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채의 나라 스페인


Spain, the Country of  the Castles 


       -교양인을 위한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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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황토색 대지 위의 드라마....

사람들........

삶의 모습.......

투우.......

포도주....

문학........

음악........

훌라멩코......

시각 예술..........

그들이 만들어 온 이야기......

유인원으로부터 로마시대까지.....

서고트 왕국......

유대인에 대한 차별 결정.....

이슬람의 도래.....

이사벨라.......

종교재판........

신대륙 발견........

필립II세.........

레판토 해전.......

30년 전쟁.......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합스부르크.....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나폴레옹의 스페인 점령.....

내전의 잉태.....

제1공화정.....

왕정복고..........

'98' 운동.........

모로코 내전........

독재정부의 등장.......

제2공화정.......

팔랑헤........

인민전선과 국민전선.......

비바, 에스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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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와 스페인을 가르는 피레네산맥을 넘으면 지금까지 푸르렀던 대지가 누런 색깔로 변한다. 이 변화처럼, 스페인 문화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스페인은 한 때 세계역사를 주도한 나라였고, 인류 문명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나라이다. 중. 근세의 미국이었다고나 할까? 이제 그곳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읽은 정보와 나의 경험에 토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이 책은 스페인의 선사시대부터 로마 식민지, 서고트 왕국, 이슬람 왕국, 가톨릭 국가를 거쳐 현대 스페인이 생성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그 여정에서 스페인 사람들이 만들어 온 역사, 문화, 예술 등 삶의 모습을 중요한 주제와 관련하여 기술하였다. 따라서 이 정보들은 스페인에 관심이 있는 여행자, 비즈니스맨, 유학생을 비롯하여 인문학적인 지식 습득에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매우 유용할 것이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도록 간략한 기술을 원칙으로 하였다.

 황토 색 대지 위의 드라마

    스페인과 프랑스를 가르는 피레네 산맥에서 시작되는 스페인 땅은 50만 평방 킬로이다. 한반도의 두 배 반, 남한의 다섯 배이다. 5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국경선의 88%가 바다에 접하고 있다. 이 국경선 밖으로부터 매년 수천 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와 전국을 돌며 여행을 즐긴다. 이제 독자 여러분도 이 글을 통해 스페인을 방문하는 것이다. 언젠가 실제 그곳을 방문하더라도 다음의 정보는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의 산수는 그 장려함이나 다양함에서 유럽의 어떤 나라도 견줄 수가 없다. 방문객들은 그 광활한 대지와 툭 터진 시야에 충격을 받는다. 거대하게 펼쳐진 황색의 대지 위에, 하천과 강을 따라 녹색의 숲이 띠를 이루고 있다. 헐벗은 산맥, 희색 빛의 바위와 구릉들, 그리고 아득한 광야가 펼쳐진다. 광야를 달리다가 산인가 하고 오르면, 또 다른 광야가 눈에 들어온다. 대지(Plateau)가 침식 작용에 의해 가라앉은 지형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앙 평야지대(Meseta)에는 침식작용에 의한 계곡이 많다. 회색빛의 광활한 이 메세따 지역은 스페인에서 가장 힘차고 역동적인 지역이기도 하다. 스페인의 대지는 유럽에서 스위스 다음으로 해발이 높다. 국토의 70퍼센트 이상이 해발 5백 미터 이상이다. 기후는 지역에 따라 변화가 심하다. 만년설의 산(Sierra Nevada)도 있고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사막(Almeria Desert)도 있다. 계절 간에는 기온이 급격히 바뀐다. 여름날 까스띠야 평원에 내리쬐는 태양은 무자비할 정도이다. 반면에 북부의 갈리시아(Galicia), 아스뚜리아스(Asturias), 깐따브리아(Cantabria), 바스끄(Basque) 지방은 비와 안개가 많다. 북지중해의 바위투성이인 꼬스따 브라바(Costa Brava) 해안, 흰 모래의 남지중해안, 갈리시아와 나바르라(Navarra)의 녹색 숲, 라만차(La Manch) 지방의 끝없는 포도밭, 안달루시아(Andalucia) 지방의 올리브 밭, 눈 덮인 피레네(Pyrenees), 발렌시아(Valencia) 지방의 오렌지 밭, 그리고 레반테(Levante)의 종려나무 등이 그 모습들이다. 스페인은 갈리시아, 아스뚜리아스, 깐따브리아, 바스끄, 나바르라, 라 리오하(La Rioja), 아라곤(Aragon), 까딸로니아(Catalonia), 발렌시아(Valencia), 무르시아(Murcia), 구까스띠야(Castilla Vieja), 신까스띠야(Castilla Nueva), 마드리드(Madrid), 엑스뜨레마두라(Extremadura), 안달루시아, 그리고 도서지방인 까나리아 군도(Canarias)와 발레아레스 군도(Baleares) 등 17개 주로 나뉜다.

    갈리시아는 포르투갈의 위쪽인 북서부에 위치하며, 녹색 지역의 습한 곳으로 스페인의 아일랜드라고 불린다. 리아스식의 긴 해안선이 발달하여 풍랑에 안전한 항구가 많고, 유럽으로 수출되는 조개류의 풍부한 생산지이기도 하다. 스페인 어선의 반 이상이 갈리시아에 그 모항을 두고 있다. 갈리시아의 문화는 켈트(Celts) 문화로 갈리시아어는 스페인어보다는 포르투갈어에 가깝다. 갈리시아주는 4개의 군(province)으로 나뉘는데,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Santiago de Compostela)가 주 수도이다.


    이 도시의 시민들은 모두 갈리시아어를 구사한다.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는 예루살렘, 로마에 이어 중세 3대 순례지의 한 곳이었다. 지금도 물론 중요한 순례지로 매년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한다. 프랑스 빠리, 브즈레이(Vezelay), 르 쀠(Le Puy), 아를르(Arles)에서 시작되는 순례의 길은 스페인 북부 도시 빰쁠로나(Pamplona)에서 합쳐져 꼼뽀스뗄라에 이른다. 옛날에는 이 길을 따라 순례자들이 묵는 주막(taberna)들이 번창했다. 산띠아고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로서 순례자는 한자리에서 세 양식을 감상할 수가 있다.

    본당 “영광의 문”을 들어서면, 제단까지 긴 회랑이 있고, 그 가운데쯤 높다란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은제의 향로가 있다. 미사 때 이 향로를 한 번 잡아당기면, 시계추처럼 왕복운동을 하며 넓은 공간에 향을 풍긴다. 지금이야 다른 이야기이겠지만 옛날 목욕이 어려웠던 시절, 먼 순례의 길을 온 순례자들이 풍기는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이런 미사 의식이 생겼다고 한다. 좁은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은제의 관에 스페인의 수호신이며 12사도 가운데 한 분인 야고보(Sanctus Iyacobus)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성소가 있다.

 산티아고 대성당

    그가 여기에 모셔진 사연은 이렇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그는 전도를 위해 스페인 땅을 왔고, 에브로(Ebro) 강가에서 성모님의 현신을 보았다. 성모님은 그곳에 성당이 세워질 것임을 예언하셨다고 한다. 그 성당이 바로 현재의 사라고사 성당이다. 그 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헤롯 왕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스페인 어디엔가 묻혔다는 구전이 전해졌다. 서기 813년, 수도승 뻴라요(Pelayo)가 하늘에서 들려오는 노래와 빛나는 광채를 따라가 보니, 그곳에서 야고보와 그의 두 제자의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세워진 성당이 바로 이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필자가 이 지하 성소를 참배했을 때 어느 앉은뱅이 장애인이, 정상인도 내려오기 힘든 계단을 내려와 제례를 드리는 걸 보았다. 믿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이곳에서 간절한 기도를 드리면 기적이 일어 걸을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본당의 벽에는 많은 목발이 걸려 있다. 기도의 힘으로 걷게 된 이들이 남기고 간 목발들이다.

 
사도 야고보 성소

    포르투갈과 갈리시아에 이어 아스뚜리아스 또한 켈트 문화 지역이다. 아스뚜리아스는 북부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는 갈리시아, 동쪽으로는 깐따브리아를 두고 있다. 비가 많아 그 산과 계곡은 푸르다. 한 때는 석탄 생산의 중심지역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폐광 상태이다. 주도는 오비에도(Oviedo)이다. 제2의 도시 히혼(Gijon)은 어항이며 조선소가 있고 석탄 수출항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주민은 현대 까스띠야어를 사용하지만, 까스띠야의 옛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스뚜리아스의 동쪽에는 깐따브리아 주가 있다. 깐따브리아는 작은 주로서, 대서양 쪽의 비스케인 만(Biscayne Bay) 연안의 산악지역이다. 그 주도는 산딴데르(Santander)이다. 해안을 끼고 있는 넓은 평야와 까스띠야와의 역사적인 관계로 인해 인근의 아스뚜리아스나 갈리시아보다는 훨씬 번영을 누리고 있다. 산딴데르 서쪽 30킬로미터 지점에, 우리의 귀에 익숙한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있다. 벽화의 보존을 위해 출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방문객은 모조 동굴에서 모조 벽화를 감상할 수가 있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

    바스끄 주는 비스케인 만의 맨 동쪽에 자리한다. 깐따브리아보다 약간 크고, 인구 밀도가 높다. 이들은 매우 독특한 바스끄어를 사용한다. 농업, 어업, 목축이 이들의 전통 산업이었는데 현대에 들어와 금융 및 중공업의 중심이 되고 있다. 여기서 생산되는 철광석과 인근 아스뚜리아스의 석탄은 이 주로 하여금 철강 생산의 중심지가 되게 하고 있다. 바스끄 주의 유일한 거대 도시인 빌바오(Bilbao)에는 최근 구겐하임(Guggenheim) 미술관이 들어서면서, 이 도시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다. 바스끄 분리주의는 스페인 통합에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고, 특히 바스끄 지방은 큰 자치권을 누리고 있음에도 독립에 집착하고 있다. 바스끄 독립운동 단체인 ETA는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마드리드 중앙정부에 대항하고 있다

    바스끄 주의 동쪽으로는 나바르라가 자리하고 있다. 이 주의 북쪽은 피레네 산맥을, 남쪽으로는 에브로(Ebro) 강과 접하고 있어 고립된 지역이다. 바스끄와 마찬가지로 오랜 자치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바스끄 주와의 역사적인 연대로 인하여 주민의 일부는 바스끄어를 사용한다. 주도는 빰쁠로나이다. 빰쁠로나의 페르민 축제(Fiesta de San Fermin)는 세계적인 구경거리이기도 하다. 

페르민 축제 

    독자 여러분은 도심의 거리에서 황소와 사람이 어울려 법석을 떠는 장면을 티. 브이나 영화에서 보았을 것이다. 매년 7월 열리는 이 축제의 장면은, 투우를 위해 젊은이들이 소를 몰고 투우장으로 가는 장면이다. 이 날은 4세기 초에 순교한 빰쁠로나의 초대 주교였던 성자 페르민을 위한 축제일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그의 소설 “태양은 또 다시 뜬다”에서 이 축제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이곳은 또 바이올린 협주곡 "지고이네르바이젠“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의 고향이기도 하다. 빰쁠로나 주민 50만 명은 상위의 생활수준을 누린다. 북쪽의 눈 덮인 피레네 산맥과 울창한 숲, 에브로 강을 따라 자리하고 있는 비옥한 땅, 남쪽의 사막에 준하는 메세따는 스페인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모습이다.

까스띠요 광장(빰쁠로나)

    나바르라와 바스끄의 남쪽에는 스페인에서 가장 작은 주인 라 리오하가 자리하고 있다. 다른 주들과는 달리 문화적, 인종적 특성이 없지만,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농경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로마시대 이래로 경작 되어 온 포도밭들이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라 리오하  포도 밭

    이 주에서 생산되는 포도주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포도주로 세계적인 명성이 있다. 이 주는 스페인에서도 가장 높은 평균소득을 자랑하고 있다. 에브로 강가에 자리하고 있는 로그로뇨(Logroño)가 그 주도이다. 에브로 강은 스페인에서 가장 긴 강으로 유일하게 지중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로그로뇨

    아라곤은 피레네 남쪽 가파른 계곡에 갇혀 있는 주로, 메마른 메세따와 함께 그 중심부를 관통하는 녹색지대는 에브로 강이 가져다 준 비옥한 땅이다. 3개의 군으로 이루어지며, 그 주도는 사라고사(Zaragoza)이다. 에브로 강가에 자리하고 있는 사라고사 성당은 성모 마리아가 사도 야고보에게 공현하신 곳에 세워진 성당이다. 

사라고사 대성당


스페인 광장(사라고사)

     이일로 인해, 사라고사 성당은 역사상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성당이다. 이 성당은 12세기초 로마네스크 풍으로 건설되었고, 15세기에는 고딕식, 그 후 18세기 말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증축되었다. 따라서 이 성당 역시 한자리에서 세 가지 건축양식을 감상할 수가 있다. 이 성당의 정문 좌우에 거대한 폭탄을 세워 놓았는데, 스페인 내전 중 이 성당에 투하된 세발의 폭탄 가운데 폭발되지 않은 두 개다. 이는 성모 마리아의 은총 때문이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아라곤은 번영된 지역으로, 아라곤어를 사용하는 오지의 소수 주민을 제외하고는, 까스띠야어를 사용한다. 15세기 아라곤의 영주 페르디난드가 까스띠야의 이사벨라와 결혼함으로써 스페인 통일의 초석을 놓은 주이다.

    에브로 강은 까딸로니아를 지나 지중해로 흘러든다. 까딸로니아 주는 북쪽으로 프랑스, 남쪽으로는 발렌시아, 서쪽으로는 아라곤과 면해 있다. 북쪽으로는 눈 덮인 동 피레네 산맥이, 동쪽으로는 지중해이며 그 해안선을 따라 번영하는 도시들이 있다.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큰 자치주로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 주도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제2의 도시이며, 제1의 항구이다.

 

바르셀로나 


콜럼버스 동상(바르셀로나 항구)

     그 주민은 까딸로니아어를 사용한다. 까딸로니아어는 스페인어와 마찬가지로 로망스어의 하나로 그 풍부한 문학적, 문화적 전통은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스끄와 함께 까딸로니아는 상업과 산업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 왔다. "까스띠야의 밀, 까딸로니아의 옷감"이라는 속담이 말하듯, 한편은 농업 다른 한편은 공업의 주도자로서 까스띠야와 까딸로니아는 끊임없는 경쟁자로서, 적대자로서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바르셀로나는 올림픽 개최지로서 우리에게도  친숙한 도시이다. 

    바르셀로나 북쪽으로 지중해 고속도로를 따라 프랑스 쪽으로 150킬로 지점을 가면, 순백의 해안 마을 까다께쓰(Cadaquez)가 있다.

 
까다께스

                                               

 
살바도르 달리

    이곳은 초현실주의 화가(Surrealist)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가 말년을 보낸 곳으로, 그의 작품들을 전시해 놓은 미술관이 있다. 까딸로니아 역시 바스끄와 마찬가지로 독립을 주장하여 스페인 통합에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

 몽환 속 풍경(S. 달리)

    지중해 연안을 따라 까딸로니아의 남쪽에 발렌시아가 자리하고 있다. 레반떼(Levante)라고도 불리는 이 주의 주도 이름 역시 발렌시아이다. 스페인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발렌시아 주 인구의 반 이상이 이 도시에 살고 있다. 주민들은 대체로 까딸로니아어 사투리를 쓰나, 까딸로니아의 이질적인 문화를 고집하거나, 바스끄 인종 분리 주의도 지지하지 않는다. 지중해 무역과 유럽에서 가장 비옥하다고 알려진 토지에 토대한 농업으로 번성한 이 지역은, 지중해 해변에 따른 관광 역시 주요 산업이다. 발렌시아 북쪽 30킬로미터 지점에는 사군또(Sagunto)가 있다.

발렌시아

 
발렌시아 축제

    사군또는 제2차포에니전쟁(Punic War; 218~201BC)때,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에게 로마군이 대패한 곳이다. 기원 전 지중해 무역으로 번영했던 이 도시의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 사실을 아는 방문객은 역사의 현장에서 그 때의 함성에 귀 기우릴 수가 있다. 발렌시아는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자기 제품 야드로(Lladro)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발렌시아의 고유한 흙으로 빚은 야드로는 이곳 야드로 가문이 개발한, 정교한 데생에 토대한 도자기 예술품이다.

  
사군또

    발렌시아의 남쪽은 무르시아이다. 무르시아는 평평한 대지에 무덥고 건조한 곳으로, 관개를 통해 불모의 땅을 농토로 바꾼 지역이다. 스페인에서 가장 가난했던 이 지역은 농업과 경공업의 육성을 통해, 지금은 비교적 번영을 누리고 있다. 주도 까르따헤나(Cartagena)는 기원전 223년 카르타고 사람들이 세운 도시로 지금은 스페인 해군의 주요 기지이다. 알메리아의 사막지대는 한 때 마카로니웨스턴의 촬영장이기도 하여,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등장하는 영화의 메마른 무대배경은 바로 이곳의 풍경이기도 하다.

 
마카로니 웨스턴 촬영장


 
알메리아 사막
 
이곳 국립해양박물관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도기제품들을 볼 수가 있다. 이곳 십자가 성소(Caravaca de la Cruz)는 서기1231년, 가톨릭 군대와 이슬람 군대 간의 전투가 있기 전, 이중의 팔을 가진 십자가가 하늘에 나타나 가톨릭 군의 승리를 이끌었다는 구전이 전해 오는 곳이다.

    무르시아와 발렌시아로부터 내륙 쪽으로 스페인의 내지인 까스띠야 평원이 펼쳐진다. 까스띠야는 영어의 Castle과 같은 뜻으로, 까스띠야에만 크고 작은 성이 약 2천 개가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이 그리 불리게 된 것이다.

                                     

 
까스띠야 평야    

고성

     서쪽으로 약간 기운 이 스텝 지역에는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두에로(Duero)강, 따구스(Tagus)강, 과르디아나(Guardiana) 강들이 있다. 까스띠야는 신, 구로 나뉜다. 까스띠야는 스페인 전국토의 1/3을 차지한다. 그 가운데 위치한 마드리드 자치구까지 합하면 전 인구의 25% 가량이 이 지역에 산다. 이들은 모두 스페인어(까스띠야어)를 사용한다. 신, 구 까스띠야 모두 평평한 메세따이다. 침식으로 이루어진 계곡이 곳곳에 있다. 신, 구라는 이름은 무어(Moro)인들이 순서대로 붙인 이름일 뿐, 그 지역이 이루어진 시간적인 순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돈끼호테의 무대로 유명한 라만차(La Mancha)는 메마른 땅으로 신 까스띠야에 속하며, 고대 레온 왕국이 있었던 레온 지방은 구 까스띠야에 속한다. 라만차의 광활한 평야에서는 풍차를 구경할 수 있다. '까스띠야는 광활하다' ,라는 스페인 속담은, 넓은 땅의 사람들은 관용이 있다는 말인데, 유혈이 낭자했던 이 지역의 역사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까스띠야는 바로 스페인이 태어난 요람이다. 이 지역의 오래 된 성채와 도시들을 보면, 수 세기에 걸친 기독교도와 무어인, 기독교도와 기독교도 간, 무어인과 무어인간의 투쟁을 알 수가 있다. 레온(Leon), 사모라(Zamora), 바야돌리드(Valladolid), 부르고스(Burgos), 소리아(Soria), 세고비아(Segovia), 아빌라(Avila), 살라망까(Salamanca), 똘레도(Toledo), 꾸엔까(Cuenca), 시우닷 엔깐따다(Ciudad Encantada), 알바 데 또르메스(Alba de Tormes) 등이 그러한 곳이다.

    레온은 로마군의 야영지로 출발한 곳이며, 재정복(Reconquest; 이사벨라 여왕에 의한 이슬람 정복)시대 초기에는 대 이슬람 투쟁의 중심지였다. 레온 대성당은 13세기 중엽에 건설되었다. 완성이 되기까지 1백년이 걸렸다고 한다. 방문객은 182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문의 화려한 모자이크 문양을 감상할 수가 있다

 
레온 대성당


 
레온 성채

    로마 시대 조그만 마을로 출발한 사모라는, 이슬람과의 투쟁 시대 가톨릭의 중요한 군사요새였다. 사모라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고딕 양식의 부속 건물이 있다. 성벽 아래에는 레온왕국의 산초II세를 암살한 후, 엘시드(El Cid)에게 체포되었던 범인이 도주한 “반역자의 문”이 있다. 슈바르츠네거 주연의 영화 “코난”에 등장하는 성채는 바로 사모라의 성채이다.

                             사모라 성                                

      사모라 마늘축제

     바야돌리드는 스페인 르네상스 시대의 뛰어난 건축물과 예술품들이 소재하는 곳이다. 방문객은 바야돌리드 대학 건물 전면의 바로크 양식을 감상 할 수가 있다. 바야돌리드는 또한 필립II세가 태어난 곳이고, 콜럼버스가 말년을 보내다가 죽은 곳이다. 모두 방문 가능하다.

바야돌리드

 바야돌리드 대학

     부르고스는 884년에 세워진 도시이며, 스페인 역사상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도시였다. 스페인의 영웅 엘시드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스페인 내전 시 프랑코 장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부르고스 시내

  
엘 시드
 
     고색창연한 산타 마리아 다리를 건너면 대성당이 있다. 시내의 섬유박물관에서는 옛날 왕족의 장례식에 사용되었던 직물들을 볼 수가 있다. 미라플로레스(Cartuja de Miraflores) 성당에서는 신대륙에서 처음 가져온 금으로 장식한 제단을 볼 수 있다. 소리아에는, 기원전 133년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다 몰사한 누만티아(Numantia)의 유적이 있다. 전투에서 패한 누만티아 족은 자신들의 마을을 불 지른 다음, 그 불속에서 스스로 모두 타 죽었다.

     세고비아에는 아름다운 세고비아 성이 있다. 로마의 요새였던 암반 위에 12세기에 세워진 이성은, 이사벨라 여왕이 등극한 곳으로, 디즈니랜드에 있는 신데렐라 성의 모델이기도 하다. 군사요새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는 이 성은 방문객으로 하여금 중세의 전투 모습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 세고비아에는 또 고대 로마시절에 건설된 길이 728미터의 공중수로가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다. 세고비아에서 마드리드로 오는 산록 나바세르라다는 완만한 구릉지로,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마지막 무대 배경이기도 하다.

세고비아 성 

세고비아 공중수로

    아빌라는 12세기에 건설된 총 길이 2킬로미터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이다. 보존이 잘 된 88개의 원통형 파수대가 있는 성벽의 성문을 들어서면 중세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곳은 또 칼멜 수녀원의 창시자인 떼레사 수녀(Santa Teresa de Jesus; 1515~82)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아빌라

성 밖에 있는 엔까르나시온(Monasterio de la Encarnacion)수도원은 그녀가 20년 이상을 살던 곳으로, 방문객들의 방문이 가능하다. 아빌라에서 가까운 알바 데 또르메스(Alba de Tormes) 성바실리카 성당에는 미이라화된 떼레사 수녀의 심장과 오른 팔이 유리 용기에 모셔져 있다. 전 세계로부터 매년 수십만 명의 순례자가 방문하여 수녀의 심장에 경의를 표한다. 멀리 한국으로부터도 많은 순례자가 온다. 특히 한국으로부터 오는 순례자들은 단순한 관광이 아닌 진정한 신앙심이 동기가 되어 옴으로써, 수도원 관계자들을 감동시킨다고 한다.        

                                                

  
산타 떼레사의 심장(왼쪽)과 오른팔(오른쪽)

    살라망까는 로마 식민지 이전 이베르족(Iberos)의 정착지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이다. 기원전 217년 카르타고의 한니발에 의해 정복되기도 했다. 살라망까 시내 프라자 마요르(Plaza Mayor)에서는 당대의 건축가 추르리게라(Churriguera) 형제의 빛나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을 볼 수가 있다.

                     

                   쁠라떼스끄(살라망까 대학) 

       

                        플라자 마요르(살라망까)

 1218년, 레온왕국의 알폰소IX가 세운 살라망까 대학은 이태리 볼로냐, 프랑스의 빠리대학(구 소르본느), 영국의 옥스포드, 캠브리지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가운데 하나이다. 살라망까 대학 본관 건물의 전면은 쁠라떼레스끄(Plateresque) 양식으로, 이 건축 양식은 고딕과 르네상스 사이에 있었던 스페인 고유의 건축 양식이다.

    똘레도는 마드리드 남쪽 7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도시로, 옛날에는 서고트 족(Visigoths)의 수도였다. 한 때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공존했던 도시로, 그 사원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똘레도

검과 철갑옷을 만들었던 곳이며 또 금세공의 도시였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방문객은 정교한 금 세공품과 공예품을 경험할 수가 있다. 화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가 살았던 집이 있고, 그곳에서 그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가 있다. 똘레도 대성당은 1226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493년에 완성된, 고딕식과 쁠라떼레스끄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방문객은 다양한 양식의 성당 내부 장식을 감상할 수가 있다. 부활절 8주 후에 오는 예수님 성체(Corpus Christi)축일 기간에는 똘레도 축제가 열린다. 이때 똘레도의 거리는 백리향 꽃으로 뒤 덥힌다. 사제를 선두로 한 종교 행렬이 그 꽃을 밟고 지나갈 때, 비단 숄이나 망토를 입은 시민들이 발코니로부터 이 행렬을 내려다보면서 열광하는 장면은,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돌아가야만 가능할, 대단히 로맨틱한 장면이다.

 
똘레도 성체 축일

        꾸엔까는 절벽 위에 세워진 옛 무어의 도시이며, 방문객은 꾸불꾸불한 거리의 양편에 서 있는 이슬람식, 고딕식, 르네상스식 건축물들을 볼 수가 있다.

꾸엔까 절벽 위의 집

마법의 도시

     마을 높이 서 있는 탑(Torre Mangna)은 무어의 군사 요새였다. 꾸엔까 인근에 마법의 도시(Ciudad Encantada)가 있다. 사람이 사는 도시가 아닌, 태고 적에 바다가 융기되어 이루어진 이곳에서는,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서 있는 바위들을 볼 수가 있다. 물과 바람이 만들어 낸 것들이다. 영화 “코난”에서, 마녀가 등장하는 무대 배경은 바로 이곳에서 촬영한 것이다.

    마드리드는 이베리아 반도의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마드리드가 수도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해발 약 7백 미터로, 수도로서는 유럽에서 해발이 가장 높은 도시이다. 마드리드는 오랜 숙적인 바르셀로나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거대 도시답게 화려하고 역동적이다. 마드리드는 물이 차고 수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마드리드, 라는 말 자체가 “물의 곳”이라는 뜻이다. 마드리드의 다운타운은 왕궁을 중심으로 한 구 마드리드(Old Madrid)와 시벨레스 광장을 중심으로 한 부르봉(Bourbon)마드리드로 나뉜다.

그란 비아(마드리드) 

시벨레스 광장

 구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은 19세기 초까지 종교재판에 의한 화형이 처해졌던 곳이며, 주변에 고색창연한 식당과 카페들이 있다. 순백의 대리석 건물인 왕궁은 1734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완성되기까지 17년이 걸렸다고 한다. 1931년까지는 왕들의 거주지였지만 지금은 왕의 거처가 아닌 국가 의전 행사에만 사용되고 있다. 왕궁의 박물관에는 열여섯 대의 스트라디 바리우스 바이올린이 소장되고 있는데 왕궁 바로 앞, 길 건너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이 있을 때에는, 이 바이올린을 호송하기 위해 일개 중대의 병력이 동원된다. 이곳에는 또 우리 정부가 기증한 신라금관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왕궁

플라자 마요르(마드리드)

구마드리드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3개의 미술관이 있다. 6천 점의 회화를 소장한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고딕이래의 미술품들을 감상할 수 있으며, 소피아 여왕 미술관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전시되고 있다. 보르네미사(Museo de Thyssen Bornemisza)미술관에서는 개인 소장품이었던 루벤스, 고야, 반 고호, 티티안, 피카소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가 있다. 마드리드의 낭만과 예술적인 분위기를 어찌 좁은 지면에 모두 설명할 수가 있으랴!

