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
French Revolution(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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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 대혁명(개요)
프랑스 대혁명은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결합한 결과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은 루이15세와 루이16세의 구체제(Ancien régime) 개혁 시도가 오히려 혁명을 초래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루이14세, 루이15세 또는 루이16세 아니면 이 세 사람 모두 혁명 발발의 책임자라고 말한다. 루이14세 (1643~1715)에 의해 약화되긴 했지만 귀족들은 아직도 왕권에 도전할만한 강력한 세력이었고, 루이15세(1715~74)와 루이16세(1774~92)는 그 누구도 강력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귀족들은 특권하에 군대나 정부의 고위직을 독점했고 가톨릭 승려는 병원, 학교, 고아원의 운영자들이었다. 출생, 사망, 결혼에 따른 신고는 가톨릭 교회에 해야 했고, 교회에 출생신고를 하지 않거나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은 사생아로 취급되어 법적인 권리가 없었다. 이 같은 교회와 귀족세력의 발호는 사회적 긴장을 불러왔고 또 왕으로 하여금 개혁을 어렵게 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더구나 루이14세가 양위를 할 당시 프랑스는 7년전쟁,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등 일련의 전쟁으로 인한 전비 때문에 빚더미에 허덕이고 있었다.
또 루이15세나 16세의 치세 기간 중 프랑스는 수많은 군사적 외교적 패배를 했고, 이로 인해 왕권의 버팀목인 군대의 충성심과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치세 초기 루이15세는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치세 말에는 뽕빠두르 (Madame de Pompadour), 뒤 배리(Madame du Barry)등 귀부인들이 개인적인 취미로 정사에 관여함으로써 “여자들의 노리개”라는 말로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루이 15세의 손자(루이15세의 아들들은 모두 죽었다)인 루이16세는 선량하고 양심적인 왕으로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튀르고(Jacques Turgot)같은 개혁파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튀르고의 적대자들은 그를 고집불통 또는 부패한 자로 매도하였다. 이 같은 반대 세력의 모함과 연약한 왕권으로 인해 그의 개혁은 실패로 끝이 났다. 낙담한 왕은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왕으로 남기만을 원했다. "선량한 왕은 수많은 벌레들이 빨아먹는 식물에 불과했다"라는 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다. 루이16세는 평화를 유지해야만 개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 등 대외 문제를 기피했고, 이로 인해 왕의 권위는 더욱 하락하였다. 그의 아내 마리 앙트와네트도 백성들의 조롱 대상이었다. 그녀는 성실한 아내 겸 어머니였지만 왕의 명성에 도움이 되는 일을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 부부가 악당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이유는, 그들의 개혁 대상이었던 귀족 계급의 모략 때문이었다. 계몽주의자들 즉, 볼테르, 루쏘, 세꽁다(Charles-Loise de Secondat), 몽테스퀴외, 디드로 등은 구체제를 버티는 두 기둥인 군주주의와 교회, 불공평한 조세제도, 정의롭지 못한 법률, 노예제도, 전쟁의 악폐, 무자비한 종교, 종교의 완고함 과 미신성에 대해 공격을 했다. 이 같은 계몽주의자들의 공격 역시 왕권을 약화시켜 개혁을 더욱 어렵게 했다.
경제 상황 역시 혁명을 불러 온 중요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정부는 주로 직접세에 의존하는 세입 구조였다. 특권계층인 귀족 및 승려들은 중세 이래 면세 대상이었고, 소외계층이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구조였다. 루이16세 즉위 시 프랑스는 파산 직전이었다. 정부는 채무 상환을 위해 점점 더 많은 세금을 거둬야 했다. 인구의 증가, 유럽 전역에 걸친 경제의 침체, 실업의 증가, 인구와 식량 공급 간의 불균형, 1788~89년간의 이상 기후로 인한 흉작은 식량 가격의 폭등을 초래하여 이 또한 혁명 발발의 한 원인이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왕은 삼부회의(États généraux: 승려, 귀족, 평민으로 구성된 국민회의로 1303년 처음 개최되었다)를 소집했다. 1614년 이후 처음 소집된 이 회의는, 프랑스가 직면한 위기의 해법을 찾고자 한 것이었다. 귀족들로 구성된 파리 최고법원 (Parlement: 구체제 하 프랑스 최고 상고 법원. 왕령이 법제화되기 전 심의 등록 기관임)은 소집될 삼부회의가 과거와 같은 조건 즉, 제1계급인 승려, 제2계급인 귀족, 기타 제3계급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투표권은 각 계급 동등하게 모두 한 표여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에 대해 법률가, 중소상공인, 농민들로 구성된 제3계급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제3계급은 자신들의 권리를 담은 책자(What is the Third Estate?)를 통해 최고법원의 결정을 비난했다. 이 책자에서 제3계급은 자신들이 백성의 대표임을 선언하고, 특권적인 질서가 무너지면 프랑스는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임을 천명했다. 이들은 루이16세에게 제3계급에게 더 많은 투표권 즉, 다른 계급보다 두 배의 투표권을 부여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왕은 재무대신 네커(Jaques Necker)의 간언으로 제3계급의 요구를 수락했다.
1789년 봄, 삼부회의 대표를 뽑는 선거가 치러졌다. 제3계급은 이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은 것이다. 동시에 불공평한 조세제도에 대한 불만의 편지(Cahiers des Doleances)도 작성했다. 이 문서는 혁명 전야, 다양한 계층의 여론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문서는 조세권의 남용 예와 관련지역, 해결 방안까지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5월 삼부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왕은 개혁을 위한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3계급은 왕이 그들의 요구를 수락할 때까지 모든 계급이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제3계급의 대표자들은 다른 계급의 대표자들에게, 자신들을 국민을 대표하는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 1계급 1표제에 반대하여 제3계급이 만든 임시 의회. 나중에 제1및 제2계급의 일부 인사들이 참여함)로 인정하고 만나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헌법이 제정되어야 해산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 때 루이16세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때문인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왕은 처음 제1계급 및 제2계급 편에 서지만, 1789년 6월 들어 마침내 제1계급 및 제2계급에 대해 제3계급과 만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제1및 제2계급으로부터 왕을 보호하기 위해 베르사이유 궁에 군대가 주둔하고, 6월11일 왕은 개혁의 상징 인물인 네커를 해임했다.
