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그곳으로부터...

          -교양인을 위한 인문학-


                목차

           

I. 예루살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 종교

II. 예루살렘 전투

   1. 예루살렘 공방전

   2. 십자군

III. 유대인

   1. 유대인

   2. 디아스포라

      가. 아쉬케나지

      나. 세파르디

      다. 미즈라히

   3. 유대인의 천재성

IV. 유대 종교

   1. 단일신교

   2. 유대교

   3. 유대교 비판

   4. 시나고그

V. 토라

VI. 탈무드

VII. 시오니즘

   1. 시온주의

   2. 발포어 선언

VIII. 반유대주의

   1. 반유대주의

   2. 스페인으로부터 유대인 추방

   3. 종교재판

   4. 포그롬

   5. 홀로코스트

   6. 아우슈비츠

   7. 아돌프 히틀러

IX. 유대인 교육

   1. 유대인 교육

   2. 영재 교육

X. 유대 지성

   1. 과학과 기술

   2. 유대 문학

   3. 유대 음악

XI. 금융과 언론

   1. 유대 금융

   2. 주식 시장

   3. 유대 언론

XII. 유대인 부의 비밀

XIII. 그들이 만들어 온 이야기


     for More Readings:

    www.beethovenno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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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이스라엘의 선사시대부터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오토만 터키 시대를 거쳐 현대 이스라엘이 건국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그 여정에서 유대인들이 만들어 온 역사, 문화, 종교 등 삶의 모습을 중요한 주제와 관련하여 기술하였다. 따라서 이 정보들은 이스라엘에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 여행자, 비즈니스맨을 비롯하여 인문학적 지식 습득에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매우 유용할 것이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도록 간략한 기술을 원칙으로 하였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에서 제일가는 성스러운 도시이다. 유대인의 조상이 비롯된 곳으로 그들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하다. 예부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이 세상의 중심으로, 하느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생각하여 왔다. 유대교에서 예루살렘은 이처럼 특별한 위치에 있다. 성경은 예루살렘을 8백 번 가까이 언급하고 있다. 하느님은 이곳을 선택, 영원히 살리라 하셨고(시편 132: 13~14)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셨다(시편 137: 5~6). 

    예루살렘이 위치한 작은 나라 이스라엘은, 인류 문명에 거대한 자취를 남긴 나라이다. 이 나라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가 만나는 지중해 동남쪽 해안선을 따라 자리하고 있다. 북으로는 레바논, 북동쪽 시리아, 동으로는 요르단, 남서쪽으로는 이집트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서쪽은 지중해이다. 이스라엘은 국토가 작고 폭이 좁으며, 그 반은 불모인 땅의 나라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이 좁은 땅에서 인간의 욕망과 증오, 갈등이 드라마처럼 전개되어 온 것이다.

    이스라엘 국토 면적은 2만7천8백 평방킬로로, 대략 경기도와 강원도를 합한 면적이다. 남북의 길이는 4백70킬로, 폭은 가장 넓은 곳이 135킬로미터이다. 이 작은 영토 안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경계선 및 휴전선을 마주하고 있다. 지중해로부터 동쪽 국경 끝 사해까지 자동차로 90분이면 횡단 가능하다. 북쪽 메툴라(Metulla)부터 남쪽 끝 엘리아트(Eliat)까지 종단은 6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이스라엘-

    길고 좁은 국토의 이스라엘은 고원 삼림지대, 비옥한 분지와 사막, 해안 평야 지대로부터 아열대의 요르단 분지를 비롯하여 사해에 이르는 변화무쌍한 지형적 특색을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의 산과 들에는 비옥한 땅도 불모의 사막도 있다. 국토의 반이 거의 불모에 가깝지만, 그러나 그 다양성은 하나의 대륙에 버금한다. 해안을 따라 평야지대도 있고 산악, 구릉, 계곡, 사막이 있다. 갈릴리 해(Kinneret)와 요르단 강이 있어 그 지역적 특성을 더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이스라엘 국토는 남북으로 세 부분으로 나뉘며, 불모지대는 대부분 남부에 위치한다.

     6백5십만의 인구 반 이상이 지중해에 접한 해안 지대에 살고 있다. 이 해안 지대에는 주요 도시들과 항구들이 있고, 대부분의 산업이 존재하며 농업과 관광 중심지이기도 하다. 긴 모래사장의 해안선으로부터 내륙 40킬로미터까지 비옥한 농경지가 전개되며, 이 해안선 북쪽은 백색 사암의 절벽으로 끝이 난다. 골란 고원과 갈릴리 구릉 지대는 국토 북동쪽에 위치한다. 국토 남북으로는 몇 개의 산맥이 관통한다. 골란 고원은 화산암 지대로, 훌라(Hula) 분지를 내려다 볼 수 있다. 갈릴리 구릉 지대는 해발 약 500~1200미터의 석회암과 백운암 지대이다. 비교적 풍부한 강우량과 멈출 줄 모르고 흐르는 내들로 인해 이 지역은 항상 푸르다.

-골란 고원-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가르는 예즈렐(Jezreel) 분지는 농업 지역으로, 여러 곳에 키부츠가 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부유한 농업 지역이다. 사마리아와 유대아 산악 지대에는 푸르고 오래된 오렌지 나무들이 서있는 구릉과 비옥한 분지들이 있다. 먼 옛날 농부들이 개척한 이곳 산비탈 계단식 경작지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풍광을 자아내고 있다.                     

                            -유대아 산맥-                               

    네게브 사막은 이스라엘 국토의 약 반을 차지한다. 물론 이곳에는 주민 수가 적다. 그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농업에 종사하거나 산업 활동을 한다. 네게브 남부는 불모의 석회암 지대로 계곡이 많고, 큰 비가 오면 홍수가 지는 마른 내가 많다. 이 지역은 바위로 된 산봉우리가 많고, 산등성이에는 돌이 많으며 남쪽으로 갈수록 더 건조하고 산이 높아진다. 이곳에는 세 곳의 침식 형 협곡이 있다. 가장 큰 협곡 마크테쉬 라몬(Makhtesh Ramon)은 폭 8킬로, 길이 35킬로로서 가지각색의 모양과 색깔의 바위들을 볼 수가 있다. 네게브의 날카로운 화강암 산봉우리들은 홍해 연안 에일라트(Eilat)에서, 햇빛 속에 빛나는 갖가지 색깔의 사암층 절벽으로 끝이 난다.

-마크테쉬 협곡-

    갈릴리 구릉 지대와 골란고원 사이에는 이스라엘 제일의 저수지인 폭 8킬로, 길이 21킬로미터의 갈릴리 해가 자리하고 있다. 이 곳은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물가를 따라 농업, 어업, 관광 시설이 들어서 있다.

-갈릴리 해-

    국토의 동쪽에는 요르단 분지와 아라바(Arava)가 있다. 요르단과의 접경 지역인 이곳은 수백만 년 전 아프리카-시리아 지구대地溝帶가 갈라진 곳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남쪽은 반 건조, 북쪽으로는 대단히 비옥한 지역이다. 이 지역 주요 산업은 농업, 어업, 경공업, 관광 산업이다. 이 지구대를 따라 북으로부터 남쪽까지 요르단 강이 흐르고 있다. 길이 300킬로미터의 이 강은 헤르몬 산(Mt. Hermon)으로부터 발원하여, 훌라(Hulla)분지를 거쳐 갈릴리 해를 지나 사해로 흘러든다. 겨울철 우기 때, 좁고 얕은 요르단 강은 물이 넘쳐흐른다.

-헤르몬 산-

   사해(Yam haMelach)는 요르단 분지 남쪽 끝에 위치한다. 해수면 보다 4백 미터 낮은, 지구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는 소금 바다이다. 염분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으며 마그네슘, 브롬, 칼륨이 풍부하여 식탁용, 산업용 소금으로 이용된다. 해수면의 증발률이 높고(연간 1.6미터),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대규모 담수화 프로젝트로 인해 사해 생태계를 악화 시키고 있다. 물의 유입량도 줄어, 1960년 이래 수면이 10.6미터나 낮아졌다. 현재 사해의 원상 복구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운하나 도관을 사용, 사해와 지중해를 연결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아라바(Arabah)는 사반나 기후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사해 남쪽에서 시작되어 홍해 입구 에일라트 만까지 이른다. 이 지역은 4계절 과일과 채소 재배가 가능하여, 사반나 기후에 알맞은 정교한 농업 기술을 이용, 주로 수출용 농산품을 생산하고 있다. 연평균 강우량은 25밀리 이하로, 여름철 기온은 섭씨 40도까지 오른다. 아라바 남쪽 끝 엘리아트(Eilat) 만은 아열대 기후로 깊고 푸른 바다와 산호초, 이국적인 바다 풍광으로 이름난 곳이다.

-사해-

    지금까지 개략적인 이스라엘 지형에 관해 약술하였다. 이스라엘은 6개 주(Makhoz)의 행정 구역(District: 이 책에서는 편의상 주로 호칭)으로 나뉜다. 우리나라로 치면 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예루살렘주(Jerusalem), 북부주(Northern District), 하이파주(Haifa District) 중부주(Central District), 텔아비브주(Tel Aviv District), 남부주(Southern District)등이다.

    먼저 예루살렘주이다. 주도는 물론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은 동예루살렘과 서예루살렘으로 나뉜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병합하였지만,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성지의 심장부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곳이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하여 알라의 말씀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방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의 순례 길에 오른 것과 같다.

    통곡의 벽(Western Wall)은 예루살렘 제2성전 벽 잔해이다. 서기 70년 파괴된 성전을 슬퍼하며, 사람들은 이곳에서 눈물을 흘린다. 유대인과 순례자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성소이다.예루살렘 구시가지 슬픔의 길(Via Dolorosa)은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님이 로마 병사들에 의해 골고다 언덕을 향해 끌려가신 길을 나타낸다. 안토니아 요새로부터 성묘 교회까지 이르는 약 6백 미터의 이 길은, 기독교 순례자들에게 축복의 장소이다. 이 길을 따라 14곳의 기도를 드리는 장소가 있으며, 이 가운데 5곳은 성묘 교회 안에 위치한다. 기도소마다 예수님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금요일 이곳을 방문하면, 프란시스코 수도승들에 의한 모의 십자가 행렬을 볼 수 있다. 

-통곡의 벽-

    성전의 언덕(Temple Mount)은 무슬림, 기독교, 유대교의 성소이다. 3대 유일신 종교(회교, 유대교, 기독교)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느님께 희생물로 바친 곳이며,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이기도 하다.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는 기독교 순례자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곳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곳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모후 헬레나가 성지 방문 중, 이 교회 터를 잡았다고 한다. 교회 안은 기독교 교파들에 따라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성물들도 볼 수 있다.

-성묘 교회-
 

    헤롯 대왕이 기원전 24년에 건립한 다윗의 탑(Tower of David)은 왕궁 수비대 보루이다. 탑 내부 박물관에는 제1성전 시기까지 거슬러 오르는, 2천5백 년 이상의 예루살렘 역사를 알 수 있는 고고학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방문객은 전시회, 음악회, 조명 쇼 등 여러 가지 행사를 즐길 수 있다.    

-다윗의 탑-

    시온의 문(Zion Gate) 남쪽 시온 언덕(Mount Zion)에는 무슬림이나 유대교 사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다윗 왕의 무덤이 있고, 이 무덤 앞 광장에서 계단을 오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신 방(Cenacle)이 있다. 이곳을 벗어나면 바로 도미션 교회(Church of Dormition)가 있다. 성모 마리아가 돌아가신 터에 세운 수도원이다.

-시온 언덕-


    올리브 산(Mt. Olives) 위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어, 순례자들이 찾는 곳이다. 예수님 승천 교회(Church of the Ascension)가 있고, 이곳으로부터 예루살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 경사면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주기도문 교회(Church of the Pater Noster)가 있고, 바로 그 옆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신 곳이 있다. 이곳으로부터 조금 더 내려가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위해 통곡하신 예수님 눈물 교회(Church of Dominus Flevit)가 있다. 그밖에도 여러 교회를 비롯하여 성모 마리아 무덤, 산헤드린 병사들이 예수님을 포박한 겟세마네 정원 등이 있다.


-올리브 산-

-예수님 눈물 교회-

    동방 정교 수도원인 십자가 수도원(Monastery of the Cross)은 선지자 롯이 살았던 곳으로, 그가 이곳에 심은 나무로 예수님이 짊어지신 십자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수도원은 이스라엘 의사당(Knesset)이 위치한 곳 아래, 십자가 계곡(Valley of the Cross)에 위치하고 있다.

  

-십자가 수도원-

    기억의 언덕(Yad Vashem)은 홀로코스트 기념관이다. 나치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 명단과 그들을 기리는 “영원의 불”이 타고 있다. 홀로코스트 관련 사진과 나치 수용소에서 죽어 간 어린이들이 남긴 메모장, 수용소에서 만든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영원의 불-

    예루살렘 행정 구역에 속하는 또 다른 도시 베이트 셰메쉬(Beit Shemesh)는 예루살렘 서쪽 30킬로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구약에 등장(여호수아 15:10) 하는 이 마을은, 유다 지파와 단 지파의 경계를 이루는 성읍이었다. 이곳을 레위지파에게 떼어 주었다는 성경 말씀이 있다(여호수아 21:16). 서기 1830년대 관련 유적이 발견되어, 최근까지 발굴이 진행되었다.

-베이트 셰메쉬-

    북부 주(Northern District)는 이스라엘 북쪽, 레바논과 접하고 있다. 이곳에 골란 고원과 갈릴리 해가 자리하고 있다. 아크레, 나사렛, 티베리아스, 사페드 등이 그 주요 도시들이다. 지중해 하이파만 끝에 자리하고 있는 아크레(Acre)는 천연의 항구로 중요한 전략지이다. 청동기 시대 초기 거주가 시작되어, 역사상 가장 오랜 세월 사람이 계속 거주해온 지역 가운데 한곳이다. 여러 번의 파괴와 점령을 당한 적이 있고, 십자군 시대에는 중요한 지중해 해상 기지로, 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서기 1291년 전투 때, 십자군 마지막 보루였다.

-아크레-

    아풀라(Afula)는 동석기 후기(석기시대 이후 청동기시대 이전 시기)부터 아이유브 제국 시대까지 존재했던 군사 요새였다. 그리스 역사가 유세비오의 지명록(Onomasticon)에는 아르벨라(Arbela)로 명기된 역사 깊은 곳이다.

-Afula-

    하갈릴리 사크닌 분지에 소재한 아라바(Arraba)는 로마제국 시대 때 유대인 정착지였고, 5세기 무렵 기독교도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17세기 아랍족인 알 자야디나(Al-Zayadina)가 도래하여, 이 도시를 장악하였다. 18세기에는 갈릴리 자치주로서 오마르(Zahir al-Omar: 팔레스타인 무슬림 통치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오토만제국 말기 기독교도들이 하이파로 이동하면서, 무슬림이 압도적인 도시로 변하였다.

-아라바-

    베이트 셰안(Beit She'an)은 해수면보다 120미터 낮다. 동석기 시대 초기 유적이 발견된, 이스라엘 북부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한곳이다. 청동기 시대 후기 이집트 행정 기구가 존재했던 도시이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로 불리었고, 로마 제국 시대에는 데카폴리스(Decapolis)중 으뜸가는 도시였다. 비잔틴 시대에는 팔레스티나 속주의 수도로서 기독교도, 유대인, 이교도, 사마리아인 등이 섞여 살아 문화적으로 다양성을 띄었다. 아랍에 의한 레반트 점령 후 몇 차례의 지진으로 파괴되어, 명성을 잃고 시골의 조그만 마을이 되었다.

-베이트 셰안-

    해안 도시인 나하리야(Nahariya)에서는 3천4백 년 전 청동기 시대 군사 요새 터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요새는 지중해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뱃사람들을 위한 지원 센터 역할을 하였다. 발견된 유물로 보아 키프러스를 포함 지중해 연변 지역과 문화적, 상업적 관계가 있었던 듯하다. 비잔틴 시대 성 라자루스(St. Lazarus)에 봉헌했던 교회 터도 발굴되었다. 이 교회는 614년 페르시아 침략 때 불에 타 사라진 곳이다.

- 나하리야-

    나사렛(Nazareth)은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유대 마을이다. 탄크레드(Tancred: 제1차 십자군 지도자. 갈릴리 영주)가 갈릴리 수도로 정한 후, 십자군 시대에 대단히 중요한 도시였다. 7세기 이후 나사렛은 기독교도들의 중요한 순례지였고, 성경 말씀을 증거하는 여러 성소들이 있다. 이곳 수태고지 교회(Church of the Annunciation)는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님 수태를 고지한 곳에 세워진 교회이다. 성경은 마리아와 요셉, 예수님이 고향 땅 나사렛으로 돌아갔음을 언급하고 있다(루가 복음 2: 51). 신약은 “나사렛 예수”를 열일곱 번 언급하고 있다.

-수태 고지 교회-

    사페드(Safed)는 해발 937미터의 고지에 자리 잡은, 이스라엘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도시이다. 대홍수 후 노아가 세운 도시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탈무드에서는 제2성전 시기 매월 보름달맞이 축제가 열렸던 도시로 언급되고 있다. 서기 1168년 거대한 십자군 요새가 건설되어 명성을 얻었고, 그후 20년이 지나 이집트 아이유브 술탄 살라딘에 의해 정복, 파괴를 당하였다. 이어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Baybars)가 큰 도시로 개발, 갈릴리를 포함하는 새로운 행정 구역의 수도로 정하였다. 현재 유대-아랍 주요 분쟁 지역이기도 하다.

-사페드 모스크-

    사크닌(Sakhnin)은 하갈릴리에 소재하는 오래된 도시로, 기원전 1479년 이집트 투투모세 II세 시대까지 거슬러 오른다. 당시 이곳은 인디고 물감 생산 중심지였다. 시 중심 유적지에서 발굴된 물탱크 파편은 서기 1세기까지 거스르는 것으로 밝혀다.

-사크닌-

        셰파 암르(Shefa-Amr)는 청동기 시대 초기 성벽과 도기 파편이 발굴된 오래된 도시이다. 이 도시는 서기 500년에 편찬된 탈무드에도 언급되고 있다. 로마 시대 동굴과 비잔틴 시대 교회와 무덤들이 발굴된 고도이다.

-셰파 암르-

    하갈릴리의 탐라(Tamra)는 구릉 위 고대 마을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고대의 돌벽돌은 마을 건축에 재사용되고 있다. 바위를 파고 만든 물탱크와 무덤이 발견되기도 했다. 탈무드에서 언급하는 유대인 마을 타마르타(Kefar Tamartha)가 바로 이곳이다. 서기 1253년 십자군 시기, 케사리아 영주는 이 도시를 순례자 보호 기사단(Knights Hospitaller)에 매각을 하여, 십자군 영토가 된 적도 있었다. 현재는 우유 가공 산업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탐라 동굴 무덤-

    티베리아스(Tiberias)는 서기 20년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가 세운 도시이다. 갈릴리 해변에 자리하고 있는 이 도시는 7세기부터 유대인의 중심지였다. 16세기 이래 예루살렘, 헤브론, 사페드와 더불어 유대교 4대 성지 중 한곳이다. 유대-로마 전쟁으로 유대아와 예루살렘이 황폐화된 후 이곳은 유대인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였다.

-티베리아스-

    요크네암(Yokneam Illit)은 카르멜 산록 하갈릴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예즈렐 분지를 내려다볼 수 있다. 기원전 1466년 이집트 파라오 투투모세 III세에게 점령당한 적이 있다. 이곳은 제불룬 족의 영토(여호수아 19:10)로, 십자군은 이곳을 “카인의 산”으로 불렀다. 현재는 스타트업 도시로, 하이테크 산업 중심지이다. 메기도 인근에 소재하고 있다.

-요크네암-

    하이파 주(Haifa District)는 지중해에 면한 주로, 주도는 하이파이다. 주요 도시로는 바카 알 가르비이예, 하이파, 아키바, 카르멜 등이 있다. 바카 알 가르비이예(Baqa al-Gharbiyye)는 그린 라인(Green Line: 이집트,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와 접한 휴전선) 가까운 이스라엘 “삼각 지대”에 있는 아랍 도시이다. 이곳에서 헬레니즘 시대 올리브나 포도즙 짜는 기구가 발굴되기도 했다. 13세기 맘루크 시기에는 십자군과 싸운 무슬림 전사들에게 이곳을 나누어 주었다. 16세기 초 팔레스타인이 오토만 제국에 합병되면서 이 지역도 합병되었다. 현재 이스라엘 당국은 이 도시를 자매 도시 샤르키야로부터 분리, 높은 벽을 쌓아 갈라놓고 있다.

-바카 알 가르비이예-

    카르멜 산록에 자리한 주도 하이파(Haifa)는 3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청동기 후기 조그만 항구 아부 하왐(Abu Hawam)에 사람들이 정착,  바로 후일의 하이파이다. 이곳에는 원래 쉬카모나(Shikamona)라는 고대 페니키아 요새가 있었다. 3세기 하이파는 염료 생산의 중심지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하이파는 가나안, 페니키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하스모니아, 로마, 비잔틴, 아랍, 십자군, 오토만 터키, 영국 등에게 정복을 당한 곳이었다.

-하이파-

    키리야트 아타(Kiryat Ata)는 청동기 시대부터 있었던 곳으로, 현재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발굴된 유물은 청동기, 페르시아, 로마 시대까지 사람들이 계속 거주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포도즙 짜는 틀과 도자기 파편은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현재 비잔틴 시대의 건축물에 대한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키리야트 아타-

    티랏 카르멜(Tirat Carmel)은 로마제국, 오토만 터키, 영국이 번갈아 가며 지배했던 곳이다. 원래 아랍 마을 알 티라(al-Tira)의 터에 들어선 이 도시는, 십자군 시대 성 요한 티레(St. Yohan de Tire)로 불리기도 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농업과 목축업 지대였다. 현재는 올리브와 알몬드 생산지로 그 주민은 무슬림이 대부분이고 소수의 기독교도들이 있다.

-티랏 카르멜-

    움 알 팜(Umm al-Fahm)에서는 후기 철기 시대, 페르시아, 헬레니즘, 로마, 무슬림, 중세시대의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16세기 초 이곳은 오토만 제국에 복속되어 17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16세기 말 조세 납부 기록을 보면 주민은 24가구에 불과했고 주업은 농업으로 밀, 보리, 양봉, 염소 사육, 올리브나 포도즙 짜기 등이었다. 주민들은 모두 아랍계이다.

-움 알 팜-


 
    중부 주(Central District)는 샤론 평야지대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카프르 카심, 크파 사바, 롯 등의 도시가 있다. 카프르 카심(Kafr Qasim)은 고대부터 있었던 도시로, 그곳 케셈 동굴(Qesem Cave)에서는 구석기 시대 후기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비잔틴 시대의 유적과 함께 포도즙 짜는 틀, 계단식 경작지 등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오토만 제국 시대인 1838년, 이곳은 무슬림 마을 케프르 카심(Kefr Kasim)으로 불리었다. 현재의 주민은 대부분 아랍인이다. 

-케셈 동굴-


    크파르 사바(Kfar Saba)는 제2성전 시기 유대인 정착지인 카파르사바(Capharsaba)로 보고 있다. 탈무드에서도 이곳 농작물과 관련한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다. 이 도시가 현대화를 이룩한 것은 1920년대초 지하수가 발견되고 나서부터였다. 최초의 우물은 현재 시청 광장에 있다.


-크파르 사바-

    롯(Lod)은 고대 도시로, 신석기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성경에도 등장하는 이곳은, 기원전 5세기부터 로마제국 시대까지 유대 학문과 교역의 중심지였다. 서기 200년 로마제국 식민지가 되면서 그 이름도 디오폴리스(Diospolis)로 바뀌기도 했다. 서기 303년 성자 조지(Saint George)가 순교한 곳으로, 이곳 성 조지 교회(Church of Saint George)와 알 카드르 모스크(Mosque of Al-Khadr)에 보관되어 있는 유해는 그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레반트가 우마이야 왕조에 의해 점령된 후 필라스틴(Jund Filastin: 우마이야 군사 지역)의 수도가 되었다가, 후일 람라에 그 지위를 빼앗겼다. 십자군 시대 로마 교회의 교구가 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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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딘(Modi'in)은 고대의 도시로, 마카비가 반란을 주도한 곳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수공예품은 제1성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서 페르시아, 헬레니즘, 로마, 비잔틴, 무슬림 시대의 정착지가 발굴되기도 했다. 

-모딘 공원-

    페타 티크바(Petah Tikva)에는 중요한 고고학적 유적지 텔 물라비스(Tell Mulabbis)가 있다. 이 도시는 로마 시대부터 오토만 시대까지 이르는 주거 유적이 남아 있는 고도이다. 서기 1596년 오토만 시대 조세 기록을 보면 이곳에는 모두 42가구의 무슬림이 살았다. 현재 25만 명의 주민이 있다.

-페타 티크바 IBM-

   칼란사위(Qalansawe)는, 서기 750년 시리아 압바스-우마이야 권력 투쟁에서 패한 우마이야 왕조가 통치하다 추방된 곳이다. 9세기부터 십자군 시대까지 이곳은 카이로-다마스커스 중간 기착지였다. 십자군 시대에는 순례자 보호 기사단 손에 들어가, 칼란존(Calanzon)또는 칼렌수에(Kalensue)로 불리었다. 서기 1265년 제7차 십자군을 격파한 맘루크 술탄은,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 이곳을 나누어 상으로 주었다. 그후 1517년 오토만 제국에 합병되었다. 서기 1870년 이곳을 방문한 프랑스 탐험가 게렝(Victor Guérin)은, 5백 명의 주민을 보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칼란사위-

    람라(Ramla)는 유대인과 아랍인 공존의 도시이다. 8세기 초 우마이야 왕조 말리크(Sulayman ibn Abd al-Malik)는 필라스틴의 수도를 롯으로부터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그후 제1차 십자군 도착과 함께 수도로서의 수명이 끝이 나, 그 이름도 “모래(Raml)”로 바뀌었다. 그 터가 모래밭이었기 때문이다.

-람라-

    티라(Tira)는 아랍 도시이다. 주말 농산물 시장과 아랍 요리로 유명한 곳이다. 12세기 십자군 시대에는 개인에게 빌려 주었다가, 14~15세기에는 가자-다마스커스 도로 경유지였다. 따라서 이곳에 여행자를 위한 여관(Khan)이 건설되었다. 오토만 제국 시대 사회가 안정되면서 이곳에 농부들이 영구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영국 식민지 시대 토질 조사 결과, 티라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었다.

-티라 여관-

    야브네(Yavne)는 유대교 역사에 중요한 곳이다. 제2성전이 파괴된 후 현자 자카이(ben Zakkai)와 가마리엘(Gamaliel II)이 이곳에서 유대교의 부흥을 위해 애를 썼다. “야브네 시기”로 불리는 이 때는, 랍비 유대교 발전에 결정적 시기였다. 고대 시대부터 포도주를 생산하였고, 그 유적이 남아 있다. 로마 후기 비잔틴 시대에는 기독교도, 유대인, 사마리아인이 어울려 함께 산 곳이었다. 십자군 시대에는 이벨린(Ibelin)으로 알려졌고, 오토만 터키 시대에는 이브나(Yibna)로 불리었다. 고고학적 유적지 텔야브네가 도시 남동쪽 인근에 있다.

-야브네-

    텔아비브 주(Tel Aviv District)는 지중해 연변의 작은 주이다. 주도는 텔아비브이며 브네이 브락, 키리야트 오노, 오르 예후다 등의 도시가 있다. 텔아비브는 이스라엘 제2의 도시로, 경제와 기술 산업의 중심지이다. 인구도 서예루살렘보다 많다. 기원전 7천5백 년 전의 고고학적 유물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1800년 무렵, 이곳에 처음 마을이 들어섰고 청동기 시대부터 항구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주변 세력들 간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이기도 하다.

-텔아비브-

    브네이 브라크(Bnei Brak)는 하레디 유대교(Hardi Judaism)의 본산지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가난하고 인구가 밀집된 도시이다. 세계 제5위의 인구 밀도이다. 히브리 성경 타나크에 따르면, 이 지역은 야곱의 열두 지파 중 단족에게 주어진 땅이다. 폴란드에서 온 하시디 유대교 8가구가 개척한 농업 마을로 출발하였으나 토지 부족으로 농업을 포기하고 전업하면서,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선조들이 그로 인해 영혼의 부활을 맞았다”라는 말처럼, 그후 이곳은 신앙인들이 정착지가 되어 발전했다.

-예쉬바-


  야파(Jaffa)는 기원전 1440년 이집트 파라오 투투모세 III세가 정벌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오래된 고도이다. 이집트 병사들을 자루에 넣어 선물로 위장하여 가나안 성읍인 야파로 보냈고, 자루에서 나온 병사들이 그 성읍을 점령하였다는 기록이다. 이집트판 트로이 목마라 하겠다. 성경에는 바리새인의 해안가 성읍으로 등장한다. 십자군 시기였던 1192년에는 사자왕 리챠드와 아이유브 술탄 살라딘 간의 전투와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오토만 터키 시대에는 중요한 아랍 도시였고, 1799년에는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약탈을 당한 적이 있다. 19세기에 이르러 오렌지 등 과일 생산지로 그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 영국의 신탁통치 기간에는 이곳에서 인종 간 대립이 격심하였다.

-야파-


    키리야트 오노(Kiryat Ono)는 성경에 등장하는 오노(Ono)이다. 이 도시의 정신적, 문화적 아이콘인 단풍나무가 많이 서 있다. 누군가 자신의 농토 주변에 단풍나무를 심고, 심은 나무마다 정성들여 물을 주고 키웠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그곳은 지금 "논(Ricefield)“이라는 이름의 공원이 되었다.

-키리야트 오노-

    오르 예후다(Or Yehuda)는 동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곳이다. 가나안 사람들은 오노(Ono)라고 했고, 역대기상(8:12)에도 오노로 등장하며, 유대 고전 문헌에서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16세기 두 곳이 무슬림 마을이 들어섰고, 18세기에 롯에 복속되었다가, 2008년 원상 복구되었다.

-오르 예후다-

    남부 주(Southern District)는 네게브 사막 대부분과 아라바(Arava)분지로 되어 있다. 주도는 베르셰바이며 아라드, 아쉬도드, 아쉬켈론 등 주요 도시들이 있다.  이곳 디오나, 스데롯, 네티보트, 예루함 등과 여러 베두인 도시들은 사회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다.

    아라드는 청동기 시대 마을로 성경에서는 가나안 족의 요새로 기록하고 있다(판관기 1:16). 가나안 시대 파괴된 후 폐허가 되어 버려져 있다가, 기원전 11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착하였다. 그들은 성벽을 세우지 않고, 높은 등성이에 성소를 정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이곳은 요새 겸 성소였고 이를 증거하는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유다왕국 시대에 포도주, 올리브 기름, 밀 등 농작물이 거래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기원전 577년 바빌로니아 침공으로 이 요새는 파괴되었고, 비잔틴 시대에 베두인들이 “아라드”라는 이름을 지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라드 요새 유적-

    히브리 성서에 열세 번 등장하는 아쉬도드(Ashdod)는 기원전 17세기까지 거슬러 오르는 도시이다. 기원전 17세기 가나안 요새였던 이곳은, 청동기 말 파괴되었다. 철기 시대에는 블레셋 5개 성읍 가운데 한곳이었다. 유다왕국의 지배를 거쳐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아조투스(Azotus)로 불리었다. 그후 로마 황제 폼페이우스는 이곳을 로마의 시리아 속주로 편입 시켰다. 비잔틴제국 시대에는 동방정교 사제의 통제를 받았고, 그후 중세기를 거치면서 촌락으로 바뀌었다. 아이유브 시대와 맘루크 시대 이곳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아마 십자군 점령을 두려워하여 이곳을 완전히 파괴해버린 결과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아쉬도드 유적-

    아쉬켈론(Ashkelon)에서 발굴된 유물은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오른다. 고대 이집트, 가나안, 블레셋,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그리스, 하스모니아, 로마, 페르시아, 이슬람, 십자군의 발길이 닿았던 곳이다. 가나안의 가장 오래된 항구로서 로마제국 때부터 십자군 시대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1차 십자군 마지막 전투가 이루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서기 1270년 맘루크 술탄의 명령에 따라 이곳 항구와 요새가 파괴되면서 주민들이 떠나 황폐화되었다. 19세기에는 미그달(Migdal)이라 불린 이곳에, 유대 이민과 부상병들이 유입되어 살기 시작했다. 그후 미그달 가자, 미그달 가드, 미그달 아쉬켈론 등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1953년 현재의 이름 아쉬켈론이 되었다.

-아쉬켈론-

    베르셰바(Beersheba)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기원전 4천 년 이곳에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증거하고 있다. 베르셰바는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우물가에 세운 곳이다(창세기 21:22~34). 두 사람은 우물을 두고 다투었고, 결국은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양보를 한다. 성경에서 베르셰바는 “일곱 우물” 또는 “맹세의 우물”을 뜻한다. 역사상 이곳은 여러 차례 파괴와 복구를 반복하였다. 비잔틴 시기에는 중요한 군사 기지로, 사막족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벽이 설치되기도 했다. 7세기에는 이슬람, 16세기에는 오토만 터키 땅이 되었다. 오랜 세월 네게브 사막 베두인족의 교역 중심지로서 또한 물 공급지이기도 하였다. 


-베르셰바 유적-

    요르단 강 서안 지구인 유대아 사마리아 주(West Bank)는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의 결과 요르단 영토가 되었다. 1967년 6일 전쟁의 결과 1990년 두 차례에 걸친 오슬로 협정에 따라(1993년 및 1995년)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지역, 이스라엘 지역,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공동 통치지역으로 나뉘었다. 이 지역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지역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공식적인 이스라엘 행정 구역이 아니다. 이 주에는 마알레 아두밈(Ma'ale Adumim), 모딘 일리트(Modi'in Illit) 같은 도시들이 있다. 마알레 아두밈은 이스라엘에 의해 네게브 사막으로부터 쫓겨난 베두인들이 정착한 곳이다. 모딘 일리트는 하레디 유대인 정착지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로, 제2성전 시기 대규모 거주지와 시나고그가 있었음이 밝혀졌고, 1세기 로마 시대의 동전이 발견되기도 했다. 유대-로마 전쟁과 바르 코크바 반란으로 3세기까지 폐허가 되어 있다가, 이방인들이 들어와 살았다. 1990년대 이스라엘 정부는 이곳에 대규모 주택 단지를 건설하였고 이에 따라 베두인들은 많은 제약을 받았다.

    

-유대아와 사마리아(웨스트 뱅크:적색 부분)- 

    가자 지구(Gaza Strip: 고대 블레셋 땅)는 지중해 동쪽 해안에 위치하는 길이 41킬로미터 폭 6~12킬로, 총 면적 365평방킬로미터의 좁고 작은 지역으로 웨스트 뱅크(West Bank)와 함께 팔레스타인 영토이다. 동북쪽 이스라엘과는 51킬로, 남서쪽의 이집트와는 11킬로의 경계선을 접하고 있다. 그 주민은 대부분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발생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후손이다. 대부분의 주민은 수니파 이슬람으로, 한곳의 기독교 공동체가 있다. 2022년 현재 인구는 약 2백3십만 명으로, 인구 밀도 높기가 세계 제3위이다.

-가자 지구-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결과 이집트 영토가 되었다가,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이 점령하였다. 이 지역 역시 오슬로 협정에 따라 몇 곳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남겨둔 채 대부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lestinian Authority)로 이양되었다. 2006년 팔레스타인 의회 선거에서 하마스(Hamas: 1987년 조직된 수니파 이슬람 정치 및 군사 조직)가 승리한 후 2007년 하마스-파타(Fatah: PLO 지파) 무력 충돌의 결과, 가자 지역은 하마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가자 지역과의 경계선을 차단, 봉쇄에 들어갔다. 그 결과 가자의 경제가 붕괴되었고 물, 전기, 의약품 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세계 최고의 실업률에 빈곤율 50%를 기록하고 있다. 2018년과 2019년 이스라엘 봉쇄 해제를 요구하는 주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유엔을 비롯하여 19개 국제 인권 단체가 이스라엘의 가자 봉쇄 해제를 촉구하고 있다. 2023년 10월7일, 가자 지구로부터 하마스의 대 이스라엘 공격이 있었고 이에 따라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에 대한 전면적인 재봉쇄와 반격이 시작되었다.


 I. 예루살렘  

   1. 예루살렘

   지중해와 사해 사이, 유대아 산맥 해발 785미터의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예루살렘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가운데 한 곳이다. 이곳은 아브라함 세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이며 요람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은 또한 유대 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중심지이다. 유대 민족주의자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비롯된 이스라엘 민족의 후손으로서 천부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고,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은 오랜 세월 그곳에 정착하여 살아온 사람들의 후손임을 근거로 예루살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중요 분쟁 지역이 되고 있다.

    

-예루살렘-

 

    기원전 19세기 이집트 중왕조 “저주의 서書”는 “rwslmm”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Rusalimum”또는 “Urusalimum”등으로 번역되는 것으로 예루살렘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 기원전 13세기 가나안 시대 아브디 헤바(Abdi-Heba: 이집트가 임명한 예루살렘 지도자)의 아마르나 서간문(이집트 신왕조와 가나안 지도자 간에 주고받은 외교 문서)은 우루살림(Urusalim)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문헌상 예루살렘에 대한 최초의 언급일 것이다. 우루살림은 가나안 신 “샬렘(Shalem)”의 이름을 딴 “샬렘의 시”를 뜻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샬렘(또는 Shalim)은 가나안 초기 신의 이름으로, 히브리어로 평화를 뜻하는 Shalom(아랍어로 Salam)에서 파생된 어휘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어원이 뜻하는 대로 “평화의 도시”, “평화가 거처 하는 곳”, “평화의 집” 또는 “폭력이 없는 곳”을 뜻한다.

-아마르나 점토판-

    성경 여호수아서에는 “Yerushalayim”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와 관련 미드라쉬(Midrash: 히브리 성서 주석서)는, 하느님이 두 이름 “Yireh(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희생물로 바치려고 했던 곳)”와 ”Shalem(평화의 곳)“을 결합하여 예루살렘이라는 말을 만드셨다고 한다. 여기서 Yireh는 셈어로 ”초석을 놓다“를 뜻하는 "yry"에서 온 말이고, -ayim은 복수를 뜻하는 어미로, 따라서 ”Yerushalayim“은 이 도시가 ”두 언덕“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어미 -ayim에 관한 성경 이외의 기록으로 최초의 것은, 예루살렘 고시가지 서쪽 3킬로미터 지점에서 발견된 돌기둥 명문銘文으로 기원전 1세기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 이외 예루살렘(Jerusalem)이라는 단어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6~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1년 구브린(Beit Guvrin: 이스라엘 중남부 라기스 소재 키부츠) 인근 레이(Khirbet Beit Lei: 고고학적 유적지)에서 발견된 이 기록을, “나는 너의 하느님 야훼이니, 유다의 성읍들을 받아들이고 '예루살렘'을 다시 찾을 것이다.”  또는 “야훼는 온 땅의 하느님이시다. 유다의 산들은 '예루살렘'의 하느님 것이니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보다 한 세기 전의 파피루스에 기록된 예도 있다.

     비잔틴 시대 예루살렘은 그리스어와 라틴어 음역인 “히에로솔리마(Hierosolyma: 그리스어 hieros는 영어로 holy를 뜻함)”로 불리었다가, 로마 제국에 정복당한 시기에는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바뀌었다.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 유대아 사막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유대 종교 관련 문헌)에 기록된 ”족장의 이야기“ 편에서는, 예루살렘을 멜기세덱의 "살렘 왕국"과 동일시하고 있다(창세기 14:18). 그러나 또 다른 초기 히브리 문헌이나 타르굼(Targum: 타나크를 히브리어가 아닌 청자聽者의 언어로 번역해놓은 구어口語 번역본)은 “살렘”을, 이스라엘 북부 세겜(현재의 나블루스) 인근으로 언급하였다. 후일 랍비 문헌들에서는 “살렘”을 예루살렘과 동일시한다. 예루살렘의 아랍어 명칭은 알 쿠드스(al-Quds)로 “성소聖所”를 뜻한다

    기원 전 7~6천 년 무렵 현재의 예루살렘 지역에 인간 흔적의 증거인 부싯돌이 남아 있고, 동석기 시대에 도기가 출현하였으며 다윗의 시(City of David: 예루살렘 구시가지 남쪽 구역)에는 기원전 4천 년 무렵 유랑하던 목동들의 움막 흔적이 남아 있다. 기원전 3천 년 청동기 초기에 최초로 이곳에 인간이 정착하여 살았다는 증거가 있다. 청동기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시기인 기원전 18세기 무렵, 예루살렘에 요새들이 있었다는 증거도 있다. 성경에 따르면 청동기 시대 여부스(Jebus)라고 불린 고대 예루살렘은 기혼의 샘(Gihon Spring: 키드론 계곡에 위치한 우물. 성 마리아의 우물이라고도 함) 위쪽에 있었다. “시온의 요새”로 불리었던 그곳은 고대(기원전 8세기부터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서기 476년까지의 기간)에 “다윗의 시”로 이름이 바뀌어 불리었다. 또 다른 이름 “시온”은 원래 예루살렘 특정 구역을 지칭했으나 후일 예루살렘을 뜻했고, 결국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땅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기혼의 샘-

    기원전 1550년부터 1200년까지 예루살렘은 이집트 가신 국가의 수도로서, 주변 목초지에는 몇 곳의 촌락이 있었다. 아브디 헤바의 지배 하에 소규모 이집트 수비대도 있었다. 이집트 세티 I세(1290~1279 BCE)와 람세스 II세(1279~1213 BCE) 때 예루살렘은 번영을 하여, 이에 따른 건축 활동이 활발하였다. 그 시대 예루살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로, 독특한 야훼 중심의 유일신 신앙이 발전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9세기 통일 이스라엘 왕국(United Kingdom of Israel) 시대 예루살렘은 건축 활동이 활발하였고 기원전 8세기에는 유다 왕국의 종교와 행정의 중심지였다. 유대교 성서(Tanakh)에 따르면, 다윗왕은 여부스족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빼앗아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았고, 솔로몬왕은 제1성전을 건축하였다. 오늘날 학자들은 유대인의 뿌리가 가나안족에 있으며, 그 문화는 독특한 야훼 중심의 일신一神숭배(후일 유일신 종교로 발전한)를 통하여 발전하였을 것으로 믿고 있다. 기원전 1천 년 무렵, 인류 문명의 여명기에 있었던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유대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띄고 있다. 예루살렘의 별명인 “성지”라는 이름은 아마도 제2성전 시기(516 BCE~70 CE)에 붙여졌을 것이다. 그리스어 번역본 타나크에는 예루살렘을 성지로 생각한 기독교에 관한 기록이 있다. 수니파 이슬람은 예루살렘을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제3의 성지로 생각하고 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면적이 0.9평방킬로에 불과하지만 통곡의 벽(Western Wall), 바위의 돔, 알 아크사 모스크, 성묘 교회 등 종교적으로 중요한 많은 성소들이 있다.    

    철기 시대의 고고학적 유물로는 실로암 터널(Siloam Tunnel)이 있다. 이 터널은 유다 왕국 히스기야 왕 때 건설된 수로水路로, 실로암 명문으로 알려진 히브리어 명문이 새겨져 있다. “넓은 성벽(Broad Wall: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유대인 지역에 위치한 성벽 터)” 역시 기원전 8세기 히스기야가 세운, 방어를 위한 요새였다. 실완(Silwan: 바위를 잘라 만든 예루살렘 고위 관리들 무덤)공동 묘지, 실완 비석(Monolith of Silwan: 파라오 딸의 무덤), 로열 스튜어드 무덤(Royal Steward: 유다 왕국 고위관리 무덤. 무덤을 개봉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명문이 있음)들에는 기념비적인 히브리어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스라엘 탑(Israelite Tower: 예루살렘 유대인 구역 소재 철기 시대 유적)은, 조각 무늬가 새겨진 초석 위에 거대하고 단단한 돌로 세운 고대 요새의 잔해이다. 2012년 로빈슨 아치 문(Robinson's Arch: 성전의 언덕 남쪽 모퉁이 거대한 석제의 문)돌계단 근처에서, 철기 시대의 거대한 저수지 터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유다 왕국 시기 성전의 언덕 서쪽 전역에 사람들이 조밀하게 살았다는 증거이다.

-실완 무덤-

    성경은 예루살렘을 벤야민 지파의 성읍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 주민은 여부스족이었다. 다윗왕은 여부스족을 정벌한 후, 헤브론(Hebron: 예루살렘 남쪽 30킬로 지점 위치. 족장들의 무덤인 동굴이 있음)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천도하여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다윗시에 있는 거석 구조물(석조 건물 흔적)과 돌계단을 다윗 왕의 궁터로 보는 학자도 있다.

 
-다윗 시(모형)-

    성경 기록에 따르면 다윗왕은 40년을 통치하였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를 이었다. 솔로몬은 모리아 산(Mt. Moriah: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쳤던 산악 지역. 역대기의 솔로몬 성전이 있었던 곳. 현 예루살렘 성전의 언덕)위에 성전을 세웠고, 계약 궤(십계명을 새긴 두 개의 석판을 담은 상자)를 보관했던 성전은 유대인의 종교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솔로몬이 죽은 후 왕국의 분열과 함께 북쪽 이스라엘 왕국 12지파 중 10지파는 왕, 선지자, 승려, 종교관습, 수도, 사원이 각각 다른 10개 나라들로 분열하였다. 남쪽 종족들은 아론의 승려제도(Kohen: 아론의 직계 후손만이 승려가 될 수 있는 제도)와 함께 예루살렘에 남았고, 예루살렘은 유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가 이스라엘 왕국을 점령하였을 때, 대규모 난민의 유입으로 예루살렘은 인구가 증가하여 2만5천 명을 넘었다. 기원전 587년부터 586년까지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네브카드네자르 II세(Nebuchadnezzar II, c. 642~562 BCE)는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솔로몬 성전을 비롯하여 예루살렘을 구석구석 파괴하였다. 유다왕국은 멸망하고 많은 난민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 사건으로 제1차 성전 시기가 끝이 났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c. 600~530 BCE. c.는 circa의 약자로 대략이라는 뜻)은, 바빌론에 포로가 되어 있던 유대인들을 유다로 돌려보내 성전을 재건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다리우스 대왕(Darius the Great, 550~486 BCE) 치세 기간인 기원전 516년, 제2성전이 세워졌다. 제1성전이 파괴된 후 70년이 되던 해였다. 그 후 기원전 485년 인근 국가들 동맹군이 예루살렘을 점령, 대규모 파괴를 하였다. 그때부터 40년이 지난 기원전 445년, 페르시아 제국의 아르타세르세스 I세(Artaxerxes, 465~424 BCE)가 예루살렘 재건에 관한 칙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은 유다 왕국의 수도로서, 아울러 유대인 종교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다시 찾게 되었다.

    제2성전 시기에 만들어진 많은 무덤들이 예루살렘에서 발굴되었다. 그 중 한 무덤에서 발견된 1세기 무렵의 유골함에는 “ 무덤의 건설자 시몬”이라는 명문이 아람어로 새겨져 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에서 발굴된 아바의 무덤에는 “나 아바는 사제 엘레아자르(Eleazar: 선지자 아론의 아들)의 아들로서, 그리고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으로서 예루살렘에서 핍박 받고 학대 받아 바빌로니아로 끌려 간 뒤, 유다의 아들 마타디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여기에 그를 묻었노라”라는 아람어와 고대 히브리어로 새겨 놓은 명문의 비석이 있다. 키드론 계곡(Kidron Valley: 예루살렘 구시가지 북서쪽 계곡)의 헤지르(Benei Hezir: 석벽을 파 만든 네 개의 무덤)무덤은 아름다운 도리아식 돌기둥과 히브리어 명문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제2성전시기 사제들 무덤으로 판명되었다. 산헤드린(Sanhedrin: 고대 이스라엘에서 도시 마다 재판관으로 임명된 23명에서 71명에 이르는 원로들 모임)묘지는 석벽을 파 만든 63기의 지하 무덤으로, 예루살렘 북쪽 교외 산헤드리아(Sanhedria)에 소재하고 있다. 이 무덤들에는 아람어와 히브리 고어로 새긴 비문이 있는데, 기원전 100년경부터 기원후 10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베네이 헤지르-

    알레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에 따라 예루살렘과 유대아(Judea: 예루살렘이 위치한 레반트 남부 산악지대)는 마케도니아 수중으로 떨어져, 프톨레미 왕조(이집트를 지배했던 마케도니아 왕조)의 프톨레미 I세(367~282 BCE)에게 복속되었다. 그후 프톨레미 V세(215~164 BCE)때 예루살렘과 유대아는 셀류싯제국(Seleucids Empire, 312~63 BCE 기간 서아시아에 존재했던 그리스 국가)의 안티오쿠스 III세(241~187 BCE)에게로 넘어갔다. 예루살렘을 그리스식 도시국가로 개조하려고 했던 셀류싯제국은, 기원전 168년 마타디아스(Mattathias ben Johanan, 166~165 BCE) 가문이 주도한 마카비 반란을 맞았다. 마타디아스의 다섯 아들이 반란에 성공, 기원전 152년 하스모니아 왕조(Hasmonean dynasty, 140~37 BCE)를 세운 후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였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106~48 BCE. 로마 장군, 정치가)는 하스모니아 왕가 왕위 쟁탈전에 개입, 예루살렘을 수중에 넣고 유대아 전 지역을 지배하였다. 이어 하스모니아를 지지하는 파르티아(Parthia, 247 BCE~24 CE 기간 존재했던 고대 이란 제국)의 침략이 있자 유대아는, 친로마와 친파르티아가 충돌하는 현장이 되었다가 결국 헤롯이라는 에돔인의 등장을 맞는다.

    파르티아보다 강했던 로마는 헤롯을 유대인의 왕으로 봉하였다. 헤롯 대왕(c. 72~c. 4 BCE)은 예루살렘을 발전시키고 아름답게 만들려고 혼신을 다했다. 성벽과 탑, 왕국을 건설하고 성전의 언덕도 넓게 확장했으며 궁정은 돌벽돌로 튼튼하게 쌓았다. 쌓은 돌에는 100톤에 달하는 바위도 있었다. 성전의 언덕도 그 면적을 두 배나 확대하였다. 헤롯이 죽은 직후인 서기 6년 유대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으나, 헤롯 왕조는 아그리파 II세(Herod Agrippa II, 27~100 CE) 시대인 서기 96년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가신왕家臣王으로 남아 있었다.

    예루살렘과 유대아에 대한 로마의 지배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을 불렀고,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전쟁 초기 예루살렘은 이곳을 장악하려는 유대 파벌들 간 무자비한 내전으로 황폐화 되었다. 서기 70년 로마는 예루살렘과 제2성전을 파괴하였다. 당시의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c.100 CE. 유대계 로마 역사학자)는 "파괴자들에 의해 완전 파괴되어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한 때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당시 1백만에 달했던 예루살렘 인구 가운데 많은 수가 굶어 죽거나 살해당하거나 또는 노예로 팔려갔다. 서기 132년, 로마에 저항하여 발생한 바르 코크바(Bar Kokhba) 반란은 3년 후인 135년 실패로 끝이 났다.

    바르 코크바 반란 후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아 속주와 인근 지방을 합쳐 시리아 팔라에스티나(Syria Palaestina)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예루살렘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꾸고 전형적인 로마식 새로운 도시로 재건하였다.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출입은 금지되고, 매년 티샤 바브 휴일(Tisha B'Av: 유대 역사상 수많은 재난, 특히 솔로몬 성전 파괴를 슬퍼하는 3주간의 마지막 금식일) 하루만 허락되었다. 이 같은 조치와 함께 예루살렘을 세속화하는 작업도 추진되었다. 유대인의 예루살렘 접근 금지는 7세기까지 계속되었으나 기독교도에게는 불원간 허락이 될 터였다. 4세기초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는(272~337 CE)는 예루살렘에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예루살렘 구시가지 기독교 구역에 소재하는, 예수님의 시신이 비어 있는 무덤으로 알려진 곳에 세운 교회)를 비롯하여 기독교 성소 건설을 명령하였다. 비잔틴 시대의 매장 유적으로는 기독교 유적들만 남아 있는데, 이는 당시 예루살렘 주민이 모두 기독교도였음을 뜻한다.

-성묘 교회-

    예루살렘은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 통치 하에 있다가 5세기에 페르시아로 넘어 간 후, 다시 동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7세기 초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코스로에스 II세(Chosroes II, 590~628 CE)는 시리아를 통하여 예루살렘을 압박했고, 서기 614년 그의 수하 장군 샤르바라즈(Shahrbaraz: 후일 사산조 페르시아 왕)와 샤힌(Shahin, ?~626 CE)은, 동로마제국에 반기를 든 팔레스티나 프리마(Palaestina Prima: 팔레스타인의 동로마 속주 지역)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 포위를 당한 예루살렘은 21일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항복하였다. 비잔틴 연대기에 따르면, 이때 페르시아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주민인 수만 명의 기독교도들을 마밀라(Mamilla Pool: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하던 저수지)에서 학살하였고, 성묘 교회를 비롯하여 기독교 교회들과 기념물들을 파괴하였다. 사산조 페르시아 수중에 떨어진 예루살렘은, 629년 동로마 제국 황제 헤라클리우스(Heraclius, 575~641 CE)가 재정복하였다. 그 후 서기 638년, 오마르(Omar ibn al-Khattab, 582~644 CE. 예언자 무함마드의 4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의 군대가 동로마 제국 지배하에 있던 예루살렘을 공격, 점령하였다.

-마밀라 풀-

   초기 무슬림들은 예루살렘을 “성전의 도시”로 알았는데, 이는 성전의 언덕에만 국한된 이름이었다. 이곳 이외의 지역은 일리야(Iliya)라고 했는데, 이는 서기 70년 성전이 파괴된 후 로마식 이름인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를 반영한 이름이었다. 후일 성전의 언덕은 “고귀한 성소”를 뜻하는 알하람(al-Haram al-Sharif)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그 주변은 마크디스(Bayt al-Maqdis)로 불리다가, 후일 “성스러움, 고귀함”을 뜻하는 알쿠드스 알 샤리프(al-Quds al-Sharif)로 바뀌었다. 예루살렘의 이슬람화는 623년에 시작되었는데, 이때 무슬림들에게 예루살렘을 향해 엎드려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있었고, 무함마드는 야간 여행을 하여 천국에 이르렀다는 무슬림 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그 후 13년이 지나, 기도의 방향이 메카로 바뀌었다. 서기 638년, 이슬람 칼리프 왕국의 영토는 예루살렘까지 이르렀다. 이에 따라 유대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오마르(Omar 또는 Umar)는 예루살렘 기독교 지도자 소프로니우스(Sophronius, 560~638 CE)와 조약을 맺고, 예루살렘 기독교 성소와 신도들이 무슬림 법의 보호를 받도록 했다. 기독교 최고의 성소인 성묘 교회에서 오마르는 메카를 향한 기도를 드리기 원치 않았음으로, 무슬림들도 성묘 교회를 모스크로 바꿀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오마르는 성묘 교회 밖에서 기도를 드렸는데, 그곳은 현재 오마르 모스크(Mosque of Omar: 예루살렘 구시가지 소재)가 있는 곳으로 성묘 교회 입구와 마주보는 곳이다. 아르쿨프(Arculf: 680년 경 레반트를 여행한 갈리아 승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오마르 모스크는 폐허 위에 세워진 정방형의 목조 건물로, 3천 명의 신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오마르 모스크-

    7세기 말 우마이야 왕조(Umayyad Caliphate, 661~750 CE)의 칼리프 말리크(Abd al-Malik, 647~705 CE)는 성전의 언덕 위에, 오늘날 "바위의 돔"으로 알려진 사원을 신축했다. 이 건물에 대해 10세기 예루살렘 지리학자 무카다시(Al-Muqaddasi, c. 945~991 CE)는 성전의 언덕 위에 예루살렘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을 세웠다는 칭송의 말을 남겼다. 그 후 4백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예루살렘을 지배하려는 주변 아랍 세력들의 투쟁이 격화되면서 예루살렘의 명성은 시들었다.

-알 아크사-

    서기 1073년 셀주크 터키의 아트시즈 아바크(Atsiz ibn Abaq, ?~1079. 터키 용병 사령관)가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셀주크 터키 황제 투투쉬 I세(Tutush I, ?~1095)는 예루살렘을 빼앗기로 마음먹고, 그를 투옥한 후 활줄로 목을 졸라 죽였다. 그를 죽인 투투쉬는 예루살렘을 또 다른 셀주크 사령관 아르투크(Artuk Bey, 1085~1091. 예루살렘 셀주크 총독)에게 넘겼다. 서기 1091년 아르투크가 죽자 그의 두 아들이 다스렸다가, 1098년 파티마 칼리프(Fatimid Caliphate: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북아프리카에 존재했던 시아파 칼리프)의 손으로 넘어갔다. 기원 후 1천 년이 경과하면서, 예루살렘에서는 카라이트 운동(Karaite: 유대교 율법과 타나크 만을 인정하는 유대교 종교 운동)이 일어나 학문의 황금시대가 열렸었으나, 그 시대는 십자군에 의해 끝이 났다.

    서기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전 파티마 예루살렘 총독은, 적군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는 기독교 주민들을 성 밖으로 내쫓았다. 끝까지 저항하던 예루살렘을 정복한 십자군은 대부분이 무슬림과 유대교도인 남아 있던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예루살렘을 자신들이 세운 “예루살렘 왕국(라틴 왕국)”의 수도로 정하였다. 사실상의 주민이 사라진 예루살렘으로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항가리인,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시리아인, 이집트인, 네스토리안(Nestorians: 네스토리아파 기독교도. 서기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이단 판결을 받은 교파), 마론인(Maronites: 지중해 동부와 레반트 지역의 토착 기독교도), 야곱 합성론자(Jacobite Miaphysites: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이 통합된 하나의 위격이라는 이론 지지자), 콥트인(Copts: 북아프리카 토착 기독교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결과 인구가 증가하여, 전쟁이 끝난 후 예루살렘 인구는 약 3만 명에 이르렀다.

    서기 1187년, 십자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 아이유브제국(Ayyubid Empire: 서기 1171년 파티마 왕조 멸망 후 수립된 이집트 술탄 왕국)의 시조 살라딘(Saladin, c. 1137~1193)은, 유대인과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살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6만 프랑크를 납부해야 돌아올 수 있었던 1인당 몸값은 더 이상 물지 않아도 되었다. 이때 예루살렘 북동쪽 구역은 트랜스요르단으로부터 온 동방기독교(Eastern Christianity: 대략 3세기에서 7세기에 동유럽, 소아시아에서 발전한 기독교) 교도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살라딘-

    살라딘 치세하 아이유브 왕국은 주택, 시장, 공중목욕탕, 순례자 숙소, 종교 시설 등의 건설에 많은 힘을 쏟았다. 그러나 13세기 내내 예루살렘은 그 전략적 가치가 사라지고, 아이유브의 내분으로 성읍으로서의 위상이 줄어들었다. 서기 1229년 신성로마제국의 프레데릭 II세(1194~1250)와 아이유브 제국의 술탄 카밀(al-Kamil, 1177~1238) 사이에 체결된 평화협정에 따라, 제6차 십자군 전쟁이 끝이 났다. 이에 따라 기독교 측으로 예루살렘 반환이 시작되어, 1244년까지 평화롭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아이유브는 무슬림 성소들을 계속 관할했으며, 프레데릭에겐 예루살렘 요새 재건이 허락되지 않았다.

    서기 1244년, 크와라즈 타타르(Khwarezmian Tatars: 서기 1221년 몽고에 의해 멸망한 후 도적과 용병이 된 크와라즈제국 타타르 종족)는 예루살렘을 약탈, 많은 기독교도를 살해하고 유대인들을 쫓아냈다. 그러나 서기 1247년 이들 역시 아이유브에게 패주, 예루살렘으로부터 쫓겨났다.

    서기 1260년부터 1217까지 예루살렘은 맘루크(Mamluks: 13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이집트, 레반트, 서아라비아를 지배했던 해방 노예들이 세운 술탄 국가. 명목상 군주는 시리아 압바스 왕조 술탄)의 지배를 받았다. 십자군과 몽고군이 한 편이 되어, 여러 지역에서 맘루크와 싸웠다. 전투 지역에는 지진과 흑사병도 덮쳤다. 서기 1267년 나마니데스(Nachmanides, 1194~1270. 중세의 지도적인 유대인 학자)가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 인구는 2천 명에 불과했고, 그 가운데 3백 명이 기독교도였다. 유대인은 두 가구에 불과했다. 저명한 아랍어 사전 편찬자인 파이루자바디(Fairuzabadi, 1329~1414)는 그러한 예루살렘에서 10년을 보냈다.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예루살렘에 건축 활동이 활발한 시대였다. 이 시기에 건축한 건물 90동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맘루크는 학교, 도서관, 병원, 여행자를 위한 숙소, 분수, 공중목욕탕 등 건축을 적극 추진하였다. 건축 활동은 주로 성전의 언덕 주변에 집중되었다. 성전의 언덕에 이르는 출입문은 오래되어 새로 만들었고, 성전의 언덕 광장 북서쪽 끝을 따라선 주랑柱廊들도 이 시기에 새로 세웠다. 나시르 무함마드(al-Nasir Muhammad, 1285~1341. 제9대 맘루크 술탄) 통치 시기인 1336년, 시리아 총독 탄지크(Tanzik, ?~1340)는 목화 시장과 새 문(Bab al-Qattanin)을 건설했는데, 시장으로부터 이 문을 지나 성전의 언덕으로 오를 수 있었다. 맘루크 제18대 술탄이었던 카이트바이(Qaytbay, 1416~1496)역시 예루살렘에 관심이 깊었다. 그는 성전의 언덕 서쪽에 아쉬라피이야(이슬람 교육기관)건설에 착수, 1482년 완공을 했다. 곧 이어 그 근처에 카이트바이 분수도 세웠다. 

 -알카타닌 문-

    서기 1517년부터 1917년까지 예루살렘은 오토만 터키제국 수중에 있었다. 슐레이만 대왕(Suleiman the Magnificent, 1494~1566) 치세 시기에는 평화와 개혁이라는 번영의 시대를 맞아,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장엄한 성벽을 새로 쌓기도 했다. 현재 이 성벽은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아르메니아인, 기독교도, 유대교도, 무슬림 등 4개 구역으로 나누는 경계선이 되고 있다. 오토만 시대 예루살렘은 수도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였다. 오토만 터키는 예루살렘에 현대식 우편제도, 정기적인 역마차와 운송제도 등 많은 혁신을 하였다. 19세기 중엽 오토만 제국은 야파(Jaffa: 현 텔아비브 위성도시)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최초의 도로 포장을 했고, 1892년에는 예루살렘까지 철도도 개설했다.

    서기 1831년 이집트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1769~1849. 현대 이집트 창건자)가 예루살렘을 복속시키자, 외국 선교단과 영사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기 1836년 파샤(Ibrahim Pasha, 1789~1848. 무함마드 알리의 장남. 이집트 장군)는 예루살렘 거주 유대인들로 하여금 네 곳의 시나고그를 재건토록 허락하였다. 그 중 한 곳이 후르바 시나고그(Hurva: 예루살렘 구시가지 소재)이다.

    서기 1840년 오토만 터키 통치가 재개되었지만, 많은 이집트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살았고, 알지에(Algiers)와 북아프리카로부터 온 유대인들의 정착이 시작되어 인구가 늘기 시작했다. 서기 1840년대와 50년대 팔레스타인에서는 강대국들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종교적 약자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의 외교전이었다. 서기 1845년 현재 예루살렘 인구는 1만6천4백10명이었고, 그 가운데 유대인 7천1백20, 무슬림 5천, 기독교도 3천3백90, 터키 군인 8백, 유럽인이 1백 명이었다. 오토만 터키 통치 시기에는 기독교 순례자들이 증가하여, 부활절 때는 예루살렘 인구를 넘어서기도 했다.

    서기 1860년대에는 순례자들을 수용하고 인구 과밀에 대처하기 위해, 구시가지 성 밖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구역과 샤아나님(Mishkenot Sha'ananim: 예루살렘 구시가지 성 밖 최초의 유대인 정착지)이 세워졌다. 이어 1868년 마하네 이스라엘(Mahane Israel: 구시가지 성 밖 제2차 유대인 정착지), 1869년 쉬바(Nahalat Shiv'a: 법원 건물), 1872년 독일인 거주지, 1873년 베이트 데이빗(Beit David: 제4차 유대인 정착촌), 1874년 쉐아림(Mea Shearim: 유대인 정착촌), 1876년 하자디크(Shimon HaZadiq: 동 예루살렘 유대인 정착촌), 1877년 야코브(Beit Ya'aqov: 구시가지 성 밖 제9차 유대인 정착촌), 1880년대 토르(Abu Tor: 동예루살렘 유대-아랍 촌), 1882년 아메리카-스웨덴 촌, 1891년 모셰(Yemin Moshe: 구시가지 성 밖 유대인 정착촌), 그리고 19세기가 끝날 무렵에 마밀라(Mamilla: 구시가지 성 밖 마을)와 요즈(Wadi al-Joz: 동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마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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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토르 정착촌-

    서기 1860년, 시리아 내전으로 발생한 기독교 고아들 수용을 위해 슈넬러 고아원(Schneller Orphanage)이 세워졌다. 창립자인 독일인 루터파 선교사 슈넬러(Johan Ludwig Schneller, 1820~1896)의 이름을 딴 고아원이었다. 유대인 가정들은 서로서로 도와가며 고아를 돌보았기 때문에, 그때까지 예루살렘에는 고아원이 없었다. 서기 1881년 러시아 포그롬으로 발생한 유대 고아들이 도착하면서, 디스킨(Maharil Diskin, 1818~1898. 랍비. 탈무드학자)이 예루살렘에 “디스킨 고아원”을 설립했다. 이어 1900년 블루멘탈 고아원(Blumenthal Orphanage: 정통 유대교 고아원 및 교육기관)이, 1902년에는 소녀 고아원이 예루살렘에 설립되었다. 

영국의 신탁통치 시기(1917~1948)

    1917년 오토만 터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앨런비(Edmund Allenby, 1861~1936) 장군이 지휘한 영국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1922년 국제연맹은 “로잔느 회의(Conference of Lausanne)”에서 팔레스타인, 트란스요르단, 이락 문제를 영국에 위임했다.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은 1923년 9월부터 공식적으로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신탁통치가 개시된 시점 예루살렘 인구는 약 5만명이었다. 기독교도와 무슬림 간의 긴장과 유대인 증가로 예루살렘은 다시 불안한 사태를 맞이하였다. 1920년과 1929년에는 예루살렘에서 아랍계 주민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영국의 신탁통치 시기 예루살렘 서부와 북부 지역에 새로운 공원이 조성되고, 고등 교육기관인 히브리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 시기 발전소 건설도 있었다.

-앨런비 장군-

    

예루살렘 분리

     영국의 팔레스타인 신탁통치가 종료되어 가면서,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리 결의안(유엔 총회 결의 제181(II)호)을 채택하였다. 이 분리안은 팔레스타인 땅에 팔레스타인 국가와 유대 국가를 수립하되,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만은 별도의 분리지역(Corpus separatum)으로 하여 특별 국제정부 하에 두자는 안이었다. 이 국제정부는 10년 간 지속될 것이며, 예루살렘의 향후 정치적 형태는 국민투표로 결정될 것이라고 했다. 1948년 4월 29일 영국이 팔레스타인 신탁통치 종료를 선언하면서, 5월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5월 15일 아침 아랍 연맹군이 팔레스타인으로 침공하면서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였다. 따라서 유엔 결의안은 실현될 수가 없었다.

    전쟁과 함께 이스라엘은 서예루살렘(West Jerusalem: 현 이스라엘 수도)을, 동예루살렘(East Jerusalem)과 웨스트 뱅크는 요르단이 점령하였다. 1948년 5월 28일 요르단 군의 진주에 따라 동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유대 주민들을 쫓아내고, 그 대신 아랍계 팔레스타인 피난민들을 정착시켰다. 바로 샤라프(Harat al-Sharaf)로 알려진 곳이다. 한편 카타몬(Katamon: 예루살렘 남쪽 교외), 탈비야(Talbiya: 예루살렘 외곽), 독일촌 등지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집을 빼앗기고 쫓겨났다. 휴전이 되면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팔레스타인 거주 구역 15곳 중 12곳을 장악하였고, 이로 인해 적어도 3만 명의 아랍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였다. 

    예루살렘 이스라엘군 사령관 모세 다얀(Moshe Dayan, 1915~1981)과 요르단 측 대표 압둘라(Abdullah el-Tell, 1918~1973)는 예루살렘 교외 어느 폐가에서 만나, 각 측의 현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였다. 이스라엘은 붉은 색, 요르단은 초록색이었다. 이 표시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1949년 휴전 협정에서 예루살렘을 동, 서로 나누는 최종 경계선이 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땅인 스코푸스 산(Mt. Scopus: 예루살렘 북동쪽 위치)은 동예루살렘에 남게 됨으로써, 고립된 지역이 되었다. 예루살렘 중심부를 가로질러 설치된 철조망과 콘크리트 벽은 고색창연한 성벽 서쪽 야파 문(Jaffa Gate: 구시가지 7개 출입문 중 하나) 가까이를 지났고, 만델바움 게이트(Mandelbaum Gate: 경계선을 따라 구시가지 북쪽 끝 지점 위치)에는 검문소가 설치되었다. 양측은 상대방을 향해 수시로 사격을 가하여, 휴전 협정을 위반하기도 했다.

- 만델바움 검문소-

    이스라엘은 건국 후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언하였다. 1953년 요르단은 동예루살렘을 요르단의 제2 수도로 정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모두 휴전선 동쪽에 위치하게 되었음으로, 그곳 모든 성소들은 요르단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무슬림 성소들은 유지관리가 잘되었다. 그러나 휴전 협정 조문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유대교 성소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많은 유대교 성소들이 파괴되거나 신성이 더럽혀지기도 했다. 제한적이긴 했으나 요르단 사람들은 성묘 교회를 비롯하여 기독교 성소들에 접근함으로써, 이로 인해 많은 기독교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년이 지나면서 동예루살렘 구시가지 소재 시나고그 58곳 가운데 절반이 약탈을 당하거나 양계장 또는 마구간으로 바뀌기도 했다. 후르바(Hurva) 시나고그와 이스라엘(Tiferet Yisrael Synagogue) 시나고그도 그러한 피해를 입었다. 3천 년의 역사를 가진 올리브 산 유대인 공동묘지도 신성을 더럽혀 묘비석은 도로공사나 화장실, 요르단군 진지 건축에 사용되었다. 3만8천기의 유대인 묘지가 훼손되었고, 유대인 시신 매장이 금지되기도 했다. "통곡의 벽"은 부라크(al-Buraq: 이슬람 신화 속 천마天馬)와 관련된 무슬림의 성소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측은 서예루살렘 소재 마밀라(Mamilla) 무슬림 공동묘지 보호를 거부하였는데, 이곳은 초기 이슬람 시대까지 소급하는 묘지이다. 점령 기간 중 요르단은 역사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많은 건물들이 파괴된 자리에 현대식 건물들을 세우고, 바위의 돔과 알 아크사 모스크를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이스라엘 점령(1967~현재)

    영국의 신탁통치 기간(1923~1948)중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의 수도였다. 독립 후인 1949년 12월 5일 이스라엘 초대 수상 벤 구리온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영원하고 신성한 수도로 선언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텔아비브에 정부를 두었으나 이스라엘 국가의 유일한 수도는 오직 예루살렘뿐이며, 전쟁이 끝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계속 기울이는 중이라고 했다. 그의 말은 실제로 이루어져 1950년 이후, 텔아비브에 있던 이스라엘 입법, 사법, 행정 기관들은 국방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 1967년까지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수도로 기능하였으나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유엔 총회결의 194호에 따른 국제도시(International city: 특정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치 또는 반 자치 도시)였기 때문이다.

    1967년 6일 전쟁 당시 중립을 지켜달라는 이스라엘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요르단은 이집트와 방위조약을 맺고 이스라엘 점령하의 서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 성전의 언덕에서 양국 군대는 백병전을 벌린 끝에, 이스라엘군은 웨스트 뱅크 전 지역과 동예루살렘을 장악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3주가 지난 1967년 6월 27일 이스라엘은, 28개 팔레스타인 마을이 소재한 웨스트 뱅크를 비롯하여 기독교, 무슬림 성소들은 물론 동예루살렘에 대해 이스라엘 법을 적용하였다. “합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하였지만, 사실상의 합병이었다. 7월 10일, 에반(Abba Eban, 1915~2002)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유엔 사무총장에게 “합병"에 따른 법 적용이 아닌, 동예루살렘 점령에 따른 행정과 성소 보호를 위한 법적 근거가 필요하여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고 설명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 아랍 주민들에게 여론 조사를 실시하였다. 주민들에게는 영주권이 주어지고, 이스라엘 시민권 신청도 할 수 있도록 했다. 1967년 이후 동예루살렘 유대인 거주지는 계속 성장하여 왔으나, 팔레스타인 거주지는 그렇지 않다. 1967년 6일 전쟁 후, 이스라엘은 법에 따라 동예루살렘에 새로운 시 경계선을 확정하였다. 그 결과 현재 동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점령 지역”으로 불리나, 많은 국가들이 팔레스타인 국가 수도로 인정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점령에 따라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은 동예루살렘 구시가지를 다시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성전의 언덕을 와크프(Jordanian Waqf: 성전의 언덕 이슬람 건물 관리 기구)가 관리하도록 했고, “통곡의 벽”도 유대인들에게 개방하였다. 통곡의 벽 가까이 있는 모로코 구역은 철거하여, 벽 앞의 광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내었다. 1968년 4월 18일, 이스라엘 재무부는 유대 구역 면적의 두 배가 넘는 토지 몰수 령을 내려, 그곳 아랍계 주민들을 내쫓고 700동 이상의 건물을 몰수하였다. 그 가운데 105개동은 요르단이 점령하기 이전, 유대 주민들 소유 건물이었다. 몰수령은 이 지역을 공공목적에 사용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유대인만을 위한 조치였다. 쫓겨난 아랍 주민들에게는 가구당 2백 디나르의 보상금을 주었다.

    6일 전쟁 후 예루살렘 인구는 196%가 증가하였다. 이 가운데 유대 인구는 155%, 아랍 인구는 314%나 증가하였다. 예루살렘 유대인 점유율은 1967년 74%, 1980년 72%, 2000년 68%, 2010년 64%, 2020년 59%를 기록했다. 이스라엘 농업부 장관 샤론(Ariel Sharon, 1928~2014. 후일 수상 역임)은 동예루살렘 동쪽 끝 주변에 유대인 정착촌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는 동예루살렘을 보다 유대화 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이 되지 않도록 하는데 그 의도가 있었다. 1977년 10월 2일 이스라엘 내각은 이 안을 승인했고, 이에 따라 동예루살렘 동쪽 끝 지역에 7곳의 유대인 마을이 조성되었다. 동예루살렘 시내에도 유대인 마을이 건설되었고, 아랍 마을에도 유대인들이 정착하였다.

    1980년 이스라엘이 제정한 예루살렘 관련법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하여 의회(Knesset), 수상관저, 대통령 관저(Beit Aghion), 대법원 등 이스라엘 모든 정부기관을 예루살렘에 두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영토로 보고, 이스라엘의 점령을 불법으로 보고 있다.  

    1988년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본부인 동예루살렘 소재 “오리엔트 하우스”를 폐쇄하였다. 1992년 이 건물은 팔레스타인 영빈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1993년 9월 13일 이스라엘-PLO 간 서명한 오슬로 협정(Oslo I Accord)에 따라, 예루살렘의 최종 지위는 팔레스타인과의 협상을 통해 결정된다고 했다. 또 최종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PLO는 동예루살렘에 공식적인 기구를 둘 수 없으나 무역사무소 개설은 가능하다고 했다. 팔레스타인 당국은 동예루살렘을 향후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압바스(Mahmoud Abbas, 1935~. 팔레스타인 국가 대통령)는,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인정하지 않는 어떤 협정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1949~. 이스라엘 수상)는 동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측은 예루살렘, 특히 성전의 언덕에 접근성이 좋은 아부 디스(Abu Dis: 웨스트 뱅크 소재 팔레스타인 마을)를 팔레스타인 국가 수도로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방어망에서 아부 디스를 제외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당국은 후일을 생각하여 그곳에 팔레스타인 의회 건물을 세웠고, 예루살렘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모든 기구들을 그곳에 두고 있다.

-아부 디스-

    1995년 미국 하원은 조건이 허락하는 경우, 주 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로 이전하겠다는 내용의 관련법을 통과 시킨 적이 있었다. 2017년 12월 6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유엔의 정책과는 달리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할 뜻을 발표하였다. 이는 많은 국가들의 비난을 받아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나, 2017년 12월 18일 미국은 이를 거부하였다. 유엔총회는 이 같은 미국의 결정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2018년 5월 14일 미국은 공식적으로 대사관을 텔아비브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텔아비브 기존의 대사관 건물은 총영사관으로 바꿨다.

    2010년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 이스라엘 최고의 위상을 부여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 전역에 주택과 인프라 건설, 교육, 고용, 사업, 관광, 문화행사 등을 진작 시키기 위해 주민들에게 금융과 세제상의 특혜를 주었다. 칼론(Moshe Kahlon, 1960~. 이스라엘 통신부 장관)은 예루살렘은 분리되지 않을 것이며 이 법은 예루살렘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밝히는 분명한 메시지라고 했다. 따라서 이 주권과 배치되는 어떤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2017년 4월, 러시아 외무부는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인정하는 유엔의 원칙에 따라 서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본다는 발표를 하였다. 2018년 12월 15일 호주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였으나, 이-팔 분쟁이 해결될 때까지 대사관은 텔아비브에 계속 두기로 했다. 그러나 2022년 10월, 호주는 이 결정을 번복했다.

    한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242호)에 따라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이 불법 점령한 지역으로 보고 있다. 또 예루살렘 문제는 “공개된 도시(Open City: 파괴를 피하기 위해 방어를 하지 않고 적에게 내주되, 적도 파괴하면 안 되는 국제법상 도시)"와 같은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했다. PLO는 1967년 정한 경계선에 따라 동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의 수도,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 하여 각자 주권을 행사함이 옳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개발은 공동개발 위원회가 책임을 지면된다고 했다. 러시아나 중국은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인정하고 있다. 유엔 총회 결의(Resolution 58/292호)도 동예루살렘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다.


