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이야기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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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프랑스 파리 제15행정구의 앙리 파르망 가(Rue Henri-Farman)에서 기원전 8천년까지 거스르는 중석기 시대 원시 수렵, 채집인의 주거지와 인간의 뼈 등 오래된 인간 흔적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250~225경에는 켈트 세논(Celtic Senones)계열의 인종인 파리지이족(Parisii: 철기 시대와 로마제국 시대에 세느강 강변에 살았던 파리 원주민)이 세느강 강변에 정착하여 교량과 보루를 건설하고 화폐를 주조하였으며 유럽의 여타 지역의 강변 종족과 교역을 하였다.

    기원 전 52년 로마 장군 라비에누스(Titus Labienus, 100- 45 BC)가 지휘하는 군대가 파리지이를 격파한 다음, 루테티아(Lutetia; 현재의 파리)에 수비대를 세웠다. 3세기에 들어 이 마을은 기독교화가 이루어졌고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서기508년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I세(Clovis I, 466-511)에 의해 수도로 정해졌다.

    중세기 내내 파리는 유럽의 가장 큰 도시였고 종교와 상업의 중심지로서, 고딕 건축 양식이 시작된 곳이었다. 13세기에는 세느강 좌안에 유럽 최초의 대학인 파리대학(구 소르본느 대학)이 세워졌다. 14세기에는 페스트로 고통을 받았고 15세기에는 페스트의 재발과 함께 100년전쟁이 있었다. 서기 1418~1436년 기간에는 부르군디 족(Brugundy: 프랑스 동중부 지역. 로마제국 말기에 이 지역으로 온 게르만 족)과 영국군 점령이 있었다. 16세기에 파리는 프랑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전쟁으로 동요되기도 했지만 또한 유럽의 도서출판 도시가 되기도 했다. 18세기에 들어서는 계몽주의라는 지성의 중심지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주 무대로서 파리는 매년 7월14일 군사 분열식을 통해 이 혁명을 기념하고 있다.

    19세기에는 나폴레옹은 자신의 군사적인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를 아름답게 장식하기도 했다. 유럽 패션의 도시가 되었고 1830년과 1848년 두 차례 혁명도 있었다. 나폴레옹III세가 임명한 세느강 담당 하우스만(Georges-Eugène Haussmann,1809-1891: 파리시를 개조한 인물. 지나치게 사치롭게 했다는 비판으로 사임했으나, 파리의 화려한 모습은 그의 덕택이라고 할 수 있음)백작은 1852~1870 기간 중 파리 중심부를 재건하였다. 이때 도로를 확장하였고 많은 광장과 공원이 새로 건설되었다. 1860년에는 파리시의 경계가 확장되어 현재에이르고 있다. 19세기 말에는 파리국제박람회와 에펠탑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몰려오기도 했다.


         -1830년 7월 혁명-

    20세기에 들어와 파리는 1차 대전 중 폭격으로 고통을 받았고 2차대전 기간인 1940~1944년까지는 독일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이 두 전쟁 사이의 기간에 파리는 현대 예술의 수도로서 전 세계로부터 작가, 지성인, 예술가들을 불러들였다. 1921년 파리 인구는 2백 10만명으로 역사적인 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나 그 후 줄어들기 시작했다. 퐁피두 센터( Centre Pompidou), 모네 미술관(Musée Marmottan Monet), 도르세(Musée d'Orsay)미술관 등의 새 박물관이 개관을 했고, 루브르(Louvre) 박물관은 유리 피라밋을 박물관 앞 광장에 세우기도 했다.

    21세기에 들어 파리는 많은 박물관과 음악당을 신설했다. 그러나 2005년, 프랑스 구식민지였던 마그레브와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로부터 온 1~2세대 이민자들를 위한 주택을 파리 외곽에 건설하는 문제로 격렬한 사회불안을 겪기도 했다. 2015년에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자살 테러로 프랑스 전국이 공포에 휩싸인 적이 있다. 1921년부터 2004년까지는 파리의 인구가 꾸준히 줄어들었는데, 이는 핵가족과 교외로의 중산층 탈출 때문이었다. 그러나 젊은이들과 이민들의 파리 유입으로 다시 인구가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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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선사 시대

    2008년 프랑스 고등교육연구부 산하 국립선사고고학연구회(INRAP: Institut national de recherches archéologiques préventives)는 세느강 좌안에서 가까운 제15행정구의 앙리 파르망가 62번지에서 발굴 작업을 하던 중, 약8천 년 전 중석기 시대 파리 지역에 정착해 살았던 수렵, 채집 인의 인골과 거주 흔적을 발견하였다.

 
           -파르망 발굴 현장-

    1991년에는 파리 제12행정구역인 베르시(Bercy: 파리 제12행정구 인근)에서 기원전 4500~4200년경의 정착지 흔적이 발견되었다. 발굴 결과 세느강 어부들이 사용했던 세 개의 목제 카누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4800~4300년까지 거슬렀다. 이 조각들은 현재 카르나발레 박물관( Musée Carnavalet,  23 rue de Sévigné, 75003 )에 전시되고 있다. 앙리 파르망 발굴 결과, 이 지역에서는 신석기 중기(4200BC)로부터 청동기 시대(3500-1500BC)를 거쳐 철기 시대 초기(800-500BC)까지의 정착 흔적이 발견되었다. 자기류, 동물 뼈 조각, 완벽한 도끼날 등도 발견되었다. 동유럽에서 만든 손도끼 등이 베르시 신석기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초기 파리인들이 이미 유럽의 여타 지역 정착민들과 교역을 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 파리 행정구 -

II. 파리지이와 로마인의 정복

    철기 시대인 기원전(250-52BC기간 중) 켈트 세논(Celtic Senones) 계열의 종족인 파리지이(Parisii: 철기 시대와 로마 정복 시기 지금의 파리 신시가지 세느강변에 살았던 갈리아 종족)가 세느강변에 정착하였다. 기원전 2세기 초 이들은 오피둠(Oppidum; 성벽으로 둘러싼 보루 형태의 마을)을 세웠다. 그 위치는 지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오피둠 -

시테(Ile de la Cité)로 추정되는 그 지역에는, 세느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다. “갈리아 전기”에서 줄리어스 씨저(Julius Caesar, 100 BC – 44 BC)는 세느강 상의 어떤 섬에서 파리지이 부족의 지도자들과 만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 섬에는 초기 갈리아인들의 정착지 흔적이 없었다고 하는 역사가들은,파리 교외 낭테르(Nanterre)를 오피둠의 실제 소재지로 보고 있다. 1980년 고속도로 건설 당시 낭테르에서 거대한 거주지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일 드 라 시테 -


    고대 로마 지리학자들이었던 스트라보(Strabo)나 프톨레미(Ptolemy)는 파리지이의 정착지를 “루코토치아(Lucotocia)” 또는 "레우코테치아(Leucotecia")라고 불렀는데 아마 이 이름들은 습지나 늪지를 뜻하는 켈트어 lugo 또는 luco에서 왔으리라 본다. 오피둠은 세느강이나 론강을 통하여 영국, 그리고 프로방스(Provence; 프랑스 남부 주)와 지중해의 로마식민지까지 이르는 주요한 교역로 상에 있었다. 오피둠은 그 지리적 위치와 다리를 건너는 통행세 징수로 크게 번영하였고, 그 결과 자체 금화를 주조할 수도 있었다.

 
        - 금화(BC1세기) -

    기원전(58BC-53BC)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 100-44 BC)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부터 영토를 지킨다는 구실로 골(Gaul; 지금의 프랑스 일대)지역에서 전투를 치렀지만 실제로는 이 지역을 정복하여 로마 공화정에 복속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기원전 53년에 그는 오피둠을 방문하여 신전 앞에 갈리아족 대표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군대를 위하여 병사와 돈을 바치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로마인들에게 겁을 먹은 파리지이는 시저의 말에 군말 없이 기병을 바치기도 했지만 그러나 기원전 52년 1월 “베르셍게토리(Vercingetorix, 82-46BC: Gaul족을 통합한 Arverni족 족장. 줄리어스 시저의 갈리아 원정 시, 로마군에 대항하여 싸우다 실패한 인물)”가 지휘하는 골족과 비밀 연대를 맺고 로마군대에 맞서 봉기했다.

    이에 시저는 재빨리 대응했다. 그는 반란이 시작된 오를레앙을 향해 북쪽으로 6개 군단을 강행군 시킨 다음, 베르셍게토리의 고향인 제르고비아(Gergovia)로 진군했다. 동시에 시저는 파리지이족과 그 동맹군인 세논 족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부장 라비에누스(Titus Labienus, 100-45BC: 로마 공화정시 직업군인)에게 4개 군단을 주어 보냈다. 파리지이의 지휘자인 카뮈로젠(Camulogene: 기원전 52년 세느족과 연합한 Aulerci족의 지도자. Lutetia 전투에서 전사. 파리 Camulogene 거리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임)은 세느강 좌안의 오피둠과 연결되는 다리를 불살라, 로마군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그러자 라비에누스의 로마군은 강 하류로 내려가 믈륑(Melun: 지금의 파리 교외 일 드 프랑스 지역 소재)에 가교를 세운 다음 세느강 우안右岸의 Lutetia를 공략하였다. 카뮈로젠은 우안의 다리와 마을을 불지른 다음 좌안으로 퇴각하여 현재의 생 제르맹 데 프레(Saint-Germain-des- Prés: 파리 제6행정구 중 한 구역. 과거 Saint-Germain-des-Prés 수도원이 소재했었음)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농성하였다.

    라비에누스는 계략으로 파리지이를 속였다. 한 밤중 그는 군대를 보내어, 가능한 큰 소리를 지르며 믈륑을 향해 강 상류를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강 우안의 본진에는 경험이 없는 병사들만 남겨놓았다. 정예 병사들과 함께 그는 세느강을 건넌 다음, 강 좌안에다 파리지이에 대비한 함정을 설치했다. 로마군이 퇴각하였다고 믿은 카뮈로젠은 병력을 나누어, 그 일부 병력은 비어있다고 생각한 로마군 본진을 공격케 하고 또 다른 병력으로는 로마군을 추격토록 했다. 그리고 자신은 직접 지금의 에펠탑과 육군사관학교 인근의 그레넬르(Grenelle)평야에서 로마 최정예 2개군단을 향해 돌격하였다. 오늘날 루테티아 전투(the Battle of Lutetia)로 알려진 이 전투에서 파리지이족은 용감하게 결사적으로 싸웠다. 카뮈로젠은 전사하였고, 그의 병사들은 훈련된 로마군에 의해 모조리 학살 당하였다. 패전을 하였지만 파리지이는 저항을 계속했다. 베르셍게토리는 8천명의 병사와 함께 알레시아 전투(the Battle of Alesia: 오늘날 프랑스 부르군디의 Alise-Sainte-Reine인근 Mont-Auxois로 추정되는 곳. 줄리어스 시저의 갈리아 원정 당시, 갈리아 종족의 하나인 Mandubii 족의 수도에서 있었던 전투)에 임하니, 이는 로마군에 대한 그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III. 로마 점령하의 루테티아(52 BC–486 AD)

    로마는 반란을 감시하기 위하여, 병사들과 현지 조력자들을 위한 기지로서 완전히 새로운 도시를 세웠다. 이 도시는 루테티아(Lutetia 또는 Lutetia Parisiorum: Lutèce또는 Lutèce of the Parisii로 불리기도 하였음. 파리의 전신)로 불리었다. 이 이름은 아마도 시저가 세느강 우안 지역을 대 습지라고 한 말로 보아 “습지 또는 진창”을 뜻하는 라틴어 luta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루테티아의 대부분은 지대가 높아서 홍수의 가능성이 낮은 세느강 좌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도시는 남-북축軸(Cardo Maximus: 주도로나 중앙로를 남북으로 향하게 내는 고대 로마 도시 계획)이라는 전통적인 로마 도시 계획을 따랐다.

    세느강 좌안에는 로마식 중앙로가 있었는데, 오늘날의 생 잭크가(Rue Saint-Jacques)이다. 이 거리는 작은 다리(Petit Pont)와 큰 다리(Grand Pont: 지금의 노트르담 다리)등 두 개의 다리를 통해 세느강을 건너 일 드 라 시테를 가로질렀다. 배를 정박할 수 있는 항구는 오늘날의 노트르담 성당 앞 광장에 해당하는 섬에 있었다.

    세느강 우안右岸에 지금의 생 마르텡(Rue Saint-Martin)에 해당하는 거리가 있었다. 좌안에는 중요성이 떨어지는 데쿠마누스(Decumanus: 동서로 난 길)인 오늘날의 Cujas, Soufflot, des Écoles 가에 해당하는 도로가 있었다.

    루테티아는 현재의 몽타뉴 생트 즈느비에브(Montagne Sainte-Geneviève) 정상의 직사각형 광장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의 주 건물은 길이가 1백미터에 달했고 그 안에는 사원, 시민 생활을 위한 회당, 점포들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 근처 경사면에는 1세기 경 건축된 거대한 야외극장이 있었다. 인구가 6천에서 8천 명 정도였지만, 관객 수용 능력은 1만에서 1만5천에 이르는극장이었다. 16킬로미터 거리의 륑지스(Rungis) 나 위수(Wissous) 저수지로부터 수도관을 통하여 음료수를 공급했다. 2세기말에서 3세기초 인근에 세워진 클뤼니(Thermes de Cluny: 파리제5행정구에 있는 갈리아-로마 시대의 온천 유적) 온천을 비롯하여 여러 온천에 수도관을 통해 물을 공급했다. 로마 통치하의 루테티아는 완전히 로마화 되어, 번영하였다.

  
      -즈느비에브 거리-

    건축이나 도시계획 이외에도, 로마식 요리법이 도입되었다. 이태리 포도주 병과 올리브기름 병(Amphora; 밑이 뾰족한 병. 특이한 형태로 많은 병을 함께 보관하기가 편리했음), 갑각류 , 그리고 유명한 로마식 소스인 가룸(Garum: 페니키아, 카르타고, 로마, 그리스 등에서 요리에 사용했던 생선을 발효하여 만든 소스)등 유물이 발굴되기도 했다. 상업적으로 중요한 도시이긴 했지만 루테티아는 그 규모가 루그두넨시스(the Roman province of Lugdunensis Quarta: 현재의 프랑스)의 수도 루그두눔(Lugdunum: 현재의 Lyon)이나 아게딘쿰(Agedincum: 현재의 Sens)보다도 훨씬 작았다. 



       - 암포라 병 -      

    3세기 중엽 파리에 기독교가 전래되었다. 구전口傳에 따르면 파리지이의 주교였던 성자 드니(Saint Denis: 기독교 성인. 순교자)가 전했고, 그는 루스티크(Rustique), 엘르테르(Éleuthère)와 함께 로마 총독 페세니우스(Fescennius)에게 체포되었다.

    그가 신앙을 포기할 것을 거부하자, 머큐리 산(Mount Mercury)위에서 목이 잘렸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성자 드니가 자신의 목을 찾아 들고 설교를 하며 6마일 가량 떨어진 기독교 공동묘지(Vicus Cattulliacus)로 가, 자신의 목을 비밀리에 묻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신심이 가득했던 기독교도 여인 카툴라(Catula)가 한밤중 그의 처형 장소에 와 그의 시신을 묘지로 옮겼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 성 드니 -

그가 처형된 머큐리산은 후일 순교자의 산(Mons Martyrum)이 되었고, 이 산이 바로 지금의 몽마르트르(Montmartre: 파리 제18행정구에 있는 높이 180미터, 넓이 60헥타의 언덕)이다. 서기 1534년 8월 15일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St. Ignatius Loyola)와 프란시스 자비에르(St. Francis Xavier)가 일행 다섯 명과 함께, 이본느 르 탁(rue Yvonne Le Tac)11번지에서 성자 드니의 순교를 받들어 수도자의 길을 맹세하니 바로 예수회 교단의 시작이었다. 성 드니의 묘지 터에 교회가 세워졌으니 이 교회는 후일의 성 드니 바실리카(Basilique-cathédrale de Saint-Denis: 파리 북쪽 교외 Saint Denis 시 소재 성당. 이 성당은 후일 고딕 양식으로 개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춤. 최초의 고딕 양식 건축물)이다. 346년에는 루테티아 최초의 주교 빅토리누스(Victorinus)가 취임했고, 392년에는 성당이 세워졌다.


     - 성 드니 성당 -

    서기 275년 알라만(Alamans)족의 침입을 시작으로, 3세기에는 게르만 족의 침입이 있었다. 이는 세느강 좌안의 주민들로 하여금 루테티아를 떠나 안전지대인 일 드 라 시테로 옮기게 한 원인이었다. 그들의 피난으로 좌안의 여러 기념물들이 버려졌다. 돌을 사용하여 일 드 라 시테의 성벽을 쌓았고 이는 파리 최초의 성벽이기도 하였다. 일 드 라 시테에 새로운 성당이 세워지고 목욕탕들이 생겨났다. 그 유적이 노트르담 성당 앞 광장 지하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서기 305년 루테티아는 파리시오룸(Civitas Parisiorum)으로 이름이 바뀐 후, 로마제국 말기(3~5세기)에는 라틴어로 “Parisisu", 불어로는 ”Paris"로 정착되었다.

    355- 360AD 기간 중 파리는 콘스탄틴 대제(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272-337AD)의 조카이며 서로마제국의 지역 총독인 줄리안(Julian, 331-363)의 통치를 받았다. 군사적 분쟁이 없었던 357-359AD 기간 중 그는 현재의 정의 궁(Palais de Justice; 일 드 라 시테에 소재하는 법원 건물)자리에 있었던 궁에 머물렀다. 이 곳에서 그는 글을 쓰고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서기 360년 2월 그의 부하들은 그를 아우구스투스 즉 황제로 추대하였고, 그렇게 해서 파리는 잠시 서로마 수도가 되기도 했다. 363년 이곳을 떠난 그는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로마제국이 끝날 무렵에 발렌티니안I세(Valentinian I, 365-367)와 그라티안(Gratian, 367-383: 발렌티니안의 아들) 두 황제는 이 곳에 머무르면서 만족의 침입을 막으려고 애를 썼다. 


      발렌티니안I세 -

    5세기에 들어와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 로마제국은 서서히 붕괴되어 몰락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와 함께 트레베(Treves: 독일 모젤강 유역 도시), 메츠(Metz: 프랑스 북동부 모젤강 유역 도시), 렝스(Reims: 파리 북동쪽 80마일 지점의 도시)를 약탈한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 406-453)가 파리를 위협하였으나 생트 즈느비에브( Sainte Geneviève, 422–502; 로만 가톨릭과 동방정교의 파리 수호여신이 됨)는 그들을 설득, 공격을 저지하였다. 파리를 내버려 둔 채 아틸라는 오를레앙을 공격했다. 서기 461년 파리는 킬데릭I세(Childeri, 436-481: 갈리아 북부 지방의 프랑크족 지도자)가 지휘하는 프랑크 족 살리안 왕조(Salian dynasty: 중세 프랑크 족 왕조)의 공격을 받아 10년 동안 포위를 당했다. 즈느비에브가 다시 군대를 조직하여 방어에 나섰다. 그녀는 11척의 바지선으로 구성된 선단을 만들어 브리(Brie: 현재의 프랑스 북부 지역. 브리 치즈로 유명함)와 깡파뉴(Campagne: 프랑스 북동부 주. 샴페인으로 잘 알려진 포도주 생산 주) )으로부터 곡물을 가져와 굶주린 파리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죽은 후 그녀는 파리 수호신이 되었다.  


   
        - 즈느비에브-

    독일어를 말하는 프랑크족은, 로마 제국이 쇠망하여 감에 따라 북부 골(Gaul: 현재의 프랑스)로 진출했다. 로마의 영향을 받은 그 지도자들은 훈족의 아틸라와 싸우는 로마를 돕기도 했다. 프랑크 족은 게르만 족의 신인 토르(Thor)을 믿었다. 프랑크족의 법과 관습은 프랑스 법과 관습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라틴어는 이제 일상의 언어가 아니었다. 프랑크족은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거대한 군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481년 킬데릭의 아들 클로비스I세(Clovis I, 466-511: 프랑크 족을 통합한 프랑크 족 초대 왕. 메로빙거 왕조의 창립자)는 불과 16세의 나이로, 롸르강(Loire River: 길이 1,006Kms로 프랑스에서 제일 긴 강)북쪽의 모든 영토의 지배자가 되어 파리에 입성하였다. 그는 부르군디(Brugundy)와의 전투를 앞두고, 만일 전투에서 승리를 한다면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그는 아내 클로틸드를 따라 개종을 하고, 496년 렝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개종은 다만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듯했다. 그는 이교도 신들, 신화, 제례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는 골로부터 서고트족(Visgoths)을 추방하는데 협력했다. 정해진 수도가 없었고 참모들을 통제할만한 중앙행정기관도 없었다. 그는 파리의 일에 간섭함으로써 그곳에 무게를 두었다. 서기 511년 그가 사망한 후 50년 동안 그의 손자들이 왕권을 나누어 가짐에 따라 파리는 왕국의 상징물로서, 공동재산으로서 면모를 유지하였다.

