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Guern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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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 – 1973)가 남긴 세기의 그림 “게르니카 (Guernica)"는, 전쟁, 학살, 제례, 순교 같은 주제를 스페인적인 에토스로 형상화함으로써,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을 고발한 작품이다. 이 그림의 주제가 된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피레네 산맥 가까운 바스크 지방의 한 마을이다. 지세가 험악하여 사나운 이슬람 군대조차도 정벌을 못한 곳이다. 바스크어는 전치사가 거의 없고 발음을 하지 않는 음소를 가진 긴 어휘들이 많은, 지구상 그 어느 언어와도 무관한 바스크어를 사용하지만, 바스크 문화는 켈트 문화이다. 이 마을은 스페인 내전 시(1936- 39) 프랑코 편을 든 독일 나치 공군의 무차별 소이탄 폭격으로 2천여 명의 비무장 주민이 사망한 곳이다. 프랑코에게 대든 대가로 치룬 희생이었다.
스페인 내전의 원인은 여러 정치, 경제, 사회적, 역사적 요인들이 복잡하게 결합하여 발생한 것이지만, 그 본질에는 결국 “소유”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즉 내전을 불러 온 모든 갈등은 소유의 문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내전 직전의 스페인은 국민 총생산의 60%가 농업부문이었다. 이를 생산하는 전국 경작 가능 토지의 반이, 평균 120정보의 토지를 소유한 대토지 소유주들의 소유였다. 캐톨릭교회들 또한 거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대규모 농장을 뜻하는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라는 어휘는 이처럼 스페인의 대토지 소유제 에서 비롯된 말이다. 나머지 50%의 토지는 한 가족의 식량 확보조차 어려운 영세농, 소작농이 대부분이었으며 많은 농민들이 수백 년 이래 농노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처럼 소수에 의한 토지 독과점이 형성된 원인은, 로마 식민지 이래 전투에서의 승리자의 몫으로 획득된데 기인하고 있다. 세르판테스는 그의 소설“돈키호테”에서 이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
"기사들은 그 종복들을 그들이 정복한 왕국이나 섬나라의 왕으로 삼는 것이
오랜 관습이고...“
1936년 실시된 총선에서 개혁파인 공화파가 승리한다. 이들은 19세기 이래의 숙원이었던 농지 개혁에 착수한다. 그렇지만 총선 다섯 달 후 프랑코 장군을 우두머리로 하는 반개혁파 군부의 반란으로, 선거에 의해 합법적으로 성립된 의회가 전복된다. 이에 따라 공화파와 국민전선파로 나뉘어 내전에 돌입한다.
국민전선측은 “빨갱이냐 기독교 문명이냐” 를 기치로, 공화파는 “전제냐 민주냐”를 기치로 내걸고 싸웠다. 부유층, 보수주의자, 귀족, 왕정주의자, 캐톨릭 교회, 기업가, 대토지 소유주들이 프랑코 장군의 국민전선 측에서,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온건 자유주의자들이 공화파 편에서 싸웠다. 전쟁은 국제전으로 번져 독일, 이태리, 포르투갈은 국민전선 쪽에서, 그 유명한 국제여단은 공화파 편에서 싸웠다. 국제여단에는 미국, 영국, 캐나다, 소련 등 세계 40개국 이상에서 지원병들이 참가하였고, 영국작가 조지 오웰을 비롯한 많은 인텔리겐챠들이 국제여단의 지원병으로 공화파를 위하여 싸웠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공화파 종군 기자로 참전을 하였고, 그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에서 마드리드 인근의 공방전을 잘 묘사하고 있다.
스페인 내전은 제2차세계대전의 전초전 성격을 띤 전쟁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각종 현대화된 기계와 과학기술이 총동원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독일은 기계화된 전투력을 시험함으로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2차대선 시 전격전이라는 전술로 폴란드를 침공한다.
3년간 싸운 이 전쟁에서 공화파가 패함으로서, 스페인 공화정을 구하겠다는 국제적 대의명분도 이상에 그쳤다. 그리고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 이 전쟁에서 대략 1백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50만 명이 전투와 처형에 따라, 그리고 또 다른 50만명이 기아,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전후 국민전선파의 대대적인 보복에 따라 처형과 강제 노동으로 20만가까운 공화파 포로가 목숨을 잃었고, 또 다른 1백만여 명이 보복을 피해 망명지로 도피를 하기도 했다. 한편 3백여 명의 수녀, 7천여 명의 캐톨릭 수도승 및 사제들을 비롯하여 4만여 명의 국민전선측 비전투원들이 공화파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국민전선파의 승리에 따라 40년에 걸친 프랑코 독재와 파시즘이 초래된다. 그의 치하에서는 모든 탐미적인 풍요로움이 거부되었다. 피카소나 달리(Salvador F. Dalí, 1904 -1989)등의 전위적인 미술은 부정되었고, 체제 비판적이거나 과거 비판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들은 반역자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체제 선전에 별 가치가 없다는 판단에서 클래식 음악도 무시되었다. 1975년 프랑코가 죽은 다음에야 스페인 예술계는 프랑코 시대의 악몽에서 벗어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가 죽은 다음 거의 5백년 동안 죽어 있던 종교적 관용이 회복되었으며, 추방되었던 회교도나 유대인들의 후손들이 옛 고향으로 돌아올 수가 있게 되었고, 이들의 종교적 자유도 허락되었다.
피카소는 게르니카(가로 7.8미터 세로3.5미터)의 플롯과 부분적인 뎃생 연습을 위해 2개월여를 보냈고 , 붓을 댄 지 2주 만에 완성을 했다. 1937년 파리에서 처음 전시된 이래 뉴욕 메트로폴리턴 미술관이 소장하였다가, 1980년 스페인의 나토 가입에 대한 대가로 미국이 돌려주었다. 현재 마드리드 소재 “소피아 여왕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는 1973년 망명지 파리에서 죽었으며, 프랑코 통치 기간 동안 조국 스페인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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