군대의 소집과 네커의 해임, 밀가루 가격의 폭등, 부랑자와 실업자들이 파리의 거리에 넘쳐나면서 시민들은 스스로 방어를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7월14일, 시민들은 무기 탈취를 위해 전제적 왕권의 상징인 바스띠유 감옥을 향해 행진했다. 감옥 소장은 폭도로 변한 시민들의 감옥 내 진입을 허락하고, 동시에 병사들에게 사격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폭도로 변한 시민들은 감옥소장과 병사 6명을 살해한 후 귿들의 목을 잘라 창에 꿴 다음 거리를 행진했다. "그 같은 잔학 행위가 도덕으로 여겨지고, 인도주의는 우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라는 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다. 군중의 바스띠유 점령은-그 날은 지금 프랑스의 국경일이다- 파리로 부터의 대탈출을 불러 왔다. 왕이 그 같은 폭도들을 처벌할 수 없으리라는 판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파리를 탈출했다. 이제 폭력적인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왕은 아직까지 제3계급과 만나지 않고 있는 제1 및 제2계급에 대해 그들을 만날 것을 촉구하고 궁정 수비대를 해산했다. 한편 폭동은 지방으로 번졌다. 8월4일, 귀족 출신 국민의회 의원 몇 사람이 질서 회복을 위한 조치로 소작인에 대한 강제노동부과권(Corvee) 등 귀족의 특권 폐지를 선언했다. 국민의회는 교회의 십일조와 면세 권을 폐지하고, 소수의 중요직을 제외한 공직 진출의 문호를 개방했다. 그러나 왕은 이 같은 개혁을 승인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서신을 대주교에게 보냈다. 8월26일, 국민의회는 인권선언(The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the Citizen)을 발표했다. 계몽사상과 미국 독립선언서에 영향을 받은 이 선언은 인간의 자연권, 법에 의한 통치, 그리고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담은 역사적인 문서이다.
베르사이유 수비를 위해 해산된 수비대를 대신하여 프랑드르 연대가 오는데, 이 군대의 환영연이 개최되었다. 이 환영연에서 부르봉 왕가의 백색기와 오스트리아 합스브르크가의 흑색기가 펄럭였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마라(Jean-Paul Marat)나 데무렝(Camille Desmoulins)등 선동가들이 왕은 국민의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같은 소문에 따라 파리에 군중들이 운집했다. 10월5일, 여성 시위대들이 시청 앞 광장에 모여 빵 값의 인하를 요구하며 베르사이유까지 행진에 나섰다. 같은 날 밤 왕은 국민의회 결정을 받아들이지만, 군중들은 왕의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군중들은 왕궁으로 몰려가 수비대 병사를 죽이고, 그 목을 잘라 창에 꽂아 행진하여 왕비의 처소에 이르렀다. 왕비는 옷도 제대로 못 입은 채 도망쳤다. 그녀는 "겁에 질려 입이 얼어붙었다."라는 당시의 목격자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왕궁 수비대는 민병대(질서 유지를 위해 파리 시민들이 임시 만들었던 군대. 중산층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를 향해 겨누었던 총을 거두어들였다. 라파예트(Marquis de Lafayette, 1757~1834, 프랑스의 귀족. 인권선언을 작성한 인물)가 지휘하는 민병대의 질서 회복으로, 왕과 국민의회는 베르사이유로부터 파리로 돌아왔다. 왕은 포로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 바스티유 공격 -
1789년 가을에 가장 중요한 혁명 입법이 통과되고 이때 과격파인 쟈코벵 (Jacobin Club)이 등장하였다. 쟈코벵은 자칭 헌법동지회(the Society of Friends of the Constitution)의 회원들로서, 자코벵이라는 명칭은 그들이 모인 건물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1791년 가을 그 회원 수는 1천명 정도였으나 과격한 혁명 국면에서는 2천명이 넘었다. 이 같은 회원 수와 거대한 조직으로 쟈코벵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가 있었다. 회원 자격은 처음 중산층 이상에 국한했으나, 나중에는 빈민들에게도 허용함으로서 과격성을 띄우게 되었다. 1793년에는 쟈코벵은 마운틴(Mountain)의 세력 하로 들어간다. 마운틴은 좌익으로서, 좌익으로 불리게 된 것은 혁명의회(Convention) 회의 시 왼쪽 가장 맨 꼭대기(Mountain)에 앉았기 때문에 그리 불리게 되었다. 마운틴에는 약 3백명 가량의 회원이 있었는데, 로베스삐에르(Maximilien Marie Isidore Robespierre), 당통(George Jacques Danton), 마라(Jean Paul Marat)등이 그 지도자였다.
루이16세는 혁명의회로부터 왕의 거부권 제한이라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혁명의회는 정부 채무를 갚기 위해 교회 재산을 몰수, 매각하고 공채와 지폐(Assignat, 혁명정부가 발행한 임시 지폐)를 발행했다. 이어서 교회 개혁을 위한 성직자법(the Civil Constitution of Clergy)을 통과 시켰다. 교구를 재편하고 주교 수도 138에서 83명으로 줄였다. 교회 종사자들도 모두 국가 공무원으로 간주하여 공무원법이 적용되도록 하고 급여도 계급에 따라 다르게 하였으며 모든 승려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서약토록 했다. 이 같은 조치는 당연 가톨릭의 저항을 불렀다. 138명이 주교 가운데 충성을 맹세한 주교는 7명에 불과했고, 전국 가톨릭 승려의 반 정도만이 충성을 서약했다. 1791년 교황이 성직자 법을 비난하고 충성을 서약한 자를 파문하겠다고 하자, 이들 승려의 반이 서약을 철회하기도 했다. 혁명은 교회를 두 종류로 갈라 놓기도 했다. 공식적인 교회와 지하 교회가 그것이다. 개혁 입법으로 인해 국가는 교회와 그리고 파리는 로마와 싸우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교회의 분열은 1801년 나폴레옹이 교황청과 화해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왕은 혁명에 환멸을 느꼈다. 1791년 왕의 가족들은 전통에 따라 부활절을 보내려고 시골로 가려고 했으나 민병대가 이를 제지했다. 자신이 사실상의 포로이고 또 백성들의 적대감으로 인해 왕은 파리를 탈출하고자 했다. 1791년 6월 파리를 탈출하지만, 불운하게도 혁명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문서를 두고 떠났다. 왕의 가족들은 다시 파리로 압송되어 왔다. 국왕의 도주로 인해 헌법의회( 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 국민의회 후신으로 1789년부터 1791년9월까지 기능함. 사실상의 통치기구로 신헌법을 제정함)는 왕이 혁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쨌든 국왕은 그에게 제시된 새로운 헌법안에 서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입헌군주 제도를 담고는 있던 새 헌법은 그러나 일 년도 못가 폐지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위기가 입헌군주제의 목숨을 끊은 것이다. 유럽 여러 열강들은 프랑스 혁명에 개입하지 않았는데, 혁명으로 프랑스가 내부적으로 붕괴되어 침략자로서의 기능을 잃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의 확산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프랑스 사태에 개입하기를 원했다. 1791년 6월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드II세는 파두아 교서(Padua Circular)를 통해, 유럽 각국들이 단결하여 혁명 확산을 막을 것을 촉구했다. 프랑스는 프랑스 내 교황령을 몰수하고 국제조약을 위반하는 등 더한층 적들의 공포감을 부추기고 있었다. 