IV. 클로비스로부터 카페 왕조까지(6~11세기)

    멜로빙거 왕조(Merovingian Dynasty)를 연 클로비스I세와 그의 후손들은 파리에 많은 종교적 건물을 세웠다. 고대 로마 광장 가까운 곳의 셍트 즈느비에브 바실리카를 비롯하여 현 노트르담 성당 자리에 있었던 생 에티엔느 성당(Saint Etienne)과 후일 생 제르맹 성당이 된 세느강 좌안의 수도원 등 많은 수도원을 건설하였다. 프랑스 왕들의 무덤인 생 드니 바실리카 성당도 건설하였다.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건축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몽마르트의 생 몽마르트르 성당(Saint-Pierre de Montmartre: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물)에 4개의 메로빙거 양식 기둥만 남아 있다. 메로빙거 왕조의 모든 왕들은 생 제르맹 수도원(Abbey of Saint-Germain-des Prés)에 묻혔으나 639년에 죽은 마지막 왕 다고베르I세(Dagobert I)만은 생 드니 바실리카에 묻힌 최초의 프랑크족 왕이었다.

    
           - des Prés성당 -

    751년 권력을 장악한 카롤링거 왕조(The Carolingian dynasty, 750-887)는 프랑크족의 수도인 에 라 차펠르(Aix-la-Chapelle: 현재의 독일 Aachen시)로 천도하였다. 775년 2월 샤를르마뉴(Charlemagne, 748-814)가 참석한 가운데 성역화된 생 드니에 피핀(King Pepin the Younger, 714-768: 제1대 카롤링거 왕)은 화려한 새 성당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파리에 관심이 없었다.

    9세기에 이르러 파리는 바이킹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 바이킹은 거대한 선단으로 세느강을 거슬러 올라 공격했다. 그들은 사람을 납치한 후 몸값을 요구하거나 마을을 약탈했다. 서기 857년 비욘(Björn Ironside: 스웨덴 전설에 등장하는 바이킹 왕)의 침입으로 파리는 거의 완파되기도 했다. 서기 889년에 재침이 있었고, 일년에 걸친 포위 공격이 있었으나 세느강과 일 드 라 시테가 방벽이 되었기 때문에 파리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파리 주교 조스렝(Joscelin: 루이 경건왕의 아들. 바이킹와 싸워 파리를 지킨 파리 주교)이 건설한 우안의 그랑 샤틀레(Grand Châtelet)와 좌안의 쁘띠 샤틀레(Petit Châtelet) 두 다리는 돌로 된 강력한 보루 역할을 하여 파리 방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현재의 샤틀레 광장(Place du Châtelet)은 Grand Châtelet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샤틀레 광장 분수-

    프랑코-게르만 전쟁이(Franco-German war: 978-980)있었던 978년 가을, 신성로마제국의 오토II세에 의한 파리 포위 공격이 있었다. 987년에는 카페 왕조(Capetian Dynasty; 이 가문은 987년부터 1792년까지, 그리고 다시 1814년부터 1848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하였음)가 들어섰다. 카페 왕조의 왕들은 파리에서 보내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일 드 라 시테에 왕궁을 수리하고, 오늘날 성 샤펠르(Sainte-Chapelle: 일 드 라 시테 소재 고딕식 왕실 성당. 14세기까지 프랑스 왕들의 거주지)가 있는 곳에 성당을 건설하기도 했다. 파리는 다시 번영을 찾기 시작했고, 세느강 우안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카페 왕조에 의해 세느강 좌안에 생 제르맹(Saint-Germain-des-Prés)수도원이 세워졌고, 11세기에는 이곳에 성당이 건설되었다. 이 수도원은 그 학문과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으로 유명하다.


V. 중세(12~15세기)

    12세기에 들어 카페 왕조는 그 통치 영역이 파리를 조금 벗어난 정도였으나 파리를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 시기 파리의 특징적인 면모가 들어나기 시작했다. 일 드 라 시테에는 왕궁이 들어섰고, 1163년에는 노트르담 성당이 새로 건설되기도 했다.


      -노트르담 성당-

    신학, 수학, 법학 분야의 학자 훈련을 위해 세느강 좌안 남쪽에 파리대학(구 Sorbonne 대학:1150년에 설립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 세워졌다. 생 제르맹 수도원(Saint-Germain-des-Prés)과 생 즈느비에브 수도원(Saint Geneviève)도 세워졌다. 세느강 우안 북쪽은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로서 항구, 중앙시장, 공장들이 있었고 상인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상인조합, 파리한자동맹이 결성되어 파리의 시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 왕궁과 루브르(Louvre)

    필립II세는 노르망디로부터 침입해오는 영국군을 막기 위해, 세느강 우안에 강력한 루브르(Louvre) 성채를 건설하였다. 요새화된 성채는 가로72미터, 세로7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직사각형 형태를 갖춘 것으로, 4개의 망루에다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요새의 가운데에는 30미터 높이의 원형 탑이 었었다. 오늘날에도 루브르 박물관 지하에서 이 요새 터를 볼 수가 있다.

    필립II세(1165-1223)는 제3차십자군 원정을 떠나기 전, 파리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였다. 세느강 좌안에 석벽을 쌓고 서른 개의 원형 탑을 세웠다. 우안 석벽은 길이가 2.8km에 달했고 성장해가는 도시 방어를 위해 40개의 탑을 세웠다. 성벽의 잔해를 오늘날에도, 특히 르 마레(Le Marais: 파리 제3, 4행정구에 소재하는 역사 구역. 오랜 세월 파리의 귀족구역으로, 귀중한 역사적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음)지역에서 볼 수가 있다. 필립II세의 세 번째 위대한 업적은 냄새나는 진흙의 길을 돌로 포장한 일로, 파리 시민들은 지금도 그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그는 또 작은 다리(Petit-Pont)와  큰 다리(Grand-Pont)등 두 개의 다리를 놓기도 했다. 그는 또 지붕이 있는 시장(Les Halles: 파리 신선 식품 시장. 1971년 붕괴되어 2018년 Westfield Forum des Halles으로 재 개장함. Émile Zola의 소설 “Le Ventre de Paris” 에 등장하는 시장)을 세우기도 했다.  


       -레 알레 시장-

    필립IV세(1285-1314)는 시테의 왕궁을 복구했다. 두 개의 거대한 홀은 아직도 정의궁(Palais de Justice)건물 안에 남아 있다. 그는 또 오늘 날의 파비앙 광장(Place du Colonel Fabien)과 처형된 범죄자들의 시체를 늘어놓았던 쇼몽 공원(Parc des Buttes Chaumont; 파리 제19행정구 소재 공원)인근에 겁나는 몽포콩 교수대(Gibbet de Montfaucon)를 설치하기도 했다. 서기 1307년 10월 13일, 너무 세력이 강하다고 그가 생각한 “신전 기사단(Knights Templar; )” 단원들을 체포하였다. 서기 1314년 3월 18일에 그는 모레이(Jacques de Molay: 신전기사단의 마지막 단장)를 체포, 일 드 라 시테에서 기둥에 묶어 화형에 처했다.


        -몽포콩 교수대 -

    서기 1356부턴 1383기간 중 샤를르V세(1338-1380)는 파리 주변에 성벽을 새로 쌓았다. 1992년 발굴 시 이 성벽의 주요 일부가 카루슬 (Place du Carrousel: 루브르 궁 광장에 면한 파리 제1행정구역에 소재하는 광장) 지하, 루브르 단지 내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파리 동쪽 끝의 생탕트완(Port Saint-Antoine: 과거 파리 두 개의 관문 중 하나. 파리 제4행정구 소재)을 수비하기 위해 거대 요새 바스티유(Bastille: 과거 공식 명칭 Bastille Saint-Antoine. 파리의 요새로 감옥이었음)를 세웠고, 파리 교외 벵상네(Vincennes)에 새로운 요새를 세우기도 하였다. 샤를르V세는 자신의 거주지를 일 드 라 시테에서 루브르로 옮겼으나 그가 가장 좋아했던 관저는 생 폴 호텔(Hôtel Saint-Pol)이었다. 


            - 카루슬 광장 -  

    2. 생 드니, 노트르담, 고딕 양식의 탄생
    파리의 종교적인 건축은 생 드니 수도원장 겸 루이VI세와 루이VII세의 고문이었던 쉬제르(Suger, 1081 – 1151)에 의해서였다. 그는 생 드니의 오래된 카로링거 양식의 바실리카 전면을 개축하여,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수직, 수평면으로 나누었다. 그후 1440년부터 4년에 걸쳐 햇빛을 충분히 받도록 건물의 뒷면 창문을 장엄하고 극적인 스테인드 유리로 바꾸었다. 후일 고딕 양식으로 불린 이 건축양식은, 파리의 여타 성당들이(Saint-Martin-des-Champs, Saint-Pierre de Montmartre, Saint-Germain-des-Prés 등) 모방을 했고, 이어 영국과 독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생 피에르 몽마르트 성당-

    서기 1160년 경, 파리 주교인 쉴리(Maurice de Sully, ?-1196)는 파리를 위해 보다 야심차고 새로운 성당 건축을 시작했고, 이 사업은 그 후 2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서기 1163년에는 노트르담 성당에 석제의 성가대석이 설치되었고, 1182년에는 제단이 봉헌되었다. 서기 1200부터 1225년까지 건물 전면이 건축되었다. 서기 1225년부턴 1250까지는 두 개의 탑이 세워졌다. 길이 125미터, 높이 63미터, 좌석 1300개의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이 성당의 설계는 세느강 좌안의 포브르(Saint-Julien-le-Pauvre: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건물 가운데 하나. 제5행정구 소재. 13세기에 세워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그리스 정교회 건물)성당을 따른 것이었다.

    13세기에는, 성자 “루이”로 알려진 루이IX세(Louis IX, 1226-1270)는 고딕 양식의 걸작 품, 특히 예수님 십자가 유품 보관을 위하여 샤펠르(Sainte-Chapelle: 일 드 라 시테 소재. 고딕식 궁정 교회. 14세기까지 왕들의 거소였음)교회를 건축하였다. 이 교회 건축은 1241년부터 1248년까지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 유리를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이 건물에는 18미터 높이의 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좌우 익부(翼部)에 설치되었다.

 
         - 샤펠르 성당 -

    3.대학

    루이VI세와 루이VII세 치세하에서 파리는 유럽에서 배움의 중심지였다. 학생, 학자, 수도자들이 영국, 독일, 이태리로부터 지식 교류를 위해, 배우고 가르치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들은 먼저 노트르담이나 생 제르맹 수도원 부속 여러 학교 수업에 참여하였다. 이 시대에 가장 뛰어난 교사는 아브라르(Pierre Abelard, 1079-1142)로, 그는 몬타뉴 생트 즈느비에브에서 5천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파리대학(구 소르본느)은 12세기 중엽, 당초 학생과 교사의 길드 또는 협업체로 출발했다. 서기 1200년 필립II세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이곳에서 공부를 한 교황 인노센트III세도 소르본느를 승인을 했다.

    당시 라틴어는 대학의 강의 언어로 유학생들의 공통언어였기 때문에, 라틴 쿼터로 알려진 세느강 좌안에는 2만 명의 학생이 거주를 했다. 가난한 학생들은 그들의 거처였던 칼리지(Collegia pauperum magistrorum)에서 먹고, 자고 했다. 


         - 라틴 쿼터 -

    서기 1257년, 루이IX세의 종교고문인 소르본(Robert de Sorbon, 1201-1274)이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대학을 세우니, 후에 그의 이름을 딴 바로 소르본느 대학(Sorbonne)이다.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소르본느 대학은 서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가톨릭 신학학교였다. 영국의 베이컨(Roger Bacon, 1219-1292: 영국의 철학자, 자연과학자), 이태리의 아퀴나스(Saint Thomas Aquinas 1225-1274: 도미니카 교단의 승려, 철학자. 가톨릭 신부), 독일의 성 보나벤투레(Saint Bonaventure, 1221-1274: 프란시스코 교단의 승려. 신학자, 철학자)가 이 학교에서 가르쳤다. 

      
             -소르본느(현 파리)대학-

    4. 파리의 상업

    11세기가 시작되면서 왕은 파리가 아닌 그랑 샤틀레(Grand Châtelet: 현재의 Place du Châtelet에 있었던 세느강 우안의 요새)에 거주하며, 왕의 대리자인 프로보(Royal Provost: 구체제하 마을, 지역등 공동체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관직)를 보내 파리를 다스렸다. 성자 "루이"는 상인 프로보(Provost of Merchants)와 권한을 공유하고, 파리 상인들의 점증하는 권력과 부를 인정하기도 했다. 장인 길드의 중요성은 파리 시정에도 반영되어, 시는 배 모습을 한 선원 길드의 문장紋章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성 루이는 24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파리 최초의 의회를 구성하였다.

   서기 1328년 파리 인구는 20만으로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인구의 증가와 함께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어, 1306년에는 최초의 폭동이 있었는데, 이는 임대료를 올린 상인 프로보에 저항한 폭동이었다. 상인들의 많은 가옥이 소실되었고 24명의 폭동 가담자들이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서기 1357년에는 파리 프로보인 에트엔느 마르셀(Étienne Marcel,1310-1358: JohnII세 치하의 파리 상인 대표)이 주도한 폭동(그의 면전에서 왕세자의 많은 신하들이 피살되었다)에서는 왕권을 제한할 것과, 1347년 파리에서 처음 개최되었던 국가 총회(États généraux: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로 구성된 입법 협의 총회)와 파리시의 특권을 요구하였다.

    5. 흑사병과 백년전쟁

    14세기 중엽 파리는 흑사병(Bubonic plague)과 백년전쟁(La guerre de Cent Ans, 1337-1453)이라는 두 번의 재난을 겪었다. 서기 1348-1349기간에 있었던 최초의 흑사병으로 파리 시민의 1/4에 해당하는 4~5만 명이 죽었다. 이 병은 1360년에 재발되어 1368년까지 계속되었다.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파리는, 매3년마다 1년은 이 병으로 시달렸다.

    전쟁은 보다 파멸적이었다. 서기 1346년에 있었던 전투에서, 영국의 에드워드III(1312-1377)세의 군대는 파리 외곽을 공격, 약탈하였다. 이로부터 10년 후, 프랑스 왕 존II세가 퐈티에르 전투(the Battle of Poitiers: 프랑스 서부 아퀴테느 소재 퐈티에르 인근 Nouaillé에서 1356년 9월 19일 있었던 백년전쟁 중 주요 전투중 하나)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고, 도적이 된 영국군 용병부대가 파리 주변을 약탈하였다.      

    불행은 계속되었다. 1418년 5월 28~29양 일간 부르군디 공국(Duchy of Brugundy: 프랑스, 이태리, 스위스 접경지에 9세기경에 출현한 부르군디 왕국의 후계 국)과 동맹을 맺은 영국군대의 파리 침략이 있었다. 1422년에는 영국 랭카스타가의 베드포드I세 공작이, 영국 아기왕 헨리VI세(the Infant King HenryVI)의 대리인으로 프랑스 북부를 지배하였다. 이 때 헨리VI세는 파리에 거주하였고, 반면 프랑스 왕 샤를르VII세는 롸르 강(Loire River)남쪽 프랑스 영토만 지배하였다. 1429년 9월 8일 파리 공략에 실패한 쟌느 다크(Jeanne d’Arc, 1412-1431)는 루브르에서 멀지않은, 샤를르V세의 최전방 수상 요새의 출입구인 생토노레(Porte Saint-Honoré: 파리의 서쪽 문)에서 부상을 입었다.


          -쟌느 다크 -

    1431년 12월 16일 영국 왕 헨리VI세는, 불과 열 살의 나이로 노트르담 성당에서 프랑스 왕으로 등극했다. 1436년 샤를르VII세가 왕권을 회복하고 나서야 영국은 파리를 떠났다. 파리의 많은 지역이 파괴된 상태였고 시민의 반에 해당하는 십만 명이 파리를 떠나 피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파리가 다시 프랑스 수도가 되었을 때 왕들은 롸르 분지( Val de Loire: 프랑스 중부 롸르강 중류 분지)에 거주하고 있었고, 특별한 경우에만 파리를 방문하였다. 그 후 1582년, 프랑스와I세 때 마침내 파리로 돌아왔다. 지금도 파리에서는 루브르나 노트르담 이외에도, 중세 이래 왕들의 거처였던 거대한 상스궁(Hôtel de Sens:15세기 말에 건설된 Sens 대주교의 관저)과 클뤼니궁(Hôtel de Cluny: 1485-1510기간에 건설된 클뤼니 수도원 원장의 관저. 현재 중세기 박물관<Musée de Cluny>으로 사용되고 있음) 건물을 볼 수가 있다. 이 두 건물은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많은 부분이 개축되었다. 

  
           -Hôtel de Sens -


       -Musée de Cluny - 

    파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가옥 건물로는 1407년에 건축된 니콜라스 프라멜(Nicolas Flamel,1330 -1418: 필사본 판매업자. 사후 연금술사로 이름이 알려짐)의 집으로 현재 몽모랑시(Montmorency) 51번지에서 볼 수가 있다. 이 집은 개인 사저가 아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숙박소였다.


         
               프라멜의 집(지금은식당) -
             

VI. 16세기

    서기 1500년경 파리는, 이전의 번영을 되찾았고 인구는 25만에 이르렀다. 새로운 왕이 들어설 때마다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새로운 건물, 교량, 분수 등을 건설하였고 이들 대부분은 이태리로부터 온 르네상스 양식이었다.

    루이XII세(1462-1515)는 파리를 방문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1499년 10월 25일,  낡은 노트르담 나무다리를 헐고, 새로 놓았다. 1512년 완성된 이 다리는 크기와 모양, 색깔이 다른 돌들로 건설하였는데, 돌로 포장을 한 다리 위 도로 양편에는 새로 건설된 68채의 가옥과 점포들이 늘어서 있었다. 1533년 7월 15일 프랑스와I세(1494-1547)는 최초의 파리 시청인 오텔 드 빌르(Hôtel de Ville)의 초석礎石을 놓았다. 이 건물은 왕이 좋아한 이태리 건축가 코르토나(Domenico da Cortona, 1465-1549)가 설계를 하였는데, 그는 왕을 위해 롸르 분지의 샹보르 성(Château de Chambord)을 디자인한 사람이기도 하다. 



            -샹보르 성 -

    오텔 드 빌은 1628년에나 완성이 되었다. 1532년 코르토나는 또한 파리 최초의 르네상스식 교회 건물인 생트스타시성당( L’église Saint-Eustache: 파리 제1행정구 소재)을 디자인 하였는데, 고딕식 구조에 화려한 르네상스식 세부 장식을 한 건물이다. 

 
       -성 으스타 성당-

파리 최초의 르네상스식 가옥은 1545년에 세워진 카르나발레( Hôtel Carnavalet: 현재의 Musée Carnavalet 박물관)이다. 이 건물은 이태리 건축가 세를리오(Sebastiano Serlio, 1475- 1554)가 디자인 한 것으로 폰테느블로(Fontainebleau) 소재 장원인 그랑 페라르(Grand Ferrare)를 모방한 것이다.


                오텔 드 빌 - 



         
Hôtel Carnavalet -  

    서기 1534년 프랑스와I세는 루브르(Louvre)를 자신의 관저로 삼은 최초의 프랑스 왕이었다. 그는 거대한 중앙 탑을 없애버리고 넓은 뜰을 만들었다. 치세 말에 그는 필립II세(Philip II, 1165-1223)가 세운 하나의 날개 건물 대신, 르네상스식 정면을 갖춘 새로운 좌우 날개 건물을 세우기로 했다. 그 디자인은 레스코(Pierre Lescot,1515-1578: 르네상스기 프랑스 건축가)가 했고, 이는 프랑스 르네상스 식 전면을 갖춘 건축물의 모델이 되었다. 


