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네 회전會戰


   The Battle of Cann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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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전쟁 당사자: 카르타고(Carthage)와 로마(Roma)

    다음은 제2차 포에니 전쟁(The 2nd Punic War, 218- 201 BC)중 있었던 칸네 전투(기원전 216년 8월 2일) 이야기이다.

      로마와 카르타고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Hannibal, 247 – ?181 BC)은 비록 왼쪽 눈이 멀었지만 미래를 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적을 본 그는 기뻤다. 이태리를 해방시키고, 로마의 세계 지배를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는 로마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이루어낸 사람이었다. 그의 군대는-전투용 코끼리 포함-알프스를 넘었고, 사나운 골 족(Gauls; 켈트 족의 일파)을 징집하기도 했다. 이제 바야흐로 꿈을 이룰 순간이었다. 

 

       한니발

    어린 시절부터 한니발은 굴복하지 않는 민족에 대해서는 오만하고 잔인무도한 로마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는 로마가 어떻게 라틴족, 에트루스칸(Etruscans; 현재의 이태리 북부 Tuscany, Umbria, Lazio 등), 그리스 도시, 골족을 정복하였는지를 알았다. 그의 시대 로마는, 그의 조국 카르타고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포에니 전쟁). 그의 부친 하밀카르(Hamilcar Barca, 275–228 BC)는 유능한 장군이었지만, 전투에서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가 로마와 싸운 23년간이라는 전쟁에서, 로마는 시실리로부터 카르타고를 완전히 축출했던 것이다. 하밀카르는 복수를 다짐했다. 카르타고 원로원은 그를 스페인으로 보냈는데, 이때 한니발은 부친을 따라갔다. 하밀카르는 조국 카르타고를 위해 스페인 반도를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스페인 반도에는 은광이 있었는데, 스페인을 손에 넣으면 지브롤터 해협을 장악할 수가 있었다. 건너편 스페인에는 브리타니 주석광산이, 서아프리카에는 금과 상아가 있었다.

    하밀카르 군대의 주력은 아프리카인 병사들로 구성된 중보병과 누미디아(Numidia; 현재의 알제리아 및 튀니지아 일부 지역) 기병이었다. 누미디아 기병은 북아프리카 유랑족으로 무릎을 쳐 말을 몰았고 따라서 두 손으로 전투를 할 수가 있었다. 그들의 주무기는 재블린(Javelin; 던지는 창)이었다.

    재블린 창

두건을 쓰고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에, 표범 가죽으로 만든 안장에 앉아 적을 공격하는 누미디아 병사의 모습은 바로 공포 그 자체였다. 하밀카르는 스페인 사람들을 자기 군대의 군인으로 징집하기도했다. 개화된 그들을 뛰어난 기병이나 보병으로 양성을 한 것이다. 철갑으로 무장한 스페인 기병은 재블린, 창, 짧고 날카로운 반월도半月刀 등의 무기로 싸웠다. 반월도는 그리스 군대의 무기이기도 했고, 알렉산더 대왕은 인도 원정 시 이 칼로 병사들을 무장 시켰다. 이 칼은 오늘날 네팔 구르카스(Gurkhas: 네팔 산악 족으로 구성된 군대. 인도, 영국, 싱가폴, 브루네이 용병과 UN 평화 유지군으로 근무하기도 함)도 사용하는 칼 쿠크리Kukri이다.

    누미디아 병사

      쿠크리 칼

반면 스페인 보병은 2피트 가량의 곧은 양날 검을 사용하였다. 스페인 보병은 끝이 뾰족한 칼로 싸우는 근접전을 좋아했다. 그 칼날은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철이었다. 스페인 북부 야만인 켈트 족(The Celts; 켈트어를 사용한 인도 유럽어 계통의 종족)역시 보병과 기병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 목숨은 물론, 사람 생명을 우습게 여겼다. 그들은 갑옷도 안 입은 채, 심지어 상반신을 벗고 싸우기도 했다. 짐승 뿔로 장식한 투구를 써, 그 모습이 괴이하고 무서웠다. 그들의 무기는 긴 칼과 무거운 재블린, 끝이 뾰족한 필룸Pilum등이었다.

   켈트 병사

     필룸

척후병은 궁수와 재블린으로 무장한 병사, 발레아레스 군도(Balearic Islands)출신의 투석 병(돌던지는 병사)으로 편제되었는데 모두 그 무기에 정통한 병사들이었다.

