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
Treasure Island
by
Robert Louis Stevenson
-꿈꾸는 이들을 위한 완역 본-
박흥서 옮김
for More Readings:
www.beethovennote.com
~~~~~~~~~~~~~

작품
평론
보물섬이 처음 출간 된 1883년은 빅토리안 시대가 그 절정을 이루었던 때이다. 당시의 대영제국은 식민지 개척에 따른 부의 유입과 산업혁명으로 초래된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비롯하여 지적, 정신적인 면에서 대 변혁을 이루고 있었다. 존 러스킨, 토마스 칼라일, 챨스 디킨스 등 뛰어난 인물들이 이 시대에 출현하기도 했다. 1837년에 왕위를 계승한 빅토리아 여왕은, 지구 면적의 1/4, 세계인구의 1/4을 그 치세 하에 두었고, 국제무역과 해운, 통신에서 영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라였다. 식민지들은 영국 상품을 위한 시장으로서의 역할은 물론,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제공해 주었고, 해상 운송을 위한 중간기지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 거대한 해양 지배는 보물섬과 같은 해양 소설이 등장하는 토양이 되기도 했다. 철도, 교량, 전신망의 확충과 이에 따른 해저 케이블의 설치도 뒤따랐다. 수증기의 힘을 이용한 열차는 원료와 제품의 대량운송을 가능케 했고,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새로운 공장 시스템은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 이같은 산업화와 도시화는 자유로운 계층 간의 이동을 가능케 했고, 이에 따라 공장주, 상인, 소매업자, 전문직업인 등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중산층이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공장 노동자들을 비롯한 하층 계급은 여전히 가난과 주기적인 해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경제적 사회적 권력과는 격리된 이방지대에 있었다. '눈처럼 하얗게 분을 바른 가발을 쓰고, 검고 빛나는 눈매와 사근사근한 태도, 깔끔하고 쾌활한 박사님에 비해 마소나 같은 시골뜨기들'이라는 묘사에서 우리는 빅토리안 시대의 일반 대중과 상류 부르조아의 편린을 살필 수 있다. 광산노동자와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은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긴장을 불러왔고, 특히 어린이 노동자들의 참상은 당시의 많은 인텔리겐챠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챨스 디킨스(1812.2.7 - 1870.6.9)는 "올리버 트위스트"와 "역경의 시절"에서 어린이 노동의 비인간성과 인간성을 상실한 삭막한 도시를 고발하고 있다.
문학이 시대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면, 보물섬은 바로 빅토리안 시대 영국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던 물질만능, 배금주의를 반영한 소설이다. 스티븐슨은 경제적인 힘이야말로 기존의 질서를 깰 수 있는 강력한 도구임을 등장인물을 통해 말하고 있다. 몰락한 해적 "퓨"를 통해 보물을 찾으면 '비단 마차를 탈 수 있다' 라던가, "실버"의 입을 통해 보물을 찾으면 '의회에 진출하겠다'라는 말은, 단순한 보물의 발견이 아닌, 그 시대의 경제적 번영의 결과물인 돈의 힘으로 인해 기존의 계급사회가 붕괴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물섬은 나약한 소년이 모험을 통해 씩씩한 청년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는 있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진정한 힘은 모험이 아니고, 바로 "보물" 즉, 돈이다. 다시 말해 히스파니올라로 하여금 대양을 횡단하여 보물섬에 이르게 하는 힘은, 돛을 미는 바람의 힘이라기보다는 배에 오른 사람들의 돈에 대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첫머리에서 "호킨스"는 모험에 대해 상세한 진술을 하겠다고 하지만, "보물섬의 위치"만은 말 할 수 없고, 그 이유는 '아직 캐내지 않은 보물이 그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서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묻혀 있는 보물 즉 돈에 주목케하고, 그들의 마음속에 일확천금의 꿈을, 대양 넘어 어딘가에 숨겨진 보물에 대한 꿈이라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영원한 로망을 충족시키고자 함으로써, 이 소설로 하여금 끝까지 생명력 유지를 가능케 하고 있다. "본스"가 "호킨스"에게 지불하는 수고비, 밀린 하숙비를 받기 위해 죽은 "본스"의 궤짝을 뒤지다 발견한 "보물섬 지도" 등, 반복되는 돈 이야기와, 환자를 팽개치고 보물찾기에 나서는 의사 "리브시", 그리고 '쏜살같이 달려가 보물이 묻힌 곳을 대번에 찾아 내, 넘치는 돈을 물 쓰듯 하며 사는 거야' 라는, 지주 "트릴로니"의 외침에서 상류계급의 절제 되지 않은 욕망과 빅토리안 시대 배금주의의 절정을 볼 수가 있다.
이는 바로 우리시대의 한국인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는 지금 빅토리안 시대의 영국처럼 전례 없는 경제적 성공을 누리고 있다. 지구 면적의 1/4이 아닌 전세계를 상대로 폭발적인 역동성을 과시하고 있지만, 그러나 빈민층의 인권에 대한 침해, 해고의 문제, 교육의 불균형 문제, 노사갈등 등 여러 가지 사회문제 역시 빅토리안 시대의 영국과 같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범선을 타고 보물섬을 찾아 나설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 즉, 꿈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누구든 모험에 나서야 하며, 그것이 정신적인 모험이던 육체적인 모험이던, 그에 따른 시련을 극복하지 않고는 그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작가는 "짐 호킨스"를 통해 말하고 있다. 이 꿈의 실현을 위해서는 굳은 신념과 불굴의 용기를 갖추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라 할 것이다. - 옮긴 이-
이
책 구입을 망설이는 이에게
뱃사람
이야기에서 뱃노래까지,
폭풍우와 모험, 사랑과 증오의 이야기를,
뭇 배와 뭇 섬, 표류자들 이야기와
해적떼와 묻어 놓은 보물에 대한 모든 옛이야기들을
내 어린 시절 즐거워했던
옛날 이야기 투로 다시 들려 주어,
지혜로운 오늘날의 젊은이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랴! 그러나,
설령
그럴 수 없다 하여도,
공부에 열중인 젊은이가
킹스턴 또는 용자 밸런타인, 아니면
밀림과 대양의 이야기를 쓴 쿠퍼(*)를
잊었다 하더라도,
그런들 또한 어쩌랴! 다만 내가
나의 해적들과 그들의 꿈이 묻힌 무덤속에
함께 눕기를!
(*) 이들 세 작가는 해양 모험 소설의
선구자들이며, 특히 돈에는 무관심한 채
오직 청소년을 위한 글쓰기에만
헌신한 밸런타인을 두고 스티븐슨은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차 례
제I부: 늙은 해적
제1장: 애드미럴 벤보우에 온 늙은 뱃사람
제2장: 블랙 독의 출현과 도주
제3장: 검은 점
제4장: 선원 용 궤짝
제5장: 장님의 최후6장
제6장: 선장의 문서
제II부: 바다의 요리사
제7장: 브리스틀에 가다
제8장: 스파이 글라스 주막에서
제9장: 화약과 무기
제10장: 항해
제11장: 사과 통 안에서 들은 이야기
제12장: 작전 회의
제III부: 해안 탐험
제13장:
나의 해안 탐험 이야기
제14장:
첫 번째 비극
제15장:
섬 사람
제IV부: 요새
제16장:
박사님의 이야기 - 배를 떠난 이야기
제17장:
계속되는 박사님의 이야기 - 상륙용 보트의 마지막 뱃길
제18장:
계속되는 박사님의 이야기 - 첫날 싸움 이야기
제19장:
짐 호킨스가 다시 하는 이야기 - 요새의 수비대
제20장: 실버의 휴전 교섭
제21장: 공격
제V부: 나의 바다 모험
제22장: 나의 바다 모험 이야기
제23장: 표류
제24장: 가죽 보트의 항해
제25장: 해적 깃발을 내리다
제26장: 이스라엘 핸즈
제27장: 8레알
제VI부: 선장 실버
제28장: 해적의 소굴에서
제29장: 또 하나의 검은 점
제30장: 맹세
제31장: 보물 찾기 - 플린트가 표시한 곳
제32장: 보물 찾기 - 숲속의 목소리
제33장: 두목의 몰락
제34장: 마지막 이야기
제I부
늙은 해적
제1장
애드미럴 벤보우에 온 늙은 뱃사람
트릴로니 지주님이나 리브시 박사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보물섬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기록하라고 했고, 그곳에는 아직 캐내지 않은 보물들이 있기 때문에 그 위치 말고는 숨길 것도 없어, 주님의 해인 17- 년에 펜을 들어, 우리 아버지가 애드미럴 벤보우 여관을
꾸려가던 시절 어느날 찾아온, 얼굴에 칼자국이 난 늙고 검으튀튀한 어느 뱃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 시절로 되돌아가 보고자 한다.
그에 대한 기억이
마치 어제 일 같은데, 무거운 발걸음으로 여관 문을 들어서는 그의 뒤를 선원용 궤짝을 실은 짐수레가
따랐고--키가 크고 건장하며 덩치가 큰 구릿빛의 그 남자는, 꾀죄죄한
푸른색 외투를 걸친 두 어깨까지 역청(당시의 하급 선원들은 머리를 땋고 역청을 발랐다: 옮긴 이)을 바른 댕기머리를 늘어뜨렸는데, 손은 터 상처 투성이에다 으깨진 손톱은 때가 끼고, 한쪽 뺨에는
희끄무레한 칼자국이 기분 나쁘게 죽 그어져 있었다. 그는 포구 쪽을 두리번거리며 휘파람을 불더니, 권양기捲揚機(닻줄이나 돛줄을 감거나 풀거나 하는, 손잡이가 달린 일종의 도르래: 옮긴 이)를 돌릴 때에나 제격이었을 우렁차고 쉰 목소리로, 뒷날 그가 자주
불렀던 흘러간 뱃노래를 갑자기 부르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의 궤짝 위에 열다섯 사람-
요-호-호, 그리고 럼 한 병."
그런 다음 들고 있던 지렛대 같이 생긴 방망이로 문을 두드렸고, 우리 아버지가 나오기가 무섭게 럼을 한잔 주문했다. 술잔을 건네자
맛을 감정하듯 입맛을 다셔가며 천천히 마시면서, 계속 주변을 살피고 절벽 쪽을 두리번거리다가 여관 간판을
올려다 보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아늑한 포구군. 이 주막도 자리를 잘 잡고 말야. 여보, 손님은 많소?” 우리 아버지가 많지 않다고, 거의
없어 애가탄다고 했다. 그가 말했다.
“음, 그렇다면, 내 거처로 해야겠군.” 짐수레를 끌던 남자에게 그가 소리쳤다.
“어이, 여보게, 이리와 짐 운반을 좀 도와 주게나. 여기서 잠시 지내야겠어.” 그가 계속했다.
“난 소탈한 사람이야. 럼, 베이컨, 달걀만 있으면 족하고, 저기 저 위에 올라가 오가는 배들을 보기만
하면 돼. 내 이름이 뭐냐구? 선장이라고 불러. 아, 여보, 미안해, 돈 내는 걸 잊었군-” 그리고는 금화 서너 개를 접수구 창턱에다 내던졌다.
“그 돈이 다 되거든 말하슈.” 그는 명령하듯 사나운 표정으로 말했다.
말이 거칠고 옷차림이
지저분했지만, 평선원은 아닌 듯했고, 조그만 배의 선장이나
항해사를 지내면서 사람을 부리고 들볶는 데 이골이 난 듯했다. 짐꾼의 말에 따르면, 그 전날 아침 로열 죠지 여관 앞에 도착한 우편마차에서 내려, 해안가에 어떤 여관들이 있는지 물었다는 것이다. 우리 여관이 호젓하고
괜찮다는 말을 듣고는, 다른 여관들을 뿌리치고 자신의 거처로 정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 손님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이것이 전부였다.
그는 침묵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놋쇠 망원경을 들고 온종일 포구나 절벽 위를 어슬렁거렸고, 저녁이면 휴게실 구석의 난로 옆에 내내 앉아 물에 진하게 탄 럼을 마셨다. 말을 걸어도 대꾸를 잘 안하려고 했고, 그대신 얼굴을 번쩍들어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무적霧笛 소리를 내듯 코를 풀었는데, 우리 가족은 물론 손님들도 이내 그가 그런 사람이려니 했다. 그는 산책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누군가 뱃사람이 혹 여관 앞길을 지나가지 않았는지를 묻곤 했다. 처음에는 동료들을 기다려 묻는다고 생각했으나, 오히려 누군가를 피하고 있음을 나중에 알았다.
애드미럴
벤보우 여관에 뱃사람이라도 투숙을 하면( 해안 도로를 따라 브리스틀을 향해 가다가 투숙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었다), 그는 커튼이 드리워진 문틈으로 먼저 손님을 유심히 살핀 다음 휴게실로 나왔다. 뱃사람이 투숙할 때면 그는 생쥐처럼 반드시 숨소리를 죽였다. 그가
왜 그러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나도 마찬가지로 겁을 냈다.
어느날 나를 잡아 끌더니 '망을 보다가 외다리의 뱃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즉시 알려주면 매월 초하루마다 은전 네 페니를
주마고 약속했던 것이다. 약속한 날은 금방 돌아왔고 그때마다 내가 수고비를 달라고 하면, 코를 풀며 성난 얼굴로 겁을 주었지만, 곧 돈을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바꾼 듯, 네 페니를 가지고 와서는, '외다리
선원이 나타나는지 잘 지켜보라'고 했다.
그 외다리 선원이 내 꿈속에서 얼마나 어른거렸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 폭풍이 불어 우리 여관을 통째로 뒤흔들고 파도가 포구로 거세게 몰려와 절벽 위로 솟아오르는 밤이면, 그가 여러 모습으로, 오만가지 무서운 표정으로 내 눈에 어른거렸다. 다리가 무릎이나 엉덩이에서 잘려나간 모습일 때도 있었으며, 몸 가운데
다리 하나만 박힌 괴물의 모습인 때도 있었다. 그가 울타리와 도랑을 뛰어 넘어, 나를 쫓아오는 무서운 악몽을 꾸기도 했다. 매달 네 푼의 돈에 대해
그처럼 몸서리쳐지는 환영들로, 나는 그 댓가를 톡톡히 치렀다.
그 외다리 선원에 대한 생각으로 몹시 겁을 먹고 있었지만, 선장을 아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그를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았다. 견디기 힘들 만큼 럼을 퍼 마시는 밤이면,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저앉아 그 거칠고 기분 나뿐, 흘러간 뱃노래를 불렀는데,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가끔 잔을 돌리면서, 자기가 하는 이야기를
듣던가 아니면 노래를 따라 부르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날벼락이 떨어질까 무서워 모두들 죽자사자 달려들어,
욕을 먹지 않으려고 남보다 큰 목소리로 '요-호-호, 그리고 럼 한 병'하면서
집이 들썩이도록 부르는 노래를 여러번 들었다.
그런 소동 속에서 누구보다도 그는 제멋대로
했다. 사람들이 말이라도 할라치면 못하게 탁자를 치거나, 무엇을
묻거나 또는 묻지를 않아도 버럭 화를 냈는데,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또 그가 술이 취해 졸다가 비틀거리며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누구도 여관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단히 무서워 했다. 무시무시한 이야기들--교수형과 처형널대(선측에 걸어 놓고 헝겁으로 눈을 가린 채, 그 위를 걷게 하여 바다에
떨어뜨려 죽이는 널빤지: 옮긴이) 이야기, 폭풍우가 치는 바다, 드라이 토루투가제도諸島(미국 플로리다 주 끝단 키 웨스트 서쪽 11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섬 : 옮긴 이)의 전설, 캐리브해 주변의 스페인 영토에 있는 무시무시한
데라던가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그는 하나님이 바다에 허락하신
가장 사악한 무리들과 함께 살았음이 틀림없었고, 그 이야기를 하면서 쓰는 말투는, 그가 전하는 죄악들 못지않게 순박한 우리 시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손님들을 들볶고 기까지 죽여, 부들부들 떨며 잠자리에 들게 만드니, 손님이
끊겨 우리 여관은 곧 문을 닫아야 할 판이라고 아버지는 늘 말했지만, 나는 그의 출현이야말로 우리에게
다행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에서는 사람들이 몸을 떨었지만, 지나고 나면 오히려 좋아했다. 따분한 시골에서는 그야말로 대단히
재미 있는 일이었고, 그가 "진짜 해적" 이고 "노련한 뱃사람"이며,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바다에서 영국이라면 벌벌떨게 만드는 이들이라면서, 그를
존경한다는 젊은이들까지 있었다.
어떤 점에서 그는 정말 우리 여관을 망하게 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머문 지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고, 따라서 맡겨 놓은 돈이
오래전에 바닥이 났는데도 아버지는 용기를 내어 돈을 더 달라는 말을 못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돈 이야기를
꺼냈는데, 선장은 화가 났다는 뜻으로 요란하게 코를 푼다음 방 밖에서 기다리는 우리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나는 아버지가 퇴짜를 맏고 양손을 비비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가
겪은 그러한 고초와 두려움이 분명 그의 불행한 죽음을 재촉했으리라고 믿는다.
우리와 지내는 동안 선장은 행상에게서 양말 몇 켤레 산 일 말고는
옷을 갈아 입은 적이 없었다. 모자챙이 한쪽으로 늘어져 바람이 불면 몹씨 거추장스러웠는데도, 그냥 내버려두었다. 외투는 2층
자신의 방에서 헝겁 조각을 대고 스스로 꿰매다보니, 나중에는 넝마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 버렸다. 편지를 쓰거나 받는 일도 없었고, 누구와도 말이 없이, 오직 측근들과, 그것도 럼에 취했을 때만 대화를 했다. 그 커다란 선원용 궤짝이 열리는 것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꼭 한번 그와 맞대결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죽을 무렵으로, 마침 가엾은 우리
아버지도 그의 목숨을 앗아간 폐병이 깊어 갈 때였다. 어느 날 오후 늦게 리브시 박사님이 우리 아버지를 진찰하려고 왔다가, 어머니가 마련한 저녁 식사를 조금 든 후, 구식 건물인 벤보우 여관에는 마굿간이 없어 마을에 매어 놓은 말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파이프 담배를 피기 위해
휴게실로 갔다. 그를 따라 나도 들어갔다. 눈처럼 하얗게
분을 바른 가발을 쓰고, 검고
빛나는 눈매와 사근사근한 태도, 깔끔하고 쾌활한 박사님에 비해 마소나 다름없는 시골뜨기들, 무엇 보다도 지저분한 뚱보에다가 럼에 이미 고주망태가 되어 팔을 탁자에 올려 놓은 채 눈을 거슴츠레 뜨고 앉아
있었던, 우리 손님인 그 허수아비 같이 생긴 해적의 모습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갑자기 그가-- 이를테면 선장이--
그 영원불변의 노래를 한 곡조 뽑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의 궤짝 위에 열다섯 사람 -
요-호-호, 그리고 럼 한 병!
살아 남은 사람에겐 술과 저주를-
요-호-호, 그리고 럼 한
병!”
처음에 나는 "죽은
사람의 궤짝(이 가사는 "죽은 사람의 관" 이라는 이름의, 캐리브해에 있는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 인근의
작은 섬을 모델로 한 것임.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18세기 초 스콧트랜드의
유명한 해적 블랙 비어드가 명령에 불복한 부하들을 처벌코자 이 섬에
약간의 럼과 함께 그들을 버리고 떠났다고 함. 한 달 후 돌아와 보니,
뱀과 펠리컨만이 우굴거리던 이 섬에서 다 죽었으리라 믿었던 그들이 모두 생존해 있었다 함. 이
가사는 여기에서 유래 된 것임: 옮긴 이)"이란, 2층 객실에 있는 바로 그 커다란 궤짝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외다리 선원이 나타나는 악몽을 꿀 때, 그 궤짝도 함께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즈음 우리는 그 노래에 관심을 잃은 지 이미 오래였고, 그날
밤 리브시 박사님 말고는 누구나 아는 노래였지만, 박사님이 잠깐 얼굴을 들어 화난 표정을 지은 후, 정원사인 테일러 노인과 류마티즘 치료를 위한 새로운 약에 관한 대화를 계속한 것으로
보아, 선장의 노래에 박사님은 기분이 상한 듯했다. 한편
선장은 자신의 노래에 점점 흥을 내다가, 돌연 자기 앞의 탁자를 두드려대, 우리는 조용하라는 뜻임을 대번에 알았다. 모두들 금방 입을 닫았지만, 리브시 박사님만이 또렸하고 따듯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 하며, 이따금씩
기분좋게 파이프를 피웠다. 선장이 잠시 박사님을 노려본 다음 다시 탁자를 두드리다가, 시선이 점점 험악해지더니 마침내 뚝배기 깨지는 소리를 냈다.
“거, 저 쪽 갑판, 입 좀 닥쳐!” 박사님이 물었다.
“내게 하는 말씀인가요?”
그 불한당이
욕지거리를 섞어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박사님이 응수했다.
“내 한마디하겠오. 당신이 럼을 계속 마셔댄다면, 지저분한 악한 한 명이 이승을 떠나는 일이 곧 일어날거요.”
늙은 선장은 펄펄 뛰었다. 벌떡 일어나 선원용 재크나이프를
꺼내 칼날을 펴 들고, 꼬챙이로 벽에다 박사님을 박아 놓겠다고 협박했다. 박사님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박사님은 휴게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목소리를 조금 높여 전과 같은 어조로, 그러나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어깨 너머 그를 보며 말했다.
“내 명예를 걸고 맹세컨대, 당장 칼을 주머니에 넣지 않으면, 다음 순회재판에서 당신의 목을 매달겠어.”
다음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혀 불꽃을 튀겼지만, 선장이 곧 굴복하여 칼을 거둔 뒤, 매 맞은 개처럼 끙끙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박사님이 계속했다.
“자, 이제 내 구역에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내가 당신을 밤낮으로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소. 나는 그냥 의사가 아니오. 재판관이기도 하지. 누군가 당신에 대해 털끝만치라고 불평하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것이
설사 오늘 밤처럼 예의를 벗어난 사소한 일에 불과한 경우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당신을 체포해 끝장을
내버리겠오. 알아들었으리라 믿소.”
곧 기다리던 말이 와 박사님이
타고 떠났다. 그날 밤은 물론 그 후 여러 밤을 선장은 얌전하게 보냈다.
제2장
블랙 독의 출현과 도주
그 일이 있은 후 곧, 그를
죽게 만든 일련의 불가사의한 사건들 가운데 첫 사건이 발생했는데, 독자 여러분이 알게 되듯, 그의 죽음은 뒷일을 남긴다. 오랫동안 된서리가 내리고 강풍이 몰아쳐
몹시 춥던 그해 겨울이었다. 가엾은 우리 아버지가 새봄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것이 애초부터 분명했다. 아버지의 병세가 하루하루 깊어졌고, 어머니와 나는 여관일에 전적으로
매달려 정신 없이 바쁘다 보니, 그 툴툴대는 손님을 돌볼 수가 없었다.
정월 어느 이른 아침--살을
에는 추운 아침이었다--포구는 하얀 서리로 뒤덮여 온통 희뿌연데다, 잔잔한
물결은 암초 위에서 찰싹거리며, 방금 뜬 해는 산봉우리에 걸린 채 멀리 바다를 향해 비치고 있었다. 선장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푸른 빛깔의 낡아빠진 넓다란 외투자락
아래 칼을 흔들며, 놋쇠 망원경을 겨드랑이에 낀 채, 모자를
머리 뒤로 비딱하게 쓰고는 해변 쪽으로 걸어 갔다. 그가 발걸음을 성큼성큼 떼면서 숨쉴 때마다 연기처럼
내뿜은 입김과, 아직도 리브시
박사님을 향해서인 듯 큰 바위를 돌면서 분노로 씩씩거리던 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우리 어머니는 2층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나는 선장이 돌아올 때를 대비하여 아침 식탁을 차리고 있었는데, 휴게실 문이 열리며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에
뚱보에다 왼손가락 두 개가 없었는데, 해적들이 쓰는 칼을 차긴했지만 싸움꾼처럼 뵈지는 않았다. 뱃사람을 보면 언제나 다리가 하나인지 둘인지 살폈으므로, 혹시 이
사람이 그가 아닐까 갈피를 못잡았던 기억이 난다. 선원은 아닌 듯했지만 역시 어딘가 바다 냄새를 풍겼다.
무엇을 주문할지 묻자, 럼을
마시고 싶다고 했다. 럼을 가져오려고 휴게실을 나가려는 순간, 그가
식탁에 앉더니 나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냅킨을 손에 든 채 나는 그 자리에 멈췄다. 그가 재촉했다.
“얘야, 이리 오렴, 좀 더 가까이 오려무나.” 내가 한 발자국 다가섰다.
“여기
이 식탁은 내 친구 빌의 밥상이니?” 그가 곁눈질을 하면서 물었다.
그의 친구 빌이 누군인지 모르지만, 그 식탁은 우리가 선장이라고 부르는 투숙객을 위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가 말했다.
“아, 실제로는 선장이 아니지만 내 친구 빌은
그리 불릴 수도 있어. 그런데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이 한쪽 볼에 상처가 있고, 특히 술을 마시고 기분을 내는 사람이면, 내 친구 빌이 맞아. 자, 그밖에도 그 선장이라는 사람이 볼에 칼자국--아마 오른 뺨이지. 아이고, 내가 벌써 말해 놓구선!
그런데 지금 내 친구 빌은 집에 있니?”
산책을 나갔다고 대답했다.
“어느
길로, 응? 어느 쪽으로 말이니?”
해안 쪽을 가리키며 그가 돌아올 길목과 시간을 말해 줬고, 그외 몇가지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을 하자 그가 말했다.
“아, 날 보는 게 빌에겐 한 잔하는
거나 다름없어.”
말은 그랬어도 표정은 어두웠고,
따라서 나는 그 낯선 사람이 무엇인가를 숨기는구나 했다. 그러나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 사람은 여관
안을 내내 서성거리며 쥐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길 모퉁이만을 응시했다. 내가 문 밖으로 나가니까 즉시
들어오라고 했지만, 그의 구미에 맞게 냉큼 안 들어오니까, 그
허연 얼굴이 무섭게 변하며 욕을 해대,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문안으로 들어서자 다시 반은 아양, 반은 빈정거리는 투로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내가 착한 아이이며 나에게 아주 반했다고 했다. 그가 알랑거리는
투로 말했다.
“내게도
너와 똑 같은 아들이 있단다. 내 자랑이지. 그렇지만 사내아이들이란
훈련이 필요해. 암, 그렇구 말구. 음, 네가 빌과 배를 탄 적이 있었다면, 문가에 있는 네게 이리 오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하지도 않았을 거다. 빌도
그렇지만 그 패거리들에게는 턱도 없는 얘기지. 그런데, 얘, 저기 봐. 틀림없는 내 친구 빌이네. 망원경을 옆구리에 끼고
말야. 빌에게 은총을. 얘, 우리 둘이 휴게실로 가 문 뒤에 숨자꾸나. 좀 놀래 주자는 말이다. 다시 비옵나니, 빌에게 은총을!”
이 말과 함께 그는 내 뒤를 따라 휴게실로 들어가 열린 문 뒤로
나를 가리며 숨었다. 독자 여러분의 짐작대로 나는 불안하고 무서웠는데,
그 괴한도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해, 나는 점점 더 겁이났다. 그는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뽑을 준비를 했다.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내내 그는 목구멍에 가시가 걸리기나 한 듯 계속 침을 삼켰다.
이윽고 휴게실로 성큼 들어선 선장이 문을 쾅 닫고는, 좌우 살필 겨를도 없이 곧장 기다리는 아침 식탁으로 갔다. 결의에
찬 목소리로 괴한이 불렀다.
“빌.”
선장이 발꿈치를 빙 돌려 우리를 보았다. 그의 구리빛 안색이 싹 가시며 코까지 하얘졌다. 그의 표정은 유령이나
악마, 아니면 무슨 몹쓸 것이라도 본 듯했고, 그처럼 늙고
나약한 모습을 보는 순간 그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한이 말했다.
“어이, 빌, 나를 알잖아. 함께 배를 탓던 옛친구 말야. 빌, 그렇고 말고.”
선장이 잠시 숨을 몰아 쉬었다.
그가 소리쳤다.
“블랙 독!” 낯선 사람이 더욱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럼
누구겠어? 한번 블랙 독은
영원한 블랙 독이지. 애드미럴 벤보우 여관으로 나의 옛 친구 빌을 보러 온 거야.” 그가 손가락이 잘려나간 손을 들며 계속했다.
“으음, 빌, 참 오래간 만이군, 내가 손가락 두 개를 잃고 난 후 말이야.” 선장이 외쳤다.
“야, 임마, 나를 쫓아 다녔군. 내
여기 있다. 그래, 말해봐.
원하는 게 뭐야?”
블랙 독이 대답했다.
“너지, 빌. 바로 너야, 빌리. 이 귀염동이에게 럼 한 잔 가져오라구 해서, 옛날처럼 한잔하자구. 자, 앉지 그래. 옛
친구로서 다정히 얘기하자구.”
내가 럼을 가져와 보니 그들은 이미 선장의 아침 식탁에 마주
앉아 있었는데--블랙 독은
문 옆 통로 쪽에 앉아, 한 눈으로는 옛 동료를 감시하고, 또
한 눈으로는 도망갈 길을 찾는 듯했다. 나에게 가서 문을 활짝 열어 놓으라고 했다. 그가 말했다.
“꼬마야, 열쇠 구멍으로 날 보면 안돼.”
그들을 남겨 둔 채 나는 바 쪽으로 갔다. 무슨 얘긴지 들으려고 애를 썼지만, 낮게 웅얼대는 소리만 오랫동안 들렸다.
드디어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주로 선장이 해대는 한두 마디 욕지거리가 들렸다. 선장이 소리를 질렀다.
“그만, 그만, 이제 그만 하자구.” 그가 다시 울부짖었다.
“교수형이라면
모두 교수대감이야.”
곧이어 엄청난 욕설과 악다구니가 오가며 탁자와 의자가 날고, 맞부딪는 쇳소리에 이은 비명과 함께, 붙잡힐세라 달아나는 블랙 독의 뒤를 선장이 맹렬히 쫓았고, 두
사람 모두 칼을 든 채, 불랙
독은 어깨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바로 문간에서 선장은 도망자를 겨누어 무시무시한 최후의 일격을
가했는데, 만일 애드미럴 벤보우의
커다란 간판이 가로막지 않았다면 도망자의 등은 두 쪽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지금도 간판테 아래 쪽에
남아 있는 칼자국을 볼 수 있다.
그 일격을 마지막으로
싸움은 끝났다. 큰길로 나선 블랙
독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날랜 두 발로 순식간에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선장은 넋이 나간 듯 간판을 보고 있었다. 몇 번이고 눈을 비비던
그는 마침내 여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가 말했다.
“짐, 럼을 가져오렴.” 그는 조금 휘청거리며 한 손을
벽에 댔다. 내가 큰 소리로 물었다.
“다치셨어요?” 그가 다시 말했다.
“럼을
가져와. 여기서 빠져나가야 되겠어. 럼, 럼을!”
럼을 가져오려고 뛰어갔지만, 내가
목격한 일로 크게 당황을 해, 잔 하나를 깨뜨리고 술통 꼭지를 망가뜨려 그 자리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휴게실에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 뛰어 들어가 보니, 마루
바닥에 선장이 길게 누워 있었다. 바로 그때 우리 어머니가, 싸우는
소리와 비명을 듣고는 깜짝 놀라서 나를 돕고자 아래 층으로 내려 왔다. 어머니와 나는 선장의 머리를
들었다. 숨소리가 크고 거칠었지만, 눈은 감겼고 안색이 바뀌어
무섭게 보였다. 어머니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이구, 이일을 어쩌나. 우리 집에 이게 무슨 일이니! 네 가엾은 아버지도 편찮으시고!”
한편, 우리는 선장을
도울 길이 막연했고, 괴한과의 결투에서 그가 크게 다쳤다는 것만 알았다. 손에 든 럼을 그의 목에 부으려고 했지만, 이를 악문 턱이 강철
같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아버지 치료 차 온 리브시 박사님이 들어와, 우리는 한결 마음을 놓았다. 우리가 반가워 소리를 질렀다.
“아, 박사님, 어떻게 하면 좋아요? 저
이는 어디를 다쳤죠?” 박사님이 말했다.
“다쳤다구? 별것 아냐! 그 정도는 누구나 다쳐. 내가 경고했듯이 저 친구는 발작을 일으킨 거야. 자, 호킨스 부인, 2층 바깥 양반에게 빨리 가 보세요. 가능한 그분에게 아무 말씀도
마시고요. 이 가엾은 인생의 파리 목숨을 최선을 다해 구해야겠습니다.
짐, 대야를
가져 온.”
내가 대야를 가져가니, 박사님은 이미 선장의 소매깃을 자른 후였고, 그의 근육질 팔뚝이
들어나 있었다. 문신도 몇 군데 보였다. 팔뚝에 새긴 "행운은 내 것", "돛 가득 바람을" 그리고 "빌리 본스의 애호품" 등의 문신들이 매우 깔끔하고 또렷했고, 교수대에 목이 매인 늠름한--내 생각에--사내의 문신이 어깨 근처에 보였다. 그림에 손가락을 대면서 박사님이
말했다.
“뭔가를 암시하는군. 빌리 본스 선장, 자, 당신 이름인지는 몰라도, 당신
피 색깔이 어떤지 좀 보아야겠어.”
박사님이 물었다.
“짐, 피가
무섭니?” 내가 대답했다.
“아뇨, 박사님.”
“음, 그렇다면, 대야를 잡고 있어.” 이렇게 말하면서 박사님은 수술용 작은 칼을 들어 피를 뽑았다.
많은 피가 쏟아지자 선장은 몽롱한 눈으로 박사님을 보았다. 처음 그는 박사님에게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으나, 나를 보더니
안심하는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안색을 바꾸더니 악을 쓰며 일어나려고 했다.
“블랙 독은
어디 있어?” 박사님이 대꾸했다.
“당신
등어리에나 있지(등어리의 검은 개라는 말은 골치 아프거나 실망스러울 때 쓰는 옛 영어 표현임: 역자 주), 여기 블랙 독은 없소. 럼이나 계속 마셔대구. 내가
말한대로 발작을 일으킨 거요. 지금 막 무덤에서 당신 머리를 잡고 끌어내는,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했단 말이오. 자, 본스 씨-.” 그가 박사님의 말을 가로챘다.
“내
이름은 본스가 아닌데...” 박사님이 다시 말했다.
“어쨌거나
내가 아는 해적의 이름이라고 해두지. 당신을 그렇게 간단히 부르겠오.
내 이걸 말해야겠오. 럼 한 잔에야 안 죽지. 허나
한 잔을 마시면 또 한 잔 마시게 되고, 또 마시게 되고, 내
가발을 걸고 맹세하지만, 술을 딱 끊지 않으면 당신은 죽어. 내말
알아 들어요? 죽는단 말이오. 성경에 써 있는, 당신 같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 간다는 말이지. 자, 일어나 보시오. 내가 부축할테니 다시 한 번 침대로 갑시다.”
우리는 천신만고 끝에 그를 2층으로
데리고 가 침대에 뉘자, 그는 마치 정신을 잃은 듯 베게에 머리를 떨구었다. 박사님이 말했다.
“잘
생각해요. 분명히 말해 두지만, 럼은 당신에게 죽음을 뜻하는
이름이야.”
그렇게 말한
다음, 박사님은 내 팔을 끌며 우리 아버지를 보려고 갔다. 문을
닫고 나서 바로 박사님이 말했다.
“별
일 아니야. 피를 꽤 뺐으니 잠시 조용하겠지. 한 일주일
저기 누어 있어야 할 거야. 그게 모두에게 좋아. 허나 또
발작을 하게 되면 끝장이지.”
제3장
검은 점
점심때쯤 나는 찬물과 약을 들고 선장의 방으로 갔다. 그는 우리가 뉘어 놓은 대로였고, 상체를 조금 일으켰지만, 기운이 없고 몸을 떠는 듯했다. 그가 말했다.
“짐, 여기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네게 늘 잘해 준 걸 너도 알 거야.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은전 네 잎을 주었지. 얘야, 네가 보다시피
난 기운도 없고 외롭구나. 모두들 날 버렸다구. 자, 럼 한 잔 가져오렴, 얘, 응?” 내가 말을 하려고 했다.
“박사님이…“
그런데 돌연 꺼져가는 목소리로 박사님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가 말했다.
“의사들이란 쓰잘 데가 없는 놈들야. 그럼, 그 의사 말이지, 뱃사람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어? 난 말이야, 역청처럼 펄펄 끓는 뜨거운 곳에도 가 보았구, 내 동료들이 황열병으로 쓰러지는 것도, 아름다운 대지가 지진 때문에
바다처럼 출렁이는 모습도 봤다구-- 의사들이 그런 땅을 알기나 알아?
–-그리고 말야, 럼이 날 살렸다구. 내게 럼은 음식이고 마실 거며, 남편과 마누라 관계 같은 거지. 당장 한 모금 못 마시면, 난, 파도에
밀려 온 바닷가의 난파선이나 다름 없을 게고, 그리되면 짐, 너하구 그 돌팔이를 저주할 거다.” 그리고
잠시 욕설을 다시 하더니, 애원하듯 계속 말을 이었다.
“짐, 내 손가락 떨리는 것 좀
봐. 멈출 수가 없네. 이 좋은 날 한 모금도 못 마셨다구. 그 멍청이 같은 의사 놈이이라니. 한 모금 못 마시면, 짐, 헛 게 보이겠지. 벌써 몇 놈
보이네. 네 뒤 저 구석에 늙은 플린트
선장이 보여. 그림처럼 또렸하게 말이지. 내가 마구 살아
온 사람이니 발작을 하면 난리가 날 거야. 그 의사란 놈도 한 잔은 괜찮다고 했지. 짐, 한 잔 가져오면 1기니 짜리 금화를 주겠다.”
그날 따라 아버지의 병세가 더 나빠 안정이 필요했는데, 그가 점점 더 몸을 떠니 겁이 났다. 게다가 한 잔으로는 죽지 않는다는
박사님 말도 생각이 나고, 온당치 않은 돈을 주겠다는 말에 좋기는 커녕 기분도 좀 상했다. 내가 말했다.
“돈은 필요 없어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에게 밀린 하숙비는 받아야겠어요. 한 잔 드리겠어요. 딱 한 잔만.” 내가 술잔을 건네자 그는 걸신들린 듯 단번에 마셔버렸다. 그가 탄성을 질렀다.
“아, 좋구나, 정말 좋아. 됐어. 그런데 말야, 친구, 내가
이 구질구질한 잠자리에 얼마나 누워 있어야 한다고 의사가 말하던?” 내가 대답했다.
“적어도 1주일은요.” 그가 소리쳤다.
“빌어먹을, 1주일이라니! 그렇게는 못해. 그때까진
내게 검은 점을 보내 올 거야. 놈들이 나를 이처럼 멀쩡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걸. 그 멍청한 놈들은 번 돈 간수는 못하면서 남의 것을 훔치려고만 하지. 그
게 뱃사람들이 할 짓이냐? 그렇지만 난 빈틈없는 사람이야. 돈을
낭비한 적도 없구, 잃은 적도 없어. 다시 꾀를 써야 겠다. 그 자식들 무서울 거 없어. 배를 여러 척 풀어 놈들을 헷갈리게
해야겠어.”
그 말을 하면서 아파 비명을 지를 만큼 내 어깨를 꽉 잡은 채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생기가
도는 말투에 비해 목소리는 가엾게도 기운이 없었다. 침대 끝으로 와 걸터 앉았다. 그가 중얼 거렸다.
“그
의사가 나한테 지꺼린 말이라니. 귀에 앵앵거리는군. 다시
누워야겠어.”
내 부축도 없이 다시 자리로 돌아간 그는 잠시 조용하게 누어
있었다. 그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짐, 오늘 그 뱃놈 봤지?” 내가 물었다.
“블랙 독 말예요?”
“그래! 블랙 독. 그놈은 악당이야. 그런데, 그놈보다
더 나쁜 놈들이 그를 보낸 거야. 얘, 내가 지금 도망을
못 가면, 그 자식들이 검은 점을 찍은 쪽지를 보내올 테고, 그건
내 낡은 선원용 궤짝을 뺏으려고 하는 수작이란다. 너, 말을
타고--말 탈 수 있지? 자 그렇다면 말을 타고, 멍청하기가 구제 불능인 그 의사한테
달려가서--음, 그렇지, 그렇게
해야지!--애드미럴 벤보우
여관에 사람들을 집합시키라고 하고--재판관들하고 경찰도 부르고--거기서
플린트 선장의 옛 졸개들을 모두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전해. 나는 1등 그래, 그
플린트의 1등항해사였지. 나만 그 장소를 알아. 그가 사반나에서 지금 나처럼 죽어가며
그걸 내게 줬지. 그런데 짐, 놈들이 내게 검은 점을 보내 오거나 또는
블랙 독이 다시 오거나 아니면 그 외다리 뱃놈--특히 이놈--을 보게 된다면 모르되, 이 말은 비밀이니 절대 누설하면 안 돼.” 내가 물었다.
“그런데
선장님, 그 검은 점이라는 게 뭐죠? “
“얘, 그건 항복하고 내놓으라는 소리란다. 그 걸 보내오면 말해 줄 께. 짐, 감시를 계속하구, 너와 똑같이 나눌 걸 명예를 걸고 맹세하마.”
잠시 종잡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그의 목소리가 점점 맥이 빠져 갔다. 내가 약을 주자 '뱃사람 치고 나나 이런 약을 먹지' 하며 어린애처럼 받아 먹고는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졌다. 그를 두고 나는 방을 나왔다. 그런
사태를 맞아 어찌 해야 할지 몰랐다.
내게 비밀을 실토한 것을 후회하여 선장이 나를 해칠까 봐 겁이나, 박사님에게 모든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일이 꼬이느라고, 바로 그날 밤 가엾은 우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따라서 다른 모든 일들을 제쳐 놓게 되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문상객들의 방문, 장례식 준비, 여관일이 겹치면서 너무 바빠, 나는 선장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
그 다음날 아침, 뜻밖에도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는 음식을 조금 먹고는, 걱정스럽게도 평소보다 럼을 더 마신 다음, 얼굴을 찡그린 채 코를 풀면서 혼자 바를 벗어났지만 아무도 감히 말리지를 못했다. 장례식 전 날, 언제나 다름없이 술에 취해 부르는, 그것도 초상집에서, 그 기분 나뿐 노래를 듣자니 소름이 끼쳤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박사님은 급한 일로 먼곳으로 가 여관으로 올 수 없는 와중에, 선장이 쇠약해져 죽을까봐 모두들 걱정했다. 선장은 원기를 회복하기보다는
내 말대로 정말 약해 보였다. 계단을 가까스로 오르내렸고, 휴게실과
바를 힘들게 오갔으며, 벽을 짚고 몸을 지탱한 채 바다 냄새를 맡으려고 이따금 문 밖으로 코를 내밀어
쉬는 숨이, 가파른 산에 오르는 사람처럼 가빳다. 그는 내게
별로 말을 걸지 않았는데, 내게 비밀을 털어 놓은 일을 잊어서였을 것이다. 점점 더
변덕스러워지는 기분에다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과거보다 더 거칠어졌다. 그는 칼집에서 칼을 빼 식탁 위에 놓고 무서운 술주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개의치 않았는데,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 방황해서인 듯했다. 한 번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분위기가 다른 노래를, 틀림없이 젊은 시절 뱃사람이 되기 전에 배웠을 촌스러운 사랑의 노래를 악을 쓰며 불렀다.
우리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그럭저럭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춥고 안개가 낀 얼어붙은 오후 3시경, 나는 아버지 생각으로 슬픔에 잠겨 잠시 문가에 서있는데, 그때 어떤
사람이 길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지팡이로 앞을 두드렸고, 커다란
초록색 눈가리개가 눈과 코를 덮은 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 장님이었다. 나이를 먹은 듯 아니면 기운이
없는 듯 등이 구부정했고, 다 낡은 두건이 달린 선원용 외투를 걸친 행색이 정말 기괴했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기분 나쁜 모습을 한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여관
앞에 이르자 발길을 멈추고, 목소리를 높여 야릇한 노랫조로 허공을 향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
조국 영국을--죠지 국왕
폐하 만세!--위해 성스러운 국방임무를 수행하다 귀중한 눈을 잃어 버린 이 불쌍한 장님에게,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마을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 주실 친절한 분은
안 계신지요?” 내가 대답했다.
“용사님, 이곳은 애드미럴 벤보우 여관이고, 마을 이름은 블랙 힐 포구 입니다.”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들리는 군, 젊은이의 목소리가.
손을 줘 봐요, 젊은이가 친절하기도 하지. 여관
안으로 나를 안내해요.”
말솜씨는 고우나, 눈이
없는 그 무시무시한 사람이, 내가 내민 손을 꽉 잡고는 죔틀처럼 조였다. 깜짝 놀란 내가 손을 빼려고 했으나, 장님은 간단하게 나를 잡아
끌었다. 그가 말했다.
“자, 얘야, 날 선장에게 데려가 주렴.” 내가 말했다.
“손님, 그렇게는 정말 못해요.” 그가 코웃음쳤다.
“딴청
부리지 마! 나를 곧장 데려가. 아니면 팔을 부러뜨려 놓겠다.” 그렇게 말하며 손목을 조여 내가
비명을 질렀다.
“어르신, 혼자 가시라는 말씀입니다. 선장님은 옛날과 달라요. 칼을 빼들고 앉아 있어요. 사람이 달라진 거….”
그가 말을 가로챘다.
“말대꾸하지 말고 어서 앞서.” 그처럼 무자비하고 싸늘하며 기분나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비틀린 팔의 고통보다 그 말이 더 고통스러워 그가 시키는대로 금방, 우리집 그 병든 늙은 해적이 럼에 취해 멍하니 앉아 있는 휴게실 문을 향해 곧장 갔다. 장님은 내게 바짝 붙어, 쇠갈고리 손으로 나를 꼭 붙잡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육중한 몸을 내게 기댔다.
“나를
곧장 그에게 안내해. 그놈이 보이면, 그때 소리를 질러. ‘빌, 여기 친구가 왔어요’라고. 아니면 이렇게 하겠다.” 그러면서 팔을 다시 비틀어 나는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장님이 너무 무서워 선장에 대한 두려움을 잊은 채, 휴게실 문을 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장님이 시킨 대로 외쳤다.
가엾은 선장이 눈을 떴고, 즉시 취기가 사라지며 제정신이 드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라기 보다는 절망적인 표정이 일었다. 일어나려고 움직였지만 몸에 힘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 걸인
같은 사람이 말했다.
“빌, 자, 그냥 앉아
있어. 내가 볼 수는 없지만, 손가락 까닥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는 있지. 자, 거래를 해 보자구. 왼손을 내밀어 봐. 얘야, 이
친구의 왼속목을 잡아 내 오른손에 대렴.”
우리 두사람은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지팡이를 잡았던 그의 움푹한
손에서 무엇인가를 선장의 손바닥으로 넘기는 것이 보였고, 선장은 곧 그것을 감싸 쥐었다. 장님이 말했다.
“자, 이제 됐어.” 이 말을 하고는 곧 내 손을 놓더니, 믿을 수 없을 만큼 정확하고
재빠르게 휴게실을 껑충껑충 가로질러 길거리로 나갔는데, 나는 그자리에 멍하니 서서, 탁탁 소리를 내며 멀어지는 그의 지팡이 소리를 들었다. 얼마 후
선장과 내가 정신을 차리면서 그의 팔을 놓자, 그는 손을 들어 손바닥을 뚫어지게 보았다. 선장이 소리를 질렀다.
“10시 정각이라! 6시간 남았군. 아직
시간이 있어.” 그가 벌떡 일어섰다.
그렇게 일어나기는 했지만, 잠시
비틀대다가, 목에 손을 댄 채 휘청거리더니, 괴상한 소리와
함께 마루 바닥에 그대로 엎어졌다. 어머니를 부르며 내가 곧 그에게로 뛰어갔다. 그러나 서두른들 소용이 없었다. 뇌출혈로 선장이 급사한 것이다. 후일 가엾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를 싫어 했기 때문에, 그가 죽는 순간 내가 눈물을 흘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의 죽음이 내가 경험한 두 번째 죽음이며,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가슴에 그대로 남아 있던 차였다.
제4장
선원 용 궤짝
좀 늦긴 했지만 어머니에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당연히 모두 말씀 드렸고, 우리는 곧 위험하고 곤란한 처지에 빠져 있음을 깨달았다. 선장의
돈--그에게 돈이 있다면--가운데 일부는 분명 우리 돈이지만, 선장의 동료 특히 내가 본 두 사람, 블랙
독과 그 눈 먼 거지가 자기들 몫에서 죽은 사람의 밀린 하숙비를 양보할 리가 없었다. 리브시
박사님에게 빨리 말을 달려가 알리라고 선장이 말했지만, 아무런 보호 없이 어머니를 홀로 남겨 둘 수는
없었다. 여관에 더 머무를 수도 없었다. 부엌 화덕에서 석탄이
타면서 내려앉는 소리, 똑딱거리는 시계소리도 무서웠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 듯했다. 휴게실 바닥에는 선장의 시체가 그대로 누워 있고 그
진저리 쳐지는 눈먼 거지가 여관 주위를 맴돌다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 그대로 소름이 끼쳤다. 무엇인가 빨리 결정을 해야 했고, 마침내 어머니와 나는 함께 이웃
마을로 가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우리는 곧 출발했다. 외투도
안 입은 채, 점점 깊어가는 어둠 속을 차가운 안개를 헤치며 서둘러 갔다.
시야에는 안 들어왔지만
이웃 마을은, 이웃한 포구 뒤쪽으로 수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우리가 가는 길은 그 장님이 왔던 길이었지만, 그가 혹 다시 돌아올지도 모를 쪽과는 정반대
방향이어서 더욱 힘이 났다. 어머니와 나는 몇 번인가 걸음을 멈춘 채 서로 붙들고 귀를 기울이기도 했지만, 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이상한 소리도 안 들렸고--잔잔한 파도 소리와 숲속 동물들의 울음소리만 들렸다.
이웃 마을에 도착하니
이미 등불들을 켜고 있어, 창문에 비치는 불빛을 보고는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마을에서 받은 도움이란 고작 그 불빛 뿐이었다. 겁이
많아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애드미럴 벤보우로 우리와 함께 가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어려움을 호소하면 할수록 모두들--남녀, 아이들 할 것 없이 더욱 움츠렸다. 플린트 선장이라는 이름이 내게는 생소했지만, 몇 사람은 이미 그 이름을 알고 있었고, 매우 두려워했다. 그밖에도 애드미럴 벤보우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밭일을 하던 사람들이, 큰 길을 지나는 괴한들을 보고 밀수꾼들이라고 생각해, 무서워 도망쳐 왔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키츠 호울에 정박한 소형 선박을 보았다고도 했다. 그래서 플린트 선장 패거리라면
정말 두렵다고 했다. 우리가 온 반대 쪽에 있는 리브시 박사님 댁으로는 몇 사람이 말을 몰겠다고 했으나, 여관을 지키기 위해 우리를
돕겠다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겁을 먹는 일은 쉽게
전염이 되나, 토론은 용기를 북돋는다는 말처럼, 여러 사람들이
각자 의견을 말하니, 우리 어머니도 한마디했다. 아버지를
잃은 당신의 아들에게 돌아갈 돈을 결코 놓지지 않겠다는 말을.
“아무도 안 가신다면, 짐과 나는 왔던 길로 돌아가겠어요. 어쨌든 고맙습니다. 모두 꽁무니를 빼다니, 겁이 많군요. 우리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궤짝을 열어볼 거예요. 그리고 크로슬리 부인, 우리의 정당한
돈을 담을 가방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물론 나는 어머니와 함께 가겠다고 했고, 모두들 우리가 무모한 짓을 한다고 비명을 지르면서, 한 사람도 함께
가겠다는 이가 없었다. 우리가 공격을 받을 것에 대비해, 탄환이
든 권총 한 자루와 돌아갈 때 타고 갈 말안장을 준비하겠다는 것이 전부였고, 박사님 댁에 사람을 보내
무장한 인력을 요청하겠다고 했다.
그 추운 밤, 어머니와
내가 이처럼 위험한 길을 떠나게 되어 가슴이 방망이 질을 했다. 보름달이 뜨면서 안개 위로 불그스레한
빛이 비쳤고, 달이 솟으면 출발도 하기 전 대낮처럼 밝아져, 우리의
떠나는 모습이 감시자들의 눈에 뜨일 게 분명했으므로, 출발을 더욱 서둘렀다. 무슨 무서운 것을 보거나 듣는 일 없이, 산울타리를 따라 발소리를
죽이며 재빨리 가, 마침내 애드미럴
벤보우의 대문 안으로 들어선 다음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나는 곧바로 빗장을 잠그고, 선장의
시체가 누워 있는 어둡고 적막한 집에서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어머니가 바에 있던 촛불을 찾아 들고
와, 서로 손을 잡고 휴게실을 향해 더듬거리며 갔다. 선장은
눈을 부릅뜨고 한 팔을 쭉 뻗은 채, 우리가 뉘어 놓은 대로 누워 있었다. 어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짐, 덧문을 내리렴. 그놈들이 밖에서 엿보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덧문을 내리자 어머니가 말했다.