             -루브르-  

    프랑스와I세는 또한 파리를 학문의 중심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서기 1500년 파리에는 베니스 다음으로 많은 75개의 인쇄소가 있었고, 16세기 후반 파리는 유럽 어느 도시보다도 많은 책을 출판했다. 서기 1530년 프랑스와I세는 파리 대학(Université de Paris)에 희브리어, 그리스어, 수학을 가르치는 새로운 교수단을 창립했다. 이 대학은 바로 프랑스 대학(Collège de France; 1530년 François I세가 세운 왕립 대학)의 전신이다.

  
       Collège de France -

    서기 1547년 프랑스와I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앙리II세(Henry II, 1519 – 1559)는 프랑스 식 르네상스 풍으로 계속 파리를 꾸며나갔다. 1549년 그의 파리 입성을 축하하기 위한 정교한 르네상스식 분수(Fontaine des Innocents)가 세워졌다. 



    -     인노상 분수 -

그는 또한 루브르에 세느강을 따라 새로운 날개 건물인 롸(Pavillon du Roi: 루브르 궁 Lescot 남쪽 끝에 탑 모양의 구조물)를 세웠다. 이 건물 일층에 왕의 침실이 있었다. 레스코에는 의전과 축제를 위한 화려한 홀(Salle des Cariatides)도 갖추었다.


    
         - Salle des  Cariatides -

    앙리II세는 투르넬(Hôtel des Tournelles: 현재는 붕괴되어 폐허가 되어 있음)소재 관저에서 말을 타고 창 시합을 하던 중 부상을 당해, 1559년 7월10일 사망했다. 그의 미망인 캐더린(Catherine de' Medici,1519-1589)소유의 낡은 저택은 1563년에 무너져 내렸다. 서기 1564~1572년 기간 중 파리 샤를르V세 성벽 바로 밖, 세느강 강변에 새로운 왕궁 튀일레리(Tuileries Palace)을 건설하였다. 그녀는 궁 서쪽을 향해 이태리 양식의 긴 정원(Jardin des Tuileries)을 새로 만들기도 했다.



           -튀일레리 궁-     

파리에는 기존의 가톨릭교회, 칼빈니즘, 르네상스 인본주의를 따르는 사람들간 음울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소르본느 대학은 가톨릭 정통 교리의 본거지로 프로테스탄트와 인본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1532년 소르본느 대학 신학교수회 명령에 따라 돌레(Étienne Dolet, 1509-1546: 프랑스 학자, 책출판자)는 모베르 광장(Place Maubert; 현재의 파리 제5행정구역, 라틴 쿼타 중심부)에서 그의 서적과 함께 기둥에 묶여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운 신학 이론에 대한 인기가 특히 프랑스 상류 계층에 점증하고 있었다. 서기 1562년 파리에서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대학살이 있었고 이 학살은 관용과 평온의 시대를 프랑스 종교전쟁(1562-1598)의 시대로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다. 파리는 가톨릭 동맹(Catholic League: 신성동맹으로 불리기도 함)의 강력한 보루가 되었다.


       모베르 광장 -

    서기 1572년 8월23-24일 밤, 나바르 공 앙리(후일 앙리IV세)와 샤를르IX(1550- 1574)세의 여동생인 마가렛과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프랑스 전역에서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이 파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궁정회의에서 그들을 모두 죽이기로 했다. 그들에 대한 살해는 곧 가톨릭 폭도들에 의한 대 프로테스탄트 대규모 학살로 번졌다. 성 바돌로뮤 학살로 알려진 이 대학살은 9월까지 파리는 물론 프랑스 전국에서 자행되었다. 파리에서만 3천명이, 프랑스 전국에서는 5천에서 1만 명에 이르는 프로테스탄트가 살해되었다.

 
           - 바돌로뮤 대학살 -

    앙리III세(1551-1589)는 이 같은 종교적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으나, 1588년 5월 12일 귀즈 대공(Duke of Guise, 1550-1588: 신성동맹 창시자)과 그의 추종자들은 앙리III세를 압박, 파리에서 추방하였다. 이 날은 소위 바리카데(Journée des barricades)의 날로, 앙리III세의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미온적이고 온건한 정책에 대해 가톨릭이 저항한 날이다. 서기 1589년 8월1일 도미니카 교단의 탁발승 클레망(Jacques Clément)은 클루 성(Château de Saint-Cloud)에서 앙리III세를 살해했다. 그의 죽음으로 프랑스 발로아(Valois)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파리는 1594년까지 여러 가톨릭동맹(신성동맹)도시들과 함께, 앙리III세의 뒤를 이은 앙리IV세에게 계속해서 저항했다.



               클루 성 - 

    서기 1590년 3월 14일 이브리전투(Battle of Ivry: 현재의 노르망디 Eure 소재)에서 신교도인 위그노와 영국군을 지휘한 앙리IV세는 가톨릭 동맹군에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파리를 포위, 공격했다. 포위는 장기간에 걸쳤으나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가톨릭으로의 개종에 합의한  앙리IV세는, 1594년 2월 27일 샤르트레 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Chartres: 파리 남서쪽 80Km에 위치)에서 프랑스 왕으로 등극한 후 3월 14일 파리에 입성했다.


VII. 17세기 파리

    16세기 종교전쟁 중 파리는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파리 시민 1/3이 전쟁을 피해 피난을 했으며 많은 가옥이 파괴되고 루브르나 오텔 드 빌, 튀일레리 등 많은 왕실사업이 미완의 상태였다. 헨리IV세는 파리의 독립성을 거부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통치를 했다. 그는 건축 사업을 재개하여 세느 강변을 따라 루브르와 튀일레리 궁을 연결하는  루브르의 새로운 날개 건물인 강변 갤러리(La Galerie du bord de l’eau)를 짓기도 했다. 루브르를 하나의 거대한 궁으로 만들겠다는 프로젝트는, 이후 3백 년 동안 계속되었다.


          - 강변 갤러리 -

    앙리IV세의 파리 건설 계획은 프로테스탄트인 베툰(Maximilien de Béthune, 1560-1641: 프랑스 귀족, 군인, 정치가)이 맡았다. 건물에 대한 그의 탁월한 감독 능력과 재정관리 능력을 인정 받아, 1599년 그는 예술의 거장으로 불리었다. 앙리IV세는 앙리III세가 1578년 건설을 시작하였으나 종교전쟁으로 미완성의 상태에 있던 퐁 뇌프(Pont Neuf)다리 건설을 1600년에 재개하여, 1607년에 완성을 했다. 이 다리는 다리 위에 집이 없는 파리 최초의 다리이다. 그 대신 양편으로 보조 도보를 두었다. 다리 가까운 곳에는 양수장인 라 사마리테느(La Samaritaine)를 두어 이 곳에서 길어 올린 물을 음료수용으로, 그리고 루브르 및 튀일레리 정원에 공급하기도 했다.



               - 퐁 뇌프 다리 -

    과거 앙리II세의 궁이었던 투르넬(Hôtel des Tournelles)의 공터 남쪽으로 주택과 아케이드로 둘러쌓인 우아하고 새로운 거주지를 만들기도 했다. 이곳은 1605~1612년 간 공사를 했는데 그 이름은 “왕의 광장”이었고, 1800년 보스지광장( Place des Vosges: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계획 광장. 제3행정구와 제4행정구가 접하는 곳에 있음)으로 개명되었다. 1607년 앙리IV세는 3각형 형의 새로운 거주지인 도피느 광장(Place Dauphine: 일 드 라 시테 서쪽 인근 광장)건설을 시작했고, 일 드 라 시테 서쪽 끝에 줄지언 선, 서른두 채의 석조 주택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이곳은 그의 마지막 파리 도시 계획이었다. 앙리IV세는 1610년 5월 14일 가톨릭 광신자인 프랑스와 라벨락(François Ravaillac1578 -1610)에게 살해되었다. 그가 죽은 4년 후 도피느 광장을 바라보는 퐁 뇌프 다리 위에, 그의 청동제 기마상이 세워졌다.


         도피느 광장 -  

    앙리IV세의 미망인 마리(Marie de Mecicis, 1575-1642; 앙리IV세의 두 번째 부인)는 자신의 거처인 뤼상부르(Luxembourg)궁을 짓기로 했다. 이 궁은 그녀의 고향인 플로렌스의 피티(Pitti) 궁을 본 딴 것이다. 이 궁에 이태리식 정원을 만들기 위해 그녀는 플로렌스 분수 전문가인 프란치니(Tommaso Francini, 1571-1651)에게 메디치 분수(La Fontaine Médicis; 파리 제6행정구 뤼상부르 공원에 소재)를 만들도록 했다. 세느강 좌안에는 물이 귀했고 이는 바로 좌안이 우안보다 발전이 늦은 이유이다. 정원과 분수에 물을 대기 위해 마리는 륑지스(Rungis)로부터 물을 끌어오기 위해 오래 된 옛 로마 수도관을 복원하기도 했다. 서기 1616년 그녀는, 세느강을 따라 튀일레리 공원 서쪽에 공원겸 산책길인 꾸르 라 레느(Cours-la-Reine: 제8행정구 꽁꼬르 광장과 카나다 광장 사이)를 만들었다. 플로렌스를 생각나게 하는 공원인 이곳은 1천8백 그루의 느릅나무가 늘어선, 긴 산책로이다.


 
           - 뤼상부르 궁 -

    루이XIII세는 앙리IV세가 시작한 루브르 사업을 계속하여 루브르 중심부에 정사각형의 정원을 새로 만들었다. 왕의 신하였던 리슐리외 추기경(Cardinal Richelieu, 1585-1642)은 파리 중심부에 중요한 건물들을 계속 신축해나갔다. 서기 1624년, 왕궁(Palais Royal: 파리 제1행정구에 소재한 과거의 왕궁)으로 알려진 자신의 웅장한 저택 추기경 궁(Palais-Cardinal)을 건축했다. 그는 생토노레가(Rue Saint-Honoré)의 여러 대저택들, 랑부이에 저택(Hôtel de Rambouillet), 다르마냑 저택(Hôtel d'Armagnac)등을 사들였고 정원을 확대하여 그 가운데에 분수를 두고 양편을 따라 나무들을 심었다.



          Palais Royal -

    17세기 전반기 리슐리외는 파리에 종교적인 건축양식이 들어서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이는 로마의 유명한 교회들 특히 성 베드로 바실리카(Basilica Papale di San Pietro in Vaticano; 바티칸 소재 르네상스 양식의 교회 건물)라던가 제주 교회(Chiesa del Gesù; 로마 소재 가톨릭 예수회 교회. 전면에 바로크 양식을 도입한 최초의 교회 건물) 같은 건물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지은 것이다. 새 양식의 파리 최초의 교회는 1627부터 1647년까지 지은 성 앙트와느 가의 생 루이성당(Église Saint-Paul-Saint-Louis)이다. 이 건물은 장식이 필요했음으로 전적으로 예수회 양식은 아니었으나 루이XIII세와 루이 XIV세가 진실로 감사하게 생각한, 또 그들의 마음이 담긴 건물이기도 하다.

   
           - 성 루이 성당 -


    소르본느 대학 예배당의 돔형 지붕은 로마 성 베드로 성당 지붕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이는 소르본느 학장 리슐리외의 주문에 따른 것이었다. 이곳은 그의 마지막 안식처이기도 하다. 이 교회 설계는 로마의 카티나리 성당(San Carlo ai Catinari)를 따른 것이다. 이 새로운 건축 양식은 화려한 고딕 또는 프랑스 바로크로 불린 것으로 누벨( Notre-Dame de Bonne-Nouvelle: 1624, 파리 제2행정구 소재), 빅톼르(Notre-Dame-des-Victoires: 1629, 파리 제2행정구 소재), 쉴피스(Saint-Sulpice: 1646, 파리 제6행정구 소재), 로키(Saint-Roch; 1653,파리 제1행정구 소재) 등 많은 성당 건물에서 볼 수가 있다.
        
      
               - 본누벨(1624년 건설) -

    루이XIII 세의 아내인 안느(Anne d'Autriche, 1601-1666: 스페인 합스브르크 공주)는 새 양식의 거대한 건축물인 발 드 그라스(Val-de-Grâce: 육군 병원. 제5행정구 소재)를 건축했다. 스페인의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 스페인 필립II세의 왕궁. 스페인 왕실 묘지)을 본 딴 이 건물에는 수도원과 교회, 왕실 미망인들을 위한 아파트가 마련되어 있었다. 발 드 그라스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들을 건설한 건축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랑스와 망사르(François Mansart, 1598 – 1666: 프랑스 바로크 양식에 고전주의를 도입한 건축가)는 17세기 건축의 특징인 경사진 지붕을 도입한 인물로 유명하다.


         발 드 그라스 -  


    17세기 하반기 파리는 인구가 늘어, 1643년 루이XIII세 치세 말에는 40만 명에 달했다. 세느강 좌, 우안 사이 연락을 쉽게 하기 위해 루이XIII세는 기존의 다리보다 두 배가 넘는 5개의 다리를 새로 놓았다. 귀족이나 관리, 부자들은 세느강 우안(Faubourg Saint-Honoré, Faubourg Saint-Jacques, Place des Vosges인근 Marais 등지)에 우아한 저택과 타운 홈을 짓기도 했다. 이러한 새 주택들은 두 개의 특별한 공간을 가지게 되는 기원이 되었는 바, 바로 식당과 응접실이다. 그 좋은 예가 보스지광장과 성 앙트와느 거리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쉴리 호텔(Hôtel de Sully: 제4행정구 소재)이다.

    
         -포부르 생 오노레-


    
          -쉴리 호텔-

    루브르와 세느강 좌안의 바크 가(Rue de Bac:   제7행정구  소재) 사이를 운행한 오래된 나룻배는, 루이XIV세 때 돌다리인 로열 다리(Pont Royal)로 바뀌었다. 이 다리의 끝 좌안에는 새롭고 멋진 포부르 생 제르맹(Faubourg Saint-Germain: 오랜 세월 프랑스 귀족 밑 상류사회의 주거지. 파리 제7행정구 소재)이 출현했다. 루이XIII세 치세 하에서 세느강 상의 두 섬(Île Notre-Dame 과 Île-aux-vaches)은 가축의 방목장으로서 땔감의 공급지로서 역할을 했고, 후일 일 생 루이(Île Saint-Louis)와 합쳐져 파리 금융인들의 눈부신 거주지가 되었다.


        Île Notre-Dame -

    루이XIII세 치세 하에서 파리는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서 명성을 날렸다. 서기 1609년초 루브르 미술관(Louvre Galerie)이 문을 열었고 화가, 조각가 등 예술가들이 이곳에 은거하며 작업을 하였다. 서기 1635년 리슐리외 추기경은 이태리 르네상스 시대의 왕자들 교육기관을 본 따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를 창립했다. 


      - 아카데미 프랑세즈 - 

서기 1648년에는 오늘날의 순수미술 아카데미(Académie des Beaux-Arts)의 전신인 왕립 미술, 조각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가 세워졌다. 1633년, 프랑스 최초의 식물원(Jardin du Roy: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됨에 따라, 1793년 Jardin des Plantes로 개명함)이 세워져 식물 및 약초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식물원은 또한 파리 최초의 시민을 위한 공원이기도 했다. 서기 1635년 리슐리외는 자신의 저택에 파리 최초의 상설 극장을 창립하였다. 

       - 순수 미술 아카데미 -

    리슐리외는 1642년에 죽었고, 1643년에는 루이XIII세가 사망하였다. 그 때 그의 아들 루이XIV세는 불과 다섯 살이었고, 따라서 어머니 안느가 섭정을 했다. 리슐리외의 후임 마자렝 추기경(Cardinal Jules Mazarin, 1602-1661: 이태리 출신의 추기경 ,외교관 ,정치가)은, 귀족으로 구성된 파리 의회(Parlement de Paris; 구체제하 프랑스 고등법원)에 세금을 부과코자 하였다. 의회가 거부하자 마자렝은 그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이 사건은 소위 프롱드(Fronde: 1648-1653 사이에 있었던 프랑스 내전)로 알려진, 왕권에 맞붙어 싸운 파리 귀족들의 길고 긴 투쟁이 시작된 출발점이었다.

    루이XIV세는 가택연금 상태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와 그의 모친은 1649년과 1651년 두 번에 걸쳐 탈출을 시도하여 생 제르맹 앙 레이 왕궁(Saint-Germain-en-Laye: 파리 교외 12마일 지점 소재 일 드 프랑스의 Yvelines에 소재)에서 군대의 파리 재탈환 때까지 머물렀다. 프롱드 전쟁의 결과 루이XIV세는 파리를 몹시 싫어하였다. 그는 파리 왕궁(Palais-Royal)을 떠나 보다 안전한 루브르로 옮겼고, 1671년 시 외곽의 베르사이유로 옮긴 다음 파리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 앙 레이 왕궁 -

    왕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파리는 인구가 계속 늘어 40만에서 50만 사이에 이르렀다. 루이XIV세로부터 새로운 빌딩감독관으로 지명 받은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19-1683: 루이XIV세의 초대 국무장관)는, 파리를 고대 로마의 후계자로 만들고자 야심에 찬 빌딩 건설을 시작하였다. 자신의 의도를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왕은 1661년 1월 기마 축제를 열었다. 그곳에 말을 타고 나타난 그는, 로마 황제의 의상을 입고 파리의 귀족들이 뒤를 따르게 했다. 그는 루브르 광장(Cour carrée de Louvre)을 완성하고 건물의 동쪽 면을 따라 우아한 열주를 세웠다. 루브르 내부에는 건축가 보(Louis Le Vau, 1612 – 1670: 프랑스 바로크 건축가)와 장식가 브륑(Charles Le Brun, 1619-1690: 프랑스 화가, 초상화가)이 아폴로 복도(Galerie d'Apollon)를 장식했는데, 그 천정에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아폴로의 마차를 조롱하는 어린 왕의 풍자적인 인물화가 그려져 있다. 왕은 또 북쪽에 새로운 건물을 증축하여 튀일레리 궁을 확장하였고, 왕궁 정원 건축가 노트르(André Le Nôtre, 1613-1700)로 하여금 튀일레리 궁의 정원을 개축토록 하였다.

 
        -아폴로 복도-


    루이XIV세는 루브르로부터 세느강 건너 대안에 대학(Collège des Quatre-Nations: 1662-1672에 건설된 역사 깊은 대학의 하나. 건축자의 이름을 따 Collège Mazarin이라고도 불리었음)을 세웠는데, 네 동의 바로크 건물과 하나의 돔형 교회가 어우러진 이 대학은 프랑스에 새로 복속된 네 지역으로부터 온 학생들을 위한 곳이었다(오늘날의 Institut de France).


       - Institut de France -


    루이XIV세는 또한 파리 시민을 위해 새 병원 살페트리에르(Salpêtrière: 현재의 Pitié-Salpêtrière University병원. 파리 제13행정구 소재)를 세웠고,
 

        - 살페트리에르 -

서기 1674년에는 상이군인을 위한, 두 개의 교회가 달린 엥발리데 병원(Les Invalides: 파리제7행정구 소재. 군사 박물관이기도 함)을 건설했다. 


           -엥발리데-

파리 중심부에는 두 개의 기념비적인 광장 빅토리아(Place des Victoires: 원형 광장. 제1,2행정구 소재)와 방돔(Place Vendôme: Place Louis-le-Grand 또는 Place Internationale로 불리기도 함. 1행정구 소재)을 건설했다.

 

          -방돔 광장-

그는 어떤 공격으로부터도 파리는 안전하고, 이제 더 이상 성벽이 필요 없다고 했다. 오래된 성벽을 철거하고 넓은 거리를 새로 만들었다. 오래된 성벽 철거를 기념하여 두 개의 개선문을 세우니 바로 생 드니(Porte Saint-Denis: 제10행정구 소재)와 생 마르텡( Porte Saint-Martin: 제10행정구 소재)개선문이다. 


      - 성 드니 개선문 -

    파리의 문화생활은 번창했다. 서기 1681년에는 장차 유명한 극장이 될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 Française)는 생 제르멩 데 프레(Rue Fossés Saint-Germain-des-Prés)에 세워졌다. 



         -코메디 프랑세즈 -

1686년 이태리 사람 콜텔리(Francesco Procopio dei Coltelli)는 파리 최초의 카페 레스토랑인 카페 프로코프(Café Procope: 제6행정구, l'Ancienne Comédie가에 소재)를 열었다.


        카페 프로코프 - 

    파리의 빈민들은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빈민들은 일 드 라 시테의 구불구불한 길에 늘어선 5~6층 짜리 건물이라던가 기타 빈민 지역에 모여 살았다. 암흑가의 범죄는 심각한 문제였다. 거리에는 철제의 가로등을 설치했고, 콜베르는 야경꾼으로 궁수를 4백 명까지 늘리기도 했다. 1667년 레이니(Gabriel Nicolas de la Reynie, 1625-1709: 현대식 경찰 제도를 확립한 인물)가 초대 파리 경시청장이 되었다. 그는 30년을 재직하였고 그의 후임자들은 업무에 관해 직접 왕에게 보고를 했다.


