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
Enlightenment
우리는 투표를 한다.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권리인 이 투표 즉, 주권을 우리 시민이 행사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이 권리를 군주와 교회로부터 빼앗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류의 선현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눈물과 피를 흘렸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민주주의하에서 지금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인류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 주권을 군주와 교회로부터 빼앗았나? 이 권리를 빼앗기 위하여 인류는 엄청난 피를 흘린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연법사상의 결과이고, 이 사상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사유란 바로 계몽주의적인 사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 방대한 정보를 여기서 모두 진술하기란 어려운 일임으로 그 개략을 설명한다. 이글을 통해 우리는 그때와 지금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계몽주의 운동은 대략 30년 전쟁(1618~ 1648)이 끝난 직후인 1650년부터 1789년 프랑스 대혁명까지 유럽인들에 의한 강렬한 지적 운동을 말한다. 이기적이고 어두운 인간성이 지배했던 중세 천 년(476~1453)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여러 사람들에 의한 지적 운동이었다. 중세 천년은 철저한 계급사회와 노예제도, 종교적 광신의 시대로 무자비한 하느님과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교회의 손아귀에서 백성들은 공포에 떤 시대였다. 이 같은 시대적 야만이 계몽주의로 인해 붕괴된 것이다.
계몽주의 운동은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왔고 미국에는 인류 최초로 3권분립에 의한 정부라는 계몽주의 꿈이 실현되기도 했다. 이 역사적인 여정에 많은 이들이 참여했고, 그들 가운데 “계몽주의자Philosophe”라고 불린 프랑스의 저명한 사상가, 작가, 정치가, 상인, 귀족,
혁명가, 신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의 백성들을 괴롭힌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문제들을 기존의 방법인 비과학적인 신앙심이나 정치적 권위에 대한 복종이 아닌, 인간의 이성을 통한 과학적 방법으로 해결코자 했다.
계몽주의 태동은 르네상스 시대(1450~1600)로 거스른다. 지적 활동의 암흑기였던 중세 천년에 비해 르네상스는 학문과 지식, 자기 계발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학이 재발견되고 미술, 건축에서 새로운 르네상스식 스타일이 창조된다. 인쇄술의 발달로 이전의 필사본 보다 싸게 만들어진 책들을 통해 르네상스적 관념이 더 멀리, 더 빨리 전파되었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회의가 점증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교회의 부패와 부도덕을 조롱했고 성부, 성자, 성신이 일체라는 “삼위일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었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는 그의 저서 “우신 예찬”에서 “동정녀 마리아”를 낡은 종교적 유산으로 보고 그 숭배를 공격했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루터의 공격은 결국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7세기 들어 유럽은 르네상스 시대에 싹튼 탐구 정신에서 비롯된 과학 혁명의 한 가운데 있었고, 새로운 발명은 새로운 영역에 대한 놀라운 관찰을 가능케 했다. 현미경의 발명으로 과거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미세한 생명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고, 망원경을 통하여 아득히 먼 별과 우주의 경이적인 모습을 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해부학, 화학, 광학, 물리학, 의학 분야에서도 인류는 거대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천문학 분야에서도 과학적인 탐구가 이루어져 지구 중심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낡은 우주관은 케플러나 갈릴레이에 의해 부정되었다. 가톨릭 교회의 주장과는 달리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고, 지구는 태양의 둘레를 도는 혹성으로 무한한 우주에 떠 있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고 했다.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과는 달리 만물을 재는 척도가 지구상의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과학 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관찰과 실험”이라는 베이컨(Francis Bacon)의 새로운 과학적 접근 방법 덕택이었다. 이성에 바탕을 둔 과학적 방법을 통해 자연 본래의 모습이 들어나자 많은 사상가들은 “이성의 힘”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전통적인 신념에 대해 의문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스로 하나님의 대변자이며 무오류라고 주장하는 교회가 이처럼 지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다면 다른 일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의문을 품은 것이다.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토대를 놓은 과학적인 연구 방법을 통해 마침내 뉴턴은 위대한 물리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은 뛰어난 사상가에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계몽주의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1687년에 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에서 뉴턴은, 우주 어디서나 중력은 균일하게 작용한다는 “중력” 이론을 발표한다. 지구에 미치는 태양의 중력과 동일한 힘으로 지구도 태양을 잡아당긴다고 했다. 그는 우주란 불가측한 것이 아닌 불변의 자연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정밀한 기계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을 한 것이다. 뉴턴으로 인해 이처럼 과학적 이해의 지평이 확대되었고, 바로 이 과학적 사고야말로 바로 계몽주의로 가는 길을 열어 준 것이다. 물질세계의 근본에 관한 뉴턴의 이 발견은, 다음 세대의 사상가들로 하여금 다른 신비적 현상에 대해서도 동일한 접근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성의 힘으로 우주의 신비가 벗겨진다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인간사의 문제들 역시 이성의 힘으로 이해하고 풀 수 있다는 혁명적인 생각을 한 것이다. 즉, 우주 질서를 지배하는 불변의 자연법칙이 존재한다면,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법칙도 교회나 왕들이 만든 인간의 법이 아닌 불변의 자연법칙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를 가져온 자연법사상으로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 그 단초이다.