“그 물건의 열쇠를 찾아야 해. 누가 감히 거기에 손을 대겠다는 건지!” 이 말을 하며 가냘픈 신음 소리를 냈다.
나는 곧 무릅을 굽혔다. 선장의
손 가까운 마루 위에 동그란 쪽지가 있었는데, 한 쪽이 검은색이었다.
그 종이 쪽지가 "검은 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집어 보니 종이 뒤쪽에 달필로 또렸하게 쓴 짤막한 글이 있었다. '10시까지 시간을 주겠음'.
“선장에게 10시까지 시간을 준 거예요, 어머니.”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 집 낡은 시계가 종을 치기 시작했다. 갑자스런 종소리에 어머니와
나는 깜짝 놀랐지만, 다행히 시계는 6시를 알렸다. 어머니가 말했다.
“짐, 이제 열쇠를 찾아 보렴.”
나는 선장의 주머니를 하나하나 뒤졌다. 조그만 동전 몇 개, 동그란 고리 하나, 그리고 실과 커다란 바늘 몇 개, 끝을 씹어 놓은 가느다란 여송연
한 개비, 손잡이가 굽은 커다란 주머니 칼, 소형 나침판, 그리고 부싯깃 통 한 개가 모두였다. 나는 크게 실망을 했다.
“목에
걸고 있을지도 몰라.” 어머니의 짐작이었다.
내키지 않는 마음을 누르며, 선장의
목 근처 속옷을 찢고 보니, 목에 역청을 바른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칼로 자른 다음 잡아당기니, 목걸이 줄에 열쇠가 달려 있었다. 열쇠가 손에 들어오자 어머니와 나는 희망에 뜰떠, 그가 그처럼 오랜동안
잠을 자고, 그가 투숙한 이래로 궤짝이 놓여 있던, 2층의 그 조그만 방으로 지체없이 달려갔다.
그 궤짝의 겉모습은 여느
뱃사람의 궤짝이나 다름없었는데, 궤짝 위에는 달군 쇠로 무엇인가의 머리글자인 “B”자를 낙인해 놓았고, 오랜 세월 마구 사용한 흔적으로 모서리가 망가져 있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열쇠를
내게 주렴.” 자물쇠가 단단히 잠겨 있었지만, 어머니는 열쇠를 돌려 순식간에 뚜껑을 열었다.
뚜껑을 열자 담뱃진 냄새가
강하게 풍겼고, 맨 위에 정성
들여 빨아 개어 놓은 좋은 옷 한 벌 말고는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선장이 그 옷을 입은 것을 어머니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옷을 들어내자, 오만가지 잡동사니--사분의四分儀, 주석으로 만든 조그만 잔, 여송연 몇 개, 멋들어진 권총 두 자루, 은 막대 한 개, 오래된 스페인제 회중시계 하나, 대부분 외국산인 싸구려 장신구들, 놋쇠 밭침의 나침판 한 쌍, 그리고 묘하게 생긴 서인도제도산産 조개껍질 대여섯 개가 보였다. 그
죄 많고 쫒기는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왜 그런 조개껍질들을 가지고 다녀야 했는지 궁금하게 생각한 적이 많다.
어쨌던 장신구와 은막대 말고는 이렇다 할 값있는 물건이 없었고, 그것들마저 어머니와 나에게는 소용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 물건들
밑에는 낡은 선원용 외투가 한 벌 있었는데, 그가 거쳤을 수많은 바다와 항구의 바닷바람이 머금었을 소금으로
하얗게 얼룩져 있었다. 어머니가 조심조심 외투를 꺼내자 맨 밑바닥에 유지油紙로 묶은, 서류로 보이는 종이들과, 손을 대면 쨍그렁 소리가 나는, 금화를 담은 마대 주머니가 보였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
불한당들에게 내가 정직한 여자라는 걸 보여 줘야겠다. 내가 받을 돈만 받겠어. 한 푼도 더 안 받아. 크로슬리 부인이 준 가방을 들고
있거라.” 어머니는 마대 가방에서 선장으로부터 받을 돈을 세어, 내가 들고 있는 가방에 넣기 시작했다.
그 일은 매우 어렵고
시간이 걸렸는데, 가치가 다른 여러나라의 동전들과--더블룬( 스페인 금화. 1869년까지 스페인의 법정 통화였음), 루이도르(프랑스 금화), 기니(영국 금화. 1813년 마지막으로 주조
됨), 그리고 8레알 은화(1497년에 주조 된 스페인 은화. 8레알은 같은 해 주조 된 1스페인 달러에 상당하며, 스페인 달러는 1857년까지 미국의 법정 통화이기도 했음. 이 책의 뒤에 나오는 "8레알"이라는 말은 이 은화를 뜻함: 옮긴 이)--그밖에도 내가 알 수 없는 돈들이 마구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또 기니는 매우
드물었는데, 어머니가 계산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이 돈을 통해서였다.
우리가 반쯤 세고 있을
때, 고요하고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심장이 멎을 듯한 무시무시한 소리가--언 땅을 똑똑 두드리는 장님의 지팡이 소리--들려와 소스라쳐 어머니의 팔을 잡았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와 어머니와 나는 숨을 죽였다. 곧 여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고, 손잡이 돌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 괴한이 들어 오려는 듯 빗장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여관 안팎으로 무섭고 긴 침묵이 흘렀다. 침묵 끝에 땅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났지만, 형언할 수 없이 기쁘고 고맙게도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문을 잠그었으니 틀림없이
의심을 했을 터이고, 그렇다면 벌집을 건드린 듯 다시 몰려올 것이 분명했지만, 어쨌던 그 무시무시한 장님을 생각하면 문을 잠근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랐다.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그냥 모두 가지고 갑시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그
무서운 가운데서도, 더도 덜도 아닌 받을 돈만 고집했다. 아직 7시도 채 안되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당연히 돈을 받을 권리가 있고
그 돈을 챙겨야 떠나겠다고 고집했다. 어머니를 계속 설득하고 있는데,
언덕 위로부터 낮고 여린 휘파람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 왔다. 말이 더 필요 없었다. 어머니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손에
들어 온 것만 가져 가겠다.”
유지 꾸러미를 들면서 내가 말했다.
“계산을
맞추려면 이것을 가지고 가야겠어요.”
곧이어 우리는, 텅 빈 궤짝 옆에 있던 촛불을 깜박 잊고 방을 나왔기 때문에, 어두운
계단을 더듬더듬 내려와 문을 연 다음 힘을 다해 뛰었다. 안개가 빠르게 흩어지면서, 이미 언덕배기가 달빛에 훤히 들어나,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위험이
닥칠 터였다. 골짜기 맨 밑과 여관 문 근처에 아직 남아 있는 엷은 안개 속으로 몸을 감추며 도망을
쳤다. 처음에는 몸을 감출 수 있었지만, 골짜기가 거의 끝나는
곳에 있는 산간 마을까지는 반도 채 못 가서, 우리는 달빛에 노출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숭얼거리는 인기척이 점점 가까이 들려와 뒤를 돌아보니, 안개 속에 불빛이 흔들거리며 다가와, 누군가 호롱불을 든 듯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소리쳤다.
“아이구머니나, 돈을 들고 뛰거라. 내가 쓰러지겠구나.”
나는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겁쟁이 이웃들을 원망했다. 가엾은 어머니의 정직함과 욕심,
그녀가 저지른 무모함과 현재의 연약함을 탓하기도 했다. 다행히 우리는 바로 조그만 다리위에
있었는데, 발을 저는 어머니를 부축하여 건너가자, 어머니는
안도의 깊은 숨을 쉬며 내 어깨에 기댔다. 도대체 나에게 그런 힘이 어디서 생겼는지 지금도 의문이고, 마구잡이였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머니를 질질끌다시피 해 둑을 내려가
교각 사이로 난 좁은 길에 이르렀다. 다리가 너무 낮아 그 밑을 기어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머니를 끌고 갈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자리에 멈췄다. 어머니는 그대로 노출이 된 채, 우리는 여관에서 부르면 들릴만한
가까운 곳에 있게 되었다.
제5장
장님의 최후
겁도 겁이지만 나는 호기심이
생겨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다시 둑으로 살금살금 돌아간 다음, 우리
여관 문 앞 큰 길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금작화 덤불 뒤로 몸을 숨겼다. 몸을 숨기자마자, 일고여덟은 됨직한 악당들이 호롱불을 앞세우고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세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있었는데, 비록 안개 속이었지만, 가운데 사람이 그 장님인 듯했다. 짐작대로 곧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문을
부숴!” 두세 명이 지르는 복창 소리도
들렸다.
“부숴!”
애드미럴 벤보우 여관으로 떼거리가 물밀듯이 몰려들었고, 그들 뒤로 등불을 든 사람이
뒤따랐다. 잠시 멈칫하던 그들이, 문이 열려 있어 놀랍다는
듯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침묵도 잠시, 장님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 분노와 흥분을 억제할 수 없는 듯,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사나워졌다. 멈칫거리는 패거리들에게 욕을 하며
악을 썼다.
“안으로
들어갓!”
명령에 따라 너댓 사람이 들어갔고, 남은 두 사람은 그 귀신 같은 장님과 길거리에 그대로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곧 비명과 함께 집안으로부터 고함소리가 들렸다.
“빌이 죽었다”
그러나 장님은 우물쭈물대는 그들을 다시 꾸짖었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등신들
같으니라구. 시체를 뒤져 봐. 위층에 가서 궤짝도 좀 가져오고.”
우리집 낡은 층계를 오르는 발소리가 쿵쿵 들렸고, 모르기는 몰라도 집도 흔들렸을 것이다. 곧 비명소리가 다시 나더니,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선장이 묵던 방의 창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달빛에 상체를 내민 채, 창 밑 길가의 장님에게 이러니저러니 했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퓨, 누군가 선수를 쳤수. 궤짝이 뒤죽박죽이야.” 퓨가 붉으락푸르락 했다.
“우리가
찾는 건?” 그가 대답했다.
“돈이
있수.” 돈이라는 말에 장님이 욕지거리를
해댔다. 그가 소리쳤다.
“플린트가 그려 놓은 게 어떻게 됐냐구 묻는 거야.” 남자가 대꾸했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 장님이 다시 소리쳤다.
“야, 거기 아래층에 있는 놈들, 빌의 몸뚱아리는 뒤져 봤냐?
선장의 몸을 뒤지려고 아래층에 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문
쪽으로 나오며 말했다.
“빌의 송장은 이미 샅샅히 뒤졌어. 남아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소.” 눈 먼 퓨가 악을 썼다.
“여기 여관 치들이 한 짓이야. 그 사내아이 놈 말이지. 그놈 눈깔을 뽑아 놨어야 했는데! 조금 전 여기 있었어. 내가 문을 흔드니 안에서 잠궜더라구. 야 이놈들아, 흩어져 찾아 봐” 2층 창문의 사내가 말했다.
“맞아, 여기 촛불을 켜 놨어.” 지팡이로 땅을 치면서 퓨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흩어져 찾으라구! 샅샅이 뒤져!”
그러자 낡아빠진 우리 여관은 온통 벌집 쑤신 듯했고, 여기저기 쿵쾅대는
발 소리, 가구 넘어지는 소리, 문 걷어차는 소리가 가까운
언덕을 울릴 정도였고, 하나 둘 길로 나오면서,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고 떠들었다.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죽은 선장의
돈을 셀 때 들려와 몸을 떨었던 바로 그 휘파람 소리가, 이 번에는 두 번씩이나 밤의 정적을 깨며 또렸하게
들려왔다. 나는 패거리들에게 우리를 쫓으라는 장님의 신호라고 생각을 했지만, 사실은 언덕에서 마을을 향해, 해적들에게 알리는 위험 신호였다. 한 사람이 말했다.
“더크란 놈이 다시 오는 군. 두
번씩이나! 여보게들, 퇴각해야겠어.” 퓨가 울부짖었다.
“퇴각이라니, 이런 농땡이 같은 놈. 더크는 원래 한심한 얼간이야--신경쓸 거 없어.
틀림없이 여관 치들이 이 근처에 있어. 멀리 갈 수 없다구. 우리 손아귀에 있단 말이야. 흩어져 찾아봐. 이 개자식들아! 아이고 맙소사, 내
눈이야!”
그 욕설이 좀 효과가 난 듯,
두 사람이 잡동사니 속을 여기저기 뒤졌지만,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에 더 신경이 쓰이는 듯
건성건성해버렸고, 다른 사람들은 길거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
등신같은 놈들, 너희들은 행운을 잡은 거야. 꽁무니를 빼다니! 그 종이를 찾으면 왕 부럽지 않은 부자가 된다구. 분명 여기 있어. 그런데, 멍하니 서 있다니. 빌이 무서워 가까이 간 놈이 한 놈도 없어. 난 직접 대면도 했는데--이 장님도 말야! 네놈들 때문에 일을 망치겠다. 난 땡전 한 푼 없이 럼을 구걸하며
길거리를 헤메는 거지가 되겠지. 비단 마차를 타고 으시댈 수도 있을텐데 말이야! 담력이 건빵 속 벌레 만큼만 돼도 그치들을 잡아낼 텐데.” 한 남자가 볼멘 소리로 말했다.
“퓨, 그것들은 지옥이나 가라
하슈. 더블룬을 챙겼수다!” 또 한 남자가 말했다.
“퓨, 그렇게 귀한 물건이야 감췄겠지. 죠지(영국 수호신인 성 죠지를 새긴 영국 금화:옮긴 이)를 가져 가요. 그만 징징거리고.”
그 말이 도화선이 되어 싸움이 시작됐다. 끝까지 뻗대는 말에 분노가 폭발한 퓨는, 보이지 않는 그들을 향해 주먹을 마구 휘둘렀고, 지팡이를 좌우로
마구 휘두르는 소리도 여러 번 났다.
그러자 그들도 눈먼 악당에게 욕설과 협박을 하며 지팡이를 빼았으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그들의 맹렬한 싸움이 계속되면서 우리가 시간을 벌고 있을 때, 언덕 너머 산간마을 쪽으로부터 새로운 소리--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말발급 소리와 거의 동시에 산울타리 쪽으로부터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권총 소리가 들렸다. 권총 소리는 위험을 알리는 마지막 신호인 듯, 해적들은 곧 등을
돌려 뿔뿔이 흩어졌다. 한 사람은 포구를 따라 바다 쪽으로, 또
한 사람은 비탈진 언덕을 따라, 남은 사람들도 제각각 도망쳐, 순식간에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퓨만 그 자리에 남았다. 그들이 장님을 팽개치고 내뺀 것은, 당황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욕설과
폭력에 대한 복수심에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혼자 남은 그는 미친듯이 여기저기 땅바닥을 더듬으며
동료들을 불렀다. 방향을 잘못 잡은 그는, 결국 내 옆을
지나 마을 쪽으로 몇 걸음 옮기며 여러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쟈니, 블랙 독, 더크--이 늙은 퓨를, 옛 친구 퓨를 버리지 마!”
바로 그때, 언덕
위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렸고, 말을 탄 네댓 사람이 달빛 속에 나타나, 비탈길을 따라 전속력으로 내려 왔다.
그제야 방향이 틀린 것을 알아차린 듯 비명을 지르며 되돌아 뛰던
퓨는, 도랑 속으로 넘어지면서
뒹굴었다. 곧 다시 일어나 뒤뚱거리며 뛰다가, 맨 앞에 달려오던
말의 발굽에 깔렸다.
말을 탄 사람이 그를
구하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차가운 밤 공기에 긴 비명 소리를 내며 말에 치였고, 네개의 말발굽이 그를 짓밟으며 차고 갔다. 모로 누어 있던 그는
이내 엎어지더니 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말을 탄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불의의 사고에 놀란 그들도 말을 멈췄고, 곧 그들이 눈에 들어왔다. 맨 뒤의 사람은 리브시 박사님
댁으로 갔던 젊은이였고, 다른 사람들은 젊은이가 도중에서 만난 세관원들로서, 젊은이의 말을 듣고 바로 따라 온 것이다. 댄스 반장은 키츠 홀에 밀수선이 정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가다, 방향을 바꿔 우리에게
왔고, 그래서 어머니와 나는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퓨의 목숨은 완전히 끊어졌다. 마을로 어머니를 모시고 가 차가운 소금물을 조금
마시게 하자 금방 원기를 회복하였고, 돈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내내 아쉬워 하면서도 여전히 무서워 벌벌
떨었다. 한편 댄스 반장은
키츠 홀을 향해 부지런히 말을 몰았지만 그의 부하들은 말에서 내려 밀거나 끌며, 악당들이 매복하고 있지나 않을까 두려워
하며 나무가 우거진 깊은 계곡 밑으로 더듬더듬 내려갔다. 그래서 그들이 키츠 홀에 도착했을
때는, 멀리는 못 갔지만 배가 막 떠난 후였다. 반장이 배를 향해 정지하라고 소리쳤다. 달빛에서 비키지 않으면 총알을
맞을 것이라는 협박 소리가 들린 순간, 반장의 팔 가까이 총알이 스쳤다. 그리고 그 밀수선은 곧 속력을 내어 사라졌다. 댄스씨가
그자리에 서서 중얼거렸다.
“내 이거 뭍에 있는 물고기 신세구먼”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브리스틀로 부하를 한 사람
보내, 순시선을 띄워 밀수선을 쫓으라고 알리는 일 뿐이었다.
“소용 없는 일이지.
깨끗이 사라졌어.
상황 끝이야. 어쨋던 망나니 퓨는 잘 됐어.” 그가 말했다. 그는 이미 나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 애드미럴 벤보우로 다시 갔다. 집은 엉망이었다. 나와 어머니를 미친 듯 찾았던 그 악당들이 바닥에 팽개쳐버린 바로 그 시계가 있었다. 선장의 돈주머니와 서랍에 있던 조그만 은괴 말고는 훔쳐간 물건이 없었지만, 우리집이
망했다는 걸 금방 알았다. 댄스씨도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돈을 훔쳐 갔다는 말이지? 음, 그렇다면, 호킨스, 그 놈들이 무엇을 찾았다는 말이니? 돈을 더?” 내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돈이 더 아녜요. 사실, 제가 안주머니에 뭘 가지고 있는데요, 그것을 안전한 데 보관하고
싶어요.” 그가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괜찮다면 내가 보관하지.” 내가 말했다.
“제 생각에는 리브시 박사님이…
그가 기꺼이 승락했다.
“그게 좋겠어. 그렇게 하렴-- 신사이고
재판관이기도 하시지. 빨리 가서 그 분이나 지주님에게 보고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쓰레기 같은 퓨가 죽었으니 모든 게 잘 됐는데, 난
죄책감은 안 들지만, 네가 보았듯이 그가 죽어버렸으니, 잘
못 보고를 하면 국왕폐하의 징세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트집거리를 줄 수도 있어. 자, 호킨스, 네가 좋다면 같이 가자꾸나.”
그 말에 나는 진심으로 고맙다고
했고, 우리는 말을 매 놓은 마을로 걸어서 돌아갔다.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고 나니, 사람들은 이미 모두 말을 타고 있었다. 댄스씨가
말했다.
“도거, 당신의 말이 좋구먼. 이 소년을 뒤에 태우시오.”
말에 올라 도거씨의 허리띠를 꼭 붙들자마자, 반장이 출발 명령을 내렸고, 일행은 리브시 박사님 댁을 향해 질풍같이 달렸다.
제6장
선장의 문서
우리들은 쉬지 않고 달려가 마침내 리브시 박사님
댁에 도착했다. 집 앞은 어두웠다. 댄스씨가 내게 말에서 내려 노크를 하라고 했고, 도거씨는 내가 밟고 내리도록 등자를
댔다. 하녀가 바로 문을 열었다. 내가 물었다.
“리브시 박사님 계신가요?”
안 계시며, 오후내내
집에 있다가 저녁식사 초대를 받아 시간도 함께 할 겸 지주님 댁으로 갔다고 했다. 댄스씨가 말했다.
“얘, 그렇다면 그곳으로 가자.”
가까운 거리라서 나는
말을 타지 않고 도거씨 말의 등자끈을 잡은 채 지주님 댁 바깥 대문까지
뛰어간 다음, 달빛이 비치는 낙엽진 긴 길을 따라, 넓고
오래된 정원으로 둘러싸인 저택 건물들의 윤곽이 하얗게 보이는 데까지 걸었다. 댄스씨가 말에서 내려, 지체없이
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인을 따라 융단이 깔린 복도 끝의 넓은 서재에 이르니, 책꽂이 위에 여러 개의 흉상이 눈에 들어왔고, 밝게 타는 난로 양쪽으로
지주님과 박사님이 담배 파이프를 손에 든 채 앉아 있었다.
그렇게 가까이서 지주님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1미터80센티가 넘는 훤칠한 키에 균형잡힌
몸매와, 무뚝뚝하고 우락부락한 인상에다, 오랜 세월 여행으로
단련된 불그스레한 얼굴에는 주름살이 있었다. 새까만 눈섶을 씰룩대, 나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어떤 성격, 이를테면 급하고 벌컥하는 성격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매우 위엄 있고 겸손하게 그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댄스씨.” 박사님도 머리를 끄덕하며 우리를 맞았다.
“댄스, 어서 오시오. 귀염동이 짐도 왔군. 무슨 바람들이 불어 왔지?”
댄스 반장은 꼿꼿하게 선 채 강의를 하듯 전말을 이야기했다. 두 신사는 상체를
수그린 채 마주보며, 호기심과 놀라움으로 담배도 잊고 귀를 기울였다.
우리 어머니가 여관으로 돌아가는 대목에서는 리브시 박사님이
무릎을 쳤고, 지주님은 '만세' 하면서 난로 쇠받침에다 파이프를 탁탁 털었다. 이야기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트릴로니(지주님의 이름임을 독자는 기억할 것이다)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 걸음으로
방안을 왔다갔다 했고, 박사님은 더 자세히 듣겠다는 듯 하얀 가루를 뿌린 가발을 벗은 채 앉아 있으니, 짧게 깍은 머리가 검은 색으로 드러나
매우 이상하게 보였다.
댄스씨가 마침내 이야기를 끝냈다. 지주님이 말했다.
“댄스씨,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오. 그 잔인하고 더러운 악당을 말을 타고 처치한 일은, 바퀴벌레를 밟아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잘 한 일입니다. 호킨스도 훌륭한 소년이라는 걸 알고 있지.
호킨스, 종을
흔들어 줄래? 댄스씨에게
맥주를 대접해야겠구나.” 박사님이 물었다.
“그리고
짐, 그놈들이 찾던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 유지 꾸러미를 그에게 주며 내가
대답했다.
“네, 여기 있습니다.”
박사님은 그것을 펴보려고 만지작거리다가, 말없이 자신의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말했다.
“지주, 댄스는 맥주를 마신 다음 국왕폐하의
일을 위해 가야 해요. 하지만 짐은
여기 우리집에 재워야겠고, 괜찮다면 냉 파이로 저녁을 먹일까 하는데요.”
“리브시, 그렇게 하시오. 애를 썼는데, 차가운 파이보다야 좋은 걸 먹여야겠지.”
그래서 커다란 비둘기
고기 파이가 들어와 작은 식탁 위에 놓였고, 나는 배고픈 독수리처럼 배불리 먹었는데, 댄스씨는 몇 마디 칭찬을 더 들은 뒤 길을 떠났다. 박사님이 말했다.
“자, 지주” 지주님이 동시에 불렀다..
“자, 리브시 박사.” 리브시 박사님이 웃었다.
“동시에
서로 부르다니, 한번에 한 사람씩만 말하기로. 혹시 플린트에 관해 들은 얘기가 있는지요?” 지주님이 외쳤다.
“그럼! 듣고 말고요! 바다를 누빈 피에 굶주린 해적이지. 플린트에 비하면 블랙 비어드(캐리브 해에서 활동했던 18세기 초
영국의 해적. 본명은 에드워드 티취: 옮긴 이)는 어린애지요. 플린트라면 스페인 사람들도 벌벌 떨어서, 말하긴 좀 뭣하지만, 그가 영국 사람인 게 때로는 자랑스럽기도 했어요. 트리니다드(캐리브 해의 섬 나라: 옮긴 이)
근해에서 그의 배를 이 두눈으로 보았는데, 내가 탓던 배의 주정뱅이 선장이 그만
겁을 먹고는 배를 돌려, 포트 오브 스페인(트리니다드의 수도: 옮긴 이)으로 뺑소니를 친 일이 있었오.” 박사님이 말했다.
“음, 우리나라에서 그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을 하는 걸 나도 들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에게 돈이 있었을까요?” 지주님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돈이라! 방금 얘기를 듣지 않았오? 악당들이 돈 말고 뭘 찾았겠오? 돈 말고 신경 쓸 일이 뭐였을까? 그 천한 몸뚱아리들을 걸고 할만
한 게 돈 말고 뭐지?” 박사님이 대답했다.
“곧 알게 될 거요. 내 말을 오해하고 역정을 내니 할 말이 없군. 내가 알고 싶은 일은 이렇소. 여기 내 주머니 안에 있는 것이 플린트가 묻은 보물에 관한 단서인 듯한데, 그 보물이 얼마나 될까요?” 지주님이 큰 소리로 말했다.
“꽤
될거요! 상당할 거야. 당신이 그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브리스틀로 가 배를 마련하고, 당신과 호킨스도 나와 함께 나선다면, 한 일년이면 보물을 손에 넣게 되겠지.” 박사님이 말했다.
“좋습니다. 자, 그럼, 짐도 괜찮다면 꾸러미를 풀겠오.” 그러면서 탁자 위에 그것을 놓았다.
꾸러미는 실로 꿰메 놓았기 때문에 진찰가방에서 수술용 가위를
꺼내 실밥을 잘랐다. 물건 두 개가--책 한 권과 한 묶음의
서류가--묶여 있었다. 박사님이 의견을 말했다.
“먼저
책을 검토해 봅시다.”
보조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데, 친절하게도 리브시 박사님이, 책을 뒤지는 것도 재미 있으니 와서 보라는 손짓을 해, 책장을 넘기는
그의 어깨 너머로 지주님과 함께 지켜보았다. 첫 쪽에는 장난 삼아 쓴 듯한 무의미한 글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선장의 팔뚝에서 본 문신인 "빌리 본스의 애호품" 이라는 문구와 "항해사
W.본스", "럼이 떨어지다", "팜키 근해에서
그가 그것을 손에 넣음" 이라는 글들과 대부분 한 단어로 된 알 수 없는 글들이 몇 개 더
있었다. 나는 "그것을 손에 넣음"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가 손에 넣은 "그것"은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그의 등에 박혔던 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별것
없군.” 리브시 박사님이 계속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다음 10-20쪽은 이상한 숫자들로 꽉 차 있었다. 매 줄마다 앞에는 날짜를 적고 끝에는 보통 회계장부처럼 돈의 액수를 적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명세를 적은 대신, 가위표로 갯수를 표시했다. 1745년 6월 12일의
예를 들면, 누구에겐가 분명히 70파운드의 돈을 꾸었는데, 돈을 꾼 이유로는 6개의 가위표만 해 놓고 있었다. 또 "카라카스(베네수엘라의 수도: 옮긴 이) 근해" 라던가, 경도나
위도를 62°16'20'', 19°19'40''처럼 단순히 숫자로만 써 놓기도 했다.
거의 20년 가까운
기록이었는데, 세월이 지나며 매 항목마다 금액이 늘어났고, 대여섯
번의 수정을 거쳐 최종 합계를 적은 다음,
"본스의 몫"이라는 기록이 맨 끝에 적혀 있었다. 리브시 박사가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군.” 지주님이 큰 소리로 말했다.
“대낮처럼
명명백백한 일이지. 그 악당의 회계장부 아니겠오? 이 가위표들은
그들이 약탈하거나 침몰시킨 마을과 선박을 표시하는 거요. 숫자는 각자의 몫을 말하고, 헛갈린다고 생각한 데는 표시를 확실히 해놨군. '카라카스 근해'라는 말은, 음, 그 바다에서 침몰해 버린 불운한 배가 있었다는 얘기지. 그 배에 탓던 가엾은 영혼들에게--오래 전 그들을 삼킨 산호초에게--주님의 은총이.” 박사님이 말했다.
“옳아요! 정말 그래.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이라 역시 다르군. 맞아! 계급이 올라가면서 액수도 많아졌어.”
그밖에 특별한 것은 없었고, 다만
뒷 면에는 몇몇 지역의 나침판 상의 위치와, 프랑스, 영국
그리고 스페인 돈을 등가等價로 계산하는 조견표가 있었다. 박사님이 말했다.
“꼼꼼한
사람이군! 남에게 속을 사람이 아니었어.” 지주님이 말했다.
“자, 이제 문서를 봅시다.”
문서는 군데군데 고리로, 그러니까
내가 선장의 주머니에서 본 듯한 바로 그 고리로 묶여져 있었다. 박사님이 조심스럽게 고리를 푸니, 경도와 위도, 물의 깊이, 산, 만灣 그리고 내해內海들을 표시하고, 배를 안전하게 정박하는데 필요한
세세한 지침을 적어 놓은 어떤 섬의 지도가 나왔다. 섬의 크기는 대략 가로 5킬로미터 세로 15킬로미터 정도였는데, 살찐 용이 곧추선 모양새였고, 육지로 움푹 들어간 두 개의 훌륭한
항구와 더불어, 섬 가운데의 산에는 "스파이 글라스"라는
표시를 해 놓고 있었다. 뒷날 추가한 사항도 보였는데, 무엇보다도
붉은 잉크로 표시한 3개의 가위표가 있었고--두 개는 섬의
북쪽 지역에, 한 개는 남서쪽에--그 한 개의 가위표 옆에는, 죽은 선장의 악필과는 달리 작고 깔끔한 글씨로, 여전히 붉은 잉크로
써 놓은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보물 더미는
이곳에"
지도의 뒷 면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더 적어 놓았다.
큰
나무, 스파이 글라스 마루터기, 북북동에서 정북쪽으로 11.25° 지점
해골섬 동남동에서 정동쪽으로
3미터
지점.
은괴는 북쪽 구덩이에 묻혔음. 동쪽
언덕 비탈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음.
정면에 보이는
검은 바위 남쪽 20미터 지점.
무기는, 북쪽 만의 북쪽 갑岬, 모래 둔덕에서 쉽게 찾음.정동에서 정북으로
2.81°
지점.
J.F.
그것이 전부였다. 간단했는데도
나는 이해를 못했지만, 지주님과 박사님은 희색이 만면했다. 지주님이
말했다.
“리브시, 이 고약한 일도 이제
끝장이오. 내일 브리스틀로
가겠오. 3주면--3주라!--아니 2주--아니 열흘이면 영국에서 가장 좋은 배와 엄선한 선원들을 손에
넣게 될 것이오. 호킨스는
사환으로 데리고 가구. 호킨스, 넌 유명해질 거야. 리브시, 당신은 담당 의사구, 난, 총지휘를 하는 거지. 레드러스, 조이스
그리고 헌터도 데리고 갑시다. 바람도
순풍일 게고, 쏜살같이 달려가 보물이 묻힌 곳을 대번에 찾아 내, 넘치는
돈을 물 쓰듯 하며 사는 거야.”
박사님이 말했다.
“트릴로니, 나도 당신과 함께
가겠오. 공증인으로 말이지요. 짐도 함께요. 비밀을 지켜야
할텐데, 딱 한 사람 걱정이 되는군.” 지주님이 소리쳤다
“그게
누구요? 그놈의 이름을 대시오.” 박사님이 대답했다.
“바로 당신이지. 입을 다물 수가 없을 것이오. 우리만 이 문서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오늘 밤 여관을 공격했던
자들과--분명 배짱 좋고 막가는 놈들이지--배에 남아 있던
자들, 그리고 부두에서 어슬렁거리는 자들도 모두, 그 보물을
손에 넣으려고 물불을 안 가릴 게 분명해요. 출항 전까지 우리는 누구도 혼자 다니면 안돼. 짐과 나는 당분간 함께 다니겠오. 브리스틀로 갈 때 조이스와 헌터를 데리고 가시오. 우리가 찾아낸 물건에 대해 누구도 발설해서는 안됩니다.” 지주님이 대답했다.
“리브시, 당신은 늘 틀림이 없는
사람이야. 내 죽은 듯이 아무 말 안 하리다.”
제II부
바다의 요리사
제7장
브리스틀에
가다
출항 준비는 지주님의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처음
세운 계획대로--심지어 리브시
박사님이 나를 데리고 가겠다는 계획도--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박사님은
자신이 떠난 후 대신해 줄 의사를 찾기 위해 런던으로 가야만 했고, 지주님은 브리스틀에 남아 열심히
일을 했다. 나는 지주님 댁에 머물면서, 산지기인 레드러스 노인으로부터 포로나 다름없는 보호를 받았지만, 항해를 하며 겪을 낯선 섬들과 매혹적인 모험을 꿈꾸면서 잔뜩 부풀어 있었다.
나는 그 지도를 곰곰히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고, 세세한 것까지 머리에 담았다. 관리인의 방 난로가에 앉아, 그 섬에 다가가는 여러
방향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그 섬의 구석구석을 밟는 상상도 했다.
스파이 글라스라고 부르는 그 높은 봉우리를 천 번도 더
올라가, 꼭대기로부터 눈앞에 전개되는 놀랍고도 변화무쌍한 광경을 즐기기도 했다. 때로는 섬이 토인들로 가득 차 그들과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사나운
동물들이 우리를 쫓아오는 상상도 했지만, 나의 이 머릿속 생각에는 실제의 모험에서 일어 날, 그처럼 이상하고 슬픈 일들은 없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난 어느 맑게 개인 날,
마침내 리브시 박사님을 수취인으로 하는 편지가, 이런 쪽지와 함께 왔다.
'수취인 부재시는
톰 레드러스 또는 호킨스 소년이 개봉 할 수 있음.'
그 쪽지에 따라 우리, 아니
내가--산지기 노인은 인쇄된 글자가 아니면 못 읽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내용을 읽었다.
올드
앵커 여관, 브리스톨, 17- 년 3월 1일
친애하는 리브시-당신이 우리집에 있는지 아니면 아직 런던에 있는지를 몰라 두 군데로 편지를 보냅니다.
배를 사서 정비를 했습니다. 접안을 한 채 출항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멋들어진 범선에--어린애도 운항을 할 수 있다오--배수량 2백톤 짜리라는 걸 당신은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배 이름은 히스파니올라입니다.
나의 오랜 친구인 블랜들리를 통해서 샀는데, 이 사람이 모든 절차를 빈틈없이 채근했지요. 이 존경할만한 친구가 아무런 조건 없이 이렇게 나의 일에 애를 써 주었고, 우리가 목적지를, 이를테면 보물을 향해 떠난다는 소문을 듣고는, 브리스틀에 있는 여러분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었오.
내가 편지를 읽다 말고 말했다.
“레드러스씨, 리브시 박사님이 질색할 일이 생겼어요. 지주님이
결국 비밀을 누설했군요.” 산지기 노인이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음, 누가 옳지? 말하지 말라고 해서 지주님이 말을 못한다면, 일이 되겠어?”
그 말을 듣고 한마디 더 하려다가 그만두고 읽기를 계속했다.
블랜들리가 히스파니올라를
찾아내고는, 아무런 문제없이 신속하게 거래를 성사시켰지요. 브리스틀에는 블랜들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사람들이 좀 있습니다. 심지어 이 정직한 사람이
돈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는 사람이고, 자신의 소유인 히스파니올라를 내게 터무니 없이 비싼 값에 팔았다고까지 했오--분명 중상모략이지요. 그렇지만 누구도 감히 배의 장점에 관해서는 부정을 못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오. 다만, 부두 노동자들이--삭구索具 준비를 위한 일꾼 등--느려터져 골치가 아팠으나, 시간이 해결해 주었오. 문제는 배에 탈 사람들이었오.
토인이나 해적 또는 구역질 나는 프랑스 놈들과 맞닥뜨릴 경우에 대비해, 대략 스무 명 정도를 모을 예정이었는데, 여섯 명 구하기도 쉽지
않아 걱정하던 차에, 운 좋게도 맘에 꼭 드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내가 선창가에서 서성이는데, 정말 우연히
그사람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오. 그는 선원 출신인데, 주막집을
하고 있고, 브리스틀의
모든 뱃사람들과 친분이 있으며, 육상 생활에 건강을 해쳐, 요리사가
되어 건강에 좋은 바다로 다시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날 아침 절름거리며 그곳을 걷고 있었는데, 바다 내음을 맡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나는 매우 감동을 했고--아마 당신도
그랬을 거요--가엾은 생각도 들어, 그자리에서 당장 우리
배의 요리사로 채용을 했습니다. 롱
존 실버라는 사람인데, 다리가 하나 없지만, 불멸의
호크 제독 휘하에서 나라를 지키다 잃은 것이라 나는 오히려 자랑이라
생각을 했오. 리브시 박사, 그에게는 연금도
없어요. 이런 형편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시오!
겨우 요리사 한명을 확보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실은 승무원을 다 구한 거나 마찬가지였오. 실버와 나는 며칠을 함께 보내면서, 머리 속에서나 상상했던 정말로 거칠고 노련한
뱃사람들을 한 무리 만났습니다--보기에는 우악스러웠지만, 불굴의
정신이 얼굴에 가득들 했습니다. 그들이라면 순양함과 대적해 싸울 수도 있다고 내가 말했지요.
롱
존은 내가 계약한 예닐곱 명에서 2명을 뺐어요. 중요한 모험에는 염려스러운 강물 출신들이라서라고 했습니다.
나는 지금 원기왕성하고 사기가 충천하며, 황소같이
먹고, 수목처럼 잠을 자지만, 나의 이 노련한 선원들이 다시
권양기를 돌릴 때까지는 눈코 뜰 새가 없을 것입니다. 바다로 가자! 보물을
찾자! 바다로 가는 건 나의 영광이지. 자, 리브시, 내 말을 소중히 생각한다면
지체 말고 와서 일을 맡으시오.
호킨스 소년은 레드러스가
보호를 해서 어머니에게 데리고 가 작별 인사를 드리도록 하시오. 그런 다음 두 사람 모두 전속력으로
브리스틀로 오길 바랍니다.
존 트릴로니
추신: 만일 8월말까지 우리의 종적을 알 수가 없으면, 우리를 찾아 배 한 척을
띄우겠다는 블랜들리의 말을 전하는 걸 잊었오. 그가 선장깜으로 아주 훌륭한 사람을 찾았다고 해서 보니, 사람이
좀 딱딱해서 마음에 안 드는 점은 있으나, 여러 면에서 보물같은 사람입니다. 롱 존 실버가, 항해사로 능력을 발휘할 애로우라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리브시, 뿔나팔을 불 갑판장도 구했고요. 멋들어진 히스파니올라에 승선하면, 모든
게 국왕폐하의 전함 같은 위용을 갖출 것입니다..
실버는 부자라는 말을 내 잊었오. 그가
예금을 하고, 절대 부도를 낸 적이 없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자기
대신 아내에게 주막 운영을 맡길 예정인데, 그 여인은 검둥이지요. 당신이나
나 같은 늙은 홀아비들로서는, 그가 다시 바다로 가는 건, 건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마 아내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재
추신: 호킨스는 어머니에게
가서 하룻밤을 보내도 좋습니다.
그 편지를 읽은 나의
기쁨이 어떻했을까는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너무 기뻐 어쩔줄을 몰랐다. 그런데 내가 생전 처음 좀 우습게 여긴 사람이 있다면, 한숨만 내쉬며
가기 싫다고 투덜대는 톰 레드러스 노인이었다. 그의 밑에 있는 일꾼들이라면 누구든지, 그가 안 간다면 대신해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주님이 뜻이 아니었고, 지주님의
뜻이야말로 그들에게는 바로 법이나 마찬가지였다. 불평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레드러스 뿐이었다.
그 다음날 아침 그와
나는 애드미럴 벤보우를 향해 떠났고,
가서 보니 어머니는 건강하고 활기에 차 있었다. 오랫동안 우리를 귀찮게 했던 선장이 없어져
더 이상 문제도 없었다. 지주님의 명령에 따라 모든 것을 다시 수리했고, 응접실과 간판도 새로 칠을 했으며, 가구도 몇 개 새로 들여 놓았고--무엇보다도 바에는 어머니를 위해 마련한 멋진 안락의자가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부족함이 없도록 새로 데려온 심부름하는 소년도 보였다.
그 소년을 보고서야 나에게 뭔가 변화가 일어난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눈앞의 모험만을 생각했지, 내가 떠난
후 집안일은 어떻게 될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제 나를 대신해 어머니 곁에 있게 될 어설프고 낯선
소년을 보니, 처음으로 눈물이 왈칵 솟았다. 이것저것 일을
가르치쳐 자리를 잡게 하니 곧 내게 도움이 되었으나, 소년에게 그런 일은 처음일 터였으므로, 그를 괴롭히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밤을 지내고 다음날, 저녁을
먹은 다음 레드러스와 나는 다시 길을 나섰다. 내가 태어난 이후 내내 살아왔던 포구, 정든 애드미럴 벤보우--칠을 다시 해서 눈에 좀 설었지만--그리고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모자를 비딱하게 쓴 채, 낡은 놋쇠 망원경을 옆구리에 끼고 해변을 따라 그 처럼 뻔질나게 배회하던, 볼에
칼자국이 난 선장을 생각했다. 굽은 길을 돌아서자 곧 우리집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땅거미가 질 무렵, 낮은
관목들이 뒤덮은 벌판 가운데 있는 로열 죠지 여관 앞에서 마차를 탔다. 나는 레드러스와 어떤 늙고 건장한
신사 틈에 끼어 앉았는데, 덜컹거리는 마차와 차가운 밤공기에도 불구하고, 마차를 타자마자 졸음이 쏟아져,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여러 역을
지나면서도 잠꾸러기처럼 잠만 잤고, 마침내 누군가 옆구리를 쿡쿡 찔러 눈을 떠 보니, 우리는 어느 도시의 커다란 건물 앞에 도착을 했고, 날은 샌지가
이미 오래였다. 내가 물었다.
“여기가
어디죠?” 톰이 말했다.
“브리스틀이다, 내리자꾸나”
트릴로니씨는 출항 준비를 감독하기 위해 부두에서 가까운 여관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었다. 부두로부터는 걸어야 했는데, 선창을 따라 정박한
크기도, 돛대 높이도, 국적도 가지가지인 수많은 배들 옆을
걷게 되어 정말 즐거웠다. 어느 배에서는 선원들이 일을 하며 노래를 불렀고, 또 어떤 배에서는 사람들이 내 머리 위 까마득한 곳에서, 거미줄보다
가늘게 보이는 줄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바닷가에서 내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다에 처음 와 보는 것이 아닌가 했다. 역청과 소금 냄새가 새로웠
다. 먼 바다를 누비고 다녔을, 감탄사가 절로 튀어 나오는 선수상船首像(범선의
뱃머리를 장식하기 위한 인어상, 여신상 등 아름다운 조각상: 옮긴
이)도 보였다. 그밖에도 귀걸이에다 곱슬곱슬한 구레나룻, 역청을 칠한 댕기머리, 쓰러질 듯 뒤뚱거리는 선상船上 걸음을 하는
늙은 선원들도 많았다. 만일 내가 왕이나 대주교들을 그렇게 많이 보았다면 별로 즐겁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선원이 되어, 범선을 타고 바다로, 호각을 부는 갑판장과 함께, 댕기머리를 땋은 선원들의 뱃노래를 들으며, 바다로, 미지의 섬을 향해, 감춰진 보물을 찾아 떠나려는 것이다!
내가 그처럼 즐거운 꿈에 잠겨 있는 사이, 어느덧 어떤 커다란 여관 앞에 도착을 하니, 푸른 색깔의 풍성한 해군장교 옷차림을 한 트릴로니 지주님이 만면에 웃음을 띈 채, 뱃사람의 걸음걸이를 그럴싸하게 흉내 내며
문을 열고 나왔다. 그가 반기며 말했다.
“어서들
오게. 박사는 어제 저녁 런던에서
왔지. 브라보! 배에 탈 사람들이 모두 모였어!” 내가 큰소리로 물었다.
“아, 지주님, 언제 출항하나요?” 그가 대답했다.
“출항이라! 내일이야!”
제8장
스파이 글라스 주막에서
내가 아침식사를 하고 나자, 지주님이
스파이 글라스 주막의 실버에게 전하는 쪽지를 주며, 부둣가를 따라 가며 잘 살펴 보면, 간판 대신 놋쇠로 만든 커다란 망원경을 걸어 놓은 조그만 주점을 쉽게 찾을 것이라고 했다. 그 기회에 배와 선원들을 더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뻐 곧 그곳을 찾아 나섰는데, 부둣가가 마침 가장 바쁜 시간이라 많은 사람들과 마차 사이를 헤쳐 가다가, 마침내
그 술집을 찾아냈다.
불빛이 밝게 비치는 조그만 목로주점이었다. 새로 칠한 간판이 보였다. 창문에는 붉은 커튼을 드리우고, 바닥은 반들반들했다. 주점 양편은 길이었고, 길 쪽으로 문이 하나씩 나 있었는데, 열린 문으로 들여다 보니,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도 크고 야트막한 방이 아주 깨끗했다.
손님 대부분은 뱃사람들이었고,
큰 목소리로 왁자지껄 떠들어대니, 들어가기가 겁이나서 문에서 머뭇거렸다.
그렇게 주춤거리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옆 방에서 나왔고, 롱
존이 틀림없음을 한눈에 알아 보았다. 왼쪽 다리가 엉덩이 가까운 곳에서 잘렸는데, 왼쪽 어깨 밑에 목발을 짚고는 읶숙한 솜씨로 새처럼 깡충깡충 뛰어 다녔다.
키가 크고 건장한데다 돼지 허벅다리만큼이나 큰 얼굴은 느끼하고
창백했지만, 아는게 많아 보였고 웃음기가 있었다. 정말 매우
쾌활한 사람인 듯했고, 휘파람을 불며 식탁 사이를 오가면서 농담을 하거나, 마음을 터놓는 손님에게는 그 어깨를 두드려 주기도 했다.
지금 고백컨대, 트릴로니 지주님이 리브시 박사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언급한 외다리 롱
존이라는 사람이, 정든 벤보우에서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살폈던 바로 그 외다리 해적이면 어떻게 하나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눈
앞의 그를 보니 그런 두려움이 사라졌다. 죽은 선장이나 블랙 독, 그리고 장님 퓨를 이미 겪은 바 있어, 해적이란 어떤 인간인지를 알았으므로, 그런 해적들과 그 깔끔하고 명랑한 주막 주인은 전혀 딴판이라고 내 나름대로 생각했다.
나는 바로 용기를 내어 문안으로 들어가, 목발에 의지한 채 서서 손님과 대화를 나누는 그에게 곧바로 다가갔다. 내가
쪽지를 내밀며 물었다.
“실버씨세요?” 그가 대답했다.
“그래. 내 이름이 바로 그렇지. 그런데 넌 누구니?” 그런 다음 지주님의 편지를 보더니, 뭔가 멈칫하는 듯했다. 그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내밀었다.
“아, 알겠어. 네가 바로 새로 온 사환이구나. 만나서 반갑다.”
그가 그 큰 손으로 내 손을 꽉 잡았다.
바로 그 순간, 구석에 있던 손님들 중 한 사람이 급히 일어나 문 쪽으로 갔다. 문에
이르더니 순식간에 길거리로 사라졌다. 그가 서두는 꼴을 눈여겨 보아,
한눈에 누군지를 알았다. 그 사람, 애드미럴 벤보우에 왔던, 손가락
두개가 없고 얼굴이 개기름으로 번들거렸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내가 소리쳤다.
“아, 블랙 독! 저 사람 잡아요!” 실버가 고함을 쳤다.
“그놈이 누군지는 내가 알 바 아니고, 그런데 계산서를 그냥 두고 내뺐어. 해리, 뛰어 가 붙들어”
문 가까이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벌떡 일어나 그를 쫓아 뛰기
시작했다.
“호크 제독(18세기 영국의 제독: 옮긴 이)일지라도 자기가 마신 술값은 자기가 내야지.” 실버가 큰 소리로 말하고는 내 손을 놓으면서 물었다.
“누구라고 그랬니? 블랙 뭐라고?
“독이요. 트릴로니 지주님이 그 해적들 얘기를 안 하셨던가요? 그들 중 한 사람이예요.”
“그래? 아니 우리집에 해적이라니! 벤, 빨리 뛰어 가 해리를 도우라구. 그놈이 한
패거리란 말이지? 몰건, 이리 와 봐, 당신 함께 술 마셨지?”
몰건이라는 사람이--늙고 희끗희끗한 머리털에 얼굴이 적갈색인 선원이었다--입안에 담배를 우물우물 씹으며 고분고분 다가왔다. 롱 존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어때, 전에 블랙--블랙 독을 본 적이 없어?” 몰건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없어요.”
“이름도 몰랐고?”
“몰랐어요” 주막 주인이 소리쳤다.
“제기랄! 톰 몰건, 자네에겐 다행이야. 허긴 그놈들과 한 패거리였다면, 우리 집에 자네를 얼씬도 못하게 했을 거야. 이 말 명심하라구.” 그러면서 물었다.
“그런데 그가 무슨 말을 하던가?” 몰건이 대답했다.
“뭐라고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요.” 롱 존이 다그쳐 물었다.
“네 어깨 위 그 물건은 대가리냐 아니면 구멍 뚫린 도르래 바퀴냐? 모르겠다니! 아마 얼떨결이라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이 안 날 수도 있지! 자, 생각해봐, 뭐라고 지껄이던가---항해?, 선장?, 배?, 말해 보라니까! 뭐야?” 몰건이 대답했다.
“용골龍骨 아래로 대가리 박고 끌려
가는 기합에 관한 얘기요.”
“기합이라고? 그럴싸하군. 좋아, 톰, 자네 자리로 가게. 멍한 친구 같으니라구”
톰은 곧 제자리로 돌아갔고, 실버는 좀 알랑거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은밀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아주 정직한 사람이야, 톰 몰건은. 좀 멍청하기는 하지만 말이지.” 그는 다시 큰 소리로 계속했다.
“자, 블랙 독이라구? 모르겠는데. 난, 모르겠다구. 난 몰라. 가만 있자, 생각나는
게 있군. 그래 맞아, 그놈을 본 적은 있어. 눈먼 망나니와 함께 몇 번인가 왔었지. 그래 그랬어.” 내가 말했다.
“그 게 확실 하다면 그 장님을 제가
알아요. 이름이 퓨입니다.”
“맞아! 퓨! 확실해. 인상이 상어 같았어. 그래, 그랬어! 블랙 독을 붙잡으면, 트릴로니 대장님한테 새 소식이 될꺼야! 벤은
뜀박질을 잘 해. 벤 만큼
잘 뛰는 사람이 없지. 그놈을 쫓아가 모가지를 끌고 데려올 거야. 제기랄! 기합 운운 했다고 그랬지? 나도 기합을 좀 주겠다!”
그런 말을 하며 내내, 런던중앙형사재판소 판사나 또는
보우(런던의 거리 이름: 옮긴 이)경찰도 그의 말을 받아들일 만큼, 격앙된 모습으로 식탁을 치며, 목발을 집고 주막 안을 왔다갔다 했다. 스파이 글라스 주막에서 블랙 독을 다시 보게되니 의심이 깊어져,
우리 배의 요리사가 될 그 사람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나 그의 속내를 알 도리가 없었고, 너무 주도면밀하고 영리한데다가 또 뒤를 쫓아갔던 두 사람이 헐레벌떡 돌아와 쫓던 사람을 군중 속에서 놓쳤다고 하니까, 도둑놈
다루듯 그들을 야단치는 것을 보고는 롱 존 실버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 그가 말했다.
“자, 어때, 호킨스, 나 같은 사람에게 너절한
일이 일어나는 걸 봤지? 트릴로니
대장님 생각은 어떨까? 그 잡놈이 우리집에 죽치고 앉아 내 럼을 마셔대다니! 마침 네가 와서 그놈의 정체를 밝혔는데, 이 비러먹을 눈 뜨고도
그놈을 놓쳤어! 호킨스, 대장님에게 잘 좀 부탁한다. 넌,
어리지만, 그래 어리지, 그렇지만 아주 영리해. 첫눈에 알아봤어. 자, 이런
말이야. 이렇게 의족으로 절뚝거리며 도대체 뭘 할 수 있겠니? 내
한창 때 같았으면 말야, 그놈을 쫓아가 한 주먹에 때려 눕혔겠지. 그런데
지금은…".
그는 돌연 발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떨군 채 뭔가를 곰곰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가 크게 소리쳤다.
“계산서가
있지! 럼 석 잔이라! 제기랄, 계산서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러면서 벤치에 주저앉아 볼에 눈물이 흐를 때까지 껄껄대며 웃었다. 그가 왜 웃는지 영문도 모르면서 나도 따라 웃었고, 우리는 주막집이
들썩거릴 정도로 점점 더 크게 웃었다. 마침내 그가 볼을 닦으며 말했다.
“산전수전 다 겪구서, 이게 무슨 일이람!