왕은 전쟁을 원했는데, 전쟁으로 군대가 붕괴되면 백성들이 그의 편이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의회 내 주도적 세력인 지롱드(Gironds) 역시 전쟁을 원했는데, 전쟁에서의 승리는 외국인들이 혁명의 편을 들 것이고, 그렇다면 혁명의 정당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라는 기대감에서였다. 이들은 숫자에 있어서도 130명으로 뛰어난 웅변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1791년 8월 필니츠 선언(the Declaration of Philnitz)을 통해 레오폴드II세는, 만일 유럽국가들이 동조할 경우 혁명을 분쇄하고 질서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를 공격하겠다고 했다. 만일이라는 말이 들어가 헛소리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이 선언은 프랑스에 전쟁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로베스삐에르 같은 강경파도 전쟁의 무익함을 주장하여 반대했지만, 1792년 4월 프랑스는 대 오스트리아 선전포고를 한다. 그러자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 이제 프랑스에 대재난이 닥치게 되는 것이다.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동맹군은, 만일 프랑스 왕이나 왕비에게 불상사가 발생할 경우 보복할 것임을 선언했다(the Brunswick Manifesto, 1792년 7월 25일). 이 선언은 전쟁을 원했던 루이16세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을 악화 시키는데, 왕이나 왕비에 대한 언급으로 인해 왕이 반혁명일지도 모른다는 혁명의회의 의구심에 불을 지른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프랑스는 전투 초기에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많은 장교들이 탈영하거나 망명을 했다. 군기가 문란해지고 장교를 살해하는 하극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 직면하자 전쟁을 반대했던 로베스삐에르가 명성을 얻게 되었고, 왕실 특히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에 대한 의혹과 불신이 확산되었다. 경제도 악화되어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고, 생필품 부족으로 물가가 폭등했다. 지방으로부터 혁명을 지지하는 백성들이 파리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마르세이유로부터는 적대적인 노래 마르세즈(Marseillaise)를 -나중에 프랑스 국가가 된다-부르며 빠리로 진군해 들어왔다. 로베스삐에르, 당통, 마라 같은 선동가들이 헛소문을 퍼뜨려 폭동을 부채질 했다. 그들은 왕을 축출할 것을 의회에 요구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제2의 혁명”이 발생했다. 폭도로 변한 군중들은 튀러리(Tuileries, 파리 세느 강변의 왕궁)를 공격, 스위스 용병수비대 6백 명을 죽였다. 폭도들이 또 혁명을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의회는 투표로 왕권을 정지시키고 새로운 공화국 헌법을 공포하지만, 폭동은 그치지 않았다. 라파예트가 지휘하는 민병대가 오스트리아 군에 패배하고, 프러시아 군대가 파리로 들어오는 마지막 관문인 베르덩(Verdun)을 점령했다. 적과 내통한 반혁명 세력이 혁명을 무력화시킬 것이라는 소문에 폭도들은 포로로 잡혀있던 가톨릭 부녀자와 어린이 1천3백 명을 학살했다(the September Massacre).
반격에 나선 프랑스는 곧 발미(Valmy)전투에서 오-프러시아 동맹군을 격퇴하고 프러시아 군대의 파리 진격을 봉쇄했다. 곧 이어 오스트리아령 네델란드와 라인 강 좌안의 사보이를 공략했다. 이 같은 승리에 따라 프랑스 혁명 세력은 두 번에 걸친 포고령 (Propaganda Decree)을 발표했다. 이 포고령은 자유를 획득하려는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고 돕겠다는 것으로, 이는 혁명 수출을 뜻하는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었다.
이제 왕의 운명은 매우 비관적이었다. 강경파 생쥐스(Louis -Antoine de Saint-Just: 1767~94,혁명 당시 군인 및 정치가)는, 왕이라는 자체가 범죄이므로 재판 없이 루이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깨끗한 통치는 한 사람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왕을 변호하는 저명한 변호사가 있었지만, 왕은 반역죄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그는 1793년 1월에 기요틴으로 목이 잘리고, 그가 죽은 후 1년도 안 되어 그의 아내 마리 앙트와네트도 처형되었다.
왕의 처형은 혁명의 수출을 두려워한 영국, 프로방스 연합(United Provinces: 네델란드 북부지방), 스페인, 사르디니아(지중해 상의 섬)로 하여금 오스트리아-프러시아의 동맹 편에 서게 했다. 이에따라 제1차 대 프랑스 동맹(the First Coalition)이 맺어진 것이다. 오-프러시아 동맹군이 반격을 개시하여 라인란트를 넘어 프랑스를 공격했다. 프랑스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총동원령은 내부의 저항을 불러와 프랑스 서부 방데(Vendee) 지역에서는 반혁명 반란이 일어났다. 이제 프랑스는 내우외환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화폐의 가치가 폭락하고 생필품 부족에 물가가 폭등했다.
1793년 5월31일, 8만 명의 폭도가 혁명의회에 침입했다. 그들이 온건파인 지롱드의 체포를 요구하자 의회로부터 지롱드 당원들이 탈출하였다. 마르세이유, 보르도, 리옹에서 폭동이 발생하고 뚤롱 항은 영국이 점령했다. 폭도와 합세한 좌익은 강력한 권력을 장악했다. 좌익(Mountain)은 온건파인 브리쏘(Jacques Pierrre Brissot, 1754~1793) 파와 대립하고 공포정치를 지지했다. 마운틴은 국민투표 없이 왕을 처형하자고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유는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거나 "절망은 반역과 같다."라는 로베스삐에르의 말을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같은 관점은 그 특성상 군주주의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의회를 장악한 좌익은 공안위원회(Comité de salut public)를 장악하는데, 이 위원회는 로베스삐에르의 공포정치 기간 중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다. 1793년 여름부터 1794년 여름까지 계속된 공포정치 기간 중 4만 명이 처형되고, 프랑스를 휩쓴 내전으로 40만 명이 죽었다. 의회의 많은 의원들이 이제 프랑스는 내우외환으로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외적과 싸우기 위해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모든 시민은 군인이며 모든 군인은 시민" 이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1793년 9월5일, 포고령 "오늘의 질서"가 공포 (terror)라는 이름으로 공포되었다. 곧이어 검문 법(Law of Suspects)이 공포되어 누구든 검문을 할 수 있고, 체포할 수가 있게 되었다. 10월10일 헌법이 정지되고 "평화를 회복할 때까지 혁명"임을 선언했다. 세 차례에 걸친 물가안정법을 통해 곡물, 밀가루, 버터, 식용유, 브랜디, 석탄, 초, 소금, 담배의 가격을 동결하고 임금을 규제했다. 정부는 전쟁 물자를 징발하고 공격에 미온적인 장군들을 처형했다. 지방의 반혁명 세력과 연방주의자들에 대해서도 탄압과 대대적인 처형에 나섰다. 1794년 6월10일 소위 대공포(the Great Terror)의 출발점이 되는 5월22일 법(the Law of 22 Prairie)이 공포되었다. 이 법은 단심제로 피고인의 방어권은 박탈되고 죄의 입증을 위해 증거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7주 간 이 법으로 재판을 받아 처형된 사람 수가 앞 선 14개월 동안의 숫자를 초과할 정도였다.