VIII. 18세기

    서기 1715년 9월1일 루이XIV세가 사망하였다. 그의 조카였던 필립(Philippe d'Orléans, 1674-1723: 프랑스 왕족, 군인, 정치가)은 다섯 살의 아기 왕 루이XV세의 섭정이었는데, 왕의 거소와 정부를 다시 파리로 옮겨 그곳에서 7년을 보냈다. 왕은 튀일레리 궁에 살았고, 필립은 왕궁(Palais-Royal; 과거 리슐리에 추기경의 저택)에서 살았다. 그는 연극, 오페라, 가면무도회 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파리의 지적 생활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서기 1719년 그는 파리 왕립 도서관을 왕궁(Palais-Royal) 인근의 네베르 건물(Hôtel de Nevers)로 이전을 했는데 바로 지금의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이다. 서기 1722년 6월 15일 파리의 혼란에 불안을 느낀 그는 궁정을 다시 베르사이유로 옮겼다. 그후 루이XV세는 특별한 경우에만 파리를 방문했다.



       - 국립 도서관 -


    루이XV세와 루이XVI세 치세하 파리의 중요 건물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는, 장차 판테옹(Panthéon)으로 불릴 세느강 좌안 즈느비에브 언덕(Montagne Sainte-Geneviève)위 생 즈느비에브 교회 건설이었다. 서기 1757년 국왕이 그 설계도를 승인하였고, 건축은 프랑스 대혁명 때까지 계속되었다. 루이XV세는 육군사관학교(École Militaire: 1773년 설립. 제7행정구 소재), 새로운 의학교인 키루르지에(École de Chirurgie: 1775년 설립. 제6행정구 소재. 현재 데카르트 대학 본부), 화폐조제국(Hôtel des Monnaies: 1768년 설립. 제6행정구 소재)건물을 새로 건설했다. 이 건물들은 모두 세느강 좌안에 있다.


       판테옹 - 

1. 확장기

    루이XV세 치세하에 파리는 서쪽으로 확장되어 갔다. 튀일레리 정원으로부터 오늘날의 에뜨왈르 광장(Place de l'Étoile: 개선문이 위치한 현재의 Charles de Gaulle 광장)까지 새로운 거리 샹제리제(Champs-Élysées)가 뚫렸고, 이후 세느강까지 파리의 역사축軸이라고 불리는 직선거리가 만들어졌다. 서기 1766~1775 기간 중 샹제리제가 시작되는 레이느 거리(Cours-la-Reine)와 튀일레리 정원 사이 넓은 광장이 만들어졌는데, 그 중앙에 루이XV세의 기마상을 세웠다. 이 광장은 처음 “루이XV세 광장”으로, 1792년 8월 10일 “혁명 광장”으로 불리다가, 1795년 디렉톼르(le Directoire: 프랑스 제1공화정 5인통치 위원회)치하에서 마지막으로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으로 개명되었다. 

           
                - 개선문, 샹제리제, 콩코르드 광장 -

    서기 1640년에서 1789년까지 파리 인구는 40만에서 60만으로 늘어나 있었다. 곧 유럽 최대 도시가 되었고, 1700년에 이르러서야 런던에 그 자리를 내주었으나 인구는 계속 급증하고 있었다. 주로 파리 분지와 프랑스 북동 지방으로부터의 인구 유입 때문이었다. 파리 중심 시가지는 점점 사람이 많아졌고 건축용지는 작아지고, 건물 높이는 높아져 4층, 5층, 심지어 6층까지 이르렀다. 1784년 마침내 건물 높이를 9트와세(Toise: 옛 프랑스 길이 단위. 1트와세는 1.949미터)로 제한하니 대략 18미터였다.

2. 계몽주의 시대

    18세기 파리는 철학과 과학 활동 폭발한, 계몽주의 중심 도시였다. 서기 1751~1752년,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와 달람베르(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는 백과사전을 출판했다. 이 사전은 유럽 전역의 지성인들을 소개했다. 서기 1783년 몽골피에르(Montgolfier)형제는 봐 드 불로뉴(Bois de Boulogne: 파리제16행정구 소재 공원)인근 뮈에트 성(Château de la Muette; 제16행정구 Bois de Boulogne 소재)에서 열기구로 유인 비행을 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파리는 프랑스와 유럽의 금융 중심지였고 유럽에서 제일가는 서적출판, 패션, 고급가구와 사치품 생산지였다. 파리의 은행들은 새로운 발명품, 극장, 공원, 예술품에 금융 지원을 했다. 오페라 극본 “세비야의 이발사”를 쓴 희곡작가 보마르세(Pierre de Beaumarchais, 1732 – 1799)는 성공적인 파리쟝으로 미국 독립 전쟁에 돈을 댄 인물이기도 하다.

 
             -뮈에트 성-

    서기 1672년 파리 최초의 카페가 문을 열었다. 서기 1720년 경에는 파리에 모두 약 4백 개의 카페가 있었다. 카페는 작가나 학자들의 모임 장소였다. 카페 프로코프(Café Procope)는 볼테르, 루쏘, 디드로, 달람베르 등이 자주 찾은 곳이었다. 카페는 뉴스, 소문, 아이디어를 교환한 곳으로 오늘날의 신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카페 프로코프- 

    서기 1763년 경, 귀족과 부자들의 주거지로가장 인기가 있었던 생 제르멩(Faubourg Saint-Germain)은 마레(Le Marais; )에 그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부자와 귀족들은 이곳에 화려한 개인 저택을 지었는데, 후일 이 건물들은 대부분 정부 청사 등 공공 건물로 사용되었다.


          -르 마레-

서기 1718~1720년 간 건설된 데브뢰(Hôtel d'Évreux)는 엘리제궁(Élysée Palace)으로 이름이 바뀌어 프랑스 대통령 관저가 되었다. 


         -엘리제 궁-

마티뇽 저택(Hôtel Matignon: 제7행정구 소재)은 수상의 관저, 부르봉궁(Palais Bourbon: 세느강 좌안 제7행정구 소재)은 프랑스 의회 건물로, 살름(Hôtel Salm)은 레종 도뇌르(la Légion d'Honneur: 세느강 좌안 소재)건물로, 비롱(Hôtel de Biron)은 로뎅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3. 건축
    17세기 중업부터 루이 필립왕( Louis Philippe, 1773-1850: 1830~1848기간 재위) 때까지 파리의 주된 건축 양식은 그레코-로만 형식에 토대한 신고전주의 양식이었다. 고전주의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로는 라 마들레느 성당(L'église de la Madeleine: 제8행정구에 소재하는 가톨릭 성당)으로 1764년에 건축되었다. 이 건물은 많은 비평을 받았는데, 대혁명 직전 소설가 메르시에르(Louis-Sébastien Mercier, 1740 -1814: L'An 2440이라는 공상과학 소설을 씀)는 “우리의 건축 천재들은 얼마나 단조로운가. 끊임없이 베껴 먹으며 살고 있다. 가장 작은 건물이라도 기둥이 없이는 만들지를 못한다. 많거나 적거나 간에 모두 베껴 놓은 사원이다”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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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 마들레느-

4. 사회 문제와 조세제도

    역사가 로슈(Daniel Roche, 1935~현재)에 따르면, 1700년 현재 파리에는 15만에서 20만이 또는 시민의 약 1/3이 빈민이었다. 이는 시당국과 교회가 인정한 숫자로, 실제로는 그이상이었다. 경제가 어려워짐에 따라 이 숫자는 늘어갔다.

    18세기 상반기 파리에는 수많은 아름다운 건물이 있었으나 또한 파리를 본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도시로 생각지를 않았다. 서기 1742년 리옹으로부터 와 파리를 처음 본 루쏘(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파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는 화려한 거리와 금과 대리석으로 장식한 왕궁이 있는 당당한 모습의 아름답고 장엄한 도시를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포부르 생 마르소(Faubourg Saint-Marceau: 파리 제13행정구)에 들어섰을 때 좁고 더러우며 악취가 나는 거리, 건강을 해칠 듯한 가난에 찌든 초라한 집들, 걸인, 가난, 마차꾼, 헌옷 수리소, 차와 헌 모자를 파는 행상들을 보았다.”

    볼테르(Voltaire,1694-1778: 본명은 François-Marie Arouet임. 볼테르는 필명)는 1749년 그의 파리 묘사에서,

“우리는 좁은 거리에 선 시장과 그곳의 불결함, 무질서.... 많은 이웃들이 필요로 하는 공공의 장소가 그러함을 목격하고는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진다. 시 중심부가 어둡고 비좁으며 음울한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야만의 시대 산물인 그 무엇과 같다” 라고 했다.

    근로 계층의 중심 주거지는 파리 동쪽 포부르 생탕트완(Faubourg Saint-Antoine)으로 이곳은 중세 이래 가구와 목공예 중심지였다. 많은 장인들이 그곳에 거주하였고, 그 규모는 파리 전인구의 10%에 달했다. 파리는 외곽으로 특히 반 농촌 지역인 서쪽, 북서쪽으로 계속 뻗어나갔다. 그곳에는 목제 또는 석제의 집들이 채소밭과 오두막, 작업장들과 함께 뒤섞여 있었다.

    파리는 행정책임자인 시장도, 행정도 없었다. 경찰은 국왕에게 직접 보고를 했다. 파리 상인 대표는 상인을 대표했고, 귀족으로 구성된 파리 고등법원(Parlement de Paris; 의회를 뜻하는 영어의 Parliament는 불어 Parlement에서 왔으나 그 뜻은 다름)은 주로 의전에만 관심이 있었고 실제로 권력도 없었다. 그들은 늘어나는 인구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을 마련해주려고 애를 썼다. 거리 이름을 나타내는 금속 또는 돌로 된 명패가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건물마다 번호가 먹여졌다. 파리 경시청은 위생, 안전, 통행에 관한 사항을 법제화했다. 18세기 말엽 처음으로 석유를 이용한 가로등이 설치되기도 했다. 물 공급을 위해 캘루(Gros-Caillou: 파리 제7행정구 소재)와 새요(Chaillot: 파리 제16행정구 소재)에 수증기를 이용한 대규모 펌프를 설치하기도 했다. 하수구가 없어 비에브르 강(Bièvre: 세느강으로 흘러드는 일 드 프랑스 지역의 개천)이 하수 천 역할을 했다. 1781년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여 팔레 로얄의 오페라 극장이 소실된 후, 1729년 파리 최초의 소방대가 조직되었다. 이즈음 파리의 거리에서는 귀족이나 부자들이 걸터앉은 채 하인들이 메고 가던 의자 가마는 점차 사라지고, 개인용 마차 또는 차비를 지불하는 마차가 등장하였다. 서기 1750년경 파리에는 1만대의 영업용 마차가 있었는데, 이를테면 파리 최초의 택시들이었다.

    루이XVI세는 1774년에 등극을 했고, 그의 새로운 베르사이유 정부는 돈이 절실히 필요했다. 7년전쟁(Seven Years' War, 1756-1763: 세계 패권을 놓고 영국과 프랑스 간에 있었던 전쟁)으로 재정은 바닥이 난 상태였다. 미국 독립 전쟁에 개입하여 1776년 이후 재정은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조세 수입 증가를 위해 파리로 반입되는 상품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으나, 이 시도는 1784~1791 기간 중 파리로 들어오려는 상인들을 막는 새로운 성벽이 되고 말았다. 성벽(Wall of the Ferme générale: 파리 여러 성벽 가운데 하나)의 길이는 25Km에 높이는 4~5미터 높이었는데, 세금을 내야하는 관문은 56곳이 있었다. 현재의 로쉐로 광장(Place Denfert-Rochereau: 파리 제14행정구에 소재)과 나숑 광장(Place de la Nation: 파리 제11, 12행정구에 소재 )에 남아있는 그 성벽의 일부를 지금도 볼 수 있다. 몽소 공원(Parc Monceau: 파리 제8행정구에 소재)에는 세금을 징수했던 관문 하나가 아직도 남아 있다. 성벽과 징세 관문은 정말 인기가 없었고 이로 인한 빵 부족은 불만에 불을 붙였고 결국 이 불만이 프랑스 혁명으로 폭발된 것이다.

 
         -로쉐로 광장-  


IX. 프랑스 대혁명(1789–1799)

    서기 1789년 파리는 프랑스와 유럽의 역사를 바꾼 프랑스 혁명의 주 무대였다. 이때 파리 인구는 60만에서 64만 명 정도였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부자들은 모두 파리 서쪽, 상인들은 중심부, 노동자들과 장인들은 남쪽과 동쪽 특히 생토노레(Faubourg Saint-Honoré)에 몰려 살았다. 이들 가운데 극빈층과 실업자 수는 약 10만 정도였고 그들 대다수가 굶주림을 피해 농촌으로부터 파리로 온 사람들이었다. 노동자(Sans-Culottes)계층인 그들은 파리 동부 주민의 1/3을 차지했고 프랑스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주인공들이었다. 


           -생토노레(2010)- 

    서기 1789년 7월11일 궁정기병연대(Régiment Royal-Allemand Cavalerie: 독일인 이민자 등 독일어 구사 병사들로 이루어진 연대. 혁명 후 1792년 해체됨)가 개혁주의자인 재무상 쟈크 넥케르(Jacques Necker,1732-1804)를 해임한 왕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루이XV 광장(Place de la Concorde: 콩코르드 광장)에서 대규모 평화적인 시위를 했다. 개혁운동은 그대로 혁명으로 바뀌었다. 7월13일 파리 시민들이 빌르(Hôtel de Ville)를 점령하고 라파예트(Marquis de La Fayette,1757-1834: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싸운 프랑스의 귀족)는 프랑스 국민 수비대(Garde Nationale)를 조직하여 파리를 지켰다. 7월14일 폭도들이 엥발리데의 무기고를 장악하고 수천 정의 총을 탈취,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감옥인 바스티유(Bastille)를 향해 노도 같이 진군했다. 그러나 그들이 잡은 포로는 일곱 명에 불과했다. 바스티유 전투에서 혁명군은 87명이 피살되었다. 바스티유 형무소장 로네이(Marquis de Launay, 1740-1789)는 항복을 하였으나 현장에서 즉시 목이 잘렸고, 잘린 목은 창끝에 매달려 파리 시내를 돌며 조리돌림을 당했다. 파리 상인조합장 플르셀르(Jacques de Flesselles,1730-1789)역시 피살되었다. 11월에 이르러 바스띠유 요새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잔해인 돌덩어리들은 기념품이 되었다.

 
            -바스띠유-

    7월15일 빌르(Hôtel de Ville)에서 제1차 파리 코뮌(Paris Commune: 파리 시의회)이 개최되어 초대 파리 시장으로 베이(Jean Sylvain Bailly,1736 -1793)를 선임하였다. 7월17일 파리에 온 루이XVI세는 시장의 환영을 받았다. 왕은 모자에 삼색의 꽃모양 기장記章을 달고 있었다. 적색과 청색은 파리의 색이고 흰색은 왕실을 나타내는 색깔이었다.

    1789년 10월5일, 수많은 파리 시민들이 베르사이유 궁을 향해 진군하여 그 다음날 사실상의 포로인 왕실과 정부에게 파리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새로운 프랑스 정부인 국민회의(Assemblée Nationale)는 튀일레리 광장 인근 마네즈(Salle du Manège: 루이XV세 때 세워진 승마학교 건물)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베르사이유 궁-

    서기 1790년 5월21일, 파리시 헌장이 채택되었고, 왕의 권력으로부터 파리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파리는 12개의 행정구역(arrondissements)과 48개의 소 구간으로 나뉘었다. 파리의 시정은 1인의 시장과 16명의 행정관, 그리고 32명의 시의회 의원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8월2일 베이 시장은 파리시민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출되었다.

    서기 1790년 7월14일 샹 드 마르(Champ de Mars: 현재의 파리 제7행정구에 있는 녹지대)에서 엄숙한 기념식(Fête de la Fédération: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1790년 프랑스 전역에서 개최되었던 혁명 기념일 행사)이 개최되었다. 라파예트가 이끄는 국민수비대는 “나라와 법과 국왕”을 지키고 왕이 승인한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샹 드 마르 광장-

    서기 1791년 6월21일 국왕가족은 파리를 탈출하였으나 바렌느(Varennes: 프랑스 북동쪽 Grand Est 행정구 Meuse department)에서 체포되어 6월25일 파리로 압송되었다. 파리에서는 입헌군주제를 원한 자유주의적인 귀족, 상인 등 온건파와 공화정을 원한 급진적인 빈민층, 노동자 계층 간에 적대감이 커지고 있었다. 빈민과 노동자들은 특권적인 귀족제도와 교회 등 특권 계층을 포함한 구체제(Ancien Régime: 대략 15세기부터 프랑스 대혁명 때까지 프랑스의 정치, 사회 시스템)의 폐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위험을 피해 시골이나 해외로 끊임없는 도피를 했다. 서기 1791년 7월17일 국민수비대는 마르(Champs de Mars)에서 모임 중인 온건파에 대해 사격을 가하여, 수십 명을 살해했다. 온건파와 급진파 혁명가간 간격이 더욱 넓어지고 있었다.

    혁명적인 일상생활은 자치단체가 중심이었다. 자코벵(Société des Jacobins: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시 가장 영향력 있던 정치 단체)은 과거 도미니크 교단의 수도원(Couvent des Jacobins de la rue Saint-Honoré)에 자코벵 본부를 두었다. 가장 영향력 있던 자코벵 회원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는 생토노레가(rue de Saint-Honoré: 파리 제1행정구) 366번지(현재 398번지)에 살았다. 세느강 좌안 로데옹 극장(Théâtre de l'Odéon: 파리 제6행정구 소재) 인근에는 코델리에르 클럽(Club des Cordeliers; 프랑스 혁명 기간 중 시민 정치 단체)이 있었다. 이 단체의 중요 멤버로는 마라(Jean-Paul Marat, 1743-1793: 정치이론가, 과학자, 신문인), 당통(Georges Danton,1759-1794: 혁명의 주도자로, 제1공화국을 연 인물로 알려지고 있음), 데스무렝(Camille Desmoulins, 1760 -1794: 언론인, 정치인. 당통과 함께 처형됨)을 비롯 여론에 불을 붙인 신문인, 출판업자 등이 있었다.


   
         -로데옹 극장-


    서기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의 대 프랑스 선전포고가 있었고, 6월에는 브룬스위크 공작(Duke of Brunswick, 1735-1806)이 지휘하는 프러시아 군대가 파리 시민들에게, 만일 오스트리아 국왕(Frederick William II)의 권능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파리를 공격하여 파괴하겠다는 통첩을 해왔다. 이 협박에 대응하기 위해 8월10일 빈민계층 지도자들은 파리시 당국을 무시한 채, 빌르(Hôtel-de-Ville)에 자신들의 정부 파리 코뮌(Paris Commune: 1789부터 1795까지 파리 정부)을 세웠다. 한 무리의 빈민계층 폭도들이 튀일레리 궁에 접근하자 왕의 가족은 가까운 의회 건물로 피신을 하였다. 튀일레리 궁을 공격한 폭도들은 왕의 마지막 보호자인 스위스 용병 근위대를 참살하고 궁을 약탈하였다. 빈민계층의 위협에 직면한 의회는 8월11일 왕권을 정지 시키고, 국민의회(Convention Nationale)가 프랑스를 통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어 8월13일 루이XVI세와 그의 가족은 탕플(Square du Temple: 파리 제3행정구 소재)요새에 감금되었다. 9월21일 국민의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그 다음날 프랑스를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국민회의 회의장은 과거 극장이었던 튀일레리 궁 안의 마신느 홀(Salle des Machines)로 옮겨졌다. 반혁명분자 추적이 임무인 공안위원회는 그 본부를 튀일레리 남쪽 건물인 플로르(Pavillon de Flore: 루브르 남서쪽 끝에 위치)에 두었다. 혁명재판소는 일 드 라 시테에 있던 중세 왕궁인 시테 궁(Palais de la Cité)에 두었는데, 바로 오늘날의 정의 궁(Palais de Justice: 법원 청사)자리에 있었다. 