-동, 서예루살렘-

    예루살렘 여러 성소들은 이-팔 분쟁의 주요 이슈로 남아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동예루살렘에 유대인 거주 확대를 위해, 그곳 구시가지 무슬림 구역에 건물 신축을 계획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슬람 지도자들은, 2천5백 년이나 된 서쪽 벽(통곡의 벽)은 모스크의 일부로서 유대인은 예루살렘과 역사적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2000년, 바라크(Ehud Barak, 1942~. 이스라엘 수상)가 소집한 전문가 그릅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은 국가적 목적 달성에 실패하였음으로 예루살렘은 6일 전쟁 이전의 분할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2014년 네타냐후 수상은, 예루살렘은 결코 분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2. 예루살렘 종교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이다. 유대교에게 예루살렘은 대략 3천 년, 기독교에는 2천 년 동안 성지였고 이슬람에게도 거의 1천4백 년 동안 성지였다. 예루살렘에는 이 종교들의 성소들이 있고, “성전의 언덕”은 이 세 종교가 공유하는 성소이다. 평화적인 공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성전의 언덕은 끊임없는 마찰의 장소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성지 중의 성지로, 기원전 10세기 다윗 왕이 수도로 정한 이후 지금까지 유대 민족의 정신적 고향이 되어왔다. 고전 고대(Classical antiquity: 800 BCE~500 CE)에는 하느님이 거하시는,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유대교 성서(Tanakh)에는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669번 등장한다. 토라에서는 모리아 땅(Moriah: 창세기 22:2)으로 등장한다. 모리아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느님께 바친 곳이다.

    유대인은 누구나 다윗 왕의 예루살렘 정복과, 그곳에 성전 건축을 위하여 애를 쓴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기고 있다. 예루살렘에 대한 다윗왕의 열망은 기도문이나 찬송가가 되어 남아 있다. 타나크에 따르면, 성전의 언덕 위에 있었던 제1성전은 솔로몬 왕이 건설에 착수하여 기원전 950년에 완성하였다. 기원전 580년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정복, 이 성전을 파괴하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때부터 유대교는 율법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솔로몬 성전과 제2성전 터인 성전의 언덕(Temple Mount)은 유대교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다. “통곡의 벽”으로도 불리는 서쪽 벽(Western Wall: Kosel)은 파괴된 제2성전 성벽의 잔해로, 유대인들이 기도를 드리는 곳이다. 시나고그를 건설할 때, 아론 코데쉬(Aron Kodesh: 토라를 보관하는 방)는 성전의 언덕을 향하도록 짓는다. 미쉬나(Mishna: 구전 토라 최초의 문서본)와 유대 율법서(Shulchan Aruch)에 정해진 대로, 매일 드리는 기도는 예루살렘과 성전의 언덕을 향해 하여야 한다. 유대 가정은 집집마다 기도의 방향을 가리키는 미즈라(Mizrah: 히브리어로 동쪽을 뜻함)를 벽에 걸어 놓고 있다. 제라임(Zeraim: 씨앗에 관한 미쉬나 율법)에 따라, 첫 수확물은 예루살렘에서 먹어야 한다(하느님께 드리는 제물로, 사제들에게 먼저 올렸음). 초막절(Sukkot: 그레고리력으로 1월15일부터 시작하는 예루살렘 성전 방문 절기)에는 예루살렘에 모여 좋은 과일, 종려나무 가지, 무성한 나뭇가지,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7일간을 야훼 앞에서 즐거워하고(레위기 23:40), 신년 새해(Rosh Hashanah)에는 쇼파르(Shofar: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를 부는 특별한 율법을 지킨다

-쇼파르-

    예루살렘은 또한 기독교의 요람이다. 그 긴 역사와 함께 예수님의 일생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으로, 기독교도들의 경외 대상이다. 신약에 따르면, 예수님은 태어나신 후 정결 예식을 치르고자 예루살렘으로 오셨고(누가복음 2:22), 후일 제2성전을 정화하셨다(요한복음 2:14~17). 또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누가복음 2:41). 세나클(Cenacle: 다락방)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던 곳으로 성전의 언덕 위, 다윗왕의 무덤과 같은 건물에 있다. 또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골고다(Golgotha) 언덕이 예루살렘에 있다. 성묘 교회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로 간주되고 있다. 성묘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은 골고다로 생각되어,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순례자들의 순례지가 되어왔다. 기독교는 유대인과 예루살렘과의 관계를, 하느님과 하느님이 선택하신 백성들과의 관계 즉 성약聖約으로 보고 있다.

-성묘 교회 내 골고다-

    중세의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했고, 따라서 지도(T–O map: 7세기 세계지도)에도 그렇게 표시했다. 비잔틴 제국에서 부른 성가 “지구 중심에 세운 십자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연상케 하는 찬송가 가사였다. 중세 유럽에서는 동쪽(Orient)의 예루살렘을 지도 위에 오도록 하고 교회 건물은 정문이 동쪽 예루살렘을 향하도록 지었는데, 이렇게 해서 “오리엔트(Orient)”라는 단어는 “올바른 방향을 정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수니파 이슬람교의 제3의 성지이기도 하다. 메카의 카아바(Kaaba: 메카 소재 알 하람 모스크 광장의 건물)로 바뀌기 전, 이슬람의 기도 방향(Quibla)은 예루살렘이었다. 제3의 성지가 된 이유는, 무함마드의 야간 여행(620 CE) 때문이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어느 날 밤 메카의 대 모스크(Masjid Al Haram)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와 승천하여, 천국에서  이슬람 선지자들을 만났다고 믿는다. 쿠란 제17장(Surat al-Isra) 첫 구절은, 무함마드 여행의 목적지는 “가장 먼 기도의 장소”임을 말하고 있다. 이슬람 초기에는 이 장소를 천국으로 이해했으나, 라쉬둔(Rashidun: 632~661 CE. 예언자 무함마드를 계승한 제1대 칼리프) 이후의 이슬람 학자들은 예루살렘, 특히 과거 성전이 있던 곳을 천국으로 알았다. 무함마드의 언행집인 하디스(Hadith)는 알-아크사(Al-Aqsa) 모스크의 소재지를 예루살렘으로 기록하고 있다. 알 아크사라는 명칭은 원래 이 사원이 자리한 넓은 지역의 이름을 따라 지은 것이다. 무함마드 사후 수십 년이 지난 우마이야 왕조 칼리프 왈리드(Al-Walid, c. 674~715 CE) 때, 무함마드가 승천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성전의 언덕 위에 이 모스크를 건설하였다.

    성전의 언덕은 이슬람 제3의 성소이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야간 여행 중 메카의 알 하람(Masjid al-Haram) 모스크로부터 이곳으로 온 것으로 믿는다. 이슬람에게 최고의 성소(al-quds)는 시리아이고, 시리아 최고의 성소는 팔레스타인이며, 팔레스타인 최고의 성소는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 최고의 성소는 성전의 언덕이며, 성전의 언덕 최고의 성소는 예배를 드리는 알 아크사이다. 무함마드가 알 샴(al-Sham: 예루살렘)에게 복이 있으라 했고, 제자가 그 이유를 묻자 무함마드는, 알라의 천사들이 알 샴 하늘 위에 날개를 펼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압바스(Ibn Abbas, c. 619~687. 무함마드의 사촌)는, 알 쿠드스(al-Quds: 예루살렘)에 너무나 많은 선지자들이 살아, 더 이상의 선지자가 기도를 드리거나, 더 이상의 천사가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했다.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미치는 정신적 중요성은, 기도의 방향성(Qibla) 때문에 더욱 강조되고 있다. 무함마드가 알라의 인도에 따라, 메카의 카아바(Kaaba: 메카 소재 알 하람 모스크의 석제 건물)가 아닌 메디나로 간 후 17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를 드렸다는 이슬람 전승이 있다. 아브라함, 다윗 왕, 솔로몬 왕, 예수님과 관련된 예루살렘은 무슬림에게도 매우 중요하고 성스러운 곳이다. 이들 모두 쿠란에도 등장하는 이슬람의 선지자들이다. 오늘날 성전의 언덕에는 우마이야 왕조 초기부터 세워진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 사슬의 돔(Dome of the Chain), 알 아크사(Al-Aqsa Mosque) 등 3개의 기념비적인 이슬람 건축물이 있다.

-바위의 돔-

II. 예루살렘 전투

   1. 예루살렘 공방전

     긴 역사를 통하여 예루살렘은 적어도 두 번에 걸쳐 완전 파괴를 당한 적이 있고, 스물세 번의 공방전을 치루고 마흔네 번의 정복을 당하였으며, 쉰두 번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이제 독자 여러분은 이 길고, 혼란스러운 전투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가. 다윗의 여부스 점령(1010 BCE)

    기원전 1010년, 다윗왕은 이스라엘족을 지휘하여 가나안 성읍인 예루살렘, 즉 여부스를 공격, 점령하였다. 이스라엘족은 여부스를 기습, 점령한 후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그 이름을 “다윗의 시”라고 하였다. 여부스 정복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성경 기록이 있다.

    "다윗 왕이 부하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가자, 거기 사는 여부스인들이 다윗에게 빈정거렸다. "너 같은 것이 이리로 쳐들어오다니, 어림도 없다. 소경이나 절름발이도 너쯤은 쫓아낼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감히 쳐들어오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 견고한 시온 성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이 다윗의 도성이 되었다(사무엘하 5:6~7)."

    "다윗은 온 이스라엘 군을 거느리고 여부스라고 불리는 예루살렘으로 갔다. 여부스 주민들은 '네가 이리로 쳐들어오려느냐? 어림도 없다.' 하고 조롱했지만, 다윗은 기어이 그 견고한 성 시온을 점령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다윗의 도성이 되었다(역대기상 11:4~5)."

-여부스 성터-

여부스를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고, 이스라엘족과는 무관한 아무런 역사적 배경이 없는 종족(Pseudo-ethnic)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나. 시삭의 예루살렘 약탈(925 BCE)

   유대교 경전 타나크 기록에 따르면 시삭(Shishak, 943~922 BCE)은 이집트 제22왕조의 시조로서, 기원전 10세기 예루살렘을 공격, 약탈한 파라오이다. 그는 마족(Ma: 고대 리비아 베르베르 족) 대족장 님롯의 아들로, 그의 행적은 이집트 아문 레(Amun Re: 태양신) 신전 카르나크 부바스티스 현관문(Bubastite Portal)에 상형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시삭이 유다 왕국을 공격, 예루살렘을 약탈한 이야기는 열왕기상(14:25)과 역대기하(12:1~12)에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 왕이 죽자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남쪽의 유다 왕국과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유다 왕국 르호보암(Rehoboam, c.931~c.913 BCE 치세. 솔로몬의 아들. 통일 이스라엘 왕국 마지막 왕. 유다 왕국의 초대 왕) 5년(926 BCE)에, 시삭은 여로보암(Jeroboam, 931~c. 910 BCE 치세. 북 이스라엘 왕국 초대 왕)의 도움을 받아 6만의 기병과 1천2백 대의 전차로 유다 왕국을 휩쓸었다. 역대기하(12:2~3)는 "병거 1천2백 대에 기병 6만, 거기에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리비아군, 수끼군, 에티오피아군이 그를 따라 이집트로부터 쳐들어 왔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삭은 “야훼의 성전(제1성전)”과 왕의 거소에서 솔로몬 왕이 만든 황금 방패를 비롯하여 보물들을 훔쳤다. 잃은 물건을 대신하기 위해, 르호보암은 그 대신 놋 방패를 만들어 궁전 문을 경비하는 근위대 장교들을 무장시켰다(역대기하 12:9~10).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c. 100 CE. 유대계 로마 역사가)는 그의 저서 “유대 고대사(Antiquitates Iudaicae)”에서 시삭의 군대에 40만 명의 보병을 추가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시삭의 군대는 유다 땅을 통과하여 르호보암의 강력한 성읍들을 “아무런 전투 없이” 점령하였다. 시삭은 르호보암을 윽박질러 성전의 문을 열고 들어가 금과 보물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밖에도 시삭은 혼인을 통하여 여로보암과 혈연관계를 맺었다. 여로보암의 아내 이름은 70인역 성서(Septuagint: 그리스어 번역본 타나크)에 이집트 공주 “아노(Ano)”로 기록되어 있다. 시삭은 자기 아내 테케미나의 큰언니 아노를 여로보암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왕의 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여인이었다.

    이집트 상형문자가 해독된 직후 학자들은 연대나 역사, 언어적으로 보아 시삭은 소금의 호수(Bitter Lake: 스웨즈 운하의 일부인 이집트 소재 소금물 호수)전투 후 가나안을 침략한 이집트 제22왕조 파라오 “쇼솅크 I세(Shoshenq I)”와 동일 인물로 보았다. 이후 많은 학자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쇼솅크가 남긴 “가나안 전투 기록 상보(네게브 사막으로부터 갈릴리에 이르는 지명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음)”도, 메기도(Megido: 이스라엘 북부 메기도 키부츠 인근 고대 성읍 터)전승 기념비와 함께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쇼솅크의 전투 기록은 예외적이라 할 만큼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는 시삭의 예루살렘 전투를 언급하고 있는 성경의 기록과 모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 “시삭(Shoshek)"은 ”Shoshenq“에서 ”n"이 생략된 발음과 같다.

    카르나크 신전에서 발견된 부바스티스 문의 양각陽刻 그림은 엘 히베(el-Hibeh: 현재의 이집트 Tayu-djayet 시)의 아문(Amun)신전 벽의 그림과 유사한 것으로, 파라오 쇼솅크 I세가 한 무리의 죄수들을 붙잡고 있는 그림이다. 그가 정복한 성읍들은 이스라엘 왕국의 영토 내(메기도 포함) 성읍들이었고, 그밖에도 네게브와 필리스티아(Philistia: 레반트 남서쪽 소재 아쉬도드, 아쉬켈론, 에크론, 갓, 가자 등 5개 도시 동맹)의 성읍들도 일부 있었다. 


-부바스티스 문 벽화-

   일반적으로 부바스티스 문에 새겨진 글은, 쇼솅크 I세의 유다 전투 기록으로 본다. 그러나 이 기록에는 예루살렘 약탈에 관한 언급은 없다. 르호보함과 여로보암에 관한 기록도 없다. 이에 관한 여러 학설이 있다. 그 이름이 지워졌거나 아니면 성문의 기록은 그보다 앞선 파라오들의 전승 기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는 르호보암이 배상금을 치루고 목록에 기록되는 걸 면제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성경 역대기에 기록된 이집트 병사 수는 불가능 숫자이고, 병거 수도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시나이와 네게브를 6만 기병이 통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집트 제27왕조 이전 이집트 기병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쇼솅크 I세가 성전의 보물을 탈취해갔다는 건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먼저 유다 왕국은 쇼솅크 I세가 정복한 적국 명단에 올라 있지 않고, 기원전 10세기 예루살렘의 물질문화는 원시적이어서 이집트 파라오가 욕심을 낼 만큼 풍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쇼솅크의 성전 약탈은 “역사적 사실로서가 아닌 신학적 관점으로 이해되어야”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피어스(Krystal V. Pierce: 미국 고고학자. UCLA 교수)는, 카르나크 벽화는 쇼솅크 I세가 레반트 전투에서 약탈한 보물을 “아문 레”신에게 바치는 그림으로, 그는 그 보물들을 이집트 전역에 걸쳐 승전 기념물을 세우는 비용으로 썼다고 했다. 

    시삭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에 등장한다. 영화 속 그는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에서 “계약 궤”를 훔쳐 타니스(Tanis: 나일 삼각주 소재)에 있는 “영혼의 우물”에 숨긴다.

   다. 세나헤립의 침략(701 BCE)

   기원전 720년 신아시리아제국은 북이스라엘 왕국 수도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그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으로 인해, 남쪽 유다 왕국은 인접 왕국들과의 전쟁에서 혼자 싸워야 했고, 남아 있는 북이스라엘 왕국 백성들도 보호해야 했다. 유다의 왕들은 과거 이스라엘 왕국의 영토였던 북쪽으로 세력 확장을 꾀했다. 이렇게 해서 아하즈 왕(Ahaz: 유다 왕국의 제12대 왕)과 히스기야 왕 말에는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공고한 기반을 다질 수가 있었다. 유다 왕국은 비록 신아시리아의 신하 국가이기는 하였지만, 공물을 바침으로써 국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가 있었다.

    유다왕국의 왕위에 오른 히스기야는 우상 파괴 등 전면적인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블레셋(Philistine)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던 네게브 사막의 땅들을 되찾기도 했다. 이집트와 아쉬켈론(Ashkelon: 이스라엘의 지중해 해안 성읍)과는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에 더 이상의 공물 납부를 거절하였다. 이에 세나헤립(Sennacherib, c. 745~681 BCE. 신아시리아 제국 왕)은 유다를 공격했던 것이다. 방어에 나선 히스기야는 아시리아 군대에 대한 물 공급을 차단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 밖 모든 우물들을 봉쇄하고, 성내 신선한 물 공급을 위해 기혼(Gihon: 동 예루살렘 키드론 계곡)의 우물까지 533미터 길이의 실로암 지하 수로를 건설하였다. 높은 감시탑과 튼튼한 성벽도 새로 새웠다. 히스기야는 백성들을 광장에 모아놓고, 아시리아인들은 오직 “인간의 힘”만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은 야훼의 보호를 받는다고 역설하였다.

-실로암 수로-

    열왕기하(18:14~16)에 따르면, 세나헤립이 라기스(Lachish: 라기스 강 남쪽 강변 유대아 저지대 고대 성읍)를 포위하였을 때, 히스기야로부터 공물을 바칠 터이니 돌아가 달라는 편지를 받았다. 히스기야는 은 3백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바쳤다. 이 엄청난 공물을 마련하기 위해 히스기야는 솔로몬 성전과 왕실 금고에 있던 은, 그리고 솔로몬 성전 문설주에 자기 손으로 입혔던 금마저 벗겨 바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나헤립은 대군을 몰아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였다. 성 앞에 진을 친 세나헤립은 성벽 위 유다 백성들에게 외쳐 말하기를, 히스기야가 그들을 속이고 있으며, 야훼는 예루살렘을 구해낼 수 없다고 하였다(이사야 36:20).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히스기야는 슬픔의 표시로 삼베옷을 입었다. 선지자 이사야는 히스기야를 안심시키기 위해, 세나헤립은 실패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난 밤 야훼의 천사가 18만5천 명의 아시리아 군인들을 죽였다고 했다(열왕기하 19:35). 학자들에 따라 이 숫자는 부정확한 것으로, 원래 5천1백80명이었다고 한다. 공성전에서 죽은 세나헤립의 병사 숫자이다. 어쨌든 세나헤립은 예루살렘만은 점령에 실패하였다. 야훼의 힘으로 예루살렘이 살아남았다고는 하나, 열왕기하(19:19)와 이사야(36:21)는 예루살렘 성 밖 유대인들이 겪은 공포와 파괴를 기록하고 있다. 세나헤립으로 인해 유다 왕국의 영토는 줄어들었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포로가 되어 아시리아로 잡혀갔다. 아시리아 왕은 목적을 달성하였고, 유다의 저항을 꺾고 복속 시킨 것이다.

    세나헤립의 유다 전쟁을 상세히 기록해놓은 세나헤립 연대기(Sennacherib‘s Prism)가 1830년 니네베의 폐허에서 발견되어, 현재 미국 시카고 대학 동방 연구소(Oriental Institute)가 소장하고 있다. 이 고문헌은 기원전 690년까지 거스르는 것으로, 그 내용은 46곳에 이르는 유다의 성읍을 멸하고, 히스기야를 “새장 속 새”처럼 포위한 세나헤립을 칭송하고 있다. 또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던 용병과 아랍인들이, 세나헤립 군대의 무시무시한 위용에 겁을 먹고 줄행랑을 친 이야기 하며 아시리아로 돌아간 세나헤립이, 유다로부터 받은 엄청난 공물에 대한 기록도 있다. 

    세나헤립은 예루살렘 주변 성읍들을 아시리아 가신家臣들인 에크론, 가자, 아쉬도드(Ashdod: 이스라엘 남부 지중해 해안 지역)의 성주들에게 넘겼다. 세나헤립의 군대는 아시리아 동부 산악지대에서 전투를 치룬 기원전 702년부터 697년까지, 그대로 유다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세나헤립은 메데스(Medes: 오늘날의 이란)로부터도 공물을 받았다. 기원전 696년 세나헤립은, 반란을 일으킨 아나톨리아(Anatolia: 지금의 터어키)의 봉신들을 제압하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기원전 690년 그는 아라비아 사막 북부에서 전투를 벌려, 아라비아 여왕이 도피해 있던 얀달(Dumat al-Jandal: 아라비아 반도 북서쪽에 위치한 고대 성읍)을 점령하였다.

    신아시리아 군대가 이집트를 공격했을 때 쥐떼의 공격을 받았다. 이를 쥐와 관련한 질병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이로 보아 세나헤립이 예루살렘 점령에 실패한 것은 어떤 질병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헬레니즘 시대 바빌로니아 역사가 베로수스(Berossus: 3세기 초 바빌로니아 역사가)는 그것을 흑사병이라고 했다. 이와는 달리 오빈(Henry T. Aubin, 1942~. 캐나다 역사학자)은, 유다와 이집트 제20왕조 동맹군이 예루살렘 공성전에서 신아시리아 군대를 격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로, 오빈의 가설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라. 벳 즈가리아 전투(162 BCE)

   기원전 164년 셀류싯 제국 시리아 총독 리시아스(Lysias, ?~162 BCE)는, 마카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시리아를 떠나 유대아로 원정을 하였다. 리시아스는 벳 쑤르(Beth Zur: 유대아 남부 헤브론 산 소재)에서 유다 마카비(Judah Maccabee, ?~160 BCE)가 지휘하는 반란군을 맞아 전투를 치렀다. 전투에서의 손실 때문인지 아니면 안티오쿠스 IV세(Antiochus IV Epiphanes, 215~164 BCE. 셀류싯 제국을 통치했던 그리스 왕)의 부음 때문이었는지, 리시아스는 협상을 통해 휴전을 하였다. 그는 셀류싯 고관인 필립과의 분쟁을 피해 시리아가 아닌, 셀류싯 수도 안티오크로 돌아갔다. 필립은 제국의 동쪽 메디아(Media: 현재의 아제르바이잔, 쿠르디스탄, 타바리스탄 지역) 출신으로, 안티오쿠스 IV세가 죽기 전 자신을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리시아스의 퇴각과 함께 마카비 반란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성전을 정화하고, 제단을 다시 헌납하였다. 그러나 셀류싯 군대는 성전의 언덕 맞은 편 예루살렘 성내 요새 아크라(Acra)를 아직도 장악하고 있었다. 기원전 162년 4월, 유다 마카비는 아크라를 포위, 유대아 땅 셀류싯 권력의 가장 중요한 상징물(뿔 달린 말)을 파괴하였다. 이는 셀류싯의 반감을 불러 리시아스는 안티오크를 출발, 두 번째 원정길에 올랐다. 양측은 모두 군량미 보급 문제가 있었다. 그 전년도에는 휴한기였다고는 하나, 문헌상으로는 명확치가 않다. 그러나 휴한기가 아니었다 해도, 식량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 밖의 전투와 폭력,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살육 등 혼란을 피해 예루살렘으로 물밀 듯이 들어오는 유대 피난민으로 인해, 식량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리시아스 원정군은 대부대였고, 보급은 약탈과 징발에 의존했다.

-셀류싯 제국-

    요세푸스에 따르면 리시아스 군 규모는 보병 5만, 기병 5천, 코끼리 80마리였다. 구약 마카베오상에는 보병은 이보다 많고 코끼리는 32마리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은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다 정확한 것으로 본다. 유대군의 규모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요세푸스가 유대군 방진方陣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헬레니즘식 훈련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들은 유대군의 규모를 대략 1만에서 2만 명으로 추정한다.

    리시아스가 지휘하는 셀류싯 군대는 헤브론 산(Mt. Hebron: 유대아 산맥 남쪽)을 지나 남서쪽으로부터 유대아로 접근하여, 벳 쑤르(Beth-Zur: 현 헤브론 산 위 고고학적 유적지) 를 포위, 항복을 받아냈다. 리시아스 군대는 계속해서 북쪽 약 32킬로 지점의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하였다. 전쟁 초기의 게릴라 전법으로는 유대아 남부와 예루살렘 방어가 어렵다는 걸 깨달은 유다 마카비는, 게릴라전 대신 예루살렘에 이르는 고원 지대에서 적을 격파하기로 했다. 셀류싯 원정군은 계곡을 통과해야 했고, 이는 원정군의 수적 우세가 오히려 불리하다는 걸 뜻했다. 기원전 162년 5월 말, 두 군대는 벳 즈가리아(Beth Zechariah: 예루살렘 남서쪽 16킬로 지점, 현 Khirbet Beit Sakaria 마을) 인근 협곡에서 전투를 벌였다. 리시아스는 아군 주력군의 전방과 측면 엄호에 필요한 인근 고지 점령을 위해 병력을 투입했다. 그 고지는 정찰은 물론, 전투 상황을 잘 관찰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리시아스 군대는, 사리사(Sarissa: 긴창)로 무장한 방진을 후미에 배치하고, 맨 앞 경보병 부대에 이어 코끼리 부대, 중보병 부대가 계곡을 지나 행군하고 있었다. 경보병 부대는 코끼리 행군에 장애가 되는 장애물을 제거할 수가 있었고, 기습에 대처할 수도 있었다.

-사리사 부대-


    코끼리 부대를 본 유다군은 허둥대기 시작했다. 유다 마카비의 동생 “엘레아자르 마카비”가 병사들에게 코끼리가 별 것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고, 적군의 거대한 코끼리를 향해 돌격하였다. 코끼리 밑으로 들어간 그는 칼을 들어 배를 찔렀다. 그 순간 코끼리가 그를 짓밟았다. 그가 죽었고, 물론 코끼리도 죽었다. 이 같은 용감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유다군은 셀류싯 방진의 위력에 무너졌다. 마카비 군대는 고원 지대로 후퇴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장소 인근 아파이레마(Aphairema: 시리아 왕 Demetrius Nicator가 사마리아 지방에서 유다로 편입 시킨 세 지역 중 한곳. 마카베오상 10:38)로 이동, 방어에 들어갔다.

-엘레아자르의 죽음-

    리시아스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는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잃을 수도 있는, 수도로부터 벗어나 장기간 머무를 수가 없었다. 군량미도 문제였다. 결국, 예루살렘 공방전은 평화협상으로 끝이 났다. 리시아스는 포위를 풀고, 유다 마카비 군대는 아크라 포위를 푸는 조건이었다. 리시아스는 안티오쿠스 IV세의 “반유대 칙령”을 폐지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성전의 언덕”을 뜻한 “시온 산” 위 자신의 방어벽을 허물어버리기도 했다. 평화조약이 발효되자 리시아스는, 어린 왕 안티오쿠스 V세(Antiochus V Eupator, 172~161 BC)를 필립(Philip)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안티오크로 돌아갔다. 그가 철수한 날짜는 기원전 162년 6~7월 무렵이었다. 필립은 선왕 안티오쿠스 IV세의 신하로, 반역의 혐의가 있어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마카베오하(13:2)는 양쪽 바퀴에 큰 낫을 단 리시아스 원정군의 3백대 병거를 기록하고 있다. 큰 낫을 단 병거는 보통 평평한 평야 전투용으로, 이 기록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유대아 땅은 그다지 평평하지 않고, 효과적인 병거 운용에 필요한 속도를 내기에 쉽지 않은 땅이다. 셀류싯 군대가 그만한 병거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요세푸스는 다프네(Daphne: 안티오쿠스 IV세가 세운 15개 신도시 가운데 한 도시)군사 분열식에 등장한 140대의 병거를 예로 들었으나, 낫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는 아마 전투용이 아닌 단순한 의전용, 운송용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리시아스 군대 규모에 관한 마카베오상의 기록은 요세푸스의 기록보다 큰 규모로 보병 10만, 기병 2만, 코끼리 32마리로 기록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를 지나치게 과장된 숫자로 본다. 그러한 규모의 군대가 실제로 파병되었다면 요세푸스가 말한 보병 5만, 기병 5천을 넘어서는 거대한 규모의 군대에 대한 보급은, 바로 악몽이었을 것이다. 코끼리 역시 불확실한 숫자로 요세푸스는 80마리라고 하였으나, 코크바(Bezalel Bar-Kochva, 1941~. Tel Aviv 대 석좌 교수. 역사학)는 더 적게 본다. 그는 요세푸스가 8마리를 “80”마리로 잘 못 말한 것이라고 했다. 코끼리는 사람의 손에 잡혀 있는 동안에는 번식이 어렵고, 당시 셀류싯은 인도 가까운 영토를 상실하여 새로운 코끼리 조달이 어려웠기 때문에, 기원전 162년 셀류싯이 그만한 코끼리를 유대아로 보낼 만큼 코끼리가 있었을 리 없었고, 따라서 그 수를 낮게 잡는 게 합리적일 것이라고 했다.

    마카베오하는 엘레아자르가 공격한 코끼리에 왕이 타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열 살에 불과한 왕이 원정에 참가했는지 여부는 성경 말고는 기록이 없다. 실제로는 총독을 왕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고, 코끼리의 화려한 장식을 본 엘레아자르도, 리시아스나 아니면 어떤 요인이 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그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리스 장군들은 알렉산더 대왕을 본따 언제나 말을 탔기 때문이다. 마카베오상은 또 코끼리가 "즉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현장의 안개 때문에 과장이 된 것일 수도 있다. 결국 죽지만 코끼리 사냥꾼들에 따르면, 코끼리는 금방 죽거나 쉽게 죽지 않는 동물이라고 한다. 화살 한 대로 코끼리의 머리나 심장 등 급소를 맞추었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는 수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다. 기원전 188년 로마-셀류싯 전쟁을 끝낸 아파메아 조약 (Treaty of Apamea)에서, 셀류싯은 코끼리 사용 포기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그 이후 전쟁에서 셀류싯 제국은 코끼리를 사용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탱크의 사용이 무력화된 것이다.

    기독교 예술과 문학에서는 그 희생정신으로 인해, 엘레아자르를 예수님의 분신으로 묘사한다. 로마 시대부터 산업혁명 시대까지 성경 마카베오서는 기독교 예술과 문학이 다룬 좋은 주제였다. 그러나 유대교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유대교 랍비나 현자들이 하스모니아 왕국을 좋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마카비 반란을 다시 거론한 때는, 19세기부터였다. 1961년 이스라엘 중앙은행은 엘레아자르 마카비의 영웅적 행동을 기념하는 하누카 동전을 발행하였다. 웨스트 뱅크 소재 “엘라자르(Elazar)”마을은 마타디아스(Mattathias: 마카비 형제들의 부친)의 아들 “엘레아자르”의 이름을 본 딴 것으로, 베이트 쑤르(Beit Zur: 헤브론 산 소재 고고학적, 성서적 유적지)로 가는 길목에 있다. 조그만 아랍 마을인 자카리야(Khirbet Beit Zakariyyah: 베들레헴 남서쪽 위치)는 고대 즈가리야가 있던 곳이다.

-엘라자르 마을-


   마. 안티오쿠스 VII세 예루살렘 공략(134 BCE)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 164~104 BCE)는 기원전 2세기 하스모니아 가문의 지도자이며 대제사장으로, 유대아를 통치한 인물이다. 랍비 문헌에는 “대제사장 요한”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치세 원년, 셀류싯 제국 왕 안티오쿠스 VII세(Antiochus VII Sidetes, 164~129 BCE)의 침략이 있었다. 안티오쿠스는 유대아(Judea: 예루살렘이 위치한 레반트 남부 산악 지역. 현재의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지역)로 진격하여 마을들을 약탈하고 1년 동안이나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였다. 장기간 포위를 당한 히르카누스는, 방어에 도움이 되지 않은 모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떠나게 하였다. 예루살렘을 떠난 유대인 대열은 안티오쿠스 진영 앞을 지나면서, 모두 포로가 되었다. 그러한 위기 속에서도 히르카누스는 수콧 축제(Sukkot: 7일간 계속되는 예루살렘 성전 순례 축제)가 다가오자, 떠나기를 원한 예루살렘 백성들을 또 떠나게 했다. 그 후 예루살렘이 식량 부족에 직면하자, 히르카누스는 안티오쿠스 VII세와 휴전 협상을 개시하였다. 휴전 조건은 안티오쿠스에 대한 배상금으로 은 3천 달란트, 예루살렘 성벽 제거, 셀류싯의 대 파르티아 전쟁 수행에 유대인의 참여, 셀류싯의 유대아에 대한 통치 재개 였다. 이러한 조건은 히르카누스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그는 3천 달란트를 마련하기 위해 다윗 왕의 무덤에서 보물을 훔쳐내야 했다.

    유대아는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맞았다. 이에 따라 히르카누스의 조세 부과는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도 히르카누스는 안티오쿠스와 함께 기원전 130년, 동방 원정에 참가해야 했다. 히르카누스는 어쩔 수 없이 유대군 사령관이 되어, 그 원정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안티오쿠스는 유대군의 종교를 배려함이 없이, 안식일과 주말에도 진군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강제는, 히르카누스가 유대 백성들의 지지를 잃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농촌의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 군대가 자신들의 땅을 약탈하자, 히르카누스를 원망했다. 더구나 히르카누스는 예루살렘이 포위 되었을 때, 백성들을 성 밖으로 추방한 이력으로 더욱 원한을 샀다. 다윗왕 무덤 보물을 훔친 일도, 종교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는 짓이었다. 따라서 겨우 1년간의 유대아 통치 후 히르카누스는 유대아 백성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히르카누스 치세 하 유대아의 장래에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기원전 128년, 셀류싯 안티오쿠스 VII세가 파르티아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는 히르카누스의에게 기회가 되었다. 히르카누스는 셀류싯 제국의 불안정을 이용하여 유대아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기원전 130년, 셀류싯 전임 왕 데메트리우스 II세(Demetrius II, c. 160~125 BCE)가 히르카니아(Hyrcania: 카스피해 남동 쪽 오늘날의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의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제국을 다시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유대아를 다시 통치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셀류싯 제국도 이투레아(Iturea: 갈릴리 북쪽 지역), 트랜스요르단의 암몬, 아라비아 반도의 나바테아(Nabatea) 등 여러 소규모 공국들로 분열되어, 각각 독립 국가를 이룬 상태였다. 히르카누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유대 국가의 세력을 떨치기로 했다. 그는 강력한 용병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유대 백성들은 역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으로, 히르카누스 군대를 도울 수가 없었다. 히르카누스는 다윗의 무덤으로부터 다시 한 번 빼낸 보물로 재정을 보충하였다.

    기원전 113년 초 히르카누스는 사마리아에 대해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개시, 두 아들 안티고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사마리아가 셀류싯의 안티오쿠스 IX세(Antiochus IX, ?~96 BCE)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안티오쿠스는 6천 명의 용병을 보내었다. 이로 인해 히르카누스는 오랜 동안 어려움을 당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사마리아는 히르카누스에게 점령을 당하여, 완전히 멸망하였다. 사마리아 백성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다. 안티오쿠스가 보낸 군대도 패전을 하였고,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이스라엘 북부 현재의 Beit She'an 시) 역시 히르카누스에 의해 함락되었다. 히르카누스는 과거 셀류싯 점령지의 이방인들에게, 유대 관습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하는 정책을 폈다.

    히르카누스 최초의 정복 대상은 트랜스요르단(Transjordan)이었다. 그의 부대는 메데바(Medeba: 현재의 요르단 Madaba 주 주도)를 포위, 6개월 후 이를 점령하였다. 이 승리 후 그는, 북쪽의 세겜(Shechem: 북이스라엘 왕국 수도였으나 왕국 멸망 후 기울었다가 후일 사마리아 중심지가 됨. 현재 웨스트 뱅크 Tell Balata 지역)과 게리짐 산(Mount Gerizim: 현재의 웨스트 뱅크 인근 산)으로 진격하여, 그곳 사마리아 신전을 파괴하였다. 그 결과 히르카누스의 위상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는 이두메아에 대한 작전도 개시하여 아도라(Adora: 에돔인 성읍), 마레샤(Maresha: 에돔인 성읍)를 비롯 에돔의 여러 성읍들을 정복하였다. 그곳 에돔인들을 유대교로 강제 개종시키기도 했다. 이는 유대아 통치자로서 전례 없는 일이었다.

-사마리아 신전 유적-

    히르카누스는 재건 사업에 착수, 안티오쿠스가 파괴한 성벽을 다시 세웠다. 성전 북쪽 바리스라 요새, 유대 사막에 히르카니아 요새도 새로 세웠다. 주변의 이교도 세력 특히 로마 공화정과도 친선 관계를 유지했다. 그 결과 로마 원로원은 히르카누스와 평화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로마는 히르카누스가 파견한 사절단을 영접하여, 하스모니아 왕조의 독립성을 인정하였다. 이처럼 히르카누스는 로마의 지원을 받은 탁월한 통치자였다. 로마 이외에도 프톨레미 이집트와도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마도, 이집트 거주 유대인들의 프톨레미 궁정과의 인간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테네와 페르가몬(Pergamon: 소아시아 북쪽 Mysia의 고대 그리스 도시)도, 로마와 평화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히르카누스에게 존경을 표했다.

-페르가몬 광장-


    그 밖에도 히르카누스의 동전 발행은, 권력을 위임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보여 준 것이었 다. 베들레헴 근처에서 발굴된 63개의 동전에는 “대 제사장 요한”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동전의 뒷면에는 “유대인 총회”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는 그의 통치 기간 중 그가 절대 군주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그 대신 그는 수시로, 소수 권력의 모임인 유대인 총회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동전에는 동물이나 인간을 묘사한 아무런 것이 없다. 이는 히르카누스가, 우상을 금지하는 유대교 율법을 엄격히 따랐음을 뜻한다.

    생애 마지막에 히르카누스는 대제사장과 세속 정치 지도자를 분리하도록 유언을 남겼다.그가 죽은 후 그 유언에 따라 그의 부인에게는 백성을 다스리는 (세속)권력이 주어졌고, 그의 장남 아리스토불루스(Judah Aristobulus I, 104~103 BCE 재임. 하스모니아 왕가의 초대 왕)는 대제사장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의 분리라는 히르카누스의 의지가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아리스토불루스는 어머니를 감옥에 가두어 굶겨 죽였다.

    히르카누스가 제정한 남다른 법령과 행동 준칙은 랍비 문헌에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3년마다 한 번 하느님께 아뢰는 일(신명기 26:12~15)을 폐지한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득에서 십일조를 떼어놓기를 이미 중단한 사실을 알았음으로, “주께서 분부하신 것을 잊지 않고 어김없이 다 행하였습니다”라고 아뢰는 것은, 창조주 앞에 거짓말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의 시대 십일조는 레위인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으나(신명기 26:12), 에스라(Ezra, 480~440 BCE. 율법학자)가 레위인들에게 벌금을 먹인 후, 십일조는 제사장들에게 바쳐지고 있었다. 따라서 하느님이 명하신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줄 수 없게 되자, 주님의 분부를 어김없이 다 행하였다는 말은 거짓말이 되었던 것이다.

    그밖에도 히르카누스는 레위인들이 성전에서 매일 부른 “오 나의 주여, 일어나소서. 어찌하여 잠들어 계십니까(시편 44:23)”라는 구절이, 마치 주님이 실제로 잠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더 이상 못 부르게 했다. 히르카누스는 또 희생제를 위한 송아지를 도살하기 전  머리를 때려 눈 가까이 피를 흘리게 하는 나쁜 도살 관행을 금지 시켰다. 히르카누스가 대제사장이 되기 전 유대인들은 축제 기간이라도 필요한 일은 하는 게 관행이었다. 히르카누스는 칙령을 발표하여 축제가 끝날 때까지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그리스를 물리친 후 하스모니아에서는 약속어음이나 판매 영수증 일상적인 계약서에 하느님을 명기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예를 들어 “요한 몇 년 몇 월, 지고지상의 하느님의 대제사장”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문서들이 역할을 다하면 쓰레기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문서에 하느님 운운 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따라서 그러한 관행은 폐지되었다. 그 폐지를 발표한 날짜 티슈리(Tishri: 그레고리력으로 1월) 3일은 기쁨의 날로 선언되어, 축제일 두루마리(Megillat Taanit: 축제일에 관한 고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또 다른 업적으로는, 농민을 비롯한 보통 사람들조차도 정직하게 십일조를 떼어 제사장들에게 바치게 하였음으로, 그 예물을 정직한 것으로 믿을 수 있게 한 일이었다. 영웅적인 모든 일을 이룬 후 히르키누스는 생애 말년에 이르러 바리새파를 떠나 사두개 편에 섰다. 이로 인해 랍비 금언 “네가 죽는 날까지 네 자신을 믿지 말라”라는 금언이 생겨났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무덤 앞에 그를 기리는 탑이 세워졌다. 

   바. 하스모니아 내전(67 BCE)

   하스모니아 내전은, 하스모니아 왕가의 왕위 계승 전쟁이다. 유대인 간의 분쟁이었던 이 전쟁에는 나바테아 왕국(Nabataean Kingdom: 아라비아 북 레반트 남쪽에 소재 했던 아랍 왕국)과 로마가 개입했다. 이 전쟁으로 유대인들은 독립을 잃게 되었다.

    마카비 반란이 끝난 후 들어선 하스모니아 왕조는 셀류싯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고, 그 후 레반트 지역의 강력한 왕국으로 등장하였다. 하스모니아 왕조(Hasmonean Dynasty: 140~37 BCE. 유대아 지역을 통치했던 왕조)는 야네우스 왕(Alexander Janneus, 치세기간 103~76 BCE. 요한 히르카누스의 아들)과 알레산드라(Salome Alexandra, 141~67 BCE) 여왕 때 최전성기를 맞았다. 여왕은 슬하에 두 아들 히르카누스(John Hyrcanus)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대제사장)를 두고 있었다. 장남 히르카누스는 백성들의 인기가 없었고 바리새 편에 섰던 반면, 야심만만했던 아리스토불르스는 인기도 있었고 사두개 편에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아리스토불루스는 어머니 치세 하에서도 군 장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알레산드라 여왕이 병석에 눕게 되자, 아리스토불루스는 그 동안 쌓아 온 인간관계를 이용하여 하스모니아 영토 내 요새들과 성읍들을 점령하려고 했다. 그는 돈으로 산 용병을 거느리고, 모친이 아직 살아있음에도 자신을 왕으로 선언하였다. 장남 히르카누스를 총애한 여왕은,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내와 아이들을 성전 북쪽, 안토니아 요새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여왕이 사망하자 장남 히르카누스는 유대아의 왕(John Hyrcanus II, 67~66 BCE 치세)이 되었다.

    두 형제의 군대는 예리고(Jericho: 요르단 분지 소재)에서 충돌했다. 히르카누스의 많은 병사들이 아리스토불루스 측에 항복하자, 히르카누스는 아리스토불루스의 가족이 잡혀 있는 안토니아 요새로 도주했다. 그러나 결국 두 형제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히르카누스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동생 아리스토불루스에게 왕위를 넘겼다. 그때 안티파테르(Antipater, 113~43 BCE. 헤롯 대왕의 아버지)라는 부유하고 세력이 있는 에돔인이 있었는데, 그는 아리스토불루스를 싫어하여 히르카누스가 왕이 되기를 바랐다. 그는 나바테아 왕국(Nabatean Kingdom: 현 사우디 아라비아 서쪽 홍해 연안, 북으로는 다마스커에 이르는 지역을 짧은 기간 지배했던 고대 왕국)왕 아레타스(Aretas III, ?~62 BCE)에게 히르카누스의 훌륭한 자질과 왕위 계승권을 강조하고, 그를 도우라고 했다. 어느 날 밤 히르카누스는 나바테아 왕국 수도 페트라(Petra: 요르단 남부 소재 고대 도시)로 가 아레타스에게 많은 선물을 바쳐 그를 기쁘게 했다. 그는 아레타스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부왕 야나에우스가 나바테아로부터 빼앗은 열두 성읍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아레타스는 히르카누스에게 총 5만 명에 달하는 기병과 보병을 지원하였다. 아레타스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하면서, 아리스토불루스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패배한 아리스토불루스 병사들 중에는 히르카누스 군에 가담한 자들도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후퇴한 아리스토불루스는, 그곳에서 그해 과월절을 보냈다.

-페트라 유적-

    아르메니아(Armenia: 현재의 터키 동부 일원에 있던 고대 국가)와 전투 중에 있었던 로마 폼페이우스 황제(Gnaeus Pompeius Magnus, 106~48 BCE)는, 스카우루스(Marcus A. Scaurus, c. 92~52 BCE. 로마 정치인)를 시리아에 파견하였다. 히르카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는 모두 그에게 사자를 보내어 동맹을 맺자고 하였다. 특히 아리스토불루스는 3백 달란트의 은을 뇌물로 보내면서, 히르카누스-아레타스 동맹군을 공격해달라고 했다. 그 결과 아레타스는 히르카누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를 떠나게 되었다. 아레타스가 떠나자 아리스토불루스는 군사를 몰아 히르카누스와 파피론(Papiron)에서 대결, 히르카누스 병사 6천 명을 죽였다. 이때 안티파테르의 형제 팔리온도 병사들과 함께 죽었다.

    아르메니아와의 전투를 끝낸 후 시리아에 도착한 폼페이우스는 아리스토불루스로부터 선물로 금 5백 달란트를 받았다. 히르카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는 모두 폼페이우스에게 또 사자를 보냈다. 이번에는 백성들도 폼페이우스에게 대표를 보내, 싸움질만하는 왕들이 더 이상 유대아를 통치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하였다.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누스 편을 드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 로마군에게 아리스토불루스를 공격하라고 했다. 그때 아리스토불루스는 어느 산꼭대기 요새에 있었는데, 폼페이우스는 아리스토불루스에게, 그 고지에서 병사들이 물러나도록 명령을 내리라고 하였다. 아리스토불루스는 그의 요구를 따랐다. 그러나 부하들이 철수하자 곧 후회를 한 아리스토불루스는 예루살렘으로 도주를 하였다. 그를 쫓아 예루살렘에 도착한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 성벽이 강고하여, 깨뜨리기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성벽 앞 계곡도 무시무시했다. 계곡으로 둘러싸인 성전은 또 다른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성벽을 깨뜨려도 그 안 성전은 적들의 또 다른 요새가 될 터였다.

    히르카누스 지지자들은 아직도 예루살렘 성내에 남아 있었다. 폼페이우스에게는 다행이었다. 성벽 북서쪽 히르카누스의 군사들이 성문을 열고 로마군을 영접했다. 이렇게 해서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취하였던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도주한 아리스토불루스는 예루살렘 동쪽 성전의 언덕과 다윗 시를 장악, 티로포이온(Tyropoeon) 계곡 위 다리(성전의 언덕과 예루살렘을 연결하는)를 끊어 방어를 튼튼히 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그에게 항복을 권했으나 거절을 당하자, 총 공격을 개시했다. 그는 아리스토불루스 군이 장악한 지역을 빙 둘러 벽을 쌓아 올린 후, 성전 북쪽 벽 안쪽에 진을 쳤다. 이곳에는 성전으로 접근이 가능한 좁은 길이 있었고, 아리스토불루스 군은 참호로 보강된 바리스(Baris: 성전의 북쪽 요새)보루에서 이 길을 수비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로마군은 성전 남동쪽에 또 다른 진을 친 후, 성전 북쪽 벽을 방어하는 참호를 메꾸기 시작했다. 바리스 보루 옆과 그 서쪽에 두 개의 누벽壘壁도 세웠다. 아리스토불루스 군은 높은 위치에서 로마 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공성을 위한 탑을 세운 후, 티레(Tyre: 레바논)에서 가져온 공성 망치로 성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성벽을 부수는 동안, 로마군 투석 병들이 적에게 돌을 퍼부었다. 3개월에 걸친 전투 후, 폼페이우스는 마침내 성전 안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선발대는 로마 독재자의 아들로 폼페이우스 군 장교인 술라(Faustus Cornelius Sulla, 86~46 BCE)였다. 그의 뒤를 센투리온(Centurion: 1개 부대 1백 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부대) 두 부대가 따랐다. 로마군은 곧 아리스토불루스의 유대 군을 제압했다. 이 전투에서 1만2천 명의 유대 군이 학살을 당하였다.

    폼페이우스는 대제사장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성전으로 들어갔다. 이는 신성모독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전으로부터 아무런 보물이나 돈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성전 청소를 명하고,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승전 기념 군사 분열식을 위해, 아리스토불루스를 포로로 잡아 함께 로마로 돌아갔다.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정복은 하스모니아 왕국에 하나의 재앙이었다.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누스를 대제사장에 재임명하였으나, 그의 왕족 지위는 박탈하였다. 유대아는 자치주가 되었으나, 로마에 공물을 바치고 시리아 로마 총독부 지배를 받게 되었다. 왕국은 해체되고, 지중해 해안가 평야도 포기해야 했음으로 유대인의 지중해, 에돔, 사마리아 접근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몇몇 성읍들이 자치권을 받아 데카폴리스(Decapolis: 레반트 남부 열 곳의 헬레니즘 도시)를 형성하였고, 왕국의 규모는 크게 축소되었다.

   사. 헤롯의 예루살렘 공격(37 BCE)

    기원전 63년 제3차 미드리다테 전쟁(Midridatic War: 아나톨리아 북부 폰투스 왕국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로마 황제 폼페이우스는 하스모니아 왕가 내전에 간섭, 왕의 자리를 아우에게 양보한 히르카누스 II세를 다시 유다의 왕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히르카누스 실제 권력은 그의 참모인 에돔인 안티파테르(Antipater: 헤롯 대왕의 부친)에게 있었다. 몇 년 후 안티파테르는 두 아들 파사엘과 헤롯을 각각 예루살렘과 갈릴리 군사 지도자로 임명하였다. 줄리어스 시저 암살로 발생한 로마 내전 후, 히르카누스 II세와 안티파테르는 로마 동쪽 지역을 다스리는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83~30 BCE. 로마 장군. 제2차 3두정치의 1인)의 가신이 되었다.

    기원전 40년 하스모니아 아리스토불루스 II세의 아들인 안티고누스 II세는 파르티아 제국(Parthian Empire: 기원전 247년부터 기원후 224년까지 고대 이란에 존재했던 제국)에 뇌물을 제공하고, 자신의 하스모니아 영토 재탈환을 도와 달라고 했다. 이에 따라 파르티아는 예루살렘을 공격, 히르카누스 II세와 파사엘을 포로로 잡고 안티고누스를 다시 유대아 왕(Antigonus II Mattathias, 40~37 BCE 재위. 하스모니아 왕조 마지막 왕)에 앉혔다. 체포된 히르카누스 II세는 사지를 절단 당하고 파사엘도 죽음을 당하였다. 가족과 함께 마사다(Masada: 이스라엘 남부 소재 고대 요새)에서 잡혀 있던 헤롯은 나바테아 왕국 수도 페트라로 도주를 하였다. 그는 나바테아의 도움을 얻지 못하자, 로마로 갔다. 로마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지지를 받은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선언하였다. 로마의 지지를 받은 그는, 왕위를 요구하기 위해 유대아로 돌아갔다.

    기원전 38년 무렵, 로마 장군 바수스(Publius V. Bassus, 89~38 BCE)는 파르티아를 무찌르고 난 후, 실로(Poppaedius Silo, ?~88 BCE. 고대 이태리 반도의 마르시족 지도자)에게 헤롯을 영접토록 하였다. 헤롯이 실로의 영접을 받으며 프톨레마이스(Ptolemais: 이스라엘 북부 해안 소재 Acre)에 도착하였다. 헤롯은 안티고누스와 전투를 벌여 갈릴리를 점령하고, 해안선을 따라 야파(Jaffa: 이스라엘 남부 고대 항구)로 진격한 후, 전쟁을 끝내겠다는 생각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로마군 장교들이 부패한데다 병사들이 반항적이어서, 안티고누스 게릴라들을 소탕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안 헤롯은, 예루살렘 공격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예루살렘이 아닌 유대아, 사마리아, 갈릴리에서 안티고누스 군과 싸웠다. 기원전 38년 말, 로마군의 지원을 받아 2년여에 걸친 전투 끝에 헤롯은 갈릴리를 평정한 후, 예루살렘을 향해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헤롯과 안티고누스는 예리고와 사마리아에서 일전을 벌렸고, 두 싸움에서 헤롯은 모두 승리하였다. 예루살렘으로 진격한 헤롯은, 26년 전 폼페이우스가 택했던 성전의 북쪽에 진을 쳤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은 3만 명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그 반 정도로 보고 있다.

    안토니우스가 보낸 로마군 보병 군단과 기병 6천, 소시우스(Gaius Sosius, 39 BCE~6 CE. 로마 장군)가 지휘 하는 시리아군 부대가 헤롯의 군대를 지원하였다. 헤롯의 공병부대는 로마군의 전술을 따라 예루살렘 성을 빙 둘러 성벽과 망루를 세우고, 성 주변의 나무를 자르고, 성벽을 부수는 망치를 사용하였다. 성 안에서는 물자부족으로 인한 고통과 휴경에 따른 식량부족으로 기근까지 겹쳤으나, 방어전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성문을 열고 돌격을 하거나, 매복으로 헤롯의 군대를 공격했다. 성루를 세우려는 헤롯 군을 괴롭히고, 성벽 밑으로 굴을 파려는 헤롯 군을, 똑같이 굴을 파 반격했다.

    40일간의 전투 끝에 헤롯 군은 “북쪽 벽” 즉, 예루살렘 제2성벽을 깨뜨렸다. 그 후 15일이 지나 제1성벽을 깨뜨리고, 성전 밖 광장도 점령하였다. 이때 성전의 주랑柱廊현관이 불에 타 무너져 내렸다. 안티고누스가 성전의 언덕 북쪽 바리스 요새에서 항전을 하고 있는 동안, 그의 군사 일부는 성전 경내와 예루살렘 남서쪽에서 싸우고 있었다. 이는 헤롯이 성전에 제물을 바칠 수(대제사장 즉, 왕이 될 수 있다는 뜻) 있는 길이 있다는 걸 뜻했다. 안티고누스는 헤롯이 “보통 에돔인”으로서, 왕이 될 만한 혈통의 가문이 아니라고 모략했다. 헤롯은 왕으로서의 합법성과 백성들의 믿음을 잃을까 우려한 나머지, 싸움이 아닌 협상에 나서기로 했다. 협상은 실패였고, 헤롯은 노도처럼 공격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그가 지휘한 로마 점령군은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을 서슴지 않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죽였다. 항복한 안티고누스 II세는, 안토니우스에게로 보내졌다. 로마 승전 분열식에서, 노예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예루살렘 성벽-

    헤롯은 안티고누스가 다시 돌아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를 죽이기 위해 안토니우스에게 뇌물을 바쳤다. 안티고누스가 헤롯에게 변함없는 위협적인 존재임을 알고 있던 안토니우스는, 하스모니아 사람들 시켜 그의 목을 자르도록 했다. 로마가 항복한 왕을 처형한 최초의 사례였다. 헤롯 역시 안티고누스 측 지도자 45명을 처형하였다.

    예루살렘 함락과 동시에 헤롯의 하스모니아 왕국 정복 전쟁도 끝이 났다. 그는 권력을 공고히 한 후, 자신의 통치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하스모니아 왕가를 조직적으로 살해하였다. 이에 따라 히르카누스 II세(John Hyrcanus II, c. 67~66 BCE 재위)는 기원전 30년 처형되었다. 헤롯(Herod the Great, 72~c.4 BCE)은 기원전 4년 그가 죽을 때까지, 헤롯왕국을 통치하였다. 그는 로마가 언제나 신뢰한 로마의 가신 왕이었다.

    헤롯의 예루살렘 점령은, 70인 역 성서(Septuagint) 솔로몬 시편(Psalm of Solomon: 18장으로 이루어진 외경) 제17장의 저자에게 영감을 준 듯하다. 이 장의 첫머리는, 다윗의 후손으로 왕을 삼겠다고 약속하신 하느님께 거역한 죄 많은 유대인들을 비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죄인들을 이방인들이 뒤엎어, 그 후손이 멸망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그 죄인을 하스모니아 왕가로, 이방인은 폼페이우스로 본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실제로 하스모니아 가문을 끝장내지 않았고, 오히려 그 통치가 다시 서도록 한 인물이었다. 이는 70인 역 성서가 하스모니아 왕가를 멸족 시킨 인물로, 폼페이우스가 아닌 헤롯을 지칭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 이야기는 요세푸스의 “유대인의 전쟁”과 카시우스(Dio Cassius, c. 155~235 CE. 로마 역사가)의 “고대 로마 사”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아. 사산조 페르시아의 예루살렘 공격(614 CE)

    서기 135년 바르 코크바 반란 이후,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I, 272~337 CE. 기독교 공인을 한 로마 황제)는 1년에 한번 티샤 바브(Tisha B'Av: 성전 파괴를 슬퍼하는 3주간 마지막 금식의 날)의 날에만, 유대인의 출입을 허락하였다. 그후 서기 438년 에우독시아(Licinia Eudoxia, 422~493 CE. 로마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딸)공주가 유대인의 예루살렘 출입 금지령을 폐지하였으나, 기독교도들의 격렬한 반대로 금지령은 다시 실시되었다. 율리아누스(Flavius C. Julianus, 331~363 CE. 로마 황제)와 페르시아 치세 때를 제외하고는 예루살렘으로부터의 유대인 추방은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614년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략이 있기 직전, 예루살렘의 유대인 인구는 소규모였다.

    비잔틴 제국이 수시로 자행한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처형은, 당연히 많은 저항을 불렀다. 비잔틴은 종교적으로도 반유대적이었다. 따라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공격을 도운 유대인들도 많았다. 서기 608년 안티오크에서 포그롬(Pogrom: 정부 선동에 의한 민간인들의 유대인 박해)이 발생하였고, 이에 따라 610년 티레(Tyre)와 아크레(Acre: 이스라엘 북부 해안 도시)에서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티레의 유대인들은 보복을 당해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다. 일찍이 페르시아 샤푸르 I세(Shapur I, 치세기간 240~270 CE. 사산조 페르시아 제2대 왕)와의 싸움에서 유대인들은 기독교도 편에서 싸웠으나, 이제 유대인들은 동방정교 비잔틴을 압제자로 보아 페르시아 편에 섰다.

    비잔틴 황제 헤라클리우스에 저항하는 유대인의 반란(614 CE)이 일어나자, 유대 지도자 느헤미야(Nehemiah ben Hushiel)와 벤야민(Benjamin of Tiberias)은 티베리아스, 나사렛, 갈릴리, 레반트 등지에서 군사를 일으켜 페르시아 군대와 함께 비잔틴 점령 하의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였다. 이때 유대 군 규모는 2만에서 2만6천 명 정도였다. 유대-페르시아 동맹군은 곧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아무런 저항 없이 항복한 예루살렘은, 느헤미야와 벤야민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페르시아는 느헤미야를 예루살렘 통치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제3성전 건설을 준비하고 새로운 대제사장 제도 확립을 위하여, 필요한 인물들의 혈통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곧 기독교도들의 반란이 일어나 느헤미야는 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반란군에게 참살을 당하였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케사리아 주둔 페르시아 공격군 사령관 샤르바라즈(Shahrbaraz)의 진영으로 도피를 하였다. 기독교 반란군은 잠시 예루살렘을 장악하였지만, 페르시아 군은 곧 반란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세베오스(Sebeos: 7세기 아르메니아 주교. 역사가)에 따르면 이때 예루살렘을 점령한 페르시아 군은 1만7천 명의 기독교도를 살해하였다. 마밀라(Mamilla: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했던 고대 저수지) 인근에서 살해당한 기독교도들 수도 4천5백18명에서 2만4천5백18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최근의 기독교 자료는 9만 명으로 보고 있다. 그밖에도 약 3만5천에서 3만7천에 이르는 기독교도들이 노예로 팔려갔다. 이때 기독교 측은 성 십자가(True Cross: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도 빼앗겼다. 코스로우 II세(Khosrow II, 590~628 CE. 사산조 페르시아 왕)5)는 이 성 십자가를 크테시폰(Ctesiphon: 페르시아 수도)으로 가져갔다.

    모데스투스(Modestus, ? ~630 CE. 동방 정교 성인)가 예루살렘 주교로 임명되었다. 많은 기독교 교회들과 건물들이 불에 타거나 손상을 입었다. 서기 616년 하반기 들어서야 예루살렘의 질서가 회복되고, 모데스투스는 성사바스(St. Sabas: 웨스트 뱅크에 위치한 동방 정교 수도원)를 다시 열도록 허락했다. 그밖에도 성묘 교회, 골고다, 세나클(Cenacle), 예수님 승천 교회(Chapel of the Ascension: 예루살렘 올리브 산 소재)등을 재정비, 복구했다. 모데스투스가 남긴 서신 내용을 보면 이들 건물의 재건축이 완성된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다.

    서기 617년, 사산조 페르시아는 정책을 바꿔 기독교 편을 들었다. 이는 아마도 메소포타미아 기독교도들의 압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유대인들은 세베오스의 말과는 달리, 예루살렘으로부터 강제추방을 당한 것 같지는 않다. 그 대신 예루살렘 주변에 유대인 정착을 금지했던 것 같다. 성전의 언덕 위 소규모 시나고그들도 폐지되었다. 반면 정책 변화에 따라 메소포타미아로 쫓겨 간 기독교도들의 상황이 개선되었다. 

    서기 628년 코스로우 II세가 폐위되자 그의 아들 카바드 2세(Kavadh II)는 헤라클리우스(Heraclius, 575~641 CE. 비잔틴 황제)와 평화협정을 체결, 팔레스티나 프리마와 함께 성 십자가를 돌려주기로 하고, 그후 샤르바라즈(Shahrbaraz ?~630 CE. 사산조 페르시아 왕) 때 돌려주었다. 그때 샤르바라즈와 그의 아들 니케타스(Niketas)는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있었다.  

    벤야민은 티베리아스(Tiberias)와 나사렛 유대인들을 이끌고 헤라클리우스에게 항복하였다. 벤야민은 기독교를 유대인의 적으로 보았지만, 헤라클리우스를 정중히 영접하여 사산조 페르시아 치하에서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던 자신과 유대인의 과오를 사면 받을 수가 있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서기 629년, 벤야민은 헤라클리우스 황제를 안내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황제는 벤야민을 설득하여 기독교로 개종 시켰다. 벤야민은 네아폴리스(Neapolis: 현 웨스트 뱅크의 Nablus 시)의 기독교도 유스타디오스(Eustathios)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서기 630년 3월 21일, 헤라클리우스는 성 십자가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그가 도착하자 기독교 성직자들은, 벤야민을 통해서 한 유대인들과의 약속을 깨라고 하였다. 그 말에 따라 헤라클리우스는 많은 유대인들을 죽이고, 예루살렘으로부터 5킬로 이내에 유대인이 살지 못하도록 하였다. 유대인에 대한 헤라클리우스의 이 같은 약속 위반에 대한 참회로, 기독교 목회자들은 금식일을 갖기로 서약하였다. 지금도 북아프리카 기독교도(Copts)들은 “헤라클리우스 금식”으로 불리는 그 서약을 지키고 있다.

   자. 왈리드의 예루살렘 정복(636~637 CE)

   서기 636년부터 1년 동안 있었던 예루살렘 공방전은, 레반트 점령을 둘러싼 비잔틴 제국과 라쉬둔 칼리프(Rashidun Caliphate, 632~661 CE. 최초의 칼리프 왕국)사이에 있었던 전투이다. 라쉬둔 칼리프 왕국은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네 명의 칼리프가 번갈아 통치한 토후국이었다. 

    서기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무슬림 주도권은 일련의 전쟁(Ridda Wars: 아랍 반란 족 진압 전쟁)을 거쳐 칼리프 바크르(Abu Bakr, 573~634 CE. 무함마드 제자)에게로 넘어갔다. 권력이 안정되자 바크르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속주인 이락을 침공하면서 동방 정복 전쟁을 개시하였다. 서쪽 비잔틴 제국도 침략하였다.

    서기 634년 바크르가 사망을 하자 오마르(Omar, c. 582~644 CE. 제2대 라쉬둔 칼리프)가 그의 뒤를 이어, 정복 전쟁을 계속해나갔다. 서기 635년 5월, 동로마제국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잃어버린 국토를 되찾기 위해 원정에 나섰은나, 636년 8월 야르무크(Yarmouk: 요르단 강 지류 야르무크 강 유역)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하였다. 같은 해 10월 초, 라시둔군 사령관 우바이다(Abu Uayda, 583~639 CE)는 예루살렘과 케사리아 처리 방안에 대해 지시를 내려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칼리프 오마르에게 보냈고, 이에 오마르는 당장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에 따라 우바이다는 왈리드(Khalid ibn al-Walid, ?~642 CE. 아랍군 지도자)와 함께 야비야(Jabiyah: 골란 고원과 Hauran 평야 사이)로부터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이때 예루살렘은 헤라클리우스가 페르시아로부터 재탈환 후, 요새화가 잘 되어 있었다. 야르무크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이 패한 후, 소프로니우스(Sophronius, c. 560~638 CE. 예루살렘 유대 지도자)는 예루살렘 진지를 수리하여 방어를 튼튼히 하였던 것이다. 야르무크 전투 후 무슬림에 대한 방비를 잘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 군대가 예리고에 이르자, 소프로니우스는 성 십자가를 비롯하여 성물들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기 위해, 바닷가 항구로 보냈다. 서기 636년 11월, 무슬림 군대는 예루살렘 공격을 미루고, 성내 식량부족으로 항복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 예루살렘 공방전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무혈의 싸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 비잔틴 수비대는, 헤라클리우스 황제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4개월 후 소프로니우스는, 만일 칼리프가 예루살렘으로 와 평화조약에 서명하고 항복을 받아들인다면, 공물을 바치고 항복을 하겠다고 했다. 이 항복 조건을 알게 된 무슬림 장수 하사나(Shurahbil ibn Hasana: 무함마드의 제자)는, 메디나(Medinah)로부터 먼 길을 와야 하는 칼리프 오마르 대신, 그를 닮은 왈리드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속임수는 통하지 않았다. 아마 시리아에서 왈리드는 너무 유명하여 잘 알려져 있었거나 또는 메디나에서 오마르와 왈리드를 모두 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협상을 거부하였다. 왈리드의 협상 실패를 보고 받은 사령관 우바이다는 오마르에게, 예루살렘으로 직접 와 항복을 받으라고 했다. 

    서기 637년 4월 오마르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였고, “오마르 계약”이라는 문서가 작성되었다. 예루살렘이 항복을 하고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기독교도들의 시민권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무슬림을 대표하여 오마르가 서명을 했고 왈리드, 사미(Amr al-Sahmi, c. 573~664. 이집트 원정군 사령관), 아우프(Abd ibn Awf, c. 581~654. 무함마드의 제자), 무아위야(Mu'awiya I, 597~680. 우마이야 왕조 초대 칼리프)가 증인을 섰다. 문헌에 따르면 서기 637년 또는 638년, 예루살렘은 오마르 칼리프에게 공식적으로 항복을 하였다. 이는 거의 500년에 걸친 로마의 압제를 받은 이후 유대인들이, 이슬람의 관용으로 다시 예루살렘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음을 뜻했다.

    무슬림 연대기에는 성묘 교회에서 쑤르 기도(Zuhr: 일출부터 일몰까지 하루 다섯 번 드리는 기도 가운데 네 번째 기도)를 드릴 때, 오마르를 초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오마르는 초대를 받아들일 경우, 그 교회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장소로서의 위치를 상실할 것이라는 생각에, 초대를 거절하였다. 오마르는 예루살렘에 열흘 동안 머문 후 메디나로 돌아갔다.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오마르는 소프로니우스의 안내를 받아 성전의 언덕을 포함하여, 여러 성지를 방문하였다. 초라한 성전 터를 본 그는, 그곳에 흩어져 있는 잔해를 치우고 깨끗이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 다음 그곳에 나무로 된 모스크를 세웠다. 서기 680년 무렵 예루살렘을 방문한 프랑크 대주교 아르퀼푸(Arculf)는, 폐허 위에 나무 기둥과 널판으로 세운 3천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매우 초라한 모스크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바로 오마르의 명령으로 세운 모스크였다.

    오마르의 명령에 따라 야지드는 케사리아를 포위, 공격하였다. 그즈음 하사나(Shurahbil ibn Hasana: 무함마드 제자)는 이미 팔레스타인 점령을 끝내고 있었다. 그러나 케사리아는 640년까지 버티다, 결국 무아위야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후 우바이다와 왈리드는 북쪽 시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1만7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떠나, 서기 637년 안티오크를 점령하였다. 이어 서기 639년 무슬림은 이집트를 침공, 점령하였다.

    무슬림 정복 후 약 50년이 지난 서기 691년, 우마이야 왕조(Uamayyad Caliphate, 661~750 CE. 무함마드 사후 수립된 네 칼리프 왕국 중 하나)의 말리크(Abd al-Malik, 647~705 CE. 제5대 칼리프)는, 성전의 언덕 위에 솟아 나온 거대한 바위 위에 건물을 세웠다. 바로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으로, 기독교 교회를 압도하고자 한 장려한 사원이었다. 그 의도야 어떻든 그가 세운 이 사원의 규모와 화려함은, 예루살렘이 초기 무슬림 신앙에 구속되었음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서기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점령할 때까지, 예루살렘은 무슬림 치세하에 있었다. 그때까지 약 4백년 이상 무슬림이 지배하는 동안, 예루살렘은 그 명성이 줄어들었다.

    수니파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하디스(Hadith: 무함마드의 언행 집)에 예루살렘 정복에 관한 예언을 남겼다고 믿고 있다. 말리(Auf bin Mali, ?~640 CE. 무함마드의 동료)는 “내가 타부크로 원정(서기 630년 10월 무함마드가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아카바 만 인근 타부크로 간 원정)할 때 예언자 무함마드를 찾아뵈니, 그가 가죽 텐트 안에 앉아 말씀하시기를 '여섯이라는 글자가 있으니, 이는 시간이 끝나 감을 가리키는 것으로 나의 죽음, 예루살렘 정복, 역병으로 인한 수많은 사람의 죽음과 양들의 죽음....'이라 하셨다" 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오마르가 점령하였을 때 예루살렘에는 엠마우스 역병(Emmaus Plague: 서기 638년부터 639년에 이르기까지 시리아를 휩쓴 흑사병)이 창궐하였다. 이 병으로 인해 무함마드의 뛰어난 제자들이 많이 죽었고, 이 질병은 무슬림 문헌에 큰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차. 아바크 침공(1073, 1077)

   아바크(Atsiz ibn Abaq, ?~1079)는, 1071년 이집트 파티마 칼리프 왕국(Fatimid Caliphate: 대서양으로부터 북아프리카를 거쳐 홍해에 이르렀던 거대 왕국. 서기 973년부터는 카이로를 수도로 하였음)으로부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남부를 빼앗아, 그곳에 공국公國을 세운 콰라즈미아(Khwarazmia: 서아시아 아무 다리야 강 델타 오아시스 지역) 출신의 투르크 용병 사령관이다.

    서기 1069년 무렵, 파티마의 시리아 총독 알 야말리(Badr al-Jamali, c. 1005~ ?)는 아나톨리아의 투르크인들에게 사자를 보내, 파티마에 쳐들어온 베두인(Bedouin: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 유랑 족) 침략자들과의 싸움에 나서달라고 하였다. 그 때 이집트에서는 수단 용병과 투르크 용병 간 내전이 발생하여, 파티마 왕국의 안정을 위협하고 있었다. 야우지(Ibn al-Jawzi, 1116~1201. 무슬림 법률가, 역사가)에 따르면, 야말리는 투르크 용병들을 누만(Maarat al-Numan: 현재의 시리아 북서부 알 마아라 시)에 정착 시킬 계획이었다.

    아바크는 투르크 나와키이야(Nawakiyya)족 용병 사령관으로, 시리아에 도착하여 파티마 군과 함께 베두인을 상대로 싸웠다. 서기 1070년 이집트 내전이 격화하면서,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한 투르크 용병들이 베두인에 가담,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미래가 불확실한 가운데 아바크는 예루살렘과 람라(Ramla: 현 이스라엘 중부 소재 도시)를 장악하였다. 이어 1076년 다마스커스를 점령한 후, 그곳 최초의 투르크 에미르(Emir: 토후土侯)가 되어, 다마스커스 요새 건설에 착수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입지를 다진 아바크는, 1076년 10월 이집트를 침공하였다. 카이로에 도착한 그는, 군대를 모으고 있던 알 야말리를 만나 협상을 하였다. 그러나 알 야말리는 아바크 군 장교들에게 뇌물을 주며, 이간 계를 썼다. 뇌물이 효과를 내어, 1077년 10월 아바크는 야말리와의 전투에서 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의 한 형제는 죽음을 당했고 또 다른 형제는 팔을 잃었다. 아바크가 패하자 예루살렘에서는 그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그는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서기 1077년 아바크는 반란군의 안전한 통과를 허락하겠다는 약속을 깨고, 예루살렘 성문을 열고 나오는 유대인들과 알 아크사 모스크에 피신하고 있던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약 3천 명을 학살하였다. 이 때 바위의 돔에 숨어있던 유대인들만 살아남았다.

    알 야말리는 휘하 장군인 아르메니아인 다울라(Nasr Al-Dawla, ?~969 CE)에게 아바크와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바크는 셀주크 터키 투투쉬 I세(Tutush I, ?~1095)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투투쉬 군대가 다마스커스를 향해 진군, 파티마 군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결국 투투쉬는 아바크의 영토를 접수하고, 그를 잡아 투옥시켰다. 서기 1079년 투투쉬는, 아바크를 활줄로 목을 졸라 죽였다. 

   카. 살라딘의 예루살렘 공격(1187)

    서기 1187년 7월 4일 하틴(Hattin: 현 이스라엘 티베리아스)전투에서 십자군이 살라딘(Saladin, 1137~1193. 중세 이집트 아이유브 칼리프 왕국 초대 술탄)에게 대패함으로써 루시냥(Guy de Lusignan, c. 1150~1194. 예루살렘 왕국 왕)을 비롯하여 예루살렘 대부분의 귀족들이 포로가 되었다. 9월 중순에 이르러 살라딘은 아크레, 나블루스(Nablus: 현 웨스트 뱅크 소재 팔레스타인 시), 야파(Jaffa), 토론(Toron: 레바논 남부 Tibnin에 소재했던 십자군 성채), 시돈(Sidon: 현 레바논의 제3도시), 베이루트(Beirut: 현 레바논 수도), 아스칼론(Ascalon)을 점령하였다. 살아남은 피난민들은 티레로 피신하였다. 당시 티레는 콘라드(Conrad of Montferrat, ?~1192. 예루살렘 왕국 이사벨라 I세 여왕의 남편)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살라딘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였다.

    티레에 머물고 있던 발리앙(Balian d'Ibelin, c. 1143~1193: 예루살렘 왕국 십자군 귀족)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아내 마리아(Maria Komnene, c. 1167~1174 CE 재위. 예루살렘 왕국 여왕)를 비롯하여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살라딘에게 요청하였다. 발리앙이 무기를 들어 대항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단 하루만 머문다는 조건으로 살라딘은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발리앙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예루살렘 주교 헤라클리우스(Heraclius), 시빌라 여왕(Queen Sibylla, 1186~1190 재위. 예루살렘 여왕), 그리고 기독교도들이 그에게 예루살렘을 지켜달라는 간청을 했다. 헤라클리우스는 기독교를 위해 발리앙이 예루살렘에 머물러야한다면서, 머물 경우 하느님이 그의 죄를 면해 주실 것이라고 했다. 이에 발리앙이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발리앙은 아스칼론에 머무르고 있던 살라딘에게 전령을 보내어, 항복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살라딘은 이미 마리아를 비롯하여 발리앙의 가솔들을 트리폴리(Tripoli: 현 레바논 제2도시)로 압송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방어군 지휘자가 된 발리앙은 예루살렘 상황이 긴박함을 알고 있었다. 살라딘의 점령지역으로부터 매일 더 많은 피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전투를 지휘할 수 있는 기사들도 몇 명 안 되었다. 더구나 시리아와 이집트 군대가 살라딘에 합류하였다. 아크레, 야파, 케사리아를 점령한 후 살라딘은, 1187년 9월 20일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예루살렘 정찰을 끝낸 후 살라딘은, 다윗의 탑과 다마스커스 문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공격을 개시했다. 살라딘 군의 궁수들이 성루를 향해 계속 화살을 쏘아댔다. 엿새 동안 산발적인 전투가 있었으나 결판이 나질 않았다. 공격 때마다 살라딘 군은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9월 26일 살라딘은 본진을 옮겨, 올리브 산(Mount of Olives, 예루살렘 구시가지 인근 구릉 지대) 위로 이동하였다. 살라딘 군은 공성 망치와 투석기, 그리스식 화염 무기(Greek Fire: 동로마제국군이 사용한 잘 꺼지지 않는 불), 석궁 등으로 성벽을 향해 끊임없는 공격을 가하였다. 9월 29일, 살라딘 군은 폭약으로 성벽을 무너뜨렸다. 십자군은 무너진 곳으로 노도같이 공격해오는 살라딘 군을 상대로 육박전이 벌였다. 곧 소수의 십자군 기사들과 병사들만 남게 되었다.

-다윗의 탑-

    성안 백성들은 절망에 빠졌다. 에르눌(Ernoul: 1187년 예루살렘 함락을 목격하고, 그 기록을 남긴 인물)에 따르면, 사제들은 맨발로 성벽 주위를 돌며 기도를 드렸고, 골고다에서는 여인들이 찬물을 담은 대야에 아이들 얼굴을 담근 후 머리털을 잘랐다고 한다. 이러한 참회는 예루살렘에 대한 하느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였다고 하나, “우리의 주님은 예루살렘의 기도소리나 소음을 듣지 아니 하셨다. 악취가 나는 간음과 방종, 죄악으로 인해 그들의 기도소리가 주님께 이르지 못하였다.”

    9월 그믐날 발리앙은 시종과 함께 말을 타고 살라딘에게로 가 항복 의사를 표했다. 살라딘은 그의 배신을 비난하고, 무력으로 예루살렘의 항복을 받아 내리라 맹세한 바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성벽 위에 이미 자신의 깃발이 올랐다고 했다. 이에 발리앙은 항복을 받아 주지 않으면 자신이 지휘하는 예루살렘 방어군이 무슬림 성소들을 파괴할 것이며, 5천 명의 무슬림 포로들을 살해할 것이고, 성전의 재물과 보물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살라딘은 무혈점령을 원했음으로, 무조건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다만 남자는 10디나르, 여자와 아이는 5디나르 몸값을 치르면, 안전하게 예루살렘을 떠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노예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발리앙은, 몸값을 지불할 수 없는 백성이 2만 명이나 된다고 했다. 살라딘은 10만 디나르를 내면, 2만 명 모두 석방할 수 있다고 했다. 발리앙은 그만한 돈을 마련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3만 디나르에 7천 명을 석방해달라는 제안을 했고, 살라딘은 이를 받아들였다.