    하밀카르는 장군이기도 하고 카르타고 원로원 의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사실상 그의 사병으로,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은 자율적인 군대였다. 그가 죽은 후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Hasdrubal Barca, 245-207 BC)이 사령관이 되었다. 그가 로마군에 패전하여 죽자, 한니발이 후임이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당시의 카르타고 시민은 주로 선원과 상인들이었다. 군사적 패배로 인한 시실리 상실은 그들의 생업에 계속 영향을 준 건 아니었다. 하밀카르 덕택으로, 시실리 이상의 땅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제 무역을 시작한지 얼마 안된 로마는, 경쟁자 카르타고가 거추장스러웠다. 따라서 카르타고를 쓸어버릴 구실이 필요했다. 마침 카르타고는, 로마와 동맹을 맺은 스페인의 사군또(Sagunto, 스페인 동부 지중해 도시 발렌시아 인근)와 분쟁 상태에 있었다. 로마는 스페인으로 사절을 보내어, 그곳에 있던 한니발에게 사군또를 공격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들의 요구를 무시한 한니발은 사군또를 공격, 점령했다. 기원전 218년의 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 다음 해 로마는 카르타고에 사절단을 보내어 한니발을 인도하라는 요구를 했다. 카르타고 원로원은 당연히 거절을 했다.

     사군또 유적

    한니발은 로마가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공격해올 것임을 확신했다. 아내와 자식들의 안전을 위해, 모두 카르타고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로마는 카르타고 역시 공격할 예정이었다. 한니발은 정탐꾼을 보내, 로마가 시실리에서 집정관 셈프로니우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163-133 BC)의 지휘 하에 공격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아냈다. 또 다른 집정관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 236? –183 BC)가 지휘하는 부대가, 동맹군 마실리아(Massilia; 현재의 프랑스 Marseilles)와 합류할 계획임도 알았다. 

    스키피오

    스키피오는 알프스를 넘어와 스페인에서 한니발과 한 판 겨룰 계획이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를 구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조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이태리 침공을 결정했다. 이태리 침공은 로마의 아프리카 침공 계획을 좌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태리 침공이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도 알았다. 당시 로마는 병력 자원이 7십7만 명이었다. 카르타고는 그 1/10인 7만 명도 안 되었다. 전 인구도 70만에 불과했다. 반면 로마 인구는 6백만을 넘었다. 이 같은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한니발은, 로마 영토 내에서 전투를 하고 로마에 복속된 사람들의 반란을 부추기면 로마제국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로마는 한니발이 스페인을 출발, 알프스를 넘어 이태리 반도까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스키피오가 마실리아에 도착해보니, 한니발의 군대는 이미 스페인을 떠나, 마실리아 북쪽 50마일 지점에서 동쪽 알프스를 향해 행군하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군대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는 동생 냐에우스(Gnaeus Cornelius Scipio Calvus, ? ~211 BC)를 보내, 스페인 내 한니발의 군사기지를 초토화 시킨 다음, 침략자를 쫓아 이태리를 향해 출발했다. 한니발의 스페인 기지를 격파한 것은 전통적인 전술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에게 그 기지들이란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그곳을 떠났고, 병사도 행군 중 모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골족은 로마에 패배를 한 직후라 복수심에 카르타고 군대 복무를 열망하였다.

    한니발은 이태리 반도에서 더 효과적인 모병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야만인 골족은 현대적인 전투를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그리스나 에트루스칸을 징모하고 싶었다. 그들은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적인 전투 방식을 이해하고 있던 문명화된 사람들이었다.


    한편,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공격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는 아프리카 공략 계획을 즉시 중단하고, 셈프로니우스(Tiberius Sempronius Longus, 260-210 BC; 로마 원로원 집정관)에게,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 군대가 지쳐 있을 터이니 이태리 반도에 발을 들여놓는 즉시 격파하라고 했다. 