이 처럼 무자비한 재판은 좌, 우익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좌익은 경제 개혁과 무신론 채택을 우선해야 한다고 했고, 온건파인 당통은 외적과 내부의 적이 분쇄되었으므로 공포정치를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기요틴으로 목이 잘렸다. 많은 사람들이 공포정치를 반대하고 자신들 역시 희생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공포정치의 주인공인 로베스삐에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고립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공포정치의 성공이 공포정치의 패망을 가져온 것이다. 혁명력 테르미도르 9일에(Thermidor: 그레고리력으로 7월19일부터 8월18일까지), 로베스삐에르, 생쥐스 등 공포정치의 주역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제 테르미도르 반동의 주역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혁명재판소를 해체하고 수천 명에 달하는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쟈코벵 클럽을 폐쇠하고 로베스삐에르의 지지자였던 파리코뮌과 공안위원회, 군대 및 정부에 파견되어 있던 쟈코벵들을 숙청했다. 이 기간 중 로베스삐에르 치하 최악의 학살자였던 카리에르(Jean-Baptiste Carrier)를 비롯해 70명이 단두대로 목이 잘렸다. 카리에르는 “공화 세례식”이라는 처형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물에 빠뜨려 죽인 학살자였다. 반혁명 봉기가 있었던 방데 지역에는 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1794년 12월 그동안의 경제 통제를 풀자 인플레가 폭발하였다. 화폐 가치가 폭락하자 세금 납부를 현금이 아닌 물납으로 바꿨다. 지폐 발행을 중단했지만 화폐의 실질 가치는 명목 가치의 2.5%로 줄어들었다. 채권자, 고정수입자, 임금수입자가 붕괴되고 경제에 대한 신뢰가 붕괴되었다. 1795년 봄 군중들은 다시 혁명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다. 5월 그들은 의회를 점령하고 의사당을 향해 대포를 조준한 다음, 이를 저지하는 부의장의 목을 잘랐다. 의회는 군대를 동원하여 폭도들을 진압했다. 폭도들이 분쇄되어 혁명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로베스삐에르 잔존세력과 공포정치, 공포정치의 모든 산물이 프랑스 전역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테르미도르 주역들은 견제와 균형에 입각한 정교한 새 헌법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이에 따라 5명의 집정관으로 구성되는 집정부(Directory)가 구성되었다. 집정관은 선거를 통해 매년 한 명씩 바꾸도록 했다. 선거를 통해 입법권을 갖는 5백인회(Conseil des Cinq-Cents: 하원)와 그 입법권에 대한 거부권을 갖는 원로원(Conseil des Anciens: 상원)도 구성되었다. 또 프러시아, 프로방스 연합, 스페인과의 평화도 이루어졌다. 모로(Jean Victor Moreau), 줄당(Jean Baptiste Jourdan),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같은 유능한 장군들이 독일과 이태리를 공략하고, 사르디니아와 오스트리아에 압력을 가하여 전쟁에서 손을 떼게 했다. 그러나 좌,우익 모두 집정부에 불만을 표시하고, 부패와 이기주의라는 구실을 들어 집정관들을 공격했다. 1795년 10월 왕당파는 자유선거를 내세워 파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했지만, 공격적인 사령관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좌익으로부터의 협박은 언론인 바뵈프(Francois-Noel Babeuf)가 주도했다. 그는 급진적인 개혁을 지지한 사람으로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 토지의 분배를 주장한 사람이었다. 1796년 그는 남아 있는 쟈코벵 무리와 함께 봉기를 시도했지만 계획이 누설되어 체포, 처형되었다.
집정부는 탐욕, 부패, 권력에의 집착이라는 이유로 계속적인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 더욱 더 군대에 의존했다. 마침내 혁명전쟁에서 명성을 얻은 젊은 군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등장한다. 그는 1799년 11월 쿠데타에 성공했다. 그리고 1804년에 황제가 되었다. 그 많은 세월에 걸쳐 전쟁과 궁핍, 수많은 죽음 끝에 얻은 것은 절대왕정보다 더 가혹한 독재라는 것을 이제 프랑스 국민들이 깨닫게 되는 것이다.
2. 구체제(Ancien Régime)의 몰락.
역사학자 테인(Hippolyte Adolphe Taine, 1828~93)은,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을 계몽주의자(philosophes)들 때문으로 보았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성과 비판을 통해 구체제의 근본을 뒤흔들고, 부당한 법률이나 전제적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주장한, 폭풍우처럼 맹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양한 계층의 출신들이었다. 몽테스퀴외는 귀족, 볼테르는 중산층, 루쏘는 하층계급 출신이었다. 프랑스가 계몽주의 중심지였지만, 그곳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존 로크, 아담 스미스, 스콧틀랜드의 데이빗 흄, 이태리의 세사르 바카리아(Cesar Beccaria), 프랑스의 몽테스퀴외, 스위스의 루쏘, 독일에는 이마뉴엘 칸트 등이 있었다. 칼 베커(Carl L. Becker, 1873~1945: 미국 역사학자)는, 계몽주의자들을 중세의 신학자들에 비유하기도 했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신앙을 통해 사후의 천국을 건설하겠다고 한데 비하여,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을 통하여 지상의 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존 로크는, 교육은 바로 생산요소의 하나라고 했다. 디드로와 달람베르(Jean Rond d'Alembert)가 편찬한 백과사전은 계몽주의 정신 즉, 지식을 전파하고 사회와 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정신을 기리고자 한 것이었다.
그들은 또 이성의 힘을 믿고, 교회와 성경을 공격한 사람들이었다. 존 로크나 베일(Pierre Bayle, 프랑스 철학자, 1647-1706) 등은 종교적 관용을 요구하며 교회를 공격했다. 로크는 자연권 사상을 전파하고, 이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했다. 정부가 이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백성은 저항권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혁명의 이론적 근거인 사회계약론이다. 루쏘나 몽테스퀴외 등도 부패한 정부에 대한 공격은 마찬가지였다. 몽테스퀴에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도처에 쇠사슬이 있다’ ,라고 했다. 루쏘는 일반의지 즉, 공동선을 위한 공동체 전 구성원의 의지가 사회를 통제해야한다고 했다. 많은 계몽주의자들이 기독교의 미신적 요소, 부당한 법률, 조세제도를 공격했고, 볼테르는 기독교적 낙관주의(Optimism)야말로 현상고착에 만족해, 개혁을 막는 철학이라고 공격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계몽주의자들은 더욱 과격성을 띄게 된다. 예컨대 로크나 베일 같은 계몽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비난했지만 그래도 절제가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들어 티리(Paul-Henri Thiry), 돌바크(Baron d'Holbach)같은 사람들은 신을 부정한다. 이 같은 생각은 구체제의 합법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것이었다. 혁명의 원인을 경제적 관점에서 보는 견해도 있다. 18세기 프랑스는, 인구의 급증이 있었고, 이에 따른 인구의 이동이 있었다. 1700년 1천9백만이던 인구는 혁명이 일어났던 해인 1789년에는 2천4백만 명으로 증가해 있었다. 흑사병 같은 질병이 사라지고, 치료방법의 발전, 환자나 빈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정신, 과학적인 영농, 축산 방법의 개선, 감자 같은 새로운 작물의 재배로 이전 세기보다 더 많은 영양식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인구 증가의 원인이었다.
