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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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 아메리카에는 모두 49개 국가가 있다. 캐리비언에 28개, 대륙에 21개이다. 2024년 말 현재 총 인구는 약 6억2천만 명 정도로, 소수의 국가를 제외하면 모두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이 대륙이 스페인에 의해 정복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은 그에 대한 이야기이다.

    콜럼버스는 역사상 누구보다도 인구에 회자되는 사람이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히틀러보다도 그에 관한 저서가 더 많다. 밀튼의 실낙원이나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에서도 그를 언급하고 있으며, 드볼자크의 신세계 교향곡-1892년 신대륙 발견 4백주년 기념 음악이다-은 그에게 헌정된 음악이다. 그는 열정적인 기독교인으로 중세적 유심론자이며 현대적 경험론자인 동시에 이태리의 영웅이지만, 제국주의적 악당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찌됐던 그는 1492년 그의 항해를 통해 세계를 바꿔놓은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유럽에 번영을 가져다 준 건 산업혁명이 아닌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라는 말도 있다. 그때 이 발견이 없었다면 유럽은 아직도, 아시아 대륙의 구석진 끝자락에 뒤쳐진 대륙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콜럼버스는 이태리 제노아 출신으로, 1451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콜럼버스 출생 2년 후인 1453년, 오토만터키에 의해 동로마제국이 멸망한다. 따라서 동방무역의 종착역인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의 손에 떨어진다. 유럽인들의 동방 무역의 길이 막힌 것이다. 따라서 서쪽으로 새로운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대륙 발견의 동인이다.

    콜럼버스의 시대 일반 대중은 지구가 평평하여 대양의 끝에서는 바닷물이 폭포처럼 떨어진다고 생각을 했지만, 또한 지식인들은 지구는 둥글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주장을 믿었다. 지구가 둥글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의 천문학자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275~194 BC)였다. 그는 신전 기둥의 그림자 길이와 자신의 두뇌 힘만으로, 지구의 둘레가 4만 킬로미터 정도일 것임을 거의 정확하게 추측한 사람이다. 에라토스테네스 5백년 후 프톨레미(Ptolemy, AD 127-145) 는 지구의 둘레를 실제 거리의 4/5인 2만마일 정도로 예측했다. 콜럼버스도 이 숫자를 믿었다. 특히 콜럼버스의 항해 의욕을 불태운 것은 마틴 벤하임(Martin Benhaim, 1459-1507)의 지구본이었다. 이 지구본은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컨대 지팡고(일본)는 스페인의 카나리아 군도로부터 서쪽으로 2천4백킬로미터 정도의 지점에 표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인도까지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바람만 순풍이면 며칠이내에 이 바다(대서양)를 건널 수 있다" 라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서도 그렇다. 따라서 콜럼버스는 인도를 발견하리라고 예상한 시점과 장소에서 그 섬을 본 것이다. 만일 그가 실제의 거리가 2만마일(3만2천킬로) 이라는 걸 알았다면, 더구나 그 사이에 대륙이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대양을 건너 그 먼 거리를 항해하겠다는 것을-스페인에서 대서양을 거쳐 인도로 가려면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하여 태평양을 건너야 한다- 감히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그러니까 콜럼버스의 그 무모한 모험을 북돋은 것은 그의 부정확한 지리적 지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항해는 과학적 신념보다는 그의 강렬한 신앙에 토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남긴 기록(El Libro de Profecias)에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 항해가 하나님의 소명임을 밝히고 있다. "과학은 내게 부질없는 것이며, 주님께서 내 마음을 여시어 인도까지 항해 할 수 있도록 하셨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는 또 그 항해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세상으로 바꾸어, 무슬림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의 항해를 또 다른 십자군 원정으로 생각을 한 것이다.

    1488년 포르투갈 국왕 요한II세에게 고한 항해 계획서에서, 3척의 배를 지원해 주면 대서양으로 나가 동방에 이르는 뱃길을 개척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바돌로뮤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1488)으로, 포르투갈은 이미 인도로 가는 항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콜럼버스의 제안에 냉담했다. 더구나 항해전문가들은, 콜럼버스가 말한 인도까지의 거리 3천8백킬로(2천4백마일)는 터무니없이 가까운 거리임을 왕에게 조언했다.