내게 사환일을 시켜도 목숨걸고 할 터이니, 호킨스, 우리 잘 해보자구. 자, 가 보자꾸나.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소용없구, 일이 먼저야, 친구. 우선
내 아끼는 모자를 쓰고, 너를 따라 트릴로니 대장님한테 가서, 지금 일어난 일을 말씀 드려야겠어. 왜냐하면,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야,
귀여운 호킨스. 여차하면 너나 나나 이 일로 신용을 잃을 수도 있어. 우리 둘 모두 등신, 그래 똑똑치 못하다는 소리도 들을 수 있지. 제기랄, 술 값도 꽤 되는데 이게 뭐람.”
그리고 다시 웃기 시작했는데,
하도 껄껄대고 웃어 영문도 모르는 채 나도 즐겁게 따라 웃었다.
부두를 따라 잠깐 함께 걸어가면서, 우리가 지나치는 많은 배--짐을 내리는 배, 싣는 배, 출항 준비를 하는 배--들이
갖춘 장비와 배수량, 그리고 국적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함께, 배와
선원에 관한 일화를 가끔 섞어가면서, 내가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항해에 관한 용어를 반복해 말했다. 나는 가장 좋은 동료 선원 한 사람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여관에 도착하니 지주님과 리브시 박사님이 함께 앉아 맥주 한 쿼트(약 1리터: 옮긴 이)에 곁들여
구운 빵 한 조각씩을 막 먹고는, 검사를 위해 배에 올라야 한다고 했다.
롱 존은 그간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거리낌 없이 보고했다. '일이 이러저러 했습니다--호킨스, 내 말 맞지?' 하며 가끔
내 동의를 구하면, 나는 언제나 그렇다고 대답했다.
블랙 독을 놓쳐 두 분은 아쉬워 했으나, 달리 어떻게 할 수도 없다는 데 모두들
의견이 같았고, 칭찬을 들은 롱
존은 목발을 짚고 자리를 떴다. 그의 뒤를 향해 지주님이 소리쳤다.
“오늘 오후 4시까지 모두들 배에 타라고 해” 요리사가 문을 나서며 대답했다.
“네, 네, 지주님” 박사님이 말했다.
“트릴로니, 당신이 뽑은 사람들은
대체로 믿음이 가지를 않아. 그런데 존 실버는 마음에 꼭 들어요.” 지주님이 말했다.
“틀림 없는 사람이지.” 박사님이 물었다.
“자, 짐도 함께 가야지?” 지주님이 대답했다.
“그럼, 그렇고 말고. 호킨스, 배를 보러 가자.”
제9장
화약과 무기
부두로부터 히스파니올라까지는 좀 거리가 있어, 우리는 보트를 저어 많은 배들의 선수상 밑을
지나고 선미船尾를 돌았는데, 굵은 밧줄들이 수면 아래나 우리 머리 위에서 거친 마찰음을 내거나 흔들거렸다. 이윽고 히스파니올라에 도착하여
배에 오르자, 햇빛에 검게 그을린 늙은 항해사 애로우씨가 우리를 맞으며 인사를 했다. 그는 사팔뜨기에다 두 귀에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지주님은 애로우씨와
친하고 우정이 깊었지만, 선장님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곧 알았다.
인상이 날카로운 선장님은
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못마땅해 하는 듯했고, 우리가 선실로 내려서자 곧 따라 들어온 선원이 전하는
말로 보아 그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수 있었다. 선원이 알렸다.
“스몰릿 선장님이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지주님이 승락했다.
“선장의
명령에 언제나 대기 중이지. 들어오라고 하게.”
말을 전한 선원의 뒤를 바로 따라온 선장님이 곧 들어와 문을
닫았다.
“음, 스몰릿 선장, 무슨 말인가? 모든 게 잘 되었으면 하네. 뱃길은 착착 준비되고 있겠지?” 선장님이 말했다.
“저, 지주님, 듣기 언짢으셔도 솔직히 말씀드려야겠군요. 이번 항해가 마음에 안 듭니다. 선원들도 마음에 들지 않고, 항해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간단히 말씀 드려, 그렇습니다.” 지주님이 매우 화가 난 모습으로 물었다.
“아니, 맘에 안 든다니, 배가?” 선장님이 대답했다.
“지주님, 배가 움직이는 것을 못 보았으니 이러구저러구 말을 못하겠습니다. 배가
멋지다는 말씀만 드립니다.” 지주님이 말했다.
“그렇다면, 혹 나를 싫어 한다는 얘긴가?” 그러자 리브시 박사님이 말 참견을
했다.
“잠깐, 조금 물러서시오. 그런 식으로 물으면 감정만 상하지 소용 없다구. 선장의 말을 알 듯 모를 듯한데 설명을 좀 들어야겠군. 이번 항해가
맘에 안 든다고 했는데, 자, 왜 그렀오?” 선장님이 대답했다.
“저는
소위 밀봉명령(일정 기간 명령서를 개봉할 수 없는 명령. 보통
전시에 기밀 유지를 위해 함장이나 특공대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옮긴 이)하에, 지주님이 명령하시는 곳으로 간다는 조건으로 이 배의 항해를
맡았습니다. 지금까지는 괜찮다 싶었죠. 그런데 선원들이 저보다 비밀을 더 많이 알고 있더라구요.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어떻습니까?” 리브시
박사님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그래서는 안되지” 선장님이 말했다.
“그다음, 우리는 보물을 찾아--뭐한 말씀이지만, 선원들이 그렇다고 했어요--떠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물 찾기란 매우 위험한 일이지요. 저는 보물을 찾아 떠나는 항해는 어느 경우든 싫습니다. 더구나 그
보물이 비밀스럽거나 앵무새까지도 들어서 알고 있는(죄송합니다. 트릴로니 지주님) 경우라면 더욱
그렇지요.” 지주님이 물었다.
“실버의 앵무새를 말하는 거요?” 선장님이 대답했다.
“꼭 그래서 만은 아니지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말씀입니다. 두 분께서는 앞으로 닥칠 위험을 모르십니다만, 제게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리브시 박사님이 말했다.
“모든 걸 분명히 알겠오. 사실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위험에 부딪힐 것이고, 그렇지만 당신이 생각하듯 우리가 그렇게 맹문이들은 아니오. 선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도 했는데, 그들이 시원치 않은가?” 선장님이 대답했다.
“마음에
안 들고요, 제가 직접 뽑았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박사님이 말했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 지주가 당신과 함께 갔어야 했었오. 허나
그렇지 않았더라도, 고의가 아니었지. 애로우를 싫어 하시오?”
“네, 훌륭한 뱃사람이라고는 믿지만, 지휘관으로서는 너무 마음이 순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해사는 자신에게 엄격해야하고, 선원들과
술을 마셔도 안됩니다!” 지주님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가
술을 마신다는 얘긴가?” 선장님이 대답했다.
“아니, 그런 말씀이 아니고, 사람이 너무 좋다는 말씀이지요.” 박사님이 물었다.
“자, 이제 그만하고, 선장,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음, 두 분께서는 이 뱃길에 마음을 굳히셨나요?” 지주님이 대답했다.
“철석같소.” 선장님이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소문으로만 듣고 말씀드린 저의 말을 꾹 참고 들어 주셨으니, 몇 마디 더 하겠습니다. 지금 화약과 무기를 뱃머리 쪽 창고에 쌓고
있더군요. 이 선실 밑에 좋은 장소가 있던데, 그곳에다 쌓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선 이것이 제 의견입니다. 그리고 지주님이
데려오신 네 사람 가운데 몇 명은, 배 앞 쪽에 있는 선원들 방을 함께 쓰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여기 이 선실 옆 방에 재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트릴로니씨가
물었다.
“그리고?” 선장님이 말했다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면, 이미 소문이 많이 퍼졌습니다.” 박사님도 거들었다.
“많이
퍼졌어” 선장님이 계속했다.
“어떤
섬의 지도가 지주님에게 있는데, 그 지도에는 보물이 묻힌 곳에 가위표시를 해놨으며, 섬의 위치가 어디어디라는 말을 이 귀로 들었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정확한 경도와 위도도 알고 있더군요.” 지주님이 외쳤다.
“내
맹세코 그런 말한 적 없어!”
선장님이 대답했다.
“선원들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지주님이 소리를 질렀다.
“리브시, 당신 아니면 호킨스가 틀림 없어.” 박사님이 대답했다
“누군가는
그다지 중요치 않아”. 트릴로니씨의 항의에 박사님이나 선장님은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나도 물론 그랬고, 확실히 트릴로니 씨는 말이 헤픈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지주님의 말도 옳고,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섬의 위치를 누설한 사람이 없다고 나는 믿었다. 선장님이 계속했다.
“음, 두 분 가운데 어느분에게 보물섬 지도가 있는지 모르지만, 애로우한테는 물론 저에게도 이 사실을 비밀로 하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비밀이 누설 되는 경우엔, 이 일을 그만두겠습니다.” 박사님이 말했다.
“알겠소. 우리 일을 비밀에 부치고, 고물 쪽을 단단히 지켜 우리편만 오가게하고, 화약과 무기를 통제하라는 얘기군. 한마디로, 반란이 무섭다는 말이지“ 선장님이 말했다.
“박사님, 따지자는 게 아니라, 반란이라는 말은 입에도 올리지 않았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군요. 떠나면 안되는 당연한 이유를 알면서도 떠난다면, 옳바른
선장이 아닙니다. 애로우씨는
참 정직한 사람이고, 많은 선원들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모두들
제가 아는 대로일 것입니다. 허나 저는 배의 안전과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책임 진 사람입니다. 일이 옳게 진행이 안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확실한 대책을 세우시라는
말씀이고요, 아니면 저는 그만 두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박사님이 미소를 띄며 말했다.
“스몰릿 선장, 산과 생쥐의 우화(일은 태산같이 하고 결과는 생쥐 한 마리를 얻었다는
우화: 옮긴 이)를 아시오?
미안하지만, 당신 말을 들으니 그 우화 생각이 나는구먼.
할 말이 더 있을 듯한데, 당신이 이 방에 들어올 때야 다른 뜻이 있었으리라, 이 가발을 걸고 장담하오.” 선장님이 말했다.
“박사님, 예리하시군요. 작별인사를
고하려고 했지요. 트릴로니 지주님이
제 말을 들어 주시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지주님이 소리쳤다
“더
이상 귀를 안 기울였을 거야. 리브시가
아니었던들 자네에게 꺼지라고 했겠지. 이제 다 들었네.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하겠네만, 자네에 대한 생각이 껄끄럽군." 선장님이
말했다.
“좋을대로
생각하시죠. 저는 임무를 다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자리를 떴다. 박사님이
말했다.
“트릴로니, 내 추측과는 달리
정직한 두 사람을 동반하게 됐군 그래--저 사람하고 존 실버 말이지.”
지주님이 큰소리로 말했다.
“실버는 자네 말대로야. 그렇지만
저 소갈딱지 없는 작자는, 행동거지가 남자답지 못하고, 뱃사람답지도
않은데다, 전혀 영국인답지도 않아.” 박사님이 말했다.
“자, 두고 보면 알겠지.”
우리가 갑판에 오르자, 선원들이 노랫조로 요-호-호
하면서 화약과 무기를 벌써 옮기기 시작했고, 선장님과 애로우씨가 감독을 하고 있었다.
잠자리가 재배치 되어 나는 매우 만족했다. 배 구석구석을 다시 정비했고, 배 앞머리 화물실 뒤에 있던 여섯
사람의 잠자리를 배 뒤쪽으로 옮겼는데, 거기서 주방이나 선수루船首樓(배의
맨 앞머리 갑판. 평 선원들의 주된 생활 및 작업 공간이다: 옮긴
이)로 가려면, 좌현 쪽에 댄 긴 막대를 따라
좁은 통로를 통해 가야 했다. 거기 있던 여섯 개의 방은 원래 선장님, 애로우씨, 헌터, 조이스, 박사님 그리고 지주님의
침실이었다. 이제 나와 레드러스씨가
각각 하나씩 차지를 하니, 선장님과 애로우씨는 갑판위 천창天窓이 있는 장소로 자리를 옮겼는데, 선장실로 불러도 좋을
만큼 갑판 양쪽으로 넓혀 놓은 곳이었다. 천장이 매우 낮았지만, 그물
침대 두 개를 매달 만큼은 여유가 있었고,
애로우씨도 그런 배치를 좋아하는 듯했다. 그도 선원들을 의심하는 눈치였으나, 독자 여러분이 알게 되듯이, 미구에 그의 의견을 더 들을 수 없게
되어, 그냥 내 짐작일 뿐이었다.
화약을 옮기고 선실을 바꾸며 모두들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롱 존이 한두 사람을 보트에 태워
더 데리고 왔다. 그가 날쌘 원숭이처럼 현측 사다리를 밟고 올라와, 눈앞의
광경을 보고는 물었다.
“어이, 이보게들, 무엇하고 있어?” 한 사람이 대답했다.
“화약을
옮기고 있오, 노형.” 롱 존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군, 그런데 젠장맞을, 일을 이렇게 하면 아침 밀물때를 놓칠 텐데!” 선장님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가
명령한 거야! 주방으로 가 할 일이나 해. 일꾼들이 저녁을
먹어야 하지 않겠어?” 요리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네, 네, 선장님” 하고는 곧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박사님이 말했다.
“선장,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오.” 스몰릿 선장님이 대꾸했다.
“그런
것 같군요, 박사님.” 화약을 나르는 선원들을 향해 그는 계속 소리쳤다.
“조심해, 조심하란 말야”
갑판에 설치한 4킬로그램짜리 포탄 발사용 회전식 청동제 대포를 살피던 나를 보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너, 사환이 아닌가? 가 봐! 요리사를
따라가서 뭔가 하란 말이야.”
그래서 내가 자리를 냉큼 뜨며 들으니, 그가 박사님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 이 배에서는 누구를 봐주는 일이란 없습니다.”
그 순간 나는 지주님과 같은 생각이 들어, 선장님이 몹시 싫어졌다.
제10장
항해
그날 밤 내내 우리는 출항 준비로 법석을 떨었고, 지주님의 장도와 무사귀환을 빌기 위해 블랜들리씨를
비롯한 지주님의 친구들이 보트를 타고 왔다. 애드미럴 벤보우 일을 반이나 도맡아 할 때도 어머니와 나는 밤을 새운 적이 없었는데, 갑판장의
호각소리에 따라 선원들이 권양기 주위에 모인 새벽 무렵, 나는 밤을 새워 이미 녹초가 된 상태였다. 나는 더 피곤해질 터였지만, 간단명료한 명령, 날카로운 나팔 소리, 희미한 등불 아래 각자 제자리에서 부산을 떠는
선원들 등 모든 것이 새롭고 재미있어 갑판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가 외쳤다.
“자, 바베큐, 노래 한 곡조 뽑아.” 또 한 사람이 고함을 쳤다.
“그 흘러간 노래로 한 곡조.” 옆구리에 목발을 짚고 옆에 서
있던 롱 존이,
“그래, 알았어, 친구들.” 하며 곧 허공을 향해 내가 잘 아는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의 궤짝 위에 열다섯 사람-“
그러자 모두 따라서 합창을 했다.
“요-호-호, 그리고 럼 한
병!”
그리고 마지막 “호!” 소리와 함께 앞에 있는 권양기의
지렛대를 모두들 힘차게 돌렸다.
그 절정의 순간에 떠나온
애드미럴 벤보우 여관에 대한 생각이 잠깐 스쳤고, 죽은 선장의 목소리가 합창에 묻혀 들리는 듯했다. 곧 닻이 올라와
물을 뚝뚝 흘리며 뱃머리에 매달렸다. 곧이어 돛이 펴지며, 정박한
배들과 육지가 옆으로 미끄러지듯 멀어져 갔다. 내가 잠시 누어 눈을 붙이려는 사이에 바야흐로 히스파니올라는 보물섬을 향해 항해 길에 오른 것이다.
항해와 관련된 시시콜콜한 사항은 생략하겠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배는 훌륭했고,
선원들은 유능했으며, 선장은 자신의 임무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보물섬까지의 긴 뱃길 중 일어난
두세가지 사건을 말해야겠다.
우선 애로우씨는 선장님이 우려했던 것보다 더 무능했다. 위엄이 없다 보니 선원들이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출항 초부터 거슴츠레 한 눈, 벌건 볼, 혀 꼬부라진 소리
등 술 취한 모습으로 갑판에서 얼쩡거렸다. 선실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명령도 자주 받았다. 넘어져 다칠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동료와 함께 쓰는 2층침대의 좁디좁은 자기 자리에서 하루종일 누워 있기도 했다. 하루이틀 겨우 술이 깨 가까스로 제 할 일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그가 어디서 술을 구하는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를 감시도 해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고, 맞대고 물어보면 취한 채 슬쩍 웃거나, 취하지
않았을 때는 정색을 하며 물만 마셨다고 했다.
그는 지휘관으로서 쓸모가 없어 선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 그렇게 해서 곧 목숨까지 잃게 되는데, 어느 칠흙같이
어두운 밤 해류를 거슬러 항해하는 도중 그가 사라져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되었어도, 놀라거나 애도를 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장님이 말했다.
“음, 바다로 추락한 거야! 여러분, 그의 발에 족쇠를 채우는 수고를 덜게된 거지.”
그렇지만 우리로서는 항해사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당연히 선원들 중 한 사람을 뽑아야 했다. 갑판장 죠우브 앤더슨이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호칭은
갑판장이라고 불리면서 항해사의 일을 맡게 되었다. 항해를 해본 경험이 있는 트릴로니씨는 날씨가 좋을 때면 직접 자신의 항해 지식을 사용하기도 해, 매우 도움이 되었다. 조타수인 이스라엘 핸즈는 주도면밀하고 경험이 풍부한 늙은 뱃사람으로, 사정이 급해지면 거의 모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롱 존 실버와 매우 친근한 사이였고, 그의 이름이 나왔으니 이제 바베큐라는 별명을 가진 우리 배의 요리사에 대해 말해 보겠다.
배에 오른 후부터 그는 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목발을 짧은 끈에 묶어 목에 걸고 다녔다. 배가 요동을 쳐도 목발을
칸막이 벽에 기대 놓은 채, 육지에서와 다름없이 읶숙하게 요리를 해내는 모습은 정말 대단했다. 악천후가 들 때 갑판을 지나는 그의 모습은 더욱 놀라웠다. 넓은
갑판을 건너는데 도움이 되도록 임시로 한두 개의 줄을--롱 존의 귀고리라고 불렀다--건 다음, 그
줄과 목발을 번갈아 잡아가며 정상인처럼 재빨리 건넜다. 그렇지만 과거 그와 함께 배를 탓던 선원들은
그 같은 모습을 가슴 아파했다. 조타수가 나에게 말했다.
“바베큐는 보통 사람이 아냐. 젊은
시절 공부도 많이 했고, 흥이나면 말이 백과사전이야. 용감하기도
하고--롱 존이라면 사자도
맥을 못 춰! 내가 봤는데, 한꺼번에 사자 네 마리를 잡아
박치기를 시켜 때려눕히더라구--맨손으로 말야.”
선원들 모두가 그를 존경하고
명령에 복종하기까지 했다. 그는 사람을 사귀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었고,
누구에게나 맘에 드는 뭔가를 해주었다. 내게는 항상 친절했으며, 내가 주방에라도 가면 언제나 반갑게 맞았고, 깨끗한 새 핀처럼 주방을
청결하게 했으며, 접시들을 반들반들 닦아 놓고, 한 쪽에는
앵무새를 기르는 새장을 걸어 놓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리 와 보렴, 호킨스, 와서 이 존과 긴 얘기를 한번 해보자꾸나. 넌 내가 제일 좋아 하는 사람이지. 여기 선장 플린트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구--내 앵무새를 그 유명한 해적의 이름을 따 선장 플린트라고 부르지--우리의 항해가 이제 성공할 거라구 플린트는 예언하고 있어. 안
그래? 선장?” 앵무새가 금방 대꾸를 했다.
“팔 레알, 팔 레알, 팔 레알.”
이상하리 만큼 거침없이 말을 하자 존이 손수건으로 새장을 덮어 말소리를 막았다. 그가 말했다.
“음, 저 새는 말이야, 아마 2백년은 살았을 거야. 호킨스, 영원히 사는 앵무새도 많아. 저
새보다 험한 일들을 더 본 놈이 있다면, 그건 분명 귀신일 거야. 저
새는 잉글랜드, 그 위대한
해적 잉글랜드 선장과 항해를 하기도 했어. 마다가스칼(인도양 상의 섬), 말라발(인도 남부 지방), 수리남(남아메리카 대서양 연안의 나라), 프로비던스(미국 로드 아일런드
주의 수도 겸 항구를 말하는 듯하다: 옮긴 이), 그리고 포르토 베요(파나마의 푸에르토 베요를 일컫는 듯하다: 옮긴 이)도 갔다 왔다구. 은화를
실은 채 가라앉은 배를 인양하는 자리에도 있었단다. “팔 레알”이라는 말도 거기서 배웠는데, 당연한 일이지. 그 난파선에서 8레알
짜리 은화가 자그만치 35만개나 나왔으니 말이야, 호킨스! 저 새는 인도 고아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을 쳐부술 때도 있었어. 그래, 보기에는 어린 새끼 같지.
그렇지만 실전 경험이 많아--그렇지? 선장?” 앵무새가 꽥꽥거렸다.
“전원
제자릿”
요리사가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주자, 앵무새는 창살을 쪼으면서 마구 욕설을 해댔다.
“아, 정말 저 새는 보물이지.” 그가 다시 말했다.
“얘, 석탄을 만지면 손을 더럽히는 이치란다. 가엾기도 하고 늙고 순진한 이 새가 욕설을 해대는구나.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암, 그렇구 말구. 신부님 앞에서도 저런식으로 욕설을 해댈 텐데 뭐.” 그러면서 그가 늘 그랬듯이, 나를
존경한다는 듯 점잖게 모자를 벗는 시늉을 해, 참으로 선량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지주님과 스몰릿 선장님은 아직도
서로 서먹서먹한 관계였다. 지주님은 지난번 일을 꽁한 채 선장님을 꺼려했다. 선장님은 선장님대로, 묻는 말에만 대답을 했고, 그것도 간단명료하고 아무런 감정없이, 쓸데없는 말은 단 한마디도
안했다. 모두들 성실히 일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열심히 일을 한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내키지 않는 듯하면서도 선원들에 대한 오해가 있었음을 인정한 적도 있었다. 그는
배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이 배는 역풍을 만나도, 남편에게
가까이 가는 아내 이상으로 제 항로 가까이 항해를 할 것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히기도 했다. '내 말인 즉, 지금은 아직 귀항길이 아니며, 나는 이 항해가 싫다.'
그 말을 듣고 지주님은 휙하니 돌아서 턱을 든 채, 갑판을 오르내렸다. 그가 말했다.
“조금만 더 들으면, 내 울화통이 터지겠어.”
몇 번 만난 악천후 속에서, 히스파니올라는 그 진가를 발휘했다. 선원들은 대단히 만족스러워하는 듯했고, 나는 인류가 항해를 시작한
이래 그처럼 버릇이 잘못 든 선원들은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만일 그들이 만족을 못했다면 태도가
분명 달랐을 것이다.
조그만 건수라도 생기면 진한 럼 칵테일을 돌렸다. 특별한 날, 예를 들어 누군가의 생일이라는 말을 들으면, 지주님은 건포도가 들어간 생과자를 특식으로 마련했고, 갑판 가운데에는
커다란 사과통을 늘 준비해 놓고 마음대로 먹게 했다. 선장님이 리브시 박사님에게 말했다.
“이런식으로
해서 좋은 결과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선원들의
못된 버릇을 키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사과 통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닥쳐올 위험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우리
모두 반란자들의 손에 죽었을 터였으므로, 독자 여러분이 곧 알게 되듯,
그 사과 통은 커다란 도움이 된 물건이었다.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우리는 무역풍을 따라 섬을 향해--위치는 말할 수 없다고 이미 말했다--가면서, 그 섬을 찾아 밤낮으로 망을 보았다. 계산을 해보니 그날 밤, 아니면 적어도 그 다음날 정오까지는 보물섬이 시야에 들어오게 되어 있었으므로,
바야흐로 우리의 항해가 끝나가는 날이었다. 우리는 남남서南南西로 향하고 있었는데, 순풍이 불고 바다는 고요했다. 히스파니올라는 뱃머리로 파도를 가르며, 이따금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돛은
모두 바람이 가득했다. 이제 우리의 모험이 그 첫장을 마무리하려는 찰라여서 모두들 사기가 충천했다.
해가 막 떨어지고 나도
일이 끝나 침실로 가는데, 갑자기 사과가 먹고 싶었다. 갑판으로
갔다. 망대 위에서 망을 보는 선원은 섬을 찾아 골몰하고 있었다. 뱃머리와 좌우측 현舷에 부딪히는 파도소리 말고는 러프(돛대 가까운 돛의 부분으로, 돛 면적의 약 20퍼센트를 차지하며, 바람이 최종으로 모이는 부분. 여기서는 바람에 부푼 돛을 뜻한다: 옮긴 이)를 바라보며 부는 조타수의 휘파람 소리만 조금 들렸다.
사과 통 속으로 들어가
보니, 사과가 한개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어두운 통 속에
그냥 주저앉아, 파도소리와 배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조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어떤 몸집이 큰 듯한 사람이 통 가까이 털석 주저 앉았다. 그가
몸을 기대는 듯 통이 뒤뚱 거렸고, 그의 말소리를 듣고는 소스라쳐 벌떡 일어설 뻔했다. 바로 실버의 목소리였다. 그의 말을 듣기 전에는 세상 없어도 일어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호기심과 공포 속에서 벌벌떨며 몇 마디 들어보니, 배를 탄 선량한 사람들의 목숨이 모두
내게 달린 것을 알게 되었다.
제11장
사과 통 안에서 들은 이야기
실버가 말했다.
“아냐, 내가 아냐. 플린트가 선장이었어. 난 이 의족 때문에 갑판장이 고작이었다구. 포격전이 벌어져 함께 싸우다 나는 다리를 잃고 퓨는 눈을 잃게 된 거지. 내 다리를 자른 놈은 뛰어난 외과의사로--학위도 있고 박식하고--라틴어까지 달통했었는데, 그런 게 다 소용이 없더라구. 코르소 캐슬(코르시카 섬 북단의 코르소 곶을 일컫는 듯하다: 옮긴 이)에서 다른 죄수들과 함께 개처럼 목이 졸려 땡볕에 팽개쳐지던데 뭐. 로버츠의 부하들이었는데, 배 이름을 로열 포춘이다 뭐다 바꿔서 그런 일이 일어난 거야. 그래서 세례명으로 받은 배 이름은 바꾸면 안 돼(세례 받은 배의 이름을 바꾸면 불행이 닥친다는 미신이 있었다: 옮긴 이). 잉글랜드 선장이 인도 총독을 쳐부순 다음, 우리는 카싼드라라는 이름이 붙은 배를 타고 말라발로부터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온 거야. 플린트의 옛 배 왈러스가, 피가 낭자한 갑판에 침몰할 만큼 금덩어리를 가득 실은 것도 보았단다.” 선원들 중 가장 나이 어린 선원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투로 말했다.
“아, 플린트는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군요.” 실버가 말했다.
“데이비스도 역시 대장부라고 모두들 그랬어. 난 그와 함께 배를 탄 적은 없지만 말야. 나는 처음 잉글랜드 선장과, 그 다음엔 플린트와 함께 했어. 다 지나간 얘기지. 그런데 지금,
말하자면 이렇게 다시 해적생활로 돌아 온 거야. 잉글랜드 선장에게서는 9백파운드를, 플린트 선장으로부터는 2천파운드를
받았지. 보통 선원 한 사람 몫으로는 적은 돈이 아니었어--모두
은행에 맡겼단다. 그런데 버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절약하는 게 중요해.
넌 이 걸 명심해야 할 거다. 잉글랜드 선장의 부하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갔지? 모를 일이야. 플린트의 부하들은? 그래, 거의 모두 이 배에 타고 있지. 지금 모두 배터지게들 먹고 있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거렁뱅이었던
놈들도 있어. 죽은 퓨 말이야, 눈이 멀어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상원의원 나리들처럼
1년에 1천2백
파운드씩이나 썼어. 지금은 어떻다? 그래, 죽어 땅속에 있지. 그렇지만 죽기
2년전부터는, 젠장할, 굶고 있었던 거야. 동냥도
하구 도둑질도 하구. 완전 파산을 해서 먹을 게 없었던 거지. 이런
빌어먹을!” 나이 어린 선원이 말했다.
“저, 그렇다면 결국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말이군요” 실버가 외쳤다.
“등신들한테는
그런 법이야. 돈을 어떻게 할 줄 몰랐지. 이 거 명심해야
한다. 자, 내말 들어봐.
자넨 젊고 영특해. 첫 눈에 알아 봤어. 내
너를 어른 대접 해주겠다.”
나에게 했던 바로 그 알랑거리는 말을 지껄이는 그 구역질 나는 늙은 요리사의 말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이 어떻했을지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할 수만 있었다면, 그대로 통을 꿰뚫어 찔러 죽이고 싶었다. 그는 누가 듣는지도 모르고
계속 떠들었다.
“보물을
찾아 나서는 신사들에 관한 얘기를 좀 해볼까? 그들의 삶이란 고달프고 교수형도 당할 수 있지만, 싸움닭처럼 먹고 마시며, 항해가 끝나면 수백 파딩(1파운드는 약1천 파딩: 옮긴
이)이 아니라, 수백 파운드씩 한몫을 챙기는 건 당연지사지. 음, 그런데 대부분이 럼을 마시며 흥청망청 써버리고는, 빈털터리가 되어 다시 바다로 나간단다. 그렇지만 나는 안 그랬어. 여기저기 조금씩 묻어 두었지. 한군데 두면 통째로 없어질까 걱정이
돼서 말야. 내 나이 쉰 살, 존경 받을 만한 나이지. 이번 항해에서 돌아오면, 이제 정말 양반으로 격에 맞게 살아야겠어. 할 만큼 했구 말야. 아, 물론
그동안 나는 편히, 뭐든 부족함이 없이 살아왔지. 바다로
나갈 때 말고는 잘 먹고 마시고 편한 잠자리에서 잤다구. 뱃생활을 어떻게 시작했냐구? 자네처럼 밑바닥부터 출발했지.” 다른 선원이 말했다.
“저, 그렇다면 묻고 남은 돈은 지금 다 써버렸다는
말이군요. 그렇지요? 그러니 브리스틀에는 감히 얼굴을 내밀 수도 없구요.” 실버가 못마땅한 듯 물었다.
“무슨
그런 말을…, 내가 돈을 어디에 맡겼다고 생각하나?” 젊은이가 대답했다.
“브리스틀에요, 은행이겠죠 뭐.” 요리사가 말했다.
“그래, 브리스틀에 닻을 내리자마자 예금을
했지. 그런데 지금 우리 늙은 마누라가 모두 꺼냈어. 스파이 글라스 주막도 술이랑 먹거리랑 가재도구랑 모두 함께 팔아 치웠다구. 마누라가 나를 기다리는 곳이 몰래 따로 있지. 내 자네를 믿으니
그곳을 말하겠네마는, 다른 선원들은 이 말을 들으면 아마 부러워 할 거야.” 다른 선원이 물었다.
“부인을
믿으세요?” 요리사가 대꾸했다.
“보물을
찾는 사람들은 서로 믿지를 않는데,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내
이 말은 믿어도 돼. 그렇지만 난 상대방을 믿는 방법이 있지. 누군가--이를테면 나를 알면서도--이 존을 속이면 그냥 내버려두지를 않아. 퓨를 두려워 한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플린트를 무서워 한 사람들도 있었지. 하지만 플린트는 날 두려워 했어. 플린트는 참으로 무시무시하고 거만했단다. 플린트의 부하들도 정말 거친 뱃사람들이었구. 악마도 그들과 항해하기를 두려워했을 정도였으니까. 내가 지금 뻥을
치는 게 아니라, 네가 봤듯이 내가 사람들과 얼마나 편히 지내니. 그러나
내가 갑판장일 때는 말야, 플린트의
옛 부하들은 순한 양과는 거리가 멀었어. 아, 이제 이 늙은
존과 함께 배를 탓으니 자신감을 갖어도 좋아.” 젊은이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사실 이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그 일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만, 존, 이제 나도 함께 하겠습니다.” 실버가 대답했다.
“자넨
용감하고 똑똑한 젊은이지. 보물을 찾아 나선 신사로서는 처음 보는 아주 잘 생긴 얼굴이야.”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통이 흔들릴 정도로 열열히 악수를 했다.
비로소 나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보물을 찾아 나서는 신사(이는 완곡어법으로, 도둑을 양상군자라고 하는 것과 같다: 옮긴 이)"란 바로 해적을 뜻하는 말이고, 착한 선원의--마지막 남은 착한 사람이었을 것이다--신세를 망치려고 꼬드기는 현장을
내가 엿들은 것이다. 내가 한숨 놓으려는 순간, 실버가 휘파람을 살짝 부니, 또
한 사람이 다가와 그들 곁에 앉았다. 실버가 말했다.
“디크가 함께 하기로 했어.” 조타수인 이스라엘 핸즈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 그럴 줄 알았지. 바보가 아니거든, 디크는.” 씹던 담배를 뱉으며 그가 계속했다.
“그런데, 바베큐, 내가 알고 싶은 게 있어. 언제까지 이런 넌더리 나는 나룻배나 타고
우왕좌왕할 거지? 스몰릿
선장에게 지쳤어. 제기랄! 내가 골았단 말이야. 선장 방에 들어가 포도주며 안주며 먹고 싶다는 말이지.” 실버가 말했다.
“이스라엘, 네 대가리는 예나 지금이나 꼴통이야. 하지만 귓구멍은 뚤렸다고 생각해. 말귀도 알아듣고 말야. 자, 그러니
잘 들어 봐. 제자리를 지키고 말야, 하라는 대로만 해. 입 다물고. 신호가 있을 때까지 절대 술을 마시면 안돼. 내 말대로만 해.” 조타수가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언제 안한다고 했나? 그런데, 도대체 언제야? 언제냔 말이지” 실버가 소리를 높여
말했다.
“언제냐! 제기랄! 저, 그러니까, 알고 싶다면 말해 주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순간이 오면, 그때야. 뛰어난 뱃사람인 스몰릿 선장이 지금 우리를 위해 배를 몰고 있구. 지주와 의사가 지도 비슷한 걸
가지고 있지. 어디다 감췄을까? 알 도리가 있어야지. 아무도 모르니 말야. 자 그렇다면,
제기랄, 지주와 박사가 보물을 찾아서 배에 싣게 내버려 두면 우리가 수고를 덜게 되는 거지. 그 다음 기회를 보는 거야. 스몰릿 선장에게 배를 몰게 내버려뒀다가,
자네들이 뜨악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모두 믿을만 하다고 확신이 서면, 돌아오는 길을 한 반쯤
와서 요절을 낼 생각이야." 디크 청년이 말했다.
“아니, 여기 우리는 모두 배를 몰 수 있는 선원들인데.” 선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마구잡이 선원이라고 해야 옳아. 항로를 따라 항해야 하겠지만, 항로는
누가 찾나? 이 길이다 저 길이다 제각각 떠들 텐데.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스몰릿 선장에게 무역풍이 부는 지점까지만 항해토록
하겠어. 그리되면, 항로를 잘못 계산하는 일도, 하루 한 모금만 마셔야 하는 물 걱정도 없을 거야. 그렇지만 난
자네들을 잘 알아. 난 섬에서 배에 보물이 실리는 즉시, 그들을
마무리할 생각이야. 안됐지만 말이지. 그런데 자네들이야 곤드레만드레
취해 해롱댈 테구. 자네같은 사람들과 배를 타다니, 이게
무슨 꼴이야!” 이스라엘이 소리를 질렀다.
“롱 존, 닥쳐요. 누가 무슨 소리를 했다고 그렇게
화를 내지?” 실버가 소리쳤다.
“그렇게
화를 낸다고? 근사한 배들이 붙잡힌 걸 내가 몇 척이나 봤다고 생각하니? 런던의 교수대에 목이 매달려 땡볕에 말라 죽은 씩씩한 젊은 애들이 얼마니? 그
게 모두 너처럼 서둘렀기 때문이야. 내 말 알아 들어? 나는
바다에서도 경험을 했지. 제 항로를 따라 순풍을 타면, 비단
마차를 타는듯 하다는 얘기야. 그런데 넌 어림도 없어. 내가
잘 알지. 금방 럼에 고주망태가 되어 교수대로 갈 걸.” 이스라엘이 말했다.
“존, 당신이 성직자처럼 절제를 한다는 걸 모두들 알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당신 만큼
배를 모는 사람들이 있지. 조금 즐겼던 거야. 술을 마시면
모두들 어울려 왁자지껄했던 거지, 당신처럼 답답한 골샌님이 아니란 말이오.” 실버가 말했다.
“그으래? 흐음,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지? 퓨가 바로 그런 종자야. 그런데 죽을 때 거지였어. 플린트도 그랬고, 사반나에서 럼 때문에 죽었어. 좋은 뱃사람들이었지! 그런데 지금 모두 어디에 있지?” 디크가 물었다.
“그런데
그들을 결박한 다음 어떻게 해요? “ 실버가 기특하다는 듯 대답했다.
“내게도
인물이 있었군! 그래서 내가 사업이라고 했던 거야. 자, 네 생각은 어떻니? 무인도에 팽개쳐 버려? 잉글랜드 선장 식으로 말이지. 아니면 돼지고기 다지듯 요절을 내? 이건 플린트나 빌리 본스식이겠구.” 이스라엘이 말했다.
“이런
일에는 빌리가 제격이야. ‘죽은자는
깨물지 않는다’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어. 지금 자신이 죽어 있으니 깨무는지 아닌지 알 거야. 빌리야말로 끝까지 살아 돌아온
끈질긴 사람이었지.” 실버가 말했다.
“맞아, 사납고 주도면밀했지. 그런데 내 말 들어봐. 나는 마음이 좋고 자네들 말처럼 신사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신중해야겠다.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나는--죽이는
쪽을 택하겠어. 장차 내가 의회에 진출하면 마차를 타게 될 게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앞에서, 기도를 방해하는 마귀들처럼, 그 귀찮은
선실 놈들이 얼쩡대는 걸 원치 않아. 기다려. 때가 오면, 그럼, 요절을 내자구.” 조타수가 외쳤다.
“존, 당신은 정말 사나이야” 실버가 말했다.
“이스라엘, 이제 보면 알게 될 거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놈만은--트릴로니말이야. 내 이 두 손으로 그 소대가리 같은 모가지를 뽑아 놓겠다.” 그리고 다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디크, 아이구 착하지, 냉큼 가서 사과를 가져 온. 목을
축여야겠구나.”
내가 사과 통 안에서 얼마나 떨었는지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할 수만 있었다면 뛰어나와 도망을 쳤겠지만, 사지와 가슴이 떨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 디크가
일어서려는 바로 그 순간, 핸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가만 있어. 존, 그런 썩은 과일을 왜 먹으려고 해. 럼이나
한 모금씩 마시자구.” 실버가 말했다.
“디크, 널 믿고 심부름을 시키는 거다. 술통에 표시를 해 놨다는 걸 명심해. 열쇠도 거기 있어. 잔에 따라서 가지고 오라구.”
공포 속에서도 나는 그 술이 바로 애로우씨의 목숨을
앗아간 술이구나 했다.
디크가 자리를 떠 잠시 비운 사이, 이스라엘이 요리사의 귀에 대고 무엇인가를 소근댔다. 한 두 마디밖에 못 들었지만 중요한 사실을 알아낸 것이, 같은 내용의
몇 마디를 더 들은데다가 '합세하지 않으려는 놈들도 있음’이라는
말을 완벽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우리가 믿을만한 선원들이 아직 배에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디크가 돌아오자, 셋이 번갈아 잔을 돌려가며
마셨다. 한 사람이 외쳤다.
“행운을
위하여 건배.”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옛
플린트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실버가 노랫조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돛에는 순풍을, 많은 몫의 보물과
먹을거리를 위하여.”
바로 그때, 환한 빛이 통 안의 나를 비춰 고개를 드니, 달이 돋아 뒷돛대 위에
은빛을뿌리며, 바람에 부푼 앞돛대의 큰돛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그
순간 망을 보던 선원이 외쳤다.
“육지다!”
제12장
작전 회의
갑판을 위를 가로지르는
요란한 발소리들이 났다. 선실과 선수루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통 밖으로 나와 앞돛 뒤로 몸을 숨긴 다음, 요리조리 몸을 피해 선미船尾 쪽으로
갔다가, 마침 선수船首 쪽으로 뛰어가는 헌터와 리브시 박사님을 만나려고 넓은 갑판으로
나왔다.
선원들이 이미 모두 모여
있었다. 달이 뜨면서 안개도 거의 걷혔다. 남서 쪽으로 멀리, 수 킬로 떨어진 곳에 두 개의 야트막한 봉우리가 눈에 들어왔고, 그
중 한 봉우리 뒤로 조금 더 높은 봉우리가 솟았는데, 그 꼭대기에는 아직 안개가 끼어 있었다. 세개의 봉우리 모두 뾰죽한 고깔 모습이었다.
조금 전의 공포로부터 아직
못 벗어난 나는, 모든 것을 거의 꿈속에서 바라보는 듯했다. 그때
스몰릿 선장님의 명령 소리가 들렸다.
히스파니올라의 뱃머리를 돌려 역풍이 불어오는 쪽으로 가까이
대자, 항로가 바뀌어 동쪽으로 또렸한 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돛이
모두 펴지자, 선장님이 물었다.
“이봐, 선원들 가운데 과거에 저 섬을 본 사람이 있는가?” 실버가 대답했다.
“접니다. 제가 어느 상선에서 요리사로 일할 때, 물을 길으러 간 적이 있습죠.” 선장님이 물었다.
“작은
섬 뒤 남쪽 해안에 배를 댈만한 곳이 있을 듯한데, 어떤가?”
“그렇습죠. 해골섬이라고 합니다. 한때 해적들의 본거지였고, 저와 배를 탔던 녀석이 그 지명을 다
꿰고 있었습죠. 저기 북쪽 산은 '앞돛대봉'이라고 합니다. 저기 남쪽을 향해 연이은 3개의 봉우리가--앞돛대봉, 주돛대
봉, 뒷돛대봉이라고 하죠--보이는군요. 저기 주돛대봉은--가장 높고 꼭대기에 구름을 인 저 가운데 봉우리
말입니다--'스파이 글라스'라고 했습니다. 그 만灣에 정박하여 배를 청소하는 동안, 저 봉우리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망을 보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습죠. 해적들이
그 만에서 배를 닦았거든요, 선장님.” 선장님이 말했다.
“여기
지도가 있는데, 그곳인지 아닌지 좀 보게.”
해도를 보자 롱 존의
눈이 번득였으나, 그 종이가 새것임을 알고는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 지도는 우리가 빌리 본스의 궤짝에서 찾아낸 지도는
아니었지만, 붉은색 가위표시와 메모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지명, 해발, 물
깊이 등--똑같은 복사본이었다. 마음이 쓰렸겠지만 실버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네, 선장님, 여기가 그 지점인데, 정말 잘 그렸군요. 누가 그렸나요? 해적들이란 원래 무식해서 이 걸 그렸을 리가 없고. 아, 여기 있군요. 그
녀석이 '캡틴 키드(1701년 해적죄로 처형된
스코틀랜드 출신의 해적. 그가 해적이었는지의 여부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옮긴 이)만'이라고 불렀습죠. 남쪽으로 흐르는 급한 해류가 서쪽 해안을 따라 흘러 다시 북쪽으로 거스릅니다.
역풍이 좀 불었는데, 배를 잘 몰으셨어요, 선장님. 배를 청소하려면 더 이상 마땅한 곳이 없습니다.” 선장님이 말했다.
“고맙소, 고마워. 내 나중 도움이 필요하면 다시 묻겠오. 이제 가서 일을 보시오.”
섬에 관해 아는 것을 침착하게 설명하는 존을 보고 나는 아연실색했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를 보고 기겁을 했다. 그의 음모를 사과 통 안에서 엿들은 일을 그는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그의 잔혹성, 이중성, 그리고 선원들을 움직이는 힘이 너무나 무시무시하여, 그가 내 팔을
잡는 순간 몸서리를 쳤다. 그가
말했다.
“아, 여기 이 섬은 아름다운 데지. 너 같은 소년은 상륙해서 배울 게
많은 곳이야. 너는 헤염도 치고, 나무에도 오르고 염소도
사냥할 수 있어. 염소처럼 저 산들에도 오르고 말야. 아이고, 나도 다시 젊어지는 것 같구나. 목발을 팽개쳐 버릴 뻔했네. 젊고 발가락 열 개가 있으면 그게 바로 축복이지. 암, 그렇구 말구. 탐험을 좀 하고 싶으면, 이 늙은 존에게 말만 하려무나. 먹을 걸 만들어 주겠다.”
그는 나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린 다음 다리를 절뚝이며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스몰릿 선장님, 지주님 그리고 박사님은 후갑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말을 하고 싶어 조바심이 났지만, 선원들의
눈에 띌까 염려가 되어 끼어들지를 못했다. 그들에게 다가갈 궁리를 하고 있는데, 박사님이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침실에 파이프를 두고 와, 담배를 못 피워 쩔쩔매면서, 나에게 가져오라고 했다. 남이 듣지 못할 만큼 가까이 다가서서 박사님에게 말했다.
“박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선장님과 지주님을 즉시 선실로 내려가시라고 하세요. 그리고 심부름을
시킬 듯 저를 부르세요. 엄청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잠시 어두워졌던 박사님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그는 무슨 질문이나 했던 양 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고맙구나, 짐, 내가 알고 싶었던 일이야.”
그런 다음 그는 두 분에게로
다시 되돌아갔다. 그들은 잠시 대화를 나눴으나, 누구도 놀라거나
큰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선장님의 명령에 따라 조우브
앤더슨이 호각을 불자, 그 소리에 맞춰 모든
선원들이 갑판에 모인 것으로 보아, 박사님이 내 말을 전한 것이 분명했다. 스몰릿 선장님이 말했다.
“선원 여러분. 내 한마디 하겠오. 눈에 보이는 저 땅이 우리가 찾던 곳이오.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도량이 넓은 신사이신 트릴로니
지주님께서 내게 그대들의 일을 물으셨고, 내가 일을 잘 하라고 다그친 적이 없는데도, 모든 선원들이 각자 맡은 바 임무를 다해냈다고 보고를 드렸오. 이제
지주님과 박사님, 그리고 나는 선실로 내려가 여러분의 건강과 행운을 빌기 위해 건배를 할 터이니, 여러분도 우리 모두의 건강과 행운을 위해 건배를 하고 한잔들 하시오. 매우
고마운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나와 같다면 이 자리를 마련하신 지주님을 위해 크게 박수를
쳐 주시오”
그 말에 따라 모두 환호성을 질렀는데, 너무나 진지하고 감동적이여서 과연 그들이 우리 목숨을 뺏으려고 하는 사람들인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롱 존 실버가 다시 박수를 제안했다.
“스몰릿 선장님을 위해 한 번 더 박수”
열렬한 박수갈채가 다시 한번 따랐다.
건배가 끝나자 세 사람은 선실로 내려갔고, 곧 짐 호킨스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원형탁자에 둘러앉은 그들 앞에 스페인산 포도주 한 병과 건포도가 보였고,
박사님은 가발을 벗어 무릅 위에 놓은 채 담배를 피웠는데, 그것은 마음이 편치않다는 뜻이었다. 날씨가 따듯한 밤이어서 열어 놓은 뒷창문을 통해 보니, 물길에 이는
파도가 달빛에 빛났다. 지주님이 말했다.
“자, 호킨스, 할 말이 있다고 했지. 말해 보렴.”
명령대로 나는, 실버가 한 말을 모두, 가능한 간단하게 말했다. 내가 말을 마칠 때까지 세 사람 모두 아무
말 없이, 꼼짝 않고 시종일관 내 얼굴만 보았다. 리브시 박사님이 말했다.
“짐, 앉으렴.”
그들 옆에 나를 앉힌 뒤, 포도주
한잔을 따라주고 건포도를 한 웅큼 쥐어 준 다음, 해적들에게 들키지 않은 행운과 나의 용기에 대해 고맙다는
표시로, 모두 차례차례 머리를 숙이며, 나의 건강을 위해
건배를 했다. 지주님이 말했다.
“자, 선장, 당신이 옳았고 내가 잘못했오. 내가 바보라고 할밖에. 당신의 명령을 기다리겠오.” 선장님이 대답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란자는 반드시 반란의
조짐을 보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그런 낌새를 알아채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
했는데요.” 그가 덧붙혔다.
“저보다
한 수 앞서는 놈입니다.” 박사님이 말했다.
“선장, 당신도 인정을 했으니 말이지, 실버가 바로 그런 자요. 대단한
놈이지.” 선장님이 대꾸했다.
“활대(돛을 걸기 위한 가로 돛대: 옮긴 이)에 목을 매 놔도 끄떡없을 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말해야 아무 소용이 없죠. 제게 서너 가지 묘안이
있습니다만, 지주님이 허락하신다면 말씀을 드리지요.”
“아, 선장의 말인데, 물론이지요.” 지주님이 으쓱해서 대답했다. 선장님이 대책을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으니 항해를
계속해야 합니다. 지금 귀항을 명령하면 그들은 즉시 반란을 일으키겠죠.
그 다음,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적어도 보물을
찾기까지는--있습니다. 셋째, 우리가 믿을만한 선원들이 있지요. 조만간 격렬한 반란이 있을 것이고
따라서 선수를 칠 것을, 이를테면 저들이 마음 놓고 있는 날을 잡아,
우리가 먼저 공격할 것을 제안합니다. 지주님 하인들은 우리 편이죠. 그렇죠, 지주님?” 지주님이 단언했다.
“나를
믿듯 믿어도 될 사람들이오.” 선장님이 수를 세었다.
“하인이 세 사람이니, 호킨스까지 합하면 우리는 일곱 사람입니다.
믿을 만한 선원들은 몇이나 되나요?” 박사님이 대답했다.
“그야
모두 트릴로니가 개인적으로 계약한 사람들이겠지. 실버에게 부탁하기 전에 말야.” 지주님이 대답했다.
“아냐, 내가 계약한 사람은 핸즈 한 사람밖에
없어요.” 선장님이 덧붙혀 말했다.
“핸즈는 믿을만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만.” 지주님이 울화통을 터뜨렸다.
“모두
영국사람이니 어련할려구 생각한 것 아니겠오! 배를 그냥 날려 버리고 싶어!” 선장님이 말했다.
“여러분, 저의 좋은 방책이라는 것도 별것 없습니다. 그냥 기다리면서 경계를
철저히 합시다. 쉽지는 않습니다. 먼저 공격을 하면 통쾌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우리 편인지 확실히 알 때까지는 먼저 공격해서 안됩니다.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말씀입니다.” 박사님이 말했다.
“여기 이 짐은
누구보다도 도움이 될터인데. 선원들은 짐을 믿어. 그러니 짐은 그들을 잘 감시할 수 있지.” 지주님이 한마디했다.
“호킨스, 너만 믿겠다.”
나는 혼자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두려워 대단한 부담감을 느꼈다. 그러나 일련의 이상한 상황으로 인해, 우리의 목숨은 전적으로 나에게
좌우되었다. 한편, 26명 가운데 우리편은 일곱 명에 불과했고, 그 가운데 나는 소년이었으므로 어른들로 비교하면 6명 대 19명이었다.
제III부
해안 탐험
제13장
나의 해안 탐험 이야기
그 다음날 아침 갑판에 올라 보니 섬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밤사이 상당한 거리를 왔지만, 이제 바람이 완전히 죽어 동쪽 해안선으로부터
동남쪽으로 800미터쯤 떨어진 해상에서 우리는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섬의 대부분이 회색빛 밀림으로 뒤덮혀 있었다. 산기슭의 황톳빛 모랫길들과 한 그루씩 또는
무리를 지어 숲 위로 높게 솟은 소나무류들이 그 한결 같은 회색빛 색조를 깨뜨리고는 있었지만, 대체적인
빛갈은 단조롭고 우울했다. 뾰죽한 바위 봉우리들이 숲 위로 또렷했다.
봉우리 모양이 모두 이상했고, 그 중 스파이 글라스는 높이 120미터 정도로 섬에서 가장 높았는데, 사방이 깍아지른 듯 솟아 오르다가 일거에 잘려나간 꼭대기는 조각상을 놓는 받침대처럼 평평하여, 그 모양이 세 봉우리 가운데 가장 이상했다.