한편, 이 같은 인구의 증가는 인구와 식량의 불균형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생활이 한계상황에 놓여 있었다. 30%의 인구가 빈민이었고, 빈부 격차가 확대되고 있었다. 혁명 발발은 바로 빵 값과 직결된 것이라고 지적한 역사학자도 있다. 예를 들어, 1774년의 흉작은 빵 값을 50%나 폭등 시켰고, 이는 프랑스 전역에 소위 “밀가루 전쟁”이라는 폭동을 불러왔다. 1780년대 들어서도, 자연 재해로 인한 빵 값의 폭등이 있었다. 혁명 발발 1년 전인 1788년에는 가뭄과 한파, 우박 등 이상 기후로 인한 피해로, 곡물 가격의 폭등이 있었고, 바스띠유가 함락된 7월 14일은 곡물 가격이 가장 치솟은 날이었다. 지난 1세기 간 물가는 65%나 상승하였지만, 임금은 그대로였고, 1785년부터 1788년까지 유럽을 휩쓴 불황으로 실업률은 최고를 기록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또한 구조적인 재정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정부의 세입은 직접세에 의존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경작지의 10%를 소유한 캐톨릭 승려, 30%를 소유한 귀족은 면세 대상이었다. 교회는 십일조 즉, 개인 소득의 1/10을 징수했다. 승려들은 국왕에게 기부를 하긴 했지만, 그 금액 결정은 그들이 했다. 더 심각한 점은, 전국에 걸쳐 조세 징수관이, 징수한 세금의 일부만 정부에 납부한 것이다. 무엇보다 혁명을 당긴 것은 재정 위기였다. 특히 전시에는 세출이 세입을 초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오스트리아왕위 계승전쟁(1740~48), 7년 전쟁(1756~63)등은 국가의 파산에 큰 역할을 한 전쟁이었다. 정부 예산의 25%가 군사비였고, 50%는 채무 상환에 쓰였다. 중앙은행이라는 게 없었던 당시의 재무상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 사채에 의존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구체제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은, 국왕이 모든 합법적인 권력을 독점했다는 점이다. 국왕은 특권의 보호자였지만 동시에 법의 원천으로, 개혁을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같은 막강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루이 15세, 16세 그 누구도 개혁에 착수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귀족들은 직접적으로 왕의 권력에 저항한 사람들이었다. 루이15세가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킨 일은 있지만, 루이16세 즉위 시 귀족들은 아직도 강력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루이15세가 사망한 이후 귀족들은 권력을 더욱 강화했고, 이 같은 현상을 ‘귀족 계급의 부활’이라고 불렀다. 귀족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권이 있었다. 세금 면제는 물론, 일반백성과는 다른 특별재판소에 의한 재판, 징집 면제와 더불어 전쟁 시 서민의 집과는 달리, 그들의 집은 군사용으로 징발될 수도 없었다. 주교, 대신, 대사, 장군 등 가장 특권적인 자리는 오로지 귀족들의 차지였다. 이처럼 구체제 하에서는 귀족이 아니면 아무리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도 고위직에 진출할 수가 없었다. 또 나이가 들수록 더 높은 자리를 차지했고, 무반(전통적인 기사계급 귀족)가문과 문반(법률가 등 정부의 고위직)가문은 결혼을 통해 연대함으로서, 강력한 반 국왕 세력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13개 최고법원의 판사는 바로 귀족들이었으며, 왕의 칙령일지라도 이 법원에 등록되지 않으면 그 효력이 없었고, 그 등록 심사는 바로 이들 판사들이 했다. 이 같은 사정으로 많은 역사가들은, 바스띠유 함락이 있었던 1789년 7월 이전에 이미 혁명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혁명의 첫 단계는 국왕과 귀족간의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루이15세(1715~74)나 루이16세(1774~92) 모두, 혁명이 절실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왕 모두, 왕권의 이론적 근거인 왕권신수설이 도전을 받음으로써, 개혁이힘을 잃고 있었다. 루이15세는 게으르고 쾌락 탐닉적인 왕이었다. 특히 그는 여자들을 좋아하고, 귀부인들의 개인적인 일을 지원했는데 뽜쏭(Jeanne Antoinette Poisson), 뽕빠두르(Marquis de Pompadour)부인의 예가 그것이다. 그의 치세 중 궁정 연회가 끊일 날이 없었고 계속된 전쟁으로 재정이 고갈되고 있었다. 뽕빠두르 부인의 장례 행렬을 보고 그는, ‘그녀는 좋은 때를 골라 떠나고 있다.’ ,라고 했다. 그는 ‘내가 죽은 다음 대홍수가 밀려 올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745년 그가 마쇼(Jean Baptiste de Machault d'Arnouville)를 재무대신으로 임명하자, 마쇼는 세제 개혁을 건의 한다. 새로운 세제 하에서는 모든 프랑스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데 이는 면세 특권을 가지고 있는 교회와 귀족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 개혁은 승려 및 귀족 계급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로 끝났다. 마침내 루이15세는 개혁이란 오로지 고등법원(Parlements)의 폐쇄와 재판관들을 축출하는 것임을 깨닫고 손을 대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일 년도 못 가 막을 내린다.
1774년 즉위한 루이16세는 개혁파인 튀르고(Jacques Turgot)를 재무대신으로 임명한다. 튀르고는 귀족의 특권 폐지와 지주에 대한 과세를 주장했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그들의 특권을 방어하고 튀르고에 저항했다. 튀르고는 전략도 없었고 정치적으로 미숙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개혁할 것을 결심하고, 많은 정적들을 바스띠유에 투옥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점진적인 개혁을 하라는 권고를 받았지만, ‘우리 집은 50세가 되면 죽는 집안이다’ ,라는 말로 응수했다. 그의 조급함은 대가를 치른다. 그는 모략으로 인해 그리고 왕비의 지지를 잃고 실각했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만이 혁명을 막을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옳았고, 또 자신의 예언 대로 54세에 죽었다. 튀르고의 해임은 ‘뿌리 깊은 특권을 개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보여 준 역사적인 예이다.