    까스띠야와 포르투갈 사이에 위치한 엑스뜨레마두라는 스페인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다. 마드리드 등 대도시에로의 주민 이탈로 인해 비어 있는, 초라한 농가들이 많다. 주 수도는 바다호스(Badajoz)이고, 까스띠야어를 사용한다. 축산, 올리브, 코르크, 담배, 광산업이 주요 수입원이다.

바다호스 

바다호스 사육제의 한 장면

    까스띠야와 엑스뜨레마두라의 남쪽은 안달루시아의 땅이다. 안달루시아는 “초저녁 별이 뜨는 곳”이라는 뜻이다. 광대한 이 지역은 8개 군으로 이루어지고, 그 주민은 까스띠야어의 사투리인 안달루스를 사용한다. 엑스뜨레마두라와 함께 안달루시아는 스페인에서 언제나 가장 가난한 주였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의 부는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소수의 지주에게 집중되어 왔다. 이는 스페인 내전의 주원인이기도 했다. 시에르라 모레나 (Sierra Morena)산맥은 까스띠야와 격리 시키는 지형상의 장벽이고, 높은 산 시에르라 네바다(Sierra Nevada)는 안달루시아 내에서조차 고립을 가져오는 장벽이다.

        시에르라 네바다      

       
과달끼비르 강

 650킬로미터에 이르는 과달끼비르(Guadalquivir) 강은 안달루시아의 대동맥이며, 이 강은 식수와 산업용수를 제공한다. 스페인 대부분의 강들처럼 이 강도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 강의 유역이나 해안가에 산다. 스페인의 여타 지역처럼, 안달루시아도 극과 극이 대조 되는 지역이다. 만년설이 덮인 시에르라 네바다와, 비가 거의 오지 않아 달 표면과 같은 알메리아는 불과 160킬로미터의 거리를 두고 있다.

    안달루시아의 주 수도 세비야(Sevilla)는 스페인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로씨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세비야 축제는 독일의 뮌헨축제, 브라질의 리오축제와 함께 세계3대 축제의 하나이다. 19세기 밀려오는 외국문화에 대항하기 위해 출발한 이 축제는 일주일 간 계속된다. 

히랄다 사원(세비야) 

세비야 축제 한 장면

축제 기간 중에는 임시 설치된 부스(Caseta)에 사람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대화를 나눈다. 새로 수확한 쌀로 빠예야(해산물과 햅쌀로 만든 요리)를 만들어 손님을 대접한다. 여행객도 접대를 받을 수가 있다. 필자가 이 축제에 갔다가, 세비야의 쌀농사가 물 논이 아닌, 밭에 비행기로 씨를 뿌려 대규모 경작을 한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다. 축제 기간에는 투우와 더불어 눈부신 의상의 훌라멩코 무용을 구경할 수가 있다. 바로크 의상을 비롯한 눈부신 전통 의상을 입은 시민들의 퍼레이드라던가 기마 행진은, 방문객들로 하여금 환상의 세계를 경험케 한다. 세비야의 히랄다(Giralda) 사원에는 콜럼버스가 묻혀 있고, 황금 탑(Torre de Oro)은 신대륙으로부터 온 금이 하역된 곳이라 그리 불리게 되었다. 세비야는 또 아름다운 부채와 모자, 세라믹 접시의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그라나다는 안달루시아에 있다. 그라나다하면 알함브라를 빼놓을 수가 없다. 따레가(Francisco Tarrega, 1852-1909)의 기타 조곡 “알함브라의 추억” 으로 우리의 귀에도 익숙하다. 알함브라는 로마시대부터 있어 왔던 군사용 요새 터에, 14세기경 이슬람 칼리프인 유수프1세가 세운 성채이다. 인류문화의 보석인 알함브라는 19세기 미국의 작가 겸 외교관이었던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1783-1859)에 의해 많은 비밀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폐허로 버려져 거지와 도둑, 집시들의 소굴이었다.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

나폴레옹의 스페인 점령 기간 중에는 그의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으며, 철수할 때에는 첨탑에 지뢰를 설치하여 파괴하기도 했다. 1870년에 이르러서야 스페인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재로 등록 되었다. “알함브라”는 아랍어로 “붉다”, 라는 뜻으로 궁 건축물의 색조가 밤에는 희색 빛인데, 햇빛을 받으면 붉으스레 하게 변하기 때문에 그리 불리게 되었다. 이 매혹적인 건물이 상징하는 이슬람 문화에 매료되어 그라나다를 정벌한 이사벨라 여왕은 그녀가 원한 대로, 사후 마드리드 인근의 왕가 묘지(El Escorial)가 아닌, 그라나다 대성당에 남편 페르디난드와 함께 묻혔다. 이후 가톨릭 왕인 까를로스5세는 르네상스 양식인 왕궁 건물을 알함브라에 증축했다. 방문객은 사크로몬테(Sacromonte)의 집시촌에서 훌라멩코의 원형을 감상할 수가 있다.

    말라가(Malaga)는 지중해 연변 도시이다. 이 도시는 지금으로부터 2천8백 년 전 페니키아 사람들이 세운 도시이다. 말라가는 또 쿠바 출신의 작곡가 레쿠오나(Ernest Lecuona; 1895~1963)의 “말라게냐”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에 적대하여 싸우다가 7천명의 말라가 시민이 죽었다.

말라가 

 
말라가 야외극장(로마 유적) 

화가 피카소가 태어난 곳으로 방문객은 그의 생가와 미술관을 방문할 수가 있고, 말라가 고고학 박물관에서는 페니키아, 로마, 중세의 유물들을 볼 수가 있다.

    꼬르도바(Cordoba)는 로마 식민지하의 이베리아 반도 수도였다. 역사상 꼬르도바는 위대한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도시는 711년 이슬람에 의해 정복되었고, 곧 이어 우마이야드 왕조(Umayyad Caliphate)의 수도가 되었다. 10세기 꼬르도바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고 돌로 포장한 도로에 가로등을 켠 선진의 도시였다. 이 때 런던이나 파리는 어두움 속에서 추위에 떨던 야만의 촌락이었다. 대학과 의과학교가 있었고 의학과 수학, 천문학이 꽃핀 지성의 도시였다. 백만 권의 필사본을 소장한 도서관도 있었다. 방문객은 꼬르도바 회교 대사원(Mezquita de Cordoba)에서 당시의 번영과 영화를 볼 수 있다.

회교 대사원 

      로마 시대의 다리

 이 회교 모스크는 화려한 왕궁 건물과 정원 및 분수, 4천3백 개에 이르는 대리석 기둥을 갖추고 있다. 원래는 서기 600년 서고트족이 세운 기독교 교회(the Church of St. Vincent)의 터에 784년 우마이야드 왕조의 라만I세(Abd al-RahmanI)가 재건을 시작하여 그 후 2백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는 칼리프 제국의 수도였던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압바스 왕조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스페인으로 도망 와 꼬르도바에 도읍한 사람이다. 그는 이 모스크를 부인의 이름을 딴 알자마(Aljama)모스크로 명명하기도 했다. 내부의 그 많은 기둥들은 그가 두고 온 시리아의 야자수를 상징한다. 수구초심이랄까, 제왕일지라도 두고 온 고향을 못 잊는다는 말일 것이다. 꼬르도바는 이슬람 치하에서 유대인들이 번영하고 보호를 받았던 상징적인 곳으로, 안달루시아의 어느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 거주구역이 남아 있다.

꼬르도바 골목길

    까디스(Cadiz)는 안달루시아의 끝 대서양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 헤라클레스가 세운 도시라고 한다. 그렇지만 문헌상으로는 기원 전 11세기 페니키아 사람들이 세운 도시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까디스는 페니키아에 이어 카르타고, 로마, 무어의 지배를 받았다. 신대륙을 향한 두 번째 항해 때 콜럼버스가 떠난 항구이다. 까디스의 쉐리 포도주(Sherry-wine)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술이다. 이곳은 또 프랑스 작곡가 델리베(Léo Delibes; 1836~91)의 “까디스의 소녀들(Les Filles de Cadiz)”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도시이다.

까디스

    지브롤터(Gibraltar)는 안달루시아의 일부이지만,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결과 체결된 유트레히트조약(1713)에 따라 영국 영토가 되었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가로지르는 지브롤터 해협은, 영국과 스페인이 모두 EU의 회원국이 됨에 따라, 국방상의 중요성을 잃어 가고 있다. 수천 명에 달하는 그 주민들은 안달루시아어 및 영어가 변형된 매우 독특한 언어를 사용한다.

지브롤터

정치적으로는 압도적으로 영국 편이다. 영국 신민으로서, 자유항이라는 특별한 위치에서 오는 경제적 이익을 누리고 있다.

    스페인에는 두 개의 도서 지방이 있다. 발레아레스 군도는 발렌시아의 정동 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까딸로니아의 영향권 하에 있다. 마요르까(Mallorca), 메노르까(Menorca), 이비사(Ibiza)를 비롯하여 모두 13개의 섬으로 구성 되어 있다. 마요르까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님이 살다가 돌아가신 곳이고, 이비사에는 누드 해변이 있다. 본토로부터의 거리를 보면 가까운 섬은 120킬로, 먼 섬은 3백 킬로 정도이다. 주민은 까딸란어 사투리를 사용한다. 마요르까는 관광산업 덕택에 높은 개인 소득을 자랑한다. 주수도 팔마 데 마요르까는 눈부신 지중해의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빨마 데 마요르까 

마요르까 뒷골목

 까나리아 군도(Canary Islands)는 스페인 본토로부터 1,100킬로미터 떨어진 대서양 상에 있다. 그란 까나리아, 떼네리페(Tenerife), 푸에르떼벤뚜라(Fuerteventura), 란사로떼(Lanzarote), 라 빨마 등의 섬으로 되어 있다. 수도는 라스 빨마스(Las Palmas)이다. 떼네리페에는 스페인에서 가장 높은 떼이데(Teide) 산이 있다. 관광과 어업이 주산업이며, 자유무역지대이기도 하다. 그 주민은 캐리비언 액센트가 섞인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떼네리페

     모로코와 접하고 있는 세우따(Ceuta)와 멜리야(Mellia)도 스페인의 영토이다. 이 지역은 5백 년 전 베르베르 해적들로부터 지중해를 지키기 위해 보루를 세우면서 스페인 영토가 되었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자치주가 아니며, 주민들은 스페인적이라기보다는 모로코적이다. 스페인 국회의원 선거권이 있고 법적으로 안전을 보장 받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에 대한 스페인의 주권을 모로코가 인정을 않고 있다. 스페인의 EU 가입으로, 이 두 항구는 EU의 최남단 영토라는 중요성을 띄게 되었다. 유럽 대륙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수십만의 아프리카인들이 합법적, 비합법적으로 이 두 항구 도시로 몰려왔다. 78평방 킬로의 좁은 지역에 급증하는 모슬렘 인구는 세우따와 멜리야의 미래를 불안케 하고 있다.

세우따 

멜리야

     지금까지 기술한 사항들이 대체적인 스페인의 지형, 지역에 관한 설명이다. 이 대지 위에서 인류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그들의 역사가 전개되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역사의 주인공인 스페인 사람들은 누구인가?


 사람들

    스페인 사람들은 아마 유럽에서 가장 장구한 세월을 살아 온 민족일 것이다. 오랜 역사에 걸쳐 스페인반도는 유럽은 물론 지중해나 아프리카부터의 침입이나 인구 이동의 경로였다. 이로 인해 현대의 스페인 사람들의 혈관에는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따라서 스페인 사람들의 신체적 특징은, 거무스름한 색깔에서부터 흰색의 피부, 검은색, 갈색, 희색, 녹색, 황갈색, 연한 청색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눈동자 색깔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스페인 북부의 주민들은 백인의 외모를 갖추고 있다. 스페인 사람들이 신장은 북유럽인보다 작은 키이지만, 젊은 세대는 그들의 부모세대보다 키가 크다. 뚱뚱한 사람들이 많이 목격 되지만, 비만은 적다. 노인들이나 허리가 굽어 있지, 처진 어깨는 드물다. 스페인 사람들은 대체로 정열적이고 매력적이며, 점잖고 자존심이 강하다.

다양한 모습의 스페인 사람들

     스페인에는 집시라는 독특한 민족이 있다. 일반 시민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인종이다. 전 인구의 3%에 이르는 이들은 주로 안달루시아 지방에 살고 있다. 스페인 주류사회에로 흡수 통합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관습을 유지한다. 집시는 유랑지에서 받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유랑족이다. 그들의 유랑은 11세기 인도에서 시작했다. 14세기 초에 북아프리카를 통하여 스페인 반도에 대규모로 들어온다. 이 때문에 이집트로부터 온 것으로 오해되어, Egyptian의 E가 탈락된 채 gypsy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15세기 초에는 또 다른 일부가 발칸반도를 통하여 동유럽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징가로(Zingaro) ,라고 불린다. 사라사테의 “징가레스카(지고이네르바이젠)”는 이를 반영한 제목이다. 그들의 언어 로마니어(Romani)는 인도-유럽어 계통으로, 산스크리트어와 뿌리가 같다. 이는 집시가 인도로부터 왔다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예컨대 영어의 Trinity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Trimuti는 또한 집시어이기도 하다. 이들이 언제, 왜 유랑의 무리가 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지만, 그들의 구전에 따르면 '언젠가 우리들의 위대한 왕이 있었고, 그 왕이 전쟁에서 패한 때부터', 라는 말이 전해 오는 걸로 미루어, 한 때는 정착민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집시 여인

    집시 다음으로는 바스끄 족이 현대의 스페인에서 가장 일관성을 유지해온 인종 그룹이다. 이들의 뿌리는 아주 깊다. 이들이야말로 크로마뇽(Cro-Magnon)인의 후손으로 믿는 인류학자들도 있다. 까딸로니아 사람들처럼 바스끄는 자신들이 스페인사람이라고 생각지를 않는다. 그들의 혈액형은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O형이거나 -Rh형이 많다. 이는 그들이 스페인 사람들과 다르다는 증거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바스끄어(Euskera)는 전치사가 거의 없고, 발음을 하지 않는 음소를 가지 긴 어휘들이 많다. 바스끄어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인도-유럽어 계통이 아닌 언어이다. 매우 독특한 언어로 세계의 어느 언어와도 연관성이 없다. 원시 크로마뇽인의 언어가 아닐까 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런 이유들로 마드리드로부터 독립을 원하고 있다. 바스끄는 또한 프랑크 왕국의 샤를르마뉴 대왕과 관련된 지역이다. 서기778년, 롱세스바예(Roncesballes)전투에서 샤를르마뉴의 후미부대가 바스끄의 매복에 걸려 전멸한 사건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게르만의 서사시 “롤랑의 노래”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바스끄는 스페인 내전 시 프랑코의 반대편에 섰다. 이 때문에 바스끄의 마을 “게르니카”는 프랑코 편을 든 독일 나치 공군의 무차별 소이탄 폭격으로 2천여 명에 가까운 비무장 민간인이 죽었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가 남긴 세기의 그림 “게르니카 (Guernica)"는 이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게르니카(피카소) 

바스끄 분리주의 단체인 ETA(Euskadi Ta Askatasuna)는 마드리드 정부에 대해 무장 투쟁을 해 왔고, 따라서 많은 ETA요원들이 투옥되어 있는 상태다. 비스케이 만에 접하고 있는 산세바스띠안(San Sebastian) 시는 국제영화제로도 유명한 아름다운 휴양지이다.

산 세바스챤 

    서유럽의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마그레브(북 아프리카)로부터 온 이민은 스페인 사회의 면모를 바꾸게 했다. 현재 스페인에는 많은 아랍인들이 살고 있다. 대부분이 모로코로부터 온 회교도들이다. 이들은 농업, 건설 부문에서 일하거나 또는 노점상을 한다. 스페인에서는 인종차별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의 혼혈족을 가리키는 Moro나 회교도를 가리키는 Kafir는, 경멸의 뉘앙스가 풍기는 어휘들이다. 거리에서, 책에서 또는 코미디 프로에서 이 단어들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2000년 1월 안달루시아에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반 아랍 폭동을 일으켜 아랍인들의 집을 불태웠다. 이는 현대 스페인 역사상 최악의 인종차별 폭동이었다. 북아프리카 다음으로 중남미도 중요한 이민 그룹이다. 교육을 받은 전문직 종사자들은 대우를 받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Sudaca"라는 경멸적인 말로 불린다. 동양인을 경멸하는 Cochino라는 말도 자주 들린다.

 

삶의 모습

    이제 스페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 볼 차례이다. 스페인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은 아마도 오랜 세월에 걸친 일상생활의 느슨함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늦게 일어나고 아침, 점심, 저녁 식사가 늦다. 점심시간에는 상점들의 문을 닫고, 집으로 가 식사를 하며, 이 시간에는 유령의 도시나 마을이 된다. 관광 관련 상점 같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점심시간 전에 하루의 일과를 마친다. 특히 세 시간에 걸친 점심 식사는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과이며, 식사 후에는 잠깐 눈을 부치는 시에스따가 있다. 마드리드 같은 대도시에서는 좀 덜 하지만, 남부 안달루시아는 시에스따가 필수적이다. 오후의 작열하는 태양으로부터 잠시 몸을 피하면서 음식물을 소화 시키는, 필요한 휴식 시간인 것이다. 그 대신 새벽같이 일어나 일터로 나선다. 따라서 시에스따는 게으름의 상징이 아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점심시간은 두 시간쯤 계속된다. 그리고 저녁식사는 9시에 시작된다. 다른 나라들에 유례가 없는 이 같은 늦은 식사 시간은 바로 스페인의 밤 생활과 관련 된다. 하루 종일 일하고 나서, 어떻게 철야 파티를 즐길 수 있는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장시간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에 대한 답이다. 한국인이나 일본인처럼 일을 많이 하면 당연히 그렇게 발전하리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또 시에스따를 통해 철야 파티를 할 수 있는 에너지가 회복되는 것이다. 진한 커피라던가 영양가 높은 음식 등도 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일상생활을 돕는 요소들이다. 스페인의 밤의 문화는 탐닉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EU 국가들 가운데 음주량이 가장 많으며, 끽연 인구도 그리스 다음이다. 16세기에 신대륙으로부터 담배가 들어 온 후, 스페인은 줄기찬 애연 국가가 되어 왔다. 담배를 안 피는 스페인 사람은 굴뚝이 없는 가옥이라는 말도 있다. 세계 최고 품질의 쿠바 산 여송연을 대량 수입하고 있다. 연간 3-4천만 개에 이른다. 스페인 사람들이 탐닉하는 3개의 마약(?)을 들라면, 커피, 술, 여송연을 든다. 식사 후 즐기는 주요 디저트들인 것이다. 이 같은 거리의 삶, 지칠 줄 모르는 밤의 문화는 까딸로니아를 제외하고는, 스페인 전역에 걸쳐 보편적인 스페인 문화의 특질이다. 국경 조금 너머 프랑스 Hendaye의 저녁 여덟 시는 쥐죽은 듯 고요하지만, 바로 이쪽 스페인의 아라곤, 나바르라, 바스끄 지방의 이 시간은 긴 밤을 위해 기지개를 펴는 순간이다.

    스페인의 도시들에는 반드시 그 중심부에 광장이 있다. 광장에는 성당이 있고 성당을 중심으로 좌우로 관공서 등 공공건물, 음식점, 그리고 바나 카페테리아가 자리한다. 대도시에는 여러 개의 광장이 있다. 스페인 사람들 대부분은 아파트에 거주한다. 소수의 영락한 귀족들만이 정원으로 둘러싸인 저택에 산다. 그래서인지 스페인 사람들의 성채는 바로 거리라는 말이 있다. 일상을 즐기는 장소는 가정이 아니라, 거리의 바나 까페이다. 인구 3백 명 당 평균 한 개의 까페 또는 바가 있다.


스페인의 전형적인 까페 풍경

     인구 당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치다. 점심이나 저녁 식사 후 사람들은 이곳으로 몰려와 친구들을 만나 담소를 즐긴다. 이곳에서 이웃이나 친구들을 만나 커피, 포도주, 맥주, 술, 안주, 그리고 가벼운 식사를 할 수가 있다. 바나 카페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도 개의치 않고 떠들어댄다. 스페인의 거리를 거닐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옳다고 생각되는 한, 얼마쯤이라도 떠들 수 있다는 강력한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함께 노래 부르는 습관이 있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공개된 장소에서 어울려 노래를 부른다. 이처럼 바나 카페테리아에 삶의 역동성이 있는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에게 있어 인생이란 축제와 다름없다. 아기자기한 축제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린다. 4월 부활절에는 1주일 이상의 휴가를 즐긴다. 여름 휴가철인 8월에는 4주간의 휴가를 즐기며, 이 때 관광산업 부문을 제외하고는 거의 철시를 한다. 또 공휴일과 공휴일 사이에 낀 날도 휴일로 쉬는 뿌엔떼(다리)가 있다. 전국적인 공휴일 말고도 지역에 따른 공휴일이 따로 있다. 산업 국가로서 스페인처럼 공휴일이 많은 나라는 없다. 매일 어느 곳에선가 축제가 있다고 보면 된다. 여름이 가장 왕성한 축제의 계절이긴 하지만, 사시사철 어느 때이고 열린다. 까디스의 사육제, 발렌시아, 알메리아를 비롯하여 지중해 연안 지방의 성 요한 축제가 있고, 8월 달의 부뇰 토마토 축제가 있다.

까디스 사육제 한 장면

오비에도 사육제

     갈리시아 지방의 비스킷 축제라던가 아스뚜리아 지방의 "모든 성인들의 축제", 12월31일 의 전국적인 망년 축제, 1월 하순의 성 세바스챤 축제가 있다. 이 축제들은 가톨릭 축제들로 모두 휴일이다. 스페인의 도시는 물론 마을마다 수호성인이 있으며, 이들과 관련한 축제가 또 있다. 오지의 마을이라도 이러한 축제가 있으며, 이 기간 중에는 오래 전에 마을을 떠난 사람들도 돌아와 축제에 참여한다. 이런 축제를 통해 마을의 결속을 다지고, 이것이 크게는 나라의 통합과 관련을 맺는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보통 가족과 혈연에 충직하고, 그 다음에는 마을이나 지역, 마지막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다. 이 같은 축제 의식은, 춤과 잔치가 결합 되었던 원시제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인류학자들도 있다. 봄이나 여름철에 열리는 대부분의 수호신 축제에서는 투우시합이 열린다. 스페인에는 또 많은 사육제가 있다. 프랑코 시대에는 이교도의 관행으로 간주하여 금지하였으나, 이제는 수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사육제를 연다. 이 기간 중에는 풍성한 먹을거리와 술, 그리고 기이한 의상을 차려 입고 사육제에 참여한다.

    프랑코가 죽기 전에는, 이러한 축제나 휴가의 주인공은 남성들이었고, 여성들은 축제 기간 중에도 빨래나 요리 등 가사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남성위주(Machism)라는 말은 스페인에서 비롯된 말로, 스페인 문화의 유산이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이슬람과 가톨릭이라는 스페인의 역사적 산물로, 순결과 동정녀 마리아를 이상적인 여성으로 보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지나간 수세기 동안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수녀가 되거나 아니면 결혼을 해야 하는 길 뿐이었다. 프랑코 독재 치하에서는 청교도적인 엄격한 생활이 강요되었다. 처녀의 순결을 중시하는 사회적 규범으로 인해 "아기는 황새가 데려 온다"는 프랑스의 판 속설로, "아기는 빠리에서 온다"는 스페인 판 속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같은 독재시대의 유산이 사라지고, 당연히 결혼과 성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혼전 동거나 혼전 섹스가 이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첫 경험의 나이는 남성 19세, 여성 21세로 유럽 평균보다 낮다. 과거와는 달리 합리적인 경우, 낙태가 인정된다. 이혼도 인정되지만, 이혼율은 매우 낮다. 강간 또는 태아나 임신부의 건강 등 불가피한 경우에는 낙태도 허용된다. 성에 관한 잣대가 남여에게 달라 아직도 "마초"의 색채가 남아 있지만, 라틴 아메리카처럼 "남성 우위"의 사회가 아님은 물론이다. 게이문화에 대해서도 적대감이 적다. 스페인에는 또 예서제라는 특이한 관습이 남아 있다. 지금은 덜 하지만, 새신랑이 3년의 처가살이를 해야 하는 관습이다. 따라서 장모와 사위 사이가 한국의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와의 관계와 같다. 장모를 죽여라, 라는 뜻의 “마따 수에그라” 라는 칵테일도 있다. 예서제 관습은 스페인이 과거 강력한 모계사회였음을 암시한다. 주말이면 분가한 젊은이들이 부모를 찾아뵙는 일이 일상화 된, 부모에 대한 공경이 지극한 나라이기도 하다.

    1980년대까지 스페인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이 같은 무관심은, 어둡고 길었던 프랑코 체제하에서 굳어진 것이다. 프랑코 치하의 무절제한 토지 투기로 인해, 지중해 연안을 비롯하여 고색창연한 도시나 마을의 경관이 회복 불가능하게 망가지기도 했다. 바다는 하수 처리장이 되었고 강과 공기가 오염 되었으며, 이 같은 환경 파괴가 아무런 처벌 없이 자행된 것이다. 스페인의 EU가입으로 이 같은 행태가 종지부를 찍는다. 약 7백 개의 환경단체가 환경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 지금 스페인은 도보여행자, 차량 여행자, 자전거 여행자, 조류관찰자 등 야외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의 천국이다. 이베리아 반도가 역사적으로 유럽과 아프리카의 교량 역할을 해 왔듯이, 두 대륙을 이동하는 철새가 지나는 길목이기도 하다. 까디스 지방의 “도냐나 국립공원(Doñana National Park)”은 유네스코에 의해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생태계 보존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스페인 역사는 또한 가톨릭과 궤를 같이 한다. 과거 스페인은 로마 교황보다도 더 가톨릭적이었다. "아빌라의 성녀 떼레사(Santa Teresa de Avila; 1515~82)"라던가, "십자가의 성 요한(San Juan de la Cruz; 1541~91)" 과 같은 신비한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도미니크 교단이나 예수회 교단이 생겨난 나라이기도 하다. 또 오뿌스 데이(Opus Dei) 교단이 생겨나기도 했다(1928). 종교재판이 주는 공포도 백성들이 가톨릭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기 불가능했던 중요한 원인이었다. 제2공화국(1931~36)은 가톨릭 교회의 교육 장악을 완화하려고 했지만, 내전에서의 패배로 이 시도는 반세기나 후퇴를 하게 되었다. 프랑코 치하의 길고 어두웠던 세월, 교회는 독점적 권한을 부여받아 전 국민의 종교생활을 통제했다. 프랑코 사후 1978년 신헌법은 성직자의 공무원 신분 폐지, 교회의 교육권 폐지, 공립학교에서의 가톨릭 교리 교육을 금지하였다. 종교적 문제에 있어도 로마교황의 권고를 따르지 않는다. 이는 정교분리라는 제2차 바티칸 공회(Vatican Council; 1962~65)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교회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재정지원이 축소되긴 했지만, 개인 헌금의 소득공제 등 간접적인 지원은 계속되고 있다. 또 가톨릭 교육구에는 재정적 지원을 한다. 그동안 스페인 교회에는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도 스페인의 정체성은 종교에 토대한다고 할 수 있다. 비신자들도 자식들을 가톨릭 학교에 보낸다거나 출생, 결혼, 장례 등 모든 의식은 성당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젊은 세대의 가톨릭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고 있으며 신도 수도 줄고 있다.

