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국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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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혁
러시아 제국 멸망 전 50년은 농노해방으로 시작한다. 1861년 2월9일 농노해방 선언이 있었다. 표면상 대개혁의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2천만 명 이상의 농노가 자유를 획득하였다. 이들의 무산 계급화를 방지하기 위해 해방된 농노들에게는 한 사람 당 약간의 토지가 주어졌다. 그 대신 농노의 소유주들이었던 지주들에게는 지방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가 면제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지방 행정기구의 미비로 지방의 질서 및 행정은 지주들의 책임이었다. 지주를 대신한 지방자치행정기구(Zemstvo, local assembly)는 1864년에 이르러서야 확립되었다. 젬츠보는 선거로 뽑은 지방의 유지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경찰업무, 행정, 보건의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그들의 권한은 제한된 것이었다. 그 활동 역시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는 것으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별로 없었고, 또 조세부과권 역시 정부 소관이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영향력 있는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젬츠보를 이용하려고 했고, 이는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기도 했다.
이 같은 지방행정기구의 재조직과 더불어 사법제도의 개혁이 있었다. 배심원 제도와 판사의 영구직, 양심적이고 유능한 재판관 선정 등 정부는 서유럽국가들 보다 더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재판제도를 확립하기도 했다. 피고인의 인격 존중과 변호사 선임권으로 원고와 공정한 다툼이 가능하도록 했다. 변호인에 관한 규정은 재판 절차의 수준을 높여, 재판을 공개하여 방청객이 재판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했다. 형사법에 심리적인, 사회적인 고려가 반영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농민들은 이 같은 새로운 사법제도의 밖에 있었다. 농민이 당사자인 재판은 특별법원의 소관이었고 특별한 경우에만 일반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현대적인 민법전의 미비로 지방재판소는 관습법에 의존했는데, 관습법은 지주 위주였으므로 농민들은 재산권의 보호가 매우 어려웠다. 이 같은 법적 차별은 개혁의 한계를 노출시켰고 또 농민은 물론 농민 편에선 인텔리겐챠들, 예컨대 젬츠보의 구성원인 자유주의자나 인기영합주의자들로부터 적대감을 샀다.
알렉산더II세의 마지막 개혁은 1874년의 군 개혁이다. 병사는 원래 농민과 하층 계급으로부터 징집되었다. 살아남은 자는 제대 후 자유민이 되었다. 농민은 다른 농노로 대신 복무케하여 징집을 면제 받을 수 있었지만, 이는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군제도를 단기 복무를 토대로 한 국민개병제로 바꾼 것이다. 국민개병제로의 개혁은 농민을 시민사회로 통합하고 현대문화를 대중에게 전파하는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했다. 문맹의 병사들은 읽고 쓰는 교육을 받았고, 현대적인 장비를 다루고 기술을 익힐 수가 있었다. 배경이 다른 수많은 병사들이 동료의식을 기르기도 했다. 복무 기간이 짧았지만, 제대군인들은 군에서 습득한 지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1차대전 때까지 러시아는 유능한 야전 장교와 하사관을 자랑하는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많은 저항에 부딪혔다.
알렉산더II세(1885~81)치세 중 단행된 개혁은, 가난하고 뒤떨어진 러시아에서 보수적인 정부가 이룩한 놀랄만한 성공이었다. 이제 러시아는 앞선 서유럽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같은 개혁은 또한 사회 전반에 걸친 변혁에 불을 지폈고,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아무런 폭력이나 천지개벽이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몇 십 년에 걸친 상황을 관찰해보면, 이 초기의 성공이 오히려 심각한 어려움을 초래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개혁은 정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 현대사회의 성격을 잘 못 판단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현대화로 인해 고삐가 풀린 동적인 힘에 면죄부를 준 것이다. 농노해방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심각한 문제를 암시하고 있었다. 해방 농민에게 분배된 토지는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당장의 필요에는 충분한 땅이었으나, 농민의 증가에 따라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1861년 개혁은 이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또 자본의 부족과 전통적으로 해온 토지 분배의 재조정이라는 관습(인구 증가에 따른 정기적인 재분배) 때문에 새로운 영농기술을 적용하기가 어려웠고, 이에 따른 토지효율의 하락은 생산량의 감소를 가져왔다. 따라서 농민들은 끊임없이 더 많은 토지를 요구했고, 이것이 바로 20세기 초 농민 봉기의 원인이었다. 농민과 농민 편에선 사람들은, 농민들에게 경작 가능한 모든 토지 분배만이 해결책임을 내세웠다. 한편 농노의 해방으로 땅을 잃은 대지주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농노와 토지를 잃은 대가로 정부가 준 보상금을, 경험 부족으로 어떻게 투자를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 역시 중대한 문제였다.