    알프스를 넘는 일은 대단히 어려웠다. 스키피오의 군대도 뒤따라오고 있었다. 추위와 험악한 지세로 인해 한니발의 전투용 코끼리는 많은 수가 죽었고, 산악 족들의 공격으로 많은 병사도 죽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그 산악 족들로부터 많은 병사를 모집하기도 했다. 출발 시 그의 군대는 1만 2천 명의 아프리카인 보병과 8천 명의 스페인 보병 그리고 6천 명의 스페인 기마병이었다. 한니발은 전쟁신이 티베르 족(Tribus; 고대 로마 시민의 일파)에게 준 선물이 바로 로마군대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 만큼 강한 군대라는 말이었다. 그는 곧 그 군대와 마주칠 터였다.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티키누스(River Ticinus; 현재의 이태리 북부 Pavia를 흐르는 강) 강변에 선 한니발은, 전투대형을 짓고 있는 로마군을 보았다. 재블린으로 무장한 경보병을 전면으로 청동 투구와 철갑옷을 입은 중보병 부대가 눈에 들어왔다. 병사마다 경, 중 두 개의 필룸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길이 약 4피트의 나무 장대에 길이 3피트, 두께 1/2인치의 철봉을 연결시킨 필룸은 그 끝이 날카로운 창이었다. 경필룸의 사정거리는 약 20보, 중필룸은 10보 정도였다. 이 무기는 적의 방패를 관통할 수가 있었는데, 일단 관통을 하면 빠지질 않아, 그 방패를 낚아챈 다음 칼로 방패의 소유자를 공격할 수가 있었다. 로마 보병의 전면 두 횡대는, 횡대간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따라서 두 횡대 간 공간 방어는 두 번째 횡대가 담당했다. 로마 군대는 지휘자가 적재적소에 신속히 부대를 배치할 수 있도록 편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편제는 적 보병의 방진方陣(Phalanx: 창병들이 여러 겹의 긴 횡대를 이루어 공격하는 전술)을 분쇄할 수가 있었다. 특히 울퉁불퉁한 지면에서는 더욱 효과적이었다. 그 같은 지면에서 방진은 일관된 직선 대형을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마 병사들은 어느 지형에서도 싸울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었다. 하스타티(Hastati; 제1선)와 프린시페(Principe; 제2선)로 구성된 전면 두 대열의 뒤에는, 창을 든 방진이 있었다. 이 부대를 트리아리이(Triarii )라고 불렀다. 하스타티와 프린시페는 젊은 병사들로 구성되었고 트리아리이는 노병들로 그다지 민첩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전투 경험으로 단련되어 있었다.

 

       Phalanx 陣

    한니발은 일생을 로마군 체제를 연구한 사람이었다. 이제 전투에 임한 그는 로마 보병이 아닌 기병에만 관심이 있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그 1/4이 기마병이었다. 모두가 말 등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에 반해 로마 기마병은, 전 군대의 1/10에도 미치지 못했다. 말을 다루고, 타는 일도 서툴렀다. 한니발은 기병을 풀었다. 남아 있던 코끼리도 공격에 가담시켰다. 코끼리가 풍기는 냄새가 낯설었던 로마의 말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카르타고의 기마병이 로마기마병을 격파한 것이다. 스키피오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누미디아 기마 부대가 로마 군의 배후로부터 트리아리이를 공격하자 트리아리이의 노병들은 창으로 맞섰다. 그러나 스키피오의 부상으로 로마군은 프라센티아(Placentia: 현재의 이태리 북부 Piacenza 시) 요새로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2천 명에 달하는 골족 출신 로마 병사들이 한니발에게 항복하였다. 카르타고 군대의 젊은 장군들은, 이제 로마 군대가 불패의 무적 군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또 그들이 해방 시킬 사람들은 그들 편에 설 터였다.

    부상을 당한 스키피오를 대신하여 집정관 셈프로니우스가 사령관 직을 맡았다. 로마 원로원에는 두 명의 최고 집정관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귀족으로부터 (스키피오의 경우) 또 한 사람은 평민에서 선출되었다. 그때는 12월이었는데, 다음 달 1월에 최고 집정관 선거가 있었다. 셈프로니우스는, 만일 자신이 침략자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재선이 될 것임을 확신했다. 그는 1만 4천의 병력과 2만 2천의 예비 병력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다. 목에까지 차는 차가운 트레비아 강물을 건너 눈보라를 헤치는 긴 행군 끝에, 해자로 둘러싸인 성벽 뒤 카르타고 군을 만났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의 사나운 아프리카 그리고 스페인 기마병은 로마 기마병을 격파하고, 최후의 저지선까지 로마 보병을 몰아붙였다. 전투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매복해 있던 또 다른 카르타고 부대가 로마 군대의 후미를 유린했다. 이 전투에서 패한 셈프로니우스는 당연히 재선에 실패했다. 1월부터 2월까지 양 측은 모두 겨울을 보내기 위해 후방으로 부대를 뺏다. 포 계곡(Po Valley; 이태리 북부 알프스 서남쪽 계곡 )으로 물러선 한니발은 그곳 골족을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켰다.