    발리앙의 명령에 따라, 10월 2일 십자군은 살라딘에게 항복하였다. 살라딘의 예루살렘 접수는 비교적 평화 속에 진행되었다. 약속한대로 발리앙은 7천 명의 몸값으로 3만 디나르를 지불하였다. “바위의 돔” 위에 십자군이 세웠던 커다란 황금 십자가가 내려졌고, 십자군의 포로가 되었던 3천 명의 무슬림 포로들도 석방되었다. 살라딘은 예루살렘 귀족 여인들이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 떠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예를 들어 그의 허락으로 예루살렘 수녀원에 잡혀 있던 비잔틴 공주가, 시종들과 함께 떠날 수가 있었다. 포로가 된 예루살렘 왕국 왕 루시냥과 왕후 시빌라에게도 석방이 허락되었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기독교도들은 그대로 남도록 허락했으나, 십자군에 종군 중인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짐과 함께 10디나르 몸값을 치루고, 아크레를 거쳐 안전한 길을 통해 다른 곳으로 가도록했다. 이 사실을 안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Al-Adil, 1145~1218. 아이유브 칼리프 왕국 제4대 술탄)은 감동을 하여, 자신이 기울인 노력의 대가로 기독교도 1천 명을 달라고 했다. 살라딘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알 아딜은 그들을 받아 곧 석방하였다. 이를 본 헤라클리우스도 살라딘에게 포로의 해방을 요청하였다. 살라딘은 그에게 7백 명, 발리앙에게는 5백 명을 주었고, 그들 모두 해방이 되었다. 살라딘은 또 몸값을 지불할 수 없는 노인들은 모두들 자유롭게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어 쿠추크(Muzaffar Ibn Ali Kuchuk: 1154~1233. 살라딘 수하 장군)가 자신의 고향 에데사(Edessa: 현 투르키예 동남부 Urfa 시) 사람들이라며 석방을 건의한, 1천 명의 포로도 몸값 없이 석방하였다.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된 사람들은 살라딘 기병 50명과 함께 3개 대열을 이루어 행진하였다. 첫 두 대열은 성전 기사단과 예루살렘 순례자보호 기사단(Kinghts Hospitaller)이, 세 번째 대열은 발리앙과 예루살렘 사제단이 이끌었다. 그들의 첫 도착지는 티레였다. 티레 방어 책임자 콘라드는 전투 가능한 사람만 받아들였고, 그밖의 사람들은 십자군 통제 지역인 트리폴리(Tripoli)로 보냈다. 트리폴리에 도착한 그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지품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들 대부분은 아르메니아 또는 안티오키아로 갔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간 피난민들은 임시 수용소에 있다가, 그곳 관리들과 원로들의 따듯한 영접으로 정착할 수가 있었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살라딘은 3일 동안 “성묘 교회”의 문을 닫으라고 했다. 그 교회를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보기 위해서였다. 그의 막료들 가운데는, 기독교도들이 더 이상 예루살렘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완전히 파괴해버리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막료들은, 그 교회가 서 있는 장소의 신성 때문에 기독교도들의 순례가 계속될 것이니 보존을 하자고 했다. 또한 예루살렘 정복 후 그 교회를 파괴하지 않고, 기독교도들에게 그대로 맡겼던 오마르 칼리프의 예도 상기시켰다. 결국 살라딘은 기독교 순례자들을 실망시킬 의도가 없다며, 그 교회를 파괴하지 않기로 했다. 명령 기간이 지난 3일 후 성묘 교회는 다시 문을 열었다. 프랑크로부터 온 순례자는 입장료를 지불해야 성묘 교회에 들어설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 대한 무슬림들의 주장을 확실히 하기 위해, 알 아크사를 비롯한 많은 성소들을 장미수로 정화하는 의식을 치렀다. 알 아크사로부터 기독교 풍 가구들도 치웠고, 양탄자를 깔았다. 벽은 촛대로 불을 밝히고, 쿠란의 구절로 장식했다. 동방정교 교도나 시리아 정교(안티오크 교회로부터 분파된 동방정교) 신도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머물러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였다. 예루살렘 왕국이 이단과 무신론자들로 취급하여 출입을 금지했던 북아프리카 원주민 기독교도(Copts)들도, 돈을 내지 않고 예루살렘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살라딘은 그들도 자신의 백성으로 생각하여, 십자군이 빼앗았던 그들의 예배 장소도 되돌려주었고, 성묘 교회와 여러 기독교 성소 방문도 허락하였다. 이디오피아 기독교도(Abyssinian Christian)들도 요금을 내지 않고 예루살렘 성소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살라딘은 아직도 자신에게 저항하고 있는 벨봐르(Belvoir: 갈릴리 해 남쪽 십자군 성채), 케락(Kerak: 현 요르단 알 카라크 시 소재 고대 성채), 몬트리얼(Montreal: 사해 남쪽 아라바 계곡의 십자군 성채)등 많은 성읍들을 정벌한 후 다시 한 번 티레로 가 포위, 공격하였다.

    한편 티레 대주교 요시아스(Josias, ?~1202)는 하틴 전투에서의 십자군 패전 소식을 유럽에 전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황 그레고리 VIII세(Gregory VIII, c. 1100~1187)는,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위한 칙령(Bull Audita Tremendi)을 발표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비 조달을 위해 “살라딘 십일조”를 세금으로 징수했다. 서기 1189년 영국의 리챠드 I세, 프랑스 필립 II세, 신성로마제국 프레데릭 I세의 군대로 구성된 제3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영화 “천국의 왕국(Kingdom of Heaven)"은 많은 부분 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타. 콰라즈미야의 예루살렘 침공(1244)

   제6차 십자군이 끝난 후인 1244년 7월 15일, 콰라즈미야 제국(Khwarazmian Empire: 1077~1231년 사이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이란 지역을 지배했던 수니파 무슬림 제국. 셀주크 투르크 가신 국가)의 예루살렘 침공이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레데릭 II세(Frederick II, 1194~1250)는, 1228년부터 1229년까지 제6차 십자군을 이끌었다. 서기 1212년부터 그는 예루살렘 왕국 여왕이었던 이사벨라 II세(Isabella II, 1212~1228)의 남편으로서, 프레데릭은 자신이 예루살렘 왕국의 왕임을 주장하였다. 그의 군사력과 이슬람 세계에 알려진 명성 덕택으로, 아이유브 왕국 술탄 카밀(al-Kamil, c. 1177~1238)과 평화 조약을 통해 전투 없이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자렛을 비롯하여 여러 요새들을 탈환할 수 있었다. 

    서기 1244년 아이유브 왕국은, 콰라즈미야에게 예루살렘 공격 명령을 내렸다. 콰라즈미야 군대는, 그 마지막 왕 멩구베르디(Mengu-Berdi, c.1199~1231)가 지휘한 킵챠크(Kipchak: 투르크 유랑족)군과 쿠르드족 1만 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7월 15일 공격이 시작되었고, 예루살렘은 곧 무너져 내려 항복을 하였다. 콰라즈미야는 예루살렘 성내 아르메니아 주거지역의 기독교도들에 대한 약탈과 학살을 자행하고, 유대인들을 쫓아냈다. 이어 “성묘 교회”내 볼드윈 1세, 고드프리 등 예루살렘 왕국 왕들의 무덤을 약탈하고, 그 유골을 파내었다. 8월 23일 “다윗의 탑” 수비대는 콰라즈미야 군에 항복하였다. 그 결과 6천 명에 달하는 기독교 남, 여, 아이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쫓겨났다. 콰라즈미야의 예루살렘 약탈과 기독교도 대학살은 곧 라 포르비(La Forbie: Gaza 인근)전투를 불렀고, 이 전투에서 십자군은 이집트, 콰라즈미야 동맹군과 싸웠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십자군이 패배함으로써, 프랑스 왕 루이 IX세(Louis IX, 1214~1270)가 제7차 십자군을 일으키게 되었다.

   파. 아랍인들의 공격(1834)

   서기 1834년 봄, 파샤(Ibrahim Pasha, 1789~1848. 오토만 투르크 제국의 알바니아계 이집트 장군)가 농민을 징병하려고 하자 헤브론과 나블루스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5월 18일, 헤브론에서 충돌이 있었고 21일에는 약 6~7천 명에 달하는 아랍 농민 반란군이 헤브론을 출발,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였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2천 명 정도의 오토만 이집트군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파샤는 야파(Jaffa)의 사령부에 머물고 있었다. 수비대는 모든 성문을 닫고 있었고, 반군의 공격이 예상되는 야파 문(Jaffa Gate: 구예루살렘 7개 성문 중 하나)은, 5~6백 명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야파 문-

    5월 22일 1천 명의 오토만 병사들이 반군과의 전투를 위해 성문을 나왔으나, 예상과는 달리 반군을 만날 수가 없었다. 오토만 군은 리프타(Lifta: 예루살렘 외곽 팔레스타인 마을)를 노략질한 후 돌아갔다. 그날 밤 성 밖으로부터 많은 포성이 들렸다. 수비대에겐 두 문의 대포가 있었는데, 반란군을 퇴치하기 위해 성벽 가까이 옮겼다. 수비대는 예루살렘 무슬림들의 충성심에만 의존할 수 없어, 밤낮으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5월 26일 초저녁 두 번의 지진이 있었고, 자정까지 여러 차례의 강한 여진이 발생했다. 지진으로 인해 알 아크사 모스크 외벽 일부와 여러 채의 가옥들, 그리고 첨탑들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반군은 계속 포를 쏘아댔다. 그 다음 날에도 여러 차례의 지진이 있었다. 5월 28일, 반군은 강력한 공격을 가하였지만, 격퇴 당하였다. 반군의 포위로 인해 예루살렘은 식량과 땔감이 부족했다. 6월 1일 자정이 지난 무렵, 수비대는 성 안쪽으로 후퇴하였다. 그 다음날 반란군이 성 안으로 들어가 상점들을 약탈하자, 퇴각했던 수비대가 다시 반격해왔다. 6월 4일, 성벽을 제외한 전 예루살렘은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나 이틀 후 수비대의 반격으로 반군이 후퇴하였다. 6월 7일 파샤 장군이 1개 연대 병력과 여섯 문의 대포와 함께 도착하였다. 야파로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3일 동안의 행군 끝에 도착한 것이다.

    6월 9일, 2천 명의 기병과 4천 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이집트 증원군이 도착하여 반란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1천5백 명의 반란군이 죽고, 11명이 포로가 되었다. 6월 16일 솔로몬 저수지(Solomon's Pool: 베들레헴 남서쪽 인근 소재) 전투에서 패한 이집트군은 예루살렘으로 철수하였다. 6월 18일 예루살렘에서 전염병이 발생하였다. 그 다음 달 이집트 군은 나블루스를 점령, 그곳 반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1천5백 정의 소총을 압수하였다. 8월 1일 이집트 군은 헤브론을 공격, 마지만 남은 반군을 소탕하였다. 그곳을 점령한 이집트 군은, 반란군에게 살해된 무슬림 주민들의 주검을 보았다.


2. 십자군

    십자군은 중세 라틴 교회(Latin Church: 현 바티칸 교황청)가 중심 역할을 했던 일련의 종교 전쟁이다. 서기 1095년부터 1291년까지 계속된 십자군은, 무슬림 지배하의 예루살렘을 탈환하려는 원정 전쟁이었다.

   가. 제1차 십자군(1096~1099)

   셀주크 투르크의 예루살렘 정복 3년 후인 1074년, 교황 그레고리 VII세는 성지 해방을 위한 군사 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로부터 21년 후인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반 II세(Urban II, c. 1035~1099)는 클레르몽(Clermont-Ferrand: 현 프랑스 클레르몽-페랑 시) 종교회의에서 십자군의 필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레고리 VII세의 꿈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이 때 셀주크로부터 계속 공격을 받고 있었던 비잔틴(동로마제국) 황제 알렉시우스(Alexius I Comnenus, 1057~1118)는 우르반 II세에게 사자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우르반 II세는 유럽이 직면한 폭력, 하느님의 평화를 지켜야할 필요성, 비잔틴 제국 지원,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 새로운 형태의 전쟁, 무장한 순례자들에 대해 역설한 후 전쟁에 참가하여 목숨을 잃을 사람들에게 속죄의 은사와 천국에서의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연설에 열광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Deus lo volt)”임을 외쳐 응답했다. 그들이 찬성의 표시로 가슴에 십자가를 붙여 표시를 하니, 바로 십자군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이다. 회의가 끝난 뒤 교황은, 프랑스를 순회하면서 십자군 참가를 설득하였다. 열정적인 교황 지지자들도 여러 나라를 돌며, 신성한 사업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클레르몽 종교회의-

    곧이어 은자 피터(Peter the Hermit, c. 1050~1115. 프랑스 아미앙 로만 가톨릭 승려)가, 대부분이 가난한 수천 명의 그리스도교도들로 구성된 소위 “백성들의 십자군(People's Crusade: 농민 십자군 또는 걸인 십자군)”을 일으켰다. 이 군대는 독일을 지나면서 많은 현지 십자군을 일으키게 한 불씨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일어난 독일 십자군은 수많은 유대인 공동체를 공격, 학살함으로써 소위 “라인란트 대학살”을 일으켰다. "백성들의 십자군“은, 1096년 아나톨리아(지금의 튀르키예)의 시베토트(Civetot: 흑해 연안) 전투에서 그 주력부대가 전멸 당함으로써 붕괴되었다.

-백성들의 십자군-

    교황의 부름에 따라 유럽의 많은 귀족들이 십자군에 참여했다. 그들 가운데 레이몽 백작(Raymond IV of Toulouse, c.1041~1105. 프랑크 원로 정치인)은 프랑크(프랑스) 르퓌의 아드헤마르 주교(Adhemar of Le Puy, ?~1098)와 함께 프랑크 남부 십자군을 지휘하였다. 그밖에도 프랑크 귀족 고드프리(Godfrey of Bouillon, 1060~1100)와 그의 형제 볼드윈(Baldwin of Boulogne, 1060~1111. 후일 예루살렘 볼드윈 I세), 보헤몽(Bohemond, c. 1054~1111. 이태리반도 남부 Taranto 영주)과 그의 조카 땅끄레(Tancred, c. 1075~1112. 후일 안티오크 총독), 로버트 커토스(Robert Curthose, c. 1051~1134. 정복 왕 윌리엄의 장남)가 지휘하는 스테판(Stephen of Blois, c. 1045~1102. 블로아 백작), 위그(Hugh of Vermandois, 1057~1101. 카페 왕조 베르망드와 백작), 로베르(Robert II of Flanders, 1065~1111.플랑드르 백작) 부대가 십자군에 참여했다. 비잔틴제국에 도착한 그들은,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의 환영을 받았다. 의심이 많았던 황제는 그들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여 달라고 했다. 그는 또 제1차 공격 목표는 니케아(Nicaea: 325년 종교회의가 개최되었던 현 터키 Bursa 주 Iznik 마을)임을 주지시켰다. 무슬림 셀주크는 시베토트 승리에 도취되어 아무런 방비를 해놓지 않고 그곳을 떠났음으로, 1097년 5월 십자군은 그곳을 쉽게 점령할 수가 있었다. 그해 7월 셀주크군은 매복전으로 보헤몽의 십자군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블로뉴의 볼드윈-

    십자군은 과거 비잔틴 도시였으나, 1084년 이후 무슬림 지배하에 있던 안티오크(Antioch: 현재의 터키 Hatay 주 Antakya 시. 기원전 300년 마케도니아 장군 Seleucus I Nicator가 세운 그리스 도시)로 향하였다. 서기 1097년 10월에 시작한 안티오크 공방전은 8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성안으로 진입한 십자군은, 무슬림은 물론 기독교도들도 무차별 학살하였다.

    안티오크 재탈환을 위해 모술(Mosul: 현 바그다드 북쪽 400킬로 지점의 도시)의 셀주크 성주 케르부가(Kerbougha)가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바돌로뮤(Peter Bartholomew, ?~1099. 프랑크 십자군 병사)가 성창聖槍(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을 발견하면서, 십자군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그러나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는 십자군을 돕기는 커녕, 오히려 필로멜리움(Philomelium: 현 터키 중부 Konya 주 아크세히르 마을)으로부터 후퇴를 하였다. 십자군으로서는 이 배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보헤몽은 전투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알고는 케르부가 군대를 향해 반격, 격퇴하였다.

-현재의 안티오크-


    서기 1099년 2월 중순 레이몽 백작은 아르카(Arqa: 현 레바논 Akkar 자치주 미니아라 인근 마을)를 포위한 다음, 평화 조약을 맺기 위해 이집트군 사령관에게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안티오크 전투에서 프랑크 십자군 지휘자 아드헤마르 주교가 사망하자 십자군은 정신적 지도자를 잃게 되었고, 성창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서기 1099년 4월 8일, 로버트 커토스의 종군 사제인 아르눌푸(Arnulf of Chocques, ?~1118)는 바돌로뮤를 불로 지지는 고문을 하였다. 며칠 후 바돌로뮤는 고문으로 인한 부상으로 사망하였다. 아울러 성창은 가짜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해 5월, 레이몽은 아르카 점령에 실패하여 포위를 푼 후,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안티오크를 향해 행군하였다. 그곳에 도착한 그는, 비잔틴 제국에 그곳을 반환하겠다고 한 자신의 약속을 어긴 채 계속 군대를 지휘했다. 

    그때 레이몽은 파티마 칼리프(Fatimid Caliphate)가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예루살렘을 재탈환하였음을 알았다. 레이몽은 예루살렘을 돌려주면, 그 동안 자신들이 점령한 땅을 그들과 나누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파티마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따라 레이몽은 파티마군이 방어선을 치기 전에 서둘러 예루살렘을 공격해야 했다.

    서기 1099년 7월 7일 레이몽의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먼 길을 와 성지를 보게 된 병사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최초의 공격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7월 15일 마침내 성벽을 깨뜨릴 수 있었다. 파티마 예루살렘 총독 다울라(al-Dawla)는 레이몽에게, 아스칼론(Ascalon: 현 이스라엘 Ashkelon)까지 퇴로를 열어달라는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십자군은 유대인과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약탈을 하였다. 예루살렘이 다시 가톨릭 수중으로 떨어진 것이다. 우르반 II세는 승전 소식을 듣지도 못한 채,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 14일 후인 1099년 7월 29일 사망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파스칼 II세(Paschal II, 1050~1118)가 교황이 되었다.

-제1차 십자군 예루살렘 점령-

    서기 1099년 7월 22일, 예루살렘 성묘 교회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를 주재한 고드프리는 왕이 아닌, 성묘의 수호자로 불리었다. 전쟁이 끝나 대부분의 병사들은 유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드프리는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 3백 명의 기사, 2천 명의 보병과 함께 남았다. 이처럼 제1차 십자군은 성공리에 끝이 났고, 그 결과 “예루살렘 왕국(라틴 왕국)”이 수립되었다.

    서기 1100년 7월 18일, 고드프리가 사망하였다. 사인은 장티푸스인 듯했다. 전 예루살렘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5일 간의 장례 기간 후 그는 성묘 교회에 묻혔다. 예루살렘 기사들은 에데사(Edessa: 메소포타미아 상류 고대 도시) 백작인 그의 동생 볼드윈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고드프리가 미결로 남긴 아르수프(Arsuf: 이스라엘 지중해 연안의 고대 도시) 공격전은, 1101년 4월 볼드윈이 이어받아 끝을 내었다. 한편 예루살렘 주교였던 다고베르트(Dagobert, ?~1105)는 보헤몽에게 서한을 보내, 볼드윈이 대관식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을 막아달라고 했다. 이 편지는 전달 도중 볼드윈 측에 발각되어, 보헤몽은 에데싸 총독 리챠드(Richard of Salerno, c. 1060~1114)와 함께 체포되었다. 서기 1100년 8월의 일이었다. 같은 해 성탄절 예루살렘 예수탄생 기념 성당에서 볼드윈은, 예루살렘 왕국 초대왕 볼드윈 I세(Baldwin I, 1060~1118)로 등극하였다. 후일 볼드윈의 뒤를 이어 볼드윈 II세가 될, 볼드윈의 사촌 부르 볼드윈(Baldwin Le Bourg, 1075~1131)은 에데사 백伯이되었고, 보헤몽이 구금되어 있는 동안 그의 조카 땅끄레(Tancred, c. 1075~1112)가 안티오크 총독이 되었다.

1101년 십자군

    서기 1101년,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십자군이 위험에 처한 사실을 알게 된 파스칼 II세는 십자군을 일으켰다(1101년 십자군). 4개부대로 구성된 이 군대를, 제1차 십자군의 연장으로 보기도 한다. 제1군 롬바르디아(Lombardia: 이태리 반도와 스위스 접경 지역) 부대는 밀라노 대주교 안셀름(Anselm, ?~1101)이 지휘하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헨리 IV세의 신하인 잘츠부르크 대주교 콘라드(Konrad von Abenberg, c. 1075~1147) 부대가 롬바르디아 부대에 합류하였다. 제2군 니베르느와(Nivernois) 부대는 네베르(Nevers: 현 프랑스 브르고뉴의 Nièvre 시)백伯 윌리엄 II세(William II, ?~1148)가 지휘하였다. 블르와(Blois: 파리 남쪽 봉건 영지)백伯 앙리(Etienne Henri, c. 1045~1102)와 부르군디(Brugundy: 오늘날의 프랑크 동부 Doubs, Jura, Haute-Saône, Belfort 지역)백伯 스티븐(Stephen I, 1065~1102)이 이끈 제3군은 프랑스 북부로부터 온 부대로, 당시 황제를 모시고 있던 뚤르즈 백伯 레이몽(Raymond IV, c. 1041~1105)의 부대와 합류하였다. 제4군은 아퀴텐느(Aquitaine: 프로방스어를 사용하는 프랑스 서남부 지역) 공작 윌리엄 IX세(William IX, 1071~1127)와 바바리아(Bavaria: 신성로마제국의 남동부 지역)공작 벨프 IV세(Welf IV, 1072~1120)가 공동으로 지휘하였다. 

-롬바르디아-

    롬바르디아 부대와 프랑크 군은 숙적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아르스란(Kilij Arslan I, ‎1079~1107)과 1101년 8월, 메르시반(Mersivan: 현 튀르키에 흑해 연변의 마을)에서 대결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같은 달 헤라클레아(Heraclea: 아나톨리아 소재 고대 카파도키아 마을)전투에서 제2군 니베르느와 부대도, 대장 윌리엄과 그의 부하 수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멸하였다. 9월 아퀴테느 부대와 바바리아 부대가 헤라클레아에 도착, 전투를 벌였으나 역시 모두 전멸을 당하였다. 서기 1101년 이 같은 십자군의 군사적, 정치적 대실패를 본 무슬림은, 십자군이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예루살렘 왕국

    제1차 십자군 결과, 서기 1100년 볼드윈 I세가 예루살렘 왕국(라틴 왕국)을 수립하면서 북으로는 셀주크, 남으로는 파티마 칼리프 왕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파티마 왕국의 칼리프 샤한샤(Al-Afdal Shahanshah, 1066~1121)는 프랑크(프랑스) 십자군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고자 1101년 9월 7일, 제1차 람라(Ramla: 이스라엘 중부 소재 도시)에서 십자군과 전투를 벌였다. 제1차 람라 전투였다. 서기 1102년 5월 17일 벌어진 제2차 람라 전투에서 십자군은, 샤한샤의 아들 마알리(Sharaf al-Ma'ali)가 지휘한 파티마 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이 전투에서 제1차 십자군 지휘자였던 블르와의 앙리와 부르군디 스티븐이 모두 전사하였다. 예루살렘 왕국은 패배로 인하여 붕괴 직전에 있었지만, 5월 27일 야파(Jaffa: 텔아비브의 모체였던 고대 항구 도시)전투의 승리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북쪽의 트리폴리 왕국은 파티마에게 포위가 된 채 7년을 보내고 있었다. 서기 1105년 샤한샤는 람라에 대한 세 번째 공격을 가했으나, 결과는 패배였다. 5년 후인 1110년, 베이루트 전투에서 십자군이 승리하였고, 그 후 20년 동안 더 이상 파티마의 위협은 없었다.

    서기 1104년 안티오크 왕국과 에데사 왕국 십자군은, 모술(Mosul: 티그리스 강 상류 고대 성읍. 현 이락의 모술 시) 군사 지도자 지키르미슈(Jikirmish, ?~1106)와 연합한 셀주크 군사령관 쇠크멘(Sökmen, ?~1104)과 하란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셀주크는 에데사 백伯 볼드윈(후일 볼드윈 II세)과 그의 사촌 요슬린(Joscelin, ?~1131. 갈릴리 영주)을 포로로 하였다. 그후 1106년 투르크 모험가 사카와(Jawali Saqawa, ?~1109)가 지키르미슈를 죽이고, 모술과 인질이 되었던 볼드윈을 손에 넣었다. 사카와로부터 먼저 석방된 요슬린은 볼드윈의 석방을 위해 사카와와 협상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마우두드(Mawdud, ?~1113. 투르크 군사 지도자)에 의해 모술로부터 쫓겨난 사카와는, 인질 볼드윈과 함께 자바르(Jabar: 시리아 아싸드 호수 좌안의 성채) 요새로 도주하였다. 사카와는 마우두드와 싸울 동맹군이 필요했고, 따라서 요슬린의 요청에 따라 1108년 여름, 볼드윈을 석방하였다.

    서기 1103년에 몸값을 치루고 석방된 보헤몽은 안티오크를 다시 장악, 비잔틴 제국과 투쟁을 계속하였다. 서기 1104년 말 보헤몽은 이태리로 가 동맹군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확보하였다. 한편 그의 조카 땅끄레는 다시 안티오크를 장악하고, 1105년 아르타(Artah: 안티오크 인근의 고대 마을)전투에서 셀주크를 격파함으로써 알레포(Aleppo: 현 시리아 북부 소재 알레포 시)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보헤몽은 십자군(소위 보헤몽 십자군)을 일으켜 발칸 반도를 지나 디라키움(Dyrrahchium: 현재의 알바니아 제2도시 Durrës)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서기 1108년 보헤몽은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I세와 조약(Treaty of Devon)을 체결, 황제의 가신이 되면서 잡다한 의무를 지게 되었다. 보헤몽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111년 사망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보헤몽 II세(Bohemond II, c. 1107~1130)가 타란토 영주가 되었고, 땅끄레는 보헤몽 II세의 후견인이 되었다. 보헤몽II세는 비잔틴 황제와의 조약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서기 1107년부터 1110년까지 노르웨이 왕 조살파르(Sigurd Jorsalfar, 1089~1130)가 십자군을 일으켰다(노르웨이 십자군). 군대라기보다는 순례자 성격이 강했던 이 군대는, 1110년 시돈(Sidon: 현 레바논의 제3도시) 전투에 참가했다. 볼드윈의 군대는 육상으로, 노르웨이 십자군은 해상으로부터 공격했다. 아르수프 전투와 아크레 전투(1100~1104)에서 승리한 십자군은 무슬림 측에 모든 항구의 개방을 요구했다. 조살파르는 성지를 방문한 최초의 유럽 왕이었다.

    서기 1110년 초, 셀주크 투르크는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어 1111년에는 샤이자르(Shaizar: 시리아 북부 소재 마을)전투, 1113년에는 볼드윈 I세가 지휘한 알 사나브라(Al-Sannabra: 갈릴리 바다 남부 해안 소재)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에서 볼드윈 I세는, 마우두드와 다마스커스 군사 지도자 토그테킨(Toghtekin, ?~1128)이 지휘하는 무슬림 군대에 대패하였다. 마우두드의 궁극적인 목표는 에데사 왕국 정복이었으나, 십자군을 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우두드는 암살로 인해 곧 죽음을 당하였다. 그를 대신한 하마단(Hamadan: 현재의 이란 하마단 주 주도) 왕 부르스크(Ibn Bursqu, ?~1117)가 무슬림 군대를 지휘, 서기 1114년 에데사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서기 1115년 9월 14일 텔 다니스(Tell Danith)전투에서, 안티오크 왕 살레르노(Roger of Salerno, ?~1119)는 마지막으로 공격해온 셀주크 투르크 군을 전멸시켰다.

    서기 1118년 4월 2일, "예루살렘 왕국" 초대왕 볼드윈 I세는 나일 강변의 도시 펠루시움(Pelusium)전투 후 사망하여, 예루살렘에 묻혔다. 4월 14일, 그의 뒤를 이어 볼드윈 II세가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내 모르피아(Morphia of Melitene, ?~1127) 문제로 인해, 대관식은 1119년 성탄절에서야 성사되었다. 부유한 아르메니아 귀족의 딸로 동방정교 신도였던 그녀는, 아마 종교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 볼드윈 II세의 치세 초기인 1119년 6월 28일, 유혈의 사르마다(Sarmada: 시리아 북서부 아나톨리아 접경지역 마을) 전투에서 일가지(Ilghazi, ?~1122)의 셀주크 군은 살레르노 왕이 지휘한 안티오크 군을 전멸 시켰고, 살레르노 역시 전사하였다. 그러나 무슬림의 승리는 오래 가지 않아, 1119년 8월 14일 제2차 텔 다니스 전투에서 볼드윈 II세는, 트리폴리 백伯 폰스(Pons, c. 1098~1137)와 힘을 합쳐 일가지 군대를 격파하였다.

    서기 1120년 1월 16일, 볼드윈 II세는 예루살렘 신임 교구장 와르문드(Warmund, 1069~1128)와 함께 나불루스(Nabulus: 현 웨스트 뱅크 나불루스 시)종교 회의를 개최, 예루살렘 왕국 통치에 필요한 일련의 법률(예루살렘 법)을 제정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신전 기사단(Knights Templar)" 결성도 허락되어, 성지 순례자 보호를 임무로 하는 "순례자 보호 기사단"의 군사적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 두 기사단은 십자군 왕국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순례자 보호 기사단은 “기사들의 성(Krak des Chevaliers: 시리아 소재 중세 성채)”을 손에 넣어 군사적, 행정적 중심지로 삼았다.

-기사들의 성-

    칼릭스투스 II세(Calixtus II, c.1065~1124. 이태리 반도 교황 직할지 교회 지도자) 십자군으로 알려진 베니스 십자군(Venetian Crusades)은, 서기 1122년부터 1124년 사이에 원정길에 올랐다. 베니스 십자군이나 트리폴리 십자군 역시 서유럽 십자군으로, 이들은 티레(Tyre)를 공격하여, 그 지도자 토그테킨으로부터 이 도시를 빼앗았다.

    서기 1123년 볼드윈 II세는, 벨레크 가지(Belek Ghazi: 셀주크 왕족)의 포로가 된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수루취(Suruc: 현 튀르키예-시리아 국경 마을)를 공격하였으나 실패, 그도 역시 포로가 되었다. 서기 1124년 벨레크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티무르타쉬(Timurtash, c. 1105~1154)가 볼드윈 II세의 석방에 관한 협상을 제안하였다. 볼드윈과 그의 딸 요베타(Jovetta, 1120~?)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인질 석방 대가로 상당한 몸값을 지불한 후, 1124년 8월 29일 볼드윈은 알레포 요새로부터 석방되었다. 요베타는 부르수키(il-Bursuqi: 모술의 셀주크 군사 지도자)에게 계속 잡혀 있다가, 1125년 아자즈(Azaz: 시리아 북서쪽, 알레포 인근 성읍) 전투에서 승리한 볼드윈이, 그곳에서 약탈한 물자로 그녀의 몸값을 치 후 석방되었다.

    서기 1128년 2월 토그테킨이 사망하였고, 그 이듬해 볼드윈 II세는 십자군을 또다시 일으켰다. 다마스커스 십자군이었다. 그 목적은 토그테킨의 아들 부리(al-Muluk Buri, ?~1132)가 이끄는 다마스커스 공략이었다. 십자군은 바니아스(Banias: 골란 고원에 소재한 마을)를 장악하였으나, 눈앞의 다마스커스를 정복할 수는 없었다. 서기 1129년 볼드윈 II세는, 예루살렘 왕국 왕가 계승을 위해 장녀 멜리상드(Melisende, 1105~1161)를 앙주백伯 풀크(Fulk V of Anjou, c. 1089~1143)와 결혼을 시켰다. 그후 볼드윈은 안티오크에서 병이 들어, 1131년 8월 21일 사망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1131년 9월 14일, 풀크와 멜리상드가 공동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들의 대관식은 볼드윈 II세가 묻힌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볼드윈 II세의 뜻과는 달리, 권력은 멜리상드가 제외된 채 풀크가 전권을 행사하였다.

젱기의 등장

    젱기(Imad ad-Din Zengi, c. 1085~1146. 레반트와 메소포타미아 상류 지역을 지배했던 수니파 무슬림 젱기 왕조 시조)의 등장은, 십자군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젱기는 1127년 9월 모술의 지도자가 되었고, 1128년 6월 알레포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서기 1135년, 젱기가 안티오크를 공격하자 십자군은 대항군을 투입하였으나 패전하였고 아울러 여러 곳의 중요한 성읍들도 빼앗겼다. 서기 1137년 젱기는 바아린(Baarin: 시리아 북부 소재 성읍)전투에서 예루살렘 왕 풀크를 격파하였다.

    서기 1137년 젱기는, 트리폴리 왕국을 공격하여 트리폴리 폰스 백伯(Pons, c. 1098~1137)을 살해하였다. 풀크가 참전하였으나, 젱기의 부대는 폰스의 후임자인 레이몽 II세(Raymond II, c. 1116~1152)를 포로로 잡고, 바아린 전투에서 풀크를 포위하였다. 항복한 풀크는 바아린 성을 넘겨주고, 자신과 레이몽의 석방을 위한 몸값을 지불하였다. 비잔틴 황제 요한 II세(John II Komnenos, 1087~1143)는 실리시아(Cilicia: 아나톨리아 반도 남부 지역)와 안티오크에 대한 영토권을 재차 주장하였다. 서기 1138년 4월, 비잔틴과 프랑크 동맹군은 알레포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어 샤이자르(Shaizar: 시리아 북부 마을)를 포위, 공격하였으나 한 달에 걸친 전투 끝에 포기하였다.

-실리시아-

    서기 1143년 11월 13일, 풀크 부부가 아크레를 방문하던 중 사고로 풀크가 사망하였다. 서기 1143년 성탄절에 풀크의 아들 볼드윈 III세(Baldwin III, 1129~1163)가 예루살렘 왕국 왕위에 올라 모친과 함께 통치하였다. 그해 안티오크 공격을 위해 군사를 준비하던 요한 II세도 곰 사냥에 나섰다가 독화살에 베어 4월 8일 사망하여, 그의 아들 마누엘 I세(Manuel I Komnenos, 1118~1180)가 왕위를 이었다.

    요한 II세 사망 후 비잔틴 군대가 철수하자, 젱기는 적대자가 없게 되었다. 풀크의 죽음으로, 에데사 공국公國(County of Edessa: 12세기 상메소포타미아에 있었던 십자군 국가)의 요슬린 II세(Joscelin II, ?~1159)는 강력한 동맹군이 사라지게 되었다. 서기 1144년 11월 28일 에데사에 도착한 젱기는, 곧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의 공격을 예상했던 에데사는 전투를 해야 했으나,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방어 병력이 없음을 알아차린 젱기는 포위망을 좁혔다. 서기 1144년 12월 24일, 에데사는 결국 함락되었다. 성안으로 진입한 젱기 군은 도망가지 못하고 남아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프랑크 십자군 포로들도 모조리 학살하였으나, 토박이 기독교도들만은 살려주었다. 십자군 최초의 대패였다.

    서기 1146년 9월 14일, 젱기가 암살을 당하자 그의 아들 딘(Nūr-ad-Din, 1118~1174)이 젱기 왕조를 계승하였다. 서기 1146년 제2차 에데사 전투에서 프랑크족은 에데사를 재탈환하였으나, 점령하지는 못하였다. 전투는 결국 딘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 결과 성안의 모든 남자들은 딘에게 학살을 당하였고, 여인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나. 제2차 십자군(1145~1149)

   서기 1144년 젱기에 의해 에데사가 멸망하면서, 제2차 십자군이 시작되었다. 에데사 공국은 제1차 십자군 기간 중이었던 1098년 예루살렘 왕국 볼드윈 I세가 건국한 나라로 십자군이 제일 먼저 세워, 제일 먼저 망한 나라였다.

-에데사-

    에데사 함락으로 예루살렘과 서유럽은 크게 놀라, 제1차 십자군 때와 같은 열정이 다시 끓어올랐다. 유진 III세(Eugene III, c. 1080~1153)는 교황에 오른 직후인 1145년 12월 칙령을 반포,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선언하였다. 제1차 십자군보다 조직과 지휘를 정밀하게 계획했다. 유럽의 강력한 군주들 지휘 하에, 바른 길을 따라 갈 예정이었다. 교황은 베르나르드(St. Bernard of Clairvaux, 1090~1153. 신전 기사단의 공동 창립자. 성인으로 추앙 받는 베네딕트 수도회 승려)에게 십자군 필요성에 관한 강론을 널리 펼 것을 지시하며, 제1차 십자군 때와 마찬가지로 원정에 참가하는 자에겐 면죄부가 주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신성로마제국의 콘라드 III세(Conrad III, 1093~1152)와 프랑크 루이 VII세(Louise VII, 1120~1180)가 십자군에 나서기로 했다. 루이VII세와 그의 아내 엘레노어, 왕자들, 귀족들이 십자군의 상징인 십자가를 받기 위해 베르나르드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콘라드와 그의 조카이며 후일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프레데릭(Frederick Barbarossa, 1122~1190 CE)역시 베르나르드로부터 십자가를 받고 원정에 나섰다.

    콘라드 III세 십자군은 1147년 5월 출발, 유럽을 횡단하여 비잔틴 제국 영토인 아나톨리아에 도착하였다. 콘라드 부대가 아나톨리아에 도착하자, 이때 비잔틴 황제 마누엘 I세는 십자군 진군을 막았다고 한다. 특히 셀주크 터키군에게 십자군 공격을 부추겼다는 말도 있었다. 그리스 동방정교인 비잔틴은 가톨릭 십자군의 아나톨리아 진출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해 9월 콘스탄티노플에서 두 군대는 전투를 벌였고,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에게 패한 콘라드 십자군은 소아시아(아나톨리아)로 퇴각하였다. 이곳에서 콘라드는 프랑크(프랑스)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제1차 십자군의 강적이었던 아르슬란(Kilij Arslan, 1079~1107)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메수드 I세(Mesud I, ?~1156)의 셀주크 군과 전투를 벌였다. 서기 1147년 10월 25일, 제2차 도릴래움(Dorylaeum: 아나톨리아의 고대 도시)전투에서 메수드 I세는 콘라드 십자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서기 1148년 3월 19일, 십자군은 에데사를 탈환코자 안티오크에 도착하였다. 같은 해 6월 24일 개최된 아크레 종교회의에서는 공격 목표를, 과거 동맹국이었으나 이제는 젱기 왕조에 충성하는 다마스커스로 바꾸었다. 

-도릴래움 전투-

    한편 루이 VII세의 프랑크 십자군은 1147년 6월에 출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아나톨리아에 도착, 콘라드의 패잔병들을 만났다. 콘라드는 곧 프랑크 군에 합류하였다. 이 십자군 부대는 1147년 12월 24일, 에베소(Ephesus: 현 튀르키예 Izmir 주 Selcuk 시)전투에서 셀주크 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고, 그로부터 며칠 후 메안데르(Meander: 아나톨리아 남서부를 흐르는 강)강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루이 VII세는 운이 따르지 않았던지, 1148년 카드무스 산(Mt. Cadmus: 현 튀르키예 Aydin 주 소재)전투에서 메수드 I세에게 심각한 패배를 당하였다. 전투와 질병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루이 VII세 패잔병들은, 배를 타고 안티오크로 후퇴하였다.

   서기 1147년 여름, 십자군은 보스라(Bosra: 현 요르단 Tafilah 자치주 소재 마을) 전투에서 다마스커스 무슬림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승패를 가릴 수 없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24일부터 28일 까지 5일간에 걸친 전투에서, 전략 부재와 불운으로 십자군은 파멸적인 패배를 하였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십자군은 비잔틴에 대한 적대감이 끓어올랐다. 이 같은 패배는 교황의 위신에 손상을 입혔고, 오랜 세월에 걸쳐 비잔틴과 서유럽 가톨릭 간 관계를 어렵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반면 무슬림들은 한껏 사기가 올라, 십자군을 멸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서기 1147년 봄, 교황 유진 III세는 이베리아 반도의 무어족 정벌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승인하였다. 서기 1147년 7월 1일부터 10월 25일까지 십자군은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성공리에 공략하였고, 이어 또르또사(Tortosa: 현 스페인 까딸로니아 소재 도시)를 6개월 동안 공격, 1148년 12월 30일 마침내 무어 족을 토벌하였다. 한편 신성로마제국은 성지에서의 싸움에 소극적이었고, 이교도 웬드족(Wends: 신성로마제국 동부 국경 지역의 슬라브 족)이 보다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서기 1147년, 웬드족 토벌을 위한 십자군이 일어나, 부분적으로는 성공을 하였으나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킬 수는 없었다.

    제2차 십자군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은, 1149년 6월 29일 딘의 군대가 이나브(Inab: 현 시리아 북부 이나브 마을)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한 일이었다. 레이몽(Raymond of Poitiers, c. 1105~1149. 안티오크 왕국 왕자)이 지원군으로 왔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그의 머리는 딘을 거쳐 바그다드의 칼리프 무크타피(al-Muqtafi, 1096 ~1160 CE)에게로 보내졌다. 서기 1150년 딘은 에데사의 요슬린 II세(Joscelin II of Edessa, ?~1159. 에데사 공국 마지막 왕)를 격파한 후, 그의 눈을 떼어내 장님으로 만들었다. 눈을 잃은 요슬린은 1159년 알레포의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이나브 전투-

그해 말 아인타브(Aintab: 현 튀르키예 남부 주요 도시)전투에서 딘은 투르베셀(Turbessel: 현 튀르키예 Gaziantep주 Gundogan 마을)로부터 볼드윈 III세의 탈출을 막는데 실패하였다. 딘이 정복하지 못한 에데사 지역은, 수년이 지나 젱기 왕조가 점령하였다. 제2차 십자군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승리는 무슬림 차지였다. 이는 예루살렘 왕국 멸망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고, 12세기 말 제3차 십자군을 부르는 원인이 되었다.

   다. 제3차 십자군(1189~1192)

   “예루살렘 왕국”은 건국 후 재난이 끊일 날이 없었다. 제2차 십자군은 목적 달성에 실패했고, 오히려 살라딘의 강력한 무슬림 제국의 등장을 가져왔다. 이집트-시리아 동맹으로 예루살렘이 함락을 당하기도 했다. 이제 서유럽은 또 다른 십자군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틴(Hattin: 현 이스라엘 티베리아스 Hittin 마을 인근) 전투에서의 십자군의 파멸적인 패배에 이어, 예루살렘 함락 소식이 유럽에 알려졌다. 이 소식을 들은 후 우르반 III세가 죽어, 그의 뒤를 이은 그레고리 VIII세(c.1100~1187)가 1187년 10월 29일, 새로운 십자군을 일으키기 위한 칙령(Audita tremendi)을 반포하였다. 그는 동방의 상황을 설명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무기를 들고, 예루살렘 구원을 위해 그곳으로 갈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따라 결성된 제3차 십자군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레데릭 I세(Frederick I, 1122~1190)와 영국의 사자왕 리챠드(Richard I, 1157~1199)가 지휘하였다.

    서기 1188년 3월, 프레데릭은 교황으로부터 십자가를 받았다. 프레데릭은 1189년 5월 성지를 향해 출발, 1190년 3월 아나톨리아에 도착하였다. 아나톨리아를 지나면서 그의 군대는 투르크 족을 격파하고, 멀리 아르메니아(Cilician Armenia: 셀주크의 아르메니아 침략으로, 그 피난민들이 세운 국가)까지 진출하였다. 서기 1190년 6월 10일, 프레데릭은 실리프케(Silifke: 현 튀르키예 Mersin 주 소재)성 인근 강에서 휴식 중 익사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신성로마제국군의 많은 병사들이 부대를 이탈하여 고향으로 돌아갔고, 남아 있던 병사들은 곧 도착한 영국과 프랑크군의 지휘를 받았다.

-실리프케-

    리챠드 I세는, 1187년 퐈티예(Poitiers: 프랑스 중서부 끌렝 강변의 도시) 백伯일 당시 이미 교황으로부터 십자가를 받고 있었다. 프랑크 필립 II세와 리챠드의 부친인 영국 왕 헨리 II세는, 예루살렘이 살라딘의 수중에 떨어진 소식을 접한 후인 1188년 1월 21일 교황으로부터 십자가를 받았다. 리챠드 I세와 필립 II세는 함께 1188년 1월 십자군에 나섰다. 리챠드는 성지에 도착하자 곧 교착 상태에 있던 아크레 전투에 참가하여 함락시켰다. 아크레 함락 후 리챠드 I세는 그곳에서 잡은 무슬림 포로들과 아이유브 칼리프 살라딘 수중의 그리스도인 1천6백 명, 성 십자가(True Cross), 10만 개의 금화와 교환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협상은 깨어지고, 양측은 상대방이 먼저 인질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성 십자가를 넘겨받기로 한 시한이 경과하자, 리챠드는 무슬림 포로들을 처형키로 했다. 8월 16일 그는 모든 포로들을 아크레 인근 야산 아이야디에(Ayyadieh)로 이동 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8월 20일 그의 명령에 따라 2천7백 명의 무슬림 포로들 목을 베었다. 대학살이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살라딘은 다마스커스에서 1천6백 명의 십자군 포로들을 살해하였다.

- 아이야디에 대학살-

리챠드 I세는 남으로 진격하여 1191년 9월 7일, 아르수프(Arsuf: 이스라엘 지중해 해안가 고대 도시)전투에서 살라딘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3일 후 리챠드는 1187년 이래 살라딘의 수중에 있던 야파(Jaffa: 텔아비브 남부 고 시가지)를 탈환한 후,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예루살렘 20킬로 지점까지 접근했던 리챠드는 살라딘 군대의 재집결을 목격한 후, 해안가로 후퇴하였다. 다른 길을 통해 접근하던 십자군들도 예루살렘 목전에서 역시 후퇴를 하였다. 그러나 프랑크 십자군 지휘자 부르군디 공公 위그 III세(Hugh III, 1142~1192)는,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을 고집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전략에서 십자군은 분열 상태에 있었는데, 어느 쪽도 목적 달성에 필요한 힘이 없었다. 십자군을 지휘할 통합된 지휘부가 결여되어 있었음으로, 해안가로 후퇴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서기 1192년 7월 27일 살라딘의 군대는 전투를 개시, 야파(Jaffa)를 점령하였다. 사자왕 리챠드 I세의 십자군은 바다로부터 야파를 공격, 그곳의 무슬림들을 격퇴하였다. 살라딘은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서기 1192년 9월 2일 리챠드와 살라딘은 “야파 조약”을 체결, 예루살렘을 무슬림 통제 하에 두되, 비무장 그리스도 순례자들이나 상인들이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조약으로 제3차 십자군은 끝이 났다.

   라. 제4차 십자군(1202~1204)

   서기 1198년, 교황 인노센트 III세(Innocent III, 1161~1216)의 선언에 따라 샹파뉴 백伯 테오발드(Theobald, 1179~1201), 블로아 백伯루이(Louis of Blois, 1172~1205), 플랑드르 백伯 볼드윈(Baldwin, 1172~1205. 후일 예루살렘 왕국 볼드윈 I세)등 3인이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 테오발드가 너무 일찍 죽자, 그를 대신하여 이태리인 보니파체(Boniface, 150~1207. 후일의 데살로니카 왕)가 십자군 지휘를 맡았다. 십자군의 당초 목적지는 이집트로, 당시 이집트에는 무슬림과 기독교도들이 휴전협정을 맺고 공존하고 있었다. 십자군 수송을 위해 베니스 공화국(697부터 1797까지 이태리 반도 북부에 있던 독립 주권 해양국가)과 운송협정을 체결하였다. 3만 명의 운송비로 8만5천 마르크를 지불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교황은 이 계약을 승인했으나 다만 두 가지 조건을 달았다. 십자군에 교황의 대리인이 반드시 동행할 것과, 기독교도에 대한 공격은 어느 경우에도 금지한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프랑크 십자군은 베니스 공화국에 지불할 채무가 있었다. 따라서 십자군은 그 돈을 갚기 위해 베니스의 요구에 따라, 기독교 도시인 자다르(Zadar: 크로아티아 아드리아 해 연안 도시)를 공격하였다. 이는 교황의 뜻에 어긋난 행동으로, 교황은 그 공격에 참가한 자들을 모두 파문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은 원정을 계속해야 했음으로, 곧 모두 용서하였다.

-자다르 전투-

    두 번째 분란은, 십자군이 비잔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였다. 그때 비잔틴 왕자 알렉시우스 IV세(Alexius IV Angelus, c. 1182~1204)는, 부왕 이삭 II세(Isaac II, 1156~1204)에 대한 삼촌 알렉시우스 III세( Alexius III Angelus, c. 1153~1211)의 반란으로 인해 망명 중에 있었다. 알렉시우스 IV세는 십자군의 공격을 막으려고 노력한 끝에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였으나 곧 “예루살렘 왕국”에 반대하는 폭동이 발생하여, 그 와중에서 살해되었다. 따라서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십자군은 식량이나 보급품을 운송할만한 해상 능력이 없었다. 유일한 운송로란 도시를 연결하는 육로로, 이는 그 도시들을 점령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이야말로 바로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도시였다. 콘스탄티노플 점령 후, 십자군은 3일간에 걸쳐 약탈과 그리스 동방정교 신도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마. 제5차 십자군(1217~1221)

   제5차 십자군의 목적은,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al-Adil, 1145~1218)이 지배하고 있던 성지 회복이었다. 서기 1213년 인노센트 III세는 제4차 라테란(Lateran: 로마 소재 라테란 궁) 종교회의에서 십자군 원정 칙령(Quia Maior)을 반포하였다. 서기 1216년 인노센트 III세가 죽자, 그의 뒤를 이은 교황 오노리우스 III세(Honorius III, c. 1150~1227)는 헝가리의 앤드류 II세(Andrew II, c. 1177~1235)와 신성로마제국의 프레데릭 II세(Frederick II, 1194~1250)에게 십자군 참가를 요구하였다. 서기 1215년 프레데릭 II세는 교황으로부터 십자가를 받았으나, 아직 왕위가 불안정했음으로 원정에 나서지 않고 주춤거렸다. 따라서 원정은 지체되었다.

    서기 1217년 8월 앤드류 II세는 아크레에 도착하여 예루살렘 왕 요한 (John of Brienne, c. 1170~1237)과 합류하였다. 그들은 당초의 목적인 이집트와 시리아 공격을 취소하고, 제한된 작전만을 수행했다. 성과가 별로 없자 앤드류는, 1218년 초 헝가리로 돌아갔다. 프레데릭 II세가 오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자, 남아 있던 십자군은 이집트 다미에타(Damietta: 현 이집트 다미에타 자치주 주도) 항구를 공격했다. 다미에타 성은 높이가 다른 세 겹의 성벽으로 둘러싸이고, 나일강 실실라 탑(Burj al-Silsilah)에는 쇠줄을 걸어 강을 가로지르게 매어 놓아, 적선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탑에는 수백 명의 병사가 매복을 하며 지키고 있었다.

-실실라 탑-

    서기 1218년 6월,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공격, 실실라 탑을 점령하였다. 이 탑을 빼앗긴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술탄 알 아딜은 곧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알 카밀(al-Kamil, c. 1177~1238)이 뒤를 이어 술탄에 올랐다. 추가 공격을 하려면 십자군은 증원군을 기다려야했다. 곧 영국과 교황이 보낸, 펠라기우스(Pelagius, c. 1165~1230. 이베리아 레온 교구 사제)가 지휘하는 십자군이 도착하였다.

    서기 1219년 2월, 십자군이 다미에타를 포위하자 카밀은 협상을 제안하였다. 그는 이집트 탈출을 허락해준다면, 알 카락크(al-Karak: 요르단 소재 중세의 성채)와 크라크(Krak de Montreal: 예루살렘 왕국 볼드윈 1세가 건설한 요르단 내 성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예루살렘 왕국에 넘겨주겠다고 했다.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당초의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생각에 예루살렘 왕 요한은 이 제안에 만족했으나, 펠라기우스와 신전 기사단은 협상을 거절했다. 이어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 1181~1226. 프란시스코 교단 창시자)가 도착하여 협상에 나섰으나 반대 세력으로 인해, 결과는 실패였다.

    서기 1219년 11월, 십자군은 다미에타에 입성하였다. 성은 텅 빈 채였고, 카밀은 이미 군대를 남쪽으로 철수 시킨 후였다. 많은 병사들이 목적을 달성했다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카밀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만수라(Mansurah: 현 이집트 다칼리아 주 주도)에서 진용을 재정비한 후, 십자군에게 다시 한 번 평화안을 제시하였으나 또 거절을 당하였다. 프레데릭 2세는 카밀을 공격하기 위해 부대를 먼저 보내며, 곧 뒤따라 갈 터이니 자기가 도착하기 전에는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서기 1221년 7월, 펠라기우스는 카밀이 주둔하고 있는 남쪽으로 진격하였다. 요한은 그 작전을 반대하였지만, 저지할 힘이 없었다. 그 작전에 반대하면 반역자가 되어 교황으로부터 파면을 당할 위험이 있었음으로, 요한은 어쩔 수 없이 펠라기우스와 합류하였다. 8월 말 벌어진 만수라 전투에서 카밀은 나일 강의 수문을 열었다. 그 결과 홍수가 일었고 또 다미에타 수비가 완벽하였음으로, 펠라기우스는 항복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펠라기우스는 카밀에게, 다미에타로부터 철수를 하겠으니 이를 허락한다면, 8년간의 휴전협정과 모든 포로의 석방, 그리고 성 십자가를 되돌려 받지 않고 포기하겠다고 했다. 공식적인 항복이 있기 전, 양측은 포로들을 확인해야 했다. 십자군 포로는 예루살렘 왕 요한과 프랑크 십자군 지휘자 헤르만(Hermann of Salza, c. 1165~1239. 튜톤 기사단장)이, 무슬림 측은 카밀의 아들이 각각 포로가 된 상태였다. 서기 1221년 9월 8일 항복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제5차 십자군은 아무런 성과 없이 참담한 실패로 끝이 났다.

   바. 제6차 십자군(1228~1229)

   제6차 십자군 역시 예루살렘 탈환을 목적으로한 원정이었다. 제5차 십자군이 실패로 끝난 후 7년이 지나 시작한 이 십자군은, 거의 전투가 없었다. 제6차 십자군은 프레데릭 II세 십자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프레데릭 II세는, 예루살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프레데릭은 13세기 대부분의 통치자들처럼 “성호가 그어진 인물(Crucesignatus: 예수님의 제자라는 뜻으로 입은 의상에 나타낸 십자가 표시)”로, 1215년 이래 수차례에 걸쳐 십자가를 받은(즉, 십자군 참전 승인을 받은) 인물이었다. 서기 1225년 7월 25일, 교황 오노리우스 III세(Honorius III, c. 1150~1227)와 체결한 산 제르마노(San Germano) 협정을 통해 프레데릭은 십자군 원정에 나설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2년간을 지체했다. 이 기간 중 원정 약속 보증금으로 교황에게 금을 맡겼다. 그가 아크레에 도착하게 되면, 이 금은 그가 되찾게 될 터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압류되어 성지에서 필요한 용도에 사용될 예정이었다.

    프레데릭 II세의 십자군 참가는, 예루살렘 왕이 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는 1225년 8월 예루살렘 왕 요한의 딸 이사벨라와 결혼하였다. 신부가 불참한, 그녀 대리인의 의사표시로 이루어진 결혼식으로, 정식 결혼식은 1227년 11월 9일에 있었다. 왕위에 계속 있겠다는 요한의 뜻에도 불구하고, 프레데릭 II세는 그에게 왕위를 양보할 것을 요구, 서기 1225년 12월 마침내 예루살렘 왕위에 올랐다. 그는 먼저 튜턴 기사단(Teutonic Knights: 신성로마제국 기사단)의 특권을 인정, 신전 기사단을 대체토록 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튜턴 기사단의 Grunwald 전투-

    제5차 십자군 이후 아이유브의 술탄 카밀은, 시리아 내전에 휩싸여 있었다. 서기 1219년 그는 십자군과의 협상에 나서, 시리아와 싸우는 자신에게 군사적 지원을 해준다면 예루살렘을 반환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협상은 실패였다. 서기 1227년 교황에 오른 그레고리 IX세(Gregory IX, c.1170~1241)는 십자군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8월, 제6차 십자군 선발대가 함선으로 출발, 해안 마을 아크레에 도착하여 진을 쳤다. 프레데릭 II세는 선박 수리 문제로 출발이 늦어 1227년 9월8일 배에 올랐으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유행병에 걸려, 치료를 위해 하선을 해야 했다. 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크레로 선단을 보냈다. 또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상황을 설명케 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그의 질병에는 관심이 없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만했다. 서기 1227년 9월 29일 교황은 성스러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혐의로, 프레데릭 II세를 파문했다.

    프레데릭 II세는 교황과의 화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는 1228년 6월, 교황을 만나기 위해 머물던 브린디시(Brindisi, 이태리 반도 남쪽 아드리아 해변 마을)에서 배를 탔다. 서기 1228년 9월 7일 키프러스에 도착한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했음에도 그곳 백성들로부터 따듯한 환영을 받았다. 대부분 영국인, 시실리안, 신성로마제국 병사들로 이루어진 그의 군대는 규모가 크지 않았고, 적대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교황이 전쟁의 열쇠를 쥐고 있는 한, 자신은 성지 전쟁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브린디시-

    시리아 내전을 해결한 카밀은, 프레데릭 II세에게 휴전을 제안하였던 1년 전보다 입지가 강해진 상황이었다. 서기 1229년 2월 18일, 무슨 이유에서인지 두 사람 간에 10년 기간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카밀은 무슬림 성소 몇 곳을 제외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십자군에게 넘겼다. 서기 1229년 3월 17일, 프레데릭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카밀 대리인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8월 29일, 세프라노 조약(Treaty of Ceprano)을 통해 교황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제6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가톨릭 통치로 되돌렸고, 교황의 개입 없이 십자군이 성공할 수 있다는 전례를 남겼다.

남작들의 십자군

    서기 1239년부터 1241년까지, 제1차 십자군 이후 가장 성공적이었던 소위 남작들의 십자군이 있었다. 스페인 나바르라 왕국의 테오볼드 I세(Theobald I of Navarre, 1201~1253)와 영국 콘월 주 영주 리챠드(Richard of Cornwall, 1209~1272)가 그 지휘자들이었다. 이들이 지휘한 십자군은 볼드윈의 십자군과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원정을 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1129년, 프레데릭 II세와 아이유브 술탄 카밀은 10년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1234년 교황 그레고리 IX세는 이 협정을 무시하고, 십자군을 일으키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 귀족들이 십자군에 참가하였으나 그 출발이 늦어지고 있었다. 휴전 협정이 종료되기 전에는 십자군 활동을 인정하지 않은 프레데릭 II세가, 십자군의 자기 영지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1239년 교황은 그를 다시 파문하였고, 십자군은 성지로 가기 위해 그의 영지가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해야 했다.

-아이유브 왕국(핑크 색)-

    프랑크 군은 테오볼드 I세와 부르군디 공작 위그(Hugh of Burgundy, 1213~1272 )가 지휘하였고, 몽포르(Montfort: 현 프랑스 일 드 프랑스 이블린 소재 공동체)의 귀족 아모리(Amaury, 1192~1242)와 드뢰(Dreux: 현 프랑스 북부 공동체)백작 피터(Peter I, c. 1187~1250)가 함께 하였다. 서기 1239년 9월 1일, 테오볼드 I세는 아크레에 도착하여, 1년 전 카밀 사망 후 발생한 아이유브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다. 9월 말, 카밀의 동생 이스마일(Salih Ismail)이 자신의 조카 살리 아이유브(Salih Ayyub, 1205~1249)로부터 다마스커스를 빼앗은 후, 아딜 II세(Al-Adil II, c. 1221~1248)를 이집트 술탄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테오볼드는 예루살렘 왕국 남쪽 국경을 지키기 위해 아스칼론을 요새화하기로 결정하고, 다마스커스를 향해 진격하였다. 그의 십자군이 행군하는 동안 아이유브 이집트군은 국경지대로 진입, 가자(Gaza)에서 테오볼드 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명령을 어기고 공격에 나선 테오폴드 부대는, 무슬림의 매복에 걸려 결정적인 패배를 하였다. 패잔병들은 테오볼드의 명령에 따라 아크레로 퇴각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케라크 토후 다우드(Nasir Daud, 1206~1261)는, 무방비 상태의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한편 위그 공작은 아스칼론 요새화 작업에 애를 썼다.

    서기 1240년 10월 8일, 리챠드(Richard, 1209~1272. 영국 존 왕의 둘째 아들)가 지휘하는 영국 십자군이 도착하여, 야파를 향해 진군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수개월 전 테오볼드가 아이유브 지도자들과 시작한 휴전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그 결과 양측으로부터 포로들이 석방되었다. 한편 리챠드 십자군은 위그의 아스칼론 요새화 작업을 도와, 1241년 3월 중순 작업이 종료되었다. 리챠드는 이 새로운 요새에 대표자를 임명한 후, 1241년 5월 3일 영국으로 돌아갔다. 서기 1239년 7월 예루살렘 왕국의 후계자인 볼드윈 II세는 소규모 부대를 지휘하여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출발, 그해 겨울 도착하였다. 서기 1240년 부활절에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그는 십자군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플 서쪽 122킬로 지점의 추루룸(Tzurulum: 현 터키 북서쪽 소재 촐루 시)을 점령하였다.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비록 남작들의 십자군이 예루살렘 왕국을 되찾았지만, 그 후 수년이 지나 상황은 역전이 되었다. 서기 1244년 7월 15일, 콰라즈미야 제국(Khwarazmiyya Empire)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많은 기독교도들이 참살을 당하였다. 그 때부터 몇 달 후 벌어진 라 포르비(La Forbie: 가자 지역 마을) 전투에서 십자군이 완패함으로서 성지에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이는 프랑크 왕 루이 IX세(Louis IX, 1214~1270)로 하여금 제7차 십자군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사. 제7차 십자군(1248~1254)

   제7차 십자군은 루이 IX세가 이끈 두 번의 십자군 가운데 첫 번째이다. 루이 IX세의 십자군으로도 알려진 이 십자군은, 당시 카밀의 아들인 아이유브의 지배하에 있던 강자 이집트를 공격, 성지 탈환이 목표였다. 교황 인노센트 IV세(Innocent IV, 1195~1254)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예루살렘 왕 프레데릭 II세, 프러시아 십자군, 몽고 침략자들 징벌을 위한 십자군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서기 1244년 말 루이 IX세는 말라리아에 걸려 중태에 빠지자, 만일 병으로부터 회복을 한다면 십자군에 나설 것을 맹세하였다. 가까스로 살아난 그는 곧 원정에 나설 준비를 했다. 그 이듬해 교황은 제1차 리용 종교회의(First Council of Lyon: 1245)를 개최, 새로운 십자군은 루이 IX세가 지휘할 것을 지시하였다. 로마를 공격하고 있던 프레데릭 II세에게는 또 다른 칙령을 내려 파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위와 나폴리 왕국의 왕위를 박탈하였다.

    추기경 오도(Odo of Chateauroux, c. 1190~1273)가 십자군 모병에 나섰으나 난관에 부딪혔다가, 1248년 8월 12일에야 가까스로 다시 모병을 할 수 있었다. 루이 IX세가 순례자 기장인 “황금 불빛 기장(Oriflamme)”을 앞세우고, 이미 파리를 떠난 후였다. 왕비 마가렛 (Margaret,1221~1295. 루이 IX세의 왕비)과 루이의 두 동생 앙주 공 샤를르 I세(Charles I de Anjou, 1226~1285), 아르뜨와 백작 로베르 I세(Robert de Artois I, 1216~1250)가 함께 하였다. 루이의 막내 동생 알퐁스(Alphonse de Poitiers, 1220~1271)는 그 이듬해에 출발하였다. 그들을 따라 부르군디 공작 위그(Hugh IV of Burgundy, 1213~1272), 브리타니 공작 피터 1세(Peter I, c. 1187~1250), 기타 왕족들, 연대기 작가 쟝(Jean de Joinville, 1224~1317), 영국 왕 헨리 II세의 손자인 윌리엄 롱지스페(William Longespée, c. 1212~1250)가 지휘하는 영국군 부대가 함께 했다.

-황금 불빛 기장(왼쪽 위 붉은 깃발)-

    서기 1248년 9월, 그들은 첫 기착지인 키프러스에 도착하여 증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오던 도중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목숨을 잃어, 보충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곧 아크레로부터 쟝(Jean de Ronay, ?~1250. 예루살렘 성 요한 기사단 기사)과 귀욤(Guillaume de Sonnac, ?~1250. 신전 기사단 기사)이 지휘하는 병력이 도착하였다. 요한(John of Brienne: 예루살렘 왕국 왕)의 두 아들 알폰소(Alfonso of Brienne, c. 1228~1270)와 루이스(Louis of Brienne, ?~1297)도 베이루트 영주의 조카인 이벨린 요한(John of Ibelin, 1215~1266. 아스칼론 백작)과 함께 합류하였다. 윌리엄(William of Villehardouin, c. 1211~1278. 그리스 아케아 영주)의 지휘 하에 프랑크 십자군도 모레아(Morea: 그리스 펠로폰네스 반도의 별칭)로부터 배편으로 왔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이집트 정벌이었다. 서기 1245년 루이 IX세는 교황이 추구했던 프랑코-몽골 동맹 십자군 결성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살리 아이유브(Salih al-Din Ayyub, 1205~1249. 아이유브 쿠르드 지도자)는 다마스커스를 침공한 십자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아이유브는 카이로로 후퇴, 신하 샤이크(Shaik, 1211~1250. 아이유브 왕조의 이집트인 토후)로 하여금 자신의 군대를 지휘케 하였다. 서기 1249년 6월 5일, 함선으로부터 내린 십자군은 샤이크가 요새화해놓은 다미에타를 공격, 손쉽게 점령하였다. 희생자는 오직 병사 한 명에 불과했다. 십자군을 지휘한 루이 IX세는 제5차 십자군 때의 홍수를 기억하고는, 진격을 하기 전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을 한 것이다. 다미에타 상실은 무슬림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아이유브는 자신의 부친이 30년 전에 했던 것처럼, 예루살렘과 다미에타를 교환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십자군은 거절하였다. 서기 1249년 10월 말, 나일강의 물이 빠지자 증원군이 도착했다. 이때를 기다렸던 십자군은 증원군과 함께, 만수라(Mansurah: 현 이집트 다카리아 주 주도)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만수라 전투-

    서기 1249년 11월 술탄이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 두르(Shajar al-Durr, ?~1257)가 남편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은 채 문서를 위조, 시리아에 머물고 있던 아들 투란샤(al-Muazzam Turanshah, ?~1250 CE)를 상속자로, 딘(Fakhr ad-Din)을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십자군은 계속 진격을 하여 1249년 12월, 강 건너 만수라가 보이는 강가에 진을 쳤다. 양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6주 동안 싸웠다. 만수라 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는, 1250년 2월 11일 이집트군의 패배로 끝이 났다. 승리를 하였으나 루이의 군대도 많은 병사는 물론, 지휘관들을 잃었다. 생존자 가운데 신전 기사단장 귀욤은 한 눈을 잃었고, 왕의 동생 로베르 I세, 윌리엄 롱지스페와 그의 부하들을 비롯하여 많은 지휘관들이 전사하였다. 십자군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서기 1250년 2월 11일, 이집트군의 공격이 다시 있었다. 이때 신전 기사단장 귀욤과 성 요한 기사단장 쟝이 전사하였다. 

    서기 1250년 2월 28일, 투란샤가 다마스커스로부터 도착하여 공격을 개시, 다미에타로부터 오는 십자군 식량 보급 선박을 가로채었다. 이에 따라 십자군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루이 IX세는 만수라로부터 후퇴를 결정하고 4월 5일, 이집트 군의 추격 속에 다미에타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다음날인 4월 6일, 이집트군은 루이의 군대를 포위,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그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그의 시종들은 쇠사슬에 묶여 만수라로 압송되었고, 그의 십자군 전 부대는 포로가 되었다. 파리스쿠르(Fariskur: 현 이집트 다미에타 주 Faraskur 시)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이처럼 루이IX세의 십자군은 결정적인 패배를 하였다.

-포로가 된 루이 9세-

    이집트군은 대규모 십자군 포로들을 이송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병약자는 곧 처형되었고, 매일 수백 명의 포로들이 참수를 당했다. 만수라로 압송된 루이와 그의 시종들 석방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석방 조건은 까다로웠다. 루이는 몸값으로 다미에타를 되돌려주기로 하고, 병사들 몸값으로는 1백만 베잔트(Bezant)를 지불키로 하였다. 몸값 협상을 위해 카이로를 방문한 로베르(Robert of Nantes, ?~1250. 낭트 로마 교회 성직자)는, 투란샤가 계모 두르의 계략으로 이미 죽었음을 알았다. 서기 1250년 5월 6일, 다미에타는 무슬림 측으로 넘겨졌다. 다미에타에 남아 있던 수많은 십자군 부상병들은, 그들의 희망과는 달리 모두 참살을 당하였다.

    서기 1251년, 루이 IX세를 구하고자 목동들과 노동자들로 구성된 “목자들의 십자군”이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다. 프랑스 북부에서 살던 신원 미상의 늙은 헝가리 수도승이, 성처녀 마리아로부터 루이 IX세를 구하기 위한 십자군을 일으키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했다. 이에 따라 약 6만 명에 달하는 그의 추종자들이 분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무리들은 가톨릭 승려들과 마찰을 빚고, 유대인 공동체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 북부 지역을 넘어선 적이 없었고, 결국 루이 VIII세의 왕비인 블랑슈(Blanche of Castile, 1188~1252 CE)의 명령에 따라 해산했다. 루이 IX세는 석방된 후 아크레로 가, 1254년까지 머물렀다. 제7차 십자군은 이렇게 끝이 났다.

   아. 마지막 십자군

   이집트에서 패전한 후 루이 IX세는, 1254년까지 아크레에 머물면서 십자군 왕국들(예루살렘, 에데싸, 트리폴리, 안티오크 왕국)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이때 이집트에서는 맘루크 지도자들과 권력이 약한 아이유브 지도자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몽고 침략에 직면한 이집트에서는 1259년, 맘루크 지도자 쿠투즈(Qutuz, ?~1260)가 술탄의 자리에 올라 또 다른 지도자 바이바르스(Baibars, 1223~1277)와 연합, 아인 야루트(Ain Jalut: 이스라엘 예즈렐 계곡 소재) 전투에서 몽고군을 격파하였다. 그 결과 맘루크는 다마스커스와 알레포를 장악하였고, 쿠투즈가 암살을 당해 죽자 바이바르스가 전권을 장악하였다. 서기 1265년부터 1271년까지, 바이바르스는 프랑크 십자군을 지중해 해안까지 몰아내었다. 그에게는 몽고와 라틴 왕국들 간의 동맹 저지, 몽고족 내분 조장(특히 투르크 칸과 페르시아 일 한국 <Il-khanate> 사이), 러시아 스텝지역으로부터의 노예 확보 등 3개의 목표가 있었다. 

-아인 야류트 전투-

    바이바르스는 시실리의 만프레드(Manfred, 1232~1266. 시실리 왕국의 마지막 왕)를 부추겨 교황에게 저항토록 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십자군 왕국들 간 불화로, 성 사바스 전쟁(War of St. Sabas: 아크레 지배권을 둘러싼 베니스 왕국과 제노아 왕국 간 싸움)같은 분쟁이 초래되기도 했다. 이 싸움에서 베니스는 제노아 세력을 아크레로부터 티레로 축출하였고, 티레로 쫓겨난 제노아 사람들은 그곳에서 이집트와 계속 교역을 할 수 있었다. 바이바르스는 동로마제국 황제 미카엘 VIII세(Michael VIII, 1224~1282)와 제노아 사람들의 아크레 자유통행권을 위한 협상에 나서기도 했다.

-성 사바스 수도원(키드론 계곡)-

    서기 1270년 루이 IX세는, 튀니스 공격을 위한 제8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십자군은 유행병으로 거의 전멸을 하였고, 루이도 8월 25일 튀니스에서 죽었다. 남은 병력은 배편으로 프랑스로 돌아갔다. 장차 영국 왕에 오를 왕자 에드워드(Edward, 1239 ~1307)가 뒤늦게 도착하여 성지를 향하여 갔으니, 이를 에드워드 십자군으로 부른다. 에드워드는 암살 시도로부터 살아남아, 무슬림과 10년간의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십자군은 이처럼 끝이 났다.

예루살렘 왕국 멸망(1291)

    서기 1272년부터 1302년까지 레반트, 지중해, 서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전투가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 X세(Gregory X, c. 1210~1276), 앙주공 샤를르 I세(Charles I de Anjou, 1226~1285), 니콜라스 IV세(Nicholas IV, 1227~1292. 이태리 반도 내 교황 직할지인 Papal States의 통치자)등이 계속해서 십자군에 나섰으나,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무슬림과 싸운 주요 세력은 영국과 프랑크의 왕들, 키프러스와 시실리 왕국, 성전 기사단을 비롯한 주요 기사단, 몽고의 일 한국(Il-khanate)등이었다. 1291년 아크레(Acre) 전투에서 십자군 패전은 예루살렘 왕국의 멸망을 가져왔다. 성지의 기독교 세력은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302년 맘루크가 루아드 섬(Ruad: 시리아 연안 지중해 섬)의 십자군 수비대를 점령하면서 끝이 났다. 이 섬의 상실로 십자군은 성지에서의 마지막 발판을 잃었다. 그 후 수세기 동안 여러 차례 십자군 시도가 있었지만 유럽인들의 성지 점령은, 20세기 제1차 세계 대전이 있기까지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아크레 전투-

    14세기 초에도 수차례 십자군이 일어났으나, 성지 예루살렘은 더 이상 서유럽의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예루살렘 왕국 엘리트 전투부대였던 성전 기사단은 비잔틴으로부터 로데스 섬(Rhodes: 그리스 연안의 섬)을 빼앗아, 그 후 1백 년 동안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그후 그 기사들은 모두 처형을 당하였다.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군 이외에도, 12세기와 13세기 스페인 가톨릭 왕국들의 이베리아 무슬림 정벌을 위한 십자군,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 발틱 연안의 이교도 정벌을 위한 신성로마제국의 북유럽 십자군, 프랑스 남부 랑귀독 카타르(Catharism) 교도 정벌을 위한 알비 십자군(Albigensian Crusade), 어린이 십자군 등 수많은 십자군이 있었다.

-로데스 섬-

  십자군 의의

    유럽 가톨릭은 유대인을 용서할 수 없는 신앙의 적으로 보았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대인에 대한 모략이 널리 퍼졌다. 유대인이 반기독교 “세계 지배 음모(International Jewish conspiracy)”를 꾸미고 있다는 모략은 12세기부터 있었다. 유대인들이 매년 그리스도 교도를 번제물로 바치고, 번제 장소와 번제물의 이름을 결정하기 위해 매년 회의를 개최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러한 모략의 결과, 1171년 브르와(Blois: 프랑스 Loire 강 유역 도시)에서는, 그곳 유대 공동체 모든 유대인들을 말뚝에 세워 화형에 처한 적이 있었다. 독일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이 같은 모함이 있었다.

    유대 공동체의 이들 순교자에 대한 기억은 영감의 원천이었다. 즉각적인 보복을 할 수 없었고,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을 당한 것은 영광된 일로, 하느님께 바쳐진 이삭과 비교되었다. 희생자들의 죽음은 하느님을 축성祝聖하기 위한 순교로 간주되었다. 순교자에 대한 기억은 잔혹한 박해에 대한 쓰라린 기억이 아닌 진정한 신앙,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일이었다. 순교자들은 찬미의 대상이었고, 세대를 이어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느님이 시험을 하시고 보람된 사람들임을 증명하셨기 때문이었다. 진정한 신앙인은 순교자와 같은 사람이어야 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겐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렇게 해서 영감을 얻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다. 순교에 관한 성가(Piyyut)는 전례, 특히 금식일(Tisha B'Av: 유대 역사상 수많은 재난들, 특히 성전의 파괴를 기억하고 슬퍼하는 연례 금식일) 성가에 포함되어 있다.

    유대인의 역사의식에는 타락한 십자군이 확고하게 각인되어 있다. 십자군 시기는 유대인의 불행이 시작된 때로 그들의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다. 십자군 시기는 여러 면에서 서구 역사의 전환점이었고, 유대 역사에서도 그렇다. 실제로 라인란트와 중부 유럽의 유대인 역사가 연속성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는 때는 바로 십자군 시대부터이다. 과거 단편적이고 중구난방식 기록이었던 유대 역사는, 십자군 시기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유대 정사가 기록되어 보존되기 시작한 것은 1096년 십자군의 라인란트 대학살 때부터이다.

    지금까지 독자 여러분은 길고 긴 전투 이야기를 읽었다. 이러한 이야기에 얽힌 유대인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III. 유대인

     1. 유대인

    유대인은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과학과 기술, 철학, 윤리학, 문학, 미술, 음악, 영화, 의약품 등 수많은 분야에서 엄청난 공헌과 영향력으로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썼고, 기독교를 창시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간접적이긴 하나 이슬람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인류의 문명과 문화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해온 것이다.

    유대인은 고대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인(Israelite)과 히브리인(Hebrew)을 조상으로 둔 민족을 말한다. 유대교는 유대인의 민족 종교이다. 민족적, 종교적 집단으로서의 유대인은 지금으로부터 4천여 년 전, 레반트(Levant: 아시아 서쪽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발원하였다. 유대인의 인종적 뿌리는 철기 시대 셈어를 사용했던 가나안 지역 여러 부족들이다. 고대 이집트 제19왕조 제4대 파라오 메르네프타(Merneptah, 1213~1203 BC)비석에는, 청동기 말기인 기원전 13세기에 이미 가나안(Canaan) 땅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뻗어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이 출현하면서 지역적으로 남, 북으로 갈리어 정착한다. 현대의 유대인(Jews)들은 남쪽 유다(Judah) 왕국의 후손으로, 그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메르네프타 전승비-

    유대인의 기원을 사실적으로 재구성하기란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이 일을 위해서는 적어도 10개 이상의 중근동 언어로 기록된 다양하고 수많은 문헌을 통해, 3천년 이상에 걸친 고대 인류사를 공부해야 한다. 유대인의 선사 시대와 그 인종적 출현은 고고학, 생물학, 역사 기록, 종교 문학, 그리고 신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타나크(Tanakh: 유대교 성서)에 따르면, “유다 종족”과 “유다 왕국”이라는 이름은 모두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Judah)로부터 비롯된 말이다. 창세기(29:35, 49:8)에 따르면 ”Judah"는 찬양을 뜻하는 동사 “yada"와 관련되어 있으나 학자들은 대체로, 족장이나 왕국의 이름은 모두 그들이 속한 골짜기나 협곡 등 지리적 특징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유대인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예후디(Yehudi, 복수형 Yehudim)”이다. “Jew"라는 어휘는 로마 사람들이 말한 ”Judean"에서 비롯된 것으로, 남쪽 유다왕국에서 온 그 누군가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스라엘인(Israelite)"으로부터 ”유대인(Jew)"으로 종족 이름이 바뀐 사실은, 유대교 경전 타나크 제3부 케투빔(Ketuvim)속의 에스더서(후일 구약의 에스델서)에서 “유다 왕 여고니아(에스델 2:6)”라는 말씀으로 증명된다.

