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사라사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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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우장에서 직접 투우 구경을 해본 일이 없는 이라도, 도심의 거리에서 황소와 사람이 어울려 법석을 떠는 장면을 티. 브이나 영화에서 보았을 것이다. 매년 7월이면 스페인의 북부 도시 팜플로나의 페르민 축제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 위험하고 혼란스레 뵈는 장면은 그러나 투우가 아니라, 투우를 위해 젊은이들이 소를 몰고 투우장으로 가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벌어지는 날은, 4세기 초에 순교한 팜플로나의 초대 주교였던 성자 페르민을 위한 축제일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그의 소설 “태양은 또 다시 뜬다”에서 이 축제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이날은 또한 팜플로나가 낳은 불세출의 바이얼리니스트 겸 작곡가인 파블로 사라사테(Martin Meliton Pablo de Sarasate y Navascues 1844 - 1908)의 축제일이기도 하다. 그는 이곳에서 1844년에 태어나 군악대 지휘자인 아버지로부터 다섯 살 때부터 바이얼린을 배웠고, 여덟 살 때 첫 연주회를 가졌다. 이 때 이미 그는 청중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는다. 그는 곧 마드리드로 유학을 하게 되었고, 곧 당시의 스페인 국왕이었던 이사벨라 2세 여왕의 궁정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 열두 살이 되던 해에 빠리 유학을 위해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로 떠난다. 그러나 그들이 탄 열차가 프랑스 국경을 통과하자마자, 어머니가 심장병으로 급사를 한다. 사라사테 역시 호열자에 걸리게 되었고.

    어느 독지가의 도움으로 병에서 회복한 그는, 그 독지가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 빠리에 도착한다. 그는 당시 빠리 음악학교의 저명한 교수인 알라르의 오디선을 통과한다. 그의 천재성을 금방 알아 본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금방 명성을 얻게 되고, 당시 최고 경쟁적이었던 쁘레미어 콩쿠르에서 일등을 한다. 17살 때의 일이다.

    자신이 작곡한 작품을 위주로, 전문적인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작품은 당연히 스페인 풍을 띠었고, 불후의 바이얼린 협주곡 “지고이네르바이젠”을 비롯한 그의 많은 음악은 지금도 우리들의 정신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시의 많은 유럽 작곡가들이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에드워드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그리고 “카미유 생생”의 바이올린 협주곡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는 사라사테에게 헌정한 음악이다. 당시의 많은 음악가들이 사라사테의 영향을 받아 스페인 음악에 몰두하였으며, “드뷔시”나 “라벨” 같은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가들의 작품들은 사라사테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가 있다.



     사라사테는 진정한 신사로 변함없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는 일생동안 수많은 구애 편지를 받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렇지만 그는 여성에 대한 정중한 예의를 잃은 적이 없으며, 여성에 대한 스페인 기사도의 전형을 보여준 사람이다. 그는 연주가 끝난 다음 열광하는 여성 팬들에게 줄 선물로, 언제나 아름다운 스페인 부채를 준비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부자가 되었지만, 관대하고 겸손했다. 그는 별장이 있었지만, 페르민 축제 때는 반드시 팜플로나로 돌아왔으며, 발코니에 앉아 거리를 질주하는 황소 떼와 그를 몰고 가는 젊은이들을 내려다볼 때면, 사람들은 그를 올려다보고 환호했다고 한다. 그는 1908년 만성 기관지염 죽었으며, 그가 이 세상에서 만든 모든 재산을 팜플로나 시에 기증했다. 그 유산을 토대로 팜플로나 음악학교가 세워졌으며, 그 구내에는 사라사테 기념관이 있다. 그는 문화 권력자였지만, 황금을 탐하지 않았음은 물론,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삼은 권력자가 아니었다. 그는 스페인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그 청아한 정신과 함께, 사라사테 음악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겨 준 것이다. -by Hans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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