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The Holoca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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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Holocaust 또는 희브리어로 “파멸” 또는 “대 재난”을 뜻하는 Shoah)는 제2차세계대전 중 유럽 유대인(기원전 1세기 로마제국의 성립 이전 이미 중근동 지역으로부터 유럽으로 이동한 유대인의 후손)에 대한 대학살을 뜻하는 단어이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과 그 동조자들은 독일 점령 하에 있던 유럽 전역에서 6백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하였다. 이 같은 학살은 포그롬(Porgrom; 나치가 선동한 폭력적인 대중에 의한 대 유대인 테러)과 대량 학살의 형태로 자행되었다. 유대인 멸종이라는 정책에 따라, 나치 점령 하 폴란드의 아우슈비츠(Auschwitz-Birkenau), 벨제쓰(Bełżec), 첼름노(Chełmno), 마이다네크(Majdanek), 소비보르(Sobibór), 트레블링카(Treblinka )등에 설치된 나치 집단 수용소에서의 강제 노동, 가스 실, 가스 차량 등을 통한 학살이었다.
유대인 학살은 단계적으로 행하여졌다. 1933년 1월30일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되면서 독일 정부는 정치적 반대자 및 “달갑지 않은 자”들 처리를 위해 1933년 3월22일 다하우(Dachau)수용소를 시작으로 일련의 집단 수용소를 건설하였다. 같은 해 3월24일 히틀러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하는 전지전능 법(Ermächtigungsgesetz)이 통과되면서 독일 정부는 시민 사회로부터 유대인 격리를 시작하였다. 4월에는 유대인에 대한 사업허가를 거부하는 조치가 있었고, 1935년 9월에는 누렘베르크 법(Nürnberger Gesetze; 반유대인 법)이 제정되었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8개월 후인 1938년 11월9일과 10일 이틀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전역에 걸쳐 소위 “깨어진 유리창의 밤(Kristallnacht)”이라고 불리는 유대인 사업체와 건물에 대한 약탈과 방화가 있었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정부는 유대인 분리와 통제를 위한 유대인 거주구역(Ghettos) 건설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나치 점령 하 유럽 전역에 걸쳐, 수천 곳에 유대인 수용소가 세워졌다. 1942년 1월 베를린에서 개최된 반제회의(Wannsee Conference; 베를린 교외 Wannsee에서 개최된 나치 고위 관리들과 SS( Schutzstaffel; 나치 준군사보안대))회의에서는, 나치가 “유대인 문제에 대한 마지막 해결책”이라고 한 유대인 멸종정책의 정점이었던 게토로의 유대인 격리 문제가 논의 되었다.
폴란드 마이다네크 수용소
독일 군대가 동유럽을 장악함에 따라, 반 유대 조치는 급진성을 띄기 시작했다. 나치당 고위 지도자로부터의 지시와 비밀경찰의 협조 하에, 독일 내에서는 물론 나치 점령하의 유럽 전역에 걸쳐, 그리고 독일 동맹국들의 영토에서 무자비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기동타격대(Einsatzgruppen)라는 이름의 준군사처형대가 독일 정규군대와 그 동조자들의 도움을 받아 1941년 여름부터 포그롬과 무차별 사격을 통해, 1백3십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살해하였다. 1942년 여름에는, 유럽 전역의 게토에서 끌려나온 유대인들이 봉인된 화물기차에 실려 가스로 처형되기도 했다. 산 채로 수용소에 도착한 경우에는, 또 다시 가스로 아니면 강제 노동이나 매를 맞아 죽기도 했다. 또는 질병에 결려 아니면 의학 실험용 대상이 되어 죽거나 이동 행군 중 죽기도 했다. 이 같은 살육은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1945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홀로코스트 기간 중(1933-1945) 멸종의 목표가 된 건 유대인 뿐 만이 아니었다. 폴란드인, 소련인, 전쟁포로, 집시, 장애인, 정적, 종교적 반대자, 동성애자 역시 멸종 대상으로 죽임을 당했다.
I. 용어와 범위
1. 홀로코스트(Holocaust)
홀로코스트라는 어휘를 근대적 의미로 처음 사용한 예는, 오토만 터키 군대의 아르메니안 기독교도 대량 학살을 보도한 1895년 뉴욕타임스 기사이다.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이 단어는 “번제燔祭”를 뜻한다. 히브리어로는 파괴(Destruction) 또는 대재난(Catastrophe)을 뜻하는 쇼아(Shoah)라고 한다.
1941년 유대계 미국인이 “홀로코스트 전야”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가 당면한 상황을 뜻한 것이었다. 1943년 5월 뉴욕타임스는 버뮤다 회의(Bermuda Conference; 나치 치하의 유대인 문제를 다룸)를 보도하면서, 홀로코스트에 직면하고 있는 수십만 명의 유대인 문제를 언급하였다. 1968년 미국 의회 도서관은 “유대인 홀로코스트(Holocaust, Jewish, 1939–1945)”라는 새로운 장르의 분류법을 채택하기도 했다. 1978년 NBC의 미니 연속극 Holocaust로 이 어휘가 잘 알려졌고, 같은 해 11월에는 대통령 직속 홀로코스트 위원회가 설치되기도 했다. 비유대인 단체들이 자신들도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라고 주장함에 따라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 대신, Shoah 또는 Churban라는 용어를 썼다. 한편 나치는 홀로코스트가 아닌, “유대인 문제 해결을 위한 마지막 해결책(die 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는 구절을 사용했다.
2 홀로코스트의 뜻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홀로코스트를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과 그 동조자들에 의한 유럽 유대인 대학살로 정의하고 있다. 또 유대인 이외에 집시와 장애인을 포함하여,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 전 인종 그룹에 대한 국가 차원의 조직적 살인“이라는 개념 정의를 찬성하는 학자들도 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된 후 인종 청소 대상은 슬라브족, 폴란드 인, 러시아인, 집시, 장애인 등 나치가 열등하다고 본 인종들과 여호와의 증인, 공산주의자, 동성연애자 등 종교적 신념이나 행위가 비정상적이라고 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인종 그룹에 대한 학살은 유대인 학살에 비하면 일관성을 결여했다는 게 헤이에스(Peter F. Hayes; 역사 학자.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 석좌 교수)의 지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슬라브 족에 대해서는 “노예화하거나 점점 그 수를 줄이는” 정책이기는 하였으나, 한편 호의적으로 대해준 슬라브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불가리안,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일부 우크라이나인 등이었다. 이와는 달리 히틀러는 스톤(Dan Stone; 런던 대학교 역사학 교수)의 지적처럼, 유대인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II. 특징
1. 학살 국가
베렌바옴(Machael Berenbaum, 1945~; 유대계 미국인 교수 겸 랍비. 예일 대 교수)의 지적대로, 대규모 인간학살로 인해 독일은 “살인 국가”로 전락하게 되었다. 야켈(Eberhard Jäckel, 1929 – 2017; 독일 역사학자)도 1986년 쓴 논문에서, 한 국가가 하나의 민족을 전멸시키겠다는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국가 권력을 행사한 예는 역사상 처음이라고 했다. 16만5천2백 명에 달하는 독일 거주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조부모나 증조부모가 유대인이어도 모조리 죽음을 당했고, 혼혈(Mischlinge)을 알아내는 정교한 법률이 제정 되기도 했다. 유대인 여부의 식별은 관리들이 담당했고, 유대인으로 확인되면 재산을 몰수당하고, 열차에 태워져 수용소로 보내졌다. 직장으로부터의 해고는 물론, 해고된 사람은 강제노동에 동원되기도 했다. 유대인 교수와 유대인 학생은 대학으로부터 쫓겨났다. 독일 제약회사는 유대인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의약품 실험을 하고, 실험 도중 사망한 시체를 태우기 위해 화장장을 건설한 제약회사도 있었다. 죽음의 수용소에 들어온 수감자들은, 모든 개인용품을 몰수당했고, 이 물품들은 재사용이 되거나 재생을 위해 독일로 보내졌다. 독일 중앙은행은 이 중 값나가는 물건들을 세탁 과정을 통해, 정상적인 물건으로 바꾸어 놓기도 했다.
2. 의학 실험
적어도 7천여 명이 의학 실험용 대상자가 되어 실험 도중 또는 실험 후 사망했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하여 다하우 등 여러 수용소에서는 이들을 대상으로 남녀 불임 실험을 비롯하여, 전상자 치료 효과, 화학무기 효과, 새로운 백신 및 의약품 개발, 최악의 조건하에서의 생존법등을 위한 실험이 행하여졌다.
종전 후 스물세 명의 내과의사와 함께 관련 의료인들이 반인도주의 범죄 혐의로 누렘베르크 전범재판소에 회부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독일 적십자 대표, 대학교수, 병원장, 생의학 연구원들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악명 높았던 의사는 멩겔레(Josef Mengele,1911 – 1979)였다.
-멩겔레-
죽음의 사자로 불린 그는 SS 장교로, 1943년 5월30일 아우슈비츠 수용소 담당 의사가 되었다. 유전학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쌍둥이에 관한 실험을 하고 싶었고, 새로 도착한 포로들 가운데 실험 대상을 선택(가스실 아니면 강제 노동으로 보내는 결정)했다. 그가 “쌍둥이 앞으로”하면, 걸어 나온 쌍둥이는 실험 대상이 되어 이것저것 테스트 당한 후 살해되어 해부되었다. 1946년, 그의 보좌관의 증언에 따르면, 그렇게 해서 얻은 장기는 베를린 소재 인류학 연구소(Anthropological Institute in Berlin-Dahlem)로 보내졌다고 한다. 1942년부터 그 연구소 소장으로 있었던 그의 스승 페르슈어(Otmar Freiherr von Verschuer, 1896 – 1969)에게 보낸 것으로 보인다.
III. 반유대주의 기원1. 반유대주의와 국민운동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은, 예수님을 죽였다는 기독교 신학에 입각하여, 기독교도들의 증오 대상이었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로만가톨릭과 루터란 파는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여 그들에 대한 모략과 추방, 테러를 멈추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는 챔벌레인(Houston Stewart Chamberlain,1855 – 1927; 영국출신의 독일 귀화인. 철학자로서 인종편견주의자였음. 음악가 리차드 바그너의 사위)이나 라가르드(Paul de Lagarde, 1827–1891; 반유태주의를 강력 지지한 독일 성서학자) 같은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사이비 인종주의를 품고 있었는데, 유대인을 세계 지배를 놓고 아리안 족과의 결사적인 싸움을 하는 종족으로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독일 전역에 퍼져 있었다. 전문가 계층은, 인간을 동일한 유전적 가치를 지닌 동일한 인종으로 생각지 않는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고, 민족주의 파생물인 나치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도, 당연히 민족주의 운동이 말하는 반유대주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2. 1차 대전 후 히틀러 세계관
제1차세계대전(1914–1918)에서 독일이 패한 후, 많은 독일인들은 이 패전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등에 칼박기”라는 말이 떠돌았고, 이는 뒤에서 독일의 항복을 획책한 충성심 없는 정치인,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을 에두르는 말이었다. 반 유대 정서에 불을 지른 것은, 바바리아 단기 혁명정부 수반이었던 톨레르(Ernst Toller, 1893 –1939; 독일 작가. 좌익 정치지도자. 1919년 바바리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6일간 대통령 역임)가 한 것처럼, 유럽 공산당 혁명 정부의 유대인 지도자들을 지나치게 위대한 인물로 내세운 일이다. 그런 인물들에 대한 선전은 유대 볼쉐비즘을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를 하여, 독일인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나치당 기관지(Völkischer Beobachter)편집인 에카르트(Dietrich Eckart, 1868–1923; 독일의 시인, 극작가, 정치가)와 1920년대 이 기관지에 반 유대 기사를 쓴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1893-1946; 나치 정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나치 이론가)등은 나치당의 초기 반유대주의자들이었다. 로젠베르크의 대 유대인 시각 즉,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은밀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생각은,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시각에 영향을 미쳐, 히틀러는 공산주의 뒤에 숨어 이를 움직이는 힘으로 유대인을 보았던 것이다. 히틀러 세계관의 중심에는, 버겐(Doris L. Bergen, 1960~ ; 캐나다 역사학자)이 말한 “인종과 공간”에 관한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독일 아리안 족을 위한 동유럽에서의 생존 공간(Lebensraum; 1890년대와 1940년대 독일에서 급격히 확산되었던 식민지 원주민을 정착민으로 바꾸는 정책. 1차대전 중 독일제국의 지정학적 목표였고, 2차대전 중에는 나치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극단적 영토 확장 정책)확장이라는 이데올로기이다. 유대인에 대한 공개적인 증오심을 나타내는 글에서 로젠베르크는 그냥 떠도는 말을, 상투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1920년 이후 그는 유대인을 병균에 비교를 하고, 따라서 병균처럼 취급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맑시즘을 유대인의 신조로 보았고, 따라서 유대 맑시즘에 대항하여 싸울 것이며, 유대인이야말로 독일을 파괴하려고 공산주의를 만들어 냈다고 믿었다.