    스페인도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마약을 탐닉하는 사람들도 있고, 지브롤터를 통한 마약 루트도 있다. 대부분의 마약이 이 루트를 통해 반입되고 있다. 범죄가 증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안정된 사회이다. 거리에는 구걸하는 사람도 있고, 부랑자도 있다. 구걸하는 집시들에게 적선도 많이 한다. 집시들은 적선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만큼 번다. 스페인은 또한 미국, 필리핀 다음으로 도박이 성행하는 나라이다. 거리의 바나 까페에서 카드놀이나 도미노 게임 또는 슬롯머신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축구 복권은 상금도 크고, 정부가 주도하는 중요한 도박 게임이다. 기타 크리스마스 복권은 많은 상금으로 인해,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고 있다. 특기할 사항은 정부가 운영하는 복권의 수익금 전액은 스페인의 대외 외교에 필요한 비용으로 쓴다는 점이다. 미국이 복권 수익금을 교육에 쓰는 거와 다르다. 스페인은 교육비가 안 들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을 동경하는 젊은이들도 있지만, 어쨌든 그들은 조상의 풍부한 역사적 유산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투우

    피레네 산맥 북쪽의 유럽 문화와는 확연히 다른 스페인 문화, 그 가운데서도 투우는 대단히 특징적인 문화이다. 이처럼 투우는 스페인적인 감성의 독특한 표현으로서, 외국인이 이해하기 힘든 스페인적인 명예심, 가치, 종교적 신념 등이 녹아 있는 경기이다. 또 사나운 소를 속일 수 있다는 세속적인 즐거움이 결합되어 있는 경기가 투우이다. 헤밍웨이는 그의 장편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사생 관을 재는 척도로 투우를 말하고 있다. 그들은 소를 죽이는 일에 개의치 않는다. 다시 말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즉 죽음은 상식이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걸 알기를 바라는 것이다.

    투우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로마 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아랍 문화라는 설, 유사 이전의 스페인 문화라는 설, 크레테에서 전래 되었다는 설, 민속 문화라는 설, 토템 신앙이라는 설 등이다. 로마 기원설은 맹수와 검투사와의 싸움의 스페인 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어 이 설은 정설이 아니다. 또 로마에서 검투사들이 황소와 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싸움과 투우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아랍 기원설은 이슬람의 스페인 지배 기간 중 투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슬람 정복 기간 중인 11세기, 스페인의 영웅 엘시드(El Cid)가 말을 타고 황소와 싸운 기록이 있고, 1354년에는 그라나다의 에미르(칼리프)가 아들의 할례를 기념하기 위한 축제에서 투우를 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아랍 기원설 역시 증거 불충분으로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다음은 유사 이전의 스페인 문화라는 설이다. 알타미라 동굴을 비롯하여 여러 곳의 석기시대 동굴벽화에서 황소 그림을 볼 수가 있다. 이들 동굴 벽화는 원시 스페인에 황소와 관련한 문화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지만, 그러나 투우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그 다음, 크레테(Crete) 전래설이다. 에반스(Sir Arthur Evans)경이 발굴한 크레테 섬의 미노스 궁 벽화에는 젊은 남녀들이 황소의 뿔을 잡고 싸우는 그림이 있다. 크레테 전래설을 주장하는 에반스는 이 벽화를, torero(투우사), corridas de toro(투우), tauromaquia(투우 기술)등, 스페인어 투우 용어를 빌려 설명하고 있다. 로마 식민지 이전 스페인 반도가 페니키아(지금의 레바논)의 식민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크레테 문화가 스페인 반도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 설 역시 증거가 없다.

    마지막으로, 스페인의 옛 결혼풍습과 관련이 있는 고유민속 설이다. 지금도 여러 지방에서는, 결혼식 3일 전부터 축제에 들어가는데, 이 때 “결혼식 투우” 라고 불리는 행사를 한다. 신랑과 신랑의 친구들이 도살장으로부터 황소를 사서, 그 뿔에다가 단단한 고삐를 맨 다음, 붉은 천으로 소를 유도하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돈 다음 신부의 집에 도착한다. 신부가 준비한 짧은 창을 신랑이 받아 소의 등에 꽂으면, 신랑의 친구들이 소를 몰고 도살장으로 간다. 이러한 풍습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프랑스 남부지방에도 있는데, 오랜 역사를 가진 이 풍습은, 풍요와 다산의 상징인 소를 숭배한 원시 토템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결혼식 투우”는 예술성을 결여하고 있지만, 현대 투우의 원형일 것으로 보고 있다. 기록상 남아 있는 최초의 공식적인 투우경기는 서기 1128년, 스페인의 알폰소7세의 결혼식 날이다.

    투우사가 말을 타지 않고 지금처럼 맨땅에서 하는 투우는 스페인 북부 지방인 바스크, 아라곤 또는 나바르라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투우가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18세기 초 스페인의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이다. 스페인 투우는 북부 형(vasco-navarro)과 남부 형(andaluz)으로 갈렸었는데, 북부 형은 창이나 칼 등 도구에 중점을 두는 것이고, 남부 형은 붉은 천(망토)을 이용한 소의 유도를 중시한다. 그러던 것이 이 두 가지 형이 결합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착된 것이다.

투우

    투우사가 되기 위한 특별한 신체조건은 없다. 일정한 체중, 키를 요구하는 운동이 있지만, 투우사는 그렇지 않다. 나이에서도 비교적 자유롭다. 대부분의 투우사들이 젊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5~6십대의 단창잡이도 흔하다. 투우는 힘으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기골이 장대한 근육질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용수처럼 균형 잡힌 날씬한 몸매를 요구한다. 투우는 정해진 스텝에 따라 소와 함께 추는 일종의 무용이기 때문이다. 대중 앞에서 경기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운동선수와 다름이 없지만, 그에게는 코치나 감독이 없다. 그는 투우사이며 무용수이고, 감독 겸 안무가이다. 그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경기를 치러야 하고, 오판은 죽음을 부른다. 죽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도 다른 운동선수와 다르다.

    투우용 소는 일반 소와 종이 다르다. 개와 늑대의 차이라고나 할까? 투우 용 소는 일종의 야수로 사자, 곰, 호랑이, 코끼리 등 어느 맹수도 이 소를 이길 수 없다. 속임수와 무기로 무장한 인간만이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투우용 소는 15분간의 경기를 위해 투우 전문 목장에서 4년 정도 자란다. 평화롭고 조용한 목초지에서 4년 정도 자라면 490~575킬로의 어미 소가 된다. 새까맣고 윤기가 나는 털은 좋은 환경에서 자랐음을 무언으로 증언한다. 소음이라던가 외부의 자극 없이 자랐기 때문에 자극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경기 전 투우장 객석 밑 우리에서 보통 5일을 보낸다. 움직일 수 없는 좁고 캄캄한 우리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Hispania Cani)가 울리면 소 엉덩이에 매질을 하거나 전기 충격을 가한다. 4년간이라는 세월을 낙원에서 보낸 소는, 영문도 모른 채 며칠 동안 꼼짝 못하고 암흑 속에서 지내다가 이 전기 충격을 받으면 놀라, 문이 열린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온다. 이 때 눈부신 태양과 함께 웅성대는 관객, 나팔 소리, 눈앞에 어른거리는 붉은 망토(그러나 소는 붉은 색에 대해 색맹이다)에 적개심을 들어내며 공격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이때 직선으로 곧장 달려 나오는 소가 가장 공격적이고 용맹스러운 소다. 그 다음 관중석에서 볼 때 오른쪽, 그 다음 왼쪽으로 굽어 달리는 소 순으로 용맹성을 가름한다. 따라서 소의 진행 방향에 따라 투우사는 그에 알맞은 싸움을 준비하는 것이다.

    소는 그 등에 출신 목장을 알리는 색깔의 리본을 달고 나온다. 등장한 소는 먼저 창잡이를 상대하게 된다. 갑옷으로 무장한 채 말을 탄 창잡이는, 달려오는 소의 척추에 긴 창으로 상처를 낸다. 이 상처로 인해 소는 기세가 꺾기고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이 상처 부위에 세 사람의 단창 잡이가 각자 2개씩 모두 6개의 날카로운 단창을 꽂는다. 그런 다음 경기의 주인공인 투우사가 등장한다. 로열박스에 경의를 표하고 관중석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강렬한 햇빛, 황금 빛 모래, 투우사의 균형 잡힌 몸매와 잘 생긴 얼굴, 눈부신 의상은 관중들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현실이 아닌 환상의 세계를 경험케 한다.

    투우는 한 경기(하루 경기)에 3명의 투우사가 6마리의 소와 싸운다. 한 사람이 두 마리의 소와 싸우는 것이다. 1번 투우사는 1번 및 4번소와, 2번 투우사는 2번 및 5번소와 그리고 3번 투우사는 3번 및 6번소와 싸운다. 투우 한 판 경기에서는, 무기를 들 수 있는 일곱 사람과 무기를 들 수 없는 없는 한 마리의 소가 싸운다. 투우사 한 사람, 창잡이(picador) 두 명, 세 사람의 단창 잡이(banderillero), 칼 심부름꾼 한 명 등 일곱 명이 한 조가 된다. 이들은 모두 투우사가 고용한 사람들이다. 투우사는 고참 순서대로 경기에 임한다. 투우는 일정한 스텝에 따라 투우사와 황소가 함께 추는 일종의 무용이다. 따라서 정확한 스텝으로 소를 유도하는 투우사는 열광적인 박수를 받는다. 무용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목숨을 건 싸움이다. 필경 죽음에 이르는 춤인 것이다. 결국은 소가 죽지만, 투우사가 죽는 경우도 적지 않다. 투우의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단계는 소의 심장을 칼로 정확히 찔러야 하는 마지막 단계이다. 찰나의 이 순간이야말로, 투우사와 소가 목숨을 걸고 마지막 대결하는 순간이다. 죽음과 삶을 가르는 순간이며 투우사에게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순간이다. 움직이는 소의 심장을 겨누어 정확히 찌른다는 것은 숙달된 투우사에게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장을 맞고 쓰러지는 소의 비극적인 죽음을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라보는 관객, 특히 이 문화에 낯선 이방의 관객은, 표현하기 힘든 어떤 아득한 슬픔을 경험하게 된다.

    잘 싸운 투우사에게는 그가 죽인 소의 귀를 잘라 상으로 준다. 귀보다 더한 영예는 꼬리이며 최고의 영예는 관중들이 목말을 태워 주는 일이다. 귀빈석의 귀부인으로부터 장미꽃을 선물 받는 투우사는, 지난 세기 로맨티시즘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렇게 죽은 소는 관객석 밑의 도살장으로 끌려가 해체되고, 결국은 식용으로 사용된다.

 

포도주

    스페인의 포도주는 페니키아사람들이 스페인 반도에 식민지를 세웠던 기원전 천백 년까지 거스른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를 휩쓴 포도나무뿌리 진딧물 병으로 프랑스 사람들이 스페인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스페인의 포도주 산업이 본격화되었다. 이태리, 프랑스에 이어 세계 3위의 포도주 생산국이다. 스페인은 강열한 햇빛과 건조한 기후로 인해 멜런, 수박을 비롯하여 모든 과일이 달다. 불타는 듯한 대지에서 생산된 포도는 고품질의 포도주 생산을 가능케 한다.

    스페인의 포도주 생산지는 지역별로 북서부, 북동부, 중부, 그리고 남부지역으로 나뉜다. 북서부 지역은 또 리아스 바이샤스(Rias Baixas), 비에르소(Bierzo), 또로(Toro), 루에다(Rueda), 두에로(Ribera del Duero), 북동부 지역은 리오하(Rioja), 나바르라(Navarra), 보르하(Campo de Borja), 따라고나(Tarragona) 등의 지방으로, 그리고 중부는 라만챠(La Mancha), 발데뻬냐스(Valdepeñas), 발렌시아(Valencia), 알리깐떼(Alicante), 후미야(Jumilla), 옐까(Yelca) 등으로 그리고 남부는 쉐리(Sherry )등의 세부 지역으로 나뉜다. 이 같은 지역 분류는 DO(Denominacion de Origen)의 기준에 따르며, DO란 EU가 요구하는 품질 수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지역을 말한다. 따라서 포도주 병의 상표 다음에 DO가 표시되어 있다면 고품질의 포도주임을 믿을 수가 있다. "포도주의 성지"라고 불리는 안달루시아의 까디스 지방에서 생산 되는 쉐리는 그 어느 나라도 흉내 낼 수 없는 품질을 자랑한다. 세비야 축제 때 쉐리는 축제의 왕으로 등장한다. 쉐리 축제인 것이다. 스페인만의 독특한 상그리아(Sangria)는 적포도주, 설탕, 계절 과일, 소다수에 보드카 등 독한 술을 섞어 칵테일을 만들어 차게 한 다음 마신다. 말 그대로 피처럼 붉은 칵테일이다.

상그리아

     또 까스띠야 지방의 빵은 비할 수 없이 맛이 있다. 그밖에도 샤프란(Shaffran)으로 물들인 빠에야(Paella), 오렌지를 비롯한 과일, 안달루시아와 갈리시아의 생선요리, 토마토 스프인 가스빠초(Gazpacho) 등은 스페인을 음식의 천국으로 만드는 먹을거리들이다.


문학

    스페인의 셰익스피어로 알려진 세르반떼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는 "돈끼호떼"를 썼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기사도를 풍자한 이 소설은 바로 위선적인 중세 사회에 대한 비판서이다. 허황된 돈끼호떼와 현실적인 그의 부하 산초판자를 통해,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광신을 비판하고, 이의 극복을 통해 자유가 충만한 새로운 시대의 등장을 예고한다. 20세기에 들어와 스페인 문학은 세계문학의 전면에 등장한다.

돈끼호떼와 산초판자

 1922년 베나벤떼(Jacinto Benavente), 1956년 히메네스(Juan Ramon Jimenez), 1977년 알레이산드레(Vicente Aleixandre), 1989년 셀라(Camilo Jose Cela)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밖에도 마차도(Antonio Machado), 바로하(Pio Baroja), 기엔(Jorge Guillen), 살리나스(Pedro Salinas), 로르까(Garcia Lorca) 등 뛰어난 작가들이 20세기 전반의 스페인 문학을 빛낸 사람들이다. 프랑코 치하에서는 알레이산드레를 비롯하여 오떼로(Blas de Otero), 비에드만(Gil de Biedman), 후에르떼스(Glorian Fuertes), 곤잘레스(Angel Gonzalez) 등은 중도좌익의 편이었고, 극작가 바예호(Antonio Buero Vallejo)는 공화파를 위해 총을 든 사람이다. 셀라(Camelo Jose Cela), 델리베스(Miguel Delibes), 라포레뜨(Carmen Laforet), 산또스(Luis Martin Santos), 마뚜떼(Ana Maria Matute) 같은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암울하고 궁핍했던 그 시대의 모순을 비판함으로서 스페인 문학을 살려낸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프랑코는 무력에선 승자였지만, 문화에서는 완패했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스페인 문학은 까르멘 마르띤(Carmen Martin), 후안 마르세(Juan Marce), 로사 몬테로(Rosa Montero), 안또니오 뮤뇨스(Antonio Munoz), 하비에르 마리아스(Javier Marias) 같은 작가들이 이끌고 있다.

 음악

    스페인 음악은 스케일이라던가, 꾸밈음(melisma), 불규칙적인 리듬, 그리고 비대칭적인 구조에서 피레네 북쪽의 음악과 다르다. 음악이 일상화되어, 출산을 축하하는 노래, 자장가, 아이들 놀이 노래, 축제의 노래, 결혼식 노래, 장례식 노래, 노동요, 궁정요 등 모든 놀이와 행사용 노래가 있다.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도, 예컨대 식당에서 식후에도 노래를 부른다. 스페인의 중북부 지역은 특히 합창을 잘 한다. 기타는 매우 대중적인 악기이며, 기타와 유사한 네 줄의 기따릴요(Guitarillo), 만도린 같이 생긴 반두루리아 (Bandrurria)도 대중적이다. 둘사이나(Dulzaina) 같은 취주악기도 있으며, 공기 주머니를 등에 메고 연주하는 갈리시아 지방의 가이따(Gaita) 같은 악기도 있다. 이 악기는 켈트 문화의 소산이다.

    싸르수엘라(Zarzuela)는 궁정에서도 거리에서도 공연이 가능한 스페인 판 오페레타이다. 싸르수엘라 ,라는 이름은 마드리드 북쪽의 싸르수엘라 왕궁에서 처음 공연이 되었기에 그리 불리게 되었다. 프랑코 사후 스페인 사회가 개방화됨에 따라, 싸르수엘라의 무대는 전 세계로 확대되어 현재 멕시코, 쿠바, 푸에르토 리코, 콜롬비아, 아르헨티나를 비롯하여 미국의 마이애미, 휴스턴, 뉴욕 등에도 싸르수엘라 공연장이 있다.

    스페인은 세계 성악 계에도 뛰어난 성악가를 배출한 나라이기도 하다. 플라시도 도밍고, 몬세르랏 까바에(Monserrat Caballe; 1933~), 호세 까르레라스(Jose Carreras; 1946~), 떼레사 베르간사(Teresa Berganza; 1935~),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Victoria de los Angeles; 1923~2005) 같은 세계적인 가수들을 배출한 나라이다. 바르셀로나의 리세우(Liceu) 극장, 마드리드의 왕립극장은 아름다운 오페라 하우스이다. 떼레사 베르간사는 메조소프라노로서 이 시대의 뛰어난 싸르수엘라 가수이다. 유튜브에서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1844~1908), 알베니스(Isaac Albeniz; 1860~1909), 엔리께 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 1867~1916), 파야(Manuel de Falla; 1876~1946), 카잘스(Pablo Cazals; 1876~1973), 로드리고(Joaquin Rodrigo; 1901~99)등은 스페인이 낳은, 세계 음악사에 빛나는 거장들이다.

    사라사테는 팜플로나가 낳은 불세출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그는 이곳에서 1844년에 태어나 군악대 지휘자인 아버지로부터 다섯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여덟 살 때 첫 연주회를 가졌다.

파블로 사라사테

 이 때 이미 그는 청중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는다. 그는 곧 마드리드로 유학을 하게 되었고, 곧 당시의 스페인 국왕이었던 이사벨라 2세 여왕의 궁정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 열두 살이 되던 해에 파리 유학을 위해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로 떠났다. 그러나 그들이 탄 열차가 프랑스 국경을 통과하자마자, 어머니가 심장병으로 급사를 한다. 사라사테 역시 호열자에 걸리게 되었고. 어느 독지가의 도움으로 병에서 회복한 그는, 그 독지가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 파리에 도착한다. 그는 당시 파리 음악학교의 저명한 교수인 알라르의 오디선을 통과한다. 그의 천재성을 금방 알아 본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금방 명성을 얻었고, 당시 최고 경쟁적이었던 프레미어 콩쿠르에서 일등을 거머쥐었다. 17살 때의 일이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작품을 위주로, 전문적인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작품은 당연히 스페인 풍을 띠었고, 불후의 바이올린 협주곡 “지고이네르바이젠”을 비롯한 그의 많은 음악은 지금도 우리들의 정신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시의 많은 유럽 작곡가들이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에드워드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그리고 “카미유 생생”의 바이올린 협주곡 “론도 카프리치오소”는 사라사테에게 헌정한 음악이다. 당시의 많은 음악가들이 사라사테의 영향을 받아 스페인 음악에 몰두하였으며, “드뷔시”나 “라벨” 같은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가들의 작품을 들어보면 사라사테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가 있다. 사라사테는 진정한 신사로 변함없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는 일생동안 수많은 구애 편지를 받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렇지만 그는 여성에 대한 정중한 예의를 잃은 적이 없으며, 여성에 대한 스페인 기사도의 전형을 보여준 사람이다. 그는 연주가 끝난 다음 열광하는 여성 팬들에게 줄 선물로, 언제나 아름다운 스페인 부채를 준비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부자가 되었지만, 관대하고 겸손했다. 그는 별장이 있었지만, 페르민 축제 때는 반드시 빰쁠로나로 돌아왔으며, 발코니에 앉아 거리를 질주하는 황소 떼와 그를 몰고 가는 젊은이들을 내려다볼 때면, 사람들은 그를 올려다보고 환호했다고 한다. 그는 1908년 만성 기관지염 죽었으며, 그가 이 세상에서 만든 모든 재산을 빰쁠로나 시에 기증했다. 그 유산을 토대로 팜플로나 음악학교가 세워졌으며, 그 구내에는 사라사테 기념관이 있다.

    "새들의 노래(El Cant dels Ocells)"는 샤를르 마뉴 시대인 9세기 초부터 전해지는 까딸로니아 민요로, 1939년 카잘스에 의해 첼로 음악으로 편곡되었다. 그러니까 1천2백여 년 전 노래를 우리가 듣는 것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첼리스트로 살다 간 그는, 1876년 바르셀로나 인근의 벤드렐(Vendrell)에서 태어났다.

 

파블로 카잘스. 백악관 초청 연주회

     그의 어머니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피아니스트로 유학생이었다. 그녀는 스승인 피아니스트 칼 카잘스와 결혼을 한다. 카잘스는 3살 때부터 아버지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음악적 분위기 속에서 자란다. 5살 때, 아버지가 지휘하는 교회 성가대에서 제2소프라노로 처음 노래를 했다. 교회 오르간 반주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교사 겸 매우 섬세한 감성의 음악가였다. 그는 아들이 일곱 살이 되기도 전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고, 이에 따라 어린 카잘스는 곧 작곡을 할 수 있었고 또 첼로에 관심을 갖는다. 여덟 살 때 오르간 연주회를 갖는다. 오르간 페달에 겨우 발이 닿을 나이었다. 여덟 살 때 대부를 위한 마주르카 소품을 작곡했는데, 대부가 기뻐하여 그에게 군것질 거리로 말린 무화과를 상품으로 주었다. 그의 첼로에 대한 관심으로, 아버지가 동네 이발사를 시켜 커다란 박을 울림통으로 하는 첼로를 만들어 준다. 열한 살이 되어서야, 장차 그의 첼로 스승이 될 가르시아의 연주회에서 처음으로 진짜 첼로 소리를 듣는다. 그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검소하고 야심이 없던 그의 부친은, 그 박통 첼로를 만들어 준 목수에게 카잘스를 도제로 받아 달라고 한다. 아들을 목수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목공일도 창의성을 요구하는 예술의 한 분야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열정적이고 총명했던 어머니는 카잘스의 교육을 위해 벤드렐을 떠나 바르셀로나로 간다. 열두 살 때였다. 그는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서 첼로와 작곡 공부를 시작한다. 당시의 첼로 교육은, 오른 쪽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연습하는 것이 일반적인 교육 방법이었다. 그래서 팔이 경직되고 긴장이 되었다. 이 같은 주법을 고치기 위해 고생을 했다고 후일 그는 회고했다. 그는 새로운 주법을 개척한다. 오른 쪽 팔의 힘을 완전히 빼어 팔꿈치의 유연성을 극대화 하는 주법이다. 그는 쉽고 자연스러운 왼손가락 운지법도 개발한다. 권위적이고 전통적인 기존의 방법을 벗어나 새로운 첼로 연주법을 창안해 낸 것이다. 새로운 것은 저항에 부딪히게 마련이어서, 전통적인 주법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그의 새로운 방법이 실패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러나 그들의 예언과는 달리, 지금 전 세계 많은 음악학교에서 카잘스 주법에 의한 첼로 교육이 행해지고 있다. 1917년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1875~1962)와 협연 차 뉴욕에 왔을 때, 크라이슬러는 “활의 제왕이 오셨도다!” ,라고 외쳤다. 1891년 바르셀로나 음악학교를 졸업 후, 그의 연주는 곧 세인을 주목을 받았고, 바르셀로나의 어느 카페에서 카잘스의 연주를 우연히 들은 모르피 백작의 소개로,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왕을 만난다. 그는 여왕의 고문이었고, 나중에 카잘스를 양아들로 삼는다. 여왕은 현 스페인 국왕 펠리페VI세의 고조모이다. 어린 첼리스트의 연주를 들은 여왕은 곧 장학금을 지급하고, 그녀의 재정 지원으로 마드리드 왕립음악학교에서 모나스테리오 교수의 지도하에 계속 공부를 한다. 그는 늘 여왕이 그의 두 번째 어머니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왕립학교 졸업 후, 모나스테리오 선생은 작곡가의 길을 갈 것을 권유하지만, 그는 어머니 뜻에 따라 연주가로 길로 나선다.

    스페인 내전 중 그는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에 반대하여 공화파 편에 섰다. 이 때문에 그는 프랑코의 박해를 받아 프랑스로 망명한다. 망명지 프라데(Prades)는 피레네에서 가까운, 당시 인구 5천명의 작은 프랑스 도시였다. 프랑코는 독재 정권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여러 번 그를 초청했지만,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그는 죽을 때까지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나치의 프랑스 점령 중 미국으로의 망명을 권유 받기도 했지만, 거절하고 프랑스에 남아, 프랑코에게 쫓겨 온 공화파 망명자들을 도왔다. 그는 게슈타포의 체포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친지의 도움으로 체포를 면한다. 전후 그는 미국으로 오라는 앨버트 아인슈타인을 필두로 한 많은 지식인들의 요청을 받았다. 그 메시지를 갖고 온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산더 슈나이더(Alexander Schneider; 1908~1993)는 천문학 적인 돈을 약속하기도 한다. 물론 그는 거절 했고, 그 대신 슈나이더의 제안에 따라 그곳 프라데에서, 바하 2백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1950년 제1회 “프라데 음악 축제”를 개최했다.

    그는 이 콩쿠르에서 바하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Suite) 전 6곡을 연주했는데, 그의 나이 74세 때였다. 후일 한국이 낳은 천재 바이얼리니스트 정경화도 이 음악제에서 빛나는 연주를 한 바가 있다. 무반주 첼로 소나타는 카잘스의 음악적 성공에 커다란 역할을 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소나타의 악보는 우연한 기회에 그의 손에 들어온다. 그가 열세 살 때, 바르셀로나의 어느 음악 상점에서 우연히 어떤 헌 악보를 발견한다. 처음 그는 피아노 반주가 없는 소나타에 의심을 품었고, 사람들도 단순한 연습곡으로 생각을 했지만, 그는 그 작품의 진가를 알았다. 여섯 곡을 전부 연습하는데 12년이 걸렸다고 한다. 1925년 처음으로 카잘스의 연주가 녹음되고, 이 레코드(CD)는 지금도 구입할 수 있다. 이 소나타는 6개 악장 즉, 서곡(Prelude), 알레망드(Allemande, 독일), 꾸랑(Courante, 프랑스), 사라반다(Zarabanda, 스페인), 메누엣(Menuet, 프랑스), 기게(Gigue, 영국)등 각 악장이 여러 나라의 무곡으로 되어 있다. 평생 독신이었던 그는 여든 한 살 때,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첼리스트이며 그의 제자인, 스물한 살의 마르타 마르티네스와 결혼한다. 그의 어머니 나라에서 온 여인이었다. 그는 폭력에 반대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운 인도주의적인 평화활동으로 1971년 유엔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1973년 96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그의 어머니 나라인 푸에르토리코에 묻혔다가, 프랑코가 죽은 후인 1979년, 그가 태어난 벤드렐로 이장을 했다. 그가 남긴 말은, 시멘트 문명에 시달린 우리들이 귀 기우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매일 다시 태어난다. 나는 일생 동안, 같은 방법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 먼저 자연을 호흡한다. 이는 이 세상을 재발견 하는 일로, 내가 이 세상의 일부라는 기쁨을 준다. 그렇게 함으로서, 삶의 경이로움을 깨닫고, 내가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놀라운 감정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 다음 피아노 앞에 앉아 바하의 서주와 후가(Prelude and Fugue)를 친다. 이는 우리 집에 내리는 축복이다. 내게 음악이란 언제나 새롭고, 환상적인 그 무엇이다. 바하야말로 바로 자연이며, 하나의 기적이다. 삶이란 복잡하고, 따라서 우리는 삶과 자연의 아름다움, 단순함을 보아야 한다. 삶과 자연을 사랑함으로서 우리는 도덕적, 정신적 가치에 반하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치함에서 오는 복잡한 삶을 거부하라는 말이다.