-두루마리 타나크-

    타나크에 따르면 유대인의 조상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사라, 레베카, 레아, 라헬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에 살았다. 12지파는 모두 야곱의 열두 아들로부터 비롯된 후손들이다. 야곱과 그의 가족은 파라오의 초청으로 아들 요셉과 함께 살기 위해 이집트로 갔다. 그 후 야곱의 후손들은 모세가 인도하여 이집트를 탈출할 때까지 모두 노예생활을 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지휘 하에 가나안 땅을 점령하였고, 여호수아가 죽은 후 판관의 시대를 거쳐, 사울 왕의 백성이 되었다. 사울의 뒤를 이어 다윗과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고 이후 통일 왕국이 끝나, 왕국은 레반트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그 가운데 유다 왕국 백성은 유다지파, 벤야민지파, 레위지파 일부 그리고 후일 이스라엘 왕국으로부터 온 종족들이었다. 아시리아 유수(Assyrian captivity: 기원전 740년 경 신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수천 명의 이스라엘 왕국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간 사건)로 인해 야곱의 12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 일부 레위 지파를 제외한 10지파(이스라엘 왕국 종족)가 모두 소멸하였음으로, 현대의 유대인들은 유다 지파를 자신들의 뿌리로 주장하고 있다.


  -야곱의 12지파-


     유대인의 기원에 관한 유전학적 연구를 통해, 전 세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중동 지역에 뿌리를 둔 유산을 공유하고 있으며, “비옥한 초승달 지역(오늘날 이락,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쿠웨이트 북부, 터키 남부, 이란 서부, 사이프러스, 이집트 북부를 포괄하는 지역)”의 이교도들과도 어떤 유전적 특질을 공유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여러 유대인 집단의 유전자 조성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동일한 유전자로부터 그들의 조상이 비롯되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유대인 공동체들은 오랜 세월 서로 격리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독특한 공통점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

    메르네프타 비석은 1896년 페트리(Flinders Petrie, 1853~1942. 영국 고고학자)가 테베(Thebes: 나일강변의 고대 이집트 도시) 유적에서 발견한 것으로,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 비문은 주로 고대 리비아(Lybia: 철기시대 이후 기원 6세기까지의 북아프리카 지역) 동맹군을 무찌른 기록이다. 비문의 마지막 28개 줄은, 당시 이집트 왕국의 속지였던 가나안에서의 전투를 말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27번째 줄 상형문자를 “이스라엘”로 번역하기 때문에, 이 비석을 “이스라엘 전승 기념비”라고도 한다. 이는 이스라엘에 관한 고대 이집트의 유일한 언급으로, 이스라엘이 문자로 나타난 최초의 예이기도 하다. 아래 그림이 바로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상형문자로, "외국인"을 뜻하는 ysrir(이스라엘)로 읽힌다. 맨 앞 굽은 막대기는 외국인을 뜻하고, 세 개의 직선 위에 사람들을 뜻하는 남녀가 앉아 있다.


                                                                            T14A1 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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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가나안(Canaan)은 기원전 20세기 후반 고대 중근동 지방에 등장한 셈어(Semitic)문명 지역으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에 속한다. 오늘날 가나안은 레바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북부, 시리아 서부 일부를 말한다. 가나안 사람(Canaanite)이라는 말은 레반트 남부 또는 가나안 지역에 살았던 정착민이나 유랑족을 포함한 모든 인종을 뜻한다. 이 말은 성경에서 자주 등장한다. 성경 여호수아서에는 멸종된 종족 명단에 가나안 사람들이 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을 모두 죽였다는 구절이 있다. 고고학적으로 이스라엘 문화는 가나안 문화로부터 비롯되어, 두 문화는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기원전 5백 년 무렵부터 고대 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인을 가나안 사람으로 알았고, 가나안 사람들이 카르타고(Carthage)로 옮겨간 후 수 세기가 지난 고대 후기(Late Antiquity: 대략 기원후 3세기부터 7세기까지), 북아프리카의 포에니 사람들(Punics: 카르타고)은 스스로를 가나안 사람(Chanani)이라고 했다. 

    기원전 14세기 아마르나(Amarna: 고대 암몬 왕국 글자) 점토판에는 Kinahna 로, 헥카타에우스(Hecataeus, 550~476 BCE. 고대 그리스 역사가)가 남긴 기록에는 Khna로 표기되어 있다. 페니키아의 경우 Khna는, 베리투스(Berytus: 현재의 레바논 베이루트의 고대 도시) 시대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사용했던 동전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가나안의 어원은 확실치가 않다. 낮음, 겸손, 복종을 뜻하는 셈어 어근 "kn"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고, 고원지대를 뜻하는 아람(Aram)에 비해 “낮은 지대”를 가리킨다고도 하고, 레반트 지역의 이집트 속주로서 “복종”을 뜻한다는 설도 있다. 히브리어 크난(כְּנַעַן: Kn n)에서 그리스어 (Χανααν: Khanaan)를 거쳐 라틴어 Canaan으로 진화하였다. 

-가나안-

    아카디아어로 키나후(Kinahhu)는 자주색 조개(Murex molluscs)로부터 채취한 물감으로 물들인 보라색 옷을 입은 사람들을 가리켰다. 기원전 500년 무렵 그리스인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그리스어 피닉스(Phoenix: 자주색 또는 심홍색을 뜻함)에 어원을 둔 페니키아인(Phoenician)으로 불렀다. 페니키아 티레(Tyre: 현 레바논의 도시)의 자주색 의상은 멀리까지 알려져, 로마 황제나 귀족들도 사용했다. 로마인들은 “피닉스”를 푀누스(Poenus)로 번역했다. 이는 카르타고(Carthage)에 정착한 가나안 사람의 후손을 뜻하기도 했고, 동시에 포에니(Punic)사람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따라서 페니키아인과 가나안인(Canaanite)은 같은 문화로, 기원전 1200년 이전 청동기 시대 레반트인(Levantine)을 가나안인으로, 철기시대에 지중해 해안에 살았던 그들의 후손을 페니키아 사람으로 본다. 

-레반트(진초록 부분)-


     또 다른 설로는 스파이저(Ephraim A. Speiser, 1902~1965. 미국인 아시리아 연구 학자)가 주장한 것으로, 가나안은 자주색을 뜻하는 후리안(Hurrian: 청동기 시대 아나톨리아, 시리아, 북 메소포타미의 Mitanni 왕국 종족)어 Kinahhu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나안과 페니키아는 모두 “보라색의 땅”을 뜻한다고 했다. 20세기 초, 후리안 고대 도시 누치(Nuzi: 티그리스강 유역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 유적에서 발견된 점토판에는, 적색 또는 보라색 물감과 동의어인 “Kinaḫnu”라는 명문이 있다. 이 물감은 기원전 1600년경, 바빌로니아를 지배했던 카시트 족(Kassite)이 뿔고둥 조개로부터 만들었고, 페니키아인들은 유리 제조의 부산물로 얻었다. 자주색 옷감은 가나안의 이름난 수출 품목으로 출애굽기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 물감의 이름은 아마 그 원산지 이름을 모방해 지어졌을 것이다.

-뿔고둥-

가나안 문명

    가나안 문명은 긴 세월 안정된 환경에 적응하며 존속하였다. 이 기간 동안 가나안 사람들은 고대 중동 문명 즉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수메르, 아카드,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히타이트, 크레테 섬의 미노스(Minoan Crete) 사이에서 중개자가 되어 이득을 취하였고, 내륙에서는 농업, 해안 지역에서는 상업으로 훌륭한 도시 국가를 이루었다. 이처럼 내륙과 해안이라는 대립은, 폭풍의 신 바알(Baal 또는Teshub)과 강의 신(Yam)사이의 투쟁으로 가나안 신화에 잘 묘사되어 있다.

-바알-

    초기 가나안은, 담으로 둘러막은 조그만 마을 주변에 여러 가지 채소와 더불어 밀, 보리, 피스타치오 생산을 위한 넓은 농경지가 있었고, 포도를 재배하여 포도주를 생산했다. 수확은 첫여름에 했다. 수확 후 우기가 오면, 가축이 마실 물이 있고 곡물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곳으로 가축을 몰고 갔다. 이 같은 농업 방식에 관한 증거는, 게제르 달력(Gezer: 가나안 글자가 새겨진 석회석 판. 1908년 예루살렘 인근 게제르에서 발견됨)과 히브리 달력에서 알 수 있다. 급격한 기후 변화로 이 같은 지중해식 농, 축 혼합 농업 양식은 붕괴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에 따라 상업적인 농업 생산은 가족을 위한 식량 생산으로 바뀌었다. 축산은 1년을 주기로 하는 유목 형태로 바뀌어, 목동들은 무리를 지어 가축과 함께 이집트 남쪽 삼각주 지역이나 유프라테스 강 북쪽으로 한 바퀴 도는(Transhumance) 유목민 생활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족장들은 적 정착민들을 공격하여 약탈한 물건이나, 상인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세금으로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에게 보상을 하였다. 성경의 족장 이야기는, 이 같은 사회 형성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게제르 달력-

  이집트 첫 중간 시기(2181~2055 BC: 이집트 고왕국이 끝난 후 중왕국이 등장할 때까지 시기), 힉소스의 가나안 침입으로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아시리아가 고립되면서 이들과 가나안의 교역도 급격히 감소하였다. 그 후 기후가 다시 안정을 되찾으면서 블레셋(Philistine)과 페니키아(지금의 레바논)의 해안 지방 교역이 회복되었다. 시장이 다시 형성되고, 카데쉬(Kadesh Barnea: 가나안의 남쪽 여러 곳)로부터 헤브론(Hebron: 웨스트뱅크 남쪽 소재), 라기스(Lachish: 유대아 저지대에 있던 고대 가나안 성읍), 예루살렘, 베델(Bethel: 고대 이스라엘 도시 및 성소), 사마리아(Samaria: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셰겜(Shechem: 가나안과 이스라엘 고대 도시. 이스라엘 왕국의 첫 수도), 실로(Shiloh: 사마리아 소재 고대 성읍, 성소) 등지를 거쳐 예즈렐, 하조르, 메기도까지 이르는 새로운 교역로가 열렸다. 이 새 교역로를 따라 새로운 성읍들도 들어섰다. 경제적 발전의 결과 에일라트(Eilat: 이스라엘 최남단 소재 고대 항구)에서 시작, 팀나(Timna: 현재의 예멘에 소재 했던 고대 성읍), 에돔(Edom), 모압(Moab), 암몬(Ammon)을 거쳐 다마스커스와 팔미라(Palmyra: 시리아 Homs 주 소재 고대 성읍)의 아람족 나라들까지 연결되는 제3의 교역로가 열렸다.

-사마리아 성터-

    무역이 번영하면서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등 강력한 세력들을 가나안으로 불러들였고, 로마는 정치적으로 가나안을 지배하면서 공물을 요구하고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 시대에는 가축 수의 증가에 따른 초지 소멸로 기후가 변하여, 초지를 따라 이동하는 목축이 흔했다. 가나안 문명이 몰락하면서, 그 지역은 그리스와 로마에 합병되었고, 비잔틴 시대를 거쳐 우마이야 칼리프 왕조(Muslim Umayyad Caliphate: 661~750 CE)지배를 받았다. 서아람어(Western Aramaic)는 가나안 문명 교량어橋梁語(lingua francas)로서 시리아의 많은 촌락에서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페니키아어 계통의 구 가나안어는 서기 100년 무렵 소멸되었다. 이락이나 이란, 북동 시리아, 터키 남동부 지역의 아시리아인들은 오늘날에도 아카디어가 섞인 동아람어를 사용하고 있다. 텔 카브리(Tel Kabri: 청동기 시대 가나안의 왕궁 터)는 중기 청동기 시대 가나안 성읍의 유적이다. 이곳은 서갈릴리 성읍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시로서, 그 중앙에 왕궁이 있었다. 텔 카브리는 폐허가 된 후 그 위에 다른 도시가 건설된 바 없음으로, 완벽한 발굴이 가능한 유일한 성터로 남아 있다. 텔 카브리는 가나안 문화 말고도, 크레테 미노스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텔 카브리에는 미노스 스타일의 프레스코 벽화가 남아 있다.


-텔 카브리 왕궁터-

    지난 2020년 유전자를 이용한 유대인 연구가 있었다. 이 연구를 통해 가나안인들은 가나안 원주민인 신석기인들과 동석기시대 자그로스(Zagros: 이란, 이락 북부, 터키 남부에 걸친 긴 산맥)로부터 온 종족, 청동기 시대 코카서스로부터 온 종족이 섞인 종족의 후손임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종족 혼합은, 기원전 2천5백 년부터 기원전 1천 년에 이르기까지 자그로스나 코카서스로부터 레반트 지역으로 끊임없는 인구 이동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 연구를 통해 대부분의 현재 유대인과 레반트 아랍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같은 가나안 혈통임도 밝혀졌다.

-자그로스 산맥-

   타나크에 나타나는 “가나안(Canaan)”은 노아의 손자이다. 그는 함의 저주라는 대화에 등장하는데, 가나안의 부친 함(Ham)이 술이 취해 벌거벗은 노아를 보았음으로 술이 깬 노아는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에게 천대 받는 종이 되어라."라는 저주를 하였다(창세기 9:25). 창세기는 또 가나안의 후손을 열거하고 있다.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창세기 10:15-19).” 가나안 사람들은 페니키아와, 현재의 가자 분지(Gaza Strip, 스바니아 2:5)에 해당하는 블레셋 그리고 요르단 계곡(여호수아 11:3, 민수기 13:29, 창세기 13:12)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블레셋인(Philistine)들은 가나안이 아닌 미즈라임(Mizraim: 함의 아들. 노아의 손자)의 후손으로 본다. 아람인(Arameans: 고대 근동지역의 셈어 계 종족), 모압인(Moabites: 요르단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었던 고대 레반트 왕국 백성), 암몬인(Ammonites: 요르단 강 동안의 고대 셈어족), 미디아인(Midianites: 홍해 아카바만 동쪽, 아라비아 반도 북서 지역 족속), 에돔인(Edomites)등은 모두 아브라함이나 셈(Shem: 노아의 아들)의 후손으로 보며, 가나안이나 아모리족과는 유전적으로 차이가 있다.

-블레셋 왕국(붉은 부분)-

    

    히타이트를 대표하는 헷(Heth)은 가나안의 아들이다. 후일의 히타이트는 인도-유럽어인 네실리(Nesili: 청동기 시대 아나톨리아어)를 말했으나, 그들의 선조 하티아(Hattians: 청동기 시대 아나톨리아 중앙지대에 살았던 종족)는 그 어원이 불확실한 하틸리어(Hattili)를 썼다. 세이르(Mt. Seir: 아카바 만과 사해 사이 산악 지역의 고대 이름)의 호리족(Horites: 창세기14:6, 36:20, 신명기2:12)은 가나안의 후손인 히위(Hivites)족이 아니었을까 한다. 상메소포타미아(Upper Mesopotamia: 이락 북서쪽 평야 지대)의 후리아족(Hurrians: 청동기 시대 아나톨리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살았던 종족)은 후리아어(Hurrian: 지금은 사라진 우랄어 계통의 언어)를 썼다.

    성서 상 가나안의 경계는 요르단 강 서안의 땅까지이다. 성서는 가나안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요르단 강 강가에서(민수기 13:29), 요르단 강 주변에서(여호수아 22:9) 살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오스왈트(John N. Oswalt: 미국 Asbury 신학교 교수. 신약학)는, 가나안 땅은 요르단의 서쪽으로 요르단의 동쪽 지역과는 관계가 없는, 하느님이 주신 풍요의 땅으로 신학적 특성이 있는 땅이라고 했다. 신명기(34:2)는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라는 가나안의 경계선을 말하고 있다. 성서 상 “가나안 사람들”은, 산간 지역 주민이 아닌 요르단 강 강변과 해안선 평야 지대의 주민들을 이르는 말이다.

    창세기에는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약속을 지키는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가나안”은 약속의 땅(the Promised Land)과 동의어이다. 찬송가 “가나안의 행복한 바닷가” 에 “오, 형제들이어 가나안의 행복한 바닷가에서 만납시다”라는 구절은 약속의 땅을 뜻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군가의 한 소절이기도 하다. 1930년대 팔레스타인 시온주의 인텔리겐챠들은, 고대 가나안 문화에 뿌리를 둔 독창적인 히브리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가나안주의(Canaanism)” 이데올로기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2. 디아스포라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고대 이스라엘인과 유대인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조국 땅(이스라엘 땅)에서 추방을 당하여 세계 여러 곳으로 흩어진 민족 분산을 말한다. 기원전 7세기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으로부터 백성들 추방이 있었고, 이 추방 기간 유다인들은 예후디(Yehudi)으로 알려졌다. 구약 에스델서가 “유다인 모르드개(Mordecai)”를 언급하면서(에스델 2:5) “유다인”이라는 어휘가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기원전 733년 아시리아 유수(Assyrian exile)는, 아시리아 제국 필레세르 III세(Tiglath-Pileser III, c. 795~727 BCE)가 북이스라엘 왕국(사마리아 왕국)으로부터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간 사건이다. 샬마네세르 V세(Shalmaneser V, 727~722 BCE 재위)는 3년간 북이스라엘 왕국을 공격하였고, 기원전 722년 사르곤 II세(Sargon II, c. 770~705 BCE)가 이 왕국을 완전 파괴하였다. 그 후 기원전 597년과 586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 II세(Nebuchadnezzar II, c. 642~562 BCE)에 의해 두 차례의 “바빌론 유수”가 있었고, 이때 유다 왕국의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바빌론 유수-

    기원전 63년 로마의 예루살렘 함락으로 하스모니아 왕가가 붕괴되자, 예루살렘으로부터  백성들의 대탈출이 있었다. 서기 6년, 유대아가 로마 속주가 되었다. 서기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시, 유대아 백성들은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그 결과 70년에는 예루살렘이 완전 파괴되었다. 이때 로마는 제2성전과 예루살렘 대부분을 파괴하였다. 이 시기 유대교와 유대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예루살렘의 소멸로, 유대인들은 기약 없는 이산에 자신을 던져야 했다. 서기 132년 바르 코크바는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반란을 지휘하였고, 이 반란을 진압한 로마는 예루살렘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이름을 바꾸었다. 4년이라는 파멸적인 전쟁 끝에 진압당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접근이 금지되었고, 따라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유대인은 아쉬케나지(북, 동유럽), 세파르디(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중동 아프리카 지역의 미즈라히로 크게 분류된다. 이들은 대학살, 피압박을 비롯하여 영국, 스페인, 아랍 국가들로부터의 추방이라는 역사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로마제국 시기, 유대인들이 게르마니아로 대거 이주한 증거가 있다. 그들은 아마 로마 군대를 따라간 상인들이었을 것이다. 


     가. 아쉬케나지

    그러나 현대의 아쉬케나지 유대인(Ashkenazi Jews)은 중세 시기 이민이나 강제 퇴거를 당하여 중동으로부터 서유럽으로 옮겨간 유대인들의 후손을 말한다. 훗날 그들은 박해로 인해 독일을 포함, 중앙 유럽으로부터 동유럽으로 대거 옮겨 가기도 했다. 그들은 이디쉬(Yiddish: 히브리어가 섞인 게르만어 사투리)문화와 아쉬케나지 전례를 잊지 않고 고수했다. 2006년 이스라엘 테크니온(Technion)대학과 람반 메디칼 센터는 공동 연구를 통해, 대부분의 아쉬케나지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중동계 조상을 두고 있음을 밝혀냈다. 

    세파르디 유대인(Sephardic Jews)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그 조상을 두고 있다. 15세기 스페인 종교 재판 시대 이전, 스페인의 유대인은 약 30만 명에 달했다. 서기 1492년 까스띠야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Isabella I451~1504)은 무슬림으로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탈환한 후 유대인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던가 아니면 그곳을 떠나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했다. 여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개종을 하지 않은 약 10만 명의 유대인들이, 1492년 알함브라 칙령에 따라 스페인을 떠났다. 그들은 마그레브(북아프리카),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 폴란드, 오토만 터키 그리고 새로 발견된 아메리카 대륙으로 갔다. 오토만 제국으로 간 세파르디는 대부분 셀라니크(Selanik: 데살로니카), 부르사(Bursa: 터키 북서부 부르사 주 주도), 이스탄불 등에 정착하였다. 그 결과 셀라니크에는 거대 유대 공동체가 생겨났다.

   나. 세파르디

    16세기 초 마라노(Marrano)라는 이름으로 네델란드를 거쳐 독일 함부르크에 정착한 세파르디는, 당연히 그곳 아쉬케나지와 같은 종교적 관습을 지켰다. 세파르디계 아쉬케나지로 유명한 인물은 그뤼켈(Glückel of Hameln, 1646~1724. 후손이 지켜야할 윤리 덕목을 30년 이상 기록한 여성 사업가)이다. 미국 최초의 시나고그를 세운 사람들도 세파르디 유대인들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 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후일 라틴 아메리카로 이주하였다. 현재 북아프리카 유대 공동체는 대부분 세파르디 유대인들이다.

   다. 미즈라히

    미즈라히 유대인(Mizrahi Jews)은 바빌로니아 유대인으로부터 비롯된 중동,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유대인 공동체의 후손이다. “미즈라히”라는 어휘는 이스라엘 정치계, 언론계, 기타 사회과학 분야에서 아랍 무슬림 국가들로부터 온 유대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미즈라히 유대인은 이락 유대인, 시리아 유대인, 레바논 유대인, 페르시아 유대인, 아프가니스탄 유대인, 중앙아시아 부카린(Bukharan Jews: 유대-페르시아 사투리를 사용하는)유대인, 쿠르드 유대인, 산악 유대인(아제르바이잔 등 코카서스 북동 쪽 유대인), 조지아 유대인(바빌로니아 유수 당시 조지아로 간 유대인)을 포함한다. 북아프리카 세파르디와 예멘 유대인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조상이 아닌,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3. 유대인의 천재성

    인류 역사상 유대인이 성취한 위대한 두 가지 업적이 있다. 먼저 세계 문학의 보물인 히브리 성서를 통한 유일신 개념이며, 그 다음 신약을 통해 서구 문명에 스며든 그리스도 사상이다. 다시 말해 예술이나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히브리 성서는 3대 종교의 토대를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과 역사의 성격에 관하여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 그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기원후 1천 년까지 유대인들은 철학, 수학, 시각예술, 희곡, 자연과학 분야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이는 유대인들이 실제 활동을 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그들의 활동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없어서인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예컨대 중세 과학사에 유대인 과학자는 한 명도 없다. 그러나 사튼(George Sarton, 1884~1956. 미국 화학자, 역사학자)은 1150년부터 1300년까지 활동한, 세계 전체 과학자 626명 가운데 15%에 달하는 95명이 유대인이었음을 밝혀냈다. 이 시기는 중세 저명한 유대 철학자인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1135~1204)의 시대와 일치하며 유대 시인, 문법학자, 종교 사상가, 학자, 의사가 있었다. 스페인 황금기(15~17세기까지) 때는 궁정 신하, 북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에는 뛰어난 유대 율법가들과 랍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 공동체 밖의 문화나 역사에는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다.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주요 인물들 가운데 유대인은 7명이 있었고, 그 가운데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는 인물은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와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 두 사람뿐이다.

    유럽의 예술과 과학이 꽃피던 시기 유대인은 야만적인 법적, 사회적 차별을 받았다. 그 후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 유대인들이 획득한 자유는, 인류 역사상 가장 눈부신 위업 가운데 하나이다. 그때부터 자유로운 환경 속에 태어난 유대인들은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서기 1830년부터 1870년까지 40년 동안 16명, 1870년부터 1910년까지 40년 동안에는 40명, 그후 1910년부터 1950년 즉 현대 유대인의 파멸적 시기였던 40년 동안에는, 114명의 뛰어난 유대인들이 탄생하였다. 1870년을 기준으로 1950년까지 부문별로 보면 문학에서는 4배, 음악 5배, 시각 예술 5배가 증가하였고 생물학에서는 8배, 화학 6배, 물리학 9배, 수학 12배, 철학에서는 14배로 늘어난 인물 배출이 있었다.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의 성취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노벨상 수상에 그 근거가 있다. 20세기 전반기 홀로코스트 등 서구 세계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차별에도 불구하고 문학, 화학, 물리학, 의학 부문 노벨상 수상자의 14%가 유대인이었다. 20세기 후반기에 이 점유율은 29%에 이르렀고, 21세기인 지금은 32%를 기록하고 있다. 전 세계 인구수에서 유대인 점유율 0.2%를 감안하면 이는 매우 높은 수치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핵심적인 답은 지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의 평균 지능은 현저히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20세기 초 미국으로 이민한 유대인들의 지능이 낮았다는 이야기는 와전된 것이다). 정확히 얼마나 높으냐는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현재 평균값은 일반적으로 107과 115 중간 값인 110을 받아들이고 있다. 노벨상 수상과 같은 탁월한 업적을 이루려면, 탁월한 지능이 필요하다. IQ 140이상은 이론 물리학이나 순수 수학 분야에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지능 수준을 뜻한다. 만일 유대인의 평균 지능을 110, 표준편차를 15로 본다면 IQ 140 이상의 유대인 비율은 다른 인종보다 약 6배가 높다. 이 불균형은 IQ가 높아질수록 증가한다. 1954년 뉴욕 시 전체 공립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IQ 테스트를 한 결과, IQ 170을 넘어서는 학생이 28명이었고, 그 가운데 24명이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의 이 같은 높은 IQ는 언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이는 유전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지능은 유전적인 것임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높은 소득, 가정의 장서, 부모의 독서 지도 등 환경적 요인은 생각과는 달리, 지능과 무관하다. 물론 좋은 환경은 지적 능력 함양에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필요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최고의 가정환경도, 그런가보다 할 정도로 조금 도움이 될 뿐이다. 출생과 동시 입양된 입양아의 지능은 양부모의 지능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유대인 가정에서 자라더라도 비유대인 아동은, 유대인 지능을 갖추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높은 지능은 유전자 속 그 무엇인가가 결정하는 것이다. 

    아울러 유대인들은 당장의 가치가 아니라, 현상에 대해 "왜" 그러한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 유대교는 원리의 기계적인 암기가 아닌 학습과 분석을 중시한다.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닌, 무엇인가를 입증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밖에도 역사상 수많은 탄압을 받아온 유대인들은 그 탄압을 극복하기 위해 최고에 서려는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머릿수로는 유대 민족을 지탱할 수 없다는 걸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IV. 유대 종교

    1. 단일신교

   단일신교單一神敎(Henotheism)는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나, 지고의 유일신만을 믿는 신앙이다. 많은 학자들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일신교(Monotheism)가 출현하기 전 과도기가 있었고, 이 과도기에 여러 신들이 있었다고 믿고 있다. 모압의 케모슈(Chemosh), 에돔의 카오스(Qos), 암몬의 밀콘(Milkon), 아시리아의 아슈르(Ashur)가 그 예이다. 이 과도기적인 기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와 엘(El: 고대 중근동 지방의 한 신을 뜻하는 고대 셈어)을 신전에 함께 모셨다. “엘”은 이스라엘 종교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Israel)이라는 명칭도 야훼가 아닌 “El”에 토대한 이름이다. 이처럼 과도기 이스라엘 종교는 단일신교였다.

    성경도 단일신교를 증거하고 있다. “...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신명기 29:26)”라는 말씀이 있다. 이를 통해 많은 학자들은, 초기 이스라엘 왕국에는 성읍마다 다른 신을 모셨던 메소포타미아와 유사한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구약에는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구절들이 많다.  “나는 너의 주,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너를 구했나니,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는 유대교 제1계명이 있다. 이 구절은 다른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다만 야훼를 다른 초자연적인 존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지고의 신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사나 악마라는 개념은 바로 이 단일신교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유대교나 기독교는 이러한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천사나 악마의 개념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야훼는 천사, 악마, 인간을 지배하는 최고의 신이었고, 다만 천사나 악마는 평균적인 인간보다 힘이 센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모습의 초자연적인 존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가나안의 신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세력을 순서대로 보면 엘, 아쉐라(Asherah), 야훼 그리고 네 번째가 바알(Baal)이었다. 초기에는 태양신 (Shamash) 숭배도 있었을 것이다. 엘과 야훼는 곧 하나가 되었고, 아쉐라는 페르시아 지배 시대가 올 때까지 인기가 있었지만 독립적인 종교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철기시대 이스라엘 종교는 가나안처럼 가족 신 숭배에 토대하고 있었다. 후기 철기시대 초 이스라엘 왕국 군주들은 야훼를 왕국의 신으로 숭배했다. 야훼는 에돔과 가나안 남쪽 메디아(Media)에서 비롯되어, 후기 철기시대 초에 겐(Kenite: 고대 레반트 유랑족)과 메디아 사람들에 의해 이스라엘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722년 이스라엘 왕국이 신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면서, 성경에 언급된 독특한 종교가 출현하게 되었다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스라엘 왕국으로부터 많은 피난민들이 율법과 야훼에 관한 선지자들의 전승을 가지고 유다 왕국으로 피난을 갔고, 유다의 지도자들은 이 율법과 전승을 받아들였다. 이때 유다 왕국은 아시리아의 가신국가였으나 기원전 630년대 아시리아 제국이 쇠약해지자, 기원전 622년 유다왕국 요시아 왕(Josiah, 640~609 BCE)은 “오직 야훼”에게만 충성을 하겠다며, 독립 운동을 시작하였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은 모두 야훼의 사자이다. 이스라엘 왕국에서 그들은 바알 선지자들과 경쟁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점도 보았고, 야훼와의 특별한 관계로 인해 신통력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성경에는 질병을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렸으며, 빵과 기름을 몇 배씩 늘리고, 가뭄 끝에 비를 내리게 한 이야기들이 있다. 모두 선지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선지자들은 왕에게 야훼의 두 말씀 즉, 왕은 오직 야훼만을 섬길 것이며 특히 가장 가엾은 백성(과부와 고아)을 돌보라고 했다. 선지자들은 엘리트 계급인 성전의 사제들보다 더욱 강력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2. 유대교  

    야훼 신앙으로부터 진화된 유대교는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체계화된 종교로 유대인의 종교, 문화, 문명, 율법을 포괄한다.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하느님이 자신들의 선조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맺은 성약聖約으로 본다. 유대교는 수많은 말씀, 풍습, 신학적인 견해, 각종 제도 등을 망라하고 있다. 유대교(Judaism)라는 어휘는 기원전 2세기 그리스어 본 마카베오하(2:21)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최초의 히브리 사람인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으로 불리고 있다. 하느님을 믿은 보상으로 그는, 그의 둘째 아들 이삭이 이스라엘 땅(가나안)을 상속 받으리라는 약속을 하느님으로부터 받는다. 후일 이삭의 아들 야곱이 이집트에서 노예가 되었고,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집트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들은 시나이 산상에서 토라 즉 모세5경을 받는다. 이 모세5경은 네비임(Nevi'im: 타나크 제2부. 전기 예언서 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 열왕기와 후기 예언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과 기타 12예언서로 되어 있음)과 케투빔(Ketuvim: 타나크 마지막 제3부. 역대기 상, 하, 에즈라, 느헤미아와 기타 11책으로 되어 있음)과 함께 문헌 토라(Written Torah)로 알려지고 있다. 

    하느님이 그들을 인도하여 이스라엘 땅으로 가, 그곳 쉴로(Shiloh: 사마리아 지역에 있던 고대 도시)에 초막을 짓고, 3백 년을 넘어서는 동안 사람을 모아 적의 공격에 대항토록 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민족이 하느님을 거역하니, 하느님은 블레셋(Philistines) 사람들이 그 초막을 차지하도록 허락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언자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하자(사무엘 상 10:19),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웠다. 백성들이 사울에게 사무엘이 내린 명령을 거역하라고 압박하자, 하느님은 사무엘에게 사울 대신 다윗을 왕으로 세우라고 하셨다. 왕에 오른 다윗은, 예언자 나단(Nathan)에게 성전을 건설하고 싶다고 했다. 하느님이 약속하시기를 그의 아들 솔로몬이 제1성전을 세울 것이며, 그의 자손 대대로 왕관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유대교 성서 타나크는, 기독교의 “구약”과 같다. 유대인들은 토라(Torah)를 타나크(Tanakh: Torah, Nevi'im, Ketuvim 등 3부로 이루어진 유대교 성서)의 일부로 본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토라(Torah)는 “가르침”, “율법”, 또는 “하명”을 뜻하며, 유대교 성서의 첫 5경 즉 창세기, 출애급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아놓은 모음집이다. 따라서 토라는 5경 또는 모세의 5경이라고도 불린다. 바로 문헌 토라(Written Torah)이다. 토라의 부록인 구전 전승(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은 미드라쉬(Midrash: 유대교 성서 주석서)와 탈무드(Talmud: 랍비 유대교 율법)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전례典禮를 위한 용도로는 두루마리 형태(Sefer Torah)를 취한다. 책의 형태로 엮을 경우에는 쿠마쉬(Chumash)라고 한다. 토라는 유대교 정신과 끝이 없는 특별한 가르침을 망라해놓은 말씀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르침은 후일 기독교, 이슬람교 등 아브라함 종교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토라에 토대한 헤브라이즘(Hebraism: 유대인, 유대교 신앙, 이데올로기 또는 문화)은 초기 기독교의 핵심적인 배경이 되어, 헬레니즘과 함께 서구 문명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유대인에 대한 학대가 심해지면서 구전 토라(또는 구전 율법)의 내용과 해석이 잊혀질 우려가 있어, 랍비 하나시(Judah haNasi, 135~217. 로마의 유대아 점령 시기 유대 공동체 지도자 랍비)가 이를 서기 200년 무렵 미쉬나에 글로 기록하였다. 탈무드는 미쉬나(Mishna)와 게마라(Gemara)로 되어 있다. 미쉬나 주석본인 게마라는 유대 학문의 두 본거지인 팔레스타인과 바빌로니아에서 썼다. 따라서 미쉬나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라, 자연히 두 개의 탈무드가 탄생을 한 것이다. 보다 오래된 탈무드는 4세기 후반 팔레스타인에서 편찬된 예루살렘 탈무드(Jerusalem Talmud)이다. 바빌로니아 탈무드(Babylonian Talmud)는 서기 500년 무렵, 바빌로니아 유대인 학자들이 편찬하였다.

 
-하나시 동굴 무덤-

    타나크에 따르면, 사울 왕 치세 하에서 통일 이스라엘 왕국(the United Kingdom of Israel)이 수립되고, 다윗 왕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였다. 솔로몬 왕의 통치가 끝난 후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북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기원전 720년 신아시리아제국이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함으로써, 많은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그 수도 사마리아로부터 메디아(Media: 현재의 이란 서북부 지역)나 카부르 강(Khabur River: 시리아 유프라테스 강 지류)유역으로 끌려갔다.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 II세는, 그때까지 독립을 유지하던 남쪽 유다 왕국을 정복하였다. 이에 따라 수많은 유다 왕국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 “바빌론의 유수”를 제1차 유대인 디아스포라(disapora: 태어난 곳을 떠나 이역을 떠도는 민족 이산)라고 한다. 그 때부터 70년 후, 바빌론을 정벌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c. 600~530 BC)의 칙령에 따라 많은 유다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를 “시온으로의 귀향”이라고 한다. 고국으로 돌아간 그들은 제2성전을 짓고, 옛 종교 관습을 되찾았다.

    제2성전 초기 최고의 종교 기관은, 율법학자 에즈라(Ezra, 480~440 BC)가 이끄는 총회였다. 총회의 업적 가운데 하나는 성서의 마지막 책들을 저술하고, 정전正典을 수정한 일이다. 기원전 3세기부터 헬레니즘 유대교(Hellenistic Judaism: 그리스 문화가 혼합된 고대 유대교)가 이집트 프톨레미 왕국(Ptolemaic Kingdom: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가 이집트에 세운 왕국)으로 전해졌다.

    유대인 대반란(66~73 CE)중 로마는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제2성전을 파괴하였다. 그 후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Caesar Trajanus Hadrianus, 76~138 CE)는 성전의 언덕(Temple Mount) 위에 이교도의 우상을 세우고, 할례를 금지하였다. 이 같은 문화 말살 정책으로 바르 코크바 반란(Bar Kokhba Revolt, 132~136 CE. 로마제국에 저항하여 시몬 바르 코크바가 이끈 반란)을 불렀고, 반란 후 로마는 토라 공부 금지, 유대인 휴일 금지, 유대아 땅으로부터 유대인 강제 추방 등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서기 200년 유대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허락되고, 4세기 초 영지주의(Gnosticism: 1세기 후반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에서 동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이단적인 종교적 관념)와 기독교가 등장(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한 기독교 공인)할 때까지 유대교는 합법적인 종교(religio licita)로 인정되었다.

    고대 중근동 신들과는 달리 유대교의 신은 이 세계, 특히 그가 창조한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타나크에 따르면,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룰 것임을 약속하였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라고 가르쳤다. 이는 유대 민족이 하느님의 세상 사랑에 대해 보답을 하고자 함이었다. 아브라함은 또 유대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 이는 백성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본받고자 함이었다. 이 같은 계명(토라에는 613개의 계명이 있다)들은 성약聖約을 이루는 율법으로, 바로 유대교의 본체이다. 유대인은 누구나 일상적인 생활 즉, 할라카(Halakha: 유대교 율법)를 준수하고 은총의 기도(Birkat Ha-Mizvot)를 통해 하느님을 경험한다. 평범하고 친숙하며 일상적인 물건이나 사건을 통해 하느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매일 먹는 식품은 물론, 매일이라는 그 자체가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은총인 것이다. 일상적인 케두샤(Kedushah: 이사야 6:3, 에제키엘 3:12의 기도문) 기도나 성스러운 행동은, 바로 인자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는 것이며, 우상숭배와 간음 그리고 피흘림으로 신성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랍비 전례典禮에서 드리는 축복의 기도(Berakhah)는 성스러움을 깨닫게 하지만, 그러나 전례에서 사용하는 많은 물건들은 세속적이다. 그렇다고 성스러운 물건들이 이적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좋든 나쁘든 모든 일에서 하느님을 경험한다. 좋든 나쁘든 하느님께 감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 철학자들은 신이 우주 어디에나 존재하느냐 또는 초월적인 존재냐 여부에 관해, 그리고 사람은 자유의지가 있느냐 아니면 그 삶은 이미 결정된 것이냐 논쟁을 벌이는데 반해, 할라카(halakha: 유대교 율법 모음)는 유대인이면 누구나 이 세상으로 하느님을 불러 모실 수 있는 통로이다. 신을 믿기보다 할라카 준수를 더 중시하는 유대교파도 있다. 즉, 인격화된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유 유대교 운동이다.

    기독교나 이슬람과는 달리 유대교에는, 신앙에 얽매이게 해놓은 규정이 없다. 모두 전례(기도문)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유대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학자들이 유대교 교리 형성에 공헌을 했고, 모든 교리는 이미 비판을 받아 교리가 된 것이다.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12세기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1138~1204. 세파르디 유대인 철학자)의 13개 신앙 원칙이다. 그는 이 13개 원칙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거부하는 유대인은 배교자이거나 이교도라고 했다. 후일 그의 원칙은 시의 형태를 띠어 수많은 유대교 전례문(기도문)에 올려져, 마침내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현대의 유대교에는 정확한 교리를 말해줄 권위 있는 중앙 기구가 없다. 따라서 기초 신앙에 관한 많은 이견이 있다. 그렇지만 크건 작건 모든 유대교파는 타나크, 탈무드, 그리고 미드라쉬에 토대하고 있다. 또한 유대교는 하느님과 아브라함 간의 계약, 하느님과 모세와의 계약을 받아들인다.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 6세기 이래 율법학자들이 선택한 유대교의 주류)의 핵심 문헌인 미쉬나는, 이 계약의 신성을 거부하는 자는 앞으로 올 지상 천국에서 자신의 몫을 잃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오늘날 유대교 핵심 교리를 세우기란 더욱 어려운 문제이다. 많고 다양한 유대교 교파 때문이다. 솔로베이트치크(Joseph Soloveitchik, 1903~1993. 미국 정통 유대교 랍비. 탈무드 학자)는, 유대교 현대화는 그 궁극적 목적이 이 세상에 신성을 가져오는 것임으로, 할라카에 토대해야 한다고 했다. 카플란(Mordecai Kaplan, 1881~1983.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랍비)은 유대교 재건운동을 일으킨 사람으로, 유대교를 종교가 아닌 점진적으로 진보하는 하나의 문명으로 보았다. 반면 솔로몬(Solomon Schechter, 1847~1915. 모라비아계 미국인 랍비)은 유대교 자체가 창조적인 해석으로, 끊임없는 수정과 율법의 조정을 받은 역사임으로, 보수주의 유대교를 토라 해석의 역사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필립슨(David Philipson, 1862~1949. 독일계 유대인. 개혁주의 랍비)은 전통적인 랍비식 유대교에 반대, 유대교 개혁주의 밑그림을 그린 인물이다. 

유대교 교파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미국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의 종교 운동 결과, 오늘날 정통 유대교, 보수 유대교, 개혁 유대교 등 여러 종파가 생겨났다.

    정통 유대교(Orthodox Judaism)는 두루마리 토라와 구전 토라 모두 하느님이 모세에게 계시하신 것으로, 토라의 모든 율법은 구속력이 있고 불변의 것으로 본다. 정통 유대교는 유대 율법전(Shulchan Aruch)을 할라카의 정통 법전으로 본다. 정통 유대교는 유대교 신앙을 정의함에 있어 마이모니데스의 13개 원칙을 강조한다. 정통 유대교를 하레디 유대교(Haredi Judaism)와 현대 정통 유대교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하레디는 현대성이 미흡하고, 비유대교적인 계율에는 관심이 적다. 수행에 있어서도 옷차림과 보다 엄격한 수행 등, 현대 정통 유대교와도 다르다. 하레디 유대교는 카발라(Kabbalah: 불변 영원의 신과 유한한 죽음의 우주와의 관계를 가르치는 유대교 신비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솔로베이트치크(Joseph Ber Soloveitchik, 1903~1993. 미국인 정통 랍비. 탈무드 학자 )가 분류한, 중도 정통 유대교라는 분파도 있다. 

    보수주의 유대교(Conservative Judaism)는 전통적인 할라카와 관습의 준수를 특징으로 한다. 안식일과 식이요법을 준수하고, 유대교 신앙원칙을 가르침에 있어 근본주의적인지 여부를 깊이 고려하고, 현대 문화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것과, 유대교 관련 서적을 읽을 때는 전통적인 랍비의 태도로, 동시에 현대적 학문 연구 자세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토라는 신성이 담긴 문헌으로, 예언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것이며 하느님의 의지가 담긴 문헌이나, 하느님이 모세에게 전했다는 정통적인 입장을 거부한다. 보수주의 유대교는 구전 토라가 신성하고 유일한 것이나, 두루마리 토라와 구전 토라 모두 현대적인 감성과 조건에 알맞도록 랍비들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개혁 유대교(Reform Judaism)는 자유 또는 진보 유대교(Liberal or Progressive Judaism)로 불리기도 하며, 토라의 전례 율법을 거부하고 도덕적인 계율과 예언자들이 말한 윤리를 준수할 것을 강조한다. 개혁 유대교는 또한 차별이 없는 히브리어 일상어 기도를 발전 시켜왔으며, 유대 전통을 준수할 것을 강조한다.

    부흥주의 유대교(Reconstructionist Judaism)는 개혁주의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할라카를 받아들이지 않으나 개혁주의 유대교와는 달리, 준수해야 할 율법 결정에 공동체의 역할을 강조한다.

    인도주의 유대교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본거지를 둔 소규모 비신학적 운동이다. 유대교의 정체성으로 유대 문화와 역사를 강조한다.

    수보트니크(Subbotnik)는 18~20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발생한 유대교 운동가들로, 대부분이 기독교에서 랍비 유대교와 카라이트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러시아 제국의 탄압을 피해 성지로 온 제1차 시온주의 알리야(Aliyah: 디아스포라로부터 이스라엘로 이민한 사람)들로, 후일 결혼을 통해 다른 유대인들과 합류하였다. 그들 후손으로는 자이드(Alexander Zaid: 1886~1938. 유대인 국방 조직 Bar Giora와 Hashomer의 창시자), 론(Alik Ron: 엔테베 작전 지휘자)소장, 11대 수상 아리엘 샤론의 모친 등이 있다.

    아쉬케나지와는 달리 역사적으로 분파행동을 피했던 세파르디와 미즈라히 공동체는 유대교 “운동”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는 특히 세파르디, 미즈라히 최대 공동체가 있는 현대 이스라엘에서 그러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아쉬케나지 운동에 참여한 세파르디나 미즈라히가 있었고, 보수적인 세파르디와 미즈라히는 전례 율법도 바꾸지 않았다. 세파르디 유대교도는 랍비 개인 또는 기관의 가르침을 따른다. 이스라엘 랍비 최고 위원회(The Chief Rabbinate Council)가 그 기관의 예이다.

    “카라이트” 유대교는 스스로를 제2성전 시대 사두개인 같은 비非랍비 유대인 지파의 후손을 자처한다. “카라이트”는 오직 타나크와 페샤트(Peshat: 성서 해석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 성서의 문장이 뜻하는 직접적인 의미)의 뜻만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성서에 쓰여 있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럽 카라이트 가운데는 자신이 유대 공동체의 일원이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사마리아”는 웨스트 뱅크 게리짐(Gerzim) 산정의 매우 작은 공동체로, 자신들을 철기 시대 이스라엘 왕국의 후손으로 자처하고 있다. 그들의 종교는 두루마리 토라(모세 5경)에 토대하고 있다. 그들은 모세 5경을 유일한 성경으로 본다.

    “하이마놋(Haymanot: 기즈 암하르어로 “종교”를 뜻함)“은 이디오피아 유대인들의 유대교이다. 랍비 유대교, 카라이트 유대교, 사마리아 유대교와 본질적으로 다른 이디오피아 유대교는, 믿음이 같은 사람들이 분열하여 생겨난 파이다. 그들의 성서는 히브리어가 아닌 기즈 암하르어(고대 이디오피어 셈어)이다. 식사 계율은 성서(Orit)에 있는 그대로 엄격하게 준수한다. 안식일 역시 차이가 있어, 이디오피아 유대 공동체에서는 랍비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이디오피아 공동체에 독특한 시그드(Sigd)같은 안식일이 있다.

    노아파(Noahidism)는 노아의 일곱 율법과 정통 유대교의 해석에 토대한 유대교 종교 운동이다. 할라카에 따르면, 이방인(Gentiles: 비유대인 또는 유대교도가 아닌 유대인)은 유대교로 개종할 의무는 없으나, 노아의 일곱 계명을 올바르게 지켜 앞으로 올 세상(Olam Ha-Ba)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탈무드는 노아의 계명을 어긴 죄에 관해서 말하고 있지만, 노아파는 사회가 정한 법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아파에서는, 노아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노아의 자손(B'nei Noach 또는 Noahides)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노아의 자손”은, 모든 이방인들도 노아의 후손으로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로 노아의 일곱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노아파와 정통 유대교는 전 세계 여러 곳에 전도 기관을 설치하였다.

    대부분의 이스라엘인들은 자신을 힐로니(Hiloni: 세속 유대인)나 마소르티(Masorti: 정통 유대인) 또는 하레디(Haredi 또는 Dati: 할라카를 준수하는 정통 유대교파)로 분류한다. 유럽계 유대인 공동체에서 “힐로니”라는 말은 매우 흔하며, 그들의 일상에서 유대인이란 정체성은 매우 강력한 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전통적인 신앙과 관습으로부터는 대체로 벗어나 있다. 그들은 정통 유대교나 개혁, 보수 유대교로부터 모두 벗어나 있음으로 조직화된 종교 생활을 무시한다. “마소르티”는 중동,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계열의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호칭하는 말이다. 그들은 보수 유대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스라엘 내에서는 “마소르티”와 “힐로니”는 구분이 모호하여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세계관과 전례에서도 많은 점이 같다. “정통 유대인”이라는 어휘는 이스라엘 사람들 대화에서 그리 흔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디아스포라에서 “정통”으로 불리는 경우는, 보통 “다티(또는 “하레디”)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 “다티 또는 하레디”는 시온주의와 정통 유대교를 결합한 개념이다. 하레디는 인종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아슈케나지에서 비롯된 “하시디 하레딤”과 “비하시디(리투아니아 계)”, 그리고 “세파르디 하레딤” 등 세 그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유대교 계율

    유대교 윤리는 율법서인 할라카가 정한 전승 또는 유대교의 여러 도덕률을 말한다. 윤리적 실천은 정의, 진리, 평화, 자애, 연민, 겸손, 자존 등으로 나타난다. 특별한 윤리적 실천으로는 박애(tzedakah)의 실천, 부정적인 언어 삼가하기(Lashon hara)가 있다. 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현안 문제와 관련한 윤리적 실천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샤하리트(Shacharit: 아침기도), 민하(Minch: 오후기도), 마아리브(Ma'ariv: 저녁기도)등 하루 세 번 기도를 드린다. 안식일이나 휴일에 드리는 무사프(Mussaf)도 있다. 기도의 핵심은 아미다(Amidah 또는 Shemone Esei: 두 발로 서서 예루살렘을 향해 드리는 열아홉 기도문)이다. 예배를 드릴 때 또 하나의 중요한 기도는 신앙 선언(Shema Yisrael 또는 Shema)이다. 신앙 선언은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이시다. 야훼 한 분 뿐이시다”라는 토라의 구절(신명기 6:4)을 낭송하는 것이다.

    기도문은 여럿이 함께 드리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전통적인 유대교 전례에서는 대부분 한 사람이 낭송한다. 공동체 전례의 경우는 쿠오룸(Quorum: 열 사람의 성인 유대인으로 구성된 그릅)이 필요하며, 이를 미냔(Minyan)이라고 한다. 거의 모든 정통 유대교 전례나 또는 소수의 보수 유대교 전례에서는, 오직 남자 유대인들만이 미냔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성 유대인이 가능한 유대교 교파도 있다.

    전례 이외에도 전통적인 유대교도들은, 일을 하면서도 하루 내내 기도를 한다. 아침에 잠을 깨어 드리는 기도, 먹고 마시기 전후 등등 끊임없이 기도를 한다. 기도는 유대교 교파에 따라 다르다. 기도문, 기도 횟수, 종교 행사에서 기도를 드리는 사람 수, 악기 사용 여부, 합창 여부, 그리고 기도를 전통적인 전례 언어로 할 것인지 아니면 세속 언어로 할 것인지 등에서도 다르다. 일반적으로 정통유대교와 보수유대교는 전례 언어를 따르고, 개혁유대교와 부흥유대교는 현대어로 번역한 기도문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대부분의 보수 유대교 시나고그와 개혁 유대교 예배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자격으로, 토라 낭송 등 전통적으로 남성의 역할이었던 기도 봉사를 한다. 그밖에도 개혁 유대교에서는 오르간 반주, 남녀 합창을 한다.

    키파(Kippah 또는 Yarmulke)는 테두리가 없는 모자로 기도드릴 때, 식사할 때, 찬송할 때, 유대교 공부할 때 쓴다. 항상 쓰고 다니는 유대인 남성들도 있다. 정통 유대 공동체에서는 남자들만이 이 모자를 쓴다. 비정통 유대 공동체에서는 이 모자를 쓰는 여성들도 있다. 챙이 없고 둥글고 작은 이 모자는 크기가 다양하여, 뒤통수만 가리는 것에서 이마까지 덮는 것이 있다.

-키파-

    치치트(Tzitzit)는 기도 드릴 때 걸치는 숄인 탈리트(Tallit)의 네 귀퉁이에 매달린 매듭 술이다. 탈리트는 유대 남성 용 예배 의상이며, 여성이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남성이 언제부터 탈리트를 입을 수 있는가에 관해서는 많은 관습이 있다. 세파르디 공동체에서는 성인이 되는 12살(여자는 13살) 부터이고, 아쉬케나지 공동체에서는 결혼 후부터이다. 작은 탈리트는 겉 옷 안에 받쳐 입을 수 있는 술이 달린 옷이다. 이 술이 겉 옷 밖으로 자유롭게 매달려 나오는 걸 허용하는 정통 유대교 공동체도 있다.

-치치트-

    테필린(Tefillin)은 두 개의 사각형 가죽 상자로 성서 구절을 담아, 가죽 끈으로 이마에 매달거나 왼팔에 둘러 감는다. 평일 아침 기도 시간에 남자 신도들이 착용하거나, 여자가 착용하는 경우도 있다.

-테필린-

    키텔(Kittel: 무릎까지 내려오는 흰색 외투)은 예배를 이끄는 사람이 입으며, 관습을 지키는 유대교도가 “경외의 휴일(Yamim Noraim: 신년새해, 욤 키푸르, 테슈바 등의 휴일)”에 입기도 한다. 과월절(Passover)에 한 가정의 가장이 입는 공동체도 있고,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입는 경우도 있다. 유대 남자가 죽으면 키텔을 입힘으로써, 수의가 되기도 한다.

-키텔-

    유대교 휴일은 유대력에서 특별한 날로, 유대교 역사상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또한 유대교 휴일은 창조, 묵상, 부활과 같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샤바트(Shabbat: 안식일)는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이다. 6일간의 천지창조 후 휴식을 취하신 하느님을 기념하는 시간이다. 유대인의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날로,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보낸다. 금요일 해가 지면, 가정의 주부는 2개 이상의 촛불을 켜고 찬송을 부른다. 키두쉬(Kiddush: 빵과 포도주로 드리는 기도)로 저녁 식사를 시작한다. 이 때 두 덩이의 할라(Challah: 울퉁불퉁한 모습의 빵)를 식탁에 올린다. 안식일 중에는 39가지의 활동(Melakhah)이 금지된다. 그러나 이는 통상적인 의미로,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러한 일에는 불을 켜거나 글을 쓰는 일, 공공장소에서 돈을 사용하는 일 등이 포함된다. 불을 켜는 일을 금지하기 때문에 자동차 운행, 자동차 운행에 필요한 연료사용, 전기 사용의 금지까지 확대되었다. 안식일 이외에도 중요한 세 순례 축제일이 있다.

    먼저 과월절(Pesach)은 출애급을 기념하는 축제로, 유대력 정월(Nisan: 그레고리력으로는 3~4월) 14일 저녁(Seder)부터 시작하여 1주일간 계속된다. 이스라엘 밖에서는 8일 동안 보낸다. 고대에는 보리 수확과 관련된 축제였다. 축제 첫날을 가정에서 보내는 유일한 축제이다. 축제가 시작되기 전, 가정으로부터 이스트가 들어간 모든 음식(Chametz)을 제거하고, 축제 기간 먹지 않는다. 집안에는 빵이나 빵 부산물이 없도록 깨끗이 청소한다. 과월절 축제 기간에는 빵 대신 마초(Matzo: 이스트가 들어가지 않은 빵)를 먹는다.

    샤부오트(Shavuot)는 시나이 산상에서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라를 주신 일을 기념하는 축제일이다. 비쿠림(Bikurim)축제 라고도 한다. 첫 밀 수확과 관련된 축제이다. 치즈케이크 등 우유제품을 먹으며 밤새워 토라를 공부한다. 가정과 시나고그를 푸른 잎으로 장식하고, 순결을 상징하는 흰옷을 입는다.

    마지막으로, 초막절은 약속의 땅으로 가던 중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한 일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방황 중 이스라엘 사람들의 임시 거처였던 초막(Sukkot)을 흉내 낸 초막을 짓고 축제를 보낸다. 과일 수확과 관련된 축제로, 농번기가 끝났음을 뜻한다. 전 세계 모든 유대인들은, 임시로 만든 초막에서 밤낮 7일을 보낸다. 이 임시 초막은 셰미니 아트제레트(Shemini Atzeret: 히브리 력 Tishrei 22일 휴일. 그레고리력 9월말 또는 10월 초)에, 비를 빌고 토라를 낭송하면서 끝난다. 이렇게 함으로써 토라 독서를 끝내고, 처음부터 다시 읽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날은 두루마리 토라를 안고 춤과 노래를 부르며 축제를 보낸다.

    이상의 세 순례 축제일 이외에도 심판과 용서에 관한 다음과 같은 축제(Yamim Noraim: 경외敬畏의 휴일)가 있다.

    로슈 하샤나(Rosh Hashanah)는 유대력 7월(Tishri) 1일로, 신년 새해에 해당한다. “기억의 날” 또는 “숫양 뿔(Shofar) 소리의 날”이라고도 한다. 숫양 뿔로 만든 나팔을 불고, 사과와 꿀을 먹으며 열흘간의 축제를 보낸다. 열흘간 참회의 날이 끝나면 곧 욤 키푸르가 시작된다.

    욤 키푸르(Yom Kippur: 속죄의 날)는 유대력에서 가장 신성한 날로, 단식과 함께 용서를 비는 기도를 올린다. 독실한 유대인은 마조르(Machzor: 휴일에 드리는 기도서)를 낭송하며, 온종일 시나고그에서 보낸다. 이 날에는 종교를 갖지 않은 유대인들도 시나고그 전례에 참석하고, 금식을 한다. 욤 키푸르 전야에, 금식 전 마지막 식사(Seuda Mafseket)를 하고 촛불을 켠다. 시나고그에서 드리는 전야 전례에서는, 콜 니드레이(Kol Nidrei)찬송으로 시작한다. 이 전례에는 가죽 신발을 신고 참석할 수 없다. 욤 키푸르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를 드린다. 마지막 기도(Ne'ilah)는, 양 뿔 나팔(Shofar)를 길게 불어 끝을 낸다.

    푸림(Purim)은 유대인을 몰살하려는 악당 하만(Haman: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제국 궁정 신하 )으로부터 페르시아 유대인 구출을 기념하는 축제일(에스델 9:22)이다. 포도주를 마시고, 하만타쉬라는 특별한 과자를 먹는다. 좋은 옷에 가면을 쓰고, 축제와 파티에 참가한다. 에스델서를 낭송하며, 음식과 마실 것을 주고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축제일이다. 유대력 12월(Adar: 그레고리력 2월 또는 3월) 14일이다.

-하만타쉬-

    하누카(Hanukkah)는 유대력 9월(Kislev: 그레고리력 11~12월) 25일에 시작되어 8일간 계속되는 불빛 축제이다. 첫째 날에는 1개, 둘째 날에는 2개...8째 날에는 8개의 불을 밝힌다. 에피파네스 왕(Antiochus IV Epiphanes: 헬레니즘 셀류싯 제국의 왕)이 파괴한 성전을 수리, 하느님께 다시 바친 일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영적으로 하누카는 “성유의 기적”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마카비 형제들이 셀류싯 제국에 승리를 거둔 후, 하느님께 성전을 다시 바치는 자리에서 성전의 촛불을 켜기 위한 기름이 하루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그 기름이 8일 동안을 밝혀, 마침내 새로운 성유聖油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누카 축제는 성경에 기록이 없고, 유대교에서 주요 축제로 여긴 적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널리 축제가 치러지고 있다. 성탄절과 같은 시기이고, 이스라엘 건국 이래 강조되어 온, 유대 민족정신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식일(Fast days)은 제1 및 제2성전이 파괴당한 일과 스페인으로부터 추방당한 일을 슬퍼하는 기념일이다. 성전 파괴를 슬퍼하는 또 다른 기념일로 3월(Tamuz: 그레고리력 6~7월)17일, 10월(Tevet: 그레고리력 12~1월) 10일, 7월(Tishrei: 그레고리력 9~10월) 3일 등이 있다. 그밖에도 홀로코스트 기념일(Yom Ha-shoah), 현충일(Yom Hazikaron), 독립 기념일(Yom Ha'atzmaut) 등이 있다.

    유대교 축제일과 안식일에 드리는 기도의 핵심은, 타나크 구절과 함께 토라 낭송이다. 이를 하프타라(Haftara)라고 한다. 1년에 걸쳐 토라 전부를 읽는다. 가을에 읽기가 끝나면, 처음부터 다시 읽기를 시작하는 이 날은 유대교 휴일(Simchat Torah)이다. 앞에서 말한 셰미니 아트제레트와는 다르다.

음식

    유대교 음식율법 카쉬루트(Kashrut)에 따르면, 율법에 따라 조리한 음식을 코셰르(Kosher)라 하고 그렇지 않은 음식은 트레이프(Trief)또는 트레이파(Treifah)라고 한다. 이 율법을 따르는 사람들을 “코셰르 보존자”라 한다.

    이 율법은 육식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율법을 따른 올바른 음식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려면, 먼저 포유동물의 경우는 발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돼지고기는 코셰르가 아닌 대표적 식품이다. 돼지는 발굽이 갈라져 있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다. 해산물이 합당한 식품이 되려면,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조개류, 갑각류, 뱀장어류 등은 코셰르가 아니다. 가금류에 관해서는 토라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새들의 이름이 기록에 남아 있지 않고, 어떤 새들이 코셰르인지 아닌지 확실치가 않다. 그러나 카쉬루트에 적합한 몇 종류 새 이름이 전승으로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닭과 칠면조는 대부분의 유대 공동체가 허락하고 있다. 양서류, 파충류, 곤충류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식품은 코셰르에 합당해야 함은 물론, 육류와 가금류는 건강해야 하고, 셰히타(Shechitah)라는 도살방법으로 도살해야 한다. 코셰르에 합당해도, 올바른 도살을 하지 않을 경우 트레이프 취급을 한다. 도살은 신속해야 하고, 가능한 고통을 가하지 말아야 한다. 피, 지방, 볼기 살은 식용이 금지된다.

    할라카는 또한 우유로 만든 낙농 식품과 고기를 함께 먹는 걸 금지하고 있다. 육류를 먹은 후 낙농 식품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은 공동체마다 다르나, 6시간 이후인 경우도 있다. 어미의 젖에 새끼를 요리할 수 없으며 이러한 규칙은 구전 토라와 탈무드, 랍비의 가르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카쉬루트 율법에 따라 닭이나 기타 코셰르에 합당한 가금류는 육류와 같은 것으로 본다. 가금류를 금지하는 경우는 성서가 아닌, 랍비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코셰르 식품일지라도 접시나 기타 식기, 오븐의 사용으로 트레이프가 될 수 있다. 코셰르가 아닌 식품을 요리하기 위해 사용한 식기에 담은 식품과 고기를 담았던 접시에 젖으로 만든 식품을 올린다면, 그 식품은 명백히 트레이프 식품이다. 이밖에도 정통유대교와 보수유대교는, 유대교도가 아닌 사람들이 만든 포도 제품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옛날 이교도들이 제사에 포도주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랍비의 감독을 받지 않고 만든 포도주와 포도 쥬스임에도, 이를 허락하는 보수 유대교 공동체도 있다.

    토라는 또한 청결한 제례, 식욕 억제, 하느님께 복종, 건강 개선, 보다 덜 잔혹한 동물 살육, 이교도 공동체와는 다른 유대 공동체의 차별성 보존 등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음식 율법은 여러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금류나 포유 동물의 피 식용 금지는, 그 피에는 그 동물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코셰르가 아닌 식품을 금지하는 이유는, 그러한 음식은 청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발라(Kabbalah: 유대 신비주의 학파)에 따르면, 성스러움은 코셰르 음식을 먹음으로써 발현되며, 코셰르가 아닌 음식(세속 음식)에 너무 얽매이면, 먹는 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타나크는 제례적으로 청결한 자(Tahor)가 불순한 자(Tamei)로 변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은 인간의 시체나 무덤 접촉, 정액의 분출, 질액의 분출, 월경 그리고 이러한 일들로 부정을 탄 사람과의 접촉 등으로 발생한다. 랍비 유대교에서 코하님(Kohanim: 성전 시대 상속을 통해 계승된 성직자. 아론 파 성직자라고도 함)은 묘지에 발을 디디거나 시체 접촉을 하면 안 되었다. 성전 시대 코하님들은 청결한 전례 중 그들에게 주어진 빵만 먹어야 했고, 이러한 율법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강해져, 모든 유대인들은 평소에도 빵을 먹기 전 손을 닦게 되었다.

    청결한 전례의 하부 율법 중 하나로, 월경 중인 여인들 격리에 관한 율법이 있다. 니다(Niddah: 가족 청결 율법)로 알려진 율법이다. 독실한 유대교도들이 믿어온 이 율법은, 오늘날 자유로운 유대교 지파에서는 따르지 않는다. 토라는, 정상적인 월경 주기를 갖는 여인의 경우 7일간 성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월경 기간이 긴 경우에는 월경이 멈춘 후 추가로 7일간 더 금지하고 있다. 정통 유대교의 랍비 율법도 월경 기간이 긴(Zavah) 여인을 고려하여, 월경이 시작된 날부터 끝난 후 7일까지 남편과 관계를 갖지 말 것과, 남편에게도 이 기간에 부인과의 접촉을 금하고 있다. 그 기간이 지나면 미크베(Mikveh)라 불리는 목욕을 통해 가정이 다시 청결해지는 것이다. 이디오피아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멘스 중의 여인을 오두막에 격리하고, 카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월경 중의 여인은 성전 출입을 금지한다. 성전은 특별한 성소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로의 이민과 여러 다른 유대교 지파의 영향을 받아, 이디오피아 유대인들은 보다 정통적인 유대교 관행을 받아들인 결과이다.

    일상의 일 또는 통과의례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강화와 공동체에 자신을 강력하게 귀속시키는, 유대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로 브리트 밀라(Brit milah), 미츠바(Mitzvah), 결혼, 죽음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브리트 밀라는, 생후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통해 남자 아기를 하느님과의 계약으로 인도하는 의식이다. 이 의식에서 히브리어로 아기 이름을 짓는다. 작명 의식은 여자 아기에게도 같으나(Brit bat)즐거움은 좀 덜하다. 미츠바(Mitzvah)는 남자의 경우(Bar mitzvah) 13세, 여자의 경우(Batt mitzvah) 12세에 거행하는 성인식으로, 정통 유대교와 보수유대교의 의식이다. 개혁유대교에서는 남녀 모두 13세에 거행한다. 성인이 된 소년은, 기도로 회중을 인도하고 토라의 관련 구절을 낭독한다. 결혼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결혼식은 행복한 가정을 상징하는 덮개인 추파(Chuppah)밑에서 거행한다. 결혼식이 끝나면 신랑은 발로 유리를 깨뜨리는데, 이는 성전 파괴와 흩어진 유대인에 대한 슬픔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음을 상징한다. 유대교에는 애도에 관한 여러 단계의 관습이 있다. 첫 단계는 쉬바(Shiva: 1주일)로, 이 기간 유족은 친지의 집에 앉아 친지의 위로를 받는다. 다음 단계는 한 달간 계속되는 쉴로쉼(Shloshim)으로, 이 기간에는 일상적인 활동은 가능하나 파티 참석이나 음악회 등 즐거움을 찾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마지막 단계는 11개월에 걸친 코데쉬(Chodesh)이다. 이 기간에는 대부분의 활동이 정상을 회복하나 시나고그에서 전례를 드릴 때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 카디쉬(Kaddish)를 부른다.

공동체 리더십

    어느 공동체나 마찬가지로 유대 공동체도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서기 70년 제2성전 파괴 시, 많은 성직자들이 희생을 당하면서 그후 오랜 세월 그들의 역할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성직은 상속에 의한 지위로서, 전례를 집전하는 의무 이외에는 이렇다 할 일이 없지만, 유대 공동체 내에서는 아직도 존경을 받고 있다. 정통 유대교 공동체에서는 앞으로 있을 제3성전 시대에 다시 필요할 지도자들을 준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공동체 지도자를 세분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코헨(Kohen: 성직자를 뜻하는 히브리어)은 모세의 형 아론의 후손인 성직자를 말한다. 성전에서 희생제를 담당하였다. 오늘날 코헨은 전례에서 제일 먼저 토라를 낭송한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을 비는 기도문(민수기 6:23~27)을 낭송한다. 그는 또 장자 부활 전례(장자를 하느님께 바침을 상징하여, 아버지가 장남을 은쟁반에 올려 코헨에게 바치면, 코헨은 은전 5개를 받고 아기를 되돌려 주는 의식)를 담당한다.

    어느 공동체나 마찬가지로 유대 공동체도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서기 70년 제2성전 파괴 시, 많은 성직자들이 희생을 당하면서 그후 오랜 세월 그들의 역할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성직은 상속에 의한 지위로서, 전례를 집전하는 의무 이외에는 이렇다 할 일이 없지만, 유대 공동체 내에서는 아직도 존경을 받고 있다. 정통 유대교 공동체에서는 앞으로 있을 제3성전 시대에 다시 필요할 지도자들을 준비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공동체 지도자를 세분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코헨(Kohen: 성직자를 뜻하는 히브리어)은 모세의 형 아론의 후손인 성직자를 말한다. 성전에서 희생제를 담당하였다. 오늘날 코헨은 전례에서 제일 먼저 토라를 낭송한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을 비는 기도문(민수기 6:23~27)을 낭송한다. 그는 또 장자 부활 전례(장자를 하느님께 바침을 상징하여, 아버지가 장남을 은쟁반에 올려 코헨에게 바치면, 코헨은 은전 5개를 받고 아기를 되돌려 주는 의식)를 담당한다.

    하잔(Hazzan)은 훈련 받은 가수이다. 좋은 목소리에다 전통 음에 관한 지식을 갖추고, 기도의 진실성을 이해하는 인물이다. 회중은 반드시 정해진 하잔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나, 대부분의 예배에서 기도는 랍비나 하잔이 한다. 회중에서 사람들이 돌아가며 하는 경우도 있다.

    회중을 대표하는 치부르(Shaliach tzibur)또는 샤츠(Shatz)는 기도 모임을 이끌며 공동체를 대표하여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회중을 대표하여 기도를 드릴 때 샤츠는 하느님과 회중의 중개자가 아니라, 진행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기도가 끝난 후 전 회중이 아멘을 낭송하면 기도에 참여한 것이 된다. 이렇게 해서 샤츠의 기도는 회중을 대표한다. 성인 누구나 기도를 낭송하면, 그는 샤츠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정통 유대교와 보수 유대교 회중에서 기도의 지도자는 남자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진보 유대교 공동체에서는 남녀 모두 가능하다.

    바알 크리야(Baal kriyah 또는 Baal kor)는 두루마리 토라 읽기에 통달한 사람으로, 그 주週에 할당된 토라를 읽는다. 바알 크리야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은 샤츠가 되는 조건과 같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배타적이 아니다. 한 사람이 이 두 역할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경우도 흔하다. 이 역할을 해낼 사람들이 여럿 있는 경우도 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역할을 해낼 수도 있다.

    많은 회중들, 특히 규모가 큰 회중에서는 가바이(Gabbai 또는 Sexton)가 시나고그 일을 돕는다. 그는 토라 독서에 사람들을 모으고, 기도를 드릴 때 정해진 샤츠가 없을 경우 샤츠를 지명하여 토라를 낭송케 한다. 시나고그의 청결과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책임을 진다.

    하잔, 치부르, 가바이는 보통 자발적인 직무로서 명예롭다. 계몽주의 시대 시나고그는 규모가 컸음으로, 랍비나 하잔을 고용하여 샤츠나 발 크리야 업무를 맡겼고, 보수와 개혁유대교에서는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통 유대교 시나고그에서는 일반 신도가 번갈아 가며 이러한 일들을 한다. 대부분의 시나고그가 한두 명의 랍비를 고용하고 있지만, 미국의 경우 전문적인 하잔은 물론, 여러 전문직 사용은 줄어들고 있다. 그밖에도 특별한 종교적 역할을 하는 지도자로 다얀, 모헬, 쇼체트, 소페르, 예쉬바가 있다.

    다얀(Dayan)은 특별한 법률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 랍비 법정(beth din)에 임명된 랍비이다. 랍비 법정은 결혼, 이혼, 개종, 유대 공동체 금융 분쟁을 다룬다. 모헬(Mohel)은 할례(Brit milah) 관련 율법 전문가로, 선임 모헬로부터 훈련을 받은 사람이다. 쇼헤트(Shochet: 도살자)는 코쉐르 음식을 위하여 카쉬루트 율법에 따른 도살 전문가이다. 다른 쇼헤트로부터 훈련을 받는다. 소페르(Sofer)는 히브리어 철자법 전문가로, 엄격한 성서 기록 율법 훈련을 받은 사람이다. 두루마리 토라, 테필린, 미주조트(Mezuzot: 문설주에 걸어 놓는 두루마리 토라), 기틴(Gittin: 이혼 청구서)은 소페르가 써야한다. 예쉬바에는 로쉬 예쉬바와 마쉬기아 예쉬바가 있다. 로쉬 예쉬바(Rosh yeshiva)는 탈무드나 할라카 등 랍비 문헌을 공부하는 전통 유대교 교육기관 예쉬바의 책임자로서 토라 학자이다. 마쉬기아(Mashgiach)는 예쉬바에서 학생의 출석을 확인하고 지도한다. 학생의 정신적, 정서적 행복을 책임지며, 유대 윤리를 강의한다.

 유대교 진행 과정

    기원 후 1세기경 바리새, 사두개, 질롯(Zealots: 열성당. 서기 1세기 로마에 대항했던 유대아 속주 정치 결사), 에쎄네(Essenes: 제2성전 시기 신비주의 유대교파), 기독교도 등 소규모 유대 교파가 있었다. 서기 70년 제2성전이 파괴된 후 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기독교도만이 살아남았으나, 유대교와 연대가 깨어져 기독교는 독립적인 종교가 되었다. 살아남은 바리새(Pharisees: 제2성전 시대 레반트 지역 유대교의 사회적 운동 및 사상학파) 신앙은, 랍비 유대교(오늘날 유대교)의 근본적, 전례적, 의례적 토대가 되었다. 사두개(Sadducees)는 선지자들과 케투빔을 부정하고 오직 토라만을 하느님 권능의 원천으로 본다. 사마리아 신앙도 사두개와 비슷하여,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것으로 본다.

    토라만을 믿는 사두개인들처럼 8~9세기에, 랍비의 권위와 미쉬나에 기록된 구전 율법의 영성을 부정하고, 오직 타나크 만을 믿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이수니파(Isunians: 8세기 페르시아의 자칭 유대 선지자 Abu Isa 추종), 유드간 파(Yudganites: 파의 시조 Yudghan을 따르는 무리) 말리크 파(Malikites: 수니파 이슬람 4개 율법 학교 가운데 하나. 8세기 Malik ibn Anas가 세움)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구전 전승을 만들어냈는데, 랍비 전승과는 다른 이 전승들은, 결국 카라이트 유대교의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소수인 카라이트 유대교도들은 대부분 이스라엘에 살고 있다. 랍비 유대인과 카라이트 유대인들은 서로 유대인임을 인정하나, 상대방의 신앙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유대인들은 세계 여러 곳에서 독특한 인종 그릅을 형성하여 왔다. 중앙 및 동유럽의 아쉬케나지, 스페인과 포르투갈, 북아프리카의 세파르디, 이디오피아의 베타 이스라엘, 아라비아 반도 남쪽의 예멘 유대인, 인도 케랄라주의 말라바리와 코친 유대인이 있다. 이들은 기도, 관습이 다르나 이러한 차이는 정통 유대교와 문화적으로 격리되어 형성되었기 때문이지, 교리 때문이 아니다.

    반유대주의는 중세에 출현하여 포그롬, 강제 개종, 추방, 사회적 차별, 거주 제한(게토) 등의 형태를 띠어왔다. 이러한 학대는 고대에 있었던 유대인에 대한 압제의 또 다른 형식이었다. 고대에 있었던 유대인 압제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으로, 다른 종족에 대한 압제도 다를 바 없었다. 성전 시대의 등장과 함께 유대인에 대한 공격은 정치적으로부터 종교적으로 바뀌었고, 이는 특히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시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중세에는 알모하드 칼리프 왕국(Almohad Caliphate: 12세기 북아프리카 베르베르 무슬림 왕국)의 학대(강제 개종, 시나고그 파괴, 유대교 예배 불법화)가 있긴 했지만, 유대인들은 대체로 관대한 무슬림 치하에서 살았다.

    18세기에 성립된 하시드 유대교(Hasidism)는 토브(Baal Shem Tov, 1700~1760 CE)가 시조로, 베쉬트(Besht)라고도 한다. 하시드 유대교는, 유럽 유대인들이 탈무드 연구를 시작할 무렵에 있었던 유대인 차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대인들은 시선을 피해 슈티벨(Shtiebel)이라고 하는 작은 장소에서 갖는 비공식 모임을 좋아했다. 그곳은 시나고그와는 달리 예배는 물론 춤, 식사, 교제를 위한 장소였다. 당시 하시드는 영적 지도자인 차디크(Tzadiks)를 통해서 선교를 했다. 하시드는 유럽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고 많은 추종자들이 있어, 유럽 전역에 많은 하시드 교파를 형성할 수 있었다. 배우기 쉽고 의무 이행을 강제하지도 않았다. 매력적인 미래만을 이야기 했다. 결국 하시드 유대교는 동유럽 대부분 유대인들의 생활 지침이 되었다. 서기 1880년대에 동유럽 유대인들이, 하시드 유대교와 함께 미국으로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하시드는 전통 유대교를 조금 새롭게 한 것이었다. 누가 말하듯 “세대를 거치며 잃은 것을 재강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하시드와 비하시드 간 심각한 분열이 있었다. 하시드를 반대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무오류와 이적을 지도자의 덕으로 돌리는, 하시드의 지나친 지도자 숭배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하시디와 그 적대자들 간의 차이는 서서히 사라져, 현재 하시드는 하레디 유대교로 통합되어 있다.

    18세기에는 계몽주의 운동으로 지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대격변이 있었다. 그 결과 세속 세상과의 접촉을 금하는 율법도 바뀌어, 세속의 교육을 받고 세속을 경험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특히 중유럽과 서유럽에서 하스칼라 운동(Haskalah: 유대교 계몽주의 운동)이 있었다. 세속 세계와의 통합을 강조하고, 이성을 통한 지식을 추구하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결과 정치적 해방에 따라, 많은 유대인들이 율법(Halakha) 준수를 계속해야 할 이유를 몰랐고, 기독교 유럽에 동화되어 갔다. 오늘날 유대교 종교 운동은 이러한 추세 속에 추진되고 있다. 중유럽에 이어 영국과 미국에서도 개혁(또는 자유) 유대교가 눈을 뜨면서 율법적인 의무를 완화하고, 청교도적인 기도 예법 모방과 유대교 전승의 윤리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현대 정통 유대교 지도자들은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도처럼 시민으로서의 생활과 할라카 준수를 요구한다. 