IV. 나치의 등장
1. 독재와 억압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되면서 나치가 권력을 장악함에 따라, 국민공동체(Volksgemeinschaft)의 재탄생을 선언했다. 나치 경찰은 국민을 두 그룹으로 분류했다. 국민공동체에 속하는 그룹은 국민의 동지(Volksgenossen)로, 그렇지 않은 그룹은 공동체의 이방인(Gemeinschaftsfremde)으로 구별했다. 적대 세력을 세 그룹으로 분류하여, 유대인과 집시는 혈통 또는 인종의 적, 맑시스트, 자유주의자, 기독교도, 일관성을 결여한 반동분자는 정치적인 적, 그리고 상습적인 범죄자, 게이,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자 등은 도덕적인 적대자로 분류하였다. 정치적인 적대자나 도덕적인 적대자는 재교육을 위해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궁극적으로는 국민공동체로 흡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종의 적”은 절대로 국민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했다.
1933년 3월에 있었던 총선을 전후하여 나치는 정적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여, 재판 없이 투옥할 수 있는 강제수용소 설치에 착수하였다. 최초의 강제수용소는 1933년 3월22일 문을 연 다하우(Dachau; 독일 바바리아 주 뮌헨 북서쪽 16Km지점)수용소이다. 처음 이 수용소는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등 정치범 수용이 목적이었다. 이어 1934년 중반쯤에 SS의 목적을 위한 수용소가 몇몇 도시 외곽에 설치되었다. 이 수용소들은 체제에 반대하는 독일인들에게 겁을 주는 수단으로도 역할을 하였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
1930년대는 전반적으로 유대인의 법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가 제한을 받은 시대였다. 1933년 4월1일, 유대인의 사업을 금지하는 입법조치가 있었다. 4월7일에는 전문직공무원법(Berufsbeamtengesetz) 제정이 있었다, 이 법에 따라, 유대인과 기타 아리안이 아닌 사람들이 공직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유대인은 변호사 자격 등 법조계에서 추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문의 편집자나 신문 소유 금지, 언론 협회 가입 금지, 농장 소유 금지 등이 법제화되었다. 1933년 3월 실레시아(Silesia; 독일-폴란드 접경지역)에서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법정에 나타나, 유대인 변호사들을 구타하는 사건이 있었다. 드레스덴(Dresden)에서는 재판 중이던 유대인 판사와 변호사가 재판정으로부터 끌려나오기도 했다. 대학생을 비롯하여 유대인 학생 수는 할당제로 통제를 받았다. 유대인 사업체는 문을 닫거나 “아리안 화”라는 명목 하에 독일인에게 강제 매각되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1933년 5만개에 이르렀던 유대인 기업은, 1939년 4월에는 7천개로 줄어 있었다. 유대인 작곡가나 작가, 예술가들의 작품은 공연이나 전시회가 금지되기도 했다. 유대인 의사는 해고되거나 퇴직을 강요당했다. 1933년 4월6일자 독일 의학 잡지(Deutsches Ärzteblatt)는 “독일인 치료는 오직 독일인이”라는 글을 실었다.
2. 단종(斷種)법
대공황으로 초래된 경제적 긴장으로, 기독교 자선단체나 일부 의료계로부터, 나치가 “생명의 가치가 없는 생명(Lebensunwertes Leben)”이라고 주장한 정신적, 육체적인 장애자 등 치료 불가능한 사람들에 대한 강제 불임 수술을 옹호하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에 따라 1933년 7월14일, 유전병환자 단종법(Sterilization Law; Aktion T4)이 통과되었다. 그해 12월21일 뉴욕타임스는 “40만 명의 독일인이 불임 수술을 받았다”라는 보도를 하였다. 의사들로부터 8만4천5백25건의 불임 수술 허가 신청이 있었고, 이 가운데 법원은 5만6천 건을 허가하였다. 독일제3제국 통치 기간 중, 이 같은 강제 불임 수술은 3십만에서 4십만 건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9년 10월1일 히틀러는 안락사법에 서명을 하였는데, 한 달 전인 9월1일 이미 히틀러 비서실장 보울러(Reichsleiter Philipp Bouhler, 1899 – 1945; 체포된 후 자살)와 주치의 브란트(Karl Brandt,1904 – 1948; 교수형에 처해짐)에게 강제 안락사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후였다. 전후 이 프로그램은 “Aktion T4”(강제 안락사에 의한 대량 학살 프로그램)로 판명되었는데, T4는 베를린 티에르가르텐가 4번지(Tiergartenstraße 4) 소재 한 건물의 주소로, 이 건물은 안락사 관련 여러 기관들의 사령부였다.
Tiergartenstraße 4T4의 강제 안락사 대상은 주로 성인이었으나, 어린이들 또한 대상이었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8만에서 10만 명에 이르는 정신 장애 성인들과 5천 명의 어린이, 1천명의 유대인 정신 장애자가 강제 안락사로 목숨을 잃었다. 안락사 센터 가운데 한 곳인 하르트하임(Schloss Hartheim; 오스트리아 Linz 시 인근 소재 성채)의 부책임자였던 레노(George Renno)의 진술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여러 곳의 안락사 센터에서 약 2만 명에 달하는 강제 안락사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마오타오젠 강제 수용소(Mauthausen concentration camp) 소장 짜이라이스(Frank Zeireis)는, 안락사의 희생자 수는 총 40만 명에 달한다고 했다. 전반적으로 보아 강제 안락사에 의한 정신 및 신체장애자 희생자는 15만 명 내외일 것으로 추정된다.
T4에 참여를 초청 받지 않았어도 많은 심리학자와 정신병원들이 T4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1941년 8월 독일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항의를 받은 후, 히틀러는 이 프로그램을 취소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장애인들은 계속 죽임을 당하였다. 의료 기관들은 연구용 시신을 계속 받을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1933년부터 1945년까지 튀빙겐 대학은 총 1천77구의 장애인 시신을 받았다. 독일 신경과학자 할레포르덴(Julius Hallervorden, 1882–1965)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4년 동안 한 병원으로부터 총 697개의 인간 뇌를 받았다. 그는 “그 뇌가 어디로부터 어떻게 왔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며, 물론 나는 그 뇌를 접수 하였다”라고 했다.
3. 유대인 추방 관련 누렘베르크 법
1935년 9월15일 독일 의회는, 누렘베르크 법(Nürnberger Gesetze)으로 알려진 제국시민법을 포함하여, 게르만 혈통과 명예 보호법을 통과 시켰다. “제국시민법”은 오직 게르만 혈통만이 독일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법이었다. 고조부모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분류되었다. 혈통보호법은, 유대인과 게르만 혈통의 결혼을 금지하였다. 그들 간의 성관계 역시 범죄로 규정했고, 유대인은 그 집 안에 45세 이하의 독일인 여성을 고용할 수 없도록 했다. 누렘베르크 법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또한 집시나 흑인 계통의 독일인에게도 적용되었다. 불가리아, 독립 크로아티아, 헝가리, 이태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비시 정부하의 프랑스 등이 이와 유사한 법을 채택하였으나, 나치 독일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광범한 반 유태 관련법을 제정 했던 것이다.
1934년 말 경에는 5만 명에 이르는 독일 거주 유대인들이 떠났고, 1938년 말까지는 독일 거주 전 유대인의 반 이상이 독일을 떠났다. 그들 가운데 교향악단 지휘자 월터(Bruno Walter, 1876-1962; 유태계 독일인.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는, 만일 그가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하는 경우, 공연장에 불을 지를 것이라는 말을 듣고 독일을 떠났다고 한다.
Bruno Walter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할 당시 미국에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다시는 독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따라 그의 독일 시민권은 박탈되고, 학회(the Kaiser Wilhelm Society, Prussian Academy of Sciences 등)에서도 제명되었다. 헤르츠(Gustav Ludwig Hertz, 1887-1975; 유대계 독일 실험물리학자)를 비롯하여, 많은 유대계 과학자들이 교수직을 포기하고 독일을 떠났다.
4. 오스트리아 합병
1938년 3월12일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 유대인 17만6천명의 90%가 비엔나에 거주하고 있었다. SS(Schutzstaffel; 인종 정책 수행 나치 준군사조직)와 SA(Sturmabteilung; 돌격 사단. 준군사조직의 폭력적인 나치 근위대)는 유대인의 상점을 습격, 자동차를 절취하는 등 폭력적인 행동을 했다. 이를 방관한 오스트리아 경찰은 이미 철 십자(Swastika)완장을 팔에 차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테필린(Tefillin; 토라 문구를 적은 두루마리를 담고 있는 가죽제의 작고 검은 상자)을 든 채, 변소나 거리 청소를 강제 당하는 등 수모를 겪기도 했다.
거리 청소 유대인
7천여에 달하는 유대인 사업체가 “아리안 화” 되었고,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법적 제한이 가해졌다. 1938년 7월, 프랑스에서 개최된 회의(Évian Conference)에는 32개국이 참가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 유대인 피난민 지원에 관해 토의하였으나, 별 성과가 없었고 참가 각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피난민 수도 늘리지 않았다. 같은 해 8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 오스트리아 SS책임자. 홀로코스트를 조직하고 실천한 주요 책임자 중 한 사람)이 비엔나 소재 유대인 추방 중앙국의 책임자로 임명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정신분석학 창시자)는, 세사라니(David Cesarani, 1956 -2015; 영국의 역사학자)의 말대로, 그를 구하려는 “상상을 불허하는 엄청난 노력” 덕택으로, 가족과 함께 1938년 7월 비엔나를 탈출, 런던에 도착하였다.
5. 깨어진 유리창의 밤
1938년 11월7일 독일 태생의 유대계 폴란드인 그린스즈판(Herschel Grynszpan)은 자신의 부모와 형제들이 독일로부터 추방당한데 대한 보복으로, 파리 주재 독일 외교관 라트(Ernst vom Rath)를 사살하였다. 이틀 후인 9일 라트가 사망하자, 독일 데사우( Dessau)시 소재 유대인 시나고그와 상점들이 습격을 당했다. 괴벨스(Joseph Goebbels, 1897 -1945; 나치의 베를린 책임자, 나치 선동선전 상)의 기록에 따르면, 히틀러는 그날 경찰력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괴벨스가 그에게 보고한 대로 “유대인들에게 독일 국민의 분노가 어떤지 한번 겪게 해야”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세사라니 말대로 살인, 강간, 약탈, 방화 등, 전례 없는 대규모 테러가 유대인에게 가해졌다.
1938년 11월9일과10일 양일간에 있었던. “깨어진 유리창의 밤(Kristallnacht)”으로 불리는 이 폭동(Porgrom)으로, 독일 전체 유대인 상점 9천개 가운데 7천5백 곳이 약탈을 당하거나 공격을 받았고, 1천 곳 이상의 시나고그가 파괴되거나 손상을 입었다. 성난 폭도들에 의해 끌려간 유대인들은 불타는 시나고그를 보아야했다.
깨어진 유리창벤스하임(Bensheim; 독일 헤센 주 마을)에서는 불타는 시나고그 주위를 돌며 춤을 추도록 강요당했고, 라오프하임(Laupheim; 독일 남부 Baden-Württemberg 주 마을)에서는 불타는 시나고그 앞에 무릎을 꿇도록 강요를 당했다. 이 폭동으로 적어도 90명의 유대인이 죽었고, 3천9백만 마르크 상당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괴벨스의 기록과는 달리, 경찰력은 철수하지 않고 있었다. 정규 경찰, 게슈타포, SS, SA가 모두 폭동에 가담을 했다. 이와 관련 히믈러(Heinrich Himmler,1900-1945; SS장교. 홀로코스트 기획자 가운데 한 사람)는 폭동에 가담한 SS에 대해 매우 화를 내었다고 한다. 유대인에 대한 테러는 물론 오스트리아에서도 있었다. 이 대규모 폭동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여, 1938년 11월11일자 런던 타임스는 다음과 같은 보도를 했다.