       -루이XVI세 가족-

    새 정부와 함께 프랑스 전역에 “공포 시대(La Terreur)"가 시작되었다. 서기 1792년 9월2일부터 6일에 걸쳐 빈민계층의 폭도들이 감옥 문을 깨고 들어가 반항하는 승려나 귀족들, 일반 범죄자들을 살해했다. 서기 1793년 1월21일 루이XVI세는 혁명광장(Place de la Concorde: 콩코르드 광장. 파리 제8행정구, 샹제리제 동쪽 끝에 소재하는 파리에서 제일 큰 광장)에서 단두대로 목이 잘렸다.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도 같은 해 10월16일 같은 장소에서 기요틴으로 목이 잘렸다. 한 달 후인 11월, 샹 드 마르에서 파리 시장 벨리도 목이 잘렸다. ”공포 시대“ 기간 중 16,594명이 혁명재판을 받아 단두대로 목이 잘렸다. 구체제(Ancien Régime)와 관련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체포, 투옥되었다. 귀족과 교회 재산은 몰수되어 국유화되었고 모든 교회는 폐쇄되었다.

    서기 1792년을 원년으로 하는 비기독교적인 프랑스 공화국 달력도 새로 만들어졌다. 서기 1794년 7월27일은 공화국 달력으로 2년 테르미도르 9일에 해당하는 식이었다. 많은 거리 이름도 바뀌었다. 정부 건물 전면에는 자유, 평등, 우애 라는 표어를 새겨 넣었다. 주소 표기도 바뀌었다. Monsieur 나 Madame은 Citoyen(시민)이나 Citoyenne로 바뀌었고, Vous(you)라는 말도 보다 프로레타리아적인 Tu로 바뀌었다.

    입법회의 명령(1792년 8월)에 따라 빈민계층의 시민들은 1792년 노트르담 성당의 첨탑을 파괴했다. 생 드니 왕립 묘지의 무덤을 파괴하는 행사를 통해 군주제 몰락을 기념하는 제1회군주제몰락기념일에 관한 법령이 1793년 8월1일 포고되기도 했다. 서기 1793년 10월23일 파리코뮌의 명령에 따라 빈민계층은 프랑스 왕들이라고 전해 내려온, 구약에 나타나는 왕 모습을 한 성당 전면의 조각물들을 파괴하기도 했다. 몽마르트 수도원이나 생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 등 뛰어난 역사적 건물들이 국유화되거나 파괴되었다. 수많은 교회가 공공재산으로 매각되거나 그 석재나 건축 자재를 얻기 위해 파괴되기도 했다. 앙리 그레과르(Henri Grégoire, 1750-1831: 가톨릭 사제. 혁명 지도자. 노예제도 폐지 및 보통선거제도 지지)는 반달리즘(Vandalism)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혁명 기간 중 정부의 명령에 따른 재산 파괴 행위를 비판했다.

    파리는 혁명파들이 계속 지배했다. 서기 1793년 6월1일 몽타냐르(Montagnards: 프랑스 혁명 기간 중 정치단체)가 지롱드(Girondins: 혁명 기간 중 정치 집단의 하나)로부터 권력을 빼앗았으나 곧 당통과 그 추종자들에게 그 권력을 넘겨주었다. 서기 1794년 당통의 무리는 전복되어, 로베스피에르(Maximillien Robespierre, 1758-1794: 프랑스 법률가, 정치가.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유명했던 인물)가 이끄는 새 정부에 의해 기요틴으로 목이 잘렸다. 서기 1794년 7월27일, 로베스피에르는 몽타냐르와 온건주의자들 동맹에 의해 체포되었고, 그 다음날 그는 21명의 정치적 동료들과 함께 목이 잘렸다. 그의 처형은 “공포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가 처형된 후 또 다른 처형은 정지되었고 죄수의 석방으로 감옥은 점점 한산해졌다.

    학자나 역사가들이 파괴된 교회들로부터 그림이나 조각을 수집하여 오귀스텡 수도원(Couvent des Petits-Augustins: 1259년에 세워진 수도원)에 보관을 하였다. 이 가운데 미술품은 1793년 말에 루브르로 옮겨졌다. 1795년 10월 오귀스텡 수도원은 프랑스 기념물 박물관(Musée des Monuments français)이 되었다가 1816년에 폐쇄되었다. 이 기념 박물관은 현재 파리 예술학교(Beaux-Arts de Paris)의 일부로 남아 있다.


         -파리 예술학교-

    새 정부인 5인위원회(le Directoire: 1795.11.2-1799.11.9기간 존속. 나폴레옹에 의해 전복됨)는 국민의회를 대신하였다. 본부를 뤼상브르 궁으로 이전하고 파리의 자치권을 제한하였다. 혁명력 4년 방데미에르 월(Vendémiaire)13일(1795년 10월5일) 새 정부에 반대하는 왕당파들의 봉기가 있자, 5인위원회는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보나파르트는 대포와 포도탄(Grapeshot: 옛날 대포에 쓰인 한 발이 9개의 작은 탄알로 이루어진 탄환)으로 거리의 시위자들을 쓸어버렸다. 혁명력 8년 브뤼메르 월(Brumaire)18일(1799년 11월9일) 보나파르트는 쿠데타를 일으켜 5인위원회를 전복시키고 자신이 초대 집정인 보나파르트 집정 정부(Le Consulat: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될 때까지 프랑스 최고 정부)를 수립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혁명은 종지부를 찍고 프랑스 최초의 제국주의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서기 1797년 경 파리 인구는 57만으로 감소되어 있었다. 그러나 빌딩 건축은 계속되고 있었다. 세느강에는 현대식 다리(Pont de la Concorde)가 건설되기도 했다. 


        Concorde 다리 -

이 다리는 루이XVI세 때 착공되어 1792년에 완성되었다. 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팡테옹(Panthéon: 파리 제5행정구 생 즈느비에브 정상에 소재)은 교회에서 프랑스 저명인사들을 위한 영묘靈廟가 되었고, 루브르는 박물관으로, 과거 왕족의 거주지였던 부르봉 궁(Palais-Bourbon: 파리 제7행정구 소재)은 의회 건물이 되었다. 



       -Palais-Bourbon-

파리 최초의 상가 거리인 캐르(Passage du Caire)와 파노라마(Passage des Panoramas: 파리 제2행정구 소재)가 1799년 개통되었다.

        파노라마 상가 - 

X. 나폴레옹I세(1800–1815)

    서기 1800년 2월19일, 초대 집정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튀일레리 궁으로 이사를 한 후, 혁명으로 초래된 수년간의 공포와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안정과 질서를 위한 조치를 취했다. 1801년 교황 피우스VII세와 정교政敎협약(Concordat of 1801)에 서명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와 평화를 도모하였다. 파리의 교회에서는 미사가 재개되고, 신부들은 성직자의 의상을 입어도 되었다. 교회는 종을 울릴 수도 있게 되었다. 질서가 무너진 도시의 질서를 되찾기 위해 그는 선거에 의한 파리 시장 선출 제도를 바꾸어, 1800년 2월17일 파리경시청장(Préfecture de police)을 파리시장으로 직접 임명하였다. 1800년 3월8일 초대 경시청장으로 임명된 뒤보아(Louis Nicolas Dubois)는, 1810년까지 파리 시장으로 재직하였다. 열두 행정구마다 시장을 두었으나 나폴레옹 정부의 법령을 집행함에 있어 그들의 권한은 한계가 있었다.

    서기 1804년 12월2일 스스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파리를 고대 로마에 필적할만한 제국의 도시로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그는 콩코르드 광장으로부터 피라미드 광장(Place des Pyramides: 파리 제1행정구 소재 광장)까지 이르는 리볼리가(Rue de Rivoli)건설에 착수했다. 카퓌시느 수녀원(Couvent des Capucines: 1806 철거됨)은 철거되었고 방돔 광장(Place Vendôme: 파리 제1행정구 소재 광장)과 그랑 블레바르(Grands Boulevards)를 연결하는 새 도로를 건설하였다. 이 거리 이름은 나폴레옹 가(Rue Napoléon)로 불리었다가 후일 페(Rue de la Paix: 파리 제2행정구 패션 거리)로 개명되었다.


       - Rue de la Paix -

    서기 1802년 나폴레옹은 세느강을 건너는 혁명적인 강철제 다리 아르 교(Pont des Arts: 인도교)를 놓았고, 이국적인 식물의 온실과 오렌지 나무로 이 다리를 장식했다. 다리 통행세로는 1수(Sou: 대혁명 이전의 화폐. 1/20파운드의 은에 해당되었던 지폐)를 받았다. 새로 놓은 두 다리 도스테를리(Pont d'Austerlitz: 1802년12월에 있었던 Austerlitz 전투 승전 기념 다리)와 드에나(Pont d'Iéna: 에펠탑과 Trocadéro 광장을 연결하는 다리)는 나폴레옹이 지은 이름이다.

  
          -Pont des Arts-

    서기 1806년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군사적 영광에 바치는, 고대 로마를 본 딴 일련의 기념물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에 따른 첫 번째 거대한 기념물이 바로 개선문(Arc de Triomphe)으로, 파리 서쪽 끝 에뜨왈르(Barrière d'Étoile광장: 현재 샤를르 드골 광장)에 건설이 시작되어 7월군주정(Monarchie de juillet: 1830년 7월 혁명의 결과 구성된 자유입헌군주정. 1848년까지 지속되었음)기간이었던 1836년 완성되었다. 


        -개선문-

나폴레옹은 또 튀일레리 궁 중앙선에 맞춘 로마의 세베루스 개선문(Arco di Settimio Severo)을 모방한 소규모 카루즐 개선문(Arc de Triomphe du Carrousel: 샹제리제 끝에 있는 이 건물은 나폴레옹의 전승 기념물로 1806~1808에 건설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구조물임)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개선문의 꼭대기에는 그가 이태리 베니스의 성 마르코 바실리카 성당(Basilica Cattedrale Patriarcale di San Marco)에서 약탈해온 청동제 기마상을 올려 놓았다. 이 개선문은 파리 역사 축軸 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 개선문 주위를 돌며 그의 승리를 축하했다. 


        -카루즐 개선문-  

나폴레옹은 또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 전승기념 석주石柱(Columna Traiani: 로마 트라야누스 황제 다키아 전투 승전 기념비)를 모방한 방돔 석주(Vendôme Column: 파리 제1행정구, 방돔 광장 소재)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이 기둥에 사용된 철은 1805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으로부터의 전취물인 대포였다. 콩코르드 가(Rue de la Concorde: 1814년 4월 27일 그 옛 이름인 Rue Royale로 다시 바뀜)가 끝나는 지점에 있는, 1763년 공사 착수 이래 그때까지 아직도 미완성인 마들레느 교회(L'église de la Madeleine; 파리 제8행정구 소재 가톨릭 성당)를 프랑스의 유명한 장군들 동상을 진열하기 위한 군사 신전神殿인 영광의 사원(Temple de la Gloire)으로 개명하였다.

    나폴레옹은 장기간 방치되었던 파리의 하부 시설에도 신경을 썼다. 서기 1802년 파리에 신선한 음료수를 공급하기 위해 우르크 운하(Canal de l'Ourcq: 파리 일 드 프랑스 구역의 108Km에 이르는 운하)를 건설토록 했고 저수지(Bassin de la Villette: 파리에서 가장 큰 인공 저수지)도 팠다. 파리 시민들에게 신선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여러 곳에 기념비적인 분수도 세웠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것은 샤틀레 광장(Place du Châtelet)의 팔미에르 분수(Fontaine du Palmier: 파리 제1행정구 소재)이다. 그는 또 파리 시내 장거리 수상 운송을 위해 운하(Canal Saint-Martin)도 새로 팠다.

 
           -팔미에르 분수-

    나폴레옹의 마지막 공공사업은 1810년에 시작한 바스티유 코끼리 분수 사업이었다. 24미터 높이의 거대한 청동제 코끼리 모습의 이 분수는 바스티유 광장 가운데 놓고자 한 것이었으나, 완성을 하기에 그는 시간이 없었다. 그가 추방된 이후 수년 동안이나 석고로 만든 거대한 코끼리 조형물이 광장 가운데 있었다.


             -코끼리 분수- 

 서기 1811년 나폴레옹은 샹 드 마르로부터 세느강 건너 편 새요(Chaillot) 언덕 위에 거대한 왕궁 건설을 위한 법령을 반포하기도 했다. 이 계획은 유럽 모든 왕궁들의 크기와 사치를 압도코자한 것이었으나, 사업 착수 후 나폴레옹은 곧 몰락을 했고 계획은 수행될 수가 없었다.

XI. 전후 회복(1815~1830)

    서기 1815년 6월 18일 워터루(Waterloo)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러시아 동맹군 제7군단 30만 명의 병사가 파리를 점령, 그해 12월까지 주둔했다. 파리로 돌아온 루이XVIII세는 나폴레옹의 관저였던 튀일레리 궁으로 입주했다. 콩코르드 다리는 “루이XVI세교”로 개명이 되었고, 퐁뇌프(Pont Neuf)다리 끝 공터에는 앙리VI세의 동상이 세워졌다. 방돔 광장의 돌기둥 위에는 부르봉 왕가의 깃발이 나부끼기도 했다.


      -루이XVIII세-

    망명했던 귀족들은 포부르 생 제르맹의 집으로 돌아왔고, 비록 과거처럼 사치하지는 않았지만 파리의 문화생활은 재빨리 회복되었다. 플르티에르 거리(Rue Le Peletier)에는 새로운 오페라 하우스가 건설되기도 했다. 서기 1827년에는 루브르가 확장되어 9개의 새전시장이 생겨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시 수집한 고대 유물들이 전시되었다.



          -생 제르멩-

    개선문 건설 사업은 계속되었고, 혁명 시 파괴되었던 교회들을 대신하여 신고전주의 양식의 새로운 교회 건물들이 건설되었다. 이 때 세원진 건물들로는 캐루 성당(Saint-Pierre-du-Gros-Caillou, 1822–1830기간에 건설: 파리 제7행정구 소재), 로레트 성당(Notre-Dame-de-Lorette, 1823–1836: 제9행정구 소재), 누벨 성당 (Notre-Dame de Bonne-Nouvelle,1828–1830: 제2행정구 소재), 바울 성당(Saint-Vincent-de-Paul, 824–1844: 제10행정구 소재), 사크르망 성당(Saint-Denys-du-Saint-Sacrement, 1826–1835: 제3행정구 소재)등이 있다.


         -바울 성당- 

    나폴레옹이 군사 영웅들을 추존하기 위해 지었던 영광의 사원(Le temple de la Gloire)은 앞에서 말한 대로 마들레느 성당(L'église de la Madeleine)이라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기도 했다. 루이XVIII세는 루이XVI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가 처형된 후 묻혔던 마들레느의 작은 공동묘지에 엑스피아트와르 예배당(Chapelle Expiatoire: 제8행정구 소재)를 지어 그들 부부에게 헌정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유해는 생 드니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급속히 성장하는 파리는 1830년 인구 80만명을 넘어섰다. 서기 1828~1860년 기간에 파리 시는 마차가 끄는 합승마차 시스템을 운영하였으니, 이는 세계 최초의 대중교통 수단이었다. 이로 인해 시민들은 파리 시내에서의 이동이 대단히 빨라졌고, 이는 다른 도시들에게 모델이 되기도 했다. 과거 파리의 거리 이름을 새겼던 석판 명패는 하늘색 청색 판(로열 블루)에 하얀 글씨를 쓴 금속판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세느강 우안 폴 성당(Saint-Vincent-de-Paul,), 로렛트 성당(Notre-Dame-de-Lorette), 유럽 광장(Place de l’Europe: 파리 제8행정구 소재) 등 주변에 패션의 거리가 생겨나기도 했다. 신 아테느(Nouvelle Athènes: 제9행정구 소재)는 나폴레옹 전쟁 후 회복기와 7월 왕정 기간 중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의 무대이기도 했다. 배우 탈마( François-Joseph Talma, 1763 – 1826)는 다므 9번지(9 Rue de la Tour-des-Dames)에, 화가 들라크르와(Eugène Delacroix, 1798 – 1863)는 로레트 54번지(54 Rue Notre-Dame de-Lorette), 그리고 소설가 상드(George Sand, 1804 – 1876)는 오르레앙 광장(Square d'Orléans: 제9행정구 소재)에 살았다. 


         -로렛트 성당 내부-

탯부 거리(Rue Taitbout) 80번지의 오르레앙 광장은 개인 재산으로, 이곳에는 46채의 아파트와 3개의 화랑이 있었다. 상드는 5번 아파트 1층에 살았고, 쇼팽(Frédéric Chopin)은 9번 아파트 그라운드(Lobby) 층에 살았다.


          -오르레앙 광장-

    서기 1824년 루이XVIII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우 샤를르X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그의 새 정부는 귀족들에게는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다. 1830년 스물여덟 살의 빅토르 위고가 쓴 희곡 에르나니(Hernani: 스페인 바스크 남쪽에 있는 마을 이름)는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 연극이 공연된 극장에서 관객들간 싸움이 발생했다. 7월26일 샤를르X세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의회를 해산하는 법령에 서명을 하였고, 이로 인해 발생한시위는 결국 폭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소위 영광의 3일(Trois Glorieuses: 7월 혁명이 있었던 1830년 7월 27부터 29일까지 3일간)이 지난 후 군대가 시위에 가담하였다. 왕과 그 가족 그리고 법원이 클루 성(Château de Saint-Cloud: 파리 서쪽 5Km 지점 Hauts-de-Seine의 Saint-Cloud 에 소재)을 탈출하였다. 7월31일 라파예트(Marquis de Lafayette, 1757- 1834)와 새로운 입헌군주인 루이 필립(Louis-Philippe, 1773-1850: 1830년부터 1848년까지 재위)이 빌르(Hôtel de Ville)앞에서 열광하는 대중들 앞에 나타나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를 높이 들었다.


XII. 루이 필립(1830–1848)

    루이 필립 치세하의 파리는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와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의 소설에서 잘 소개되고 있다. 서기 1831년 78만5천명이던 파리 인구는, 북서부 쪽으로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1848년에는 1백5만3천명으로 늘어 있었다. 시내 중심부의 빈곤 계층 인구 밀도도 더욱 증가하였다.

    일 드 라 시테 주변의 시내 중심부는 좁고 구불구불한 길과 19세기초부터 무너져 내린 건물들로 인해 뒤죽박죽이었다. 아름다운 면도 있었지만 어둡고 혼잡한데다 유해하고 위험했다. 물은 장대에 물통을 달아 어깨에 걸고 날랐으며, 하수구는 세느강으로 직접 흘러들었다. 1832년에는 콜레라가 발생하여 2만명의 파리 시민이 죽었다. 루이 필립 치세하에서 15년간 세느강 지역 담당관을 지낸 랑뷔토(Comte de Rambuteau, 1781-1869)는, 파리 중심부의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느강 선창가 도로를 돌로 포장을 하고, 강변을 따라 나무를 심었다. 르 마레와 여러 시장들을 연결하는 새로운 도로(현재의 Rue Rambuteau)도 뚫었고, 유명한 파리 중앙 시장인 알레(Les Halles)도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 시장은 나폴레옹III세 때 완성되었다.

    루이 필립왕은 조상 대대로 이어받은 오를레앙 궁(Palais-Royal)에서 1832년까지 살다가 그후 튀일레리 궁으로 옮겼다. 서기 1836년 완성된 콩코르드 광장은, 그가 파리에 공헌한 기념물이라 할 것이다. 콩코르드 광장에는 두 개의 분수가 있는 데, 강 어업을 뜻하는 플뢰브(Fontaine des Fleuves)분수와 바다 어업을 상징하는 메르(Fontaine des Mers) 분수이다. 메르 분수에는 Brest, Rouen, Lyon, Marseille, Bordeaux, Nantes, Lille, Strasbourg 등 8대 도시를 상징하는 여덟 개의 여인 조각상도 있다. 이 가운데 Strasbourg 상은 빅토르 위고의 연인 드루에(Juliette Drouet, 1806-1883: 배우였던 그녀는 배우를 포기하고 빅토르 위고의 비서가 되어 여행도 함께 하는 등 동반자가 되었음)를 닮고 있다. 

 
          -메르 분수-

     콩코르드 광장은 1836년 10월25일 무게 250톤의 오벨리스크(Luxor Obelisk: 3천년 이상 된 고대 이집트 유물. 람세스II세<1250BC>의 룩소 신전 정문 옆에 있던 석주)를 가져다 놓음으로써 한층 더 아름다움을 뽑내게 되었다.   


