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Califor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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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 례 -


I. 20세기 이전의 캘리포니아 역사

II.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전

III. 유럽인들의 탐험

    1. 에르난 꼬르떼스

    2. 프란시스코 데 우요아

    3. 후안 로드리게쓰 까브릴요

    4. 스페인령 필립핀과의 교역로 개통

    5. 프란시스 드레이크

    6. 세바스띠안 비스까이노

    7. 기타 유럽인들의 탐험

IV. 스페인 식민지 착수와 총독부

    1. 스페인 최초 식민지

    2. 포르톨라의 원정대

    3. 후니페로 세르라

    4. 알타 캘리포니아 선교

    5. 목장 개척

    6. 행정 구역

V. 러시아 식민지 사무소

VI. 멕시코 영토 알타 캘리포니아

    1. 멕시코제1왕국과 멕시코제1공화정

    2. 멕시코 공화국 주권하의 캘리포니아

    3. 러시아-아메리카 회사

    4. 외부로부터의 영향

    5. 미국의 이익과 이민자들

VII. 캘리포니아 공화국과 미-멕시코 전쟁

    1. 곰 기(Bear Flag ) 반란과 캘리포니아 공화국

    2. 미국인에 의한 정복

VIII. 미국 영토로서의 캘리포니아

    1. 인구

    2. 골드러시

    3. 캘리포니아 임시 정부

    4. 초기 분리주의 운동

    5. 법 체제

    6. 캘리포니아 대학살

        1)  나비 전쟁

        2)  멘도시노 전쟁

    7. 남북 전쟁

    8. 노동 운동

    9. 노동 정책과 원주민 보호

  10. 철도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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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20세기 이전 캘리포니아 역사

    지금으로부터 약 1만3천 년 전 아메리카 원주민이 처음 캘리포니아에 도착함으로써 이 지역에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 스페인 사람들에 의한 캘리포니아 해안 탐험이 있었고, 이에 따라 유럽인들의 해안 정착이 이루어졌으며, 18세기에는 내륙 산간 지역으로의 주민 이동이 있었다. 캘리포니아는 1821년까지 신新스페인부왕국副王國(Virreinato de la Nueva España; 스페인 합스브르크 왕가에 의해 수립된 신대륙 식민지. 현재의 멕시코, 중미,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북미남서지역, 남아메리카 북부, 필립핀과 괌을 포함한 몇몇 태평양 도서지역을 포함한 거대한 왕국)의 영토였고, 왕국의 해체에 따라 멕시코 땅이 되었다가, 미-멕시코 전쟁(1846-1848)의 결과 미국이 승리함으로써, 과달루페 이달고 협정(the Treaty of Guadalupe Hidalgo)에 의해 미국 영토가 되었다. 19세기말까지 캘리포니아는 인구 약 1백40만에 불과한, 미개발의 거대한 농업 지역이었다.

  

       - 신스페인 부왕국 영토 -


II.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전

        아시아로부터 아메리카 대륙으로 인류의 이동은 약 16,500년 전, 베링 연육교(Bering Land Bridge)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1959년 캘리포니아 연안 산타 로사 섬(Santa Rosa Island)에서 발견된 알링톤 스프링스인(Arlington Springs Man: 홍적세 후기 인)의 유골로 보아 그 섬은 초기 인류의 거주지로서, 약 13,000년 전 위스컨신 빙하기(Wisconsin glaciation: 북미대륙의 마지막 빙하기)까지 거스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캘리포니아라고 불리는 지역에는 약 30여 종족 또는 문화 집단이, 여섯 개 정도의 다른 언어로 나뉘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집단은 먼저 도착한 호칸어족 (Hokan: 북쪽 산악지역으로부터 남부의 콜로라도 강 유역,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바하 캘리포니아까지 분포)과 나중에 도착한 모하비 사막의 남동 쪽 우토 -아즈텍족(Uto-Aztecan)을 포함한다. 이와 같은 문화적 다양성은 북미대륙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13,000년 전 훨씬 이전에 이 지역으로의 인류 이동과 침략의 결과가 아닐까 한다.

        최초의 유럽인들이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을 때, 이 지역의 원주민은 Chumash, Kumeyaay, Nisenan, Maidu, Miwok, Modoc, Mohave, Ohlone, Pomo, Serrano, Shasta, Tataviam, Tongva, Wintu, Yurok, Yokut 등 16종족이었다. 이들은 매우 역동적이어서 그 힘에 따라 영토가 늘거나 줄거나 했다. 18세기 유럽인들의 도착하기  전 캘리포니아 전체 원주민은 30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인들이 도래하기 이전 현재 미국이라고 불리는 지역의 토착 원주민의 약 1/3이 지금의 캘리포니아 땅에서 살았다. 캘리포니아 원주민 언어는 사투리를 포함하여 80~90개였고, 현재 몇 개가 남아 있지만 그것마저도 사라질 위험에 처해있다.

        원주민들은 캘리포니아의 다양한 기후에 적응하였다. 해안가 부족들은 교역용 구슬의 주요 공급자였는데, 이 구슬은 어패류의 껍질을 석기로 가공하여 만들었다. 중앙부의 광활한 분지와 산기슭의 부족들은 일찍이 농업을 시작하였다. 북부와 동부 산악 지역의 부족들은 수렵과 연어 채집 등 어로에 의존하였고, 흑요석(黑曜石)을 가공 하여 장신구를 만들거나 타 부족과의 거래에 사용하였다. 동남부의 가혹한 사막 지역은, 그곳의 식물을 이용하거나 오아시스 또는 물길을 따라 살면서 삶을 터득한 부족들의 터전이었다. 부족 간의 교역을 통해 소금을 비롯하여 식품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는 귀한 물건일 수도 있었던 부싯돌이나 창날과 화살촉 용 흑요석을 획득할 수 있었다.


       - 흑요석 -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개 이외에는 가축이 없었다. 질그릇도 없었다. 그들이 사용한 도구는 나무로 만든 도구와 짐승 가죽, 바구니, 그물, 돌, 사슴 뿔 등이었다. 집은 나뭇가지와 진흙으로 짓거나, 2~3피트 깊이의 땅을 판 다음 그 위에 움막을 짓고, 그 지붕을 동물 가죽이나 갈대 또는 진흙으로 덮었다. 해안지역과 내륙으로 약간 들어온 지역의 전통적인 구조물들은, 적색 각목 또는 삼나무 판자를 사용하여 짓기도 했다. 여름에는 무두질한 사슴 가죽이나 여러 동물 가죽으로 만든 그들 식의 전통 의상으로 최소 부위만 가렸으며, 겨울철에는 짐승의 털과 풀로 짠 조잡한 옷을 입었다. 제례를 드릴 때에는 새의 깃털을 이어 붙여 만든 제례용품을 착용하였다. 바구니를 짜 만드는 일은 적색 목재를 파내어 카누를 만드는 일만큼이나 고도의 기술로 그 유용성이 컸다. 캘리포니아 산타 바바라 인근과 챤넬 군도(Channel Islands: 캘리포니아 Santa Barbara 연안의 8개 섬),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만 지역의 부족들은 갈대로 만든 카누를 사용하였다. 북서 해안 지역의 부족들은 삼나무를 파내어 카누를 만들기도 했다. 


             - 챤넬 군도 -

        캘리포니아 내륙의 대부분 원주민들 주식은 도토리였다. 도토리를 말려 껍질을 벗긴 다음, 가루를 만들어 물에 담가 떫은맛을 우려낸 다음 먹을거리를 만들었다. 수세기에 걸쳐 그들이 사용한, 커다란 바위에 파놓은 맷돌 구멍을 지금도 여러 곳에서 볼 수가 있다. 도토리를 갈아 떫은맛을 우려낸 가루로는 보통 영양가 있는 죽을 만들었고, 여러 고유 음식과 함께 이 죽을 매일 먹었다. 도토리 가공은 대단한 중노동으로 거의 여자들 일이었다. 부족에 따라서는 1년에 1톤의 도토리를 먹었으리라는 추정도 해볼 수 있다. 가족마다 수세대에 걸쳐 생산성 있는 참나무와 도토리나무(Tanoak) 숲을 지켰다. 대량으로 수집한 도토리를 든든한 겨울 식량으로 저장했다.

        옥수수와 감자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또 다른 주식이었고, 캘리포니아의 전형적인 우기(3개월에서 5개월)와 건기(9개월에서 7개월)로 나뉘는 기후에서 옥수수와 감자는 관개가 없이는 자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의 풍요로운 자연과 캘리포니아 원주민이 수천 년에 걸쳐 이룩한 환경 관리 능력은, 멕시코 북부의 아메리카 지역에 높은 인구밀도를 가능케 했다. 원주민들은 숲속이나 초원, 혼성 숲(Mixed woodlands: 침엽수나 활엽수 등 어느 것이든 20%를 초과하지 않은 숲)등에서 다양한 형태의 산림 원예(Forest gardening)를 하였고, 이를 통해 원하는 식품이나 약초를 계속해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불을 통제하여 거주 지역의 넓이에 알맞은 약한 불을 만들어 낼 수가 있었고, 이렇게 해서 화재로 인한 대규모 재난을 방지하고 경작 주기가 느슨한, 환경에 적응한 농업을 지속할 수가 있었다. 관목과 잔디를 태워 토지에 활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새싹을 돋게 하고, 이 새로운 숲은 식품용 동물들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화목농업火木農業(Fire stick agriculture: 사냥을 쉽게 하기 위해, 숲의 식물이나 동물 분포를 바꾸기 위해 또는 잡초제거나 생물 다양성을 높이기 위해 숲을 태우는 농업)은 고목을 불태워 새로운 나무를 다시 돋게 하여 농업 환경을 개선하는 원시 자급자족 농업이었다.

        캘리포니아 동쪽 대분지 사막(the Great Basin Desert: 시에르라 네바다와 Wasatch 산맥 사이의 대분지)뒤에 자리한 높고 험한 시에르나 네바다 산맥, 북부의 광활한 삼림 시대와 산악들, 남쪽의 험하고 거친 소노란 사막(Sonoran Desert: 캘리포니아와 아리조나 그리고 멕시코 북서부 소노라 지역과 바하 캘리포니아<Baja California: 하下 캘리포니아. 현재의 멕시코 령 캘리포니아 반도>의 일부를 포괄하는 지역. 넓이 10만 평방마일로 멕시코에서 가장 더운 사막 지역)과 남부의 모하비 사막(Mohave Desert: 산맥으로 가리어 비가 적은 시에르라 네바다 산맥의 사막 지역. 모하비는 원주민 종족 이름임. 캘리포니아, 네바다 그리고 유타, 아리조나주에 그 일부가 걸쳐 있음), 그리고 서쪽의 태평양은 캘리포니아를 고립시켜 여타 원주민들과의 접촉과 교역을 어렵게 하였다. 