유대교와 기독교

    제2성전 시대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였으나, 1세기에 갈라졌다. 두 종교의 차이는 예수가 메시아이냐의 여부로, 이는 타협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견이 아니었다. 두 종교의 중요한 차이는 메시아의 성격, 죄와 보속의 성격,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 계명의 중요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하느님 자체의 성격에 관한 이견이었다. 이러한 이견으로 유대교는 기독교를, 유일신 종교가 아닌 쉬투프(Shituf: 이중 계약 신학. 유일신 신앙도 다신교 신앙도 아닌 신학. 기독교 삼위일체에 대한 유대교 비판)로 보았다. 반면 기독교는 유대교를 기독교의 등장으로 쓸모가 없어진 것으로, 유대인들은 유대교가 망쳐놓은 사람들로 보았다. 그러나 중세 이래 로마 교황청은 친유대적이었다. 친유대인 헌장(Constitutio pro Judæis)은, 유대인들이 가톨릭 세례를 받을 의지가 없거나 거부할 경우 이를 강제하지 않는다는 교황의 칙령이었다. 헌장은 “...정부 당국의 재판 없이 어느 크리스찬도 유대인에 상처를 입히거나, 살해, 재산을 빼앗을 수 없고 그들이 살아온 곳에서 향유해온 좋은 관습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유대인이 해방되기 이전, 기독교 국가의 유대인들은 모욕적인 법적 제재를 받았다. 유대인들은 모자나 노란 배지 등을 착용하여 유대인임을 표시해야 했고, 특정 도시나 마을 출입이 제한되었으며, 특정 상업도 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중세 스웨덴에서 유대인은 의류를 팔 수 없었다. 유대인 차별 법에 의거 유대인에게는 특별한 세금이 부과되었고, 공공 생활에서도 제외되었다. 종교 의식에 참가도 제한되고 언어 검열도 받았다. 유대인을 추방한 나라도 있어 1290년 영국에서(1655년에 재입국이 허가 되었다), 1492년에는 스페인에서 유대인 추방이 있었다(1868년에 재입국 허가). 서기 1654년, 네델란드 식민지 뉴 암스텔담(현재의 뉴욕)에 유대인이 처음 도착하였다. 그러나 관직 취업이나 상점 개업, 시나고그 출입을 금지 당했다. 서기 1664년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를 점령하였으나, 유대인의 권리 제한은 변함이 없었다.

    서기 1671년, 아서 레비(Asser Levy, ?~1680)가 뉴 암스텔담 최초의 유대인 배심원이 되었다. 서기 1791년 프랑스 혁명 정부가 처음으로 유대인 차별 법을 폐지하였고, 이어 1848년 프러시아도 같은 조치를 취하였다. 서기 1848년 영국에서 있었던 유대인 자유화 조치는 골드스미드(Isaac Lyon Goldsmid, 1778~1859. 영국 유대인 해방 운동 지도자)가 30년 투쟁 끝에 얻어낸 성과였다. 그 결과 의회에서 유대인 구제법(Jews Relief Act 1858) 통과가 가능할 수 있었다. 서기 1871년 독일제국이 유대인 차별 법을 폐지하였으나, 1935년 뉘른베르크 법에서 되살아났다.

    기독교 국가에서 유대인의 삶은 피를 부르는 분쟁, 추방, 강제 개종, 대량 학살로 특징지을 수 있다. 유럽의 반유대인 정서에는 종교적 편견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독교는 그 초기 시대부터 반유대인 감정이 있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러한 감정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기독교의 반유대인 폭력은 홀로코스트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기독교의 이 같은 폭력은 지난 2천년 동안 유대인을 경멸하는 예술이나 대중 강연을 통하여, 아울러 유대인을 경멸하고 낙인을 찍는 법률을 통해 이행되어 왔던 것이다.

    나치는 기독교 교회를 박해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개신교 참회 교회(Confessing Church: 나치 하 독일 개신교 운동), 가톨릭 성당, 퀘이커교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나치의 표적이었던 유대인을 돕고 구하기도 했다.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가톨릭의 자세는, 2차대전 이후 대체로 긍정적으로 변하였다. 교황 바오로II세와 바티칸은 “변함없이 계속적으로 유대인을 지지”하며, 하느님과 유대인 간의 계약을 재확인 하였다. 지난 2015년 12월 바티칸은 1만 자에 달하는 선언문에서, 가톨릭은 유대인과 함께 반유대를 저지하는 투쟁에 앞장설 것임을 발표했다.

유대교와 이슬람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그 뿌리가 족장 아브라함이라는 점에서 같아, 따라서 모두 아브라함 종교로 불린다. 유대교와 무슬림 전승에 따르면, 유대인과 아랍인은 각각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의 후손이다. 두 종교 모두 유일신을 믿는 일신교이고 유사한 점이 많지만, 유대교는 예수나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생각지를 않는다는 사실에서 차이가 난다. 이슬람이 발생하여 아라비아 반도로 퍼져나간 7세기 이래 이 두 종교는 서로 영향을 끼쳤다. 서기 712년부터 1066년까지 우마이야 왕조(Umayyad Caliphate) 하의 스페인 유대 문화는 황금기였다. 

    이슬람 국가에서 이슬람을 믿지 않으나, 법적 보호를 받았던 사람들을 딤미스(Dhimmis)라고 하였다. 유대인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딤미스는 자신들의 종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슬림에게는 부과되지 않은 일정한 제약이 있었다. 예를 들어 성인의 비무슬림에게는 인두세(Jizya)가 부과되었다. 무기 소지도 불허되었고, 무슬림이 관련된 재판에서 증인이 될 수도 없었다. 딤미스 관련 많은 법률은 유대인을 상징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딤미스는 특별한 옷을 입어야 했다. 이러한 법들은 쿠란이나 하디스(Hadiths: 이슬람 예언자 무하마드의 언행집)에 없는, 중세 초 바그다드에서 강행된 말도 안 되는 법이었다. 무슬림 국가의 유대인들은 학대로부터도 자유롭지가 않았다. 예를 들어 12세기 페르시아에서는 많은 유대인들은 죽음이나 추방, 강제 개종을 당하였다.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우마이야 알모하드 왕조 하에서, 17세기 예멘에서도 그랬다. 15세기에 모로코에서는 거주 지역의 제한을 받아, 유대인은 담으로 둘러싸인 구역(Mellahs)에서 살아야 했고, 이 같은 상황은 19세기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20세기 중반에는 모든 아랍 국가들로부터 유대인들이 쫓겨난 일도 있었다. 오늘날 반유대주의는 헤즈볼라(Hezbollah: 레바논 시아파 이슬람 정치 정당 겸 민병대)나 하마스의 선전 선동, 이란 혁명 공화국 여러 기관의 발표문, 터키 이슬람 정당(Refah Partisi)의 신문이나 발간물에서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유대교 통합 운동

    유대교적인 요소를 갖춘 종교 운동이 있다. 그들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1960년대에 일어난 메시아 유대교(Messianic Judaism: 20세기 초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의 히브리 기독교 운동)교파이다. 이 교파는 유대교의 메시아적인 전승과 기독교 교리를 통합하고 있다. 이 교파는 예수를 유대인의 메시아로 삼위일체의 한분이며, 구원은 오직 구세주인 그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메시아 유대교를, 유대교의 한 교파로 보는 메시아 유대교 신도도 있다. 그러나 모든 유대교 교단은 메시아 유대교를 기독교 교파로 본다. 바울 기독교의 교리와 같은 교리를 가르친다는 이유에서이다. 

    블랙 히브리 이스라엘(Black Hebrew Israelite)운동도 있다. 이 교파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고대 이스라엘의 후손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이 교파는 블랙 유대교(Black Judaism)와는 다르다. 블랙 유대교는 아프리카, 미국, 유럽, 이스라엘 등지의 흑인 공동체 유대교이다. 이 흑인 유대교 운동은, 유대 역사상 최초의 흑인으로 생각되는 시포라(Zipporah. 모세의 아내. 출애굽 2:21)로 인해 유대인은 흑인일 수도 있다는,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생각에 토대하고 있다.

    또 다른 통합 교파로는 신 셈족 민속 종교(Semitic Neopaganism: 미국 유대인 중심의 고대 셈족 종교 부흥 운동 그릅)가 있다. 이 교단은 조직이 느슨하나 유대 불교, 아시아적인 신앙, 이슬람 수니파 또는 시아파 종교 관행, 미국 원주민 신앙 등 이교 신앙 또는 위칸(Wiccan: 현대의 민속 종교) 신앙을 포괄한다. 그밖에도 카발라 센터(Kabblah Center: 미국 L.A 소재 유대 신비주의 온라인 카발라 교육기관)는 신세대 종교운동 기관으로, 유대교 신비주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유대교 비판

    유대교에 대한 비판은 곧 유대교 교리, 말씀, 율법, 관행에 대한 비판이다. 이 비판은 유대교와 기독교 간 신앙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이 신앙 논쟁은 중세 시기 많은 비판을 받은 중요한 논쟁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역시 신앙 논쟁은 정통 유대교, 보수 유대교, 개혁 유대교 교파 간의 불화가 있음을 뜻한다.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17세기 네델란드 계몽주의 철학자. 세파르디 유대인)와 카플란(Mordecai Kaplan, 1881~1983.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랍비)은, 유대교의 신이 인격신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했다. 그들은 신은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자연의 힘과 같은 것으로, 우주 그 자체라고 했다. 따라서 모세나 아브라함 같은 사람들을 통하여 유대 민족과 계약을 맺은 유대교의 신은, 인격신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한 것이다.

    대부분의 유대교 교파는 유대인을 선택 받은 백성으로 생각한다.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인간사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역할을 한다는 뜻에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혁 유대교는 하느님의 왕국, 전 인류적인 형제애, 정의, 진리, 세계 평화의 구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과 연대할 책임이 유대인에게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인종적 우월감이라는 타종교로부터의 비판이 있다. “선민의식”은 시대착오적이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도 있다. 그 결과 카플란의 재건주의 유대교(Reconstructionist Judaism)가 등장하여, 유대인의 인종 중심적 생각과 그 선민의식을 거부하였다.

    비판은 유대교 내부에서도 있다. 정통 유대교는 보수 유대교가 할라카(Halakah: 유대 율법서)를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잡혼, 부계혈통, 동성애자의 성직 수임 등도 보수 유대교는 반대, 개혁 유대교는 지지라는 대립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보수 유대교는 게이 랍비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유대교 개혁운동은, 전통 유대교(Traditional Judaism: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유대교)나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이미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정통 유대교(Orthodox Judaism)와 개혁 유대교 간에 다툼이 있었다. 마소르티 유대교(Masorti Judaism: 유대율법과 전승의 권위는 하느님의 계시가 아닌 백성들과 대를 이어 계승된 공동체의 승인으로부터 온다는 유대교파)의 저명한 랍비 제이콥(Louis Jacobs, 1920~2006. 런던 시나고그 랍비)에 따르면, 개혁 유대교는 유대교로부터 유대인을 이탈 시키는 이단이라고 했다. 반면에 개혁 유대교는 정통 유대교가 과거에는 무지로 인해 몰랐던 위험을 지금은 알면서도 못 보기 때문에, 유대인의 생존에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고 했다. 아인혼(David Einhorn, 1809~1879. 미국 개혁 유대교 지도자)은 개혁 유대교를 유대교의 “해방”이라고 칭송하고 “지금 유대교에는 그 존립에 영향을 미치는 분열이 있다. 이 분열은 아무리 눈부신 방법으로라도 고칠 수가 없다. 이처럼 건강한 뼈와 골수를 서서히 망가뜨리는 악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유대교의 자유화를 달성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유대교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예방할 수가 있다” 라고 했다.

    토라의 율법이 엄격한 구속력이 없다는 이유로 전통 유대교를 비판하기도 한다. 랍비 지도자들은 너무 권위적이고, 너무나 많은 미신이 있다는 것이다. 전통 유대교는 타 공동체와 고립되어 있고, 고립된 생활을 너무 강조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 코스타(Uriel Costa, 1585~1604 CE.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포르투갈 철학자)는, 영혼과 진정성을 결여하고 있는 탈무드와 랍비의 권위를 비판했다.

    기독교로부터의 비판도 있다. 예수가 메시아인 줄 깨닫지 못하고, 이방인을 차별하고 자신들의 지위를 즐긴 유대인을 바울은 꾸짖었다(로마서 3:27). 바울의 유대교 비판 이유 가운데 하나는, 유대교가 신앙이 아닌 율법에 토대한 종교라는 것이다(로마서 7:12). 유대교는 죄를 자기정당화 하는 근본적인 결점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로마서 11: 25~26). 이 문제는 유대교에 대한 여러 가지 시각으로 인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바울의 유대교 비판이 옳다는 학자들도 있고, 랍비 유대교가 아닌 바울이 잘 알던 헬레니즘화 된 유대교에 대한 비판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또 바울이 누구에게 한 말인지도 분명치가 않다. 바울은 자신을 이방인에 대한 사제로 생각했고, 따라서 로마서의 내용이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인들에게 한 말인지, 아니면 이방인에 대해서인지 또는 둘 모두에게인지도 확실하지가 않다.

     던(James Dunn, 1939~2020, 영국 신약학자)은 바울이, 하느님 백성을 결정짓는 기준으로 율법을 본 유대인들을 공격한 것이라고 했다. 즉, 하느님 백성은 인종, 윤리, 지역이 아닌 그리스도 신앙에 토대하여 보다 개방적어야 할 것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의 유대교 비판은, 과거 자신이 속했던 유대교의 외국인 혐오를 비판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스미가(George Smiga: 오하이오주 위클리프 신학대학원 교수. 성서학)도 비슷한 주장을 하여, 신약에서 발견되는 유대교에 대한 비판은, 비판이라기보다 기독교로 개종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했다. 예수의 죽음은 유대교와 유대인의 책임임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바울(데살로니카 전서 2:15)이다. 1965년 로마 교황청은 "우리 시대(Nostra aetate)“라는 제목의 선언문에서, 오랜 세월에 걸친 반유대주의에 로마 교회가 연루되었음을 공식적으로 부인하였다. 이는 예수의 죽음에 유대인이 책임이 있다는 통념을 부인한 선언이었다.

    유대인에 대해 적대적인 쿠란(Qur'an)의 비판은, 일차적으로 아브라함 종교의 개념에 관해서이다. 쿠란이 말하는 무슬림은 유대인과 아랍인 육신의 아버지인 아브라함과 토라의 계시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유대교는 진정한 아브라함 종교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쿠란은, 암소를 숭배한 사건(모세가 시나이 산정에 가 있는 동안 아론이 황금 송아지를 만든 일)을 예로 들고 있다. 즉 유대인들은 하느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그들의 고리대금업은 속된 탐욕과 하느님에게 불복종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하느님이 계시하지 않은 일도 하느님 탓으로 돌렸다고 했다. 쿠란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우상 우자이르(Uzair: 에즈라와 동일시된 인물)를 “하느님의 아들”로 떠받들었다고 했다. 쿠란이 그 인물됨을 말하는 에즈라(Ezra, 480~440 BC. 구약의 에즈라서에 등장하는 율법학자)는, 후일 안다루시아 무슬림 학자 이븐 하즘(Ibn Hazm, 994~1064)의 저작물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이븐 하즘은 에즈라를 성경의 내용을 그릇되게 한 거짓말쟁이이며 이교도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부세(Heribert H. Busse, 1926~. 독일 Kiel 대 교수. 신학)는, 하즘이 기독교와 다름없는 이단으로 유대교를 비난하고 싶었을 것이며, 따라서 유대교에서 칭송하는 에즈라의 명성을 폄하했던 것으로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다고 했다.

    유대교에 대한 철학적 비판은 일반적인 종교적 비판이거나 또는 유대교의 독특한 특성에 관한 비판일 것이다. 칸트(Immanuel Kant)는 후자의 입장이었다. 그는 유대교가 도덕률에 대한 형식적인 복종을 요구하며 세속 중심으로, 불멸에 관한 관심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동물의 도살과 할례 등 유대교 관습에 대한 비판도 있다. 비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의 도살 방법(Kosher)이 잔인하고 비위생적이라며 비난을 해왔다. 서기 1893년 영국 애버딘(Aberdeen)에서 있었던 동물 보호 캠페인은, 코셰르 도살의 잔혹성을 유대교와 연결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율법에 따라 죽인 동물의 고기를 먹으면 몸을 망친다는 반유대 모략도 있었다. 이는 육류산업으로부터 유대인을 몰아내기 위한 경제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20년대 폴란드에서는 코셰르 도살이 유대교 성서와는 무관하다며 비난했다. 그러나 유대교 당국은 신명기(12:21)에 그 근거가 있으며, 이 율법은 아직도 구속력이 있다고 했다. 최근 코셰르 도살방법은 동물 보호단체들로부터 비난을 듣고 있다. 마취나 기절을 시키지 않고 동물의 목을 자르는 일은 불필요한 고통을 준다는 것이다. 2008년 독일연방수의사협회, 2011년 네델란드 동물을 위한 당(Party for Animals)은 코셰르 도살 폐지안을 의회에 상정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유대교 단체들은, 이 같은 폐지안이 그들 종교에 대한 공격이라며 반발했다.

   옛날부터 할례는“고통스럽고 잔인하며” 본인 승낙 없이 행하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생식기 절단과 다름없는 것으로 비난을 받아왔다. 헬레니즘 문화에서 할례는 금기시되어 육체적 불구로 여겼고, 할례를 한 남자는 올림픽 출전이 금지되기도 했다. 헬레니즘 시대 유대인 중에는 에피스파즘(Epispasm: 할례 받은 성기를 다시 할례 받지 않은 모양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로마제국 시대 할례는, 야만적이고 구역질나는 관습으로 여겼다. 탈무드에 따르면 기원전 95년, 집정관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는 할례를 하고 유대교로 개종을 한 죄로, 원로원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Caesar Traianus Hadrianus, 76~138 CE)는 할례를 금지하였다. 바울은 할례를 신체 절단으로 보아,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고 했다(빌립보서 3:2).

시나고그

    시나고그(Synagogue)는 예배와 교육, 사회활동과 자선활동, 사교모임 등이 이루어지는 유대인 공동체 종교 센터이다. 시나고그 말고도 여러 어휘가 있다. 예컨대 히브리어 베이트 크네세트(Beit Knesset)는 “기도를 드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정통 유대교와 하시드 유대교에서는 이디시어로 슐(Shul)이라고도 한다. 이는 독일어 “Schule"에 어원을 둔 말이다.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베이트 크세트의 그리스어 번역인 “시나고그”를 “모임의 장소”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유대인들은 “성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그들의 모임 장소가 다윗의 성전”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은 “성전”을 가볍게 생각한다는 이유로, 이 단어 사용을 용납하지 않는다. “Schule"도 현대의 유대인들에게는 낯선 말이다. 따라서 ”시나고그“란 단어는 그 뜻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어, 최선의 어휘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시나고그는 기도를 드리는 집(Beit Tefilah)이다. 그곳에서 공동체를 위해 함께 기도를 드린다. 유대인들은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매일 기도를 드릴 의무가 있다. 그러나 10명의 남자가 모여야 드릴 수 있는 기도(Minyan)도 있다. 혼자보다는 그릅을 지어 기도를 드려야 더 보람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한 시나고그의 신성함은, 예루살렘 성전 다음이다. 실제로도 랍비 문헌에서는 시나고그를 “작은 성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시나고그는 또한 공부하는 집(Beit Midrash)이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유대인 교육은 바르 미츠바(Bar Mitzvah: 성인이 되는 나이)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유대교 유대인들에게 성서 공부는 일생의 과업이다. 따라서 시나고그는 공동체 주민들이 성서를 공부할 수 있는, 많은 장서를 갖춘 도서관과 같다. 어린이들이 기초적인 종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시나고그에는 종교적, 비종교적 활동을 위한 사교 장소가 있고, 이곳은 공동체의 중요 문제 토론을 위한 회의실로 사용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시나고그는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운영한다. 위원회는 시나고그와 그 활동을 관리하며, 공동체를 위한 랍비를 고용한다. 시나고그는 랍비가 없이도 운영 가능하다. 평범한 사람들도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종교적인 행사를 이끌 수 있다. 일시적으로 랍비가 없는 시나고그는 흔한 일이다. 그러나 랍비는 공동체에 필요한 매우 중요한 인물로, 공동체를 이끌고 교육을 담당한다. 시나고그는 대부분의 경우, 공동체마다 독립된 기구이다. 유대교 활동에는 여러 중앙 기구가 있고, 시나고그는 이들과 관련을 맺지만 이러한 기구들은 시나고그에 대해 어떤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다.

    교회와는 달리 시나고그는 예배 도중 헌금 접시를 돌리지 않는다. 유대교도는 휴일이나 안식일에 현금을 보유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회원들의 자발적인 헌금인 연회비와, 하쉬나(Rosh Hashanah: 유대력 신년 초 10일 간)와 욤 키푸르(Yom Kippur: 유대력 정월 10일)때, 기도 좌석을 팔아 재정을 조달한다. 이 때 시나고그에는 연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시나고그 회원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만일 정기적으로 기도를 드리고 싶다면, 합당한 자기 몫의 비용을 내야 한다. 그러나 시나고그 출입 시 회원증을 검사하지는 않는다. 

    시나고그에는 성소(아쉬케나지는 “아론 코데슈라” 하고 세파르디는 “헤칼”이라고 함)가 있다. 이 성소(아쉬케나지는 “아론 코데슈라” 하고 세파르디는 “헤칼”이라고 함)에는 "궤"가 있다. “궤(Ark)”라는 이름은 “성궤”를 뜻하는 히브리어 아론 코데쉬(Aron Kodesh)의 앞 철자를 따 만든 어휘이다. 이는 노아의 성궤(Teyvat)와는 무관한 말이다. 성소 안에 안치되어 있는 이 궤에는 토라 두루마리가 보관되어 있다. 성소에는 문이 있고, 휘장(Parokhet)이 드리워져 있다. 이 휘장은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 휘장을 모방한 것으로, 그 이름도 같다. 기도를 드릴 때 이 문들과 휘장을 열고 닫을 수가 있다. 이 일은 신도 중 누군가가 하며,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로 여긴다. 성소 전면 위 가까운 곳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Ner Tamid)이 있다. 이 등불은 계약 궤 앞, 휘장 밖의 등불을 꺼트리지 말라는 계명(출애급 27:20~21)을 상징한다.

-시나고그 내부-

    시나고그마다 이 등불 이외에, 예루살렘 성전의 촛대(Menorah)를 상징하는 촛대가 있다. 7개의 가지로 이루어진 예루살렘 성전의 촛대와는 달리, 이들 촛대는 6개 또는 8개의 가지가 있다. 예루살렘 성전 제례 물품을 똑 같이 모방한다는 건 적절치 않기 때문이다. 토라를 펴놓고 읽을 수 있는 비마(Bimah)와 아무드(Amud: 연단)를 비치한 시나고그도 있다. 정통 유대교 시나고그에서 여성의 좌석은 2층 발코니거나 또는 남성 좌석과 벽이나 커튼으로 분리해놓은, 좌석 뒤 또는 벽 쪽이다. 여성이 있는 곳에서 남성은 기도를 드릴 수 없다.

-Menorah-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예의를 지키는 한, 언제라도 시나고그 예배 참여를 환영 받는다. 그러나 타 종교 전도를 목적으로 참여한다면, 옳지 못하다. 이는 남의 집을 처음 방문하여, 그 집 살림살이를 비판하는 것과 같다. 진심으로 시나고그 예배에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또는 우정의 마음으로 참여한다면, 언제라도 환영을 받는다. 시나고그를 방문할 때 옷차림은, 교회나 모스크를 방문할 때와 마찬가지로 깨끗하고 검소한 평상복이면 족하다. 남성 방문객이 시나고그를 방문할 경우, 만일 그 시나고그 유대 남성들이 모자(Kippah)를 쓴다면, 모자를 써야한다. 모자가 없을 경우에는, 시나고그 입구에서 손에 넣을 수 있다. 시나고그에 따라서는 기혼 여성의 경우, 레이스로 머리를 가리기도 한다. 그러나 유대교도가 아닐 경우는 모자를 쓰거나 레이스로 가릴 필요 없다. 정통 유대교 시나고그의 경우, 남성은 신도 석 오른쪽에 앉아야 한다. 남녀 좌석이 구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배 중 유대교도가 아닌 사람은 히브리어 기도서에 함께 인쇄되어 있는 영어 기도문으로 할 수 있다. 유대교도가 아닌 사람은 편한대로 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 유대교 전례를 미리 공부하여 이해를 높일 수도 있다.

    “궤”가 열리고 토라가 비마로 옮겨질 때, 유대교도가 아닌 사람은 하느님과 토라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밖에는 신도들이 서 있을 때, 유대교도가 아닌 사람은 서거나 앉거나 관계없다.


V. 토라

    토라(Torah)는 히브리 성서(유대교 성서 타나크) 첫 5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토라는 모세 5경(Pentateuch)과 같은 말이다. 이는 또 문헌 토라로도 알려지고 있다. 전례용을 뜻하는 경우에는 두루마리 토라(Sefer Torah)를 말한다. 책으로 편집하였을 경우에는 쿠마쉬(Chumash)라고 하며, 랍비 평론(Perushim)을 함께 실어 인쇄한다. 이는 이미 제IV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토라는 또한 히브리 성서 전체 또는 타나크(Tanakh)와 동의어이기도 하다. 이 경우 첫 5경은 물론 히브리 성서 24권 전체를 말한다. 토라는 성서나 랍비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유대인의 교육과 문화, 여러 종교적 관행을 뜻하기도 한다. 랍비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토라를 구전 토라라고 한다. 유대교의 영적, 종교적 전통의 핵심인 토라는 70개, 아니 무한한 해석이 가능한 일련의 가르침을 뜻하는 말로, 토라를 명확히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토라의 아랍어 명칭은 타우라(Tawrah 또는 Tawrat)이며, 무슬림들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선지자들에게 주신 이슬람 성서로 믿고 있다.

    토라는 또 모세 5경과 구전 토라를 말하기도 한다. 구전 토라는 세대를 거쳐 구전으로 전해진 랍비의 해설과 부연敷衍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탈무드와 미드라쉬(Midrash: 유대교 성서 외경)에 구체화되어 있다. 랍비들은 두루마리 토라나 구전 토라 속의 모든 가르침은, 하느님이 선지자 모세를 통해 내리신 것으로, 모세가 모두 기록을 하여 현재의 토라가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미드라쉬에 따르면 토라는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천지창조를 위한 청사진이었다는 것이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바빌로니아 유수 때 이미 존재했던 자료와 구전에 토대하여 두루마리 토라를 썼고, 바빌로니아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후 최종 본이 완성되었다고 믿고 있다. 전통적으로 토라의 말씀은, 율법학자가 히브리어로 두루마리에 썼다. 그런 다음 3일마다 한 번, 회중이 모인 가운데 낭독을 했다. 이 같은 토라 낭독은, 유대 공동체의 주요 생활 중 하나였다.

    히브리어로 토라라는 말은 가르침이나 교훈, 또는 지도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율법”이라는 뜻은 틀린 표현이다. 이 표현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이 번역한 70인 역(Septuagint: 그리스어 구약 성경)에 인용된 그리스 어 “nomos"를 율법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모세5경을 율법서로 부르는 관행은 이 그리스어 단어와 라틴어 성경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토라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랍비 유대교의 두루마리 율법과 구전 율법을 말한다. 따라서 토라는 미쉬나(Mishna: 구전 토라의 최초 문서 본), 탈무드, 미드라쉬를 포함하여 정통 유대교의 모든 가르침을 포괄한다.

    이스라엘에 관한 토라 이야기는 하느님의 천지 창조와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 이집트로 간 이스라엘 민족 후손, 시나이 산상에서 토라의 내리심 등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모세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이 이야기 과정에서 십계명과 같은 종교적 의무와 율법에 관한 특별한 가르침이 명시적으로, 또는 출애굽기의 과월절 준수 같은 묵시적인 가르침이 등장한다. 히브리어 토라 5경은 책마다 모두冒頭의 말로 그 내용을 약술하고 있다. 5경의 영어 명칭은 그리스어 70인 역에 토대하여 지은 것이다.

    토라 연구(넓은 의미에서 시문, 대화, 율법, 타나크, 탈무드에 대한 연구)는 유대교에서 매우 중요하고, 성스러운 일이다. 미쉬나와 탈무드 연구자에게 토라 연구란, 하느님의 계시를 공부하는 것이며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사람은 이 세상에 주어진 것만을 즐겨하는지라 정말로 즐거운 일들은 앞으로 올 세상에 있느니 부모를 공경하고, 타인에게 친절하고 사람들 간 평화를 지키는 일이라, 토라를 공부하는 것은 이 모든 일을 이루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토라 공부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수단이다” 라고 유대교는 말하고 있다. 

    요세(Eliezer ben Jose: 2세기 유대아 랍비)는 32개 원칙에 토대하여 토라의 율법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스마엘(R. Ishmael: 1세기 갈릴리 지방의 랍비)의 13개 원칙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원칙은 초기 유대교의 논리학, 해석학, 법률학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원칙은 유대교 기도서에 실려 있어, 유대교도들이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다. 이스마엘 13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어떤 조건 하에서 적용되는 율법은, 그 조건이 보다 명확한 같은 조건의 다른 사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2. 어떤 상황하에 적용되는 율법은 그 내용이 같은 다른 상황에도 적용된다.

 3. 그 적용 목적이 명백한 율법은 그 목적이 같은 다른 상황에도 적용된다.

 4. 하나의 총론적인 율법 다음의 세칙은, 그 총론적인 율법 아래에 놓인다.

 5. 특정 사건에서 시작하여 일반화된 율법은, 그 율법이 특정하지 않은 사건에도 적용할 것이나, 논리적으로는 그 사건과 똑 같이 일반화된 사건에 적용하여야 한다.

 6. 그 적용이 일반화되어 특정 사건에 적용되는 율법은, 그 일반화를 다시 밝히고 그 특정 사건에 적용할 수 있다.

 7. 만일 특정 사건의 기술 또는 일반화에 관한 진술이 순전히 언어의 명확성을 얻기 위해서임이 분명한 경우는, 특정 사건(제5항) 전후의 일반화에 관한 율법은 적용하지 아니한다.

 8. 이미 일반화된 율법의 대상이 된 사건이지만 특별한 율법의 적용을 받으면, 일반화된 율법의 대상이 되는 모든 다른 사건에도 동일하게 특별한 율법을 적용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9. 일반적인 범주에 속하는 범죄에 대한 처벌은, 일반적인 율법이 명시하고는 있으나 처벌에 관한 언급이 없는 사건에는 자동적으로 적용하지 않는다.

 10. 특별한 처벌이 따르는 일반적인 금지는, 일반화에 포함되는 특정 사례가 뒤따를 수 있어 처벌의 경중으로 그 처벌을 수정할 수 있다.

 11. 논리적으로는 일반적인 율법의 대상이나 특별히 다루는 사건은, 그렇게 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율법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12. 성서 구절의 모호성은 그 구절 또는 다음에 오는 구절들 내용으로 명확히 할 수 있다.

 13. 성서 구절 간 모순은, 다른 구절을 통하여 제거할 수 있다.

    창세기(Bereshit)는 토라의 첫 번째 책이다. 창세기는 천지 창조(1~11장까지) 이야기와 이스라엘 조상(12~50장까지)에 관한 이야기로 나뉜다. 천지창조 이야기는 신성, 그리고 인간과 조물주와의 관계로부터 시작한다. 즉 하느님은 인간에게 적합하고 좋은 세상을 창조하였으나, 인간은 죄를 지어 세상을 부패시켰음으로 하느님은 이를 멸하기로 결정하고는, 오직 의로운 노아만을 구하여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재정립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조상에 관한 이야기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선사시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노아의 자손인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하느님이 주신 가나안 땅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도 마찬가지였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한 후, 아들 요셉을 비롯하여 후손들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니, 그 가족은 모두 70명에 달했고 하느님은 그들이 창대할 것임을 약속하셨다. 창세기는 이집트에서 요셉의 죽음으로 끝이 나며, 모세의 출현과 출애굽이 준비된다. 창세기 이야기는 하느님과의 언약을 강조하며, 그 언약의 범위는 전 인류(노아와의 언약)로부터 하나의 민족(아브라함과 그 후손)으로 계속 좁혀지고 있다.

    출애굽(Shemot)은 창세기 다음에 오는 토라 두 번째 책이다. 출애굽기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집트 노예 생활을 벗어나,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 받은 이야기이다. 야훼 하느님은 역병을 일으켜, 이집트에 무시무시한 타격을 가하였다. 이스라엘 백성 지도자인 선지자 모세를 따라 광야를 거쳐 시나이 산에 이른 그들은 믿음의 대가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실 것임을 하느님으로부터 약속 받는다. 하느님과의 계약에 따라 그들은 율법을 받고, 초막을 지을 것을 지시 받는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하느님은 그 초막에 거하시며, 약속한 땅을 취하기 위한 성전聖戰을 지도하고 평화를 안겨 주신다. 메이어스(Carol Meyers, 1942~. 듀크 대 교수. 성서학)는 고난과 이집트로부터의 탈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느님과의 계약, 공동체 생활의 정립과 그 존속을 위한 지침 등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출애굽기를 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본다.

    레위기(Wayiqra)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어 놓은 초막(Tabernacle)의 사용 방법에 관한 지침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 청결에 관한 율법으로, 이에는 식용이 가능한 동물의 도살에 관한 율법(11~15장까지), 속죄의 날에 지켜야 할 율법(16장), 그리고 여러 가지 지켜야할 도덕과 전례에 관한 율법(17~26장까지) 등이 있다. 17장은 야훼께 드리는 희생제는 반드시 야훼의 초막 앞에서 행할 것을 명하고 있으나, 후일 성전이 희생물을 바치는 유일한 장소가 되면서 이 율법도 변하였다. 레위기 26장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와 어기는 자에 대한 상벌을 상세하게 명시하고 있다.

    민수기(Bemidbar)는 토라의 네 번째 책이다. 민수기는 길고 복잡한 이야기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기원전 5세기 초 만들어진 야휘스트(Yahwist: 토라 원전의 하나)를 선지자들이 편집한 편집본이 아닐까 한다. 민수기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두 차례의 인구조사에서 비롯되었다. 민수기 이야기는 시나이 산에서 시작되는데,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으로부터 율법과 계약 궤를 받고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성소에서 거하시게 된다. 그들의 과업은 약속의 땅을 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백성의 머릿수를 세고 진군에 나섰다. 가는 길이 힘드니, 그들은 지도자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을 한다. 이를 보신 하느님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 가운데 거의 1만5천 명을 멸하신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가나안 땅 경계에 이르러, 염탐꾼을 보내 사정을 알아보았다. 가나안 사정에 관한 염탐꾼의 보고는 놀라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땅 취하기를 거부하였다. 하느님은 그들을 꾸짖으시고,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 그 과업을 달성할 때까지 황야를 헤매다가 죽게 만드셨다. 민수기는 새로운 세대가 모압 광야에서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하면서 끝이 난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의 압제에서 벗어나, 하느님이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가는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창세기에서 언급한 주제와 출애굽 및 레위기에서 이루어진 일들이 이렇게 결론이 나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큰 나라를 이루고, 야훼와 특별한 관계를 가질 것이며, 가나안 땅을 취하리라는 하느님의 약속 그대로인 것이다. 민수기는 또한 영적 순결, 신의, 믿음의 중요성을 예시하고 있다. 하느님이 현재顯在하시고 선지자들이 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약속의 땅을 취하는 과업이 다음 세대로 넘어간 것이다.

    신명기(Devarim)는 토라의 다섯 번째 책이다. 1장부터 30장까지는 약속한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 모압 광야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세가지 설교이다. 첫 번째 설교는 그때까지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한 이야기로, 계명(모세의 율법)을 지키라는 훈계로 끝이 난다. 그 다음은 야훼와 자신이 일러준 계명을 따를 것과, 그렇게 해야 약속된 땅을 얻을 것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환기 시키는 내용이다. 세 번째는 백성들이 믿음이 없어 약속 받은 땅을 잃게 되더라도, 회개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위로의 내용이다. 끝으로 31장부터 34장까지는 모세의 노래와, 모세로부터 여호수아로 지도자가 바뀌는 이야기, 네보 산 위에서 모세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다. 가나안 정복 전 모세의 설교에서 보듯 신명기는,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아람 왕국 정복 과정에서 유다왕국으로 전해진 이스라엘 전승이, 기원전 7세기 후반 요시아(Josiah) 시대 민족주의적 개혁에 맞추어 변형된 다음, 6세기 후반 바빌론 유수로부터 해방된 후 1천년이 지나면서 현대적인 형태를 갖춘 것으로 많은 학자들은 보고 있다. 신명기 6장 4절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라는 구절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말하는 결정적 선언이다. 신명기 6장 5절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라는 구절은, 예수님도 인용하고 있다(마르코 복음 12:30).

    모세가 신명기 마지막 8개절을 제외한 모든 토라를 쓰고, 그의 죽음과 장례에 관해서는 여호수아가 기록한 것으로 탈무드는 밝히고 있다. 이츠챠키(Shlomo Yitzchaki, 1040~1105 CE, 중세 프랑스 랍비. 탈무드와 히브리 성서 해석학자)는 “신명기는 하느님이 말씀하시고 모세가 눈물로 받아썼다.” 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토라의 모세 저술을 부정한다. 토라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저술되고, 수세기에 걸쳐 편집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20세기에 들어 토라 원전에 관한 학자들의 의견 일치가 있었다. 4개로 이루어진 이 원전은 J(Jahwist: 하느님을 야훼로 호칭한 문헌들. 그 존재 여부가 논쟁이 되었으나, 많은 학자들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음), E(Elohist: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엘로힘으로 호칭한 문헌들), P(Priestly: 성직제도, 전례, 율법, 성전, 가계의 혈통, 성직자의 역할을 강조한, 토라의 원전으로 가장 널리 인정되는 문헌들), D(Deuteronomist: 신명기 전편 또는 신명기 12~26장까지) 등으로, 각각 별개의 문헌들이었으나 후일 이 문헌들을 토대로 토라를 편집하였다고 본 것이다.

    토라는 하느님 말씀에 토대하여 모세가 모두 쓴 것이라는 정통 유대교 랍비들의 주장과는 달리, 오늘날 자유주의 유대교나 보수주의 유대교는, 모세의 저술을 부정한다. 유대 설화집(Legends of the Jews: 미쉬나, 탈무드, 미드라쉬 등으로부터 취한 설화집)에 따르면, 하느님은 여러 나라와 민족에게 토라를 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들이 받기를 거절하자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이 설화집에서 토라는 모세의 집필이 아닌, 최초의 창조물 가운데 하나로 사탄에 대적하고, 천지창조 시에 인간의 창조를 하느님께 권한 조언자로 정의되고 있다.

    토라 낭독(K'riat HaTorah)은, 두루마리 토라의 구절을 사람들 앞에서 낭송하는 유대교 전례이다. 토라 낭독은 궤로부터 토라(두루마리)를 꺼내어, 관련 구절을 노래하듯 낭송한 다음 궤에 다시 담는 과정이다. 사람들 앞에서의 토라 낭독은 느헤미아서에 기록된 대로, 바빌론으로부터 해방되어 돌아온 후, 선지자 에즈라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정통 유대교도들은, 서기 70년 성전이 파괴된 후 2천년 동안 불변이라고 그들이 믿는 절차에 따라, 토라 낭송 관행을 실천하고 있다. 19세기와 20세기 개혁 유대교나 보수주의 유대교 등 새로운 유대교파에서도 전통적인 낭송 형식을 그대로 따랐다.

    주 중 특정일, 금식일, 휴일 아침, 안식일, 욤 키푸르 저녁 기도 때 모세5경 구절 낭송은, 두루마리 토라를 이용한다. 안식일(Shabbat: 토요일) 아침에는 파라샤(Parashah: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 본 타나크)를 읽는다. 따라서 일 년 내내 모세 5경을 읽는 것이다. 파라샤 구절은, 마이모니데스의 미쉬나 토라(Mishneh Torah: 마이모니데스가 지은 랍비 유대교 율법 집), 테필린 율법(Laws of Tefillin: 조그만 검은 가죽 상자에 든 토라 율법 구절), 메주자(Mezuzah: 토라의 구절을 담아, 유대인의 집 정문 오른 쪽 기둥에 부착하는 조그만 상자), 그리고 두루마리 토라 제8장에 정한 목록에서 선택한다. 마이모니데스의 토라 파라샤 구절은 알레포 성서(Aleppo Codex: 10세기 이스라엘 티베리아스에서 쓴 히브리 성서)에 토대하고 있다. 오늘날 보수주의 유대교나 개혁주의 유대교 시나고그에서는, 3년 주기로 파라샤를 낭송한다. 토라 읽기를 끝내고 다시 시작하는 심핫 토라(Simchat Torah)의 날은 연례 휴일이다.

-메주자-

    시나고그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두루마리 토라는 여러 가지 장식과 왕관(Keter)으로 꾸민 커버를 씌운다. 토라를 읽기 위해 궤로부터 꺼내어 운반하고, 독서대에 올리고, 제례가 끝나 다시 궤로 옮겨질 때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회중의 사람들은 기립을 한다. 그러나 토라를 읽을 때는 물론 착석을 한다.

    토라의 말씀은 모두 율법으로 성서 율법 또는 계명으로 불리며, 경우에 따라 모세의 율법 또는 시나이 산상 율법이라고도 한다. 토라의 뜻이 불명하나 이에 대한 설명이나 지침이 없을 경우에는, 구전 토라를 이용 그 뜻을 상세히 알아내야 한다. 테필린(Tefillin), 카쉬루트(Kashrut: 요리 율법), 안식일에 관한 율법은 추가 설명이 필요한 계명들이다.

    신명기 제6장 8절의 율법에 따라, 테필린은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야 한다. 그러나 테필린이 무엇인지 또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상세한 지침은 없다. 요리 율법과 관련하여, 새끼 염소는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출애굽 23:19). 이 율법은 그 모호성으로 인해 이해하기 힘든 점이 많고, 구전 전승이기 때문에 모음이 생략되어 있다. 예컨대 우유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으면 동물의 지방으로 뜻이 달라진다. 따라서 구전 전승이 아니면, 고기에 우유를 섞었는지 아니면 지방을 섞었는지 그 위반 사항을 알 수가 없다.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위반할 경우는 처벌이 중함으로, 즉 사형을 당할 수도 있음으로, 그러한 중대한 계명을 정확히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특별한 지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식일에 관해서는 대부분, 토라가 아닌 탈무드와 구전 율법에서 비롯된 다른 문헌들에 있다. 예를 들어 시나이에서 모세에게, 모세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으로 전해졌다는 안식일에 관한 율법은 랍비 문헌에 있다.

    당시에는 글이 불완전하여 오류와 남용이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구전 율법을 글이나 문헌으로 만드는 것이 금지되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바빌론 유수 이후 이러한 관행이 철폐되어, 구전 율법을 보존하려면 글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수많은 랍비들이 오랜 세월에 걸친 노력의 결과, 서기 200년경 랍비 하나시(Judah haNasi, 135~217 CE. 랍비)가 구전 율법인 미쉬나를 글로 기록하여 편찬하였다. 그 당시 미쉬나에 오르지 않은 구전 율법들(Baraito)은 토세프타(Tosefta: 미쉬나 시기인 2세기 후반 이후 유대 구전 율법 집)에 올렸다. 그 밖의 율법들은, 미드라쉬에 기록하였다.

    율법 위반과 관련한 많은 처벌이 있은 후, 이에 관한 많은 구전 율법들이 글로 기록되었다. 이에 따라 수백 페이지에 불과했던 미쉬나에 언급된 가르침과 강론, 전승들이 이제 수천 페이지의 게마라(Gemara: 미쉬나에 대한 랍비의 분석과 해설로 이루어진 63권의 책)로 바뀌게 되었다. 게마라는 아람어로 썼고, 바빌론에서 편찬되었다. 바로 바빌로니아 탈무드이다. 이스라엘 땅 랍비들도 율법을 수집하여 편찬하니, 이를 예루살렘 탈무드라고 한다. 바빌론에는 많은 랍비들이 살았음으로, 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 간 충돌이 있을 경우,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우선했다.

    후일 정통 유대교와 보수 유대교는 구전 토라와 두루마리 토라를 할라카(Halakha: 유대교율법 체제)와 유대 법전의 토대로 삼았다. 그러나 개혁주의 유대교와 재건주의 유대교는 강행법규를 제정하는데 악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이 같은 법체제를 반대하였다. 인도주의 유대교는 토라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학적 내용을 받아들이나, 토라의 모든 내용이 진리이며 도덕적으로 옳다고 생각지 않는다. 토라가 아닌 전 유대인의 경험이 유대인의 행동과 윤리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유대교 신비주의자들(Kabbalist)은 토라의 말씀은 하느님 말씀으로 보고 따라서 문자의 점 하나, 획 하나도 그곳에 놓이게 된 것은 하느님의 뜻으로 본다.

    두루마리 토라(Sefer Torah)는 아직도 필사筆寫를 하여, 전례에 사용한다. 고도의 자격을 갖춘 율법학자들이 땀 흘려 기록하고 있다. 모든 어휘, 모든 표시가 하느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어느 하나라도 부주의로 인하여 오류가 발생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토라는, 그 한자 한자가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히브리어 토라 텍스트를 이루는 304,805개의 단어 가운데 글자 하나, 장식 하나 또는 기호에 오류가 있으면, 이 토라는 사용할 수가 없다. 따라서 토라 기록은 특별한 기능을 필요로 하며, 그 기록과 교정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유대 율법에 따르면 두루마리 토라는 곡물만을 먹는 동물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에 깃촉 펜으로 잉크를 찍어, 히브리어로 필사한다. 히브리어 두루마리 토라는 모두 304,805 개 단어로, 그 필사본을 쓰려면 훈련된 율법학자(Sofer)가 정교한 필사를 통해, 1년 반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의 두루마리 토라는 연聯당 40행으로 이루어지며, 히브리 문자 사용에 관한 규칙은 매우 엄격하다. 두루마리 토라를 한 벌 완성하는 일은 하나의 위대한 축복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토라는, 이를 쓴 사람을 비롯하여 유대인 누구나 지켜야 할 하느님의 계명(Mitzvah)인 것이다. 두루마리 토라는 시나고그의 가장 성스러운 곳에 성궤에 넣어 보관한다. 토라는 아람어, 그리스어, 라틴어, 아랍어 번역본이 있고 기타 유대 학자들이 번역한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불어, 스페인어 본도 있다. 또 기독교 정전의 일부로서 수많은 언어 번역본이 있다. 사마리아 토라(Samaritan Torah)는 사마리아 히브리 문자로 쓴 토라로, 사마리아 5경이라고도 한다. 사마리아인들이 사용하는 성스러운 문헌으로, 사마리아교(Samaritanism: 아브라함의 유일신을 믿는 사마리아 종교)의 모든 교리를 담고 있다. 


VI. 탈무드

    탈무드(Talmud)는 랍비 유대교의 중심 문헌으로, 유대교 율법(Halakah)과 유대교 신학의 원천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 이전 모든 유대인 공동체 문화생활은 탈무드가 중심이었다. 탈무드는 유대인 사유思惟의 토대로, 유대인 일상 생활의 안내자이기도 하였다. 예루살렘 탈무드(Talmud Yerushalmi)가 있기는 하나, 탈무드라 할 때는 보통 바빌로니아 탈무드(Talmud Bavli)를 가리킨다. 전통적으로 탈무드는 히브리어 시샤 세다림(Shisha Sedarim)의 약자인 “샤”로, 또는 “미쉬나 여섯 율법”으로 불리기도 한다.

    탈무드는 미쉬나(Mishnah)와 게마라(Gemara)로 구성된다. 미쉬나는 서기 200년 무렵 편찬된 구전 토라의 최초 문서본이며, 서기 500년 무렵 만들어진 게마라는 미쉬나에 관한 랍비들의 해석과 평론을 종합해놓은 것이다. “탈무드”는 게마라만을 또는 미쉬나와 게마라를 함께 지칭하기도 한다. 탈무드는 모두 63책(논문)으로 되어 있다. 인쇄는 빌나 샤스(Vilna Shas: 리투아니아 빌니우스에서 인쇄되는,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는 탈무드 인쇄 방법)로 불리는 표준 인쇄이다. 탈무드는 수많은 랍비들(기원후부터 5세기까지)의 가르침과 그들의 의견을 비롯하여 할라카, 윤리학, 철학, 관습, 역사, 민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탈무드는 또한 모든 유대 율법의 토대로, 랍비 문헌에 광범하게 인용되고 있다. 탈무드라는 말은 “공부” 또는 “배움”을 뜻한다. 

-빌니우스-

    유대 학문은 원래 세대를 이어 구전으로 전해졌다. 랍비들은 아무런 다른 문헌의 도움이 없이, 토라(모세 5경)를 논하고 해석하였다. 서기 70년 로마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국가가 멸망하면서 상황이 바뀜에 따라 유대인의 사회적, 법적 규범에 대변혁이 있었다. 랍비들은 성전이 사라져버린 유대교와 로마의 유대아 지배라는 새로운 현실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당연히 법률 용어에 혼란이 일었고, 구전口傳 학문이라는 구식 방법은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었다. 랍비의 강론이 글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게마라”는 유대 학문의 두 중심지였던 갈릴리와 바빌로니아에서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두 본의 탈무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가운데 예루살렘 탈무드(Talmud Yerushalmi)는, 4세기에 갈릴리에서 먼저 편찬되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서기 5백년 전후 편찬되어, 후일에도 계속 보정되었다.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냥 “탈무드”라고 할 때는,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말한다. 이 두 탈무드는 아무런 영향을 서로 주고받지 않고, 각각 독립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만일 양측 편집자들이 상대방의 편집 내용을 알았다면, 이를 언급하지 않았을 리 없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탈무드는 팔레스타인 탈무드 또는 이스라엘 탈무드라고도 한다. 이는 편찬되기 전 수 세기 동안 이스라엘 땅의 유대 학자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해진, 유대교에 관한 가르침과 주석을 편찬한 것이다. 이 탈무드는 2백년 이상 티베리아스(Tiberias: 갈릴리 호수 서쪽 호반 도시), 세포리아스(Sepphoris: 갈릴리 중부 고고학적 유적지), 케사리아(Caesarea: 지중해 동부 샤론 평야 소재 고대 도시)등지의 유대 아카데미아에서의 가르침을 편찬한 것이다. 지역 특성으로 인해, 이들 아카데미아의 랍비들은 이스라엘 땅 농사 관련 율법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예루살렘 탈무드는 서기 350년 경 랍비 무나(Muna)와 랍비 요시(Yossi)가 재편집한 것으로 본다. 예루살렘 탈무드는 예루살렘에서 편찬되지 않았음으로 그 이름은 잘못 된 것으로, 따라서 보다 정확한 이름 “에레츠 이스라엘(Eretz Yisrael: 이스라엘 땅) 탈무드”로 불리어 왔다.

-케사리아-

    예루살렘 탈무드 마지막 편집은 4세기 말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의 형태를 갖추도록 한 학자들이 누구인지는 특정할 수가 없다. 그즈음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어 있었고, 예루살렘은 기독교 성지였다. 최초의 기독교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the Great, c. 272~337)는 “혐오스러운 유대인들과는 공유할 것이 아무것도 없도록 하겠다”고 했고, 이후 그의 발언에 따른 반유대인 정책으로, 유대인은 버림받은 걸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당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뜻한 바대로 높은 수준의 탈무드를 만들어낼 수가 없어 그 내용이 완벽하지가 않았고, 내용에 따라 실천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어 서기 425년 로마 데오도시우스 황제(Theodosius II, 401~450 CE)가 족장 제도를 억압함에 따라 예루살렘 탈무드 편찬 작업이 중단되었고, 공식적인 랍비 서품식(Semikhah)도 폐지되었다. 이 같은 이유들로 예루살렘 탈무드는 완벽함을 결여한 채, 유대 율법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지식의 원천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한편 바빌로니아 탈무드(Talmud Bavli)는 고대 후기(3세기부터 6세기)에 편집된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기 “바빌로니아”의 유대교 중심지로는 네하르데아(Nehardea: 유프라테스 강과 Nahr Malka 강이 만나는 지점의 고대 도시), 니시비스(Nisibis: 현재의 튀르키예 누사이빈 시), 마호자(Mahoza: 티그리스 강 유역의 고대 도시), 품베디타(Pumbedita : 현 이락 팔루자 시 인근에 있었던 고대 도시)등이 있었고, 바그다드 남쪽 60킬로 지점 수라(Sura)에는 유대 예쉬바(Yeshiva: 유대 교육기관)가 있었다.

    비빌로니아 탈무드는 미쉬나와 바빌로니아 게마라(Gemara)로 구성된다. 게마라는 바빌로니아 탈무드 아카데미에서 3백여 년에 걸쳐 이루어진 미쉬나 해설이다. 이 해설은 하나시(Judah ha-Nasi, 135~217 CE. 랍비. 미쉬나 편집자)의 제자 아리카(Abba Arika, 175~247 CE. 유대인 학자)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편집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도록 한 사람들은 랍비 아쉬(Ashi, 352~427 CE)와 라비나(Ravina II, ?~475 CE)였다. 아쉬는 375년부터 427년까지 수라 예쉬바 교장이었고, 그가 시작한 과업을 라비나가 완성하였다. 라비나는 미쉬나 해설을 한 마지막 학자였다. 그는 475년에 사망하였음으로, 탈무드의 마지막 편집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유대 학자들의 시대(Amoraic period: 대략 200~500 CE)가 끝난 후, 탈무드는 현자(Savoraim)들에 의해 다소 증보되었다.

    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언어를 보면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아람어, 예루살렘 탈무드는 서아람어 사투리이다. 예루살렘 탈무드는 탈무드 학자도 읽기 힘든,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반면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보다 정밀하다. 두 탈무드에 실린 율법은 기본적으로 비슷하나, 강조를 한다거나 세부적인 해석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예루살렘 탈무드는 랍비들이 해석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해석의 경우에도 대부분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해석과 비교하여 그 차이점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예루살렘 탈무드나 바빌로니아 탈무드 모두 미쉬나 전체를 다루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바빌로니아 게마라는 미쉬나 63책 가운데 37책만을 다룬다. 예루살렘 탈무드는 제라임(Zeraim: 이스라엘 땅에 국한된 농업 율법)의 전 책을,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제라임의 베라호트(Berachot: 씨앗에 관한 율법)만을 언급한다. 제라임 율법은 바빌로니아에서 실용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탈무드는 이스라엘 땅에 더 관심을 기울였고, 토라의 농사 율법은 그 율법이 적용된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졌음으로, 이스라엘 땅에만 해당하는 율법이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예루살렘 랍비들의 해석을 인용하고 있으나, 예루살렘 탈무드는 바빌로니아 랍비들의 해석이 거의 없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또한 편찬이 늦었던 관계로, 여러 세대에 걸친 의견을 담고 있어 내용이 보다 풍부하다. 두 탈무드는 그 편집 시기가 수세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초기(200~500 CE) 랍비들의 해석은 예루살렘 탈무드에서 보다 원형에 가깝다. 영향력 면에서도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훨씬 컸다. 이는 탈무드가 편찬된 후 제오님(Geonim, 589~1038 CE. 중세 초 바빌로니아 탈무드 아카데미 지도자들)시대까지 이스라엘 유대 공동체의 영향력과 명성이 계속 줄어들었고, 바빌로니아 탈무드 편집이 더 우수하여 사용이 쉬웠기 때문이다. 제오님 시대 모든 유대 공동체들은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구속되었다. 오늘날에도 두 본이 충돌하는 경우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따른다. 탈무드의 여섯 율법은 미쉬나 구조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전술한 대로 율법별로 편집한 63책으로 나뉜다. 이 책들 모두가 게마라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각 책은 장(Perek)으로 나뉘어 총 517장으로 되어 있고, 히브리어 알파벳에 따라 각 장의 명칭과 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미쉬나는 율법적 견해와 토론을 편집한 것으로, 하나의 주제에 관한 랍비들의 견해 또는 합의된 견해를 간결한 문체로 기록하고 있다. 미쉬나에 기록된 랍비들을 타나임(Tannaim)이라고 한다. 미쉬나는 성서가 아닌 율법적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미드라쉬(Midrash: 유대교 성서 외경)보다는 주제를 보다 철저히 다루었고, 다룰 율법 선정에서도 미드라쉬보다 더 폭이 넓었다. 따라서 탈무드는 전반적으로 미쉬나 체계를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탈무드의 책 순서는 미쉬나와는 다르다. 미쉬나 여섯 율법은 다음과 같다.

제라임(Zeraim: 씨앗 관련):

    제라임은 미쉬나 여섯 율법 중 첫 번째 율법이다. 기도와 은총에 관한 율법이 아닌, 이스라엘 땅의 농사와 십일조에 관한 율법이다. 주로 토라의 농사 율법에 관한 종교적, 사회적 측면을 다룬다. 수확물에 관한 가난한 자, 승려, 레위인의 권리에 관한 토라의 계명과 파종 그리고 경작에 관한 율법이다. 제라임은 총 11책 74장으로 되어 있다. 첫 책 베라코트(Berakhot)는 의무적으로 매일 드려야하는 기도에 관한 율법으로, 모두 9장으로 되어 있다.

모에드(Moed: 축제 관련):

    축제 관련 율법인 모에드는 미쉬나 제2율법으로, 구전 토라의 최초 문서 본이다. 미쉬나 여섯 율법 가운데, 세 번째로 짧다. 모에드는 모두 12책으로 되어 있다.

나쉼(Nashim: 여성 관련):

    나쉼은 미쉬나 세 번째 율법으로, 가족에 관한 율법이다. 여섯 율법 중 가장 짧은 7책으로 되어 있다.

네지킨(Nezikin: 상해 관련):

    미쉬나 네 번째 율법으로, 유대인의 범죄와 재판정에 관한 율법이다.

코다쉼(Kodashim: 성전 전례 관련)

    미쉬나 다섯 번째 율법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전례에 관한 율법이다. 성전 유지관리와 성물(Korbanot), 제례용 동물 및 식용 동물의 도살에 관한 율법이다. 중요한 율법으로 모두 11책으로 되어 있다.

토호로트(Tohorot: 가정의 청결):

    식기 등 가정의 살림살이, 시신의 처리 등 가정의 청결과 관련한 율법이다. 모두 12책으로, 여섯 율법 가운데 가장 길다.

    방대한 탈무드를 여기서 모두 소개하기란 불가능하여 그 전형적인 한 구절을 간단히 소개한다. 탈무드를 오역하면 벌을 받는다는 말이 있다. 잘 못 해석하여 악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의 예문은 영어 본 탈무드(미쉬나)의 손해 관련 율법 네지킨(Nezikin)의 한 장(제2장)의 일부를 이 책의 저자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어휘의 본 뜻과 뉘앙스 등 아람어 원본과 차이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색의 바다라고 일컬어지는 탈무드의 사유 방법이 어떠한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미쉬나: 발이 잘못을 저지른다고 생각되는 경우는 언제인가? 걷다가 무엇인가를 깨뜨릴 때이다. 이는 두 경우가 있다. 발길질로 자갈을 차(가끔은 동물의 습관이기도 하다), 그 자갈이 그릇을 깰 때이다. 이 경우(고소인의 고소가 있으면) 피해액의 절반을 배상해야 한다. 그릇을 밟아 깨뜨릴 때는, 그 깨진 그릇의 파편이 또 다른 그릇을 깨뜨린다면, 먼저 밟은 그릇은 전액을 배상해야하고(발로 손상이 되었다), 파편으로 깨진 그릇은 절반을 배상해야 한다. 수탉도 평소 걷다가 (무엇인가)깨뜨릴 수가 있다. 무엇인가 수탉의 다리에 걸려 깨지던가, 그릇을 밟아 깨뜨릴 수가 있다. 이 경우는 깨진 그릇 피해액의 절반만을 배상한다(그 이유는 게마라에서 설명한다).

    게마라: 랍비 라브하가 말하였다. 미쉬나에서 말하는 “발”이란 말은 동물의 발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 그렇다면 미쉬나에서는 왜 그 뜻이 바뀐 것일까? 과거의 미쉬나가 “발”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 시대의 미쉬나도 “발”로 시작한다, 라고 그가 대답하였다. 랍비가 가르쳤다. 동물이란 일상적인 걸음 속에서 (무엇인가를)깨뜨릴 수 있지 않은가? 동물은 사람(고소인)의 영역으로 들어가 몸이나 털, 걸음걸이, 자기 몸 위 안장, 지고 있는 짐, 입에 물린 고삐, 목에 달린 종으로 손해를 끼칠 수가 있고, 짐을 진 당나귀의 경우에는 그 손해의 전액을 배상하여야 한다. 시마쿠스(Symmachus ben Joseph: 타나임)가 이르기를, 자갈과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돼지로 인한 손해라면, 전액을 배상하여야 한다. “손해가 났다?” 이는 그 자체로 명백한 것이 아닌가? 만일 돼지가 쓰레기 더미를 헤집어 던져 생긴 손해라면, 전액을 배상하여야 한다. “자갈?” 이 말은 이곳 어디서 언급되고 있는가? 바라이타(Baraitha: 미쉬나 여섯 율법에 포함되지 않은 유대 구전 율법 속 전승)는 완벽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렇게 읽어야 한다. 즉, 자갈은 그 속성상 (발로)찰 수 있는 것이니, 이 자갈로 인해 생긴 손해는 반을 배상해야 한다. 돼지가 헤집어 던진 쓰레기로 생긴 손해도 같다. 그러나 시마쿠스는 말하기를, 자갈과 돼지의 경우는 손해 전액을 배상해야 한다. 랍비가 이르기를, 수탉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나르다 그 날개로 그릇을 깨뜨렸다면, 손해를 전액 배상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 손해가 수탉의 날개가 일으킨 바람으로 인한 자갈로 발생하였다면, 손해의 반을 배상해야 한다(몸의 직접적인 힘이 아닌 힘이라도, 자갈이라는 점에서는 같아 반을 배상한다). 그러나 시마쿠스는 전액을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탉이 밀가루 반죽이나 과일 위를 밟아 더럽히거나 흠을 내면, 전액을 배상해야 한다. 만일 수탉이 먼지나 자갈로 손해를 입혔다면, 그 반액을 배상하여야 한다. 그러나 시마쿠스는 전액을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바라이타 율법이 이르기를, 만일 수탉이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날다가 그 날개로 일으킨 바람이 그릇을 깨뜨릴 경우, 그 손해의 반을 배상해야 한다.......

    미쉬나 이외에 타나임의 가르침도 있다. 게마라는 미쉬나와 타나임의 가르침을 비교하여, 아모라임(Amoraim: 구전 토라를 가르친 서기 200~500년 사이 유대 학자들)의 주장을 지지하거나 또는 반박하였다. 게마라에 인용된 바라이타(Baraita: 미쉬나에는 없는 구전 토라의 가르침)는 주로, 토세프타(Tosefta: 타나크 613개 율법을 미쉬나 시대인 서기 2세기말 편찬한 유대교 구전 율법집)나 미드라쉬 할라카(Midrash Halakha: 타나크의 613개 율법을 해설한 고대 유대 랍비의 토라 연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게마라는 대부분 법적 해석으로 미쉬나 율법들의 정확한 성경적 근거와, 율법 간 연결 관계를 논리적으로 밝히기도 한다. 이러한 일은 두루마리 탈무드가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도 탈무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게마라의 미쉬나 인용문이나 바라이타, 타나크 인용문은 미쉬나 히브리어 또는 타나크 히브리어이다. 전반적으로 탈무드 문장의 반 정도가 히브리어이다. 이는, 그 편집 상 긴 세월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 학문의 대상 탈무드

    탈무드가 완성되자 그 시대부터 탈무드는 유대 학문 연구에 필수가 되었다. 유대교 윤리교육 지침서(Pirkei Avot: 족장의 윤리)는 15살부터 탈무드 공부를 권하고, 대략적인 그 공부 범위를 정하고 있다. 최초의 탈무드 해석은 서기 800년부터 1000년까지 게오님(Geonim: 수라와 품베디타 탈무드 아카데미 지도자 랍비)들에 의해서였다. 특정 주제에 관한 이들의 해석이, 자료로서 아직 남아 있다. 게오님 시대 탈무드 학문에 관해서는, 탈무드 구절에 관한 그들의 문답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이는 랍비 레빈(Binyamin M. Levin, 1879~1944. 랍비)의 저서 “게오님의 보물(Otzar ha-Geonim)”에 잘 정리되어 있다. 기타 벤 나만(Yehudai ben Nahman: 757부터 761년까지 수라 예쉬바 교장), 아하이 가온(Achai Gaon: 8세기 저명한 탈무드 학자. Gaon은 Geonim의 단수 형), 카이야라(Simeon Kayyara: 8세기 전반기 할라카 학자)등 저명한 학자들의 논문도 탈무드 공부에 중요한 자료이다. 쉐리라(Hai ben Sherira, 939~1038. 품베디타 탈무드 아카데미 교장)가 죽은 후, 탈무드 학문의 중심지는 유럽과 북아프리카로 옮겨졌다.

    알파시(Isaac Alfasi, 1013~1103. 랍비)같은 초기 탈무드 학자들은, 탈무드의 법적 해석에 토대한 의사 결정을 연구하였다. 알파시의 연구는 큰 영향력을 미쳐, 할라카 율법전 확립에 토대가 되기도 했다. 알파시의 연구를 어느 정도 따른 “모르드개(Mordechai)”는, 힐렐(Mordechai ben Hillel, c. 1250~1298. 신성로마제국 랍비)이 편찬한 탈무드 율법 해석집이다. 하비브(Jacob ibn Habib, 1469~1516. 스페인 랍비)는 탈무드로부터 아가다(Aggada: 탈무드나 미드라쉬에 있는 비율법적 해석)를 모두 발췌하여, 엔 야코브(En Ya'aqob: 16세기 아가다 편집 본)를 편찬하였다. 편찬 목적은 탈무드의 윤리적인 부분과 탈무드 내용을 둘러싼 많은 논쟁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탈무드에는 암호 같고,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스, 페르시아 단어들도 많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단어들은 그 뜻이 모호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탈무드 연구가 발전하면서, 이러한 단어들이나 구절들의 뜻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랍비 게르숌(Gershom ben Judah, 960~1040. 탈무드 및 할라카 학자)이나 하나넬(Ḥananel ben Ḥushiel, 980~1055. 탈무드 학자. 랍비)은 많은 주제를 해석하였다. 이 같은 해석은 탈무드 본문과 함께 읽을 수가 있고, 문장의 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 다른 주요 해석서로는 랍비 니심(Nissim Gaon. 990~1062)이 지은 “열쇠의 서(Sefer ha-Mafteah: 탈무드 해설 서)”이다. 이 책은 서문에서, 여러 형태의 탈무드 논거가 있을 수 있음을 말하고, 같은 생각을 표현한 구절들을 교차 체크하여 사라진 구절들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넬과 알파시의 연구에 토대한 두 책자 바트라(Bava Batra: 재산 소유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탈무드 율법)와 셰부오트(Shevuot: 칠칠절. 무교절, 초막절과 함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과 율법을 받으면서 제정된 날. 그레고리력으로 대략 5월 15일부터 6월 14일까지)에 관한 미가쉬(Joseph ibn Migash, 1077~c. 1141. 랍비)의 해석집(Hiddushim)도 남아 있고, 아그마티(Zechariah Aghmati, 1120~1195. 탈무드 학자. 랍비)가 편집한 알파시의 할라카에 대한 해석집(Sefer ha-Ner)도 남아 있다. 랍비 예히엘(Nathan b. Jechiel, c. 1035~1106)은 어려운 어휘 번역을 위해, 여러 문체를 이용한 사전을 편찬하였다.

    지금까지 가장 잘 알려진 바빌로니아 탈무드 해석집은 프랑스 랍비 이삭(Solomon ben Isaac, 1040~1105)의 저서이다. 이 해석집은 거의 전 탈무드를 다루고 있다. 해석과 함께, 어휘들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각 구절의 논리적 구조를 밝히고 있어, 탈무드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필수서이다. 과거 학자들의 연구를 이용하였지만, 그들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자료 활용 면에서 독창적이다. 그의 해석에 토대하여 그의 제자와 후계자들은, 그의 해석을 수정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다. 이 작업을 토사포트(Tosafot: 추가 또는 보완의 뜻)라고 한다. 그러니까 토사포트는 중세 아쉬케나지 랍비들의 탈무드에 대한 해석 모음이다. 토사포트의 주목적 가운데 하나는, 탈무드의 모순되는 내용에 대한 해석이다. 토사포트의 해석은 이삭의 해석과는 다르다. 현재 예쉬바에서는 추가적인 분석을 위한 필요성 때문에 탈무드, 이삭의 해석, 토사포트를 통합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 이 통합을 약자로 표시하면 “gefet"이다.

    이삭의 손자인 프랑스 랍비 메이르(Jacob ben Meir, 1100~1171)와 메이르의 조카인 사무엘(Isaac ben Samuel, c.1115~c.1184)은 토사포트 학교를 세운 사람들이다. 이 학교는 많은 량의 다양한 토사포트 해석집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는 엘리제(R. Eliezer of Touques: 13세기 후반 프랑스 토사포트 학자. 프랑스 노르망디 투께 출신)와 예이엘(Asher ben Jehiel, 1250~1327. 스페인 랍비)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토사포트 해석을 수집한 결과이다. 특히 스페인 유대 공동체에는 나만(Moses ben Nachman, 1194~1270), 아데레트(Shlomo ibn Aderet, 1235~1310), 아브라함(Yom ben Abraham, 1260~1320), 레우벤(Nissim ben Reuven, 1320~1376)등 랍비 학자들의 해석집이 있었고, 아브라함(Bezalel ben Abraham, 1520~1592. 팔레스타인 랍비)은 이 해석집들로부터 발췌하여 편집한 금언 모음집을 편찬하였다.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새로운 형태의 강열한 탈무드 연구 활동이 있었다. 탈무드가 안고 있는 모순점을 설명하기 위해, 복잡하고 논리적인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연구 방법을 필풀(Pilpul)이라고 하였다. 필풀 논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탈무드에 모순이나 췌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고도의 논리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연구 방법은 16세기와 17세기에 최고조에 달하여, 이 시기 필풀 분석은 예술로 간주되었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예쉬바의 학문 목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유행과 같은 탈무드 연구 방법은, 비판이 없었기 때문에 존속할 수가 없었다. 15세기 자디킴(Orhot Zaddikim: 독일어판 유대 윤리학 책)은 필풀의 지나친 지적 예민함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16~17세기 베자렐(Judah ben Bezalel, 1526~1609. 보헤미아의 탈무드 학자), 호로비츠(Isaiah Horowitz, 1555~1630. 폴란드 랍비), 야이르(Chavos Yair, 1639~1702. 신성로마제국 랍비)등 많은 랍비들 역시 필풀에 비판적이었다. 18세기에 들어와 필풀 연구는 기울어 필풀이라는 단어도, 궤변이나 일삼고 쓸데없이 따지는 경멸적인 말이 되었다. 그밖에도 세파르디 방법론, 브리스커 방법론, 비판적 방법론, 현대적 방법론 등 여러 탈무드 연구 방법론이 있으나 이 책에서는 생략한다. 탈무드는 다음과 같은 번역본이 있다.

가. 바빌로니아 탈무드:

   현재 바빌로니아 탈무드(Talmud Bavli)는 여섯 종류의 영역 본이 있다.

    1) 슈타인잘츠 본: 랍비 슈타인잘츠(Adin Steinsaltz, 1937~2020)가 출판한 현대 영역 본으로 2012년에 발간되었다. 탈무드 전체에 대한 슈타인잘츠의 해석이 실려 있다.

    2) 아트스크롤 본: 미국 뉴저지 소재 아트스크롤(Artscroll) 사가 발간한, 총 73권의 영역 본으로 아람어와 히브리어 원문이 함께 실려 있다. 1990년 발간에 착수, 2004년에 완료하였다.

    3) 손치노 본: 영국의 손치노(Soncino) 출판사가 발간한 탈무드이다. 1935년에 착수, 1948년에 완성하였다. 총 34권으로 되어 있으며 아람어, 히브리어 원문이 함께 있다. CD-ROM도 가능하다.

그밖에도 로드킨슨(Michael L. Rodkinson, 1845~1904. 탈무드 영역 최초 번역자), 노이스너(Jacob Neusner, 1932~2016. 미국 유대 학자)등이 번역한 영어 본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있다.

나. 예루살렘 탈무드:

    예루살렘 탈무드 영역 본은 시카고 대학 출판부가 발간한 노이스너 번역본과 아트스크롤 본이 있다.

유대교에서 탈무드의 위치

    탈무드는 구전 토라를 글로 기록한 것이다. 탈무드를 통하여 유대교 율법의 유래를 알 수 있다. 탈무드는 랍비 율법과 관습의 토대, 무엇보다도 미쉬나 토라(Mishneh Torah: 랍비 유대교 율법전)와 아룩 슐한(Shulchan Aruch: 유대교 율법전)의 토대가 되었다.

    탈무드의 권위와 관련하여 정통 유대교나 보수 유대교는 그 권위를 받아들이지만 사마리아인, 사두개인, 카라이트 유대교, 개혁 유대교는 그렇지 않다. 카라이트 유대교는 탈무드가 완성된 후 일어난 유대교 운동으로, 탈무드에 구체화된 구전 토라를 거부하고 두루마리 토라(Written Torah)만을 믿는다. 사두개파는 제2성전 기간 중 번성했던 유대교파로, 바리새(후일 랍비 유대교)와는 달리 구전 토라와 사후 부활을 부정하였다. 정통 유대교는 예쉬바 교육 과목으로, 특히 랍비가 되고자하는 학생 훈련을 위해 탈무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도주의 유대교는 일상생활과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탈무드를 역사서로 공부한다.

탈무드 비판

    로드킨슨(Michael Levi Rodkinson, 1845~1904.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최초로 영역한 유대 학자)는 그의 저서 “탈무드 역사(the History of Talmud)"에서, 탈무드가 만들어진 이후 그 비방자들의 특성과 비방 목적, 비방 행위를 기록하고 있다. 

    비방자들 가운데는 니콜라스 도넹(Nicholas Donin: 13세기 유대교에서 기독교로의 개종자. 탈무드 재판과 소각을 주도적하였던 인물), 페퍼콘(Johannes Pfefferkorn, 1469~1521. 가톨릭 신학자. 반유대 설교, 탈무드 소각 주동 인물), 아이젠멩거(Johann Andreas Eisenmenger, 1654~1704. 신성로마제국 동양학자), 프랑코(Jacob Frank, 1726~1791. 유대교 율법과 가르침의 거부하고, 율법 폐기를 주장), 롤링(August Rohling, 1839~1931. 독일 가톨릭 신학자. 그의 저서 Der Talmudjude는 표준적인 반유대교과서였음)등이 포함되어 있다. 프라나이티스(Justinas Pranaitis, 1861~1917. 리투아니아 가톨릭 신부), 딜링(Elizabeth Dilling, 1894~1966. 미국 작가), 듀크(David Duke, 1950~. 미국인 백인우월주의자) 등도 탈무드는 물론, 반유대인 공격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기독교와 무슬림으로부터는 물론, 무신론자들과 회의론자들로부터도 공격이 있다. 

    탈무드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은, 13세기 탈무드 공부가 성행했던 프랑스에서 있었다. 서기 1230년 니콜라스 도넹은 탈무드의 글이 예수님과 마리아, 기독교에 반하는 신성모독적이라는 이유로, 35개 혐의를 걸어 교황 그레고리 IX세에게 고발하였다. 그 글은, 똥물이 영원히 끓고 있는 지옥으로 나사렛 예수가 보내졌다는 내용을 담은 탈무드 구절이었다. 물론 조작된 글이었다. 도넹은 또한 탈무드가 유대인들에게, 비유대인들을 죽이도록 허락하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선동으로 인해 1240년 루이 IX세의 왕궁에서, 탈무드에 관한 재판(Disputation of Paris)이 열리게 되었다. 이 재판에서 야곱(Moses ben Jacob of Coucy: 프랑스 랍비)을 포함한 네 명의 랍비가 도넹과 싸워 탈무드를 지켜냈다. 이 재판의 결과에 불만은 품은 자들에 의해, 1242년 처음으로 파리에서 탈무드를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서기 1263년, 탈무드는 나하만(Moses ben Nahman: 세파르디 랍비)과 가톨릭으로 개종한 크리스티아니(Pablo Christiani: 세파르디 유대인)간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크리스티아니의 탈무드 공격으로 교황의 반 탈무드 칙령을 불렀고, 이에 따라 가톨릭에 반하는 탈무드 구절을 삭제하라는 명령을 받은 도미니크 수도사들이, 바르셀로나에서 처음으로 탈무드 검열에 착수하였다. 서기 1413년 스페인에서 있었던 토르토사(Tortosa: 따라고나 주 도시)논쟁에서는 헤로니모(Geronimo de Santa Fe, 1400~1430.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의사)가 탈무드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그는 우상숭배자, 이교도, 배교자에 대한 탈무드의 비난은 모두 사실로, 이 사실을 그리스도 교도들이 모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유대 공동체는 헤로니모의 주장을 반박하고,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은 기독교와 같으며, 다신교인 이교도와는 다르다고 했다. 다만 기독교도들은 유일신을 믿으나, 제대로 믿지 않는다고 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기독교도들의 신앙이 잘못되었지만 탈무드에서 말하는 이교도나 우상 숭배자와는 다르다고 했다. 크리스티아니와 헤로니모는 탈무드를 비판하였지만 탈무드의 권위를 인정, 기독교 전도를 위한 자료로 이용하였다. 예를 들어, 구세주 예수가 성전 파괴 즈음에 태어나 하느님 오른 손에 앉으셨다는 탈무드의 말씀이다.

    19세기에 들어와 러시아 정부는, 빌나본 탈무드(Vilna: 리투아니아 빌라 시 인쇄본. 탈무드 기본서)에 대한 검열을 실시하였다. 정부 정책에 따라 자체 검열도 하였으나, 별로 엄격하지 않은 검열이었다. “탈무드”라는 명칭도 그대로 허용되었고, 오히려 탈무드에 아보다 자라(Avodah Zarah: 유대인과 이방인간 관련 율법. 네지킨의 여덟 번째 율법)를 추가할 수 있었다. 서기 1830년 프랑스 귀족원(Chamber of Peers: 상원 상당)은 유대교를 인정할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토론한 적이 있었다. 이 토론에서 베루엘(Carel Hendrik Ver Huell, 1764~1845. 해군 제독. 프랑스에 귀화한 네델란드 해군 장교)은, 세계 여러 곳에서 만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탈무드를 신봉한다는 점에서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다.같은 해 치아리니(Luigi Chiarini, 1789~1832. 이태리 가톨릭 사제)는 자신이 출판한 “유대교 이론(Théorie du Judaïsme)”에서 탈무드를 번역하여, 처음으로 대중이 탈무드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고, 이를 기회로 유대교를 공격하였다. 총 6권에 달하는 번역서 가운데 현재 2권만 남아 있다. 19세기 비엔나에서는 반 유대 선동 목적으로 탈무드를 발간, 공격하기도 했다.  