“어제 독일을 부끄럽게 한, 무방비의 무고한 사람들을 무차별 공격하여 구타하고 불을 지른 사건을 이 세계가 비상한 인내로 참고 견딜 수 있기 전에는, 어떤 언론 매체도 더러운 독일을 편들지 않을 것이다. 독일 당국이 이 사태의 당사자이거나 아니면 공공질서와 무뢰배들에 대한 책임이 있거나 간에, 어느 경우든 독일 당국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11월 9일에서 16일까지 3만 명의 유대인이 부헨발트, 다하우, 작센하우젠 등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몇 주 후 대부분이 석방되어 돌아왔지만, 1939년 초까지 아직도 2천여 명이 그대로 수용소에 남아 있었다. 피해의 복구에는 독일 유대인들이 공동으로 책임을 졌다. 그들은 또 10억 마르크 이상의 손해배상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유대인 재산 손상에 대해 보험회사가 지불한 보험금은 정부가 압류를 했다. 11월 12일 제정된 법은, 유대인이 남아 있는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사업체에 접근하는 일을 금지했다. “깨어진 유리창의 밤”을 계기로, 유대인의 공적 활동과 문화 활동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서둘러 독일을 떠나야했다.
6. 재정착
제2차세계대전 이전부터 독일은, 유럽으로부터 유대인 추방을 구상했다. 추방 후 그들의 가능한 정착지로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생각했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령 마다카스카르, 시베리아, 폴란드 내 두 곳의 보호지역 등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독일시온주의연합과 나치 독일정부간 체결된 하바라 협정(Haavara Agreement; 1933년 8월25일)을 통해, 독일 정부의 유대인 이주정책이 효과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이 협정에 따라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약6만 명의 유대인이, 독일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치 상품 보이콧(The anti-Nazi boycott; 1933년 히틀러의 반 유대인 정책에 대응한 독일 상품 거부 국제 운동)을 어겨가며, 1억 마르크에 상당하는 독일 상품을 구매, 팔레스타인으로 가져갔다.
V. 제2차세계대전 발발
1. 폴란드 침공
가. 게토(Ghettos)
개전 당시 폴란드에는 3백5십만 정도의 유대인이 살았고, 이 가운데 2백7십만에서 3백만 정도가 홀로코스트로 죽었다. 1939년 현재 폴란드는 미국(4백6십만 명) 다음으로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는 나라였다. 그밖에 소련에는 3백만 정도의 유대인이 있었다. 1939년 9월1일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대독일 선전 포고를 하였고, 독일은 점령 지역에서 약 2백만에 달하는 유대인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1939년 9월17일 동쪽으로부터 소련의 침공으로, 폴란드는 그 영토 일부가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7개 SS기동타격대(Einsatzgruppen der Sicherheitspolitizei)와 3천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대유대인 특수임무부대(Einsatzkommando)의 지원을 받았다. 이 특수임무부대는, 전투 부대 후방에서 일체의 반독일 요소를 뿌리 뽑는 것이었다. 폴란드에서 독일의 목표는, 폴란드 전역에서 비유대계 폴란드인을 추방한 후 그 지역에 독일인들을 정착시킨 다음, 폴란드 지도자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고, 하층 계급에 대한 교육의 거부와 유대인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서부 지역 등 그 합병 지역의 모든 유대인들을, 소위 일반정부(Generalgouvernement)라고 부른, 폴란드 중부 지역으로 보냈다. 그렇지만 “보다 쉬운 통제와 이후 추방”을 위해서라는, 1939년 9월21일자 헤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1904 -1942;SS 장교. 체코 망명정부가 밀파한 저격병에 의해 죽음)의 명령에 따라, 아직은 주요 도시 게토들에 수용코자 했다. 12월1일부터 유대인들은 “다윗의 별”을 팔뚝에 걸도록 명령을 받았다.
독일은 24명의 유대인 남성으로 구성된 행정기구(Judenrat)를 설치, 그들로 하여금 게토를 이끌도록 하여, 독일의 명령을 수행하는 책임을 지도록 했다. 1942년부터는 명령을 통해 가능하도록, 강제수용소로의 추방을 쉽게 했다. 1940년 11월에는 바르샤바에 게토가 설치되어, 1941년 초 이곳에 44만5천명이 수용되었다.
바르샤바 게토
둘째 규모의 게토로는 1940년 5월 현재 16만을 수용했던 폴란드 로드치 게토(Łódź Ghetto; 폴란드 제3도시)이다. 게토의 유대인들은, 그들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팔아, 식품과 생필품을 사들여야 했다. 적어도 50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게토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굶주림과 질병, 가난한 생활 조건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바르샤바 게토 인구는 시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했지만, 그 면적은 시 전체 면적의 2.4%에 불과하여, 게토는 방 하나당 평균 아홉 명이 살아야 했다. 1941년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사망자 수는 4만3천 명이었다.
나. 폴란드 동부 포그롬
헤이즈(Peter Hayes; 현 미국 Northwestern 대학교 석좌교수)는 독일인들이 폴란드에 홉스의 세계(Hobbesian World; 17세기 Thomas Hobbes 가 쓴 Leviathan을 말함) )를 구축하여, 그 속에서 이질적인 사람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고 했다. 소련의 폴란드 침략을 유대인들이 지지했다는 비 유대계 폴란드 사람들의 인식은, 이미 상존해왔던 반유대주의를 더욱 깊게 했고, 독일은 그 같은 인식을 악용하여 유대인의 거주지를 재배치하고 재산을 약탈하였으며, 유대 구역의 시나고그, 학교, 병원 등을 폐쇄하였던 것이다. 유대인을 돕는 사람에게는 사형 선고를 내리기도 하였다. 유대인 사냥 기간(Judenjagd)에는 첩자들을 뿌려 누가 유대인인지, 유대인을 돕는 폴란드인은 누구인지를 알아내도록 했다. 그러나 수많은 폴란드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을 도왔다. 이 과정에서 1천여 명의 폴란드인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야드 바셈(Yad Vashem;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관한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기록)은, 7천 명 이상의 폴란드인들을 “세계의 정의로운 인물(the Righteous of the world's nations; 홀로코스트 기간 중 비유대인으로서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죽음으로부터 구한 명예로운 인물들)”로 기록하고 있다.
포그롬은 나치 점령지역 전역에서 자행되었다. 1941년 6월부터 7월까지 있었던 폴란드 동부 르비브(Lviv;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포그롬에서는-당시 르비브 인구는 폴란드인 15만6천4백90명, 유대인 9만9천5백95명, 유크라이나인 4만9천 5백95명-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와 그 민병대에 의해 6천명의 유대인이 거리에서 살해되었다. 유대 여인들은 옷이 벗겨지고, 구타와 강간을 당하기도 했다. 7월2일 도착한 SS총살대 C중대(Einsatzgruppe C)는 유대인 3천명을 총살하였다.
포그롬
1941년 7월10일에 있었던 예드바브네(Jedwabne; 나치 점령 폴란드 시)포그롬에서는, 그 날 새벽 도착한 독일 게슈타포 요원들의 부추김을 받은 폴란드 남자 40명이 수백 명의 유대인을 죽였는데, 그 가운데는 마구간에 가두어 불을 질러 죽인 유대인도 3백 명 정도가 있었다. 헤이즈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 포그롬은 수발키 시(Suwalki; 폴란드 북동부 도시)가 속한 주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했던 6건의 포그롬 가운데 하나로, 이와 유사한 2백여 건의 포그롬이, 소련에 합병된 폴란드 동부 전역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2. 폴란드 내 나치 죽음의 수용소
1941년 말에 이르러 나치 독일은 폴란드 내에 아우슈비츠(Auschwitz), 벨제쓰(Bełżec), 첼름노(Chełmno), 마이다네크(Majdanek), 소비보르(Sobibór), 트레블링카 등 죽음의 수용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1942년 봄, 수용소에 가스실을 설치했다. 1942년부터 43년까지 SS는 폴란드 일반정부 지역(the General Government; 폴란드 중부 지역)의 유대인 게토를 모조리 철거한 다음(Łódź Ghetto는 1944년 중반에 철거함), 그 유대인 주민들을 유럽 전역에서 붙잡아 온 유대인들과 함께, 이들 수용소로 보냈다. 수용소는 현지 주민들에게 일자리와 암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상품을 제공해주었다. 새로운 곳에서 정착하리라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살림살이를 챙겨 왔고, 수용소는 그 물건들을 몰수하여 주민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살림살이와 함께
헤이스 교수에 따르면, 1942년부터 1943년 기간, 트레블링카 수용소 밖에는 매춘부는 물론 보석 가게와 환전소가 있었다고 한다. 1942년 말에는, 폴란드 중부 일반정부 지역으로부터 온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은 유대인은 3백만 명 이상이며, 대부분이 도착 즉시 가스실에서 죽었다.
3. 노르웨이와 덴마크 침공
1940년 4월9일 독일은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침공하였다(Weserübung 작전). 침략에 대항할 시간이 부족했던 덴마크는 쉽사리 무너졌다. 덴마크 유대인에 대한 몇 가지 조치가 취해졌다. 1940년 6월, 나치는 노르웨이를 완전 점령했다.
Weserübung 작전그해 말에는 1천8백 명의 유대인이 직장에서 추방되었고, 1941년에는 유대인의 재산은 모두 정부에 신고를 하도록 했다. 1942년 11월26일 5백32명의 유대인이 경찰에 체포되어, 새벽 4시에 오슬로 항으로 보내져, 독일 배를 탔다. 독일에 도착한 후 화물기차에 실린 그들은 아우슈비츠로 향했다. 런던 대학교 댄 스톤 교수에 따르면, 그들 가운데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사람은 아홉 명에 불과했다.
4. 프랑스와 네델란드 등
1940년 독일은 네델란드, 룩셈부르그, 벨지움, 프랑스를 침공했다. 항복한 벨지움은 나치 군정장관 팔켄하우젠(Alexander von Falkenhausen, 1878-1966; 장개석의 군사고문을 했던 독일 장군)이 통치를 했다. 그는 대부분이 독일이나 동유럽으로부터의 난민인, 9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에 대한 반유대인 법을 제정하였다. 독일은 잉쿠아르트(Arthur Seyss-Inquart, 1892-1946; 오스트리아계 나치 정치인. 전범으로 처형됨)를, 제3제국을 대표한 네델란드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잉쿠아르트
네넬란드에 부임한 그는 14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 처벌을 시작하였다. 유대인들은 직장으로부터 강제로 쫓겨났다. 유대인은 정부에 신분을 등록하도록 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1941년 2월 비유대계 네델란드 시민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항의하자, 즉시 진압을 하기도 했다. 1942년 7월부터 시작한 유대인 추방으로, 10만7천명 이상이 강제수용소로 갔고, 전쟁이 끝난 후 이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5천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이 아우슈비츠로 갔다. 1942년 7월15일 네델란드를 떠나 아우슈비츠로 간 첫 출발은 1천1백35명이었다. 1943년 3월부터 7월까지 3만4천 3백13명이 열아홉 차례에 걸쳐 소비보르 수용소로 보내졌고, 모두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프랑스에는 3십3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나치 점령지역인 북부와 비점령 지역인 남부로 나뉘어 있었다. 남부는 나치 협력 정부인 비시 정부하에 있었다. 그들의 반 이상이 프랑스 국민이 아닌,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온 난민들이었다. 나치 점령 지역인 북부는 군사 정부였으나, 남부의 비시정부에서와 마찬가지로, 반유대인 법을 정하지 않고 있었다.
유대 여인, 파리
1940년 7월, 나치 점령 지역인 북부 알사스-로렌 지역의 유대인들이 비시 정부하의 남부로 추방을 당하였다. 이에 따라 비시 정부는 프랑스 남부 지역은 물론, 신탁통치령인 튀니지아와 모로코에 반유대인 조치를 취하였다. 튀니지아의 경우, 1942년 11월 독일군과 이태리군이 도착하였을 때 유대인 인구는 약 8만5천명이었다. 이 가운데 5천명이 나치군대를 위한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The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Washington, D.C 소재) 자료는, 홀로코스트 기간 중 프랑스에서 목숨을 잃은 유대인 숫자를 7만2천9백에서 7만4천 명 정도로 보고 있다.