       대분지 -

이러한 고립으로 인해 스페인 선교사들이나 골드러시로 인한, 그리고 유럽 계 미국인에 의한 캘리포니아 원주민 영토 탈취가 행해질 때까지 비극과 상처를 늦게 경험하기도 했다.


        - 소노란 사막 -



    - 바하 캘리포니아 -

        캘리포니아를 벗어난 교역은 드물어 콜로라도와 아리조나 Gila 강, 바하 캘리포니아, 소노라 북서부 지역에 살았던 유만어 부족(Yuman language: 바하 캘리포니아, 소노라 북부, 남 캘리포니아, 아리조나 서부지역의 원주민 언어. 18세기 후반에 소멸되었음), 그리고 아타바스칸어 부족(Athabaskan language: 앨라스카를 비롯하여 현재의 캐나다 북서부, 태평양 연안, 현재의 오클라호마, 텍사스, 멕시코 북부 소노라, 치와와, 두랑고, 코아우일라, 누에 등 1백5십만 평방마일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걸친 언어군)과 가끔 이루어졌다. 추마쉬 부족(Chumash: 캘리포니아 중서부에 해당하는 현재의 산 루이스 오비스포, 산타 바바라, 벤투라 및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모로 베이와 말리부, 챤넬 군도의 산타크루스, 산타 로사, 산 미겔 섬과 가뭄으로 인한 계절적으로 거주한 작은 섬 아나카파 지역의 부족)이나 통바 부족(Tongva; 현재의 로스앤젤레스 분지에서  챤넬 군도<the Channel Islands: 캘리포니아 벤투라 연안의 8개 섬>에 걸친 약 4천평방 마일의 지역에 거주했던 부족)은 태평양 북서부 부족, 그리고 8세기에는 폴리네시안, 14세기에는 하와이 원주민과 접촉을 하였고, 아마 이들로부터 토몰 카누(Tomol: 산타 바바라 및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사용된 널판으로 만든 카누. 이 카누는 갈대를 엮여 만든 카누를 대체하였음)를 만드는 기술을 전수 받은 듯하다.

III. 유럽인들의 탐험

        16세기 초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스페인과 영국의 탐험가들이 캘리포니아 해안을 따라 항해를 했으나 정착하지는 않았다. 가장 강력한 식민 세력이었던 스페인은 그 제국주의 식민 본거지인 멕시코에 정성을 다했다. 캘리포니아를 포함하여 태평양 연안에 접한 모든 땅에 대한 권리를 확신했던 스페인은 탐험대를 보내어 캘리포니아 연안을 따라 탐사했다. 배 위에서 그들이 본 캘리포니아는, 잔디 깔린 구릉들과 나무가 우거진 계곡의 모습으로 아무런 자원도 관심을 끌만한 천연의 항구도 없었다. 스페인 이외의 여타 유럽 국가들도 다른 지역으로만 눈길을 돌렸을 뿐 캘리포니아에는 관심이 없었다. 18세기 중엽에야 러시아와 영국의 탐험가와 모피상들이 캘리포니아 해안에 무역사무소를 개설하기 시작했다.

1. 에르난 꼬르떼스

        서기 1530년경 신스페인왕국 총독 구즈만(Nuño Beltrán de Guzmán, 1490-1558)은 인디언 포로로부터 금과 은으로 거리를 포장한 시볼라 일곱 도시(the Seven Cities of Cibola)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에르난 꼬르떼스(Hernán Cortés, 1485-1547: 멕시코의 Aztec 왕국을 정복한 스페인 정복자)도 북서쪽 어디엔가 멀리, 아마존 여인들이 사는 금과 은, 진주와 보석이 흘러넘치는 경이로운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크게 마음이 끌렸다. 


    - 꼬르떼스 -

그들은 이 두 곳이 같은 장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1533년 탐험에서 스페인 사람들은 지금의 바하 캘리포니아 라 파스 만(La Paz Bay)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한 후 고생 끝에 귀환을 했다. 꼬르떼스가 참여한 1534년과 1535년 원정에서도 그 도시들을 찾지 못하였다. 1535년 5월 3일의 원정에서 꼬르떼스는 산타 크루스 섬(Santa Cruz Island: 현재의 바하 캘리포니아. 당시의 정복자들은 현재의 바하 캘리포니아를 섬으로 알고 있었다)이라고 주장한 곳에 도시를 계획하니 지금의 바하 캘리포니아 주도 라 파스이다.


      - 16세기 바하 캘리포니아 -


2. 프란시스코 데 우요아

        서기 1539년 꼬르떼스는 프란시스코 데 우요아(Francisco de Ulloa,  ?~1540년 사망)를 세척의 배와 함께 보내어 캘리포니아 만을 탐사토록 했다. 우요아는 콜로라도 강 입구까지 탐사를 한 후, 캘리포니아 반도를 돌아 멀리 바하 캘리포니아 연안의 세드로 섬(Cedros Island)까지 항해하였다. 이 항해를 통해 바하 캘리포니아가 반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이듬해 에르난 데 알라르꼰(Hernan de Alarcon, 1500~?: 16세기 스페인의 탐험가)이 지휘하는 탐험대가 콜로라도 강 하류까지 거슬러 올라가 우요아의 발견을 재확인하였다. 이렇게 해서 알라르꼰은 알타 캘리포니아(Alta California: 상上 캘리포니아. 지금의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16세기 프랑드르(Frandre: 네델란드 북부 지방)지리학자겸 지도제작자인 메르카토르(Gerardus Mercator, 1512-1594)와 오리텔리우스(Abraham Ortelius,1527- 1598: 네델란드 지리학자겸 지도제작자)가 발간한 지도에는 바하 캘리포니아를 반도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의 지도에는 그렇지가 않다. 우요아의 항해 일지에는 “캘리포니아”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이 이름은 1510년 발간된 스페인 소설가 몬탈보(Garci Rodríguez de Montalvo, 1450-1505)의 기사 소설 “에스프란디안의 모험(Las Sergas de Esplandián)”에 등장하는 이상향의 섬 이름 California를 딴 것이다.

 
       - 우요아 -

3. 후안 로드리게쓰 까브릴요

        까브릴요(Juan Rodríguez Cabrillo, 1499-1543)는 캘리포니아를 탐험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는 국적이 확실치 않으나 스페인 또는 포르투갈 사람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는 사병 출신으로 석궁수石弓手였고 스페인 왕실을 위한 항해가였다. 그는 서부 해안 즉, 지금의 멕시코에서 자신이 설계하고 건조한 두 척의 배로 탐험대를 이끌고 1542년 6월 탐험에 나섰다. 9월 28일 그는 현재의 바하 캘리포니아 샌 디에고에 상륙하여, 그가 섬으로 생각한 캘리포니아를 스페인의 영토로 선언하였다. 또한 그는 바하 캘리포니아에서 알타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연안의 여러 섬들의 이름을 짓고 스페인의 영토로 선언하였다.

    
         - 까브릴요 -

        까브릴요 탐험대는 북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여 10월 8일, 후일 로스 앤젤레스 (Los Angeles)항구가 될 산 페드로 만(San Pedro Bay)에 상륙하였다. 그는 이 만을 스모크 만(Smoke Bay)로 명명하였는데, 이는 해안을 따라 추마쉬 원주민들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 피우는 불의 연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원정대는 아시아로 연결되는 것으로 믿은 해안 항로를 찾기 위해 북으로 계속 나아갔다. 까브릴요는 산 미겔 곶(San Miguel Island: 캘리포니아 Ventura 연안에서 서쪽으로 가장 먼 섬)까지 이르렀고, 포인트 레이에스 곶(Point Reyes: 샌프란시스코 연안 서북서 쪽 30마일 Marine county에 위치)까지 항해할 수 있었으나 항해 도중 사고로 사망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페르레르(Bartolomé Ferrer, 1499-1550)가 지휘하는 원정대는 북쪽으로 더 나아가, 오늘 날의 오레곤 주 로그 강(Rogue River)까지 갔던 것으로 보인다.

     
          -페르페르 -

        카브릴요 원정대는 스페인과 교역을 하기엔 너무나 먼 곳인 캘리포니아를 탐험하는 건 쓸데없는 일임을 알았다. 원정대는 소규모 목장에 100에서 150명이 무리지어 사는 원주민의 생활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4. 스페인령 필립핀과의 교역로 개통

        서기 1565년 스페인 사람들은 필리핀과의 교역로를 개척하였고, 이 교역로를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획득한 금과 은을 중국 및 기타 아시아 국가들에서 생산된 향료 등 상품과의 교역에 사용하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필리핀의 마닐라에 본부를 두었다. 멕시코와의 교역에는 대형 상선단의 일 년 항해가 소요되었다. 마닐라를 출발한  상선들은 우선 북위 40도를 향해 가다가,  편서무역풍과 해류를 따라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 필리핀-멕 교역로 -

        이 상선들은 60일에서 120일 후, 북위 대략 40도 부근인 샌프란시스코 북쪽 3백마일 지점인 멘도시노 곶(Mendocino Cape: 현 캘리포니아 Humbolt county에 소재. 경도 상 캘리포니아 최서단에 위치함)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그런 다음 바람이나 남쪽으로 흐르는 캘리포니아 해류(시속 1.6킬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결국 1,500마일 남쪽의 모항인 멕시코에 도착했을 것이다. 현재의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최초의 아시아인은 1500년, 스페인 상선을 타고 와, 모로 항(Morro Bay: 캘리포니아 주 산 루이스 오비스포에 소재)에 도착한 필리핀 선원들이었다.

5. 프란시스 드레이크

        프란시스 드레이크(Sir Francis Drake, 1540-1596: 영국의 탐험가. 동시에 해적, 노예상인, 해군장교, 정치인이기도 함)는 신대륙의 태평양 연안을 따라 있었던 스페인 식민지와 보물선들을 약탈한 다음 오레곤으로 항해하였다. 그런 다음 1579년 6월 17일, 장차 샌프란시스코가 들어설 포인트 레이에스(Point Reyes: 샌프란시스코 북서쪽 30마일 Marine County 소재)에 상륙, 캘리포니아 해안 지역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그는 미워크 족(Coast Miwok: 오늘 날의 캘리포니아 북부 마린 카운티와 소노마 카운티에 살았던 원주민 )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 지역을 뉴 알비온(New Albion: 1579년 드레이크가 북미 대륙에 상륙하여 영국의 주권을 주장한 멕시코 북부 지역. 그의 주장은 북미 대륙에 대한 영국 특권의 정당성을 위한 근거가 되었음)이라 하고 영국의 주권을 주장하였다.