    21세기인 현재 인터넷은 또 다른 탈무드 비판 수단이 되고 있다. 이에 관하여 반명예훼손 동맹(Anti-Defamation League: 유대인 국제 비정부기구)은, 잘못 번역한 탈무드 구절을 인용하거나 특정 구절을 왜곡하여 인터넷 상에서  탈무드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정 구절의 전체 내용을 결하거나, 탈무드가 형성된 2천여 년 전 문화에 대한 정보나 이해가 없이, 비난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탈무드 설명을 요청 받은 유대인은 거짓 설명을 해야 한다. 이 계명을 어기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라는 반유대 선동문구가 있다. 서기 1671년에 발간된 "다윗의 증오(Libbre David)" 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이는 이 문구는, 탈무드에는 실제로 없다. 이 문구는, 홀로코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그림슈타트(William Grimstad, ?. 반 유대 작가)의 책 “6백만에 대한 재고(the Six Million Reconsidered)"에 있다.

    오늘날 사용되는 탈무드는 빌나본이거나 빌나본에 토대하고 있다. 따라서 많은 토론 구절들이 생략되어 있다. 과거 수세기 동안 사용할 수 없었던 이 구절들은 하샤스(Chersonos Hashas: 탈무드 생략 구절 모음집)에 보존되어 있다. 검열 이전의 원본들은 바티칸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오늘 날 탈무드 출판은, 검열로 인해 생략된 구절들을 책 말미에, 또는 원래의 위치에 놓고 발간하고 있다.


 VII. 시오니즘

     1. 시온주의

    시온주의(Zionism)는 1890년 비른바움(Nathan Birnbaum, 1864~1937.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유대 민족주의자)이 만든 용어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국인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 주권을 회복하는 민족주의 운동으로 정의된다. 19세기 시오니즘은 중, 동부 유럽의 반유대주의라는 격랑에 대응하고, 아울러 민족 재부흥을 위한 하스칼라 운동(Haskalah: 1770~1881년 기간 유럽 유대 계몽주의 운동)의 일환으로서 등장하였다. 그 후 이 운동의 리더들은, 당시 오토만 제국 치하에 있던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 국가를 수립하는데 운동의 주요 목적을 두었다.

    시온주의 아버지인 헤르즐(Theoder Herzl, 1860~1904.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 언론인, 변호사)은 시오니즘에 새로운 이데올기를 도입하였고, 1897년 스위스 바젤(Basel)에서 최초의 시온주의자 의회(Zionist Congress)가 개최되었다. 이때 시온주의자 기구(ZO)가 만들어졌고, 1960년 이 기구는 세계시온주의자 기구(World Zionist Organization)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 시온주의 기구로는 시온주의자 기구(Zionist Organization, 1897), 시온주의자 최고회의(Zionist Congress, 1897), 팔레스타인 연락 사무소(Palestine Office, 1908. 팔레스타인 유대민족 기금), 케렌 헤이소드(Keren Hayesod, 1901. 정착촌 토지 구매), 유대 헌금 기구(Jewish Agency, 1929) 등이 있었다.

    “시오니즘”은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언덕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19세기 동유럽 전역에는 히브리어의 재생과 보존을 비롯하여, 조상의 땅에 정착코자 한 유대 풀뿌리 모임들이 있었다. 이들은 “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불렸고, 동시에 현지에 동화되어 가는 유대 공동체에 대한 저항 세력이기도 했다. “시오니즘”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비른바움은 유대민족 학생운동(Kadimah: 비엔나 유대 학생회)창립자로, 1890년 그가 발간한 잡지(Selbstemanzipation)에서 처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잡지 이름은 1882년 핀스커(Leon Pinsker, 1821~1891. 의사, 시온주의 활동가)가 발간한 잡지 이름 “자립 해방(Auto-Emancipation)"과 같은 이름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누구나 유대인들의 조국으로서, 그리고 유대민족 자결권의 합법적 중심지로서 “이스라엘 땅(Eretz Isael) 팔레스타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물론 유대인과 이스라엘 땅과 관계, 유대인의 종교적 전통에 토대하고 있다. 시오니즘은 독자적으로 태어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종교적 시오니즘, 노동 시오니즘, 개혁 시오니즘, 환경 시오니즘 등 여러 이데올로기들 간 논쟁 속에서 진화, 형성된 것이다.

    나라 없이 이역에서 2천년 가까이 살아 온 후, 시온주의 운동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l'affaire Dreyfus)이나 러시아의 반유대인 포그롬과 같은 반유대주의에 대응키 위해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시온주의 정치 운동은, 1897년 헤르즐이 유대국가(Der Judenstaat)라는 잡지를 발간하면서 불이 붙었다. 이 운동의 목적은, 사는 곳에 동화되지 않은 채 떠돌이나 다름없는 가난한 유대인들을 오토만 제국 하의 팔레스타인 땅으로 보내고자 한 것이었다. 헤르즐은 그들이 현지에 동화된 유대인을 불안케 하고, 기독교 사회의 반유대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시온주의는 반유대주의에 대처하고, 현지에 동화된 유대인을 고려한 정치 운동이었다.

-Theoder Herzl-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시온주의 운동이 뿌리를 내렸던 중부 및 동부 유럽 유대 공동체가 붕괴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유대 민족국가 수립을 생각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얻어낸 시온주의자들은, 유대인 박해가 특히 심했던 러시아에서 팔레스타인 이주자들을 모집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그곳 아랍인들에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뒤늦게 깨달았고, 따라서 유대-영국 관계는 긴장 관계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시온주의자들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결국 시온주의 운동은 1948년 5월 14일, 유대 민족의 조국으로서 이스라엘 건국이라는 성공을 가져왔던 것이다.

    시온주의 운동은 또한 현대 세계에 유대인들을 동화시키고자 한 운동이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그들이 사는 곳에서 이방인이었음으로, 현대적인 사상으로부터 괴리되어 있었다. 반면 동화주의 유대인들은 유럽 사회에 완전 동화되기를 원했다. 그들은 현대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숨기고, 전통적인 가치나 사상을 포기하기도 했다. 또 문화적 통합을 선택한 유대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유대 가치와 신앙을 지키되, 현대 사회에 적응할 필요성을 강조한 사람들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기원전 약 1200년부터 586년까지 유다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의 언어였던 셈어 계통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사랑한다. 시온주의자들은 히브리어 현대화에 앞장서, 히브리어는 현재 그들의 일상어가 되었다. 히브리어는 유대교의 전례어로서 긴 역사를 통해 보존되어온 언어이다. 시온주의자들은 이디쉬어(Yiddish: 아쉬케나지 언어인 서부 독일어 사투리)를 유럽에서 박해를 받을 때 발전한 언어로 보고, 이의 사용을 거부한 적도 있었다. 이스라엘로 돌아온 시온주의자들은 대부분 디아스포라 시절 사용했던 언어를 버리고, 히브리어를 받아들였다. 히브리어는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스라엘 모든 시민들의 공통 언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시온주의자들은 이 언어를 통해 정치적, 문화적으로 더욱 결속할 수가 있었다.

    시온주의자들의 사상은 이스라엘 독립선언서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이스라엘 땅은 유대민족의 발상지로서 유대인의 정신적, 종교적, 정치적 정체성이 형성된 곳이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처음으로 국가를 세워 민족적이고 보편적인 문화를 창조하였으며, “책 중의 책(성경)”을 이 세상에 가져다주었다. 이 땅으로부터 강제로 추방을 당한 후 유대 민족은, 유랑 생활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고, 고토로 돌아가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겠다는 기도와 희망을 결코 잃은 적이 없다. 유대인들은 고토로 돌아가 다시 나라를 세우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무리지어 돌아왔던 것이다.

유대인 정착촌

    서기 1819년 로빈슨(William.D. Robinson. 미국인 무역상)은 미시시피 강 상류에 유대인 정착지를 세운 적이 있었다. 크레슨(Warder Cresson, 1798~1860. 주 예루살렘 미국 초대 총영사)은 1850년, 예루살렘 인근에 유대인 정착촌을 세웠다. 이를 이유로 그의 아내와 아들은, 오직 정신병자만이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한다는 이유로 피소되었다. 재판 후 크레슨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레파임(Rephaim) 분지에 농경지를 개척하였다.

-레파임 분지-


    서기 1825년, 노아(Mordecai Noah, 1785~1851. 미국 언론인, 작가)가 버팔로 인근 그랜드 아일랜드에 유대인 난민촌을 세웠고, 1835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도 베니슈(Abraham Benisch, 1811~1878. 영국 언론인)와 슈타인슈나이더(Moritz Steinschneider, 1816~1907. 모라비아계 성서학자)같은 사람들이 유대인 공동체를 세우려는 노력이 있었다. 

    몬테피오르(Moses Montefiore, 1784~1885. 영국 은행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지를 건설하였다. 서기 1854년 그의 친구인 투로(Judah Touro, 1775~1854. 미국인 사업가, 박애주의자)는 팔레스타인 유대 정착지를 위한 많은 돈을 헌금하였다. 투로는 몬테피오르의 유언 집행자로, 1860년 최초의 유대인 정착지를 비롯하여 예루살렘 구시가지 성 밖에, 오늘날 샤나님(Mishkenot Sha'ananim)으로 알려진 구빈원 등 건설에 그의 유산을 사용하였다. 올리판트(Laurence Oliphant, 1829~1888. 영국 의회의원, 작가)처럼 폴란드,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오토만 터키로부터 가난한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데려오고자 노력한 사람도 있었다.

-몬테피오르-

    팔레스타인에 이슈브(Yishuv: 이스라엘 내 유대인 정착촌) 건설은, 빌루 그릅(Bilu: 이스라엘 땅에 농업 정착을 목적으로 했던 유대인 그릅)이 1882년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때 온 유대인들은 대부분,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학대를 피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서유럽 박애주의자들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팔레스타인 여러 곳에 농업 정착지를 건설하였다. 19세기말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는 소규모였다. 그 후 러시아 혁명 때 포그롬으로 인한 또 다른 알리야(Aliyah: 해외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동)가 있었다.

    

시온주의 형태

    시온주의는 그 형태가 다양하여 노동 시온주의(Labor Zionism: 좌익 사회주의), 자유주의 시온주의(Liberal Zionism), 개혁 시온주의(Revisionist Zionism), 종교적 시온주의(Religious Zionism), 녹색운동 시온주의(Green Zionism)등이 있다.

    노동 시온주의는 동유럽에 기원을 두고 있다. 노동주의 시온주의자들은, 수세기에 걸친 박해로 유대인들은 유약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절망적인 삶을 살아 왔고, 이로 인해 더 심한 반유대주의를 불러왔다고 했다.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정신적, 사회적 혁명이 필요하며 이는 이스라엘로 돌아가 농부나 근로자, 군인이 됨으로써 가능하다고 했다. 노동주의 시온주의자들은 유대교의 종교적 관행 준수를 거부하고 “키부츠(Kibbutz)”라는 농촌 공동체 설립을 주장하였다. 키부츠는 일종의 변형된 국영 농장으로 기업농 형태를 띠었으며, 유대민족기금(JNF)으로 훈련된 유대인 감독관을 고용하여, 그의 감독을 받도록 했다. 키부츠는 제2차 알리야의 상징물로, 특히 공동체주의와 평등주의를 강조하여 어느 정도 유토피아적인 사회주의를 대변하였다. 더구나 노동 시온니즘의 핵심인 자급자족을 강조하였다. 노동 시오니즘이 유대교로부터 영감을 얻고 그에 철학적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러나 정통 유대교와 반목을 키워왔다. 노동 시오니즘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신탁통치 시기 이슈브(Yishuv: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전 팔레스타인 거주 유대인)의 정치적, 경제적 생활의 주도적인 힘이었고, 1977년 노동당이 선거에서 패할 때까지 이스라엘의 주도적인 정치 이념이었다. 현재 키부츠에게 가장 인기 있는 정당은 메레츠(Meretz: 이스라엘 좌익정당. 1992년 창당)이지만, 이스라엘 노동당은 아직 과거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자유주의 시오니즘은 1897년 시온주의 최고회의가 수립된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시온주의 운동의 주된 조류였다. 자유주의 시오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 하에, 보다 민주적인 이스라엘 사회를 위해 팔레스타인 국가 필요성, 자유시장 원칙, 아랍계 이스라엘 국민의 동등한 권리 보장 등을 옹호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현 리쿠드(Likud: 이스라엘 중도 우익 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보틴스키(Ze'ev Jabotinsky, 1880~1940. 러시아계 유대인)가 이끈 개혁주의 시오니즘은 민족주의 시오니즘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지도 원칙은 1924년 그의 논문 “철의 장막”에 실려 있다. 1935년 개혁주의 시온주의자들은, 시온주의 목표는 유대국가의 수립이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세계시온주의자기구(WZO)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구를 탈퇴하였다. 자보틴스키는 시오니즘을 하나의 모험으로 보았다. 시오니즘을 세우고 히브리어를 말한다는 것도 중요하나, 총을 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며, 그렇지 못하면 시오니즘은 식민지가 된 땅에서 소꿉놀이를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는 또 유대인들은 동유럽으로부터 왔으나 문화적, 도덕적, 정신적으로는 서구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의 시오니즘은 정신적 고향으로 유대인들의 귀환이 아닌, 서구 문명의 동방 이식으로 보았다. 개혁주의 시온주의자들은, 유대인의 대규모 이입을 아랍인들이 받아들이게 하려면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군대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개혁주의 시오니즘으로 등장한 리쿠드(Likud)당은 웨스트 뱅크와 동예루살렘에 대한 이스라엘의 계속적인 지배를 주장하며,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 강경노선을 택하고 있다. 2005년, 이스라엘 점령지에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 문제로 리쿠드당은 분열하였다.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과 평화적 회담을 옹호했던 측이 카디마(Kadima)당을 창설하였다.

    녹색운동 시온주의(Green Zionism)는 이스라엘 환경 문제에 관심이 있는 시온주의 한 분파이다. 녹색 시온주의자 동맹(Green Zionist Alliance)은 특수하고 유일한 환경문제 정당이다.

    20세기가 지난 현재 고전적인 이스라엘 민족주의가 기울면서, 포스트 시오니즘(Post Zionism)이 등장하였다. 포스트 시오니즘은 “유대인의 국가”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모든 시민 즉 아랍인과 유대인이 자치권을 누리면서 함께 살 수 있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2. 발포어 선언

    발포어 선언은 강대국에 의한 최초의 시오니즘 지지 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전 세계 유대 공동체의 적극적인 환영을 받았으나 또한 영국의 팔레스타인 식민지 건설 토대가 되기도 했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상 발포어(Arthur J. Balfour, 1848~1930)는 유대 가문의 수장인 로스 챠일드에게 한 장의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서 그는, 1차대전이 끝난 다음 팔레스타인 땅, 그러니까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이 새 나라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건국을 반대한 유대인들도 많았다. 러시아 유대인들이 그들이다. 러시아 혁명 당시, 그러니까 발포어 선언 당시 러시아에는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고, 새 나라 건국에 대해 그들은 비유대 유대인(Non-Jews), 프로레타리아 유대인, 시온주의자 유대인 등 세 부류로 의견이 나뉘어 있었다. 우선 비유대 유대인(Non-Jews)들이다. 이들은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지만 유대교도가 아닌, 그러니까 이념적으로는 유대인임을 스스로 부정한 인텔리겐챠, 공산주의자, 유대 정치인들이다. 혁명 주체인 볼쉐비키당 지도부의 20%, 공산당원, 유대인에 의한 유대인 박해 기구인 예프세크치야 (Yevsektsiya) 조직원 30만 명 그리고 공무원, 세무서원, 비밀경찰 등에 많은 비유대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유대 국가를 세우는 것은 혁명에 대한 반동이며, 따라서 건국을 바라는 시온주의자들을 계급의 적으로 불렀다. 그 다음 무산 유대인(Proletariat Jews)들로, 이들은 국가란 랍비나 유대 부르좌지의 이익을 위한 조직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반대했다. 그러니까 시온주의 유대인들만 새로운 국가 건설을 열망한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국가 건설은 전 유대인의 컨센서스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냥 두어도 되었을 일을 발포어는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했던 것이다. 왜 그런 약속을 했을까?

    와이즈만(Chaim Weizman, 1874~1952)이라는 맨체스터 대학의 유대인 생화학 교수가 있었다. 후일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열렬한 시온주의자로, 영국 지도층의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좋은 감정을 이용하여 유대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 그는 보수당 지도자이며 시온주의 지지자인 발포어(Arthur Balfour, 1848~1930), 처칠(Winston Churchill), 로이드 조지(Lloyd George)등과 친분을 맺고, 이어 유대인 하원의원 사무엘(Herbert Samuel Montagu)을 만난다. 사무엘은 영국 내각의 각료가 된 최초의 유대 정치인이다. 와이즈만의 말을 들은 사무엘이 어느 날 영국 외상 그레이(Edward Grey)를 만난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1차 대전이 끝나면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취하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가 가진다는 의견을 교환했다. 그 후 영국과 프랑스는 비밀 합의(Sykes-Picot Secret Agreement, 1916.5.19)를 통해 이 의견을 받아 들였다. 이-팔 분쟁 이면에 제국주의적 영토 야심이 깔려 있었다는 말과 같다. 이 비밀 합의는 전후 체결된 베르사이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1919.6.28)에 구체화 되었다.

-아서 발포어-

    사무엘은 또 재무상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에게도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세우고 싶다는 강력한 의사를 표하였다. 열렬한 성경 신봉자이며 시온주의에 공감하는 로이드 조지가 수상이 되면서, 그의 내각에 발포아가 외무상으로 임명되었다. 사무엘과 와이즈만의 계획이 착착 진행된 것이다. 1914년 12월 12일은 한 사람의 로맨틱한 감정에 의해 이-팔의 운명이 결정된 역사적인 날이다. 그날 와이즈만은 다음과 같이 발포어를 설득했다.

“유대인들은 독일의 산업계, 문화계, 과학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이 같은 유대인의 능력 발휘는 독일인의 신분으로 독일의 번영을 위한 것이지, 독일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유대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독일인들은 유대인의 능력과 두뇌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습니다. 독일의 번영에 엄청난 공헌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비극은 그들이 독일인도 유대인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발포어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와이즈만의 손을 잡는다. 와이즈만은 영국의 적국인 독일에 대한 발포어의 적개심에 호소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발포어는 확고한 시온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무엘이 새 나라 건설에 관한 계획을 내각에 제출했을 때, 역시 정치인이며 극단적 반시온주의자인 그의 사촌 에드윈(Edwin Samuel Montagu, 1879~1924))이 강력한 반대를 하였다. 어쨌든 새로운 유대국가 건설에 와이즈만과 로이드 조지는 의기투합했다. 그렇지만 반시온주의자인 전임 수상 애스퀴스(Herbert Henry Asquith)에 따르면, 로이드 조지는 유대인 보호보다는 성지 예루살렘에 프랑스의 진출을 막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당초 발포어 초안이 바뀐 점이나, 또 그 문안에 “나라(country)” 라는 어휘 대신 “유대 민족의 귀향지” 라는 문구로 보아 애스퀴스의 말은 사실인 듯하다.

    1917년에 들어 시온주의 최대 장애물이었던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March 15, 1917)하면서, 러시아에서는 비유대유대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온주의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의 반유대법이 폐지되고, 독일의 유보트 공격에 따라 미국이 참전(1917.4.6)하였다. 미국 역시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수립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 따라 1917년 7월 18일, “발포어 선언” 초안이 작성되었다. 그 초안은 유대 민족의 귀향지로서 팔레스타인 전 지역의 재건, (귀향지로)유대인의 무제한 이주, 자치 인정 등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만일 이것이 성사되었다면 이는 시온주의자들의 완전한 승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윈 몬타구의 반대로, 그 내용이 변경된다. 에드윈 몬타구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1917년 10월 31일자의 안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이 곧 유대인의 귀향지라는 말이 없고, 유대인의 무제한 이주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 민족의 권리는 보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뒤 11월2일 최종 안은 10월31일자 안이 수정된, 다음과 같은 문안을 담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귀향지(National Home) 건설에 호의를 가지고 유의하며, 이 목적 달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주민의 시민권과 종교권, 그리고 전 세계 유대인들의 권리와 정치적인 지위를 해치는 어떠한 일도 없을 것임을 명백히 이해한다.” 이처럼 같은 땅에 양측을 모두 보호하겠다는 양립할 수 없는 선언을 한 것이다.

    종전 후,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합의한 대로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신탁통치령이 되었고 시리아, 레바논은 프랑스가 취했다. 발포어가 약속한 대로, 팔레스타인 민족이 살고 있는 땅에 유대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이미 살고 있었던 10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있었고, 이 인구 규모로는 나라가 설 수 없어 국가 건설이 미루어졌다. 그 후 유대인의 계속적인 유입으로,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당시 팔레스타인의 유대 인구는 60만 명이었다.

    이 분쟁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영국의 영토 욕심과, 물론 내각의 승인이 있긴 했지만, 네 사람(와이즈만, 사무엘, 발포아, 에드윈)이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편으로 갈라져, 감상에 젖어 처리한 결과라고 볼 수가 있다. 만일 발포어 선언이 없었더라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건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VIII. 반유대주의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말은 13세기부터 있었다. 반유대주의(Anti-Semitism)는 19세기 후반, 괴트쉐(Hermann Goedsche, 1815~1878. 프러시아 작가)같은 반유대 선동가들 때문에 더욱 심화되었다. 1903년 발표된 반유대 허위 글“시온 원로 의정서(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 1903년 러시아에서 발간된 반유대 서적)”는 괴트쉐의 반유대 소설 비아리츠(Biarritz)를 인용하여 쓴 글이다. 이 허위의 글은 츠나미야(Znamya: 러시아 왕당파 일간 신문)에 연재되기도 했다. 이는 오크라나(Okhrana: 러시아 제국 비밀경찰)의 음모일 수도 있었다. 유대인들이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는 소문도 퍼져나갔다. 

    “시온 원로 의정서”의 선동으로 인해, 현재 반유대주의에는 이 “유대인의 세계 지배 음모” 가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음모론을 제일 먼저 퍼뜨리기 시작한 세력은, 러시아 혁명으로 쫓겨난 왕정주의자(Tsarist)들이었다. 그들이 이 음모론을 퍼뜨리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증폭되었던 것이다. 영국인 음모론자 웹스터(Nesta Webster, 1876~1960. 작가)는 러시아 혁명에서의 유대인 역할을 강조하고, 소위 일루미나티 음모론(Illuminati: 유대인과 프리메이슨의 세계 지배론)을 주장하였다. 홀로코스트는 이 같은 음모론을 전제로 하였다. 1970년대에는 반유대주의자들이 시온주의자 지배정부(ZOG)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서구 국가들에 대한 유대인 지배를 뜻하는 용어였다. 21세기인 지금도 반유대주의자들은 “시온 원로 의정서”에 실린 그대로, 유대인의 세계 지배 음모론을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유대-메이슨(Judeo-Masonic) 음모론은, 프리메이슨(Freemason: 13세기 말 등장한 석공 길드. 현재는 정규 프리메이슨과 컨티넨탈 프리메이슨 두 그룹으로 나뉨)이 유대인의 국제 음모 대행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1. 반유대주의

    반유대주의는, 셈어족 유대인은 인도-유럽어족인 아리안족과는 다른 인종으로, 두 인종은 결코 함께할 수 없다는 인종 이론에 근거한 용어이다. 이는 반유대주의가 종교가 아닌 인종에 토대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 용어는 유대인의 탐욕, 특별한 돈벌이 재주, 힘든 일에 대한 혐오, 배타성, 눈에 거슬리는 태도, 사회적인 접촉 기피, 유별난 애국심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반유대주의는 또 유대인의 범죄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유대인이니까...라는 식이다. 역사적으로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 차별, 학살, 조직적 폭력을 대신하는 말이기도 했다. 유명한 반유대주의 사건들로는 1096년 라인란트 대학살, 1290년 영국 에드워드 I세의 유대인 추방령, 흑사병이 유대인 때문이라는 이유로 1348년부터 1351년까지 있었던 스페인, 독일, 프랑스의 유대인 학살과 추방, 스페인 종교재판과 1492년 유대인 추방, 1648년부터 1657년까지 우크라이나 코사크 족의 유대인 대학살, 1821년부터 1906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대유대인 포그롬, 1894년부터 1906년까지 있었던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유대인 드레퓌스 프랑스 육군 대위를 프러시아 간첩 혐의로 무고한 사건), 제2차세계대전중 나치에 의한 대학살과 소련의 반유대인 정책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반유대인 사건은 유럽에서 발생하였지만, 20세기 이후 중동 지역에서 현저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고대 이교도와 초기 기독교를 현대 반유대주의의 뿌리로 보고 있다. 체인스(Jerome A. Chanes: 콜럼비아 대 교수)는 반유대주의 발전 과정을 6단계로 분류한다.

제1단계: 기독교 이전, 인종적 경향이 강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 단계

제2단계: 종교적 특색이 강했던 고대와 중세 기독교도에 의한 박해

제3단계: 무슬림에 의한 박해

제4단계: 계몽주의 시대 및 그 이후 유럽에서의 박해

제5단계: 20세기 나치에 의해 정점을 찍은 인종적 반유대주의

제6단계: 새로운 반유대주의로 인식되는 오늘날의 반유대주의.

그는 또 이 여섯 단계를 인종적 색채가 강했던 고대 반유대주의, 종교적이었던 중세 기독교의 반유대주의,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 인종에 토대한 반유대주의로 3분하기도 한다.

    최초의 반유대인은 기원전 3세기, 당시 최대의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존재했고 성경 70인 역(Septuagint: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이 이루어졌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있었다. 그 시대 승려이며 역사가였던 마네토(Manetho)는, 유대인을 혹평하는 글을 썼다. 그는 이집트 신들을 믿지 말라는 모세의 가르침을 받은 유대인들이, 이집트 당국으로부터 문둥이 취급을 받아 추방을 당하였다고 했다. 그의 뒤를 이어 타키투스(Tacitus, 56~120 CE. 로마 역사가, 정치가)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글을 썼다. 아가타르쿠스(Agatharchus: 기원전 2세기 그리스 역사학자, 지리학자)는 기원전 320년 이집트 침공 시,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안식일에 전투를 하지 않고 쉬었기 때문에, 프톨레미 I세(Ptolemy I Soter, 367~282 BCE. 이집트 파라오)가 쉽게 예루살렘을 공략할 수 있었다며, 그들의 율법이 어리석다고 했다.

    마네토의 글에서 보듯, 반유대주의는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필로(Philo Judaeus, 20 BCE~50 CE. 유대인 철학자)는, 수천 명의 유대인이 살해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학살 사건(38 CE)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사건은, 사람들을 기피하는 유대인이 그 원인이었을 수도 있었다. 체리코베르(Victor A. Tcherikover, 1894~1958. 유대계 러시아 학자)는 헬레니즘 시대 유대인에 대한 혐오는, 그들이 그리스 인들을 상대하지 않고 고립된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편견은,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의 많은 글에서 볼 수 있다. 그 이유를 헤카타에투스(Hecataetus, c. 360~290 BCE. 그리스 역사학자)는, 출애급을 잊지 않기 위해 사람들을 피하고 엄격한 생활을 하도록 모세가 제도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 종교와 사회 규범을 잘 따르지 않았다. 따라서 헬레니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세속화하고 할례, 안식일 등 유대인의 종교적 관습을 금지한 예가 많았다. 이러한 금지의 예는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속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생한 반 유대인 폭동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이 폭동으로 유대 용병들이 세운 나일강 엘레판틴 섬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기원전 410년 그 성전과 함께 붕괴되었다.

    정복자 로마 제국과 피정복자 유대인과의 관계는 유대인 반란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티베리우스 황제(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 42 BCE~37 CE)는 과거부터 살아온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하였다. 4세기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적대적 태도도 더욱 악화되어 갔다. 캐롤(James Carroll, 1943~. 미국 언론인, 가톨릭 교회 개혁 운동가)은 로마 제국 전체 인구 10%가 유대인으로, 대량 학살이나 개종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 세계 유대인구는 현재의 1천3백만이 아닌, 2억 명을 넘어섰을 것이라고 했다.

    6세기 후반 이베리아 반도(스페인)의 서고트(Visigoths: 게르만 족의 일파)와 가톨릭교회는 강제 개종, 노예화, 추방, 사형 등을 통해 유대인을 탄압하였다. 똘레도(Toledo)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남쪽 76킬로 지점에 위치하는 중세의 도시로 서고트족의 수도였다. 이곳에서 서기 586년에 로만 가톨릭의 제3차 종교회의가 있었다. 이 종교회의에는 당시 스페인 반도를 지배하던 서고트 족의 왕 “리카리드(Reccared, 559~601 CE)”의 왕권이, 로마교황으로부터 승인 받느냐 하는 문제가 걸려 있었다. 승인이 없으면 교황의 파문권으로 인해, 세속의 왕권 유지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Arius, 256~336 CE) 교리를 고집했던 리카리드는 결국 교황이 요구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298 CE) 교리와 유대인에 대한 차별 조치” 를 받아들인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예수는 인간으로서 다만 초인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 교리는, 니케아 제1차 종교회의(325 CE)이래 교황청의 정통 교리인 아타나시우스 교리 즉, 삼위일체설을 부정하였다.

-똘레도-

    똘레도 종교회의 역사적 의미는 바로 이 회의에서, 그 이후 기나긴 세월에 걸친 유대인에 대한 법적, 제도적 차별이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이 회의에서, “유대인의 공직 취임 금지, 토지 소유 금지 및 농업 금지, 상업 금지,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도와의 결혼금지, 할례 금지, 유대교 휴일 준수 금지, ...” 등등에 걸친 결정이 있었다. 말하자면 유대인의 사회적 활동 및 먹고 살 길을 완전히 막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구속은 1천2백년이 지난 프랑스 대혁명에 이르러서야 해제가 된다.

    이 같은 구속은, 711년 이슬람 군대가 스페인을 침략했을 때,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 군대의 편에 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이슬람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유대인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 덕택으로, 8세기부터 11세기까지 유대인이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한 곳은 이슬람 정복하의 스페인이었고,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상인들로부터 예금을 받아 칼리프들을 상대로 대출을 하였다. 이를테면 사업으로서의 금융업이 시작된 것이다. 은행업은 칼리프들에게 매우 편리했고, 따라서 그들은 유대 금융업을 후원하기도 했다. 출애굽기(22:25)는 이자를 금지하고 있다. 레위기도 “너희는 동족에게서 세나 이자를 받지 못한다(25:36~37)” 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가르침으로 중세의 기독교 세계에서는 대금업을 천시, 죄악시 하였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가 천시한 대금업은, 이방의 땅에서 달리 먹고 살 길이 없던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생존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금융업은, 톨레도 종교회의 이후 유대인들이 지켜온 긴 역사를 가진, 그들의 존속을 가능케 했던 사업인 것이다.

    9세기부터 이슬람 세계는,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을 디미스(Dhimmis: 이슬람 국가 거주 비무슬림)로 분류하여, 중세 유럽 가톨릭 국가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였다. 적어도 11세기까지, 이슬람 치세하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황금기를 누렸으나, 1011년 꼬르도바(Cordoba)와 1066년 그라나다(Granada)에서 반유대인 폭동이 발생함으로써 이 같은 자유는 끝이 났다. 11세기부터 이집트와 시리아, 이락, 예멘에서 시나고그 폐쇄 관련법이 제정되어 시행되기도 했다. 그밖에도 12세기부터 18세기까지 예멘, 모로코, 바그다드의 유대인들은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강요받았고,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죽음을 당하였다.

    서기 1147년까지, 마그레브(Magreb: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와 안달루시아(Andalusia: 스페인 남부)를 지배했던 알모하드 칼리프 왕국(Almohad Caliphate)은, 앞선 왕조들보다 더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로서, 디미스를 거칠게 다루었다. 죽음이나 개종이냐라는 선택 앞에서, 많은 유대인들과 기독교도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떠났다. 그들 가운데 마이모니데스(Maimonides)같은 사람들은 보다 관대한 무슬림 국가들을 향해 동쪽으로 갔다. 물론 유럽 가톨릭 왕국들로 가, 정착한 유대인들도 많았다.

    중세 유럽 유대인들은 혈액 모독(Blood Libel: 유대교 의식에 필요한 피를 얻기 위해 유대인들이 기독교 소년을 살해한다고 모함한 반유대인 모략), 추방, 강제 개종, 대량 학살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학대는 흔히 종교적 이유로 정당화되었고, 십자군 시대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하였다. 서기 1096년 제1차 십자군이 출발하기 전, 수천 명의 유대인이 학살(Rhineland 대학살: 프랑스 및 신성로마제국 폭도들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사건)을 당하였다. 라인란트 대학살은 스페인 밖 최초의 유대인 학살 사건으로, 19세기 시온주의자들이 이스라엘 국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논거가 되기도 했다.

    서기 1147년 제2차 십자군 원정 기간에는, 수차례에 걸친 유대인 학살이 있었다. 서기 1251년과 1320년에 있었던 목자들의 십자군(Shephards' Crusades: 교황의 허락을 받지 않은 농부, 장인, 자칭 기사들로 구성된)과, 1298년 린트푸레이슈(Rindfleisch Movement: 독일 최초의 대규모 유대인 대학살 사건)에서도 대규모 유대인 대학살이 있었다. 서기 1290년에는 영국으로부터, 1394년에는 프랑스로부터 10만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추방을 당하였다. 서기 1421년에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쫓겨나, 폴란드로 갔다.

    르네상스 시기 유럽 반유대인 정서를 심화시키고 합법화 시킨 세력은, 프란시스코 예수회의 베르나디누스(Bernardinus, 1439~1494. 이태리 파비아 펠트레 마을의 탁발승)와 도미니크 예수회 소속 페르레르(San V. Ferreri, 1350~1419)였다. 그들은 열정적이고 선동적인 연설로 반유대주의를 부추겼다. 14세기 중엽 발생한 흑사병은 유럽을 초토화시켜 많은 백성들이 죽었고, 유대인들은 이 죽음의 희생양이 되었다.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뿌려 그 병이 발생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이로 인해 수백 곳의 유대인 공동체가 파괴되었다. 서기 1348년, 교황 클레멘트 VI세(Clement VI, 1291~1352)는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두 차례의 교서를 발표하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서기 1349년 2월14일, 신성로마제국 슈트라스부르크에서는 9백 명의 유대인들이 산채로 불에 태워져 죽었는데(Strasbourg massacre), 그곳은 아직 페스트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었음에도 그랬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종교 개혁을 주도한 인물)는 1543년 남긴 그의 글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서, 반유대인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 거친 언어와 폭언으로 유대인을 묘사하고, 그들에 대한 압박과 추방을 요구하면서, 그들을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 상세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우리들은 그들을 죽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라는 마틴 루터의 글귀는, 존슨(Paul Johson, 1928~2023. 영국 언론인, 역사가)에 따르면, 현대 반유대주의 출발점으로 홀로코스트의 길로 가는 거대한 첫 발걸음이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국은 17세기 중, 후반기 혼란으로 인구의 1/3을 이상(3백만 이상)을 잃었고, 이들 가운데는 수십만의 유대인들이 있었다. 최초의 혼란은 크멜니츠키 봉기(코사크 족 반란)로, 크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 1595~1657. 우크라이나 코사크 군사령관)의 지지자들이, 오늘날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의 유대인 수만 명을 학살하였다. 정확한 유대인 희생자 수를 알기란 불가능했으나 이민, 질병으로 인한 사망, 오토만 제국으로 잡혀간 포로 등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유대인 인구는 20만에서 10만으로 줄어, 수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음을 알 수가 있다.

    17세기 초, 유럽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오면서 반유대주의도 함께 왔다. 당시 뉴 암스텔담(현재의 뉴욕) 네델란드 총독 스타이브샌트(Peter Stuyvesant, 1610~1672)는 유대인 정착을 금지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처럼 식민지 시대 미국 정부는 유대인의 정치적, 경제적 권리를 제한하였다. 유대인이 투표권 등 권리를 획득한 때는, 미국 독립전쟁 이후였다. 그러나 미국의 유대인 차별은 최악의 경우에도, 과거 유럽에서 만큼 가혹하지 않았다. 17세기 시아파 자이디(Zaydism: 시아파의 한 분파) 치하의 예멘(Yemen)에서도, 유대인들은 역시 차별의 대상으로, 불모의 해안 지방 티하마(Tihamah)로 추방되었다. 이 추방은 “마우자(Mauza: 홍해 해안의 항구)추방”으로 알려져 있다.

계몽주의 시대

    서기 1744년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여왕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 1717~1780)는 보헤미아로부터 유대인 축출을 명하였으나, 유대인들은 10년마다 재거주를 위한 세금을 납부한다는 조건으로 추방 명령을 번복하였다. 이 세금은 일종의 강탈로, 유대인들 사이에 말케 겔트(malke-geld: 이디쉬어로 여왕의 주머니 돈을 뜻함)로 알려 졌다. 서기 1752년 여왕은, 유대 가정에 아들 한 명으로 제한하는 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마리아 테레사-

    서기 1782년 합스브르크 계몽주의 군주 요세프 II세(Joseph II, 1741~1790)는 공문서에 이디쉬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않고, 유대인들의 자치적인 사법체계를 폐지한다는 조건으로, 유대인에 대한 모든 박해를 폐지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 칙령은 루터파, 칼빈파, 세르비아 정교, 유대교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칙령이기도 했다. 그러나 멘델스존(Moses Mendelsson, 1729~1786. 유대계 독일 철학자)은, 이 같은 허용은 공개적인 박해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즉, 종교의 자유를 허락할 수 없다는 뜻).

    볼테르(Voltaire, 1694- 1778.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의 저서 철학 편지(Lettres philosophiques), 철학사전(Dictionnaire philosophique), 캔디드(Candide)등은 유대인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유대인에 대한 그의 적대감은 프랑스 여론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가톨릭 반종교개혁주의자 보날드(Louis de Bonal, 1754~1840. 철학자)는 왕당파로서, 유대인 해방을 철회할 것을 주장, 나폴레옹의 알사스 지방 유대인 공민권 제한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글 "유대인에 관하여(Sur les Juifs)"는 반자유주의, 반유대적인 기독교 사상을 결합한 그 시대 가장 악랄한 글 중 하나로 유대인들을 대금업자와 동일시하였고, 이는 드뤼몽(Édouard Drumont, 1844~1917. 반유대 프랑스 언론인)과 같은 극우 반동주의자들, 오라노(Paolo Orano, 1875~1945. 이태리 정치인)같은 민족주의자들, 투스넬(Alphonse Toussenel, 1803~1885. 프랑스 박물학자)같은 반유대 사회주의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보날드는 유대인을 “외계인”으로, 그 공동체를 “국가 내 또 다른 국가”라며, 그들을 쉽게 구별하려면 눈에 띄는 표시를 강제로라도 달게 해야 한다고 했다.

-볼테르-

    프랑스 제2제정 시기 가톨릭 언론인으로서 반혁명적, 반유대주의자였던 뵈이요(Louis Veuillot, 1813~1883)는 보날드를 따라 유대인을 “귀족 대금업자”라 칭하고, 예수를 살해한 자들로 공격하였다. 서기 1882년부터 1886년까지 불과 4년 동안 프랑스 가톨릭 사제들은 20권 이상의 반유대주의 서적을 발간하였고 유대인들을 국외나 게토로 추방하거나, 교수대로 보낼 것을 정부에 촉구하였다. 무소(Gougenot des Mousseaux, 1805~1876. 프랑스 반유대 언론인)의 저서 “유대인, 유대교와 기독교도의 유대인화”는 현대 반유대주의 바이블로서,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1892~1946. 나치 이론가)가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제정 러시아 시대

    서기 1768년 폴란드 우만(Uman: 현 우크라이나 중부 도시)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코사크 민병대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서기 1772년 러시아 캐더린 II세(Catherine II, 1729~1796) 여왕은 러시아 서부 지역(Pale of Settlement: 현재의 폴란드, 우크라이나, 백러시아에 해당하는 지역)을 유대인 정착지로 명령하고, 폴란드 분할 이전 그들이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804년부터, 거주지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서기 1827년 니콜라스 I세(Nicholas I, 1796~1855)는 18세 이하의 유대 소년들을 징집하여, 25년간 군 복무를 시키는 병역법을 제정하였다.

    러시아 알렉산더 II세(Alexander II, 1818~1881) 치세하 유대인들은, 어느 정도 자유로웠다. 그러나 1881년 황제가 암살을 당한 후 유대인에 대한 압력이 심해지면서, 새로운 법(May Laws of 1882: 거주지 제한 등 유대인 제재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니콜라스 II세의 왕자 시절 가정교사였던 포베도노스체프(K. Pobedonostsev: 별명 검은 황제)는, “유대인 1/3은 죽음을, 1/3은 국외추방을, 나머지 1/3은 기독교로의 개종”을 시켜야 한다고 했다.

19세기 이슬람의 반유대주의

    19세기에 들어 무슬림 세계의 유대인들은 불리한 환경에 직면하였다. 모리스(Benny Morris, 1948~ 벤구리온 대 교수. 역사학)는, 무슬림 어린이가 유대인에게 돌을 던지는 장면을 목격한 19세기 어떤 여행자의 말을 빌어, 그 사건은 유대인들의 상황이 악화된 하나의 상징이었다고 했다. 19세기 중엽 페르시아 유대인들의 생활 조건은 16세기로 되돌아갔으며, “그들은 격리된 마을에서 살아야 했고, 불결하다는 이유로 가혹한 대접을 받았으며 무슬림들이 있는 거리로 나서는 경우, 아이들과 군중들이 돌과 오물을 던졌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만큼은 유대인 생활 조건은 좋아지고 있었다. 몬테피오레(Moses Montefiore, 1784~1885. 영국 은행가, 박애주의자)는 1875년 일곱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새로 솟는 건물들을 목격하고는, 시온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이 이루어질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이 시기 무슬림이나 아랍인 기독교도들도 푸림(Purim)이나 과월절 축제에 참석할 수 있었다. 아랍인들은 세파르디 유대인들을 아랍의 자손이라고 했다. 울레마(Ulema: 이슬람 율법을 해석하거나 전하는 사람)나 랍비들은 가뭄이 들면, 유대인과 함께 기우제를 드리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있었던 드레퓌스 재판 때 무슬림들은, 기독교 가해자들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그의 편을 들었다.

인종적 반유대

    독일 음악가 바그너(R. Wagner, 1813~1883)는 현대 반유대주의 창시자로 불리는 인물로, 1850년 “음악에서의 유대주의”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음악을 위한 새 시대 정신”이라는 긴 가명으로 쓴 이 논문에서 그는, 경쟁자인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과 메이에르베르(Giacomo Meyerbeer, 1791~1864. 독일 오페라 작곡가)를 비롯하여 유대인들을 진정한 독일 예술 창조가 불가능한 기생충들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독일 문화에 백해무익한 존재들이라며 비난했다. 유대인들이 화폐 경제를 통제, 조작하고 있으며 유대인의 자유로움은 해방을 맞은 것 이상의 상태라고 했다. 아울러 돈이 권력인 한, 유대인은 앞으로도 계속 지배 세력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익명으로 발표되었던 그의 논문이 19년 후인 1869년 재발표되었을 때, 유대인은 부패하다는 관념이 이미 널리 퍼져, 자연히 바그너의 이름도 알려지게 되었다. 반유대주의는 그림 형제의 동화책에도 등장하여 유대인들을 악당으로 묘사한 “훌륭한 거래”, “가시밭의 유대인”등 그의 동화책이 소개되었다. 19세기 중엽 챠르 체제하의 동유럽에서도 유대인들에 대한 정부의 괴롭힘이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1846년 80명의 유대인들이, 유대 전통 복장을 입을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바르샤바 총독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거절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머리털과 수염이 잘리고 그 이발 비용도 털이 잘린 그들이 지불하였다.

    휘트만(Walt Whitman, 1819~1892. 미국 시인)같은 영향력 있는 인물도, 미국 내 유대인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 관대하였다. 그가 편집자로 일하던 신문 “부르클린 이글스”는 유대인을 나쁜 시각에서 보는 기사를 쓰곤 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악명 높은 반유대인 사건이었다. 서기 1894년, 프랑스 육군의 유대인 포병 대위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는 프러시아에 비밀을 넘겼다는 혐의로 피소되었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남미 프랑스령 가이아나 악마의 섬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는 들끓었고, 드레퓌스의 유무죄를 놓고 여론이 둘로 나뉘었다. 그러나 진범 에스테르하지(Marie Charles Esterhazy, 1847~1923. 프랑스군 보병 소령)가 체포되었다. 에밀 졸라(Émile Zola, 1840~1902. 프랑스 소설가, 언론인)는 드레퓌스의 편을 들어, 프랑스 사법 체계를 부패시킨 군을 크게 비난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여론은 드레퓌스의 유죄로, 80%의 프랑스 언론은 그를 비난하였다. 이는 그 시대 프랑스인 대다수가 반유대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걸 말하고 있다.

    프러시아 빌헬름 I세 궁정의 루터 파 목사 슈퇴커(Adolf Stoecker, 1835~1909)는, 1878년 기독교 사회당이라는 명칭의 반유대, 반자유주의 정당을 창설하였다. 이 정당은 소수당으로 그가 죽은 후 지지자들도 줄어들었으나, 그 당원들은 대부분 독일민족 당(Deutschnationale Volkspartei: 나치 등장 이전의 독일 최대 보수 정당)에 합류하였다.

    칼 마르크스의 논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On the Jewish Questions)”를 반유대주의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마르크스는 유대교가 자본주의를 확산 시키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의 논문은 나치즘은 물론, 소련과 아랍 세계의 반유대주의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마르크스도 유대인을 조상으로 두어 난처한 입장에 있었고, 따라서 정치적 권리 획득을 위해 싸우는 프러시아 유대인 공동체를 도왔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는, 유대인을 추방하더라도 기독교로 개종 시킨 후 추방해야 한다는 바우어(Bruno Bauer, 1809~1882. 독일 철학자, 신학자)와, 자유권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는 것이다. 몽크(Iain H. Monk: 영국 Exeter대 교수. 정치학)도 이 논문을 마르크스의 반유대주의로 인식한 것은, 피상적으로 읽고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20세기

    1900년부터 1924년까지 약 1백75만 명의 유대인이 포그롬을 피해 유럽으로부터 미국으로 이민을 하였다. 1900년 이전 미국의 유대인은 미국 전체 인구의 1%도 안 되었으나, 1930년에는 약 3.5%를 기록하였다. 이 같은 증가로 일부 유대인의 사회적 신분이 상승하면서, 반유대주의가 재등장하게 되었다. 20세기 전반 미국 내 유대인은 취업에서의 차별, 주택과 위락 시설 이용 제한, 각종 클럽이나 기구의 회원 자격 제한, 대학교 입학이나 교수직에도 인원수의 제한을 받았다.

    1915년 조지아주 마리에타(Marietta)시에서 한 무리의 시민들이 프랭크(Leo Frank, 1884~1915)를 집단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1913년 공장 감독자였던 유대인 프랭크가, 13세의 소년 공원을 살해했다고 하여 발생하였다. 그의 재판은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15년 사형 선고 후 감형을 받은 그에게 이 같은 집단 폭행이 가해진 것이다. 이 사건은 사회적, 정치적으로는 물론 특히 반유대주의와 관련하여 관심을 끌었다. 오늘날 그에 대한 판결은 오판으로 밝혀졌고, 진범은 따로 있었다. 이 사건은 1870년 이후 활동을 중단하고 있었던 KKK단이 부활하는 촉매가 되기도 했다.

    미국의 반유대주의는 1차대전이 끝난 1918년부터 2차대전이 시작된 1939년 기간에 최고조에 달하였다. 자동차 왕 헨리포드(Henry Ford, 1863~1947)는 자기 소유 신문(the Dearborn Independent)에 반유대주의 선전문을 올리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 커프린 신부(Charles E. Coughlin, 1891~1979. 가톨릭 신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은 유대 금융자본의 음모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와 의견을 같이 하는 저명 정치인들도 있었다. 하원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장인 맥파든(Louis T. McFadden, 1876~1936)은 루즈벨트의 금본위제도 폐지는 유대인 때문이며 “현재 미국 유대인들은 합법적인 화폐를, 비유대인들은 종이쪽지만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유대인을 비난했다.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있었던 베일리스(Menahem Mendel Beilis, 1874~1934) 재판은 현대판 혈액 모독의 전형이었다. 이 사건은 베일리스가 제례에 필요한 혈액을 얻기 위해, 키에프에서 소년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었다. 긴 재판 끝에 그는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는 러시아 제국의 반유대인 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러시아 내전 중에는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포그롬으로 학살을 당하였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 독일 정부는, 유대인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억압적인 법률을 제정하였다. 1935년 9월에 제정된 뉘른베르크 법(Nürnberg Laws)은 아리안과 유대인간의 성관계는 물론 결혼을 금지하고, 독일 내 유대인들은 그 혈통이 1/4이든 1/2이든 모두 시민권을 박탈하였다. 1938년 11월 9일과 10일 밤에는 “깨어진 유리창의 밤(Kristallnacht)”이라는 이름의 포그롬이 발생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생명과 재산을 잃고, 시나고그는 불에 탔다. 이때 반유대 법률과 선전선동은, 유럽 전역 독일 점령지역으로 퍼져나가, 그곳 반유대주의 밑거름이 되었다.

    1940년 저명한 조종사인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 1902~1974. 뉴욕-파리 최초 비행 조종사)와 많은 미국인 저명인사들은, 미국의 유럽 전쟁 참전을 반대하는 위원회(the America First Committee)를 이끌었다. 린드버그는 유대인들이 독일과의 전쟁터로 미국을 몰아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자신이 반유대주의자가 아님을 주장했지만, 그가 쓴 편지와 비행일지 등 많은 글에서, 유럽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유대계 언론들을 여러 차례 언급하였다. 1938년 11월 어느 날 쓴 일기에 그는 “깨어진 유리창의 밤”에 대해, 독일 측 입장에서 생각해보아도 그 폭동을 이해할 수 없고, 분명 “유대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나, 그처럼 비이성적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고 기록해놓았다. 여기서 독일에 “유대인 문제”가 있다는 그의 언급은, 그가 나치에 동의했음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린드버그의 지인인 마윌(Jonathan Marwil: 미시간 대 교수. 역사학)은, 그의 반유대적인 발언은 “유대인 문제” 그 말 한 마디뿐이었고 그를 반유대주의자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나치는 폴란드 바르샤바, 크라코우(Kraków), 르보브(Lvov), 루블린(Lublin), 라돔(Radom)등지의 게토로 유대인들을 강제로 몰아넣었다. 1941년 독-소 전쟁이 개시된 후 1942~1945 기간 나치에 의한 대량학살(Holocaust)은 그 정점에 달하였다. 나치의 목표는 1천1백만의 유대인 말살이었고, 결국 약 6백만의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 후

    2차 대전 이후에도 반유대주의는 계속되었다. 소련의 반유대주의는 스탈린과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 유대계 소련 정치인)간 갈등, 정부의 선전선동으로 인한 수많은 음모론 때문에 반유대주의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 결과 1948년 소위 “뿌리 없는 사해동포(유대인에 대한 완곡어)” 와의 싸움에서 수많은 이디쉬어 유대 시인, 작가, 화가, 조각가들이 살해되거나 체포를 당하였다. 이어 1952년 소위 “의사들의 음모 사건(Doctors' Plot: 공산당이 주장한 유대인 의사들에 의한 당, 정부 고위 인사 살해 음모 조작 사건)”에서 반유대주의는 그 절정을 이루었다. 2차 대전 이후 반유대 선전선동은 폴란드에서도 일어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대탈출이 있었다. 키엘체(Kielce: 폴란드 남부 도시) 포그롬과 “1968년 3월 대행진” 은, 유럽의 반유대주의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전후 폴란드에서 발생한 반유대주의 사건들은 모두 혈액 모독과 관련이 있었다.

    21세기인 지금도 유럽에서는 구타, 도검에 의한 상해 등 유대인에 대한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유대인들이 있었다. 2015년 미국무부 보고서는, 유럽의 반이스라엘 감정이 반유대주의로 확대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 같은 반유대주의 폭력 증가는 2008년 금융위기의 결과로, 무슬림의 반유대 및 극우정치집단들과 관련이 있다. 동유럽 및 서유럽에서 극우사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증가함에 따라, 반유대주의 활동도 빈번해지면서 유대 기념물, 시나고그, 유대인 공동묘지, 유대인 개인에 대한 신체적 공격도 늘고 있다. 동유럽에서는 소련의 붕괴가 유대인 때문이라는 비난과 함께 정책 결정자에 대한 유대인의 뇌물 제공 등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유대인을 모략하고 있다.

    동유럽의 반유대 사건은 대부분 유대인 공동묘지나 건축물 훼손이다. 신체에 대한 공격으로는, 2006년 모스크바 볼샤야 브로나야가의 유대 시나고그에서 신나치주의자가 아홉 명의 유대인을 칼로 공격한 사건이 있었다. 이 시나고그는 1999년에도 폭탄 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어 2009년에는 우크라이나 중부 도시 우만(Uman)에서 유대인 순례자들에 대한 공격이 있었고, 몰도바(Moldova)공화국 기독교 단체가 메노라를 손상 시킨 사건이 있었다. 현재 유럽 국가로서 반유대 정책을 취하는 나라는 없지만,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서 포퓰리즘과 민족주의가 등장하면서 유대인들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이코노미스트지의 지적이 있다.

    인권감시기구(Human Rights Watch: 뉴욕에 본부를 둔 비정부 국제기구)의 창립자인 번슈타인(Robert Bernstein, 1923~2019. 미국 인권 활동가)은, 반유대주의가 현대 아랍 국가들에 깊이 뿌리를 내려, 제도화되고 있다고 했다. 2011년 퓨연구센터(Pew Research Center: 워싱턴에 본부를 둔 싱크 탱크)조사에 따르면, 중동 주요 무슬림 국가들은 모두 유대인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부정적이라고 했다. 설문에 응한 응답자 중 이집트 2%, 레바논 3%, 요르단2% 만이 유대인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중동을 벗어난 무슬림 국가도 마찬가지여서 터키 4%, 인도네시아 9%만이 유대인에 호의적이었다.

    2011년 워싱턴에서 개최된 홀로코스트 전시회에서 있었던, 유대인에 대한 중동 언론 논평은 놀라울 정도로 나치 선전과 유사했다. 요페(Josef Joffe: 독일 Die Zeit 기자)는 “반유대주의는 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단순한 비난이 아닌, 히잡이나 후카(Hookah: 물담뱃대)처럼 아랍인들 일상생활의 중요한 일부이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은 서구사회에서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지만, 아랍 세계에서는 문화적 질병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다. 중동 국가 무슬림 지도자들은 흔히 유대인을 원숭이나 돼지의 후손으로 언급하는데, “돼지”라는 어휘는 유대인이나 기독교도들을 지칭하는 그들의 전통적인 언어이다. 위스트리치(Robert S. Wistrich, 1945~2015. 예루살렘 대 교수. 역사학)는 이란, 하마스, 헤즈볼라, 이슬람 지하드, 무슬림 형제동맹이 주장하는 이스라엘 파멸은 다름 아닌 현대판 홀로코스트라고 했다.

    2022년 미국 유대인 협회(American Jewish Committee)는, 자신들을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블랙 히브리 이스라엘인(Black Hebrew Israelite: 미국 흑인들이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을 위험한 잠재력을 가진 반유대주자들로 보았다. 이들은 미국 내 유대인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이들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5건에 달하는 종교관련 범죄를 저질렀다. 이들은 유대인을 남의 이름을 사칭하는 협잡꾼이라며, 아메리카 흑인들의 진정한 인종적, 종교적 정체성을 훔쳐간 족속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 유대인의 기원에 관하여 반유대주의적인 카자르 이론(Khazar theory: 아쉬케나지 유대인은 6세기 후반 터키에 살았던 유목민의 후손이라는 설)을 퍼뜨리고 있다. 2019년 현재, 미국 흑인 4%가 블랙 히브리 이스라엘인임을 자처하고 있다.

2.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

    12~13세기에 가톨릭의 반유대교가 심해지면서, 1215년 교황 인노센트 III세(Innocent III, 1161~1216))가 소집한 제4차 라테란 종교회의에서 반유대인 조치가 채택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왕국들은 점증하는 반유대 감정에 관심을 가졌지만, 어쨌든 유대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보호를 하여, 왕국에 이익이 되도록 하였다. 이처럼 14세기 이전까지 알 안다루스(Al-Andalus: 이베리아 반도) 무슬림 칼리프 왕국의 치세하 유대인들은, 디미스(dhimmis: 이슬람국의 비이슬람교도)신분으로 자유롭게 살았다. 권리 면에서 유대인들은 무슬림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유럽 어느 기독교 왕국들보다는 더 좋은 조건 속에서 살았다.

-알 안다루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대인에 대한 관대한 시기는 끝이 나고 갈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마음이 바뀐 것이 아니라 환경이 바뀐 것이다. 스페인의 세 종교(가톨릭, 기독교, 이슬람)간 평화 시대는 영토, 인구, 경제 등 모두가 확장된 시대로,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은 모두 경제적 번영에 기여를 하여 자기 몫을 차지할 수가 있었다. 반면 가톨릭교회와 탁발 수도회(Mendicant orders: 로마 가톨릭 수도회의 한 형태)의 전투적인 반유대주의는 거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흑사병과 더불어 전쟁과 자연재해 등 14세기의 사회, 경제, 정치적 변화는 새로운 상황을 불렀다. 사람들은 그 상황을,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했다. 성직자들은 신자들에게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오라고 했다. 그러자 가톨릭은 “예수님을 죽인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수치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바로 유대인들을 인식한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 최초의 유대인 학살은, 1321년 목자들의 십자군(Shepherds' Crusade)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오면서, 나바르라 왕국(Reino de Navarra: 스페인 북부 피레네 산맥 서쪽 끝 왕국)에서 발생하였다. 당초 가톨릭 군주들의 재정복(Reconquista) 지원을 위해 일반 백성들로 구성되었던 이 십자군은 귀족과 교회의 지원을 받지 못하자, 분풀이로 유대인 학살에 나섰다. 이로 인해 빰쁠로나(Pamplona: 현 나바르라 주 수도)와 리싸르라(Estella-Lizarra: 나바르라 마을) 유대인 공동체가 쑥밭이 되었다. 그 후 27년이 지난 1348년 발생한 흑사병이,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까딸로니아 여러 유대인 공동체들을 덮쳤다. 유대인들이 이 병을 퍼뜨렸다는 모략으로 이때 많은 유대인들이 죽었다. 까스띠야 왕국의 유대인 학대는, 뻬드로 I세(Pedro I, 1334~1369))때 발생한 내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 내전에서 뜨라스따마라(Enrique de Trastámara: 후일의 까스띠야 엔리께 II세)측은, 왕관을 두고 다투었던 이복형제 뻬드로(Pedro de Castilla)를 유대인 편으로 모략했다. 반유대주의를 무기로 했던 것이다. 서기 1355년 뜨라스따마라가 똘레도(Toledo)에 입성하면서, 그곳 유대인들에 대한 대학살을 저질렀다. 그로부터 11년 후, 그들이 부르고스의 브리비에스까(Briviesca)를 점령하면서 같은 일이 발생하였다. 서기 1366년, 부과된 막대한 공물을 납부하지 못한 브리비에스까 유대인들은 노예가 되어 팔려갔다. 서기 1367년 바야돌리드(Valladolid: 현 까스띠야 주 주도)에서 공격당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죽이려는 뜨라스따마라를 향해 마음에도 없는 “엔리께 대왕 만세”를 불러야 했다. 이 때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시나고그가 불타 내려앉았다.

-바야돌리드-

    이베리아 반도 유대인 최대의 재난은, 1391년에 발생한 까스띠야와 아라곤왕국 유대인 공동체 대학살이었다. 그해 6월 세비야에서는 대주교 죽음으로 인한 권력 공백 기간에, 에시하(Ecija: 현 스페인 남부 세비야주 도시)부주교 마르띠네스(Ferrand Martinez)가 폭동을 일으켜 유대인에 대한 약탈, 살인을 자행했다. 그는 1378년 반유대인 강경 발언을 시작으로 시나고그를 파괴하고, 기도서 탈취를 선동했다. 서기 1391년 1월 마르띠네스 폭도들은 유대인 거주 구역을 공격, 수백 명의 유대인을 살해하고 그 가정을 약탈하였으며, 시나고그는 가톨릭교회로 바뀌기도 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몸을 피해 도주하거나,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을 당하였다. 유대인에 대한 폭력은 세비야로부터 안달루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간 후, 까스띠야를 향하고 있었다. 8월에는 아라곤 왕국도 반유대 폭력에 휩싸였다. 살인, 약탈, 방화가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나바르라, 포르투갈, 프랑스, 북아프리카로 도주를 하거나 죽음을 피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였다.    

    이후 반유대인 조치는 더욱 강화되었다. 서기 1412년 까스띠야의 유대인 남자들은 수염을 기르고 옷에는 붉은색 배지를 달아 쉽게 구별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라곤 왕국의 경우 탈무드 소유는 불법으로 바뀌었고, 시나고그는 공동체당 한곳으로 제한되었다. 그밖에도 탁발 수도회는 유대인의 가톨릭 개종을 위해, 가일층 노력했다. 이 일을 수행한 페레르(Vincent Ferrer, 1350~1419. 발렌시아 도미니크 교단 수도승)는 가톨릭 군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아라곤 왕국의 유대인은, 1년에 3번 가톨릭 설교회 참가가 법정 의무였다. 서기 1391년 대학살의 결과, 1415년 랍비 등 유대공동체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까스띠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 유대인의 반 이상이, 모세의 율법을 포기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1415년까지 거의 1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이 아직도 까스띠야와 아라곤에서 유대교 예배를 계속하였다. 그렇지만 스페인 유대교는 다시는 그 원상태를 회복할 수가 없었다. 유대 공동체는 규모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지적으로도 무너져 내렸다.

    서기 1391년부터 1415년까지의 위기시대를 거친 후 유대인들은 가슴에 붉은 리본을 달거나 가톨릭 수사의 설교에 참석해야 하는 의무를 피할 수도 있었다. 또 알하마(Aljama: 이베리아 반도 가톨릭 왕국 내 이슬람과 유대인 자치 공동체) 재건과 종교 활동도 할 수 있었다. 이는 1432년 바야돌리드 알하마 지도자 회의가 합의하고 왕이 재가한 협정의 덕택이었다. 까스띠야 왕은 자기 치세하의 신민臣民이,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가질 수 있음을 허락하고, 소수민족인 유대인들이 합법적인 신분으로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 공동체는 왕의 승인 하에 재건되었다. 바야돌리드 회의를 주재했던 벤베니스떼(Abraham Benveniste, ?~1450. 랍비, 정치인)는 까스띠야 왕국의 전체 유대인에 대하여 권능을 갖는 법정 랍비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왕의 대변자이기도 했다.

    15세기 후반 가톨릭 군주 치세하 까스띠야와 아라곤 왕국의 많은 유대인들은 시골에 살면서 농업에 종사했다. 수공업이나 상업은 누구나 할 수 있었으나 국제무역은 개종자들 몫이었다. 유대인들은 대금업을 계속했고, 많은 그리스도인 대금업자들도 크게 증가하였다. 유대인들은 왕궁이나 교회, 봉건 영주들의 조세 징수 업무를 대행했으나 그 중요성은 점점 약화되었다. 까스띠야의 경우 그들이 징수한 세금은 총액의 1/4에 불과했다. 이와는 달리 까스띠야 궁정의 경우 유대인들은 행정적, 재정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세뇨르(Abraham Senior, 1412~1493. 세파르디 랍비)는 그라나다 전쟁(Granada War: 1482~1491기간 까스띠야와 그라나다 Nasrid 무슬림 왕국간의 전쟁)의 재정 조달 조직이었던 성형제동맹(Santa Hermanidad: 중세 스페인, 무장한 개인들로 구성된 평화 유지군)의 책임자로, 까스띠야 최고위 랍비이기도 했다.

    가톨릭 군주들인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디난드 왕은, 그들 왕국 초기부터 유대인 보호에 관심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바로 그들의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477년 9월 6일 세비야 유대인 공동체에 보낸 서한에서 이사벨라 여왕은 그들의 보호에 관해 언급하기를, 알하마 유대인과 그들의 재산을 보호하고 유대인에 대한 공격, 살해, 상해를 금지하며 그러한 상황에서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수동적인 태도를 용납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1492년까지 가톨릭 군주들은 유대인 보호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 군주들은 가톨릭 사제들의 유대인 차별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서기 1476년 마드리갈(Madrigal: 현 아빌라 주 마드리갈 시) 회의에서 이사벨라 여왕은 유대인의 사치스런 복장 착용 금지, 오른쪽 어깨 붉은 표시 의무, 그리스도인보다 높은 지위 금지, 그리스도인 하인 고용 금지, 고리대금업 금지 등에 관한 1412년 법률 위반을 꾸짖은 적이 있었다. 서기 1480년 똘레도 회의(Cortes de Toledo)는 이보다 더 엄격한 법을 채택하였다. 즉, 유대인 거주구역을 격리시켜, 주간을 제외하고는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때까지 유대인 거주구역은 도시 내에 있었음으로, 가톨릭교도들과 함께 살았다. 서기 1480년부터 유대 거주구역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게토로 변하였고, 유대인들은 가톨릭들에게 해가되거나 그들과 섞이지 않도록, 게토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2년을 살면 떠날 수 있게 하였으나 10년을 지나야 했고, 가톨릭들의 박해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유대인은 지정된 곳을 벗어나 가톨릭들이 사는 곳에서 살 수 없었다. 똘레도 회의 결정문은 무슬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 되었다. 게토로부터 유대인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결정은, 그들을 가톨릭들로부터 격리시켜 보호하기 위해서였고, 동시에 그들의 활동을 제한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면 유대인들은, 유대인으로서의 신분 포기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게토의 유대인들은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요받거나 자주권이 침해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톨릭으로의 개종이 유일한 해결책임은 변함이 없었다.

    서기 1480년 11월, 최초의 종교재판관이 세비야에 도착하였다. 백성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종교재판 첫해에 세비야에서만 7백 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5천 명이 가톨릭교회와의 화해 즉, 징역이나 국외 추방 또는 단순한 참회 형을 받았다. 물론 재산몰수형도 있었고, 형을 받은 사람은 공직 취임이나 교회의 일을 할 수도 없었다.

    심문 과정에서 조사관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많은 유대인들이 오랜 기간 친척들과 함께 유대 축일을 지키고, 심지어는 시나고그에도 참석하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조사관들은 개종자들이 계속 유대인을 만날 수 있다면, 겉으로만 개종을 하는 일이 계속될 것임을 알았다. 따라서 가톨릭 군주들에게 안달루시아로부터 유대인을 추방할 것을 건의하였다. 서기 1483년,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세비야, 꼬르도바, 까디스(Cadiz: 스페인 남서부 지브롤터 인근 항구)의 유대인들에게, 6개월 이내에 엑스뜨레마두라(Extremadura: 현 포르투갈 접경 스페인 내륙 자치주)로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알함브라 칙령 

    서기 1492년 1월 2일 이사벨라 여왕은 그라나다의 나스리드 왕국(Nasrid Kingdom: 이베리아 반도 남부 이슬람 왕국)을 정복하였다. 이에 따라 나스리드 왕 무함마드 XII세(Muhammad XII of Granada, 1460~1533)가 알뿌하르라스(Alpujarras: 스페인 남부 시에르라 네바다 산맥 남쪽 경사면 지역)로 물러남으로써, 800년에 걸친 무슬림의 이베리아 반도 지배가 막을 내렸다. 나스리드 왕국과 전쟁(그라나다 전쟁)을 끝낸 직후인 서기 1492년 3월 31일, 유대인 추방을 위한 알함브라 칙령(Alhambra Decree)이 내려졌다. 까스띠야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Isabella Católica, 1451~1504)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디난드(Ferdinand II, 1452~1516)왕이 내린 이 칙령은 고리대금과 이교도 전례, 가톨릭 세례 거부, 모세의 율법에 충실한 자(즉, 유대인)의 재산 몰수를 포함하여 과거의 법이 금지했던 금, 은, 말의 몰수도 가능케 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의 수많은 유대인들이 추방을 당하거나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였다. 

-그라나다-  

    추방은 까스띠야와 아라곤 왕국의 모든 유대인 남녀가 대상이었고, 추방당한 자는 누구도 다시 왕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나이, 거주지, 출생지에 따른 예외도 없었다. 4개월 이내에 떠나야 했고, 추가로 10일을 연장할 수 있었다. 기간 내에 떠나지 않거나 다시 돌아오는 경우는, 사형과 재산 몰수형에 처하였다. 유대인을 돕거나 숨기는 자도 같았다. 기한 내 떠나는 자는 재산을 처분할 수 있었으나 그 대금은 화폐와 금, 은, 말, 무기류의 대외 유출이 법으로 금지되었음으로, 어음 또는 상품으로 하여야 했다. 칙령에는 개종에 관한 언급은 없었으나, 그에 관한 암시는 있었다. 유대인들은 생사를 다투는, 4개월이란 무시무시한 기간 내에 신앙을 포기하고 남아 있던가, 아니면 떠나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가던 길을 돌아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태어난 곳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 재산을 싸구려 처분하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아브라바넬((Isaac Abravanel, 1437~1508. 유대계 포르투갈 정치가, 철학자)) 같은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 저명인사들이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까스띠야 왕국 랍비 대표자였던 아브라함(Abraham Senior, 1412~1493)은 왕의 측근으로, 그는 가족과 함께 1492년 6월 5일 과달루뻬 수도원에서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그의 대부모는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디난드 왕이었다. 그의 세례명 페르난(Fernan)은 페르디난드 왕의 세례명과 같았다. 그의 아들 페르난 뻬레즈도 마찬가지였다. 추방을 당한 유대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걸어서 또는 당나귀나 마차를 타고 길을 따라, 벌판을 지나 항구를 향하여 갔다. 가다가 병이 들어 죽고, 새로 태어나기도 했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하는 가톨릭교도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가톨릭 세례만 주려고 했다.

결과

    서기 1492년 스페인 유대교는 종말을 고하고, 그 이후 지하로 숨어들었다. 유대인은 언제나 종교재판의 위험에 처해 있었고 유대적인 것들, 심지어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도 가톨릭과 스페인의 적으로 의심을 받았다. 이때 스페인을 떠난 유대인 수는 추측에 토대한 것으로 역사가에 따라 다르다. 마리아나(Juan de Mariana, 1536~1624. 스페인 예수회 승려)는 80만, 아브라바넬은 30만으로 보았다. 보다 현대적인 바르셀로나 대학의 자료는, 15세기 스페인 총인구 약 7백5십만 명 가운데 40만의 세파르디 유대인이 있었고, 그 중 반인 20만이(아니면 30만 정도)가톨릭으로 개종 후 남아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세금보고와 유대 공동체 인구에 토대한 추정치는, 약 8만 명의 유대인과 20만의 개종자 가운데 약 4만이 추방된 것으로 본다.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비밀리에 유대교를 지켰고, 이들은 종교재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까스띠야 왕국의 유대인들은 아프리카와 포르투갈로 갔고, 아라곤 왕국의 유대인들은 이태리를 포함 가톨릭 국가들로 갔다. 대부분의 개종자들이 가톨릭 문화에 동화되었지만, 비밀리에 유대교를 지킨 유대인들은 그 후 유럽, 북아프리카, 오토만 터키 등 이미 유대인 공동체가 확립되어 있던 국가들로 서서히 퍼져 갔다.

    유대인 추방은 자본주의 탄생을 늦춰, 스페인 쇠락의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뻬레즈(Joseph Pérez, 1931~2020. 프랑스 역사학자)의 지적대로 조세와 경제활동의 관점에서 보면 유대인은 더 이상 부를 창출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은행가도 대금업자도 아니었고, 국제 수준의 사업을 하는 상인들도 아니었다. 유대인 추방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지만, 국가 수준의 재난은 아니었다는 견해도 있다. 스페인의 쇠락을 유대인 추방 탓으로 돌리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세파르디 디아스포라

    추방된 유대인들은 대부분 포르투갈, 북아프리카, 나바르라 왕국(Reino de Navarra: 피레네 산맥 서쪽 바스크 지역), 이태리 등지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1497~1498년 까스띠야와 아라곤으로부터 추방을 당한 사람들이었음으로, 그 후 스페인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된 그곳 정착지들을 또 다시 떠나야 했다. 나바르라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바욘느(Bayonne: 프랑스 남부 스페인 국경 지역)에 정착하였다.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영국이나 프랑드르 등 북유럽으로 갔다. 북아프리카 페즈 왕국(Fez Kingdom: 현재의 모로코를 지배했던 왕조)으로 갔던 유대인들은, 학대와 약탈 등 온갖 고통을 당했다. 심지어 오래전 먼저 와 있던 동족 유대인들로부터도 약탈을 당했다. 가장 대우를 잘 받은 곳은 북아프리카, 중동, 발칸 반도, 라구사(Republic of Ragusa: 현 크로아티아 최남단 Dalmatia의 Dubrovnik 시) 등지에서였다. 오토만 제국 술탄은 유대인을 환영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의 후계자 술레이만 대왕(Suleiman I, 1494~1566)은 아라곤 국왕 페르디난드를 가리켜 나라를 가난하게 만들어 타국을 부유케 한, 왕으로 부를 수 없는 자라고 했다. 술레이만은 또 신성로마제국의 챨스V세(Charles V, 1500~1558)가 파견한 외교사절에게, 까스띠야가 유대인을 버린 것은 부를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여 그들을 놀라게 했다.

-Dubrovnik 시-

   이베리아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세파라드(Sepharad: 히브리어로 스페인이라는 뜻)가 스페인과 이베리아 반도임을 알았음으로, 자신들을 호칭하는 세파르디라는 이름을 받아들였다. 세파르디는 조상의 관습을 유지하고 특히 스페인어 사용을 계속하였다. 그들이 현재 사용하는 스페인어는 중세 까스띠야어 그대로이다. 세파르디는 조상의 땅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 그 감정은 복합적이어서, 한편으로는 1492년의 비극적 사건에 원한을 품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잃어버린 고토에 대해 향수를 품고 있는 것이다. 라디노(Ladino: 스페인어 영향을 받은 유대어)의 정체성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15세기 스페인으로부터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스페인어와 스페인 관습을 동유럽에서 지키고 있다는 말이 있다. 유대인 추방으로 수많은 유대인 가정들이 이베리아 특히 안달루시아와 까스띠야로부터 쫓겨나, 오토만 터키 지배하의 이집트, 알제리아, 모로코, 터키, 그리스, 불가리아 등지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들은 훌륭한 사회적 기반을 갖춘 세파르디들로서, 지난 5세기 반 동안 자신들의 종교, 관습, 언어, 문학을 잃지 않고 보전하여 왔다. 15세기 말 그들이 가지고 나온 까스띠야와 안달루시아 스페인어는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있었던 언어적 진화를 겪은 적이 없다. 그 발성은 예스러우나 퇴화가 된 것은 아니다. 어휘는 그들이 살아온 지역에 따라 히브리어, 그리스어, 이태리어, 아랍어, 터키어로부터 수많은 어휘들을 차용하고 있다.”

    1968년 제2차 바티칸 공회는 알함브라 칙령을 공식적으로 무효화 하였다. 이는 19세기 스페인 종교의 자유에 관한 법률에 따라, 시나고그가 합법적인 예배 장소된 후 1세기가 지나 내려진 조치였다. 1924년 스페인 정부는 세파르디 디아스포라에 스페인 시민권을 부여하였고, 2014년에는 과거의 “부끄러운 사건”에 대한 보상으로 당시의 유대인 후손에 대해 스페인 국적을 부여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알함브라 칙령으로 인해 1492년 스페인으로부터 추방당한 유대인의 후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세파르디 유대인에게는, 현재 살고 있는 국가를 떠나지 않고, 현재의 국적을 바꾸지 않아도 스페인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하였다.


3. 종교 재판

    종교재판은 12세기 말 교황 루키우스(Lucius III, c. 1097~1185)가 프랑스 남부 알비 이단을 처단코자 교서(Ad Abolendam)를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알비 이단이란 프랑스 남부 피레네 산맥 가까운 도시 알비(Albi)의 카타리즘(Catharism) 교도들이다. 이들은 마니교의 영향을 받은 가톨릭의 일파로 가난한 삶, 엄격한 채식, 절대 정직, 금욕 등 경건하고 검소한 생활로 인해 당시 부패한 가톨릭 사제들의 적대 세력이 되고 있었다.

    중세기를 거치면서 교황의 정치적, 외교적 수단으로서 유럽 여러 왕국에서는 종교 법정이 운영되고 있었다. 아라곤 왕국은 1232년 교황 그레고리 X세(Gregory X, 1170~1241)의 파문법(Excommunicamus)에 따라, 종교 법정이 설치되었다. 아라곤 백성들은 종교재판에 적대적이었고, 종교재판에 대한 모욕이나 공격은 금지되었다. 교황은 이베리아 반도의 대규모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기독교도들에게 어떤 이단적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했다. 따라서 교황은 아라곤에 이어 다른 왕국들에게도 종교 법정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따라 13세기 나바르라가, 14세기 말에는 포르투갈이 교황의 종교재판 법정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까스띠야(후일의 스페인)는 유럽에서 입지가 강했고 군사력도 있어, 교황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힘과 저항을 통해 “교황의 종교 재판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있었다. 따라서 까스띠야에서 교황의 종교재판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신앙을 감시하고 배교자를 처벌하는 일은 주교단 소속 주교들 책임이었고, 언제나 왕의 지시를 받았다. 까스띠야는 내정에 간섭하려는 로마 교황과 심각한 긴장 관계에 있었다. 이 같은 긴장은 까스띠야가 모자랍(Mozarabic Rite: 교황청과는 다른 이베리아 반도 가톨릭 전례)포기를 거부하고, 이슬람으로부터 되찾은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교황의 지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주도적인 종교재판으로는 스페인(까스띠야) 종교재판, 교황청 종교재판, 포르투갈 종교재판 있었고 그 가운데 스페인 종교재판이 가장 주도적이었다.

    14세기 말 까스띠야는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유대인과 무슬림들에 관한 법률이 크게 바뀌었다. 일반적으로 까스띠야 법체계는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이슬람 법체계와 유사했다. 가톨릭이 아니면 조세상 차별을 받았고, 혼자 있지 않는 한 비단옷이나 화려한 옷을 입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만 유대인은 놀라우리만치 자유로웠고 여타 유럽지역보다 더 많은 보호를 받았으며 왕의 비서, 재무담당, 조언자 등 고위직에도 진출하고 있었다. 개종자들 간의 결혼도 허락되고 권장되었다.

    까스띠야에서 종교간 지적 교류나 협력은 일상 있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아랍어, 유대어, 스페인어를 번역한 똘레도(Toledo) 통역 학교는 11세기부터 운영되었다. 유대인과 무어인(Moor: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 시실리, 말타의 중세 무슬림)은 정부 고위직에도 진출할 수 있었다. 비가톨릭 대중의 생활을 악화시켰던 14세기 경제 위기 이후, 까스띠야 왕국에서 있었던 타종교에 대한 적대감이 늘어난 이후에도, 까스띠야는 유럽에서 유대인에 대해 가장 관대한 나라였다. 이처럼 수세기에 걸쳐 이교도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던 까스띠야가, 어떤 이유로 종교재판을 시작하였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다.