이 같은 자연법사상의 선구자가 바로 로크(John Locke, 1632~1704)이다. 그는 많은 글과 생각을 통해 계몽주의를 위한 지적 토대를 세운 사람이다. 그는 “자연법”의 존재를 믿었다. 그는 중력을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이 있듯이,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법칙은 이성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이성의 힘”을 가지며 생명, 자유, 재산에 관한 동일한 자연권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이성이 선언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사람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아니 되며,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독립적이므로 아무도 타인의 생명, 건강, 자유, 재산에 관한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성의 가르침이라고 했다. 1690년에 발표한 논문(Two Treatise of Government)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있다.
즉, 개인은 자연법의 원칙을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하며, 여기에 중앙집권적인 통제가 개입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자연법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그 견해가 다를 수 있으므로 따라서 모든 경우를 포괄하는 “사회계약”을 체결하고, 사람들은 이에 따를 것을 합의해야 한다고 했다. 이 계약에 따라 사람들은 정부를 세우고 그들이 세운 정부가 “공동 선”을 유지하도록 권한을 위임하되, 그 위임된 권한은 제한된 것이라야 한다고 했다. 개인은 자신의 권한 일부를 정부에 주었지만, 그 대신 정부로부터 신체와 재산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했다. 어떤 정부도 이 같은 자연의 권리 즉 “자연권”을 감시하거나 빼앗을 수 없으며, 이 권리야말로 바로 “천부의 인권”이라고 했다. 만일 정부가 이 권리를 존중하지 않을 때 백성은, 그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가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백성의 “자연권을 침해한 군주나 정부에 대해 저항하는 권리"가 백성에게 있다는 것이다. 즉 “저항권”을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이며 그의 허락 없이는, 그 무엇도 그를 세속의 권력에 복종시킬 수 없다”고 했다. 또 정부는 그 권력의 정당성을 오로지 백성들로부터만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시민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의사결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무엇이 민주주의인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로크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진리 탐구를 돕기 위해 신은 우리에게 이성의 능력을 부여했다. 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신은 슬픔이나 육체적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욕망을 우리의 내면에 심어 놓았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들을 피하고 행복과 기쁨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자식의 행복을 부모가 원하듯, 우리는 모두 신의 자녀이므로 누구를 막론하고 행복해야 함을 신이 원한다는 것을 이성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 누구도 타인을 불행케 하거나 고통스럽게 할 수가 없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신의 뜻에 거역하는 자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듯 타인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모든 사람이 이성을 통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누구도 타인보다 더 나은 진리를 찾아내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 같은 이유로 정치적 지도자는, 그 국민에게 자신의 신념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현상을 이해하고, 우리의 이성으로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니 만큼, 어떠한 외부적인 힘도 우리의 생각과 어긋나는 방법으로 우리의 생각을 강제할 수가 없다. 