    
            -드레이크-

6. 세바스띠안 비스까이노

        서기 1602년, 비스까이노(Sebastián Vizcaíno, 1548-1624: 스페인 탐험가)는 앞에서 말한 신스페인부왕국副王國을 위하여 캘리포니아 연안을 탐험하였다. 그는 현재의 샌디에고 만이라는 이름을 지은 인물이다. 그는 해안선을 따라 내륙 남부를 탐험하였고, 현재의 카멜 만(Carmel Bay:  몬테레이 카운티에 소재하는 만)으로 추정되는 곳에 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많은 역사적 공적을 남겼는데, 정박항으로서의 몬테레이 지역과 정착 가능한 곳, 경작 가능 작물에 관한 보고서들과 2백년 이상 사용 가능했던 세밀한 해류도를 작성하여 남겼다.

     
           - 비스까이노 -


7. 기타 유럽인들의 탐험(1765-1821)

        서기 1680년 이후 캘리포니아에서는 번성했던 중국과의 교역이 중단되었던 듯하다. 서기 1680년부터 1740년 기간 중 스페인 상인들은 멕시코 시를 벗어나, 아카풀코(Acapulco: 멕시코의 태평양 연안 도시)나 까야오(Callo: 1537년 스페인 정복자들이 페루에 세운 도시)와 마닐라 간 교역에 투자를 했다. 그들은 마닐라에서 인도 산 면화와 중국산 비단을 사들였다. 스페인 정부는 지나치게 많은 아시아산 직물이 멕시코와 리마에 수입되어, 스페인 산 직물의 경쟁자로서 신대륙 시장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마닐라와 아카풀코간의 선적 량에 제한을 가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멕시코 상인들은 물 저장용 공간을 밀수품으로 채우는 등 과적으로 대항하였다. 그 결과 마닐라를 떠난 선박은 두 달간의 물을 실었으나 항해는 6개월이 걸렸다. 하와이는 아직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마닐라와 아카풀코 간의 해로는 해류로 인해 북쪽으로 기울었고, 따라서 처음 닿은 곳은 지금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나 몬테레이가 되었다. 18세기 중엽 영국과 스페인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서기1762년 양국 간의 전쟁(the Anglo–Spanish War: 7년 전쟁의 일환으로 싸운 전쟁)결과 영국은 태평양의 필리핀과 캐리브 해의 아바나를 차지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스페인은 1769년 샌프란시스코와 몬테레이에 요새를 구축하였다. 영국 역시 태평양에서의 활동을 강화하였다. 1778년 영국의 항해가 제임스 쿡(Captain James Cook, 1728-1779)은 영국 해군 포함 레조루션(Resolution)호를 타고, 캘리포니아 서해안으로부터 베링 해에 이르는 뱃길을 3~4차례 항해하여 해도를 작성하였다. 1786년 루이XVI의 명령을 받은 프랑스 탐험가 드 갈로(Jean-François de Galaup, comte de Lapérouse, 1741-1788?)가 한 무리의 과학자와 예술가들을 이끌고 탐험에 나섰다. 몬테레이에 도착한 그는 원주민의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고, 캘리포니아의 토지와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 후 수십 년간 상인과 고래잡이들, 과학조사단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 쿡 -


IV. 스페인 식민지 착수와 총독부(1697-1821)

        서기 1697년, 리나레스 총독(the Viceroy Duque de Linares, 1662-1717: 1711부터 1716까지 신 스페인 부왕국 총독)은 미라바에 공작(the Conde de Miravalle: 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스페인 귀족 계급 명칭임)과 아카풀코 재무담당관 시에르뻬(Pedro Gil de la Sierpe, 1648-1717)와 함께 예수회의 캘리포니아 전도를 적극 재정 지원을 하였다. 1711년 리나레스는 아시아와 아카풀코, 리마간의 교역 증대를 위해 스페인 왕실과 적극적인 로비를 하였다. 바하 캘리포니아의 남단부는 마닐라로부터 아카풀코로 가는 중간 기지로서 밀수품을 하역할 수 있는 곳이었다. 밀수품은 선적 후 캘리포니아 만을 건너 소노라를 경유하여 멕시코 본토로 들어갈 수가 있었을 것이고, 소노라에 선교회를 가지고 있었던 예수회는 자신들을 재정 지원하는 밀수 선원들에게 동조하였다.

        서기 1697년 10월 25일, 예수회 선교사인 살바띠에르라(Juan Maria de Salvatierra)가 바하 캘리포니아 반도 최초의 항구적인 선교회인 로레토 꼰초 선교회(Misión de Nuestra Señora de Loreto Conchó)를 현재의 Loreto 시 꼰초 인디언 보호구역에 세웠다. 선교회 확장을 포함하여 로레토로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통제는 남으로는 케이프, 북으로는 현재의 바하 캘리포니아 북쪽 경계선까지 점점 확대되어 갔다. 그 결과 바하 캘리포니아의 스페인 선교회는 30개에 이르렀다.

      
              - 꼰초 선교회 -

        18세기 마지막 남은 25년 동안 최초의 스페인 정착지가 세워졌고, 이 정착지들은 나중에 신 스페인 부왕국의 캘리포니아 성(Las Californias Province of the Viceroyalty of New Spain)이 되었다. 러시아 그리고 뒤이어 영국이 태평양 북쪽 해안의 모피 동물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스페인은 캘리포니아 중, 남부 해안선을 따라 목장을 설치하고 군대를 동반한 선교회를 계속 확장해 나아갔다. 이 선교회들이 의도한 바는, 현재의 캘리포니아 지역에 스페인 제국의 주권을 과시코자 한 것이었다. 1823년 현재 알타 캘리포니아(Alta California: 상上 캘리포니아)지역의 스페인 선교회는 21개에 달했다. 산 블라스(San Blas: 멕시코의 태평양 연안 마을)에 본거지를 두고, 캘리포니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거나 북서태평양을 비롯하여 앨라스카까지 탐험을 했던 것이다

      
            - 산 블라스 -

        19세기 초에 남, 중부 캘리포니아 해안선을 따라 스페인 선교회와 목장이 세워지고 군대의 주둔에 따른 식민지가 서서히 형성되어 갔다. 서기 1820년까지 스페인의 영향력은 로레토로(Loreto 또는 Conchó; 바하 캘리포니아의 캘리포니아 만 해안에 있는 도시 )부터 샌디에고를 지나 현재의 샌프란시스코 만 바로 위까지 분포되었던 선교회가 상징한다. 내륙으로는 선교회들로부터 대략 25마일에서 30마일의 범위까지 이르렀다. 이 범위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20만에서 25만에 이르는 원주민들이 전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1819년에 체결된 애담-오니스 조약(Adam-Onis Treaty: 플로리다를 미국에 양도한다는 내용의 조약)에서 스페인의 주권을 북위 42도까지 정함으로써 오늘날 캘리포니아 주와 오레곤 주의 경계가 정해졌다.

      
                   - 산 로레토 -

1. 스페인 최초 식민지

        서기 1519년 이후 스페인은 수많은 선교회와 요새들을 신 스페인부왕국에 설치, 운영했다. 1542년 스페인은, 캘리포니아 북쪽 해안 지방에 대한 주권을 주장했다. 북쪽의 뉴멕시코에 있는 산타페를 신 스페인부왕국에서 제외시킴으로써, 그 후 150년 동안 북쪽으로의 정착은 지지부진했다. 1697년 바하 캘리포니아의 로레토에 정착지가 세워졌으나, 1765년 앨라스카로부터 내려온 러시아 모피 상인들의 침입과 정착 가능성으로 위협을 느낀 스페인은 정착지를 훨씬 북쪽까지 더 확대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때까지 스페인은 7년 전쟁(Seven Years War, 1756-1763: 신대륙에 대한 패권을 놓고 영국과 스페인, 프랑스가 다툰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캘리포니아 북부 먼 곳까지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알타 캘리포니아(Alta California)는, 캘리포니아 수도회 소속 군대의 보호 하에 프란시스코 예수회 탁발승들이 정착할 예정이었다. 1774년부터 1791년까지 스페인은 여러 차례 원정대를 보내어, 알타 캘리포니아와 북서 태평양 연안에 정착 시켰다.

2. 포르톨라의 원정대

        서기 1768년 5월, 스페인의 갈베스 장군(Jose de Galvlez, 1720-1787: 스페인 왕이 파견한 강력한 권한을 가진 특수 임무의 장군)은 4개의 원정대를 알타 캘리포니아에 정착 시킬 계획을 세웠다. 원정대 둘은 해상으로, 또 다른 두 원정대는 육상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이 육상 원정대는 포르톨라(Gaspar de Portola, 1716-1786: 스페인 군인. 샌디에고나 몬테레이 등 캘리포니아 주요 도시를 세우고, 캘리포니아 여러 곳의 이름을 지은 인물. 그 지명들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음)가 자원하여 지휘를 맡았다.


      
                 - 포르톨라 -

        서기 1769년 6월 29일 포르톨라의 육상 원정대는 현재의 샌디에고에 도착하여, 그곳에 샌디에고 요새를 세운 다음 인근의 쿠메야이(Kumeyaay)인디언 부족 마을과 코사아이 마을(Kosa'aay: 현재의 샌디에고 구시가지)을 병합하니, 이는 캘리포니아 최초의 유럽인 정착지이다. 북쪽의 몬테레이 만까지 진출을 원했던 포르톨라는 후안 크레스피 신부(Father Juan Crespi, 1721-1782: 스페인 마요르카 출신의 프란시스코 예수회 신부), 가죽제 상의를 입은 63명의 병사, 수백 마리의 노새로 이루어진 원정대를 이끌고, 7월 14일 북쪽을 향하여 출발했다. 8월 2일 현재의 로스앤젤레스에 도착을 했고 3일에 산타모니카, 8월 19일 산타 바바라(Santa Barbara)에 도착했다. 9월 13일 샌시메온(San Simeon)을 거쳐 10월 1일 살리나스 강(Salinas River)입구에 도착했다. 몬테레이만을 찾고자 원했지만, 정작 그곳에 도착했어도 그곳이 몬테레이라는 걸 몰랐다. 10월 31일, 포르톨라 원정대는 샌프란시스코만을 목격한 최초의 유럽인들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때까지 200년 동안 필리핀 마닐라를 출발하여 그곳을 지나간 수많은 상선들이 있었지만, 그 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1770년 원정대는 샌디에고로 귀환했다. 그 후 포르톨라는 초대 캘리포니아 총독이 되었다.

       
               - 살리나스  강 -


3. 후니페로 세르라

        후니페로 세르라(Junípero Serra, 1713-1784: 로만 가톨릭 승려 겸 프란시스코 수도회 탁발승)는 알타 캘리포니아에 최초로 스페인 선교회를 세운, 스페인 마요르카 출신의 성직자이다. 1768년 2월 3일 까를로스III세(스페인 국왕, 1759-1788)에 의한 신 스페인부왕국으로부터 예수회 성직자들의 추방령이 내려진 후 그의 이름은 “대장 신부(Father Presidente)”로 불리었다. 1769년 그는, 캘리포니아 최초의 프란시스코 선교회인 알칼라(San Diego de Alcala; 샌디에고 소재)선교회를 세웠다. 1770년 몬테레이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 알타 캘리포니아 두 번째 선교회인 샌 카를로스 보르로메아 교회(San Carlos Borromea: 1797년에 세워진 전형적인 로만 가톨릭 선교 교회. 캘리포니아 카르멜 계곡 입구에 있으며, 역사적 장소로 등록되어 있음)를 세웠다.