넘실거리는 파도 위에서 히스파니올라는 갑판까지 물이 들었다 빠졌다 했다. 아래 활대와 도르래가 부딪히고
키는 풀려 헛 돌았고, 삐거덕
덜커덕 요동치는 배는 공장을 방불케 했다. 나는 돛줄을 꽉 잡았다. 평화로운
뱃길에서야 나도 훌륭한 선원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이른 아침 빈속에 선채로 술병처럼 몸이 흔들리니, 생전 처음 멀미 때문에 온 세상이 뱅뱅 돌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뜨거운 태양, 바로 옆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노래하는 바닷새들, 그리고 긴 항해 끝 상륙이니 기뻐하리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우울한 느낌의 희색빛 숲, 거친 모습의 바위 봉우리, 가파른 해안에 파도가 부딪히며 내는 거품과 뇌성벽력을 보고 듣자니, 어쩌면
이런 섬의 모습--다시 말해 그런 섬의 모습 때문에, 말
그대로 나는 기가 꺽였고, 보물섬에 대한 그 같은 첫 인상으로 인해,
그 후 그 섬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바람이 불 기미가 없어 우리는 아침부터 힘든 일을 했다. 배에서 내린 몇 척의 보트에 선원들이 탄 채, 밧줄로 배와 보트를
연결한 다음, 섬을 돌아 좁은 해협을 지나 해골섬 뒤에 있는 조그만 정박지까지 5-6킬로미터를 노를 저어 배를 예인했다. 나도 보트 한 척에 올라
일을 자원했지만, 물론 할 일이 없었다. 햇빛은 뜨거웠고, 선원들은 노젓는 일을 매우 못마땅해 했다. 내가 탄 보트는 앤더슨이 지휘를 했는데, 지휘는
커녕 다른 선원들보다도 더 투덜댔다.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떠들었다.
“뭐
이 거지 같은 일도 이제 마지막이야.”
그때까지는 선원들이 솔선수범해서 임무를 다했지만, 섬을 발견한 후부터는 규율이 산만해지는
것을 보고, 나는 그의 말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다.
배를 견인하는 동안, 롱 존은 조타수 옆에 서서 배의 진로를 지시했다. 그는 물길을 손바닥 들여다보는
듯했고, 수심을 재는 선원이 해도의 표시보다 더 깊은 곳을 이곳저곳 지적하면, 매번 거침없이 한마디했다.
“썰물
때문에 물살이 세서 그래. 이 수로는 바닥이 물살에 쓸려나가 그렇다는 말이지.”
우리는 본本섬과 해골섬의 해안으로부터 각각 5백미터 정도 떨어진, 해도에 닻 표시를 해 놓은 두 섬의 중간 지점까지 배를 예인했다. 밑을
내려다보니 맑은 물 밑으로 깨끗한 모래바닥이 보였다. 닻을 내리는 소리에 놀란 새들이 구름처럼 날아올라
숲 위를 잠시 빙빙돌며 울다가 내려앉자, 모든 것이 다시 조용해졌다.
배를 예인해 놓은 곳은 해안에서 수로를 통해 들어가는 우묵한 곳으로, 나무가 뒤덮어 그
가지들이 수면까지 드리웠고, 해변은 대체로 평평한데다가, 멀지
않은 곳에는 산봉우리들이 띄엄띄엄, 야외극장의 객석처럼 빙 둘러 있었다.
두 개의 개천, 아니 두 개의 늪으로부터, 연못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그곳으로 물이 흘러들었다. 해변을 뒤덮은
나뭇잎들은 무엇인가 불쾌한 냄새를 풍겼다. 배에서 바라보니 나무에 뒤덮여 집이라던가 요새 같은 흔적이
없었다. 지도에 그런 표시를 해 놨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들이야말로 그 섬이 바다 위로 솟은 이래 처음 배를 댄 사람들이었을지도 몰랐다.
바람 한 점 없었고, 불거진 바위를 때리는
파도 소리만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해안으로부터 들려왔다. 우리가
정박한 곳은 퀴퀴하고 이상한 냄새가--나뭇잎과 줄기가 물에 썩는 냄새--진동했다. 박사님이 썩은 달걀 냄새를 맡듯 킁킁거렸다. 그가 말했다.
“여기
보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병이 있다는 건 내 가발을 걸고 장담해.”
보트에서 본 선원들의 불온한 낌새는, 이제 그들이 모두 배에 오르고 나니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갑판에 떼지어 다니며 불평을 했다. 사소한
명령에도 인상을 쓰고 투덜대며 아무렇게나 해버렸다.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으니 선량한 선원조차 물이
들었다. 반란의 검은 구름이 분명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선실측만 그 기미를 눈치챈 것이 아니었다. 롱 존은 여기저기 오가며 조언을 하고,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모범을 보였다. 그는 솔선수범과 예절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모두에게 사근사근
했다. 명령을 받으면 곧 목발을 짚고 일어서며,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상냥한 목소리로 '예, 예, 알았습니다' 했다. 할
일이 없을 때는, 반란에 나설 선원들의 불평불만을 은폐하려는 듯, 키다리 존은 계속 노래를 불렀다.
롱 존의 그 같은 제스처는, 그 우울한 오후, 선원들의 불길한 행동 가운데서도, 내 마음에 가장 걸렸다.
우리는 선실에서 다시 모임을 가졌다. 선장님이 말했다.
“지주님, 위험을 무릅쓰고 작업 명령을 다시 내려도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형편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제 말도 안 따르지 않던가요? 음, 말을 듣지 않아 강제를
하면, 곧 반란을 일으키겠지요. 아무말 않고 가만히 있으면, 실버는 뭔가 저의 의도를 알아챌
것이고, 그리 되면 일이 어렵게 됩니다. 자, 한 사람 이용을 해야겠습니다.” 지주님이 물었다.
“그게
누구요?” 선장님이 대답했다.
“실버입니다. 뭔가를 가라앉히려고 우리처럼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뭔가 불화가 있어서지요. 기회만 되면 불만에 찬 선원들을 달래려고
할 텐데, 그래서 제 말씀은 그에게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오후에
상륙을 시킵시다. 그들이 모두 상륙하고 나면, 배는 우리가
차지하고 싸우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상륙을 안하는 경우에는, 우리는
선실을 차지하고 싸울 것이고,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제
말씀을 잘 들으세요, 지주님, 실버가 몇 명만 데리고 상륙할 경우에는,
그들을 양처럼 순하게 만들어 데리고 오겠지요.”
그래서 그들을 상륙시키기로 했다. 우리편에게 탄환을 장전한 권총이 지급되었다. 우리편이 확실한 헌터, 조이스 그리고 레드러스는 모든 사실을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고 기대보다도 더 사기충천했다. 선장님이 갑판에 올라 선원들에게 말했다.
“선원 여러분, 그동안 날씨가 더웠고 일도
힘들어 우리 모두 지쳤오. 상륙은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오. 상륙용
보트는 아직 물에 떠있오. 그대로 타고 가급적이면 많이들 상륙해 오후를 즐기시오. 해지기 30분전, 대포를
쏴 되돌아올 시간을 알리겠오.”
어리석은 선원들은 뭍에 오르면 금방 보물을 뒤집어쓰는 줄 아는지, 곧 심술을 풀고 환호성을 지르자, 그 소리가 먼 산에 메아리치고, 그 소리에 놀란 새들이 다시 날아올라 만을 맴돌며 울었다.
선장님은 갑판에 멍하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실버에게 상륙을 준비 시킨 뒤 선장님이 곧 자리를 떠,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가 계속 갑판에 머물렀다면, 거기서 일어나는 일을 더이상 모르는 체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대낮처럼 분명했다. 실버는 사실상의 선장으로서 드세고 반항적인 선원들을 마음대로 다뤘다. 올바른 선원들도--배에 몇 명이 있다는 걸 곧 알았다--멍청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모든 선원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주모자들에게 불만이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
가운데 몇 사람, 대개는 선량한 몇몇 선원들은 더 이상 그들을 따르거나 시키는 대로 하려고 하지 않았다. 슬슬 눈치나 보는 사람들과 배를 점령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패로 갈라졌다는 말이다.
드디어 상륙 준비가 끝났다. 여섯 명은
배에 남고 실버를 포함한 열세 명이 보트에 탔다. 바로 그때, 우리의 생명을 구하는 데 크게 기여한 몇가지 생각 가운데, 그 첫 번째 것이 떠올랐다. 실버가 여섯 명을 남겨 놓으면, 우리가
배를 점령하고 싸울 수가 없음이 분명했다. 또 선실 측도 여섯 명이니 내가 꼭 남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상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금방 들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가까운
보트의 뱃머리에 웅크리는 순간 보트가 출발했다. 아무도 나를 못 알아보았고, 노를 젓는 사람만이 알아보고 물었다.
“짐이니? 머리를 숙여.”
그러나 다른 보트에 있던 실버가 노려보며 나인지 아닌지
소리쳐 물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보트에 오른 것을 후회했다.
선원들은 해안을 향해 경쟁하듯 저어 갔지만, 내가
탄 보트가 조금 일찍 출발했고 몸이 가벼운 사람들이 타고 힘차게 저어서였는지, 다른 보트들보다 조금
앞섰다. 뱃머리가 해안가의 나무숲에 다가서자, 나는 나무가지를
잡은 채 가까운 풀섶으로 뛰어 내렸는데, 실버는 다른 선원들과 함께 아직도 훨씬 뒤에 있었다. 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짐!, 짐!.”
내가 귀도 기울이지 않았음을 독자 여러분은 짐작할 것이다. 요리조리 나뭇가지를 헤치며
점프도 해가면서, 더 뛸 수 없을 때까지 곧장 내달았다.
제14장
첫 번째 비극
롱 존을 따돌려
매우 기분이 좋은 나는 주위의 낯선 땅을 흥미있게 둘러보기 시작했다.
갈대와 버드나무, 습지의 낯선 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선 길을 따라 늪지대를 지나, 모래가 물결치 듯 울퉁불퉁한 2킬로미터 정도의 개활지로 나가니, 소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었고, 이파리는 버드나무 잎처럼 희뿌연데 줄기가 비틀린, 다 자란 참나무
같이 생긴 나무들이 울창했다. 햇빛을 받아 모습이 또렸한, 묘하게
생긴 두 개의 깍아지른 암봉을 인 산 하나가 멀리, 개활지가 끝나는 곳에 보였다.
내 생애 처음으로 탐험을 하게 되어 기뻤다. 섬은
무인도였다. 함께 상륙한 선원들은 내 뒤에 있고 앞에는 말 못하는 짐승과 새들 뿐이었다. 나무숲을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사방에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했다. 뱀도 여기저기 보였고, 바위틈으로 머리를 내밀어 나를 향해 쉬익쉬익 팽이 도는 소리를 내는 놈도 있었다. 그 뱀이 독사라는 걸, 그 유명한 방울뱀 소리라는 걸 상상도 못했다.
모래사장을 따라 찔레처럼 나즈막하게 자란 참나무 같은 나무들이--토리나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숲을 이룬 곳에 이르니, 가지는 뒤엉기고 잎들은 촘촘해, 이엉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어느 모래언덕 위로부터 뻗어 내린
그 숲은 점점 넓어지면서 나무들 키도 커지다가, 갈대가 무성한 넓은 늪지대를 만나는 곳에서 끝났는데, 작은 개천 하나가 그 갈대밭을 지나 우리 배가 정박한 만으로 흘러들었다. 강렬한
햇빛 때문에 늪지대에 김이 서리고, 그 아지랑에 속에 스파이 글라스가 어른거렸다.
바로 그때 갈대숲이 부스럭거렸다. 물오리 한 마리가 꽥꽥거리며 날아오르자, 오리떼들이 잇따라 날아올랐고, 금방 늪 상공을 구름처럼 뒤덮은 새들이
공중을 선회하며 울었다. 누군가가 갈대밭을 따라 다가오는 것이 분명했다. 짐작대로 사람들이 수근대는 소리가 곧 들려왔고, 계속 귀를 기울이니
그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가까워졌다.
겁에 질린 나는 가까운 참나무 뒤로 기어가 납작업드린 채, 생쥐처럼 숨을 죽이며 기다렸다.
누군가 말대꾸하는 소리가 들렸고, 곧 처음 들려온 목소리, 다름아닌 실버가 가끔 질문에 답하면서
뭔가 다시 한번 긴 설명을 했다. 목소리로 미루어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 화를 내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무슨 소리인지 잘 들리지가 않았다.
다가오던 발소리가 멎고 물오리들도 울음을 그치며 늪가의 제자리를 찾는 것을 보니,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그자리에 주저앉은 듯했다.
그 순간, 임무를 이탈해 악당들과 뭍에 오르는 바보짓를 했으니, 하다못해 그 작당하는 말이라도 들어야겠으며, 그렇게 하려면 가능한
접근해서 덤불 뒤에 숨어야겠고, 그 일이야 쉽고 간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목소리에 놀라서 날아 오른 오리떼가 아직도 그들의 머리 위를 날고 있어, 그 침입자들이 있는 쪽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기어가 나뭇잎 사이로 머리를 들어 내려다 보니, 늪 가까이 나무가
둘어싼 움푹한 곳에 초록빛 잔디가 깔렸는데, 그곳에서 실버와 한 선원이 얼굴을 맞대고 언쟁을 하고 있었다.
강렬한 햇빛이 그들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실버가 모자를 벗어 땅바닥에 팽개치자, 땀으로
번들거리는 크고 넓적하며 허여멀건 얼굴이, 뭔가 호소하듯 상대방의 얼굴을 맞보고 있었다. 그의 말소리가 들렸다.
“이봐, 널 금쪽같이 생각해서야--금쪽이란 말이야. 내말 믿으라구! 내가 너를 찰떡같이 좋아해서지, 여길 데려와 겁을 준다고 생각하는 거니? 주사위는 던져졌어. 어쩔 수 없어. 널 살리려고 이러는 거야. 만약에 네가 발뺌하는 걸 저 망나니들이 알기라도 하면, 내가 온전하겠니? 톰 말해봐, 날 그대로 내버려 두겠어?” 그 선원이 말했다.
“실버,” 얼굴이 벌개져 까마귀처럼 깍깍거리는 말소리는
팽팽한 밧줄이 떠는 듯했다.
“실버, 당신은 늙고 정직하지. 아니 그렇게들 알고 있어. 많고
많은 가난뱅이 뱃놈들에게는 없는 돈도 있구.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 몰라도, 당신은 용감도 하지. 그런데 저 잡놈들이 당신을 강제로 어떻게 한다는
말이오? 그렇게는 못할 거야! 하느님이 분명 내려다 보시니, 내
팔을 금방 자르시겠지. 내가 다시 해적질을 한다면 말이야…"
바로 그때 인기척이 나면서 그가 말을 중단했다. 얌전한 선원 한 명이 눈에 들어왔고 곧이어
또 한 명이 보였다. 갑자기 서로 싸우는 소리가 늪지대
멀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비명 소리가 길게 울렸다. 그
소리에 스파이 글라스의 바위들이 여러번 메아리쳤다. 늪의 새떼가 다시 날아올라 하늘을
뒤덮고 퍼덕였다. 그 죽음의 비명이 오랜동안 내 귀에서 맴돌다가, 전
늪지역이 다시 침묵에 잠기며, 새들이 내려앉는 소리와 먼 파도소리만 오후의 나른함 속에 들려왔다.
비명소리에 톰이
회초리를 맞은 말처럼 벌떡 일어섰지만, 실버는 눈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목발에 기댄 채 꿈쩍도 않고, 뱀처럼 튀어 오를 듯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그 선원이 손을 내뻗으며
소리쳤다.
“존.”
능숙한 체조선수처럼 신속, 정확한 자세로
내 쪽으로 다가서듯 뒤로 한 발 물러서며, 실버가 소리쳤다.
“손
치워.” 상대방이 말했다.
“존 실버, 치우라면 치우지. 내 손이 무서운 건 심보가 나빠서 그래. 그런데 저 비명소린 도대체 뭐야?” 실버가 대답했다.
“비명? 저 소리 말이지? 아, 앨런일 거야.” 실버가 빙긋 웃었지만 더욱 경계의 빛을
띈얼굴로, 그 커다란 얼굴에 좁쌀만한 눈을 유리알처럼 반짝이며 대답했다.
이 말을 듣자 톰은 영웅처럼 화를 냈다(이는 트로이 전쟁시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으로부터 모욕을 당한 영웅 아킬레스가 불같이 화를 내고 전투 참여를 거부한 것에 빗댄 것임: 옮긴 이).
“앨런! 진정한 뱃사람인 그의 영혼에 안식을! 롱 존, 우린 오랜 친구였지만 이젠 아냐. 개처럼
죽더라도 할 일은 하고 죽겠어. 너, 앨런을 죽였지? 죽일 수 있으면
나도 죽여봐. 허나 그냥 죽을 수는 없어.”
이 말을 한 다음, 그 용감한 선원은 요리사로부터 등을 돌려 물가로 갔다. 하지만 그는 멀리 갈 운명이 아니었다. 존이 나뭇가지를 잡은 채 소리를 지르며,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목발을 번쩍들어 던지자, 그 괴상한 모습의 창이 공기를 가르며 날았다. 목발의 뾰죽한 끝이 가엾은 톰의
두 어깨 사이 등 한가운데를 사정 없이 때렸다. 손을 내저으며 헐떡거리던 그가 고꾸라졌다.
얼마나 다쳤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비명으로 짐작컨대, 맞은 척추가 부러지지 않았을까 했다. 다시 일어날 틈도 없었다. 다리 하나와 목발이 없어도, 실버는 날쌘 원숭이처럼 순식간에
톰을 덮쳐, 꼼짝 못하는
그의 몸에 두 번씩이나 깊숙히 칼을 꽂았다. 내가 숨은 곳까지 그가 칼질을 하며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실신한다는 말이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르지만, 그 순간 내 눈앞의 온 세상이 희미한 안개
속으로 소용돌이치며 사라졌다. 실버는 물론 물오리들, 그리고
스파이 글라스의 높은 꼭대기가 내 눈앞에서 빙빙돌며 곤두박질을 쳤고, 종소리와 먼 아우성 소리가 귀속에서 울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악마가 몸을 추스르고 목발을 짚은 채 모자를 쓰고 있었다. 톰이 바로 그의 앞 풀밭에 누어
있었지만, 살인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잔디를 한 움큼 뜯어 피 묻은 칼을 닦았다.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고, 김이 솟아 오르는 늪과 높은 산봉우리를
무심한 태양이 변함없이 비추는 가운데, 내 눈앞에서 사람을 죽여, 순식간에
한 생명이 무참히 사라진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존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머니에서 호각을 꺼내 몇 번 불어 신호를 보내자, 그 소리가 뜨거운 열기를 타고 멀리 퍼져나갔다. 그 신호가 무엇을
뜻하는지 물론 나는 몰랐지만, 그 소리를 듣자 다시 무서워졌다. 악당들이
더 몰려올 터였다. 나는 그들의 눈에 띌지도 몰랐다. 그들은
이미 죄없는 두 사람을 죽였다. 톰과
앨런 다음에는 내 차례일지도 몰랐다.
곧 그곳을 벗어나 숨을 죽이며 숲속의 조금 넓은 공터를 향해
재빨리 기었다. 기어가면서 그 늙은 해적과 그의 동료들 간에 오가는 왁자지껄한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에 위험을 느낀 나는 날개가 돋힌 듯 도망쳤다. 숲을 벗어나자
그들을 떼어 놓으려고, 뛰는 방향도 모르면서 생전 처음 죽을 힘을 다해 뛰었는데, 뛰면서도 점점 더 무서워져 미칠 지경이었다.
정말 당황했다. 돌아오라는 대포가 울리면
피냄새가 가시지 않은 악당들과 함께 보트를 타러 가야한다? 나를 보면 도요새 모가지 비틀듯 내 목을
비틀지나 않을까? 임무를 이탈한 나를 의심해 내 정체가 들어나지는 않을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히스파니올라여 안녕. 지주님, 박사님, 그리고 선장님 안녕히 계세요. 내게는 굶어 죽거나 폭도들의 손에 죽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뛰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 개의 봉우리가 솟은 조그만 산 기슭에 이르니, 넓은 지역에 도토리나무가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도토리나무들 틈에 보이는 몇 그루의 소나무들은 그 키가 15미터
가량이나 됐고, 25미터쯤 되는 것도 있었다. 공기도 아래
늪지대보다 훨씬 신선했다.
거기서 또 놀라운 일에 맞닥뜨려 가슴이 덜컹하여 발길을 멈췄다.
제15장
섬 사람
돌무더기가 봉우리의 가파른 바위 비탈을 우르르 흘러내려 나무들 사이로 굴렀다. 본능적으로 그쪽을 보니, 소나무 뒤로 무엇인가 재빨리 사라지고 있었다. 곰인지 사람인지 아니면 원숭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검은 빛깔에
털이 북슬북슬해 보였는데, 더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이 새로운 출현으로 겁을 먹은 나는 그자리에서 멈췄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 아닌가 했다. 뒤에는 살인자들, 앞에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몸을 숨긴 것이다. 나는 미지의 위험보다는 아는 위험을 택했다. 그 숲속의 괴물 보다는 실버가
덜 무서워, 발길을 되돌려 보트를 향해 뛰면서, 어깨 너머로
살폈다.
곧 다시 나타난 그것이 길을 가로질러 나의 길목을 막으려고 했다. 나는 지친 상태이기는 했지만, 설사 잠자리에서 막 일어난 듯 힘이 솟구쳤다 해도 그 흉물과의 뜀박질은 헛수고임을 알았다. 괴물은 사슴 같이 나무들 사이를 요리조리 뛰었는데, 사람처럼 두다리로 뛰었지만 보통 사람들의 뛰는 모습과는 달리, 얼굴이 땅에 닿을 듯 허리를 구부리고 뛰었다.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식인종에
관해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람살리라는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인데 단지 야만인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이 얼핏 들면서, 다시 자신감이 생기자, 또 실버가 더 무서워졌다. 그래서
그자리에 가만히 서서 도망갈 궁리를 했다. 그때 번득 권총 생각이 났다. 무방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용기가 솟아 그 섬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며 거침없이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그도 모습을 나타내고 내게 다가온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 나무 뒤에 숨어 나를 지켜 본 것이 분명했다. 머뭇머뭇
뒷걸음을 치더니, 다시 다가와 끝내 무릅을 꿇고 애원하듯 두손을 모아,
나는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나도 다시 그자리에 멈췄다. 내가 물었다.
“누구세요?” 그가 대답했다. 녹슨 자물쇠가 덜컥이듯, 거칠고
겁먹은 목소리였다.
“벤 건. 가엾은 벤 건이지. 지난 3년 동안 기독교인과 말을 못했어.”
가까이 보니 그는 나처럼 백인이었고 외모가 준수하기조차 했다. 햇빛에 들어난 피부는 그을려 검었다. 입술조차 검게 탔고, 얼굴은 시커먼데 눈은 푸르러 매우 무섭게
보였다. 내가 보고 상상한 거지들 가운데서도 가장 비참한 넝마를 걸치고 있었다. 낡은 돛과 헤진 선원 옷으로 만든 누더기었는데, 놋단추, 막대기 조각, 역청을 먹인 마대 조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얼기설기
얽어맨 세상에 없는 걸레였다. 그의 옷차림에서 온전한 것이라고는 허리띠의 놋쇠 버클 뿐이었다. 내가 놀라 물었다.
“3년씩이나! 배가
파선했나요?” 그가 대답했다.
“아니, 친구, 버림을 받았어.”
그것은 바로 규칙을 위반한 해적에게 탄환을 조금 주어, 먼 무인도의 해변에 떨어뜨리는, 해적들에게는 흔한 무서운 처벌 방식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가
계속했다.
“버림
받은 지 3년이 흐르고, 그동안 염소고기, 딸기, 굴을 먹고 살았어. 사람이란
어디에 있던 살게 마련이더라구. 그런데, 친구, 기독교인들이 먹는 음식을 먹고 싶어 미치겠어. 혹시 치즈 같은 거
없니? 음, 노상 치즈--맛있게
구운 빵도--꿈을 꾸지만 깨고 나면 이 섬이더란 말이지.” 내가 말했다.
“배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야, 원하시는대로 다 가져다 드리지요.”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그는 내 옷을 만지작거리고, 내 손을 쓰다듬기도 하며, 내 장화를 내려다보기도 하면서, 말끝마다 새 친구를 만난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그러나 내 말에 놀란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다시 말했다.
“아니, 네가 다시 배로 가겠다는데, 누가 못 가게 하니?” 내가 대답했다.
“아저씨가
아니고요.” 그가 소리쳤다.
“그러면
그렇지. 그런데, 네 이름이 뭐지?” 내가 이름을 말했다.
“짐이라고 합니다.” 정말 기쁜 듯 그가 중얼댔다.
“짐, 짐이라. 그래, 짐 나는 내 얘기를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마구 살았지” 그가 물었다.
“자, 짐, 내 이 꼴을 보면 우리 어머니가 신앙심이 없는 여인이라고 생각들 하겠지?” 내가 대답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가 말했다.
“아, 그래, 우리 어머니는 무척 자비로운 분이었지. 내가 정직하고 신앙심 깊은 소년이었을
때 교리문답집을 줄줄 외워대면 사람들이 못 알아 먹었어. 그런데 짐, 난 공동묘지의 비석을 맞추는
동전 따먹기 놀이를 했어. 그렇게 시작하니 점점 나쁜 길로 빠져든 거지. 신앙심 깊으신
어머니가 예언하신대로 말야! 그런데 내가 이 섬에 버려진 건 하나님의 계시야. 이 외로운 섬에서 늘 그 생각을 하며 후회를 해서, 다시 신앙심을
찾았지. 다시는 럼을 안 마실 작정이야. 새 술통이 생기면
물론 축배 겸 새오줌만큼이야 마셔야겠지만 말이야. 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결심했고 그 길을 가고 있어.” 그가 다시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짐, 난 부자야.”
나는 그 불쌍한 사람이 외로움 때문에 틀림없이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감정이 내
얼굴에 나타나서였는지, 그는 부자라는 말을 열심히 반복했다. 그가
말했다.
“부자! 부자라구! 한가지 더, 짐, 내가 너를 의젓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 아, 짐, 너는 축복을 받을 운명이야. 그래, 짐, 넌 맨 먼저 날 찾아냈거든!”
그러나 곧 그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내
손을 꽉 쥔 채 집게 손가락을 들어 겁을 주듯 내 눈 앞에 댔다. 그가 물었다.
“자, 짐, 사실대로 말해 봐. 플린트의 배지?”
그 말에 나는 마음이 뿌듯했다. 우리 편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 즉시 대답했다.
“아뇨, 플린트는 죽었어요. 그런데 원하시는대로 사실을 말하면요, 플린트의 부하들이 배에 타고 있어요. 우리에게는
운이 나쁜 거지요.”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한 남자--다리 하나가 없는--그런
사람 없던가?” 내가 물었다.
“실버요?” 그가 대답했다.
“그래, 실버, 그렇게들 불렀어, 맞아. ” 내가 말했다.
“그는
요리사인데 반란을 주도했어요.”
그는 아직도 내 팔목을 잡고 비틀었다. 그가 말했다.
“만일
롱 존이 널 이곳에 보냈다면, 난
죽은 목숨이야. 그런데 넌, 어떻게 여길 왔니?”
그 순간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간의 항해와 현재 처한 어려움을 말했다. 내 말을 매우
흥미 있게 듣던 그는, 말이 끝나자 내 머리를 가볍게 쳤다. 그가
말했다.
“짐, 넌 착한 아이구나. 모두 심각한 위험에 빠졌다는 말이지?
음, 날 믿어. 내가 필요할 거야. 그런데 네가 말한 그 곤경에서 빠져나오도록 지주를 돕겠다면, 그
사람이 내 말을 받아 주겠니? “
나는 지주님이 너그러우신 분이라고 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좋아, 그런데, 짐, 내가 무슨 파수를 보겠으니 그 댓가로 옷을 한 벌 달라거나 그런 말이 아니야. 사실 내 돈은 아니지만, 내 거나 마찬가지인 돈을 보관하고 있는데, 지주는 그 돈에서 내 몫으로 천 파운드를 떼어 줄까?” 내가 말했다.
“물론이죠. 모든 선원들에게 골고루 나누겠다는 생각이셔요.” 그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리고
집으로도 데려다 줄까?” 내가 큰소리로 말했다.
“그럼요. 지주님은 신사이십니다. 그밖에도 반란을 진압한 다음, 배가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아저씨의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음, 그럴 수도 있겠군.” 이렇게 말하며 매우 안도하는 빛이였다. 그가 계속했다.
“자, 네게 한마디만 더하겠다. 내가 플린트의 배에서 일할 때 그가 보물을 묻었어. 플린트가 여섯 명, 아주 건장한 여섯명을
데리고 이 섬에 상륙을 했지. 그들이 한 일주일 뭍에 있는 동안 우리는, 이제는 옛 배가 돼버린 왈러스호를
타고 해안을 오락가락하며 지냈어. 날씨가 맑았던 어느날, 배로
귀환하라는 깃발이 오르자 플린트가 작은 배를 타고 오는데, 머리에 푸른 수건을 동여맸더라구. 해가 솟고 있었는데, 물을 저어 가까이 오는 그의 얼굴을 보니 송장처럼 창백했어. 그러니까
상상을 해보렴. 그는 살고 여섯 명은 모두 죽었는데--모두
죽여 파묻은 거야. 어떻게 그 짓을 했는지, 그 배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어. 6대1로 싸워 죽인 건데, 독살일 수도 있겠지. 항해사인 빌리 본스와 갑판장인 롱 존이, 플린트에게
보물이 있는 곳을 물었단다. 플린트는
‘아, 보물을 찾고 싶다면 상륙해서 죽치고 찾으라구. 허지만, 제기랄, 이 배는 말야, 금을
더 찾아 떠나는 거야!’ 하더라구.”
“음, 3년 후 나는 다른 배를 타고 이 섬을 지나게 되었어. 내가 ‘친구들, 여기가 플린트의 보물섬이다. 모두 내려 보물을 찾자’라고 했지. 선장이 못마땅해 하는 눈치였지만, 선원들이 모두 원하니 상륙을 했어. 열이틀이나 보물을 찾으면서 나에게
보물이 안 나온다고 매일 투덜대다가, 어느 맑게 개인 아침 모두 배로 돌아가겠다고 하더군. ‘야, 벤자민 건, 여기 총이 있구, 삽과 곡괭이도 있다. 여기서 너 혼자 주저앉아, 플린트의 보물을 찾아 보라구’ 하면서 말야.”
“그런데
짐, 난 여기서 3년을 지냈는데 지금까지 기독교인이 먹는 음식을 전혀 못 먹어 봤단 말이지. 자, 날 좀 봐. 내가 지금 해적으로 보이니? 아니라고 말해 봐. 과거에도 아니었고.” 그리고는 눈을 찡긋하며 나를 꽉 꼬집었다. 그가 계속했다.
“짐, 지주에게 이렇게 전해. 과거에도 그는 해적이 아니었다구 말이야. 밤이나 낮이나, 비가 오나 해가 뜨나 이 섬에서 3년을 보냈다고 해. 기도하며 시간을 보낸 적도 많구(이 말을 전해), 늙으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살아 계시길 빈 적도 많았다구
하라구(이 말을 잊지 마). 그렇지만 벤 건은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일(이
말을 아주 강조하라구)을 하며 보냈다구 해. 그리고 내가
너를 꼬집듯 지주를 꼬집어 봐, 이렇게.” 그는 자기를 믿으라는 듯 은근하게 다시 나를
꼬집었다. 그가 계속했다.
“그런
다음 말이지, 잠시 뜸을 들였다가 ‘건은 선량한 사람입니다(이 말도 전해). 그의
깐깐한 눈썰미는--깐깐한 눈썰미와 마음은--돈으로 이룬 신사보다야
타고난 신사를 전적으로 신뢰하는데, 그도 타고난 신사이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씀드려.” 내가 말했다.
“저어, 무슨 말씀인지 한마디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어쨋던 여기서는 그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어떻게 해야 다시 배로 돌아가죠?” 그가 말했다.
“아, 정말 그일이 시급하군. 음, 내가
이 두 손으로 만든 배가 있지. 저기 흰 바위 밑에 있어. 사태가
심각해지면 해가 진 후 끌어내자구.” 그가 갑자기 소리쳤다.
“어라, 저 소리가 뭐지?”
바로 그때, 해가 지려면 아직 한 두시간여가
남았는데, 섬 전체가 진동하는 대포소리가 울렸다. 내가 외쳤다
“싸움을
시작한 거예요. 저를 따라 오세요.” ”
나는 무서움을 잊은 채 만을 향해 뛰었고, 염소 가죽옷을 입은 그 버림받은 이가 내 옆에서
날렵하게 따라왔다. 그가 소리쳤다.
“왼쪽이야, 왼쪽, 왼쪽으로 계속 뛰어, 짐! 나무 밑 쪽으로 말야. 내가 처음 염소를 잡은 데지. 염소는 이제 내려오지 않아. 이 벤자민 건이 무서워서 모두
산꼭대기에서만 놀지. 아! 저기 공동묘지가--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나보다--있군. 흙무덤이 보이지? 일요일이라고 짐작되는 날 가끔 여기와서 기도를
드렸지. 교회는 아니지만 신성한 곳이기는 해. 그러니까 벤 건은 모든 게 부족했다고 말씀드려--교회도, 성경도, 국기도 없었다구 말이야.”
뛰면서 그는 계속 지껄였지만, 나로부터 아무런 대답을 받지도 기대도 못했다.
대포소리가 나고 한참 뒤, 일제사격을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다시 침묵이 흐른 뒤, 5백미터 가량 떨어진 앞을 보니,
숲 위 하늘에 영국국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제IV부
요새
제16장
박사님의 이야기 - 배를 떠난 이야기
1시반
경--바다에서는 종을 세 번 친다(배에서는 자정부터 매 4시간마다-오후 4시부터
8시까지는 2시간마다-당직을
교대하며 각 당직 시간에는 30분마다 한번 꼴로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린다: 옮긴 이)--히스파니올라로부터 두 척의 보트가 육지를 향해 떠났다. 선장, 지주와 더불어 선실에서 대책을 논의했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었다면
배에 남았던 여섯 명의 반란자들을 해치운 다음 닻줄을 풀고 바다로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바람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짐 호킨스가 보트를
타고 선원들과 상륙을 했다는 소식을 헌터가 선실로 내려와 전했다.
짐 호킨스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의 안전이 걱정 됐다. 함께 간 선원들의 성품으로 보아 그 소년을 다시 볼 가능성이 적었다. 걱정이
되어 갑판으로 갔다. 갑판 판자 사이를 메꾼 역청이 끓었다. 역한
냄새로 위장이 뒤집히는 듯했다. 열병과 이질이 냄새를 풍기는 곳이 있다면 우리가 정박한 바로 그 바다였다. 6명의 악당들은 선수갑판의 돛아래에 앉아 수군대고 있었다. 바다로 흘러드는 개천 어귀에 계류繫留해 놓은 두 척의 보트에는, 각각 한 사람씩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휘파람으로 '릴리불레로(1689년에 발표된 아일랜드 무용 음악. 작곡자는 헨리 퍼셀: 옮긴 이)'를 불렀다.
기다리다 조바심이 나, 상황도 알아볼 겸 헌터와 내가 상륙용 보트를 타고 상륙하기로 했다. 앞서 간 보트들은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갔지만, 헌터와 나는 지도에 표시 된 요새를 향해 곧장 저었다. 타고 간 보트를 지키던 두 놈이 우리가 나타나자 놀란 듯, 부르던 '릴리불레로'를 멈추고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하는 눈치였다. 만일 그들이 실버에게로 가서 우리의 도착을 알렸다면, 사태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별도의 명령이 있었던지, 아무 말없이 제자리에 주저앉더니 다시 '릴리불레로'를 불러제꼈다.
해안선에는 좀 튀어나온 지점 있었는데, 그곳에
가려 그들이 우리를 못 보도록 배를 저었다. 그 지점을 돌자 그들의 보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모자 밑에 커다란 비단 수건을 받쳐 햇빛을 가리고, 탄환이 장전된
권총 두 자루로 든든히 무장을 한 채, 뭍으로 뛰어내려 뜀박질하듯 다가갔다. 백미터도 못 가 요새가 나타났다.
요새를 설명하면 이렇다. 둔덕이 하나 있는데
그 꼭대기 가까이 맑은 물이 솟는 샘이 있었다. 둔덕 위에는 긴급시
4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동서 양쪽으로 총안銃眼을 뚫어 놓은 튼튼한 통나무집이 있었는데, 그 집안에 샘이 있었다. 통나무집 주변의 넓은 지역에는 장애물이
하나도 없고, 문이나 출입구가 없는 2미터 높이의 말뚝울타리를
둘러 세워, 이를 무너뜨리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여 공격자들이 몸을 감추기 어려웠다. 통나무집에서는 사방으로 공격자들을 내다볼 수 있었다. 가만히 숨어 있다가 메추리 사냥하듯 총을 쏘기만 하면 됐다. 경계를
잘하고 식량만 충분하다면, 단기간의 기습전에서는 1개 연대와
대결해도 버틸 수 있는 곳이었다.
특별히 눈이 간 곳은 그 샘이었다. 히스파니올라의 선실이라는 유리한 곳을 장악하고, 무기와 화약, 식량과 훌륭한 포도주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가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일, 우리에게는 물이 없었다. 물 생각을 곰곰하고 있는데, 사람이 죽어가는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섬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나에게 죽음이란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나는
컴버랜드공작 각하의 휘하에서 복무 중, 퐁트노이 전투(1745년 5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벨지움의
퐁트노이에서 벌어진 영국-네델란드 동맹군과 프랑스군사이에 벌어진 전투:
옮긴 이)에서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 가슴이
뛰었다. 얼핏 ‘짐 호킨스가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군대 경험이 그동안 뭔가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실은 의사가 내 본분이었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었다. 즉시 결단을 내려 지체없이 해안으로 되돌아
가 타고 온 보트에 올랐다.
다행히 헌터가 노를 잘 저었다. 나는 듯이 보트를 저어 곧 히스파니올라에
닿아 갑판에 올랐다. 예상했던대로 모두들 덜덜 떨고 있었다. 지주는
펄떡 주저앉아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우리를 그런 상황에 빠뜨린 책임을 느끼는 듯했다. 선수루에 있던 여섯 명 가운데 한명이 전혀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스몰릿 선장이 턱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박사님, 저 신출내기를 보세요. 비명을 듣더니 거의 까무러치더라구요. 키만 한 번 더 돌려도 우리편으로 올 것 같습니다.”
선장에게 내 계획을 설명하고, 우리는 계획 달성을 위한 세부사항을 합의했다.
선실에서 선수루로 가는 통로에 레드러스 노인을 보초로
세우고, 탄환을 장전한 서너 자루의 총으로 무장을 시킨 다음 매트리스로 은폐를 해주었다. 헌터가 선미에 매 놓았던 보트를
가져와, 조이스와 나는
탄약통, 화승총, 건빵 자루, 베이컨 통, 꼬냑 통 그리고 요긴한 약품 상자를 실었다.
한편, 지주와 선장은 갑판에 있었는데, 선장이
반란 주모자 급인 조타수에게 소리쳤다. .
“핸즈, 여기 우리 두 사람에게는 각각 권총이 두 자루씩 있다. 조금이라도 허튼수작을 부리는 놈은, 누구든지 목숨이 그를 떠날 것이다.”
쩔쩔매던 그들이 잠시 수근거리더니 한 사람씩 계단을 내려 왔는데, 틀림없이 우리를 뒤로부터
공격하겠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통로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레드러스씨를 보자 즉시 발걸음을 돌려 다시 갑판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선장이 호령을
했다.
“항복해, 이 죽일 놈들아!”
머리들이 다시 쑥 들어갔다. 이번에는 여섯 명 모두 겁을 먹었는지 쥐 죽은 듯했다.
보트에는 이미 마음껏 내린 짐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조이스와 나는 선미 쪽의 문을 통해 보트에 오른 뒤, 다시 육지를 향해 힘껏 노를 저었다.
우리가 다시 나타나자 해변에서 망을 보던 악당들이 의심하는 것이 분명했다. 부르던 '릴리불레로'를 다시 중단했다. 해안선이 튀어나온 지점을 돌면서,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려는 순간, 그 가운데 한 명이 해변을 따라
어디론가 뛰어가 사라졌다. 당초 계획을 바꿔 그들의 보트를 부숴버릴까 했지만, 실버와 그의 졸개들이 가까이 있지
않을까 염려가 됐고, 일에 비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곧 처음 상륙했던 지점에 배를 댄 다음 통나무집으로 짐을 나르시 시작했다. 세
사람은 뱃길이 처음인데다가 짐이 무거우니 울타리 넘어로 팽개치듯 했다. 조이스에게 그 짐을 지키게 한 다음--사람은
하나지만 총은 여섯 자루를 남겨 놓은 채--헌터와 나는 보트로 돌아가 다시 짐을 짊어졌다. 숨쉴 틈도 없이 짐을 날라 마침내
모두 옮겨 놓고는, 두 하인에게 통나무집을 지키게 한 다음, 나는
히스파니올라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두 번째 짐 운반은, 위험이 닥칠지도 몰랐지만, 별
신경쓸 일도 아니었다. 숫적으로는 물론 그들이 유리했으나, 우리에겐
무기가 있었다. 상륙한 해적들에겐 화승총이 한 자루도 없었고, 따라서
우리가 그들의 권총 사정권 밖에 있는 한, 적어도 배에 남은 6명에
대해서는 자신만만했기 때문이다.
선미의 창가에서 기다리던 지주는 나를 보자 생기가 돌았다. 그는 선미의 밧줄을 붙들고
우리의 생명을 지켜줄 짐을 보트에 싣는 일을 도왔다. 베이컨, 화약, 건빵, 그리고 지주, 나, 레드러스, 선장에게 각각 한 자루씩 돌아갈 화승총과 칼을 실었다. 남은 총과
화약은 깊이가 두 길 반이나 넘는 바다로 버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깨끗한 모래 바닥에 가라앉은 총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썰물이 일기 시작하자 배가 닻줄을 중심으로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두 척의 보트가 있는
해안쪽으로부터 고함 소리가 멀리 들려 왔다. 조이스와 헌터가 소리나는 쪽보다 훨씬 동쪽에
있어 안심은 했지만, 그 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들어 출발을 서둘렀다.
복도에서 보초를 서던 레드러스가 돌아와 보트에 오르자, 스몰릿 선장이 편하게 타도록, 좌현 쪽 사다리가 있는 곳으로 돌았다. 선장이 외쳤다.
“야, 거기, 내 말이 들리니?”
선수루 쪽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너
말야, 에이브러햄 그레이--네게 한 말이야.” 대답이 없자,
스몰릿 선장이 조금 큰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레이, 지금 보트가 떠난다. 이 선장에게 복종할 것을 명령한다.
너는 근본이 착한 사람인 줄 알아. 다른 자들도 보기 만큼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아. 여기 시계가 있다. 30초를 주겠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선장이 계속했다.
“야,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나와. 내 목숨도 목숨이지만 여기 어르신들의
목숨이 초를 다투고 있어.”
갑자기 치고받는 소리가 나더니, 얼굴에 칼자국이 난 에이브러햄 그레이가 번개같이 나타나, 휘파람 소리에 뛰어오는 개처럼 선장에게 달려왔다. 그가 말했다.
“선장님을
따르겠습니다.”
그와 선장이 보트에 오르자 바로 육지를 향해 출발했다. 배를 빠져나오긴 했지만, 요새에 상륙하려면 아직 길이 멀었다.
제17장
계속되는 박사님의 이야기 - 상륙용 보트의 마지막 뱃길
다섯 번째로 오른 보트는 이전과 사정이 완전 달랐다.
우선 조그만 약탕기 같은 보트에 짐이 너무 많았다. 다섯 사람의 성인남자를--그 가운데 트릴로니, 레드러스, 그리고 선장은 1미터80센티가
넘는 키였다--운반하기에도 벅찼다. 그런데 화약, 베이컨, 빵자루를 더 실은 것이다.
선미 뱃전까지 물이 올라왔다. 몇 번의 파도에 100미터도
못 가서 내 바지와 외투자락이 모두 젖었다. 선장의 지시에 따라 화물을 다시 배치해 균형을 조금 잡았다. 균형이 깨질까봐 숨쉬기조차 두려웠다.
더군다나 막 썰물이 이는 중이었다. 썰물로
인해 심한 파도를 동반한 해류가 대륙붕을 따라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아침나절
우리가 들어온 해협을 통해 바다로 흘러 나가고 있었다. 짐을 지나치게 실은 보트를 파도가 위협했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점은 보트가 물길을 벗어나, 해안선이 돌출한 지점
너머에 있는 상륙 예정 장소에서 멀어진 일이었다. 해류를 따라 그대로 간다면 우리는 해적들의 보트 쪽으로 가게되어 금방 그들이
튀어나올 터였다. 보트에 새로 오른 선장과 레드러스는 노를 저었고 나는 키를 잡았다. 내가 선장에게 말했다.
“요새쪽으로 뱃머리를 유지할 수가 없오. 조류에
배가 쓸리고 있어요. 노를 좀 더 세게 저을 수 있나요?” 선장이 대답했다.
“세게
저으면 파도가 덥칠 겁니다. 박사님, 방향을 그대로 유지하세요. 조류를 벗어날 때까지 키를 그대로 잡고 계세요.”
선장의 말대로 키를 잡고
있자니, 정동正東을 향하거나 또는 우리가 가야 할 방향과 대략 직각으로 뱃머리를 돌리지 않으면, 조류에 쓸려 계속 서쪽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말했다.
“이래서는 절대 상륙할 수가 없다구.” 선장이 대답했다.
“다른 항로가 없다면 계속 가야 합니다. 박사님, 역류를 거슬러야겠습니다.” 그가 계속말했다.
“방향을 바꾸면 상륙도 미지수이고, 악당들의
눈에 띄기도 쉽습니다. 계속 가다 보면 해류도 약해질 것이고, 다시
해안선을 따라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때 앞자리의 그레이가 말했다.
“해류가 좀 약해졌네요. 키를 좀 풀으세요.”
마음
속으로 그를 우리편으로 이미 받아들였으므로, 아무 일 없었던 듯 내가 대답했다.
“고맙소.”
갑자기 선장이 다시 소리를 질렀는데, 당황하는 목소리였다.
“대포 생각을 못했네!” 그가 요새에 대한 포격을 염두에 두는 듯해서
내가 대답했다.
“나도 그 생각을 했오. 대포를 뭍으로 가져오지는
못할 거요. 가져와도 끌고 숲을 지나는 일은 불가능해.” 선장이 다시 소리쳤다.
“박사님, 저 배 선미 쪽을 보세요.”
우리는 4킬로그램짜리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장거리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놀랍게도 배에 남았던 다섯 명의 악당들이 소위 저고리라고 부르는, 두꺼운 방수포로 만든 항해용 대포 덮개를 벗기고 있었다. 남겨 놓은
화약과 대포알이 쉽게 그들 차지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번개 같이 스쳤다. 그레이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스라엘은 플린트의 포수였어요.”
우리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상륙 지점을 향해 똑바로 갔다. 이때는 이미 강한 해류로부터 멀리 벗어났으므로 필요하면 천천히 젓기도 해가며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갔다. 그러나 보트의 방향이
달라지니, 운 나쁘게도 뒤에 있어야 할 히스파니올라가
옆에 있게 되어, 우리는 그들의 대문짝만한 표적이 되었다. 벌겋게
술이 취한 악당 이스라엘 핸즈가 갑판 위에다 대포알을 털썩 내려놓았다. 선장이 물었다.
“어느 분이 총을 제일 잘 쏘시나요?” 내가 대답했다.
“트릴로니씨가 제일이지요.” 선장이 말했다.
“지주님, 저놈들 가운데 한 놈을 거꾸러뜨려 주시겠어요? 가능하면 핸즈를.”
트릴로니는 얼음처럼 냉정했다. 탄환을 장전했다. 선장이
소리쳤다.
“조심하세요
지주님. 자칫하면 배가 뒤집어집니다. 지주님이 조준할 때
움직이지들 마세요.”
지주가 총을 들었고, 노젓기가 중단 됐고, 배의
균형을 위해 반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모든 것이 차분해져 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그때 악당들이 포문을 돌렸고, 꽂을대를 들고 있던 핸즈가 그대로 눈에 띄었다. 그러나 우리는 운이 없었다. 트릴로니가 쏘는 순간 핸즈가 허리를 굽혔고, 그의 머리 위로 빗나간 총알을 다른 해적이 맞고 쓰러졌다. 그가 비명을 지르자 배 위 그의 동료들도 소리를 질렀고, 해안 쪽에서도 왁자지껄해서 보니, 숲에서 몰려나온 해적들이 각자 제자리를 찾아 보트로 뛰어들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저놈들 좀 봐.” 선장이 외쳤다.
“걱정말고
앞으로 돌진. 주춤거리면 안됩니다. 지금 상륙을 못하면 만사가
끝입니다.” 내가 한마디 했다.
“한
척만 오고 있어. 다른 놈들은 해안을 돌아 우리의 상륙을 막으려는 것 같아.” 선장이 대꾸했다.
“저들은
노를 빨리 저어 올 것이고, 뭍에도 해적들이 있지요. 제가
염려하는 것은 저들이 아닙니다. 대포알이지요. 맞으면 산산조각이
납니다! 제 아내의 하녀조차도 실수 없이 쏠 수 있는 대포입니다. 지주님, 불을 댕기는 것이 보이거든 말씀하세요. 우리 모두 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짐을 잔뜩 실은 우리 보트는 그런 가운데서도 제 속도를 내어, 상당한 거리를 저어가 육지에
거의 다가갔다. 이미 썰물이 빠져 나무숲 아래 좁다란 모래밭이 들어나,
삼사십 번만 더 저으면 뭍에 오를 수가 있었다. 해적들의 보트는 더이상 두렵지 않았다. 해안선이 돌출한 지점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리를 그다지도 지체시켰던
썰물이 이제는 해적들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한가지 위험한 일이 있다면, 대포였다. 선장이 말했다.
“할 수 있다면, 잠시 멈춰 한 놈 더 없애버렸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한 사람을 더 처치한다고 해서 그들의 포격을 지연 시킬 수는 없었다. 쓰러진 동료를
거들떠보지도 않아, 죽지는 않았지만 몸부림치며 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지주가 소리를 질렀다.
“준비!” 그와 동시에 선장이 외쳤다.
“잠깐”.
선장과 레드러스가 힘껏 노를 젓자 보트 뒤로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대포 소리가 울렸다. 나중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소리가 짐이
처음 들은 대포소리였고, 지주가 쏜 총소리는 짐이 못 들었던 것이다. 대포알이 어디를 향해 날아가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분명 우리 머리 위를 날아갔고, 쉬익하는 소리는 우리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어쨌던 우리가 탄 배가 뒷전부터 천천히 침몰했고, 선장과 나는 1미터 정도 깊이의 물에 서서 서로 쳐다보았다. 다른 세 사람은 완전
곤두박질을 해서, 흠뻑 젖은 채 일어났다.
그때까지 큰 탈은 없었다. 죽은 사람도 없었고, 우리는
걸어서 안전하게 뭍으로 나왔다. 그러나 싣고 온 물건들은 모두 물에 가라앉고, 설상가상으로 다섯 자루의 총 가운데 세 정만 온전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무릅에 있던 총을 머리위로 번쩍 들었다. 선장은 현명한 사람답게 총구를 위로 향하고 메어, 총구에 물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른 세 사람의 총은 보트와 함께
물에 가라앉아 버렸다.
우리가 걱정을 하고 있는데, 해변가의 숲으로부터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고, 반은 결딴이 난 상태에서 요새로 가는 길도 막혀 위험에 빠진데다, 만일
여섯명의 해적들이 헌터와 조이스를 공격한다면 그들이 단호하게 대항할 마음이 있을까도 걱정이 되었다. 헌터가 배짱이 있고 의연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조이스는 싹싹하고 예의가 발라
하인으로서야 나무랄 데가 없지만, 과연 싸움에 적합한지는 의문이었다.
이런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처량한 우리의 상륙용 보트와 반에 가까운 화약과 보급품을
뒤에 남긴 채, 얕은 물을 건너 서둘러 뭍으로 갔다.
제18장
계속되는 박사님의 이야기--첫날 싸움 이야기
앞을
가로막은 숲 지대를 헤치며 서둘러 요새로 갔는데, 해적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갈수록 점점 가까워졌다. 곧 무성한 숲을 내닫는 발자국 소리와 나무가지를 건드리는 소리가 탁탁 들려왔다. 요새에 도착하기 전 놈들을 남김없이 처치해야겠다는 생각에 탄환을 장전했다. 내가
선장에게 말했다.
“선장, 트릴로니는 명사수야. 당신 총을 그에게 주시오. 그의 총은 못 쓰게 됐어.”
두 사람은 총을 바꿨고, 싸움이 시작된 이후 말이 없고 침착해진 트릴로니는 잠시 서서 총을 점검했다. 그레이도 총이 없어 내 칼을 주었다. 손에
침을 발라 칼을 잡고, 눈을 부릅뜬 채 허공을 향해 휘두르는 그를 보고 모두들 마음 든든해 했다. 이 새로운 동지의 모든 행동으로 보아 그의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리라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40보 정도를 더 가 숲에서 벗어나니 요새가 바로 앞에 보였다. 남쪽 울타리의 가운데 쯤을 부수자마자 일곱 명의 해적이--지휘자는
갑판장 조우브 앤더슨--남서쪽
모퉁이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나타났다.
그들이 물러설 듯 주춤했다 다시 나오는 순간, 지주와
나 그리고 통나무집으로부터 헌터와 조이스가 일제사격을 했다. 네
발의 탄환은 좀 산발적이긴 했지만 그런대로 임무를 다 해냈다. 한 놈이 거꾸러졌고 나머지는 허겁지겁
숲속으로 꽁무니를 뺐다.
다시 탄환을 잰 다음, 쓰러진 해적을 보려고
울타리 쪽으로 갔다. 그는 즉사--탄환이 심장을 관통해 버린
것이다.