5. 마다가스카르 계획
프랑스 항복은 1940년 여름 마다가스카르 계획을 불러왔다. 유럽 유대인들을 이 섬으로 추방하는 문제가 검토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섬의 열악한 생존 환경은 곧 죽음을 부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1930년대 이미 폴란드, 프랑스, 영국의 몇몇 지도자들이 검토한 바 있고, 1938년부터 독일의 지도자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치 정부는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 독일 SS책임자. 홀로코스트 주역의 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같은 선택이 가능한지 조사해보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1940년 6월 프랑스가 항복한 후까지 어떤 계획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영국을 굴복 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이로 인해 유대인 해상 운송이 불가능하다는 걸 안 독일은, 1942년 2월 이 계획을 포기했다.
6.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침공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한 독일은, 한 달도 못 되어 항복을 받아냈다. 독일과 이태리, 불가리아가 그리스를 분할 점령하였으나, 멸망을 시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전쟁 이전의 그리스 유대인은 7만2천에서 7만7천명 정도였다. 전쟁 후 남은 사람은 약 1만 명으로, 이는 발칸 반도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생존율이었다
체조를 강제 당하는
유대인, 그리스
8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던 유고슬라비아는 여러 지역으로 쪼개져 북부는 독일과 항가리, 해안지역은 이태리, 코소보와 서마케도니아는 알바니아, 동마케도니아는 불가리아에 각각 합병되었다. 기타의 지역은 이태리와 독일의 꼭두각시 정부인 독립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는 파시스트 우스타세 당(Ustaše party)이 집권을 하고 있었다. 독일이 점령한 세르비아는 독일 군인 및 경찰 등 관리가 통치를 하였고, 이들은 밀란 네디치(Milan Nedić, 1878-1946; 세르비아 장군. 나치 협조자)가 이끄는 괴뢰정부를 앞세웠다. 1942년 8월 세르비아는 유대인 청소를 선언하였고, 이어 네디치 정부와 친 나치 범세르비아 파시스트 단체(Zbor)의 지원을 받은 독일군과 경찰은, 1만7천명에 달하는 거의 모든 세르비아 유대인을 죽였다.
나치는 독립 크로아티아 집권 당 우스타세에게 반유대인 정책을 받아들일 것과 유대인 처벌, 강제수용소 설치를 요구했다. 이러한 나치의 요구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1941년 4월 말, 우스타세는 모든 유대인에게 “다윗의 별”을 부착할 것을 명령하고, 10월에 들어서는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세르비아인과 집시를 처형하였다. 이처럼 크로아티아는 홀로코스트에 적극 가담하여 크로아티아 유대인 대부분을 죽였던 것이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은, 크로아티아에서 죽은 유대인을 3만1백48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토마세비치(Jozo Tomasevich, 1908-1994; 샌프란시스코 주립 대 석좌교수)는,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유고슬라비아에 있던 115개 유대교 공동체 가운데, 오직 자그레브 공동체만 살아남았다고 했다.
독립 크로아티아는, 크로아티아의 대의명분에 기꺼이 기여하는 유대인에게 명예 아리안 시민권을 약속하고, 이렇게 하면 학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나치의 반유대 정책을 피해 나가기도 했다. 태너(Marcus Tanner, 1960~ ; 영국 작가, 발칸 반도 전문가)에 따르면, 적어도 5천명의 유대인이 크로아티아에서 살아남았고, 수천 명의 유대인이 돈을 주고 “명예 아리안”시민증을 사 크로아티아를 벗어났음을 SS가 불만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툴린(Nevenko Bartulin, 1972~; 호주 New South Wales 대학 교수, 역사학자)은 합법적인 아리안 시민권을 받은 유대인은 1백 명으로 그 가족까지 합해야 불과 5백 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3만7천 명에 달했던 크로아티아 전체 유대 인구를 생각하면 어떤 경우든 살아남은 사람은 소규모였다고 할 수 있다.
VI. 소련 침공
1. 이유
1941년 6월22일 독일은 소련 공격을 개시하였다. 스나이더(Timothy Snyder, 1969~ ; Yale 대학교 교수. 역사학자)는, 이날이야말로 유럽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날로, 설명 불가능한 참화가 시작된 날이라고 했다. 독일의 선동선전 매체는 이 충돌을, 게르만 민족 사회주의와 유대 볼쉐비즘 간의 이념 전쟁으로 그리고 유대인, 집시, 저열한 슬라브 족에 대한 독일의 인종 전쟁으로 묘사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식량 생산을 위한 농토, 산업자원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큰 유전을 장악해야 했다. 마테에우스(Jürgen Matthäus, 1959~; 독일 역사학자.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 조사부장)에 따르면, 1941년 초가을부터 1942년 늦은 봄까지, 2백만에서 3백5십만에 이르는 소련군 포로가 독일군의 처형과 학대로 죽었다.
2. 대규모 총살 집행
독일군의 진격에 따라, 폴란드에서처럼 반독일 요소에 대해서는 무차별 사격하라는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의 명령이 SS 총살대에 하달되었다. 이 명령의 핵심은 지역 공산당 지도부를 분쇄함으로써 “공산당 내부와 정부 전반에 포진한 유대인과 기타 급진적 요소를 제거하여, 소련을 붕괴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세사라니(Cesarani)에 따르면, 이 시점에서 유대인 학살은 이 같은 목적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했다.
총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면, 희생자들은 옷을 벗고 귀중품을 빼앗긴 다음 총살을 당할 구덩이 가장자리에 줄을 서거나 아니면 그 구덩이에 쌓인 시체 더미로 위로 떠밀려 떨어져,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정어리 묶음(Sardinenpackung)”이라고 한 이 총살 형태는, SS장교 예켈른(Friedrich Jeckeln, 1895-1946; 소련 점령 시 SS총살대 대장. 10만 명 정도의 유대인과 집시를 총살한 책임자. 처형당함)이 처음 시작한 총살 방법으로 알려졌다.
Jeckeln베테(Wolfram Wette, 1940~; 독일 역사가, 작가)에 따르면, 독일군은 이 총살 현장에서 구경꾼으로, 사진사로, 또는 실제 사격수로서 참여 하였다고 했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그리고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서는 현지인도 깊이 관여했다. 백러시아 유대인 총살에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이 참여했고, 남부 우크라이나인 들은 2만4천에 달하는 유대인을 총살했다. 폴란드로 가 유대인 강제 수용소 간수로 일한 우크라이나 사람도 상당한 수였다.
SS기동타격대 A중대(Einsatzgruppe A; 독일 북부군 소속. 340명으로 구성된 총살대)가 독일 북부군과 함께 발틱 국가(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도착했다. B중대는 중부군을 따라 백러시아로, C중대는 남부군을 따라 우크라이나로, D중대는 11군을 따라 우크라이나 남부 지방으로 갔다. 각 중대는 6백 명 내지 1천 명으로 구성되었고, 약간의 여성 행정요원이 있었다. SS 기동타격대는 기동경찰 9개 대대와 3개 총살대(Waffen-SS), 그리고 그 동조자들과 함께 행군하면서 1941-42동계 기간 중, 거의 50만에 달하는 사람을 죽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들은 1백3십만의 유대인과 2십5만에 이르는 집시를 비롯하여, 총 2백만에 가까운 사람을 죽였다.
가장 참혹한 학살 가운데 하나는 1941년 7월에 있었던 빌니우스(Vilnius; 리투이나아 수도) 인근 포나리(Ponary; 현재의 Paneriai. 빌리우스 중심가로부터 10킬로 떨어진 지점)학살이다. SS기동타격대 B중대와 리투아니아 동조자들이 행한 이 학살에서는 7만2천명의 유대인, 8천명의 비 유대 리투아니아인과 폴란드인이 집단 총살을 당했다.
포나리 학살1941년 8월27일부터 30일까지 카미아네츠 포딜스키(Kamianets-Podilskyi; 우크라이나 남서부 도시)에서, 2만4천명의 유대인이 총살로 죽었다. 1941년 9월29-30양일간 자행된 바비야르 계곡(Babi Yar; 우크라이나 수도 Kiev 외곽)학살에서는 3만3천7백71명이 살해되었는데, 전쟁 기간 내내 독일은 이 계곡에서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였다.
3. 홀로코스트를 향하여
나치는 처음 특정 직업이나 나라 같은 조직을 위해 일 할 수 있는, 15세에서 60세에 이르는 유대인 남성 인텔리겐챠를 제거 대상으로 보았다. 그들을 “볼쉐비키 관료”나 그와 유사한 사람들로 본 것이다. 그러나 1941년 8월부터는 여성과 아이들도 죽이기 시작했다. 브라우닝(Christopher R. Browning, 1944; 노스캘로리나 대학교 석좌교수. 역사 학자)의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1941년 8월1일 SS기병 여단이 예하 부대에게 내린 히믈러의 명령(Explicit order by RF-SS)은, “모든 유대인을 총살 시켜야하고, 유대 여성은 늪으로 몰아 죽여야 한다“ 라고 했다.
아기를 안은 여인
1943년 10월6일 나치 당 지도자 회의 연설에서 히믈러는, 여성과 아이들도 총살을 시키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롱게리히(Peter Longerich, 1955~; 독일 뮌헨 대 역사학 교수)와 게를라하(Christian Gerlach; 스위스 Bern 대학교 역사학 교수)에 따르면, 여자와 아이들을 죽이기 시작한 장소와 시간은 히믈러의 말과는 시차가 있어, 이는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 학살에 현지인이 관여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롱게리히 교수가 “독일의 유대인 정책”이라고 부른 홀로코스트가, 1941년 봄부터 가을까지 점점 과격하게 되어가고 있었음을 역사가들은 인정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때 총통(히틀러)이 유럽 유대인 학살을 결정했는지에 관해서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브라우닝 교수는 그의 2004년 논문에서, 소련 침공 전에는 소련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이 없었다는 점에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2010년 롱게리히도, 1941년 7월부터 9월 사이 학살이 점점 더 무자비해지고 피학살자의 숫자가 증가했던 것은, 그렇게 하라는 “특별한 명령”이 있었던 때문이 아니고, 명령을 점점 급진적으로 해석해나갔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VII. 강제 노동 수용소
당초 독일은 강제 수용소를 정치적 반대자에게 겁을 주기 위한 장소로 사용했다. 1938년 “깨어진 유리창의 밤”이 있기 전에는, 아주 많은 수의 유대인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것은 아니다. 1942년이 지나면서, 수용소 간수들은 더욱 포악해지고 폭행과 굶주림, 빈번한 살해 행위로 피수용자의 사망률은 급증했다. 노동을 통한 몰살(Vernichtung durch Arbeit)은 하나의 정책으로, 피수용자들은 일을 하다가 죽거나, 탈진하는 경우는 곧 총살이 되거나 가스실로 보내졌다. 식품과 옷 부족, 전염병, 사소한 규칙 위반에 대한 처벌 등으로 피수용자들의 평균 수명은 3개월이었다. 작업 교대 시간은 길었고, 수시로 위험물 작업에 투입되었다.
강제 노동
수용소로의 운송은, 밀폐된 화물 차량에 피수용자를 가득 태운 후 환기도 마실 물도 없이 장기간이 소요되었다. 1942년 중반에 이르러 수용소는, 위생 검열을 위해 새로 도착하는 피수용자들에게 4주간을 대기토록 했다. 그들에게는 색깔 별 삼각형 표시를 한 죄수복을 입혔고, 이 표시는 그들이 죄수라는 뜻이었다. 정치범은 붉은 삼각형을, 여호와의 증인은 자줏빛 삼각형, 반 사회범은 검은색, 일반범죄자는 초록색, 게이는 핑크색이었다. 유대인은 두 개의 노란 삼각형을 착용했는데, 이를 포개면 여섯 개의 꼭지점을 가지는 별이 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죄수가 도착하면 바로 문신을 하여 번호를 먹였다.
VIII. 추축국
1. 루마니아
스톤(Dan Storn, 런던 대학교 교수. 역사학자)에 따르면, 루마니아의 유대인 학살은 본질적으로 독자적인 행위였다고 했다. 1940년 5월과 6월에 있었던 루마니아의 유대인 학살은 독일과의 동맹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했다. 1941년 3월에 이르러 루마니아 유대인들은 모두 그 직업을 잃었고 재산은 몰수를 당했다. 1941년 6월 루마니아는, 독일의 대 소련 공격에 동참하였다.