    
                - 알칼라 선교회 -


4. 알타 캘리포니아 선교

        캘리포니아 선교회는 캘리포니아 원주민들에 대한 기독교 교리 전파를 위해 도미니카교단, 예수회 교단, 프란시스코 교단에 의해 건립된 일련의 종교적인 전초기지前哨基地이다. 이들에 대한 정부 재정의 80%는 선교회가 아닌, 스페인 통제 하에 있는 샌디에고와 몬테레이를 포함, 샌프란시스코 수비대들에게 지원되었다. 챤넬 군도에 있는 산타바바라 요새는 후에 세워졌다. 선교회는 유럽으로부터 가축과 과일류, 채소류 등 농산물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식물을 캘리포니아로 가져왔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선교회가 필요로 했던 노동력 공급은, 원주민의 거주지를 강제로 재배치하고 일용 임금 노동(Peonage)에 의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각 선교회에 소속한 소수의 스페인 사람들은 선교회마다 대략 5천 명의 원주민들을 컨트롤하기 위해 주로 협상에 의존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유혹이나 협박도 했음이 밝혀졌다. 캘리포니아의 미래에 관해 군인들과 시각이 달랐던 선교사들은 원주민을 컨트롤하기 위해 주로 그들과의 협력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유한 토지로 볼 때, 대부분의 선교회는 거대 규모(대략 지금의 한 카운티 면적)였다. 그러나 스페인사람이나 멕시코인등 관리요원의 수는 적어, 보통 두 명의 프란시스코 신부에 여섯 내지 여덟 명의 병사가 함께 상주하며 따르는 식이었다. 원주민 집단 수는 처음 몇 개 안되었으나 점점 많아져, 스페인의 지배가 끝난 1810년에는 2천여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집단은 프란시스코 선교회의 감시 하에, 주로 원주민들이 만든 것이다. 그들의 노동이 강제였느냐의 여부에 관해 학술적인 논쟁이 있다. 1769년부터 1810년까지 선교회가 생산한 산물은, 일차적으로 원주민들에게 분배되었다. 1808년 스페인의 페르난도VII세가 프랑스에 의해 구금되면서 스페인제국(부에노스 아이레스로부터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는)이 붕괴됨에 따라, 1810년 캘리포니아 스페인 선교회와 요새들은 정부로부터의 재정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증산을 위해 원주민들은 점점 더 압력을 받게 되었다. 선교회들은 원주민의 노동 생산물을 영국계 미국인이나 멕시코 상인들을 통해 팔았다. 원주민이나 군인들에 대한 배급은 점점 정치적 고려와 선교사 개인의 자비심에 의존하게 되었다. 1825년 멕시코는 캘리포니아를 통제하기 위해 총독을 보냈으나, 그는 군인들의 임금 지급에 관해 아무런 대책이 없이 왔다. 캘리포니아 주둔 멕시코 요새의 재정 지원을 위해 무보수로 부려먹었던 선교회 소속 원주민 노동력 문제는 바로 정상화 되었다.

        요새와 마을 이외에도 선교회는, 식민지와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 스페인 정부가 활용한 세 개의 주요 단체 가운데 하나였다. 이 세 단체 중 어느 것도 자립 능력이 없었고 끊임없는 재정 지원을 요구했다. 1810년 멕시코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이 재정 지원은 소멸되었고 선교회들은 홀로 서게 되었다. 1827년 멕시코 정부가 스페인 사람들을 추방하는 추방 법(the General Law of Expulsion)을 제정함에 따라, 캘리포니아 거주 스페인 성직자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몇몇 선교회는 멕시코 정부에 의해 국유화가 되었고 또 매각이 되기도 했다. 미국 정부 수립 후 미국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몇몇 선교회는 그 원래의 소유주인 수도회로 돌아갔다.

        육로 여행을 쉽게 하기 위하여 선교회는 30마일 간격으로 세워졌다. 그렇게 해서 6백 마일에 이르는 왕도王道(El Camino Real: 샌디에고 알칼라 선교회로부터 샌프란시스코 Solano 선교회까지 6백마일의 순례 길)를, 말을 타고 하루거리인 30마일 간격으로 세운 것이다. 이 길은 "캘리포니아 전도 길(California Mission Trail)"이라고도 부른다. 이 길을 따라 가며 선교회 신부들은, 눈부신 노란 꽃을 피워 표시하기 위해 겨자씨를 뿌리는 관습이 전해지고 있다. 후일 로스엔젤레스로부터 샌호세 선교회(Mission San José: 1797년 6월에 캘리포니아 Fremont에 세워진 선교회)와 샌프란시스코 만에 이르는 직선 가까운 도로 엘 까미노 비에호(El Camino Viejo: 구도舊道)가, 샌 호아낀 계곡(San Joaquin Valley: 새크라멘토 남쪽 샌 호아낀 강 삼각주에 위치한 분지)의 서쪽 끝을 따라 건설되었다.

        
                - 순례의 길 -

        무거운 화물의 장거리 운송은 바닷길로 했지만 병사들이나 정착민, 여행자는 물론 말이나 노새, 우마차등 동물을 이용한 화물 운송은 이 길을 이용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 해안을 따라 전략적으로 세워지고, 각각 군사 지역으로 조직되었던 4개의 요새는 알타 캘리포니아 선교회와 정착민들을 보호하는데 기여했다.

        많은 선교회 건물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거나 재건축되기도 했고, 20세기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많은 선교회가 신도들을 확보하고 있다. 그 선교의 길과 선교회들은 이제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로맨틱한 과거의 상징물로 남아 있다.

5. 목장 개척

        스페인 사람들은 소와 양을 기룰 수 있는, 목장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무상 토지를 주며 정착을 장려한 바 있다. 멕시코 독립 후 1833년, 멕시코 세속화 법( The Mexican Secularization Act of 1833: 캘리포니아에서의 스페인 선교회가 로만 가톨릭에 계속 충성함으로써 스페인 영향력의 재부상을 두려워한 멕시코가 스페인 선교회 해체를 목적으로 한 법)제정과, 이전의 광대한 선교회 토지가 여러 개의 목장들로 쪼개지면서 캘리포니아 선교회는 세속화(해체)되었다. 19세기 중엽까지 쇠가죽(개당 1달라)과 쇠기름(비누와 양초의 원료)은 캘리포니아의 주 수출 품목이었다. 국내외 시장으로 대량 팔려 나갔다. 목장 노동자들이란 대부분 원주민 인디언들이었고 대부분이 선교회 구역 주민들로 스페인어와 말 타기를 배운 사람들이었다. 에스꼬르피온(Rancho El Escorpión: 현재의 L.A 카운티에 있었던 4.5평방 킬로 넓이의 목장)이나 테메쿨라(Rancho Little Temecula: 현재의 리버사이드 카운티에 있었던 넓이 9.04평방 킬로의 목장)같은 목장은 1845년 캘리포니아 지사 피오 피코(Pio de Jesus Pico,1801-1894)에 의해 원주민들에게 무상으로 양여되었다.

    
              - 피오 피코 -


6. 행정 구역

       서기 1773년 팔로우(Francisco Palou, 1723-1789: 스페인 프란시스코 교단 소속 선교사)는 캘리포니아를 Alta(상), Baja(하)로 나누어 선교 구역 경계선을 그었다. 그때까지 바하 캘리포니아의 선교권은 도미니카교단에 있었다. 그 후 1804년 알타 캘리포니아에 히스패닉 계 인구가 증가하자 이 지역은 두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보리카(Diego de Borica,1742-1800: 스페인 바스크 출신의 캘리포니아 총독)는 현재의 상, 하 캘리포니아를 공식적으로 분할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바하 캘리포니아 반도는 Vieja California로 불리기도 한다. 스페인어 Vieja는 영어로 Old 라는 뜻이다. 그 북쪽 알타 캘리포니아는 또한 Nueva(new) California로 불리기도 한다. 알타 캘리포니아의 동쪽 경계선은 아직 정해진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의 알타 캘리포니아 영토는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일부, 뉴멕시코, 콜로라도 서부, 와이오밍 남서부분, 바하 캘리포니아 북부 좁은 지협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시 사실상의 동쪽 경계선은 애리조나의 스페인 정착지, 그리고 뉴멕시코와 면한 시에르라 네바다(Sierra Nevada)와 콜로라도 강과 연결되는  선이었다.

          
                -시에르라 네바다 산맥 -

V. 러시아 식민 개척 사무소

        스페인 사람들이 알타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동기는 부분적으로 이 지역에 러시아의 식민지 설치를 막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19세기 초, 러시아 제국의 러-아메리카회사(the Russian-American Company of Imperial Russia: 러시아 황제 바울I세가 특허를 준 회사. 신대륙에 식민지 건설이 임무였음. 원주민과의 교역 및 식민 계획을 수행함)는 앨라스카에 교역 본부를 두고, 수달피를 찾아 멀리 남쪽 샌디에고까지 왔다. 서기 1812년 이 회사는 포트 로스(Fort Ross: 캘리포니아 소노마 카운티 소재)에 보루 겸 무역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이곳은 샌프란시스코 북쪽 60마일 지점으로 영국이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점령하지는 못한 곳이었다. 이 러시아 정착지는 1839년까지 운영되었다.

