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명의 출발

 

Battle of Adrianople(378 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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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당사자: 동로마와 서고트 족(Visigoths: 게르만 족의 일파)


    동로마제국 황제 발렌스(Valence, 328~378 CE)의 시야에 강 건너 한 무리의 서고트족이 들어왔다. 그들은 다뉴브 강 건너 편 강변에서 무기를 흔들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공격의 함성이 아닌, 제국 영토로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애원의 소리였다. 4세기 로마 역사가 유나피우스(Eunapius: the Lives of Philosophers and Sophists의 저자)는, 그들이 20만 명을 넘는 서고트족 전사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만일 허락을 해준다면 로마제국에 충성하겠다고 서고트족은 약속했다. 페르시아와 전쟁 경험이 있던 발렌스는 이 서고트 족의 병사들로 로마군대의 무력을 증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두 장군 루피키누스(Lupicinus, 368~377 CE)와 막시무스(Maximus, 335~388 CE )에게 서고트가 무기를 버린다는 조건으로 영토 내로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하라고 했다.

  

     - Valence 황제 -

    고트족(Goths)과 로마는 1세기 이상 이웃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제1차고트전쟁(250~270 CE)말고는 대체로 평화적이었다. 오늘 날 그들을 짐승 가죽을 입고 약탈, 강간, 학살을 저지른 야만 민족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들은 기독교도로서 글자도 있었고 평균적인 로마인들만큼 교육을 받은 민족이었다. 많은 고트인들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읽고 썼다. 고트인 조단(Jordanes: 6세기경 동로마 역사학자)은 이름난 역사학자로서 그 시대에 관한 정보는 대부분 그가 남긴 기록이다. 그러나 훈족은 달랐다.

훈(Huns):

    훈족은 야만인이었다. 문자도 없었고 오직 목축과 전투만 일삼았다. 수세기 동안 그들은 중국 대륙을 괴롭히기도 했다. 서진을 하여 페르시아 접경까지 이르기도 했다. 당시에는 사방을 색깔로 표현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은 적색, 북은 검은색, 중앙은 황금색이었다. 오토만 터키는 그들 북쪽의 바다를 흑해(Black Sea)로 남쪽 바다는 홍해(Red Sea)로 불렀다. 이에 따라 훈족을 백인(Caucacian)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는 오해였다. 그들은 원래 터키족이었으나 세력이 확장되면서 몽고인, 만주인, 이란인 등 타 인종과 결합한 종족이었다. 

 

         Huns

    4세기에 들어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초원으로 진출한 훈족은 한 때 중국 대륙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몽골족인 아바르족(Avars;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의 북동코카서스인종. 현 러시아 다게스탄 공화국 인종)에 패하여 서쪽으로 쫓겨났던 것이다. 초원을 따라 유럽으로 향하던 훈족은 알란족(Alans: 고대 이란 유목민)과 충돌하였다. 알란족은 사르마타족(Sarmatian: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현재의 이란을 지배했던 종족으로,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스키타이를 몰아내고 주도권을 잡았던 종족) 가운데서도 주도적인 세력이었다. 알란족은 용맹스런 전사들이었으나 슬라브족, 사르마타족 등 타 종족을 통합할 능력은 없었다. 수세기에 걸친 전투를 치루면서 알란족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 Avars 족 - 

    훈족을 만난 알란족은 그들과 통합할 능력이 없었다. 아니면 훈족의 무력이 더 강했을 수도 있었다. 후일 징기스칸의 전사들처럼 훈족의 군사조직은 10명, 100명, 1,000명, 경우에 따라서는 10,000명 등 10진법에 따른 단위였다. 그들은 모두 말을 탄 기병들로 갑옷을 입고 주 무기는 활이었다. 당시의 로마 역사가 마르셀리누스(Ammianus Marcellinus, 330~400? CE)는 “훈족은 멀리 떨어져, 날아가는 무기로 싸운다” 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본 적 병사들이 기가 꺾기면 목숨을 아끼지 않는 훈족이 기병들이 달려들어 육탄전을 벌렸다.