1941년 1월부터 6월까지 루마니아 수도 부카레스트과 이아시(Iasi; 루마니아 제2도시)에서 있었던 포그롬 폭동에서는 수천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이아시 포그롬
프릴링(Tuvia Friling, 1953; 이스라엘 Ben-Gurion 대학 교수)의 2004년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이아시 폭동에서 희생된 유대인은 1만4천8백50명이었다. 1941년 10월18일부터 1942년 3월까지 있었던 오데싸(Odessa; 흑해에 면한 우크라이나 도시. 2차대전시에는 루마니아 통제 하에 있었음)포그롬에서는, 경찰과 무장군대의 지원 하에, 2만5천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1941년 7월 루마니아 부수상 안토네스쿠(Mihai Antonescu, 1904-1946; 전범으로 처형됨)는 “우리국민의 생활개선을 위해, 겨우살이처럼 자라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우리의 영혼에 이질적인 모든 요소를 깨끗이 씻어내기 위해, 지금은 철저한 인종 청소의 시기” ,라고 역설했다.
안토네스쿠루마니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a;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접경지대)에 가장 잔혹했다고 알려진 강제 수용소를 세웠고, 이곳에서 1941년부터 1943년까지 15만4천명에서 17만에 상당하는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2.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불가리아는 1940년부터 1943년 기간에 반유대인 정책(다윗의 별 부착. 전화와 라디오 소유 금지 등)을 채택하였다. 불가리아는 트라키아(Tracia; 흑해, 에게해, 마르마라해로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발칸반도의 남동쪽 지역)와 마케도니아를 병합한 후, 1943년 2월, 2만 명의 유대인을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보내라는 독일의 요구를 수락했다. 이에 따라 병합 지역으로부터 1만1천명의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냈고, 나머지 9천명을 채우기 위해서는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유대인 6천내지 8천명을 보낼 계획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가리아 그리스 정교회와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항의가 이어지자, 국왕(Boris III; 1918-1943 재위)은 이 계획을 취소했고, 그 대신 불가리아 태생의 모든 유대인을 지방으로 소개疏開하였다.
스톤 교수는, 로만 가톨릭 성직자 티소(Jozef Tiso, 1887-1947; 1939–1945 기간 대통령. 1947년 반인도주의 범죄로 처형됨)가 이끌었던 슬로바키아는 나치의 가장 충실한 동조자로 보았다.
Tiso
1938년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7천5백 명의 유대인을 추방했고, 1940년 여러 가지 반유대인 조치 채택, 1942년 가을쯤에는 이미 6만에 달하는 유대인을 폴란드로 추방하고 있었다. 이어 발생한 폭동으로 2천3백96명을 추가로 추방했고, 2천2백57 명이 살해되었다. 1944년 10월부터 1945년 3월까지는 1만3천5백 명이 폴란드로 추방되었다. 스톤은, 꼭두각시 나라에서 이루어진 점을 고려해도, 슬로바키아 홀로코스트는 독일이 계획했던 수준 이상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체포되는 유대인,체코
헝가리는 1941년 새로 병합한 지역 출신으로, 헝가리 시민이 아닌 유대인을 추방한 상태였지만, 1944년 3월 독일의 헝가리 침공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유대인 추방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944년 5월15일부터 7월초까지 43만7천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보냈다. 하루에 네 번, 매 번 3천 명씩 보냈다.
부다페스트 유대인
같은 해 10월과 11월,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 화살십자당(Arrow Cross Party; 헝가리 민족주의 사회당)은 독일과의 강제 노동력 공급에 관한 거래의 일환으로, 5천명의 유대인을 오스트리아 접경지역까지 강제로 행군을 시켰다. 그러나 행군 도중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자, 행군은 중단되었다.
3. 이태리, 핀란드, 일본
이태리도 반유대주의를 채택했지만, 독일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유대인에게는 독일 점령지역보다 이태리 점령지역이 안전한 곳이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이태리 유대인은 4만 명을 넘었다. 1943년 9월 이태리 중북부를 점령한 독일은, 이태리 파시스트 괴뢰 정부(Republica Sociale Italiana)를 세웠다. 나치 비밀경찰(Gestapo)과 독일제국보안사령부(Reichssicherheitshauptamt)의 예하부서인 독일제국보안국(Reichssicherheitshauptamt;RSHA IV B4 )은 아우슈비츠로 이태리 유대인 추방을 개시하였다.
1차로 로마를 떠난 1천34명의 유대인이 1943년 10월23일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여, 그 가운데 8백39명이 즉시 가스실에서 처형되었다. 이태리에서는 모두 8천5백 명 정도가 수용소로 추방되었다. 이태리 지배하에 있던 리비아에는 유대인 강제 수용소가 몇 군데 세워졌고, 이곳으로 2천6백 명의 리비아 유대인이 보내져, 그 가운데 5백62명이 죽었다.
1942년 나치의 압력을 받은 핀란드 정부는 핀란드 시민이 아닌 2백 명 정도의 유대인을 독일에 넘겼다. 같은 해 말 시민의 반대에 직면한 정부는 8명의 유대인을 추방했고, 이 가운데 전쟁 후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 일본은 반유대주의가 거의 없었고, 박해도 없였다. 일본 지배 하 중국 상하이에 있던 유대인들은 구금이 되기도 했지만, 독일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처형되지 않았다.
IX. 최후의 해결책
1. 진주만과 독일의 대미국선전 포고
1941년 12월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2천4백3명의 미국인이 죽었다. 그 다음 날인 8일 미국의 대일본 선전포고가 있었고, 11일에는 독일의 대미국 선전포고가 따랐다. 드워크(Deborah Dwork, 미국 역사학자. Clark 대학교 교수)와 잰(Robert Jan, 1955~; 역사학자. 캐나다 Waterloo 대학교 교수)등 두 교수에 따르면, 히틀러는 미국 내 세력이 강한 유대인들이 독일 유대인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미국이 전쟁 개입을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확신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선전포고를 하자, 히틀러는 미국 유대인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1939년 1월30일 이미 히틀러는 의회(Reichstag; 독일제3제국의 의회)연설에서, 만일 국제유대금융자본가들이 다시 한 번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는다면, 지구의 볼쉐비즘화나 유대인의 승리가 아닌, 유럽에서 유대인의 몰살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라고 했다. 대미선전포고 후 하루 뒤인 1941년 12월12일 히틀러는, “유대인 몰살이라는 자신의 원칙”을 다시 선언한 것으로 게를라하 교수는 보고 있다. 그날 히틀러는 총통 관저에서 있었던 나치당 지도자들과의 회의석상에서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이 있고 그 다음날 선동선전상 괴벨스는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기고 있다.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총통은 유대인을 쓸어버리기로 결정하였다. 만일 그들이 다른 전쟁을 획책한다면, 그들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그 말은 빈 말이 아니라, 이제 전쟁의 시작되었다. 전쟁은 반드시 유대인 파멸이라는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해 우리는 감상적일 수가 없다”
브라우닝(Christopher Browning, 1944~; 노스캐롤리나 대학교 석좌교수. 역사학자)은, 히틀러가 그날 유대인 학살에 관한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1939년 유대인에 대한 자신의 경고가 말 그대로 이행될 것임을 다시 한 번 천명한 것이고, 이제 나치당 지도자들이 필요한 사람에게 합당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걸 밝힌 것으로 보았다.
게를라하 교수는, 신분을 알 수 없는 전직 SS장교 출신이 스위스로 탈영한 후 1944년 남긴 기록에,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 후 총통의 명령에 따라 유럽 유대인 몰살이 개시되었다” ,라는 기록을 남겼다고 했다.
당지도자들을 만나고 난 4일 후, 프랑크(Hans Frank, 1900-1946; 폴란드 일반 정부 관할지역 총독. 교수형에 처해짐)는 지역 책임자들에게 “유대인에 대해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나는 원칙적으로 유대인이 사라질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일을 추진할 것이다. 그들은 없어져야 한다” ,라고 했다. 1941년 12월8일 히틀러와 히믈러의 회동 후, 히믈러는 그의 업무 수첩에, ”유대인 문제/빨치산과 다름없이 몰살“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브라우닝 교수는, 이 회동에서 어떻게 유대인 살해를 정당화할 것인가가 토의되었다고 보았다.
2. 반제 회의
1942년 1월20일 베를린 교외 반제에 있는 어느 건물에서 SS(Schutzstaffel; 나치 준군사 보안부대) 고위 지도자인 헤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1904-1942)주재 하에 소위 반제회의(Wannsee Conference)가 열렸다.
반제 회의 건물
원래 이 회의는 1941년 12월9일 열릴 예정이었으나, 초청장이 늦게 발송(11월29일부터 12월1일까지)되었고, 진주만 사건(12월7일) 때문에 무기 연기가 되었다가, 1월 8일 다시 초청장이 발송되어, 이날 개최가 되었던 것이다. 회의에는 헤이드리히를 비롯하여, 제3제국보안사령부제4국B4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 중령(RSHA IV B4; 제3제국보안사령부(Reichssicherheitshauptamt) 및 게슈타포 산하기관. 유대인 담당), RSHA제4국장 뮐러준장(Heinrich Müller, 1900-사망일자 불명. 1945년 베를린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생사불명), 기타 SS관계자와 나치당 지도자들이 참가하였다. 브라우닝 교수에 따르면, 참가자 15명 가운데 8명이 박사학위 소지자였다. 따라서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얼간이들 모임이 아니었다. 소위 반제회의 프로토콜이라는 상세한 회의록이 30부나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 제16번 회의록이, 미국 검찰에 의해 1947년 독일 외무성 문서철에서 발견되었다. 아이히만이 서명하고 “극비”라는 도장이 찍힌 이 문서는 헤이드리히의 지시 사항을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후일 아이히만도 이 문서를 증언한 바 있다.
회의에서는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과 “유럽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에 관한 계획을 검토하고, 이를 위한 정책에 서로 협력할 것과 모든 권한은 헤이드리히에게 있다는 걸 확인했다. 혼혈 독일인(Mischlinge; 반은 유대인)을 포함할 것인지도 검토하였다. 헤이드리히는, 유대인 문제의 또 다른 해결책으로, 유대인을 동유럽으로 추방하기 위한 장소가 확보되어 있으나, 이를 위해서는 히틀러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마지막 해결책으로 가는 과정은 올바른 지도(히틀러의 지도)가 필요하고, 유대인들은 적정한 노동을 위해 동유럽에 배치되어야 한다. 장애자가 아닌 유대인들은 남. 여로 나누어 이 지역의 근로에 투입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자연적인 이유로 대부분이 제거될 것이다. 남은 자들은 분명 끈질긴 자들로, 그들은 자연선택의 결과임으로 그에 따라 처리될 것이다. 만일 그들을 석방한다면, 또다시 그들은 유대인 재활의 씨앗이 될 것이다. 마지막 해결책 실행 과정에서, 동유럽에서 서유럽까지 샅샅이 조사하여 유대인을 색출할 것이다. 주택 문제와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 인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등 보호령을 비롯하여 독일 본토에서 먼저 이 조치가 실행될 것이다. 추방된 유대인들은 우선 그룹을 지어 임시 게토로 보내질 것이며, 그 후 동유럽으로 보내질 것이다.”
추방은 선택적이었다. “마지막 해결책”의 대상은, 독일 통제 하에 있던 지역과 군사적 상황에 좌우될 영국, 아일랜드, 스위스, 터키,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 헝가리 거주 유대인 1천1백만이었다.
2. 강제 수용소
1941년 말 독일은 폴란드 내에 수용소를 신설하거나, 기존 시설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41년 10월, 아우슈비츠로부터 수 킬로 떨어진 곳에 제2아우슈비츠(Auschwitz II-Birkenau)를 건설했다. 1942년 봄과 여름에는 각 수용소에 가스실을 설치했다. 다만 첼름노 수용소만은 가스실이 아닌 가스 차량(Van)을 사용했다. 수용소 별 소재지와 가스로 처형한 사망자 수는 다음과 같다(단위; 천명).