       
               - 포트 로스 -

        서기 1836년 알타 캘리포니아 북부 전선 사령관인 바예호 장군(General Mariano Guadalupe Vallejo, 1806-1890)은 소노마 막사(Sonoma Barracks)를 건립하였다. 이 요새는 러시아의 침투를 막기 위한 대멕시코 전략의 일환으로 세워졌으나 또한 스페인 사람들을 위한 선교회 건물로도 사용되었다. 바예호 장군은 Californio(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스페인 사람)로서 멕시코 공화국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그는 알타 캘리포니아에서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로 바뀌는 과도기에 캘리포니아 형성에 기여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 소노마 바라크 -

VI. 멕시코 영토 알타 캘리포니아(1821-1846)

       1. 멕시코제1왕국과 멕시코제1공화정

           19세기 하반기에 들어, 알타 캘리포니아에는 실질적인 변화가 일었다. 서기 1809년 스페인 국왕이 프랑스 나폴레옹에 의해 구금됨으로써 스페인은 알타 캘리포니아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15년 동안 알타 캘리포니아는 생존을 위해서나 새로운 소식을 접하려면 페루의 리마 또는 산 블라스로부터 온 스페인계 미국인이나 영국계 미국인들과의 교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서기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전쟁에서 멕시코가 승리함으로써 캘리포니아에 대한 멕시코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신생 멕시코 왕국으로서는 쉽지 않은 통치였다. 1810-1825 기간 중 선교회의 원주민 신도와 선교사들은, 전 식민지에 수출 소득을 가져다 준 결정적인 상품 제공자들이었다. 그러나 목장이 활성화되고 교역이 증가함에 따라 선교회 원주민 신도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신 스페인부왕국의 후임자로서 멕시코는 자동적으로 알타, 바하 캘리포니아 영토를 물려받게 되었다. 서기 1823년 공화정부가 수립되면서 알타 캘리포니아는 많은 다른 영토들과 마찬가지로, 그 인구 규모가 작아 헌법상 멕시코 영토로 인정될 수가 없었다. 알타 캘리포니아가 멕시코 영토가 된 것은 1824년 헌법에 의해서였다. 멕시코는 1821년에 독립국이 되었으나 제1차 멕시코 공화정이 들어선 1825년, 에체안디아(Jose Maria de Echeandia, ?-1871: 두 번에 걸쳐 알타 캘리포니아 총독을 역임한 인물)가 변경 지역에 공화 정신을 전파하고 메스티소(스페인과 원주민간의 혼혈인)를 해방시킨 다음에야 캘리포니아에 총독을 파견할 수가 있었다. 그는 선교회에 속박되었던 원주민을 해방시키는 운동을 시작했다. 또한 병사들이 불하 받아 원주민 노동력을 이용하여 이득을 챙겼던 농장들의 이윤동기도 없애버렸다. 원주민 신도들이 경작했던 비옥한 토지에 대해 병사들의 지배력 확대를 막은 선교회를 폐지하려는 압력이 점증되고 있었다. 1829년 가장 강력했던 선교회인 오비스포 선교회(Luis Martinez of San Luis Obispo)와 레이 선교회(Peyri of Mission San Luis Rey)가 폐지되었다. 1827년 멕시코 의회는 추방 법(the General Law of Expulsion)을 통과 시켰다. 이법은 스페인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불법 이민자로 선언하고, 그들에게 새로 편입된 멕시코 땅을 당장 떠나도록 명령하였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스페인 사람들로 노인이 많았고, 그들은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서기 1831년 알타 캘리포니아의 부자들로 구성된 소규모 단체가 마누엘 빅토리아 총독에게 민주적인 개혁을 할 것을 청원했다. 이전 총독 호세 마리아 데 에체안디아가 훨씬 인기가 있었고, 따라서 그 부자들은 그에게 빅토리아 총독은 곧 몰락할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소규모 군대를 조직하여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로 진군하여, 그곳을 점령했다. 빅토리아 총독은 군대를 소집하여 스스로 지휘, 그들과 싸우기 위해 갔다. 1831년 12월 5일, 그는 카우엔가 (the Cahuenga Pass: 현재의 로스앤젤레스 산타모니카 산 동쪽 끝에 난 산길)에서 적군과 만났다. 그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빅토리아는 알타 캘리포니아 총독 직을 사임했다. 전임 총독 에체안디아가 그 자리를 이어 받아, 1833년 호세 피게로아가 총독이 될 때가지 그 직을 수행했다.

  
               - 카우엔카 -

       서기 1833년 8월 18일, 멕시코 의회는 캘리포니아 선교회 해산 법(An Act for the Secularization of the Missions of California)을 통과 시켰다. 법령이 발효된 그 이듬해 샌 후안 카피스트라노 선교회(Mission San Juan Capistrano: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소재. 1776년 설립된 스페인 프란시스코 교단 선교회) 가 그 첫 대상이었다. 합법적인 허락을 받은 군대는 그 선교회 소속 원주민 땅을 몰수, 나누어 가졌다. 살비데아(José María de Zalvidea, 1780-1846: 스페인 출신의 프란시스코 교단 신부)처럼 나이 든 프란시스코 교단 신부들은 결코 임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미 그곳을 떠나 스페인으로 돌아간 페이리(Peyri) 신부는, 그곳을 떠나 온 걸 슬퍼했다.

2. 멕시코 공화국 주권하의 캘리포니아

        서기1836년 멕시코는 1824년 제정한 연방헌법을 폐지하고 상, 하 캘리포니아를 하나로 통합하는, 정치적으로 보다 중립적인 법안을 채택했다. 이러한 변화는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진 알타 캘리포니아에는 별 효과가 없었다. 알타 캘리포니아의 수도 몬테레이는 1769년 포르톨라 원정대가 처음 정한 그대로였고, 현지 정치 구조도 그대로였다.

        서기 1835년 구티에르레스(Lieutenant Colonel Nicolás Gutiérrez)가 통합 캘리포니아 주 지사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그는 치코(Mariano Chico, 1796-1850)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치코는 인기가 없었다. 자신에 대한 반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멕시코로 돌아가 군대를 모집하였으나, 직무 이탈로 비난을 받았다. 군사령관 구티에르레스가 그 자리를 맡았으나 그 역시 인기가 없었다. 알타 캘리포니아 의회 원로 의원인 알바라도(Juan Bautista Alvarado,1809-1882)와 카스트로(Jose Castro, 1808-1860)는 바예호(Mariano Guadalupe Vallejo: 제4지역 군사령관 및 북부지역 식민 국장)와 미국인 모피상인 그래함(Isaac Graham,1800-1863)이 이끄는 무리의 지원을 받아, 1836년 반란을 일으켜 구티에르레스를 자리에서 축출했다. 미국인들은 캘리포니아 독립을 원했으나 알바라도는 멕시코의 일부로 남는 길을 택했다

        서기 1840년에 들어 모피상인 그래함은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 식 혁명을 부추기기 시작했고, 3월에는 경마 대회가 있다는 말을 퍼뜨렸는데 이는 반란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알바라도는 바예호에게 상황을 알렸고, 4월에 들어 캘리포니아 군 당국은 미국인 및 영국인 이민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몬테레이 요새에서는 1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체포하기도 했다. 당시 캘리포니아 전체 외국인은 4백 명 정도였다. 바예호는 몬테레이로 돌아가 47명의 죄수를 풀어 카스트로에게 인계하면서, 배에 태워 샌 블라스로 데리고 가 각자 그들의 나라로 추방하라고 했다. 영국과 미국 외교관들의 항의를 받은 부스타멘테 (Anastasio Bustamante y Oseguera: 멕시코 대통령. 군인 겸 정치가)대통령은 남은 죄수들을 석방하고 카스트로를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미국인 여행가 환햄( Thomas Jefferson Farnham, 1804-1848: 미국인 탐험가 겸 저술가)은 반란에 가담하여 체포된 그래함의 석방을 도왔다. 그래함과 그 동조자 18명은 멕시코 연방정부가 발급한 여권을 가지고 몬테레이로 돌아왔다.

      
                  - 몬테레이 -

       서기 1841년 미국 정치지도자들은 매니페스토 운명(Manifest Destiny: 미국인 정착자들은 북부로 뻗어 나가야 할 운명이라는 신념)주의를 선언하고 있었고 칼리포니오(Californio: 미국에서 태어난 스페인 인)들은 그 주의가 무엇을 의도하는지 걱정이 되었다. 따라서 바예호는 두 사람(카스트로와 알바라도)과 의논을 한 다음, 그들은 캘리포니아를 통제하기 위해, 멕시코는 군대를 증파할 것을 제안했다.

        군대 증파에 관해 멕시코 대통령 산타안나(Lopez de Santa Anna, 1794-1876)는 1842년, 3백 명의 병사와 함께 미첼토레나(Manueal Micheltorea, 1804-1853)준장을 캘리포니아로 파견하여, 지사직과 사령관직을 수행토록 했다. 그가 몬테레이에 도착하기 전인 10월, 미국 해군제독 존슨(Thomas ap Catesby Jones, 1790-1858)은 미국과 멕시코 간 전쟁이 발발한 것으로 잘 못 알고 있었다. 그는 몬테레이 만으로 배를 몰고 가, 그곳 멕시코 요새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미첼토레나의 군대는 아직 남쪽에 있었고 몬테레이 요새에는 병력이 거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알바라도는 마지못해 항복을 하고 알리살 목장(Rancho El Alisal: 현재의 캘리포니아 몬테레이 카운티 소재 )으로 퇴각을 했다. 다음날 존스 제독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으나, 알바라도는 요새로 돌아갈 것을 거부하고 존스와의 싸움을 미첼토레나에게 일임했다.

      
              - 존슨 제독-

        결국 미첼토레나는 몬테레이로 돌아가기로 했으나, 그의 군대는 대부분이 범죄자들로 구성되어 있어 통제가 불가능했다. 이들은 반란에 관한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고, 1844년에는 알바라도 자신이 불평불만 자들과 연루가 되었다. 미첼토레나는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를 곧 석방해야 했다.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라는 돌발적인 명령을 받아, 모든 인력을 전쟁 준비에 투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미첼토레나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는데, 1844년 11월, 마누엘 카스트로가 이끄는 한 무리의 칼리포르니오(Californio: 미국에서 태어난 스페인 사람)가 멕시코 당국을 향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알바라도와 호세 카스트로가 부대를 지휘했다. 실제로 전투는 없었으나 휴전 협상이 있었고, 미첼토레나는 죄수들로 구성된 자신의 군대를 해체할 것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파기되고 곧 전투가 발생했다. 서기 1845년 2월 로스앤젤레스 강 프로비덴시아 전투에서 반도들이 승리를 했고, 패전한 미첼토레나와 그의 군대는 캘리포니아를 떠났다.

        피오 피코( Pío de Jesús Pico, 1801-1894; 캘리포니아노 출신 정치인. 알타 캘리포니아 지사)가 L.A 지사로 취임했다. 알바라도는 멕시코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멕시코로 떠날 준비를 했으나, 피코는 그의 이동에 필요한 재정지원을 거부했다. 알타 캘리포니아의 북부는 미국인 인구가 늘기 시작했고, 그 남부는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칼리포르니오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두 지역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서기 1846년 초, 프레르몽(John C. Frémont, 1813-1890: 서부 개척자. 군인 겸 정치인. )이 몬테레이에 도착했다.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두려워한 카스트로는 군대를 조직하고 알바라도를 사령관으로 하여 프레르몽에 대비했다. 그러나 프레르몽은 그들을 지나쳐 북쪽 오레곤으로 갔다. 멕시코의 정정불안은 칼리포르니오들 간의 관계를 긴장 시켰고, 알타 캘리포니아 남부와 북부 지역 간 전쟁이 터질 듯 했다.