승리를 기뻐하기 무섭게 숲에서 권총 소리가 나며 탄환이 내 귓전을 스쳤고, 가엾게도 톰 레드러스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지주와 내가 응사를 했지만, 보이지 않는 적을
마구잡이로 쏘니 화약만 낭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탄환을 다시 잰 다음, 가엾은 톰에게 눈을 돌렸다.
이미
선장과 그레이가 그를 보살피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끝났음을 한눈에 알았다. 우리의 신속한 대응사격으로 다시
흩어진 해적들로부터 더 이상 공격이 없어,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가엾은 산지기 노인을 번쩍 들어 울안을
지나 통나무집으로 옮겼다.
우리가 모험을 시작한 후 통나무집에 뉩혀져 이제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 그 가엾은 노인은 놀랍다거나, 불평을 하거나, 무섭다거나 심지어 무엇을 찬성을 한다는 말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는
트로이의 병사처럼 매트리스 뒤에서 복도를 지켰다. 그는 모든 명령을 묵묵히, 고지식할 정도로 충실히 따랐다. 그는 우리보다 20년이나 나이가 더 든 최연장자였다. 이제 충직하고 늙은, 자기 희생적인 하인이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지주는 그의 옆에 무릅을 꿇고 어린애처럼 울면서 그의 손에 입을 맞췄다. 노인이 물었다.
“박사님, 저는 죽는 거지요?” 내가 대답했다.
“톰, 이제 우리 모두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가 대답했다.
“내가
먼저 총으로 그놈들을 한 방에 날려버렸어야 했어요.” 그가 헐떢이며 말했다. 지주가 말했다.
“톰, 나를 용서한다고 말해 봐요.” 그가 대답했다.
“존경하는
지주님께, 감히 당치도 않은 말씀 아닌가요? 하지만 원하신다면
그렇게--아멘.”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가 임종기도를 해달라고 했다. 그는
미안한 듯 덧붙혔다.
“관습이니까요.” 다른 말 없이 곧 숨을 거두었다.
한편 앞주머니가 크게 부풀어 보였던 스몰릿 선장이 여러가지
물건들--영국국기, 성경,
굵은 줄타래, 펜, 잉크, 항해일지 그리고 꽤 많은 담배를 쏟아 놓았다. 선장은 요새 안에
다듬어진 채 쓰러져 있는 긴 전나무를 찾아 내, 헌터의 도움을 받아 통나무가 직각으로 교차하는 집 모퉁이에 기대 세웠다. 그런
다음 지붕으로 올라가 손수 영국 국기를 계양했다.
그렇게 하고 나서 그는 크게 안심을 하는 듯 했다.
통나무집으로 다시 들어온 선장은 오직 보급품만이 전부인 듯 그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톰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가
죽자 국기를 가져다 경건하게 시신을 덮었다. 선장이 지주의 손을 잡고 말했다.
“지주님, 슬퍼하지 마세요. 자기 임무를 다한 사람입니다. 뱃사람답게 이 선장과 지주님을 위해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다 쓰러진 것이지요.
좋은 일은 아니지만 받아들이셔야죠.” 그렇게 말하며 나를 잡아 끌었다. 그가 물었다.
“리브시 박사님, 그리고 지주님은 몇 주가 지나야 구조선이 오리라고 보시나요?”
나는 몇 주가 아니라 몇 달이 지나야 하며, 만일 우리가 8월말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블랜들리가
구조선을 보내겠지만, 조만간에는 가능성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에게
내가 한마디했다.
“선장이
날짜를 한번 계산해 보시오.” 선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래
봐야 하겠지만, 박사님, 하나님이 도와 주신다고 해도, 물자가 정말 부족합니다.” 내가 물었다.
“무슨
말이요?” 선장이 대답했다.
“제
말씀은, 두 번째 실어 나르던 물건들을 잃어 안타깝습니다. 화약과
탄환은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그런데 박사님, 식량이 모자라, 정말 매우 부족해서 입을 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국기에 덮힌 시신을 가리켰다.
바로 그때 폭발음과 함께 대포알이 바람을 가르며 지붕 위를 날아 숲속 저만치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선장이 외쳤다.
“좋아! 그렇게 헛방만 쏘라구! 이놈들, 이제
화약이 얼마 안 남았을 걸.”
두 번째 대포알은 조준이 조금 더 정확해서, 울 안으로 떨어져 모래 구름을 일으켰지만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지주가 말했다.
“선장, 이 집은 배에서 전혀 보이질 않아. 깃발을 보고 쏘는 것이 틀림없어요. 기를 내려야 하지 않겠오?” 선장이 외쳤다.
“기를
내리다니, 안됩니다 지주님!”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 모두들 그의 뜻을 이해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깃발은 단지 강인한 바닷사람의 고귀한 정신의 표상만은 아니었다. 해적들의 포격을 무시해버리는
좋은 수단이기도 했다.
저녁 내내 그들은 포를 쐈다. 쏘는대로 요새보다 멀리,
또는 못미쳐, 또는 울안의 모래에 떨어졌지만, 모두
사격 고도가 높아 대포알은 제대로 날지를 못하고 부드러운 모래에 그대로 쳐박혔다. 날아오는 대포알도
무섭지 않았고, 한 발이 지붕을 뚫고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런
소란에 금방 읶숙해진 우리는 귀뚜라미의 공격 정도로 생각했다. 선장이 적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저 앞 숲길이 열린 듯하구요, 썰물도 충분히
빠졌습니다. 물에 빠진 물건들이 틀림없이 들어났겠지요. 누가
자원해 가서 베이컨을 가져왔으면 하는데요.”
그레이와 헌터가
제일 먼저 나섰다. 무기를 갖춘 채 요새를 몰래 빠져나갔지만,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반란자들은 생각보다 더 용감했고, 이스라엘의 포격 솜씨를 굳게 믿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역류에 쓸려 쩔쩔매며 노를 젓고 있는 보트로, 네댓 명이 우리가 잃은 보급품을
힘겹게, 부지런히 옮기는 중이었다. 실버가 뱃전에 앉아 지휘를 했는데, 그들만의
비밀장소에 감춰 두었던 화승총으로 모두 무장한 채였다.
그날 선장의 항해일지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선장, 알렉산더 스몰릿. 탑승 의사, 데이빗 리브시. 목공, 에이브러함 그레이. 선주, 존 트릴로니. 선주의 하인 겸 견습선원, 존 헌터와 리쳐드 조이스 – 살아 남은 우리 측 사람들- 열흘 분의 배급 식량, 오늘 상륙해서 보물섬의 요새에 영국 국기를 계양하다. 선주의 하인 겸 견습선원 토마스 레드러스, 해적들의 총격으로 사망. 선실 사환 짐 호킨스--
그 순간 가엾은 짐 호킨스의 운명은 어떻게 됐나 걱정이
되었다. 육지 쪽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파수를
보던 헌터가 말했다.
“누군가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박사님, 지주님, 선장님, 안녕하세요? 그리고 헌터씨 아니세요?” 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즉시 문가로 뛰어가 내다보니 짐 호킨스가 무사히, 건강한 모습으로 울타리를 넘어왔다.
제19장
짐 호킨스가 다시 하는 이야기
-요새의 수비대-
깃발을 보자 벤 건이 걸음을 멈추며 갑자기 내 팔을 잡았다. 그가 말했다.
“네
친구들이 틀림없어.” 내가 대답했다.
“해적들
같아요.” 그가 소리쳤다.
“해적이라니! 당치않아. 보물을 찾아 나선 사람들만 있는 여기서, 실버라면 틀림없이 해적깃발을 올렸을
거야. 실버가 아니고, 네 친구들이야. 싸움도 있었고, 네
친구들이 틀림없이 이겼어. 수년 전 플린트가 세운 낡아빠진 요새로 피신한 게 아닌가 해. 아, 플린트, 머리가 좋았지! 럼만 아니었다면, 그를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어. 그래, 그는 두려워 하는 사람이 없었단다. 오직 실버만을 무서워했다구. 실버는 그런 놈이야.” 내가 대답했다.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면 더욱 서둘러 친구들을 만나야겠네요.” 벤이 대답했다.
“잠깐만, 친구. 내가 잘못 아는 게 아니고서야, 너는 착한 소년이지. 하지만 소년에 불과하다는 말을 귀담다 들어. 이 벤 건은 말야, 조심성이 있고 눈치가 빠르다구. 럼을 줘도 너를 따라가지 않겠어. 타고난 신사인 그분을 만나, 그 분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않는
한, 럼 따위는 소용없다구. 내 말 전하는 걸 잊지마.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이 말을 아주 강조하라구)’, ‘정말
믿을 수 있습니다’ 하면서
이렇게 지주를 꼬집으라구”
그러면서 믿으라는 듯 세 번째로 또 나를 꼬집었다.
“이
벤 건이 필요하면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면 돼. 오늘 만난 곳 말이야. 나를 만나려는 사람은 올 때 하얀 걸 손에
들고 혼자 와야 해. 아!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전해. ‘벤 건은 제정신입니다’라고. 내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지주님과 박사님을 만나 뭔가 제안을 하고
싶고, 우리가 만난 곳에서 아저씨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죠?” 그가 덧붙혔다.
“언제냐고는
왜 안 물어 보니? 점심때부터 6시 종을 치는 사이에 오렴.” 내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이제 가도 되죠?”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잊지
않겠지? ‘정말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제정신입니다’라는
말 말이야. ‘제정신’이란 사람간에 근본이지.” 그가 나를 계속 잡고 말했다.
“짐, 이제 가도 좋아. 혹 실버에게 이 벤 건을 팔아먹지는 않겠지? 네 주리가 틀려도 아니지? 아니라고 대답해 봐. 짐, 해적들이 해변에 천막을 쳤다면, 그 마누라들이 대번에 과부 될 일밖에
더 있겠니?”
바로 그때 요란한 대포소리에 그가 말을 중단했고, 대포알 하나가 나무가지를 찢으며 날아와, 우리가 말하고 있던 장소에서 1백미터도 안되는 모래밭에 박혔다. 그와 동시에 우리 두 사람은 뿔뿔히 도망을 쳤다.
한동안 대포소리가 여러번 섬을 흔들었고, 대포알이 숲을 가르며 계속 날아왔다. 나는 영원한 도망자, 아니면 적어도 그런 모습으로, 무시무시하게 날아오는 대포알을 요리조리 피하며 도망쳤다. 그러나
포격이 끝날 즈음 다시 용기가 솟아, 대포알이 수시로 떨어지는 요새로는 직접 못 갔지만, 동쪽으로 멀리 우회하여 해변가의 숲을, 몸을 낮추어 헤치며 갔다.
날이 막 저물고, 바닷바람이 살살 불어 나무가지가 흔들리고 만에는 희뿌연 잔물결이일고
있었다. 썰물이 멀리 빠져나가 모래펄이 커다랗게 들어나 있었다. 온종일
뜨거웠던 공기가 식어 옷깃을 차갑게 스몄다.
히스파니올라는 처음 정박한 그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졸리 로져가--해골이
그려진 검은 바탕의 해적깃발--꼭대기에 나부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불꽃이 또 번쩍하며 대포 소리가 들리더니 대포알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마지막 포사격이었다.
나는 포사격에 이은 해적의 소동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요새 가까운 해변에서 도끼로 무엇인가를--나중에 우리가 타고 온 보트라는 것을 알았다--무참히 때려부수는 마음 아픈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멀리, 개천 어귀 근처에서 타오르는 커다란 불꽃이 나무들 사이로 보였고, 불꽃과
보트 사이를 사람들이 오갔는데, 노를 저으며 아이들처럼 지르는 소리가 음울하게 들려왔다. 그 음조로 보아 럼에 취한 듯한 목소리였다.
결국 요새로 가야겠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요새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야트막하게 솟은 모래톱 위에 있었는데, 만의
동쪽을 둘러싼 그 모래톱은, 썰물 때는 물이 빠져 해골섬으로 가는 길로 변하는 곳이었다. 몸을 일으켜 바라보니 모래톱 아래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유별나게
희고 큰 바위가 관목 위로 솟아 있었다. 바로 벤 건이 말한 바위로 조만간 보트가 필요하면, 바로 저기서 찾아야겠구나
했다.
나는 숲가를 따라 마침내 요새의 후면, 다시 말해 해안쪽으로 난 길에 도착했고, 곧 일행의 따듯한 영접을 받았다.
나는 지체없이 그동안 겪은 일을 말한 다음,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통나무 집은 다듬지 않은 소나무로--지붕, 벽, 바닥을--지은 집이었다. 모래땅 위에 40센티미터 정도 높이로, 군데군데 놓은 마루가 있었다. 정문은 현관 식이었고, 현관 마루 밑에 있는 조그만 샘에서 물이 솟아 조금 이상하게 생긴 대야--다름아닌 밑 빠진 선박용 커다란 쇠 주전자로 흘러들었는데, 선장의 말을 빌리면, 그 대야는 모래에 ’흘수선까지' 잠겨 있었다.
통나무집 건물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고, 다만 한 구석에는 화덕처럼 해놓은 돌판과 불을
담는 낡고 녹슨 쇠그릇이 있었다.
통나무집을 짓느라 요새 안팎 경사면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 그 남아 있는 그루터기들을 보면, 한때 얼마나 아름답고 큰 나무들이
자랐는지 알 수 있었다. 나무가 잘린 다음 토사가 일어 대부분의 흙이 씻겨 나가, 모래밭 가운데로 흐르는 주전자 물을 따라, 두터운 이끼와 고사리
그리고 키작은 덩굴식물들이 자라는 데만 그나마 푸른기가 남아 있었다.
요새 가까이 삥 둘러 나무가 울창했는데--방어를 위해 아주 불리하다고들 했다--육지 쪽으로는 모두 전나무들이었고, 바다 쪽으로는 도토리나무가 섞여
있었다.
앞에서 말한 싸늘한 저녁바람이 불면서, 초라하게 지은 통나무집 구석구석에 뚫린 틈새를 통해, 마루 바닥에
미세한 모래 비를 뿌렸다. 우리의 눈에도 모래, 입에도 모래, 저녁식사에도 모래가 섞였고, 쇠 주전자에 떨어지는 모래가 잔물결을
일으켜, 마치 온 땅이 죽 끓는 듯했다. 지붕에는 정방형의
굴뚝이 있었는데, 연기가 조금밖에 빠지지 않아, 남은 연기에
휩싸여 우리는 계속 기침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밖에도 우리편이 된 그레이가 해적들에게서 빠져나올 때 생긴 상처로 얼굴에 붕대를 감았고, 가엾은 톰 레드러스 노인은 아직도 묻히지 못한 채, 차가운 시신이 되어 영국 국기에 덮혀 누워 있었다.
우리가 한가했다면 틀림없이 모두들 우울해 했겠지만, 스몰릿 선장님은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둘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 불러 경계조를 편성했다. 박사님과
그레이, 나는 같은 조였다. 지주님, 헌터, 조이스는 또 다른 조였다. 모두들
지쳤지만, 두 사람은 나무를 하러 가고, 또 다른 두 사람은
레드러스의 무덤을 팠다. 박사님은
요리를 맡았다. 나는 문을 지키는 보초를 섰다. 선장님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기를 북돋우고, 일손이 모자라는 데는 돕기도 했다.
연기로 충혈된 눈을 신선한 공기에 쐬러 문가로 잠시 올 때마다, 박사님은 이런 말을 했다.
“저 사람 스몰릿
말이야, 나보다 훨씬 훌륭해.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짐, 대단한 사람이라는 뜻이야.”
언젠가는 와서 한참 말이 없다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네
생각에 벤 건은 제 정신이니?” 내가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제정신인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내 말에 박사님이 대답했다.
“확인할
길이 없다면, 그는 미쳤다고 보아야 해. 짐, 손톱을 씹으며 3년이나 무인도에서 보낸 사람은 너나 나처럼 온전하기를 기대할 수 없어. 인간의
본성이란 그렇게 강인하지 않아. 치즈가 먹고 싶다고 했다며?” 내가 대답했다.
“네, 박사님.” 박사님이 말했다.
“짐, 음식에 까다로운 것이 보람이 될 때도 있구나. 내 코담배갑 있지? 내가 코담배 피는 것을 너는 못 봤을 거다. 그 담배갑에 파르메산 치즈가 있어. 이태리산
영양가 높은 치즈 말이야. 그 걸 벤
건에게 가져다 주렴!”
저녁 식사에 앞서 톰 노인을 모래에 묻은 다음, 그 주위에 둘러 서서 찬 바람에 모자를 벗고 잠시
경의를 표했다. 땔감을 많이 해왔지만, 선장님은 성에 차지
않은 듯 머리를 가로저으며 ‘내일 아침 더욱 힘을 내 다시 해 오라’고
모두에게 지시했다. 우리는 베이컨을 먹은 다음 브랜디를 한 잔씩 받았고, 세 분 대장님들은 구석에 모여 장차 할 일을 의논했다.
식량이 얼마 남지 않아 배고픔을 못 이긴 우리가, 틀림없이 구조대가 오기도 전에 항복을 하게 될 것이라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몹시 걱정들을 하는 듯했다. 그래서 해적들이 항복하거나 히스파니올라를 몰고 도주하기 전에 무찌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열아홉에서 이제 열다섯 명으로 줄었고, 두 사람은 부상인데다 그
가운데 한 명은--대포 옆에서 총에 맞은 해적--비록 죽지는
않았다고 해도, 중상임이 분명했다. 우리는 쏠 때마다 명중을
시켜 그들의 숫자를 줄여 놓았고, 우리측은 지극히 몸조심을 해서 인명피해가 적었다. 그밖에도 우리는 유능한 두 동맹군--럼과 날씨가 있었다.
럼은 해적들을 취하게 해, 그들과 우리는
1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고함과 노래소리를 밤 늦도록
들을 수 있었다. 두 번째의 우군인 날씨는, 박사님이 가발을
걸고까지 한 말이지만, 약도 없이 늪지대에서 버티는 해적들을, 1주일도
못 가 태반을 궁지로 몰아넣을 터였다. 박사님이 말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먼저 모두 처치하지 않으면, 저놈들은
배를 타고 의기양양 도망을 칠 거란 말이지. 저 배는 좋은 배야. 저
배만 있으면 언제고 다시 해적질에 나설 수가 있어.” 스몰릿 선장님이 말했다.
“배를 잃어 보기는 처음입니다.”
독자
여러분이 짐작하듯 나는 피곤하여 죽을 지경이었다. 그같은 소동 끝에 잠이 들어, 죽은 듯 세상 모르게 잤다.
부산한 소리에 잠을 깨니, 다른 사람들은
벌써 일어나 이미 아침을 먹고 그 전날의 두 배나 되는 장작을 해다 쌓은 후였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휴전 깃발이다!” 이어서 놀랍다는 함성이 터졌다.
“실버가 직접 왔다!”
그 소리에 나는 벌떡 일어나 눈을 비비며 벽에 난 총안을 향해 뛰었다.
제20장
실버의 휴전 교섭
짐작대로 울타리 밖에 두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백기를 들고 또 한 사람, 바로 실버가 옆에 천연덕스럽게 서 있었다.
아직 이른 새벽이고 배를 탄 이후 가장 추웠다고 생각되는 아침으로, 추위가 뼈속까지 스몄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고, 나무 꼭대기 가지들이 햇빛을
받아 불그스레 했다. 그러나 실버가
부하와 서 있는 곳은 아직 어두웠고, 밤새 늪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 나온 하얀 안개가 그들의 무릅까지
찼다. 차가운 공기와 새벽 안개가 뒤섞여 거칠고 험한 그 섬을 말해 주고 있었다. 구중중하고 열병 끼가 있는 건강에 해로운 곳이라는 증거였다. 선장님이
말했다.
“문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십중팔구 속임수입니다.” 그리고 해적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냣? 서지 않으면 쏠테다.” 실버가 외쳤다.
“휴전이오.”
선장님은 현관에서, 있을지도 모를 불시의
사격을 예의 경계했다. 우리를 돌아보며 그가 명령했다.
“박사님조
경계 돌입. 박사님은 북쪽을 맡으시고, 짐은 동쪽, 그레이는 서쪽을. 비경계조 요원들은
모두 총에 탄약을 재시오. 여러분, 서둘러요, 조심들 하고.”
다시 해적들을 보며 소리쳤다.
“백기를
들고 오다니, 어쩌자는 거야?” 옆에 있던 해적이 대답했다.
“실버 선장님이 그곳으로 올라가 휴전조건을 제시하겠답니다.” 선장님이 대답했다.
“실버 선장이라! 난 모르겠는데, 그 게 누구야?” 선장님의 연이은 말소리가 들렸다.
“선장이라고
그랬지? 아이구 골치야, 이 섬에선 승진이 빠르기도 하구먼!” 이번에는 롱 존이 대답했다.
“나요. 당신이 배에서 도망친 다음 이 가련한 백성들이 날 선장으로 추대했다우.” 그는 "도망"이라는 말에 특별히 힘을 주면서 계속했다.
“우리가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드린다면 항복할 수도 있지. 골치 아프게 싸울 필요도없구. 스몰릿 선장, 내가 원하는 건, 우리가 이 요새에서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도록 약속을, 당신들이
총을 쏘기 전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잠시 짬을 달라는 거요.” 스몰릿 선장님이 대답했다.
“이봐, 난 너와 전혀 말하고 싶지 않아. 담판하고 싶으면 올라 와. 더 이상 할 말 없어. 허튼수작일랑 하지 말고, 믿고 올라와. 어쨋든 주님이 널 용서하시기를."
롱 존이 기뻐하며 큰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선장님. 그 말 고맙수. 신사를
믿고 올라가겠수다."
백기를 든 부하가 롱 존을 말리는 것이 보였다. 선장님이 얼마나 배짱있게 말했는지, 부하의 행동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실버는 껄껄대며 멍청이나
겁을 먹는다는 듯 그의 등을 철석 때렸다. 그런 다음 요새를 향해 오더니, 목발을 울안으로 집어던진 다음, 다리를 번쩍들어 힘차고 능숙하게
울타리를 넘어왔다. 그 장면에 내 마음을 빼앗겨 보초근무가 쓸모없을 정도였음을 고백한다. 실제로도 나는, 내 초소인 동쪽 총구멍을 이탈하여 선장님의 뒤로
살금살금 가서 보니, 그는 문지방에 걸터앉아, 팔꿈치를 무릅에
대고 턱을 괸 채, 모래밭 낡은 쇠주전자에서 졸졸 흐르는 샘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년, 소녀들이어 오라",
라는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면서.
실버는 애써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가파른
비탈과 수많은 그루터기, 부드러운 모래밭을 지나며, 그의
몸과 목발은 역풍을 만난 배처럼 절망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남자답게 묵묵히 목발에 의지하여, 마침내 선장님의 앞에 이르러 점잖게 인사를 했다. 옷차림새가 번지르르했다. 놋쇠 단추를 주렁주렁 단, 무릅 아래까지 내려오는 근사한 청색 코트을
입고, 정교한 레이스가 달린 모자를 머리 뒤로 비딱하게 쓰고 있었다.
선장님이 머리를 들며 말했다.
“음, 왔군. 앉지 그래.” 롱 존이 투덜거렸다.
“선장, 나를 안으로 안 들일 거요? 이렇게 추운 아침, 한데서 모래 바닥에 앉기란 거 뭐한데” 선장님이 말했다.
“그으래? 실버, 네가 정직한 사람이었다면 지금 식당에 있겠지. 다 네가 뿌린 씨야. 네가 배의 요리사라면 나도 점잖게 대우했을 테고. 하지만 선장 실버라면 그냥 해적이고 반란자야, 교수형
감이지!” 누가 앉으라는 말이라도 한 듯 요리사가 모래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좋아요, 선장, 앉으라면 앉지. 하지만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워야 할 걸. 여긴 참 좋은 곳이야. 아, 저기 짐이 있네. 짐, 잘 잤니? 박사님도, 명령만
내리십쇼, 박사님. 노상 하는 말이지만 모두 행복한 한가족
같네.” 선장님이 말했다.
“이봐, 할 말이 있으면 그 말이나 해.” 실버가 대답했다.
“그러믄요, 스몰릿 선장님. 일은 일이니까. 자, 내
말 들어봐요. 지난 밤에는 잘들 싸우던데. 내 그 걸 인정하지. 누군가 꼬챙이를 잘도 쓰더군. 내 부하 몇 놈 아니 전부 기겁을
했다구. 나도 놀랐으니까. 그래서 담판 차 여기 여기 온
거요. 그런데 선장, 내 말을 들어 봐요. 그런 수작은, 제기랄, 두
번 다시 안 통해! 이제 보초를 세워 럼 근처에도 못 가게 할 거야.
우리 모두 술에 취해 해롱댔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난 취하지 않았었오. 고단해서 눈을 못 떴을 뿐이지. 내가 조금 일찍 눈을 떴더라면, 당신 덜미를 챘을 거요. 가까이 보니 안 죽었더라구. 안 죽었어, 그가.” 선장님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래서?”
실버의 말은 선장님에게 모두 수수께끼같아, 그
말로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눈치를 챘다. 벤 건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모닥불
주변에 곯아떨어진 해적들을 벤 건이 찾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 열네 명 남았으니 그들만 처치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놓였다. 실버가 말했다.
“내
제안은 이렇소. 우린 보물을 원하고 또 손에 넣을 거요.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짐작컨데 목숨만 건지겠다는 게 당신들 뜻인 듯 하구, 당신 손에 보물지도가 있지 않소?” 선장님이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롱 존이 대꾸했다.
“음, 그래요, 당신이 가진 걸 내 알지.
나를 너무 언짢게 대하지 마쇼. 그래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아 둬요. 지도만 내놔요. 해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소.” 선장님이 말을 막았다.
“헛소리
하지 마, 네놈들 수작을 다 알아. 우리는 상관 안해. 해볼테면 해보라구.” 선장님이 그를 조용히 바라보며 파이프에 담배를
담았다. 실버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만일
에이브 그레이가--스몰릿 선장님이 외쳤다.
“닥쳐! 그레이가 뭐라 하지도 않았고 내가
묻지도 않았어. 어쨋던 물이 말라 버려, 너희들도 이 섬도
모두 바싹 타버렸으면 해. 내 말 알아 들었니? 이놈아.”
이 욕설에 실버가
조용해 지는 듯했다. 약을 올리던 자세를 바꿔 신중해지는 눈치였다. 그가
말했다.
“그만
됐수. 정정당당히 싸우겠다는 신사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담배를 재우는 걸 보니, 선장님,
나도 한 대 태우겠오.”
그는 담배를 담아 불을 붙혔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말없이 담배를 피우더니, 파이프를 털고 상체를 수그려 침을 칵 뱉았다.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듯 재미 있었다. 실버가 계속했다.
“자, 말한대로요. 보물을 찾도록 지도를 내놓고, 가엾은 내 부하들을 그만 쏘고 잠잘 때 쳐들어와 대갈통을 부수지 말라는 말이요. 그렇게만 해 준다면 우리도 양보하겠오. 우리와 다시 함께 일을 하다가, 일단
보물을 실은 다음 어딘가 안전한 해변에 내려 주겠다는 걸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오. 만일 이 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 부하들 가운데에는 상스러운 놈들도 있고 혹사를 당해 원한을 품은 놈도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그냥 여기 남아도 있어도 좋소. 여기
남겠다면 머릿수 대로 공정하게 식량을 나누어 주겠고, 처음 만나는 배에게 당신들을 태우라고 부탁할 것임을
이미 말한대로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오.”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이상 좋은 조건이 없어요. 여기 통나무집에 있는 사람들 모두 내 말을 들었으리라 믿겠오. 한 사람에게 한 말은 여럿에게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스몰릿 선장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왼손바닥에 파이프를 털었다. 그가 물었다.
“말
다했니?” 존이 대답했다.
“제기랄, 내 이 마지막 말, 이 말 거절하면, 우린 이제 마지막 보는 거구, 남는 건 총알밖에 없지.” 선장님이 말했다.
“좋아, 이제 내 말 들어 봐. 너희들이 무장을 해제하고 한 놈씩 와서 항복을
한다면, 내가 쇠족쇄를 채워 고향으로 데려가 영국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도록 해 주지. 만일 항복을 하지 않으면, 폐하의 깃발을 계양한 이 사람, 나 알렉산더 스몰릿은 너희들을
모조리 수장 시켜버리겠다. 너희들은 보물을 찾을 수 없어. 배도
몰 수가 없고--쓸모 있는 놈이 한 놈도 없지. 우리를 이길
수도 없고. 그레이가 혼자
힘으로 다섯 놈이나 제압하고 도망을 나왔어. 실버 선생, 배도 옴짝달싹을 못할 것이고. 지금
바람도 없고 말이야, 내 말이 옳은 걸 곧 깨닫게 될 거야. 내
이제 여기서 네게 권고한다. 나의 마지막 충고이고, 하늘을
두고 맹세하되, 다음 만나게 되면 그때 네 등어리에 총알을 박아 놓겠다. 이놈들아, 빨리 꺼져, 부리나케
어서!”
실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노로 눈을 크게
부라렸다. 파이프를 털어 불을 껐다. 그가 외쳤다.
“나를
좀 거들어 주오.” 선장님이 대답했다.
“난
못해.” 실버가 으르렁거렸다.
“누가
날 좀 일으켜 줘.”
아무도 도와 주지 않았다. 더러운 악담을
하며 모래를 기어가, 현관 기둥을 잡고 목발에 의지해 다시 일어섰다.
그런 다음 샘물에다 침을 뱉았다. 그가 외쳤다.
“거참! 이놈들은 내가 생각했던 대로군. 한 시간 안에 이 거지 같은 요새를
술통 부수듯 요절을 내겠다. 웃으라고, 제기랄, 비웃으라니까. 한 시간 안에 저승에서 웃을 거다. 뒈진 놈들은 복이 터진 놈들일 거구.”
욕지거리와 함께 넘어지면서 모래 비탈에 고랑을 만들며 미끄러져 내려간 다음, 네댓 번의 시도 끝에 백기를 든 부하의 도움을 받아, 말뚝 울타리를
넘어 순식간에 숲속으로 사라졌다.
제21장
공격
실버가 가버리자, 그를 노려보던 선장님은 집
안으로 눈길을 돌려, 그레이
말고는 모두 제 위치를 이탈한 우리들을 보았다. 처음으로 그가 화를 냈다. 그가 불호령을
내렸다.
“모두
원위치!”
모두 기가 죽어 제자리로 돌아가자 그가 말했다.
“그레이, 자네의 이름을 항해일지에 기록하겠네. 뱃사람답게 제자리에서 임무를 다했지. 트릴로니 지주님, 정말 실망했습니다. 박사님도 폐하의 군대에 복무하신 것으로 아는데! 퐁트노이 전투에 그런 태도로 임하셨다면, 차라리 주무시는 게 나았을 법도 했을 텐데요.”
박사님의 경계조는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사격자세를 취했고, 남은 사람들은 총에 탄약을 쟀으며,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속담
대로 모두들 얼굴을 붉혔다.
선장님은 말 없이 잠시 두리번거렸다. 그가
다시 말했다.
“여러분, 실버를 꾸짖어 쫓아 버렸습니다. 내가 일부러 그렇게 화를 냈어요. 그 작자가 말한 대로 한 시간
이내에 공격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숫적으로 열세이지만, 엄폐물
안에서 싸우게 됩니다. 또 조금 전 규율에 따라 싸우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여러분이 굳게 믿으면, 틀림없이 그 놈들을 요절낼 수 있습니다.”
이어 그는 우리의 경계태세를 점검하고, 자신의 의도 대로 모든 것이 질서정연함을 확인했다.
통나무집의 동 서 양쪽 벽은 폭이 좁은데다, 총안은 각각 한 개씪에 불과했다. 현관이 있는 남쪽 벽에는 두 개의
총안이, 그리고 북쪽으로는 다섯 개가 있었다. 우리 일곱
사람에게는 스무 자루의 총이 있었다. 장작더미를--탁자 모양으로
쌓았다고 해도 좋을-- 네 군데에 쌓았고, 화약을 잰 총을
장작더미들 사이에 1정씩, 그리고 그 위에다 각각 4정씩을 사수의 손이 닿도록 준비를 했다. 장작더미들 사이에는 칼도
준비해 놓았다. 선장님이 말했다.
“화덕불을 꺼요. 이제 추위도 가시고, 연기가 눈에 들어가면 안됩니다.”
트릴로니씨가 몸소 불 담는 쇠그릇을 치웠고, 타다
남은 불씨가 모래밭에서 사그라들었다. 스몰릿 선장님이 계속했다.
“호킨스는 아직 아침을 안 먹었지. 호킨스, 밥을 먹으렴, 네 자리에 가서
먹어. 빨리 먹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다 못 먹을지도 몰라. 헌터, 모두에게 브랜디를 한 잔씩 돌리게.”
술잔을 돌리는 동안 선장님은 마음속으로 방어계획을 세웠다. 그가 다시 말했다.
“박사님, 정문을 맡으세요. 몸을 감추시고.
절대로 나가지 마세요. 현관 쪽을 겨냥해서 쏘세요. 헌터, 동쪽을 맡게. 조이스는 서쪽을 방어하구. 트릴로니씨는 특등사수니까, 그레이와 함께 다섯 개의 총안이
있는 가장 긴 북쪽 벽을 맡으세요. 어쩌면 그곳으로 공격을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놈들이 만일 북쪽으로 접근해서 우리가 지키는 총구멍을 통해 사격을 해오면, 형편이
좀 고약하게 될 것입니다. 호킨스, 너와 나는 총쏘는 솜씨가 뭐하니 화약이나 재면서 거들자꾸나.”
선장님의 말대로, 냉기가 사라졌다. 우리를
둘러싼 숲 위로 해가 솟자, 요새 앞 툭터진 경사면에 햇빛이 쏟아져,
단번에 안개가 걷혔다. 모래가 금방 달구어졌고, 통나무
집의 통나무들 사이를 메꾼 송진이 녹아 내렸다. 외투와 윗도리를 벗어 던지고, 셔츠는 단추를 풀어 어깨까지 걷어붙힌 채, 열기와 초조함 속에서
각자 정위치를 지켰다. 한 시간여가 지났다. 선장님이 말했다.
“목을
매달 놈들 같으니라구! 적도의 무풍지대에 갇힌 기분이군. 그레이, 휘파람이라도 불어 바람을
불러보게나”
바로 그때 곧 싸움이 있으리라는 첫 조짐이 시작됐다. 조이스가 말했다.
“선장님, 누군가 눈에 띄면 쏴도 되나요?” 선장님이 대답했다.
“쏘고
말고!” 조이스가 한결같이 온순한 자세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잠시 조용했지만, 그 말에 모두들 정신을 바짝차려 경계태세를 취했다. 사수들은 읶숙한 솜씨로 총을 들었고, 선장님은 입을 꽉 다문 채
위엄 있는 표정으로 통나무집 한가운데 섰다.
그렇게 몇 초가 흐른 다음, 마침내 조이스가 화승총을 조준하여 그대로 쏴 버렸다. 총소리가 울리자마자 울 밖 사면팔방으로부터 마구 쏴대는 총알이, 마치
기러기떼가 줄지어 날 듯 계속해서 날아왔다. 통나무집에 몇 발이 맞았으나 뚫지는 못했다. 화약연기가
멀리 사라지자 요새와 주변의 숲은 아무 일 없었던 듯 전처럼 다시 조용해졌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거나 총열이 반짝하는 악당들의 출현 조짐이 없었다. 선장님이 물었다.
“눈에
띈 놈 쓰러뜨렸나?” 조이스가 대답했다.
“아뇨, 실패한 것 같습니다, 선장님.” 스몰릿 선장님이 중얼거렸다.
“사실대로
말하는 것도 못지않게 훌륭한 일이야. 호킨스, 조이스의
총에 화약을 재우거라. 박사님, 박사님은 어떻습니까?” 리브시 박사님이 대답했다.
“내
정확하게 알고 있오. 이쪽으로 세 발이 날아왔어. 불꽃이
세 번 번쩍했는데--두 번은 거의 같은 곳에서--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서 뵈더군.” 선장님이 말을 받았다.
“세
발이라! 지주님은요?”
이 질문에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북쪽으로부터
많은 총알이--지주님의 계산으로는 일고여덟 발이, 그레이에 따르면 여덟아홉 발이 날아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격은 북쪽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다른 세 방향으로부터는 우리를
괴롭히려는 교란사격임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알고 스몰릿 선장님은 인원 배치를 그대로 두었다. 인원을 재배치하면, 반란자들이 울안을 지나 성공적으로 접근하는 경우, 수비가 빈 총안을
점령할 것이고, 그 구멍을 통해 굴속에 있는 쥐를 잡듯, 통나무집 안의 우리를 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갑자기 시끄러운 함성과 함께, 해적 몇 명이 북쪽 숲에서 튀어나와 요새를 향해 곧장 돌격해 왔다. 그와
동시에, 숲으로부터 다시 사격이 시작되었고, 탄환 한 발이
문을 뚫고 들어와 박사님의 총을 부쉈다.
해적들이 원숭이처럼 울타리를 타고 올랐다. 지주님과
그레이가 계속 사격을 했다. 해적
세 명이, 한 명은 울 안으로 두 명은 밖으로 쓰러졌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다시 일어나 순식간에 숲속으로 도망친 것으로 보아, 부상을 당한 것이 아니라 놀라서
자빠졌던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죽고, 한 명은 도망치고, 우리의
방어선 안으로 네 명이 들어왔지만, 숲속 어딘가 분명 숨어 있을 일고여덟 명이, 통나무집을 향해 몇 자루의 총으로, 맹렬은 하지만 부질없는 사격을
해댔다. 담장을 넘어온 네 명은 눈앞 통나무집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돌진해 왔고, 숲에 숨은 해적들은 이들의 사기를 북돋고자 악을 썼다. 우리가 몇
발을 쏘았지만, 아무리 명사수라도 허겁지겁 쏘니 모두 빗나갔다. 곧
경사면을 기어오른 네 명의 해적이 들이닥쳤다.
가운데 총안으로 갑판장 조우브 앤더슨의 머리가 보였다. 그가 벼락 같은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공격, 모두 죽여--모두 때려잡아!”
그 순간 해적 한 명이 총안을 통해 헌터의 총대를 잡고
비틀어 낚아챈 다음, 그대로 일격을 가해, 가엾게도 그가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세 번째 해적은 집 주위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현관으로 불쑥 나와 칼을 휘두르며 박사님을 덮쳤다.
싸우는 위치가 완전히 뒤바뀐 입장이었다. 총격전이 시작 된 후 지금까지 우리는 엄폐 하에서
노출된 적을 쏘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노출 되어 반격이 어려웠다.
통나무집은 연기가 가득했지만, 우리의 안전에는
도움이 되었다. 악을 쓰며 허둥대는소리, 권총이 번쩍하며
터지는 소리, 누군가의 신음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선장님이
소리쳤다.
“모두
밖으로, 밖에서 싸웁시다! 칼을 잡아요!”
나는 장작더미 위에 있던 칼을 집어 들었고, 그때 누군가도 칼을 들면서 내 손등을 쳐
상처가 났지만 별 느낌이 없었다. 나는 문쪽으로 뛰어가 밝은 햇빛으로 나왔다. 누군가 내 뒤를 바짝 따라왔다. 바로 내 앞에서, 박사님이 경사면을 따라 적을 쫓고 있었는데, 내 눈길이 닿는 순간, 박사님은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한 칼에 상대의 얼굴을 베어 쓸어뜨렸다. 선장님이
외쳤다.
“집
뒤로. 모두들, 집 뒤로!” 그런 소동 속에서 선장님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그 말에 따라 나는 기계적으로 동쪽으로 몸을 돌려, 칼을 든 채 통나무집 귀퉁이를 돌아
쫓아갔다. 그리고 곧 앤더슨과
맞닥뜨렸다. 악마 같은 소리를 지르며 그가 치켜든 단도가 햇빛에 번쩍였다. 나에게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나는 무섭다 뭐다 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옆으로 피하다 부드러운 모래를 헛디뎌, 곤두박질을 치면서 비탈 아래로 굴렀다.
내가 처음 문밖으로 나왔을 때, 우리를 끝장 내려는 듯 숲에 남았던 해적들이 떼지어 울타리를
기어오르고 것을 보았었다. 붉은 두건을 쓴 한 사내가 칼을 입에 문 채, 간신히 꼭대기에 올라 가랭이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앤더슨의 칼을 피할 때까지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고, 다시 일어나 자세를 가다듬고 보니, 붉은 두건은 아직도 가랭이를
걸치고 있었고, 또 한 해적도 울타리 위로 머리를 내민 채였다. 그러나
싸움은 단숨에 끝났고, 승리는 우리의 몫이었다.
내 뒤를 바짝 따라오던 그레이가, 나에 대한 일격에 실패한 거구의 갑판장을, 그가 다시 자세를 가다듬기도
전에, 한칼에 베어버렸다. 총안을 통해 집안으로 사격을 하던
또 다른 해적은 그 자리에서 총을 맞고 쓰러져,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권총을 손에 쥔 채 신음했다. 세 번째 해적도 내가 본대로 박사님이 일격에 처치했다. 울타리를
넘어 온 네 명의 해적 중 온전한 사람은 한 명 뿐이었지만, 눈앞에 닥친 죽음이 무서우니, 그도 칼을 팽개치고 다시 울타리를 기어올라 도망치고 있었다. 박사님이
외쳤다.
“발사! 집안에 있는 분들 발사! 밖에 있는 분들은 집안으로 몸을 숨기시오!”
하지만 그의 명령과는 달리 총을 쏜 사람이 없었고, 울타리를 기어오른 그 해적은 그대로
도망쳐 동료들과 함께 숲속으로 사라졌다. 도주 하는 데 3초나
걸렸을까, 해적들의 습격으로 남은 것이라고는, 울안에 네
명, 울 밖에 한 명 등 모두 다섯 명이 순식간에 쓰러진 일 뿐이었다.
박사님과 그레이 그리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통나무집으로
뛰었다. 살아 돌아간 해적들이 총을 버리고 갔으니 곧 다시 돌아올 것이고, 그래서 언제든지 또 싸움이 시작될 터였다.
이제 집 안의 연기도 어느 정도 사라지고, 승리를 위해 치룬 댓가가 금방 눈에 띄었다. 헌터가 지키던 총안 옆에서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그의 옆에는 조이스가, 총알이 머리를 관통하여 다시는 움직이질 못했다. 방 한가운데에서는
지주님이 선장님을 돌보고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창백했다. 트릴로니씨가 말했다.
“선장이
다쳤군.” 스몰릿 선장님이 물었다.
“놈들은
도망쳤나요?” 박사님이 대답했다.
“모두
줄행랑을 쳤오, 산토끼들 처럼. 하지만 다섯 놈은 다시는
뜀박질을 못할 거요.” 선장님이 외쳤다.
“다섯이라! 거 괜찮군요. 5대3이면
이제 남은 사람은 9대4이군. 처음보다 좋은 비율입니다. 그때는
19대7, 아니 그런 비율로 생각해서 우리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갑판에서 트릴로니씨의 총을 맞은 해적이 그날 밤 바로
죽어 해적들의 실제 숫자는 8명이었는데, 트릴로니 측에서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저자는 작가 노트에 적고 있다: 옮긴 이).
제V부
나의 바다 모험
제22장
나의 바다 모험 이야기
해적들의
재공격도 없었고, 숲으로부터 총격도 더이상 없었다. 선장님이
말한 대로 ‘해적들은 그 날짜 치 배급품을 톡톡히 받았고’, 우리는 요새를 차지한 채 조용히 부상자를
돌보고 저녁을 먹었다. 지주님과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밖에서 음식을 준비했는데, 박사님이 치료하는 부상자들의 앓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려와, 마음이
아파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싸움에서 쓰러진 여덟 명 가운데, 총안에서 총을 맞은 해적 한 명과 헌터
그리고 스몰릿 선장님 등, 오직
세 사람만 아직 숨을 쉬었고, 그 가운데 해적과 헌터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해적은 박사님이 수술하는 중에 죽었고, 헌터는 우리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의식을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우리 여관에서 뇌졸증으로 죽은 늙은 선장처럼 의식을 잃은 채, 가뿐 숨을 몰아쉬며 하루를 간신히 버텼지만, 충격으로 갈비뼈가 부러지고
두개골이 주저앉아, 그 이틑날 밤 조금 지나 아무런 흔적이나 소리도 없이, 창조주 곁으로 가고야 말았다.
선장님은 크게 다쳤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치명상을 입은 것이 아니었다. 앤더슨이--그가 먼저 선장님을
쏘았다--쏜 총알이 선장님의 어깨뼈를 부러뜨리고 폐를 스쳤지만, 심각하지는
않았다. 두 번째 총알은 그의 종아리 근육을 갈랐다. 회복은
확실했지만, 앞으로 몇 주 동안은 걷거나 팔을 움직여도 안되고, 말을
해야 하는 경우라도 해서는 안된다고 박사님이 말했다.
내 손마디에 난 상처는 별것 아니었다. 리브시 박사님이 고약을 바른 다음, 이를테면 덤으로, 내 볼을 살짝 잡고 흔들어 주었다.
식사 후 지주님과 박사님이 선장님 곁에 앉아 잠시 의논을 했다. 각자 심중의 생각을 말한
다음, 정오가 조금 지나, 박사님이 모자를 쓰고 권총 두
자루를 차더니, 허리에는 칼을, 주머니에는 지도를, 어깨에는 총을 메고 북쪽 울타리를 나아가, 나무들 사이를 당당하게
걸어갔다.
그레이와 나는 두 대장님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 안된다고 생각을 해, 그들에게서 좀 떨어진 통나무집 귀퉁이에 앉아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놀란 그레이가 입에서 담뱃대를 떼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했다.
“아니, 도대체, 리브시 박사가 미쳤나?” 내가 말했다.
“아니예요. 우리 가운데 저 분 만큼 제정신인 사람은 없어요.” 그레이가 말했다.
“음, 그래, 그럴지도 몰라. 그렇다면, 내가 미쳤다는 말이군.” 내가 대답했다.
“틀림없이
무슨 계획이 있을 거예요. 내 생각이 옳다면, 지금 벤 건을 찾아가시는 길일 겁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내 말이 옳았다. 한편, 한낮의 태양으로 집안은 숨막히게 더웠고, 울안의 모래 마당이 달구어지면서,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지글지글 끓는 더위 속에 앉아, 옷은 송진에 늘어붙고, 피로 물든 주변에 가엾은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어 무서운데다가 심한 구역질도 하던 나는, 싱그러운 소나무 향기를 맡으며 새들이
훨훨 나는 시원한 숲속을 걸어가는 박사님이 부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청소를 하고 저녁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내내, 통나무집이 싫어지고 박사님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점점 강해지더니 마침내 빵 자루 앞에서 보는 사람이 없게 되자, 탈출계획의 첫 단계로 코트 양쪽
주머니에 건빵을 가득 담았다.
나를 정신 나갔다고 할 독자도 있겠지만, 정말
터무니 없고 무모한 짓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힘 닿는대로 철저히 준비해서 계획을 실천하기로 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있더라도 그 빵은, 나를 굶주림으로부터 적어도
그 다음 날까지는 보호해 줄 터였다.
그다음 권총 두 자루를 챙기고 나니, 화약통과 탄알은 이미 가지고 있었던 만큼, 든든한 무장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속의 계획 자체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바다와
배가 정박한 만을 동서로 가르는 모래톱으로 가서, 그 전날 밤 눈여겨보았던 흰색 바위를 찾아내, 벤 건이 숨긴 보트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볼 참이었고, 그 일은 위험을 무릅쓸만 했다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 울 밖으로 나를 내보내지 않을 터였고, 그렇다면 몰래
무단이탈을 해야 하니, 방법이 나빠 떳떳하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소년에 불과한 내게 그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고 따라서 결심을 했다.
마침내 고대하던 일이 생겨 계획을 실천할 기회가 왔다. 지주님과 그레이는 선장님을 도와 다시 붕대를 감기에 바빴고, 해안선 쪽은 경계가 없어, 나는 재빨리 요새를 빠져나와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간 다음, 내가 없어진 것을 알아챈 동료들이 불러도 들리지 않을 만한 곳까지 멀리 벗어났다.
통나무집을 지키기에 온전한 사람이란 둘 뿐인데, 그들을
팽개치고 또 바보짓을 해, 먼저보다 훨씬 나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의 무단이탈처럼 그 계획은 우리의 생명을 구하게 된다.
히스파니올라가 정박한 만에서 볼 수 없도록, 만과 바다를 가르는 모래톱의 바다쪽을 걷기로 마음먹고, 섬의 동쪽 해안을 향해 곧장 갔다. 해가 있어 아직 더웠지만, 이미 늦은 오후였다. 높다란 나무숲을 헤쳐 가며, 암초에 끊임없이 부서지는 먼 파도소리와 나뭇잎이 흔들리고 가지들이 서로 부딪는 소리로, 바닷바람이 평소보다 강하다고 짐작했다.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한줄기 불었고, 조금 더 가 숲을 벗어나 바라보니, 푸른 바다가 펼쳐지며 수평선에는 햇빛이 반짝이고, 해안선을 따라 파도가 흰 거품을 일으키며 솟구쳤다가는 곤두박질을 했다.
보물섬 주변의 바다가 그렇게 평온한 것을 처음 보았다. 머리 위에는 태양이 빛나고, 숨을 죽인 대기와, 바다는 푸르고 잔잔했지만, 밤낮으로 표호豹虎하며 전 해변으로 몰려드는 그 위대한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란 섬 전체에 아무 데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쁨에 넘쳐 해변을 따라 걷다가, 남쪽으로 너무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어, 무성한 풀섭을 이용해 몸을 감춰 가며 조심스레 모래톱 위로 기어올랐다.
내 뒤쪽은 바다이고, 앞은 우리 배가 정박하고 있는 바다였다. 바닷바람은 스스로의 엄청난 힘에 쓸려간 듯 곧 잦아들었다. 그 대신
잔잔한 남풍, 남동풍이 번갈아 불면서 커다란 안개띠를 몰고 왔다. 해골섬에
가려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만은 처음 정박했을 때와 다름없이 잔잔했다. 히스파니올라는 돛대 꼭대기로부터 흘수선吃水線까지 거울 같은 바다에 그대로
비쳤고, 꼭대기에는 해적기가 걸려 있었다.
선측에 매 놓은 상륙용 보트 뒤쪽에 실버가 앉아 있었고--언제나 나는 그를 알아 보았다--히스파니올라의 선미 난간에 해적 두 명이 기대고 있었는데, 그중 붉은 두건을 두른 사람은 몇 시간 전 요새의 울타리 위에 가랑이를 걸치고 있던 자였다. 거의 1.5킬로미터나 떨어진 거리라서 무슨 내용인지 당연히 몰랐지만, 그들은 웃고 떠드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갑자기 머리털이 곤두서는
무시무시한 비명 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으나, 곧 앵무새 플린트의 목소리가 생각났고, 주인 팔목에 내려 앉는 화려한 깃털로 그 새임을 확인했다.
상륙용 보트는 곧 해변으로 향했고, 붉은 두건과 그의 동료는 갑판 아래로 사라졌다.
바로 그때, 스파이
글라스 너머로 해가 지고, 안개가 빠르게 깔리면서 본격적으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날 밤 안으로 보트를 찾으려면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덤불 너머로 보이는 흰 바위까지는 모래톱을 따라 아직 1킬로미터쯤 더 가야 했는데, 때로는 관목 속에 몸을 감추고 기어가기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
끝에 그곳에 도착했다. 거의 밤이 되어 거친 바위 표면에 손을 댔다.
바위 바로 밑에는, 무릅 높이로 자란 덤불과 모래 둑에 가린 아주 작은 구덩이가 있었는데, 그 속에서 푸른 잔디가 매우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 구덩이
한가운데에는 영국에서 집시들이 가지고 다니는 천막 같이 생긴, 염소가죽으로 만든 조그만 천막이 있었다.
구덩이로 내려가 천막 자락을 들어 올리고 보니, 거기
벤 건의 보트--손으로
만들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가죽 보트가 있었다. 거친 나무로 만든 조잡하고 일그러진 뼈대에다 염소
가죽을 입혔는데, 보트 안쪽에는 염소 털이 그대로 있었다. 내
몸에 견주어도 너무나 작았고, 정상적인 어른이야 당연히 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죽을 팽팽하게 펴려고 앞뒤 바닥에 각각 가로대를 하나씩 깔았고, 양
끝에 주걱이 달린 노가 하나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고대 영국인들이 만들었다는 가죽 보트를 본 일이 없었고, 훗날 다른 가죽 배를 본 후, 벤 건의 가죽 보트야 말로 아무리 공정히 평가한다고 해도, 인간이 만든 최악의 배로 최초였다는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아주 가볍고 운반이 쉬워, 좋은 점도 분명 있었다.