0 Auschwitz II
* Brzezinka(폴란드)
* 1,082
0 Bełżec
* Bełżec(폴란드)
* 600
0 Chełmno
* Chełmno(폴란드)
* 320
0 Majdanek
* Lublin(폴란드)
* 78
0 Sobibór
* Sobibór(폴란드)
* 250
0 Treblinka
* Treblinka(폴란드)
* 870
총계: 3,218명
죽음의 수용소로 알려진 소련 민스크 근처 트로스티네츠 수용소에서는 6만5천명이 죽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총살이나 가스 차량으로 처형된 것으로 생각된다. 기타 오스트리아 마오타오젠(Mauthausen), 폴란드 그단스크 소재 슈트트호프(Stutthof), 독일의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라벤스브뤽크(Ravensbrück) 수용소 둥이 있었다.
1) 가스 차
첼름노 수용소에서는 오로지 가스 차량(Van)만 사용하였는데, 이는 안락사 프로그램(Aktion T4; 베를린 시 Tiergartenstraße 4 거리의 약자. T4 관련 요원을 모집했던 곳)에 따른 것이었다.
가스 차량
1939년 12월과 그 이듬해 1월에, 차량에 가스 실린더를 장착했다. 이들 차량은 밀봉되어, 폴란드 점령 지역의 장애인을 죽이는데 사용하였다. 러시아에서는 대량 총살이 진행됨에 따라 히믈러와 그의 참모들은, 그러한 살인 행위가 그 행위자인 SS요원들에게 심리적인 문제를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다른 방안을 모색하였다. 1941년 12월 첼름노 수용소는, 액체 가스가 아닌 훈증 가스를 도입했다. 희생자들은 완전히 죽지 않은 질식 상태로, 인근 숲속에 파 놓은 구덩이에 매장되었다. 가스 차량은 소련의 민스크 게토 소탕 작전에서도,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총살이나 다름없이, 가스 차량도 심리적인 문제를 불러왔다.
2) 가스 실
게를라하 교수는 대량학살이 최고조에 달했던 1942년, 3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고 했다. 이 가운데 적어도 1백40만 명이 폴란드 일반 정부 지역에서 살해되었다. 희생자들은 흔히 화물열차에 실려 수용소로 왔다. 죽은 노동자를 대체하기 위해 근로에 투입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도착 즉시 가스실로 갔다. 아우슈비츠의 경우, 약 20%정도가 노동에 투입되었다. 살해 대상자들은 옷을 벗긴 채, 귀중품은 모두 수용소 근무자들에게 빼앗겼다. 그런 다음 나신으로 무리를 지어 가스실로 들어갔다. 그들이 두려워할까, 그 방은 샤워실이거나 이를 잡는 방이라는 말로 속였다.
가스 실
아우슈비츠의 경우, 방이 차면 문이 닫히고 구멍을 통해 떨어진 시안화화합물(Zyklon-B)로부터, 유독성 시안화산이 방출되었다. 사망 시간은 20분 이내였는데, 회스(Rudolf Höss, 1901-1947; SS장교. 아우슈비츠에 시안화화합물을 도입한 인물. 교수형에 처해짐)의 기록에 따르면, 죽는 시간은 구멍에 가까울수록 빨랐으며, 희생자의 1/3은 즉시 죽었다고 했다. 가스 처형을 감독한 SS의사 조한 크레머는, 틈새를 통해 희생자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게 분명했다고 증언했다. 처형이 끝나면 방으로부터 가스를 제거한 다음, 죄수 노동자(Sonderkommando; 죄수들에서 뽑힌 노동자. 대부분 유대인 수감자)들이 시신을 끌어냈다. 시체로부터 금이빨을 뽑아내고, 여인들의 머리털을 자르고, 보석류와 의족, 안경 등을 모았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처음 깊은 구덩이에 시체를 묻고 생석회로 덮었으나, 1942년 9월부터 11월까지는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10만구의 시체를 파내, 불에 태웠다. 1943년 초, 시체의 증가에 따라 가스실과 화장터가 증설되었다.
가스 실을 향해
가는 여인들
벨제쓰,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수용소 등은 폴란드 일반정부 지역의 유대인 말살 계획에 따라 명명된 라인하르트 작전(Operation Reinhard; 독일 점령 폴란드 일반 정부 지역 유대인 말살 계획을 가르키는 암호명)수용소로 알려지기도 했다. 1942년 3월부터 1943년 11월까지, 1백5십2만6천5백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에 가두고, 디젤엔진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일산화탄소로 처형하였다. 매장하기 전 시체로부터 금이빨을 뽑아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와는 달리 여인들의 머리털은 죽이기 전에 잘랐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경우는, 희생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열차 도착지를 기차역처럼 꾸며, 역사처럼 보이는 건물에 커다란 가짜 시계를 걸어 놓기도 했다. 이 세 수용소의 경우, 처음에는 대부분의 희생자들을 구덩이에 묻었다. 1942년 중반부터 아우슈비츠, 첼름노, 벨제쓰,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는 대량살상 증거말살 작전(Sonderaktion 1005)에 따라, 매장된 시신을 파내 불에 태웠다. 이는 증거인멸을 위해서, 풍기는 악취와 마시는 물이 오염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는 70만구의 시체를, 구덩이에 장작불을 피워 태웠고, 타고 남은 유골은 잘게 부수어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4) 협조자
홀로코스트는 나치가 계획하고 집행하였지만, 자발적으로 협조한 외국인(Ustashe; 크로아티아 파시스트 극우민족주의 조직의 경우)도, 강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참가한 동조자도 있었다. 국가 차원은 물론 개인 차원으로도 그랬다. 스톤 교수는, 홀로코스트를 범 유럽적인 현상으로, 현지 조력자의 도움이 없었으면 계속적인 학살은 불가능 했을 것으로 보았다.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 많은 유럽 국가들이 자신들의 방법으로 유대인 문제 해결을 떠맡았다는 것이다.
X. 레지스탕스
1. 유대인 레지스탕스
1942년 말까지, 폴란드 유대인 게토에는 레지스탕스가 거의 없었다. 힐베르크(Raul Hilberg,1926-2007;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대계 미국인. 정치학자)는, 유대인에 대한 박해 역사를 들어 이 현상을 설명했다. 즉, 가만히 있으면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고, 살육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스나이더(Timoty Snyder, 1969~; 미국 역사학자. 예일 대 교수)는, 유대인들이 무장투쟁의 필요성에 의견의 일치를 보인 것은, 1942년 7월부터 9월까지 있었던 추방 후, 3개월 동안에 불과했음을 지적했다.
유대전투조직(ŻOB), 바르샤바 게토 유대 전투연합(ŻZW), 리투아니아의 빌나 연합파르티잔 기구(Fareynikte Partizaner Organizatsye)등 몇몇 레지스탕스 단체가 생겨났다. 동유럽 전역에 걸쳐 적어도 열아홉 게토에서, 1백회 이상의 유대 레지스탕스 저항과 봉기가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단체는 바르샤바 레지스탕스 단체로, 이 단체는 1943년 그곳에 남아 있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기 위해 독일군이 도착하자, 전투에 임했다. 4월19일, ŻOB와 ŻZW 전사들의 반격으로 일단 후퇴했던 독일군은, SS대장 슈트룹(Jürgen Stroop,1895-1952; 반인도주의 범죄로 처형됨)의 지휘 하에 그날 늦게 다시 반격해왔다. 약 1천명에 이르는 빈약한 무장의 유대 전사들은 4주이상 SS의 발을 묶어 놓았다. 폴란드 및 유대 기록에 따르면 이때 수백 내지 수천 명의 나치 군이 피살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16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독일군은 이때 죽은 유대인을 1만4천명으로 -전투 중 7천명, 전투 후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7천명-기록하고 있다. 추가로 5만3천에서 5만6천 명 가량의 유대인이 강제수용소로 추방되었다. 폴란드 레지스탕스 신문(Gwardia Ludowa; 1939년에 창간)은 1943년 5월 어느 날, 연기와 화염 속에 죽어가는 유대 파르티잔 병사들과, 전설적인 전투력의 독일 군이 붕괴되는 장면을 보도하고 있다. 레지스탕스의 승리와 독일 군이 약체라는 사실을 말하는 기사였다.
저항 후 체포된
유대인
1943년 8월2일에 있었던 트레블링카 수용소 저항에서는 6명의 경비병을 살해하고, 수용소 건물에 방화를 하여, 혼란 중에 탈주에 성공한 수감자들도 있었다. 같은 해 8월16일에 있었던 폴란드 비알리스토크 게토 (Białystok Ghetto)의 레지스탕스에서 유대인들은 닷새에 걸쳐 저항을 했고, 그들 모두는 수용소로 보내졌다. 같은 해10월14일 소비보르 수용소에서 탈주를 시도하던 유대인 수감자들이 11명의 SS대원과 세 명의 우크라니아, 독일인 경비병을 죽였다. 아라드(Yitzhak Arad, 1926 –2021; 이스라엘 역사학자)에 따르면, 이 숫자는 단 한 번의 저항에서 가장 많은 SS대원이 살해된 경우였다. 이때 약 3백 명의 수감자들이 탈주에 성공했으나, 이 가운데 1백 명은 다시 체포되어 즉시 총살되었다. 1944년 10월7일, 대부분이 그리스계, 헝가리계 유대인이었던 아우슈비츠 죄수노동자(Sonderkommando) 3백 명은, 이제 조만간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반란을 일으켜, 화장장을 폭파하였다. 이 과정에서 3명의 SS대원이 피살되었다. 이 때 제2화장터에서 일하고 있던 죄수노동자들이, 소란스러운 소동 소리를 듣고는 수용소 반란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자신들을 감독하던 십장을 화장장 불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그때 SS는 이미 사태를 장악한 뒤였다. 노동자 4백51명이 즉시 처형되었다.
유럽 전역에 걸쳐 파르티잔에 참가한 유대인은 대략 2만에서 10만으로 추정된다.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와 소련 영토에서는, 수천 명의 유대인이 삼림이나 험지로 들어가 파르티잔에 합류하였다. 소련 파르티잔은 2만에서 3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유대 파르티잔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단체는, 비엘스키 형제(Bielski; 폴란드 유대인 가정)가 이끈 백러시아 비엘스키 파르티잔이었다. 유대인들은 홈 아미(Home Army; 1942년 나치 점령 폴란드에서 구성된 반 나치 저항 운동)에도 가담하였다. 스나이더 교수에 따르면, 1943년 4월에 있었던 바르샤바 게토 봉기보다 1944년 8월의 바르샤바 봉기에서 더 많은 유대인들이 싸웠다고 했다.
2. 폴란드 레지스탕스
플레밍(Michael Fleming, 영국 역사학자. 영국소재 폴란드 해외대학 교수)에 따르면, 1940년부터 1942년 8월까지,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바르샤바 지도자들로부터,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관한 정보를 계속 받았다. 이는 주로 폴란드 홈 아미의 필레스키(Witold Pilecki, 1901-1948; 폴란드 정보 장교로 레지스탕스 지도자)대위 덕택이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상황을 알아내고자 1940년 나치에 위장 자수, 수용소로 보내졌으나, 1943년에 탈주에 성공하였다. 그 후 그는 아우슈비츠 전복을 위한 레지스탕스와, 폴란드 망명정부를 위한 정보수집 활동을 했다.
필레스키 대위
1942년 1월6일, 소련 외무상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1890-1986)는, 소련군이 되찾은 지역에서 발견된 시체들에 대한 보고와, 그 지역의 제보자들의 보고에 따라 나치의 학살에 관한 외교문서를 폴란드 망명정부에 보냈다. 플레밍 교수에 따르면, 1942년 5~6월경에, 첼름노, 소비보르, 벨제쓰 등 강제 수용소에 관한 소문이 런던에 퍼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해 2월 비너(Szlama Ber Winer, 1911-1942; 폴란드계 유대인)가 첼름노 강제 수용소를 탈출하여, 바르사뱌 게토의 샤바트(Oneg Shabbat group; 나치 점령 하 게토의 생활상을 기록한 역사학자, 작가, 랍비, 사회봉자들 모임)에 관련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의 보고서는 Grojanowski라는 익명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카르스키(Jan Karski, 1914-2000; 폴란드군 연락병)는 나치 관련 정보를 폴란드 망명 정부 및 연합군에게 제공하였다. 1942년 7월 중순, 폴란드 정부 지도자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대량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폴란드 내무성이 작성한 보고서(Sprawozdanie)는 그 말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학살당하였다. 총살, 창, 독 가스실 등을 통해서였다. 게슈타포가 사형 판결을 내린 수감자는 총살 및 창으로, 병이들거나 노동능력을 상실한 수감자와 가스 처형이 필요한 소련 전쟁 포로, 유대인들은 가스실로 보내졌다.”