    포르투갈 궁정으로부터 거부를 당한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정과 2년에 걸친 로비 끝에, 1492년 4월 꼬르도바의 왕궁에서 이사벨라 여왕을 알현한다. 유럽의 마지막 무슬림 요새였던 그라나다가 함락된 후 3개월만이었고, 모든 유대인들에 개종을 하든지 아니면 스페인을 떠나든지 선택을 하라는 포고령이 내려진 직후였다. 이제 스페인은 아라공과 까스띠야의 통합에 따른 신생 통일국가로서,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교역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그가 말한 인도까지의 거리가 너무 짧아, 그 비현실성 때문에 거절을 당하지만, 남편 페르디난드의 권고에 따라 여왕은 곧 지원을 약속한다. 이사벨라 여왕은, 콜럼버스가 성공할 경우 제독의 지위와 새로운 땅의 총독으로, 그리고 그 땅에서 거두어들이는 모든 수입의 10%를 줄 것이며, 이러한 특권과 지위는 그의 장남에게 상속이 될 것임을 약속한다. 콜럼버스는 그의 열렬한 신앙심 때문에도, 여왕의 경건한 신앙심에 알맞은 사람이었다. 콜럼버스는 또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고갈된 왕실의 재정을 회복하여,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의 길로 나설 것임을 약속한다. 여왕으로서는 지원에 따를 위험 부담이 별로 없었고, 지원금 마련을 위해 여왕이 보석을 팔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지만, 원정 자금 2백만원( Maravedis)은, 영국의 헨리VII세에게 시집보낸 장녀 카타리나 공주의 결혼 자금의 1/30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인도를 향해 스페인의 팔로스Palos 항을 떠난 1492년 8월 3일자 일기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스페인과 대양 위 섬나라의 군주이시며 주님의 자녀이시고 탁월하고 강력하신 국왕 폐하와 여왕 폐하를 만백성이 칭송했다. 폐하께옵서는 1492년 올해, 유럽을 지배했던 ‘무어’와의 싸움을 끝내셨다. 금년 1월2일 위대한 도시 그라나다Granada의 요새인 알함브라Alhambra의 첨탑 위에, 군사들이 국왕폐하의 깃발을 게양하는 것을 보았다. 무어의 왕이 성문을 나와, 두 분 폐하와 나의 주군이신 왕자님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같은 달, 내가 폐하께 올린 인도의 땅과, 우리말로 왕 중 왕을 뜻하는 '위대한 칸'이라는 그 땅의 왕에 관한 정보에 따라, 그 왕과 그곳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와 더불어 모든 것을 아시고자,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들을 우리의 성스러운 신앙으로 개종을 시킬 수 있는지 아시고자, 폐하께서는 나 콜럼버스를 인도의 땅으로 보내실 것을 결정하셨다. 나는 이 위대한 칸Kahn에 관해 보고를 드렸고, 칸의 전임 왕들이 그들의 백성을 가르치고자 로마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우리의 신앙을 깊이 아는 사람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성부(주: 교황)께서 이를 허락한 적이 없어, 우상을 믿어 지옥 불에 떨어질 그 많은 사람들을 저버렸음을 또한 보고를 드렸다. 폐하 내외분께서는 캐톨릭 신앙과 그 신앙의 전파에 몸을 바치신 캐톨릭 신자로서 그리고 국왕으로서, 그리고 무슬림과 모든 우상숭배자들과 이단자들의 적대자로서 내게 명령하시기를, 과거처럼 육로가 아닌 방법으로 동방으로 갈 것을 명령하셨다. 이 명령을 받은 때부터 오늘까지 나는, 그 누구도 앞서 가본 적이 없는, 서쪽의 길로 갈 운명이었다. 그리고 같은 달 1월, 폐하의 왕국과 영토에서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시고 난 다음, 부족함이 없는 함대와 함께 인도의 땅으로 갈 것을 내게 명령하셨다. 이 일을 위해 나는 커다란 혜택과 귀한 칭호를 부여 받았는 바, 폐하께서는 나에게 Don이라는 귀족의 칭호와 바다의 제독이라는 지위를 부여하셨고, 내가 발견할 섬과 땅의 종신 총독으로 임명하셨으며, 이러한 지위는 나의 장남에게 상속됨과 더불어 대를 이어 상속이 될 것을 약속하셨다. 나는 1492년 5월 12일 토요일 "그라나다"를 떠나 "팔로스" 항구로 갔다. 그곳에서 이 사업에 안성맞춤인 세척의 배를 마련하여 항해 장비를 갖췄다. 8월 3일 금요일, 많은 보급품과 함께 여러 선원들을 데리고 그 항구를 출발했다. 나는 폐하의 섬인 대양 (대서양)상의 카나리아군도를 향해 항로를 잡았고, 그곳으로부터 인도에 도착하여 폐하의 서한을 그곳의 왕에게 전달하고 폐하가 명령하신 모든 임무를 수행할 때까지 멈춤이 없는 항해를 할 것이다.“