        -오벨리스크-

    생트 엘레나(Saint Helena)에서 죽은 나폴레옹의 유해는, 1840년 12월15일 파리로 돌아와 엄숙한 의식을 거쳐 엥발리드에 안치되었다. 루이 필립왕은 방돔 광장의 석주 위에 나폴레옹의 동상을 세웠다. 1840년 왕은 자신의 집권을 가능케 한 1830년 7월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바스티유 광장(Place de la Bastille: 파리 제3행정구 소재)에 기념탑을 세웠다. 그는 또 혁명 기간 중 파괴된 파리 교회들 복구 사업을 시작했는데, 프레 성당(Saint-Germain-des-Prés)을 시작으로 이 사업은 건축가이며 역사가인 뒤크(Eugène Viollet-le-Duc, 1814 -1879: 많은 중세 건축물을 복구한 인물)가 맡았다. 서기 1837~1841년간 뒤크는 빌르 건물(Hôtel de Ville)을 수리했고 이 때 화가 들라크르와(Eugène Delacroix)가 내부 장식을 했다.


         - 바스티유 광장 -

    루이 필립 치세하에서 파리에 처음으로 철도역이 건설되었다.  여러 회사가 건설에 참여했다. 철도는 서로 연결되지 않았고 시 중심부를 벗어나 있었다. 최초의 철도인 레이 선은( Embarcadère de Saint-Germain-en-Laye)는 1837년 8월24일 유럽 광장(Place de l'Europe)에서 개통되었다. 서기 1842년 라자르(Gare Saint-Lazare)역이 문을 열었고 1843년 5월에는 파리-오를레앙간 그리고 파리-루앙간 최초의 철도가 개통되었다.

 
           -라자르 역-

    파리의 인구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노동자 계층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1830~1840년 간 거의 매년 그들의 봉기가 있었다. 1832년 라마르크 (Jean Maximilien Lamarque, 1770-1832;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 장군. 군주제를 반대하고 이태리, 폴란드 독립을 지지함. 나폴레옹 전쟁 시 영국으로부터 카프리 섬을 빼앗음)장례식 후 그에 대한 루이 필립 왕의 비난은 파리 시민들의 봉기를 불렀다. 이 이야기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 잘 묘사되어 있다.

    점점 커지던 불안은 1848년 2월23일 마침내 폭발하여 군대의 대규모 시위를 불러왔다. 파리 동부 근로자 주거 지역에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국왕은 튀일레리 궁 앞에서 자신의 근위대를 맞았으나, 그들은 환호 대신 “개혁 만세”를 외쳤다. 이에 낙담한 왕은, 왕의 자리를 내놓고 영국으로 망명을 하였다.


XIII. 제2공화정과 나폴레옹III세(1848–1870)

    서기 1848년 12월 나폴레옹I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Louis-Napoleon Bonaparte, 1808-1873)은 투표에서 74%의 지지를 얻어 선거에 의한 최초의 프랑스 수장이 되었다. 왕당파와 공화파간 첨예한 분열 때문에 이 “황태자 대통령(Prince-President)"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헌법의 규정 때문에 재선도 불가능했다. 1851년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1852년 12월2일 국민투표에서 승리함으로써 나폴레옹III세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III세 치세 초기 파리 인구는 약 1백만명으로, 대부분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몰려 살았다. 서기 1848년 인구 밀집 지역에서 발생한 콜레라로 2만명이 사망했다. 서기 1853년 황제는 신임 세느강 담당장관인 하우스만(Georges-Eugène Haussmann, 1809-1891)를 앞세워 거대한 공공사업에 착수하였다. 하우스만은 실업자를 동원하여 파리 중심부를 깨끗한 물로 청소토록하고 공공장소에 가로등을 켜게 하는 등 일을 시켰다.

    나폴레옹III세는 1795년 정했던 12개의 행정구(Arrondissement)를 시 외곽까지 확장했다. 파리 외곽의 마을들은 증세를 우려하여 파리 편입에 저항하였다. 그는 황제의 권력을 사용하여 파리 확장을 단행했고, 이에 따라 8개의 행정구가 신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황제와 하우스만은 17년에 걸쳐 파리의 면모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일 드 라 시테에 있었던 낡은 건물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정의궁(Palais de Justice), 경시청,  병원 건물(Hôtel-Dieu; 제4행정구 일 드 라 시테 소재 병원)등 새 건물들을 건설했다. 나폴레옹I세가 시작한 리볼리 거리(Rue de Rivoli)의 연장 공사도 끝을 냈고 넓은 도로망을 건설하여 기차역과 도시 외곽과의 교통 소통을 개선하였으며 기념물 주변의 공간도 넓게 했다. 넓어진 새 도로에는 혁명이나 민중이 봉기할 때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기가 어려웠으나 넓은 길의 주목적이 바리케이드 설치가 아니었음을 하우스만은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새로 만든 大路(Boulevard)를 따라 건설되는 신축 건물에 대해 하우스만은,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였다. 동일한 높이에다 기본적인 설계가 같아야 하고, 전면은 크림 색깔의 돌로 해야 했다. 이러한 표준으로 파리 중심부의 거리들은 오늘날에도 특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나폴레옹III세는 파리 시민들 특히 시 외곽의 주민들에게 휴식과 오락을 위한 푸른 공간을 마련해 주고자 했다. 망명 시절 자주 방문했던 런던의 하이드 파크(Hyde Park)로부터 영감을 얻은 그는,  나침판 상 정확한 파리 주위 동서남북 네 방향 지점에 거대한 새 공원을 짓도록 명령했다. 그렇게 해서 서쪽의 불로뉴(Bois de Boulogne: 파리 제16행정구 소재), 동쪽의 벵상느(Bois de Vincennes: 파리 동쪽 시 경계에 위치), 북쪽의 쇼몽(Parc des Buttes-Chaumont: 파리 제19행정구 소재), 남쪽의 몽수리(Parc Montsouris: 파리 제14행정구 소재)등 네 공원이 건설되었고 기타 파리 시 주변에 많은 공원과 광장이 생겨난 결과 어느 곳에서든 걸어서 10분 이내에 공원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불로뉴 공원-

    나폴레옹III 세와 하우스만은 리용(Gare de Lyon: 파리 제12행정구 소재)과 노르(Gare du Nord: 파리 제10행정구 소재)등 두 곳에 철도역을 건설하였다. 그들은 또한 도로 밑으로 상, 하수도관을 묻어 파리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고 신선한 물 공급을 늘리기 위해 새로운 저수지와 수로를 건설하였다. 그밖에도 거리와 기념물을 밝히기 위해 수만 개의 가스등을 새로 설치했다.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 하우스(Opéra Garnier: 파리 제9행정구 소재)건설에도 착수하였다.


   
          -가르니에 오페라 하우스-

또 도로 건설을 위해 철거되었던 소위 “범죄의 거리”로 알려진 탕플리 거리(Boulevard du Temple)의 낡은 극장을 대신하여, 샤틀레 광장(Place du Châtelet)에 두 개의 극장을 신축하였다. 

 
           -탕플 거리-

파리 중앙 시장(Les Halles)재건축도 끝을 냈다. 세느강 상의 철도도 처음으로 놓았고 새로운 대로인 미셀 거리(Boulevard Saint-Michel)입구의 기념비적인 미셀 분수(Fontaine Saint-Michel: 파리 제6행정구 소재)도 세웠다. 파리의 도로들도 새로 디자인하여 가로등, 매점, 합승차량 정류소, 공중변소 등을 새로 설치하였고, 이 모든 일을 다비우(Gabriel Davioud, 1824-1881: 프랑스 건축가)가 하였다. 이렇게 해서 파리의 거리는 드물게 보는 조화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미셀 분수-      

    서기 1860년대 후반 나폴레옹III세는 행정부에 보다 많은 자유를, 입법부에는 보다 많은 권력을 허락하였다. 하우스만은 의회의 주공격 대상이었는데 사업 추진에 필요한 비정상적인 금융조달, 30헥타르의 뤽상부르 공원부지로부터 4헥타르의 토지를 신 도로 건설을 위해 사용한 일, 20년에 걸친 그의 사업으로 겪은 파리시민들의 불편 등이 그가 받은 비난의 이유였다. 1870년 1월 나폴레옹III세는 하우스만을 해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달 후 보-불 전쟁(Franco-Prussian War: 1870년 7월1일부터 1871년 1월 28까지 있었던 프랑스-프러시아간 전쟁)이 일어났고, 1870년 9월1일 세당 전투(Sedan Battle: 프랑스 북동부Ardennes 의 세당 마을)에서 패한 황제는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하우스만은 황제가 패전한 후 폐위되어 수립된 제3공화정 기간에도 도로 확장 사업을 계속했고, 이 사업은 1927년에 이르러 마침내 완료가 되었다.

1. 경제

    나폴레옹 치세하 파리에서는 최초의 대규모 산업이 시작되었다. 파리 교외는 산업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는데,  이곳은 프랑스 혁명 기간 중 몰수된 교회와 수도원의 건물과 토지를 산업에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포부르 생트 안트와느나 포부르 생 드니에는 거대한 방직공장이 세워졌다. 영국의 봉쇄로 서인도제도로부터 설탕 반입이 불가능해지자, 파시(Passy; 현재의 파리 제16행정구)에 최초의 설탕공장이 세워지기도 했다. 18세기 후반에는 포부르 생토노레와 세요에 철과 구리 제련소가 건설되었고 쟈블(Javel: 파리 제15행정구), 샤펠르(La Chapelle)와 클리냥쿠르(Clignancourt: 파리 제18행정구)에 화학 공장도 처음 들어섰다. 1801년 현재 파리는 900개 공장이 6만명의 근로자를 고용했으나 이 가운데 100명 이상을 고용하는 곳은 스물넷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은 소규모 작업장에 고용되었던 것이다. 19세기 파리는 수많은 장인들이 사치품 특히 의류, 시계, 고급가구, 도자기, 보석, 가죽 공예품을 생산했고 이러한 상품들은 세계 시장에서 비싼 가격으로 팔렸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파리의 산업과 근로자는 늘어났다. 1847년 현재 파리는 6만5천개의 기업에 3십5만 명의 근로자가 있었으나 열 명 이상을 고용한 기업은 7천개에 불과했다. 섬유산업은 기울었으나, 파리는 증기기관과 기계류의 20%를 생산했고 프랑스 금속산업의 세 번째 도시였다. 쟈블, 파시, 그레넬(Grenelle: 파리 제15행정구), 클리시(Clichy: 파리 북서부 교외), 벨르빌르(Belleville: 파리 동부 세느강 변 ), 팡텡(Pantin: 파리 북동부 교외)등에는 공해 산업인 화학공장도 들어섰다.

    19세기 중엽 파리는 런던 다음으로 국제금융도시가 되었다. 국립은행은 물론 도전적인 민간은행들은 전 유럽에 걸쳐 금융지원을 했고, 제II프랑스제국(1852~1870)의 확대에 기여를 하였다. 나폴레옹III세의 목표는 런던을 따돌리고 파리를 세계 제일의 금융도시로 만드는 것이었으나, 1870~71년 전쟁((Franco-Prussian War)으로 타격은 받은 파리 금융은 그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기간 중 중요한 성과로는,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 영국의 유대인 금융가문)의 은행 지점이 파리에 개설되었다는 점이다. 이 은행은 엘바섬을 탈출한 나포레옹I세를 지원함으로써 유럽 금융계의 지도적인 은행의 하나가 되었다. 이 은행은 여러 신규 투자은행들과 함께 프랑스 산업과 식민지 확장에 금융지원을 하였다. 1796년에 설립된 프랑스 은행(Banque de France)은, 1848년에 있었던 금융위기를 해결하여 강력한 중앙은행으로서의 입지를 확보하였다. 1948년 금융위기와 공화파 혁명 당시 파리할인은행(CNEP: 1966년 BNCI에 합병되어 BNP가 되었고, BNP는 2000년 Paribas에 합병되어 BNP Paribas 가 되었음)이 설립되었다. CNEP는 대구모 사업에 개인자금과 공공자금을 함께 지원하는 혁신적인 금융사업을 하였고 전국에 지점을 두어 예금을 받아들였다. 기타 중요한 금유기관으로는 Société Générale 와 Crédit Mobilier가 있었다. 리용에서 시작한 Crédit Lyonnais은 파리로 이주하였다.

    파리에는 주식시장(Paris Bourse)도 생겨나, 주식을 사고파는 투자자들을 위한 핵심 역할을 하였다. 주식시장은 일차적으로 주식거래를 위한 것이었으나 또한 상호보증기금을 설립하여, 주요 거래인의 실패가 전체적인 금융위기로 번지지 않도록 하였다. 1880년대에 이 주식시장의 통제를 싫어한 주식투기꾼들이, 규제가 덜한 쿨리스(Coulisse)를 대안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1895~96년 수많은 주식 브로커들이 일시에 실패함으로써, 쿨리스는 붕괴하였다. 파리 주식시장은 그 독점적 지위를 보장하는 법으로 시장 통제를 강화하여, 또 다른 금융 공황의 발생 위험을 줄였다.


XIV. 포위된 파리와 코뮌(1870–1871)

    보-불전쟁(Franco-Prussian War) 끝 무렵인 1870년 9월 1~2일간 있었던 세당 전투에서 나폴레옹III세가 패배하여 포로가 됨으로써 그의 통치는 끝이 났다. 9월4일 그는 하야를 했고, 그 날 바로 제3공화정이 선포되었다. 9월19일 프러시아 군대가 진주하여 1871년 1월까지 시를 포위하였다. 이 기간 중 파리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통을 겪었다. 고양이, 쥐, 개, 말, 심지어 프랑테 공원(Jardin des Plantes)의 두 코끼리 카스토르(Castor)와 폴뤼(Pollux)도 식용으로 도살이 되었다. 1871년 1월 프러시아 군의 대포 공격이 있었고, 1월28일 파리는 결국 항복을 하였다. 파리를 잠시 점령했던 프러시아 군은 곧 물러나 교외에 주둔했다.

    1871년 3월18일 파리에서 급진적인 병사들에 의한 폭동이 일어나 두 명의 장군이 피살되었다. 정부와 군은 베르사이유로 퇴각을 하였고, 3월26일 무정부주의자들과 급진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한 새로운 시위원회인 파리 코뮌(Paris Commune)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파리 코뮌은 야심적이고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단행하려고 했으나 그 권력 기간은 2개월에 불과했다. 5월21일부터 28일까지 프랑스 군은 소위 “피의 주일(Semaine Sanglante)”이라 불리는 치열한 전투 끝에 파리를 다시 찾았다. 시가전 중 코뮈나르(Communards; 파리 코뮌 지지자들)는 수적으로 프랑스군보다 5대1의 우세였지만 유능한 지휘자도 파리 방어를 위한 전술도 없었다. 따라서 맡은 지역은 각자 방어를 해야 했다. 5월26일 그들의 사령관 델레클뤼즈(Louis Charles Delescluze, 1809-1871: 혁명가, 언론인)가 바리케이드 위에 올라, 극적인 자살을 하였다. 전투 마지막 날 코뮈나르는 튀일레리 궁, 빌르, 정의 궁, 레종 도뇌르 궁을 비롯하여 여러 정부 건물에 방화를 했고 파리 추기경 다르보이(Georges Darboy, 1813-1871)를 포함하여 잡은 포로들을 학살하였다.

    4월초부터 “피의 주일”까지 프랑스 군 인명피해는 사망 837명, 부상 6,424명이었다. 7천명에 달하는 코뮈나르가 전투 중 또는 전투 후 군 총살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들은 모두 시 공동묘지에 임시로 합장되었다. 1만명에 이르는 코뮈나르가 도주를 하여 벨지움, 영국, 스위스, 미국으로 망명을 하였다. 파리 코뮌이 붕괴된 후 포로가 된 4만5천명의 죄수는 대부분 석방되었으나 그 가운데 23명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약 1만 명은 투옥 또는 뉴 칼레도니아(Nouvelle-Calédonie: 남태평양 Vanuatu 남쪽 프랑스 식민지) 등 해외 식민지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1879년과 1880년 모든 죄수들과 망명자들은 사면을 받아 프랑스로 돌아왔고, 그들 가운데 의회 의원이 된 사람도 있었다.


XV. 아름다운 시절(1871–1914)

    파리 코뮌이 붕괴된 후 파리는 보수적인 국민 정부의 엄격한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상원은 일찍이 뤼상부르 궁으로 돌아왔지만, 정부와 의회는 1879년까지 베르사이유에서 파리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1873년 7월23일 의회는 파리 코뮌의 봉기가 시작되었던 곳에 바실리카 건축 프로젝트를 승인했다. 이는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 시기에 고통을 겪은 파리에 대한 속죄를 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신 비잔틴 양식의 쾨르 성당(Basilique du Sacré-Cœur: 몽마르트 언던 위 소재)이 건설되었고, 건설 비용은 시민들의 헌금으로 충당되었다. 1919년에 완공된 이 성당은 곧 파리의 가장 유명한 건물들 중 하나가 되었다.


         -쾨르 성당-


    급진적인 공화파는 1787년 선거에서 시의회 총 80석 가운데 75석을 차지함으로써 파리를 장악했다. 1879년 그들은 파리의 여러 거리와 광장들 이름을 바꿨다. 도 광장(Place du Château-d’Eau)은 레퓌블리크(Place de la République: 제3, 10,11행정구에 하나씩 소재)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883년에 그 중앙에 공화파를 기리는 마리안느(Marianne; 프랑스 공화정을 의인화한 인물. 자유, 평등, 우애, 이성을 표상하는 인물) 동상을 세웠다. 거리 이름도 바뀌었다. 프랑스 혁명에 헌신한 장군들 이름을 따 오르땅스(Reine-Hortense)는 오슈(Hoche: 제8행정구 소재), 조세핀(Joséphine)은 마르소(Marceau, 1769-1796: 대혁명 시 프랑스 장군), 롬(Roi-de-Rome)은 클레버(Kléber: 파리 제16행정구 소재)로 각각 바뀌었다.

 
         -레퓌블리끄 광장-

    서기 1874년부터 1882년까지, 빌르(Hôtel de Ville)는 샹보르 성(Château de Chambord: 프랑스 중부 Loire 계곡 분지 샹보르에 소재)의 탑을 본 딴 탑을 갖춘 신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샹보르 성

코뮈나르가 불태운 도르제(Quai d'Orsay; 파리 제7행정구 소재 선창)의 콩므츠(Cour des Comptes: 행정법원)의 잔해도 철거하고 대신 도르제 철도역(Gare d'Orsay: 오늘날의 Musée d'Orsay 박물관)을 놓았다. 


       -Hôtel de Ville-

튀일레리 궁의 벽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 하우스만(Baron Haussmann)이나 르프엘(Hector Lefuel, 1810 – 1880: 프랑스 건축가), 뒤크(Eugène Viollet-le-Duc, 1814-1879: 프랑스 건축가, 작가)같은 사람들은 튀일레리 궁의 재건축을 주장했지만, 1879년 시의회는 군주제를 상징하는 건물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Musée d'Orsay 박물관-

서기 1883년 파리시는 이 궁을 전면 철거하고 오직 북쪽의 마르상 별관( Pavillon de Marsan), 남쪽의 플로르 별관(Pavillon de Flore)만 남겨 놓았다. 

 
        - 마르상 별관-  

    이 시기 파리 시민들에게 가장 기억할만한 일은, 1885년에 있었던 빅토르 위고의 장례식이었다. 수만 명의 파리 시민들이 관에 누운 그의 모습을 보기 위해 샹제리제 거리에서 줄을 섰다. 그를 조문하기 위해 개선문에는 검은 휘장이 드리워졌다. 그의 시신은 과거 성 즈느비에브 성당이었던 판테옹에 안치되었는데, 이 곳은 프랑스 혁명에 기여한 프랑스 위인들을 위한 묘지였다가 1816년 부르봉 왕가가 회복되자 다시 성당으로 바뀌었다. 19세기 이 성당은 몇 차례 곡절을 겪은 후 빅토르 위고의 장례식이 있었던 때에는 이미 세속화되어 있었다.

1. 교통

    19세기말 파리는 런던을 따르고자 교통 현대화를 시작하였다. 1897년 메요(Porte Maillot)와 벵상느(Porte de Vincennes)간 최초의 도시철도 건설에 착수하여 1900년 세계 박람회 때 완공하였다. 세느강에 두 개의 새로운 다리도 놓아졌다. 그 가운데 알렉산데III세 다리(Pont Alexandre III)는 세느강 좌안과 1900년 박람회장을 연결하는 다리였다. 이 다리의 초석은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II세가 놓았는데, 그는 1894년 부왕 알렉산더III세의 왕위를 계승한 황제였다. 이 다리와 샹제리제를 연결하는 거리는 처음 알렉산더III가로 명명되었다가 그 후 니콜라스II세가로, 그 후 다시 알렉산더III세가로 바뀌어 1966년까지 사용되다가 마지막으로 윈스턴 처칠가로 바뀌었다. 현대식 강철 다리인 알렉산더III세 다리를 건설한 엔지니어는, 오트이(Auteuil)와 자블(Javel)을 연결하는 미라보 다리(Pont Mirabeau)를 건설하기도 했다.

