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Baro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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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적으로 바로크 시대는 대략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중엽까지(1600~1750)의 기간을 말한다. 이 시기는 음악, 미술뿐만이 아니라 계몽주의 등장, 30년 전쟁 등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바로크라는 어휘는 포르투갈어로 “비틀린 진주”라는 뜻으로 당초 경멸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많은 학자들이 오랜 동안 무시해왔던 말이었다. 18세기와 19세기 초에 이르러 평론가들이 바로크 예술작품을 비평하면서 이 용어가 역사에 등장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주로 이전 시대의 작품(특히 르네상스 작품들)과 비교하면서 바로크 작품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부정적 인식이 사라지고 이제 바로크라는 단어는 한 시대를 특정 짓은 어휘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 성 베드로 성당(바로크 양식)-
17세기와 18세기 초에 걸쳐 유럽은 여러 나라들의 영고성쇠에 따라 많은 정치적인 지형이 바뀌기도 했다. 결혼을 통한 국가 간 동맹도 있었고 종교 분쟁, 특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30년 전쟁(1618~1648)을 비롯하여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합스부르크가(Habsburg Family)와 그 적대 세력 간의 분쟁은 유럽의 안정을 해쳤음을 물론이다. 30년 전쟁의 결과 1648년 베스트팔리아 조약(the Treaty of Westphalia; 1648년)이 체결되었고, 오스트리아-항가리제국이 탄생하였다. 또 네델란드연합국(the Provinces of the Netherlands), 스웨덴, 프랑스의 세력이 확장된 반면 스페인, 덴마크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아울러 민족국가의 건설이 강조되기도 했다.
현대적인 국가 시스템의 등장이 전적으로 30년전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또한 그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이 전쟁은 또한 당시의 유럽 국가들의 역사적,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들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30년 전쟁이 유럽 붕괴의 징후였다는 사실은 1562년부터 1721년까지 160년 동안 전 유럽이 평화로웠던 시절은 오직 4년에 불과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가 있다.
30년 전쟁에 내재했던 본질적인 분쟁과 당시의 유럽이 겪은 혼란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간의 끊임없는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리아 조약의 결과 정치적인 지형의 변화가 있었음을 물론 이제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다. 오로지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전제 시스템이 실사구시적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세속의 정치 시스템으로 바뀐 것이다.
- 30년 전쟁 -
끊임없는 전쟁은 세속 정부의 성립을 위한 움직임을 자극했고 중세 이래의 낡은 군사 기술의 혁신을 가져왔다. 16세기말과 17세기 초에 이르러 대포를 비롯한 신식무기의 등장은, 대규모 전투부대의 운영과 탄력적인 기동전을 가능케 했다. 아울러 대규모 군사력에 대한 필요성으로 이를 확보하고 통제하기 위한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군사정책은 결국 세속 정부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정치 영역에서의 빠른 세속화는 과학과 결합되었고, 이 같은 새로운 과학적 사고는 기존의 종교적 신념을 흔들어 놓기도 했다. 이제 천문학, 물리학, 생물학, 수학 등이 등장한다. 수학과 물질론(우주는 움직이는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이론)은 계몽주의의 토대가 되었고 이로부터 증명 불가능한 두뇌 속 사유가 아닌 경험을 중시하게 되었다.
새로운 학문은 객관적이지 않고 관찰되는 사실과는 거리가 먼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7세기말과 18세기 과학 분야에서의 위대한 진전은 물론 실험과 증명에 토대한 것이다. 해석기하학과 미적분이 발견되기도 했고 가톨릭의 우주관과는 다른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등장하기도 했다. 화학의 급속한 발전은 의약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보일의 법칙이 발견되어 물질에 관한 원자적 설명이 가능했고 가스의 부피와 압력의 관계가 밝혀지기도 했다. 하베이(William Harvey, 1578~1657)의 해부학은 심장의 기능과 구조, 혈액의 흐름을 밝혀내기도 했다.