    기원전 217년 한니발은 다시 남쪽을 향했다. 얼어붙은 아페닌 산맥(Apennines; 이태리 반도 중앙을 관통하는 산맥)을 넘어, 음습한 습지대를 지나 한니발의 군대가 온다는 걸 로마는 생각지도 못했다. 한니발은 적보다 자연 장애물 통과가 더 어렵다는 걸 알았다. 습지대에 이른 그의 부대는 잠을 잘 수 있는 마른 땅을 찾지 못해 수면을 못 취한 채 4일간의 행군을 했다. 이때 한니발은 말라리아에 걸려, 그 열로 인해 왼쪽 눈이 멀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로마군의 최전방 경계선을 돌파할 수가 있었다. 로마군을 유인하기 위해 한니발은 계략을 썼다. 들판과 마을에 불을 지르고, 약탈과 함께 그 주민들을 죽였다. 그렇게 하면 로마군이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다.

    집정관 플라미니우스(Gaius Flaminius; 275-217 BC)는 유능한 사령관으로, 골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귀족 출신 집정관 세르빌리우스에게 한니발 군대를 추적하여 그 행군을 저지시키라고 했다. 자신은 한니발을 체포할 계획이었다.

    한니발은 플라미니우스가 추적해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트라시메노 호수(Lago Trasimeno; 이태리 Perugia 주 소재)로 부대를 물리었다. 호숫가를 따라 좁은 길이 나 있었다. 플라미니우스의 부대가 도착했을 때 그곳은 안개에 덮여 있었다. 호숫가를 일렬종대로 행군하던 그들은 카르타고군의 비오듯 쏟아지는 재블린과 화살, 투석기의 공격을 받았다. 부대의 선두는 한니발 보병 부대의 방진에 저지를 당했다. 스페인 기마병부대는 후방으로부터 공격해왔다. 언덕 위에 매복한 한니발의 군대는 눈에 띄지도 않았다. 전열을 가다듬을 틈도 없었다. 많은 로마 병사들이 죽은 다음, 언덕 위로부터 카르타고군이 물밀 듯이 내려왔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4만 명의 로마 군대 중 1만5천 명을 포로로 하고 1개 군단 6천 명의 항복을 받아냈다. 로마 역사상 전례 없는 패전이었다. 플라미니우스를 포함하여 남은 병력은 모두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한니발은 로마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와 갑옷으로 부대를 재무장했다. 한니발은 또 많은 동맹군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는 세르빌리우스와 싸우기 위해 남진하는 대신, 아페닌 산맥으로 되돌아 가 휴식을 취했다. 그때 로마는 독재자 파비우스( Quintus Fabius Maximus Verrucosus, 280 – 203 BC)를 집정관으로 선출하였다.