    “아랑후에스 협주곡”은 호아낀 로드리고가 작곡한 기타 협주곡이다. 기타의 품격을 한 단계 올려놓은 음악이다. 그는 스페인 지중해 도시 발렌시아 출신으로 1901년에 태어나, 3살 때 디프테리아로 인해 시력을 잃었다. 14살 때 화성학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이미 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이 음악의 배경이 된 아랑후에스 궁은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안달루시아로 가는 길목에 있다.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하계 궁이다. 이 곡은 1939년 그가 파리 유학시절에 작곡한 작품이다. 이 협주곡에 왕궁의 이름을 붙인 이유는, 스페인 궁정의 몽환적 분위기와 투우로 대표되는 일반 백성의 문화를 결합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호아낀 로드리고 

즉 왕궁으로 대표되는 귀족 문화와 하층 계급에서 비롯된 훌라멩코 음악을 결합코자 한 것이다. 이 곡은 형식면에서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을 결합한 것이고, 그 밑바탕을 이루는 정서는, 이 화려한 궁전의 정원에 피는 목련꽃의 향기와 새들의 노래 소리 그리고 분수의 속삭임이다. 이 곡은 전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타와 잉글리시 혼이 주고받는 제2악장의 어둡고 우울한 멜로디는, 아내의 유산으로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첫 아이에 대한 슬픔을 표현한 것이다. 미누엣 풍의 3악장은 궁정 무도회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음악은 기타를 위한 협주곡이지만, 연주는 하프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우리는 하프 또는 기타로 연주되는 2악장을 감상할 수가 있다. 이 음악은 1940년 바르셀로나에서 초연이 되었고, 1949년 파리에서 저명한 기타리스트 이에페스(Narciso Yepes; 1927~97)가 스페인 국립교향악단과 협연함으로서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한다.

 
아랑후에스 궁

그는 파리 음악학교(Ecole de Normale de Musique) 유학 중 만난 터키 출신의 피아니스트 “빅토리아 카밀”과 1933년 결혼했다. 그들은 신혼 여행지로 아랑후에스를 방문하였고, 그 정원을 함께 걸으며 아내 빅토리아가 정원의 세세한 모습을 설명했다고 한다. 이 행복했던 신혼여행의 추억과 아내의 설명은 후일 아랑후에스 협주곡의 작곡 동기가 된다. 그녀는 악보의 기록은 물론 교정을 비롯해, 저녁이면 소파에 앉아 그날의 신문을 읽어 주는 등 60년 가까운 세월을 아내로서, 협력자로서, 어두움과 싸운 남편의 눈이 되어, 마침내는 그로 하여금 20세기의 위대한 음악가의 반열에 설 수 있도록 한 여인이었다. 그는 눈으로 볼 수가 없었지만, 아랑후에스 정원에 핀 꽃들과 분수 그리고 그 정원을 비추는 밤하늘의 별들이 부르는 노래를 가슴으로 보고 들은 것이다.

    스페인 음악을 말할 때는 또 집시를 빼 놓을 수가 없다. 유랑의 길에서 특별한 생산 수단이 없었던 집시들은 음악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고, 오랜 세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방 음악과 섞여, 완전히 다른 색깔의 음악으로 변한 것이다. 이는 여러 음악에서 증명이 되고 있다. 집시 음악가와 유대 크레츠머(Klezmer) 음악가의 연주를 들어보면 그 음악적 특성이 같음을 알 수가 있다. 프랑스 피레네 지방에서도 집시음악을 들을 수 있으며, 영국이나 아일랜드의 민속 음악에서도 집시 음악의 흔적이 있다(The Raggle Taggle Gypsies). 헝가리 음악가 리스트(Franz Liszt; 1811~86)는 집시 음악을 알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이다. 그는 집시 음악이야 말로 헝가리 음악의 모체라고 했다. 같은 헝가리 작곡가 바르토크(Bela Bartok; 1881~1945) 역시 그의 두 개의 바이올린 광시곡에서 집시음악의 낭만적 요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서유럽이 집시 음악에 대해 진정으로 알게 된 것은 공산주의 붕괴로 동유럽을 자유로이 여행을 한 다음부터이다. 1988년에 만든 할리우드 영화 “집시의 시대(the Time of the Gypsyies)”는 서구인들이 집시음악을 이해하는 데 크게 공헌한 영화이다.

훌라멩코

    집시하면 훌라멩코(Flamenco)를 빼놓을 수 없다. 훌라멩코는 중요한 스페인 문화의 하나이며 이 문화의 중심지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이다. 문서상 기록된 훌라멩코는 불과 2백년 정도이며 그 이전의 역사는 구전으로 전해진다. 14세기 초 집시들은 인도로부터 많은 노래와 무용을 가지고 왔다. 집시가 도착한 당시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는 유대인, 무어인(이슬람)이 함께 있었고, 불원간 이들은 가톨릭 군주들로부터 학대를 받는다. 무어인과 유대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당했고, 개종을 하지 않을 경우 추방되었다. 집시는 멸종 대상이었다. 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일들은 모두 금지되었고, 오직 말(horse)관리, 행상, 점술만 인정되었다. 이 같은 학대로 유대인, 집시, 무어인들은 추적이 어려운 깊은 산속으로 도피한다. 그 결과 산 속에서 서로 다른 문화가 어울리게 되었고, 이들의 음악과 무용이 융합하여 마침내 훌라멩코 음악이 탄생한 것이다. 19세기 들어와 탄압이 수그러들자, 집시들이 마을로 내려오면서 훌라멩코 음악도 함께 내려온다. 처음에는 주목을 못 받아, 그 공연장이란 가정집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낭만주의 작가들이 이 춤에 주목하면서, 이 야성적이고 에로틱한 춤과 거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에 대한 소문이 그들의 글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에 따라 일반 대중의 흥미를 끌기 시작했고, 마을의 잔치나 부자들의 유흥에 놀이패로서 초대 받기도 한다. 이처럼 훌라멩코의 인기가 확대되면서 주요 도시에 훌라멩코 클럽이 생겨나고, 훌라멩코는 그 황금기에 들어선다. 1850~1910년 기간은 훌라멩코의 황금기였지만 또한 정통 훌라멩코의 사양기였다. 훌라멩코 인기가 상승함에 따라 안무가, 새로운 스타일의 무용, 기타 연주가도 등장한다. 이에 따라 집시가 아닌 가수들이 보다 부드럽고 가벼운 목소리로 안달루시아 민요를 노래했다. 이를테면 소프라노 가수가 남도민요를 부른 격이다. 이 새로운 스타일의 훌라멩코를 환당고(Fandango)라고 한다. 환당고는 한 때 전 안달루시아를 휩쓸었다. 이에 저항한 집시들은 카바레 스타일의 현대적인 클럽에서 노래하기를 거부했고, 이에 따라 집시의 정통 훌라멩코인 혼도(Cante Jondo)는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순수한 형태의 훌라멩코 가수나 춤꾼이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집시들은 환당고를 수용하거나 아니면 산으로 되돌아가야 할 운명이었다. 위기에 처한 혼도를 구하기 위해, 시인 로르까, 작곡가 화야 등이 주축이 되어, 훌라멩코 콩쿠르를 개최했다. 이렇게 해서 1922년 6월13일, 알함브라 궁전에서 제1회 콩쿠르가 열리고, 안달루시아 전역으로부터 경쟁자들이 참가한다. 이 대회서 승리한 12살의 후아레스(Manuel Ortega Juarez; 1909~73)가 바로 후일, 불후의 이름을 남긴 카라콜 (Manolo Caracol; 1909~1973)이다. 스페인 내전과 2차대전으로 1930년대와 40년대 훌라멩코는 망각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후라멩코 댄스

     1950년대 들어, 혼도를 되살리려는 예술가들의 노력으로, 사라질 위기에 있던 혼도 가사들이 녹음된다. 1956년, 코르도바에서 혼도 콩쿠르가 개최되었는데, 이는 1922년 이후 처음 개최된 것으로, 여기서 뿌엔떼 헤닐 출신인 포르포리토가 승리한다. 이 승리를 계기로 그는 20세기 최고의 훌라멩코 가수 반열에 선다. 1957년 우트레라(Utrera)에서 제1회 집시 훌라멩코 축제(El Potaje Gitano)가 열린다. 이를 흉내 낸 축제가 안달루시아 전역의 작은 마을들에서 열리고, 사람들이 참가하여 기량을 발휘한다. 훌라멩코의 인기가 회복됨에 따라 축제에서 승리한 시골출신의 가수들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다.1959년 코르도바 콩쿠르에서 두 명의 훌라멩코 가수가 탄생한다. 딸레가(Juan Talega; 1891~1971)와 불멸의 솔레아레스 여왕 우트레라(La Fernanda Utrera; 1923~2006)가 그들이다. 1960년대 들어, 알헤시라스 출신의 루시아(Paco de Lucia; 1947~)와 이슬라(Camaron de la Isla; 1950~92)등 두 명의 천재가 등장한다. 루시아는 스페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훌라멩코 기타리스트이다. 이슬라는 원형에 가장 가까운 훌라멩코를 부른 가수이다.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영국 로열필 교향악단과 협연도 했다. 그는 또 현대음악과 결합한 퓨전스타일의 훌라멩코를 창안한 사람이고, 그의 스타일을 따른 새로운 훌라멩코 음악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는 1992년 마흔두 살로 요절했다. 이슬라의 새로운 훌라멩코에 메르세(Jose Merce; 1955~), 히메네스(Jose Cortez Jimenez; 1946~), 시갈라(Diegoel Cigala; 1968~)등 많은 가수들이 함께 했다. 메르세는 현재 최고의 혼도 가수이다. 그는 훌라멩코에 드럼과 키보드를 도입하여 팝송 스타일로 부르기도 한다.

    훌라멩코는 노래(Cante), 춤(Baile), 기타연주(Toque)와 할레오(Jaleo)로 구성된다.훌라멩코의 본체는 방망이로 마루를 두드리는 리듬과 악쓰듯 하는 노래이다. 춤은 장식이다. 따라서 가장 오래된 풀라멩코의 원형을, 바싹 마른 몽둥이라는 뜻의 팔로 세코(Palo Seco)라고 한다. 바싹 마른 몽둥이라야 효과적인 소리를 냈을 것이다. 모루를 치는 쇠망치 리듬에 맞추어 부르는 대장장이 노래 마르티네테스(Martinetez), 죄수들의 노래(Carceleras), 데블라(Debla, 집시의 제례 노래), 사에떼(Saete) 등이 모두 팔로 세코이다. 사에떼는 유대음악에 뿌리를 둔 훌라멩코이다.

    가사는 집시들이 직면했던 박해와 슬픔, 죽음 등에 관한 내용이다. 할레오는 손 벽치기, 발 구르기, 흥을 돋우기 위한 소리 지르기를 말한다. 할레오에서는 관객도 함께 소리를 지를 수가 있다. 손 벽치기는 보기에 쉽지만, 그러나 정교한 리듬으로 노래를 뒷받침해야 하고, 사빠떼아또(발장단)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사빠떼아또는 발로 추는 탭 댄스로, 이 역시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훌라멩코는 박자, 멜로디, 음계에 따라 솔레아레스, 깐띠냐스, 세기리야스, 팔로 세꼬, 환당고, 말라게냐, 레반테, 탱고 등등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이들은 또 주제에 따라 세분된다. 예를 들어, 솔레아레스는 불레아리스, 까냐, 할레오, 아보레아, 밤베라르, 로만스, 힐리아나 등으로 세분된다.

 

시각 예술

    벨라스께스(Diego Velasquez; 1599~1660), 리베라(Jose de Rivera; 1591~1652), 쑤르바란(Francisco de Zurabaran; 1598~1664), 무릴요(Bartolome Esteban Murillo; 1617~82),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는 서양 미술사에 빛나는 이정표를 세운 화가들이다. 이들의 뒤를 이은 소로야(Joaquin Sorolla; 1863~1923), 피카소(Pablo Piccaso; 1881~1973), 미로(Joan Miro; 1893~1983), 달리(Salvador Dali; 1904~89), 그리고 따삐에스(Antoni Tapies; 1923~2012)는 스페인이 낳은 20세기의 천재들이다.

추상화(호안 미로)

   블란차르드(Maria Blanchard; 1881~1932)는 버림받은 아이들을 독특한 색조와 톤으로 그려, 아름다움과 독창성을 창조해낸 화가이다. 

병후 회복(블란차르드)

     프랑코 독재 기간은 모든 탐미적인 풍요로움이 거부된 시대로, 피카소나 달리 등 전위적인 미술은 부정되었다. 아르로요(Eduardo Arrollo; 1937~)처럼 체제 비판적인, 과거 비판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들은 반역자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프랑코 사후 스페인 미술계는 악몽에서 벗어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많은 전시회와 미술대회가 개최 되고, 이를 위해 정부는 재정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체포되는 학생 (아르로요)

    스페인의 나토 가입에 대한 대가의 일환으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미국이 돌려 준 것도 1980년의 일이다. 이 그림의 주제가 된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피레네 산맥 가까운 바스크 지방의 한 마을이다. 스페인 내전 시(1936~39) 프랑코 편을 든 독일 나치 공군의 무차별 소이탄 폭격으로 2천여 명의 비무장 주민이 사망한 곳이다. 현재 마드리드 소재 “소피아 여왕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피카소는 1973년 망명지 파리에서 죽었으며, 프랑코 통치 기간 동안 조국 스페인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이들 이외에도, 바얄따(Guillermo Perez Vallalta; 1948~)를 비롯해 세비야(Ferran Garcia Sevilla; 1949~), 깜빠노(Miguel Angel Campano; 1948~), 시실리아(Jose Maria Sicilia; 1954~), 바르셀로(Miguel Barcelo; 1957~), 가르시아(Antoni Lopez Garcia; 1936~) 같은 이들은 이미 세계 화단에 알려진 저명한 현존 화가들이다. 이들은 자신만의 독특하고, 창조적인 기법으로 뛰어난 미술품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백일몽(바얄따)

     회화와는 달리 스페인의 조형예술은 20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그 이름을 국제무대에 알리기 시작했다. 프랑코 치하에서는 바스끄 출신의 조각가 치이다(Eduardo Chillida; 1924~2002)가 전위적인 작품으로 명맥을 이었다. 그는 일생을 통해 돌, 강철, 목재 등에 천착하여 추상적인 조형물을 창조해낸 조각가이다. 그는 또 일생 동안 자신의 작품을 팔기를 거부한 작가로, 사후 20세기의 위대한 추상조각가로 추앙 받고 있다. 

수평선 찬가 (치이다)

     지금 스페인 조각 계에는 바딜로아(Txomin Badiloa; 1957~), 이글레시아스(Cristina Iglesias; 1956~), 시나가(Fernando Cinaga) 등의 젊은 작가들이 미니멀리즘, 컨셉투어리즘을 이끌고 있으며, 갈리시아의 폰떼베드라(Pontevedra)시의 버려진 땅(Xunqueira)에는 이 작가들의 기념비적인 설치미술이 전시되고 있다.

    건축 예술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꽃이 피기 시작했다. 프랑코가 죽은 후 패션, 실내 디자인, 건축, 회화, 조각, 사진 등의 시각 예술에 창의적인 작품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프랑코 독재 치하에서 가장 고통을 받았던 까딸로니아가 주역을 담당하고 있다. 바르셀로나 소재 “메르베이에(Merbeye)”는 까딸로니아 출신의 아마트(Fernando Amat; 1921~)가 창고 건물을 이용하여 만든 전위적인 디자인의 대중 바이다. 아르리바스(Alfredo Arribas; 1954~)는 수많은 바와 식당을 디자인 했고, 이에 따른 실내 장식은 물론, 화장실, 메뉴, 간판, 음악 등 모든 것이 전위적이다. 

유리 벽돌 빌딩(아르리바스)

    보필(Ricardo Bofill; 1939~)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경기장을 디자인한 건축가이다. 도시 계획과 건축에 있어 인간의 접근성을 중시한 그의 작품으로는, 고성을 모방한 알리깐떼 해변의 엘 사나두(El Xanadu), 따라고나의 아파트 타운인 카프카의 성(Castillo de Kafka)등을 비롯하여 파리, 뉴욕, 모스크바, 스톡홀름 등에도 그의 작품이 있다. 모네오(Rafael Moneo; 1937~)는 프랑코 사후 혁명적인 건축 디자인을 선도한 사람이다. 메리다 국립 로마 미술관 디자인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그는, 초빙교수로 하버드대학원 건축디자인학부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마드리드 비야 에르모사(Villa Hermosa)왕궁 복구 사업, 세비야 국제공항, 마요르까의 호안 미로 미술관, 마드리드 아또차 역, 산 세바스찬 음악당, 미국 휴스톤 미술관, 웨슬리 대학의 데이비스 미술관, 베를린시의 포츠담 플라자 호텔, L.A 성당(Our Lady of the Angels), 아이슬랜드 현대 미술관,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이며,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을 재정비하기도 했다. 그는 국제적으로 저명한 건축 상인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최초의 스페인 건축가이기도 하다.

엘 사나두(보필)

L.A 성당(모네오)

     프랑코 치하에서는 사진예술 역시 검열로 인해, 그 발전이 수십 년 지연되었다. 꾸아야도(Gabriel Cuallado; 1925~2003) 같은 작가들에 의한 흑백사진이 겨우 명맥을 이었을 뿐이다. 암흑기에 그는 무생물의 피사체도 사람의 인체처럼 다루어 역동적인 작품을 창조한 작가이다. 로데로(Cristina G. Rodero; 1949~)는 스페인 전역을 여행하며 종교적인 또는 세속적인 의식들을 사진에 담았고, 이 의식들이 갖는 잔인성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녀는 지금 전 세계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집단의식을 기록하는 중이다. 지금 스페인에서는 사진예술이 고급 시각예술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비오는 길(로데로)

    마드리드는 쁘라도미술관, 보르네미사, 소피아 여왕 미술관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수많은 화랑들과 미술 단체들로 인하여 세계 미술의 중심지가 되어 가고 있다. 스페인 미술계의 최대의 연중행사는 ARCO가 주관하는 "마드리드 현대국제미술전"이다. 정부가 지원하는 이 국제 미술전을 통해 ARCO는 국내외 작가들의 회화, 조각, 사진 작품 등을 수집, 구매한다. 아르꼬는 또한 수집가들에게 미술품 구매에 대한 조언도 한다. 2억 달러 상당의 미술품 구매를 코카콜라에게 조언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쁘라도 미술관

 

 

그들이 만들어 온 이야기

 

유인원으로부터 로마시대까지

    이미 말한 것처럼 스페인은 매우 오래된 민족의 나라이다. 80만 년 전 고대인의 유적이 부르고스(Burgos)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이 유적은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하기 50만 년 전의 것으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인류인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s)의 선조로 추정되고 있다. 네안데르탈인 다음으로는, 지금으로부터 약 4만 년 전 스페인 반도에 호모사피엔스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깐따브리아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원시인류의 벽화로, 소의 불거진 근육을 표현하기 위해 바위의 불거진 부분을 이용한 그림이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

     원시 벽화로써는 가장 탁월한 그림인 것이다. 이 벽화는 대략 BC1만5천년~BC9천년경의 것이다. 이밖에도 빙하기가 끝날 무렵에 그려진 수천 점의 생생한 동굴 벽화를 스페인 전역에서 볼 수가 있다. BC6천년 경에 원시적인 농업과 가축을 기른 흔적이 발견되고, BC3천5백년경의 토기와 고인돌, BC3천2백년경의 구리 제련, BC2천년경의 청동제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기원전에는 많은 문명들이 이 반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싸웠다. 페니키아,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 등이 그들이다. 페니키아는 구약에 등장하는 여호수아에 의해 쫓겨 간 가나안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다. 카르타고는 또 페니키아에서 망명한 디도(Dido)여왕이 세운 나라이다.

    BC1600년경에 이베리아 부족(Iberos)이 도래하여, 이 반도를 이베리아 ,라고 불리는 원인이 되었다. 이들에 의한 금광 및 은광의 개발은 정교한 금은 세공품의 유물을 남겼다. 이들이 남긴 정교하고 아름다운 "엘체 부인" 및 "바싸 부인"의 흉상을 마드리드 국립고고학박물관에서 볼 수가 있다.

엘체 부인

    이베리아 반도의 금과 은은 지중해 동편의 페니키아(지금의 레바논)인들을 불러들인 동기가 되였다. BC1100년경 도래한 페니키아인들은, 앞에서 기술한 대로 남부 스페인에 까디스(Cadiz)와 말라가(Malaga)시를 세웠다. 이들의 도래는 이베리아 문화와 그리스 문화가 혼합하는 계기가 된다. 스페인 남부는 페니키아의 식민지 즉, 카르타고의 의해 정복되었다. 지중해 도시 카르타헤나(Cartagena)는 카르타고에 의해 세워진 도시이다. 기원전 6세기에는 켈트인(Celts)이 피레네를 넘어와 이베리아인들과 섞임으로써, 독특한 이베르-켈트 문화를 남기게 된다. 이 시대의 기록은 문자로도 남아 있다.

    BC202년 제2차 포에니(Punic)전쟁 시, 자마(Jama) 전에서 로마의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을 격파했다. 이 승리의 결과 스키피오는 지금의 세비야 근처 이탈리카(Italica)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스페인(이베리아)반도의 라틴 화에 착수했다. 이후 2백 년 동안 로마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갔다. 로마는 골(지금의 프랑스)지역을 한 번의 전투로 굴복시킨데 반해, 이베르-켈트 족의 항복을 받아 내는 데 2백년이 걸렸다. 구까스띠야에 있는 누만띠야(Numantia)는 이 투쟁의 상징적 장소로, 그 주민들은 로마와 20년을 싸우다가 집단 자살을 택한 곳이다. 스페인 역사상 외국인 혐오와 고립이라는 이베리아인들의 특징은, 누만띠아의 맹렬한 저항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이베리아를 정복한 로마는 이 지역을 라틴식 이름인 히스빠니아(Hispania)로 명명했고, 지금의 국명 “에스빠냐”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로마의 지배에 따라 라틴어가 까스띠야 어, 까딸란어, 갈리시아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루마니아어 등 로망스어의 모태가 되었다. 라틴어가 현지어와 결합된 이 언어들을 로망스어라고 한다. 폼페이우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줄리어스 씨저는 자신을 지지한 퇴역 장군들에게 스페인의 땅을 하사한다. 바로 인류를 노예화한 대토지소유제도 즉, 라티푼디움(Latifundium)의 기원이다. 이 제도 하에서 로마는 이베리아의 광대한 토지에 노예노동에 토대한 대규모 농업을 실시했고, 이 농업양식은 역사적으로 스페인뿐만 아니라 미국,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원인이 되어 왔다. 라티푼티움의 잔재는 미국 및 라틴아메리카에 아직도 남아 있다. 씨이저의 조카인 옥타비아누스 씨이저(Augustus; 63BC~18AD)는 이베리아 반도의 라틴 화를 종료하고, 많은 도시들을 세운다. 꼬르도바(Cordoba), 따라고나(Tarragona), 메리다(Merida), 사라고사(Zaragoza), 바르셀로나(Barcelona), 세고비아(Segovia), 빰쁠로나(Pamplona) 등등 고색창연한 도시들은 그의 치세 하에서 세워진 도시들이다.

로마제국 야외극장(메리다)

     도시의 발달에 따라 도로 등 사회간접 자본의 건설이 활발해지고, 이 때 세워진 도로, 경기장, 야외극장, 수로 등은 아직도 남아 있다. 세고비아의 아름다운 공중수로(Aqueduct), 메리다와 따르라고나의 야외극장, 꼬르도바의 다리 등은 아직도 남아 있는 그 시대의 유산이다. 이 시대의 종교는 물론 로마의 다신교이지만, 사도 바울을 따라 온(로마서 15:29) 기독교도들과 유대인이 도래하기도 한다.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Diocletianus; 242~316)시대에 지금의 까르따헤나를 중심으로 한 동남부 지역, 포르투갈을 포함한 서부 지역, 그리고 지금의 모로코를 중심으로 한 북아프리카 지역을 포괄하는 거대한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제국의 재편에 장애 요소였던 기독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있었지만, 엘비라(Elvira) 종교회의가 있었던 310년에는 스페인 전역에 이미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있었다. 이 종교회의에서는 기독교적인 윤리와 교리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에 따라 코르도바 대주교인 호시우스가 황제의 종교 고문이 되었고, 392년에는 스페인 태생인 테오도시우스I세(Theodosius I; 347~95)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스페인의 기독교는 이처럼 그 뿌리가 깊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여러 황제들이 로마제국의 재건을 위해 귀족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고, 그 대가로 귀족들에게 광대한 토지와 사법권을 주었다. 이 사법권을 토대로 귀족들은 소지주나 소작인, 노예(자유 노예)를 부릴 수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중세에 이르러 봉건제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귀족들의 낙향에 따라 도시가 쇠퇴하게 된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자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리되어 그의 두 아들에게 상속되었다. 409년에 수십만 명에 이르는 반달족(Vandals), 수에비족(Suevis), 알란족(Alans)이 주축이 된 게르만족이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했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이미 방어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 후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에게, 동로마제국은 1453년에 오토만 터키(Ottoman Empire)에 의해 멸망했다. 서 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게르만족의 침입이 있따랐다.  게르만족 가운데 가장 문명화된 서고트족 (Visigoths)은 비록 늦게 도래했지만, 이때 이미 기독교로 개종한 상태였다. 이베리아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게르만족의 일파 인 서고트(Visigoths)족에 대해 좀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서고트 왕국(Kingdom of Visigoths)

    서고트족은 376년 다뉴브 강 유역으로 진출하고, 378년 아드리아노플 (Adrianople, 오늘날의 터어키 Edirne시 ) 전투에서 동로마 황제 발렌스(Valens Augustus; 328~78)를 격파한다. 발렌스의 후임 테오도시우스황제는 서고트와 화해를 하고 동맹관계를 맺지만, 409년 반란을 일으킨 서고트는 로마를 공격, 약탈한다. 제국의 서쪽인 골(지금의 프랑스)로 진출한 서고트는 뚤루즈(Toulouse)에 왕국을 세웠다. 로마와 새로운 협약을 맺은 이들은, 이미 스페인 반도를 점령한 반달, 수에비 및 알란 족들과 싸우는 로마를 도왔다. 이때 서고트족에 패배한 약 8만 명의 반달족이 지브롤터를 건너 북아프리카로 도주하여 나라를 세우니 지금의 튀니스, 리비아 일대이다. 한편, 골 지역에서 훈족(Huns)의 아틸라(Attila the Hun)와 싸우는 로마를 돕기 위해 서고트족이 원정을 했고, 그 사이에 수에비족은 스페인의 갈리시아에서 안달루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세력을 확장했다. 이들을 퇴치하고 농민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로마는 다시 서고트족을 이베리아 반도로 불러들였다. 이에 따라 서기490년경에 서고트족의 이베리아 정착이 개시되고, 서고트 왕국이 세워졌으며 동로마제국은 이를 승인했다. 즉, 이베리아 반도에 서로마제국의 영향력이 끝난 것이다. 서기507년, 뚤루즈의 서고트 세력이 프랑크족에 의해 붕괴되면서 서고트족은 바르셀로나로 천도했다. 이후 왕국의 번영에 따라 똘레도(Toledo)로 다시 천도하고, 라틴어를 국어로 받아들였다. 이 어두운 시기에 서고트족의 문화는 서유럽에서 가장 빛나는 문화였다.