행정적, 재정적인 이유로 1861년 농노해방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조세의 징수를 지방 공동체의 책임 하에 두고자 한 것이었다. 이 제도 하에서 농민은 마을 전 주민의 승인 없이는 마을을 떠날 수가 없었고, 이 승인을 받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누군가가 마을을 떠나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의 세금을 납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타 지역으로 가서 일할 수 있는 여행증을 마을 공동체가 발급했고, 그가 돌아와 세금을 납부한다는 게 확실해야만 여행증을 발급했다. 이 같은 노동력 이동의 제한으로 러시아 내륙에는 농업인구가 넘쳐났다. 20세기 들어와 자유로운 노동력 이동을 허락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악화되어 농업인구 증가로 인한 토지의 재분배가 정치적,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었다. 농지 확대를 위한 시베리아로의 농민 이주로는 당장의 효과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제국의 행정을 위해 만든 기본조직 젬츠보는 자신들이 국민의 대표라는 생각을 했고 교사, 보건요원, 기술자, 호구조사요원들과 전국적으로 연대하여 중앙정부와 대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반해 중앙정부는 젬츠보의 국민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지방행정에 대한)그들의 조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시민사회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정부는 지방 엘리트 즉, 젬츠보와의 심각한 갈등을 격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농촌의 현대화, 농민의 보건 향상, 새로운 영농기술의 교육 등이 마비되었다. 이 역시 1861년 개혁이 예상치 못한 일로, 혁명을 부른 원인이었다.
마지막으로 모든 전제체제가 그러하듯, 알렉산더II세 치세 하의 모든 개혁이 군주의 변덕에 좌우되었다는 점이다. 개혁자들은 조정의 실권자들이었음에도 전적으로 황제에게 의존했다. 개혁의 성공 여부는 황제의 열정에 좌우되었고, 그러나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히자 황제의 개혁 열정은 식었다. 예를 들어, 국민개병제에 반대하여 일어난 1863년의 폴란드 봉기는 황제와 정부를 놀라게 하여 개혁이 과연 현명한 일인지 의구심을 품게 했고, 이에 따라 초기의 개혁 정신과 신념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1866년 이후, 관료들의 무관심과 황제의 확고한 신념 부족으로 개혁은 지지부진해지고, 설상가상으로 보수주의자 들은 개혁을 연기토록 정부에 압력을 가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움직임이 싹튼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개혁에 실망한 여러 세력이 움직였다. 학생, 사회주의자, 유물론자, 허무주의자, 비밀혁명조직 등이었다. 문화적, 도덕적으로 대중을 이끌려던 학생들은, 이제 정부에 대한 완전한 적대세력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정부의 개혁을 거부하고 혁명을 통한 개혁을 주장함으로써 정부에 의한 개혁의 힘은 붕괴되고 있었다. 인텔리겐챠들은 혁명주의자들을 지지했고, 지식인들에 대한 정부의 불신은 깊어만 갔다. 정부와 시민사회 간에는 소통이 단절되고 전문가, 사업가, 예술가, 박애주의자들은 모두 적대세력으로 등장하여 보다 많은 자유와 자율 그리고 정치에의 참여를 원했다.