    
           -알렉산더III세 다리-

      
               -미라보 다리-    

2. 현대 미술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걸쳐 파리는 현대미술과 영화의 요람이었다. 이름 있는 많은 예술가들이 이 “아름다운 시대(Belle Époque)” 에 파리 또는 렌트가 저렴하고 쾌적한 몽마르트에 살면서 작업을 했다. 서기 1876년 르느와르(Auguste Renoir, 1841-1919)는 코르토(Rue Cortot: 12 rue Cortot 75018 Paris ,France)12번지 셋집에 살면서 일요일 오후 몽마르트의 무도회를 그린 갈레트(Bal du moulin de la Galette)를 그렸다. 위트리요(Maurice Utrillo, 1883-1955)도 1906년부터 1914년까지 같은 주소에서 살았고, 뒤피(Raoul Dufy; 1877 – 1953: 화가. 섬유 도자기 디자이너)도 1901년부터 1911년까지 이곳에서 화실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 건물은 지금 몽마르트 박물관(Musée de Montmartre: 8~14 rue Cortot, 파리 제18행정구)이 되었다. 

         -몽마르트 박물관- 

소(Pablo Picasso; 1881 – 1973)와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를 비롯하여 많은 작가들이 1904~1909기간 중 라바르( Le Bateau-Lavoir: 몽마르트 소재 건물 별칭)에 살며 작업을 했다. 이 집에서 피카소는 걸작 아비뇽의 처녀(Les Demoiselles d'Avignon)를 그렸다. 사티(Erik Satie, 1866- 1925: 프랑스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를 비롯하여 여러 작곡가들이 이 근처에서 살았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몽마르트를 떠나 몽파르나스(Montparnasse)로 가서 살았다.

 
         - la Galette -

    서기 1895년 12월25일 카퓌시느(Boulevard des Capucines)대로의 그랑 카페(Grand Café: 4 Bd. des Capucines, 75009 Paris)에서는 루미에르(Lumière: 사진 기계 제작업자) 형제가 만든 최초의 영화 상영이 있었다. 이때 서른두 명의 관객이 각자 1프랑의 관람료를 내고 리용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찍은 활동사진을 포함 여러 편의 단편 영화를 보았다.


         -그랑 카페-

    20세기로 들어서면서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를 비롯하여 브라크(Georges Braque: 1882- 1963 ), 드렝(André Derain: 1880-1954 ), 뒤피(Raoul Dufy: 1877-1953), 메칭거(Jean Metzinger: 1883 – 1956), 블라멩크(Maurice de Vlaminck: 1876-1958) 같은 야수파(Fauvism)작가들이 “자유자재”로운 붓질과 원색을 사용하여 풍경과 인물을 그려냄으로써 파리를 혁명적인예술의 도시로 바꾸어 놓았다. 마티스가 그린 춤(La Danse)은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모두 현대 회화로의 발전 과정을 말하는 그림이다.

 


             -- 

3. 상업과 백화점

    19세기 말부터 20세기초까지 파리는 그 부가 급속히 증가했고 도시집중화가 이루어졌다. 1872년부터 1927년까지 파리는 “랑티르 사회(Rentier Society; 유산 상속자 사회)”였다. 유산을 상속 받은 부자들은 전 시민의 10%였으나, 파리 전 재산의 7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자산 소득은 근로 소득으로는 어림도 없는 높은 수준의 생활을 누리게 했고, 엄청난 사치품 소비를 가능케 했다. 파리는 소비자 우선 도시, 경제력 우선 도시 특히 그 웅대한 백화점들과 사침품 매점이 끊임없이 줄지어 늘어선 상가로 인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상류 계층과 새롭게 형성된 중산층이 소비하는 좋은 상품에 관한 세계표준을 정하는 “꿈의 기계(시각을 자극하는 기계 즉 디자이너)”들이 있었다. 조그만 옷가계 주인 아들이었던 부시코(Aristide Boucicaut, 1810-1877: 파리 최초의 현대식 백화점 창립자)는 1848년 파리에서 르 봉(Le Bon Marché)이라는 잡화점 주인과 동업자가 되었다. 서기 1852년 르봉을 인수한 그는 이 상점을 현대식 백화점으로 바꾸어 대량구매, 적은 이윤, 계절 판매, 할인, 광고, 우편 판매를 위한 카달로그 제작은 물론 부모와 어린이등 고객을 위한 상품 제공과 오락 행사를 하였다. 가격 정찰제와 더불어 환불, 교환제도도 실시하여 품질을 보장했다.


              -르봉 백화점-

이렇게 해서 르봉은 사마리텐(La Samaritaine), 프렝땅(Printemps), 라파예트(Galeries Lafayette)등 다른 백화점의 표본이 되었다.


       -프렝땅 백화점-

    프랑스의 영광은 파리의 상점에서 볼 수 있는 국민적 신망에 있다. 졸라(Émile Zola, 1840-1902: 프랑스 자연주의 작가)는 1880년 르 봉 마르쉐에서 조사한 사실을 토대로 파리의 전형적인 백화점을 무대로 한 소설 “부인들의 천국(Au Bonheur des Dames)”을 썼다. 이 소설에서 그는 백화점을 사회를 발전시키며 또한 사회를 괴롭히는 신기술의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상품, 관리기술, 마켓팅, 소비자 중심주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라파예트백화점-

    서기 1890년 파리 북부에 세워진 뒤파엘(Grands Magasins Dufayel)은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한 거대한 백화점으로 노동자 계층이 새로운 주 고객이었다. 주변의 공터는 소비자들의 놀이터였다. 부자들이 시내 중심부의 유명 백화점에서 사듯이 노동자들이 단순히 일상적으로 필수품을 사는 것이 아닌, 구매행위가 즐거운 사회활동의 하나가 되도록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부르조아들이 사용하는 백화점처럼 소비를 단순한 상거래에서 소비자와 상품간의 직접적인 관계로 전환시켜 놓기도 했다. 광고를 통해 최신의 새 유행 상품을 합리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영화 같은 최신의 기술도 보여주고 X-ray 기계나 축음기 같은 새로움 발명품들을 전시하기도 했다.

    서기 1870년 이후 백화점 종업원들은 점점 여성화되어 젊은 여성들에게 영예로운 직업의 기회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보수가 낮고 근무 시간이 길었지만 최신의 유행상품과 고소득 고객을 상대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자존심은 대단했다.

4. 파리세계박람회(1855-1900)

    19세기 후반 파리는 다섯 차례의 박람회를 개최하여 수백만 명의 방문객을 유치하고 파리를 기술과 무역, 관광의 중요한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 박람회들을 통해 엄청난 강철 구조물을 전시하고, 마법과 같은 기계류와 기계 설비를 보여주며기술과 산업생산을 예찬 했다.

    제1회국제박람회는 1855년 나폴레옹III세 때 샹제리제 근처 공원에서 개최되었다. 이 박람회는 1851년에 있었던 런던 박람회 영향을 받은 것으로, 프랑스 문화와 산업이 달성한 성과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특히 이 박람회를 위해, 보로도 포도주 분류 시스템이 창안되기도 했다. 샹제리제 인근의 롱 프앙 극장(Théâtre du Rond-Point: 제8행정구 소재)은 이 박람회의 자취로 아직도 남아있다.

   
          -제1회국제박람회장-

    서기 1867년에 있었던 국제박람회 역시 나폴레옹III세가 주관한 것으로 마르(Champ de Mars)에 세워진 길이 490미터, 넓이 380미터의 거대한 돔형 전시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박람회를 방문한 저명 인사로는 러시아의 알렉산데II세, 독일제국의 카이저I세와 비스마르크 수상, 바바리아의 루이II세, 오토만 제국의 술탄 등이었다. 특히 술탄의 방문은 오토만 역사상 술탄으로서는 최초의 해외여행이었다. 바토 무쉬(Bateaux Mouches)는 1867년 박람회중 세느강을 유람한 최초의 유람선들이었다.


          -제2회국제박람회장-

    서기 1878년 국제박람회는 세느강 양안 즉, 샹 드 마르와 트로카데로 언덕(Trocadéro: 현재의 Palais de Chaillot 터. 제16행정구 소재)에서 개최되었다. 벨(Alexander Graham Bell)은 그가 발명한 새 전화기를, 에디슨(Thomas Edison)은 축음기를 전시했고 자유의 여신상 머리가 뉴욕으로 보내져 몸에 부착되기 전 이곳에서 전시되었다. 박람회를 빛내기 위해 오페라 가(Avenue de l’Opéra)와 오페라 광장(Place de l’Opéra)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등이 켜지기도 했다. 이 박람회에는 1천3백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였다.

  
         -제3회국제박람회장-

    서기 1889년 역시 마르에서 개최된 박람회는 프랑스 혁명 1백주년을 기념코자 한 박람회였다. 이 박람회의 가장 기념비적인 구조물은 박람회 정문에 세워진 3백미터 높이(현재는 방송탑이 추가 되어 324미터 높이)의 에펠탑(tour Eiffel)이다. 이 탑은 1930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그러나 이 탑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 – 1893: 프랑스 작가), 구노(Charles Gounod, 1818-1893: 프랑스 음악가), 가르니에(Charles Garnier, 1825-1898: 프랑스 건축가)같은 프랑스 문화계 저명인사들은 현대적 양식의 이 탑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박람회기념우표-

여러 가지 색깔의 전구로 장식하여, 시간에 맞춰 음악이 흐르도록 한 음악 분수도 처음 보는 또 다른 구경거리였다. 박람회에서 공연한 빌(Buffalo Bill, 1846-1917; 미국인 들소 사냥꾼. 쇼맨. 초기서부영화 배우)과 오클리(Annie Oakley, 1860-1926; 버팔로 빌의 Vaudeville 쇼에서 연기한 미국인 여자 명사수. 보드빌 쇼는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출현한 오락 연극)는 많은 관객을 불러들였다.


         -애니 오클리-

    1900년에 개최된 세계박람회는 세기가 바뀌는 걸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박람회 역시 샹 드 마르에서 개최되었고 5천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했다. 


        -1900년세계박람회장-

에펠탑과 더불어 세계 최대의 회전바퀴(Grande Roue de Paris)가 등장하였는데, 높이 1백미터의 이 회전 바퀴에는 한번에 1천6백 명을 태울 수 있는 40개의 승강차가 달려 있었다. 

 
            -회전바퀴-

전시장 안에는 디젤(Rudolph Diesel, 1858-1913: 디젤 엔진을 발명한 독일의 엔지니어)이 새로운 엔진을 전시했고, 세계최초의 에스커레이터가 운영되기도 했다. 박람회와 함께 올림픽이 개최되었는데 이 파리 올림픽은 그리스를 벗어나 개최된 최초의 올림픽 경기였다. 이 박람회는 또한 새 양식의 예술(Art Nouveau: 건축, 응용미술 특히 장식 미술 등 분야의 새로운 양식의 예술)을 소개하여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박람회의 유산인 큰 궁(Grand Palais: 파리 제8행정구 샹제리제 소재. 박물관 겸 전시관)과 작은 궁(Petit Palais: 파리 제8행정구 소재. 현 예술 박물관)이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랑 팔레 -


         -쁘띠 팔레-


XVI. 제1차대전(1914–1918)

    1914년 8월 제1차세계대전 발발하자, 파리 콩코르드 광장과 동부역(Gare de l'Est)과 북부역(Gare du Nord)에서는 전선으로 떠나는 병사들의 애국적인 분열식이 있었다. 그러나 몇 주도 안 되어 독일군은 파리 동쪽 마른 강에 이르렀다. 프랑스 정부는 9월2일 보르도(Bordeaux)로 옮겼고, 루브르 박물관의 걸작 예술품들은 툴루즈로 옮겼다.


            -보르도-

    1914년 9월5일 제1차 마른 강 전투가 개시되었을 때 프랑스 군은 증원군이 절실히 필요했다. 파리의 군사 수반인 갈리니(Joseph Simon Gallieni, 1849 – 1916)장군은 수송 차량이 필요했다. 그는 버스를 비롯하여 6백대의 택시를 징발, 파리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오두엥(Nanteuil-le-Haudouin: 프랑스 북쪽 Oise 소재 마을)전선으로 6천명의 병사를 보냈다. 라이트를 켠 택시를 선두로 택시마다 다섯 명의 병사를 태웠고, 이 수송 작전은 하루가 걸렸다. 기습을 당한 독일군은 프랑스-영국 동맹군에게 격퇴되었다. 수송 병력은 소규모였지만 프랑스 군에 끼친 사기는 엄청났다. 군대와 민간의 연대를 확인한 작전이었다. 정부는 파리로 복귀했고 극장과 카페는 다시 문을 열었다.
 
  -마른 전투-

파리는 독일군의 고타(Gotha: 1차대전시 독일군의 장거리 폭격기)중폭격기와 제펠린(Zeppelins)비행선의 공습을 받았다. 파리 시민들은 장티프스와 홍역 등 전염병으로 고통을 받았고 더구나 1918~19년간 발생한 스페인 인프루엔자로 수천 명의 파리 시민이 죽었다.

 
           -제펠린-

    1918년 봄, 독일군은 다시 공세를 취해 파리를 위협하였고 대포로 공격하였다. 1918년 3월29일 생 프로테 성당(Saint-Gervais-Saint-Protais: 파리 제4행정구 소재)에 떨어진 폭탄으로 88명의 신도가 현장에서 죽었다. 폭격의 조짐이 보이면 사이렌을 울려 시민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1917년 6월29일 미군이 도착하여 프-영 연합군과 합류하였다. 이에 따라 독일군은 다시 퇴각했다. 1918년 11월11일 휴전이 선포되었다. 11월17일 수만 명의 파리 시민들이 샹제리제에 모여 알사스(Alsace: 라인강 상류 독일, 프랑스, 스위스 접경지역)와 로렌(Lorraine: 프랑스 북동부 독일 접경지역) 두 곳의 영토 회복을 축하했다. 12월16일에는 미국 윌슨(Woodrow Wilson)대통령을 위한 대규모 시민 환영대회가 빌(Hôtel de Ville)에서 있었다. 1919년 7월14일에는 연합군의 승전을 기념하는 분열식이 샹제리제에서 있었고 많은 파리 시민들이 참가하였다.


          -알사스 콜마르 시-
  

1. 시민 생활/Civilian life

    전쟁 기간 파리 시민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개스, 전기, 석탄, 빵, 버터, 밀가루, 감자, 설탕은 엄격한 배급제였다. 소비자 협동 단체들이 생기고 자치단체 별로 채소밭을 가꾸기도 했다. 1916~17 동절기에는 석탄이 부족했다. 시 외곽 특히, 13, 14, 15, 18행정구는 국방 산업의 중심지가 되어 트럭, 대포, 앰뷸런스, 탄약 등의 생산 기지가 되었다. 파리 교외 빌랑쿠르(Boulogne-Billancourt)의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는 탱크를 만들었고, 자블(Javel)에 있던 새 공장은 포탄의 대량 생산 기지였다. 전후 이 공장은 시트로엥 자동차 공장이 되었다가 그 후 시트로엥 공원(Parc André Citroën)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공장의 남자들은 징집되어 전선으로 갔음으로 그들의 자리는 여자들과 아프리카나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온 식민지 사람들이 메꾸었다. 이들은 정부의 면밀한 감시를 받았다. 사크레(Union Sacrée: 1차대전 기간 중 반정부라던가 파업 등을 하지 않는다는 좌파와 합의한 정치적 휴전)라고 알려진 합의 하에 모든 계층은 전쟁을 지지하고,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정부가 효율을 강조하고 군수품 공급에 최대의 노력을 기우리자 노동자 계층은 소비자 권리를 그때까지의 상식에 맡겼다. 그렇게 해서 정부는 파리시민들을 위해 기초식품이나 주거, 연료를 공급하였다. 매점매석은 시민들이 힘을 합하여 싸워야할 악행이었다. 그러나 1917년 의류공장, 백화점, 은행, 탄약공장 여종업원들의 5주간에 걸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이 있었다.

  
            -탄약공장 여성근로자들-

XVII.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1919–1939)

    1차대전 후 실업이 증가하고 물가는 치솟았다. 배급제는 계속되었다. 파리에서는 가족 당 하루 빵 배급량은 3백그램이었고, 육류 배급은 주 4일만 했다. 1919년 7월21일 총파업이 일어나 시가 마비되었다. 프랑스 공산당과 사회당은 영향력 확대를 위해 노동자들과 합세하여 싸웠다. 미래의 월남 지도자인 호치민은 1919년부터 23년까지 파리에서 일을 하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공부하였다. 미래의 세네갈 초대 대통령 레오폴드 셍고르는 1923년 파리에 유학을 왔고, 대학교수가 되었고 마침내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파리 주변의 요새들은 1920년대에 모두 철거되었고, 그 대신 그 자리에 수만 채의 7층 주택을 건설하여 저소득 노동자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지지자들이었다. 그 결과 부르즈와적인 파리 중심부는 급진적인 좌익에 포위가 되었다. 한편 파리 중심부에는 특히 1931년 식민지 박람회(Exposition coloniale internationale: 프랑스 식민지 문화 박람회)를 계기로 많은 박물관들이 새로 건설되었다. 이 박람회는 성공적이었던 지난 박람회들에 비해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1. 예술

    전후의 어려운 시대였지만, 파리는 소위 “광기의 시대(les années folles: 사회적, 예술적, 문화적으로 풍요했던 프랑스의 1920년 대. ”노도의 시대“ 라고도 함)”를 맞아 예술의 수도로서 그 면모를 다시 찾았다. 1925년 파리는 현대산업 박람회(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décoratifs et industriels modernes)를 개최하였고, 이 박람회에는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 – 1965: 화가, 도시계획가, 현대건축의 선구자)같은 예술가들이 참가하였다. 이 격동의 시대에 열정적인 파리 예술은 그 중심지가 몽마르트로부터 라스페 대로(Boulevard Raspail)교차로 가까운 몽파르나스에 있던 조키(Le Jockey: 232 Bd Raspail, 75014 Paris), 돔(Le Dôme: 108 boulevard du Montparnasse, 75014 Paris), 롱통드(La Rontonde: 105 boulevard du Montparnasse, 75006 Paris)카페 등으로 옮겨졌다가 1927년 이후로는 쿠폴(La Coupole: Boulevard du Montparnasse, 75014 Paris)이 그 중심지가 되었다.


          -카페 롱통드-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1882-1971), 예이츠(W. B. Yeats, 1865-1939),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 -1972)등을 비롯하여 전 세계로부터 온 화가, 작가, 시인들이 페트(fête: 자선 모금이 목적인 전통적인 야외 축제)운동에 참가하였다. 파리는 다다이즘(Dadaism: 20세기초 유럽의 전위 예술 운동. 마르셀 뒤상의 뉴욕 전시회에서 비롯된 이 운동은 취리히를 거쳐, 파리에서 번성하였음)이나 초현실주의(Surrealism: 1차대전 후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아 전개된 유럽 문화 운동)같은 새로운 예술 운동의 요람이었다. 1928년 파리를 방문한 거쉰(George Gershwin,1898-1937: 미국의 작곡가, 피아니스트)은 머제스티크 호텔(Hotel Majestic: 파리 제16행정구 Avenue Kléber 에 소재)에 머물며 에트왈르 광장 주변을 달리는 택시의 경적음을 잡아, 교향곡 형식의 재즈(Symphonic Jazz)인 "파리의 아메리카 인“을 작곡하였다.

    재즈는 흑인 공동체로 하여금 그들의 문화가 혁신적이고 문명적이라는 걸 보여주기도 했지만 또한 원시성과 성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베이커(Josephine Baker, 1906- 1975: 미국 태생의 흑인 프랑스 영화배우, 레지스탕스, 인권운동가)는 샹젤리제 극장에서 이러한 주제를 잘 살린 공연을 통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파리의 남성들과 유색의 여인들이 한 팀이 되어 연기한 비긴 무용(Beguine: 서인도 제도 Martinique 섬 원주민의 춤)은 재즈와는 다른, 그들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원천이었다. 이 같은 공연은 흑인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자부심과 그들의 인종적 사기를 앙양시켜 준 하나의 예였다.