튀르고의 뒤를 이어 네커(Jacques Necker)가 임명되었다. 그는 우선 세출의 축소와 고이자율의 채무를 줄여 재정을 회복하려고 했다. 그는 또 매관매직으로 거래되는 모든 공직을 조사했다. 당시 프랑스의 공직은 매관매직이 성행했던 때였다. 그의 노력으로 국왕의 금고는 흑자로 돌아섰고, 그는 재정의 구세주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고, 더 강력한 개혁을 요구하자 루이16세는 그를 해임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한 칼론은, 모든 토지 즉 교회와 귀족 소유의 토지에 대한 토지세의 신설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귀족원(Assembly of Nobles)내에는 많은 칼론의 적들이 있었고, 이들은 칼론의 개혁을 거부했다. 이에 따라 왕은 칼론을 해임하는데,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영국으로 망명을 한다.
칼론의 후임으로 왕은 칼론의 적이었던 귀족원 의원 브리안을 임명했다. 그는 의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국왕은 비협조적인 귀족원을 설득, 세입확대를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난 브리안의 이 같은 노력도 실패로 돌아간다. 이제 구체제는 붕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왕은, 1614년 이래 폐쇄되었던 3부회의를 소집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된다.
루이16세는 상황을 해결할 능력도 상상력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양심적인 국왕이긴 했지만 결단력도 없었고, 정치적인 능력도 없었다. 그는 지극히 사적인 사람으로 사냥과 연회에 몰두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로서의 부실한 역할도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의 아내 마리 앙트와네트도 군주인 남편의 명예를 훼손하는데 한 몫을 했다. 그녀는 사치하고 고집이 센데다가 경박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숙적인 오스트리아 출신이었으므로 더욱 인기가 없었다. 그녀는 많은 일에서 프랑스보다는 오스트리아의 이익에 관심이 컸다. 어느 성직자가 그녀에게 줄 선물로 산 가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그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사치함을 알리는데 크게 기여한 사건이다. 루이16세와 그녀는 왕가와 백성간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
왕의 일차적인 의무는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으므로 군사적, 외교적 패배는 그의 책임이었다. 18세기에 프랑스는, 여러 번에 걸쳐 굴욕적인 군사적 패배를 하였다. 1757년에 프러시아에 패한 로스바하(Rossbach)전투가 하나의 예이다. 폴란드 왕위계승전쟁 (1733~35),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48), 7년전쟁(1756~63)에 참전을 했지만 어느 것도 승리한 바가 없었다. 오히려 해외 식민지만 잃었다. 외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756년에 있었던 숙적 오스트리아와의 동맹도 웃기는 일이었다. 이 동맹은, 원칙으로 보면 거대한 동맹이었지만, 실제로는 파멸적인 것이었다. 전통적인 동맹국들을 지원할 수 없었던 것도 치욕이었다.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가 폴란드 분할을 할 때, 그리고 러시아가 터키령 크리미아 반도를 점령한 때, 프랑스는 수수방관을 할 수밖에 없었다. 1787년 프러시아가 프로방스연방(네델란드 북부지방)을 침범했을 때도, 프로방스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패배는 프랑스의 위신을 깍아 내린 것이다. 영국과 체결한 에덴관세인하 협정(the Eden Treaty of 1786)도 프랑스의 실업과 불경기를 부채질한 원인으로 인식되어 백성들의 비난을 샀다. 이 같은 군사적, 외교적 실패에 대한 백성의 반응은 조롱, 분노, 왕실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났다.
왕실에 대한 군대의 반감 역시 다가올 혁명에서 한 몫을 한다. 연이은 패전으로 사기가 저하된 군대는, 프로방스 지원을 위한 파병에 반대한 왕에게 분노한다. 혁명이 발발했지만 왕은 자신의 군대에 의존할 수 없었다. 군중들에 발포를 명령하면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말을 군대로부터 듣게 된 것이다. 군대는 또한 야전에서 왕에게 충성을 한 것이 아니라, 삼부회의의 의자에 앉아 자신들의 이익 침해에 대해 불평하고 있었다. 삼부회의 귀족 석 278석 가운데 현역 및 제대 군인이 221명이었다.
18세기 프랑스의 유일한 군사적, 외교적 성공은 미국독립전쟁에 대한 지원이었다. 루이16세는, 재정 형편상 미국독립전쟁에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튀르고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원에 나섰다. 이 전쟁에 대한 지원비는 프랑스 1년 세입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 지원은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 전쟁을 본 백성들은, 전제적인 왕과 부당한 법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과, 전제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3. 공포 정치(the Terror)
공포정치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지롱드 당원을 처형한 1793년 6월2일부터 로베스삐에르가 몰락한 1794년 7월27일까지로 보고 있다. 체포와 구금, 처형이 일상화되었던 기간이다. 이 기간 중 1만7천명이 혁명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언도를 받았고, 혁명-반혁명 파간의 내전에서 항복한 반혁명 포로 1만2천명을 죽였다. 또 다른 1만1천명이 재판을 기다리다 죽었다. 공포정치 기간 중 4만여 명이 처형된 것이다.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 시인 앙드레 쉐니에르(Andre Chenier), 현대 화학의 창시자 라봐지에, 철학자 겸 수학자 카리타(Marie de Caritat), 그리고 많은 아카데미 회원, 파리 시장, 지롱드 당원, 당통 파(Dantonistes), 헤베르 파(Herbertistes)가 처형되었다. 죽은 자의 84%가 제3계급 출신이었다. 이처럼 대규모의 비인도적인 처형을 프랑스 역사가 테인(Hippolyte Adolphe Taine, 1828~93)은 “피로 쓴 정치 철학”이라고 했다.
공포정치의 원인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다. 이데오로기의 당연한 결과라던가 또는 혁명의 본성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다. 외적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혁명 성공을 위한 저항세력의 분쇄를 위해 공포정치가 불가피 했다고 보는 관점이다. 1793년 봄 현재,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스페인, 영국, 프로방스, 사르디니아와 전쟁 중에 있었다. 많은 전선에서 프랑스 혁명군은 패배를 하고 있었다. 전투를 기피한 장군도 있었고, 영토가 적군에 점령을 당한 곳도 있었다. 훈련도 엉망이었고 상관 폭행도 빈번했다. 설상가상으로 혁명-반혁명 군 간의 내전도 있었다. 국민개병에 의한 징병은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새로운 성직자법에 대한 반대, 왕에 대한 처벌도 반대에 부딪혔다. 많은 지역이 혁명의회의 정책 및 권능에 도전했다. 서부 방데(Vendee) 지역에서는, 왕정을 지지하는 5만 명의 반혁명군이 '예수의 성 십자가' 기치 아래 혁명군에 저항했다. 파리의 권력 집중을 반대하는 연방주의자들도 반혁명 대열에 섰다. 리옹, 마르세이유, 보르도 등 지방 대도시들도 혁명의회에 반대하는 세력이었다. 왕당파는 뚤롱 시를 적군 즉, 영국군 수중으로 넘기기도 했다. 공포정치는 이 같은 반혁명 세력 분쇄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혁명정부의 임시지폐(Assignats)는 가치가 폭락하고 연료, 식품 등은 동이 나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793년을 맞는다.