1942년 11월12일, 보고서 6/42호가 런던에 도착하였다. 영어로 쓴 108페이지에 달하는 “폴란드 상황에 관한 보고서(Report on Conditions in Poland)”였다. 이 보고서는 워싱턴 주재 폴란드 대사관으로 보내졌다. 같은 해 12월10일, 폴란드 외무상 라스진스키(Edward Raczyński, 1891-1993)는 그 학살에 관해, 갓 태어난 유엔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은 ‘독일 점령 하 폴란드에서 자행된 유대인 대량 학살’이라는 제목이 붙어, 유엔 회원국들에게 배포되었다. 그는 독가스 사용에 관해 언급하고 트레블링카, 벨제쓰, 소비도르가 강제수용소라는 점과, 1942년 3월과 4월 그 수용소들에서 수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음을 밝혔다.
수용소 행 유대인
폴란드 유대인 3백만 명 가운데 세 명중 한 명이 이렇게 죽었다고 했다. 그의 발언은 뉴욕타임스와 런던 타임스가 받아썼다.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은 그 보고를 받았고, 이든(Anthony Eden, 1897-1977; 당시 영국 외무상)이 보고서를 내각에 제출하였다. 1942년 12월17일, 연합국은 나치의 “냉혈적인 살인(bestial policy of cold-blooded extermination)이라는 야만적 정책”에 관해 유엔회원국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영국과 미국정부는, 습득한 정보를 발표하기 꺼려했다. 1942년 매카트니(Carlile Macartney, 1895–1978; 영국 학자. 동유럽 전문가)가 쓴 메모(BBC Hungarian Service; 영국 BBC 국제 방송)는, “유대인에 관한 언급을 해서는 아니 될 것”이라고 했다. 만일 연합국이 유대인에 관한 보도를 한다면, 헝가리 국민의 반유대인 감정으로 볼 때, 그들은 연합군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영국은 보았다. 반유대주의와 고립주의가 일상이었던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는 전쟁이 유대인과 관련한 전쟁으로 변질될까 우려를 했다. 많은 나라들과 독일 국민들은 유대인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아는 듯 했다. 유대인들만 모르는 듯 하는 모양새였다. 프리드랜더(Saul Friedländer, 1932~; UCLA 석좌 교수. 정치학)에 따르면, 나치 점령 지역의 유대인들이 남긴 증언들로 볼 때,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몰랐던 것 같았다고 했다. 서유럽 유대 공동체는 정보 종합에 실패를 한 반면, 동유럽 유대 공동체 역시 그들이 들은 이야기가 자신들에게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했다.
XI. 종전
1. 헝가리 홀로코스트
1943에 들어와, 독일은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남서 유럽으로부터 철도를 통한 유대인 운송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유대인 수송은 군수물자 수송 다음으로 우선이었고, 1942년 말에 이르러서는 점증하는 군사적 어려움 속에서도 유대인 수송은 계속되었다. 군지도자들이나 경제 관료들은 유대인 수송에 따른 자원의 낭비, 유대인 숙련 노동력 살해에 불만이었지만 나치 지도자들은 경제적인 고려보다는 이데오로기적인 불가피성에 더 무게를 두었다.
대량학살은 1944년, 아우슈비츠에서 5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가스로 처형함으로써 광적인 단계에 이르렀다. 1944년 3월19일 히틀러는 아이히만을 헝가리로 보내, 유대인 처형을 감독토록 하였다. 5월15일부터 7월9일까지 44만 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추방되었고, 그곳에 도착하는 즉시 가스실로 들어갔다. 이 일이 있기 한 달 전 아이히만은 브란트(Joel Brand, 1906-1964; 부다페스트 시온주의자 지하단체 회원)를 중개인으로 하여, 서부전선에서 독일 군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연합군 트럭 1만대와 유대인 1백만 명을 교환할 수 있다는 제안을 했다. 영국은 이 제안을 폭로함으로써, 나치의 계획을 좌절 시켰다.
2. 죽음의 행진
소련 군의 진격에 따라 SS는 폴란드 동부 지역의 강제 수용소를 폐쇄하고 자신들의 만행을 숨기려고 했다. 가스 실은 해체되고, 화장장은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했다. 대규모 무덤에서 시체를 파내어 화장을 했다. 1945년 1월부터 4월까지 SS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소재 강제 수용소를 향해 가도록 수감자들을 죽음의 행진으로 내몰았다. 독일 군 기록에 따르면, 1945년 1월 현재 7십1만4천 명이었던 유대인 수감자는, 5월까지 2십5만이 행군 도중에 죽었다. 굶주림과 악조건 속에서 이미 병이 들었으나, 기차역으로 행군한 후 먹을 것도 없는 무개화차에 실려 간 후, 다시 기차에서 내려 수용소까지 행군을 해야 했다. 트럭이나 화차를 타고 간 사람도 있고, 전 거리를 걸어서 간 사람도 있었다. 낙오자는 즉시 총살되었다.
3. 해방
1944년 7월25일, 연합군은 최초로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를 발견하였다. 진격하던 소련군 부대가 가스실을 갖춘 그 수용소를 발견한 것이다.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벨제쓰 등 수용소는 연합군에 의해 해방이 된 것이 아닌, 1943년 나치 스스로가 폭파를 하였다. 1945년 1월17일, 5만8천명의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이 서쪽을 향해 죽음의 행진을 시작했다. 1월27일 소련군이 그곳에 도착하여 보니 3개 동에 7천명, 부속 건물에 5백 명의 수용자가 있었다. 4월11일에는 미군에 의해 부헨발트 수용소(Buchenwald; 독일 Weimar 시 인근)가, 15일에는 영국군에 의해 베르겐 수용소(Bergen-Belsen; 독일 북부 하색슨 주 마을 ), 29일 다하우 수용소(Dachau)는 미군, 30일에는 소련군이 라벤스브뤼크 수용소(Ravensbrück; 독일 북구 브란덴브르크 수 소재), 5월5일에는 미군에 의해 마오타오젠 수용소(Mauthausen; SS가 세운 유대인 게토. 체코슬로바키아 소재)가 각각 해방되었다. 5월3일, 소련군이 도착하기 직전 국제적십자가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Theresienstadt; 체코슬로바키아 소재)를 장악하였다.
영국군 제11기갑사단이 베르겐 수용소를 접수하였을 당시, 9만 명의 수용자(유대인 90%)와 1만3천구의 매장하지 않은 시체가 있었고, 생존자 가운데 1만 명이 장티푸스와 영양실조로 곧 이어 사망하였다. BBC 방송 종군 기자 딤블비(Richard Dimbleby, 1913-1965)는 그가 목격한 장면을 있는 그대로 썼고, BBC는 그의 보고가 너무 끔찍하여 믿지를 않고 4일간이나 방송 거부를 하다가, 딤블비가 사직을 하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보도를 했다. 딤블비는, 영국군 병사들이 그처럼 격분하는 걸 본적이 없다고 했다. 그가 쓴 기사이다.
“여기 한 에이커가 넘는 땅에 죽은 이들과 죽어가는 이들이 누워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별할 수가 없다. 산 사람들은 죽은 이들의 시신을 베고 누워 있고, 그들 주변으로 여위고 겁에 질린 사람들이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아무런 목적 없이 유령처럼 대열을 이루어 떠돌고 있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없으나, 그 곳을 벗어날 수가 없고, 주변의 비극적인 모습을 볼 수도 없다. 이곳에서 아기들이 태어났으나, 그 작은 생명들은 모두 시들어 죽었다. 미쳐버린 듯한 어느 여인이 아기에게 젓을 주겠다며 영국군 보초병에게 소리를 지른 다음, 아기를 그 병사에게 던져버렸다. 병사가 보니 죽은 지 며칠 되는 아기였다. 이날은 내 일생에서 가장 참혹한 날이었다.” -4월15일, 1945년. 리챠드 딤블비-
XII. 사망자 수
유대인 사망자 수는, 전 세계 총 유대인 수의 약 1/3, 전쟁 전 유럽 유대인 인구 9백7만을 고려하면, 유렵 유대인의 2/3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전전 대부분의 유대인은 동유럽에 거주하여, 폴란드에 3백5십만, 소련에 3백만, 루마니아 8십만, 헝가리 7십만, 독일 5십만이었다.
통상적인 유대인 희생자 수는 6백만 명으로, 이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회틀(Wilhelm Höttl, 1915 -1999; 오스트리아 나치당원. SS대원. 전후 미국 CIC첩보 요원으로 포섭됨)에게 제출하고, 회틀이 법정에서 진술하고, 서명한 숫자이다. 학자들은 4백2십만에서 7백만 정도로 보고 있다. 바셈(Yad Vashem,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록)은 5백만에서 6백만 정도로 보고 있다.
이 같은 불확실성은, 1939년 현재 정확한 유럽 유대인 수를 알 수 없고, 사망자를 두 번 계산한 경우도 있으며, 가해자로부터의 부정확한 보고, 받은 학대로 인해 석방 후 사망한 사람을 포함할 것인가의 여부 등에 기인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라이트링거(Gerald Reitlinge, 1900-1978; 영국 역사학자)는 4백2십만에서 4백5십만으로, 힐베르크(Raul Hilberg, 1926-2007; 유대계 미국인. 정치학자. 버몬트 대학 교수)는 5백10만, 레스츠친스키(Jacob Lestschinsky, 1876-1966; 이스라엘 사회학자)는 5백95만 명으로 보았다. 1990년 바우어(Yehuda Bauer,1926~; 이스라에 역사학자. 희브리 대 교수)는 5백5십9만에서 5백8십6만으로 보았고, 1991년 벤츠(Wolfgang Benz, 1941~; 독일 역사학자. 베를린대 교수)는 5백29만에서 6백만으로 보았다. 이 숫자는 1백만 이상의 어린이를 포함하고 있다.
폴란드 강제 수용소에서 유대인 희생자의 반 이상을 죽였다. 아우슈비츠 9십6만, 트레블링카 8십7만, 벨제쓰 6십만, 첼름노 3십2만, 소비보르 2십5만, 마이다네크 7만9천 명 등이다.
사망률은 유럽 각국의 자국 내 유대계 시민들을 보호하겠다는 의지에 좌우되었다. 독일과 동맹관계에 있었던 국가들에서는, 유대인 포함 그 시민들에 대한 통제는 자국의 주권문제로 인식했다. 이에 따라 유대인 공동체를 완벽히 파괴하기 위한 제도와 기구가 끊임없이 생겨났다. 독일 군이 도착하였을 당시 에스토니아 유대인이,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 청소를 선언한 후 99%가 죽은 것처럼, 독일 점령 지역에서는, 피 점령 국가 정부의 존속 성 또한 유대인 사망률과 관련을 맺고 있다. 예컨대 프랑스는 유대인의 75%, 덴마크 99%가 생존을 했고, 반면에 네델란드에서는 75%가 죽었다.
게를라하 교수에 따르면, 정부가 붕괴되지 않은 나라의 유대인 생존율은 비 독일인(해당정부 및 국민)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가 붕괴된 국가(폴란드 및 발틱 국가들)와 소련의 서부 지역에서으 유대인 운명은, 독일 말고도 유대인에 적대적인 현지인들의 자비심에 크게 좌우되었다. 독일, 폴란드, 발틱 국가, 독일 점령 소련 지역 유대인들은 거의 모두 죽었고, 생존률은 평균 5%에 불과했다. 폴란드 유대인 3백3십만 가운데 약 90%가 학살당하였다.
XIII. 그밖의 희생자
1. 소련 국민 및 전쟁 포로
나치는 슬라브족을 하등인간(Untermenschen)으로 보았다. 독일 군대는 소련의 마을들을 불태우고, 그 시민들은 강제노동에 동원하였으며, 식량을 몰수하여 기근을 일으켰다. 백러시아에서는 3십8만 명을 강제노동에, 1백6십만을 살해하였다. 5천2백9십5곳의 유대인 정착지를 파괴하기도 했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5백7십만의 소련군 포로 가운데 3백3십만이 독일군 감시 하에 죽었다. 독일 전쟁 수행에 포로가 필요함에 따라 사망률은 낮아졌는데, 1943년 50만 명의 포로가 독일군을 위한 노예 노동에 투입되기도 했다.