    
            - 프레르몽 -

        서기 1846년 알타 캘리포니아의 스페인어 사용 인구는 1만 명이 채 안 되었다. 멕시코 북쪽의 여타 지역의 전 인구와 비교를 해도 작은 규모였다. 칼리포르니오는 약 8백 가정쯤 되었는데, 대부분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미국인은 1천3백 명 정도였고 유럽 여러 나라에서 온 약 5백 명에 이르는 유럽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몬테레이에서 새크라멘토까지 흩어져 있었고, 주업은 교역이었다. 성인 남자들로 보면 이 두 그릅은 비슷했지만, 다만 미국인들이 보다 최근에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3. 러시아-아메리카 회사

        서기 1812년에 북아메리카 최남단인 포트 로스(Fort Ross: 캘리포니아 소노마 카운티 소재. 과거 러시아인 정착지)에 러시아-아메리카 주식회사(RAC)가 설립되었다. 북쪽의 러시아인들에게 농산물 공급을 위한 회사였다. 이 공급 사업은 RAC와 허드슨 베이 사(Hudson‘s Bay Company: 캐나다인 소매상 그릅. 모피 거래가 주업이었음)간의 거래로, 콜럼비아 강 유역의 뱅쿠버 요새를 비롯 여러 공급자들로부터 오는 상품을 취급했다. 포트 로스는 1841년까지 러시아 수중에 있었지만, 그러나 이 사업 개시 당시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고, 러시아인은 물론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오는 다른 인종들 수도 줄어들고 있었다.

        서기 1814년, 알루샨 열도 원주민(Aleuts)모피상들과 러시아 땅 앨라스카로부터 오는 러시아 모피상들은, 물개와 수달피를 찾아 샌니콜라스 섬(San Nicolas Island: 캘리포니아 벤투라 카운티 앞 바다의 섬)까지 왔다. 이곳에서의 지나친 불법 남획으로 비난을 받자 그들은, 그 섬 주민인 니콜레뇨 족(the Native Nicoleño)의 남자들을 대부분 학살하고 여자들을 강간을 했다. 이는 캘리포니아 원주민에게 다가올 학살 가운데 최초의 만행이었다.

       
             - 니콜레뇨 원주민 -


4. 외부로부터의 영향

        이 시기 미국인 및 유럽인 모피상들도 비버(beaver)를 찾아 캘리포니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스키유 길(Siskiyou Trail; 캘리포니아 중앙 계곡으로부터 오레곤의 Williamette에 이르는 길. 지금의 5번 도로)과 구스페인 길(Old Spanish Trail: 뉴 멕시코의 산타 페로부터 콜로라도, 유타, 네바다를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이르는 길. 거의 7백마일 거리)그리고 후일, 캘리포니아 길(California Trail: 미주리 강으로부터 시작하여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북미 서부를 가로지르는 길. 거리 1,600마일)을 통해 캘리포니아로 왔다. 그들은 멕시코 당국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 또 당국의 승인도 없이 왔다. 그들의 도래는 후일 골드 러쉬(Gold Rush)때 몰려올 농부나 목장 노동자들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기도 했다.

        서기 1840년 미국의 모험가 리챠드(Richard Henry Dana Jr.  1815-1882: 미국의 변호사겸 정치인)는 보스톤으로부터 캘리포니아까지 2년여에 걸친 항해 기록 “돛대 앞에서 2년(Two Years Before the Mast)”을 남기기도 했다.

        서기 1840년 프랑스 캘리포니아 과학탐험대 대장인 모프라(Eugène Duflot de Mofras; 19세기 프랑스 외교관 겸 박물학자)는 “... 분명한 사실은 어느 나라든 마음대로 캘리포니아에 해군과 2백 명의 사람을 보낼 수 있다” 라는 기록은 남기고 있다. 1841년 바예호 장군은 알바라도 지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프랑스가 캘리포니아의 주인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알렸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당면한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캘리포니아에 대한 관심을 계속 유지할 수가 없었다. 멕시코 사람들과 갈등을 겪던 스위스 태생의 열렬한 프랑스 광이었던 서터(John Sutter, 1803-1880)는, 캘리포니아 하늘에 프랑스 국기를 계양하겠다고 겁을 주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의 보호를 받아 New Helvetia(New Switzerland)에 거주지를 세우니, 지금의 캘리포니아 Sacramento이다.


      
                - 새크라멘토  -

5. 미국의 이익과 이민자들

        서기 1830년대 초부터 캘리포니아에는 소수의 미국인 상인과 모피상들이 살기는 했지만, 최초의 조직화된 이민은 1841년 바틀슨-비드웰 이민단(Bartleson-Bidwell Party: 바틀손과 비드웰이 지휘한 5백 명의 이민) 이었다. 8월 24일 미주리를 출발한 그들은, 10월 30일 지금의 캘리포니아 샌 호아낀 강(San Joaquin River)에 도착하였다. 노새에 짐을 싣고 도보로, 이들은 전인미답의 캘리포니아 길(California Trail: 미시시피 강으로부터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3,200km 거리의 길)을 따라 왔던 것이다. 같은 해에 태평양 연안 북서쪽으로부터 시스키유 길(Siskiyou Trail: 캘리포니아 중앙 분지로부터 오레곤 Willamette 분지까지의 길)을 따라 미국 탐험 원정대(the United States Exploring Expedition)가 오기도 했다. 서기1844년에는 모피상인 겸 길안내인 그린우드(Caleb Greenwood 1783-1850)의 안내로 스티븐-타운센드 머피 이민 그릅(the Stephens–Townsend–Murphy Party)이 왔다. 열 가족으로 이루어진 이 이민단은, 아이오와를 출발하여 역마차를 타고 시에르라 네바다를 횡단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1846년에는 도너 이민단(Donner Party)의 비극적인 일도 있었다. 미중서부에서 역마차로 출발한 그들은, 여러 가지 시행착오로 늦어져 시에르라 네바다 산맥에서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 죽은 동료의 시신을 먹은 사람도 있었다.

VII. 캘리포니아 공화국과 미-멕시코 전쟁(1846-1848)

       1. 곰 기(Bear Flag ) 반란과 캘리포니아 공화국

           1846년 5월 13일 미국의 대멕시코 선전포고 후, 그 포고가 캘리포니아에 알려지기까지는 두 달이 걸렸다. 몬테레이 주재 미국 총영사 라킨(Thomas O. Larkin, 1802-1858)은 그 소식을 듣고, 호세 카스트로가 지휘하는 소규모 멕시코 수비대와 미국인 간의 충돌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1845년 12월, 미육군 대위 프레몽(John C. Fremont)은 무장이 잘 된 정예 병력 60명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들어와 오레곤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 때 바로 미-멕시코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었다.

      
              - 캘리포니아 기 -

        서기 1846년 1월 15일, 비멕시코계 정착민으로 대부분이 미국인이었던 30명 정도의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소노마 주재 멕시코 수비대를 공격, 멕시코 장군인 마리아노 바예호(Mariano Guadalupe Vallejo,1807 – 1890 )를 포로로 잡았다. 그들은 캘리포니아 공화국 곰 기(Bear Flag: 곰이 그려진 깃발)를 Sonoma 상공에 게양했다. 윌리엄(William Brown Ide, 1796-1852: 미국의 개척자)을 대통령으로 한 소위 이 캘리포니아 공화국(California Republic)은, 프레몽의 미 육군이 급파되어 장악함으로써 일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 현 캘리포니아 주기州旗는 이 곰 기에 토대하고 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공화국(California Republic)”이라는 말은 지금도 주기에 사용되고 있다.

        
                - 아이드 -

 2. 미국인에 의한 정복

        미 해군 제독 슬로우트(John Drake Sloat, 1781-1867: 캘리포니아에 대한 미국의 주권을 주장한 인물)는 전쟁이 급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노마에서 반란을 일으켜 몬테레이에 상륙, 점령하였다. 서기 1846년 7월 7일, 그는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예르바 부에나(Yerba Buena: 현재의 샌프란시스코)를 점령하고 미국기를 게양하였다. 7월 23일 그는, 스탁튼 제독(Robert F. Stockton, 1795-1866: 미 해군 제독. 미-멕시코 전쟁 시 캘리포니아 공략에 공헌한 인물)에게 명령하여 프레몽의 병력을 자기의 지휘 하에 두도록 병력을 재편했다. 이때 프레몽의 “캘리포니아 여단”은 정착지로부터 지원병이 증가하여 160명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어 있었다. 7월 19일 스로우트는 스탁튼과 공동 작전으로 몬테레이에 입성하였다. “멕시코-미국 전쟁” 중이라는 공식적인 어휘도 접수되었다. 미 해군은 불과 며칠 만에 캘리포니아 북부 지역인 몬테레이, 예르바 부에나, 소노마, 그리고 서터 요새를 손쉽게 점령한 것이다.

        한편, 캘리포니아 남부에서는, 멕시코 장군 호세 카스트로와 피오 피코 지사는 로스앤젤레스를 포기하고 있었다. 서기 1846년 8월 13일, 스탁튼 부대가 로스앤젤레스에 입성했을 때 아무런 저항이 없었고 무혈의 캘리포니아 정복이 끝난 듯했다. 스탁튼은 로스앤젤레스에 불과 36명의 소규모 수비대 병력만 남겨놓은 채 떠났고, 플로레스(José María Flores, 1818-1866: 멕시코 육군 장교)가 지휘하는 병력은 멕시코 본국으로부터 도움도 없었다. 따라서 9월이 되어 스탁튼의 수비대는 철수하였다.

        서기 1848년 10월 7일부터 9일까지, 스탁튼이 파견한 2백 명의 증원부대는 도밍게스 란초(the Battle of Dominguez Rancho: 현재의 팔로스 베르데스, 토랜스 등 L.A 인근 지역)전투에서 미 해군 대위 머빈(William Mervine, 1791-1868)의 지휘 하에 싸웠는데,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14명의 전사자를 낸 후 퇴각하였다. 한편 키어니 장군(Stephen Watts Kearny, 1794-1848: 미육군 장교. 미-멕시코 전쟁 영웅)은 100명의 소규모 산악보병부대를 이끌고 뉴멕시코의 산타페를 출발하여, 소노라 사막(Sonoran Desert)을 횡단하는 악전고투의 행군 끝에 마침내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였다. 이 부대는 1846년 12월 6일, 샌디에고 인근 샌파스쿠알 전투(the Battle of San Pasqual )에서 18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이 숫자는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어느 전투의 전사자 수보다 많은 인명 손실이었다.

    
          - 파스쿠알 전투 -

        스탁튼이 포위된 키어니 부대를 구출한 후 하나가 된 두 부대는, 샌디에고를 떠나 북쪽으로 행군하였다. 1월 8일 현재의 "오렌지 카운티(Orange County)"에 들어선 부대는 프레몽의 부대와 만나 합쳤다. 합쳐진 부대의 병력은 660명으로 불어나, 샌 가브리엘 전투(the Battle of Rio San Gabriel: 현재의 L.A 동남쪽 10마일 지점인 Whittier, Pico Rivera, Montebello 등)에서 멕시코 군과 싸웠고, 9일에는 라 메사 전투(the Battle of La Mesa; 현재의 Vernon 지역)를 치루고 12일 전투에서는 멕시코 군의 주력이 항복하였다. 이는 캘리포니아에서의 전쟁이 종료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서기 1847년 1월 13일, 멕시코의 캘리포니아 지배를 끝내는 카우엥가 조약(the Treaty of Cahuenga; 현재의 Studio City 시 101번과 만나는 카우엥가 도로)이 체결되었다.