이제 보트를 찾았으니 내가 부린 말썽에 일단 보답을 했다고 할 수도 있었으나, 그동안 내게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고 이를 꼭 실천하겠다는 결심을 해, 설사
스몰릿 선장님이 반대했더라도 행동으로 옮겼을 것이다. 그 생각이란 다름 아닌, 어둠을 타고 히스파니올라에 몰래 다가가 그 닻줄을 끊어, 해류를 따라 멋대로 표류토록 해서 좌초를 시키는 일이었다. 그날
아침 우리에게 격퇴를 당하고 나서, 반란자들은 닻을 올려 바다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리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를 막아야 옳다는 생각을 했고, 히스파니올라를 지키는 해적들에게는 보트가 한 척도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그 일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쭈그리고 앉아 어둠을 기다리며, 건빵을 실컷 먹었다. 계획
실행을 위한 천재일우의 밤이었다. 안개가 하늘을 뒤덮었다. 마지막
땅거미가 지고, 보물섬에 칠흑 같은 밤이 드리웠다. 마침내
가죽 보트를 등에 메고 저녁 끼니를 때웠던 구덩이를 더듬더듬 기어나오니, 만 전체에 오직 두 개의 불빛만
보였다.
하나는 해변가의 화톳불로, 불 주변에 해적들이
둘러앉아 패배를 잊으려는 듯 흥청댔다. 어둠속에 희미하게 비치는 또 다른 불빛으로 미루어, 닻을 내린 배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히스파니올라는 썰물이 일면서 빙빙 돌았고--내가
보았을 때 마침 뱃머리가 나를 향했다--선실에만 불이 켜졌는데, 그
불빛이 선실 뒷창문을 통해 안개에 강하게 반사된 것을 본 것이다.
썰물이 빠지기 시작한 후 시간이 좀 흐른 다음, 질척거리는 모래바닥을 발목까지 잠겨가며
걸어 가, 파도가 밀리는 물가에 이른 다음, 용기를 내어
조심조심 몇 걸음 물로 들어가서, 가죽 보트를 띄웠다.
제23장
표류
그 가죽 보트는--타기 전에 여러번 살펴본 대로--물에 잘 뜨고 거친 파도에도 끄떡없어, 내 키와 체중의 사람에게는 매우 안전했지만, 다루기가 매우 까다롭고 변덕스러웠다. 그런대로 잘 나갔지만, 언제나 노를 저어가는 방향에서 벗어났고, 툭하면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벤 건조차도 ‘그 버릇을 알기 전에는 다루기가 매우 야릇한’ 배라고 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정말 그 버릇을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든 잘나갔는데, 내가 뜻하는 방향만은 아니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 히스파니올라에 이르지를 못했고, 해류가 아니었더라면 그 배에 결코 닿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노는 마음대로 저을 수 있어 해류를 따라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니, 해류를 따라 흐르는 히스파니올라가 손에 잡힐 듯 바로 그곳에 있었다.
처음에는 어두움을 배경으로 검은 윤곽으로 보이던 히스파니올라는, 돛대와 선체가 조금씩 보이는가 했더니, 닻줄이 금방(바다로 나갈수록 해류가 빨라져 금방 다가간 듯 생각 되었다) 옆에
보여 꽉 붙잡았다.
닻줄은 교수대의 밧줄처럼 팽팽했는데, 강한
물살이 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물결이 사방으로 배에 부딪혀 거품을 내면서, 산 속의 작은 계곡물처럼 소리를 냈다. 칼로 줄을 자르기만 하면
히스파니올라는 해류를 따라 유유히 흘러갈 참이었다.
그런대로 일이 잘 되어갔지만, 갑자기 닻줄을
자르면 마치 뒷발질하는 말 만큼이나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그런식으로 무모하게
닻줄을 자르면, 십중팔구 줄에 맞아, 나와 가죽 보트는 공중으로
날아갈 터였다.
그래서 일단 행동을 멈췄고, 만일 행운이 다시 따르지 않았다면 계획을 포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불어오던 부드러운 남풍, 남동풍이 해가 지자 남서풍으로
바뀌었다.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줄기 강한
바람이 불어 히스파니올라를 해류 쪽으로 밀어내자, 반갑게도 닻줄을 잡은 손이 느슨해지며 잠깐 물에 잠겼다.
그 순간 결심을 하고 칼을 빼, 이빨로 날을 편 다음,
닻줄을 한가닥씩 잘랐고, 두 가닥만 남게 되자 마침내 배가 흔들거렸다. 그래서 바람이 다시 불어 줄이 느슨해지면 남은 가닥을 자르리라 생각하며 조용히 기다렸다..
그동안 선실로부터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밧줄 자르기에 골몰하다 보니 귀를 기울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할일이 없다보니, 그제서야 신경이
쓰였다.
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옛날 플린트 선장의 포수였던 조타수 이스라엘 핸즈였다. 다른 목소리야 물론 내가 잘 아는 붉은 두건이었다. 내가 엿듣고
있는데도, 한사람이 취한 목소리로 떠들며, 선실 뒷문을 열고
빈병인 듯한 물건을 내버리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취해 계속 마셔대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냥 취한 게 아니라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있었다. 서로
욕설을 퍼붓고 있어, 분노가 결국은 주먹다짐으로 끝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간히 싸움을 끝내고 목소리를 낮춰 웅얼거리다가는 또 시작하고, 결과
없이 또 잠잠해지곤 했다.
해변에 지른 커다란 화톳불이 해안가 나무들 사이로 따듯하게 비쳤다. 누군가 무미하고 단조로운 흘러간 뱃노래를, 매 귀절이 끝나는 대목마다
떨리는 목소리로 자지러지듯 불렀는데, 부르는 자가 지쳐야 그만둘,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계속 될 듯한 노래였다. 배를 탄 후 여러번 들어 기억한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살아 남은 사람은 오직 한 명,
배를 탄 사람은 일흔다섯.”
그 노래는 그날 아침, 그렇게 무참히 동료들을
잃은 해적들에게는 더없이 어울리는 구슬픈 노래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본 대로, 해적들은 그들이 지나온 바다처럼, 실제로는 모두 감정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때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어둠속에서 배가 좀 더 가까워졌고, 잡은 닻줄이 다시 느슨해져, 나는 젖먹던 힘을 다해 마지막 가닥을
잘랐다.
바람이 가죽 보트를 어떻게 하지 못했음에도, 하마터면 나는 히스파니올라의 뱃머리에 부딪힐 뻔했다. 그
순간 조류에 쓸린 선체가 제자리에서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언제라도 내 보트가 침몰할 수 있어, 필사적인 힘을 쏟았다. 곧장 저어 가면 충돌할 수도 있었으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 히스파니올라의 뒤쪽으로 저었다. 마침내
위험을 벗어났고, 마지막 힘을 다하는 순간 선미의 난간에 걸려 있던 밧줄이 손에 와 닿았다. 그 줄을 재빨리 낚아챘다.
왜 그래야 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단순한 본능에서 그랬겠지만, 일단 낚아채자 그대로 타고 올라가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고, 선실
창문으로 엿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줄을 기어올라 충분히 다가갔다고 판단이 서자, 위험을 무릅쓰고 상체를 드니 선실의 지붕과
내부 일부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히스파니올라와 내 가죽 보트는 매우 빠른 물살을
타고 있었다. 실제로 화톳불에 이미 다가간 상태였다. 히스파니올라도 지껄인다는 선원들의 말대로, 수많은 물결에 부딪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끊임없는 물보라를 일으켰다. 창문을 들여다보기 전에는, 왜 보초를 안 서는지 이해를 못했다. 그러나 들여다 보니 알만 했다. 흔들리는 배에서 얼핏 보아도 역력했다. 핸즈와 그의 동료가 서로 맞붙어 목을 조이며 죽자사자 싸우고 있었다.
나는 물로 떨어질 뻔하여 곧 보트로 다시 내려와 자리에 앉았다. 눈에 띈 것이라고는 희미한 등불아래 어른거리는 시뻘건 두 얼굴 뿐이었고, 나는
다시 어둠에 적응하려고 눈을 감았다. 끊임없이
부르던 그 노래가 마침내 끝나면서, 숫자가 줄어든 화톳불가의 해적떼가,
내가 그토록 자주 들었던 노래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의 궤짝 위에 열다섯 사람-
요-호-호, 그리고 럼 한
병!
살아 남은 사람에겐 술과 저주를-
요-호-호, 그리고 럼 한 병!”
그때 나는 히스파니올라의 선실에서 벌어지는 술판과 싸움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죽 보트가 한쪽으로 기울어 깜짝놀랐다. 동시에
심하게 흔들리며 항로를 벗어나는 듯했다. 속도가 이상하게 빨라졌다.
바로 눈을 떴다. 내 주위에 인 잔 파도가
찰랑대며 희미한 빛을 냈다. 히스파니올라가
일으킨 소용돌이를 따라가며 빙빙 도는 내 보트에서 보니, 히스파니올라는 항로를 벗어나는 듯했고, 몹씨 흔들리는 돛대가 어둠속에 보였다. 더 볼 필요도 없이, 틀림없이 남쪽으로 표류하고 있었다.
어깨 너머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바로 내 뒤에 화톳불이 타고 있었다. 해류의 흐름이 직각으로 바뀌어, 커다란 히스파니올라와 요동치는 내 조그만 가죽배가 그 해류를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해류는 점점 더 빨리, 더 큰 파도와 점점 더 커지는 물소리를 내면서, 좁은 해협을 소용돌이 치며 지나, 대양으로 흘러갔다.
내 눈앞에서 히스파니올라가 갑자기 좌우로 요동을 치더니
옆으로 20도 가량 항로를 빗겼다. 그와 동시에 갑판으로부터
고함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갑판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는 소리가 쿵쿵거렸고, 마침내 그 두 주정뱅이가 싸움을 중단한 것으로 보아, 닥친 재난을
알아차린 듯했다.
나는 그 가련한 보트 바닥에 납짝 업드린 채,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 해협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틀림없이 험한 암초에 부딪힐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 모험은 순식간에 끝날 것이 분명했다. 죽는 것이야
받아들인다 해도, 죽음에 다가가는 내 운명을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었다.
큰 파도가 끊임없이 내동댕이치는 가죽 보트 안에서 수시로 물보라를 뒤집어 쓰며, 다음 파도가 덮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속에 수 시간을 누워 있어야 했다.
피로가 점점 엄습해 왔다. 사지가 마비되고 때때로 정신도 혼미해지면서, 마음까지 공포에 떨며, 요동치는 보트에 누워 마침내 잠이든 채, 그리운 우리집 애드미럴 벤보우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
제24장
가죽 보트의 항해
잠에서 깨어 나니 날이 밝았고 나는 보물섬 남서쪽 바다를 표류하고 있었다. 해는 떳으나
높다란 스파이
글라스에 가려 보이질 않았는데, 바다까지 뻗어 내려간 험악한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홀보우라인(돛줄이라는 뜻: 옮긴 이)곶과 뒷돛대봉이 지척에 있었는데, 뒷돛대봉은 헐벗은데다 거무칙칙했고, 높이가 15미터 가량되는 홀보우라인곶 절벽
밑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떨어져 널려 있었다. 나는 4백미터
정도 떨어진 바다 위에 있었는데, 노를 저어 상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포기를 하고 말았다. 절벽 밑 바위에 파도가 부딪혀 용솟음치며 포효했다. 엄청난 물보라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쉴새 없이 솟구쳤다가 떨어졌다. 무모하게
상륙하다 거친 해안에 내동댕이쳐져 죽거나, 거친 절벽을 기어오르다 힘이 다해 헛수고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평평한 바위 위를 떼지어
기어 다니거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다로 뛰어드는 거대한 몸집의 끈적끈적한 괴물들이--이를테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흐느적거리는 달팽이랄까--칠팔십 마리씩
무리를 지어, 바위가 울리도록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훗날 그 동물들이 전혀 해롭지 않은 바다사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그
괴물들을 본데다 또 해변도 거칠고 파도도 높아, 그곳으로의 상륙이 전혀 마음 내키지 않았다. 그런 위험을 겪느니 차라리 바다에서 굶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옳다꾸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홀보우라인곶 북쪽으로 긴 해안선이 있는데,
그곳에는 썰물 때 들어나는 긴 황금빛 모래사장이 있었다. 모래사장 북쪽에는 또 다른 곶이--지도에는 우즈곶이라고 표시 되어
있다--해안까지 뻗어내려 온 소나무 숲에 가려 있었다.
나는 실버가 말한, 보물섬
서쪽 해안선을 끼고 북쪽으로 흐르는 해류를 생각했는데, 이미 그 물길을 따라가고 있음을 알고는, 홀보우라인을 포기하고 보다 안전하게
보이는 우즈곶에 상륙하기 위해 힘을 아끼기로 했다.
파도가 높았지만 사납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남풍이 해류와 같은 방향으로 계속 불어, 너울이 일었다가는 그냥 내려앉았다.
만일 바람이 해류와 반대 방향으로 불었다면, 나는 이미 물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그 조그만 보트는, 놀라우리 만치 안전하고 편했다. 바닥에 누워 이따금씩 배 언저리를 올려다 보면,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며
나를 덮칠 듯했다. 그렇지만 보트는 튀어오르듯 솟구쳣다가는, 새처럼
가뿐히 파도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나는 용기가 솟아 노를 저으려고 일어났다. 그런데
이런 류의 가죽 보트란 무게중심이 조금만 바뀌어도 격렬하게 요동치기 마련이다. 내가 조금 움직이자마자, 곧 얌전하던 자세를 잃고 가파른 파도를
따라 곤두박질을 쳐 현기증이 났고, 물보라가 뱃전을 때리며 뒤이어 파도가 덮쳤다.
물벼락을 맞아 겁이나 다시 자리에 앉자, 보트가 제 방향을 찾아서인지 심한 파도 속에서
나도 다시 안정을 찾았다. 보트는 분명히 간섭을 싫어했고, 그렇다면
그 가는 길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상륙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무서웠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우선 모자를 벗어, 조심조심 보트 안의 물을 퍼냈다. 그런 다음, 보트 언저리를 살피며, 어떻게 그리 거침없이 파도를 헤치며 왔는지
곰곰 생각해보았다.
해변이나 배의 갑판에서 보면 파도는 무슨 번쩍이는 거대한 산이 출렁이는 듯 보이지만, 육지의 여느 산들처럼 파도에는 수많은 봉우리와 편편한 평야, 계곡이
있음을 깨달았다. 가죽 보트를 그냥 내버려두니까 빙글빙글 돌며, 이를테면
낮은 계곡을 따라, 가파른 비탈과 높은 물결을 요리조리 피하며 나아갔다.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이제야
알겠구나. 가만히 누워 있어야지 균형을 깨면 안돼. 하지만
파도가 잔잔할 때 가끔 한두 번 노를 대, 육지를 향하도록 해 주어야 해.” 당장 그렇게 했다. 팔베개를 하고 누웠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불편했지만, 보트가 해안을 향하도록 가끔 노를 들어 살짝 물에 댔다.
매우 지루하고 시간이 걸렸지만, 상당한
거리를 갔다. 동쪽으로 수백 미터를 가 우즈곶으로 접근했지만, 틀림없이 지나쳐 버릴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나는 섬에서 머지 않은 바다에 있었다. 미풍에 흔들대는 시원한
초록색 우듬지들이 눈에 들어와, 다음 곶에서는 반드시 상륙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무엇보다 목이 타기 시작해, 상륙이 시급했다. 머리위의
이글거리는 태양과, 파도에 반사되는 수천수만의 햇빛, 내몸을
적신 후 마르는 바닷물, 소금으로 타들어가는 입술 등 모두가 어우러져 목이 타고 머리도 깨질 듯했다. 바로 앞에 숲이 보이니 물을 마시고 싶어 거의 병이 날 정도였지만, 해류에
휩쓸려 그 지점을 그냥 지나 넓은 바다로 나오니, 물 생각이 싹 가시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앞 1킬로미터쯤에, 히스파니올라가 돛을 올리고 있었다. 틀림없이
해적들에게 붙잡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목이 타니,
붙잡히는 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몰라 한참을 망서리며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히스파니올라는 주돛과 두 개의 3각돛을 폈는데, 아름답고 하얀 돛들이 햇빛을 받아 눈이나 은처럼 빛났다. 모든 돛을
올린 것이 첫눈에 들어왔다.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해적들이
섬을 한 바퀴 돌아 만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짐작 됐다. 그러더니 이내 서쪽으로 뱃머리를 돌리는 것을
보니, 나를 알아보고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했다. 그때 마침
역풍이 불자 히스파니올라는 그자리에서 돛을 펄럭이며 한동안 꼼짝을
못했다. 내가 한마디했다.
“얼빠진
사람들 같으니. 모주꾼들처럼 아직도 분명 취했어.” 그리고 스몰릿 선장님이라면 얼마나 엄하게 꾸짖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히스파니올라는 조금씩 움직이더니, 뱃머리를 바꾸자
다시 바람을 받아 빠르게 나아가다, 바람이 또 죽자 다시 꼼짝을 못했다(범선이 역풍을 거슬러 항해하려면 지그재그로 가야 돛이 바람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좌현, 우현이 번갈아 가며 바람을 받게 되고, 이 바람의
힘으로 느리지만 앞으로 전진하게 된다: 옮긴 이). 움직였다가는
서고, 계속 그렇게 반복했다. 전후좌우 종잡을 수 없이 나아가다가는, 매번 돛을 축 늘어뜨리며 멈췄다. 분명 배를 조종하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 취해서 인사불성이거나 아니면 모두
탈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만일 내가 배에 오를 수 있다면,
스몰릿 선장님에게 배를 돌려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내 가죽보트와 히스파니올라는 해류를 따라 같은 속도로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처럼 요동치며 변덕스럽고 또 번번히 오랜 시간 꼼짝을 않으니, 히스파니올라는 흘러가기는 했으나
멀리는 가지를 못했다. 마음 먹고 노를 저으면 틀림없이 잡을 수 있었다. 해볼만한 모험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뱃머리 계단 옆의 물탱크를 생각하니
더욱 용기가 솟았다.
일어나 앉는 순간 물보라가 또 덮쳤지만, 이번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저으며, 떠내려가는 히스파니올라를 힘껏
쫓았다. 큰 파도를 뒤집어쓰면, 노젓기를 중단하고 새가슴을
졸이며 물을 퍼내야 했지만, 파도에 점점 읶숙해졌고, 이따금
뱃머리를 때리는 물거품을 얼굴에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 배로 재빨리 다가서고 있었다. 덜커덕거리며 헛도는 키의 반짝이는 놋쇠 손잡이가 보였고, 갑판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버려진 배라고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래 선실에 취해 누어 있을 것이고, 그
경우 문을 잠그기만 하면 배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터였다.
그 배는 한동안 내게 아주 못된 짓을--꼼짝않고 가만히 있는 짓을--했다. 거의 정남正南을 향하긴 했지만, 언제나 정방향正方向에서 벗어났다. 방향을 벗어날 때마다 돛도 그
쪽 바람을 받아 금방 방향을 바꿨다. 못된 짓이라고 말한 이유는, 꼼짝을
안하는 듯 해도, 해류의 강한 유속과 바람의 힘을 받아, 폿砲소리 만큼이나 펄럭이는
돛 소리와 갑판을 구르는 요란스러운 대포 바퀴 소리를 내면서, 히스파니올라는 나로부터 계속 멀어져 갔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바람이 잠시
약해지면서, 해류를 따라 천천히 흐르던 히스파니올라가 제자리를 돌면서 선미가 내쪽을 향해서 보니, 선실 창문이 활짝 열린
채 대낮인데도 식탁 위의 등불은 아직 켜져 있었다. 주돛은 깃발처럼 축 늘어진 채였다. 배를 미는 힘은 해류 뿐이었다.
잠시 거리가 벌어졌지만, 다시 따라잡으려고
힘을 냈다.
백미터쯤 다가갔을까, 바람이 갑자기 다시 불었다. 좌현
쪽으로 불어 온 바람을 받아 돛이 활짝 펴지면서, 선체가 기우뚱하더니,
제비처럼 날쌔게 다시 미끄러졌다.
그것을 보고 낙담을 했지만 나는 곧 한숨을 놓았다. 배가 빙 돌자 선측이 나를 향했고, 계속 빙빙 돌면서 점점 거리가 가까워졌다. 배 앞에 이는 흰 파도가
보였다. 내 가죽 보트에서 올려다 보니 히스파니올라는 엄청나게 컸다.
그때 갑자기 위험이 닥쳤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생각할 수도, 어떻게 할 겨를도 없었다. 내 보트가 파도를 타는 순간 또 다른
파도가 일면서 히스파니올라가 내 쪽으로 기울었다. 제1사장(第1斜檣. 선수 앞에 비스듬하게 누운 돛대. 여기에 앞돛대를 지지하는 밧줄을 매고, 삼각돛을 달기도 한다: 옮긴 이)이 머리 위에 보였다. 물이
덮친 보트를 발로 차면서 벌떡 일어났다. 한손으로 삼각돛줄을 잡자, 지삭(돛대를 고정시키는 굵은 밧줄: 옮긴 이)과 아딧줄(바람의 방향을 맞추기 위해 돛을 매어 쓰는 줄: 옮긴 이)사이에 발이 끼었다. 그렇게
매달려 허덕이고 있는데, 둔탁한 소리가 들려 내려다 보니, 배가
보트를 덮치며 산산조각을 내버리고 있었고, 따라서 나는 다시 히스파니올로 오를 수밖에 없었다.
제25장
해적 깃발을 내리다
제1사장斜檣에 매달리는 순간 3각돛이 펄럭하더니, 다시 불어 온 바람을 받아 폭음을 내며 활짝 펴졌다. 그 충격으로
배가 밑창까지 흔들렸고, 다음 순간 다른 돛들은 그대로인데도, 3각돛은
바람이 빠지면서 축 늘어졌다.
그 충격으로 나도 거의 바다로 빠질 뻔했다. 제1사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 지체 없이 갑판까지 기어가, 그 위로 머리를 박으며 떨어졌다.
나는 선수루 앞에 떨어졌고, 펴진 주돛이 가려 후갑판의 일부만 보였다.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반란을 일으킨 후 닦지를 않아 갑판에는
많은 발자국들이 있었고, 배수구들 사이에는, 목 부러진 빈병들이
마치 살아 있듯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역풍이 불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삼각돛이 요란스레 펄럭거리고, 키가 헛돌면서, 선체가 요동치며 한쪽으로 기울었고, 그와 동시에 도르래의 줄이 신음하듯 소리를 내면서, 주돛대의 활대가
안쪽으로 돌자, 후갑판이 전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틀림없는 해적 두 명이 보였다. 한 사람은 붉은 두건을 등어리까지 늘어뜨린 채, 십자가에 못 박힌 자세로 팔을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뻗고 있었는데, 입을
헤 벌려 이빨이 보였다. 이스라엘
핸즈는 난간에 기댄 채 턱을 가슴에 묻고는, 손바닥을 갑판에 대고 있었는데, 그 거친 얼굴이 양초처럼 창백했다.
바람부는 대로 돛의 방향이 바뀌자, 활대도
변덕스레 돌면서, 마침내 힘에 겨운 돛대가 삐걱 소리를 내더니, 배가
미친 말처럼 요동치면서 잠시 앞으로 나아갔다. 물보라가 난간을 덮치고 거친 파도가 뱃전을 때렸다. 파도가 거칠다보니 이미 바다밑으로 가라앉은 초라하고 못 생긴 내 보트보다, 그
크고 아름다운 배가 더 요동을 치게된 것이다.
배가 요동칠 때마다 붉은 두건은 이리저리 뒹굴었지만--정말 무서운 광경이었다--그런 흔들림 속에서도, 그 자세나 이를 꽉 물고 웃는 듯하는 모습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핸즈 역시 배가 흔들릴 때마다
조금씩 자세가 흩어지더니, 갑판 위에 엎어져 선미 쪽으로 미끄러져 가며 얼굴이 점점 작게 보이다가, 마침내 귀와 곱슬거리는 구렛나루만 보였다.
그와 동시에 그들 주변의 갑판에 번진 검붉은 피자국도 보여, 취한 상태에서 싸우다가 서로
죽인 것이 분명했다.
이런 저런 생각 속에 잠시 조용히 보고 있자니 배가 다시 얌전해졌고, 그때 이스라엘 핸즈가 가냘픈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조금 뒤치고는, 내가 처음 보았던 장소로 몸을 뒤틀며 돌아갔다.
기력이 다한 채 고통스러워 하는 소리와 늘어뜨린 턱에 벌린 입을 보니 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사과통 안에서 들은 말이 생각나, 불쌍한 생각이 사라졌다.
선미 쪽으로 걸어가 주돛대에 이르렀다. 내가 비웃듯 말했다.
“핸즈씨, 내가 배에 올랐소이다.”
그가 힘없이 나를 보았지만, 기운이 빠져 놀란 표정도 못 지었다. 고작 한마디를 중얼댔다.
“브랜디를”
그가 죽어 가니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갑판을
또 가로막은 활대 밑을 지나 계단을 내려가 선실로 갔다.
선실은 난장판이었다. 지도를 찾으려고 했는지, 모든
설합이 부서진 채 열려 있었다. 악당들이 지내는 천막 주변의 진흙탕을 그대로 밟고 와, 마시고 떠들면서 더럽힌 마루 바닥이 두꺼운 흙으로 덮여 있었다. 네
귀퉁이에 금박 구슬로 쇠시리를 한 하얀 벽에는 더러운 손자국이 묻어 있었다. 배가 흔들리자 수십 개의
빈병들이 서로 부딪는 소리를 냈다. 식탁 위에는 박사님의 의학서적 한 권이 반은 뜯겨져 나간 채로 있어, 담배불 붙이는 데 쓰인 것이 아닌가 했다. 그런 가운데 아직 켜 놓은 등 하나가 연기를 내며, 어둠침침하게 비치고 있었다.
창고로 가 보았다. 술통이 모두 사라지고, 수많은
빈병들이 나뒹굴었다. 반란을 일으킨 후 모두 술에 취해 산 듯했다.
샅샅이 뒤져 보니, 브랜디가--핸즈를 위한--조금 남은 병이 하나 눈에 띄었다. 내 몫으로 약간의 건빵과 말린
과일, 커다란 건포도 덩어리, 그리고 치즈 한 조각을 챙겼다. 그것들을 가지고 갑판으로 돌아가 내 몫은 키 뒤에 감춘 후, 핸즈 몰래 물통으로 가서 물을 싫컷 마셨다. 그런 다음 그에게 브랜디 병을 건넸다. 한 질(약 1/7리터: 옮긴 이)이나 마신 후에야 병에서 입을 떼었다. 그가 말했다.
“아이고, 제기랄, 정말 마시고 싶었네!”
나는 이미 구석에 앉아 요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많이
다쳤나요?” 그가 웅얼거렸다. 아니 신음을 했다. 그가 말했다.
“그
의사가 배에 있다면, 한 두어 번 치료로 끝났을 텐데. 허나
난 운이 없어. 네가 보듯이 말야. 그 게 내 팔자야.” 붉은 두건을 가리키며 그가 덧붙였다.
“저
허깨비 인간 말야, 뒈졌지 아마. 어쨌던 저치는 뱃놈이 아니었어. 그런데 도대체 넌 어디서 왔니?” 내가 대답했다.
“핸즈씨, 난 이 배를 장악하려고 탔어요.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두말 말고 나를 선장으로 모셔요.”
그가 씁쓸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나를 보았다. 볼에 핏기가 다시 돌았지만, 아직 기운이 없는 듯했고 배가 흔들리는대로 계속 쓰러졌다 일어났다 했다. 내가
계속했다.
“그런데
핸즈씨, 저 깃발은 용서할
수 없어요. 미안하지만, 내리겠어요. 저 깃발보다야 차라리 없는것이 나아요.”
가로막은 활대를 돌아 깃대로 가서, 그 꼴도 보기 싫은 해적깃발을 내려 바다로 내던졌다. 모자를 벗어 흔들며 내가 외쳤다.
“국왕폐하
만세. 선장 실버는 이제
끝!”
턱을 내내 가슴에 묻은 채, 그는 매섭고 음흉한 시선을 보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호킨스 선장, 지금 상륙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텐데, 그에
관해 얘기를 나누자구.” 내가 대답했다.
“암, 그렇구말구요. 그런 생각 간절하지요. 말해 보세요.”
나는 다시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그가 힘없이 시체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친구는 원래 이름이 오브라이언인데,
아일랜드 상놈이야. 만으로 돌아가려고 우리 둘이 돛을 올렸지. 이제 저렇게 죽어버렸으니--개숫물 빠지 듯 말야. 누가 이 배를 몬다? 글쎄 말이다.
내가 일러주지 않으면, 자네도 어쩔 수 없어. 그런데, 이봐, 먹을 것 마실 것, 그리구
상처 싸맬 헝겁이나 한 조각 주면, 배 모는 방법을 가르쳐 줄 께. 이걸
서로 약속하구, 각자 책임을 지자구.” 내가 말했다.
“한가지 말할 게 있어요. 캡틴 키드 만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녜요. 북쪽 만으로 들어가 눈에 안 띄게 배를 대고 싶어요.”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된 거나 다름없어. 암, 난 강물에서나 어기적거린 멍청한
뱃놈이 아니라구. 나도 누깔이 있는데, 그렇지? 자네에게 졌을 뿐이지. 이제 명령만 내리라구. 북쪽 만이라구 했지? 아무렴, 내
맘대로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제기랄! 사형대로 배를
몰고 가는 한이 있더라도 자네를 돕겠어, 돕겠다구.”
그의 말은 얼마간 그럴 듯했다. 우리는 당장 약속했다.
바람이 불자 곧 보물섬 해안선을 따라 쉽게 히스파니올라를
몰면서, 점심 전에 섬의 북쪽 끝을 돌아, 물이 차기 전
북쪽 만으로 깊숙히 들어가 탈없이 배를 댄 다음, 물이 잔잔해지면 상륙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키를 고정시킨 후 어머니가 주신 부드러운 비단 손수건을 보관한 궤짝이 있는 선실로 내려갔다. 나의
도움을 받아 핸즈는 그 수건으로 칼을 맞은 넓적다리의 커다란 상처를
싸맨 후, 약간의 음식을 먹고 브랜디를 몇 모금 마시자 눈에 띄게 원기를 회복하면서, 꼿꼿하게 앉아 크고 분명한 말투로 떠들어 대,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보였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큰 도움이 되었다. 새가 날듯 바람을 등지고 미끄러지니, 해안선이 빠르게 지나가며 눈앞의 광경이 순간순간 바뀌었다. 해안가
절벽지대가 곧 시야에서 사라지자, 지대가 낮아지면서 키작은 소나무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는 모래사장이
보였는데, 그곳도 곧 통과를 해서, 섬의 북쪽 끝인 바위언덕을
돌았다.
배를 모니 의기양양했고, 청명한 날씨와 변화무쌍한 해안 풍경에 마음을 빼았겼다. 마실 물도 충분하고 먹을 것도 많아, 혼자 떨어져 무섭고 괴로왔던 내 마음은, 이제 내가 이룬 엄청난 성과로 인해 차분히 가라앉았다. 더이상 바랄 것이 없었지만, 코웃음 치듯 나를 보는 핸즈의 눈빛과 그의 얼굴을 떠나지 않는 야릇한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고통스럽고 기운이 다한 미소였지만--늙고 초췌한 남자의--한가닥 비웃음이, 배신의 그림자가 깃든 그 교활한 눈초리가 나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26장
이스라엘 핸즈
우리가 원한대로 바람이 불어, 서쪽으로 뱃머리를 향할 수 있었다. 섬의 북동쪽 끝을 돌아 북쪽 만의 어귀에 쉽게 도착했다. 다만 닻이
없어 정박을 못하고, 밀물이 더 들기를 기다렸다가 갯가에 대기로 하니 시간 여유가 많았다. 조타수인 그가 배를 똑바로 대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여러번 시도를
해서 배운 다음, 둘이 조용히 앉아 음식을 먹었다. 그가
예의 마음에 걸리는 미소를 지으며 마침내 한마디했다.
“선장, 여기 죽어 자빠진 늙다리 오브라이언
말야, 자네가 그 송장을 바다에 버렸으면 하네. 내가 별나게
까다로운 것도 아니고 또 이놈을 해치운 일도 내 책임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어때, 갑판에 내버려두자니 보기 안 좋지?” 내가 말했다.
“난, 힘도 없구요, 하고 싶은 일도 아녜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가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짐, 히스파니올라는 운이 나쁜 배야. 이 히스파니올라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죽었지. 우리가 브리스틀에서 배를 탄 이래, 가엾은
뱃사람들이 저 세상으로 갔어. 이보다 더 재수 없는 배를 본적이 없다구. 이 오브라이언을 좀 봐. 지금 그는 죽었어. 그렇지? 음, 난 글을 모르는데, 자넨 읽고 쓸 수 있는 젊은이니, 솔직히 말해 봐. 죽은 사람은 그냥 내내 죽는 것인가 아니면 다시
살아 나는가?” 내가 대답했다
“핸즈씨, 육체는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못 죽이지요. 이미
아실텐데요. 오브라이언은
저세상으로 갔고, 아마 지금 우리를 보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가 말했다.
“아! 그렇군. 참 불행한 일이야. 그래서
살인은 시간 낭비인 거 같아. 어쨌던 내 경험 상, 귀신들이란
대체로 말이 없어. 무서울 거 없다구, 짐. 자아, 자네가
거리낌 없이 말을 했으니 말이네만, 선실로 내려가 내게 하나 가져다주면--음, 왜 이렇게 다리가 후둘거리지!--고맙겠네.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는데 음, 짐, 포도주 한 병만 가져다
주게. 브랜디는 말이야, 너무 독해서 골이 아파.”
조타수의 더듬는 말이 어딘가 어색했고, 브랜디보다는 포도주가 좋다는 말을 전혀 믿을 수가
없었다. 모두 핑계였다. 내가 갑판을 떠나 줬으면 하는 눈치가
분명했지만, 그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내눈을 똑바로
보지도 않았다. 여기저기, 위 아래를 두리번거렸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죽은 오브라이언을
흘낏 보기도 했다. 내내 웃음을 띄는 얼굴에다 뭔가 감추는 듯한 말투와 허둥대는 태도로 보아, 무슨 흉계인지를 꾸미고 있음을 어린애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곧 대비책을 마련하고, 어쨋던 나는 유리한 고지에 있었으므로, 그런
천하 멍청이에게 내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내색을 끝까지 안 했다. 내가 물었다.
“포도주라고요? 거 좋군요. 백포도주요 아니면 적포도주요?” 그가 대답했다.
“고맙기는
마찬가지지, 친구. 맛이 있고 양만 많으면 되지, 뭐 다른 게 필요 있겠어?” 내가 대답했다.
“알았어요. 핸즈씨, 포르토(품질 유지를 위해 발효전 브랜디를 첨가한 포르투갈산 적포도주: 옮긴
이)를 가져오겠어요. 그런데 찾아봐야 하니 시간이 걸리겠네요.”
그렇게 말하고는, 발을 있는 대로 쿵쾅거리며
선실로 가는 계단을 내려간 다음, 신발을 벗어 든 채 복도를 돌아 계단을 다시 올라가, 갑판 위로 머리를 내밀고 엿보았다. 거기서 그가 나를 기다리며 지켜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아주 조심을 했다. 그에 대해 품은 내 의심은 운이 나쁘게도 사실이었다. 그가 손을 집고 무릅을 꿇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을 때 다리가
몹씨 아픈게 분명했지만--억지로 참는 신음 소리가 들렸다--갑판을
가로질러 재빨리 건너는 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좌현 배수구에 이르더니,
밧줄 타래 안에 숨겨놨던 긴 주머니 칼, 아니 피가 묻어 손잡이가 검게 변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잠시 칼을 들여다 보던 그는, 아래턱을 밀어보기도
하고 칼끝을 손에 대보기도 하더니, 서둘러 윗옷 안주머니에 감추고는 원래 기대 앉았던 난간으로 재빨리
돌아갔다.
더 이상 알 필요가 없었다. 이스라엘은 몸을 움직일 수가 있고, 이제
칼도 가졌으니, 나를 죽이지 못해 그렇게 안달을 했었다면, 이제
내가 희생 될 것이 분명했다. 나를 죽인 다음 그가 할 일은--북쪽
만으로부터 그의 동료들이 있는 늪지까지 몸을 질질끌면서라도 가던가, 아니면 대포를 쏘아 동료들의 구조를
기다리던가--내가 말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가지, 우리 두 사람은 배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같아, 그 점에서는 그를 믿을 수 있었다. 배가
다시 떠날 때 많은 일을 피하려면, 가능한 한 손상을 시키지 말고 안전한 곳에 정박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같았다. 그때까지는 내 목숨도 안전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계속 바쁘게 움직였다. 선실로
살금살금 돌아가, 신발을 다시 신고, 손닫는 대로 포도주
한 병을 집어 들고는, 그것 때문에 늦었다는 듯 갑판으로 올라갔다.
핸즈는 내가 자리를 뜰 때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넝마처럼 축 늘어진 채, 기운이 없어 햇빛조차 무겁다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다가가자 눈을 뜨고, 한결같이 읶숙한 솜씨로 병목을 깬 다음, 좋아하는
건배인 ‘행운을’ 외친 다음,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 다음 잠시 조용하더니, 담배를
꺼내 조금만 잘라 달라고 했다. 그가 떠들었다.
“조금만
말이지. 난 칼도 없고 자를 기운도 없어. 힘 좀 났으면
좋으련만. 아, 짐, 짐, 내 힘이 다한 것 같아! 젊은이,
이제 마지막 길에 마지막 담배일지도 모르니, 조금만 잘라,
실수하지 말고.” 내가 말했다.
“좋아요, 조금만 자르지요. 그런데 내가 그렇게 죽어가는 몸이라면, 기독교인처럼 기도를 드릴텐데요.” 그가 말했다.
“왜
기도를 하지? 이유를 말해 봐.” 내가 소리를 질렀다.
“왜라니요? 조금 전 죽음에 대해 묻지 않았어요? 사람이 그렇게 믿음이 없어서야. 죄와 거짖말 속에서, 피를 묻히며 살아왔지요? 지금 당신 발아래 당신에게 목숨을 빼앗긴 사람이 누워 있어요. 왜냐고
묻다니! 핸즈씨, 하나님의 은총을 빌기 위해서예요.”
그가 주머니에 숨긴 피묻은 단도와 나를 해치겠다는 의도를 생각하니, 몹씨 화가나 소리를 질렀다. 포도주를 쭉 들이키고나서
그는 기대 밖의 점잖을 빼며 말을 했다.
“지난 30여년간 배를 타면서, 이런 일 저런 일, 좋은 일 궂은 일, 좋은 날씨 궂은 날씨를 겪었고, 먹을 것이 떨어져 고생도 해봤고, 칼질도 해봤고, 안 겪은 일이 없지. 그런데 말야,
내 한마디한다면, 선량해서 결과가 좋은 걸 아직 못 봤어.
먼저 찌르는 게 장땡이야. 죽은 자는 물지 않거든. 이
게 내 생각이야. 아멘, 당연히 그래야지.” 그리고는 별안간 부두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
말 들어 봐. 이제 어린애 짓은 그만 하자구. 이제 물이
찼어. 호킨스 선장, 내 말 듣구, 배를 몰아 뭍에 대자구.”
대략 3킬로미터를 더 가야 했다. 그러나 배를 몰기가 쉽지 않았다. 북쪽 만으로 진입하는 그 수로는
좁고 얕으면서도 동서로 굽이가 져, 목적지에 닿으려면 정말 배를 잘 다루어야 했다. 졸지에 선장이 된 내가 잘 하기도 했지만, 핸즈가 분명 뛰어난 조타수였던 것은, 보기도
좋게끔 안전하고 깔끔하게 배를 몰아, 양쪽 둑 사이를 스칠 듯 말 듯,
그러나 아무런 문제 없이 정확하게 수로를 빠져나오도록 했기 때문이다.
수로를 지나자 바로 사방이 육지였다. 남쪽 만처럼 해변을 따라 나무들이 무성했지만, 바다는 더 좁고 길어 마치 내의 입구 같았고, 실제로도 냇가의 어귀였다. 바로 우리 눈 앞, 그러니까 해변의 남쪽 끝에 난파선의 잔해가 보였다. 돛대가 3개나 되는 큰 배이지만 오랜 세월 비바람 속에 내팽겨쳐져
해초가 엉겨붙고, 갑판에는 해변에서 자라는 잡초가 뿌리를 내려 꽃이 무성했다. 가슴이 아팠지만, 또한 그 만灣이 평화스러운 곳임을 말해 주는 광경이었다. 핸즈가 말했다.
“자, 저길 봐. 배를 댈만한 조그만 장소야. 모래사장도 훌륭하고, 나무들이 둘러싸 바람막이가 잘되는 곳이지. 저 난파선 갑판에 피는 꽃들과 똑 같은 꽃들도 피어 있고 말야.” 내가 물었다.
“배를
뭍에 올리면, 어떻게 다시 물에 띄우지요?” 그가 대답했다.
“문제
될 거 없어. 물이 빠질 때 저 건너편 해안으로 굵은 밧줄을 가지고 가서 큰 소나무에 묶으라구. 그런 다음, 한 끝을 다시 가지고 와 권양기에 잡아맨 다음, 물이 찰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만조가 된 다음, 모두 달려들어 밧줄을 감으면, 배는 자연스레 순순히 물로 끌려오는
거지. 선장, 조심해. 여기가
바로 상륙 지점이야. 배가 너무 빨라. 우현 쪽으로 조금… 그렇지… 그렇게 계속 나가… 우현 쪽으로… 좌현 쪽으로 꺽어… 그래… 그렇지.
그가 계속 지휘를 했고, 나는 숨쉴 틈 없이 명령을 따랐는데, 그가 갑자기 소리쳤다.
“이봐, 역풍 쪽으로 몰아!”
내가 키를 꽉 잡자, 히스파니올라는 방향을 홱 바꾸더니, 나무가 무성한 야트막한 해변을 향해 그대로
돌진을 했다.
그런 소동을 벌리다 보니, 지금까지 조타수를
경계하던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아직 배를 대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위험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목을 길게 빼고 서서 우현 난간 너머로, 뱃머리에 갈라지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 머리를 돌리지 않았던들 나는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무슨 소린가 들린 듯도 했고, 조타수의 그림자가 얼핏 눈에 스친 듯도 했다. 고양이의 본능이라고나
할까, 눈을 돌리니 바로 눈앞에 핸즈가
오른손에 단검을 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모두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렀고, 그는 황소가 씩씩거리며 돌진하는 소리를 냈다. 다음 순간 그가 공격을 해왔고, 나는 몸을 비켜 선측 통로를 따라
선수 쪽으로 피했다. 몸을 피하면서 키의 손잡이를 놓자, 바람이
불어가는 쪽으로 팽그르르 풀렸는데, 그때 키의 손잡이에 가슴을 맞은 핸즈가 한동안 꼼짝을 못해, 결국
내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 나는 몰려 있던
구석을 빠져나와, 그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넓은 갑판으로 나왔다. 제정신이
들어 다시 나를 쫓는 그를 향해, 주돛대 뒤에 숨어 침착하게 조준을 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공이 때리는 소리가 났지만, 불꽃도 안 보이고 총성도 들리지 않았다. 바닷물로 인해 화약이 못쓰게 된 것이다. 나의 게으름을 탓했다. 무기라고는 권총뿐이면서 왜 미리미리 손질해 탄환을 재 놓지 않았던가?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망나니에게 쫒기는 힘없는 양의 신세는 아니지 않겠는가?
비록 부상을 입었지만, 그는 놀라울 정도로
몸이 재빨랐고,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휘날리는 얼굴은 분노와 흥분으로,
영국 해군의 깃발 만큼이나 붉었다. 권총이 또 한 자루 있었지만, 화약을 채울 시간도, 쓸모가 있으리라는 믿음도 별로 없었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의 앞에서 물러서기만 하면
안되는 것이, 계속 도망만 다니면 선미에서 구석으로 몰렸듯이, 선수에서도
순식간에 구석으로 몰릴 터였다. 일단 몰리게 되면, 내가
이승에서 겪을 마지막 일이란, 내 몸 속 깊숙히 파고 들어올 그의 피 묻은, 20센티나 되는 칼일 것이다. 나는 굵다란 주돛대 뒤에서, 온 신경을 집중한 채 기다렸다.
내가 숨바꼭질하듯 몸을 도사리자 그도 멈칫했다. 곧
그가 칼질을 시작했고, 나는 요리조리 피했다. 숨박꼭질이야
고향 마을 블랙 힐 포구의 바위 언덕에서 늘 하던 놀이였지만, 그처럼 가슴을 떨며 논 적은 없었다. 지금도 그것은 아이들 놀이
같았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때 생각하기를, 넓적다리에 부상을 입은 늙은 해적을 상대로 한다면야 한번 해볼만
하지 않겠는가 했다. 그런 생각에 용기가 솟아, 싸움의 결말이
어떻게 될까 얼핏 생각을 해보니, 그렇게 돛대를 뱅뱅 돌 수야 있겠지만, 더 이상 도망은 못 갈 것이 분명했다.
그때 히스파니올라가
갑자기 요동을 치며 순식간에 모래뻘에 좌초를 했고, 그 충격으로 45도
가량 좌측으로 기울면서, 물통에서 쏟아진 물이 배수구로 흐르며 갑판과 난간사이가 물에 잠겼다.
나와 핸즈 모두 순식간에 넘어져 배수구 쪽으로 나뒹굴었는데, 붉은 두건의 시체가 아직도 팔을 쫙 벌린 채, 뻣뻣하게 굳어 우리
뒤에서 뒹굴었다. 둘이 가까이 붙어 있어, 핸즈의 발이 내 머리에 닺자, 이가
덜덜 떨렸다. 그렇지만 핸즈가
붉은 두건의 시체에 끼어, 내가 먼저 벌떡 일어났다. 배가
갑자기 기울었기 때문에 갑판을 뛰어 도망갈 곳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의 칼을 맞을 찰라여서 달리 도망갈
길을 빨리 찾아야 했다. 그 생각과 동시에, 번개처럼 뒷돛대에
걸린 줄사다리를 타고 순식간에 맨 꼭대기 가로활대로 올랐다.
재빠른 행동으로 생명을 구했지만, 사다리에
걸린 발 바로 밑으로 그가 칼을 휘둘렀다. 이스라엘 핸즈는 입을 벌린 채 나를 올려다 보았는데, 그 모습이 놀라움과 실망에
찬 완벽한 조각상 같았다.
틈이 조금 생겼으므로 재빨리 화약을 바꿔 쏠 준비를 한 다음, 다른 권총에도 새로 화약을
재워, 실수 없이 쏠 수 있도록 두 자루의 권총을 준비했다.
다시 화약을 재는 나를 보고 핸즈는 깜짝 놀랐다. 이길 수 없음을 알아챈 그는 잠시 동요의 빛을 보이더니, 칼을 입에
물고 천천히, 힘들게 줄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픈 다리를 끌고 오르자니 더딘데다가 앓는 소리까지 냈다. 그가 채 반도 오르기 전에 나는 발사 준비를
끝냈다. 양손에 권총을 들고 그에게 호령했다.
“핸즈씨, 더 이상 올라 오면 대갈통을 날려버리겠어요!” 내가 낄낄대며 한마디 더 했다.
“당신이
말한대로 ‘죽은자는
깨물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가 멈칫 했다. 망서리는 빛이 역력했고, 그가
뜸을 들이자 나는 승리감에 크게 웃었다. 당황한 표정을 계속 지으며,
몇 번 침을 삼킨 후 그가 말했다. 가만히 있지 않고서야,
말을 하려니 입에 문 칼을 떼야 했다.
“짐, 너와 내가 이래서는 안돼. 다시 협정을 맺자구. 배가
기울지 않았으면 넌 꼼짝 못했을 거야. 난, 운이 없다구. 운이 없어. 그래서 말이지, 너같은
애송이에게 숙달된 뱃사람이 하긴 어려운 일이지만, 항복을 해야겠어, 짐.”
그 말에 취한 나는 담장 위의 수탉처럼 우쭐대고 있는데, 그 순간 핸즈가 어깨 위로 오른손을
들었다.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가 났다. 충격과
함께 심한 통증이 느껴지면서 내 어깨가 돛대에 꿰었다. 그 순간 말할 수 없는 아픔과 놀라움 속에서도
두 자루의 권총이--내 의지, 의도라고는 할 수 없이--발사 되었고, 발사 된 후 두 자루 모두 손에서 떨어뜨렸다. 권총만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조타수가 줄을 놓고 비명을 지르며
바다를 향해 거꾸로 떨어졌다.
제27장
8레알
배가 기울어 돛대가 바다 위로 걸치게 되었고, 걸터앉은
활대에서 아래를 보니 물만 보였다. 돛대를 많이 오르지 못했던 핸즈는 당연히 선체 가까이, 그러니까 나와 난간 사이의 바닷물로 추락을 한 것이다. 피 범벅이 된 물위로 한번 솟더니 영영 다시 가라앉아 버렸다. 물이
잔잔해지면서, 배의 그림자가 드리운, 눈부시게 깨끗한 모래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물고기 두서너 마리가 그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물살이 흔들릴 때마다 그가 다시 일어서려는 듯, 몸뚱아리가 흔들거렸다. 그러나 총을 맞고 물에 빠져 완전히 죽은 것이고, 나를 죽이려고
수작을 부린 곳에서 고기밥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의 죽음을 확인하자 곧 나도 구역질과 현기증이 나면서 무서워졌다. 등과 가슴으로 뜨거운 피가 흘렀다. 어깨를 꿰뚫고 돛대에 꽂힌 칼
때문에 달군 쇠로 지지는 듯 쓰라렸다. 그렇지만 이는 꾹 참을 수가 있어 별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내가 있는 활대에서 푸른 바다 밑 조타수 시체 곁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정말 무서웠다.
손톱이 아프도록 두손으로 가로돛대를 꽉 잡은 채 무서운 장면을 안 보려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조금씩 정신이 들고 뛰던 가슴도 가라앉으니 다시 자신이 생겼다.
우선 칼를 빼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너무 단단히 박혔는지 아니면 내 신경이 마비 되었는지, 몸이
몹시 떨려 단념했다. 신기하게도 몸이 떨린 것이 한몫을 했다. 사실
칼은 빗나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슬아슬하게 피부만을 건드렸고, 몸을
떠니 칼이 빠진 것이다. 피가 많이 흘렀지만 다시 정신이 들었고, 외투와
셔츠만 돛대에 꿰어 있었다.
돛대에 꿴 외투와 셔츠를 잡아챘다. 그런 다음 곧 우현 쪽 줄사다리를 타고 다시 갑판으로
내려왔다. 이스라엘이 방금
떨어져 죽은 좌현 쪽 줄사다리를 세상 없어도 다시는 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선실로 내려가 상처를 치료했다. 무척 아프고 아직 피가 흘렀지만, 상처가 깊거나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고, 팔을 못 움직일 정도도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 배는 내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마지막 남은 오브라이언의 시체를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말한대로 그는, 사람 크기의 인형처럼, 기괴하고 보기 흉한 모습으로 난간에 비스듬히 등을 대고 있었는데, 그
피부색이나 용모가 살아 있는 사람의 그것과는 말할 수 없이 달랐다! 그렇게 죽어 있으니 이제 쉽게 다가갈
수가 있어, 비극적인 모험에 읶숙해진 나는 주검에 대한 두려움도 잊은 채, 밀기울 푸대 잡듯이 그의 허리를 잡아
번쩍들어 바다로 힘껏 내던졌다. 풍덩 소리와 함께 그의 시체가 물에 가라앉았다. 벗겨진 붉은 수건이 물 위에 둥둥떴다. 일었던 물결이 잠잠해지자, 그의 몸이 이스라엘의 시체와 함께
나란히 누워, 물결치는 대로 이리저리
뒹구는 것이 보였다. 오브라이언은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거의 머리털이 없는 대머리였다. 그는 자신을 죽인 자의 무릅 위에 대머리를 올려
놓은 채 누어 있었는데, 그 두 사람의 시체 위로 물고기들이 재빨리 모여들었다.
배에는 이제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조류가 바뀌고 있었다. 해가 거의 기울어 서쪽 해안의 소나무 그림자가 물을 건너와 배의 갑판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저녁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동쪽 쌍봉우리를 이고 있는 산이 바람을
잘 막아 주기는 했지만, 밧줄에 부드러운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조금씩 들리면서 돛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배가 위험 했다. 삼각돛을 재빨리 내리고, 갑판을
뛰어 주돛으로 갔지만, 그것을 내리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배가
기울었으니 활대도 당연히 배 밖으로 기울어, 그 끝과 돛의 일부가 물에 잠겼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고 생각 했지만, 돛이 너무 무거워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칼을 빼 돛줄을 잘랐다. 맨 윗 활대가 곧 무너져내렸고, 바람이 빠진 커다란 돛이 물위에 떴다. 돛대를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으므로, 돛줄을 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물론 히스파니올라도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일을 끝내자 만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고, 나무들
사이를 뚫고 들어온 마지막 햇빛을 받아 난파선 위의 꽃들이 보석처럼 빛났다. 날씨가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썰물이 빠르게 빠지면서 배는 점점 더 옆으로 기울었다.
앞으로 간신히 기어가 내다보았다. 물이
얕아 보여 잘린 돛줄을 단단히 잡고 가볍게 배 밖으로 내렸다. 물은 허리 깊이었다. 모래바닥은 단단했지만 울퉁불퉁했다. 주돛을 물 위에 편 채 비스듬히
누운 히스파니올라를 뒤로 하고, 당당한
마음으로 모래바닥을 걸어 뭍으로 나갔다. 그때 해가 거의 졌고, 땅거미가
내린 소나무 숲 사이로 소슬바람이 불어왔다.
