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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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조를 띈 선률의 "El Cant dels Ocells(새들의 노래)"는 샤를르마뉴 시대인 9세기 초부터 전해오는 까딸로니아 민요로, 1939년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가 첼로곡으로 - 이 음악은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다 - 편곡했다. 그러니까 1천2백여년 전 노래를 우리가 듣는 것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첼리스트로 살다 간 파블로 카잘스는, 1876년 바르셀로나 인근의 벤드렐(Vendrell)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Pilar Casals)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피아니스트로 유학생이었다. 그녀는 스승인 피아니스트 칼 카잘스(Carles Casals)와 결혼을 한다.

    카잘스는 3살 때부터 아버지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음악적 분위기 속에서 자란다. 5살 때, 아버지가 지휘하는 교회 성가대에서 제2소프라노로 처음 노래를 했다. 후일 그는 그날의 벅찬 감격을 잊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교회 올갠 반주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교사 겸 매우 섬세한 감성의 음악가였다. 그는 카잘스가 일곱 살이 되기도 전에 피아노와 바이얼린을 가르쳤고, 이에 따라 어린 카잘스는 곧 작곡을 할 수 있었고 또 첼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여덟 살 때 올갠 연주회를 갖는다. 올갠 페달에 겨우 발이 닿을 나이었다. 여덟 살 때 대부를 위한 마주르카 소품을 작곡했는데, 대부가 기뻐하여 그에게 군것질 거리로 말린 무화과를 상품으로 주었다. 그의 첼로에 대한 관심으로, 아버지가 동네 이발사를 시켜 커다란 박을 울림통으로 하는 첼로를 만들어 준다. 열 한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장차 그의 첼로 스승이 될 가르시아의 연주회에서 처음으로 진짜 첼로 소리를 듣는다. 그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검소하고 야심이 없던 그의 부친은, 그 박통 첼로를 만들어 준 목수에게 카잘스를 도제로 받아달라고 한다. 아들을 목수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열정적이고 총명했던 어머니는 카잘스의 교육을 위해 벤드렐을 떠나 바르셀로나로 간다. 열두 살 때였다. 그는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서 첼로와 작곡 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열심히 공부한다. 당시의 첼로 교육은, 오른 쪽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연습하는 것이 일반적인 교육 방법이었다. 그래서 팔이 경직되고 긴장이 되었다. 이 같은 주법을 고치기 위해 고생을 했다고 후일 그는 회고했다. 그는 새로운 주법을 개척한다. 오른 쪽 팔의 힘을 완전히 빼어 팔꿈치의 유연성을 극대화 하는 주법이다. 그는 쉽고 자연스러운 왼손가락 운지법도 개발한다. 권위적이고 전통적인 기존의 방법을 벗어나 새로운 첼로 연주법을 창안해 낸 것이다. 새로운 것은 저항에 부딪히게 마련이어서, 전통적인 주법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그의 새로운 방법이 실패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러나 그들의 예언과는 달리, 지금 전 세계 많은 음악학교에서 카잘스 주법에 의한 첼로 교육이 행해지고 있다. 1917년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1875~1962)와 협연 차 뉴욕에 왔을 때, 크라이슬러는 “활의 제왕이 오셨도다!” ,라고 외쳤다.

    1891년 바르셀로나 음악학교를 졸업 후, 그의 연주는 곧 세인을 주목을 받았고, 바르셀로나의 어느 카페에서 카잘스의 연주를 우연히 들은 모르피 백작의 소개로,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왕을 만난다. 그는 여왕의 고문이었고, 나중에 카잘스를 양아들로 삼는다. 여왕은 현 스페인 국왕 펠리페VI세의 고조할머니이다. 어린 첼리스트의 연주를 들은 여왕은 곧 장학금을 지급하고, 그녀의 재정 지원으로 마드리드 왕립음악학교에서 모나스테리오 교수의 지도하에 계속 공부를 한다. 그는 늘 여왕이 그의 두 번째 어머니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왕립학교 졸업 후, 모나스테리오 선생은 작곡가의 길을 갈 것을 권유하지만, 그는 어머니 뜻에 따라 연주가로 길로 나선다.