서고트 금관

     이들은 로마 제도를 도입하고 법전의 개정을 비롯해 수백 개의 지명, 일상용어 및 수많은 기독교식 사람 이름 등으로 스페인 문화에 기여하였다. 이 기독교적인 이름들은 아직도 게르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알폰소라는 이름은 "만반의 준비가 된 자"라는 뜻이며, 페르난도는 "평화" 또는 "대담무쌍"이라는 뜻이고, 로드리고는 "명성" 또는 "강자", 곤잘로는 "분발" 또는 "투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많은 스페인의 왕과 귀족들이 이러한 게르만적 이름을 선호하여 왔다. 이 시대 세비야의 주교인 성 이시도르(St. Isidore; 560~636)는 서고트인으로, 그가 편찬한 어원집(Etymologies)은 중세초의 백과사전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 금세공에 일가견이 있던 서고트인들은 새로운 정착지에 금으로 장식한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그들의 금세공 전통은 아직도 남아, 똘레도를 방문하는 이들은 그 유구한 전통을 현장에서 체험할 수가 있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 결정

    인류 역사상 똘레도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도 없을 것이다. 똘레도는 마드리드 남쪽 75킬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를 방문하는 이는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돌아가는 듯한 경험을 한다. 그냥 옛 그대로이다. 여기서 586년에 로만 가톨릭의 제3차 종교회의가 있었다. 이 종교회의에는 당시 스페인 반도를 지배하던 서고트의 왕 리카리드(Reccared; 559~601)의 왕권이, 로마교황으로부터 승인 받느냐 하는 문제가 걸려 있었다. 승인이 없으면 세속의 왕권 유지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Arius; 256~ 336) 교리를 고집했던 리카리드는 결국 교황이 요구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교리와 유대인에 대한 차별 조치를 받아들인다. 우리가 알고 있듯 아리우스 교리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예수는 인간으로서 다만 초인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니케아 제1차 종교회의(325)이래 교황청의 정통 교리인 아타나시우스 교리 즉, 삼위일체설을 부정한다. 똘레도 종교회의 역사적 의미는, 그 회의 이후 기나긴 세월 동안 유대인을 법적, 제도적으로 차별한 결정이 바로 이 회의에서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이 회의에서, “유대인의 공직 취임 금지, 토지 소유 금지 및 농업 금지, 상업 금지, 유대인과 크리스트 교도와의 결혼금지 등등...에 걸친 교황의 요구가 받아들여진다. 말하자면 유대인의 경제적, 사회적 활동을 완전히 막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구속은 1천2백년이 지난 프랑스 대혁명에 이르러서야 해제가 된다. 이 같은 구속은, 711년 이슬람 군대가 스페인을 침략했을 때,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 군대의 편에 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이슬람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유대인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편다. 그 관대함은 꼬르도바의 유대구역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이러한 정책 덕택으로, 8세기부터 11세기까지 유대인이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한 곳은 이슬람 정복 하의 스페인이었고,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상인들로부터 예금을 받아 회교의 왕인 칼리프들을 상대로 대출을 한다. 이를테면 사업으로서의 금융업이 시작된 것이다. 은행업은 칼리프들에게 매우 편리했고, 따라서 그들은 유대 금융업을 후원하기도 했다. 출애급기(22:25)는 이자를 금지하고 있다. 레위기에서도(25:36)는 ‘너희는 동족에게서 세나 이자를 받지 못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가르침으로 중세의 기독교 세계에서는 대금업을 천시, 죄악시 했던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도가 천시한 이 사업을 그들에게 천대 받은 유대인들이 떠맡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똘레도 유대인 구역

이슬람의 도래

    이슬람 무어족(Moro)은 북아프리카로부터 왔으며, 711년 서고트왕국의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정복한다. 무어라는 말은 당시의 모리타니아(Mauritania, 지금의 모로코)로부터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1492년 이사벨라 여왕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스페인 반도를 지배한다. 여타의 유럽 국가들이 켈트 문화, 로마문화 또는 게르만 문화였던데 반해 스페인에서는 8백년 가까운 세월이 이슬람 문화였다. 이것이 바로 스페인 문화가 유럽 역사의 주된 흐름에서 벗어난 이유이다. 이슬람은 여인들을 데리고 오지 않아, 자연히 반도의 기독교 여인들을 아내로 맞았다. 이는 스페인 사람들이 신대륙에서 원주민 인디언 여인들을 아내로 맞은 것과 같다. 많은 기독교도들이 승리자인 무슬림으로 개종을 했으며, 서기 1000년경에는 인구의 75% 이상이 회교도였다. 기독교도에게는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되 다만 인두세를 부과하는 등 관대한 정책을 펴기도 했다. 유대교들에게도 역시 같은 대우를 했다. 수세기 동안 안달루시아는 회교, 기독교, 유대교가 공존하는 평화의 땅이었다. 유럽의 여타 지역이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뒤떨어진 시기에 이베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빛나는 문명의 지대였다. 무어인들은 관개를 이용하여 메마른 메세따 지역을 녹색지대로 바꾸었고, 빛나는 사원과 왕궁을 세웠고,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과 의학학교를 설립했으며 뛰어난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역사학자, 시인, 신비론자들을 배출했다. 그들의 발달된 수학, 자연과학, 철학적 지식이 유럽에 전달되었고, 특히 이들에 의해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의 고전들이, 똘레도 아카데미아 에서 다시 라틴어로 재 번역된 후 이태리로 전해짐에 따라, 그리스 인본주의에 토대한 르네상스가 꽃피게 되는 것이다.

    당시의 알메리아에는 5천개의 방추를 갖춘 직조 공장이 있었고, 이 공장은 비단을 비롯하여 무명, 모직물을 생산하기도 했다. 알메리아에는 40만권의 필사본 책을 갖춘 도서관도 있었다. 이슬람 통치하의 이베리아는 역사상 최대의 번영기였으며, 정교한 문화로 세계를 이끈 유일한 시기였다. 아직도 사용 가능한 관개시설이라던가, 꼬르도바의 회교사원(Mosque),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Alhambra), 세비야의 알카사르(Alcazar)와 알까사르 성채, 사라고사의 알하페리아 궁(Aljaferia) 등은 무어인들이 스페인에 남긴 정교하고 풍부한 문화유산들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들에 속한다.

  

알하페리아 궁  

 
알카사르(세비야)

이사벨라

    기독교에 의해 무어인들이 추방 될 때까지 거의 8백년의 세월이 소요 되었다. 이 추방은 재정복(Reconquest)이라 불리고, 스페인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1469년 까스띠야의 이사벨라 여왕(Isabela Catolica)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드가 결혼을 통해 두 왕국이 통일되어 하나의 기독교 왕국이 탄생하고, 이로부터 재정복 사업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사벨라 여왕의 그라나다 정벌

 

    교황에 의해 가톨릭 군주로 명명된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가 1492년, 스페인 반도의 마지막 무슬림 왕국인 그라나다를 정벌하였다. 이해가 바로 스페인의 운명이 바뀐 해였다. 이해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고, 이는 인간이 지구에 대해, 우주에 대해, 그리고 인간 자신에 대해 혁명적인 사유를 하게 된 사건이었다. 이제 스페인 제국은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에까지도 조만간 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 해에 또한 50만 명에 이르는 유태인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이냐 아니면 스페인으로부터의 추방이냐,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 결정이 있었다.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는 패배한 무슬림에게도 이슬람 신앙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했지만, 10년도 못 가서 이 약속을 깼다. 추방이냐 개종이냐의 선택을 강요한 것이다. 이에 따라 많은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스페인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무슬림이나 유태인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천년 가까이 살아 온 사람들로, 그들 조상이 지켜 온 신앙을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당시에 추방된 무슬림이나 유태인들의 후손들은 스페인 땅을 그리운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박해는 그 후에도 반복이 되어, 17세기의 자유주의 사상가들에 대한 박해, 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에 대한 박해,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처벌, 20세기에 들어서는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무신론자, 성직자, 왕, 대통령, 장군,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파시스트, 공산주의자 등이 모조리 추방되었다. 그리고 바스끄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처벌도 계속되어 왔다. 이 같은 추방은 가톨릭, 보수 집단, 전통주의자들 등 소위 우익 보수주의자들에 의해서만 행하여진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분리주의자들도 폭력과 살인을 자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폭력과 추방으로 스페인은 수많은 예술가, 장인, 상인, 전문가들을 잃었고, 20세기말까지 이를 메우지 못했던 것이다. 이 추방이야 말로 역사상 가장 옳지 못한 일로, 스페인의 영혼에 상처를 남기고 있다. 또 스페인의 중요한 박해 수단이었던 종교재판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종교재판

    중세 스페인은 까스띠야, 아라공, 아스투리아스, 까딸로니아 등 여러 공국(Reino)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남쪽에는 이슬람 그라나다 왕국이 있었다.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는 결혼을 통해 통일국가의 초석을 놓는다. 통일은 가톨릭 이념 하에 이루어져야 했다. 따라서 이교도는 용납될 수 없었다. 스페인 최초의 종교재판은 1481년 2월, 안달루시아의 세비야에서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날 6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세비야의 부자 3명, 유대교 랍비 한 명, 가톨릭 교회 집사 1명, 세비야 재판소장 등이었다. 그들의 신분으로 보아, 재산이나 지위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가톨릭 교도가 죽었다는 건, 무고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종교재판

    종교재판의 야만성을 좀 더 상세히 진술하면 이렇다. 종교재판(Inquisition)은 말 그대로 감시와 심문을 특징으로 한다. 감시와 심문을 통해 중세인의 정신과 행동을 억압한 것이다. 종교재판은 또 정치성을 띄어, 신앙의 적은 국가의 적이기도 했다. 이교도는 하나님의 적인 동시 국왕에 저항하는 반역자였다. 세속의 왕에 대한 반역이 죽음이라는 논리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은 더 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교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자이고, 이웃의 영혼을 죽이는 자이며, 사회의 근간을 약화시켜 그 결속을 파괴하는 자로, 뿌리를 뽑아야 할 대상이라고 했다. 종교재판은 정화교(Catharism) 때문에 시작되었다. 정화교는 10세기 불가리아에서 일어난 가톨릭의 일파이다. 마니교(Manichaeanism)의 영향을 받은 정화교의 우주관은, 영원히 대립하는 선과 악의 이원론이다. 악은 바로 사탄이며 사탄은 물질세계의 창조자이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처럼 물질세계는 악과 죄의 세계이다. 이 같은 육체에 갇혀 있는 영혼은 성령으로 세례(consolamentum)를 받아야 끊임없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난다고 했다. 세례 받은 사람은 이제 물질세계와의 인연을 끊고 가난한 삶, 엄격한 채식, 절대 정직, 금욕을 해야 한다. 이런 사람을 완전자(perfecti)라고 했는데, 이들만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이 같은 교리는 들불처럼 번지는데, 이는 완전자의 경건하고 검소한 생활이 당시 가톨릭 사제들의 생활과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가톨릭 교회는 권력과 부를 향유하고 있었고, 부패와 사치가 말할 수 없이 심했다. 12세기 들어 이 부패에 대한 유일한 저항 세력은 정화교였다. 정화교는 프랑스 남부 랑귀독(Languedoc)에서 급속히 번져 나갔다. 이에 따라 정화교는 가톨릭 교회에 심각한 적이 되었다. 신앙도 다른데다가 가톨릭 교회의 물질, 부, 세속적인 권력 집착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는 사탄의 도구임에도, 마치 신자들이 구원 받은 듯 속인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가톨릭 교회에 대한 복종을 거부했는데, 이는 교회와 세속정부의 근본을 뒤흔드는 중대한 문제였다. 이 같은 정화교에 우려한 교황 인노센트III세(1198~1126)는 진상 파악을 위해, 1198년 시토수도회 수도사(Cistercian)를 사자로 파견한다. 그러나 정화교의 독특한 성격 때문에 이들의 임무는 어려움에 봉착한다. 정화교 신도들이 예배의식을 치루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제 있고 검약한 생활을 했지만, 세례는 임종 시에나 받았다. 따라서 세례를 받기 전에는 결혼도, 아이도 가질 수 있고, 고기도 먹고, 재산도 늘리고, 가톨릭 교회의 미사와 성사 참석했으며, 다만 죽기 직전에 정화교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 신도와 구별이 불가능했다. 이 같은 이유로 정화교와의 싸움에 별 진전이 없었다.

    1208년, 정화교를 지지하는 현지 귀족과 교황이 파견한 사자가 언쟁 끝에 사자가 피살된다. 이에 대로한 교황은 징벌을 위해 십자군을 일으키는데, 바로 알비 십자군 (Albigensian Cruz)이다. 정화교의 강력한 보루였던 알비 시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십자군은 이후 20년 동안이나 원정에 나선다. 이 십자군에 의해 많은 정화교도들이 죽지만, 십자군은 그 목적달성을 못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정화교 편이었고 또 전쟁은 종교전쟁을 벗어나, 남 프랑스와 북 프랑스 간의 정치적 싸움으로 번졌다. 알비 십자군이 실패하자 교황은 다른 방법 즉, 종교재판 (Inquisition)을 선택한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종교회의(Lateran Council)에서 인노센트III세는 이교도 문제를 제기한다. 그의 요구로 이교도 처벌법이 마련된다. 주교, 봉건영주, 가톨릭 교도들이 이단자를 색출하여 교회특별재판소에 회부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바로 종교재판의 근거 법이다. 인노센트III세는 이 법의 시행을 못 보고 죽었지만, 1233년 그의 후임 교황 그레고리IX세 (1227-41)는 랑귀독의 도미니크 교단에 종교재판을 명령한다. 프란시스코 교단도 참가한다. 두 교단은 25년간에 걸쳐 심문절차, 재판절차 등 세밀한 준비를 한다. 이어서 1252년 교황 인노센트IV세(1243-54)는 고문을 공식화하는 칙령(Ad extirpanda)을 발표한다. 교회법은 사제가 손에 피를 묻히는 걸 금지하여 고문을 제한했지만, 후일의 상황을 보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종교재판의 심문관은 판사 겸 검사이고, 그를 보좌하는 수도승이나 서기는 증인에 불과했다. 피고인의 죄와 처벌은 심문관 단독의 뜻에 따라 결정되었다. 우선 심문관은 잡혀 온 혐의자를 비난하는 설교를 한다. 그런 다음 7일에서30일 간의 유예 기간을 준다. 이 기간 중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 용서와 함께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했다. 가벼운 처벌로는 금식, 반복적인 기도, 죄인 복 착용, 공개 태형, 성지 순례, 단기간의 투옥, 수도원이나 수녀원에 대한 노력봉사, 자택 감금 등이 있었다. 유예기간 중 자신의 혐의를 소명 못한 사람은, 종교 법정에 선다. 교회에 저항했다는 막연한 말로, 미주알고주알 캐묻고는 자백할 것을 요구한다. 자백이 수집한 소문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일치하도록 자백할 때까지 감옥에 가둔다. 이처럼 '비협조적인' 혐의자는 추가 조사를 한다는 명분으로 무기한으로 감옥에 가두었다. 자백할 때까지 3년, 5년, 10년까지 감옥에 가두는 경우도 있었다.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한 회유, 협박, 고문, 거짓 감형 약속, 굶기기 등의 방법도 동원되었다. 가족을 연루시키거나, 자백을 설득토록 가족을 협박하기도 했다. 고문의 형태로 가장 유명한 것은 '매달기' 였다. 손을 뒤로 묶은 다음, 천정에 매다는 고문이다. 발에 무거운 쇳덩이를 달아 고통을 늘리기도 했다. 17~18세기에는, 발에 쇠 족쇄를 채워 조이는 고문 기술이 유행했다. 족쇄를 조여 발목을 으스러뜨리는 고문 방법이었다. 이처럼 무자비한 고문이 교회의 의지였다는 걸 지금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12세기 당시 고문은 로마법 절차의 재현으로,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한 일반적인 수단의 하나였다. 중세 교회는, 영혼 구제와 육체는 무관하다고 믿었고, 따라서 심문관들은 오로지 영혼 구제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물론 자백을 받아 내는 것이었지만 또한 이교도 신앙을 완전한 가톨릭 신앙으로 바꾸는데 있었다. 고문에 따른 고통은, 구원 받지 못한 영혼이 겪을 영원한 지옥불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이었다. 형의 집행은 교회를 대신해 세속의 정부가 맡았다. 이교도에 대한 처벌은, 유혈을 피할 수 있다는 이유로 화형이 일반적이었다. 재판 중 병이나 고문으로 사망한 경우는, 비밀리에 매장한 다음 재판을 계속했다. 죄가 없음이 들어 날 경우, 죽은 사람의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무죄판결문을 읽었다. 그런 다음 그의 비밀 무덤이 가족에게 통보되었다. 유죄 판결일 경우는 그의 시신을 파내어 화형에 처했다. 이교도로 판명된 경우는, 만일 그가 회개하고 개종하면 교수형에 처한 다음 화형에 처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산 채로 화형에 처했다. 재산 몰수형도 있었다. 몰수된 재산은 종교재판 비용으로 쓰기로 되어 있었으나 지켜지는 일은 거의 없었고 심문관, 교회관계자, 세속의 왕들이 나눠 가졌다. 종교재판을 통해 재산을 늘릴 수 있다는 생각에 왕들은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이 같은 처벌 역시 지금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중세의 형법전은 보복형 체계로 무자비했고, 고문과 화형은 일반적이 처벌 방식이었다. 사기범은 산 채로 화형에 처했고, 무게나 길이를 속이는 죄는 태형 또는 사형이었다. 강도는 교수형, 재범의 절도 역시 사형이었다. 물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 형, 창자를 끄집어내는 형, 사지절단 형, 물에 삶아 죽이는 형 등이 있었다. 당시의 백성들은 지금과 같은 교양시민이 아니라 무질서하고 난잡했기 때문에, 처벌도 무질서하고 난잡했다고 볼 수 있다. 좀도둑에게도 고문을 했기 때문에, 이교도에 대한 고문이나 화형도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종교재판의 무서움은 이 같은 처벌 방식보다는, 인간의 내면을 알아내려고 한 그 집요함에 있었다. 한 개인의 말, 행동, 습관, 가톨릭 교리와는 다른 이질적인 생각 등을 면밀히 관찰하여 이교도 여부를 판단하려고 했다. 이 같은 상황으로, 돼지고기와 금요일, 토요일도 고통의 대상이었다. 돼지고기를 싫어하거나 안 먹으면 종교재판의 법정에 서야 했다. 무슬림 안식일인 금요일, 유대교 안식일인 토요일에는 몸이 아파도 쉴 수가 없었다. 쉬면 이교도 혐의가 씌워졌다. 채무자는 빚을 안 갚으려고, 채권자가 돼지고기를 안 먹었다던가, 금요일, 토요일에 쉬었다는 등 고자질을 했다. 개인적인 원한으로 누가 고발될지 아무도 몰랐다. 고발된 사람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고발자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었다. 소문은 곧 조사 대상이 되었고, 말 실수의 경우, 친인척들로부터도 고발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엄청난 공포에 시달렸다. 자신이 당하기 전에 먼저 고발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부모와 자식 간에, 부부 간에 고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대인과 무슬림은 그 신분만으로도 이미 반역자로 의심을 받았다. 이에 따라 사람들 간 신뢰가 붕괴되고, 공동체가 붕괴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같은 종교재판이 이태리, 독일,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스페인, 포르투갈로 퍼져 나갔다. 스페인의 식민지 확대로, 신대륙과 필리핀에도 종교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종교재판의 무자비한 처벌은 존 후스(John Huss, 1369-1415)에 대한 재판을 통해 알 수가 있다.

    그는 보헤미아 출신의 성직자 겸 철학자이다. 루터에 앞서 종교개혁을 시도한 사람이다. 그에 대한 처형은 1415년 7월, 지금의 독일 콘스탄스 시에서 있었다. 말뚝에 전신을 묶어 세웠다. 그의 얼굴은 서쪽을 향하게 했다. 예루살렘이 동쪽이었기 때문이다. 신념을 포기할 것을 집행자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는 물론 거부했다. 반쯤 탄 그의 시신을 다시 잘게 분해하여 장작불에 태운 다음, 그 재를 개천에 버렸다.

    종교재판은 근세에 들어 강력한 세속 왕권이 확립되면서 쇠락하기 시작한다. 그 권한은 세속의 재판소로 넘겨지고,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이 줄어든다. 계몽주의 덕택으로 인류는 새로운 법률, 종교적 관용, 민주주의, 자유를 확보한다. 압제적인 종교재판이 저항에 부딪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페인에서는 계몽사상을 억압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극성을 부렸지만, 1808년 스페인을 정복한 나폴레옹은 종교재판소를 폐지한다. 나폴레옹이 물러간 후 종교재판을 부활 시켰지만 나폴레옹의 점령 중, 종교재판에 관한 모든 기록과 문서가 파괴되었으므로, 부활된 종교 재판소는 제대로 기능을 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스페인 의회는 종교재판이 헌법 정신과 배치된다는 선언을 했고, 종교재판에 반대한 국민들이 1820년 종교재판소를 공격, 파괴했고 1834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바티칸 성실청(the Congregation of the Holy Office)은 종교재판 관장기구이었다. 1965년 교황 바오로VI세는 그 이름을 신앙교리회(the 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로 바꿨다. 교회업무와 신학적 사항에 관한 교황 자문기관으로 그 기능을 국한했다. 이 기관은 믿음과 내면의 생각은 통제할 수 없다는, 그 궁극적인 실패를 뜻하는 종교재판의 상징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이념의 덧을 씌워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면, 종교재판은 아직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대륙 발견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역사상 누구보다도 인구에 회자되는 사람이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레오나르 다빈치, 히틀러보다도 그에 관한 저서가 더 많다. 밀튼의 실낙원이나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서도 그를 언급하고 있으며,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은 그에게 헌정한 음악이다. 그는 열정적인 기독교인으로 중세적 유심론자이면 현대적 경험론자인 동시에 이태리의 영웅이지만, 제국주의적 악당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찌됐던 그는 1492년 그이 항해를 통해 세계를 바꿔놓은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콜럼버스는 이태리 제노아 출신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1451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콜럼버스가 태어나고 2년 후인 1453년 오토만터키에 의해 동로마제국이 멸망한다. 따라서 동방무역의 종착역인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의 손에 떨어짐으로써 유럽인들의 동방무역의 길이 막히게 된 것이다. 이제 유럽인들은 서쪽으로 새로운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시대의 일반대중은 지구가 평평하여 대양의 끝에서는 바닷물이 폭포처럼 떨어진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구가 둥글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의 천문학자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였다. 그는 신전의 대리석 기둥의 그림자 길이와 자신의 두뇌의 힘만으로 지구의 둘레가 4만km 정도일 거라고 거의 정확한 추측을 한 사람이었다. 에라토스테네스 후 4백년이 지난 다음, 프톨레미(Ptolemy)는 지구의 둘레를 실제 크기의 4/5인 2만마일 정도로 예측했다. 이는 곧 콜럼버스의 신념이기도 했다. 특히 콜럼버스의 항해 의욕을 불태운 것은 마틴 벤하임(Martin Benhaim, 1459-1506, 독일의 항해가 겸 천문학자)의 지구본이었다. 이 지구본에는 많은 오류가 있었는데, 예컨대 지팡고(일본)는 스페인의 까나리아로부터 서쪽으로 1500마일 정도의 지점에 그려져 있었다. 따라서 콜럼버스는 까나리아로부터 인도까지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바람만 순풍이면 며칠 내에 이 바다(대서양)를 건널 수 있다’, 라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서도 그렇다. 그리니까 콜럼버스가 세계를 바꿔 놓은 것은 그의 지식이 정확해서가 아니라 부정확했기 때문이었다. 또 그의 항해는 과학적 신념에 토대했다기보다는 신앙적인 신념이 더 강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 항해가 하나님의 소명임을 밝히고 ‘과학은 내게 부질없는 것이며, 주님께서 내 마음을 여시어 인도까지 항해할 수 있도록 하셨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는 또 그 항해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세상으로 바꾸어, 무슬림으로부터 예수살렘을 다시 탈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1488년 그는 포르투갈 국왕(Juan II)에게 3척의 배를 지원해 주면 대서양으로 나아가 동방에 이르는 뱃길을 개척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국왕은 이미 바돌로뮤 디아스(Bartholomew Diaz)의 희망봉 발견(1488)으로 인도로 가는 가능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콜럼버스의 제안에 냉담했다. 더구나 콜럼버스가 말한 인도까지의 거리 2400마일(3,800킬로)은 터무니없이 가까운 거리임을 항해전문가들이 왕에게 조언했다.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 

    포르투갈의 지원을 얻는데 실패한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정과 2녀에 걸친 로비 끝에, 1492년 4월 꼬르도바의 왕궁에서 이사벨라 여왕을 알현한다. 유럽의 마지막 무슬림 요새였던 그라나다 함락 3개월 후의 일로, 무슬림과 유대인들에게 개종하지 않을 경우 스페인을 떠나라는 포고령이 내려진 직후였다. 이제 스페인은 아라곤과 까스띠야의 통합에 따른 샌생 통일국가로서,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교역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포르투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계획의 비현실성 즉, 인도까지의 거리가 너무 짧기 때문에 거절을 당하지만, 남편 페르디난드의 권고에 따라 이사벨라 여왕은 지원을 약속한다. 여왕은 콜럼버스가 성공할 경우 제독의 지위와 새로운 땅의 총독으로, 그리고 그 땅에서 거두어들이는 모든 수입의 10%를 주겠다는 것과, 이러한 특권과 지위는 그의 장남에게 상속이 될 것임을 약속한다(La Capitualcion de Santa Fe). 콜럼버스는 그 열렬한 신앙심으로 인해 여왕의 경건한 신앙심에 알맞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고갈된 왕실의 재정을 회복한 다음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에 나설 것임을 여왕에게 약속한다. 여왕으로서는 지원에 따를 위험부담이 별로 없었고, 지원금 마련을 위해 여왕이 보석을 팔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지만, 원정 자금 2백만원(Maravedis)은, 여왕의 장녀 까따리나 공주의 결혼 비용의 1/30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가 인도를 향해 스페인의 빨로스(Palos)항을 떠난 1492년 8월 3일자 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스페인과 대양 위 섬나라의 군주이시며 주님의 자녀이시고 탁월하고 강력하신 국왕 폐하와 여왕 폐하를 만백성이 칭송했다. 폐하께옵서는 1492년 올해, 유럽을 지배했던 ‘무어’와의 싸움을 끝내셨다. 금년 1월2일 위대한 도시 ‘그라나다(Granada)'의 요새인 ’알함브라(Alhambra)'의 첨탑 위에 군사들이 국왕폐하의 깃발을 게양하는 것을 보았다. 무어의 왕이 성문을 나와 두 분 폐하와 나의 주군이신 왕자님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같은 달, 내가 폐하께 올린 인도의 땅과, 우리말로 왕중앙을 뜻하는 ‘위대한 칸’이라는 그 땅의 왕에 관한 정보에 따라, 그 왕과 그곳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와 더불어 모든 것을 아시고자,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들을 우리의 성스러운 신앙으로 개종을 시킬 수 있는지 아시고자, 폐하께서는 나 콜럼버스를 인도의 땅으로 보낼 것을 결정하셨다. 나는 이 ‘위대한 칸(the Great Kahn)'에 대해서 보고를 드렸고, 칸의 전임 왕들이 백성을 가르치고자 로마에 여러 차레 사신을 보내어, 우리의 신앙에 통달한 사람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성부(교황)께서 이를 허락한 적이 없어, 우상을 믿어 지옥 불에 떨어질 그 많은 사람들을 저버렸음을 또한 보고들 드렸다. 폐하 내외분께서는 가톨릭 신앙과 그 전도에 몸을 바치신 가톨릭 신자로서 그리고 국왕으로서, 아울러 무슬림과 모든 우상숭배자들과 이단자들의 적대자로서, 과거처럼 육로가 아닌 방법으로 동방으로 갈 것을 내게 명령하셨다. 이 명령을 받은 때부터 오늘까지 나는, 그 누구도 앞서 가 본적이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서쪽의 길로 갈 운명이었다. 그리고 같은 달 1월에 폐하의 왕국과 영토에서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시고 난 다음, 부족함이 없는 함대와 함께 인도의 땅으로 갈 것을 내게 명령하셨다. 이 일을 위해 나는 커다란 혜택과 귀한 칭호를 부여 받았는 바, 폐하께서는 나에게 Don이라는 귀족의 칭호와 바다의 제독이라는 지위를 부여하셨고, 내가 발견할 섬과 땅의 종신 총독으로 임명하셨으며 이러한 지위는 나의 장남에게 상속됨과 더불어 대를 이어 상속이 될 것을 약속하셨다. 나는 1492년 5월12일 토요일, ’그라나다‘를 떠나 ’빨로스‘ 항구로 갔다. 그곳에서 이 사업에 안성맞춤인 세척의 배를 마련하여 항해 장비를 갖췄다. 8월3일 금요일, 많은 보급품과 함께 여러 선원들을 데리고 그 항구를 출발했다. 나는 폐하의 섬인 대양상의 까나리아군도를 향해 항로를 잡았고, 그곳으로부터 내가 인도에 도착하여 폐하의 서한을 그곳의 왕에게 전달하고, 폐하가 명령하신 모든 임무를 수행할 때까지 계속될 항해를 시작할 것이다.”