적어도, 그리고 드디어 뭍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제
빈손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마침내 배는 해적들의 손을 확실하게 벗어났으므로, 우리가 타고 다시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새로 돌아가
자랑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내 멋대로 해 야단을 맞을지도 몰랐지만,
히스파니올라를 되찾았으니, 모두의 입을 막을 수도 있고, 시간 낭비가 아니었음을 스몰릿 선장님도 인정하리라 확신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힘이 솟아, 통나무집 나의
동료들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캡틴
키드만으로 흘러드는 개천들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는 개천이, 내 왼쪽에 있는 쌍봉우리를 인 산에서
시작된다는 기억이 나, 폭이 좁은 그곳으로 건너기 위해 봉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숲이 깊지 않았고, 야트막한 산허리를 따라가다가 산을 돌자 바로 얕은 여울을 만나, 그곳을
건넜다.
버림받은 벤 건을 만났던 장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방을 응시하면서 조심스럽게 걸었다. 밤이 완전히 내리고, 두 개의 산봉우리 사이를 지나니,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불빛이 흔들리는
게 보여, 그 섬사람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저녁거리를 준비하는 것이 아닌가 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조심성 없이 불을 지펴도 되는가 했다. 내가
볼 수 있는 불빛이라면, 늪 근처에 천막을 친 실버의 눈에도 띄지 않겠는가?
밤이 점점 깊어갔다. 목적지를 향해 대강 헤아리며 갈 수 밖에 없었다. 내 뒤의 쌍봉우리와 오른쪽의 스파이 글라스가
시야에서 점점 사라졌다. 별도 몇 개만 희미하게 보였다. 산기슭의
관목을 헤쳐 가며, 모래 구덩이에 넘어지기도 했다.
갑자기 주위가 환해졌다. 머리를 들었다. 스파이 글라스 위를 희미한 달빛이
비치고, 뒤따라 숲 뒤로 커다란 은쟁반 같은 것이 나지막하게 눈에 들어와, 달이 뜬 것을 알았다.
달빛의 도움을 받아 남은 길을 재촉해, 뛰며 걸으며 초조한 마음으로 요새 근처에 이르렀다. 그러나 요새 앞의 숲을 지나면서 무턱대고 걷지 않고 발걸음을 늦추며 아주 조심을 했다. 우리편이 실수하여 쏘는 총을 맞으면, 내 모험이 가엾게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달이 점점 높이 솟아 넓은 숲을 비추면서, 바로 내 눈앞 나무들 틈으로 이상한 빛이 번쩍했다. 붉은 광채를 냈는데, 이따금씩 잦아들어 모닥불이 타다 남은 듯했다. 도대체 왜 불을 피웠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숲을 지나 마침내 시야가 트인 곳으로 나왔다. 요새의
서쪽은 이미 달빛이 환했다. 통나무집을 비롯 그 외의 지역은 아직 어두운 그늘 속에 있었는데, 그늘 속 군데군데 은색의 달빛이 뿌려지고 있었다. 집 한 쪽에는
타다 남은 커다란 모닥불이 아직도 붉은 빛을 내, 희미하고 몽롱한 달빛과 강렬한 대조를 이루었다. 부드러운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인적도 없었다.
부쩍 의심이 들어, 아니 겁도 나 발걸음을 멈췄다. 우리는
큰 불을 놓는 일이 없었다. 선장님의 명령에 따라 우리는 장작을 아꼈는데, 따라서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잘못된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걱정이 되었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달 그림자를 타고 울타리의 동쪽 끝으로 간 다음, 가장 어두운 곳을
골라 울타리를 넘었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집 모퉁이를 향해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손과 무릅으로 기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들려온 소리로 대단히 기뻤다. 그 소리 자체야 즐거울 것이 없는, 내가 가끔은 못마땅해 했었던, 평화로운 잠에 빠진 동료들의 코고는 소리였지만, 이제는 음악을 듣는
듯했다. 보초가 지르는 ‘이상 무’라는 고함도 그렇게 아름답게 들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보초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부실한 경계였다. 만일 실버와 그의 부하들이 나처럼
몰래 잠입했었다면, 집안에 있던 사람은 그 누구도 그 이튿날 햇빛을 못 보았을 것이다. 선장님이 부상을 당해 보초가 부실한 것이 아닌가 했다. 어쨌던 보초를
설 사람도 부족한데, 내가 그들을 위험 속에 팽개치고 이탈해 마음속 깊이 후회했다.
어느덧 문에 다가가 일어섰다. 집안이 어두워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코 고는 소리가 단조롭게 계속 들렸고, 홰를 치거나 부리로 쪼는
듯한, 말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소리도 가끔 들렸다. 팔을
더듬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내 자리로 가 누운 다음, 아침에
일어나 나를 알아본동료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속으로 웃으며--생각해보았다.
내 발이 무엇인가에--잠자는 사람의 다리--걸리자
그가 몸을 뒤척이며 웅얼거렸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팔
레알! 팔 레알! 팔 레알!”
조그만 베틀이 덜거덕거리듯, 그 소리를
단조롭게 반복했다.
다름 아닌 선장 플린트, 실버의 초록 앵무새였다! 그 새가 나무껍질을 쪼는 소리를 내가 들었던 것이다. 그 새야 말로
사람보다 훌륭한 보초로서, 그 지겨운 소리로 나의 출현을 계속 알린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할 겨를이 없었다. 앵무새가 지르는 날카로운 비명에, 잠자던 해적들이 벌떡 일어났다. 욕지거리를 하면서 실버가 소리를 질렀다.
“거
뛰는 놈은 누구냣?”
뒤돌아 도망치던 나는 누군가와 세게 부딪혔고, 내가 주춤하는 사이 또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
꼼짝 못하게 했다. 내가 붙잡힌 것을 보고 실버가 말했다.
“디크, 횃불을 가져와.”
한 사람이 나가더니 곧 불붙은 장작개비를 들고 들어왔다.
제VI부
선장 실버
제28장
해적의 소굴에서
붉은 횃불이 방안을 비추고, 내가 붙잡힌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통나무집과
보급품이 해적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술통, 베이컨, 건빵은 전과 다름없었으나,
포로가 있다는 낌새가 없어 무엇보다 두려웠다. 모두 죽었다고 판단 되어, 그들과 함께 죽지 못한 자책감에 가슴이 메었다.
해적들은 모두 여섯 명으로, 모두 죽고
남은 사람들이었다. 그 중 서 있는 다섯 사람은, 술이 취해
골아떨어졌던 잠에서 갑자기 깨어나, 붉으스레한 얼굴들이 부석부석했다.
나머지 한 해적은 팔꿈치로 일어나 앉았다. 그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고, 머리에 피 묻은 붕대를 감은 것으로 보아, 최근에 다쳐 아직 치료
중인 듯했다. 그들이 공격했을 때, 총을 맞고 숲속으로 도망친
해적이 생각 나, 혹시 그가 이 사람이 아닌가 했다. 앵무새가 롱 실버의 어깨에 앉아 깃털을 쪼고 있었다. 그는 전보다 얼굴이 더 창백했고, 안절부절하는 듯했다. 협상 차 왔을 때 입었던 멋진 옷을 아직 입고는 있었지만, 이제
흙이 묻어 더럽고 날카로운 나뭇가시에 찢겨 구질구질했다. 그가 떠들었다.
“여기
짐 호킨스가 있다니, 이럴
수가 있나! 이거야 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졌나, 엉? 어쨌던, 어서 오게. 잘 해보자구.”
그는 술통에 걸터앉아, 파이프에 담배를 담기 시작했다.
그가 말했다.
“디크, 담배 불 좀 가져와.” 불을 가져오자, 담배불을 붙인 다음 그가 말했다.
“음, 됐어. 장작개비는 불더미에 버려.
그리구 자네들은 앉아--서 있을 필요없구, 호킨스씨가 이해할 거야. 그렇게들
알라구.” 그가 파이프를 입에서 떼며 덧붙혔다.
“짐, 돌아왔군. 이 늙고 가엾은 존이 정말 놀랬다구. 너를 처음 보았을 때는 영리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돌아오다니 이해를 못하겠어.”
그가 하는 말에 당연히 나는 아무런 대꾸를 안 했다.
해적들이 나를 벽에 기대서게 해서, 그 자리에 선 채, 전혀
꿇리지 않는 모습으로 보이기를 바라며, 실버의 얼굴을 노려보았지만, 가슴 속에는 절망이 엄습했다.
파이프를 몇 번 빨고 나서, 실버는 대단히 침착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그가 말했다.
“자, 짐, 네가
여기 있으니 내 생각을 말해보겠다. 난 언제나 너를, 용기
있는 너를, 내 어렸을 때의 단정했던 나를 꼭 닮은 너를 좋아 했지.
나와 함께 일하고 네 몫을 챙겨 양반처럼 살아가기를 언제나 바랬는데, 지금도 달리 방법이
없어요, 우리 도련님. 스몰릿 선장 말야, 훌륭한 뱃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지만, 너무 원칙에 매달려. ‘법은
법이다’라는
얘긴데, 사실 그 말도 맞기는 맞아. 넌 그냥 그 사람을
조심만 하면 돼. 그 의사란 놈 말야, 다시는 너를 안 볼
거야. 너 보구 뭐라고 했는지 알아? ‘배은망덕한
불량배’라고
했다구. 결론부터 말하면, 너는 돌아갈 수 없어. 그들이 네게 바랄 게 없기 때문이지. 혈혈단신으로 또 다른 배의
선원이 되지 않을 바에야, 이 실버
선장과 힘을 합치자구.”
그 말을 들으니 됐다 싶었다. 내가 무단이탈을 해 모두들 화를 냈다는 실버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말 그대로라면 내 동료들은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이고, 따라서 걱정보다는 안심이 되었다. 실버가 계속했다.
“난
말이지, 네가 우리 손아귀에 있지만 그런 말은 하고 싶지도 않아. 내말
믿어. 나는 상의하기를 좋아 해. 협박을 해서 되는 일을
본 적이 없어. 내 의견이 괜찮다면 같이 하자구. 짐, 물론 맘에 안 들면 걱정
말고 못하겠다구 해. 그건 네 마음대로야, 친구. 뱃놈치구 더 이상 사리에 닿는 말을 할 수는 없고, 아이구 제기랄!”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대답해야 하나요?”
그런 어처구니 없는 대화 속에서, 내게 닥친 죽음의 공포를 느꼈고, 볼이 뜨거워지면서 가슴 속 심장이 두근거렸다. 실버가 말했다.
“얘, 누구도 네게 강요를 하지 않아. 깊이 생각해 보라구. 우린 아무도 재촉 안 해. 친구.
너와 함께라면 시간이 잘 가.” 짐짓 용기를 내어 내가 말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먼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당신들은 왜 여기 있으며, 우리 동료들은 어디에 있는지 내게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해적 한 명이 목이 쉰 소리로 내말을 받았다.
“뭔
일이 일어났냐구? 어흠, 어느 놈이 그걸 안담!” 그를 향해 실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임마, 입 뚜껑 열라고 할 때까지 잠자코 있어.” 그리고 나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호킨스 씨, 어제 아침에 말이지, 망을 보고 있는데, 리브시 박사가 백기를 들고 왔더라구. 말인 즉슨, ‘실버 선장님, 당신은 망했어요. 배도 없어지고’ 하더라구. 우리는
한잔하며 흥을 돋우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 그렇지 않다고 대답을 못했어. 우리는 아무도 배를 본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가서 보니까, 젠장할, 그 빌어먹을 배가 없어졌더라구! 그처럼 겁에 질려 눈알이 튀어나온 우리 멍청이 패거리들을 생전 처음 보았어.
여하튼 눈알이 확 튀어나온 황당한 표정들이라고나 할까, 뭐 그렇게 생각해도 돼. 의사가 ’자, 협상을 하시지요’라고
하더군. 그와 내가 협상을 했지. 그래서 여기 우리가 있게
됐고, 먹을 거랑 술, 이 통나무 집, 고맙게도 미리미리 해 둔 장작더미, 그리고 민망스럽게도 그 배까지
몽땅 차지하게 된 거야. 그 대신 의사 패거리들은 이 집을 떠났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
그가 다시 조용하게 파이프를 빨았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협상의
머릿수에 너도 포함 되지 않았겠느냐 하고 생각할까 봐 하는 얘긴데, 마지막으로 이런 얘기를 했지. 내가 ‘몇 명이 떠날 거냐?’ 하고 물었어.
‘네 명이 떠날 텐데, 한 명은 다쳤습니다. 그 어린애는, 빌어먹을, 나도
어디 있는지 몰라요. 상관할 것도 없고. 그 애 때문에 골치가
아파요’. 이 게 전부 그치가 한 말야.” 내가 물었다.
“말씀
다하셨나요?” 실버가 대답했다.
“음, 네가 들어야 할 말은 다했지.”
“이제
결정할까요?” 실버가 대답했다.
“지금
저쪽인지 이쪽인지를 결정해. 확신을 가지고 말이야.” 내가 말했다.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내 갈 길을 너무나 잘 알아요. 최악의
경우가 닥쳐도 괜찮아요. 당신들을 만난 후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몇 마디 할 말을 해야겠어요.” 마음이 격앙되니 거침없이 말이 나왔다.
“우선, 당신은 앞길이 캄캄해요--배도, 보물도, 부하도 모두 잃고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나요? 바로 나예요! 우리가 육지를 발견한 그날 밤, 나는 사과통 안에서 당신 존, 저기 앉아 있는 디크 존슨, 그리고 지금은 바다 밑에 가라앉은 핸즈가
하는 말을 다 듣고, 지주님께 곧바로 모든 말씀을 드렸어요. 히스파니올라는 말이지요, 바로
내가 닻줄을 끊었고, 당신이 배에 태운 당신의 부하들을 죽인 사람도 나이고, 당신들 가운데 누구도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배를 몰고 간 사람도 나에요.
마지막으로 웃을 사람도 나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이 일에서 이기고 있었어요. 난 당신을 한 마리 파리 정도로 여긴달까, 이제 무섭지 않아요. 죽일테면 죽이든가 아니면 풀어줘요. 그리고 한마디 더 해야겠어요. 만일 나를 풀어 주면,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니까, 당신들이 해적질한 죄로 재판정에 서게 되면, 힘을 다해 당신들을
구하겠어요. 선택은 당신이 해야 해요. 얻는 것도 없이 남을
죽이는 바보 짓을 하던가, 아니면 나를 살려, 교수대로부터
당신들을 구하려고 편을 들어 줄 증인을 확보하던가 하세요.”
내가, 말하자면, 숨이 차 말을 중단하자, 놀랍게도 모두 꼼짝 않고, 양떼처럼 앉아 나를 응시했다. 말없이 쳐다보는 틈을 타 다시 말을 토했다.
“자, 실버 씨, 당신은 여기서 그래도 좀 나은 사람이예요. 만일 내가 잘못 되는
경우, 여기서 내 행동이 어떠했었는지 박사님이 아시게라도 해주신다면 고맙겠어요.”
실버가 나의 요구를 비웃어서인지 아니면 열변에 호감이 가서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말투로 대답했다.
“알겠어.”
바로 그때 적갈색 얼굴을 한 늙은 해적, 내가 브리스틀 부둣가의 롱 존 주막에서 본 몰건이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
했더니, 바로 저 놈이야요. 블랙 독을 알아본 놈이야요.” 요리사가 따라 말했다.
“그래, 제기랄! 한마디 더 해야겠군. 바로
저 아이가 빌리 본스에게서
보물지도를 훔쳤어. 전부 짐 호킨스
때문에 망친 거야.” 몰건이 욕지거리를 하며 외쳤다. 칼을 빼며
마치 스무 살 먹은 젊은이처럼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면
이 칼을 받아라” 실버가 외쳤다.
“거, 멈추지 못해! 넌 누구야, 톰 몰건? 네가 대장이라고 생각하나보군. 이런 환장할 노릇이 있나. 네게 한 수 가르쳐 줘야겠다! 내 앞에 무릅 꿇어. 지난 30년
동안 말이지, 제기랄, 까불던 놈들이 활대에 매달리거나 아니면
널대에서 떨어져, 모조리 고기밥이 돼 너보다 앞서 간 곳으로 보내주마.
두 누깔 부라리며 내게 대든 놈치고 온전했던 놈 없어. 톰 몰건, 내 말 명심해.”
몰건은 움칫 했지만, 다른 해적들이 웅성거렸다. 한 사람이 말했다.
“몰건은 잘못한 거 없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난
어느 선장 놈에게 오랜 세월 혹사 당했어. 존 실버, 당신도 그럴테면 차라리 내 목을 조여 죽여 달라구.” 아직 타고 있는 파이프를 오른손에 든 채, 술통 위에 앉아 상체를 숙이며 실버가 으르렁거렸다.
“나와
결판을 내겠다 이 말이지? 누군지 말해 봐. 귀가 먹었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지금까지 수 많은 세월, 뱃머리에서 주정뱅이들을 내 앞에 무릅 꿇리며 살아 온 거 알아? 너희들
규칙이 뭔지 알지? 너희들 말대로, 너희들은 보물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야. 자, 해보자구. 감히 칼을 들 놈이 있으면 들어 봐. 이 담뱃불이 꺼지기도 전에
내 목발이건 어디건 묻은 그놈의 내장 색깔을 볼테다.”
모두 꼼짝달삭을, 말대꾸를 못했다. 파이프를
입으로 가져가며 실버가 계속했다.
“너희들은
다 그렇구 그런 놈들이지, 그렇지? 보기에만 근사한 망나니들이지. 싸움에도 별 볼일 없어. 내가 하는 표준말을 알아먹는지나 모르겠네. 난, 너희들이 선출한 선장이라구.
능력으로 말하자면 너희들보다 10리도 더 가. 그래서
선장이 된 거야. 너희들은 보물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싸움도 할 줄 몰라. 그렇다면, 제기랄, 고분고분
말이나 잘 들어! 자, 난 말이지, 저 애가 좋아. 쟤보다 영리한 아이를 본 적이 없어. 이 집안에 있는 너희 떨거지 어느 누구보다 더 어른답다는 말이지. 누가
저 애한테 손만 대 보라구.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으니, 내
말 명심해.”
그 말을 끝내자 긴 침묵이 흘렀다. 나는
벽에 기댄 채 꼼짝않고 서 있었고, 가슴은 방망이질을 했지만, 한가닥
희망이 솟았다. 실버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팔짱을 낀 채, 파이프를 입가에 물고, 마치
교회에 앉아 있듯이 침묵했다. 그러나 그의 은밀한 눈길은 불온한 부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한편, 방 한구석으로 엉금엉금 모여든 해적들이 뭔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바람소리처럼 계속 들려왔다. 번갈아 얼굴을 들어 쳐다보았는데, 횃불의
붉은 불빛이 긴장한 얼굴들을 언듯언듯 비췄다. 그러나 내가 아닌, 실버를 노려본 것이다. 실버가 허공을 향해 침을 찍 뱉으며 한마디했다.
“할
말들이 많은가 본데, 들어볼 테니 말해보던가, 아니면 자빠져들
자라구.” 한 사람이 대답했다.
“선장님, 내 한마디 하겠오. 선장님이 잘 안 지키는 규칙들이 있다 이거요. 어떤 규칙들은 너무 잘 지키면서 말이오. 그래서 우리가 불만이지. 꼼짝 못하게 하니까 싫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어느 선원들 못지않게
권리가 있고, 난 그 권리를 찾고 싶소. 당신이 만든 규칙에도, 우리가 모여 의논할 수 있는 권리가 정해져 있어요. 지금이야 당신을
선장으로 인정을 하지만, 나도 권리가 있구, 나가서 의논을
하겠오.”
선원의 격식에 맞는 인사를 한 후, 큰 키에 눈이 노랗고 인상이 험악한, 서른다섯살 가량 짐작되는 그 사내는 말없이 문쪽으로 걸어가 밖으로 사라졌다.
그의 뒤를 따라 이런저런 구실들을 대면서 한 사람씩 경례를 하며 나갔다. "규칙에
따라"라는 말을 한 사람도 있었고, 몰건은 "선수루 회의"를 하러 간다고 했다. 그렇게 한마디씩 던지며 모두 나가
버리자 횃불 밑에 실버와 나만 남게 되었다.
늙은 요리사가 즉시 입에서 파이프를 떼었다. 그가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목소리 말했다.
“자, 짐 호킨스, 잘 들어. 넌 말이지, 반은
죽은 목숨이야. 잘못하면 고문을 당할 수도 있어. 저 놈들은
나를 뒤엎으려고 해. 그런데 말이지, 난 세상 없어도 네편이라는
걸 잊지마. 네 말을 듣고서야 내 잘못을 알았어. 그 많은
돈도 잃고 교수형을 당할지도 몰라 미치겠더라는 말이지. 그런데 이제 네 말이 옳다는 걸 알았어. 내 스스로 말했지. ‘존, 너는 호킨스와 함께 있다. 호킨스도 너와 함께다. 너는 그의 마지막 카드이며, 날벼락이 떨어져도, 존, 그는 너의 마지막 카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편을 들어줄 증인의 목숨을 구하면, 그도 너의 목숨을 살릴 것이다.’ 라고 다짐했지.”
무슨 말인지 대략 이해가 되었다. 내가 물었다.
“모든
걸 잃었다는 말인가요?” 그가 대답했다.
“그래, 아이구 맙소사! 배도 잃고, 목도
날라 갈 지경이고--그랬다는 말이지. 짐 호킨스, 바다를 보니 배도
눈에 안 띄고--음, 난 역경에 강한 사람이지만,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 말 잘 들어. 저기 모여 우리를 없애려고 꿍꿍이 짖하는 저치들 말이야, 겁쟁이에다
정말 멍한 놈들이야. 내가 저들로부터 네 목숨을 구할 수 있으면 구하겠어. 그렇지만, 짐--주고 받기지--이 롱 존을 교수대로부터 구해 줘야 해.”
나는 좀 당황했다. 그 늙은 해적, 반란의 두목인 그의 요구는 이루어질 희망이 없을 듯했다. 내가 말했다.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겠어요.” 롱 존이 소리쳤다.
“이건
협상이야! 힘을 내서 크게 말해. 제기랄, 한번 해보는 거지 뭐!”
절뚝거리며 장작더미 사이에 꽂아 놓은 횃불로 다가간 그는, 다시 파이프에 불을 붙혔다. 자리로 돌아오며 그가 말했다.
“짐, 내 말 들어 봐. 그럼, 나도 생각이 있어. 지금 난 지주님 편이야. 네가 안전한 곳에 배를 감춘 것도 알아. 어떻게 그 일을 해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쨋던 배는 온전한 것으로
알아. 핸즈와 오브라이언이 비겁한 짓을 했다고 짐작이 간다구. 그 놈들을 믿어 본 적도 없어. 내 말 잘 들어 봐. 네게 무얼 묻지도 않을 게고, 저놈들에게도 묻지 못하게 하겠어. 나는 시합이 끝나는 때를 알아. 암, 알구 말구. 진실한 젊은이도 알아볼 수 있구. 오, 네가 바로 그런 젊은이란다--너와
내가 힘을 합치면 근사한 일을 해낼 수 있다구!”
그는 술통에서 꼬냑을 따라 주석 술잔에 부었다. 그가 물었다.
“맛
좀 볼래, 친구?” 내가 거절하자 그가 말했다.
“음, 짐, 난 한잔해야겠어. 곧 소동이 있을 듯하니 마음을 가라앉혀야지. 소동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짐, 왜 의사가 내게 보물지도를
주었을까?.”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짖자 필요 없다는 듯 더 묻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그래, 내게 주었어. 그렇지만, 그렇지만
무슨 의도가--틀림없이 숨은 의도가 분명히 있어--좋든 나쁘든
말야.
그리고는 마치 종말을 향하여 가는 사람처럼 긴 금발을 치렁거리며, 또 한잔 죽 들이켰다.
제29장
또 하나의 검은 점
해적들이 구수회의를 시작한 후 조금 지나, 한 사람이 다시 방으로 돌아와, 나갈 때처럼 어울리지 않는 경례를 한 다음, 횃불을 잠깐 빌려달라고
했다. 실버가 금방 승락을
했고, 그 사람이 되돌아 가자, 어둠 속에는 우리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매우 우호적이고 친근한 목소리로 실버가 말했다.
“짐, 바람이 부는군.”
가까운 총안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지금까지 활활타던 모닥불이 꺼져가며, 불씨가 거의 남아 있지를 않아, 그래서 횃불을 빌려달라는 것이 아닌가
했다. 그들은 요새로 오르는 비탈의 중간쯤에 모여 있었다. 한
사람은 횃불을 들고, 또 한 사람은 무릅을 꿇은 채 동료들에게 둘러쌓였는데, 그의 손에 들린 칼이 달빛과 횃불을 받아 여러 빛깔을 내며 번뜩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 해적이 하는 짓을 보겠다는 듯,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칼뿐만 아니라 책도 눈에 띄어, 어떤 이유로 서로 색다른 그 두 물건이 필요한지
궁금해 하고 있는데, 앉아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서자, 모두
통나무집을 향해 오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다.
“저
사람들이 오고 있어요.”
엿보는 일이 그들에게 들키면 내 위신 문제이기도 해서,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갔다. 실버가 됐다는 듯 말했다.
“좋아, 오라구, 얼마든지 오라구 해. 아직
한 방 남았어.”
문이 열리며 누가 먼저 들어설지 다섯 사람이 옥신각신하다, 한 사람을 밀어 넣었다. 꽉 쥔 오른손 주먹을 앞으로 뻗은 채, 주춤주춤 내딛는 모습이란 어느 경우라도 웃음이 나올 터였다. 실버가 소리를 질렀다
“야
임마, 다가 오라구, 잡아먹지 않을테니. 등신같으니라구, 뭐야 이리 내놔.
규칙을 알고 있어. 대표로 온 놈을 어쩌지는 않아.”
이 말에 용기가 난 그 해적은 성큼 다가와 무엇인가를 실버의
손에 넘긴 후, 재빨리 뒤로 돌아 다시 일행에게로 갔다.
요리사가 받은 물건을 들여다 보았다. 그가 말했다.
“검은
점이군! 내 그럴 줄 알았어. 종이를 어디서 구했지? 그런데--이
게 무슨 짓이야! 이것 봐, 벌 받을 짖을 했어. 밖에 나가더니 성경을 찢었네. 누가 이런 바보짓을 했어?” 몰건이 동료들에게 말했다.
“아, 저 말 들어 봐! 내가 뭐라고 그랬어? 그러면 안된다구 했잖아.” 실버가 계속했다.
“음, 기어코 일을 저질렀군. 너희들은 모두 교수대감이야. 어떤 돌대가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었니?” 한 사람이 대답했다.
“디크요.” 실버가 말했다.
“디크라고 그랬니? 그렇다면 디크는 기도를 드려라. 디크는 말이지, 이제 끝장이야. 틀림
없어.”
그때 노란 눈의 꺽다리가 말참견을 했다.
“죤 실버, 그런 말 집어치워. 우린 규칙에 따라 합의를 해서 당신에게 통보한 거야. 딴말 말구, 무엇이 쓰였나 종이를 뒤집어 봐. 그런 다음 얘기하자구.” 요리사가 대답했다.
“고맙군, 죠지, 일도 똑 뿌러지게 하더니, 규칙도 잘 아는 걸 보니 좋네그려. 그럼, 보구말구. 그런데
이 게 뭐냐, 아 ! ‘선장
자격 박탈’이라--그런 말이네, 그렇지? 글씨도
정말 예쁘게 쓰고, 활자로 찍은 듯 말이야. 죠지, 네가 썼지? 그래, 넌 여기 네 패거리의 대장이 될 자격이 충분해. 다음 선장은 분명 네 차지야. 그런데 횃불 좀 돌려줄 수 있겠니? 담뱃불이 꺼졌어.” 죠지가 말했다.
“좋소, 더 이상 우릴 놀리지 마쇼. 당신은 재미 있오? 그러나 이제 별 볼일 없게 됐으니, 통에서 내려와 투표나 하슈.” 실버가 경멸조로 대꾸했다.
“규칙을
안다고 떠벌리더니만. 적어도 말이지, 네가 아니라고 해도, 난 규칙을 알아. 난 이 통 위에서--아직 내가 선장이라는 걸 명심해--너희들이 불만을 적은 목록을 가져오면
어떻게 할지 생각하며 기다리는 중이야. 그때까지 그 따위 검댕이 동그라미는 과자 부스러기 만큼도 쓸모가
없어. 목록을 보고 얘기하자구.” 죠지가 대답했다.
“아, 걱정할 것 없오. 하나하나 다 말하지. 첫째, 당신은 이번 항해를 망쳐 놓았어--뻔뻔한 사람이니 그렇지 않다고 하겠지. 둘째, 잡아 놓았던 지주 패거리들을 아무런 댓가 없이 석방했어. 왜요? 그들이 원해서요? 난, 도무지
모르겠어. 셋째, 그들이 물러갈 때 공격을 못하도록 당신이
막았오. 존 실버, 우린 당신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오. 적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얘기지. 이건 중대한 문제야. 그리고 네 번째로는, 거기 그 꼬마는 뭐요?” 실버가 조용하게 반문했다.
“말
다했니?” 죠지가 대꾸했다.
“다했지. 당신이 어설퍼 우리 모두 목이 달아날 처지란 말이오.”
“좋아, 자, 내 말 들어 봐. 지적한 네 가지를 하나씩 대답하겠다. 내가 이 뱃길을 망쳤다고 했겠다? 좋아, 그런데 내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모두 잘 알고 있고, 만일
일이 잘 되었더라면, 제기랄, 오늘밤쯤은 모두 목숨이 붙어
있는 건강한 몸으로, 좋은 자두가 들어간 떡을 실컷 먹고는 창고에 보물을 가득 실은 채, 히스파니올라에 몸을 싣고 있었으리라는
걸 너희들 모두 알고 있지 않으냐 이런 말이지! 그런데, 이를
못하게 막은 건 누구야? 내손을 잡아 끌어 선장으로 뽑은 놈은 누구야?
우리가 상륙해서 춤추던 날, 반란을 꼬드긴 놈은 누구야?
아, 거 참 신나는 춤이었지--나도 췄지만 말이야-- 런던 교수형장의 밧줄에 매달려 흔들어대는 해적놈의 발짓 만큼이나 힘찼어. 자, 누가 그랬어? 물론 앤더슨이나 핸즈, 아니면 너, 죠지 메리겠지! 그런데
너, 죠지 말이야, 넌 갑판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골때리는 놈이지. 이제 뒈질라구 간덩이가
부어 날 뒤엎고 선장이 되겠다는 말인가 본데--너야말로 우릴 모두 망쳐놓은 놈이야! 이런 제기랄! 게거품 물고 긴 얘기해 봐야 소용없지.”
실버가 잠시 침묵했고, 죠지나
그 동료들의 얼굴 표정으로 보아 실버의 말이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통나무집이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 말을 하다보니,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면서, 그 운수가 다한 남자가 외쳤다.
“이것이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래, 말은 하지만 정말 말하고
싶지 않아. 너희들은 멍한데다가 기억력도 없고, 너희 어미들이
어쩌자고 네놈들을 바다로 보냈는지 통 알 수가 없다. 바다라! 보물을
찾아 나선 신사들이라! 내 생각으로는 말이지, 너희들은 양복점에서
옷이나 꿰메야 제격이야.” 몰건이 말했다.
“존, 다른 질문에 대해서도 계속 대답해요.” 존이 대답했다.
“암, 그래야지. 그럴듯한 질문들이야. 그렇지? 이번 항해를 망쳤다고 했겠다. 아!
절대로 그렇지 않아. 정말 망쳤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교수대에 있을 것이고, 그 생각을 하면 내 목이 다 뻗뻗해진다구. 너희들은 아마 쇠사슬에 목이 매여, 뭇새들이 주위를 맴돌 것이고, 물길을 따라 지나가는 뱃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겠지. ’저게
누구야?’ 하고 한 사람이 물으면, 또 한 사람은 ‘저거? 그야 물론 존 실버지, 내가 잘 아는 놈이야’ 할 거란 말이지. 교수대 밑의 부표浮標들을 잇는 쇠줄이 짤랑대는 소리도 듣고 있을 테고. 자, 이게 어머님의 아들들인 우리가 지금 각자 처한 형편이 아니겠느냐
하는 얘기고, 이게 모두, 너, 죠지, 그리고 핸즈, 앤더슨을 비롯해서 우리를 망친
너희 바보들 때문이었겠다 이런 말이야. 그리고 네 번째 질문도 질문이랍시구 물었는데, 아이고, 저 애는 당연히 인질 아니니? 인질을 팽개치라구? 안돼. 그는
우리의 마지막 카드가 될 수도 있고, 분명 그렇게 될 거야. 저
애를 죽여라? 난 못해 이 놈들아. 세 번째 질문에 답하라구? 음,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
너희들을 돌보려고 매일 와 주어도, 학식 있는 진정한 의사를 알아볼 리가 없고--존, 너는
머리가 깨졌고, 죠지 메리, 너는 여섯 시간 전에 학질에 걸려 온 몸을 떨고, 지금 네 눈깔이
누르무레하다는 걸 알고나 있니? 짐작컨대, 구조대가 오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오고 있어. 곧 도착할 거야. 그때가 되면 인질을 잡고 있는 게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될 거다. 둘째 질문에 관해서는, 왜 협상을 했느냐
하는 말이겠는데--음, 너희들이 내게 기어와서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어?--겁에 질려 설설 기어와서는 말야--협상을
안했다면 너희들은 굶어 죽었을 거야--하지만 그래서 협상을 한 것은 아니지! 여길 보라구--이것 때문이야!”
그가 땅바닥에다 종이 한 장을 던졌고,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여관에서 죽은 선장의 궤짝 바닥에서 유지에 싸인 채 내 눈에 띈, 세 개의 붉은 가위표를
한, 누런 종이에 그린 보물지도임을 나는 즉시 알아보았다. 박사님이
왜 이 지도를 그에게 주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니, 그 지도의 출현이야말로 살아남은
해적들에게는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쥐를 덮치는 고양이들처럼 달려들었다. 손에서 손으로 빼앗아가며 보았다. 욕설과 고함과 어린애처럼 깔깔대며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마치 보물을 바로 손에 넣고 무사히 배를 탄 양이나 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맞아, 플린트의 보물지도야. J.F 라고 쓰고 및줄을 친 다음, 옆에 매듭 표시를 한 것도 그렇구. 언제나 그렇게 했지.” 죠지가 말했다.
“멋지군. 그런데 보물을 어떻게 운반하지? 배가 없으니 말이야.”
실버가 벌떡 일어나 벽을 집고 섰다. 그가
소리쳤다.
“죠지, 내 경고 하건대, 그따위 건방진 소리 한 번만 더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 어떻게 운반하냐구? 그걸 말이라고 하니?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이야. 너하구 그 얼간이들이 끼어들어 배를 잃어버리구서는! 그런데 너희들은
운반 못해. 그럴 능력이 없다구. 지능이 바퀴벌레만도 못해. 그런데, 죠지 메리 말이야, 말은 공손하게 할 줄 알 텐데, 또 그렇게 해야 하구. 그럼, 그렇게
해야지.” 늙은 몰건이 말했다.
“옳은
말이요.” 요리사가 말했다.
“옳고
말고. 너희들은 배를 잃고, 나는 보물을 찾아냈어. 누가 더 임무를 잘 완수했니? 제기랄, 이제 나는 때려치울테다! 너희들 마음대로 좋아하는 사람 뽑아. 선장질 더하고 싶지 않아.” 해적들이 합창했다.
“실버! 영원한 선장님, 영원한 바베큐.” 실버가 외쳤다.
“저렇게들
외치고 있지? 죠지, 내 생각에는 말이지, 자네는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내가 복수에 불타는 사람이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하구 말이야. 복수를
해본 적도 없어. 자, 여보게들, 이 종이 쪽지를 어떻게 한다? 쓸모가 없어져 버렸는데, 그렇지? 디크야 성경을 찢었으니, 유감스럽지만 이제 저주가 따를 테고.” 자신에게 닥쳐올 천벌에 겁이 잔뜩 난 디크가 신음했다.
“성경에
입을 맞추면 아직 괜찮지 않겠어요?” 실버가 코웃음치며 대꾸했다.
“한
장이 찢겨나간 성경이라! 속절없는 짓이야. 찢어진 성경은
노래책이나 같아.” 그때 디크가 조금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속절
없다구요? 그렇다면, 노래책을 보관하는 일도 괜찮겠네요.” 실버가 그 종이를 내게 주며 말했다.
“짐, 이 걸 가져. 기념품으로 주겠다.”
1크라운 동전 크기의 동그란 종이쪽지였다. 성경의
마지막 한 장을 찢은 것이므로, 뒷면은 백지였다. 앞면에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몇 귀절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개와
살인자들은…..성밖에 있으리라(요한계시록 22:15: 옮긴 이)’라는
말씀이 내 마음을 비수처럼 찔렀다. 종이에 묻은 재가 내 손가락을 더럽혔다. 뒷면에는 숯으로 쓴 "추방"이라는 단 한마디가 있었다. 지금도 그것을 기념품으로 간직하고
있는데, 희미해진 글씨는 손톱에 긁힌 무슨 자국 같다.
그 밤은 이렇게 끝났다. 술을 한잔씩 마신 다음 모두 잠자리에 들었고, 실버는 죠지 메리에게 앙갚음을 했는데, 보초를
세우면서 초소를 이탈하면 죽여버리겠다고 겁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목격한 실버의 뛰어난 그때 처신--한편으로는 반란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비참한 삶을 구하기 위해, 가능하던 불가능하던 모든 수단을 가리지 않는 실버의 뛰어난 몸가짐에 대해, 그리고 그날 오후 위기일발의 순간에 내가 죽인 그 해적에 관해, 오랫동안 잠 못 이루고 많은 상념에 빠졌던 일을 하나님도 아셨을 것이다. 그가 평화롭게 잠들어 코를 드르렁거렸지만, 그에게 다가오는 어두운 그림자와 그를 기다리는 치욕적인 교수대를 생각하니, 비록 악한 사람이긴 하나, 그에 대한 연민으로 내 마음이 아팠다.
제30장
맹세
나는, 아니 우리 모두, 문설주에 기대어 잠들었던
보초까지, 숲 언저리에서 우리를 부르는 맑고 쾌활한 목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어이, 통나무집 사람들 들어! 나 의사다.”
정말 박사님이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기뻤지만, 마음이 착잡했다. 마음 대로 몰래 빠져나온 내 행동이 뇌리를 스쳐
갈피를 못 잡았고, 그로 인해 내가 이렇게 되어버린 일을--해적들에게
잡혀 위험에 빠진 형편--생각하니 박사님 얼굴 보기가 부끄러웠다.
아직 날이 새지 않아, 그는 한밤중에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총안으로 뛰어가 내다보니, 실버가 그랬듯이, 낮게 깔린
안개 속에 다리가 반쯤 잠긴 채 박사님이 서 있었다. 실버가 잠시 친절은 하나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목소리로 외쳤다.
“박사님! 안녕히 주무셨는지요. 언제나 일찍 일어나시고 활기가 있으시군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도 잡는다는 속담도 있지요. 얘, 죠지, 냉큼 일어나 박사님이 사다리를 타고 갑판에 오르시도록(여기서는 물론
은유적인 표현이다: 옮긴 이) 도와 드려라. 환자들은 모두 잘 있습니다--모두들 멀쩡하고 기분들이 좋습니다.”
목발을 짚은 채 언덕 위에 서서, 한손은
통나무집 귀퉁이를 잡고, 예나 다름없는 목소리, 태도, 얼굴 표정을 지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그가 계속 떠들었다.
“박사님, 박사님도 깜짝 놀랄 소식이 있습죠. 여기 어린 손님--, 그가 있어요! 새로 온 식객,
교양 있고 음악가처럼 단정한 투숙객이 말이죠. 이 죤 옆에 꼭 붙어서, 화물감독관처럼 잠을 잤습니다--마치 두 척의 배가 붙어 있듯, 온 밤을 말입니다요.”
그때 박사님은 울 안으로 넘어와 요리사에게 꽤 가까이 있었고, 당황해 하는 그의 말소리가
들렸다. 박사님이 물었다.
“짐이 아니겠어?” 실버가 말했다.
“바로
그 짐입니다.”
박사님이 말은 안 했지만 놀란 듯 멈칫하고는, 잠시후
다시 움직였다. 박사님이 말했다.
“자, 자, 실버, 자네가 말했듯이 일이 먼저고, 기쁜
일은 나중이지. 자네 환자들을 먼저 보자구.”
박사님은
통나무집으로 들어선 다음, 근엄한 표정으로 내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아픈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미덥지 않은 악당들 가운데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분명 알았을 터이지만,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듯했다. 평화로운 어느 영국 가정을 치료차
방문한 여느 의사처럼, 환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마치
그들은 아직도 착한 선원들이고 박사님은 배의 탑승 의사로서,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박사님을 맞이하는
것으로 보아, 박사님의 점잖은 태도가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본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사람에게 박사님이 말했다.
“곧
나을 거야. 자네야 말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지. 자네
머리는 쇠처럼 단단한 게 틀림없어.” 또 죠지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음, 죠지, 자네는 어떤가? 혈색이 정말 안 좋군. 간에 이상이 있어. 내가 준 약 먹었나? 여보게들, 이 친구 그 약 먹었나?” 몰건이 대답했다.
“아, 네, 박사님, 틀림없이
먹었습니다요.” 리브시 박사님이 아주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말이야 반란자들, 아니 차라리 죄수들을 치료하는 의사라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말인데, 죠지 국왕폐하(국왕폐하 만세!)를 위해서도 그리고 교수대를 위해서라도, 한 사람이라도 목숨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 명예라고 생각을 해.” 해적들이 서로 마주보며 말 없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한 사람이 말했다.
“디크는 좋지가 않은데요.” 박사님이 말했다.
“그래? 이리 와 봐, 디크, 혀 좀 보자구. 혀가 정상일리가
없지! 자네 혀를 프랑스 사람들이 보면 기겁을 할 거야. 자네, 열병에 걸렸군.” 몰건이 말했다.
“저런, 성경을 찢더니만, 벌을 받은 거지요.” 박사님이 반박했다.
“잘
몰라서 그런 말들을 하지. 상식들이 없으니, 좋은 공기와
나쁜 공기, 마른 땅과 전염병이 득실거리는 습한 땅을 구별 못해서야.
내 의견으로는 말야--물론 의견에 불과 하지만--자네들
그 무서운 학질이 걸리기 전에 모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커. 늪지에서 야영을 했지? 실버, 내 자네에게 놀랐네. 자네는 저 친구들처럼 어리벙벙한 것도 아닌데, 건강수칙에 대한 이해가 기초도 없는 것 같아.”
살벌한 반란자나 해적들이라기보다는 자선학교 어린 학생들처럼 웃음꽃을 피우며 화기애애한 가운데, 일일히
약을 주고 처방을 해준 다음, 박사님이 덧붙혀 말했다.
“좋아, 음, 오늘은 이것으로 끝. 그런데
말이야, 저 소년하고 말 좀 해야겠어.”
그리고는 나를 향해 예사롭게 고개를 끄덕했다.
죠지 메리는 약이 쓴지 침을 흘리며, 뱉으며 문가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박사님의 첫마디에 홱 돌아서며 화난 얼굴로 ‘안돼’하며
욕지거리를 했다.
실버가 손바닥으로 술통을 두드렸다. 사자처럼
사납게 주위를 둘러보며 으르렁거렸다.
“다…악…쳐!” 그리고 곧 조용한 소리로 계속했다.
“박사님, 박사님의 저 소년에 대한 애정을 알고 있어, 내가 그 문제를 좀
생각해 봤습니다. 박사님이 돌보아 주셔서 고마운 마음 그지없고, 또
보시다시피 우린 박사님을 믿고, 주신 약을 술마시듯 먹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공평한 방법이 있습니다. 호킨스, 맹세, 어린 신사로서의--너는
출신이야 가난하지만 어린 신사이지--맹세, 도망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할 수 있니?”
나는 얼른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실버가 말했다.
“그러면, 박사님, 울 밖으로 나가세요. 저
아이를 곧 울타리 안 쪽에 세우고 신호를 할 테니, 그 틈새로 긴 얘기를 나눠 보세요. 박사님, 행운을 빕니다. 우리
모두 지주님과 스몰릿 선장님에게도 경의를 표합니다.”
박사님이 요새 밖으로 나가자마자, 실버의 무서운 눈매에 꼼짝을 못하던 해적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대체로 실버는 동료들의 이익을
희생해 자신의 안전만을 노리는 이중행동을 한다는 욕을 먹었는데, 한마디로 말해,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을 했다. 내 눈에도 분명 그렇게 보였고, 그가 동료들의 분노를 어떻게 달랠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동료들보다
뛰어난 사람이었다. 지난 밤의 승리로 그들을 정신적으로 압도했다. 바보니
얼간이니 있는 대로 욕을 하고는, 나와 박사님간에 대화가 필요하다면서,
그들의 얼굴에 대고 지도를 흔들며, 바야흐로 보물이 손에 들어오려는 순간에 박사와의 약속을 과연 너희들이 깰 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다. 그가 외쳤다.
“아니지, 제기랄, 때가 와야 깨는 거야. 그때까지는
술로 그 의사의 장화를 닦는 한이 있더라도, 그놈을 이용해야겠어.”
그리고 나서 불을 피우라는 명령을 내린 다음, 그의
달변에 납득은커녕 말문이 막혀 어리둥절한 부하들을 내버려두고, 내 어깨를 잡은 채 목발을 집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가 말했다.
“얘, 천천히, 좀 천천히 가자. 서두르는
눈치를 보이면, 저놈들이 순식간에 덮칠 거야.”
모래 마당을 조심조심 지나 울타리 바깥에서 기다리는 박사님 쪽으로 다가가, 말소리가 들릴 수 있는 거리에 이르자 실버가
멈췄다. 그가 말했다.
“박사님, 이제 말씀을 드리고자 하니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아이의
생명을 제가 어떻게 구했으며 그일로 제가 선장자리에서 쫓겨날 뻔한 일을, 얘가 말씀을 드릴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박사님, 저처럼 이렇게 역경을 헤쳐나가는
사람에게는--젖 먹던 힘까지 다해 죽자사자하고 있지요--뭔가
격려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제 목숨도 목숨이지만--저
애의 생명이 걸린 일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제발 너그러운 말씀,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한 말씀해 주세요.”
실버는 통나무집을 벗어나 부하들을 뒤로 하자, 딴판인
사람이 돼 버린 것이다. 초췌한 얼굴에 목소리는 떨렸는데, 그렇게
수심에 찬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리브시 박사님이 말했다.
“그래? 죤, 겁나는 것이 없을 텐데?”
“박사님, 저는 겁쟁이는 아닙니다. 그럼요,
절대 아니지요.” 그가 손가락을 튕겨 탁하는 소리를 냈다.
“설령
겁이나더라도 그런 말을 안 하지요. 하지만 솔직히 교수대는 무섭습니다.
박사님은 훌륭하시고 진실한 분이죠. 더 이상 훌륭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저지른 잘못은 잊으시고, 잘 한 일들만 기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짐과 박사님만 남겨두고 자리를--자, 여기--비켜 드릴 테니, 제 문제도 좀 잊지 말고 거론하시고요, 너무 질질 끌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한 곳까지 물러간 다음, 나뭇등걸에 걸터앉아 휘파람을 불면서, 간간이 몸을 돌려 나와 박사님을, 그리고 아침식사를 위해 베이컨과 빵을 가져오려고 통나무집과 모닥불--그들은
서둘러 다시 불을 지폈다--사이의 모래밭을 오가는 무뢰한들을 지켜 보았다. 박사님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하튼, 짐, 여기 잡혀 있다니. 너는 말이지,
네가 뿌린 씨를 거두고 있는 거야. 너를 탓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하나님은 아시겠지만, 심하다고 하든 말든 할 말은 해야겠다. 스몰릿 선장이 건강할 때는 제자리를 지키던 놈이, 부상을 당해 지휘를 못하니까 도망을 쳤더란 말이지. 말할 수 없이
비겁한 짓이야!” 지금 고백하지만, 그때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말했다.
“박사님, 용서해 주십시오. 제 잘못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어쨌던 지금 제 생명이 위험하고, 실버가 아니었던들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
박사님, 제 말씀을 믿어 주십시오. 저는 죽을
수 있습니다--죽을 죄를 지었구요--하지만 고문이 두렵습니다. 저들이 고문을 한다면…. ” 박사님이 말투를 부드럽게 바꾸며 내 말을 가로챘다.
“짐, 이럴 수는 없어. 고만 울고, 울타리를 넘으렴. 도망가자꾸나.” 내가 말했다.
“박사님, 저는 맹세를 했습니다.” 그가 외쳤다.
“알아, 알고 있어. 짐, 지금 도망을 갈 수밖에 없어. 책임이건
불명예건 모두 내게 맡겨. 그렇지만 얘, 너를 여기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뛰어 넘어! 넘어온 다음, 산양처럼 뛰어 달아나자꾸나.” 내가 거절했다.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박사님은 잘 아시면서요--박사님도 지주님도, 선장님도 아시지만 물론 저도 압니다. 실버는 저를 믿어요. 저는 맹세를
했고, 그래서 그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렇지만 박사님, 드릴 말씀을 끝내겠어요. 만일 그들이 고문을 한다면, 저는 배가 있는 곳, 위험 속에서도 운 좋게 배를 댄 곳, 북쪽 만의 해변 남쪽 만조선滿潮線이 닿는 곳을 실토할지도 모릅니다. 썰물이
반쯤 빠지면 배가 갯벌로 올라 앉을 겁니다. 박사님이 외쳤다.
“배를
대다니!”
내가 한 일을 재빨리 설명했고, 그는 잠자코
들었다. 말을 끝내자 그가 말했다.
“이번 항해에는 운명이라는 게 있는가 보군. 네가 매번 우리 생명을 구했단 말이야. 혹시라도 우리가 너를 죽게 내버려둘 것 같다고 생각하니? 얘, 그런 보답은 있을 수 없어. 너는 반란 음모도 알아냈구, 벤 건도 발견하고--이런 일은 네가 아흔 살까지 산다고 해도, 다시 할 수 없는 일이지. 음, 그런데 벤 건의 일 말이지! 그래, 사람을 그렇게 무인도에 팽개쳐 버리는 일은 몹쓸 짓이야.” 그가 소리쳐 불렀다.
“실버!” 그가 다가오자 박사님이 계속했다.
“실버, 내가 충고 한마디 하겠어. 보물 찾기를 너무 서두르지 말라구.” 실버가 말했다.
“아니지요, 박사님, 불가능한 일을 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죄송하게도, 저놈들에게 보물을 찾으라고 해야만 그나마 저 애 목숨이나
제 목숨을 건질 수 있어서입니다. 제 말씀 믿으세요.” 박사님이 대답했다.
“음, 실버, 그렇다면 말이야, 한마디 더 하겠네. 보물을 찾은 다음 닥쳐올 폭풍을 조심해야 하네.” 실버가 말했다.
“박사님, 그 말씀은 뭔가 의미가 알쏭달쏭하여, 남자대 남자로서 제가 묻겠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찾고자 하시며, 왜 통나무집을 떠나셨고, 무슨 일로 거기서 그 보물지도를 제게 주셨는지요? 지금까지 눈 딱
감고 박사님의 말씀을 따랐지만, 희망을 가질 만한 소식은 없었지요! 지금
그 말씀은 너무하시다 뭐 이런 생각입니다. 그 말씀의 의도를 못 밝히겠다 하고 분명히 말씀을 하시면, 저도 이 일을 때려치우겠습니다.” 박사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못해. 더 이상 말할 건더기도 없어. 알다시피, 비밀이랄 것도 없고, 실버, 그렇지 않다면야 왜 말을 안해 주겠어. 그렇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아니 그 이상 자네를 돕겠네. 스몰릿
선장이 용납을 안해도 말이지. 먼저 희망적인 말 한마디해볼까?
실버, 우리
모두 이 곤경에서 살아남으면 말이야, 내 거짖 증언을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자네 목숨을 구하도록 하겠네.”
실버의 얼굴에 기쁜 빛이 역력했다. 그가 외쳤다.
“우리
어머니라도 그 이상은 말씀을 못하실 겁니다.” 박사님이 덧붙였다.
“음, 이것이 우선 일러두는 말이네. 그 다음엔 말이지, 저 소년을 늘 옆에 두게.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크게 소리를 지르라구. 나는 돌아가서 자네를 도울 방법을 찾아 보겠네. 말 뿐이 아니라는
걸 보여 줘야겠지. 짐, 몸 조심 하거라.”
리브시 박사님은 울타리 사이로 손을 내밀어 나와 악수를 한 다음, 실버에게 머리를 끄덕하고는, 숲속으로 성큼성큼 사라져버렸다.
제31장
보물 찾기--플린트가 표시한 곳
우리만 남게 되자, 실버가
말했다.
“짐, 내가 네 목숨을 구하고, 넌 내 목숨을 구했어. 내
이 일을 잊지 않을 게. 슬쩍 보니까, 의사가 도망을 치자는
손짓을 하더군. 네가 싫다고 말하는 게 똑 뿌러지게 들리데. 짐, 잘 했어. 이건 내가 통나무집을 쳐들어가다가 망한 후, 처음 찾아온 한가닥 희망인데, 다 네 덕택이지. 또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의사의 말을 따라 여기 이 보물 찾기에 나서고는 있지만, 짐, 아무튼 의사의 그런 꿍꿍이 속셈은 싫어. 우리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굳게 뭉쳐, 다가올 운명을 개척하자구.”