    알란족은 초원의 유랑족이 그렇듯 경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중기병도 있었다. 지휘관들은 철갑옷에 칼과 창으로 무장했다. 훈족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가죽이나 나무로 만든 안장을 사용했다. 안장이나 등자鐙子(말에 오르기 위한 발 받침대)는 창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10단위의 부대조직은 적 창병을 만나면 쉽게 산개하여 공격을 무력화 시킨 다음, 곧 다시 대열을 정렬할 수가 있었다. 그 훈족이 초원을 이동하며 많은 수의 알란족을 통합한 것이다. 통합되지 않은 알란족은 여기저기 흩어졌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바로 고트족과 합류했고 또 다른 일부는 서쪽으로 계속 가, 초원이 끝나는 지점에서 숲속으로 들어간 갔던 것이다.

    알란족을 통합한 훈족은 사기가 더욱 충천했다. 훈족이 또 다른 사기충천한 종족을 만났으니 바로 동고트족(Ostrogoths)이었다. 동고트족은 사르마타족으로부터 중기병 운영 술을 배워 알고 있었다. 그들은 왕의 지휘 하에 슬라브족과 사마르타 족을 정벌한 후 무리를 이끌고 동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훈족과의 전투에서 왕이 전사하자 많은 수가 훈족에 편입되었다. 편입되지 않은 동고트족은 새로운 왕 비티미르(Vithimiris; 서기 376년경 현재의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던 인물)의 지휘 하에 서쪽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안테스족(Antes; 흑해 북서쪽 다뉴브강 하류 현재의 몰도바와 중앙우크라이나, 러시아 중서부 지방에 살았던 동슬라브족)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었다.

    동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안테스가 패배했고 비티미르는 안테스족의 왕과 그의 아들들, 그의 휘하 귀족 70명을 모두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너무나 잔인한 살육이었다. 죽은 안테스 왕과 그 무리들은 알란족으로, 훈족 군대의 알란족 지휘관들과 친척관계에 있었다. 훈족은 그들에게 군사를 주며 복수하라고 했다. 마르셀리누스는 “비티미르는 왕이 되어 한동안 저항하였으나 결국은 전투에 패하여 사망하였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수가 더 줄어든 동고트족은 더 멀리 서쪽으로 퇴각하였다.

    비티미르가 죽자 고트족의 알레테우스(Aletheus, 376~387 CE)와 알란족의 사프락스(Saphrax, ?~400? CE)가 비티미르의 어린 아들 섭정이 되었다. 이때 훈족의 주력부대가 동고트족을 쫓았고, 동고트족은 사촌격인 서고트족 가까이 있게 되었다. 두 고트족은 비록 같은 언어를 사용했지만 협조 관계는 아니었다. 그때 훈족이 서고트족을 공격을 하여 동로마 국경까지 몰아쳤다. 이렇게 해서 이 이야기의 첫머리에서 말하는 동로마 황제 발렌스와 다뉴브 강을 사이에 두고 대면하게 된 것이다. 한편 서고트족을 따라온 동고트족은 몰래 먼저 강을 건너 제국의 영토로 들어갔다.

전쟁:

    서고트 족은 무기를 버리고 강을 건너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창녀로 한다는 조건으로 동로마는 무기 휴대를 허락했다. 약속한 대로 식량도 보급했다. 그러나 서고트는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마음대로 행동했다. 먼저 강을 건넜던 동고트도 마찬가지였다. 동로마와 아무런 사전 약속이 없었던 동고트족은 마음대로 제국 내를 활보했다.

    이 같은 고트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루피키누스(Lupicinus, 368~377 CE)와 막시무스(Maximus, 335~388 CE)는 서고트 왕과 그 일행을 잔치에 초대하여 암살을 시도했다. 암살 현장을 탈출한 몇몇 서고트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동고트가 합류했다. 소규모 부대로 편성된 그들의 군사가 여러 곳에서 산발적인 공격을 했고 동로마의 정규군이 이를 막아내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현대전으로 보면 게릴라 전법이라 하겠다.