만일 백성이 맹목적으로 정부를 따른다면, 바로 이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신의 법칙 즉 자연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로크는 또 인간은 어떤 선험적인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물론 신의 계시 같은 것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선험적인 선과 악 같은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은 백지장(tabla rasa) 같은 정신을 가지고 태어나, 살아가는 과정에서 오감을 통해 외부 세계로부터 정보를 획득, 축적해 간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모든 지식은 경험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인간이 이브의 잘못 때문에 원죄로 태어난다는 가톨릭 교회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후일 프랑스 계몽주의의 아버지로 불린 베일(Pierre Bayle, 1647~1706)은 프랑스 사람이지만 네델란드의 로텔담 대학의 철학 교수였다. 1682년 그는, 그때부터 2년 전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거대한 혜성의 출현에 대해, 혜성의 출현이란 과학적으로 예측 가능한 것이지 사람들이 믿듯이 불길한 징조를 말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문학, 과학, 철학, 탐험 등에 관한 지식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또 당시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무슬림, 유대교도, 무신론자들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베풀 것을 촉구하고, 수많은 유럽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가톨릭과 신교도 간의 무자비한 유혈 투쟁이었던 30년 전쟁을 비롯하여 모든 종교적 박해를 비난했다. 프랑스 교회와 정부가 합세한 위그노교도들에 대한 박해 때, 그는 4명의 가족을 잃는다. 그는 신교도였음에도 신앙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 때문에 교수직을 잃었다. 시간을 얻은 그는 “역사적, 비판적 사전(Historical and Critical Dictionary)”이라는 방대한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이 바로 프랑스 계몽주의의 모체가 된 책이다. “사전”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어휘의 정의가 아닌 역사, 문학, 정치, 철학, 종교 등 광범한 주제에 관한 문집이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성서상의 여러 이적들과 기독교 신앙 형태에 가차 없는 공격을 가했다. 예컨대 이브가 실제로 940세까지 살았는지에 의심을 품었다. 아담과 이브를 창조할 수 있었던 전지전능한 야훼가, 그들이 어느 날엔가 죄를 지어 자신의 은총을 잃게 될 것임을 모를 수 있었겠냐고 했다. “선하고 완전무결한 야훼가 범죄적인 피조물을 창조했다는 말인가? 완벽한 신이 도대체 불행한 피조물을 창조했다는 말인가? 라고 물었다. 악에 대한 정의에서도 다른 신학자들과는 달리 그는 ”양심에 반하는 행동이 죄악“ 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인간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인간이란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인간성이란 변함이 없고 따라서 인간의 범죄와 결점은 반복되게끔 되어 있다고 했다. 이러한 이유로, 정부의 권력은 사회적인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18세기의 성서“로 불린 그의 ”사전“은 유럽을 풍미했고 훗날의 계몽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다.
18세기에 들어서자 점증하는 사회적 문제들에 예리한 관심을 갖는 사상가, 문인, 성직자, 귀족 등 일군의 뛰어난 사람들이 프랑스 전역에 등장한다. 이들을 ”계몽주의자“ 라고 불렀다. 그들 대부분은 전문적인 철학자나 대학교수 등이 아니었고, 물론 무장을 한 혁명가들도 아니었다. 단지 사회의 기능에 대해 의문을 품고 비판을 가하는 자칭 사회 비판 세력이었다.
권력을 추구하기보다는 광범한 사회 문제에 대해 여론을 형성하고, 사회 개혁을 위해 정부에 압력을 가한 사람들이었다. ”편견이나 전통 등 인간을 노예화하는 모든 것을 내치고, 원점으로 돌아가 명확한 일반원칙을 찾고 경험과 이성이 증명하는 증거 이외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말 것“ 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백성을 볼모로 한 채 권력 놀음에 빠져 백성을 등한시하는 군주, 귀족들을 비난했다. 프랑스에서는 인구의 3%에 불과한 승려와 귀족들이 낡은 전통과 관습(Ancien Régime)하에서 부당한 권력과 명예, 면세특권, 국토의 대부분과 정부 및 군대의 모든 요직을 독차지하고 97%의 상인, 도시 노동자, 전문 직업인, 농민층은 모든 노동과 오직 군주 한 사람의 낭비를 위한 가혹한 세금을 떠맡고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은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도 분노했다. 공포, 협박, 공갈, 허황된 지식을 통한 교회의 백성 학대와 농단을 참지 못했다. 그들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불행과 죄악, 어리석음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것은 이성이 책임져야 할 임무이지 예수의 재림을 기다려 해결될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계몽주의자들은 대부분 문필가들이었다. 빛나는 문체로 글을 쓰고 책의 저술과 시, 희곡, 대화록, 문집들을 발간하여 배포함으로써 계몽주의 운동에 불을 지폈다. 그들은 정부, 교회, 사법기관 등 모든 중요한 기관들이 편견과 미신, 부패의 껍질을 쓰고 있다고 했다. 이 껍질들은 이성과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깨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또 상속에 의해 권력, 부, 지위 등을 물려받는 부당한 시스템을 구체제의 질서로 보았다. 