     승무원 86명 가운데에는 콜럼버스와의 항해를 조건으로사면을 받은 4명의 사형수도 있었다. 콜럼버스의 선단을 구성한 세척의 배 즉 니냐, 산타 마리아, 그리고 핀타 호의 그림이 남아 있지 않아 실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스페인으로부터 추방되는 유대인을 실은 마지막 배가 출항한 다음 날, 빨로스 항에서 출항한 후 보급품을 준비하기 위해 까나리아 군도에서 1달을 보냈다. 그리고 까나리아를 출발한지 36일 후인 1492년 10월12일, 지금의 서인도제도(도미니카 공화국)에 도착한 것이다.

콜럼버스의 서인도 제도 상륙

    그는 인도까지의 거리가 3천마일로 순풍의 경우 21일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대체로 그가 계산한 시간과 장소에서 새로운 땅을 만난 것이고, 그래서 자신이 인도에 도착했다고 믿었고 죽을 때까지 이 믿음은 변화가 없었다. 만일 그가 인도까지 실제의 거리가 2만마일(약 32,000킬로)이라는 걸 알았다면, 더구나 그 사이에 대륙이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대양을 건너 그 먼 거리를 항해하겠다는 건 감히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부정확한 지식이 그 같은 무모한 모험을 부추기고 성공 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후 3번이나 캐리비언 연안을 탐험했지만, 북미대륙을 밟은 적이 없었다. 그 후, 플로렌스이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가 캐리브 및 남아메리카 일원을 탐험한 끝에 이 대륙이 인도가 아닌 새로운 대륙임을 확인했고, 이 공로를 인정하여 독일의 지도제작업자 발트제뮐러(Martin Waldseemüller,1470 –  1520) )가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이 신대륙을 아메리카라고 명명한 지도를 발간했다(1507). 이리하여 이 대륙이 아메리카 ,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필립II세

    155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동시에 스페인의 국왕인 까를로스I세(신성로마제제국의 챨스V세)는 양위를 한다. 그는 동생인 페르디난드I세에게는 신성로마제국을, 아들인 필립II세에게는 스페인을 물려주었다. 필립II세는 60년 동안 통치를 한 왕이다. 그는 포르투갈 왕이기도 했다.


필립II세

필리핀도 필립의 땅이 되었고, 필리핀이라는 국명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또 플랑드르(Flandre; 당시의 네델란드 남부 지방)와 밀라노 역시 필립에게 상속됨으로서 프랑스를 압박하고, 밀라노를 마드리드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까를로스I세가 여행을 좋아한 국제적인 인물이었던데 반해 필립II세는, 튜더(Tudor)가의 메리와 결혼을 위해 영국을 방문한 것과, 싸움을 위해 플랑드르의 생 뀌앙뗑(St. Quentin)으로 원정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스페인에 머물렀다. 포르투갈도 그의 영토가 된 후에야 방문을 했다. 그의 부왕이 외향적인 성격이었던데 반해 그는 내성적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문제 해결을 밖에서 찾은데 반해 그는 문서를 통한 심사숙고 끝에 결정을 내린 왕이었다. 마드리드 인근의 엘 에스꼬리알(El Escorial)은 그의 왕궁 겸 은거지로, 방문자는 그 폐쇄적인 분위기를 경험할 수가 있다.

엘  에스꼬리알

   그의 이 같은 행동과 성격은 다른 나라들의 적대감정을 불러온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까를로스I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지만, 필립은 스페인의 이익보호에만 관심이 있었다. 분쟁의 해결에서도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30년 전쟁이 가져온 유럽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 까를로스I세는 아우크스부르크협정(The Augsburg Settlement, 1555)에 서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프로테스탄트를 현실적인 존재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필립은 이 같은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덜란드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강경한 탄압은 오히려 이 지역을 잃을 것이라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란의 주모자인 에그몬트 백작과 오렌지 공 윌리엄을 단두대로 보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시작되고, 80년의 항쟁 끝에 네덜란드가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Treaty of Münster, 1648)을 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그의 무자비함은, 황태자인 아들 까를로스를 반역죄로 죽이고 그의 약혼자를 빼앗은 사건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괴테의 Egmont와 쉴러의 돈 까를로스(Don Carlos)에 잘 묘사되어 있고 또 베토벤과 베르디에 의해 오페라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레판토 해전

    필립II세의 치세 하에서 오토만 터키와 레판토(Lepanto; 1571)해전이 있었다. 해전이 있기 1년 전 지중해의 사이프러스 섬은 이미 오토만 터키의 수중에 들어갔고 이는 말타, 제노아, 베니스 같은 부유한 무역 도시들의 해상 교통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또한 교황청과 필립II세의 외가인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이슬람의 모욕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스페인, 베니스, 제노아, 교황청을 한 축으로 하는 신성동맹(Holy League)이 맺어졌다. 필립II세는 이복동생인 후안(Juan de Austria)으로 하여금 210척의 전함(Galley)으로 구성된 무적함대(Armada Invincible)를 지휘케 하여 그리스 서쪽 바다인 레판토--지금의 Navpatkos--에서 오토만 터키 함대와 싸웠다. 이 싸움에서 오토만의 함대는 동맹군보다 대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함대 사령관이 전사하는 등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레판토 해전

     당시의 해전은 육전의 연속으로 거대한 배에 많은 수의 병력을 태워 적선에 오르게 하여 육박전을 벌리는 전술이었다. 따라서 많은 병사를 태울 수 있는 큰 배(Galley)가 해전의 요체였다. 후일 영국은 함포의 사정거리를 늘려 적선이 접근하기 전 격침시키는 전술을 사용함에 따라, 1805년에 있었던 트라팔가 해전( the Battle of Trafalgar)에서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를 계기로 스페인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30년 전쟁

    중세의 스페인은 싸움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은 30년 전쟁(1618~48)의 주역이기도 했다. 이 전쟁은 유럽 여러 나라들이 뒤엉켜 싸운,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세력 간의 주도권 싸움이었다. 전쟁의 당사자는 스페인, 신성로마제국(독일), 교황청 등 가톨릭 세력과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화란, 보헤미아 등 프로테스탄트 세력이다. 전쟁을 간략히 기술하면 이렇다. 1618년 3월, 반종교개혁 세력인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황제 마티아스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보헤미아(현재의 체코) 귀족들이 봉기한다. 마티아스는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외증손자이다. 바로 일 년 뒤 마티아스가 죽자, 극단적 가톨릭 교도인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드가 보헤미아의 왕위를 계승한다. 이 왕위는 원래 보헤미아 성직자 회의가 선출하는 자리였다. 4일 후, 보헤미아는 페르디난드를 축출하고 그 대신 칼빈주의자인 프레데릭V세를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축출된 지 일주일 후 페르디난드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드II세로 즉위한다. 프레데릭은 군사력으로 자신의 왕위을 지키려고 하지만, 1620년 백산(White Mountain)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그 꿈이 수포로 돌아갔다. 합스부르크 스페인 군대가 개입하고, 이에 따라 오랜 기간 스페인에 저항한 네덜란드가 프레데릭의 편에 섰다. 당시 네덜란드는 남. 북으로 갈려 남부는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었고, 북부는 프로방스 연합으로 뭉쳐 독립을 위한 대 스페인 항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프레데릭은 돈으로 용병과 장군들을 사서 싸우지만 번번이 패한다. 1623년 슈타트론(Stadtlohn) 전투에서 바바리아 대공 맥시밀리안에게 프레데릭이 대패함으로서 신성로마제국과 가톨릭 세력이 결정적인 승리를 했다.

30년 전쟁 전투 장면

     싸움의 제2단계는 개신교 세력인 덴마크의 개입이다. 프레데릭의 패배는 덴마크 왕 크리스찬IV세의 개입을 불러온 것이다. 1625년 그는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했다. 이에 대항하여 보헤미아의 하급 귀족인 발렌슈타인(Wallenstein)이 대항하여 싸운다. 그는 투기로 부자가 된 사람이다. 1629년 그는 자신의 돈으로 용병을 사서 크리스찬과 싸워 그를 패배 시켰다. 다시 가톨릭이 승리를 한 것이다. 이 승리를 계기로 페르디난드II세는 가톨릭의 종교적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위하여 몰수령(Edict of Restitution)을 반포하였다. 이는 종교개혁의 결과 프로테스탄트, 수도원, 교구, 주교, 수녀원의 몫이 되었던 제국 내의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다시 가톨릭 교회의 소유로 한다는 칙령이었다. 이 칙령은 또한 모든 가톨릭 교회나 성직자들이 백성들에게 종교적 복종을 강요해도 된다는 허락을 했다. 또 루터파를 제외한 프로테스탄트의 모든 의식을 배척했다. 이는 분명 칼빈파를 배척하기 위한 칙령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여러 지역에 강화된 군사력을 주둔시켰다. 이는 토지 세속화의 최대 수혜자였던 프로테스탄트의 토지 및 토지 수입에 대한 실질적인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칙령은 법절차가 결여된 황제의 일방적인 행위로,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력 확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유럽 전역에 공포를 불러 왔다.

    이런 상황에서 스웨덴 왕 구스타브(Adolphus Gustavus)가 프로테스탄트를 보호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전쟁은 제3단계로 진입했다. 서기 1630년 그는 신성로마제국으로 쳐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 그는 프랑스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 브란덴부르크와 색슨(Saxony)을 동맹군으로 끌어들였다. 서기 1631년 그는 라이프치히 인근 브라이텐펠트 (Breitenfeld)에서 가톨릭 군대를 대파하고 이어 마인츠를 거쳐 바바리아의 경계선까지 진출했다. 이때 동맹군인 색슨 군대도 보헤미아의 프라하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1632년 구스타브는 라이프치히 인근 뤼첸(Lützen)전투에서 전사를 하였다. 이어 1634년 스웨덴 군대는 후일 페르디난드III세가 될 페르디난드II세의 아들에 의해 뇌르트링겐(Nördlingen) 싸움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싸움은 4단계로 들어간다. 스웨덴의 패전으로 동맹군인 부란덴부르크와 색슨 군대는 기세가 꺾여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프라하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대신 황제는 몰수령을 거두어 들였다. 독립을 위해 스페인과 싸우는 네덜란드와 독일과 싸우는 스웨덴을 오랜 세월 재정지원을 해온 프랑스는 직접 싸움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1635년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스페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12년에 걸친 스페인-프랑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30년 전쟁은 주로 신성로마제국 영토 내에서 치러졌다.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으로 1643년부터 협상이 시작되었다. 전투의 승패가 수시로 바뀜에 따라 협상 조건이 바뀌어 협상이 지지부진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챨스V세는 전쟁의 종료를 위해 프로테스탄트가 요구하는 협상 조건을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1648년 베스트팔리아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은 1차대전 후 베르사이유 체제가 들어설 때까지 약 3백년 가까이 유럽의 국제질서가 되는 것이다. 이 조약으로 인해 신성로마제국 및 스페인 등 주도적인 가톨릭 세력의 퇴조와 함께 루터 개혁 이래 계속되어 온 신.구교 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제 완전한 프로테스탄트의 자유가 확보되었음은 물론, 유럽 각 국가의 영토주권에 대한 로마교황청의 간섭에 종지부를 찍고 민족주의의 싹이 트게 되는 것이다.

    전쟁이 늘 그렇듯 전투와 흑사병, 기아 등으로 유럽 인구의 1/3이 죽었다. 특히 가톨릭 세력인 신성로마 제국(독일)의 피해가 커 남성 인구의 반, 총 인구의 30~40%에 해당하는 5~6백만 명이 죽었다. 전투가 주로 독일 영토에서 이루어졌고, 특히 스페인 원정군의 병력이 대부분 독일 현지에서 징병된 병사들로 충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피해는 게르만 민족의 자존심에 대한 상처로 인식되어, 후일 이 치욕을 만회하려는 히틀러의 복수심에 불을 지르는 심리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30년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신성로마제국

    고대 로마제국은 여러 차례 분리, 통합을 거쳐 395년 테오도시우스1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두 아들에게 각각 동로마, 서로마로 분리 상속된다. 476년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고, 동로마제국은 그 후 천 년을 더 존속하다가, 1453년 오토만 터키의 술탄 MehmedII세에게 멸망하였다. 이 때 메메드의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메로빙거 가문의 클로비스(Clovis; 466-511)가 프랑크 족을 통합하여 프랑크왕국을 열었다. 바로 메로빙거왕조(Merovingians)의 시작이다. 프랑크왕국은 지금의 벨지움, 네덜란드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클로비스의 지도하에 프랑크왕국은 옛 로마 영토인 골(Gaul, 현재의 프랑스)지방을 정복하여 후일 서유럽을 지배하게 될 제국의 토대를 세웠다. 그의 적대자들은 아리우스 가톨릭인데 반해 클로비스는 아타나시우스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서 후일 서유럽이 가톨릭 국가가 될 초석을 놓는다. 그가 죽자 그의 왕조는 아들들에게 분할되어 계속 팽창해 나아갔다. 7세기에 들어와 멜로빙거왕조는 기울기 시작하고 그 대신 피핀II세의 카롤링거(Carolingians)가문이 지도적인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피핀의 아들 칼 마르텔(Carl Martel)은 스페인의 아랍 세력을 물리치고, 라인 강 동쪽의 영토를 정복하였다. 이때부터 정복지에 수도원 건설이 시작되고 그 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이 사업의 주역은 바로 성 보니페이스(St. Boniface)로, 그는 초기 유럽 형성에 공헌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서기 751년 칼 마르텔의 아들 피핀III세가 메로빙거의 마지막 왕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니 바로 카롤링거왕조의 시작이다. 프랑크왕국을 거의 50년간 통치한 샤를르마뉴 대왕(742-814)은 피핀III세의 아들이다. 샤를르마뉴의 치세 기간 중에는 반란이라던가 내부의 저항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외치에 힘쓸 수가 있었다. 프랑크 왕국은 거의 전쟁을 위해 건국된 나라라고 할 수 있고 재정 조달과 영토 확장을 위해 끊임없는 전쟁을 치렀다. 샤를르마뉴는 이교도인 색슨족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거의 30년간을 싸웠고, 교황 하드리아누스I세 치세하의 로마에 침입한 롬바르드족을 물리치고 자신을 롬바르디아(현재의 스위스와 이태리 국경지역)의 왕으로 선언하기도 했다. 그는 778년 스페인에 원정했다. 그러나 그의 휘하 장수인 롤랑이 지휘하는 후미 부대가 바스끄 매복에 걸려 전멸하였음은 이미 전술한 바와 같다. 서기 796년 그는 아바르(Avar, 지금의 헝가리)를 정복, 멸망시켰다. 이 정복에서 전례 없는 엄청난 전취물을 획득했고, 이 전취물로 새로운 교회들을 건설하고 서부 독일 아헨(Achen)에 신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서기 800년 동로마제국의 레오IV가 사망하자 교황 레오III세는 대관식을 통해 샤를르마뉴에게 동. 서 로마황제의 칭호를 부여함으로써 서로마제국 멸망과 함께 사라졌던 황제라는 칭호가 재등장하였였다.

    샤를르마뉴의 아들 루이 경건왕은 무능력한 왕이었고, 840년 루이가 죽자 프랑크 왕국은 그의 아들 3형제로 분열되었다. 형제들 간의 싸움으로 왕국은 더욱 분열되고, 바이킹과 이슬람 그리고 동쪽으로부터 마자르(현재의 헝가리)의 침입을 받았다. 샤를르마뉴의 이 세 손자들 간에 3년에 걸친 유혈의 전쟁 끝에 843년 베르덩 조약(the Treaty of Verdun)이 체결되고, 조약의 결과 프랑크왕국의 땅은 동프랑크, 중프랑크, 서프랑크로 쪼개졌다. 이 가운데 서프랑크가 현 프랑스의 전신이다. 서프랑크 왕국은 아퀴테느, 브리타니, 부르군디, 까딸로니아, 프랑드르, 가스코니, 고티아, 일 드 프랑스, 뚤루즈 등의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서기 987년 카롤링거 왕조를 누르고 카페왕조(House of Capet)가 들어섰고, 카페왕조는 그 왕조에서 뻗어 나간 발로아 왕조와 부르봉 왕조를 거치면서 8백년간 프랑스를 지배했다. 서프랑크왕국에서 프랑스왕국으로 바뀐 시기는 명확치가 않다. 그냥 중세 봉건국가에서 현대국가로 서서히 진화해 나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카페 왕조의 등장을 그 바뀐 전환점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베르덩조약에 따라 동프랑크왕국은 루이 독일왕(Louis the German)에게 분할되었다. 서기 911년 카롤링거의 마지막 왕인 루이 아기왕(Louis the Child)이 죽은 후, 색슨지방의 귀족들이 군웅할거하는 가운데 오토(Otto)가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는 색슨(현재의  작센 ) 지방의 하르츠 산(Harz Mountains)에서 은광을 발견했는데, 이곳에서 생산된 은을 밑천으로 거대한 군대를 만들고 성채를 세워 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쪽의 마자르를 쳐부수고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샤를르마뉴와 마찬가지로 교회와 교구의 건설, 이교도의 개종에 진력하였고 귀족 세력을 억제하고 가톨릭을 보호 육성하는 데 힘을 썼다. 오토는 962년 교황 요한XII세로부터 대관식을 통해 신성로마제국의 초대황제가 된다. 그가 바로 오토대제로 불리는 오토I세이다. 이로 인해 중세 내내 교황과 신성로마황제와의 관계가 공고히 되는 것이다. 동프랑크왕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전신으로 신성로마제국은 바로 중세의 독일이다. 그 전성기에는 독일왕국, 보헤미아, 이태리, 부르군디에 걸친 중앙 유럽의 광활한 땅이 그 영토였다. 신성로마제국은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니었고, 따라서 황제의 직할령이 일부 있기는 했지만, 제국의 전 역사 대부분은 3백 개 이상의 공국, 영지, 백작령, 자유시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런 특성으로 정해진 수도가 없어 황제들은 이곳저곳 옮겨가며 살았고, 다만 합스부르크가는 비엔나를 그 수도로 삼았다. 이 같은 지역적 분열은, 1517년 루터의 종교 개혁이 있었을 때 북부는 프로테스탄트, 남부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분열을 초래한 원인이기도 했다. 이 분열은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제국에 파멸적인 피해를 가져왔고, 전후 프러시아, 바바리아, 색슨 등 수많은 독립 주로 갈라졌다. 서로마제국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던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했다. 그 후 민족주의 운동과 전쟁(오스트리아-프러시아 전쟁)을 거쳐 독일제국(German Empire; 1871-1918)이라는 이름으로 통일 된 것은 1871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해서였다. 그 후 1차대전에서 패한 독일제국은 1919년 의회제인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바뀌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1933년 히틀러의 제3제국이 들어서면서 붕괴했다. 히틀러의 제3제국은 바로 앞선 두 로마제국을 계승하겠다는 맹랑한 꿈의 나라였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30년 전쟁의 주역이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렇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돌프(Count Rudolf of Habsburg)가 제국의 영토인 지금의 오스트리아 및 스티리아(Styria) 땅을 점령 자신을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선언하고 그 땅의 상속자임을 선언한다. 선언만 하면 내 땅이 되는 시대였다. 서기1282년의 일로 바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탄생이다. 그 후 2백50년에 걸쳐 합스부르크는 결혼 또는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였다. 신세계, 부르군디(Brugundy), 네델란드, 까스띠야(스페인), 이태리, 헝가리, 보헤미아(현재의 체코)가 합스부르크의 수중에 떨어지고 이슬람 오토만 터키의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다. 합스부르크가는 찰스V세(CharlesV; 1500~58)때 최고의 전성기에 이른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아울러 스페인과 이태리의 왕이었다. 그의 치세 하에서 신대륙과 네델란드, 보헤미아가 합스부르크가의 영토가 되었다. 찰스V세는 까스띠야(스페인)의 가톨릭 이사벨라( Isabella Catolica) 여왕의 외손자이다. 이사벨라 여왕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토록 재정 지원을 한 여인이다. 그 가계의 사연은 이렇다.

    이사벨라 여왕은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넷을 두었다. 두 딸은 포르투갈 왕가로 시집을 보냈고, 왕자 후안은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황제 맥시밀리안의 딸 마가렛(Magaret)과 결혼한다. 후안은 왕위계승자였으나 일찍 죽었고 따라서 까스띠야 왕위는 이사벨라의 둘째 딸 후안나에게 계승되었다. 후안나는 합스부르크가의 맥시밀리안 황제의 아들인 필립 미남왕(Philip the Fair)에게 시집을 갔고, 그들의 아들이 바로 찰스5세이다. 이를테면 스페인 까스띠야왕국과 합스부르크가는 겹사돈이 되는 것이다. 스페인이 30년 전쟁의 한 축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후안나가 죽자 찰스5세는 신성로마제국은 물론 까스띠야(스페인)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탄생이다.

찰스V세

     스페인의 까를로스1세가 바로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의 찰스5세로 같은 사람이다. 그는 까스띠야 국왕이었지만 스페인어를 몰랐고 독일어만 알아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스페인의 근대화에 노력한 군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이태리 영토권을 둘러싸고 이태리 파비아(Pavia)전투(1525)에서 프랑스를 격파하여 밀라노를 수중에 넣고, 로마를 공격 하여 프랑스와 연합한 교황 클레멘트7세를 포로로 잡는다(1527). 그는 또 뮐베르크 전투(Mühlberg; 1547)에서 프로테스탄트 군대를 격파하여 종교개혁 이래 가톨릭의 열세를 만회하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어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1555)을 체결한다. 이 협정은 30년 전쟁으로 베스트팔리아 조약이 체결(1648)될 때까지 유럽의 국제 질서가 되는 것이다. 스페인 합스부르크가는 1700년 프랑스 루이14세의 손자인 앙주 공 필립(Philip of Anjou)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결과 필립V세의 이름으로 스페인 왕이 되면서 종말을 고하였다. 바로 스페인 부르봉왕가의 등장으로, 현 스페인 국왕 펠리페VI세는 부르봉왕가의 후손이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는 1918년 제1차세계대전의 결과 오스트리아가 패망할 때까지 6백여 년을 지속했다.

    여기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현재의 주권국가인 오스트리아를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라는 말은 현재의 오스트리아 땅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통치자 가문이었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에게 망한 다음 오스트리아 지역은 오스트리아 제국(Austrian Empire)으로 탄생했고,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전쟁(1866)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Austro- Hungarian Empire; 1867~1918)으로 재탄생했다. 오-헝가리제국은 1차대전의 패전국으로 멸망한 다음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가, 1938년 나치 독일에 합병되었다. 그 후 1955년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천년왕국 신성로마제국을 무너뜨린 나폴레옹도 몰락하여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모두 세상의 권세가들이 알아야 할 부질없는 인간사이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겸손일 것이다. 한편 이사벨라의 큰 딸 캐더린은 영국 헨리7세의 장남인 웨일즈공 아더에게 시집을 갔으나, 아더가 죽자 그의 동생 헨리8세가 형수인 캐더린을 아내로 맞는다. 캐더린은 아이들을 생산했으나 사산 또는 몇 개월 만에 모두 죽었고 다섯 번째 얻은 딸이 바로 후일 메리 여왕이다. 헨리8세는 후계자로 왕자를 원했지만, 캐더린으로부터 아들을 얻는 일이 불가능하자 앤(Anne Boulyn)과 결혼하기 위해 캐더린과의 이혼을 원한다. 그는 교황 클레멘트7세에게 캐더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해 줄 것을 요청하나, 교황이 그 요구를 들어줄 리도 들어줄 수도 없었다. 가톨릭은 이혼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황 클레멘트7세는 캐더린의 조카인 합스부르크 챨스V세의 구금 하에 있었던 것이다. 이일로 인해 헨리8세는 영국교회의 수장은 교황이 아닌 자신임을 선언한 수장령을 반포한다. 바로 영국 성공회가 생긴 계기이다. 후일 엘리자베스I세 여왕은 바로 앤 불린의 딸이다.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1701~14)은 30년 전쟁만큼이나 유럽의 판도를 바꾼 전쟁이다. 까를로스II세(Carlos II; 1661~1700)는 병약한 왕이었다. 그는 합스부르크가의 유전적 특질인 자신의 주걱턱을 슬퍼한 황제이기도 했다. 그의 치세기는 스페인의 사양기로 경제상황 역시 최악이었다. 이에 비해 프랑스는 태양왕 루이14세의 치하에서 세력이 확장되고 있었다. 까를로스II세의 부인은 프랑스 루이13세의 손녀로, 그들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왕이 될 가능성이 컸다. 이는 그가 사망한 후 지난 100년간 세계를 지배했던 스페인의 부와 권력이 어디로 귀속되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분쟁의 중심에는 프랑스, 영국, 네델란드가 있었다. 까를로스II세는 바바리아 대공 조셉 페르디난드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그가 곧 죽어, 프랑스 루이14세의 손자인 앙주 공(Duque de Anjou) 필립을 왕위계승자로 다시 지명했다. 그가 필립V세의 이름으로 스페인 왕이 되자 까스띠야는 그를 적극 환영한 반면, 까딸로니아(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발레아레스는 이에 반대하고 그 대신 합스부르크 대공 찰스를 지지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전쟁에 돌입한다. 까딸로니아가 자신들을 핍박한 합스부르크를 지지한 이유는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즉 프랑스 루이 14세는 프-스페인 통일 국가를 원했던 것이다.

까를로스II세

     한편 프랑스의 패권을 두려워한 영국과 네덜란드도 찰스 편에 섰다. 전쟁은 7년이나 계속되었고 프랑스가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했지만, 루이14세는 그의 손자가 스페인의 국왕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1714년 유트레히트(the Treaty of Utrecht)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네덜란드, 밀라노, 나폴리 왕국, 사르디니아를 합스부르크가에 넘기고, 영국은 메노르카, 지브롤터 그리고 신대륙에 대한 노예공급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전략적 요충지인 지브롤터가 영국의 영토가 된 반면 프랑스는 벨지움, 프랑슈 꽁떼를 잃었다. 프-스페인 통일국가라는 꿈도 사라졌지만 그 대신 스페인에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들어설 수가 있었다. 스페인에 부르봉왕가가 들어섬으로써 신대륙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전쟁의 결과 스페인은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그 대신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가 주도적인 국가들로 등장하는 것이다. 한편 까딸로니아는 합스부르크 편을 든 대가로 자치권을 상실했다가, 1931년 공화정부 하에서 자치권을 회복했으나, 프랑코 치하에서 다시 자치권을 상실한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 전쟁의 결과 필립V세는 까딸로니아, 발렌시아, 아라곤의 모든 기득권을 폐지하고 까스띠야에 복속시킴으로써 이베리아 반도는 명실상부한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 국명도 까스띠야왕국(Reino de Castilla)이 아닌 스페인왕국(Reino de España)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스페인의 진정한 통일은 18세기 초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의 스페인 점령

    1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로 정치, 문화, 예술에 있어 이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시대였다. 이제 바로크 스타일은 저물고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예술에 토대한 고전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벨라스케즈와 고야(Goya)의 등장으로 완벽성이라는 고전주의 양식이 깨지고 있었다. 고야는 까를로스IV세의 궁정화가였다. 그가 그린 왕족의 그림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한 부분을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오만한 모습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 교활한 눈매의 페르디난드 왕자, 국왕까를로스IV세의 미련한 모습 등 꾸밈없이 그대로 묘사한 고야의 화풍은, 그 후 사실주의 효시로 간주되며 또한 후일 20세기의 표현주의와 인상주의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그림에는 없지만 수상 고도이(Manuel de Godoy)는 왕족과 같은 대우를 받았던 사람이었고, 왕가 특히 왕비의 총애를 받았다.

