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전쟁

  

One Hundred Years'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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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 전쟁이 있었던 14세기의 문제는 오직 기근, 역병, 경제적 혼란, 사회 격변, 폭동 등 뿐만이 아니었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도 있었다. 14세기에 계속된 모든 혼란 가운데 백년전쟁이야말로 가장 폭력적인 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 백년 전쟁의 원인

    1259년 영국 국왕 제임스III세는 그때까지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 영토 가운데 비교적 작은 영지인 가스코니 공국(the duchy of Gascony)을 제외한 모든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였다. 그는 가스코니의 영주로서 아울러 프랑스 왕의 봉신(封臣)으로서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이처럼 13세기 전반에 걸쳐 프랑스 카페 왕조는 세력이 있는 봉신들 즉, 봉건 영주들에 대해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왕의 신하들은 정기적으로 봉건영주들의 일 특히 송사에 간섭을 하여 그들을 괴롭혔다. 특히 영국왕은 더 큰 괴로움을 당했다.

    백년 전쟁의 두 번째 원인으로는 플랜더스(Flanders)의 경제적 문제이다. 플랜더스에서 발생한 반란은 장인들과 부유한 상인들 간 적대관계를 초래했고 영국산 양모의 대 플랜더스 수출을 위협하기도 했다. 플랜더스는 영국산 양모의 주요 수출 시장으로서 영국 왕들이 수출세를 징수할 수 있는 거대한 수입원이었다. 상인 편에 선 프랑스 왕이 간섭을 하자 영국은 큰 위협을 느꼈다. 만일 프랑스가 플랜더스를 장악한다면 영국 양모 수출에 대재앙이 초래될 터였다. 따라서 영국왕은 플랜더스 장인들 편을 들었다.

    프랑스 왕위 계승권에 관한 분쟁은 두 나라간 불화를 더욱 복잡하게 했다. 14세기에 들어 프랑스 카페왕조는 지난 4백년 이래 처음으로 왕위가 왕자에게 계승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1328년 챨스IV세의 사망과 함께 카페왕조는 대가 끊겨 왕위가 계승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왕 필립 IV세의 외손주인 영국 왕 에드워드 III세(1327-1377)는 자신이 가장 가까운 인척으로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관행에 따라 부계인 카페왕가의 사촌 발로아공(Duke of Valois)을 프랑스 왕으로 즉위시켰다. 그가 바로 필립VI세(1328-1350)이다.

    가스코니 공국을 둘러싼 분쟁 역시 영국과 프랑스 간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1337년 영국 왕 에드워드III세와 가스코니 공작이 충성을 거부하자 프랑스 왕 필립VI세는 가스코니 공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에 에드워드III세는 필립VI세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백년 전쟁의 시작이다. 이 전쟁의 발발은 두 국왕의 성격과도 분명한 관계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사치를 좋아했고 군사 행동이 가져오는 영광과 특권을 갈망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키기에는 두 사람 모두 전쟁 수행을 위한 자원이 부족했다. 전쟁 자원인 귀족들은 토지와 약탈물의 분배 약속을 받았지만, 이는 전투력과는 무관한 주군을 따라 파멸의 길을 가는데 대한 보잘 것 없는 보상이었다.

나. 전쟁의 경과

    백년 전쟁은 기사들의 열정이 폭발되어 시작된 전쟁이다. 전사로 훈련된 기사들은 전투를 자신들의 기사도를 과시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그러나 백년전쟁은 봉건적인 생활양식이 쇠퇴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이제 주요 전투의 결과는 기사가 아닌 농민으로 이루어진 보병에 의해서였다는 점이 그 명백한 증거였다. 이처럼 기사에 토대한 봉건적 군사제도를 극복한 것은 프랑스가 아닌 영국이었다. 1337년 현재 프랑스 군대는 중무장을 한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는 12~13세기 프랑스 군대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귀족으로 구성된 프랑스 기병들은 자신들을 전투 엘리트로 자부하고 있었고 보병이나 궁병을 무시했다. 사회적 계급이 낮거나 농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프랑스 군대는 값비싼 희생을 치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 보병은 앵글로 색슨 시대부터 봉급을 받는 농민들로 구성되었다. 창으로 무장한 영국 보병은 웨일스인(Wales)이 발명한 큰 활을 사용하였다. 큰 활은 석궁보다 더 빠른 불화살을 쏠 수가 있었다. 영국도 중무장한 기병을 운영하였지만 대규모 보병에 더 의존하였다.