        서기 1847년 1월 26일 셔만(William T. Sherman, 1820-1891)중위가 지휘하는 부대가 몬테레이에 도착하였다. 3월 15일 스티븐슨의 뉴욕제7지원병연대(Seventh Regiment of New York Volunteers)의 900명 병력이 도착했다. 이 모든 부대들은 1848년 1월 금이 발견될 때까지 주둔했다.

        서기 1848년 2월 2일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he Treaty of Guadalupe Hidalgo: 메시코 과달루페시에서 체결한 미-멕시코 평화 친선 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미국은 멕시코에 18백만 달러를 지불하고, 멕시코는 캘리포니아를 미국에 할양하기로 합의하였다. 조약에 따라 미국과 멕시코 간 최초의 국경선이 그어진 것이다. 1819년 애담-오니스 조약(the Adams-Onis)에서 스페인과 미국이 합의한 경계선은,  현재 캘리포니아와 오레곤의 경계선이 되고 있다. 샌디에고 만은 샌프란시스코 남쪽 캘리포니아의 몇 안 되는 천연항구의 하나이다. 이 전략적인 항구를 남쪽 국경으로 삼음으로써  캘리포니아 전 해안을 감싸게 되었다.

VIII. 1848년, 미국 영토로서의 캘리포니아

         1. 인구

             서기 1840년 현재 원주민을 제외한 캘리포니아 인구는 8천명이었다. 원주민 수는 조사된 바 없지만, 대략 3만에서 15만 명으로 추산된다. 1850년 인구 조사에서도 원주민 및 샌프란시스코, 산타클라라, 콘트라 코스타가 제외되었다. 자료가 손실되어 제외되었던 것이다. 어떤 추정치들은 185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신문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1850년 정확한 캘리포니아 인구는 92,597(수정되지 않은“공식 숫자”)명으로부터 12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1850년 실시한 최초의 인구조사는 가족 단위 이름과 성을 토대로, 15세 이상의 비원주민 여성 4165명을 포함, 여성은 7,019명에 불과했다. 이 숫자에 자료 상실로 제외되었던 샌프란시스코, 산타클라라, 콘트라 코스타의 15세 이상 여성 1,300명을 더해야 할 것이다. 1850년 현재 캘리포니아 전 인구 12만 명(원주민 제외)중 여성은 1만 명도 채 안되었다. 1850년 이전 금을 찾아온 여성은 3천5백 명으로 남성 11만 5천명의 3%였다.

             서기 1852년 실시된 인구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는 20만 명에 이르렀고 이중 10%가 여성이었다.  캘리포니아에 새로 온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들은 아내나 연인, 가족들을 불러들였다. 파나마 지협地峽을 횡단하는 파나마 철도(1855년 완성)가 이미 운행되기 시작한 1850년 이후, 이곳으로부터 캘리포니아까지는 편도가 대략 40일이 소요되어 여행이 보다 쉬어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캘리포니아 트레일(California Trail)을 통해 왔으나, 이 여행은 120일에서 160일이 소요되었다. 남녀 1대1의 비율은 1950년 인구조사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1세기 이상 캘리포니아는 여성이 부족한 지역이었다.

2. 골드러시

        1848년 1월 새크라멘토 동쪽 40마일 지점의 시에르라 네바다 산록 콜로마의 서터 물방앗간(Sutter's Mill)에서 금이 발견되어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다. 

    
                -셔터 물방앗간-


이는 어느 시대보다 캘리포니아  인구 증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일이었다. 광부들은 지금의 캘리포니아 49번 도로를 따라 정착하였고, 다른 지역(현재의 시스키유 카운티)에서도 금이 발견됨에 따라 광부들의 정착지는 시스키유 길(the Siskiyou Trail)을 따라 확대되어 갔다. 이곳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항구는 샌프란시스코 만이었고, 급속히 성장하는 샌프란시스코는 금 채굴에 돈을 대는 은행가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 시스키유 길 -

        골드러시는 캘리포니아로 세계인을 불러들였다. 1855년까지 미국인은 물론, 전 세계로부터 30만 명에 달하는 “포티-나이너(Forty-Niners: 1849년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몰려 온 사람들)"들이 몰려들었다. 부자가 되어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못했다. 콜레라, 열병 등 여러 가지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광산 사고로 남편을 잃은 과부가 많이 생기기도 했다. 또 금이 발견된 직후 10년 동안 그들이 가져온 여러 가지 질병으로 원주민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 Forty-Niners -

3. 캘리포니아 임시 정부

        1846년 중반부터 1849년 12월까지 캘리포니아는 미군이 통치를 했다. 대부분의 지역은 알칼데(Alcalde; 멕시코 계 시장)가 관할했으나, 이제는 미국 사람이 맡은 곳도 있었다. 마지막 지사인 라일리(Bennet C. Riley, 1787-1853)는, 1849년 9월 몬테레이에서 헌법회의(the Californian Constitutional Convention)를 소집한 마지막 군인 지사였다. 헌법회의 대표단 48명은 대부분 1846년 이전에 정착한 미국인들이었고, 이 가운데 8명이 캘리포니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노예제도를 불법으로 인정하고 주정부를 출발시켰다. 이 임시 정부는 1850년 9월 9일 미 의회가 타협법(the Compromise of 1850; 노예와 자유 주州 간 정치적 대결을 인정하지 않는 법)에 따라 캘리포니아를 주洲로 공식 인정할 때까지 8개월간 기능하였다.

        주 수도였던 몬테레이는 그 후 San Jose (1850-1851), Vallejo(1852-1853), Benicia (1853-1854)를 거쳐 1854년 Sacramento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4. 초기 분리주의 운동

        서기 1850년대에, 조세와 토지제도에 불만을 품은 캘리포니아 주민들과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캘리포니아 남부 주민들은 세 번에 걸쳐 북부 캘리포니아로부터 영토나 주 지위를 분리시키려고 했다. 그 마지막 시도인 1859년 피코 법(the Pico Act of 1859)이 캘리포니아 의회를 통과했고, 주지사의 서명을 거쳐, 주민 투표로 압도적인 찬성을 받은 다음 워싱턴으로 보내졌다. 이 법안은 상원의원 래덤(Milton S. Latham, 1827-1882: 제6대 캘리포니아 지사, 상원의원)의 지지를 받았으나 의회투표에 상정되지는 않았다.

5. 법과 전문성

        미국의 국경은 서쪽을 향하여 서서히 확장되어 갔다. 처음에는 연방 법률가나 관리들의 통제 하에 먼 거리를 가는 서툴기만 한 영토 확장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과도기적 모습은 헌법적, 법률적 절차를 거쳐 거주지의 형태에서 주의 형태로 바뀌어 갔다. 1850년에 이르러 멕시코 땅이 미국 영토로 바뀌면서 전 세계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법적 전통을 가지고 왔다. 이 같은 현상은 처음 커다란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신생 미국은 판례라던가 형사정책, 유능한 법률가, 통일적인 법 체계가 결여되어 있었다.

        불안한 시민들이 자경단을 조직했고, 그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1850년대 샌프란시스코 자경단(the San Francisco Committee of Vigilance)이다. 법체계가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즉결재판을 통해 태형, 추방, 교수형 등 허술한 법집행을 했다.

        사법 조직이 발전하면서 여성도 계약을 할 수 있는 권리, 부동산 및 저당권, 배상법, 하자 있는 법령에 대한 재심리 등에 관한 판례를 남겼고 금과 관련한 광권鑛權이나 용수권用水權을 다루기 위해 새로운 사법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원주민이나 중국인에 대한 무자비한 학대가 있었고, 정도가 약하긴 했지만 멕시코 사람들에 대해서도 차별은 마찬가지였다. 1860년대에 이르러 샌프란시스코는 전문적인 경찰력을 확립했고 이를 통해 방범활동을 할 수가 있었다. 1865년에 들어서야  캘리포니아 전역에 걸쳐 법이 원만하게 운영되었다.

    
                  - 자경단에 의한 교수형 -

6. 캘리포니아 대학살

        19세기 캘리포니아 대학살은, 미국이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를 획득한 다음 자행되었다. 그 결과 캘리포니아 인디언 원주민 수가 급격히 감소되었다. 1846년부터 1871년까지 보수적으로 보아도 9천5백 명의 원주민이 미국인들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인에 의한 원주민 노예화, 납치, 강간, 원주민 부모로부터 어린이 탈취 등이 당국과 군대의 묵인 하에 광범하게 자행되었다.

1) 나비(Mariposa)전쟁(1850-1851)

        골드러시는 금이 매장된 지역으로부터 원주민의 추방을 뜻했기 때문에, 원주민들에게 커다란 압력이 되었다. 많은 원주민들이 광산 노동을 강제 받았고, 그들 마을에 대한 군대와 민병대의 공격도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싸운 원주민들이 있었다.

        아와네치 족(Ahwahnechees: Yosemite 분지에 있었던 원주민)을 필두로 시에르라 네바다와 샌 호아낀 분지의 차우칠라 족(Chowchilla)은 1850년 12월, 새비지(James D. Savage, 1817-1852: 캘리포니아 민병대 대장. 백인으로서는 요세미티 분지를 처음 본 인물)가 지휘한 프레스노 강 수비대를 공격하기도 했다.


     
                - 아와네치 인디언-

         이에 대한 보복으로 1851년 1월 11일 마리포사 카운티(Mariposa County: 프레스노 북쪽, 메르세드 동쪽, 스탁튼 동남쪽 시에르라 네바다 산맥 서쪽 기슭에 위치)의 보안관 제임스 버니가 민병대를 이끌고 오크허스트(Oakhurst: 캘리포니아 Madera 카운티 소재)인근 산기슭에서 원주민과 충돌하였다.

2) 멘도시노 전쟁

         1856년부터 1859년까지 라운드 밸리 대학살(the Round Valley Settler Massacres: 캘리포니아 백인 정착민들에 의한 캘리포니아 멘도시노 카운티 소재 라운드 분지의 Yuki 부족 대학살 사건.)이 있은 다음, 1859년 7월부터 1860년 1월 18일까지 유키 족에 대한 또 다른 대학살이 있었다. 이는 원주민 땅에 백인들이 침입한 결과 저항을 불러왔고, 그 결과 수백 명의 원주민이 살해되었다. 1859년 자보우(Walter S. Jarboe, 1829-1869: 원주민과의 싸움에서 악명 높았던 인물)가 이끄는 특별부대(the Eel River Rangers)가, 원주민을 백인 정착지로부터 멘도시노 원주민 보호 구역(Mendocino Indian Reservation) 인근의 놈 컬트 농장(Nome Cult Farm)으로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6개월에 걸친 23번의 전투에서 283명의 원주민 남자들과 함께 수많은 여자와 아이들이 살해를 당했다. 그 부대는 미국 정부로부터 전투의 대가로 보상을 받았다.