    먼저 종교적 다양성 설이다. 이 설은, 무슬림으로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다시 찾음으로써 초래된, 스페인의 종교적 다양성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 스페인 종교재판을 설명한다. 서기 1492년 까스띠야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은, 711년 이베리아를 정복한 이래 그라나다에 웅거하고 있던 무슬림을 정벌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완전히 축출된 것은 아니었다. 까스띠야 지배계층은 유대인들은 물론 무슬림에게도 아직 관대하였다. 무슬림이 이베리아를 정복한 후  가끔 갈등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가톨릭, 유대교, 무슬림간 평화의 시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 세 종교 간 분열과 갈등이 발생, 이의 극복을 위해 종교재판이 시작되었다는 설이다.

    그 다음은 국경 통합설이다. 이 설에 따르면 종교재판은, 이베리아를 분열시킨 여러 법제도를 표준화하기 위해 필요했다는 것이다. 트라스타마라(Trastamara: 까스띠야 최초의 왕조) 왕조하의 초기 까스띠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귀족을 통제하지 못해 항상 반역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귀족의 조세 징수권과 특권은 지방마다 달랐고, 특히 아라곤 왕국에서는 강력한 귀족들이 왕을 겁박하여 더 많은 이권을 챙기기도 했다. 따라서 까스띠야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드는 두 왕국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두 왕국의 법률을 통합하고 행정적, 사법적인 무기를 확보하여 귀족의 개입 없이, 왕의 권력을 직접 행사해야 했다. 이 목적을 위해 스페인 종교재판이 탄생되었다는 것이 이 학설의 요지이다. 실제로 종교재판을 통해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는 현상 변경 없이, 자신들의 왕국이 행사할 수 있는 경찰력은 물론 법체계를 확보하여, 이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종교재판의 이단 처벌은 2차적인 것이고 오히려 음모자, 반역자 등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처벌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당시 왕권은 하느님의 권리와 하느님께 드리는 충성 맹세에 토대한 것으로, 따라서 종교적 일탈과 정치적 불충 간의 관계는 명확하였다. 다시 말해 정치적 배신자들인 반역자 처벌은 종교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설은 현재도 부분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다. 종교재판을 통해 왕의 국새나 통화 위조를 처벌하였고, 왕명의 효과적인 전달이 가능하기도 했다. 종교재판을 통해 공문서, 특히 다른 왕국으로 보내는 공문서의 진위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종교 관련 이외의 범죄도 종교재판 대상이었다.

    세 번째로 회유설懷柔說이다. 유대인들이 추방당하지 않고 남아 있던 유럽 국가들에서는, 세파르디 유대인들의 피가 더럽다며 멸시하였다. 세계가 좁아지고 외교가 힘에 좌우되는 시대가 되자, 세파르디와 무슬림에 대한 이미지는 커다란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밖에도 이사벨라는 왕위 계승 전쟁에서 호아나(Joana de Portugal, 1439~1475. 까스띠야 엔리께 IV세의 부인. 포르투갈 공주)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통적인 동맹국인 포르투갈과 사이가 나빠져 새로운 관계 설정이 필요했다. 페르디난드의 아라곤은 지중해를 지배하려는 야심과 프랑스를 방어할 필요가 있었다. 유럽 가톨릭 군주들은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심각하게 우려했고, 이에 대응하여 유럽 전역에 걸친 왕실 동맹 결성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이교도에 대한 이베리아 반도의 지나치도록 관대한 정책이 문제가 되었다. 까스띠야는 이베리아 반도 재정복이라는 영광을 획득했지만, 오랜 세월 이베리아 반도에는 3개의 종교가 공존하였음으로, 스페인 사람들에 대한 외국의 이미지는 “나쁜 기독교인”이거나 이단자였다. 유대인 추방과 그들의 재산 몰수를 정당화하기 위한 유럽의 유대인에 대한 중상모략은, 까스띠야 사람에게 대해서도 똑 같았다. 유대인과 무어인은 탐욕스럽고 황금에 굶주린 데다 잔혹하고 폭력적이어서, 그들과 함께 사는 스페인(까스띠야) 사람들도 그렇다고 했다. 그러니까 스페인 종교재판은 무어인의 이미지를 벗어나, 스페인 사람들을 보다 유럽적으로 보이게 하여 교황과의 관계를 개선코자한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의 전략이었다는 것이 이 학설의 요지이다.

    네 번째로 오토만에 대한 공포설이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이, 오토만 제국을 위한 음모를 꾸밀 수도 있다는 우려가 종교재판을 불렀다는 설이다. 당시 급팽창하고 있던 오토만 제국은,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 때 지중해에 접한 아라곤 왕국은, 전쟁으로 인한 비용과 피로감으로 무너져 가고 있었다. 아라곤 왕 페르디난드는 오토만이 공격해 시, 만일 내부의 무슬림들이 돕는다면, 이를 격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무슬림들의 밀집지는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사이의 해협(현재의 지브롤터 해협) 언저리였다. 사실 모리스코(Morisco: 가톨릭 세례를 받은 무어인)나 유대인들이 오토만의 침략을 도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을 추방한 본질적인 이유였다. 종교재판은 그들 추방을 위한 준비 단계였고, 잠재적 위험 요소인 거짓 개종자들을 발본색원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꼬르도바(Gonzalo Fernández de Córdoba, 1453~1515. 까스띠야 왕국 장군)의 나폴리 정복은 지중해를 제패하겠다는 스페인의 욕망을 나타낸 것으로, 이로 인해 오토만 제국을 비롯하여 여타 무슬림 국가들과 마찰을 일으킬 터였다. 따라서 종교재판은 이제 경쟁자가 된 무슬림 국가들에 동조하는 백성들의 출현을 사전에 막기 위해 만들어졌고, 피할 수도 없었다.

    다섯 번째로는 플로렌스 학파의 마키아벨리(Machiavelli, 1469~1527. 이태리 철학자)등이 주장한 철학적, 종교적 이유 때문이라는 설이다.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국민 통합과 권력 집중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창의와 혁신에 장애가 되는 지나친 사회 분열이 초래하는 위험을 경고하였다. 마키아벨리는 백성들은 경건하고 도덕적이어야 하나, 군주는 백성들을 통합하기 위하여 경건함과 도덕을 도구로 써야 하기 때문에, 군주는 경건하고 도덕적일 필요가 없다고 했다. 부패한 교회로 인해 이기적인 백성과 귀족이 생겨나, 이태리 반도를 분열시켜 프랑스와 아라곤에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종교재판은 이와 같은 사상을 실천에 옮긴 결과로 볼 수가 있다. 법이 상이한 다른 나라를 통합하기 위해 종교를 사용하고, 법을 적용하기 위해 종교재판을 만들어낸 것은, 종교적 통일을 유지하고 지배계층을 통제하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페르디난드의 면모를 보면, 단순한 종교적 동기도 아닌 것 같다. 페르디난드에 관한 논평에서 마키아벨리는, 그가 신앙심이 무엇인지를 몰랐고 다만 종교를 정치적으로 사용하였다고 했다. 페르디난드는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필하는 데 영감을 준 주요 인물이다.

    여섯 번째로 교황에 대한 억제 설이다. 중세의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은 무슬림으로부터 되찾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등, 스페인을 전복 시키려는 많은 시도를 하였다. 과거 교황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모자라브(Mozarabic Rite: 무슬림 치세하 이베리아 반도 가톨릭 전례)를 추방하려 했고, 부분적으로 성공하기도 했다. 아라곤의 루시용(Roussillon: 프랑스, 아라곤 국경 지대)지역 상실은 교황 때문이기도 하였다. 아라곤의 이태리 반도 남부 지배권에 대한 교황의 간섭은 어느 때보다도 심했다.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는, 세속 왕에 대한 로마 교회의 절대 권력을 주창한 교황 바울 II세(Paul II, 1417~1471)와 갈등 관계에 있었다. 스페인의 (무슬림과의) “혼혈”을 구실로 개입을 주장한 적대자들도 있었다. 교황과 유럽 군주들은 중세 성기盛期(1000~1300) 전 기간에 걸쳐 서로 패권을 다투었고, 교황은 프랑스를 포함 여러 왕국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교황은 멀고 먼 스페인에 자신의 종교 재판소를 운영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스페인 내 로마 교회의 권력 행사를 대신해줄 기구가 필요했다. 그러나 스페인 종교재판소의 우두머리는 로마 교황이 아닌 국왕이었다. 이 같은 독립성으로 인해 스페인 왕은, 교황의 개입 없이 성직자들에 대해 부패와 반역 혐의로 조사, 기소, 재판을 할 수가 있었다. 종교재판은 “성(Holy)"이라는 명칭이 따랐지만 반드시 성직자들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고 세속의 법률가도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스페인 종교재판은 교황이 참가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지극히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 종교재판은 관료조직과 같아, 명목상으로는 로마 교회의 권위를 갖추고 있었고 성직자 처벌에는 로마 교회의 승인이 필요했지만, 책임은 스페인 국왕에게만 졌다. 따라서 교황은 스페인 왕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스페인 최초의 종교재판은 1481년 2월, 안달루시아의 세비야에서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날 6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세비야의 부자 3명, 유대교 랍비 1명, 가톨릭교회 집사 1명, 세비야 재판소장 등이었다. 그들의 신분으로 보아, 재산이나 지위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가톨릭교도가 죽었다는 건, 무고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종교재판-

    종교재판의 야만성을 좀 더 상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종교재판(Inquisition)은 말 그대로 감시와 심문을 특징으로 한다. 감시와 심문을 통해 중세인의 정신과 행동을 억압한 것이다. 종교재판은 또 정치성을 띄어, 신앙의 적은 국가의 적이기도 했다. 이교도는 하나님의 적인 동시 국왕에 저항하는 반역자였다. 세속의 왕에 대한 반역은 죽음이라는 논리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은 더 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교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자이고 이웃의 영혼을 죽이는 자이며 사회의 근간을 약화시켜 그 결속을 파괴하는 자로, 뿌리를 뽑아야 할 대상이라고 했다. 교회법은 사제가 손에 피를 묻히는 걸 금지하여 고문을 제한했지만, 후일의 상황을 보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종교재판의 심문관은 판사 겸 검사이고, 그를 보좌하는 수도승이나 서기는 증인에 불과했다. 피고인의 죄와 처벌은 심문관 단독의 뜻에 따라 결정되었다. 우선 심문관은 잡혀 온 혐의자를 비난하는 설교를 한다. 그런 다음 7일에서 30일 간의 유예 기간을 준다. 이 기간 중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 용서와 함께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했다. 가벼운 처벌로는 금식, 반복적인 기도, 죄인 복 착용, 공개 태형, 성지 순례, 단기간의 투옥, 수도원이나 수녀원에 대한 노력봉사, 자택 감금 등이 있었다. 유예기간 중 자신의 혐의를 소명 못한 사람은, 종교 법정에 선다. 교회에 저항했다는 막연한 말로, 미주알고주알 캐묻고는 자백할 것을 요구한다. 자백이 수집한 소문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일치하도록 자백할 때까지 감옥에 가둔다. 이처럼 "비협조적인" 혐의자는 추가 조사를 한다는 명분으로 무기한으로 감옥에 가두었다. 자백할 때까지 3년, 5년, 10년까지 감옥에 가두는 경우도 있었다.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한 회유, 협박, 고문, 거짓 감형 약속, 굶기기 등의 방법도 동원되었다. 가족을 연루시키거나, 자백을 설득토록 가족을 협박하기도 했다. 고문의 형태로 가장 유명한 것은 "매달기" 였다. 손을 뒤로 묶은 다음, 천정에 매다는 고문이다. 발에 무거운 쇳덩이를 달아 고통을 늘리기도 했다. 17~18세기에는, 발에 쇠 족쇄를 채워 조이는 고문 기술이 유행했다. 족쇄를 조여 발목을 으스러뜨리는 고문 방법이었다. 이처럼 무자비한 고문이 교회의 의지였다는 걸 지금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12세기 당시 고문은 로마법 절차의 재현으로,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한 일반적인 수단의 하나였다. 중세 교회는 영혼 구제와 육체는 무관하다고 믿었고, 따라서 심문관들은 오로지 영혼 구제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물론 자백을 받아 내는 것이었지만 또한 이교도 신앙을 완전한 가톨릭 신앙으로 바꾸는데 있었다. 고문에 따른 고통은, 구원 받지 못한 영혼이 겪을 영원한 지옥불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이었다. 형의 집행은 교회를 대신해 세속의 정부가 맡았다. 이교도에 대한 처벌은, 유혈을 피할 수 있다는 이유로 화형이 일반적이었다. 재판 중 병이나 고문으로 사망한 경우는, 비밀리에 매장한 다음 재판을 계속했다. 죄가 없음이 들어 날 경우, 죽은 사람의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무죄판결문을 읽었다. 그런 다음 그의 비밀 무덤이 가족에게 통보되었다. 유죄 판결일 경우는 그의 시신을 파내어 화형에 처했다. 이교도로 판명된 경우는, 만일 그가 회개하고 개종하면 교수형에 처한 다음 화형에 처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산 채로 화형에 처했다. 재산 몰수형도 있었다. 몰수된 재산은 종교재판 비용으로 쓰기로 되어 있었으나 지켜지는 일은 거의 없었고 심문관, 교회관계자, 세속의 왕들이 나눠 가졌다. 종교재판을 통해 재산을 늘릴 수 있다는 생각에 왕들은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이 같은 처벌 역시 지금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중세의 형법전은 보복형 체계로 무자비했고, 고문과 화형은 일반적인 처벌 방식이었다. 사기범은 산채로 화형에 처했고, 무게나 길이를 속이는 죄는 태형 또는 사형이었다. 강도는 교수형, 재범의 절도 역시 사형이었다. 물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 형, 창자를 끄집어내는 형, 사지절단 형, 물에 삶아 죽이는 형 등이 있었다. 당시의 백성들은 지금과 같은 교양 시민이 아니라 무질서하고 난잡했기 때문에, 처벌도 무질서하고 난잡했다고 볼 수 있다. 좀도둑에게도 고문을 했기 때문에, 이교도에 대한 고문이나 화형도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종교재판의 무서움은 이 같은 처벌 방식보다는, 인간의 내면을 알아내려고 한 그 집요함에 있었다. 한 개인의 말, 행동, 습관, 가톨릭 교리와는 다른 이질적인 생각 등을 면밀히 관찰하여 이교도 여부를 판단하려고 했다. 이 같은 상황으로 돼지고기와 금요일, 토요일도 고통의 대상이었다. 돼지고기를 싫어하거나 안 먹으면 종교재판의 법정에 서야 했다. 무슬림 안식일인 금요일, 유대교 안식일인 토요일에는 몸이 아파도 쉴 수가 없었다. 쉬면 이교도 혐의가 씌워졌다. 채무자는 빚을 안 갚으려고, 채권자가 돼지고기를 안 먹었다던가, 금요일, 토요일에 쉬었다는 등 고자질을 했다. 개인적인 원한으로 누가 고발될지 아무도 몰랐다. 고발된 사람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고발자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었다. 소문은 곧 조사 대상이 되었고, 말실수의 경우, 친인척들로부터도 고발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엄청난 공포에 시달렸다. 자신이 당하기 전에 먼저 고발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부모와 자식 간에, 부부 간에 고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대인과 무슬림은 그 신분만으로도 이미 반역자로 의심을 받았다. 이에 따라 사람들 간 신뢰가 붕괴되고, 공동체가 붕괴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같은 종교재판이 이태리, 독일,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포르투갈로 퍼져 나갔다. 스페인의 식민지 확대로, 신대륙과 필리핀에도 종교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오늘날 연구에 따르면 스페인 종교재판이 실시되었던 3백여년 동안 약 15만 명이 처벌을 받았고, 이 가운데 3천내지 5천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종교재판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처벌한 적이 없었다. 그들을 처벌하지 말라는 스페인 왕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은 근세에 들어 강력한 세속 왕권이 확립되면서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그 권한은 세속의 재판소로 넘겨지고,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가톨릭교회의 영향력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계몽주의 등장으로 인류는 새로운 법률, 종교적 관용, 민주주의, 자유를 확보함으로써 압제적인 종교재판이 저항에 부딪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페인에서는 계몽사상을 억압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극성을 부렸지만, 1808년 스페인을 정복한 나폴레옹은 종교 재판소를 폐지하였다. 나폴레옹이 물러간 후 종교재판을 부활 시켰으나 나폴레옹의 점령 중, 종교재판에 관한 모든 기록과 문서가 파괴되었으므로, 부활된 종교 재판소는 제대로 기능을 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스페인 의회는 종교재판이 헌법 정신과 배치된다는 선언을 하였다. 1820년 종교재판에 반대한 스페인 국민들은 종교 재판소를 공격, 파괴하였고, 1834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이념의 덧을 씌워 사람을 죽이는 걸 보면 종교재판은 아직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바티칸-

    바티칸 “성실청”은 종교재판 관장기구였다. 1965년 교황 바오로VI세는 그 이름을 “신앙 교리회”로 바꾸고, 교회업무와 신학적 사항에 관한 교황 자문기관으로 그 기능을 국한했다. 이 기관은 믿음과 내면의 생각은 통제할 수 없다는, 그 궁극적인 실패를 뜻하는 종교재판의 상징물로 남아 있다.

4. 포그롬

    포그롬(Porgrom)은 특정 인종 또는 종교 집단 특히 유대인에 대한 학살, 추방을 목적으로 한 폭력을 뜻하는 러시아어이다. 러시아 현대사에서 포그롬은 타민족(아르메니아인, 타타르인) 또는 인텔리겐챠 계층을 상대로 행하여져 왔다. 그러나 국제적 정의에 따르면 포그롬은, 러시아 유대인들에 대한 약탈과 유혈을 동반하는 공격을 뜻한다. 러시아어 pogrom은 접두사 ”po-"와 어근 “gromit"가 결합한 것으로, 큰 위해를 가하거나 파괴를 뜻한다. 러시아에서 있었던 포그롬으로는 1821년 오데사(Odessa: 흑해 연안 우크라이나 인구 밀집 도시) 포그롬, 바르샤바 포그롬(1881), 1905년의 키에프 포그롬, 1906년 비알리스토크(Bialystok: 폴란드 북동쪽 대도시) 포그롬 등을 들 수 있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이 붕괴된 후 동유럽에서는 권력 투쟁의 와중에서 1918년 르비브(Lvivi: 우크라이나 서부 대도시) 포그롬, 1919년 키에프 포그롬이 발생하였다. 다른 시대, 러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있었던 유대인에 대한 공격도, 포그롬으로 부른다.

    가장 심각했던 포그롬으로는, 1938년 나치 독일의 “깨어진 유리창의 밤(Kristallnacht)”이다. 2차 대전 중 널리 알려진 포그롬으로는 1941년 이락 파르후드 포그롬(영국-이태리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 후, 유대인들이 영국을 지지할 것이라는 우려에서 발생), 1941년 7월 1만3천2백 명의 유대인이 살해된 루마니아 이아시(Iasi) 포그롬, 독일 점령 폴란드 예드바브네(Jedwabne: 폴란드 북동쪽 소재 도시) 포그롬 등이 있다. 2차 대전 이후의 포그롬으로는 1945년 트리폴리 포그롬, 1946년 폴란드 키엘체(Kielce)포그롬, 1947년 시리아 알레포(Aleppo)포그롬 등이 있다.

    역사상 최초의 반유대인 포그롬은, 서기 38년에 있었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포그롬이다. 중세 유럽에서도 많은 반유대인 폭동이 있었다. 흑사병을 유대인 탓으로 돌린 1348년 프랑스 툴롱, 1349년 독일 에르푸르트 학살, 바젤 학살, 스페인의 아라곤 대학살, 프랑드르 포그롬, 그리고 1349년 발렌타인 데이에 슈트라스브르크 대학살이 있었다. 이때 약 510곳에 달하는 유대인 공동체가 파괴되었다. 서기 1370년에는 브럿셀 대학살이 있었다. 서기 1389년 성 안식일(Holy Saturday)에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발생한 포그롬으로 유대인 거주지가 불타고, 많은 유대인들이 살해당하였다. 이 때 프라하 시나고그에 감금되었던 500여명의 유대인 남녀, 어린이들이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서기 1648년부터 1657년까지 있었던 크멜니츠키 반란(Khmelnytsky: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동쪽 영토에서 있었던 코사크 족 반란)에서는, 많은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이 학살을 당하였다. 이때 코사크인들에게 죽음을 당한 유대인들은 남녀노소 약 4만에서 10만 이상에 달했다. 19세기 초에는 독일 바바리아 왕국에서 유대인 해방에 반대하는 폭동(Hep-Hep)이 일어나, 많은 유대인들이 부상을 당하고 재산을 잃었다.

    서기 1791년 러시아 캐더린 여제(Catherine the Great, 1729~1796)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분할로 생긴 “돌출 지역(Pale of Settlement)”을 유대인의 거주지역으로 하였다. 이에 따라 과거 연방국 주민이었던 유대인들은, 여왕의 칙령으로 성 피터스버그와 모스크바, 기타 여러 러시아 도시들로부터 추방된 유대인들과 함께, 오직 이 지역 내에서만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서기 1821년 발생한 오데사 포그롬은, 19세기 챠르 시대에 발생할 포그롬의 시작이었다. 이후 19세기가 끝나기 전 오데사에는 네 번의 포그롬이 더 있었다. 서기 1881년 볼랴(Narodnaya Volya: 19세기 러시아 혁명사회주의 정치조직)에 의해 알렉산더 II세(Alexander II)가 암살당한 후 수년 동안, 200번 이상의 포그롬이 발생하였다. 니콜라스 I세는 1844년, 유대인 자치 조직인 케힐라(Kehillah)도 폐지하였다.

    20세기 최초의 포그롬은 1903년 키쉬네프(Kishinev: 현 몰도바 공화국 수도)에서 발생, 49명의 유대인 사망자와 수백 명이 부상하였고 700채의 가옥 파괴, 600곳의 상점이 약탈을 당하였다. 같은 해 백러시아의 고멜(Gomel), 우크라이나의 스멜라(Smela), 크리미아 반도의 페오도시아(Feodosiya), 우크라이나 멜리토폴(Melitopol) 등지에서도 포그롬이 발생하였다. 부상자의 사지를 잘라내는 등 만행이 다반사였다. 이어 지토미르(Zhitomir: 우크라이나 서북부 도시) 포그롬에서는 29명의 유대인이 죽었고, 1905년 10월 키에프 포그롬에서는 약 1백 명의 유대인이 학살을 당하였다. 1905년부터 1906년까지 우크라이나와 베사라비아(Bessarabia: 오늘날 대부분 몰도바 지역)에서 660회의 포그롬이 있었고, 백러시아에서도 러시아 정부가 연루된 몇 번의 포그롬이 있었다. 그즈음 유대 노동당(Jewish Labor Bund)은 자체 방어를 위한 무장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후 수년 동안 포그롬은 수그러들었다. 타츠(Colin Tatz, 1934~2019. 호주 뉴잉글랜드 대 교수. 정치학)에 따르면, 1881년부터 1920년까지 우크라이나에서만 1천3백 26번의 포그롬이 발생하여, 총 7만에서 25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고 5십만 명이 가정을 잃었다. 포그롬은 동유럽 전역으로 번져, 2백50만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서유럽을 향한 이민의 물결을 이룬 동기가 되었다.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2008. 러시아 노벨문학상수상자)은 그의 저서 “2백년을 함께”에서 게르겔(Nahum Gergel, 1887~1931. 유대인권운동가)의 보고서를 인용, 총 1천2백36건의 포그롬 가운데 887건을 대규모로 보았고, 나머지는 대규모가 아닌 “과잉”으로 분류하였다. 1919년 키에프를 시작으로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있었던 포그롬으로 3만내지 7만의 유대인이 학살을 당했다. 그러나 최근 새로운 연구는 10만으로 보고 있다. 게르겔 보고서상의 포그롬 가운데, 약 40%는 페틀리우라(Symon Petliura, 1879~1926. 우크라이나 정치인, 언론인)가 지휘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군대가 저지른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 포그롬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나, 금지 시키지는 못했다. 유대인은 아무런 정치적 이유 없이, 다만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죽음을 당한 것이다. 학살당한 유대인의 25%는 우크라이나 무장 농민군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폭도들이, 17%는 데니킨(Anton Denikin, 1872~1947. 러시아 육군 중장)이 지휘하는 백군(White Army: 반 소비에트 군대)이, 8.5%는 적군 특히 세미욘 부데니(Semyon Budenny, 1883~1973. 구소련군 기병 장교)가 지휘한 제1기병대에 의한 것이었다. 특히 세미욘 부대 병사들은 데니킨 휘하의 백군에 복무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볼세비키 지도부는 포그롬 주모자들을 처벌하지 않은 채, “비난과 무장 해제”조치만을 취했다.

    폴란드-소련 전쟁 중이었던 1919년 8월 8일, 폴란드는 민스크를 점령, 볼세비키 지지자들로 의심이 가는 유대인 31명을 살해하고 유대인 상점 337곳, 기타 많은 유대 가정을 습격, 약탈하였다. 폴란드 사람들로부터 받은 이 같은 압제로 유대인들은 러시아 적군의 동정을 받아, 적군의 백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을 지지하게 되었다.

    20세기 초 포그롬은 세계 여러 곳에서 발생하였다. 1904년 아일랜드에서 있었던 리머릭 보이코트(Limerick boycott: 리머릭시 유대 공동체에 대한 경제적 보이코트)는, 유대인들이 그곳을 떠나게 한 사건이었다. 1911년 영국 웨일즈 트레디가(Tredegar: Sirhowy 강변 마을) 폭동으로, 일주일 동안 많은 유대 가정과 상점들이 약탈을 당하고 불에 타, 당시 영국 국무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군대를 동원하여 폭도들을 진압하였다. 처칠은 이 폭동을 포그롬으로 불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 내전 중, 르비브(Lviv: 현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포그롬으로 72명의 유대인이 살해되고, 443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그 후에도 신생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여러 차례의 포그롬이 발생하였다.

    1919년 아르헨티나에서도 “비극의 주일”이라는 포그롬이 있었다. 유대인과 까딸란 지역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었다. 까딸란은 토박이들이 사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몬세르랏 가까운 지역으로 공격을 받을 이유가 없었으나, 아마 스페인 민족주의 영향으로 까딸란 주민들을 셈족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29년 영국의 신탁통치 지역인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인을 목표로 한 헤브론(Hebron) 포그롬과 사페드 포그롬(Safed: 유대인의 통곡의 벽 접근 여부 분쟁으로 인한 무슬림의 대 유대인 공격)이 있었고, 1934년 터키와 알제리아에서도 포그롬이 있었다.

나치 치하 유럽

    나치 독일 최초의 포그롬은 앞에서 말한 ”깨어진 유리창의 밤"이다. 1938년 11월7일 독일 태생의 유대계 폴란드인 그린즈판(Herschel Grynszpan, 1921~1960?)은 자신의 부모와 형제들이 독일로부터 추방당한데 대한 보복으로, 파리 주재 독일 외교관 라트(Ernst vom Rath, 1909~1938)를 사살하였다. 이틀 후인 9일 라트가 사망하자, 독일 데사우(Dessau)시 소재 유대인 시나고그와 상점들이 습격을 당하였다. 괴벨스(Joseph Goebbels, 1897~1945. 나치의 베를린 책임자, 나치 선동선전상)의 기록에 따르면, 히틀러는 그날 그곳 경찰력을 철수시켜 치안 공백지대로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유대인들에게 독일 국민의 분노가 어떠한지 한번 겪게 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살인, 강간, 약탈, 방화 등 전례 없는 대규모 테러가 유대인에게 가해졌다. 11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틀간 있었던 “깨어진 유리창의 밤”으로, 독일 전체 유대인 상점 9천 곳 가운데 7천5백 곳이 약탈을 당하거나 공격을 받았고, 1천 곳 이상의 시나고그가 파괴되거나 손상을 입었다.

-파괴된 시나고그-

    벤스하임(Bensheim; 독일 헤센 주 마을)에서는 유대인들이 불타는 시나고그 주위를 돌며 춤을 추도록 강요당했고, 라오프하임(Laupheim; 독일 남부 Baden-Württemberg 주 마을)에서는 불타는 시나고그 앞에 무릎을 꿇도록 강요를 당했다. 이 폭동으로 적어도 90명의 유대인이 죽었고, 3천9백만 마르크 상당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괴벨스의 기록과는 달리, 경찰력은 철수하지 않고 있었다. 정규 경찰, 게슈타포, SS, SA가 모두 폭동에 가담을 했다. 유대인에 대한 테러는 오스트리아에서도 있었다. 이 대규모 폭동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여, 1938년 11월11일자 런던 타임스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어제 독일을 부끄럽게 한, 무방비의 무고한 사람들을 무차별 공격하여 구타하고 불을 지른 사건에 대해, 이 세계가 비상한 인내로 참고 견딜 수 있다면 모르되, 어떤 언론 매체도 더러운 독일을 편들지 않을 것이다. 독일 당국이 이 사태의 당사자이거나 또는 공공질서와 무뢰배들에 대한 책임이 있거나 간에, 어느 경우든 독일 당국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11월 9일에서 16일까지 3만 명의 유대인이 부헨발트, 다하우, 작센하우젠 등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몇 주 후 대부분이 석방되어 돌아왔지만, 1939년 초까지 아직도 2천여 명이 그대로 수용소에 남아 있었다. 피해의 복구에는 독일 유대인들이 공동으로 책임을 졌다. 더구나 배상을 받아야 할 그들은 오히려 10억 마르크 이상의 손해배상금을 납부해야 했다. 유대인 재산 손상에 대해 보험회사가 지불한 보험금은 독일정부가 압류를 했다. 11월 12일 제정된 법은, 남아 있는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유대인이 자신의 사업체에 접근하는 일을 금지했다. “깨어진 유리창의 밤”을 계기로, 유대인의 공적 활동과 문화 활동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서둘러 독일을 떠나야했다.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는 독일의 영향력 밖의 지역에서도 수많은 포그롬이 발생하였다. 그중 최악의 것은, 안토네스쿠(Ion Antonescu, 1882~1946. 루마니아 육군 대원수)가 선동한 루마니아 이아시(Iasi) 포그롬으로, 1만3천2백66명의 유대인이 루마니아 시민, 경찰, 군인들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루마니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a: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접경지대)에 가장 잔혹했다고 알려진 강제 수용소를 세웠고, 이곳에서 1941년부터 1943년까지 17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1941년 7월 안토네스쿠는 “우리국민의 생활개선을 위해, 겨우살이처럼 자라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모든 요소들을 깨끗이 씻어내기 위해, 지금은 철저한 인종 청소의 시기” 라고 역설하였다.

   1941년 10월18일부터 1942년 3월까지 있었던 오데싸(Odessa: 흑해에 면한 우크라이나 도시. 2차대전시에는 루마니아 통제 하에 있었음) 포그롬에서는, 경찰과 무장군대의 지원을 받은 폭도들에 의해 2만5천 명의 유대인이 학살을 당하였다.

    1941년 6월 1일부터 2일까지 이락 바그다드에서 파르후드(Farhud) 포그롬이 발생하였다. 알리(Rashid Ali, 1892~1965. 정치인. 후일 이락 수상 역임)와 사바위(Yunis al-Sabawi: 알 후투와 지도자), 이락청년도덕동맹(al-Futuwa)이 합세하여 저지른 이 포그롬으로 약 2백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고, 6백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많은 여성들이 강간을 당하였다. 아울러 1천5백 곳에 이르는 상점과 유대 가정이 약탈을 당했다. 1941년 6월과 7월, 우크라이나 르비브(Lviv)시에서 나치 결사대(Einsatzgruppen)의 사주를 받은 우크라이나 민병대가 일으킨 포그롬이 있었다. 이때 6천 명의 폴란드 유대인이 소련 내무성 인민위원회와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아 처형되었다. 유대 여인들은 옷이 벗겨지고, 구타와 강간을 당하기도 했다. 7월2일 도착한 SS총살대 C중대(Einsatzgruppe C)는 유대인 3천 명을 총살하였다. 리투아니아에서도 크리마티스(Algirdas Klimatis, 1910~1988. 리투아니아 민병대 사령관)와 소련 적군 탈영병 3천6백 명으로 구성된 리투아니아 빨치산이, 나치 점령지인 카우나스(Kaunas: 현 리투아니아 제2도시)에서 반유대인 포그롬을 일으켰다. 이 포그롬으로 3천8백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고, 시나고그와 유대 가정들이 불에 탔다. 1941년 7월10일에 있었던 예드바브네(Jedwabne; 나치 점령 폴란드 시) 포그롬에서는, 그 날 새벽 도착한 독일 게슈타포 요원들의 부추김을 받은 폴란드 남자 40명이 수백 명의 유대인을 죽였는데, 그 가운데는 마구간에 가두어 불을 질러 죽인 유대인도 3백 명 정도가 있었다. 이 포그롬은 수발키(Suwalki; 폴란드 북동부 도시)가 속한 주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했던 6건의 포그롬 중 하나였다. 이와 유사한 2백여 건의 포그롬이, 소련에 합병된 폴란드 동부 전역에서 발생하였다.

-르비브 포그롬-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소련 지배 동유럽으로부터 돌아온 유대인들에 대한 여러 차례의 포그롬이 있었다. 이는 나치가 동유럽 반유대 폭동(1944~1946년 폴란드 폭동, 1944~1946년 동유럽 폭동)을 유대-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고 선전하여, 유대인에 대한 감정이 나빠진 결과였다. 1945년 트리폴리타니아(Tripolitania: 현 트리폴리)에서도 포그롬이 발생, 140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1947년 영국에서도 반유대 포그롬이 있었다. 1947~1948년에는 영국의 신탁통치령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인들에 의한 여러 차례의 반유대 폭동이 있었다. 1947년 알레포(Aleppo: 시리아 알레포 주 주도)에서 발생한 포그롬으로, 알레포 유대인 1만 명 가운데 반 이상이 그곳을 떠났고, 영국령 아덴(Aden: 현재의 예멘)과 프랑스 식민지 모로코의 우이다(Oujda: 모로코와 알제리아 국경도시)와 예라다(Jerada: 모로코 북동쪽 도시)에서도 반유대 폭동이 있었다.

5.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 유대인(기원전 1세기 로마제국 성립 이전, 이미 중근동 지역으로부터 유럽으로 이동한 유대인의 후손)에 대한 대학살을 뜻하는 용어이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과 그 동조자들은 유럽 전역에서, 6백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같은 학살은 포그롬과 대량 학살의 형태로 자행되었다. 유대인 멸종이라는 정책에 따라, 나치 점령하 폴란드의 아우슈비츠(Auschwitz-Birkenau), 벨제쓰(Bełżec), 첼름노(Chełmno), 마이다네크(Majdanek), 소비보르(Sobibor), 트레블링카(Treblinka)등에 설치된 나치 집단 수용소에서의 강제 노동, 가스 실, 가스 차량 등을 통한 학살이었다.

    유대인 학살은 단계적으로 행하여졌다. 1933년 1월30일 독일 수상에 오른 아돌프 히틀러는 정치적 반대자 및 “달갑지 않은 자”들 처리를 위해 여러 곳에 집단 수용소를 건설하였다. 같은 해 3월24일 히틀러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하는 “권능 부여법(Ermächtigungsgesetz)”이 통과되면서, 시민 사회로부터 유대인 격리가 시작되었다. 4월에는 유대인에 대한 사업허가를 거부하는 조치가 있었고, 1935년 9월에는 뉘른베르크 법(Nürnberger Gesetze: 반유대인 법)이 제정되었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8개월 후인 1938년 11월 9일부터 10일까지, 독일과 오스트리아 전역에 걸쳐 소위 “깨어진 유리창의 밤(Kristallnacht)”이라고 불리는, 유대인 사업체와 건물에 대한 약탈과 방화가 있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 정부는 유대인 분리와 통제를 위한 유대인 거주 구역(Ghettos)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에 따라 나치 점령 하 유럽 전역에 수천 곳의 유대인 게토가 설치되었다. 1942년 1월 베를린에서 개최된 반제회의(Wannsee Conference: 베를린 교외 Wannsee에서 개최된 나치 고위 관리들과 SS와의 회담)에서는, 나치가 “유대인 문제에 대한 마지막 해결책”이라고 한, 유대인 멸종 정책의 정점에 있었던 게토로의 유대인 격리 문제가 논의 되었다.

    독일 군대가 동유럽을 장악하면서, 반유대 조치는 급진성을 띄기 시작했다. 나치 고위 지도자로부터의 지시와 비밀경찰의 협조 하에 독일 내에서는 물론 나치 점령하 유럽 전역에 걸쳐, 그리고 독일 동맹국들의 영토에서 무자비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기동 타격대(Einsatzgruppen)라는 이름의 준군사 처형대가 독일 정규군대의 도움을 받아, 1941년 여름부터 포그롬과 무차별 공격을 통해, 1백3십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살해하였다. 1942년 여름에는, 유럽 전역의 게토에서 끌려나온 유대인들이 봉인된 화물기차에 실려, 가스로 처형되기도 했다. 산 채로 수용소에 도착한 경우에는, 또 다시 가스로 아니면 강제 노동이나 구타를 당해 죽었다. 질병이나 의학 실험용 대상이 되어 죽거나, 이동 행군 중 죽기도 했다. 이 같은 살육은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1945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홀로코스트 기간 중(1933~1945) 멸종의 목표가 된 건 유대인뿐만이 아니었다. 폴란드인, 소련인, 전쟁 포로, 집시, 장애인, 정치적 적대자, 종교적 반대자, 동성애자 역시 멸종 대상으로 죽임을 당했다.

    홀로코스트라는 어휘를 근대적 의미로 처음 사용한 예는, 오토만 터키 군대의 아르메니안 기독교도 대량 학살을 보도한 1895년 뉴욕타임스 기사이다.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이 단어는 “번제燔祭”를 뜻한다. 히브리어로는 쇼아(Shoah)라고 하며, 파괴 또는 대재난을 뜻한다. 1943년 5월 뉴욕타임스는 버뮤다 회의(Bermuda Conference: 나치 치하의 유대인 문제 관련 회의)를 보도하면서, “홀로코스트”에 직면하고 있는 수십만 명의 유대인 문제를 언급하였다. 1968년 미국 의회 도서관은 “유대인 홀로코스트(Holocaust, Jewish, 1939~1945)”라는 새로운 장르의 도서 분류법을 채택하였고, 1978년 NBC의 미니 연속극 “Holocaust”로 이 어휘가 잘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미국 대통령 직속 홀로코스트 위원회가 설치되기도 했다. 비유대인 단체들이 자신들도 홀로코스트 희생자라고 주장함에 따라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 대신, Shoah 또는 Churban이라는 용어를 썼다. 한편 나치는 홀로코스트가 아닌 “유대인 문제 해결을 위한 마지막 해결책(die 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고 했다.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홀로코스트를,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과 그 동조자들에 의한 유럽 유대인 대학살로 정의하고 있다. 또 유대인 이외에 집시와 장애인을 포함하여,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 전 인종 그룹에 대한 국가 차원의 조직적 살인“이라는 개념 정의를 찬성하는 학자들도 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된 후 인종 청소 대상은 슬라브족, 폴란드인, 러시아인, 집시, 장애인 등 나치가 열등하다고 본 인종들과 여호와의 증인, 공산주의자, 동성연애자 등 종교적 신념이나 행위가 비정상적이라고 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인종 그룹에 대한 학살은, 유대인 학살에 비하면 일관성을 결여하였다는 게 헤이즈(Peter F. Hayes: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 석좌 교수. 역사학)의 지적이다. 예를 들어 슬라브 족에 대해서는 “노예화하거나 점점 그 수를 줄이는” 정책이기는 하였으나, 한편 호의적으로 대해준 슬라브 사람들도 있었으니 바로 불가리안,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일부 우크라이나인 등에 대해서였다. 이와는 달리 히틀러는 일관되게, 유대인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베렌바움(Machael Berenbaum, 1945~. 예일 대 교수. 랍비)의 지적대로, 대규모 인간 학살로 인해 독일은 “살인 국가”로 전락하게 되었다. 예켈(Eberhard Jäckel, 1929~2017. 독일 역사학자)은 한 국가가, 하나의 민족을 전멸시키겠다는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국가 권력을 행사한 예는 역사상 처음이라고 했다. 16만5천2백 명에 달하는 독일 거주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조부모나 증조부모가 유대인이어도 모조리 죽음을 당했고, 유대인 피가 섞인 혼혈을 알아내는 정교한 법률이 제정되기도 했다. 유대인 여부의 식별은 관리들이 담당했고, 유대인으로 확인되면 재산을 몰수당하고, 열차에 태워져 수용소로 보내졌다. 직장으로부터의 해고는 물론, 해고된 후 강제노동에 동원되기도 했다. 유대인 교수와 유대인 학생은 대학으로부터 쫓겨났다. 독일 제약회사는 유대인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의약품 실험을 하고, 실험 도중 사망한 시체를 태우기 위해 화장장을 건설한 제약회사도 있었다. 죽음의 수용소에 들어온 수감자들은, 모든 개인용품을 몰수당했고, 이 물품들은 재사용이 되거나 재생을 위해 독일로 보내졌다. 독일 중앙은행은 세탁 과정을 통해, 이 중 값나가는 물건들을 정상적인 물건으로 바꾸어 놓기도 했다. 아우슈비츠 등 여러 수용소에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불임 실험, 전상자 치료 효과, 화학무기 효과, 새로운 백신 및 의약품 개발, 최악의 조건하에서의 생존법 등을 위한 실험을 했다. 적어도 7~8천 명이 의학 실험용 대상자가 되어 실험 과정에서 모두 죽었다.

    종전 후 스물세 명의 내과의사와 함께 관련 의료인들이 반인도주의 범죄 혐의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에 회부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독일 적십자 대표, 대학교수, 병원장, 생의학 연구원들이 있었다. 

반유대주의 기원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은, 예수님을 죽였다는 기독교 신학에 입각하여, 기독교도들의 증오 대상이었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로만 가톨릭과 루터파는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여 모략과 추방, 테러를 멈추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는 챔벌레인(Houston S. Chamberlain, 1855~1927. 영국계 독일인. 철학자로서 인종편견주의자였음. 음악가 리차드 바그너의 사위)이나 라가르드(Paul de Lagarde, 1827~1891. 반유대주의를 강력 지지한 독일 성서학자) 같은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사이비 인종주의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유대인을 세계 지배를 놓고 아리안 족과 결사적인 싸움을 하는 종족으로 보았다. 이러한 시각은 독일 전역에 퍼져 있었다. 독일 엘리트 계층은 인간을 동일한 유전적 가치를 지닌 동일한 종으로 생각지 않는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 민족주의 파생물인 나치도 당연히 민족주의 운동이 주장하는 반유대주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에서 독일 제국이 패한 후, 독일인들은 이 패전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등에 칼박기”라는 말이 떠돌았고, 이는 뒤에서 독일의 항복을 획책한 충성심 없는 정치인,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을 에두르는 말이었다. 반유대 정서에 불이 붙은 것은, 러시아 공산당 혁명 정부의 유대인 지도자들을 지나치게 위대한 인물로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인물들에 대한 선전은 유대 볼쉐비즘을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를 하여, 독일인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실제로 볼쉐비키당 지도부의 20%가 유대인이었다.

                                                 
                                                                                -오스트리아 우편엽서(1919)-

    나치당 기관지(Völkischer Beobachter) 편집인 에카르트(Dietrich Eckart, 1868~1923. 독일의 시인)와 1920년대 이 기관지에 반유대 기사를 쓴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1893~1946. 나치 이론가)등은, 나치당의 초기 반유대주의자들이었다. 로젠베르크의 대유대인 시각 즉,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은밀한 음모(World Jewish Conspiracy)를 꾸미고 있다는 생각은, 히틀러의 대유대인 시각에 영향을 미쳐, 히틀러는 공산주의 뒤에 숨어 이를 움직이는 힘으로 유대인을 보았던 것이다. 로젠베르크는 시중에 떠도는 말을 인용,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을 나타내는 글을 썼다. 1920년 이후 그는 유대인을 병균에 비교를 하고, 따라서 병균처럼 취급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맑시즘을 유대인의 이데올로기로 보았고, 따라서 유대 맑시즘에 대항하여 싸울 것이며, 유대인이야말로 독일을 파괴하려고 공산주의를 만들어 냈다고 했다. 히틀러 세계관의 중심에는 버겐(Doris L. Bergen, 1960~. 캐나다 역사학자)이 말한, “인종과 공간”이라는 이데올로기도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독일 아리안 족을 위한 생존 공간(Lebensraum: 1890년대와 1940년대 독일의 극단적 영토 확장 정책)확장 즉, 영토 확장이라는 이데올로기이다.

    1933년 1월 독일 수상에 오른 아돌프 히틀러는 모든 국민이 단결하여 국가목적을 달성하자는 국민공동체(Volksgemeinschaft: 1차대전 당시 전쟁지지 구호)의 재탄생을 선언했다. 나치 경찰은 국민을 두 그룹으로 분류했다. 국민공동체에 속하는 그룹은 국민의 동지(Volksgenossen)로, 그렇지 않은 그룹은 이방인(Gemeinschaftsfremde) 즉, 적대세력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유대인과 집시는 혈통 또는 인종적인 적, 맑시스트, 자유주의자, 기독교도, 일관성을 결여한 반동분자는 정치적인 적, 상습적인 범죄자, 게이,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자 등은 도덕적인 적대자 등 세 그룹으로 분류하여 적대시 하였다. 정치적인 적대자나 도덕적인 적대자는 재교육을 위해 강제 수용소로 보내, 궁극적으로는 국민공동체로 흡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종적인 적”은 절대로 국민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했다.

    1933년 3월에 있었던 총선 전후, 나치는 정적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여, 재판 없이 투옥할 수 있는 강제수용소 설치에 착수하였다. 최초의 강제수용소는 1933년 3월22일 문을 연 다하우(Dachau; 독일 바바리아 주 뮌헨 북서쪽 16Km지점)수용소이다. 이 수용소는 처음,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등 정치범 수용이 목적이었다. 이어 1934년 중반, SS의 목적을 위한 수용소가 몇몇 도시 외곽에 설치되었다. 이 수용소들은 체제에 반대하는 독일인들에게 겁을 주는 수단으로도 역할을 하였다.

-다하우-

    1930년대는 전반적으로 유대인의 법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가 제한을 받은 시대였다. 1933년 4월1일 독일에서는, 유대인의 사업을 금지하는 입법조치가 있었다. 4월 7일에는 전문직 공무원 법(Berufsbeamtengesetz) 제정이 있었다. 이 법에 따라, 유대인과 기타 아리안이 아닌 사람들은 공직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유대인은 변호사 자격 박탈 등 법조계에서 추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문의 편집자나 신문사 소유 금지, 언론 협회 가입 금지, 농장 소유 금지 등이 법제화되었다. 1933년 3월 실레시아(Silesia; 독일-폴란드 접경지역)에서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법정에 나타나, 유대인 변호사들을 구타하는 사건이 있었다. 드레스덴(Dresden)에서는 재판 중이던 유대인 판사와 변호사가 재판정으로부터 끌려나오기도 했다. 대학생을 비롯하여 유대인 학생 수는 쿼타제로 통제를 받았다. 유대인 사업체는 문을 닫거나 “아리안화”라는 명목으로 독일인에게 강제 매각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1933년 5만 개였던 유대인 기업은, 1939년 4월에는 7천개로 줄어들었다. 유대인 작곡가나 작가, 예술가들의 작품은 공연이나 전시회가 금지되기도 했다. 유대인 의사는 해고되거나 퇴직을 강요당했다. 1933년 4월6일자 독일 의학 잡지(Deutsches Ärzteblatt)는 “독일인 치료는 오직 독일인이”라는 글을 실었다.

단종법斷種法

    대공황으로 초래된 경제적 긴장으로 기독교 자선단체나 의료계 일부로부터, 나치가 “생명의 가치가 없는 생명(Lebensunwertes Leben)”이라고 주장한 정신적, 육체적 장애자 등 치료 불가능한 사람들에 대한 강제 불임 수술을 찬성하는 의견이 일었다. 이에 따라 1933년 7월 14일, 유전병 환자 단종법(Sterilization Law; Aktion T4)이 통과되었다. 의사들로부터 8만4천5백25건의 불임 수술 허가 신청이 있었고, 이 가운데 법원은 5만6천 건을 허가하였다. 그해 12월 21일 뉴욕타임스는 “40만 명의 독일인이 불임 수술을 받았다”라는 보도를 하였다. 제3제국 통치 기간 중, 이 같은 강제 불임 수술은 3십만에서 4십만 건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1939년 10월 1일 히틀러는 안락사 법에 서명을 하였는데, 한 달 전인 9월 1일 이미 히틀러 비서실장 보울러(Philipp Bouhler, 1899~1945. 미군에 체포된 직후 자살)와 주치의 브란트(Karl Brandt, 1904~1948. 교수형에 처해짐)에게 강제 안락사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후였다. 전후 이 프로그램은 “Aktion T4”(강제 안락사에 의한 대량 학살 프로그램)로 판명되었는데, T4는 베를린 티에르가르텐가 4번지(Tiergartenstraße 4)에 소재한 한 건물의 주소로, 이 건물은 안락사 관련 여러 기관들의 사령부였다.

    T4의 강제 안락사 대상은 주로 성인이었으나, 어린이들 또한 대상이었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8만에서 10만 명에 이르는 정신 장애 성인들과 5천 명의 어린이, 1천 명의 유대인 정신 장애자가 강제 안락사로 목숨을 잃었다. 안락사 센터 가운데 한 곳인 하르트하임(Schloss Hartheim: 오스트리아 Linz 시 인근 소재 성채)의 부책임자였던 레노(George Renno, ?~1945)의 진술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여러 곳의 안락사 센터에서 약 2만 명에 달하는 강제 안락사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마우타우젠(Mauthausen: 오스트리아 다뉴브 강변 마을) 강제 수용소 소장 차이라이스(Franz Zeireis, 1905~1945)는, 안락사 희생자 수를 총 40만 명으로 진술하였다. 전반적으로 보아 강제 안락사에 의한 정신 및 신체장애자 희생자는 15만 명 내외일 것으로 추정된다.

-하르트하임 성-

    T4 프로그램에는 많은 심리학자와 정신병원들이 참여하였다. 1941년 8월 독일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로부터 항의를 받은 히틀러는 이 프로그램을 취소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장애인들은 계속 죽임을 당하였다. 의료 기관들은 연구용 시신을 계속 공급 받았는데, 예를 들어 1933년부터 1945년까지 튀빙겐 대학은 총 1천77구의 장애인 시신을 받았다. 독일 신경과학자 할레포르덴(Julius Hallervorden, 1882~1965)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4년 동안, 어느 한 병원으로부터 총 697개의 인간 뇌수를 받았다. 그는 “그 뇌가 어디로부터 어떻게 왔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었고, 물론 나는 그 뇌를 접수하였다” 라고 했다.

    1935년 9월 15일, 독일 의회는 독일제국 시민권 법인 뉘른베르크 법(Nürnberger Gesetze)을 통과 시켰다. 이 법은 “독일 국민과 독일 제국에 충성할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르만인 또는 게르만 피를 받은 사람을 독일 시민”으로서 정의하였다. 게르만 순혈과 독일의 영예를 보호하기 위하여, 독일인 또는 게르만 피를 가진 사람은 유대인과의 결혼을 금지하였다. 고조부모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분류되었다. 혈통 보호법은, 유대인과 게르만 혈통의 결혼을 금지하였다. 그들 간의 성관계 역시 범죄로 규정했고, 유대인 가정은 45세 이하의 독일인 여성을 고용할 수 없도록 했다. 뉘른베르크 법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또한 집시나 흑인 계통의 독일인에게도 적용되었다. 불가리아, 독립 크로아티아, 헝가리, 이태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비시 정부하의 프랑스 등이 이와 유사한 법을 채택하였으나, 나치 독일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폭이 넓은 반유대인 관련법을 제정했던 것이다.

    1934년 말경에는 5만 명에 이르는 독일 거주 유대인들이 떠났고, 1938년 말에 이르러 독일 거주 전체 유대인의 반 이상이 독일을 떠났다. 그들 가운데 교향악단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1876~1962: 유태계 독일인.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는, 만일 그가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할 경우, 공연장에 불을 지를 것이라는 말을 듣고 독일을 떠났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할 당시 미국에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다시는 독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따라 그의 독일 시민권은 박탈되고, 학회(Kaiser Wilhelm Society, Prussian Academy of Sciences 등)에서도 제명되었다. 헤르츠(Gustav Ludwig Hertz, 1887~1975: 유대계 독일 실험물리학자)를 비롯하여, 많은 유대계 과학자들이 교수직을 포기하고 독일을 떠났다.

    1938년 3월12일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 유대인 17만6천 명의 90%가 비엔나에 거주하고 있었다. SS(Schutzstaffel: 나치당 준군사 조직. 히틀러 호위부대)와 SA(Sturmabteilung: 돌격 사단. 준군사조직으로 폭력적인 나치 근위대)는 유대인 상점을 습격, 자동차를 절취하는 등 폭력적인 행동을 했다. 이를 방관한 오스트리아 경찰은 이미 철십자(Swastika)완장을 팔에 차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테필린(Tefillin: 토라 두루마리를 담은 가죽제의 작고 검은 상자)을 든 채, 변소나 거리 청소를 강제 당하는 등 수모를 겪기도 했다.

-강제 거리 청소-

    7천여에 달하는 유대인 사업체가 “아리안화” 되었고,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법적 제재가 강화되었다. 1938년 7월, 프랑스에서 개최된 에비앙 회의(Évian Conference)에는 32개국이 참가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 유대인 피난민에 대한 지원에 관해 토의하였으나 별 성과가 없었고, 회의 참가 각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피난민 수도 제한되어 있었다. 같은 해 8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 오스트리아 SS책임자. 홀로코스트를 조직하고 실천한 주요 책임자 중 한 사람)이 비엔나 소재 “유대인 추방 중앙국”의 책임자로 임명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정신분석학 창시자)는, 그를 구하려는 여러 사람들의 “상상을 불허하는 엄청난 노력” 덕택으로, 가족과 함께 1938년 7월 비엔나를 탈출, 런던에 도착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독일은, 유럽으로부터 유대인 추방을 구상했다. 추방된 유대인들 정착지로는 당초 팔레스타인을 생각했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 령 마다카스카르, 시베리아, 폴란드 등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은 독일 시온주의연합과 나치 독일정부간 1933년 8월 25일 체결된 하바라 협정(Haavara Agreement)에 따라, 독일 정부의 유대인 이주 정책이 효과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이 협정에 따라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약6만 명의 유대인이, 독일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치 상품 보이콧(The anti-Nazi boycott: 1933년 히틀러의 반유대인 정책에 대응한 독일 상품 거부 국제운동)을 어겨가며, 1억 마르크에 상당하는 독일 상품을 구매, 팔레스타인으로 가져갔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2차 대전 개전 당시 폴란드에는 3백5십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살았고, 이 가운데 2백7십만에서 3백만 정도가 홀로코스트로 죽었다. 1939년 현재 폴란드는 미국(4백6십만 명) 다음으로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는 나라였다. 그밖에 소련에는 3백만 정도의 유대인이 있었다. 1939년 9월1일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대독일 선전 포고를 하였고, 이에 따라 독일은 점령 지역에서 약 2백만에 달하는 유대인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1939년 9월17일 소련도 폴란드를 침공, 그 일부를 점령하였다.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7개 SS기동타격대와 3천 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대유대인 특수임무부대(Einsatzkommando)의 지원을 받았다. 이 특수임무부대의 임무는, 전투 부대 후방에서 일체의 반독일 요소를 뿌리 뽑는 일이었다. 폴란드에서 독일의 목표는, 폴란드 전역에서 비유대계 폴란드인을 추방한 후 그 지역에 독일인들을 정착시킨 다음, 폴란드 지도자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고, 하층 계급에 대한 교육 철폐와 유대인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서부 지역 등 합병 지역의 모든 유대인들을, 소위 일반정부(Generalgouvernement)지역이라고 한, 폴란드 중부 지역으로 보냈다. 그러나 “보다 쉬운 통제와 이후 추방”을 위해서라는, 1939년 9월21일자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1904~1942. SS 장교. 체코 망명정부가 밀파한 저격병에 의해 죽음)의 명령에 따라, 아직은 주요 도시 게토들에 수용코자 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12월1일부터 유대인들은 팔뚝에 “다윗의 별”을 걸어야 했다.

    1940년 11월에는 바르샤바에 게토가 설치되어, 1941년 초 이곳에 44만5천 명의 유대인들이 수용되었다. 바르샤바 게토 인구는 시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했지만, 그 면적은 시 전체 면적의 2.4%에 불과하여, 게토는 방 하나당 평균 아홉 명이 살아야 했다. 1941년 현재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사망자 수는 4만3천 명이었다. 독일은 24명의 유대인 남성들로 구성된 행정기구(Judenrat)를 설치, 그들로 하여금 게토를 이끌도록 하여, 독일의 명령을 수행하는 책임을 지도록 했다. 1942년부터는 명령을 통해서도 가능하도록,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추방 절차를 간소했다.

-바르샤바 게토-

    바르샤바 게토 다음으로 큰 게토는 로드치(Lodz: 폴란드 제3도시)게토였다. 1940년 5월 현재 그 수용 인원은 16만 명이었다. 게토의 유대인들은 무엇이든 팔아, 식품과 생필품을 사들여야 했다. 그때까지 적어도 50만 명의 유대인들이, 게토와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굶주림과 질병, 가난한 생활 조건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헤이즈(Peter Hayes: Northwestern 대학교 석좌교수)는 독일인들이 폴란드에 홉스의 세계(Hobbesian World: 17세기 Thomas Hobbes 가 쓴 Leviathan을 말함)를 구축하여, 그 속에서 이질적인 사람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고 했다. 소련의 폴란드 침략을 유대인들이 지지했다는 비유대계 폴란드 사람들의 인식은, 이미 상존해왔던 반유대주의를 더욱 심화시켰고, 독일은 그 같은 인식을 악용하여 유대인의 거주지를 재배치하고 재산을 약탈하였으며, 유대 구역의 시나고그, 학교, 병원 등을 폐쇄하였던 것이다. 유대인을 돕는 사람에게는 사형 선고를 내리기도 하였다. 유대인 사냥 기간(Judenjagd)에는 첩자들을 뿌려 누가 유대인인지, 유대인을 돕는 폴란드인은 누구인지를 알아내도록 했다. 그러나 수많은 폴란드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을 도왔다. 이 과정에서 1천명 가까운 폴란드인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야드 바솀(Yad Vashem: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희생자 기념 센터)은, 7천 명 이상의 폴란드인들을 “세계 민족의 정의로운 인물(홀로코스트 기간 중 비유대인으로서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죽음으로부터 구한 명예로운 인물들)”로 기록하고 있다.

    1941년 말 나치 독일은 폴란드 내에 아우슈비츠(Auschwitz), 벨제쓰(Belżec), 첼름노(Chelmno), 마이다네크(Majdanek), 소비보르(Sobibor), 트레블링카 등 죽음의 수용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1942년부터 43년까지 SS는 폴란드 일반정부 지역(폴란드 중부 지역)의 유대인 게토를 모조리 철거한 다음, 그 주민들을 유럽 전역에서 압송해온 유대인들과 함께, 이 수용소들로 보냈다. 수용소는 현지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암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상품들의 공급처이기도 했다. 새로운 곳에서 정착하리라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살림살이를 챙겨 왔고, 수용소는 그 물건들을 몰수하여 그곳 주민들에게 주거나 팔았던 것이다. 1942년부터 1943년까지, 트레블링카 수용소 밖에는 매춘부는 물론 보석 가게와 환전소가 있었다. 1942년 말에는, 폴란드 중부 일반정부 지역으로부터 온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은 유대인은 3백만 명 이상이며, 대부분이 도착 즉시 가스실에서 죽었다.

-살림살이와 함께-

    1940년 4월9일 독일은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침공하였다(Weserübung 작전). 침략에 대항할 시간이 부족했던 덴마크는 쉽사리 무너졌다. 덴마크 유대인에 대한 몇 가지 조치가 취해졌다. 1940년 6월, 나치는 노르웨이를 완전 점령했다. 그해 말 1천8백 명의 유대인이 직장에서 추방되었고, 1941년에는 유대인의 재산은 모두 정부에 신고토록 했다. 1942년 11월26일 경찰에 체포된 5백32명의 유대인들이 새벽 4시에 오슬로 항에서 독일행 배를 탔다. 독일에 도착한 후 화물기차에 실린 그들은 아우슈비츠로 향했다. 그들 가운데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사람은 아홉 명에 불과했다.

    1940년 독일은 네델란드, 룩셈부르그, 벨지움, 프랑스를 침공하였다. 항복한 벨지움은, 나치 군정장관 팔켄하우젠(Alexander von Falkenhausen, 1878~1966. 장개석의 군사고문을 했던 독일 장군)이 통치했다. 그는 대부분이 독일이나 동유럽으로부터 온, 9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 난민을 목표로 한 반유대인 법을 제정하였다. 독일은 잉쿠아르트(Arthur S. Inquart, 1892~1946: 오스트리아계 정치인. 전범으로 처형됨)를, 네델란드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잉쿠아르트-

네넬란드에 부임한 그는 14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 처벌에 착수했다. 유대인들은 직장으로부터 강제로 쫓겨났다. 유대인은 정부에 신분을 등록토록 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1941년 2월 비유대계 네델란드 시민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항의하자, 즉시 진압을 하기도 했다. 1942년 7월부터 시작한 유대인 추방으로, 10만7천 명 이상의 네델란드 유대인들의 대부분이 아우슈비츠로 갔다. 이 가운데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사람은 5천 명에 불과했다. 1942년 7월15일 네델란드를 떠나 아우슈비츠로 간 첫 출발은 1천1백35명이었다. 1943년 3월부터 7월까지 3만4천3백13명이 열아홉 차례에 걸쳐 소비보르 수용소로 보내졌고, 모두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3십3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던 프랑스는 나치 점령지역인 북부와 비점령 지역인 남부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남부는 나치 협력 정부인 비시 정부(Vichy France)하에 있었다. 남부 시민의 반 이상이 프랑스 국민이 아닌,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온 난민들이었다. 나치 점령 지역인 북부는 군사 정부였으나, 남부의 비시정부에서와 마찬가지로 반유대인 법을 정하지 않고 있었다.

-유대 여인(파리)-

    1940년 7월, 나치 점령 지역인 북부 알사스-로렌 지역의 유대인들이 비시 정부하의 남부로 추방을 당하였다. 이에 따라 비시 정부는 프랑스 남부 지역은 물론, 신탁통치령인 튀니지아와 모로코에 반유대인 조치를 취하였다. 튀니지아의 경우, 1942년 11월 독일군과 이태리군이 도착하였을 때 유대 인구는 약 8만5천 명이었다. 이 가운데 5천 명이 나치 군대를 위한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Washington, D.C 소재) 자료는, 홀로코스트 기간 중 프랑스에서 목숨을 잃은 유대인 숫자를 7만2천9백에서 7만4천 명 정도로 보고 있다. 프랑스가 나치에 항복하면서, 1940년 여름 나치에게는 "마다가스카르 계획"이 대두되었다. 유럽 유대인들을 그 섬으로 추방하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섬의 열악한 생존 환경이 곧 죽음을 부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 아이디어는 1930년대 이미 폴란드, 프랑스, 영국의 지도자들이 검토한 바 있었고, 1938년부터 독일의 지도자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치 정부는 아이히만에게 그 가능성 여부를 조사해보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그 조사에 따라 어떤 계획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독일은 영국을 굴복 시키지 못하는 한, 마다가스카르로의 유대인 해상 운송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고, 따라서 1942년 2월 이 계획을 포기하였다.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한 독일은, 한 달도 못 되어 항복을 받아냈다. 독일과 이태리, 불가리아가 그리스를 분할 점령하였다. 전쟁 이전의 그리스 유대인은 7만2천에서 7만7천 명 정도였다. 전쟁 후 남은 사람은 약 1만 명으로, 이는 발칸 반도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생존율이었다. 8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던 유고슬라비아는 여러 지역으로 쪼개져 북부는 독일과 항가리, 해안지역은 이태리, 코소보와 서마케도니아는 알바니아, 동마케도니아는 불가리아에 각각 합병되었다. 기타의 지역은 이태리와 독일의 괴뢰 정부인 독립 크로아티아(Independent Croatia)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집권을 하였다.

-체포된 유대인(그리스)-

    독일이 점령한 세르비아는, 독일군 및 경찰이 밀란 네디치(Milan Nedic, 1878~1946. 세르비아 장군. 나치 협조자) 괴뢰정부를 앞세워 통치하였다. 1942년 8월 세르비아는 유대인 청소를 선언하였고, 이어 네디치 정부와 친나치 범세르비아 파시스트 단체(Zbor)의 지원을 받은 독일군과 경찰은, 1만7천 명에 달하는 거의 모든 세르비아 유대인을 죽였다.

    나치는 독립 크로아티아 집권당 우스타세(Ustase party)에게도 반유대인 정책을 받아들일 것과 유대인 처벌, 강제수용소 설치를 요구했고, 이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1941년 4월 말, 우스타세당은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별”을 부착할 것을 명령하고, 10월에 들어서 유대인 재산 몰수에 착수하였다. 이와 함께 유대인과 집시를 처형하였다. 이처럼 크로아티아는 홀로코스트에 적극 가담하여 크로아티아 유대인 대부분을 죽였던 것이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은, 크로아티아에서 죽은 유대인을 3만1백48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유고슬라비아에 있던 115개 유대인 공동체 가운데, 오직 자그레브 공동체만 살아남았다. 그러나 크로아티아는, 크로아티아의 대의명분에 기여하는 유대인에게 명예 아리안 시민권을 약속하고, 이렇게 하면 학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나치의 반유대 정책을 피해 나가기도 했다. 그 결과 적어도 5천 명의 유대인이 크로아티아에서 살아남았고, 수천 명의 유대인이 돈을 주고 산 “명예 아리안” 시민증으로 크로아티아를 벗어나, 이 사실을 SS가 불만스러워 했다.

   1941년 6월22일 독일은 소련 공격을 개시하였다. 스나이더(Timothy Snyder, 1969~. Yale 대 교수. 역사학)는, 이날이야말로 유럽 역사상 설명 불가능한 참화가 시작된 날이라고 했다. 독일의 선동선전 매체는 이 전쟁을 게르만 민족 사회주의와 유대 볼쉐비즘 간의 이념 전쟁으로, 아울러 유대인, 집시, 저열한 슬라브 족에 대한 독일의 인종 전쟁으로 보도하였다. 독일군의 진격에 따라, 폴란드에서처럼 반독일 요소에 대해서는 무차별 사격하라는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1904~1942. SS대장)의 명령이 SS총살대에 하달되었다. 이 명령의 핵심은 지역 공산당 지도부를 분쇄하여 “공산당 내부와 정부 전반에 포진한 유대인과 기타 급진적 요소를 제거, 소련을 붕괴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총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면, 희생자들은 옷을 벗고 귀중품을 빼앗긴 다음 총살을 당할 구덩이 가장자리에 줄을 서거나 아니면 그 구덩이에 쌓인 시체 더미로 위로 떠밀려 떨어져,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정어리 묶음(Sardinenpackung)”이라고 불린 이 총살 방법은, SS장교 예켈른(Friedrich Jeckeln, 1895~1946. 나치의 소련 점령 시 SS총살대 대장. 10만 명 정도의 유대인과 집시를 총살한 책임자. 전범으로 처형됨)이 고안,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덩이 학살-


-예켈른-

    이 총살 현장에 독일군은 구경꾼으로, 사진사로 또는 실제 사격수로서 참여 하였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그리고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서는 현지인도 깊이 관여하였다. 백러시아 유대인 총살에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이 참여했고, 남부 우크라이나인들은 2만4천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총살한 당사자들이었다. 폴란드로 가 유대인 강제 수용소 간수로 일한 우크라이나 사람들도 상당 수 있었다. 

    SS기동타격대 A중대(독일 북부군 소속. 340명으로 구성된 총살대)가 독일 북부군과 함께 발틱 국가(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도착했다. B중대는 독일군 중부군을 따라 백러시아로, C중대는 남부군을 따라 우크라이나로, D중대는 우크라이나 남부 지방으로 갔다. 각 중대는 6백 명 내지 1천 명으로 구성되었고, 약간의 여성 행정요원이 있었다. SS기동타격대는 기동경찰 9개 대대와 3개 총살대(Waffen-SS), 그리고 그 동조자들과 함께 행군하면서 1941~1942동계 기간 중, 거의 50만에 달하는 사람을 죽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이 부대는 1백3십만의 유대인과 2십5만에 이르는 집시를 비롯하여, 총 2백만에 가까운 사람을 죽였다. 가장 참혹한 학살은 1941년 7월에 있었던 빌니우스(Vilnius: 리투아니아 수도) 인근 포나리(Ponary: 현재의 Paneriai. 빌리우스 중심가로부터 10킬로 떨어진 지점)학살로 7만2천 명의 유대인, 8천 명의 리투아니아인과 폴란드인들이 SS기동타격대 B중대와 리투아니아 동조자들에 의해 집단 총살을 당하였다.

-포나리 학살-

1941년 8월27일부터 30일까지 카미아네츠 포딜스키(Kamianets-Podilskyi: 우크라이나 남서부 도시)에서, 2만4천 명의 유대인이 총살로 죽었다. 1941년 9월29~30양일간 자행된 바비야르 계곡(Babi Yar: 우크라이나 수도 Kiev 외곽) 학살에서는 3만3천7백71명이 살해되었다. 전쟁 기간 내내 독일은 이 계곡에서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였다. 나치는 처음 특정 직업이나 국가 같은 조직을 위해 일 할 수 있는, 15세에서 60세에 이르는 유대인 남성 인텔리겐챠를 제거 대상으로 보았다. 그들을 “볼쉐비키 관료”나 그와 유사한 사람들로 본 것이다. 그러나 1941년 8월부터는 여성과 아이들도 죽이기 시작했다. 1941년 8월1일 SS기병 여단이 예하 부대에게 내린 히믈러의 명령은, “모든 유대인을 총살 시켜야하고, 유대 여성은 늪으로 몰아 죽여야 한다“고 했다.

-아기와 함께(우크라이나)-

    1942년이 지나면서 수용소 요원들은 더욱 포악해졌다.  폭행과 굶주림으로 인해 피수용자의 사망률은 급증했다. 노동을 통한 몰살(Vernichtung durch Arbeit)은 하나의 정책으로, 피수용자들은 일을 하다가 죽거나 탈진하는 경우는 곧 총살되거나 가스실로 보내졌다. 식품 부족, 전염병, 사소한 규칙 위반에 대한 처벌 등으로 피수용자들의 평균 수명은 3개월에 불과했다. 작업 교대 시간은 길었고, 수시로 위험물 작업에 투입되었다. 수용소로의 운송은, 밀폐된 화물 차량에 피수용자를 가득 태운 후 환기도 마실 물도 없이 장시간이 소요되었다. 1942년 중반 수용소는 위생 검열을 위해, 새로 도착한 피수용자들에게 4주간을 대기토록 했다. 그들에게는 색깔 별 삼각형 표시를 한 죄수복을 입혔고, 이 표시는 죄수라는 뜻이었다.

-강제 노동-

    1940~1943년 기간 불가리아는 반유대인 정책(다윗의 별 부착. 전화와 라디오 소유 금지 등)을 채택하였다. 불가리아는 트라키아(Tracia; 흑해, 에게해, 마르마라해로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발칸반도의 남동쪽 지역)와 마케도니아를 합병한 후 1943년 2월, 2만 명의 유대인을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보내라는 독일의 요구를 수락했다. 이에 따라 합병 지역으로부터 1만1천 명의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냈고, 나머지 9천 명을 채우기 위해서는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유대인 6천 내지 8천 명을 보낼 계획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가리아 그리스 정교회와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항의가 이어지자, 국왕(Boris III. 1918~1943 재위)은 계획을 취소, 그 대신 불가리아 태생의 모든 유대인을 지방으로 소개疏開하였다.

    스톤(Dan Storn. 런던 대학교 교수. 역사학) 교수는, 로만 가톨릭 성직자 티소(Jozef Tiso. 1939~1945 슬로바키아 대통령. 1947년 반인도주의 범죄로 처형됨)가 이끌었던 슬로바키아를 나치의 가장 충실한 동조자로 보았다. 1938년 티소는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7천5백 명의 유대인을 추방했고, 1940년 여러 가지 반유대인 정책 채택, 1942년 가을쯤에는 이미 6만에 달하는 유대인을 폴란드로 추방하고 있었다. 이어 발생한 폭동으로 2천3백96명이 추가로 추방을 당했고, 2천2백57명이 살해되었다. 1944년 10월부터 1945년 3월까지는 1만3천5백 명의 유대인이 폴란드로 추방되었다. 스톤은, 꼭두각시 나라에서 이루어진 점을 고려해도, 슬로바키아 홀로코스트는 독일이 계획했던 이상의 피해를 냈음을 지적하고 있다.

    헝가리는 1944년 3월 독일의 헝가리 침공 이전까지는 유대인 추방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944년 5월15일부터 7월초까지 43만7천 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보냈다. 하루에 네 번, 매 번 3천 명씩 보냈다. 같은 해 10월과 11월, 헝가리 화살 십자당(Arrow Cross Party: 헝가리 민족주의 사회당)은 대독일 노동력 공급의 일환으로, 5천 명의 유대인을 수도 부다페스트로부터 오스트리아 접경지역까지 강제로 행군을 시켰다. 그러나 행군 도중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자, 행군은 중단되었다.

   
-체포된 유대여인들(부다페스트)-

    이태리도 반유대주의를 채택했지만, 독일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유대인에게는 독일 점령지역보다 이태리 점령지역이 안전한 곳이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이태리 유대인은 4만 명을 넘었다. 1943년 9월 이태리 중북부를 점령한 후 독일은, 그곳에 이태리 파시스트 괴뢰 정부(Republica Sociale Italiana)를 세웠다. 나치 비밀경찰(Gestapo)과 독일제국보안사령부(Reichssicherheitshauptamt)의 예하부서인 독일제국보안국(Reichssicherheitshauptamt)은 아우슈비츠로 이태리 유대인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1차로 로마를 떠난 1천34명의 유대인들은 1943년 10월23일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여, 그 가운데 8백39명이 즉시 가스실에서 죽었다. 이태리에서는 모두 8천5백 명 정도가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이태리 지배하에 있던 리비아에 세워진 몇 곳의 강제 수용소로 2천6백 명의 리비아 유대인이 보내져, 그 가운데 5백62명이 죽었다.

    1942년 나치의 압력을 받은 핀란드 정부는, 핀란드 시민이 아닌 2백 명 정도의 유대인을 독일에 넘겼다. 같은 해 말 시민의 반대에 직면한 핀란드 정부는 8명의 유대인을 수용소로 추방했고, 이 가운데 전쟁 후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 일본에서는 반유대주의가 거의 없었고, 박해도 없었다. 일본 점령하 중국 상하이에 있던 유대인들은 구금이 되기도 했지만, 독일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처형되지 않았다.

최후의 해결책

    1941년 12월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2천4백3명의 미국인이 죽었다. 그 다음 날인 8일 미국의 대일본 선전포고가 있었고, 11일에는 독일의 대미국 선전포고가 잇따랐다. 드워크(Deborah Dwork. Clark 대학교 교수. 역사학)에 따르면, 히틀러는 미국내 세력이 강한 유대인들이 독일 유대인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미국이 전쟁 개입을 못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확신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선전포고를 하자, 히틀러는 미국 유대인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1939년 1월30일 히틀러는 의회 연설에서, 만일 국제유대금융 자본가들이 다시 한 번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는다면, 지구의 볼쉐비즘화나 유대인의 승리가 아닌, 유럽에서 유대인의 몰살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대미선전포고 후 하루 뒤인 1941년 12월12일, 총통 관저에서 있었던 나치당 지도자들과의 회의석상에서 히틀러는 “유대인 몰살이라는 자신의 원칙”을 재천명하였다. 이 연설이 있고 그 다음날, 선동선전상 괴벨스는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기고 있다.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총통은 유대인을 쓸어버리기로 결정하였다. 만일 그들이 다른 전쟁을 획책한다면, 그들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이 말은 빈 말이 아니고, 이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반드시 유대인 파멸이라는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해 우리는 감상적일 수가 없다.”

    당지도자들을 만나고 난 4일 후, 프랑크(Hans Frank, 1900~1946. 폴란드 일반 정부 관할지역 총독.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짐)는 지역 책임자들에게 “유대인에 대해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나는 원칙적으로 유대인이 사라질 것이라는 전제하에 일을 추진할 것이다. 그들은 없어져야 한다.” 라고 했다. 1941년 12월8일 히틀러와 회동 후 히믈러는 그의 업무 수첩에 “유대인 문제/빨치산과 다름없이 몰살” 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브라우닝(Christopher Robert Browning, 1944~. 노스캐롤라이나 대 교수. 역사학)은, 이 회동에서 어떻게 유대인 살해를 정당화할 것인가가 토의되었다고 했다.

반제 회의

    1942년 1월20일 베를린 교외 반제에 있는 어느 건물에서 SS고위 지도자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1904~1942) 주재 하에 소위 반제 회의(Wannsee Conference)가 열렸다. 원래 이 회의는 1941년 12월9일 열릴 예정이었으나 참가자들에게 초청장이 늦게 발송되었고, 진주만 사건(12월7일) 때문에 무기 연기가 되었다가, 1월 8일 다시 초청장이 발송되어, 이날 개최가 되었던 것이다. 회의에는 하이드리히를 비롯하여, 제3제국 보안사령부 제4국B4(RSHA IV B4) 유대인 담당 아돌프 아이히만 중령, RSHA제4국장 뮐러준장(Heinrich Müller, 1900~사망일자 불명. 1945년 베를린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생사불명), 기타 SS관계자와 나치당 지도자들이 참가하였다. 브라우닝 교수에 따르면, 참가자 15명 가운데 8명이 박사학위 소지자였다. 따라서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얼간이들 모임이 아니었다. 소위 반제회의 프로토콜이라는 상세한 회의록이 30부나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 제16번 회의록이, 미국 검찰에 의해 1947년 독일 외무성 문서철에서 발견되었다. 아이히만이 서명하고 “극비”라는 도장이 찍힌 이 문서는, 하이드리히의 지시 사항을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후일 아이히만도 이 문서를 증언한 바 있다.