까를로스IV세와 그의 가족

    프랑스 혁명 세력을 진압한 나폴레옹은 외부의 먹이로 스페인을 지목하게 된다. 이때 왕비 마리아 루이사는 고도이와 불륜 관계에 있었고, 왕자 페르디난드는 이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어 백성들의 동정심을 샀다. 따라서 페르디난드는 반역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처럼 내분에 휩싸인 스페인 왕가는 나폴레옹의 지지를 받기 위해 다투고 있었다. 또 개혁을 두고 국민 여론은 찬,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같은 스페인의 정정은 유럽의 맹주가 된 나폴레옹에게 매우 불리했다. 배후의 스페인이 안정되어야, 영국을 제압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이미 트라팔가 해전(1805)에서 프-스페인 연합 함대를 궤멸 시킨 바가 있었다.

                                                                   트라팔가 해전

     1808년 왕자 페르디난드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봉기가 있었고, 이에 힘입어 왕자는 페르디난드VII세로 등극했다. 이 해 5월에 마침내 나폴레옹이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의 압력으로 페르디난드가 실각했고, 이어 까를로스IV세가 복위되었지만 곧 나폴레옹의 형인 요셉I세(Joseph Napoleon Bonapart I)에게 양위를 했다. 수상 고도이는 죽음 직전 나폴레옹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영국을 겨눈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이 성공하려면, 영국과 스페인의 관계를 깨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고도이를 살려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고도이는 1년 전, 포르투갈 분할에 관한 퐁뗀블로조약(Treaty of Fontainebleau)체결 시 나폴레옹의 협상 파트너였다. 나폴레옹의 이 같은 무분별한 간섭은 스페인 농민들의 봉기를 불러왔다. 이는 대 프랑스 최초의 국민적인 항전으로 프랑스군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맞섰다. 고야의 그림 “몽끌로아 학살”은 나폴레옹 군대에 의한 마드리드 시민 학살을 묘사한 것이다.

몽끌로아 학살

    스페인 전역이 프랑스 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스페인의 각 지역에서는 나폴레옹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독자적인 자치회의(Juntas)가 조직되었고, 까디스(Cadiz)에는 전국의 자치회의를 통합한 스페인최고회의가 세워졌다. 까디스 최고회의는 인류역사상 미국 다음으로 현대식 의회였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지원을 받은 이 회의는 구체제하의 행정, 정치 시스템의 폐지 등에 관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함으로서 민주주의를 향한 거보를 내디뎠다. 1812년 헌법이라고 불리는 스페인 최초의 이 헌법은 법 앞의 평등, 중앙집권정부, 현대식관료제도, 세제개혁, 봉건특권 폐지, 개인의 사유재산 및 처분권 인정을 비롯해 주권재민, 의원의 불 체포 특권, 페르디난드VII세의 왕위 인정 등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헌법은 나폴레옹으로 인해 시행이 불가능하게 된다. 프랑스 점령군에 대한 저항은, 산발적이고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강력한 프랑스군에 비해 스페인 군대는 보잘 것이 없었다. 이때부터 비정규 소규모 전투원(Guerrillero)들의 매복 공격 등으로 대 프랑스군 투쟁이 시작되니 이것이 바로 오늘 날 게릴라전의 효시이다. 대부분의 게릴라들은 교육수준이 낮은 농민들이었다. 그들에게 프랑스는 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의 적으로, 혁명을 통해 가톨릭을 붕괴시킨 부패하고 잘못된 철학의 이단자였다. 따라서 그들을 죽이는 것은 하느님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1812년 요셉I세는 종교재판 폐지, 검열제도 폐지, 사냥과 어업에 관한 귀족의 특권 폐지, 농노제도 폐지, 의회에 의한 국왕의 권력 제한 등 광범한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같은 자유주의적 조치로 인해, 이후 신대륙에서도 혁명이 진행되어 많은 국가들이 독립을 하였다.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 산마르틴(San Martin), 오히긴스(Bernardo O'higgins) 등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 영웅들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계몽주의자들로서, 그들의 스페인 왕가에 대한 저항은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내전의 잉태

    1814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추방됨에 따라 스페인 독립전쟁도 종료되었다. 페르디난드VII가 복위되지만 스페인의 진정한 독립전쟁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프랑스의 압제가 이제 내부적인 갈등으로 바뀐 것이다. 나폴레옹에게 맞서 싸운 스페인 대중은 불행하게도 민족주의적이며 절대주의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프랑스는 절대주의를 붕괴시킨 혁명의 전파자로 따라서 배척 대상이었다. 그들은 교육수준이 낮고 광신적인 하급 성직자들의 지도하에 있었다. 한편 교육을 받은 고위직의 사제들이나 추기경은 페르디난드의 복위를 반겼지만, 의회는 그가 1812년 헌법을 준수한다는 선서를 하지 않는 한 국왕의 자리에 돌아 올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페르디난드는 구세력 대한 복종의 표시로 추기경의 손에 입을 맞췄는데, 이는 스페인 민주주의의 후퇴를 뜻하는 행동이었다. 곧이어 헌법이 폐지되고, 헌법 제정에 관련되었던 인사들이 추방되거나 투옥되었다. 이 같은 절대주의에로의 회귀는 국내외적으로 심각한 저항을 불러왔다.

    1820년에는 1812년 헌법 회복을 위한 군대의 반란이 있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군부는 자유주의적이었다. 반란 진압을 위해 왕실은 신성동맹(Holy Alliance)의 도움을 요청했다. 신성동맹이란 프랑스 혁명의 확산을 저지코자 1814년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간에 맺어진 연맹체였다.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왕정이 복고된 프랑스도 1815년 이 동맹에 가입했다. 스페인의 요청에 따라 1823년 프랑스 루이18세가 10만 명의 군대(Sons of St. Louis)를 보냈을 때, 절대주의 편향의 스페인 국민들은 이 침략자들을 반겼다. 또 스페인 왕실에 대한 저항은 투옥이나 망명을 뜻했기 때문에 많은 자유주의자들도 숨을 죽였다. 이제 페르디난드VII세는 군대와 자신이 전적으로 무시한 대중의 지지를 받아 계속 왕의 자리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위기는 자유주의자들로부터가 아닌 내부로부터 왔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의 억압정책은 약화되어 갔고, 특히 그의 부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자유주의적 배경을 가진 여인이었다. 왕위 계승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 문제는 바로 왕의 동생 까를로스(Don Carlos: 베르디의 오페라에 등장하는 인물과는 다른 인물임)와 공주(Isabella) 중 누가 적임자냐 하는 문제였다. 이는 표면적인 이유였을 뿐 본질적으로는 자유냐 전제냐 하는 문제였다. 종교재판과 절대군주제를 지지하는 우익은 까를로스를 지지했다. 왕이 죽고 어린 이사벨이 이사벨라II세의 이름으로 여왕에 등극하자, 까를로스는 바스끄와 까딸로니아 산악 지역을 근거지로 한 무장활동을 통해 이사벨라에게 저항했다. 바로 칼리스트(왕정주의자)들에 의한 제1차 칼리스트 내전(Carlist Wars)의 시작이다. 이제 백년 후에 있을 스페인 내전이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칼리스트 내전은 모두 네 번 있었는데 제1차(1832~39), 제2차(1846~49), 제3차(1872~76), 그리고 마지막은 프랑코가 주도한 스페인 내전(1936~39)이다. 제1차 칼리스트 내전 시 칼리스트는 산악지역에 웅거하며 자신들의 이념을 지키고자 했다. 까딸로니아에서는 그들이 우세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못하고 있었다. 왕비 크리스티나의 편에 선 군부도 빈약하여, 칼리스트를 제압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쨌든 이 때 만해도 자유주의적인 군부는 칼리스트들과 싸웠다. 싸움은 무자비 했다. 포로나 인질은 무자비하게 처형되었다. 자신과 이념이 다르면, 당연히 말살 대상이었다. 이 같은 무자비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이슬람 정복 이래 계속되어 온 스페인 사람들의 특성이었다.

    당시 바스끄나 까딸로니아 등 일부 북부 지역은 자유주의 헌법에 반대를 했고, 반면 마드리드는 자유주의자들의 본거지였다. 북부의 가톨릭 사제들도 칼리스트였다. 따라서 마드리드나 발렌시아, 바르셀로나에서는 격렬한 반 사제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제들은 모두 같은 부류로 간주되었다. 유능한 정치인이었던 로사(Martinez de Rosa; 1787~1862)는 이 같은 폭력을 근절코자 노력을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칼리스트들이 헌법을 부정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정부는 좌익 즉, 자유주의자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1812년 헌법으로 되돌아가는 일로 또한 교회, 성직자, 군인, 종교단체의 재산을 몰수 매각하는 것을 뜻했다. 이는 경제학자 멘디사발(Juan Albarez Mendizabal; 1790-1853)의 아이디어로, 아무런 활동 없이 죽어 있는 교회의 재산을 경제에 투입하면 경제를 활성화 시켜 소득의 재분배를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에서 그 예가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 아이디어는 제대로 이행될 수가 없었다. 처분 재산의 구매자들이란 대부분 귀족이나 대지주였고, 그 처분이란 이 재산들을 거대한 재산가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에 불과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 정책으로 인해 교회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칼리스트 전쟁의 결과 교회의 또는 교회에 대한 폭력이 점증해 갔다. 교회는 우익과 연대하고 있었다. 군대의 영향력도 증가하여, 군이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어린 여왕의 취약함은, 여왕을 보호한다는 군대의 좋은 명분이 되기도 했다. 섭정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모후는, 좌익과 우익 사이에서 우왕좌왕했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왕궁수비대의 상사출신 제대군인인 뮤뇨스(Agustín Fernando Muñoz)와 재혼을 함으로서 백성들의 존경심을 잃기도 했다. 이 일은 또 군인들의 신분상승 의지를 자극하여, 이후 군인들의 반란은 이때부터 싹이 텄다고 할 수 있다. 1840년, 베르가라 협정(the Vergara Agreement)을 통해 칼리스트 전쟁을 종결시킨 에스빠르떼로(Baldomero Espartero)가, 크리스타나의 승인 하에 국가수반이 되었다. 스페인 역사상 처음으로 장군 출신의 국가수반이 탄생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야전 경험이 있는 장군들은 이제 전국을 쟁패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1840~70 기간은 장군들의 권력투쟁 기간이었다. 여왕은 왕좌를 내놔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유능한 통치자가 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경박한데다 우둔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궁정의 고위직에 임명하고 똑똑한 장군들을 해임하는 게 일수였다. 그녀는 또한 광신적이어서, 러시아의 라스푸틴에 비견되는 수녀 파트로치노와의 밀착관계로 인해 백성들의 비난을 샀다. 장군들의 해임은 그들의 결속을 불러왔고, 그들과의 싸움인 알꼴레야 전투(Batalla de Alcolea; 1868) 에서 진 여왕은 왕위에서 내려와(1870), 치욕적이 망명의 길에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제3차 칼리스트 전쟁이다.

    이 승리로 자유주의적이건 보수건 모든 장군들은 자신이 국가를 통치할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자유주의자 프림(Juan Prim; 1814~70) 장군은, 이사벨라II세의 후임으로 이태리 사보이 왕가의 아마데우스(Amadeus of Savoy)왕자를 지지하니, 그가 바로 아마데우스I세(1870~73) 이다. 아마데우스I세는 1812년 헌법준수를 선서하고 왕위에 올랐다. 외국인으로서 그가 스페인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스페인왕가의 외가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외국인이었지만, 타락한 부르봉 왕가의 때가 묻지 않은, 스페인 불만 세력도 국왕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증명된 인물이었다. 여왕에 의해 해임되었던 장군 세르라노(Francisico Serrano; 1810~80)가 새 왕의 섭정이 되었다. 아마데우스는 그의 짧은 치세 기간 중 공화주의자들의 반란음모, 칼리스트들의 봉기, 쿠바 분리주의자들의 봉기, 그에 대한 암살기도 등 내외적으로 수많은 위기를 겪었다. 그가 의지할 수 있었던 세력은 진보주의자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입헌주의자와 왕정주의자들로 나뉘어 내분이 격화되고 있었다. 바스끄와 바르셀로나에서는 칼리스트들의 봉기가 있었고, 이에 대항한 공화주의자들의 봉기가 전국을 휩쓸기도 했다. 1873년 2월 육군 포병부대의 스트라이크가 일어나자 이의 진압을 명령한 후 그는 퇴위했다.

    한편 아마데우스를 지지했던 프림은 정계를 떠나며 당시 스페인이 안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이 나라의 적이 외국인이라면 내가 앞장서 싸우겠다. 그러나 적은 외국인이 아니라, 말과 글 그리고 군사력으로 백성을 괴롭히는 스페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조국을 위한다고 주장하지만, 어느 주장이 진정으로 조국을 위한 것인지 분간하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심각한 질병을 치료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 자신을 성찰케 하는 말이다.

    왕의 궐위에 따라 북부에서는 칼리스트들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칼리스트들은 스페인 사람들의 강제규범으로 가톨릭 교리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부 까르따헤나에서는 이혼을 허락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 역시 수락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페인은 내분으로 병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는 뒤떨어졌지만, 어쨌든 산업혁명의 결과 중산층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바스끄와 까딸로니아의 산업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마드리드-바르셀로나 간의 철도 부설(1848)과 노동조합이 설립(1869)되기도 했다. 1876년에 최초의 사립학교(Institution of Free Education)가 세워졌고, 이 학교는 뛰어난 스페인의 현대 지성들을 배출했다. 스페인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대부분 이 학교 출신들이다.

제1공화정

    또 스페인은 공화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왕의 퇴위에 따라 의회는 공화정(1873.2~74.12)을 선포한다. 바로 제1공화국이다. 휘게라스(Estanbislao Figueras; 1819~82)가 초대 공화국 대통령이 되었다. 당시의 의회는 급진주의자, 공화주의자, 민주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공화정 지도자들은 연방공화국을 구상하고, 이를 위해 연방헌법을 제정할 제헌의회를 생각했다. 그러나 급진주의자들은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생각했고 따라서 두 세력은 서로 대립했다. 대립의 결과 권력에서 밀려난 급진주의자들은 칼리스트 편으로 돌아섰다. 짧은 통치 기간 중 휘게라스를 비롯하여 네 명의 대통령이 바뀔 정도로 정치는 혼란스러웠다. 스페인 역사 상 최초의 공화정은 이처럼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과 폭력 속에 1874년 12월 29일 칼리스트인 깜뽀스(Martinez Campos; 1831~1900)장군의 의해 붕괴되었다.

왕정복고

    공화정의 붕괴와 함께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알폰소XII세(1857~85) 가 왕위에 오르니 그는 축출되었던 이사벨라II세의 아들이다. 그는 그가 다니던 영국 군사학교( Sandhurst Military Academy)에서 자신을 추대한다는 통보를 받고, “반드시 훌륭한 스페인 사람이 되겠다.” ,라는 소위 샌드허스트 선언을 했다. 이 선언은 공화주의자와 왕정주의 두 세력 간의 화해를 위한 제스처였다. 그의 치세 하에서 스페인은 과거의 혼란과 분열을 벗어나 평화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병영으로 돌아간 장군들은 독립을 요구한 쿠바와 필리핀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군대를 직접 지휘하여 왕정주의자들 반란에 종지부를 찍기도 했다. 그의 치하에서 정당들은 보수건 진보건 영국식의 신사적인 정책 대결을 했다. 1885년, 알폰소XII세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제왕으로서의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지만 타고난 재능과 망명 기간에 습득한 건전한 판단력 있었다. 관대하고 이해성 있는 성품은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아무런 신변 경호 없이, 콜레라가 창궐하는 지역의 백성들을 방문한 왕이었다. 사람들을 신중하고 겸손하게 대했으며, 국왕임에도 불구하고 특권의식이 없었다. 그의 짧은 치세 기간에는 국내외적으로 평온했으며, 재정지출을 억제하고 효과적인 행정을 폄으로서, 후일 파멸적인 미-스페인 전쟁을 치러 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가 죽은 후 6개월 뒤, 유복자가 태어나니 바로 알폰소XIII세(1886.5~1941.2)이다. 따라서 유복자의 어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섭정이 되었다(그녀는 이사벨라II세의 섭정이었던 마리아 크리스티나와는 동명이인임).

알폰소XII세 기마상(레띠로 공원)

 98운동

    스페인 역사에 있어 8은 액운을 뜻하는 숫자이다. 1588년은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에 궤멸적인 패배를 당하여 제해권을 잃었고, 1648년에는 웨스트팔리아 조약으로 캐토릭의 맹주자리를 잃었으며, 1808년은 나폴레옹의 지배 하로 들어간 해였다. 1898년의 스페인-미국 전쟁(Spanish-American War)은 스페인의 패배로 끝났고, 그 결과 쿠바,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이 미국으로 넘어갔다. 해전은 큰 배에 토대한 육전의 연속이라는 스페인의 구식 전술이 미국의 장거리포에 토대한 새로운 전술에 진 것이다. 패전은 군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가져왔고,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움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소위 “98세대(Generation of 98)" 라고 불린,  ”새로운 스페인 정신 운동“을 불러왔다. 이 운동은 스페인의 자연, 문명, 스페인 민족, 정부 등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을 통한 정신 개혁 운동이었다. 문필가들이 중심이 되었던 이 운동은 또한 정치적 운동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 운동의 중심에 섰던 마드리드 대학의 리오스(Francisco Giner de Rios; 1839~!915)는 칸트 철학에 토대한 도덕의 회복, 인도주의, 개혁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개혁을 앞세운 그의 주장은 교회와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을 불렀다. 반교회주의에 앞장에 섰던 그는 교회의 미움을 받아 결국 교단에서 쫓겨났다. 왕정과 국가, 교회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 그는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새로운 교육을 위한 자유교육회(Institucion Libre de Ensenañza)를 창립했다. 그들은, 캐토릭 지배하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비판 능력을 상실한 암기식 위주의 교육이야말로 바로 스페인이 당면한 모든 문제들의 근본 원인이라고 했다. 당시 스페인의 문맹률은 70%였다. 학생들은 수업료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자유교육회는 초, 중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무료교육을 주장했다. 자유주의정부가 들어서면서 리오스 교수는 복직을 했고, 자유교육회의 명성과 영향력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더 좋은 교육을 받기 위해 많은 학생들이 해외로 유학을 하던 시대였고, 따라서 이에 대한 대책으로 대학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1907년 교유개혁을 위한 교육개혁위원회(Junta para Ampliacion de Estudios)가 설치되었다. 스페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까할(Santiago Ramon y Cajal; 1852~1934)교수가 이 위원회에 합류했다. 삐달(Ramon Mendez Pidal; 1869~1968)교수에 의해 스페인 역사학회가 설립되었고, 대학 기숙사의 건설과 더불어 학생-교수간의 관계가 전례 없이 긴밀해지기도 했다. 이 때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될 두 인물 오르떼가(Jose Ortega y Gasset; 1883~1955)와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 1864~1936)가 등장한다. 실존주의자 오르떼가는 마드리드 대학의 철학교수였다. 그에 따르면, 스페인이 당면한 문제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엘리트의 부재라고 했다. 그는 도덕을 상실한 테크노라트들이 지배하는 스페인 사회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우나무노 역시 실존주의자였다. 그에 따르면, 서구인들은 영혼을 상실한 유물론자들인데 반해 스페인 사람들은 인간 존재에 관한 불안감 때문에 그 인생관이 “전부냐 아니냐(All or nothing)” 라는 것이다. 중간 지대가 없이 흑백논리만 있다는 것이다. 그는 리베라 정부에 반대를 하였기 때문에 마드리드 대학 교수직에서 쫓겨나 파리로 망명했다. “98세대” 가운데, 후안 라몬 히메네스(Juan Ramon Jimenez; 1881~1956)와 니카라과 출신의 루벤 다리오(Ruben Dario; 1867~i916)같은 시인들은 후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사람들이다.

    음악에 있어서는, 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 1867~1916), 파야(Manuel de Falla; 1876~1946)가 이 시대에 출현했다. 시인 로르까(Garcia Lorca;1898~1936)는 그라나다 출신으로, 안달루시아의 삶이 그가 노래한 주제였다.

마누엘 데 파야

    쑬로아가(Ignacio Zuloaga; 1870~1945)는 강렬한 색채로 안달루시아의 삶을 그린 화가이다. 말라가 출신의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는 바르셀로나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고, 건축가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의 영향을 받은 달리(Salvador Dali; 1904~89)와 미로(Juan Miro; 1893~1983)의 명성은 이미 해외에까지 알려지고 있었다. 가우디가 설계한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성당은 신고딕Neo-Gothic 양식의 건물로 1882년에 착공되었고, 2026년에나 완공 예정이다. 바르셀로나에 건설 중인 이 건물은 아직 미완성이지만 이미 유네스코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내부 천정

    1920년대에 스페인을 방문한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모옴(William Sommerset Maughom; 1874~1965), 브레난(Gerald Brenan; 1895~1987) 같은 작가들은, 유럽인들이 잃어버린 삶의 강렬함을 스페인 사람들에게서 찾은 작가들이다. 1차대전 중 스페인은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전쟁이 직접적인 피해가 없었고 오히려 이 기간은 전쟁물자 공급 국가로서, 경제적 번영을 이룬 시기이기도 하다.

모로코 내전

    1925년에는 모로코 독립군의 봉기가 있었다. 탱크와 비행기로 무장한 50만 명의 스페인-프랑스 동맹군은 독일제 독가스로 모로코 독립군을 공격했다. 이때의 지휘관이 후일 총통이 된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였다. 그는 32살에 장군이 된 사람이었다. 이 무자비한 탄압으로 사회당과 특히 독립을 원하던 까딸로니아가 군부를 맹렬히 공격했고, 이 공격은 이후 까딸로니아와 군부가 대립하게 된 원인이었다. 모로코 북부 지중해 연변의 세우따와 멜리야(Ceuta and Melilla)는 이미 15세기말에 스페인이 정복한 땅이다. 1912년에는 훼쓰조약(Treaty of Fez)에 따라 모로코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는 대신, 스페인은 모로코 북부 전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모로코 독립 운동가들의 저항에 따라, 1919년 스페인 군대는 사령관 베렝게르(Damasco Berenguer; 1873~1953)의 지휘 하에 이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있었다. 그 후 1921년 7월에는 실베스트레(Fernandez Silvestre; 1871~1921)가 지휘하는 토벌군과 모로코 독립 지도자 크림(Abd el Krim; 1882~1963)이 지휘하는 게릴라 간에 전투(Battle at Annoual)가 있었고, 이 전투에서 실베스트레는 궤멸적인 패배를 하여 자신은 물론 1만 명이 넘는 스페인군이 전사했다. 이 때 알폰소XIII세는 엘시드(El Cid)의 묘지 이장 식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이 패전 소식은 청천벽력이었다. 1926년 크림은 프랑스군에 항복하여, 인도양 상의 레우니온 섬(Reunion Island)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영웅적인 이야기는 영화와 뮤지칼( The Desert Song)로 만들어져 뉴욕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사막의 노래” 중 한 장면

 독재정부의 등장

    1923년,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의회는 군부와 알폰소XIII세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군부의 부패가 도마 위에 올랐다. 이에 반발한 바르셀로나 주둔군 사령관 리베라(Miguel Primo de Rivera; 1870~1930)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왕은 그를 수상으로 임명하고 독재 권력을 행사해도 좋다고 했다. 리베라의 독재가 시작되었다.

알폰소13세(중앙)와 리베라(앞줄 맨 왼쪽)독재 내각

    1차대전 이후의 자유주의적 정부에 대한 사람들의 실망감이 팽배하던 시대였고, 많은 사람들은 머지않아 파시스트 아니면 공산주의식 독재가 닥쳐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르떼가 같은 지성인들조차 정치적 분열에 좌절한 나머지,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을 바랐다. 그래서 리베라의 독재정부가 자리를 잡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리베라는 기술 관료들로 구성된 내각으로 개편했고, 재무상 소뗄로(Jose Calvo Sotelo; 1893~1936)에 의한 세제개혁과 철도국영화가 단행되었다. 새로운 수력발전소의 건설에 따라 철도의 전철화도 이루어졌고, 현대식 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대중교통 수단으로서 철도와 버스가 등장하기여 도시와 농촌 간 신속한 이동이 이루어졌다. 자동차 운전이 유행되었고 비행기도 도입되어, 1926년에는 프랑코 장군의 동생인 라몬 프랑코가 마드리드-부에노스아이레스 간 비행에 성공함으로서, 최초의 남대서양 횡단 비행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은 스페인에게도 재앙이었다. 경제 악화라는 결정타를 맞은 리베라 정부는 학생이나 인텔리 계층과의 긴장관계로 들어갔다. 리베라 정부는 많은 교수들을 해고했다. 지식인들은 리베라의 쿠데타로 정치활동을 중단했던 재야의 구 정치인들과 연합했고, 리베라가 추방했던 망명 정치인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1929년 7월 보수층 지도자 게르라(Jose Sanches Guerra; 1859~1935)가 돌아왔지만 곧 군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보수주의자였지만 독재에 반대한 입헌 주의자였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리베라는 군부의 지지를 요청했지만 장군들은 냉담했고, 지금까지 그를 지지했던 알폰소XIII세는 그의 사임을 요구했다. 그는 곧 사임하여 파리로 망명했고, 6주 후 그곳에서 죽었다.

    리베라의 후임으로 국왕은 장군 베렝게르(Damasco Berenguer; 1873~1953)를 새 내각 수반으로 지명했다. 베렝게르는 구정치인들에게 지지를 호소했지만, 그들은 국왕이 독재정권과 야합했다는 이유로 협조를 거부했다. 자유주의자들이나 보수주의자들이나 모두 새로운 총선을 요구했다. 스페인은 마땅히 공화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1930년 8월, 북부 도시 산세바스챤에서 공화주의자들의 모임이 있었다.