소련군 포로와 히믈러
2. 폴란드 인
폴란드에 대한 개전과 동시 독일은, 히틀러의 계획 즉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언급한, 동유럽에 대규모 독일인 식민지 설치를 위한 “삶의 공간(Lebensraum)” 획득이 필요했다. 히틀러의 계획은 고전적인 제국주의와 나치 인종 이데올로기가 결합된 것이었다. 폴란드에서 유대인을 제거한다는 것은 나치의 장기계획이었던 반면, 폴란드 인들은 점령과 동시 물리적 폭력의 대상이었다. SS는 폴란드인들을 주적으로 삼고, 폴란드 서부 지역의 “폴란드적인 요소”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1939년 9월7일, 헤이드리히는 모든 폴란드 귀족, 승려, 유대인은 처벌 받을 것임을 선언했다. 9월12일 독일군 최고사령관 카이텔(Wilhelm Keitel, 1882-1946)은, 처단 대상에 폴란드 인텔리겐챠들을 포함시켰다.
1940년 3월15일, SS대장 히믈러는, 폴란드 각 분야 전문가들이 독일 군수산업에 투입될 것임을 발표를 했다. 그들을 부려먹은 후 모두 죽였다. 나치는 위대한 독일이 폴란드 사람들을 숙청하는 것은 숙명이며, 최우선의 과업이라고 했다. 1940년 말 히틀러는, 폴란드 내 모든 위해 요인을 제거하는 계획을 최종 확인했다. 전쟁이 끝난 후 누렘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와 폴란드 대법원은, 폴란드 내 독일 경찰은 유대인과 폴란드 시민을 생물학적으로 학살하려했다는 것이 그 임무였다는 판결을 했다.
전쟁 중 약 1백9십만의 비유대계 폴란드인들이 나치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대략 2십만 명이 강제수용소에서, 14만6천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그리고 15만에서 20만에 이르는 폴란드 시민들이 바르샤바 레지스탕스 같은 저항에서 학살당하였다.
3. 집시
독일과 그 동맹국들은 유럽 집시의 25%에 달하는 2십2만 명을 죽였다. 리터(Robert Ritter, 1901-1951; 독일 인종학자. 나치의 인종차별 정책의 이론가)는 집시를 가리켜 “진화가 없는, 돌연변이에 의해 생긴 별종의 인간”으로 불렀다.
추방 당하는 집시
1942년 집시는 유대인과 동일한 법의 규제 대상이 되었고, 12월에 히믈러는, 독일 군대에 복무하지 않은 집시는 모두 아우슈비츠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1943년 11월15일 그는 명령을 조금 수정하여, 나치 점령 소련 지역 내 정착 집시와 혼혈집시는 시민으로 간주하여 수용소행에서 제외했다. 프랑스와 벨지움, 네델란드 내 집시는 행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일정 지역을 떠나지 못했고, 동유럽의 집시들은 모두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많은 수가 학살을 당했다.
4. 정치범 및 종교적 반대자
독일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원들은 모두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1941년 12월7일 히틀러의 직접 명령(Nacht und Nebel)에 따라 독일 전역은 물론 나치 점령 지역에서 정치범들에 대한 사형, 고문이 있었다. 피쉘(Jack Fischel; 펜실바니아 대 역사학 교수)에 따르면, 1944년 4월에는 1천7백9십3명에 대한 사형선고가 있었다. 군대 복무를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그곳에서 신앙을 포기하고 국가에 복종할 것을 요구 받았다. 약 3천명이 보내져, 1천4백 명이 죽었다. 독일 역사가 가르베(Detlef Garbe)에 따르면, 나치에 일관되게 저항한 종교 운동은 없었다고 한다.
5. 게이와 아프리카계 독일인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에서는 10만 명의 게이 가운데 5만 명이 투옥되었다. 이 가운데 5천에서 1만5천 정도가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수백 명의 게이가 중한 죄를 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거세 수술을 받았다. 1936년 히믈러는, 동성애추방과 임신중절을 위한 기구를 설치하였다. 게이는 바 출입을 금지시켰고, 게이 관련 출판사를 폐쇄했다. 여성동성애자들은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았다. 나치는 그들을 성적인 이상자가 아니라 반사회적으로 보았다. 나치가 권력을 장악할 당시, 약5천에서 2만5천에 이르는 아프리카계 독일인이 있었다. 독일을 비롯하여 독일 점령 지역 유럽의 흑인들은 투옥 대상이기는 했으나, 집단적인 학살 대상은 아니었다.
XIV. 홀로코스트 결과
1. 재판
전쟁이 끝난 후 독일 누렘베르크(Nuremberg)에서 독일 지도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일련의 연합국 군사재판이 열렸다. 제1회 연합국 군사재판은, 국제군사재판(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이 열리기 전인 1945-1946년간 열렸다. 아돌프 히틀러, 하인리히 히믈러, 조세프 괴벨스는 이미 몇 달 전 자살을 한 후였다. 스물네 명의 전쟁범죄자와 제3제국 내각, SS, SD, SA, 게슈타포, 합동참모본부, 최고사령부 등 7개 조직이 기소되었다.
기소 내용은, 평화에 반하는 범죄의 목적 달성을 위한 음모와 계획에 참여한 죄목이었다. 즉, 공격전을 기획하고 착수하고 이행한 죄, 전쟁 범죄, 그리고 반인도주의 죄였다.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 나치 외무상), 카이텔(Wilhelm Keitel; 나치군 최고 사령관),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발틱의 나치 이론가), 조들(Alfred Jodl; 나치군 최고사령부작전참모)등 11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히틀러의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죄목이었다.
이어 1946년부터 1949년까지의 누렘베르크 재판에는 1백8십5명의 또 다른 피고인들이 회부되었다. 당시 서독은 소수의 전직 나치를 재판에 회부하려고 했으나, 울름 재판(Ulm Einsatzkommando; 서독 정부 수립 후, 1958년 서독 법에 의한 최초의 나치 전범 재판)이후, 전범 처리를 위한 별도의 기구를 신설하였다. 나치 전범과 그 동조자들에 대한 재판은 계속되었다. 1960년 모사드는 아르헨티나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하여, 이스라엘로 압송한 다음, 열다섯 가지 죄목으로 기소하였다. 1961년 12월 그는 유죄판결을 받고 1962년 처형되었다. 그의 재판과 죽음은, 전쟁 범죄와 홀로코스트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2. 배상
1951년 이스라엘 정부는, 독일이 유럽 유대인들로부터 60억 달라 상당을 절취했다고 주장하며 독일정부에 대해, 살아남은 50만 유대인 생존자 재활을 위한 재정자금으로 15억 달러를 요구하였다. 독일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이스라엘 사람들 간에 이견을 불렀다. 이어 뉴욕에서 배상금 협상회의(the Claims Conference)가 개최되어, 최종 8억4천5백만 달러로 타결되었다. 1988년 독일은 추가로 1억2천5백만 달러를 추가 지급하였다. BMW, 도이치 은행(Deutsche Bank), 포드(Ford), 오펠(Opel), 지멘스, 포크스바겐 등이 전쟁 중 강제 노동죄목으로 피소되었다. 이에 대해 독일은 2000년 “기억, 책임, 미래 재단”을 설립하고 강제 노동 피해자들에게 4십4억5천만 유로를 지급했다. 2013년 독일은 5만6천명에 달하는 전 세계 홀로코스트 생존 유대인들에게, 7억7천2백만 유로 상당의 의료비, 간호비, 사회보장금을 지급했다. 2014년 프랑스 국영 철도회사(SNCF)는 생존 유대계 미국인들에게 1인당 10만달러씩, 총 6천만 달러를 지급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강제수용소로 유대인을 운송한 책임에 대한 보상이었다.
3. 역사 논쟁과 문제의 특이성
학자들은 홀로코스트를 하나의 특이하고 거대한 인종학살로 보았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1980년대에 논쟁을 통해, 홀로코스트를 독일의 역사에 재정립하려는 서독 역사가들의 시도가 있었다.
놀테(Ernst Nolte, 1923-2016; 베를린 대 교수. 역사학자)가 논쟁에 불을 붙였다. 1986년 6월 그는 보수적인 프랑크푸르트 신문(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에 ‘흐르지 않을 과거’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나치 시대는 역사적 사건으로 연구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닌 한 자루 칼로서, 현재의 독일 머리 위에 매달려 있다”,라고 썼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굴라그(Gulag; 레닌의 명령으로 설치된 소련 강제 수용소)에 비교하면서, 홀로코스트는 소련에 대해 공포를 느낀 히틀러가 그에 대응코자한 결과물이라면서, 아우슈비츠보다 굴라그가 먼저 생기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전 계급에 대한 볼세비크의 살인 행위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가 행한 인종 살인의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전례가 아니냐고 했다. 아우슈비츠는 흐르지 않은 과거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했다.
놀테의 주장은 홀로코스트를 정상적인 것으로 보려는 시도로 보였다. 그의 주장에 대해 야켈(Eberhard Jäckel, 1929-2017; 독일 역사학자. 역사 논쟁의 주역)은 1986년 9월자 짜이트 지(Die Zeit)를 통해, 역사 상 어느 국가도, 가능한 모든 국가 권력을 사용하여 노인, 여성, 어린이, 젖먹이를 포함하여 특정 집단의 인간을 가능한 빨리 죽일 것을 결정하고 이를 결행할 수 있는 권능을 그 지도자에게 부여한 적이 없다, 라고 반박했다. 2010년 스톤 교수는, 놀테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역사 논쟁은 홀로코스트에 관한 “비교의 문제”를 제시하였다고 했다. 그는 스탈린니즘의 인종청소라는 내용에 홀로코스트를 포함하려는 시도가 홀로코스트를 독특한 사건으로 보려는 관점을 압도하고 있다고 하면서, 전후 나치의 인구 재배치 계획 즉 동방 계획(Generalplan Ost)은, 독일인을 위한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천만 명의 슬라브 족을 죽일 계획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야켈은 주장을 굽히지 않아, 홀로코스트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견해를 불러 일으켰다. 2015년 에반스(Richard J. Evans, 1947~; 영국 역사학자.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는 그의 저서(The Third Reich in History and Memory)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마지막 해결책(홀로코스트)”은 많은 해결책 가운데 하나이나, 또한 그것들과는 다른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많은 해결책들과는 달리, 홀로코스트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특정 지역의 장애물 제거가 아닌, 세계의 적이라는 대상을 정해놓고, 전 지구적인 규모로 자행된 것이다. 유대인에 대해, 나치가 유대인의 꼭두각시로 본 사람들에 대한 투쟁을 위해, 동유럽이라는 특정 지역을 목표로 하여, 상상 불가능한 규모의 인간 살해를 포함하여, 인종 재편성이라는 대규모 계획이 바로 홀로코스이다. 홀로코스트는 세계 역사를 인종이라는 관점에서 본 몽상가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산업적인 방법으로 자행되었다. 그래서 홀로코스트는 독특한 것이다.“
4. 기념일
1951년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기념일(Yom HaShoah)을 제정하였다. 이 기념일은 유엔을 비롯 37개국이 준수하고 있다. -끝-
작성자: 박흥서
'홀로코스트'는 그리스어 '홀로카우스톤(holokauston)'에서 비롯됐다 해요.
ReplyDelete신에게 바치기 위해 '전부(holos) 태우는(kaustos)' 방식으로 희생된 동물을 뜻한다고..
13세기 영미권에 넘어오면서 점차 '불로 인한 파괴' '대량 학살' 등의 뜻이 더해졌습니다.
1950년대 중반 영미권 역사학자들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홀로코스트'로 지칭하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그런데 정작 유대인들은 이 단어 대신 '쇼아(Shoah)'라는 표현을 쓴다고 해요.
ReplyDelete히브리어로 '대재앙'을 뜻한다고.
가스실과 소각로를 이용한 나치의 대량 학살이 신을 위한 제물에 비유될 수 없다는 이유로 말이죠.
홀로코스트가 다신교였던 고대 그리스의 종교 의식에서 비롯된 점도 유대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고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친이스라엘 외교를 펼치는 인사들도 '쇼아'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