알함브라 추억

 

    따레가(Francisco Tárrega, 1852-1909)의 기타 조곡(Recuerdos de la Alhambra)으로 우리의 귀에 익숙한 알함브라는 스페인의 남부, 안달루시아의 고도 그라나다에 자리하고 있다. 알함브라는 로마 시대부터 있었던 요새터에, 14세기경 이슬람 칼리프인 유수프 1세가 세운 성채이다. 인류문화의 보석인 알함브라는 19세기 미국의 작가겸 외교관이었던 워싱턴 어빙(1783-1859)에 의해 많은 비밀이 밝혀지기 전 까지는 폐허로 버려져, 거지와 도둑, 집시들의 소굴이었다. 나폴레옹의 스페인 점령 기간 중에는 그의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으며, 철수할 때에는 첨탑에 지뢰를 설치하여 파괴하기도 했다. 1870년에 이르러서야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재로 등록되었다.



     남부 스페인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35백미터 높이의 시에르라 네바다를 배경으로 깊은 역사를 숨 쉬고 있는 알함브라는, 방문객에게 가히 경탄과 신비함을 안겨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알함브라는 아랍어로붉다”,라는 뜻으로 궁 건축물의 색조가 별빛 아래서는 희색 빛인데, 햇빛을 받으면 붉게 변하기 때문에 그리 불리게 되었다

     이슬람 제국의 팽창과 더불어 8세기 초 스페인에 침입한 이슬람교도들은 1492년 이사벨라 여왕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800여 년 동안 스페인 반도를 지배했다. 세계사를 바꾼 이슬람의 스페인 반도 진출은 지극히 단순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의 스페인은 게르만의 일파인 서고트족이 지배하고 있었다. 서고트족의 왕 로드리고는 똘레도(Toledo:당시 서고트 족의 수도로서 마드리드 남쪽 75킬로 지점에 위치)에 유학중이던 세우따(Ceuta: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 연안에 위치)의 영주 훌리안의 딸을 겁탈했다. 이에 화가 난 훌리안은 이슬람의 장수 Gebel-Al-Tarik에게 스페인의 관문인 해협의 길목을 열어주었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가르는 지금의 Gibraltar라는 해협의 이름은 바로 이 장수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슬람의 스페인 정복은 그들의 발달된 수학, 자연과학, 철학적 지식이 유럽에 전달되는 계기가 되었고, 특히 이들에 의해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의 고전들이, 똘레도 아카데미아에서 다시 라틴어로 재번역된 후 이태리로 전해짐에 따라, 그리스 인본주의에 토대한 르네상스가 꽃피게 되는 것이다. 인류사에서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이슬람이 해낸 것이다.

     알함브라 궁은 이슬람의 예술적 기교가 집대성된 오리엔트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공간과 광선을 교묘하게 조화시킨 탁월한 조형미가 방문객들을 놀라게 한다. 4만 명의 군대가 상주하였다는 넓은 터에 수많은 분수와 정원으로 장식된 이 궁은, 사막의 건조함에 목말랐던 그들의 물과 숲에 대한 집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궁을 지배하고 있는 전체적인 선은 원의 호를 이용해 동글동글한 호가 끊임없이 연결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알함브라의 추억의 구르는 듯한 트레모로 선율은 이러한 건축 양식을 묘사한 것이다. 벽면의 디자인은 기하학적 문양이 끊임없이 연결되는 것으로, 궁이라면 있을 법한 인물상이 없는 것은, 사람을 그려 장식하지 말라는 코란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매혹적인 건물이 상징하는 이슬람 문화에 매료되어 그라나다를 정벌한 이사벨라 여왕은 그녀가 원한 대로, 사후 마드리드 인근의 왕가 묘지가 아닌 그라나다 대성당에 남편 페르디난드와 함께 묻혔다. 이후 가톨릭 왕인 카를로스 5세는 르네상스 양식의 왕궁 건물을 알함브라에 증축하였다

                                 

                                         -Arrayanes 정원-

     무엇보다 방문객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곳은 아벤세르라헤의 방이라는 곳이다. 이방의 천장에는 피타고라스 정리를 응용한 정교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아름답게, 정말 아름답게 장식해 놓았다. 그렇지만 이 방은, 알함브라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던 곳으로, 당시의 양대 세력 가문이었던 세그리 가아벤세르라헤 가”의 처참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던 곳이다. 권력투쟁에서 패한 아벤세르라헤의 수백 명의 무사들이 이 방에서, 세그리 가의 무사들에 의해 모조리 목이 잘렸다 한다

                            

                                     - 아벤세르라헤 -

  우리는 몽환적인 기타 선율 알함브라의 추억”과 파바로티가 부른 “그라나다”를 유튜브에서 쉽게 들을 수가 있다.   

