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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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대혁명(1789), 러시아 혁명(1917), 태평천국의 난(1850~64), 동학 혁명(1894)은 모두 왕조의 멸망을 가져온 사건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 사건들의 핵심은 개혁이었으며, 이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 혁명의 당사자로 처형된 루이16세는 개혁을 원했지만 특권적인 교회와 귀족들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그는 결국 단두대로 목이 잘렸다. 러시아 알렉산더III세와 니콜라스II세는 알렉산더II세의 개혁을 되돌려 놓은 반개혁 황제들이었다. 자신을 학대한 부친을 죽인 혼외정사의 아들 스메르자코프 카라마조프를 통해, 혼외자식 학대하듯 백성을 학대하는 황제는 언젠가 백성들의 손에 죽을 것임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암시하지만 황제는 알아듣지 못했다. 니콜라스II세는 러시아 혁명의 결과 1918년 가족과 함께 총살된다. 청조는 한족에 대한 차별과 서구 열강의 침탈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아편전쟁(1839~42)에서 영국에 대한 굴욕적인 패배와 피폐한 백성들의 삶은 결국 홍수전의 반란(1850~64)을 불러온다. 수많은 민란을 간과했던 청조는 뒤늦게 개혁(양무운동)에 손을 댔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그나마 보수 세력의 끊임없는 비판과 견제를 받았다. 양무운동(1861~1894)은 또 백성을 위한 당장의 시급한 개혁이 아닌, 초점을 벗어난 장기 부국강병 개혁이었다. 홍수전의 난으로 국력이 약화된 청조는 결국 막을 내린다.

        동학 혁명(1894)은 갑오경장이라는 개혁을 가져왔지만 이 역시 때가 늦어 미구에 왕조가 멸망하는 것이다. 시기를 잃은 개혁은 오히려 위기를 부른다는 토크빌의 (Alexis de Tocqueville, 1805~59, 프랑스 역사학자)말이 증명된 것이다. 이 네 사건들의 공통점은 개혁이고, 개혁에 실패함으로서 한 왕조의 몰락은 물론 인류 역사가 바뀐 것이다. 모두 양보를 모르는 놀부, 부유한 놀부들의 더 많은 욕심이 스스로의 종말을 불렀던 것이다. 아래의 글은 당시 백성들 삶의 편린으로 개혁이 왜 필요했었는지에 대한 간략한 답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현재, 대부분의 프랑스 농민들은 바닥이 더러운 한 칸 또는 두 칸짜리 집에서 살았다. 어둡고 통풍이 안 되는 집안에는 가축들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불결한 환경은 질병의 중요한 원인이기도 했다. 당시의 농촌 여인들의 1/3이 중노동의 결과 사산의 경험이 있었으며, 신생아 20명 당 한명이 사산이었다. 많은 신생아가 죽으니 신부를 부를 겨를도 없어, 산파가 영결세례를 줄 수 있도록 자격이 주어지기도 했다. 태어나기도 힘들지만 생후 1년 이내에 1/5이 죽었다. 빈민 지역에서는 1/3이 죽었다. 살아남은 아이의 반은 15세 이전에 죽었다. 영아의 40%가 8월부터 10월 기간에 죽었다. 어머니의 일손으로 인해 수유를 못해 영양실조와 전염병으로 죽은 것이다. 농민의 식사는 조잡했고 단백질, 비타민이 든 육류, 신선한 야채는 매우 귀한 식품이었다. 가축은 너무 소중하여 식품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질병 못지않게 농민을 괴롭힌 것은 경작 환경이었다. 반 이상이 소작농이었던 당시의 농민들을 괴롭힌 것은 경작 계약이다. “반 타작 (half-fruits)”이라고 불리었던 이 경작 계약은 이렇다.