뉴턴(Sir Isaac Newton,1642~1727)은 물리학자였지만 또한 계몽주의 토대를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과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역시 이 시대에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데카르트의 회의주의 철학은 진리를 밝히는 도구가 되었다. 물질과 정신의 공존이야말로 바로 그의 철학의 토대였다. 이 같은 과학적 사고는 전분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증거와 증명을 요구하는 과학적 사고는 무신론자들의 신념에 용기를 북돋은 반면 가톨릭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이단이었다.
17세기 유럽 국가들은 보다 체계적인 장거리 무역을 하기 시작했다. 시장의 확대와 보다 많은 이윤 추구 보다 많은 상품에 대한 욕구는 당연히 치열한 경쟁을 불렀으며 장거리 항해나 지리적 탐험에 필요한 지도제작과 선박 건조 기술의 향상을 가져왔다. 16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거의 모든 중요한 항로들이 개척되어 있었다. 17세기에는 식민지 확대에 따라 금융과 무역 부문의 제도 변화가 있었고 이에 따라 세계 시장이 등장하게 되었다. 1609년에는 암스텔담 은행이 설립되었고, 도시에서는 여러 나라의 화폐가 서로 태환이 되기도 했다. 은행 구좌를 소유한 상인들은 이제 송금도 가능하게 되어 그때까지의 지불 수단이었던 금이나 은을 대체하게 되었다. 무역 실무는 더욱 복잡해져 그때까지의 쌍방 무역을 벗어나 삼각무역도 가능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원하는 상품 범위가 넓어지고 보다 대규모로 거래가 가능케 된 것이다. 거래 상품이 넓어 졌다는 말은 식습관이 변했다는 말로 이제 커피와 홍차가 일상적인, 인기 있는 음료가 되기도 했다. 노예 노동에 의한 설탕, 담배, 쌀의 수요 증가는 노예무역의 증가를 가져왔다. 이들 상품 생산을 늘리기 위해 아프리카로부터 구대륙과 신대륙으로 노예 수입이 급증했다.
지주 엘리트들이나 봉급을 받는 관료들은 국제무역 팽창을 싫어했지만 어쨌든 이를막지 못했고, 세계를 상대로 한 중상주의는 유렵의 면모를 일신시키기도 했다. 이와 같은 국제무역의 번영은 당연히 일상생활에도 반영되어 새롭고 세련된 예의범절이 필요하게 되었다. 가처분 소득의 증가와 함께 늘어난 신흥 부자들은 예술품에 많은 돈을 썼고 화가들에 후원자가 되기도 했다. 이는 바로크 후기 로코코의 등장 원인이기도 하다. 부자와 귀족들을 위한 실내 장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 C)
- 바로크 회화 -
Written by Hung S.Park
바로크(Baroque)란 포르투갈어로 "찌그러진 진주"라는 뜻이라 합니다. 본디 미술에서 시작된 이 용어에서 우리는 뭔가 삐딱한 시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이 샘솟기 시작한 르네상스를 지나 그것이 퇴폐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에서 이같은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하네요.
ReplyDelete간략하게 배웠던 음악사를 회상해보면 중세의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단번에 바로크의 바흐와 헨델로 뛰어넘었는데, 그사이에는 진실로 많은 작곡가들이 포진하여 음악을 풍성하게 만들었음을 베토벤님의 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결코 바로크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돌연변이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크에는 인간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위해 꾸밈음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때로는 꾸밈음이 너무 길어 음악의 속도가 변하기도 하였다 합니다. 르네상스에는 인간의 맥박수를 기준으로하여 정속도로 연주되었다고..
ReplyDelete오늘날의 서양의학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인간의 감정 호르몬을 적절히 조절하기 위해 항우울제인 프로작을 투여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음악요법을 찾아내는 시도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 바로크 시대부터 꾸밈음으로 멜로디를 더욱 화려하게 했던 것이지요. 마치 건축, 미술을 화려하게 꾸몄듯이... 지아님,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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