이 구체제야 말로 모든 것의 희생 위에 왕족, 귀족, 승려 계급에게 특권과 부, 권력을 부여하는 원흉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부패 체제를 바꾸어, 타고난 재능과 능력이 있는 사람을 대우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열망했다. 그들은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글을 썼지만 또한 낙관적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왕이나 귀족, 교회가 아닌 백성을 위한 위대한 잠재력을 가진 사회에 살고 있음을 확신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이성적인 방법으로 진술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면, 중요한 사회적 변화가 올 것임을 굳게 믿었다. 그들은 구체제의 잔학성과 부당성을 공격했지만 또한 인간에 대한 진정한 애정과 백성이 겪는 고통을 제거하고
불의를 일소할 것을 주장했다. 법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행해지는 고문과 야만적인 처벌을 비난했고 노예제도를 반대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대우하여야 한다고 했다. 전쟁이란 권력에 미친 군주나 사제들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이 희생되는 광신적인 놀음이라고 비판했다.
볼테르(볼테르는 필명임. 본명 François-Marie Arouet, 1694~1778)는 자신의 시대를 가장 냉철하게 비판했던 사람이다. 그는 베일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작가, 소설가,수필가, 역사가, 철학자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던 그는 18세기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그의 예리한 비판은 그로 하여금 많은 고통을 겪게도 했다. 프랑스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바스티유 감옥에 두 번이나 투옥되었다. 1726년 마침내 그는 3년간 영국으로 추방되었고, 추방 생활 중 로크, 뉴턴 등 영국 지성인들의 책을 읽었다. 정부를 개혁하는 영국인들에게 찬사와 경의를 보내기도 했다.
- 볼테르 -
그는 1729년 프랑스로 돌아온다.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한 그는, 1734년 "영국에 관한 서신(Letters on the English Nation)"을 발간했고, 이 책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뉴턴과 로크의 사상을 알렸다. 구체제에 대한 맹렬한 공격과 영국의 정치개혁을 열렬히 옹호했다. 죄인에 대한 가혹한 처벌과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권력자들의 무관심을 비난했고, 가톨릭 교회와 귀족들에 의한 철권적인 사회 통제를 경멸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믿었고, 인간을 부패시키는 것은 조직화된 종교라고 했다. 자신이 하느님을 믿는 신자였음에도, 기적과 신의 계시를 가르치는 교회를 비판하고 조롱했다. 이로 인해 문필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또한 많은 적을 만들기도 했다. 적들의 보복에 두려움을 느낀 그는 프랑스 국경 가까운 스위스의 페르니(Ferney)로 도피한다. 그곳에서 20년 동안 구체제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계속하면서 희곡, 수필, 소설, 서신 등 수많은 문학작품을 썼다. 그는 일생 동안 일만 개가 넘은 글을 썼는데, 이는 대략 1천5백 만 단어로 성경 20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이 글들을 통해 그는 비이성적이고 옳지 못한 법과 관습을 공격하고 낡은 특권에 집착하는 위선적이고 어리석은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을 조롱했다. 그의 적에게나 추종자에게나 그는 18세기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사상가요 작가였음은 물론이다. 1778년 그가 죽자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왕, 러시아의 캐더린II세, 스웨덴의 구스타프III세 같은 절대군주들조차 그를 칭송해 마지않았다.
이들 이외에도 라이프 니츠(Gottfried W. Leibnitz;1646~1716),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 몽테스키외(Baron de Montesquieu; 1689~1755), 벤자민 프랭크린(Benjamin Fraklin; 1706~1790),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 디드로(Denis Didrot; 1713~1784), 달람베르(Jean R. d'Alember 1717~1783),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캐더린 여제(Catherine the Great; 1729~1796),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 토마스 제퍼슨(Thoma Jefferson; 1743~1826)이 계몽사상으로 무장하고 민주주의를 만든 이들이다. 이들 이외에도 더 많은 이들이 있다.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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