    프랑스 영토 내에서의 초기 전투에서 영국왕 에드워드 III세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1346년 그가 노르만디를 침공하자 프랑스 왕 필립은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플랜더스 남쪽 크레시(Crécy)에서 그를 맞는다. 프랑스 군은 병력이 더 많았음에도 중구난방식 공격으로 전투를 했고, 결국 영국 궁병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었다. 당시의 역사가 프롸사르(Jean Froissart, 1337-1405)는, “영국군은 큰 활을 사용하여 밀집한 프랑스 군을 향해 계속 쏘아댔고 한 발도 소홀함이 없었다. 화살 공격을 받은 프랑스 기병은 옴짝달싹을 못하고 말에서 떨어졌다. 무거운 갑옷으로 인해 도움이 없이는 다시 일어설 수가 없었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세상을 놀라게 한 영국군의 승리였다. 에드워드는 계속 진군하여 프랑스 칼레 항(Calais)을 점령하여 향후 공격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

   -크레시 전투-

    전쟁은 크레시 전투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휴전과 전투가 반복되고 끊임없는 반목이 계속되었다. 영국군은 에드워드III세와 “검은 왕자”로 알려진 왕자 웨일즈 공 에드워드가 지휘하였다. “검은 왕자”의 전투는 무지막지하였다. 정정당당한 전투를 피한 채 그의 군대는 마을을 공격하여 곡물과 값 나가는 물건들을 노략질 했다. 이는 프랑스 국민에게 굶주림과 궁핍, 죽음을 뜻했다. “검은 왕자”는 존II세(John II, 1350~1364)가 지휘한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여 존을 포로로 잡기도 했다. 이 전투가 바로 백년 전쟁의 첫 단계를 마무리 지은 “프와티에르 전투(Battle of Poitiers; 1356)"이다. 1359년 브레티니(Treaty of Brétigny)평화 협정에 따라 프랑스는 존II세의 몸값으로 엄청난 돈을 지불하기로 하고, 가스코니 지역의 영국 영토를 더 확장하여도 좋다는 합의 했다. 에드워드III세는 또 프랑스 내 영국 영토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봉건적 통제를 하지 않겠다고 한 존II세의 약속에 따라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 초기 승리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전 프랑스를 복속시키거나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현실화 시킬 만큼 강력하지가 않았다.

    군주들이란 학습에 관한한 지진아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브레티니 평화협정은 실제로 이행된 적이 없었다. 전쟁의 제2단계는 존II세의 아들인 챨스V세(1364~1380)에 의해 잃어버린 걸 회복한 시기였다. 그의 치세 하에서 영국은 빼앗았던 토지를 돌려주고 전투를 피하였다. 이에 만족했던 챨스V세 역시 전투를 피하고 영국군 진지 수를 줄이는데만 진력하였다. 이렇게 해서 1374년 현재 프랑스는 잃었던 고토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아직도 “자유 군대”라는 용병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영국이 고용했던 그들은 임금을 받지 못해 약탈과 납치한 사람 몸값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1396년 “20년 평화협정”체결로 전쟁은 끝이 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415년 영국왕 헨리V세(1413~1422)가 전쟁을 다시 시작하였다. 1415년 아젱쿠르(Agincourt)전투에서 프랑스는 궤멸적인 패배로 1천5백 명의 귀족이 전사하였다. 철갑옷으로 무장을 한 그들이 들판을 가로질러 공격을 했고, 이때 억수 같은 비가 쏟아져 모두 진흙 수렁에 빠졌고 곧 이어 공격을 당해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Agincourt 전투-


    헨리는 계속 진격을 하여 노르망디를 재점령했다. 이어 부르군디공과 연합하여 프랑스 북부의 맹주가 되었다. 이때 프랑스 남부는 왕세자 챨스의 치세하에 있었는데 병약하고 겁이 많았던 그는 대영 항쟁을 위한 군사 동원을 못하고 있었다. 1428년 영국군은 오를레앙 시를 포위한 후 롸르 계곡으로 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 군주를 구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농민 소녀가 있었다. 바로 쟌 다크(Jeanne d'Arc, 1412-1431)였다.