      파비우스

    독재자 선출은 전례가 없던 일은 아니었으나 흔한 일도 아니었다. 다음 선거 때까지 그는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가 있었다. 원로원, 집정관, 호민관은 그에게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자신의 권력 행사마다, 그 배경을 설명했다. 그렇게 하는 집정관은 애국자 중의 애국자였는데 파비우스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정복자 한니발에게 협조는 했으나 거리를 두었다. 그는 한니발 군대의 군량미를 차단하려고 노력을 했고, 자신을 전투에 끌어들이려는 한니발의 시도를 피했다. 한니발을 약화 시키고 그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애를 썼다. 파비우스의 전략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한니발은 이태리 반도 전역에 걸쳐 약탈을 계속했다. 옮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빼앗았고, 옮길 수 없는 것은 모조리 파괴했다. 그리스와 샘(Samnium; 고대 이태리 중부에 있던 나라)그리고 리구리아(Liguria; 이태리 북서부 해안지방)는 한니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에게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로마의 역사가나 작가들은, 글을 팔아서 먹고 살지 않았다. 그들은 리비우스(Titus Livius, 59 BC – AD 17)나 폴리비우스(Polybius, 200-118 BC )처럼 부유한 귀족이거나 귀족의 후손이었다. 폴리비우스는 스키피오와 같은 부족 출신이었다. 그 시대 로마 공화정은 귀족 출신의 집정관과 평민 출신의 집정관이 함께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귀족 출신 집정관은 애국자요 영웅으로, 평민 출신 집정관은 염소라는 말로 경시를 당했다. 리비우스는 플라미니우스를 “경험도 없고 군사적 능력도 없는 자”라고 했지만 사실과는 다른 말이었다. 플라미니우스는 스키피오의 두 형제, 냐에우스와 푸블리우스보다 훨씬 뛰어난 장군이었다. 평민 출신 집정관 가운데 역사가들로부터 가장 모욕을 당한 사람은 바르로(Gaius Tarentius Varro; 218–200 BC)이다. 리비우스는 그를 “무모하고 성미가 급하며 거만하고 피상 적인 미친 놈”이라고 까지 했다. 그러나 사실과는 다른 말이었다.

     바르로

    한니발을 보는 바르로와 파비우스의 관점은 완전히 달랐다. 파비우스는 한니발이 이태리 반도에 머물면 머물수록 약화될 것으로 보았다. 로마나 기타 대도시를 결코 점령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농부나 노예 이외에 누구도 해치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바르로는 한니발이 죽을 것이며 그의 군대도 곧 굶어 죽을 것이라고 했다. 한니발은 시골을 떠돌며 농가를 불사르고 마을을 약탈하며 농부들을 죽이고 있었다. 파비우스도 한니발의 살육 현장을 목격한 바가 있었다. 바르로가 파비우스에게 묻기를 로마가 한니발을 동맹국으로 기대할 수 있느냐고, 로마가 백성을 보호하지도 못하면서 카르타고에 복종하면 그 대가로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바르로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사실 한니발은 파비우스와 그의 동료 집정관들에게 은밀히 뇌물을 주고 있었다. 농부들은 토지를 버리고 도주를 하여 로마로 몰려들었다. 몇 푼의 돈에 농토를 팔았다. 그 토지를 원로원 의원들이 싼 값에 사들여 노예를 부려 경작을 했다. 그 다음 선거에서 바르로는 보수적인 귀족 파울루스(Lucius Aemilius Paulus, 229 – 160 BC; 마케도니아를 정벌한 로마 장군)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로마는 다시 거대한 군대를 조직하여 집정관들이 매일 번갈아 지휘를 했다. 당시 로마 군대는 집정관들이 나누어 사병으로 삼았지만, 바르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침내 로마와 카르타고가 운명의 날을 맞았다. 기원전 216년 8월 3일, 그날 로마 군대의 사령관은 바르로였다. 로마 군대는 8만의 보병과 6천명의 기마병 등 총 8만6천으로, 한니발 군대의 두 배가 넘는 숫자였다. 한니발에게는 1만의 기마병이 있었다. 로마군은 그 대형의 크기에 문제가 있었다. 1개 군단은 5점형(Quincunx; 네 귀와 중앙에 배치) 대열을 취했는데 그 길이는 2마일에 달했다. 따라서 나팔로 명령을 내리는 지휘 시스템 운영이 불가능했다. 그 길이를 짧게 하기 위해 바르로는, 보병 중대를 줄였다. 편제를 바꾸니, 1개 군단을 3개의 방진으로 바꿀 수가 있었다. 

    Quincunx 배치

    칸네(Cannae: 이태리 남동부 아드리아해 연안 Apulia 지역 고대 로마 마을)지역은 땅이 평평하여 방진에 최적이었다. 그러나 대열은 아직도 길어 1마일을 넘었다. 바르로는 중기마병을 우측에 배치한 다음, 부사령관 파울루스(Lucius Awmilius Paulus, 229 – 160 BC)가 지휘토록 했다. 레굴루스(Marcus Atilius Regulus, 307-250 BC)와 제미누스(Gnaeus Servilius Geminus, ? -216 BC) 두 장군에게는 보병을 지휘토록 했다. 바르로 자신은 경기마병을 지휘하여 좌측을 맡았다.