이 같은 위기에 직면한 혁명측은 권력의 파리 집중을 서둘렀다. 온건파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94)이 제거되고, 로베스삐에르(Maximilien Franc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94: 프랑스 변호사, 혁명가)를 필두로 한 강경파들이 등장하였다. 이 급진 좌파들이 혁명의회(Convention) 및 오만한 권력기구인 공안위원회를 장악한다. 정책 수행을 위해 정부 각 부처로 위원들을 파견했다. 공안위원회가 국가 운영을 장악한 것이다. 1793년 겨울, 공안위원회는 의회도 장악했다. 경찰권도 장악했다. 12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공포정치 기간 중, 프랑스를 통치했다. 지도자 로베스삐에르와 그의 동조자들은 “도덕 공화국”을 세우겠다고 했다. 위원회는 로베스삐에르를 포함한 여덟 명의 변호사, 두 사람의 엔지니어, 성직자 한 사람, 배우 한 사람 등 12명이었다. 그 중 귀족 1명, 하층 계급 1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전문가 출신들이었다. 4명이 20대였고 마흔 살을 넘은 사람은 1명뿐이었다. 위원회 내에서 특별한 업무를 담당한 사람도 있었지만, 혁명에 대한 책임은 모두 똑 같이 졌다.
로베스삐에르는 ‘반혁명 분자는 죽음뿐’이라는 프로파갠다를 내세웠다.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흑과 백의 타협을 시도하는 어리석은 궤변가’ ,라고 매도했다. 전쟁과 평화도 같은 관점에서 보았다. ‘평화 시 시민정부의 근거가 도덕이라면, 혁명 시 시민정부의 근거 역시 도덕과 공포이다. 공포가 없는 도덕은 악이며, 도덕이 없는 공포는 희망이 없다. 공포는 다만 정의이며, 도덕의 산물이다’ ,라고 했다. 9월 5일 혁명의회는 ‘공포는 오늘의 질서’ ,라는 법령을 정하고, 평화를 달성할 때까지 프랑스는 혁명 상태임을 선언한다.
1793년 8월23일 의회는 총동원령(Levee en Masse)을 내렸다. 18~24세의 미혼자는 징집되고, 기혼자는 탄약 및 군수품 제조와 운반에, 여성들은 군복 및 텐트의 제조, 어린이들은 붕대의 제조에 투입되는 법이다.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와 인원의 동원 등 경제도 전시체제로 바뀐다. 물자를 징발하고 전쟁 필수품에 최고 가격을 매겨 유통을 억제했다. 그밖에도 패전의 책임을 물어 84명의 장군을 처형했는데, 이는 전사한 장군 수를 능가하는 숫자였다. 이 같은 노력으로 1793년 말쯤에는,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선에서 적을 격퇴할 수가 있었다. 1794년 봄에는 8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오스트리아령 네델란드와 라인강 좌안을 점령할 수 있었다.
1794년 봄에는, 방데 지역의 반혁명군과 연방주의자들을 무찔렀다. 무자비한 방법으로 가차 없이 포로들을 처형했다. 예를 들어, 리옹 지방에서는 1천7백 명에 달하는 반혁명 포로들을, 미리 파놓은 구덩이 앞에 세워놓고 대포를 쏴 학살했다. 도시의 이름들도 새로운 이름(Ville affranchie: 해방 도시 등)으로 바꿨다. 전국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툴롱에서는 1천1백 명의 시민이 한 번에 총살되기도 했다. 서른 두 명의 부녀자, 아이들이 생매장되기도 했다(Gonnord). 낭트에서는, 소위 ‘공화국 세례식’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수장하기도 했다.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우물에 독을 탄다거나 폐광에 감금하고 독가스를 뿌리는 방법도 혁명군의 아이디어였다. 지옥의 군대라는 이름의 혁명군은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죽이고 파괴할 수 있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곡물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했다. 방데를 폐허로 만들고 그 주민의 1/3을 죽였다. 방데, 라는 이름을 복수(Venge)라는 이름으로 바꾸기도 했다.
1793년 9월, 혁명의회는 반역자 색출을 위한 일련의 법률을 공포한다. 혁명에 비협조적인 사람은 누구나 체포할 수 있는 법률이다. 이 법은 그 기준이 모호하여 누구나 체포될 수가 있었다. 왕정지지자, 연방주의자, 신분을 명확히 입증하지 못하는 자, 신분증 불소지 자, 퇴직공무원, 귀족 및 귀족의 친척, 망명자의 친척, 혁명에 충성한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자 등등 모두 체포될 수가 있었다. 이 법에 따라 약 30만 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악법은 혁명 헌법(the Law of Frimaire)으로, 이 법은 권력의 파리 집중과 법의 제정 및 공포를 내용으로 한 것이다. 이 법에 의거 경찰을 제외한 모든 정부기관은 공안위원회의 지휘를 받게 된다. 1794년 6월, 테러의 강화와 혁명재판소 개혁을 위한 법(the Law of 22 Prairial)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모든 재판은 파리에서 하되, 피고인의 합법적인 변호권은 박탈되고, 유죄 입증을 위한 증거는 필요 없으며, 시민의 적이라는 모호한 말로, 무죄 아니면 사형이라는 오직 두 개의 판결만을 정하고 있었다. 도덕과 법을 동일시하고, 재판은 형식적인 것으로 격하 시킨 법이었다. 이 법에 따라 6주 반 만에 파리에서 1,376명이 처형되었다. 지방으로부터 죄수들이 압송됨에 따라, 파리의 감옥과 재판소는 죄수들로 가득했다. 집단 재판(Fournees)이라는 것이 행해졌고, 한 번 판결로 60명을 재판한 경우도 있었다. 대공포(the Great Terror)의 기간으로 불린 7주 동안 처벌된 사람 수가, 앞선 14개월 동안 처벌된 숫자를 훨씬 넘어설 정도였다.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이 학살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는 충분한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 학살의 원인으로 혁명적인 감정에 토대한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든다. 혁명가들의 오만한 자기 확신 또는 인류를 바꿀 수 있다는 맹목적이고 광적인 확신 등 종교적인 열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혁명의회는 새 공화국 질서 확립을 위해 단두대는 물론, 시민들로 하여금 구질서의 제거라는 의식을 갖도록, 혁명 문화를 확립하려고 애를 썼다. 예를 들어 구달력을 폐지하고, 1년을 열두 달, 한 달을 열흘씩 3등분하는 새로운 혁명력을 채택하기도 했다. 구체제보다도 더 엄격한 검열을 시행했다. 캐톨릭 세례명도 개명하고, 승려제도와 교회의 폐쇄, 종교적 상징물의 파괴, 캐톨릭 기념일의 혁명 기념일로의 전환 등도 이루어졌다.