    스페인 내전 중 그는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에 반대하여 공화파 편에 섰다. 이 때문에 그는 프랑코의 박해를 받아 프랑스로 망명한다. 망명지 프라데(Prades)는 피레네에서 가까운, 당시 인구 5천명의 작은 프랑스 도시였다. 프랑코는 독재 정권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여러 번 그를 초청했지만,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그는 죽을 때까지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나치의 프랑스 점령 중 미국으로의 망명을 권유 받기도 했지만, 거절하고 프랑스에 남아, 프랑코에게 쫓겨 온 공화파 망명자들을 돕는다. 그는 게슈타포의 체포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친지의 도움으로 체포를 면한다. 전후 그는 미국으로 오라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을 필두로 한 많은 지식인들의 요청을 받는다. 그 메시지를 갖고 온 바이얼리니스트 알렉산더 슈나이더(Alexander Schneider; 1908~1993)는 천문학 적인 돈을 약속하기도 한다. 물론 그는 거절 했고, 그 대신 슈나이더의 제안에 따라 그곳 프라데에서, 바하 2백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1950년 제1회 “프라데 음악 축제”를 개최하기로 한다. 그는 이 콩쿠르에서 바하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 전 6곡을 연주했는데, 그의 나이 74세 때였다. 이 축제에서는 또 한국의 천재 소녀 정경화가 빛나는 연주를 하여 어려운 시절,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공헌을 하기도 했다.

    이 소나타는 그의 음악적 성공에 커다란 역할을 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소나타의 악보는 우연한 기회에 그의 손에 들어온다. 그가 열세 살 때, 바르셀로나의 어느 음악 상점에서 우연히 어떤 헌 악보를 발견한다. 처음 그는 피아노 반주가 없는 소나타에 의심을 품었고, 사람들도 단순한 연습곡으로 생각을 했지만, 그는 그 작품의 진가를 알았다. 여섯 곡을 전부 연습하는데 12년이 걸렸다고 한다. 1925년 처음으로 카잘스의 연주가 녹음되고, 이 레코드(CD)는 지금도 구입할 수 있다. 이 소나타는 6개 악장 즉, 서곡(Prelude), 알레망드(Allemande, 독일), 꾸랑(Courante, 프랑스), 사라반다(Sarabande, 스페인), 메누엣(Menuet, 프랑스), 기게(Gigue, 영국)등 각 악장이 여러 나라의 무곡으로 되어 있다.

    평생 독신이었던 그는 여든 한 살 때, 푸에르토 리코 출신의 첼리스트이며 그의 제자인, 스물한 살의 마르타 마르티네스와 결혼한다. 그의 어머니 나라에서 온 여인이었다. 그는 폭력에 반대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운 인도주의적인 평화활동으로 1971년 유엔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1973년 96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그의 어머니 나라인 프에르토 리코에 묻혔다가, 프랑코가 죽은 후인 1979년, 그가 태어난 벤드렐로 이장을 했다. 그의 장례 기간 중 유엔본부는, 파야(Manuel de Falla; 1876~1946)의 자장가 “Nana"를 온종일 틀었다. 그가 남긴 말은, 시멘트 문명에 시달린 우리들이 귀 기우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매일 다시 태어난다. 나는 일생 동안, 같은 방법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 먼저 자연을 호흡한다. 이는 이 세상을 재발견 하는 일로, 내가 이 세상의 일부라는 기쁨을 준다. 그렇게 함으로서, 삶의 경이로움을 깨닫고, 내가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놀라운 감정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 다음 피아노 앞에 앉아 바하의 서주와 후가(Prelude and Fugue)를 친다. 이는 우리 집에 내리는 축복이다. 내게 음악이란 언제나 새롭고, 환상적인 그 무엇이다. 바하야말로 바로 자연이며, 하나의 기적이다. 삶이란 복잡하고, 따라서 우리는 삶과 자연의 아름다움, 단순함을 보아야 한다. 삶과 자연을 사랑함으로서 우리는 도덕적, 정신적 가치에 반하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

    for More Readings;

www.beethovenno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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