    글: 박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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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음악

  

  Baroque Music

 

    서양 음악의 역사는 바로 기독교 찬송가의 역사이고, 따라서 서양 음악은 교회 음악의 발전과 동일선상에 있다. 많은 음악가들이 교회 음악 발전에 헌신함에 따라 서양 음악이 발전해 온 것이다. AD 313"콘스탄티누스"대제에 의한 기독교 공인을 계기로 유대 예배 음악이 발전한다. 이들 음악은 7~8세기에 이르러, 교황 "그레고리우스 I세와 II"가 집대성하여 현재 약 3천여 곡의 그레고리 성가가 전해지고 있다. 가톨릭 성당에서 고음의 성가대원이 반주 없이, 박자 없이 목소리를 길게 뽑아 부르는 독창곡(단성 음악)이 바로 그레고리 성가이다. 이 그레고리 성가야말로 바로 서양음악의 모태인 것이다. 이처럼 교회음악과의 불가분성은 "고전주의 (1750-1820)"에 이르러 대중의 취향을 의식하여 음악 형식이 바뀔 때까지 일관된 흐름이었다.

    바로크(Baroque, 1600-1750) 전야인 르네상스기(1450-1600)는 인류사에 있어서 도전과 대전환의 시대였고 이 시기에 인류는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성찰함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식은 결국 중세 이래의 가혹하고 요지부동이었던 여러 체제에 금이 가게 했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불가피한 중재자로 여겨졌던 교회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했다. 이러한 의문은 필연적으로 "루터"의 개혁을 가져왔고, 이는 바로 바로크 예술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었다.

    르네상스 다음에 온 "바로크"예술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 세력 싸움, 즉 종교개혁과 30년 전쟁의 결과이다. 이 두 번의 싸움을 통해 가톨릭 세력이 퇴조함으로써 가톨릭 교회로부터 신도들이 떠나갔고, 따라서 바티칸은 위신과 위엄을 회복하여 떠나간 신도들을 다시 불러들여야 했다. 이를 위한 수단이 바로 미술과 음악이었다. 바로크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며, -프랑스 후기 바로크를 로코코라고 한다 - 전기에는 미술이, 후기에는 음악이 주된 역할을 한다.

    전기 바로크 기간에는 바티칸의 요구에 따라 표현 범위, 정치성, 완벽성, 기교 면에서 최고 수준의 미술품, 조각품들이 생산되었다아름다운 궁성을 모방한 교회 건물, 아름다운 조각과 현란한 벽화, 금과 은으로 장식한 제단은 신도들에게 우월감과 승리감을 북돋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바로크 스타일의 성당을 방문해 본 이들은 그 화려한 내부 장식에 압도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성이 마비되었던 그 시대,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사람들은 화려하고 웅대 무비한 교회 건물에 하나님이 임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금박과 현란한 조각으로 장식된 제단을 하나님의 거소로 생각하여 두려움에 떨었다.  

                   
                        - 갈릴리 호수의 

                          폭풍우(렘브란트), 

                           바로크 회화의 

                           특징인 또렸한

                           명암 대조를 볼

                            수 있다 -                                               

    후기 바로크는 30년 전쟁(1618-1648) 다음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이 전쟁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야만적인 싸움이었다. 종교개혁으로 신교의 자유를 인정했던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체제를 깨고, 가톨릭이 프로테스탄트에 가한 최후의 물리적 공격이었다. 이 전쟁은 결국 가톨릭 세력의 패배로 끝났고, 가톨릭 세력의 주축이었던 스페인의 몰락은 이 전쟁 때문이다.

    전쟁 후 가톨릭은 세력 확장을 위해 음악을 동원한다. 미술과 건축에 적용했던 화려한 장식을 음악에도 반영하여 트릴 (trill)과 같은 장식음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장식음으로 멜로디를 더욱 현란하고 동적으로 만든 것이다. 또 그림에서의 명암은 음악에서는 음의 대조로 나타난다. 강한 멜로디 다음에 약한 멜로디, 고음 다음에 저음이, 빠른 악장 다음에 느린 악장이 오는 식이다. 또한 현란한 음악을 생산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음악 양식이 등장한다. , 오페라, 소나타, 무용음악(Suite), 실내악, 협주곡 등의 출현이 그것이다. 협주곡은 다음 시대 고전주의에 이르러 교향곡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음악은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도 중시되어, 이때 등장한 바흐의 칸타타나 헨델의 오라토리오는 프로테스탄트에게 봉사한 음악이다. 이 시대에는 많은 악기가 발명되기도 한다. 다양한 형태의 음악을 표현하는 데 사람의 목소리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 악기가 사람의 목소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올갠, 하프시코드, 크라비코드 등 건반악기와 더불어 스트라디바리우스, 아마티, 과르넬리 등의 등장도 이 시대이다. 이처럼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새로이 등장한 악기로 연주하는 예배나 미사가 신, 구교를 막론하고 당시의 무지몽매한 신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문학에서도 미사여구로 꾸민 화려한 스타일의 문장이 등장한다. 스페인 작가 세르판테스, 로페 데 베가 등이 그 예이다.

    바로크 시대는 또한 뉴턴이나, 라이프니츠, 데카르트나 프란시스 베이컨 같은 불멸의 천재들에 의해 인류의 지성사에 혁명적인 변화가 온 시대이며, 계몽주의의 등장으로 하나님 중심의 중세적 우주관에서 완전히 벗어나 현대적 민주국가로 발전할 토대를 마련한 시기이기도 하다.(C)

     글: 박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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