     Cannae

    한니발은 말에서 내려 로마군을 유인했다. 바람은 그의 등 뒤로부터 불어 와 로마군은 먼지를 맞받아야 했고 아침 햇살도 정면으로 보아야 했다. 한니발 좌측의 보병과 강 사이에는 스페인과 골족의 중기마병이 배치되었다. 우측에는 누미디아 중기마병을 배치했다. 좌우의 기마병 가운데에는 로마군에서 노획한 갑옷으로 무장한 아프리카 중보병을 배치했다. 보병의 지휘소는 카르타고 군 후면의 V자형 구릉의 양쪽 날개 끝에 두었다. 보병은 활 모양의 굽은 횡대를 지어, 중간 돌출 부분에 골족 보병을 배치하여 로마군을 맞도록 했다. 벌거벗은 윗몸에 뿔이 달린 투구, 긴 칼을 찬 골족은, 바로 야만인 그 모습이었다. 그러나 모습은 같았지만, 한니발 군대의 골족은, 그의 지휘 하에 지난 2년간의 전투를 통해 훈련 받은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전투 경험이 풍부한 보병들이었다. 로마 군이 함성을 지르며, 창과 방패를 서로 부딪쳐 소리를 냈다. 창병槍兵과 궁수들이 전면으로 나왔다. 한니발이 발레아레스(Baleares Islands; 스페인 지중해 연안 군도) 투석병사投石兵士들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투석병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은 돌을 장거리, 중거리, 단거리로 보낼 수 있는 3개의 투석기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장거리 투석기로 쏜 돌은 화살보다 멀리 날아 로마 군의 머리 위로 비가 오듯 쏟아졌다. 돌 공격을 한 다음 기병이 돌격했다. 로마군 중기마병은 카르타고의 측면 공격을 두려워하여, 보병과 강 사이 좁은 공간에서 밀집 대형을 이루고 있었다. 카르타고군의 측면 공격이 두려워 한쪽을 강으로 방어를 한 것이다. 한니발의 기병은 재블린으로 공격했다. 필룸처럼 생긴 커다란 창은 로마군의 방패와 갑옷을 뚫었다. 재블린을 맞은 로마군의 말이 미친 듯이 날뛰며 밀집한 로마군 대열에서 뒷발질을 쳤다. 로마군 중기마병은 재블린 대신 창을 휘둘렀다. 그러나 말 위에 앉아 무거운 창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가 없었다. 카르타고는 투석기로 로마군 기병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돌을 맞은 로마군 부사령관 파울루스는 뼈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었다. 출혈이 심했던 그는 혼전 중 죽었다. 질서가 무너진 로마 기마병은 말에서 내려 보병으로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원래 보병이 아니었다. 무질서한 폭도 무리와 다름이 없었다. 한니발의 켈트족 기마병도 말에서 내렸다. 칼을 들고 난투극을 벌리는 건 그들의 타고난 재능이었다. 이 싸움에서 로마의 중기마병은 전멸을 당했다. 바르로의 군대는 로마시민이 아닌 여러 종족의 연합군으로 재블린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사용할 수가 없었다. 누미디아 병사들이 사방에서 물밀 듯이 공격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혼전 중 5백 명의 누미디아 병사가 로마군에게 항복을 한 경우도 있었다. 로마군은 그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다음, 후방으로 압송하기 위해 로마 기병대를 통과하게 되었다. 그때 누미디언들은 다시 반격을 가해 로마 기병들의 목을 거의 모두 잘랐다.

    칸네 전투

    바로 그때, 로마군의 우측에서 전투를 끝낸 카르타고 중기마병 부대는 로마 군의 주변을 돌아 배후로부터 바르로 부대를 공격했다. 당황한 로마 경기마병 부대는 사령관 바르로와 함께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투 대열의 중간에 위치했던 로마 보병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카르타고 군 횡대의 가운데를 집중 공격했다. 혐오스러운 골 부대를 끝장내기 위해서였다. 한니발은 동생 마고(Mago Barca, 243–203 BC)와 함께 흩어진 그들을 지휘하여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다. 골 부대가 뒤로 후퇴를 했다. 언덕 뒤에는 한니발의 아프리카 방진 부대가 있었다. 로마 보병이 계속 몰아붙였고, 한니발의 골 부대는 뒤쪽 언덕까지 밀리었다. 더 이상 밀릴 수는 없었다. 그때 한니발의 아프리카 방진부대가 언덕 뒤로부터 나타났다. 양측면의 방진부대도 좌우 협공을 가했다. 협공을 당한 로마 보병부대는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된 로마 창병은 창을 던질 수도 없었다. 그때 뒤로부터 카르타고 기마 부대가 공격을 했다. 말에서 내린 그들은 칼을 들고 로마 군을 베었다. 전투는 오후에 끝이 났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 전사자는 7만 명이었다. 그 전에도 이후에도 예가 없었던 최악의 로마군 참패였다.