    동로마 역시 산발적인 매복 작전으로 싸웠다. 마침내 고트족은 그들의 본거지인 아드리아노플(Adrianople: 지금의 터키 북서부 Edirne 시)로 퇴각했다.

          - Adrianople -

    이에 동로마 황제 발렌스는 한 번의 큰 전투로 그들과의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서고트 왕 프리티게른(Fritigern, ?~380 CE)은, 만일 자기를 트라키아(Thracia)의 맹주로 허락해준다면 평화를 지키겠다고 제안했다. 물론 발렌스는 그의 요구를 거절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동로마의 기병들이 발렌스의 측면에 보명은 전면에 배치되었다. 

 

       트라키아

    동로마군을 본 프리티게른은 겁에 질려 다시 평화를 지키자고 제안했고 이에 따라 발렌스는 고딕 진영에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회담이 열리기도 전에 사절단을 호위하던 한 병사가 회담장 뒤에서 움직이는 이상한 그림자를 보았다. 병사가 활로 그를 쏘았다. 이로 인해 협상은 커녕 고트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 로마 사절단은 퇴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어 고트의 공격으로 로마 보병의 대형이 무너졌다. 그때 알레테우스와 사프락스가 지휘하는 동고트족과 알란족이 매복해 있던 숲속으로부터 노도처럼 몰려나와 로마 기병을 짓밟았다. 로마 기병이 붕괴된 것이다. 곧이어 합세한 서고트족과 함께 동로마 보병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기습을 당한 동로마군은 대오를 정돈할 수도 없었다. 고트족과 알란족 병사들이 로마 보병과 뒤섞여 로마군은 무기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 전투에서 동로마군의 2/3에 해당하는 4만 명이 죽었고 발렌스 황제도 전사하였다. 그때부터 6백 년 전에 있었던 칸네 회전 이후 로마 최악의 참패였다.

     -아드리아노플 전투 -

결과:

    아드리아노플 전투는 기마전술(Cavalry Cycle: 기마부대로 적 보병을 에워싸는 전술)의 효시로 간주된다. 이 전술은 중세 내내 유럽 전쟁터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는 또한 로마제국이 몰락해가는 걸 뜻했다. 고트족은 이제 자신의 왕과 귀족이 지배하는 제국 내 독립적인 국가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제약 없이 제국 내를 활보했다. 때로는 황제에게 충성을 보이기도 했지만 겉치레였다. 서고트 족은 서로마제국을 유린하고 이어 갈리아(현재의 프랑스)와 스페인도 점령하였다. 결국 서고트족은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476 CE) 이태리 반도를 차지하였다. 그 결과 고대 로마 문명은 그 주도권을 빼앗기고, 게르만 문화와 기독교 문명이 결합한 현재의 서구 문명이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C)

for More Readings;

www.beethovennote.com

 

 

Comments

  1. 로마제국의 멸망을 가져온 변곡점으로 역사학자들은 아드리아노플 전투를 꼽습니다. 서기 378년 8월 발렌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은 도끼와 방패를 든 고트족에게 완패했고, 황제 또한 전사했습니다. 물론 군사적 패배는 강대국이 겪는 쇠퇴의 절정이지요. 그러나 로마의 몰락은 이 전투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실은 수세기 전부터 안에서 썩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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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로마가 멸망한 후 세계는 1000년 동안 어둠에 빠졌습니다. 제국의 몰락은 과잉 팽창이나 이민족의 위협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쌓아 영토 확장을 멈추었고, 명나라는 정화의 함대를 불태웠음에도 몰락했습니다. 팽창이 아니라 고립이 독이 됐고요. 위대한 문명을 위협한 것은 내부에서 자초한 '경제적 불균형'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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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현재 미국은 심각한 재정 불균형에 직면해 있습니다. 최근 미국의 재정 적자는 해마다 약 1조달러씩 불어나고 있고요.
    미국의 쇠퇴가 가져올 거대한 공백을 도전자의 힘으로 메우기에는 역부족일 것이고, 강대국 흥망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야기 속에서 날카로운 통찰을 돋보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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