한편 우익들은 민족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열정으로 백성들을 선동했다. 폴란드 봉기가 러시아 쇼비니즘에 불을 질렀듯이, 발칸 전쟁과 중앙아시아 진출은 제국주의와 공격적인 범슬라브주의에 불을 붙였다. 우익들의 선동으로 민족주의적 열정에 휩싸인 백성들은 정부의 신중한 외교 정책 및 미온적인 식민지 확대 정책을 부정했다. 자신들이 전제체제 주체임을 자처한 보수주의자들도 정부의 미온적인 정책에 반대했다. 급진 인텔리겐챠들에 대한 우익의 반격은 러시아 문화의 종교적, 형이상학적, 민족적 성격에 관한 백성들의 호기심을 불러오긴 했지만 체제 유지에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혁명을 부추기는 선동이 날로 심해지고 "인민의 의지(Narodnaia Volia)"라는 좌익 테러 단체가 결성되면서 이 선동은 정치적 테러로 발전하여 급기야는 1881년 3월1일, 알렉산더II세는 이 단체의 테러로 암살된다. 그는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입법과정에 시민사회의 참여를 허락할 예정이었다. 급진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정부는 인민의지의 멤버들을 전원 체포, 사형에 처했다. 이를 계기로 그후 10년간 테러와 선동이 잠잠해졌다. 여론도 급진 테러리스트들에게 등을 돌리고 백성들도 생활수준 향상으로 눈을 돌려, 보다 온건한 자세로 돌아갔다. 이에 따라 알렉산더III세와 그의 아들 니콜라스II세는 개혁을 중단하는 기회주의적 행동을 했다. 그들은 이미 진행된 개혁 조치들을 원상태로 돌리고 소위 반개혁시대로 들어갔던 것이다.
2. 반개혁(1880~90년대)
반개혁의 영향을 받은 것은 주로 대학과 젬츠보이다. 대학과 학생을 통제하는 새로운 법이 제정되고 검열을 강화하여 지적 활동을 통제, 감시했다. 젬츠보의 권한은 축소되었고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도록 했다. 이 같은 통제는 시민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조치였고 정치에 시민의 참여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도시나 지방을 가리지 않고 그 주민들을 감시했다. 경찰에 의한 이 감시는 점점 도를 더 해갔다. 알렉산더III세는 지지를 얻기 위해 민병대, 저명인사, 쇼비니즘에 호소했다. 외국인, 비러시아계 러시아인(1897년 현재 러시아에는 170개 종족이 있었다), 중도계층이 그때까지 누렸던 모든 권리는 축소되거나 폐지되었다. 발틱지방, 폴란드, 코카서스, 핀랜드의 러시아화가 진행되었으며 유대인들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었다. 하스칼라 운동(Haskalah:유대인 계몽주의 운동)으로 잠시 자유를 누렸던 유대인들은 포그람(Pograms:반 유대인 폭력)으로 커다란 희생을 치루었다.
3. 산업화.
이 같은 음울한 분위기와는 달리, 경제는 도약을 한다. 그러나 이 도약은 농업 부문의 희생에 토대한 것이었다. 재정과 통화안정정책에 힘입어 수출이 증가하였고, 1895년에는 경제 잠재력이 산업국가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농업부문에 심각한 타격을 준 것이었다. 농업부문의 불균형은 1891~92년대 기근을 가져왔고, 이는 정부 정책의 빈약함이 들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재난에 직면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아무런 정책이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기근과 정부 대책의 부실은 엘리트 계층의 사회적 책임을 다시 자극하기 시작했고 대학, 종교단체, 사회단체 등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폭력적인 대중 집회가 다시 일기 시작했다.