    
         -유키족 원주민-

7. 남북 전쟁

        캘리포니아는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남북전쟁에서 별 역할을 못 하였다. 남부에 동조하는 정착민도 있었지만 군대를 조직하는 건 허락되지 않았고 신문도 정간되었다. 전임 상원의원 귄(William M. Gwin, 1805-1885)은 남군 동조자로 체포되었으나 나중에 석방되어 유럽으로 망명하였다. 강력한 자본가들은 광산, 해운, 금융을 지배함으로써, 캘리포니아 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 그들은 새 정당인 공화당을 통해 캘리포니아를 통제했다. 병사로 지원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서부에 머무르며 시설물을 지키고 남.북 분리주의자들을 억압하거나 원주민과 싸웠다. 1862년 캘리포니아 지원병부대(the California Column)가 애리조나를 횡단, 동쪽으로 진군하여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의 남군을 쫓아버렸다. 그 부대는 이 지역에서 남은 전쟁 기간을 원주민과 싸우며 보냈다.

    
             - 귄 -

8. 노동 운동

        캘리포니아 상원 의원 브로데릭(David C. Broderic, 1820-1859: 캘리포니아 민주당 상원의원)은 당선 후 상원 첫 연설에서 말하기를 "미국 어느 곳도, 지구상 어느 곳도 캘리포니아에서처럼 노동이 명예롭고, 보상을 받는 곳은 없다"라고 했다. 초기 캘리포니아 이민자들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왔고, 노동자들이 조직화된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캘리포니아 노동운동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되었고, 당시의 샌프란시스코는 수십 년 동안 캘리포니아 유일의 대도시에다 로키 산맥 서쪽의 노동조합 중심지이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는 비노동조합원도 고용하는 강력한 보루로서 기능을 하였는데, 반세기가 지나서야 샌프란시스코와 연대하여 캘리포니아를 대표적인 노동조합 주로 만들었다

        샌프란시스코는 비교적 고립되어 노동력 공급이 어려운 지역이라 숙련 노동자들은 동부의 숙련 노동자들이 할 수 없는 요구를 할 수가 있었다. 1850년, 인쇄공들이 처음 노동조합 설립을 시도하였고 1851년에는 마부, 짐마차 꾼, 뱃사공, 하역부荷役夫, 배 수리공이, 1852년에는 제빵공과 벽돌공, 1853년에는 누수漏水방지공, 목수, 미장이, 철공, 배목수, 그리고 1856년에는 음악가들이 노동조합을 설립하였다. 노동조합이 안정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했지만 어쨌든 조합원들은 더 높은 보수와 노동 조건을 획득할 수 있었고, 캘리포니아 주 노동법 입법이라는 긴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1850년부터 1870기간에는 임금지급, 직공의 선취득권(임금 미지급 시 고용주 재산 압류권), 주 8시간 근로에 관한 법 제정이 있었다.

     
                    - 샌프란시스코- 

        19세기 후반 50년 동안,  샌프란시스코 노동자들은 미국 어느 지역보다도 8시간 노동을 향유했다. 1864년에 있었던 보일러공과 거푸집 만드는 사람들의 파업이 있었는데 이는 파업자들의 요구를 허락한 고용주에게 하루 1천 달라 벌금을 부고하겠다고 협박하고 이를 전국의 파업파괴자들(파업비참여노동자들)에게 알린, 새로 설립된 철공소연합에 대항한 파업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노동조합은 시의 최초 중앙노동기구로서, 대표단을 파나마에 파견하여 파업파괴자들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교육을 시켰다. 교육을 받은 그들은 모두 합법적인 노조원 신분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왔다.

        서기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후 캘리포니아는 급속한 성장을 계속했다. 개인 소유였던 광산들은 대부분 거대 광산 회사의 소유가 되었다. 철도 건설이 시작되었고, 철도 회사나 광산회사들은 수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1869년의 대륙횡단 철도 개통은 결정적 사건이었다. 과거 배를 타고 6개월이 소요되던 샌프란시스코-시카고 여행은 이제 기차로 6일이면 되었다. 그러나 철로의 출현으로 노동력의 이동이 용이해지면서, 비교적 안전했던 캘리포니아 노동자들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수 십 년 동안 캘리포니아 노동자들은 중국 이민자들을 배척했고, 정치인들은 반중국인 입법을 부채질했다. 광부와 도시노동자들은 노예 수입(소위 “계약” 노동)에 반대하여 싸웠다.


     
               - 중국인 박해 -

        캘리포니아 최초의 연합노동기구는 “주 기계공위원회"로, 이 위원회는 고용주들의 1867년 “10시간 동맹”에 대항하여  “하루 여덟 시간”을 걸고 싸웠다. 이 위원회는 미국 최초의 전국 노동조합인 “전국노동조합”과 연합하였다. 1872년에 이르러 중국인 노동자는 샌프란시스코 전 노동자의 반을 차지했으나, 그들의 임금은 백인 근로자보다 훨씬 낮았다. “중국인은 돌라가라!” 는 샌프란시스코의 유명한 노동지도자 키어니(Denis Kearney, 1847-1907)의 선동적인 표어였다. 1877년 대중 앞에 나타난 그는, 동네 자경단을 이끌며 중국인들을 폭행하고 그들의 상점을 파괴했다.

        미 서부 주(the West Coast; 캘리포니아, 오레곤, 워싱턴 주)의 선원들은 두 번에 걸쳐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1875년에 들어서야 선원보호협회(the Seaman's Protective Association)가 창립되었고, 보다 높은 임금 보다 좋은 근로 환경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이에 샌프란시스코 포스트(the San Francisco Post)지 편집장 조지(Henry George,1839 – 1897)가 합세하였다. 무자비한 선장을 처벌하는 입법 투쟁을 전개할 것과 선원의 2/3가 미국인이어야 한다는 법안이 제출되었다. 이후 30년 동안 휴러세스(Andrew Furuseth, 1854-1938; 미국 노동운동 지도자)를 비롯, 1908년 이후에는 태평양선원노동조합(the Sailors' Union of the Pacific)과 미국국제선원조합이 같은 노력을 기울였다. 1887년 미서부선원신문(the Coast‘s Seamen's Journal)이 창간되었고, 이는 수 년 동안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신문이었다. 이와 함께 부두노동자들이 조직한 태평양해양연합(the Maritime Federation of the Pacific)도 있었다.

9. 노동 정책과 원주민 보호

        산업화에 따라 수많은 저임금의 중국인 근로자들이 캘리포니아로 쏟아져 들어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금광이나 도시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대륙횡단철도 개통 후 시작된 10년간의 불경기 중 백인 노동자들은 그 책임을 중국인들에게 돌려 비난하기 시작했다. 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이 광산으로부터 쫓겨났다. 중앙태평양철도(The Central Pacific Railroad (CPRR): 1862년 미의회가 특허를 준 철도회사. 캘리포니아 샌크레멘트에서 시작하여 동부로 향한 철도를 건설함)가 건설된 후 본국으로 돌아간 중국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중국인들이 샌프란시스코를 포함 여러 도시의 차이나타운으로 몰려들었다. 차이나타운은 백인들의 폭력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다.

        서기 1850년부터 1900년까지 반중국인에 대한 정서가 있었고, 이로 인해 많은 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들은 20세기 중반까지 적용되었다. 가장 악명 높은 법으로는 1879년 제정되고 비준된 신캘리포니아주헌법수정안(a new state constitutional convention)일 것이다. 키어니(Denis Kearny)가 이끄는 반중국인노동당의 강력한 로비로 만들어진 제19조 4항은, 기업의 중국인 쿨리(Coolies: 저임금의 동남 아시아인) 고용 금지, 캘리포니아 전 도시 및 카운티에 중국인 거주 금지 및 추방을 규정했다. 이 수정안은 1952년에 폐지되었다.

        서기 1879년 헌법수정안은 이민을 강력 억제하는 권고안을 의회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 결과 1882년 중국인 추방법이 통과되기도 하였다. 1889년 미 대법원은 이 법안을 확정하였고, 1943년 하원이 폐지하였다. 반 중국인 정서는 일본에 대해서도 비슷하여, 1943년 일본과 신사협정을 맺고, 이 협정에 따라 일본은 미국으로의 이민을 자제하였다. 캘리포니아는 또한 외국인토지법(Alien Land Act: 1913년 제정)을 제정하여, 외국인 특히 아시아인의 토지소유를 억제했다. 1960년대까지 아시아인의 미국시민권 취득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들은, 미국에서 태어난 자손들의 이름으로 토지를 취득하였다. 1952년 미대법원은 이 법을 반 헌법적으로 판결하였다.

        서기 1886년 중국인 세탁소 주인이, 중국인의 세탁소업을 명백히 배제하는 샌프란시스코 조례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 미대법원은 중국인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를 통해 헌법이 보장한 현대적인 평등권의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아시아인 이민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있었음에도 비숙련 미국인 노동자와 부유한 지주 사이의 긴장은 계속 고조되어 대공황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소설가 런던(Jack London, 1876-1916, 미국 작가, 저널리스트)은, 1913년 그의 소설 “달의 분지(The Valley of the Moon)”에서 오크랜드 시 노동자들 투쟁을 그리고 있다.

10. 철도의 등장

      미대륙횡단철도의 서쪽 노선(the Central Pacific Railroad: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유타 주 Promontory Summit 까지)을 건설한 4대 철도 회사는, 스탠포드(Leland Stanford, 1824-1893), 헌팅턴(Collis Potter Huntington, 1821-1900), 홉킨스(Mark Hopkins, 1813-1878), 크로커(Charles Crocker, 1822-1888)등 거대 회사들이다. 이 철도의 건설로 캘리포니아는 미국의 여타 지역과 연결이 되고, 그 후 한 세기 동안 이 장거리 운송 시스템은 어느 것도 대적할 수 없는 미국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발전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이 4대회사들은 1880~90년대에 캘리포니아 정치, 경제를 좌우한 회사들이었다. 그 가운데 헌팅턴은 19세기 말 탐욕과 부패를 상징하는 기업인으로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혐오를 받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사업 경쟁자나 정치 개혁가들은, 그를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사악한 인물로 비난을 했다. 언론인이나 시사 만화가들은 그를 조롱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역사가들도 그를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비열한 악당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변호하는 말을 했는데 “나의 행동 동기는 정직이며, 그 결과 내게보다는 캘리포니아에 더 많은 이익이 되었다” 라고 했다.(C)

  
       - 헌팅턴 -
 
Written by Hung S.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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