    그리고 36일 후인 14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는 지금의 서인도 제도에 도착한 것이다. 역사적인 그 날자 일기에서 콜럼버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이 틀 무렵, 벌거벗은 사람들이 보였다. 무장을 한 '핀타' 호의 선장 '알론소 핀촌'과 그의 형제이며 '니냐' 호의 선장인 '빈센테 핀촌' 과 함께 보트를 내려 타고 저어가 상륙했다. 나는 폐하의 깃발을 폈고, 두 사람의 선장은 녹색 십자가의 좌우로 F자와 Y자가 쓰여진 커다란 깃발을 가져왔다. 이 두 글자 위에 각각 폐하의 왕관이 그려져 있다. 우리 함대의 모든 배들이 주 깃발로 게양했던 것이다.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두 선장과 함대의 사무장인 '로드리고 데 에스코베도' , 그리고 검사 담당인 '산체스 데 세고비아'에게 명령하여, 국왕폐하와 여왕폐하를 위하여 이 섬을 취하는 것을 서약하고 증인을 서라고 했다. 나는 모든 필요한 선서를 하고, 이 모든 사실을 서기로 하여금 세세히 문서로 작성토록 했다. 앞에 말한 사람들 말고도 배의 모든 승무원들이 이 일에 증인을 섰다. 나는 이 섬을 은총이 충만하신 주님을 위해 '산살바도르San Salvador(지금의 도미니카 공화국)' ,라고 명명했다.

 