      -조세핀 베이커-

2. 대공황 시기의 파리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파리도 어려움과 우울한 시대를 맞았다. 인구도 줄어 1921년의 2백9십만에서 1936년에는 2백8십만 명이었다. 시 중심부 행정구는 20%이상의 인구가 줄어든 반면 시 외곽은 10%의 증가를 보였다. 파리의 낮은 출산율은 러시아, 폴란드, 독일, 동유럽, 중유럽, 이태리, 포르투갈, 스페인 등으로부터의 이민으로 충당되었다. 파업과 시위, 공산주의자 등 극좌와 극우 간의 대결로 파리의 정치적 긴장은 고조되어 갔다.

 
         -대공황-

 이 같은 긴장에도 불구하고 파리는 1937년 또 다른 세계 박람회(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et Techniques dans la Vie Moderne)를 개최하였다. 장기간(5월부터 11월까지)개최된 박람회였다. 


      -1937 파리 국제박람회-

마르(Champ de Mars)와 세요 언덕(Colline de Chaillot) 등 세느강 양 안이 개최 장소였다. 테라스를 거대한 물 대포 분수로 장식한 세요 궁(Palais de Chaillot)은 토쿄 궁(Palais de Tokyo: 제16행정구 소재)과 함께 박람회 본 전시장이었다. 토쿄 궁은 현재 그 오른쪽 날개 동에 파리 현대 미술관(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이 자리잡고 있다.


              -세요 궁-


소련관 위에는 망치와 낫이, 독일관 위에는 독수리와 나치 철십자가 놓여져 전시장 가운데를 중심으로 두 전시관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파리의 정신은 국가 간 화합이었으나 마주보며 상대방을 압도하려는 이 두 나라 전시관은 1930년 말 파리 자체의 여러가지 문제 이외에도, 위협적인 이 두 경쟁자들로 인해 파리가 어두움에 휩싸이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상징물이었다.

 
         -소련관(우), 독일관(좌)-

XVIII. 나치 점령과 해방(1940–1945)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프랑스는 대독일 선전포고를 하였다. 프랑스의 방어 전략은 매우 수동적인 것으로 프랑스 군은 다만 독일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3만 명의 파리 어린이들을 지방으로 피신 시켰고 시민들에게는 방독면이 배급되었으며, 시 전역에 방공호가 설치되었다. 루브르를 비롯한 박물관들의 중요 예술품들은 롸르 계곡(Val de Loire; 프랑스 중부를 흐르는 롸르강 중부 유역의 길이 280Km에 달하는 계곡)등 여러 곳으로 옮겼고, 중요한 건물들은 모래주머니로 방어벽을 쌓았다. 프랑스 군은 마지노 선( Ligne Maginot: 이태리, 스위스, 독일, 룩셈부르크, 벨지움과 프랑스의 국경이 맞닿은 선을 따라 건설한 요새)을 따라 대기했다. 그러나 파리의 카페와 극장들은 문을 열고 있었다.


             -마지노선-


    1940년 5월10일 마침내 독일은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독일군은 마지노 선을 피해 영.불 해협 쪽으로 나아간 다음 파리를 향해 진군했다. 파리는 전투지역으로부터 온 피난민들로 가득했다. 6월2일, 시트로엥 자동차 공장에 대한 독일 공군의 폭격이 있었다. 6월10일 프랑스 정부는 파리를 포기하고 투르(Tours)로 갔다가 보르도(Bordeaux)로 옮겼다. 6월12일 파리 시는 항복을 하고, 14일 독일 군이 입성하여 개선문으로부터 샹제리제를 지나는 군사분열식을 하였다. 24일에는 정복자 아돌프 히틀러가 파리에 도착하여 여러 관광지를 방문하였고, 나폴레옹 무덤에 경의를 표하였다.

 
          -파리 점령 독일군-

    나치 점령 하에서 프랑스는 비시정부(Régime de Vichy, 1940-1944: 필립 페텡 원수가 이끈 나치 괴뢰정부. 권위적이고 반외국인, 반유대인적이었음)가 들어서 모든 정부 건물에는 나치 깃발을 게양했다. 파리의 주요 거리 이름을 독일어로 표시했고 표준시는 베를린을 따랐다. 머제스틱(Majestic Hotel: 19 Avenue Kléber 소재)호텔은 프랑스 주둔 독일 점령군 사령관의 관저가 되었고 독일군 정보기관(Abwehr)은 루테티아(Hôtel Lutetia: 45 Boulevard Raspail)를 차지했다. 



      -루테티아 호텔-

독일 공군은 리츠 호텔(Hôtel Ritz; 파리 중심부 제1행정구 소재)을, 해군은 마린 호텔(Hôtel de la Marine: 콩코르드 광장 소재)을 차지하였고 비밀경찰(Gestapo)은 암흑가인 로리스통(93 Rue Lauriston)의 한 건물을 본부로 했다. 주둔군 사령관은 그후 리볼리 거리의 뫼리스 호텔(Hôtel Meurice)로 옮겼다. 독일군 병사들을 위해 마련된 극장이나 카페가 있었지만 장교들은 리츠(Ritz), 맥심( Maxim's), 쿠폴(La Coupole)등과 같은 고급 식당에서 즐겼고 프랑-마르크화 환율은 독일군에게 유리하도록 고정되어 있었다.

 
        -로리스통 93번지-

독일군 점령이란 다름 아닌 혼란과 궁핍, 모욕을 뜻하는 것이었다. 저녁 아홉 시부터 이튿날 새벽 다섯 시까지 통행금지가 실시되었다. 밤이 되면 암흑으로 바뀌었다. 1940년 9월부터 식품, 담배, 석탄, 의류의 배급제가 실시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배급량은 줄어들었고 물가는 치솟았다. 수백만에 달하는 파리 시민들이 파리를 떠나, 먹을 것이 있고 독일군이 드문 시골로 피신을 하였다. 프랑스 신문과 방송은 오로지 독일의 선동선전 뿐이었다.

    유대인은 노란색 다윗의 별을 걸도록 강제되었고, 특정의 일이나 장소 출입이 금지되었다. 1942년 7월 16~17양일간 나치 독일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 경찰은 4천51명의 어린이와 5천82명의 여성을 포함한 1만2천884명의 유대인을 체포하였다. 미혼자나 아이가 없는 부부는 파리 북부 드랑시(Dranchy; 파리 북동부 교외 마을)로 압송되었고, 또 다른 7천명은 파리 제15행정구 디베르(Vélodrome d’Hiver: 제15행정구 Rue Nélaton가)로 보내져 그곳 스타디움에서 5일간을 머무른 후 아유스비츠 수용소로 보내졌다.

    나치 점령에 대한 최초의 저항은 1940년 11월11일 파리 학생들에 의해서였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비밀 결사와 조직망이 결성되어 공산당이나 런던에 있던 드골 장군(Charles André Joseph Marie de Gaulle, 1890 – 1970)에게 충성하기도 했다. 그들은 벽보를 붙이든가 지하 언론을 조직하고 독일군 장교나 사병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들에 대한 독일군의 반격은 신속하고 거칠었다.

    파리는 런던이나 베를린처럼 심한 공습을 받지는 않았지만, 파리 교외의 공장이나 철도는 자주 공격 목표가 되었다. 1944년 4월20~21 양일간 있었던 파리 제18행정구의 샤펠(La Chapelle)철도역에 대한 야간 공습으로 670명이 죽었고 수 백 채의 빌딩이 파괴되었다.

    1944년 6월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이 있었고 두 달 후 독일군 방어선을 뚫고 파리로 진격하였다. 연합군의 진격에 따라 레지스땅스가 조직한 파업으로 철도 운송이 마비되었고 파리 경찰과 공공서비스가 중단되었다. 8월19일에는 파리 전역에 총파업을 하라는 레지스땅스의 지령이 있었다. 파리 심장부의 경찰서와 공공건물은 레지스땅스가 점령을 했다.  오트크로키(Philippe François Marie Leclerc de Hauteclocque, 1902-1947)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제2기갑사단과 미제4보병사단이 8월25일 파리에 입성하여, 시민들의 열광 속에서 시내 중심가에서 만났다. 


          -미군 파리 입성-

독일군 파리점령군 사령관인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 1894-1966)는 파리의 기념물들을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고 8월25일 항복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파리를 구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하나 또한 레지스땅스로 인해 파리를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기념물 보호 행동은 불가피했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콜티츠- 

    1944년 8월26일 드골 장군의 파리에 입성했고, 노트르담으로부터 샹제리제를 향하는 분열식을 거행하여 테 데움(Te Deum;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성가를 부르며 행하는 짧은 예배)을 기념하였다. 8월29일, 전날 밤 불로뉴(Bois de Boulogne; 제16행정구 소재 대공원)에 진주해 있던 미제28보병사단 전 병력은 24종대로 개선문과 연결되는 오슈 가(Avenue Hoche)를 지나 샹제리제에 이르는 대규모 분열식을 거행하였다. 이 보병사단의 병력과 차량은 파리를 지나 파리 북동부 공격 명령을 하달 받은 지점까지 행군하였다.



        -드골장군 파리 입성-


XIX. 전후(1946–2000)

    1970년대 중반까지 파리는 화재로 그을린 건물, 건물의 균열, 벗겨진 페인트 등 전쟁이 가져온 파괴와 고통이 그대로 남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하우스만의 시대처럼 파리는 다시 수리, 재건되었다.

    파리의 해방과 종전이 되었다고 해서 파리 시민들의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빵 배급은 1948년2월까지 커피, 식용유, 설탕, 쌀 배급은 1949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파리의 주택들은 낡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1954년 현재 파리의 아파트 35%는 1871년 이전에 세워진 것들이었다. 파리 아파트의 81%가 욕실이 없었고 51%는 자체 화장실이 없었다. 집값은 비쌌고 공급량도 부족했다. 1950년 프랑스 정부는 시외곽 교외에 저소득층을 위한 대규모 아파트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946년까지 파리 인구는 아직 1936년 수준에 이르지 못했고, 1954년에는 이민자 13만5천을 포함하여 2백8십5만에 이르렀다. 이민자는 알제리아, 모로코, 이태리, 스페인으로부터 온 사람들이었다. 중산층의 교외로의 이탈이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1960년대와 70년대 기간에는 파리 인구가 줄었고(1962년 2백75만3천, 1972년 2백3십만), 80년대 들어서 안정(1982년 2백16만8천, 1992년 2백15만2천)되었다.

    전쟁의 상처를 크게 입은 파리는 세계의 도시로서 과거의 위상을 찾을 수 있을 지가 의문이었다. 1970년대까지 파리 시민들은 이에 대해 많은 걱정을 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있었던 현대화 계획이 무너져 내린 삶의 질을 회복해 주리라 믿지 않았고 그 눈부신 영광이 빛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1940년대와 50년대 파리 정치는 말 그대로 혼란 그자체였다. 1950년 12월의 총파업으로 전기가 끊기고 파리 메트로 운행이 중단되었다. 1948년과 1951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시위로 거리에서 경찰과의 전투가 있었다. 알제리아 독립투쟁과 알제리아 거주 프랑스인들의 레지스탕스로 인해 1961~1962년 간에는 많은 폭발 사건이 있었고 파리에서는 시위군중과 경찰간에 폭력적인 대결이 있었다. 전후 심각한 분열을 보였던 제4공화국은 1958년 붕괴되었고 신헌법이 채택되었다. 신 정부가 구성되어 드골이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68년 5월 세느강 좌안에서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5월2일 라틴 쿼터에 바리케이트와 적색기가 출현하고 학생들이 대학 건물을 장악했다. 5월13일이 총파업으로 인해 시의 대부분이 폐쇄되었다. 1968년 5월30일 드골 대통령을 지지하는 1백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시위가 샹제리제에서 있은 후 파리의 데모는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파리의 문화생활은 생 제르멩의 플로르(Café de Flore: 파리제6행정구 소재), 리프(Brasserie Lipp: 파리 제6행정구 소재), 마고(Les Deux Magots: 파리 제6행정구 소재)같은 카페들을 중심으로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나 보바르(Simone de Beauvoir, 1908- 1986)같은 지성인들이 대중과의 대화를 가졌다. 루즈(La Rose Rouge)나 타부(Le Tabou: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모였던 지하 바) 같은 나이트클럽도 있었다. 비쳇(Sidney Joseph Bechet, 1897-1959: 미국인 재즈 음악가)이나 비앙(Boris Vian, 1920-1959: 프랑스 시인겸 가수, 트럼펫 연주가)이 이끈 재즈나 비법(Bebob: 1940년대 중반 출현한, 기존의 빅 밴드 재즈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새로운 재즈 양식. 5인 이내의 연주자로 구성되었음)등 새로운 양식의 유행 음악이 등장하기도 했다. 1847년에는 1937년 세계박람회의 도쿄 전시관 건물에 파리현대미술관(Musée d'Art Moderne de Paris: 파리 제16행정구 소재)이 문을 열었다. 

 
        -파리 현대미술관-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 1905 -1957)가 이끄는 파리의 디자이너들이 다시금 파리를 유행의 도시로 바꾸어 놓기도 했다.


      -디오르-

    프랑스 혁명 이후 파리 시장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적이 없었다. 나폴레옹이나 그 후계자들은 마음대로 파리 시장을 임명하였다. 1975년 12월31일 데스텡(Valéry René Marie Georges Giscard d'Estaing, 1926-2020)대통령 정부 하에서 법이 바뀌어, 1977년 선거에 의해 전임 수상 시라크(Jacques René Chirac, 1932-2019)가 파리시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1995년까지 18년간을 파리 시장으로 재임하였고 그후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의 후임 시장은 우익의 티베리(Jean Tiberi)였다.


   
           -데스텡 대통령-


1. 대통령들의 파리 도시 계획

    제5공화국 대통령들은 누구나 파리에 업적을 남기고 싶어 하여 모두들 “위대한 과업(Grands Travaux)”을 시작하였다. 초대 대통령 드골은 아름다우나 오래된 알레(Les Halles)시장 대신에, 륑지스(Rungis)에 새로운 중앙 시장을 건설했다. 그러나 드골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문화장관 말로(Georges André Malraux, 1901-1976; 프랑스 소설가)가 초안을 잡은 말로 법(Malraux Law: 오래된 아파트를 개인이 복원復元하는 경우 그에 소요된 비용을 면세하는 법)이었다. 노트르담 사원이나 기타 파리의 중요한 건물의 수세기에 걸친 때를 깨끗이 닦아내어 그 본래의 색깔을 되찾았다.

    퐁피두(Georges Jean Raymond Pompidou, 1911-1974) 대통령의 주요업적으로는, 제4행정구 보부르 소재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이다. 이 곳은 현대 예술품 전시를 위한 초현대식 전시장으로 그 파이프 기둥이나 에스커레이터 기타의 내부 장치가 외부에 노출되어 있다. 


          -퐁피두 센터-

퐁피두의 후임자인 데스텡 대통령은 19세기 예술품 전시를 위해 도르세 철도역(Gare d'Orsay)을 미술관으로 바꾸었다. 이 미술관은 1977년 미테랑 대통령 때 문을 열였다. 그는 또 과거 도살장이었던 빌레트 공원(Parc de la Villette)의 건물을 철거하고 1986년 그 자리에 과학, 산업 박물관(Cité des Sciences et de l'Industrie)을 세우기도 했다.



       -과학, 산업 박물관 -

    14년간 집권한 미테랑( François Mitterrand,1916-1996)대통령은 나폴레옹III세 이후 어느 국가 수반보다도 보다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가 있었다. 그의 “위대한 과업”으로는 아랍 문화재단(Institut du Monde Arabe; 아랍문화 소개를 위한 프랑스-아랍18개국 공동 설립 문화재단),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이 있고,  


      -국립도서관-

1989년에는 프랑스 혁명2백주년 기념을 위한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Opéra Bastille: 파리 제12행정구 소재), 재무성 신축 건물 역시 1989년에 문을 열었다. 

 
       -Opéra Bastille-

같은 해에 라 데팡스에 라데팡스 아치(La Grande Arche de la Défense: 112미터 높이의 사각형 아치)가 세워졌다.


         -라데팡스 아치-


 무엇보다 유명했던 프로젝트는 “위대한 루브르” 사업으로, 박물관 대부분과 지하 전시장을 개축하고 전면에 페이(Ieoh Ming Pei, 1917-2019: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유리 피라밋을 세운 일이었다.


         -유리 피라밋-

   전후 파리는 1914년 종말을 고한 “아름다운 시기” 이래 가장 큰 개발사업을 수행한 것이다. 파리 교외는 계속 확대되어 갔고, 라데팡스는 비즈니스 타운이 되었다. 메트로를 보완하기 위하여 고속 지하철(PER)이 건설되어 먼 교외까지 운행되었다. 1973년 파리 외곽을 도는 고속 순환도로도 완성되었다.

2, 도시 외곽의 위기

    1970년대 파리 교외(특히 북부, 동부 외곽)는 공장들이 문을 닫거나 딴 곳으로 이주함으로써 탈산업화가 진행되었다. 한 때 번성했던 마을들은 아프리카와 아랍으로부터 온 이민자들의 빈민굴이 되었고 고실업의 온상으로 변했다. 그때 파리 서부, 남부 교외는 전형적인 제조업을 벗어나 고부가가치 하이테크 산업으로 바뀌면서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서 1인당 소득 최고의 지역이 되었다. 이로 인한 북동부 지역과 남서부 지역 간 소득 격차는, 북동부 지역 젊은 주민과 경찰 간에 주기적인 충돌을 불러오고 있다. (C).

Written by Hung S. Park


Comments

  1. 베토벤님의 파리 이야기를 읽으니 다시 가서 살아보고 싶은 곳..
    파리 이야기를 하자면 밤을 지새워도 모자랄 듯합니다.

    파리의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는 센 강 한가운데에는 작은 섬 두 개가
    이어져 있습니다. 생 루이 섬과 시테 섬이죠.
    시테 섬은 흔히들 알고 있는 노트르담 성당과 생트 샤펠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많이들 방문합니다.

    파리 시내에서 생 루이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
    생루이 섬으로 들어와 시테 섬으로 연결되는 다리인
    생 루이 다리까지 걷는 데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아요.
    시테 섬도 굉장히 작은 섬이지만, 생 루이 섬은 그보다도
    더 작은 곳이기 때문이죠.

    생 루이 성당 말고는 유명한 유적지가 많지는 않지만,
    시인 보들레르도 생루이 섬에서 3년간 살았고,
    로뎅의 연인 까미유 끌로델도 베르사유 궁전의 건축가였던
    루이 르보도 오랫동안 살았던 곳이기도 하죠.

    통행이 제한되어 있어서 걷기에 좋은 곳이고,
    세느강변을 따라 산책로도 있습니다.
    섬 안에는 지하철역은 없고 버스 정거장이 2개있죠.
    거리는 차가 많이 다니지 않고 아기자기한 빵집, 카페,
    식료품 점을 구경하다 보면 금방 시테 섬이 보입니다.
    시테 섬으로 들어가면 노트르담 대성당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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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노트르담 쪽을 지나 센 강을 따라 걷다가 보면
    금방 생트 샤펠에 도착합니다.
    생트 샤펠은 성스러운 예배당이라는 의미로
    1240년대에 만들어진 2층짜리 예배당이죠.
    성당의 규모 자체가 크지는 않지만 형형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생트 샤펠에서 나와 돌핀 광장을 지나면
    새로운 다리라는 뜻의 퐁네프 다리가 보입니다.
    다리는 이름과 달리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지요.

    퐁네프를 건너 센 강 남쪽으로 건너오면 생루이 섬과
    시테 섬과는 다른 매력의 생제르맹 지구가 나온답니다.

    생제르맹 지구는 샌드위치나 케밥같이 가격대가 낮은
    길거리 음식부터 고급 진 파인 다이닝까지 다양한
    식당들이 있답니다.
    식사 후에는 카페 드 플로르나 레 두 마고 와 같이
    파리를 대표하는 유서깊은 카페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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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카뮈,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피카소 등
    우리가 잘 아는 예술가와 문인들이 이곳에서
    서로 교류하며 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하죠.
    생텍쥐페리, 헤밍웨이가 소설을 구상한 곳으로도
    유명하고요.

    두 카페 모두 20세기 프랑스의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의 휴식처였으며, 수많은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에게도 사랑받고 있습니다.
    날씨만 좋다면 야외 자리에 앉아 파리 거리의
    정취를 함께 느껴보는 것도 정말 좋죠.

    불어를 배우기 위해 매일같이 시내로 나갔던
    저 또한 수업 후에 다른 나라 유학생들과 함께
    이 유서깊은 카페의 알 베르 까뮈의 자리에
    앉아서(그 당시엔 탁자마다 누가 왔던 자리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한잔의 커피와
    한조각의 쿠키를 먹으면서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되어
    감명 깊어했던 시간들이 떠오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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