바로 그때, 화톳불로부터 누군가 아침식사가
준비 되었음을 알려 왔고, 우리는 곧 건빵과 구운 베이컨을 먹으려고,
여기저기 모래 밭에 앉았다. 황소라도 구을 듯 크게 불을 지펴, 불길이 뜨거우니 바람을 등지고 다가서야 했고, 그것도 조심에 조심을
해야 했다.
아끼는 마음들이 없으니, 먹을 수 있는 양보다 서너 배나 더 음식을 만든 듯했다. 한 사람이 얼간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먹다 남은 음식을 불에다 던지자, 불길이
일며 요란스럽게 타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들을 그날 아침 나는 생전 처음 보았다. 하루벌어 하루먹는 것이 말하자면 그들의 유일한 생활방식이었다. 음식을
마구 버린다거나 잠을 자버리는 보초로 보건대, 숨어 있다 덮치는 일에는 용감할지 모르지만, 장기간에 걸쳐 계획을 필요로 하는 일에는 영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버마저 앵무새 플린트를
어깨에 앉힌 채 그들과 식사를 하면서, 그 잘못에 대해 한마디도 야단을 치지 않았다. 그 당시 그렇게 주도면밀했던 그였기에, 내가 더 놀랬다. 그가 말했다.
“아, 여보게들, 여기 이 바베큐가 자네들을 위해 머리를 쓰고 있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라구. 지도두 손에
넣고. 배는 분명 그치들의 수중에 있어. 아직 감춘 데를
모르지만 말이야. 허나 일단 보물을 찾은 다음, 배를 찾아야
하겠지. 우리 손에 배만 들어왔다 하면, 승리는 우리 것이지.”
입에 뜨거운 베이컨을 가득 문 채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말에 모두들 희망과 자신감을
다시 찾았고, 그도 분명 자신이 생긴 듯했다. 그가 계속했다.
“저
아이는 말이야, 둘이 얘기를 나누던데 아마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지막 대화였겠지. 새 소식도 들었는데, 다 저 아이 덕분이야. 그런데 뭐 이건 다 지나간 얘기고, 보물을 찾으러 갈 때 쟤한테
사고가 나면 안되니까 줄로 묶어 금덩어리 다루듯 데리고 가야 해. 일이 끝날 때까지만 말이야. 일단 배와 보물이 모두 손에 들어와 한가족처럼 행복하게 바다로 나가게 되면,
당연히 우리는 호킨스씨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기여한 공도 있으니 그의 몫도 줘야겠지.”
그들이 기뻐하는 것이야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맥이 탁 풀렸다. 실버는
이중으로 배반을 하는 사람이니, 그 계획이 성공할 수만 있다면, 주저
없이 결행을 할 터였다. 그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지만, 우리편에
섬으로서 간신히 교수형을 면하기 보다는, 해적들 편에 서서 보물과 자유를 더 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일이 뜻대로 안되어 어쩔 수 없이 그가 리브시 박사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경우라도,우리는 위험했다. 그를 따르던 5명의 무자비하고 힘센 해적들이 이 사실을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그와 나는--절름발이와 소년인--그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내 동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요새를 떠났는지, 보물지도는 왜 포기했는지 알 수가 없었고, 무엇보다 '폭풍에 대비 하라’고 실버에게
한 박사님의 마지막 말뜻을 몰라, 아침밥맛도 없었고, 보물을
찾아 나서는 그들의 뒤를 따라가야 하니 얼마나 가슴이 쓰렸을지, 독자 여러분이 쉽게 이해할 것이다.
우리 모습을 누가 보았더라면 가관이었을 터인데, 더러운 선원복을 입은 채, 나
말고는 모두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 실버는 화승총 두 자루를 앞뒤 멜빵에 메고 허리에 칼을 찬 채, 넓다란 외투 자락
양쪽 주머니에는 각각 권총 한 정씩을 넣었다. 그 기괴한 모습에다 한 수 더해, 앵무새 플린트가 그의 어깨에 앉아
별 뜻도 없는 뱃사람들의 잡소리를 꽥꽥거렸다. 밧줄에 허리가 묶인 나는 그의 뒤를 꼼짝없이 따라다녔는데, 어떤 때는 손으로 어떤 때는 그 튼튼한 이빨로, 그가 줄 끝을 물고
잡아당겼다. 틀림없이 나는 춤추는 곰 모양새가 아니었을까 한다.
다른 사람들은 곡괭이나 삽 등--상륙할
때 히스파니올라에서 가장 먼저 챙긴 물건들이다--이것저것
짐을 날랐고, 점심식사를 위해 베이컨이나 빵, 브랜디를 옮기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보급품은 우리들이 요새로 운반해 놓았던 것들이었고, 실버가 그 전날 밤에 한 말로
미루어, 그와 박사님 간에 무슨 약속이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박사님과
계약이 없었다면, 배를 잃은 실버나
그의 부하들은 맹물이나 사냥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개천물이 입맛에 맞게 깨끗할 리도 없었을
것이고, 뱃사람들의 총쏘는 쏨씨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식량이
바닥나 사냥을 한다 해도, 무엇보다 화약이 넉넉치 않았을 것이다.
어쨌던 그런 차림새를 하고 출발해서--통나무집 그늘에서 쉬어야 할, 머리가 깨진 그 해적도 갔다--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두 척의 보트가 기다리는 해변으로 갔다. 그 배들도 술주정뱅이들의 관리 부실로, 두 척 모두 흙투성이에다 물이 괴어 있었고 더구나 한 척은 좌석이 망가진 채였다. 모두 안전지대로 옮겨야 해서, 두 패로 나뉘어 한 척씩 맡아, 만灣 가운데로 저어 나갔다. 노를 저으며 보물지도에 관한 의견이 오갔다. 표시를 해 놓은 붉은 가위표가 너무 커, 보물이 묻힌 장소가 정확치 않았고, 뒷면에 적어 놓은 기록이 애매하다고들 했다. 독자 여러분은 다음을 기억할 것이다.
큰 나무, 스파이 글라스 마루터기,
북북동에서 정북 쪽으로 11.25° 지점.
해골섬 동남동에서 정동쪽으로
3미터 지점.
그러니까 키 큰 나무가 가장 중요한 표시였다. 만을
저어가던 바로 우리 눈 앞에 칠십에서 백미터 가량 높이 솟은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는데, 절벽 위에서
시작된 고원지대가 북쪽으로 뻗어 나가다, 스파이 글라스의 남쪽 경사면과 만난 다음,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오르다가는, 험악한 단애斷崖인 뒷돛대봉과 만나게 된다. 고원지대에는 키가 높고
낮은 소나무들이 뒤섞여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15미터나 되는 키가 큰 품종의 소나무들이 다른 나무들
위로 여기저기 솟아, 플린트
선장이 지적한 특별히 "키
큰 나무"가 어느 것인지는, 바로 그 나무가 선
자리를 알아야만, 그리고 나침판이 가리키는 방위각을 읽을수 있어야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사정이 그와 같은데다가 아직 반도 채 못 갔는데, 보트를
탄 모두가 제멋대로들 한 그루씩 찍었지만, 롱 죤만은 어깨를 들석하며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잠자코 있으라고 했다.
도착도 하기 전에 지치지 않도록 실버의 지휘에 따라
천천히 노를 저었고, 긴 물길을 지나 두 번째 개천--나무가
우거진 스파이 글라스의 절벽쪽으로 흐르는-- 입구에서 배를 내렸다. 거기서 왼쪽으로 길을 꺽은 다음, 고원지대를 향해 경사면을 오르기 시작했다.
진창길에다가 늪지의 수목이 울창해 처음에는 발걸음이 매우 더뎠다. 점점 경사가 심해지면서 돌뿌리가 채였고, 나무의 모양새가 달라지더니
숲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우리는 섬에서 가장 상쾌한 지점에 다가서고 있었다. 짙은 향기를 내는 금작화 한 그루와 꽃이 만발한 떨기나무들이 초원을 뒤덮고 있었다. 녹색의 육두구肉荳寇 나무 숲이, 붉은색 줄기의 소나무들이 드리우는
그늘과 어울려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 두 가지 나무의 향기가 서로 섞여 향내를 풍겼다. 공기도 신선하고 원기를 돋구어, 찬란한 햇빛 아래 우리의 기분이란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해적들이 기뻐 소리를 지르며 좌우로 뿔뿔히 흩어져 여기저기 쏘다녔다. 실버와 나는 무리의 가운데쯤에서
뒤쳐져 따라갔다. 나는 밧줄에 묶인 채였고, 실버는 헐떡거리며 미끄러지는 자갈길을 절뚝절뚝 걸었다. 이따금 내가 부축을 해 주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발을 헛디뎌
벼랑 아래로 굴렀을 것이다.
그처럼 힘들게 1킬로미터 정도를 나아가 고원지대의 문턱에 이러렀을 때, 왼편에서 제일 앞서가던 사람이 공포에 질린 듯 소리쳤다. 계속 비명을
지르는 그에게 모두들 뛰어갔다. 늙은 몰건이 우리를 제치고 앞으로 뛰어가며 말했다.
“보물을
찾았을 리는 없구, 보물은 더 위 쪽이야.”
가서 보니, 그의 말대로 정말 보물과는
딴판이었다. 높다란 소나무 밑을 뒤덮은 푸른 덩굴나무를 조금 제치고 보니, 사람의 해골인, 몇 개의 뼈 조각이 걸레가 다 된 옷과 함께 흩어져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그 순간 모두들 으시시한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까 한다. 누구보다도 용감한 죠지 메리가 다가가, 옷 조각을 들며 말했다.
“뱃사람이군. 그런데 좋은 옷감이야.” 실버가 말했다.
“그렇지, 그래. 여기 주교님이 누워 있을리는 없고. 그런데 말이야, 뼈가 누어 있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우니
왜 그렇지?”
다시 보니 정말 시체가 그런 식으로 눕는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흩어진 뼈야 그렇다고 하더라도(아마 새들이 쪼았거나 아니면 덩굴나무가
천천히 자라면서 뼈들을 건드렸을 수도 있다), 곧게 누운 자세에서--다리는
한쪽을 가리키고, 다이버처럼 머리 위로 치켜 모은 두 손은, 다리가
가리키는 방향과는 정 반대쪽을 가리켰다. 실버가 말했다.
“나의
이 다 된 골통으로도 생각나는 게 하나 있네. 자, 나침반을
보자구. 저기 이빨처럼 튀어 나온 거 말이야, 그 게 해골섬의
꼭대기야. 손 뼈가 가리키는 대로 선을 따라 방향을 재 보자구.”
각도를 재 보았다. 해골은 해골섬을 똑바로 가리켰고, 나침반의
눈금은 정확히 동남동에서 정동쪽을 가리켰다. 실버가 소리를 질렀다.
“내
생각대로야. 이 바늘이 가리키는 곳 말야. 죽 따라가면 하늘
위 북극성도 가리키고, 돈더미도 가르키지. 그런데, 제기랄! 플린트는 생각만 해도 내 오금이 저리는데, 이건 그가 장난 삼아 한 짓이 분명해. 여기에 여섯 명을 데리고 와 죽여 버린 것이지. 그리고는 시체 하나를
끌어다 나침반에 맞추어 뉘어 놓은 거야. 아이구 맙소사! 뼈가
굵고, 머리털이 누렇던데, 아마, 앨러다이스일 거야. 톰 몰건, 앨러다이스 알지?” 몰건이 대답했다.
“그러믄요. 알구말굽쇼. 상륙했을 때 나한테 돈도 꿔 가구, 칼도 빌려 갔는뎁쇼.” 다른 해적이 물었다.
“칼이라구
그랬지? 그럼 여기 어딘가 있을 테니 찾아 보세. 플린트는 부하의 주머니를 뒤지는 사람이 아니었지. 무거우니 새가 물어 갔을 리도 없구.” 실버가 소리쳤다.
“아이구, 네 말이 맞다.” 아직도 해골 주위를 어기적거리면서, 메리가 말했다.
“남아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수. 동전 한 닢, 담배곽 하나 안
보이구. 거 참 이상하네.” 그 말에 실버가 맞장구를 쳤다.
“정말
이상해. 께름칙도 하고 말야. 여보게들, 큰 일 날 뻔했어! 만일 플린트가 살았더라면, 여기서 우리는 모두 그의 밥이 되었을 거야. 여섯 명이 모두 백골이 되다니, 우리도 여섯인데.” 몰건이 말했다.
“플린트가 죽은 걸 이 두눈으로 똑똑히 봤는뎁쇼. 빌리가 날 데리고 들어 갔어요. 거기 그가 누워 있었는데요, 두눈에다 동전을 올려 놓았더라구요.” 머리에 붕대를 감은 그의 동료가 말했다.
“그래, 분명히 죽어 지옥으로 떨어졌지. 귀신이
떠도는 일이 있다면, 플린트 귀신이
그럴 거야. 플린트는 말야,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사나운 꼴로 죽었어!”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러게
말이지. 화가 나면 럼을 더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노래를 부르던 게 생각나는구만. ‘열다섯 사람’이
유일하게 아는 노래였어. 사실 말이지, 그가 죽은 다음에는
그 노래를 들으면 아주 싫더라구. 날씨가 더워 문이라도 열어 놓으면,
그 흘러간 노래가 생생하게 들려 왔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죽고 없어졌네그려.” 실버가 말했다.
“자, 그만, 그만. 그는 죽었어. 죽은 사람은 못 걸어다녀. 적어도 낮에는 말이야. 내 말 믿으라구. 호기심 많은 고양이가 목숨을 잃는다는 말이 있지. 보물이나 찾으러 가자구.”
다시 길을 떠났다. 햇빛이 뜨겁고 눈부셨지만, 더 이상 해적들은 뿔뿔히 흩어져 떠들지를 않고, 떼를 지어 말없이 숲속을 걸었다. 죽어버린 그 해적이 무서워 겁이 잔뜩 났던 것이다.
제32장
보물 찾기--숲속의 목소리
공포로 인해 기력이 빠진데다 실버의 다리도 그렇고, 몸이 아픈 사람도 있고 해서, 우리는 고원지대로 들어서자마자 그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곳은 서쪽을 향해 조금 기울어진 땅이어서 좌우로 시야가 넓게 들어왔다. 우즈 곶에 파도가 밀려와 부서지는
모습이 숲 너머 보였다. 뒤를 돌아 보니 히스파니올라가 정박했던 바다와 해골섬이 내려다 보였고--모래톱과 섬의 동쪽 저지대
너머로 또렸하게--망망대해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눈앞에
무시무시한 절벽으로 도도하게 서있는 스파이 글라스에는, 군데군데 소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었다. 사방이 쥐죽은 듯했고, 온 바다로부터 산으로라도 오를듯 솟구쳤다가 부서지는 먼 파도소리와 수많은 풀벌레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사람도 배도 보이지 않는 넓고넓은 바다였다. 그 같은 광활한 정경이
더욱 고독감을 느끼게 했다.
실버가 쉬면서, 나침판이 가리킨 지점이 틀리지
않았나 따져 보았다. 그가 말했다.
“저기
커다란 소나무 세 그루 말이야, 해골섬으로부터 대략 직선상에 있어. ‘스파이 글라스 마루터기’라고 적어 놓은 것 말이야, 내 생각에는
더 아래 쪽을 가리키는 말 같아. 이거야 꼬맹이들 보물찾기 놀이 같구먼. 먼저 밥이나 먹자구.” 몰건이 투덜댔다.
“플린트를 생각하면--내게 한 짖이라니--밥맛도 없습니다요.” 실버가 말했다.
“거
봐라. 그러니까, 넌, 그가
죽은 걸 일월성신에게 고맙다구 하라구.” 또 한 해적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정말
더러운 작자였오. 쌍판대기도 검푸르뎅뎅하고.” 메리가 거들었다.
“럼을
마셔대서 그랬지. 검푸르뎅뎅이라! 맞아, 푸르무레했어. 맞는 말이야.”
해골을 본 다음 기억이 되살아나 그런 말을 지꺼린 그들이, 점점 목소리를 죽여 거의 속삭임으로 변한 말소리가, 이내 숲의 침묵
속으로 잦아들었다. 바로 그때, 우리의 귀에 읶은 그 노래가
가냘프고 떨리는, 고음의 목소리를 타고 바로 눈앞 숲으로부터 들려왔다.
“죽은 사람의 궤짝 위에 열다섯 사람-
요-호-호, 그리고 럼 한 병!”
그 해적들처럼 그렇게 겁에 질려 떠는 사람들을 그때까지 나는 본 적이 없다. 마법에 걸린
듯, 여섯 사람의 안색이 변했다. 다리를 후둘후둘 떨기도
하고 서로 껴안기도 했다. 몰건은
땅바닥을 기었다. 메리가
소리쳤다.
“저기--플린트닷!”
그때 마치 누구인가가 그 사람의 입을 틀어막기라도 한 듯, 별안간 들려온 것처럼 별안간 노래 소리가 뚝 끊겼다. 푸르른 나무숲의
맑고 밝은 대기를 가르는 그 노래소리가, 내게는 달콤하고 경쾌했지만,
해적들에게는 괴이하게 들린 것이다. 입술이 새파래진 실버가 말했다.
“자, 자, 별거 아냐. 떠날
준비나 해. 조짐이 좋아.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 장난을
치고 있어--살아 있는 사람이 말이지. 내 말 믿으라구.”
스스로의 말에 용기를 얻어 실버는 잃었던 안색을 되찾았다. 그의 격려에 부하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자, 이번에는 노래가 아닌, 힘없는 목소리가 멀리 들리며, 스파이 글라스의 절벽에 희미하게 메아리 쳤다.
“다비 맥그로.”--달리 이렇다 말할 수 없게 들리는 소리였다--“다비 맥그로! 다비 맥그로!” 몇 번이고 반복하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입에 못 담을 욕설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다비, 럼 가져와!”
눈이 휘둥그래진 해적들이 그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도 오랫동안, 그들은 공포로 입을 다문 채, 앞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 사람이 겁에 질려 말했다.
“플린트가 틀림 없어. 도망가자!” 몰건이 신음했다.
“저
건 플린트가 마지막 한 말입니다요.
이 세상에서 말입니다요.”
성경을 찢은 디크가 중얼중얼 기도했다. 그는 바닷사람이 되어 해적질을 하기 전까지는 흠이 없이 자란 사람이었다.
아직도 실버는 결연했다. 이빨을 덜덜 떨었지만, 굴하지 않았다. 그가 중얼거렸다.
“이
섬에서 다비라는 이름을 들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리밖에는 여기 온 사람들이 없다구.” 그리고 나서 힘차게 외쳤다.
“여보게들, 난 말이야, 보물을 찾으러 여길 왔어. 인간이건 귀신이건 날 단념 시킬 수가 없다구. 산 플린트도 내가 무서워한 적이 없는데, 제기랄! 죽은 놈이 뭐가 대수야. 여기서
4백미터도 안되는 곳에 70만 파운드가 있어. 보물을
찾아 나선 사람이 그따위 낯짝이 푸르딩딩한 늙다리 술주정뱅이 뱃놈이 무서워--더군다나 죽어 자빠진 놈
때문에, 그만한 보물을 눈앞에 두고 뺑소니를 치는 일을 본 적들 있니?”
겁 없이 지꺼리는 그의 말에, 용기는 커녕 해적들은 더더욱 무서워지는 모양이었다. 메리가 말했다.
“존, 영혼에 대한 욕설은 제발 그만!”
아무도 겁에 질려 말을 못했다. 할 수만
있었다면 뿔뿔히 도망이라도쳤겠지만, 존의 대담한 말이 도움이 될까 싶어, 그의 주위로 모두 모여들었다. 존은 자신만만했다. 그가 말했다.
“영혼이라구? 좋아, 그렇다구 치지. 그런데
말이야, 좀 이상한 게 하나 있어. 산이 울리더란 말이지. 그림자가 있는 귀신을 봤다는 사람은 없다구. 그렇다면 말야, 누가 받는다구 메아리를 보내는 거야? 거 이상하지 않아? 그렇지?”
그의 말을 나는 납득을 못했다. 그러나 미신에 사로잡힌 그들을 안심 시키는 말을 아무도
못했는데, 놀랍게도 죠지 메리가
한숨 놓으며 말했다
“존, 그 말 맞소. 머리 한 번 좋습니다그려. 모두들
그렇다고 할 거요. 자, 정신들 차리자구! 이 거 뭔가 잘못 돼 가고 있어. 플린트의 목소리와 비슷한 걸 나도 인정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우렁차지가 않아.
누군가 다른 놈--그놈의 목소리야.” 실버가 고함쳤다.
“빌어먹을, 벤 건이야!” 몰건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아이구
그랬구나. 맞아, 벤 건의 목소리!” 디크가 물었다.
“그게
그거 아니요? 벤 건도 플린트처럼 이미 몸뚱아리가 없어졌는데.” 그의 이 말에 늙은 선원들은 코웃음을 쳤다. 메리가 큰소리로 말했다.
“아니지, 누구도 벤 건한테 신경을 쓰지
않았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도 몰라.”
놀랍게도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안색을 되 찾았다. 곧, 머리를 맞대고 수근대다가, 그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더이상 들리지 않자, 연장과 먹을 것을 등에 메고 다시 발걸음을
떼어, 실버의 나침반을
손에 든 맨 앞의 메리를 따라, 우리는
해골섬으로 이어지는 일직선 상을 똑바로 나아갔다. 메리의 말이 옳았다. 죽었든 살았든, 벤 건을 마음에 두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디크만이 성경을 아직도 꽉 쥔 채, 겁먹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었는데, 아무도 안심을 시켜주는 사람 없이 벌벌떠는 그를 실버가 놀렸다.
“내가
뭐랬어. 그 성경은 소용이 없다구 했잖아. 기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성경이 귀신을 쫓을 것 같아? 천만에!” 하면서 잠시 멈춰, 그 굵은 손가락으로 목발을 두드렸다.
하지만 디크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곧 병이 났다. 더위 속을 빨리 걸어 지친데다가 마음고생까지 겹쳐, 리브시 박사님이 진단한 열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고원지대를 횡단하는 일은 어렵지가 않았다. 이미 말했듯이 땅이 서쪽으로 조금 기울어, 우리가 가는 길은 약간 비탈이 졌다. 크고 낮은 소나무들이 여기저기
자라고 있었다. 진달래 숲과 높다란 육두구 나무사이에 있는 넓은 대지는, 작열하는 햇빛으로 달구어 지고 있었다. 섬을 가로질러 북서쪽으로
그대로 밀고 나아가, 스파이 글라스의
마루턱에 다가서고 있었는데, 한쪽을 내려다보니 가죽 보트를 타고 내가 쩔쩔맸던 서쪽 만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마침내 큰 나무들 가운데 첫째를 찾아냈으나, 위치로 보아 우리가 찾는 나무가 아니었다. 둘째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소나무는, 나무 덤불 위로 거의 70여 미터나 치솟았는데, 통나무집 기둥은 될만한 검붉은 줄기의 그 거대한 나무가 만드는 그늘은, 가히
그 속에서 1개중대가 훈련을 받을만도 했다. 그 지점으로부터
동, 서 양쪽으로 멀리 바다가 보였는데, 뱃길 안내를 위해
지도에 그 나무를 표시해 놓은 듯했다.
그들은 모두 감격했다. 큰 나무 때문이 아니라, 그
넓은 그늘 어딘가 70만 파운드의
보물이 묻혀 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보물에 대한 생각으로,
지금까지의 공포감이 그들에게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모두들 눈에서 불이 튀었다. 발걸음이 빨라지고 나는 듯했다. 거기 기다리고 있는, 그들 누구나 일생을 호의호식할 수 있는 보물에만 온 정신을 팔았다.
실버는 투덜대면서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걸었다. 코가
벌름거렸다. 땀과 열기로 번들거리는 얼굴에 파리가 앉자 미친 듯 욕을 해댔다. 나를 묶은 밧줄을 가끔 세게 잡아채기도 하고 이따금씩 돌아보며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그가 거침없이 들어내는 속셈을 나는 훤히 알았다. 보물에 가까이
다가서면서, 그밖의 일들은 모두 잊은 것이다. 그가 한 약속이나
박사님의 경고는 과거지사가 되고, 보물을 차지하게 되면 밤에 히스파니올라를 몰래 찾아내, 섬의 우리 친구들을 모두 죽인 다음, 당초의 계획대로 부를 움켜쥔 채, 죄 지은 몸으로 멀리 도망을 가겠다는
의도가 뻔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몸이 떨려, 그들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내가 넘어질 때마다 실버가 줄을
세게 잡아당기며, 끔찍한 눈매로 노려 보았다. 맨꽁무니에
쳐져 걷던 디크는 열이 높아지면서 욕설인지 기도인지 모를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그로 인해 나의 기분이 더욱 비참했고, 게다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몰랐던 얼굴 푸른 그 해적이--술이나 달라고 고함치며 노래나 부르다가 사반나에서 죽은 플린트가--그 고원에서 자신의 손으로 동료 여섯 명을 죽여버렸다는 비참한 사실을
생각하니, 무서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를 않았다. 그 평화로운
숲이 그때는 비명으로 울렸을 것이고, 그런 생각을 하니 아우성이 아직도 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는 숲에 당도했다. 메리가 소리를 질렀다.
“만세! 이봐, 모두들 뛰어!” 앞서 가던 사람들이 냅다 뛰기 시작했다.
십미터도 못 가 그들이 갑자기 멈췄다.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실버가 목발을 내두르며 마치 귀신
들린 사람처럼 뛰어갔다. 다음 순간 그와 나도 몸이 굳었다.
눈앞에 커다란 구덩이가 있었는데, 언저리가 무너지고 바닥에 풀이 나 최근에 판 것이 아닌
듯했다. 부러진 곡괭이 자루 두 개와 깨진 상자 부스러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나무 조각 하나에는 달군 쇠로 지져 놓은 월러스라는
글씨가 보였는데, 바로 플린트의
배 이름이었다.
자세히 보니 모든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의 눈에 띄어 이미 샅샅이 파내어져 있었다. 70만 파운드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제33장
두목의 몰락
천지가 개벽할 노릇이었다. 여섯 사람 모두 벼락을 맞은 듯했다. 그러나 실버만은 금방 제정신을
차렸다. 경주 말이 목표만을 향해 질주하듯, 보물만이 그가
생각하는 전부였다. 곧 냉정을 되찾아 침착하게 마음을 추스린 그는, 해적들이
속았다고 생각할 것에 미리 대비했다. 그가 속삭였다.
“짐, 이걸 가지고 있어. 곧, 난리가 날 거야.” 그러면서 내게 2연발 권총 한 자루를 주었다.
그런 다음, 북쪽으로 묵묵히 몇 걸음 걸어가자, 우리
두 사람과 해적 다섯 사이에 그 구덩이가 놓이게 되었다. 그가 나를 보며 ‘막다른
골목이야’ 하는 듯 머리를 끄덕했는데, 정말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눈길이 매우 은근했지만, 하도 변절을 잘하는 사람이니 구역질이 나서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 바꾸는 거군요.”
그가 내 말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해적들이 욕설을 퍼붓고 소리를 지르며, 한 사람씩 구덩이에 뛰어들어 맨손으로 땅을 파, 손에 잡히는대로
상자 부스러기를 집어던졌다. 몰건이
금화 한 개를 줏었다. 머리 위로 치켜들고 별별 욕지거리를 다했다. 그것은
두 푼짜리 기니화로서, 서로
주고받으며 잠깐씩 들여다보았다. 메리가
실버에게 그것을 흔들며 소리쳤다.
“두
푼이라구! 당신이 말한 70만파운드가 이거야? 약속을 지키는 남자라구 하지 않았어? 실수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니만, 이런 개천물에서나 어기적거릴 얼간이 같으니라구!” 실버가 꿈쩍도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
“더
파 봐, 이놈들아. 쇠불알이라도 틀림없이 나올 테니” 메리가 그 말을 되받으며 악을 썼다.
“쇠불알이라! 자네들 들었지? 저놈은 줄곧 다 알고 있었어. 저 보라구. 낮짝에 다 써 있어.” 실버가 대꾸했다.
“아, 메리, 다시 대장이 되고 싶다는 말이지? 너는 정말 뱃심이 좋은 놈이야.”
그렇지만 이번에는 모두 메리 편을 들었다. 뒤로 눈을 부라리며 구덩이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한가지 다행한 일은, 실버가 서 있는 곳 반대 쪽으로 올라선 것이다.
말하자면 구덩이를 가운데 두고 이쪽 두 명과 저쪽 다섯 명으로 갈렸는데, 어느 쪽도 먼저 공격할 만큼 충분한 용기가 없었다. 실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목발을
집고 꼿꼿이 서서 그들을 노려보았는데, 그처럼 단호한 그의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는 정말 용감무쌍했다.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듯 마침내 메리가
말했다.
“여보게들, 저기 두 놈 뿐이네만, 우릴 여기 데려와 이 구덩이에 처박은 저
늙다리 절름발이하고, 내가 보기에도 좀 안 된 저 아이하고 말이지. 자, 자네들은….“
팔을 번쩍 들며 지르는 우렁찬 목소리가, 분명
공격명령을 내릴 자세였다. 바로 그때, 탕,탕, 탕하는 세 발의 화승총 소리와 함께 숲속에서 불빛이 번쩍했다. 메리가 구덩이 속으로 머리를 박으며
쓰러졌다. 붕대를 감은 사나이는 팽이처럼 빙글 돌아 모로 자빠지면서,
치명상을 입은 채 누워 꿈틀거렸다. 남은 세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줄행랑을 쳤다.
헐떡이는 메리에게 실버는 늦을세라 권총 두 발을 쏘았고, 숨을
거두며 올려다 보는 그에게 실버가 마지막 한마디했다.
“죠지, 이것으로 끝장이 났네그려.”
바로 그때 박사님과 그레이, 그리고 벤 건이 육두구나무 숲으로부터
연기가 나는 총을 들고 다가왔다. 박사님이 외쳤다.
“뛰어! 모두들 전속력으로. 도망친 놈들이 보트를 못 타게 해야 해.”
때때로 가슴까지 닿는 풀숲을 헤치며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의 뒤를 쫓았다.
힘이 들었지만 실버는 조금도 뒤쳐지려고 하지 않았다. 가슴 근육이 찢어질 만큼 목발을 짚고 뛰는 그의 노고란, 성한 사람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일이었고, 박사님도
지금 나의 이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를 따라올 수는 없었고, 고원지대에
들어설 즈음에는 30미터쯤 뒤에 쳐져 헐떡거렸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박사님, 저기를 보세요! 서두를 필요 없어요.” 정말 그의 말대로였다. 고원의 개활지 위를 살아남은 세 명의 해적이, 처음 튀었던 방향인
뒷돛대봉을 향해 여전히 도망치는 중이었다. 우리는 보트가 있는 지점을 이미 지나,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네 사람은 숨을 돌리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는데, 롱 존이
얼굴의 땀을 닦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말했다.
“박사님, 참으로 고맙습니다. 저와 호킨스한테 딱 맞게, 어찌 그리 제때에 오셨는지요. 아니, 자네, 벤 건이구만!” 그가 덧붙혔다.
“자네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 그 버림받은 사람이 당황하여 뱀장어처럼 몸을 꼬며 대답했다.
“그렇소. 벤 건이요.” 긴 침묵 끝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간
무고하시오, 실버씨?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하고
내게 대답해야 할 거요.” 실버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벤, 벤, 내게 한 짓도 생각해 봐!”
해적들이 싸우다 버린 곡괭이를 하나 가져오라고 그레이를 온 길로 되돌려 보낸 다음, 보트가
있는 곳을 향해 느긋하게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박사님이 그간의 일을 짤막하게 말했다. 바로 실버가 알고 싶어 안달했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 속의 영웅이야말로 다름아닌, 버림을
받아 거의 바보가 된 벤 건이었다.
긴 세월 홀로 섬을 헤메다가 그 해골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가 해골을 흐트러뜨린 것이다. 보물도 찾아냈다. 그것을 파내기도 했다(구덩이에 있던 부러진 곡괭이 자루는 그의 것이었다). 히스파니올라가 도착하기 두 달
전, 바로 그 큰 소나무 밑에서 찾아낸 보물을 등에메고, 천신만고
끝에 섬 북동쪽 쌍봉우리 산에 있는 그의 동굴로 옮겨, 안전하게 보관을 해두었다는 것이다.
해적들의 공격이 있던 날 오후 벤 건에게서 이 비밀을
들은 박사님은, 다음날 아침 만으로부터 히스파니올라가 사라져 버린 것을 알고는, 벤 건의 동굴로 가면 말라리아도 피하고 보물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실버를 찾아가 마음놓고 요새를 떠나가게 해달라고 하면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보물지도를 포함하여--벤 건이 손수 소금에 절인 염소고기도 동굴에 많이 마련해 두었다고 해서
식량까지도 실버에게 주었다고 했다--뭐든지
달라는대로 다 주어 버렸다는 것이다.
“짐, 너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임무를 다하는 사람을 지원하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제 몫을 못한 것은 누가 잘못해서일까?”
그날
아침 해적들이 곤경에 빠져 있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붙잡힌 나를 보고 충격을 받은 박사님은, 동굴로 급히 돌아가 지주님에게 선장님을 돌보라고 한 다음, 그 소나무가
있는 데로 가려고, 그레이 그리고
벤 건과 함께 섬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택해 출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곧 해적들이 먼저 떠나 버린 사실을 알고는, 발이 빠른 벤 건을 미리 보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도록 했다. 그래서 벤 건은 미신에 사로잡힌 옛 동료들을 골려주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대성공을 거두어 해적들의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어, 그들보다
박사님이 한 발 앞서 도착하여 매복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버가 말했다.
“아이고, 호킨스를 여기까지 데려오다니, 제게는 천만다행이군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늙은 존을 요절 내시고, 눈도 깜짝 안하셨을텐데요, 박사님.” 박사님이 명랑하게 대답했다.
“자네 말이 맞아.”
마침내
우리는 두 척의 보트가 기다리는 곳에 도착했다. 박사님이 곡괭이로 한 척을 부수어 버린 다음, 남은 한 척에 모두 올라 북쪽 만으로 향했다.
그곳까지는 15킬로미터 정도였다. 실버는 과로로 녹초가 된 상태였지만, 우리와
다름없이 노를 저었고, 우리는 곧 잔잔한 바다를 쏜살 같이 미끄러져 나갔다. 곧이어 좁은 해협을 빠져나와, 나흘 전 히스파니올라를 예인했던 항로인, 섬의
남동쪽 끝을 돌았다. 쌍봉우리 산 앞을 지나면서 보니 벤 건의 컴컴한 동굴 입구에, 한 사람이 총을 들고 있었다. 바로 지주님이었다. 우리 세사람은 수건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렀는데, 실버도 물론 누구나 다름없이 함께
기뻐했다.
5킬로미터를 더 가서 바로 북쪽 만 어귀로 들어서니, 히스파니올라가 홀로 떠돌고 있었다. 만조滿潮가
되어 물에 떴는데, 남쪽 만에서처럼 바람이나 조류라도 세었더라면, 영영
다시 찾지 못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좌초를 해서 회복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돛이 찢어진 일 말고는 다행히
별 문제가 없었다. 닻을 새로 달아 3미터 깊이의 물에 내렸다. 우리는 다시 노를 저어 보물이 있는 벤
건의 동굴에서 가까운 럼곶으로 향했다. 곧 이어 외팔이 그레이가, 지난 밤 몸을 싣고 파수를 보았던 보트를 저어, 히스파니올라로 돌아왔다.
해변에서 동굴까지 오르는 길은 경사가 부드러웠다. 비탈길을 올라가니 지주님이 우리를 맞았다. 나의 무단이탈에 관해
야단도 칭찬도, 아무런 말도 없이 따듯하고 친절하게 나를 대했다. 실버가 정중히 인사를 하자 얼굴에 불쾌한 빛을 띄었다. 그가 말했다.
“존 실버, 너는 아주 못된 건달에다가 협잡꾼--구제불능의 협잡꾼이야. 내가 너를 법정에 세우지 않으리라는 말들을 하더구만. 좋아, 그렇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러나 죽은 사람들이 네 목이나 죄고
맷돌 돌아가듯 돌아갔으면 좋겠어.” 롱 존이 다시 절하며 대답했다.
“지주님, 대단히 고맙습니다.” 지주님이 꾸짖었다..
“고마운 것 좋아하네! 내 임무를 포기 하는
일이야. 저리 비켜!”
우리는 곧 동굴로 들어갔다. 바람이 잘 통하는 커다란 굴인데, 옹달샘과 맑은 물이 고인 연못이 고사리에 둘러쌓여 있었다. 바닥은
모래였다. 커다란 화덕 옆에 스몰릿
선장님이 누워 있었는데, 희미한 불빛이 어른거리는 한쪽 구석에, 무더기로
쌓인 금화와 금괴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찾아 지금까지 헤맨,
히스파니올라를 탔던 사람들 가운데 이미 열일곱 명의 목숨을 빼앗아 간, 바로 그 플린트의 보물이었다. 그 보물이
요구한 희생이, 피와 슬픔이, 바다 밑으로 침몰한 멋진 배들이, 처형널대 위를 걷다 빠져 죽은 용감한 뱃사람들이, 쏘아댄 대포알이
모두 얼마이며, 뱃사람들이 겪은 그 잔혹함과 거짖 그리고 치욕이 어떻했는지, 살아 있는 사람의 입으로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섬에는, 범죄에 가담해 자기 몫을 챙기려던 꿈이 허사가 되버린 세 사람이--실버와 몰건 영감 그리고 벤 건--아직도 살아 있었다. 선장님이
말했다.
“짐, 어서 온. 너는 어떤 면에서는 훌륭한데, 너와
함께 다시 바다로 가지는 않을 것 같구나. 이거 누구야, 존 실버 아니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실버가 대답했다.
“임무를 다하기 위해 다시 왔습니다.” 선장님이 한마디했다.
“아!”
그 말이 전부였다.
그날
밤 동료들과 기막힌 저녁식사를 했다. 벤 건이 소금에 절인 염소고기와 히스파니올라에서
가져온 맛난 음식들과 오래된 포도주를 먹고 마셨다. 더없이 행복했고 즐거웠다. 실버 역시 화덕에서 멀리 떨어진
구석에 앉아 마음껏 먹으며, 필요한 심부름도 냉큼냉큼해 가면서 우리가 웃으면 그도 가만히 따라 웃었는데, 항해에 나선 선원으로서의 싹싹함과 예의범절 그리고 아첨하는 모습은, 예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제34장
마지막 이야기
그 다음날 아침, 그 엄청난 황금 더미를
히스파니올라까지 옮기려면 해안까지
1.5킬로미터를, 해안으로부터 5킬로미터의 바닷길을
가야만 해서,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일은
많고 일손이 부족하여 대단히 벅찼다. 아직 섬에 남아 있는 세명의 해적들에 대해서는 별 걱정이 없었다. 그들의 불시 공격에 대해서는 언덕 위에 보초 한 명으로 충분했는데, 그들이
싸움에 신물이 났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따라서
신명나게 일을 했다. 우리가 해변에다 보물을 옮겨다 쌓으면, 그레이와 벤 건이 보트에 실어 날랐다. 밧줄로 묶은 두 개의 금덩어리는 어른이 운반하기에도
벅찼지만, 뿌듯한 마음으로 천천히 날랐다. 나는 힘이 없어
운반일을 제대로 못하니까, 동굴 안에서 빵자루에다 하루 종일 부지런히 금화를 담는 일을 했다. 빌리 본스의 궤짝에서 본 것처럼
갖가지 금화를 보고 놀랐지만, 그때보다 양도 더 많고 가짓수도 더 다양한 동전을 정리하면서 그렇게 기뻐해
본 적이 없었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의 금화를 비롯한 죠지, 루이, 더블룬, 더블기니, 모이도르, 세퀸(1284년에
주조 된 베니스 공화국의 금화: 옮긴
이) 등, 지난 수백년 동안 유럽 왕들의 모습이 새겨진 금화가
모두 있었고, 무슨 거미줄 같은 모양이 찍힌 신기한 동양의 금화, 모양도
둥글거나 네모가 진 금화, 목에라도 걸라는 듯 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린 금화도 있어, 틀림없이 세상 돈이 다 모인 박물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량도
엄청나 낙엽처럼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을 하니 구부린 등도 아프고 돈을 고르는 손가락도
아파 왔다.
일은 며칠을 두고 계속되었다. 매일 저녁 배에 보물을 실었지만, 이틑날이면 또 실어야 할 보물이 기다렸다. 도망간 세 명의 해적들은
종내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가--사흘째 되던 날 밤인가--박사님과 내가 섬의 저지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을 걷고 있는데, 캄캄한
아래쪽에서 노래인지 비명인지가 바람에 실려 왔다. 잠깐 들리고는 침묵이 계속되었다. 박사님이 말했다.
“하나님, 저들, 저 반란자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때
등 뒤로부터 실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술주정 하는 겁니다.”
실버는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할 수 있고, 푸대접
속에서도 평범한 선원으로서 과거의 위신을 조금씩 되찾아 갔다. 정말 놀라우리 만치 몸조심을 했고,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모두 그를 개
취급하는 눈치였고, 다만 벤 건만은
옛 상관이었던 그를 아직도 무서워했다. 다시 반란을 꿈꾸는 그를 고원지대에서 본 다음부터, 누구보다도 그를 나쁜 사람으로 생각은 했지만, 나도 그에게 나름대로
고마운 점이 있었다. 박사님이 더 없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술주정 아니면 신음 소리겠지.” 실버가 대꾸했다.
“맞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박사님과 제게는
마찬가지죠.” 박사님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자네를
매정한 사람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겠지. 이런 말해야 영문도 모를 테고, 실버씨. 허나 앓는 소리라면--의사의 양심에 비추어, 저 사람들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은 분명 열병에 걸렸다는 말이고--내
몸뚱아리에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그곳으로 가서 치료를 해야겠다는 말이야.” 실버가 말했다.
“무슨 그런 송구스러운 말씀을, 박사님, 그리하시면 안됩니다. 귀한 생명을 잃으실 수도 있구요. 제 말씀 들으세요. 저야 말로 전적으로 박사님의 사람입니다. 우리 편이 약해지는 일도 그렇지만, 어떻게 감히 박사님을 잃을 수가
있나요. 제가 입은 은혜도 얼마인데. 저 아래 있는 놈들은, 약속을 지킬 줄도 모르고 또 그럴 뜻도 없는 놈들입니다. 더구나
박사님이 생각하시듯 그렇게 믿을 만한 놈들이 못됩니다.” 박사님이 말했다.
“맞아, 그런데, 자네만 약속을 지킨다는 말이지?”
이것이 그 세명의 해적에 대해 나눈 마지막 이야기다. 꼭 한번 총소리가 멀리 들려와, 사냥을 하는 것이 아닌가 했다. 우리는 회의를 열어, 그들을 그냥 섬에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벤 건은 좋아 펄펄 뛰었고, 그레이도 대찬성이었다. 많은
양의 화약과 탄환, 소금에 절인 염소고기 한 짝, 약간의
의약품과 기타 필수품, 연장, 옷가지, 비상용 돛, 밧줄 두 타래 그리고 박사님의 특별 배려로 맛 좋은
담배를 선물로 남겨 놓았다.
그렇게 섬의 일을 마무리지었다. 보물은 물론, 충분한
물과 주고 남은 염소고기를 비상용으로 배에 실었다. 마침내 어느 맑게 개인 아침, 우리는 모두 달려들어 닻을 올린 다음, 선장님이 요새에서 높다랗게
걸고 싸웠던 바로 그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 만을 떠났다.
틀림없이 세 명의 해적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짐작을 했고, 그
짐작이 사실임이 곧 들어났다. 좁은 수로를 통과한 다음 남쪽 갑岬을 지나는데, 세 명 모두 모래톱에 무릅을 꿇고 손을 들어 애원을 했다. 무참하게
버림받은 그들이 무척 가슴 아팠지만, 우리는 더 이상 반란의 위험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친절을 베풀 수도 있었지만, 그들을 고향으로 데리고 가면 교수대에
서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렇게도 못할 노릇이었다. 박사님이
큰 목소리로, 남겨 놓은 물건들과 그 장소를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제발 자비를 베풀어 달라며 그런 곳에서 죽게 내버려 두지 말라고 호소했다.
물길을 따라 그들에게서 배가 곧 멀어지려고 하자,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악을 쓰며 벌떡 일어나 우리를 겨누어 쏘자, 실버의 머리위로 날아간 총알이
주돛을 뚫었다.
모두
난간 뒤로 숨어 내다보니,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모래톱이 점점 멀어지며 작아져 갔다. 그들과는 이렇게 끝이 났고, 정오가 되기 전에, 푸르고 둥그스름한 수평선 너머로 보물섬의 가장 높은 바위 봉우리가 사라져 버려,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사람 수가 부족하니 배를 탄 모든 사람들이 한가지씩 일을 맡았고, 선장님은 상당히 회복을
했지만 아직 안정이 필요해 선미 쪽에 깔아 논 멍석에 누워 지휘를 했다. 선원을 새로 보충하지 않으면
고국까지 항해가 불가능했으므로, 우리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에 있는 항구들 가운데 가장
가까운 곳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바람의 방향이 변덕스러웠고 강풍을 몇 번이나 만나, 항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우리는 모두 녹초가 되었다.
해질 무렵이 되어 육지로 깊숙히 들어간 어느 아름다운 만에서 닻을 내리자, 곧 흑인과
멕시코 인디안, 그리고 튀기들이 보트를 타고 몰려와 과일이나 채소를 팔았고, 우리가 던져 준 동전을 건지려고 그들은 잠수를 하기도 했다. 웃음 꽃이 핀 많은 사람들과(특히
흑인들), 열대과일의 맛, 그리고 무엇보다도 막 켜지기 시작한
마을의 불빛들이 대단히 매혹적이어서, 비극적이고도 유혈이 낭자했던 보물섬에서의 모험과 좋은 대조가 되었다. 박사님과 지주님이 초저녁을 보내려고 나를 데리고 상륙을 했다. 거기서
영국 해군의 선장을 만나 그와 이야기를 나눈 끝에, 그의 배에 올라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고,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 새벽녘에야 히스파니올라로
귀환했다.
갑판에 벤 건이 혼자 있다가, 우리가 배에 오르자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우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일어난 일을 털어 놓았다. 실버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몇 시간 전 보트를 타고 도주하는 것을 묵인 했으며, 묵인한 이유는 오직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
외다리의 사내가 배를 타고 있는 한’ 우리의 목숨이 틀림없이 위태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 요리사는 빈손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인가 선실 벽을 뚫고, 앞으로 떠돌이 밑천이 되어 줄, 삼사백 기니 가량의 금화 한 자루를 들고 간 것이다.
몇
푼 안 들이고 그를 쫓아버려 우리는 모두 기뻐했다.
자, 길고 긴 이야기를 요약해야 하겠는데, 우리는
선원을 보충하고 순항한 끝에, 블랜들리씨가
구조대를 조직하려는 찰라, 브리스틀에
도착했다. 떠났던 사람들 가운데 다섯 명만 돌아온 것이다. ‘살아
남은 사람에게는 술과 저주를’이라는 말은 분명 복수심에 가득찬 말이고, 저주의
노래로 부른 배도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살아 남은 사람은 오직 한 명,
배를 탄 사람은 일흔다섯.”
우리는
각자 많은 양의 보물을 나누어 가졌고, 각자의 성격에 따라 지혜롭게 쓴 사람도 있고 어리석게 쓴 사람도
있다. 스몰릿 선장님은
이제 바닷일을 그만두었다. 그레이는
돈을 잘 지켰을 뿐만아니라, 더욱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이 불현 듯 솟아, 자기일에 열심히 노력한 결과, 지금은 항해사 겸 훌륭한 배의 공동
소유주가 되었고, 결혼도 하여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벤 건으로 말하자면 천파운드의 돈을 받았는데 3주일만에 아니 정확히 말해 19일만에, 다 써버렸는지 잃어버렸는지 모르지만, 20일이 되던 날 다시 돈
좀 달라고 왔다. 그에게 어느 농장의 문지기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는 데, 그가 섬에서 걱정했던 대로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아직도
살아 있으며, 그 농장집 아이들에게 인기도 있고 사랑도 받고, 주일이나
성 축일에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중요한 일도 한다.
실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는 바가 없다. 그 겁나는 외다리 뱃사람이 마침내 내 삶으로부터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옛 검둥이 부인을 만나 그녀와 함께 그리고 앵무새 플린트와 함께 편안한 삶을 살아 주기를 바란다. 제발 그랬으면 좋은 이유는, 새로 찾은 세계에서 편안한 삶이란 그렇게
쉽지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플린트가 숨겨
놓은 곳에 은괴와 무기들이 아직 그대로 있다. 내가 찾지 않는 한 계속 그대로 있을 것이다. 황소가 잡아 끌어도 나는 그 저주 받은 섬으로 다시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가끔 악몽을 꾸는데, 그 섬의 해변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듣거나 아니면 내 귀에 아직도 생생한, 앵무새 플린트가 날카로운 소리로
“팔 레알!, 팔 레알!”하고 외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는 꿈이다.
-끝-
작가 연보
1850 11월 13일 스콧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아버지 토마스 스티븐슨, 어머니
마가렛 사이의 외동 아들로 태어남.
태어나면서부터 폐결핵으로
추정되는 질병에 걸림.
1858 병약으로 인해 학교를 자주 결석함.
가정교사를 초대 함.
1859 챨스 다윈의 "종의 기원" 발표.
챨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발표.
1865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발표.
1867 아버지 토마스, 가업 계승을 바라며
아들을 에딘버러 대학에 입학 시킴.
병약하나 낭만적인 그는 교수들을
기쁘게 하지만, 수업을 소홀히 함.
에딘버러 시민들과의 교제보다는
미쉘 드 몽테뉴, 윌리엄 해즐릿,
다니엘 데포 등의 문체를 공부하며
시간을 보냄.
1871 건축학에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꿈에 따라 아버지를 실망 시킴.
진정으로 좋아하는 글쓰기를 계속함.
1872 루이스 캐롤의 "거울로",
죠지 엘리엇의 "미들마치" 발표.
1874 토마스 하디의 "광인들로
부터의
도피" 발표.
1875 변호사 시험 합격. 변호사로 일하는 대신
글을 쓰며, 유럽을 여행함.
1876 프랑스의 오이스 강 유람. 이때 얻은
영감으로
여행기 "내륙으로의 여행" 집필.
이때 10년 연상의 미국인 유부녀인
파니
오스번을 만나 사랑에 빠짐.
1878 "내륙으로의 여행" 발간. 파니의 미국
귀향으로 우울증에 빠짐. 프랑스의
Massif Central 산맥 종주 시작.
그 경험담을 이듬해 "세벤느에서의 당나귀
여행" 으로 발표.
1879 캘리포니아로 가 파니를 만남.
심각한 폐질환으로 사경을 헤맴.
1880 이혼 후 파니와 재혼. 북 캘리포니아에서
파니의 간호를 받음. 두 사람 에딘버러로
돌아온 후 4년간을 투병함.
남 프랑스 및 스위스 여행.
1881 파니가 데리고 온 아들 로이드 오스번과
장난 삼아 그린 지도에서, 묻힌 보물에 관한
이야기의 플롯을 생각함.
1882 "보물섬" 발표, 영국 독자들의 호응을 얻음.
1884 남 프랑스 여행 중 병 재발. 파니, 오스번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와, 영국 남해안의
휴양지 본마우스에서 3년간 요양함.
그후 2년간 많은 작품을 씀.
헨리 제임스와 교제함.
1885
"동시집" 발표
1886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일", "납치" 등
발표.
1887 5월 부친 사망. 남은 유가족 미국 여행.
수필집 "추억과 초상들"
발표.
1888 유람선 카스코 호를 타고 남태평양 유람.
이때, 타히티, 마르케스, 하와이 등
많은 섬을 방문함.
1889 몰로카이의 나병촌 방문. 촌장인 다미안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함. "지주
밸런트래" 발표.
1890 동 태평양 유람. 폐출혈로 사모아 섬에서
내림. "남해 바다에서"와 "다미안
신부님" 등 발표.
1891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발표.
1892 사모아 인들에 대한 서구 열강의
인권 침해에 대한 저항운동
주도. "역사 주석", "사모아에서
고난의 8년" 등 발표.
1893 사모아 추장을 지지하자, 사주 혐의로
추방 위기를 맞음. 건강 악화로
스콧틀랜드로의 귀향이 불가능함에 따라
깊은 향수에 빠짐.
1894 사모아에 평화가 정착하자 영웅으로
찬사를 받음. 12월 3일, "허미스톤의 위어,
집필 중, 뇌출혈로 사망.
사모아의 바이아(Vaea)산
정상에 묻힘.
옮긴이: 박흥서
보물섬
초판 발행: 2011년 월 일
지은이/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옮긴이/박흥서
그림/박흥서
펴낸곳/교보문고
주소/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1번지
홈페이지/www.kyobobook.co.kr
© 박흥서 2010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으셔야 합니다.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