    이렇게 이 섬을 수중에 넣는 절차를 끝내고나니, 곧 사람들이 해변으로 몰려오기 시작했고, 모태에서처럼 모두들 벌거숭이였는데, 나는 그냥 한 어린 소녀만을 응시했다. 모두 젊은 사람들로 서른 살을 넘은 사람이 없어 보였다. 건장한 체구에 몸매가 늘씬하고, 잘생긴 얼굴들이지만, 흠이라면 내가 다른 곳에서 본 인종들보다 이마가 넓고 얼굴이 크다. 눈이 크고 아름다우며, 카나리아의 '이에르로'와 이 섬이 동서로 같은 선상에 있어, 우리가 예상했던 검은 피부와는 달리, 피부색은 카나리아 섬 주민처럼 햇빛에 그을린 색깔이다. 모두들 키가 크고 쭉 뻗은 다리에 배불뚝이가 없다. 정말 균형이 잘 잡힌 몸매들이다. 곱슬머리가 아닌 곧은 머리털이지만 말의 갈기처럼 거칠다. 눈썹 바로 위까지 앞 머리털을 늘어뜨리고, 잘라본 적이 없는 뒷머리털은 묶어서 길게 늘어뜨린 총각머리다. 많은 원주민들이 얼굴에 칠을 하고 있다. 몸 전체를 칠한 사람도 있고, 눈과 코만 칠을 한 사람도 있다. 검은 칠을 한 사람, 흰색을 칠한 사람, 붉은 색을 칠한 사람, 여러 가지 색깔을 칠한 사람들도 있다. 이 섬사람들을 이들의 말로 '과나바니' ,라고 하는데, 이들의 언어는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거침이 없고 유창하다. 우호적이고 공손한 사람들로서, 조그만 창 말고는 무기를 들지 않았고 쇠라는 것은 없다. 내가 칼을 보여주자 멋도 모르고 칼날을 잡은 사람이 손을 다쳤다. 이들의 창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창날로는 물고기의 이빨 또는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을 달았다. 이들은 무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우리의 성스러운 신앙으로 자유롭게 만들 수 있고 또 개종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니 만큼, 이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이었으면 했다. 그래서 몇몇 사람에게 붉은 모자를 주었고 또 몇몇에게는 유리구슬 목걸이를 주었다. 이들은 그 목걸이를 목에 걸었고, 내가 준 몇 가지 보잘 것 없는 물건들을 받았다. 모두들 선물을 받고 매우 기뻐했고, 매우 우호적이어서 다행이었다. 이들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선의로 우리에게 주거나 바꾸었지만, 가진 것이 별로 없는 듯하고 모든 물자가 부족한 것 같다. 대가를 치루지 않고는 이들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오늘 오후 '산살바도르' 로부터 사람들이 헤엄을 치거나 통나무로 만든 보트를 타고 우리 배로 왔다. 앵무새, 목화실타래, 창, 그리고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무슨 마른 잎(주: 담배) 같은 것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물건을 가져왔다. 우리는 약간의 유리구슬 목걸이와 사냥용 매의 목에 다는 방울로 답례를 했다. 이들 대부분은 몸에 상처가 있어 그 이유를 묻자, 근처 섬사람들의 공격이 있었고,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이들을 잡아 노예로 쓰려고 한 사람들이 왔을 거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재빨리 따라하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그들은 훌륭하고 숙달된 하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종교가 없는 듯 보여, 쉽게 기독교인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이곳을 떠날 때 여섯 명을 폐하께 데리고 가 우리말을 가르쳐야겠다.“

    이 날은 인류사에 있어 새로운 장이 열린 날로, 수만 년 간 서로 고립되어 있던 두 문화와 인종이 조우한 날이었고, 지중해 세계에 갇혀 있던 유럽이 대양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으며, 스페인으로 하여금 향후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게 한 날이었고, 먼 바다로 나가면 절벽으로 떨어질 거라는 중세의 빈약한 과학적 지식이 패배한 날이고, 인류가 중세의 미망으로부터 근세의 개명으로 커다란 발걸음을 내딛은 날이다. 또 이 일기에서 보듯 콜럼버스는, 남의 땅에 와서 불문곡직 그의 땅으로 선언하고, 그들을 하인으로 훈련시킬 계획과 기독교로 개종시킬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수 만년 동안 남북으로 길게 뻗은 대륙에서 살아 온, 150개 언어의 350여 종족 5천만 명에게 다가올 시련에 대한 예언이기도 했다. 콜럼버스가 이처럼 대양을 건너와 히스파니올라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을 그는 '인디오'라고 불렀다. 인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인디언으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말로 '타이노'였다. 타이노, 란 선량하다는 뜻이다. ‘타이노 족은 어린 양처럼 천진하고 마음이 순수하며 악의나 속임수가 없는 종족이다’ ,라는 기록이 아직도 남아 있다. 콜럼버스도 이들이 얼마나 유순한 사람들인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가진 것이 없어 우리에게 보답할 물건이 없었지만, 우리가 주는 선물 즉, 깨진 유리조각이나 그릇에 대해 무엇이든 모두 보답하려고 했다. 선원 한 사람이 동전 한 개를 주었더니, 25파운드 상당의 면화로 보답해 왔다.’ 