      

      - 단두대 아래 루이XVI세 -

        농민은 지주와 보통 1년짜리 경작계약을 했다. 우선 실물로 지불하는 임차료를 보자. 임차지에서 기르는 모든 가금 류, 가축 류의 반과 이 동물들이 생산하는 달걀이라던가 우유의 반은 지주의 것이다. 또 성 요한의 날 등 무슨무슨 날에 달걀이라던가 닭고기 등 계약상의 실물납을 해야 했다. 경작지는 중세 이래의 경작 방식인 3포제로, 1/3은 경작을 쉬는 휴경지, 1/3은 밀이라던가 보리 등 곡물, 나머지 1/3은 콩, 채소 등의 작물을 경작했다. 이는 강제 계약으로, 만일 소작인이 휴경지 이외의 땅을 놀리는 경우, 지주는 그 놀리는 땅을 다른 사람에게 소작을 줄 수가 있었다. 소작료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300평의 소작지 경우 100평은 휴경지, 다른 100평은 곡물, 나머지 100평은 채소 생산을 담당한다. 당시의 경작 환경으로 인해 100평의 곡물 경작지의 실제 생산 가능한 토지는 평균 80-90평 정도였다. 여기서 생산된 생산물을 100으로 볼 경우, 20은 빌린 종자용 씨앗 상환 몫, 20은 계약금, 수확 및 타작 비용 10을 제외하고 난 나머지 50의 반 25를 임차료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또 지주로부터 빌려 쓴 농기구에 대한 임차료도 지불해야 했다. 토지의 유지 관리에 드는 비용도 모두 소작인이 지불해야 했고 세금, 지방 토후에게 바치는 공물, 교회에 내는 십일조 등도 납부해야 했다. 이것저것 공제하고 나면 소작인의 몫은 평균 수확의 15%에 불과했다. 이처럼 농민계층은 귀족 계급의 등쌀로 뼈가 으스러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가혹하게 보이는 계약은 그래도 소작인에게 상당히 유리한 계약이었다. 이러한 계약은 보통 25정보 이상의 대규모 토지로, 소득율이 작아도 수확량이 크기 때문에 먹고 살 수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작지의 40~45%가 농민 소유이긴 했지만, 그러나 80%의 농민들이 영세농이었다. 1789년 현재 30%의 인구가 빈민이었고, 빈부 격차가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경작지의 10%를 소유한 가톨릭 승려, 30%를 소유한 귀족은 면세 대상이었고 교회는 또 십일조를 징수했다. 이 같은 상황은 개혁을 절실히 요구했지만 국왕, 승려, 귀족들은 그들의 특권 보호를 위해 개혁을 거부했던 것이다.

        농노해방이 있었던 1861년 현재 러시아 인구는 총 6천만 명이었다. 이 중 1천2 백만이 자유인, 나머지 4천8백만 명은 국가에 예속된 농노(Obrok)와 개인 지주에게 예속된 농노(Barshichina) 등 두 부류로 나뉘었다. 이 가운데 개인에게 예속된 농노는 전체 인구의 37.7%였다. 이들은 소작료를 납부하는 소작 농노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력 농노로 나뉘었다. 14세 이상은 누구나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18세기 말에는 주 3일의 노동으로 제한했지만 지켜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1830년대 니콜라스I세는 국가예속 농노들을 관리하기 위해 농노청을 두고, 이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또 자치기구를 만들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여행을 하려면 여행증명서가 필요하긴 했지만, 이들은 사실상 자유농으로 남성인구의 대략 30-40%정도였다. 이처럼 국가에 예속된 농노는 그래도 조금은 자유롭고 부담도 적었다. 그러나 개인에게 예속된 농노는 달랐다. 농노와 지주와의 관계는 황제와 신하 관계의 축소판이었다. 지주는 자기 소유 농노에 대한 모든 권한이 있었다. 기근이나 흉작 시 지주는 농노를 보호하고 도왔으나 또한 징벌권도 있었다. 태형, 사형을 비롯해 시베리아 유형을 시킬 수도 있었다. 지주는 자신의 토지 내에서 사실상의 황제였다. 농노는 일종의 재물로, 선물로 주고받거나 매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농노의 경작지는 대부분 거친 땅으로 중세 이래의 경작 방식인 다품종밀집경작농지(open-field with multi-strip)가 대부분이었고 영농기술은 후진적이었다. 노동 능력, 성별, 나이에 따라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해야 했으므로 경작지의 분배는 정기적으로 재조정을 해야 했다. 19세기 들어 인구가 증가했고 이에 따라 제한된 경작지를 재조정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가 대두되었다. 농노제도가 집중적으로 시행된 지역은 농노제도가 시작되었던 제국의 중앙지역과 폴란드 분할로 획득한 서부지역이었다. 이 서부 지역 인구의 반이 농노였다. 북부, 동부, 시베리아지역은 농노제도가 실시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산업화에 따른 농업부문의 희생은 1890년대 기근을 비롯해 만성적인 식량부족을 불러 왔다. 1900년 어느 날, 폴란드 로즈(Lodz)시 거리의 모습이다. 