이 같은 폭력은 그러나 좌, 우익 모두로부터 저항을 부른다. 공안위원회 강경파인 로베스삐에르도 미신 타파를 명분으로 한 비기독교화를 비난하고, 무신론 그 자체가 종교라고 비난했다. 그는 초월적 존재를 믿은 사람으로, 비기독교화 조치는 신성모독이라고 했다. 공안위원회 급진 좌익인 헤베르(Jacques Rene Hebert, 1757~94: 언론인)는, 중소 상공인 계층의 대변자로, 파리 코뮌의 지지를 받고 로베스삐에르와 대결한다. 그는 검열법, 물가안정법 지지자로, 무신론을 지지하고 계몽주의자들의 이성론을 믿었다. 그러나 1794년 그는,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온건파인 당통은 공포정치를 완화할 것을 주장하고, 역시 공안위원회의 정책을 비판했다. 혁명군의 승리에 따라 이 같은 공포정치를 완화할 것을 많은 사람들이 요구했다. 의회의원인 튀리오(Jacques Thuriot)는, ‘우리를 야만으로 되돌리는 이 같은 폭력은 저지되어야 한다’ ,라고 했다. 로베스삐에르의 동료였던 데무렝은, ‘자유롭고 번영된 공화 프랑스는 한 방울의 잉크, 한 대의 기요틴으로 족하다’, 라고 했다. 지나친 폭력을 반대한 것이다. 당통 역시 공포에 토대한 공화국 창설에 반대했다. 이 같은 반대로 1794년 4월, 당통과 데무렝은 단두대로 처형되었고, 곧 이어 그 아내들도 처형되었다. 왕의 변호에 나섰던 변호사 말레쉐브도 그의 딸, 사위, 손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파리 시장과 파리 대주교도 단두대로 목이 잘렸다. 이어 공안위원회는 정부의 각 부처를 폐지하고, 그 대신 그 업무를 공안위에 보고하는 위원회를 두었다. 파리 코뮌도 장악했다.
그러나 공안위원회는 모든 비판자들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외국과의 전쟁에서, 내전에서 혁명군이 승리함에 따라 더 이상의 공포정치가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로베스삐에르의 초월자 신봉을 혐오하고, 그의 부패에 대한 지나친 증오에 불만인 사람들도 있었다. 공안위원회 내부의 의견도 갈리고 있었다. 고등법원을 증오하고 헤베르의 처형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당통의 처형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로베스삐에르는 동료들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로베스삐에르에 대한 공포와 그의 정책에 대한 불만은 이제 비판자들로 하여금 행동을 취하게 한다. 공화력 테르미도르 9일(July 27, 1794), 마침내 로베스삐에르는 공안위원회에서 축출된 후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이다. 그는 지지자들에 의해 잠시 석방되지만 곧 다시 체포되어 그날 저녁 바로 단두대로 처형된다. 그는 그가 임명한 파리코뮌 위원들이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어서 혁명정부는 해체되고, 1795년 집정부(Directory)가 창설될 때까지 테르미도르 반동 주동자들이 전권을 장악한다. 수천 명의 죄수들을 석방하고, 로베스삐에르 일당에 대한 처벌과, 쟈코벵 클럽 폐쇄, 로베스삐에르 지지자였던 파리코뮌 요원 70명을 처형한다. 물가안정법(Maximum)을 폐지하고, 공안위원회의 권력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이에 따라 왕당파의 백색테러가 부활하여 쟈코벵 민병대를 학살하였다. 테르미도르 주동자들은 공포정치의 주동자들을 모두 단두대로 보냈다. 공포정치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카리에, 혁명재판소의 처형자였던 텡빌을 포함하여 로베스삐에르의 추종자 108명이 단두대로 목이 잘린다. 혁명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남의 목을 잘랐던 사람들이 동일한 방법으로 목이 잘린 것이다.
-Written by Hung S. Park(C)
참고 자료: 1.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People by David Abdress.
2.The French Revolution by Linda S. Frey and Marshall L. Frey.
파리에 가면 파리 사람들이 바게트를 샤핑백에 넣어
ReplyDelete걸어가는 모습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먹을 수 있는 프랑스의 국민 빵이지만
예전엔 빵도 신분에 따라 다르게 먹었다 해요.
귀족들은 버터가 듬뿍 들으간 하얀 고급빵,
농민과 시민들은 시커먼 잡곡빵.
요즘은 잡곡빵이 건강에 훨씬 좋다지만 그당시
잡곡빵은 까맣고 아주 딱딱해서 먹기가
엄청 곤욕스러웠다죠.
베토벤님이 본문에 이야기 해주셨듯이, 프랑스 대혁명
이후 부터 누구나 같은 품질의 빵을 사먹을 수 있었다 해요.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빵 하나 훔친 죄로
19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잖아요. 소설 속의 이야기라 해도
어떻게 빵 하나 훔쳤다고 그렇게 처벌할 수 있을까 의아했는데
당시 빵은 먹는 음식이 아니라 신분의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신이 부드럽고 흰 빵을 만든 것은 귀족들의 연약한 소화 기능을
ReplyDelete위해서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평민이 부드러운 흰 빵을 먹으면
신의 뜻에 어긋날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강을 해치는 범죄로
가혹한 처벌을 받았던 거죠. 그래서 장발장의 범죄가 컸던 거였어요.
당시 먹는 것 까지 차별하는 것 뿐만 아니라 치솟은 빵 값과 높은
세금을 내야했는데, 종교 지도자와 귀족, 고급 관리들은 낮은 세금을
내거나 면제되었으니 참다참다 너무 배고프고 살기 어려웠던
시민들은 당연히 거리로 뛰쳐나왔던 것이죠.
성난 시민들이 프랑스 혁명에서 이렇게 외쳤다죠.
"빵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러자 왕비였던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트아네트가
유명한 한마디를 던졌다 합니다.
“빵이 없으면 대신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
프랑스 민중은 더 분노했고 혁명은 더 퍼져나갔습니다.
그런데 마리 앙트아네트가 케이크라고 한말은 사실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ReplyDelete프랑스어로 "Qu'ils mangent de la brioche" 라고 했는데 그것을 직역하면,
"그럼 그들에게 브리오슈를 먹으라고 하세요!" 라는 뜻입니다.
브리오슈는 디저트 케이크 보다는 크림과 달걀과 버터가 많이 들어간
프랑스의 전통적인 달달한 빵이라 보면 됩니다.
달고 부드러운 맛이기에 케이크로 번역되어 알려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튼 프랑스 혁명이 크게 성공하면서 정부가 제일 먼저 서둘러 마련한 것이
빵의 평등권이었다고 해요.
알고보니 예전엔 빵 하나 먹는 게 쉬운 것이 아니었더라고요.
베토벤님의 자세하고 깊은 많은 분량의 프랑스 대혁명을 다시 읽어보니
프랑스의 대표적인 국민 빵이 떠올라 소견을 남겨봅니다.
빵 대신 뭘 먹어라 했다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말은 혁명파의 모략이라는 말도 있었고...
ReplyDelete어쨌든 프랑스 대혁명은 중세의 종교적,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킨 빛나는 사건이었지요. 그 혁명이 없었다면 인류는 지금의 눈부신문명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