    진보주의자 레룩스(Alejandro Lerroux; 1866~1949), 공화주의자로 전향한 캐토릭 교회 지도자 사모라(Niceto Alcala Zamora; 1877~1949), 언론인 아쓰나르(Manuel Aznar; 1894~1975), 그리고 공화파에 가담한 장군들이 이 모임의 참가자들이었다. 그들은 공화정을 수립하겠다는 산세바스챤협약(Pacto de San Sebastian)을 발표했고 이에 따라 중앙혁명위원회(Junta Central de Revolucion)를 설치했다. 나중 이 위원회는 제2공화정의 임시정부가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노동조합(UGT: Union General de Trabjdores)과 무정부주의자노동조합(CNT: Confedracion Nacional de Trabajo)은 보다 더 강력한 혁명을 주장하여 이 협약에 반대했다. 이제 스페인 전 노동자들이 전투화 되어 가고 있었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던 두 장군 몰라(Emilio Mola; 1887~1937)와 야노(Gonzalo Queipo Llano; 1875~1951)는, 신뢰를 잃은 왕과 조국 중 택일을 해야만 할 운명이었다. 12월에는 공화파 편에선 하카(Jaca) 주둔군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고, 지휘자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공화국 건설이라는 공화파의 태도는 이제 분명해진 것이다. 오르떼가 이가세트를 비롯한 지식인들도 공화국 선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수상 베렝게르는 총선을 약속했지만, 부정선거를 두려워 한 정치인들은 그 진정성을 믿지 않았다. 지지획득에 실패한 베렝게르는 사임을 했고 그의 후임으로 아쓰나르(Juan Bautista Aznar; 1860~1933)가 새로운 수상이 되었다(1931). 그는 구정치인으로 그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격렬한 봉기가 일었다. 마드리드에서는 시위학생들에 대한 경찰의 발포가 있었다. 아쓰나르는, 이 같은 폭력을 제거하려면 선거를 통한 강력한 왕정복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제2공화정

    1931년 4월12일 지방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의 결과 공화파가 승리함으로서, 이틀 후 제2공화정이 선포되었다. 사모라(Niceto Alcala Zamora; 1877~1949) 임시내각이 들어섰다. 바르셀로나와 세비야에서 공화정 지지선언이 있었다. 같은 날 저녁, 마드리드 노동자들의 축제가 있었고, 태양의 광장(Puerta del Sol)에서는 왕정 폐지와 공화국 선포를 지지하는 군중들의 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부유층은 폭동을 두려워했고, 군부는 시위 군중에 대한 발포를 검토했다. 다음 날 아침 왕정파 정치인, 교수들, 언론인들이 회합을 가졌고, 왕궁에서도 대책을 협의하고 있었다. 결론은 왕의 하야였다. 이에 따라 알폰소XIII세는 군주제에 관한 의회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잠시 스페인을 떠나 있겠다고 선언했다. 다음날 그는 까르따헤나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로 망명했다. 임시 정부 수반인 사모라가 국왕이 망명했음을 발표했다. 4월 15일, 왕비는 왕자 후안(Infante Don Juan; 1913~93)을 비롯하여 남은 가족을 데리고 마드리드를 떠났다. 그 후 1941년 알폰소XIII세는 로마에서 죽었다. 죽기 전 그는 왕자 후안을 왕위계승자로 지명했지만 후안은 왕위 계승을 못하고 그의 아들이 계승하니, 바로 현 스페인 국왕인 후안 까를로스I세이다. 왕정복고가 가능했던 것은 프랑코가 정한 왕위계승법 때문이었다.

    사모라 내각은 산적한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었다. 총선 전에 이를 해결해야 했다. 먼저 새로운 헌법 제정을 하려면 이를 위한 의회를 구성해야 했다. 산업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과 토지개혁의 필요성도 대두되었다. 노동자들은 더 많은 보수와 근로조건의 개선을 요구했고, 혁명과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같은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20세기 문명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의 발전은 더 많은 물자의 생산을 가능케 하여 부유층은 더 많은 것을 손에 넣을 수가 있었지만, 이에서 소외된 빈곤층은 좌절감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20세기 문명은 또한 “함께 한다는 공동체 의식”을 깸으로서, 부유층과 빈곤층 간의 연대감이 없었다. 부유층은 빈곤층에 무관심했고, 빈곤계층은 정당한 자기들의 몫을 요구했으며,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은 그 몫을 약속했던 것이다. 한편 군대는 특권층으로 규모가 비대하고 정치적이었으며, 그 유지에 엄청난 돈이 필요한 조직으로, 이 또한 개혁 대상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또 캐토릭 교회의 권력과 부야 말로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보았다. 까딸로니아 독립 문제도 있었다. 이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사모라 임시정부는 총선 전에 군대와 교회, 부유층의 특권 폐지에 손을 대기에 이른다.

    1931년 5월에 들어, 공립학교의 종교교육이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똘레도 대주교가 전국의 가톨릭 교도들에게 공화정부에 대항하여 봉기할 것을 촉구했다. 바티칸도 제2공화정을 부정했다. 마드리드에서는 공화파 민병대와 가톨릭 신도들 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성난 군중들이 성당들을 공격, 파괴하였다. 성당 공격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폭동이 확대되자 계엄령이 선포되고, 그 진압을 위해 민병대와 군대가 투입됐다. 이제 신생공화국과 늙은 가톨릭 교회 간에 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폭력을 동반한 파업이 전국적으로 발생하고, UGT와 CNT는 경쟁적으로 농업 노동자의 조직화에 나섰다. 경제의 불확실성에 따라 뻬세따화의 급격한 평가절하와 부유층의 재산 해외 반출이 이어졌다.

    군 개혁을 위해 아싸냐(Manuel Azaña; 1880~1940)가 국방상이 되었다. 그는 군 출신이 아니었지만, 역사 공부를 통해 군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군대에 대한 개혁이 시작되었다. 군은 16개 사단 12만 명으로 2만5천 명의 보직 장교와 80명의 장군이 있었다. 그는 8개 사단으로 축소하고 장교들에게 퇴직을 권유했다. 그는 지역사령관 제도를 폐지하고, 모로코 패전에도 불구하고 독재체제 하에서 승진한 장군들의 진급을 재심사했다. 많은 장교들이 퇴직을 했지만, 또 많은 장교들이 아싸냐의 적대자가 되기도 했다.

    1931년 6월에 총선이 있었다. 임시정부는 공화파가 승리하여 의회제도가 정착하기를 바랐다. 23세 이상의 모든 스페인 국민은 투표권이 있었다. 전국적으로 50개의 정당이 후보자를 냈다. 투표 결과 총 457석 가운데 공화파와 사회주의자들이 250석 이상을 얻었다. 이 가운데 사회당(PSOE; Partido Socialista Obrero Español) 119석, 공화파 80석, 까딸로니아 사회당 37석, 갈리시아 20석 그리고 기타 소규모의 좌익계 정당들이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레룩스 급진당(Lerroux's Radicals)은 97석을 차지함으로서 오르떼가 이가세트, 우나무노, 마라뇬 같은 지식인들의 의회 진출이 가능해지기도 했다. 보수 측은 40석을 얻는데 불과했다.

    새 의회는 프랑스 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 개회되어 “1931년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초안은 “모든 계층의 노동자 공화국”을 선포했다. 새 헌법은 단원제를 택하고, 인구 5만 명 당 임기 4년의 의원, 비례대표제 도입, 의회 의원과 선거인들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한 임기 6년의 대통령 선출, 대통령의 의회 해산권과 의회의 대통령 불신임권, 지방자치 및 지방의회의 구성, 인권 보호를 위한 헌법재판소, 국방, 외교, 금융제도, 지역 간 상업의 진흥, 중앙정부에 의한 종교적 관행의 통제 등 민주공화국의 헌법으로서 골격을 갖추고 있었다. 정교 분리와 사제의 국가공무원 신분 폐지 조치도 단행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헌법 초안에 반대한 사모라가 사임했고, 그의 후임으로 국방상 아싸냐가 수상이 되었다. 아싸냐는 스페인이 더 이상 가톨릭 국가가 아님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가톨릭 교회를 향한 일반시민들의 예배 행렬이 멈추게 되었다. 학교로부터 십자가가 철거되었다. 교사가 훈련되는 대로 교단으로부터 캐토릭 신부들을 추방할 예정이었다. 학교 건축이 우선되어, 수천 개의 학교 건물이 새로 건설되었다. 여름방학이면 대학생들이 외딴 농촌으로 파견되어 계몽운동을 펴기도 했다.

    1931년 12월 새 헌법에 관한 의회의 비준이 있었다. 아싸냐는 화해의 제스처로 사임했던 전임 수상 사모라를 제2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932년, 의회는 까딸로니아의 자치를 인정하여 자치정부와 자치의회를 갖도록 허락했다. 이 때 바스끄와 갈리시아는 자치 정부 획득에 실패했는데, 특히 바스끄는 마드리드 중앙정부의 종교정책에 반대하여, 종교자치권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토지 문제는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1931년 에스뜨레마두라 지역에서 네 명의 민병대원이 농부들에게 살해되어 사지가 절단되는 사건이 있었다. 범인들이 체포되어 종신형에 처해졌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민병대장 산후르호(Jose Sanjurjo; 1872~1936)장군이 반정부 선언을 했고 이로 인해 그는 투옥되었다. 1932년 의회 내의 이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토지개혁법이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토지개혁위원회는 대규모 농지(Latifundium)에 대한 몰수를 단행했다. 유상 몰수였지만 보상금 재원의 부족으로 농지의 재분배를 끝내려면 수백 년이 걸릴 터였다. 당시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농민은 2백만 명이 넘었고, 이 숫자에 여성 농업인구는 포함되지 않아 실제 숫자는 훨씬 더 많았다. 농지의 재분배가 지지부진함에 따라, 안달루시아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과 소작 농민들의 소요가 계속되었다. 마드리드 정부는 진압경찰 부대를 창설하여 민병대를 도와 진압토록 했다. 1933년 들어 안달루시아, 아라곤, 바르셀로나에서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한 소요가 일어났고, 진압 과정에서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다쳤다. 소요는 전국적으로 번졌다. 까디스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이 두 명의 민병대원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그 보복으로 범인들이 은신한 농가에 민병대가 불을 지름으로서, 범인은 물론 6명의 가족이 불타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마을의 또 다른 열두 명의 농부가 즉결처분되기도 했다. 수상 아싸냐의 지시라는 말이 떠돌았다. 아싸냐 정부는 대중적인 인기가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종교교육에 대한 공세를 계속했다. 1933년에는 캐토릭계 초, 중등학교들을 폐쇄한다는 법이 제정되었다. 신임 똘레도 대주교는 공화정부에 관대한 사람으로 신도들에게 공화정부를 따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법이 시행되기도 전에 사모라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했다. 11월에 또 총선이 실시되었다.

    선거의 결과 보수주의자, 왕정주의자, 전통주의자들이 공화파를 누르고 승리했다. 캐토릭 지도자 로블레스(Jose Maria Gil Robles; 1898~1980)가 스페인자주권연맹(CEDA: Confederacion Espanola de Derechas Autonomas)을 이끌고, 가톨릭 교도가 대부분인 여성표의 힘을 얻어 의회의 다수 석을 차지했고, 여당인 사회당(PSOE)이 3위를 차지하므로서 아싸냐의 좌익 공화정부는 뿌리째 흔들렸다. 곧 이어 의회로부터 공화파 의원들이 사퇴가 있었다. 우익의 승리는 좌익의 봉기를 불렀다. 까딸로니아 극좌 및 사회주의자들이 파업을 일으켜 전국 노동자들에게 합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중산층의 지지가 없었고 노동자들의 무장이 금지되어, 이 파업은 실패로 끝났다. 마드리드를 비롯한 기타 지역에서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로 소요가 소강상태였지만, 그러나 아스뚜리아스의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은 주수도 오비에도를 비롯하여 기혼(Gijon)항을 휩쓸기도 했다.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은 오비에도에 새로운 지방정부를 세우기도 했다. 폭도들에 의한 약탈이 자행되었다. 마드리드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다. 진압 부대는 모로코 병사가 포함된 모로코 주둔 스페인군으로, 프랑코가 지휘하는 정예부대였다. 상호 간에 학살을 자행했다. 1천여 명의 사람들이 죽고 나서 질서가 회복되었다. 좌익과 자유주의자 측 언론은 모로코 병사들의 야만성을 폭로했고, 우익 언론은 좌익에 의한 경찰과 신부 학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스페인 전역에 계엄령과 함께 언론 검열이 실시되었다. 폭동과 파업을 주동한 혐의로 수상 아싸냐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혐의가 없어 석방되었고, 반면 우익을 달래기 위해 민병대장 산후르호 장군이 석방되었다. 그렇지만 수천 명의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석방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까딸로니아 정부 수반 꿈빵스(Lluys Companys; 1882~1940)와 그의 각료들도 수감되었다. 까딸로니아와 아스뚜리아스 지도자들에 대한 재판에서 수천 명이 유죄판결을 받아 투옥되었고 이는 좌, 우익의 간극을 더 벌려 놓는 계기가 되었다. 군부로부터 자유주의적인 장군들이 실각하고, 프랑코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1935.5)되었다.

    농촌에서는 농업노동자 임금이 삭감되었지만, 대 지주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농장을 떠났다. 농산물 시장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불황에 시달렸다. 농업에 냉담했던 보수정치인들조차 이 같은 상황을 우려했다. 도시에서는 여론이 갈라지고, 시민들 간에 격렬한 논쟁이 일었다. 좌, 우익 양측의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서로 싸우다 죽었다.

소요와 주검

 

    한편, 공산당과 사회당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공화파와 절연한 사회당수 까바예로(Francisco Largo Caballero; 1869~1946)는 혁명을 부추기고 있었다. 좌파들은 무장을 하고, 이에 대항하여 극우세력은 파시스트 이념을 선전했다.

 랑헤 등장

    1933년 전임 독재자 리베라의 아들인 호세 안토니오(Jose Antonio Primo de Rivera; 1903~36)가 파시즘과 나치즘을 결합한 이념에 토대한 스페인 팔랑헤(Falange)당을 창설했다. 열렬한 파시스트들이 그의 휘하로 모였다.

호세 안토니오

     그는 국가의 재건과 기업 사회(Corporate Society)를 내세웠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의사 결정에 기업이 간여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의회에서 한 석을 얻고, 대사회주의자대책회(Junta Ofensiva Nacional Socialista )와 연대했다. 이에 따라 소뗄로(Jose Calvo Sotelo; 1863~1936)같은 왕정주의자들이 해외 망명에서 돌아왔고, 왕정주의자연합 같은 단체가 공개적으로 조직되기도 했다. 북부 나바르라의 산악지대에서는 붉은 베레모의 왕정주의자들이 군사훈련에 돌입하기에 이르렀다. 내전이 서서히 구체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정치적 긴장에도 불구하고 문화생활은 하루하루 번영하고 있었다. 시인 로르카(Garcia Lorca; 1898~1936)의 피의 결혼식(Bodas de Sangre), 예르마(Yerma), 알바가(Casa de Bernarda Alba)등 3부작 희곡이 전국적으로 공연되었다. 국제적인 명성의 영화감독 부뉘엘(Luis Buñuel; 1900~83)이 만든 “빵이 없는 대지(Las Hurdes: Tierra sin Pan)”는 교회와 부자의 탐욕을 그린 영화이다. 그는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초현실적인 영화를 만들어 사람들을 열광시키기도 했다. 첼리스트 카잘스는 바르셀로나 교향악단의 재정 지원자였고, 우나무노나 이가세트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스페인 문화계는 풍부한 토양을 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나는 문화의 이면에서는, 스페인의 고질적인 질병인 빈부격차가 더욱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대통령 사모라는 민주주의가 오직 비상상태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현실에 절망하고, 분열을 부르는 좌익 또는 우익을 선택하는 대신 안정적인 중도 노선을 열망했다. 1935년 급진주의자들이 관련된 금융사고가 발생하자, 다시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치르게 되었다. 사모라는 좌도 우도 아닌, 비록 금융 사고에 관련은 되어 있지만, 중도 노선의 라디칼(los Radicales)이 승리하기를 바랐다.

 인민전선과 국민전선

    선거를 앞 둔 1936년 1월, 사회주의자, 공화좌파, 공산주의자들이 합세한 인민전선(Frontera Popular)이 창설되었다. 빛나는 언변의 까바예로와 아싸냐가 그 대변인이 되었고 민주주의의 지속과 토지개혁, 근로자를 위한 정책, 교육과 일상생활로부터 캐토릭 교회의 배제, 1934년 10월 사건으로 투옥된 인사들의 석방을 약속했다. 이에 대항하여 우익은 국민전선(Frontera Nacional)을 결성하고 대대적인 자금 모금에 나섰다. 가톨릭 지도자 로블레스는 사회주의적 캐토릭주의를 표방하고, 적색혁명은 물론 왕정의 부활도 반대했다. 2월6일의 총선 결과 인민전선 4백7십만 표, 국민전선 4백6십만 표였다. 이처럼 인민전선이 간발의 승리를 한 것은, 구속인사 석방을 약속 받은 무정부주의자들의 지지표 덕택이었다. 우익은 승리를 기대했으나 진 것이다. 득표율에 따라 473석의 의석 가운데 인민전선 271석, 우익 137석, 중도 40석, 그리고 나머지는 바스끄 민족주의자를 비롯한 지역정당에 배분되었다. 인민전선은 다시 여당이 되었고, 이에 대해 중도 및 우익 측은 부정선거라고 주장했다.

    선거 관리 내각이 해산하고 새 의회가 소집되었다. 아싸냐가 신임 수상이 되어 좌파의 공화 내각이 구성되었다. 아싸냐는 좌파의 폭력 진압을 위해 취했던 비상사태를 해제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3만 명에 이르는 구속인사를 석방했다. 까딸로니아 수반인 꿈빵스도 석방하고 그의 사회주의 자치정부도 인정했다. 그는 또 안달루시아와 엑스뜨레마두라 지역의 농지개혁에도 착수했다. 이와 함께 공화정을 전복하려는 혐의가 있던 장군들을 해임하기도 했다. 이때 프랑코도 해임되어 까나리아 군도로 추방되었다. 이어 공화정에 충성하는 장군들을 주요 보직에 앉혔다. 이에 따라 좌우 대립이 다시 시작되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모방한 군중들의 시가행진이 연이었고, 스페인 전역에서 좌, 우, 중도 간에 정치적 보복행위가 계속되었다. 마드리드에서는 팔랑헤 학생당원들이 사회당의원을 암살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사회당원들은 왕정주의자 깔보 소뗄로의 신문사와 교회들을 공격, 파괴하기도 했다. 아싸냐는 팔랑헤당을 불법화하고 그 당수 호세 안토니오를 체포했다. 그는 1936년 공화파에 의해 총살되었다. 프랑코는 그를 구할 수 있었음에도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그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국립묘지(Valle de los Caidos)에 프랑코와 함께 나란히 누워 있다.

    아쌰냐는 토지개혁안, 학교 건설, 지방정부에 대한 보다 큰 권한 위임, 바스끄 자치 인정, 1933년 이래 정치적 이유로 해고당한 근로자의 재임용 등에 관한 법률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공화정부에 대한 우익으로부터의 지지를 받기 위해 토지, 은행, 산업의 국유화를 하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했다. 사회당과 공산당에 대해서도 혁명을 생각지 말고 그의 온건 정책에 협조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토지가 없는 농민들이 대규모 농장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언론통제로 인해 이를 알 수가 없어, 국민들은 그의 온건 정책으로 모든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어 가고 있다고 믿었다.

    헌법의 규정에 따라 의회는 사모라를 대통령직에서 축출했다. 두 번씩이나 의회를 해산한 게 이유였다. 그의 뒤를 이어 아싸냐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공화파와 좌익으로 구성된 내각이 부르주아 체제하에서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아싸냐는 온건 사회주의자인 쁘리에토(Indalecio Prieto; 1883~1962)를 수상으로 생각했지만, 여당인 사회당이 받아들이지 않을 터였다. 사회당 당수 까발예로가 쁘리에토를 비난했는데, 5월 노동절 행사에서 쁘리에또가 좌익의 폭력을 비난하고, 그 같은 폭력은 프랑코 주도하의 팔랑헤 독재를 부를 것이라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싸냐는 공화파의 끼로가(Santiago Casares Quiroga; 1884~1950)를 수상에 지명했다.

    정치적 폭력은 계속되었고, 매주 노동자들에 의한 파업이 일어났다. 6월 들어 7만 명의 마드리드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고, 이로 인해 전 도시가 마비되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임금 인상과 혜택을 약속하고는 공장을 폐쇄했다. 약속을 지키기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수출이 감소하고 국제시장에서의 경쟁력이 떨어졌다. 교회에 대한 산발적인 공격이 재개되자, 학교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는 휴교령을 내렸다. 교회는 이 같은 조치를 학교의 궁극적인 폐쇄로 이해했다. 6월 캐토릭 지도자 로블레스가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총선 이후 정치적 폭력으로 269명이 죽었고, 부상자 1200명, 4백 개의 교회 파괴, 3백건의 총파업이 있었다.

내전

    군부는 점증하는 폭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에 망명 중인 장군 산후르호(Sanjurjo)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정부도 산후르호를 지지했다. 국내에서는 장군 몰라(Emilio Mola; 1887~1937)가 쿠데타를 주도하고 있었다. 몰라는 공화주의자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가 왕정주의자들과 내통하고 있다는 정보에도 불구하고 아싸냐는 그를 나바르라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세비야 주둔군 사령관 야노(Gonazalo Queipo de Llano; 1875~1951)도 쿠데타에 가담하고 있었다. 그 역시 표면적인 공화주의자였지만, 아싸냐를 싫어하고 있었다. 이때 프랑코는 쿠데타 군에 가담할 것을 요청 받았지만 침묵했다. 이 같은 움직임에 군부 내의 공화파 및 좌익 장교들도 반 파시스트연합을 만들어 대비하기 시작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히틀러

    쿠데타군은 7월10일~20일 사이를 거사 일로 했다. 군부의 쿠데타는 착착 진행되어, 17일 모로코 주둔 군대가 봉기했고, 다음 날 일요일 전국으로 봉기가 번졌다. 프랑코도 쿠데타 참가를 선언했다. 그는 파괴와 무정부 상태로부터 스페인을 구하기 위해 군대가 궐기했다는 방송을 했다. 월요일 그는 영국이 빌려준 비행기를 타고 연금 상태에 있던 까나리아의 떼네리페를 탈출, 모로코로 달려갔다. 자신이 지휘했던 모로코 주둔 스페인군을 지휘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이후 3년에 걸친 스페인 내전이라는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쿠데타 주모자인 산후르호는 포르투갈에서 급히 스페인으로 오던 도중 죽었다. 그가 탄 비행기가 추락하였기 때문이다. 1937년 몰라 장군도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프랑코의 라이발이었던 두 장군의 죽음은 프랑코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지금까지 스페인 내전을 불러 온 배경을 지루하게 설명했지만, 내전의 본질은 결국 “소유”의 문제라고 할 수가 있다. 내전 직전의 스페인은 국민 총생산의 거의 60%가 농업부문이었다. 이를 생산하는 전국 경작 가능 토지의 반이, 평균 120정보의 토지를 소유한 대토지 소유주들의 것이었다. 가톨릭 교회들 또한 거대한 토지 소유주였다. 나머지 반의 토지는, 한 가족의 식량 확보조차 어려운 영세농, 소작농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농민들이 수백 년 이래 농노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처럼 소수에 의한 토지 독과점이 형성된 원인은, 앞에서 말한 대로 로마 식민지 이래 전투에서의 승리자의 몫으로 획득된데 기인하고 있다. 세르판테스는 그의 소설“돈키호테”에서 이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

"기사들은 그 종복들을 그들이 정복한 왕국이나 섬나라의 왕으로 삼는 것이 오랜 관습이고...“

    1936년 2월의 총선에서 개혁파인 공화파가 승리하여 19세기 이래의 숙원이었던 농지를 포함한 전반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이로 인해 개혁파인 공화파와 프랑코의 국민전선파로 나뉘어 내전으로 들어간 것이다. 국민전선측은 “빨갱이냐 기독교 문명이냐” 를 기치로, 공화파는 “전제냐 민주냐”를 기치로 내걸고 싸웠다. 부유층, 보수주의자, 귀족, 왕정주의자, 가톨릭 교회, 기업가, 대토지 소유주들이 프랑코의 국민전선 측에서 그리고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온건 자유주의자들이 공화파 편에서 싸웠다. 전쟁은 국제전으로 번져 독일, 이태리, 포르투갈은 국민전선을 위해, 그 유명한 국제여단은 공화파 편에서 싸웠다. 국제여단에는 미국, 영국, 캐나다, 소련 등 세계 40개국 이상에서 지원병들이 참가하였고, 영국작가 조지 오웰을 비롯한 많은 인텔리겐치아들이 국제여단의 지원병으로 공화파를 위하여 싸웠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공화파의 종군 기자로 참전을 하였고, 그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에서 마드리드 인근의 공방전을 잘 묘사하고 있다. 스페인 내전은 제2차세계대전의 전초전 성격을 띤 전쟁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각종 현대화된 기계와 과학기술이 총동원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독일은 기계화된 전투력을 시험함으로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2차대선 시 전격전이라는 전술로 폴란드를 침공한다. 3년간 싸운 이 전쟁에서 공화파가 패함으로서, 스페인 공화정을 구하겠다는 국제적 대의명분도 이상에 그쳤다. 그리고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 이 전쟁에서 대략 1백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50만 명이 전투와 처형에 따라, 그리고 또 다른 50만 명이 기아,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전후 국민전선파의 대대적인 보복에 따라 처형과 강제 노동으로 20만여 명의 공화파 포로가 목숨을 잃었고, 또 다른 1백만여 명이 보복을 피해 해외로 망명을 했다. 거대한 로스 까이도스(Valle de Los Caidos)지하 성당은 공화파 포로들의 강제노동으로 건설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한편 3백여 명의 수녀, 7천여 명의 가톨릭 수도승 및 사제들을 비롯하여 4만여 명의 국민전선 측 비전투원들이 공화파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국민전선파의 승리에 따라 35년에 걸친 독재와 파시즘이 초래되기도 했다.

로스 까이도스 지하성당(국립 묘지)

 비바, 에스빠냐

    이제 21세기 초 스페인은 인구 4천만이 넘는 나라이다. 입헌군주국으로서, 꼬르떼스(Cortes)라 불리는 민선에 의한 의회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민주국가로서의 성장은 오랜 투쟁의 결과이다. 20세기 대부분 스페인은 독재 하에 있었고, 특히 1939~75간은 그 유명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 하에 있었다. 1975년 프랑코의 사망으로 그의 파시즘 체제가 막을 내렸고, 1978년에 현 스페인 헌법이 채택되었다. 이 헌법은 유럽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헌법으로 의회주의적 군주제도를 택하고 있다.  후안 카를로스 전 국왕은 1981년 군부 쿠데타에 강력히 반대함으로서 갓 태어난 민주주의를 살려낸 본받을 만한 군주였다. 스페인은 의회주의에 입각한 다당제의 국가이다. 1981군부쿠데타 실패 이후, 사회당이, 그 다음에는 보수당이 집권을 했다. 지난 40여 년 간 이 두개의 정당이 번갈아 집권을 했지만, 기타 군소정당들 역시 정부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현 국왕 펠리페6세(Felipe VI)는  2014년에 즉위 했다. 그는 젊은 국왕으로서 국내외적으로 정열적인 활동을 수행함으로써 스페인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있다.

국왕 부처

    스페인은 이제 과거처럼 수백 년 간 지속되어 온 극심한 빈부격차의 나라가 아니다. 스페인은 젊고 새로우며, 이처럼 번영되고 자유로운 적이 없다. 프랑코 사후 들어선 민주정부의 최대의 업적은 경제의 현대화이다. 전국 어디서나 중산층이 번영하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담배를 많이 피우고,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이지만, 서유럽에서 가장 평균수명이 길다. 이 같은 장수의 비밀은, 기후와 신선한 식품 때문이다. 전 국민에게 무료의료가 제공된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필자가 근무했을 때는 외국인도 무료였다. 내가 마드리드에서 두 아이를 얻었을 때, 나의 아내는 모두 무료 입원 분만이었다. 국민1인당 의사 수는 세계 최고이다.

    시민들은 물위의 백조처럼 자유를 누리고 있다. 독재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 같은 훌륭한 전환은 보기 힘든 예이다. 한 때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명령에 의해 결정 되었던 일상사가, 이제는 근로자를 비롯한 학생 등 유권자들이 결정한다. 정부를 비판하고 불평하는 건 일종의 국민적인 오락이다. 이러한 이유로 '스페인 사람들은 천국에 있어도 불평을 할 것이다', 라는 말들을 한다. 법정통화는 물론 유로(Euro)이다. 이로 인해 스페인 사람들은 이제야말로 유럽의 일원임을 알게 되었고, 피레네 북쪽의 유럽인들도 스페인에 대한 차별적인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이제 스페인은 NATO와 EU 회원국으로 브뤼셀과 연결되는 강력한 나라가 된 것이다. 비바, 에스빠냐! -끝-


지은 이: 박흥서

    지은 이는 코트라 마드리드,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칠레 무역관장을 역임하였고 GATT(WTO 전신) 및 UNCTAD(유엔무역개발회의)의 무역협상에 참여하는 등 오랜 세월 국제무역 업무에 종사하였다. 그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를 번역했고, “영어 단어 내려다보기”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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