    칸네 패전은 로마로서는 견디기 힘든 최악의 패배였다. 한니발은 로마의 지배를 받던 종족들의 대 로마 반란을 고대했다. 반란이 일어나면 그들을 동맹군으로 받아들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반란은 없었다. 카푸아(Capua; 이태리 남부 도시)가 한니발 편을 들기는 했지만 그의 군대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전보다 모병도 어려웠다. 한니발은 당황했다. 당황은 로마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바르로만은 예외였다. 파괴자를 제거하기 위해 로마는 꽃다운 젊은이들을 희생시킨 패전을 했지만, 로마의 동맹군들은 로마를 잊지 않을 것임을 그는 알았다.

    한니발은 이태리 반도에 머물렀다. 그는 4개 군단의 로마 군대를 더 멸하고 5명 이상의 로마군 사령관을 더 죽였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의 군대는 점점 약화되어 갔다. 결국 아프리카로 돌아간 그는 기원전 202년 자마(Zama; 현재 튀니지아 Siliana 시 인근)전투에서, 한 때 그의 적수였던 스키피오의 아들(Cornelius Publius Scipio, 236–183 BC )에게 졌다. 젊은 스키피오는 한니발로부터 많은 전술을 배운 사람으로, 책략에서 카르타고를 압도했다. 그는 누미디아 왕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그 기병을 전리품으로 챙기기도 했다. 자마전투에서 패한 한니발은 다음 날을 위해 도주를 했지만, 그것은 사실 한니발 전쟁(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났음을 뜻했다.

  무심한 칸네 들판과  전투 기념비

    오늘날 역사가들은 기원전 207년 네로(Gaius Claudius Nero, 247-189 BC)가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을 격퇴한 메타우루스 전투(Battle of the Metaurus; 이태리 마르세 주를 흐르는 Metauro 강변 전투)를 제2차 포에니 전쟁의 결정적인 싸움으로 보고 있다. 이 전투에서 패한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은 목이 잘려 죽었다. 그러나 당시 하스드루발 군대는 로마를 포위, 공격할만한 충분한 병력이 없었다. 그래서 진 것이다. 다시 말해 칸네 전투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결정적인 전투였다. 전투에서 승리한 한니발은 이후 14년 동안 끊임없이 이태리 반도를 약탈했다. 그 기간 중 농부들은 한니발의 약탈을 피해 대지주나 원로원 의원들에게 헐값으로 토지를 판매하고 로마로 몰려들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그들은, 그때까지 지극히 안정적이었던 로마 공화정을 뿌리 채 흔들어 놓았다. 이에 따라 마리우스, 술라, 폼페이우스, 줄리어스 씨저 같은 군사적 모험가들이 몰락한 농민들을 사병으로 이용할 수가 있었다. 이로 인해 결국 시민들이 지배했던 로마 공화정은 사라지고 황제가 지배하는 로마제국이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끝)


* 회전會戰: 양측이 서로 합의한 날짜와 장소에서 만나 싸우는 전투.

Written by Hung S. Park

 

 


 

 

 













Comments

  1. 칸네회전에서의 반월진은 아마 그전에 있던 회전에서 스페인 켈트 용병진이 중앙돌파를 당해서, 완전한 포위망 형성에 실패한 경험에 대한 보완책으로 완전섬멸을 노리고 배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기병전은 아프리카 중장보병이 전술기동을 할때, 로마기병 내지 기타부대로 부터 방해를 받지 않도록 공간을 열어놓는데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기병전은 보병전의 보조역에 머물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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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켈트 스페인 용병대에 올인하고 예비대를 두지 않았던 로마군은 아프리카 중장보병의 전술기동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비대란 그런때 필요한 것이거든요.
    예비대의 개념자체가 이미 높은 수준의 용병이었단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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