이 같은 경제적, 사회적 위기는 곤궁한 무산대중과 결합하여 긴장을 더욱 고조시켜 조만간 위기를 불러올 것으로 예측되었다. 지식인들이 위기를 더욱 부추겼고, 역사 발전의 주도권을 둘러싼 맑스주의자들과 인기영합주의자들 간의 논쟁, 이상주의적인 형이상학의 부활, 그리고 마침내는 니체, 입센(Henrik Johan Ibsen, 1828-1906)등이 주장한 새로운 시대의 도래라는 메시지를 담은 세기말 사조(fin de siecle)가 풍미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이제 폭풍우가 닥친다. 농업의 위기로 농민 봉기가 일고, 농민의 봉기는 정치적 테러와 맞물려 더욱 거칠어졌다.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열변으로 농민을 옹호했다. 알렉산더III세의 반개혁으로 활동 무대를 잃었던 젬츠보의 지도자들은 보수체제와의 싸움을 지휘하기 위해 나섰다. 정부와 타 종족과의 갈등 역시 정부에 대해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혁명으로 발전할지도 모를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니콜라스II세(1894~1917) 정부는 일본과의 전쟁을 생각한다. 단기간에 승리할 것으로 보았다. 국내의 정치적 동요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애국심에 의존코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큰 오산이었다. 파멸적인 패전은 절대왕정의 물질적, 도덕적 약점을 만천하에 들어냈고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정부와 함께 백성의 몫이었다. 1905년에 들어 군대의 반란과 농민봉기가 절정에 이르자 정부는 한 발 물러선다. 니콜라스 황제는 선거에 의한 의회 수립과 헌법 제정을 약속했다. 이 약속으로 소요가 가라앉고, 포츠머츠 조약에 서명함에 따라 평온을 회복했다. 1906년에 들어 의회(Duma) 선거가 치루어지고 헌법에 기초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투표권은 아직 제한적이었지만, 시민단체의 조직과 정치적 결사가 허락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정부는 진정한 의미에서 헌법적인 것이 아니었다. 전제정은 그대로였고 아직도 황제가 최고 권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새 의회는 매우 자유주의적인 분위기였다. 경제적, 사회적인 문제를 보는 관점도 매우 온건했다. 그러나 정부와의 관계는 협조가 아니라 견제로 보았다. 이는 정부와의 갈등을 불러오고, 이로 인해 곧 러시아 최초의 입법기관인 의회의 해산을 불러왔다. 수상 스톨리핀(Stolypin)이 보다 협조적이고 온건한 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쿠데타를 단행,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법을 개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나자 계엄령을 선포하여 진압했다. 스톨리핀의 강경정책으로 1907년부터 1914년(실제로는 1917년까지) 기간에 러시아는 평온을 되찾았다. 이 기간 중 현대화와 산업화가 회복되고 농업구조가 개선되었다. 지성과 문화는 다시 훈풍을 맞고, 여러 분야에서 창조적인 일들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러나 사회적인 문제가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었다. 무산계층과 농민들은 아직도 가난한 삶에 허덕였고, 그 생활은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무산계층은 농민 출신들로, 수백 년에 걸친 그들의 관습과 전통이 사라지고 있었다. 영향력 있는 시민단체의 반정부적 태도로 인해 이전보다 더 혁명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지식인들은 정부의 불신 대상으로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 니콜라스II세 가족 -
지식인들과 협력할 수 없었던 스톨리핀이나 그 후임자들은 민족주의나 애국심에 호소하여 부유층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내정은 민족주의, 외교는 제국주의적 쇼비니즘을 통해 국내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이에 따라 1차대전에 참전을 했다. 그러나 궤멸적인 타격을 받아 혁명이 당겨진다. 군량미 조달을 위해 농촌에 대한 식량공급 중단과 도시의 빵 부족을 항의하는 집회가 폭동으로 확대되면서 체제 붕괴가 시작된 것이다. 그 지지기반이었어야 했던 단체(젬츠보)의 지지를 잃고, 무능한 관료제도와 개혁을 주저한 왕실로 인해 제국주의 왕조는 막을 내린 것이다. 이것이 1861~1917년 사이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의 요약이다.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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