    - 니콜라스II세 가족-

“어깨가 축 늘어진 행인들이유령처럼 걷고 있었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하는 여인이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녀는 며칠 동안 굶어, 술이 취한 게 아니라는 말을 할 기운조차 없었다. 같은 시간, 한 남자가 길거리에서 누워있었다. 며칠 동안 굶었고, 갈 곳조차 없었다. 또 바로 그 시간에, 12세 소년, 21살의 처녀, 55세 남자가 굶주림으로 쓰려져 들것에 실려 가고 있었다. 그 거리에서만 하루 5명이 굶주림으로 그렇게 쓰러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죽었을까? 빵과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간 것이다.”  

-From Lodz's Development-

        청조 멸망의 원인이었던 태평천국의 난은 가뭄, 홍수, 기근, 역병 등으로 절망 상태에 있던 백성들이 일으킨 난이다. 홍수전이 이끈 이 난은 기독교 사상에 입각했던 것으로, 천년 왕국이라는 신비적인 요소를 담고는 있었지만 후일 중국 근대화의 초석이 된, 아편금지, 도박금지, 담배 및 음주 금지, 일부다처제 금지, 노예제 금지, 매음 금지 등을 기치로 내세웠다. 그들은 남녀평등을 외쳐 전족과 중매결혼 금지를 주장하고 실제 실천하기도 했다. 토지의 개인 소유금지와 공평한 분배를 내세웠다. 이 같은 병폐들은 당연히 개혁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었다. 홍수, 한발, 기근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할 대로 피폐했고 이에 따른 크고 작은 농민봉기가 잇따랐지만, 청조는 태만과 무기력으로 문제해결이 불가능했다. 홍수전의 농민군은 삽시간에 그 세력이 불어나 양자강 일대를 장악하고, 1853년에는 남경을 함락한 다음 수도로 정하고 3천만 명에 달하는 백성을 그 치세 하에 둔다. 

      - 태평천국의 난 -

        그러나 1864년 홍수전이 사망함으로서 그의 군대는 항복한다. 그의 화장된 유골은 대포에 담아져 발사되는데, 이는 반란에 대한 처벌로 그의 영혼이 영원히 안식을 못 찾도록 한 청조의 징벌이었다. 이 싸움의 희생자 수는 대략 3천만 명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인명 피해를 낸 2차대전 희생자 6천만 명 다음이다. 청조는 뒤늦게 양무운동을 일으켰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국력이 약화된 청나라는, 1911년 손문의 신해혁명으로 붕괴된다.  (C)

 

 참고자료: 1. Franz Michael. "The Taiping Rebellion 1851-1864."

           2.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People by David Abdress.

             3.The French Revolution by Linda S. Frey and Marshall L.

               Frey.

             4. The Russian Chronicles by Norman Stone and Dimitri

                Obolensky

             5. Understanding Imperial Russia by Marc Rae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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