    이러한 모습은 그 후 수세기 동안 유럽인들로 하여금, 이들이야말로 축복 받은 자연의 자녀로서, 실낙원 이전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을 것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1493년 스페인으로 돌아갔던 콜럼버스가 이 섬에 다시 돌아 왔을 때, 그가 정착민으로 남겨 두고 간 부하들이 타이노의 공격으로 모두 죽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욕심을 알아차린 타이노가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1495년 콜럼버스는 2백 명의 병사를 지휘하여 그들과 전투를 치룬다. 곤봉과 활로 무장한 "타이노"군대와 석궁, 검, 창, 총, 그리고 기병으로 무장한 군대 간의 싸움이다. 화승총과 대포 소리에 타이노는 넋을 잃는다. 짖는 일이라고는 없는 그들의 개와는 달리, 맹렬히 짖어대며 공격해 오는 개들에 놀란다. 처음 보는 말과-말은 정복자들이 구대륙에서 가져온 동물이다- 말과 사람이 일체인 기병의 기괴한 모습에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이 전투가 신대륙과 구대륙간의 최초의 전투이며,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승리한 최초의 전투이다. 1496년 사로잡힌 이 섬의 추장은 스페인으로 압송 도중 선상에서 자살한다. 그의 미망인 '아나카오나‘가 잠시 추장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정복자에게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상당한 미인이었던 그녀는, 1503년 새로 부임한 스페인 총독을 위한 3일간의 환영연에서 그녀를 따르는 80명의 무리들과 함께 춤과 놀이로 봉사를 하지만, 그녀의 반란을 두려워한 스페인 총독은 그들이 모인 건물에 불을 지른다. 이 불로 그녀를 포함 모두 타 죽는다.

    콜럼버스가 이 섬에 발을 디딘 22년 후인 1514년, 타이노 족은 2천2백 명으로 줄었고, 정복자들이 가져온 질병과 정복자에 대한 굴종보다는 자살을 택해, 그 후 수십 년이 지나 지구상에서 멸종된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1492년 현재 이들의 인구는 아무리 적어도 50만 명은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파블로 네루다(칠레 시인, 1971년 노벨 문학상 수상)는 "1492년 이전 하나님의 자녀들이었던 이들을 십자가의 이름으로 모두 때려 죽였다" 라고 이 비극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들은 멸종되었지만,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문화적 유산을 남기고 있다. 

                                hamaca(hammock), canoa(canoe), huracan(hurricane), 

                                barbacoa(barbecue), savanna(savanna), casabe(cassava), 

                                batata(potato),....

    콜럼버스의 선단에는 86명의 선원이 탔었고, 그들 가운데에는 항해를 조건으로 사면을 받은 4명의 사형수도 있었다. 콜럼버스의 선단을 구성한 세척의 배 니냐Niña, 산타 마리아Santa Maria, 핀타호Pinta의 그림이 남아 있지 않아 실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스페인으로부터 추방되는 유대인을 실은 마지막 배가 출항한 다음 날 팔로스 항을 떠나, 보급품을 준비하기 위해 카나리아 군도에서 한 달을 보냈다. 그는 인도까지의 거리가 대략 4천킬로 정도로, 순풍을 타면 스무하루 정도 걸릴 것으로 믿었다. 그러니까 그가 도착한 서인도제도the Indies는, 그가 계산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난 새로운 땅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인도에 도착했다고 믿었고 죽을 때까지 이 신념은 변화가 없었다. 그는 서인도 제도를 발견한 후 3번이나 캐리브 연안을 탐험했지만-2차 때 코스타리카를 방문했고, 이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북미대륙을 밟은 적이 없었다. 그 후 프로렌스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가 캐리브 및 남아메리카 일원을 탐험한 끝에, 이 대륙이 인도가 아닌 새로운 대륙임을 확인했다. 이 공로를 인정하여 독일의 지도제작업자 발트제뮐러(M. Waldseemüller; 1470~1520)가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이 신대륙을 아메리카로 명명한 지도를 발간(1507)했고, 그 때부터 이 대륙이 아메리카 라고 불리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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