    쟌 다크는 샹파뉴 지방, 돔레미(Domrémy) 마을에서 유복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녀는 어떤 환영을 본 후 성인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하고 왕세자로 하여금 왕관을 쓰도록 하라는 사명을 받았다고 스스로 믿었다. 1429년 2월 그녀는 왕세자 챨스를 알현한 자리에서 오를레앙에 원정하는 프랑스 군에 복무토록 해달라고 간청했다. 자신을 “성처녀”로 부른 농부 소녀의 신앙에 사기가 오른 프랑스군은 결국 오를레앙을 해방시켰다. 이로써 전쟁의 양상이 바뀌어 그로부터 수 주일 이내에 롸르 계곡 전역이 영국군으로부터 해방되었다. 1429년 7월 잔 다크의 또 다른 과업이었던 왕세자의 대관식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프랑스 왕 챨스VII세(1422-1461)이다. 이처럼 쟌 다크의 두 가지 소명이 달성됨으로써 백년 전쟁은 결정적인 전기를 마지하였다.

            - 쟌 다크-

    그러나 쟌 다크는 전쟁이 끝나는 걸 못 보고 죽었다. 1430년 영국과 부르군디(Burgundy) 동맹군에 의해 체포된 그녀는, “성 처녀”를 제거해야한다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마녀 혐의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15세기는 어떤 영적 환영을 보았다는 것은 하느님을 보았거나 아니면 마귀의 장난으로 생각되던 시대였다. 쟌 다크는 남자 옷을 입었었기 때문에 그녀의 적들은 그녀를 “검은 왕자”와 동맹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이단으로 사형 선고를 받아 1431년 기둥에 매어 화형에 처해졌다. 나이 19세 때였다. 그녀를 태운 재는 세느강에 뿌려졌다. 그 후 25년이 지나 다시 열린 종교 재판에서 그녀는 면죄 판결을 받았고, 1920년 교황 베네딕트 XV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존되었다.

    그녀의 공적은 결정적이었다. 그녀 사후 전쟁은 20년을 더 끌었지만, 노르망디와 아퀴텐느 전투에서의 승리는 프랑스 편이었다. 프랑스군에게는 14세기 유럽에 처음 등장한 대포를 운영하는 능력이 있었고, 이는 이들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영국군의 유능한 지휘관들의 죽음과 헨리VI세(1422-1461) 치세 하 영국 정부의 불안정성도 영국 패배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1453년 영국 수중에 남아 있던 프랑스 땅은 칼레의 해안 마을이 고작이었다. 이 지역은 다음 세기까지 영국 땅으로 남아 있었다.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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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유럽 박물관 어디에서나 중세 기사들의 철모와 갑옷을 전시한 것을 보게 됩니다. 중세 기사들은 쇠로 만든 무거운 모자와 갑옷으로 무장하고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가면 보병들은 감히 덤벼들지 못했습니다. 보병이 칼로 베어도, 화살로 쏘아도 철갑옷을 뚫지 못했습니다.

    철모와 갑옷은 주로 독일에서 제작되었는데,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면 독일 대장간이 번성했다고 합니다. 기사는 중세의 상징이었고, 봉건제도를 유지하는 군사력의 근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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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장궁의 위력을 보여준 첫 전투는 1346년 8월 26일, 북부 프랑스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벌어진 크레시 전투(Battle of Crécy)였죠.

    크레시 전투는 1356년 푸아티에 전투, 1415년 아쟁쿠르 전투와 함께 백년전쟁(1337~1453년)에서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이긴 3대 전투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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