-반제 회의 건물-

    회의에서는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과 “유럽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에 관한 계획을 검토하고, 이를 위한 정책에 서로 협력할 것과 모든 권한은 하이드리히에게 있다는 걸 확인했다. 혼혈 독일인(Mischlinge: 반은 유대인)을 포함할 것인지 여부도 검토하였다. 하이드리히는, 유대인 문제의 또 다른 해결책으로, 유대인을 동유럽으로 추방하기 위한 장소가 확보되어 있으나, 이를 위해서는 히틀러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마지막 해결책으로 가는 과정은 올바른 지도(히틀러의 지도)가 필요하고, 유대인들은 적정한 노동을 위해 동유럽에 배치되어야 한다. 장애자가 아닌 유대인들은 남녀로 나뉘어 이 지역의 근로에 투입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자연적인 이유로 대부분이 제거될 것이다. 남은 자들은 분명 끈질긴 자들로, 그들은 자연선택의 결과임으로 그에 따라 처리될 것이다. 만일 그들을 석방한다면, 또다시 유대인 재활의 씨앗이 될 것이다. 마지막 해결책 실행 과정에서, 동유럽에서 서유럽까지 샅샅이 조사하여 유대인을 색출할 것이다. 주택 문제와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 인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등 보호령을 비롯하여 독일 본토에서 먼저 이 조치가 실행될 것이다. 추방된 유대인들은 우선 그룹을 지어 임시 게토로 보내질 것이며, 그 후 동유럽으로 보내질 것이다.”

    추방은 선택적이었다. “마지막 해결책”의 대상은 독일 통제 하에 있던 지역과 군사적 상황에 따라 그 포함 여부가 좌우될 영국, 아일랜드, 스위스, 터키,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 헝가리 거주 유대인 총 1천1백만 명이었다.

강제 수용소

     1941년 10월, 아우슈비츠로부터 수 킬로 떨어진 곳에 제2아우슈비츠(Auschwitz II-Birkenau)를 건설했다. 1942년 봄과 여름에는 각 수용소에 가스실을 설치했다. 다만 첼름노 수용소만은 가스실이 아닌 가스 차량(Van)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안락사 프로그램(Aktion T4)에 따른 것이었다. 죽음의 수용소로 알려진 소련 민스크 근처 트로스티네츠(Trostinets) 수용소에서는 6만5천 명이 죽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총살이나 가스 차량으로 처형되었다. 그밖에도 오스트리아 마우타타젠(Mauthausen), 폴란드 그단스크 소재 슈트트호프(Stutthof), 독일의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라벤스브뤽크(Ravensbrück) 수용소 등이 있었다.

    1939년 12월부터 차량에 가스 실린더를 장착하여, 폴란드 점령 지역의 장애인들을 죽이는데 사용하였다. 대량 총살이 진행됨에 따라 히믈러는 총살을 담당한 S요원들이 심리적인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다른 방안을 모색한 결과가 가스 처형이었다. 1941년 12월 첼름노 수용소는, 액체 가스가 아닌 훈증 가스를 도입했다. 희생자들은 완전히 죽지 않은 질식 상태로, 인근 숲속에 파놓은 구덩이에 매장되었다. 가스 차량은 소련의 민스크 게토 소탕 작전에서도,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총살이나 다름없이, 가스 차량도 병사들의 심리적인 문제를 불렀다.

    게를라하(Hans Christian Gerlach. 베를린 대 교수. 역사학)는 대량학살이 최고조에 달했던 1942년, 3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고 했다. 이 가운데 적어도 1백40만 명이 폴란드에서 살해되었다. 희생자들은 화물열차에 실려 수용소로 왔다. 죽은 노동자를 대체하기 위해 근로에 투입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도착 즉시 가스실로 갔다. 아우슈비츠의 경우, 약 20%정도가 노동에 투입되었다. 살해 대상자들은 옷을 벗긴 채, 귀중품은 모두 수용소 근무자들에게 빼앗겼다. 그런 다음 나신으로 무리를 지어 가스실로 들어갔다. 그들이 두려워할까, 그 방은 샤워실 또는 이를 잡는 방이라는 말로 속였다.

-옷을 벗긴 채 개스실로-

    아우슈비츠의 경우, 방이 차면 문이 닫히고 구멍을 통해 흘러 떨어진 시안화화합물(Zyklon-B)로부터, 유독성 시안화산 가스가 방출되었다. 사망 시간은 10분 내외였는데, 회스(Rudolf Höss, 1901~1947. SS장교. 아우슈비츠에 시안화화합물을 도입한 인물. 교수형에 처해짐)의 기록에 따르면, 죽는 시간은 구멍에 가까울수록 빨랐으며, 희생자의 1/3은 즉시 죽었다고 했다. 가스 처형을 감독한 SS의사 요한 크레머(Johann Paul Kremer, 1883~1965)는, 틈새를 통해 희생자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게 분명했다고 증언했다. 처형이 끝나면 방으로부터 가스를 제거한 다음, 돌격대원 (Sonderkommando: SS 나치 돌격대원과는 무관한 시체 처리를 위해 선발된 수감자. 대부분 유대인)들이 시신을 끌어냈다. 시체로부터 금이빨을 뽑아내고, 여인들의 머리털을 자르고, 보석류와 의족, 안경 등을 수거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처음에, 깊은 구덩이에 시체를 묻고 생석회로 덮었으나, 1942년 9월부터 11월까지는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10만구의 시체를 파내어 불에 태웠다. 1943년 초, 시체의 증가에 따라 가스실과 화장터가 증설되었다.

-개스 실-

    벨제쓰,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수용소 등은, 폴란드 일반정부 지역의 유대인 말살 계획인 라인하르트 작전(Operation Reinhard: 독일 점령 폴란드 유대인 말살 계획을 가리키는 암호명) 수용소로 알려지기도 했다. 1942년 3월부터 1943년 11월까지 1백5십2만6천5백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디젤엔진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일산화탄소로 처형하였다. 매장하기 전 시체로부터 금이빨을 뽑아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와는 달리, 여인들의 머리털은 죽이기 전에 잘랐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경우는, 희생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열차 도착지를 기차역처럼 꾸며, 역사처럼 보이는 건물에 커다란 가짜 시계를 걸어 놓기도 했다. 이 세 수용소의 경우, 처음에는 대부분의 희생자들을 구덩이에 묻었다. 1942년 중반부터 아우슈비츠, 첼름노, 벨제쓰,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는 대량 살상 증거말살 작전(Sonderaktion 1005)에 따라, 매장된 시신을 파내 불에 태웠다. 이는 증거 인멸을 위해서, 그리고 풍기는 악취와 마시는 물이 오염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는 70만구의 시체를, 구덩이에 장작불을 피워 태웠고, 타고 남은 유골은 잘게 부수어 가루로 만들어 땅에 뿌렸다.

-트레블링카 노천 화장터-

    홀로코스트는 나치가 계획하고 집행하였지만, 자발적으로 협조한 외국인(Ustashe; 크로아티아 파시스트 극우민족주의 조직의 경우)도 있었고, 강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참가한 동조자도 있었다. 국가 차원은 물론 개인 차원으로도 그랬다. 홀로코스트는 범유럽적인 현상으로, 현지 조력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계속적인 학살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많은 유럽 국가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유대인 문제 해결을 떠맡은 것이다.

레지스탕스 

    유대 전투 조직(ZOB), 바르샤바게토 유대 전투 연합(ZZW), 리투아니아의 빌나 연합 파르티잔 기구(Fareynikte Partizaner Organizatsye)등 몇몇 레지스탕스 단체가 생겨났다. 동유럽 전역에 걸쳐 적어도 열아홉 곳의 게토에서, 1백회 이상의 유대 레지스탕스 저항과 봉기가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단체는 ZZW로, 1943년 바르사뱌 게토에 남아 있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기 위해 독일군이 도착하자, 이 단체와 전투가 벌어졌다. 4월19일, ZOB와 ZZW 전사들의 반격으로 일단 후퇴했던 독일군은, SS대장 슈트룹(Jürgen Stroop, 1895~1952. 반인도주의 범죄로 처형됨)의 지휘 하에 그날 늦게 다시 반격에 나섰다. 빈약한 무장을 한 1천 명 정도의 유대 전사들은 4주 이상 이 SS 부대의 발을 묶어 놓을 수 있었다. 폴란드 및 유대 기록에 따르면 이때 수백 내지 수천 명의 나치군이 피살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16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독일군은 이때 죽은 유대인을 1만4천 명으로 -전투 중 7천명, 전투 후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7천명-기록하고 있다. 폴란드 레지스탕스 신문(Gwardia Ludowa: 1939년에 창간)은 1943년 5월 어느 날, 연기와 화염 속에 죽어가는 유대 파르티잔 병사들과, 전설적인 전투력의 독일군이 붕괴되는 장면을 보도하였다. 레지스탕스의 승리와 독일군이 약체라는 사실을 말하는 기사였다. 전투가 끝난 후 5만3천에서 5만6천 명 가량의 유대인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체포된 레지스탕스-

    1943년 8월2일의 트레블링카 수용소 저항에서는 6명의 경비병을 살해하고, 수용소 건물에 방화를 하였다. 이 혼란을 틈타 탈주에 성공한 수감자들도 있었다. 같은 해 8월16일에 있었던 폴란드 비알리스토크 게토 (Białystok Ghetto) 레지스탕스에서 유대인들은 닷새에 걸쳐 저항을 했고, 그들 모두는 수용소로 보내졌다. 같은 해10월 14일 소비보르 수용소에서 탈주를 시도하던 유대인 수감자들이 11명의 SS대원과 세 명의 우크라이나, 독일인 경비병을 죽였다. 아라드(Yitzhak Arad, 1926~2021. 이스라엘 역사학자)에 따르면, 이 숫자는 단 한 번의 저항에서 가장 많은 SS대원이 살해된 경우였다. 이때 약 3백 명의 수감자들이 탈주에 성공했으나, 이 가운데 1백 명은 다시 체포되어 즉시 총살되었다. 1944년 10월7일, 대부분이 그리스계, 헝가리계 유대인이었던 아우슈비츠 돌격대(Sonderkommando: 수감자들 가운데 선발된 근로자) 3백 명은, 이제 조만간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반란을 일으켜 화장장을 폭파하였다. 이 과정에서 3명의 SS대원이 피살되었다. 이 때 제2화장터에서 일하고 있던 돌격대원들이 반란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자신들을 감독하던 십장을 화장장 불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그때 SS는 이미 사태를 장악한 뒤였다. 돌격대원 4백51명이 즉시 처형되었다.

    유럽 전역에 걸쳐 파르티잔에 참가한 유대인은 대략 2만에서 10만으로 추정된다.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와 소련 영토에서는, 수천 명의 유대인이 삼림이나 험지로 들어가 파르티잔에 합류하였다. 소련 유대인 파르티잔은 2만에서 3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유대 파르티잔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단체는, 비엘스키 형제(Bielski: 폴란드 유대인 가문)가 이끈 백러시아 비엘스키 파르티잔이었다. 유대인들은 홈 아미(Home Army: 1942년 나치 점령 폴란드에서 구성된 반나치 운동)에도 가담하였다. 1940년부터 1942년 8월까지,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바르샤바로부터,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관한 정보를 계속 받고 있었다. 이는 폴란드 홈 아미의 필레츠키(Witold Pilecki, 1901~1948. 폴란드 정보 장교로 레지스탕스 지도자)대위 덕택이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상황을 알아내고자 1940년 나치에 위장 자수하여 수용소로 보내졌으나, 1943년에 탈주에 성공, 아우슈비츠 전복을 위한 레지스탕스와 폴란드 망명정부를 위한 정보수집 활동을 한 인물이었다.

-필레츠키 대위-

    폴란드에 대한 개전과 동시 독일은, 히틀러의 계획 즉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언급한, 동유럽에 대규모 독일인 식민지 설치를 위한 “삶의 공간(Lebensraum)” 획득이 필요했다. 히틀러의 그 계획은 “고전적인 제국주의와 나치 인종 이데올로기가 결합”된 것이었다. 폴란드 유대인 제거는 나치의 장기계획이었던 반면, 폴란드인들은 점령과 동시 물리적 폭력의 대상이었다. SS는 폴란드인들을 주적으로 삼고, 폴란드 서부 지역의 “폴란드적인 요소”를 파괴하라고 예하 부대에 명령했다. 독일인 이주를 위한 사전 작전이었다.

    1939년 9월7일, SS대장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는 폴란드 귀족, 승려, 유대인은 처벌을 받을 것임을 발표했고, 9월12일 독일군 최고사령관 카이텔(Wilhelm Keitel, 1882~1946)은, 처단 대상에 폴란드 인텔리겐챠들도 포함시켰다. 1940년 3월15일, SS대장 히믈러는, 독일 군수산업에 폴란드 각 분야 전문가들이 투입될 것임을 발표를 했다. 그렇게 투입된 전문가들은 이용을 당한 후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나치는 위대한 독일이 폴란드 사람들을 숙청하는 것은 숙명이며, 최우선의 과업이라고 했다. 1940년 말 히틀러는, 폴란드내 모든 위해 요인을 제거하는 계획을 최종 확인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법정과 폴란드 대법원은 “유대인과 폴란드 시민을 생물학적으로 학살하려 한 것이 폴란드 내 나치 경찰의 임무였다" 는 판결을 했다.

    1942년 1월6일 소련 외무상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1890~1986)는, 나치 만행에 관한 외교문서를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에 보냈다. 그 해 2월 비너(Szlama Ber Winer, 1911~1942. 폴란드계 유대인)가 첼름노 강제 수용소를 탈출하여, 바르사뱌 게토의 샤바트 그릅(Oneg Shabbat: 나치 점령 하 게토의 생활상을 기록한 역사학자, 작가, 랍비, 사회봉사자들 모임)에 수용소 관련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의 보고서는 익명으로 작성한 것이었다. 카르스키(Jan Karski, 1914~2000. 폴란드 레지스탕스 전사)는 나치 관련 정보를 폴란드 망명정부 및 연합군에게 제공하였다. 그해 5~6월경 첼름노, 소비보르, 벨제쓰 등 강제 수용소에 관한 소문이 런던에 퍼지고 있었다. 이 같은 경로를 통해 1942년 7월 중순, 폴란드 망명정부 지도자들은 그제서야 아우슈비츠 유대인 대량 학살을 알았다. 폴란드 내무성이 작성한 보고서(Sprawozdanie)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얀 카르스키-

"유대인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학살당하였다. 총살, 창, 독가스 실 등이 이용되었다. 게슈타포가 사형 판결을 내린 수감자는 총살 및 창으로, 병이 들거나 노동능력을 상실한 수감자와 가스 처형이 필요한 소련군 포로, 유대인들은 가스실로 보내졌다."

    1942년 11월12일, 카르스키의 "폴란드 상황에 관한 보고서(보고서 6/42호)" 런던 폴란드 망명정부에 도착하였다. 영어로 쓴 108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다시 워싱턴 주재 폴란드 대사관으로 보내졌다. 같은 해 12월10일, 폴란드 외무상 라스진스키(Edward Raczyński, 1891~1993)는 그 학살에 관해, 갓 태어난 유엔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의 연설문은 “독일 점령하 폴란드에서 자행된 유대인 대량 학살”이라는 제목으로, 유엔 회원국들에게 배포되었다. 그는 독가스 사용에 관해 언급하고 트레블링카, 벨제쓰, 소비도르가 강제수용소라는 점과, 1942년 3월과 4월 그 수용소들에서 수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하였음을 밝혔다. 폴란드 유대인 3백만 명 가운데 1/3이 이런 방법들로 죽었다고 했다. 뉴욕타임스와 런던 타임스가 라스진스키의 발언을 보도했다. 영국 수상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도 보고를 받았고, 이든(Anthony Eden, 1897~1977. 당시 영국 외무상)은 이 보고서를 내각에 제출하였다. 1942년 12월17일, 연합국은 나치의 “야만적이고 냉혈적인 몰살 정책”에 관한 유엔 회원국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전쟁 중 약 6백만 명의 폴란드 시민들이 죽었고, 그 가운데 유대인이 3백만 명 비유대 폴란드 시민이 3백만 명이었다. 이는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 폴란드인은 제외한 숫자였다.

종전

    1943에 들어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으나 남서 유럽으로부터 철도를 통한 유대인 운송은 계속되고 있었다. 유대인 운송은 군수물자 수송 다음으로 우선이었다. 1942년 말에 이르러 점증하는 군사적 어려움 속에서도 유대인 수송은 계속되었다. 군지도자들이나 경제 관료들은 유대인 운송에 따른 자원의 낭비, 유대인 숙련 노동력 살해에 불만이었지만 나치 지도자들은 경제적인 고려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 불가피성에 더 무게를 두었다.

    1944년, 아우슈비츠에서 5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가스로 처형함으로써 대량학살은 광적인 단계에 이르렀다. 1944년 3월19일 히틀러는 아이히만을 헝가리로 보내, 유대인 처형을 감독토록 하였다. 5월15일부터 7월9일까지 44만 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고, 그곳에 도착하는 즉시 가스실로 들어갔다. 이 일이 있기 한 달 전 아이히만은 브란트(Joel Brand, 1906~1964. 부다페스트 시온주의자 지하단체 회원)를 중개인으로 하여,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연합군 트럭 1만대와 유대인 1백만 명을 교환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 제안을 폭로함으로써, 나치의 계획을 좌절 시켰다.

    소련군의 진격해오자, SS는 폴란드 동부 지역의 강제 수용소를 폐쇄하고 자신들의 만행을 숨기려고 했다. 가스실은 해체되고, 화장장은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했다. 대규모 무덤에서 시체를 파내어 화장을 했다. 1945년 1월부터 4월까지 SS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강제 수용소를 향하여 수감자들을 죽음의 행진으로 내몰았다. 굶주림과 악조건 속에서 기차역으로 행군한 후 먹을 것도 없는 무개화차에 실려 간 다음, 다시 기차에서 내려 수용소까지 행군을 해야 했다. 트럭이나 화차를 타고 간 사람도 있고, 전 거리를 걸어서 간 사람도 있었다. 낙오자는 즉시 총살되었다. 독일군 기록에 따르면, 1945년 1월 현재 7십1만4천 명이었던 유대인 수감자는, 5월까지 2십5만 명이 행군 도중에 죽었다.

해방

    1944년 7월25일, 진격하던 연합군의 눈에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가 들어왔다. 가스실을 갖춘 그 수용소를 소련군 부대가 발견한 것이다.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벨제쓰 등 수용소는 이미 1943년 나치가 폭파한 후였다. 1945년 1월17일, 5만8천 명의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이 서쪽을 향해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1월27일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였을 때 3개 동에 7천명, 부속 건물에 5백 명의 수용자가 있었다. 4월11일 부헨발트 수용소(Buchenwald: 독일 Weimar 시 인근)는 미군이, 베르겐 수용소(Bergen-Belsen: 독일 북부 하색슨 주 마을)는 15일 영국군에 의해, 29일 다하우 수용소(Dachau)는 미군이, 30일에는 소련군이 라벤스브뤼크 수용소(Ravensbrück: 베르린 인근 소재 마을. 여자 수용소)를 점령하였다. 이어 5월5일에는 미군이 마우타우젠 수용소(Mauthausen: 오스트리아 소재)를, 5월3일에는 국제적십자사가 테레지엔수용소(Theresienstadt: 체코슬로바키아 소재)를 장악하였다.

-마우타우젠 수용소-

    영국군 제11기갑사단이 베르겐 수용소를 접수하였을 당시, 9만 명의 수용자(유대인 90%)와 매장하지 않은 1만3천구의 시체가 있었고, 생존자 가운데 1만 명이 장티푸스와 영양실조로 곧 사망하였다. BBC 방송 종군 기자 딤블비(Richard Dimbleby, 1913~1965)는 목격한 장면을 있는 그대로 기사를 썼고, BBC는 그의 보고가 너무 끔찍하여 믿지를 않고 4일간이나 방송을 지연, 딤블비가 사직을 하겠다고 하자, 그때서야 보도를 했다. 딤블비는, 영국군 병사들이 그처럼 격분하는 걸 본적이 없다고 했다. 그가 쓴 1945년 4월 15일자 기사이다.

“여기 1에이커가 넘는 땅에 죽은 이들과 죽어가는 이들이 누워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별할 수가 없다. 산 사람들은 죽은 이들의 시신을 베고 누워 있고, 그들 주변으로 여위고 겁에 질린 사람들이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아무런 목적 없이 유령처럼 대열을 이루어 떠돌고 있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없지만 그들은 그 곳을 벗어날 수가 없고, 주변의 비극적인 모습을 볼 수도 없다. 이곳에서 아기들이 태어났으나, 그 작은 생명들은 모두 시들어 죽었다. 미쳐버린 듯한 어느 여인이 아기에게 젖을 주겠다며 영국군 보초병에게 소리를 지른 다음, 아기를 그 병사에게 던져버렸다. 병사가 보니 죽은 지 며칠이 지난 아기였다. 이날은 내 일생에서 가장 참혹한 날이었다.” 

유대인 사망자 수는, 전 세계 유대인 총 인구의 약 1/3, 전쟁 전 유럽 유대인 인구 9백7만을 고려하면, 유럽 유대인의 2/3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전쟁 전 유럽 유대인들은 폴란드에 3백5십만, 소련 3백만, 루마니아 8십만, 헝가리 7십만, 독일 5십만 명 등 대부분 동유럽에 거주하고 있었다.

    통상적인 유대인 희생자 수는 6백만 명으로, 이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회틀(Wilhelm Höttl, 1915~1999. 오스트리아 나치당원. SS대원. 전후 미국 CIC첩보 요원으로 포섭됨)에게 제출하고, 회틀이 법정에서 진술한 숫자이다. 학자들은 4백2십만에서 7백만 정도로, 바솀(Yad Vashem,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희생자 기념회)은 5백만에서 6백만 정도로 보고 있다. 1990년 바우어(Yehuda Bauer,1926~ 히브리 대 교수. 역사학)는 5백5십9만에서 5백8십6만으로 보았고, 1991년 벤츠(Wolfgang Benz, 1941~. 베를린 대 교수. 역사학)는 5백29만에서 6백만으로 보았다. 이 숫자는 1백만 이상의 어린이를 포함한다. 이 같은 차이는 1939년 현재 정확한 유럽 유대인 수를 알 수 없고, 사망자를 두 번 계산한 경우도 있으며, 가해자로부터의 부정확한 보고,  석방된 후 학대로 인해 사망한 사람을 포함할 것인가의 여부 등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9십6만, 트레블링카 8십7만, 벨제쓰 6십만, 첼름노 3십2만, 소비보르 2십5만, 마이다네크 7만9천 명 등 유대인 희생자의 반 이상이 폴란드 강제 수용소에서 죽었다.

    사망률은 유럽 각국의 자국 내 유대계 시민들을 보호하겠다는 의지에 좌우되었다. 독일과 동맹관계에 있었던 국가들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통제는 자국의 주권문제로 인식했다. 이에 따라 유대인 공동체를 완벽히 파괴하기 위한 제도와 기구가 끊임없이 생겨났다. 1942년 반제 회의에서 나치가 유대인 청소를 선언한 후 에스토니아 유대인 99%가 죽은 것처럼, 독일이 점령한 국가에서는 기존의 정부가 존속했느냐 여부가 유대인 사망률과 관련을 맺고 있다. 예컨대 정부가 존속되었던 프랑스는 75%, 덴마크는 99%의 유대인이 생존을 했던 반면, 정부가 붕괴되었던 네델란드에서는 75%가 죽었다. 

    나치는 슬라브족을 하등인간(Untermenschen)으로 보았다. 독일 군대는 소련의 마을들을 불태우고, 그 시민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하였으며, 식량을 몰수하여 기근을 일으켰다. 백러시아에서는 3십8만 명을 강제노동에, 1백6십만을 살해하였다. 5천2백9십5곳의 유대인 정착지를 파괴하기도 했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1941년 초가을부터 1942년 늦은 봄까지, 5백7십만 의 소련군 포로 가운데 3백3십만이 독일군의 처형과 학대로 죽었다. 독일 전쟁 수행에 포로의 노동력이 필요함에 따라 사망률은 낮아졌는데, 1943년 50만 명의 소련군 포로가 독일군을 위한 노예 노동에 투입되기도 했다.

    나치는 유럽 집시의 25%에 달하는 2십2만 명을 죽였다. 리터(Robert Ritter, 1901~1951. 독일 인종학자)는 집시를 “진화가 없는, 돌연변이에 의해 생긴 별종의 인간”이라고 했다. 1942년 집시는 유대인과 동일한 법의 규제 대상이 되었고, 12월에 들어 히믈러는, 독일 군대에 복무하지 않은 집시는 모두 아우슈비츠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1943년 11월15일 그는 명령을 조금 수정하여, 나치가 점령한 소련 지역에 정착한 집시와 혼혈 집시는 시민으로 간주하여 수용소 행에서 제외했다. 프랑스와 벨지움, 네델란드의 집시는 행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일정 지역을 떠나지 못했고, 동유럽의 집시들은 모두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많은 수가 죽음을 당했다.

-추방당하는 집시-

    독일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원들은 모두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1941년 12월7일 히틀러의 직접 명령에 따라, 독일 전역은 물론 나치 점령 지역에서 정치범들에 대한 고문과 사형이 있었다. 피셸(Jack Fischel. 펜실바니아 대 교수. 역사학)에 따르면, 1944년 4월에는 1천7백9십3명의 정치범에 대한 사형선고가 있었다. 군대 복무를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그곳에서 신앙을 포기하고 국가에 복종할 것을 요구 받았다.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약 3천 명의 정치범 가운데 1천4백 명이 죽음 맞았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에서는, 10만 명의 게이 가운데 5만 명이 투옥되었다. 이 가운데 5천에서 1만5천 정도가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수백 명의 게이가 중한 벌을 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거세 수술을 받았다. 1936년 히믈러는, 동성애 추방과 임신중절을 위한 기구를 설치하였다. 게이는 바 출입을 금지시켰고, 게이 관련 출판사를 폐쇄했다. 나치는 그들을 성적 이상자가 아니라 반사회적으로 보았다. 나치가 권력을 장악할 당시, 약5천에서 2만5천에 이르는 아프리카계 독일인이 있었다. 독일을 비롯하여 독일 점령 지역의 유럽 흑인들은 투옥 대상이기는 했으나, 집단적인 학살 대상은 아니었다.

결과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11월20일부터 1946년 10월1일까지 독일 뉘른베르크(Nürnberg: 독일 바이에른 주 도시)에서, 나치 지도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연합국 군사재판이 열렸다. 아돌프 히틀러, 하인리히 히믈러, 조세프 괴벨스는 몇 달 전 이미 자살을 한 후였다. 스물네 명의 전쟁범죄자와 제3제국 내각, SS, SD, SA, 게슈타포, 합동참모본부, 최고사령부 등 7개 조직이 기소되었다. 기소의 대상이 된 죄목은 “평화에 반하는 범죄의 목적 달성을 위한 음모와 계획”이었다. 즉, 공격전을 기획하고 착수하고 이행한 죄, 전쟁 범죄, 그리고 반인도주의 죄였다.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 나치 외무상), 카이텔(Wilhelm Keitel. 나치군 최고 사령관),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나치 이론가), 요들(Alfred Jodl. 나치군 최고사령부작전참모)등 11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1949년까지 계속된 재판에는 1백8십5명의 또 다른 피고인들이 추가로 회부되었다.

    1958년 서독은 울름 재판(Ulm Einsatzkommando: 서독 법률에 의한 최초의 나치 전범 재판)을 거쳐, 전범 처리를 위한 별도의 기구를 신설하였다. 나치 전범과 그 동조자들에 대한 재판은 계속되었다.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아르헨티나에서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을 체포하여 이스라엘로 압송, 열다섯 가지 죄목으로 기소하였다. 1961년 12월 그는 유죄판결을 받고, 다음 해 처형되었다. 그의 재판과 죽음은, 전쟁 범죄와 홀로코스트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히만-

    1951년 이스라엘 정부는, 독일이 유럽 유대인들로부터 60억 달라 상당을 절취했다고 주장하며 독일정부에 대해, 살아남은 50만 유대인 생존자 재활을 위한 재정자금으로 15억 달러를 요구하였다. 이어 뉴욕에서 배상금 협상회의가 개최되어, 최종 8억4천5백만 달러로 타결되었다. 1988년 독일은 추가로 1억2천5백만 달러를 지급하였다. BMW, 도이치 은행(Deutsche Bank), 오펠(Opel), 지멘스, 포크스바겐 등이 전쟁 중 강제 노동 죄목으로 피소되었다. 이에 대해 독일은 2000년 “기억, 책임, 미래 재단”을 설립하고 강제 노동 피해자들에게 4십4억5천만 유로를 지급했다. 2013년 독일은 5만6천 명에 달하는 전 세계 홀로코스트 생존 유대인들에게, 7억7천2백만 유로 상당의 의료비, 간호비, 사회보장금을 지급했다. 2014년 프랑스 국영 철도회사(SNCF)도 생존 유대계 미국인들에게 1인당 10만 달러씩, 총 6천만 달러를 지급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강제수용소로 유대인을 운송한 책임에 대한 보상이었다.

    세계 역사를 인종이라는 관점에서 본 몽상가들에 의해, 산업적인 방식으로 자행된 상상 불가능한 규모의 인간 살육이 바로 홀로코스트이다. 그래서 홀로코스트는 특이하고 괴이한 것이다. 1951년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기념일(Yom HaShoah. 히브리 력 Nisan 27일. 그레고리력 3~4월)을 제정하였다. 이 기념일은 현재 유엔을 비롯하여 37개국이 준수하고 있다.

6. 아우슈비츠

    앞 장에서 약술하였던 아우슈비츠에 대해 조금 더 상세하게 기술코자 한다. 에반스(Richard J. Evans, 1947~.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역사학)는 나치즘을 인종 위생학(Racial hygiene: 나치의 우생학 이론. 잡혼 금지, 순종 교배 원칙), 우생학, 반유대주의, 범게르만주의, 영토 팽창주의 등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는 이데올로기로 언급한 바 있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유대인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후 독일계 유대인들에 대한 폭력 사태가 빈번했고, 공무원이나 법조계에 그들의 취업을 제한하는 법률이 제정되기도 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히틀러는 폴란드 지도층과 지식인들을 멸할 것을 명령하였다. 독일 제국에 복속된 아우슈비츠 지역은 가우 실레시아(Gau Silesia: 독일에 복속된 실레시아 나치 행정구역)의 일부가 되었다가, 1941년부터는 나치의 상실레시아(Upper Silesia: 폴란드, 체코, 독일 접경지역) 행정구역으로 재편되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1941년 4월에 세워졌다. 아우슈비츠 최초의 가스 학살은 소련 전쟁포로를 상대로 1941년 8월 무렵 자행되었다. 학자들은 1941년 말까지의 기간을 홀로코스트의 제1단계로 본다. 이 기간 중 50만에서 80만에 달하는 소련계 유대인들이 나치 특수부대(Einsatzgruppen: SS), 일반 병사, 현지 동조자들에 의해 학살을 당하였다.

    1942년 1월 20일 반제 회의(Wansee Conference: 베를린 교외 반제에서 개최된 나치 고위관리들과 나치 친위대 지도자들 모임)에서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1904~1942)가 유대인 문제에 관한 최후의 해결책(Final Solution)을 구상한 후, 1942년 초부터 나치가 점령한 유럽 전역의 유대인들을 열차에 실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Auschwitz), 벨제크(Bełżec), 첼름노(Chełmno), 마이다네크(Majdanek), 소비보르(Sobibór), 트레블링카(Treblinka) 등 나치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아우슈비츠 I

    아우슈비츠 제I 수용소(Auschwitz I)는 원래 제1차 세계대전 중 징용 근로자들 숙소였다가 후일 폴란드 육군 막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이곳은 수용소 행정본부이기도 했다. 폴란드 크라크푸(Kraków: 폴란드 제2도시)로부터 남서쪽 50킬로 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길이 약 1천 미터 넓이 약 4백 미터의 터에 벽돌로 지은 22개동의 건물이 들어서고, 그 가운데 8개동은 2층 건물이었다. 1943년, 단층 건물들을 2층으로 증축하였고 8개동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아우슈비츠 I-

     1940년 4월 SS대장 히믈러(Heinrich Himmler, 1900~1945)는 수용소 SS대장 회스(Rudolf Höss, 1901~1947)의 조언에 따라, 아우슈비츠를 수용소로 할 것을 승인하였다. 1940년 5월 20일, 작센하우젠 감옥으로부터 30명의 죄수가 처음으로 도착하였다. 독일인 전과자들인 그들은 “초록색(Grünen)”으로 분류되어, 초록색 삼각형 표시를 부착한 수의를 입었다. 그들은 형무소 관리 요원으로 왔음으로, 그들의 만행은 수용소 초기 새디즘이 자리를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특히 그들의 폭력은 폴란드 죄수들에게 직접적으로 가해졌다. 30명 중 죄수 번호 1번인 브로트니비츠(Bruno Brodniewicz, 1895~1945)는 최고참 죄수였다. 다른 죄수들은 카포(Kapo: 강제 노동 감독자)나 구역 감시자 역할을 하였다.
  

    최초의 대량 수감자들은 728명의 폴란드 남성 정치범들이었다. 가톨릭 성직자와 유대인들인 그들은, 1940년 6월 14일 폴란드 타르노프스키(Tarnowskie: 폴란드 남부 실레지아 고원지대 소재 도시)로부터 도착하였다. 그들에게는 31번부터 728번까지 일련번호가 부여되었다. 회스가 글뤼크스(Richard Glücks, 1889~1945. 수용소 수사 대장)에게 보낸 1940년 7월 12일자 편지에는, 현지의 광적인 폴란드 주민들이 SS를 상대로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곳 주민들의 토지를 빼앗으려고 한 회스의 모략이었다. 1940년 말 SS는 주변의 토지를 몰수, 40평방 킬로에 달하는 “관심 지역”을 설정한 후 SS, 게슈타포, 현지 경찰로 하여금 감시토록 했다. 그 후 1941년 3월까지 총 1만9백 명이 아우슈비츠에 투옥되었다. 대부분 폴란드인들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 곧장 가스실로 가지 않는 경우, 수감자들이 처음 발을 딛는 곳은 “노동은 자유를 가져온다(Arbeit macht frei)”라는 표지가 붙은 정문 옆 죄수 접수 센터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문신으로 몸에 번호를 새기고, 머리를 깍고, 예방주사를 맞고, 줄이 난 죄수복을 입었다. 1942~1944년 사이에 세운 이 접수 센터에는 목욕탕과 세탁소가 각각 한 곳, 옷 속의 이를 죽이기 위한 열아홉 곳의 가스실이 있었다. 현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 박물관 방문객 접수 센터가 바로 그곳이다.

-접수 센터-

    아우슈비츠 제I수용소 화장장 건설은 1940년 6월말 무렵 착수하였다. 당초 이 화장장은 처형을 위해서가 아닌, 수용소에서 죽은 시신을 화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1940년 8월 시작한 이곳의 화장 작업은 1943년 7월까지 계속되었고, 그 이후의 화장은 아우슈비츠 제II수용소가 맡았다. 1942년 5월까지 3개의 소각로가 설치되어, 하루 24시간 동안 340구의 시체를 처리하였다.

-아우슈비츠 I 화장장-

    아우슈비츠에 유대인들이 처음 도착한 날짜가 언제였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어쨌든 1942년 1월20일 열린 “반제 회의”에서 나치 지도층은 완곡한 어법으로 “마지막 해결책”을 위한 개략적인 계획을 발표하였다. 파이퍼(Francis Piper, 1941~. 폴란드 역사학자)에 따르면, 전후 재판에서 회스는 유대인 학살이 시작된 날짜를 1941년 12월 또는 1942년 1월, 아니면 1942년 3월 여자 수용소 설립 직전이었다는 일관성이 결여된 진술을 하였다고 한다. 체크(Danuta Czech, 1922~2004. 폴란드 역사학자)는, 1942년 2월 15일 상실레시아 보이텐(Beuthen)으로부터 열차로 수송되어 온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I에 도착하여 곧 가스실로 보내졌다고 했다. 1998년에 있었던 증언에 따르면, 그 열차는 보이텐 출신 여성들로 가득했었다고 했다. 1941년 가을부터 노동을 할 수 없거나 적합하지 않은 유대인들은 곧 가스실로 보내졌다. 1942년 3월 20일경, 폴란드 실레시아와 자그레비 다브로브스키로부터 열차로 운송된 유대인들이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아우슈비츠 II(Auschwitz II-Birkenau) 가스실로 보내졌다. 프랑스로부터 독일 제국 안전국(RHSA) 수송 작전은 3월 30일부터 있었다. 새로 도착한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낼 것이냐 아니면 노동에 투입할 것이냐의 결정은 1942년 4월부터 시작, 노동에 부적합하다고 판단된 사람들은 죄수로 등록됨이 없이 곧장 가스실로 보내졌다.

    1941년 아우슈비츠 I을 방문한 히믈러는 수용소 확장을 명령한 것으로 보인다. 1941년 1월 10일, 폴란드 레지스탕스는 런던 폴란드 망명정부에 “아우슈비츠 현재 수용 능력은 7천 명으로, 약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재건축 될 것으로 보인다” 라는 보고를 했다. 전쟁 포로수용소라고 불린 아우슈비츠II-비르케나우(Birkenau)는 1941년 10월, 아우슈비츠I에서 3킬로미터 거리의 브르제진카에서 착공되었다. 당초의 설계에 따르면, 아우슈비츠II는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구역마다 6개의 산하 수용소를 건설하여, 수용소마다 별도의 정문과 담장을 설치하기로 되어 있었다. 처음 두 구역이 완공(B1 구역은 검역소)되었다. 셋째 구역은 1943년 착공하였으나, 1944년 4월 건설이 중단되었다. 네째 구역은 착공을 할 수 없어 건설을 포기하였다.

    아우슈비츠 I에서 가스로 죽음을 당한 사람들 숫자도 소스에 따라 다르다. SS 비군사 요원으로 아우슈비츠 I에서 근무했던 브로드(Perry Broad, 1931~1993)는 “열차로 연이어 수송되어 온 사람들이 화장터로 사라졌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아우슈비츠 I의 돌격대원이었던 뮐러(Filip Müller, 1922~2013)는 프랑스, 네델란드, 유고슬라비아, 상 실레시아 등지와 테레진슈타트(Theresienstadt: 독일신탁통치령 보헤미아, 모라비아의 테레진 마을에 나치가 세운 게토), 치카노프(Ciechanow: 폴란드 북부 도시), 그로드노(Grodno: 백러시아 그로드노 시에 나치가 세운 게토)로부터 실려 온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음을 당했다고 했다. 이와는 달리 프레삭(Jean Pressac, 1944~2003. 프랑스 작가)은 1만 명 정도가 아우슈비츠 I에서 살해되었다고 했다. 1942년 12월 아우슈비츠 I에서 마지막으로 가스 처형을 당한 사람들은, 아우슈비츠 II의 돌격대원 4백여 명이었다. 그들은 10만구가 넘는 수용소 대규모 무덤을 파헤쳐, 그 유골을 불사른 강제 노동에 동원된 사람들이었다. 만행 현장의 증인들이기도 했다.

    SS돌격대원 비쇼프(Karl Bishcoff, 1897~1950. 건축가)는 건설 책임자였다. 당초의 예산 8.9백만 마르크로, 각 동마다 55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그러나 744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를 변경하였는데, 이는 당초의 수용 목표인 9만7천 명을 상회하는 12만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모두 174개 동이 건설되었다. 각 동의 크기는 길이 35.4미터, 폭 11.0미터로, 4평방미터 크기의 칸 62개를 설치하였다. 각 칸은 3명, 나중에는 4명이 잘 수 있도록 하였다. 1인당 1평방미터에서 자고, 개인 소지품을 보관해야 했다. 존재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도 박탈을 당했던 것이다. 수용자들은 자신들이 짓고 있는 건축물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했다. 작업 이외에도 밤이 되면 점호를 받아야 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남자 수용자들은 저체온증, 굶주림, 과로사로 인해 입소 후 수주 만에 죽었다. 1941년 10월에 입소한 소련군 포로 약 1만 명 가운데 1942년 3월 1일 현재 945명만 살아 있었다. 살아남은 그들은 아우슈비츠 II로 보내져, 5월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아우슈비츠 I 벙크침대-

아우슈비츠 II

    아우슈비츠 II(Auschwitz II-Birkenau) 최초의 가스실은 1942년 3월부터 운영을 시작하였다. 3월 20일 폴란드 실레시아와 다브로프스키에(Zaglebie Dabrowskie: 폴란드 남부 소재 시)로부터 게슈타포가 보낸 폴란드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화물역에 도착한 후 곧바로 아우슈비츠 II 가스실로 보내졌다. 그들의 시체는 인근 벌판에 묻었다. 가스실은 죄수들이 “작고 붉은 집”으로 부른 곳에 있었다. SS대원들은 그곳을 벙커 1로 불렀다. 가스 설비를 갖춘 붉은 벽돌의 그 건물은 밀폐된 창문에 4개 방을 합쳐 만든 두 개의 방이 있었다. 방마다 문에는 “방역”이란 팻말이 걸려 있었다. 두 번째 건물 “작고 하얀 집(또는 벙커 2)”는 1942년 6월부터 운영을 시작하였다. 1942년 7월 17일 그곳을 방문한 히믈러 앞에서, 네델란드계 유대인들을 가스로 처형하는 시연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아우슈비츠 III 건설 현장을 방문한 후, 모로비츠(Morowitz: 아우슈비츠 III 산하 수용소)에 파르벤 사(IG Farben: 독일 화학 및 의약품 회사)의 새 공장을 세웠다. 이 두 건물은 1943년 봄, 새 화장장이 건설되면서 운영이 중단되었다가, 1943년 헝가리 유대인들을 처형하기 위해 재가동 되었다. 벙커1은 1943년에, 벙커2는 1944년 11월에 폐쇄되었다.

-아우슈비츠 II-

    화장터 1과 화장터 2의 설계를 보면 가로 30미터 세로 11.24미터 크기의 지상 소각실, 그리고 지하에는 탈의실과 가스실이 있었다. 탈의실에는 벽을 따라 목제의 벤치가 놓여있고, 옷걸이에는 번호가 먹여져 있었다. 희생자들은 아마 5야드의 좁은 통로를 지나 가스실로 왔을 것이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 널따란 공간을 만났을 것이다. 가스실의 벽은 백색으로 천정에는 샤워기 같은 수도꼭지가 걸려 있었다. 소각로 1기당 1일 24시간 화장 능력을 보면 제1기는 3백40구, 제2기와 제3기는 합쳐 1천4백40구, 제4기와 5기는 각각 7백68구였다. 1943년 6월까지 모든 소각로가 운영되었으나 1943년 7월 이후 제1기는 사용을 멈추었다. 이에 따라 한번에 3~5구를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처리 능력은 4천4백16구였다. 수용소 돌격대 하루 처리 능력은 8천구였다. 그러나 하루에 8천구를 처리할 필요는 거의 없었고, 1942년부터 1944년까지는 하루 평균 1천구를 처리했다.

 

-아우슈비츠 II 화장장-

    파르벤 사는 아우슈비츠 인근 마을 드보리(Dwory)와 모노비츠 인근에 전쟁 수행에 필요한 합성 고무(Buna-N) 공장을 세웠다. 1940년 12월에 제정된 동부지역 재정 지원법에 따라, 국경 지역에서 사업을 하는 회사에 대해서는 세제 혜택이 있었다. 그밖에도 강제 노동 수용소 인근에는 값싼 노동력도 있었고, 철도 이용도 가능했다. 1941년 2월 히믈러는 숙련 노동자 확보를 위해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주민들에 대한 추방령을 내려, 모두 체포했다. 추방령 후 남아 있던 폴란드 사람들은 모두 파르벤 공장에,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은 건설 노동에 투입되었다. 1941년 4월에 들어,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은 부나 베르케(Buna Werke: 독일 화학회사)나 파르벤 공장 건설부지 확보를 위한, 모노비츠 주택 철거에 동원되었다. 

아우슈비츠 III

    5월이 되어 트럭이 부족해지자, 수백 명에 달하는 수감자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우슈비츠로부터 작업장까지 걸어서 오고가야 했다. 과로로 지친 죄수들이 긴 대열을 이루어 아우슈비츠 거리를 통과하면서 독일-폴란드 경찰과의 관계가 나빠졌기 때문에, 죄수들은 매일 면도를 하여 단정한 차림새로, 노래를 부르며 행진토록 하였다. 7월말부터 그들은 화물차나 기차로 통근을 하였다. 그들의 통근 문제가 어려워지고 특히 겨울철이 다가오자, 파르벤 측은 공장 내 그들의 막사를 짓기로 했다. 1942년 10월 30일 수감자들은 처음으로 파르벤의 새로 지은 막사로 옮겨갔다. 이 막사가 바로 후일 모노비츠 수용소로 불린 아우슈비츠 III수용소이다. 이 수용소는 민간 기업의 돈으로, 민간 기업이 건설한 최초의 집단 수용소였다.

가로 270미터 세로 490미터 크기의 아우슈비츠 III은 아우슈비츠 I보다 규모가 컸다. 1944년 말경, 이곳은 가로 17.5미터 세로 8미터 크기의 막사 60개 동이 들어서 동마다 거실 한 곳, 3층으로 된 목제의 벙커 침대가 56대씩 비치되었다. 파르벤은 하루 9시간 내지 11시간 일한 대가로 노동자 1인당 3~4마르크를 SS에 지불했다.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이 공장에서 일한 수감자 수는 약 3만5천 명으로, 하루 평균 32명씩 총 2만3천 명이 영양실조, 질병, 과로로 사망하였다. 수감자들은 모두 “일하는 해골”이 되었다. 과로로 인한 사망과 아우슈비츠 II에서의 가스 처형으로, 수감자들은 매달 그 수가 1/5씩 줄어들었다. 수용소 요원들은 수감자들을 가스실 운운하며 끊임없이 위협했고, 시체 태우는 냄새가 수용소 I, II를 뒤덮기도 했다.

-아우슈비츠 III-


    1944년 8월 20일을 시작으로 9월 13일, 12월 18일, 12월 26일 연합군의 공습이 계속되었다. 1945년 1월 19일 SS는 수용소 철수를 명령하고, 대부분이 유대인들인 9천 명의 수감자들은 글리비체(Gliwice: 상 실레시아 소재 도시)의 아우슈비츠 산하 수용소로 죽음의 행진에 나섰다. 그곳에 도착한 수감자들은 화물열차로 부헨바르트(Buchenward: 독일 바이마르 인근 강제 나치 수용소)나 마우타우젠으로 이송되었다. 모노비츠 병원에 남아 있던 8백 명의 수감자들은, 1945년 1월 27일 소련 적군 우크라이나 전방 1사단의 진입으로 수용소에 남아 있던 수감자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산하 수용소

    크루프(Krupp: 철강, 야포, 탄약 등을 생산한 독일 회사)나 지멘스(Siemens-Schucket: 독일 전기 회사)같은 기업들도 자체의 수용소를 갖춘 공장을 건설하였다. 산업 단지 근처 총 28개소에 달했던 이들 수용소는, 수용소마다 수백 또는 수천 명의 수감자들을 수용하였다. 블레하메르(Blechhammer: 아우슈비츠 부속 화학 공장), 야비스조비체(Jawiszowice: 폴란드 남부 도시), 야보르즈노(Jaworzno: 폴란드 남부 도시), 라기스제(Lagisze: 폴란드 남부 실레지아 고원 소재 도시), 미슬로비체(Mysłowice: 실레지아 소재 도시), 트르제비니아(Trzebinia: 폴란드 동남부 소재 마을) 등지, 그리고 멀리는 독일 보호령인 체코슬로바키아의 보헤미아, 모라비아에도 이와 같은 수용소를 건설했다.

    석탄 광산, 주물 및 금속 회사, 화학 회사들이 이 같은 수용소를 산하에 두었다. 삼림 벌채나 농사일에도 수감자들이 투입되었다. 예를 들어 폴란드 남부 브르제스체(Brzeszcze) 인근 “부디” 마을의 농업관리단지는 기업 산하 수용소로, 이곳에 투입된 수감자들은 가축을 기르고, 화장터에서 나온 인골 가루를 흙과 인분을 섞어 비료를 만들기 위해 하루 12시간씩 일을 하였다. 샤롯텐그루베(Charlottengrube: 폴란드 남부 소재 광산 촌), 글라이비츠(Gleiwitz: 폴란드 남부 상실레시아 소재 도시), 라이스코(Rajsko: 폴란드 남부 마을)같은 곳에도 기업 소속 강제 수용소가 설치되었다. 이들 수용소 생활은 너무나 비참하여, 징벌 수용소로 불리었다.

SS 수비대

    190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태어난 회스(Rudolf Höss, 1901~1947)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건설을 명령한 히믈러(Heinrich Himmler)에 의해 1940년 4월 27일 아우슈비츠 I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회스는 수용소 본부 건물 가까운 곳에 시멘트로 지은 2층집에서 아내를 비롯하여 자녀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1943년 11월까지 부소장 크라머(Josef Kramer, 1906~1945. SS돌격대원)와 함께 근무하였다. 후임자 리베헨쉘(Arthur Liebehenschel, 1901~1948)이 부임하자 회스는 SS로 복귀, 오라닌브르크(Oranienburg: 독일 브란덴브르크 주 소재)시 책임자로, 강제수용소 검열관이 되었다. 아우슈비츠 II는 1943년 11월 22일부터 하르트옌슈타인(Friedrich Hartjenstein, 1905~1954. SS요원)이 소장이 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크라머가 1945년 1월 수용소가 폐쇄될 때까지 소장을 맡았다. 아우슈비츠 III은 자율 수용소가 된 1943년 11월부터 폐쇄될 때까지 슈바르츠(Heinrich Schwarz, 1906~1947. SS 장교)가 수용소 소장이었다. 이처럼 SS(Schutzstaffell)는 나치 강제 수용소 운영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SS는 당초 히틀러 경호를 위한 당 내 준군사조직으로, 1925년 뮌헨에서 창설되었다. 회스는 1944년 7월 무렵 아우슈비츠로 돌아와 수비대장이 되어, 헝가리로부터 오는 유대인을 감시하였고, 이렇게 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장들을 지휘하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루돌프 회스-

    라시크(Aleksander Lasik, 1953~. 폴란드 Kazimierz Wielki 대 교수. 역사학)에 따르면, 수용소 운영 기간 중 총 6천3백35명(남성 6천1백61명)이 아우슈비츠 SS에서 근무하였고, 그 가운데 보직 장교는 4.2%, 무보직 장교 26.1%, 사병은 69.7%였다. 1941년 3월 7백 명이었던 SS 수비대 병력은 1942년 6월 2천 명, 1944년 8월에는 3천3백42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가장 숫자가 많았던 1945년 1월에는 남자 대원 4천4백80명, 여자 대원 71명이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했다. 이처럼 수가 불어난 이유는, 수용소 철거에 따른 철거 물자 운송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자 대원은 SS 감독관으로 불리었다.

    대부분의 SS요원들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출신이었으나,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발틱 국가 등지로부터 많은 독일계 사람들(Volksdeutsche: 독일 시민권과는 무관한 독일계 외국인)이 아우슈비츠로 와 SS에 가담하였다. 그들 모두가 인종적으로 게르만은 아니었다. 수용소 경비병은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로부터 모집하였다. SS병력의 3/4을 차지한 경비 병력은 SS 결사대(SS-Totenkopfverbände) 요원이기도 했다. 의료나 정치 부문, 의복과 기타 물자 확보를 비롯하여 사망한 수감자의 재산을 관리하는 요원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아우슈비츠는 편한 일자리였다. 이는 전선에 투입되는 걸 피할 수도, 사망자의 재산을 챙길 수도 있음을 뜻했다.

    수용소 관리요원은 처음 독일인이었다가, 나중에는 유대인 그 다음 비유대 폴란드인 순서로 바뀌었다. 그들은 보다 좋은 주거와 음식을 제공 받았다. 관리요원으로서 직책은 막사 서기, 감시자, 내무반장 등이 있었고 모범수도 관리요원이 될 수 있었다. 수감자들에 대한 무지막지한 폭력행사로 인해, 관리요원들은 새디스트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전후 재판을 통해 처벌을 받은 자가 거의 없었다. 학살에 대한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는지 아니면 SS에게 있었는지 판단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SS가 가스실 살인을 저질렀지만, 이에 필요한 노동은 돌격대(Sonderkommando)가 맡았다. 그들 대부분은 수감자 가운데서 선발된 유대인들이었으나, 소련 전쟁포로들도 있었다. 1940년부터 41년까지는 가스실이 한 곳이었고, 이 곳에서는 처음 20명의 돌격대가 일을 하였다. 1943년에 후반에는 4백 명으로 늘었고, 1944년 헝가리 홀로코스트 기간 중에는 8백74명으로 증가하였다. 돌격대는 도착한 열차로부터 화물과 시체의 하역이나 적재, 탈의실이나 가스실로 사람들을 안내 후, 죽은 그들의 시신을 옮기는 일을 하였다. 그들은 시신으로부터 귀금속, 머리털, 틀니, 금이빨 등 값나가는 물건들을 수거하여 독일로 보냈다. 빼앗을 물건이 없는 시체는 곧장 화장 처리하였다.

    돌격대원들은 대량학살의 증인이 될 수 있었음으로, 다른 수감자들과는 별도로 생활토록 하였으나, 이 원칙은 비유대인 돌격대원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꽤나 좋은 생활을 했는데, 이는 새로 도착한 수감자들의 재산이나 소지품을 빼앗아, 수용소 내에서 팔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살지를 못했다. 수용소 비밀을 아는 그들을 살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용소 철폐 당시 살아남은 그들은 약 1백 명 정도였다. 그들은 죽음의 행진을 거쳐 열차편으로 마우타우젠 수용소로 갔고, 도착 3일 후 수용소 관리요원인지 여부를 심문 받았다. 아무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았고, SS는 그들에 대한 기록 카드가 없었음으로,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

    아우슈비츠에서만 유일하게 수감자들에게 번호를 매기는 문신을 하였다. 소련 전쟁포로는 왼쪽 가슴에, 일반인은 왼쪽 팔에 하였다. 죄수는 상의 죄수 번호 밑에 삼각형 표시로 구별할 수 있게 하였다. 이 표시는 죄수라는 뜻이었다. 대부분이 폴란드인인 정치범의 경우는 붉은 색, 일반 형사범(대부분 독일인)의 경우는 초록색 표시를 하였다. 반사회범인 부랑자, 창녀, 집시는 검은색, 여호와의 증인은 보라색, 대부분이 독일인인 게이의 경우는 핑크색 삼각형을 부착토록 했다. 유대인들에겐 노란색 다윗의 별 배지를 달도록 했다. 약 5천에서 1만5천 명에 이르는 독일인 게이들이 독일 형법 제175조에 의거, 강제 수용되었고 그들 가운데 미상의 숫자가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수감자들의 국적은 옷에 표시한 글자로 표시하였다. 인종 간 계층도 있어 최 상위는 독일인, 그 다음은 비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은 제일 밑바닥으로 분류되었다.

-생존자 문신(왼팔)-

    죄수들은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태운, 비참한 상태의 화물열차나 가축 수송 열차를 타고 와, 아우슈비츠 I 근처 역에서 내렸다. 아우슈비츠 화물역의 옛 유대인 출입구(Altejudenrampe)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유대인 수송을 위한 역사로 사용되었다. 아우슈비츠 I과 아우슈비츠 II 사이에 위치한 이 역사는, 아우슈비츠 II로부터 2.5킬로 거리에 있었다. 따라서 열차에서 내린 죄수들은 SS의 감시 하에, 이 거리를 걸어야 했다. 독가스(Zyklon B)를 실은 적십자 표시를 한 차량과, 독가스를 잘못 다루어 SS요원이 다칠 경우를 대비하여 의사도 함께 이들을 따랐다. 도착은 밤에 이루어졌다. 걸을 수 없는 사람은 트럭에 실렸다. 헝가리계 유대인 도착에 대비하여, 1944년 5월 아우슈비츠 II의 제1구역과 제2구역 간 새로운 철도를 건설했다. 이 철도는 가스실들을 한 바퀴 돌아, 각 가스실로 가게 되어 있었다. 

    남성 수감자의 일과는 여자 수감자보다 이른 새벽 4시 30분부터(겨울철에는 5시 30분) 시작되었다. 구역장이 종을 울린 후 막대기로 수감자들을 두드려 깨워 세수를 시키고, 화장실을 가게 했다. 위생 시설은 형편이 없어, 화장실 수도 적고 깨끗한 물도 부족했다. 세면장 한 곳을 수천 명의 수감자가 사용해야 했다. 화장실은 하수 처리 배수로와 같은 모습으로, 앉아서 변을 볼 수 있는 58개의 구멍이 콘크리트 바닥에 뚫려 있었다. 1944년 아우슈비츠 III의 화장실 상황에 대해 레비(Primo Levi, 1919~1987. 홀로코스트 생존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화장실-

“조명도 어둡고, 악취로 가득했다. 바닥은 진흙 벽돌이었다. 물은 역겨운 냄새가 났다. 몇 시간 동안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벽은 이상한 그림들로 덮여 있었다. 예를 들어 허리까지 벌거벗은 죄수가 대머리에 비누칠을 하는 그림이 있었는데, 이는 양순한 죄수를 그린 그림이었다. 이 그림 밑에는 ‘이처럼 청결하게’라는 글귀가 있었다. 매부리코(유대인이라는 뜻)에 고깔모자를 쓰고 때가 묻은 더러운 옷을 자랑스러운 듯 입고, 대야에 손가락을 담고 있는 그림은 악질 죄수를 나타냈다. 이 그림 밑에는 ‘이처럼 더럽게 끝날 것’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그리고 더 밑에는 고딕체의 프랑스어로 ‘청결은 건강’이라는 말이 있었다.”

    수감자들은 아침에 1/2리터의 커피 대용 음료나 차를 받았으나 식품은 없었다. 두 번째 종이 울리면 아침 점호를 했고, 수감자들을 10명 단위로 줄을 섰다. 날씨가 어떻든, 인원 파악을 위해 SS 대원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얼마나 서 있어야 할지는 전적으로 장교의 기분에 좌우되었다. 만일 누군가 도주를 시도하거나, 무슨 사건이라도 발생하면 모두 벌을 받았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한 시간 동안 쪼그리고 앉거나, 손바닥을 때리기도 했다. 옷의 단추를 잃어버렸거나 식기가 청결하지 않을 경우 영창으로 보냈다. 인원 파악은 몇 번이고 반복을 하였다.

    점호가 끝나면 5열종대로 노동가를 부르며 작업장으로 향했다. 여름철에는 하루 11시간(겨울철에는 약간 짧음)일을 했다. 아우슈비츠 여성 오케스트라 같은 수용소 음악단이 이들을 위하여, 마음에도 없는 음악을 연주하였다. 작업장을 향해 가는 이 대열에는 SS가 따라 붙어 감시를 하였다. 수감자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카포스(Kapos: 나치에 의해 강제된 유대인 형리)에게 있었다. 작업은 주로 건설 현장이나 자갈 밭, 목재 야적장 등이었다. 휴식 시간은 없었다. 한 사람이 화장실을 가면, 다른 수감자를 따라 붙여 그 배변 시간을 재었다.

    점심 식사는 3/4리터의 죽이었다. 맛은 형편없었다고 했다. 이 죽에는 일주일에 고기를 네 번, 채소(대부분 감자나 홍당무)를 세 번 넣어 주었다. 저녁 식사로는 곰팡내 나는 3백 그램의 빵과 한 숟가락의 치즈 또는 잼, 또는 25그램의 마가린 또는 소시지를 주었다. 수감자들은 이 빵을 아껴, 다음날 아침 먹기도 했다. 중노동을 하는 수감자들에게는 추가 배급이 있었다.

    오후 일곱 시에 저녁 점호가 있었다. 이 점호 때 물구나무를 서거나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한 사람이라도 결원일 경우, 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또는 그 이유가 밝혀질 때까지 몇 시간이고 서 있어야 했다. 1940년 6월 6일, 폴란드인 수감자 비조프스키(Tadeusz Wiejowski, ?~1941)가 탈주를 하여, 19시간에 걸친 저녁 점호가 있었다. 결국 그를 체포한 후, 굶겨 죽였다. 점호가 끝난 후 빵 배급도 받고, 자유 시간에 화장실에도 갔고 우편물도 받았다. 그러나 유대인은 예외였다. 밤 아홉시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수감자들은 길게 늘어선 목제 또는 석제의 벙크 침대(계단식 침대)에서 잠을 잤다. 도난을 당하지 않으려고, 옷이나 신발은 깔고 잤다. 벙크 침대에는 담요나 톱밥을 채운 매트리스가 있었으나, 벽돌 막사에서는 짚을 깔고 잤다. 막사마다 8백에서 1천 명에 달하는 수감자들을 처박았다. 몸을 완전히 펴고 잘 수도 없었다. 가로로 또는 세로로 누워, 한 사람의 다리가 다른 사람의 목이나 머리, 가슴 위로 놓이기도 하였다. 인간의 존엄이란 눈곱만치도 없었고, 조금이라도 더 편한 잠자리를 위해, 조그만 틈새라도 더 차지하려고 서로 밀치고 걷어차고 하였다.

-점호-

일요일에는 일을 하지 않았지만 막사 청소를 하고 샤워를 했다. SS가 검열을 했지만 가족에게 편지(독일어로 써야 했다)도 썼다. 독일어를 모르는 수감자들은 빵을 주고 대필로 독일어 편지를 썼다. 유대인들은 유대력에 따라 안식일을 비롯하여 유대 휴일을 지키려고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만든 조잡한 유대교 달력 두 장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아 있었다. 시계나 달력 등은 수용소 반입이 금지되었다. 달력이 없으니 수감자들은 새로 도착한 수감자들을 통해 날짜를 알 수가 있었다.

    등록된 수감자 가운데 약 30%가 여자들이었다. 최초의 여자 대량 수감자들은 1942년 3월 26일,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 베를린 북쪽 90킬로 지점의 마을)강제 수용소로부터 온 999명의 비유대 독일 여자들이었다. 범죄자, 반사회범, 정치범 등으로 분류된 그녀들은, 아우슈비츠 여자 수용소 관리자로 온 것이다. 루돌프 회스는 그녀들에게, “수감자들은 짐승과 같아 여자들에게 함부로 할 것이고... 그들에게 정신적 고통이란 있을 수 없다” 라는 말을 했다. 마구 다루어도 좋다는 말이었다. 그녀들에게는 1번부터 999번까지 번호가 부여되었다. 그녀들 가운데 랑게펠트(Johanna Langefeld, 1900~1974)는 아우슈비츠 여자 수용소 최초의 여자 감독자가 되었다. 같은 날 두 번째로 999명의 유대인들이 슬로바키아의 포프라드(Poprad: 슬로바키아 북부 도시)로부터 도착하였다. 이는 독일제국 안전국(RAHA) 유대인 담당 부서(IV B4)의 아돌프 아이히만에 의한 최초의 공식적인 아우슈비츠 수감자 운송이었다. 3월 28일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스라바로부터 798명의 유대 여성들이 세 번째로 왔다.

-여성 수감자(아우슈비츠 II)-

    여자들은 처음 1구역에서 10구역까지 수용되었다. 그러나 8월 6일부터 1만3천 명의 새로운 여자 수감자들이 아우슈비츠 II 여자 수용소에 인계되었다. 1943년 10월 현재 이 수용소에는 3만2천 명 가량의 여자 수감자가 있었다. 1943년부터 1944년 사이 집시 가족 수용소에도 약 1만1천 명의 여자 수감자가 있었고, 체코슬로바키아의 테레진(Terezín) 게토로부터 온 테레지엔슈타트 가족 수용소에도 수천 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여자 수용소 환경은 최악으로, 1942년 남자 수감자들이 양호실을 설치코자 왔을 때, 그들의 첫 임무는 살아 있는 여자들과 시체를 구분하는 일이었다. 펄(Gisella Perl, 1907~1988. 여자 수용소 생존자)에 따르면 그곳에는 여성 3만2천 명 당 변소는 한 곳이었고, 그것도 하루 정한 시간에만 사용이 허락되었다. 변을 보려면 줄을 서 기다려야 했고, 인분이 넘쳐흘렀다. 설사병으로 모두들 고통을 받았고,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누더기 옷을 입은 채로 그대로 배변을 하였다. 악취가 구름처럼 덮이니, 삶 자체가 공포였다고 했다. 변소는 일정한 간격으로 구덩이를 깊게 파, 그 위에 널빤지를 올려놓은 형식이었다. 전선줄의 새처럼 그 널빤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일을 보니, 가까운 옆 사람에게 오물이 튀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42년 10월 마리아 만델(Maria Mandel, 1912~1948)이 랑게펠트의 후임자가 되어, 잔혹함으로 이름을 날렸다. 회스는 뮐러(Paul Müller, 1896~1945, SS 대원)나 회슬러(Franz Hössler, 1906~1945. SS대원)등 남자들로 하여금 여자 감독들을 감시토록 하였다. 전후 만델과 회슬러는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막사 30에서는 독일 여성학자 클라우베르크(Carl Clauberg, 1898~1957)와 의사 슈만(Horst Schumann, 1906~1983)이 여수감자들을 대상으로 불임 실험을 하기도 했다.

-만델-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독일 의사들은 다양한 실험을 하였다. SS 소속 의사들은 여자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다량의 X-ray를 투사하여 그 효능을 실험했다. 클라우베르크(Carl Clauberg, 1898~1957. 산부인과 의사)는 자궁 경부 폐쇄 실험을 위해, 여자 수감자의 자궁에 화학 물질 주사를 하기도 했다. 백신 실험을 위해 수감자들에게는 병균을 투여하거나, 독극물을 주사하기도 했다. 당시 파르벤의 자회사였던 바이엘은 마취 실험을 위해, 여성 수감자 1인당 150마르크를 아우슈비츠에 지불하였다. 바이엘 직원이 회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150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으나 실험 도중 모두 죽어 실험 결과를 알 수 없으니, 같은 값으로 또 다른 150명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실험을 주도한 베터(Helmuth Vetter, 1910~1949)는 SS장교로, 바이엘 직원 겸 아우슈비츠 의사였다. 그와 함께 실험을 주도한 엔트레스(Friedrich Entress, 1914~1947), 비르스( Eduard Wirths, 1909~1945)등도 SS 장교로, 아우슈비츠 의사였다.

    아우슈비츠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던 의사는 1943년 5월 30일부터 아우슈비츠 II 집시 수용소에서 근무했던 멩겔레(Josef Mengele, 1911~1979)였다. 죽음의 사자로 불린 그는 SS 장교로, 1943년 5월30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담당 의사로 부임하였다. 유전병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44년 5월부터 6세 이하의 쌍둥이와 난쟁이를 실험 대상으로 하였다. 그가 “쌍둥이 앞으로”하면, 걸어 나온 쌍둥이를 이것저것 테스트를 하였다. 쌍둥이의 각 신체부분을 재고, 사진을 찍고 아울러 이빨, 눈, 귀 검사, X선 검사, 혈청 검사, 쌍둥이 형제간 혈액 교환 실험도 하였다. 실험 후 살해한 다음, 시체 해부도 하였다.

    1949년 멩겔레는 아르헨티나로 도주하였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인근에 숨어 살던 그는 1959년 파라과이로, 1960년 브라질로 가 은신하였다. 한편 서독 경찰, 모사드(Mossad: 이스라엘 정보기관), 시몬 비젠탈(Simon Wiesenthal, 1908~2005. 나치 추적자. 오스트리아 작가. 홀로코스트 생존자)같은 추적자들이 그의 뒤를 쫓았다. 그는 1979년 베르티오가(Bertioga: 브라질 상 파울로 인근) 해변에서 수영 중 뇌졸증으로 사망, 볼프강 게르하르트라는 가명으로 매장되었다. 1985년 그의 시신은 발굴되어, 법의학 실험을 거쳐 신분을 확인하였다.

-멩겔레-

또 다른 독일 의사 하이스메이어(Kurt Heissmeyer, 1905~1967. SS 장교)는 20명의 폴란드계 유대 아동들을 아우슈비츠로부터 함브르크 인근 노이엔가메(Neuengamme) 수용소로 데려가, 과학적 실험이라고 할 수 없는 사이비 실험을 하였다. 결핵 치료를 위한 실험이라는 이름으로, 아동들에게 결핵균을 주사하였다.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1945년 그는 아동들을 모두 목매달아 살해했다.

-살아남은 유대 아동들(아우슈비츠)-

    유대인의 인종적 특성이 소문과 같은지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브란트(Rudolf Brandt, 1909~1948. SS 장교)와 SS 싱크탱크(Ahnenerbe) 연구소의 지베르스(Wolfram Sievers, 1905~1948)는 115구의 유대인 시신 유골을 수습, 알사스-로렌 슈트라스브르크 소재 라이히대학 해부학 연구실로 보냈다. 이는 하인리히 히믈러와 히르트(August Hirt, 1898~1945. 라이히 대학 해부학자)의 지휘 아래 행하여진 것이다. 브란트와 지베르스는 1948년 뉘른베르크 "의사들에 대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1943년 8월 슈트루토프(Natzweiler-Struthof)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87명의 유대인 수감자들은, 겨자 가스로 죽음을 당하였다.

-슈트루토프 수용소-

    수감자들은 규칙을 조금만 어겨도 카포스(Kapos: 죄수를 감독한 죄수)나 경비병들에게 구타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했다. 카포스는 그 야만성으로 인해 흡혈귀, 교살자 등으로 불리었다. 처벌 대상이 된 행위로는 두 번 배식을 받는 행위, 빵과 금이빨 교환, 돼지 먹이를 훔치려고 돼지우리에 들어가는 행위, 주머니에 손 넣기 등이 있었다. 이 같은 처벌에 관한 275건의 보고서가 아우슈비츠 박물관에 현재 남아 있다.

    점호 때 구타는 일상적이었다. “염소”라는 이름의 탁자는 밑에 통이 있어, 이 통에 발을 담그고 탁자 끝에 허리를 대고 엎드리면, 꼼짝할 수가 없었다. 몸이 “ㄱ”자로 꺾인 수감자는 25번의 매질을 당했고, 매질마다 “감사합니다”를 외쳐야 했다. 손을 뒤로 묶어 들어 올리는 체벌도 있었다. 이로 인해 어깨를 다쳐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가스실로 보내졌다. 체벌을 당한 수감자를 돕거나, 담배꽁초를 주어 가지면 기둥에 묶어 구타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수감자들의 얼굴을 난로 속으로 밀어 넣어, 얼굴이나 눈에 화상을 입게 하는 일도 있었다.

    1941년까지 13구역으로 알려진 아우슈비츠 제11구역은 감옥 안의 감옥으로, 레지스탕스 혐의가 있는 수감자들 수용소였다. 11구역 22번 감옥 방은 창이 없었다. 이 감옥 방은 4칸으로 나뉘어, 각 칸의 넓이는 1평방미터로, 4명의 수감자를 위한 공간이었다. 수감자들은 벽과 마루가 맞닿은 곳에 뚫린 구멍을 통해 출입했다. 가로 5센티 세로 5센티 크기의 환기 구멍은, 구멍이 뚫린 양철 덮개가 있었다. 수감자들은 이곳에서 며칠을 보내야 했다. 킬라르(Wieslaw Kielar, 1919~1990. 폴란드 작가)는 사소한 실수로 이 곳에서 4주를 보냈다.

-죽음의 벽-

    제10구역과 11구역 사이에는 “죽음의 벽”으로 알려진 광장이 있었는데, 이곳은 폴란드인 사형수를 처형한 곳이었다. 이곳 최초의 처형은 1941년 11월 11일 폴란드 독립 기념일에 있었는데, 수 명의 수감자들 뒷머리에 권총을 쏘아 사살했다. 한 번에 151명의 죄수들을, 옷을 완전히 벗긴 채 손을 뒤로 묶어 처형한 적도 있었다. 1주일 후 그들의 영혼을 위한 가톨릭 미사가 아우슈비츠 I 제4구역에서 비밀리에 거행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수용소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수감자들을 포함하여 약 4천5백 명의 폴란드 정치범들과 명단에도 없는 약 1만 명의 폴란드인들도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약 1천 명의 소련 전쟁포로들도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폴란드 망명정부에 따르면, 이곳에서 1만1천2백74명의 수감자와 6천3백14명의 전쟁 포로가 학살을 당하였다. 루돌프 회스는 “처형 대상자들이 줄을 이어 왔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브로드(Perry Broad, 1921~1993. SS대원)는 “해골이나 다름없는 수감자들이, 악취가 나는 감옥에서 몇 달씩 보냈다. 짐승도 지낼 수 없는, 가까스로 일어설 정도의 낮은 천정 감옥 방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렇지만 마지막 순간에도 그들은 굴하지 않고 “폴란드 만세, 자유 만세”를 외쳤다. 1943년 1월 25일 처형된 수감자들 가운데는 51명의 레지스땅스 혐의자들을 비롯하여 카르키즈(Jan Karcz, 1892~1943. 폴란드 육군 대령)와 게틴스키(Edward G. Getyński, 1898~1943. 폴란드 육군 소령)도 있었다. 폴란드 장거리 육상 선수인 노이(Jozef Noji, 1909~1943)는 2월 25일 처형되었다. 1944년 10월에는 돌격대원 반란에 따른 관련자 2백 명이 처형되었다.

-아우슈비츠 I 수감자들-

가족 수용소

    1943년 2월, 집시를 대상으로 한 별도의 수용소가 아우슈비츠 II-비르켄나우에 설치되었다. 이 수용소 최초의 집시는 1943년 2월 26일 독일로부터 도착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실험 대상에서 제외된 채,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했다. 1942년 12월 그들 가운데 체코계 집시인 이그나츠와 프랑크 덴헬이 탈출을 시도, 덴헬만이 성공하였다. 아우슈비츠 악당 중 악당인 의사 멩겔레는 1943년 5월 30일, 이 집시 수용소에서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집시 아동들-

아우슈비츠 명단록(Hauptbücher)에는 아우슈비츠에 등록된 2만9백46명의 집시가 올라 있다. 그밖에 미등록 집시는 약 3천 명 정도이다. 1943년 3월 22일, 1천7백 명의 폴란드계 집시들이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도착 즉시 가스실로 갔다. 이어 5월 25일 또 다른 1천35명의 집시들이 가스로 살해되었다. 1944년 5월 16일, SS는 집시 수용소를 폐쇄하려고 했지만, 칼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집시들이 저항을 하였고, 따라서 SS는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곧 SS는 2천9백8명의 집시들을 가족과 분리, 강제 노동에 투입하였다. 이어 1944년 8월 2일, 노동에서 제외된 채 남아 있던 집시 2천8백97명을 가스실로 보냈다.

    1943년 9월 8일 남자 2천2백93명, 여자 2천7백13명을 시작으로 체코슬로바키아 테레진(Terezin: 체코슬로바키아 리토메리체 주 도시) 소재 테레진슈타트 유대인 게토로부터 약 1만8천 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냈다. B구역 "가족 수용소"에 수감된 그들은 소지품을 가질 수도, 고유 의상을 입을 수도, 가족에게 편지를 쓸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삭발도 하지 않고, 실험 대상도 되지 않았다. 남자들과 소년들은 짝수 막사에 수용되었다. 30번과 32번 막사에는 양호실이 있었고, 31번 막사는 유치원과 학교용이었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마 의학 실험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 수용소 수감자 1천 명이 6개월 만에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1943년 12월 16일 2천4백91명, 12월 20일 2천4백73명 등 또 다른 두 그룹의 유대인들이 테레진슈타트 게토로부터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였다.

-가족 수용소 터-

    1944년 3월 8일 남, 여, 아이들로 구성된 총 3천7백91명의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보내졌다. 남자들 시신은 제3화장터로, 여자들 시신은 제2화장터에서 처리했다. 끌려가면서 하티크바(Hatikvah: 이스라엘 국가)와 체코슬로바키아 국가를 부른 사람들도 있었다. 쌍둥이들은, 실험을 위해 되돌려 보냈다.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는, 스위스 베른 주재 체코 대표부로부터 브르바-베츨러(Vrba-Wtzler) 보고서를 받은 후, 남아 있는 체코계 유대인 구출을 위한 외교전을 개시하였다. 이 보고서는 아우슈비츠 가족 수용소로부터 탈출한 브르바(Rudolf Vrba, 1924~2006. 후일 유대계 체코 생화학자)와 베츨러(Alfred Wetzler, 1918~1988. 작가)가 작성한 것으로, 수용소에 남아 있는 유대인 가족들이 곧 가스실로 가,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1944년 6월 16일 BBC는 독일어 방송을 통해 아우슈비츠 가족 수용소 유대 여성 학살 사건을 보도하면서 “이 학살에 책임이 있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1944년 6월 국제적십자는 테레진슈타트 유대 게토를 방문하였다. SS는 그곳으로부터 추방을 당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 다음 달, 가족 수용소로부터 2천 명의 여자 수감자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80명의 아동들이 남자 수용소로 옮겨졌다. 나머지 7천 명은 7월 10일부터 12일 사이에 가스실로 갔다.

생체 실험

    아우슈비츠 최초의 가스 처형은 1941년 9월초에 있었다. 이 날 850명의 소련군 포로와 병든 폴란드인 수감자들이 아우슈비츠 I의 제11구역 지하실에서 치클론B 가스(Zyklon B: 시안화 화합물)로 살해되었다. 한 번에 700명 이상을 처리할 수 있는 가스실을 설치하여 1942년 12월까지 운영하는 동안, 수만 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가스실로 들어가기 전 희생자들의 옷을 벗겼다.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소독과 이를 잡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였다. 가스실로 들여보낸 후 문을 잠근 다음 가스를 분사했다. 가스실로 사용이 끝난 후 그 곳은 창고가 되었다가, 공습에 대비한 SS의 방공호로 사용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가스실과 화장장을 복구하였다. 굴뚝도 새로 만들고, 가스를 어떻게 투입하였는지 보여주기 위해 천정에 4개의 구멍을 내었다. 세 개의 화장 화구 가운데 두 곳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구하였다.

    1942년 초, 아우슈비츠 II에도 두 곳의 임시 가스실(제1벙커 붉은 집과 제2벙커 하얀 집)을 만들어, 대량 학살을 처리했다. 대규모 화장터들(제2, 제3, 제4, 제5 화장터)도 건설 중이었다. 1944년 5월부터 11월까지 제2벙커를 재가동하여, 다수의 헝가리계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냈다. 1944년 여름에는 수용소 화장장과 옥외 화장장에서 하루 2만구의 시체를 처리하였다. 당초 계획했던 제6화장장은 건설되지 않았다.

    1942년부터는, 나치 점령 유럽 전역으로부터 열차편으로 매일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였다. 헝가리 홀로코스트 기간이었던 1944년 5월부터 7월까지는, 모든 가스실을 빠짐없이 가동하였다. 아우슈비츠 II의 제2, 제3화장터로 접근하는 아우슈비츠 철도지선은 5월에 완성되어, 열차로부터 가스실까지의 통로가 보다 가까워지기도 했다. 이 철도가 완성된 후 7월초까지 43만7천명의 헝가리 계 유대인들이 잡혀 왔다. 이는 하루 1만2천 명 꼴이었다. 화장터를 재정비하여 제2, 제3화장터는 가스실로부터 화구까지 엘리베이터가 새로 설치되었고, 화구를 수리하고 탈의실과 가스실은 도색 처리를 하였다. 화장 후 유골은 제5화장터 뒤편 구덩이에 처리하였다. 넘쳐나는 시체로 인해 돌격대들은 화장터는 물론, 옥외에서 화장을 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 I 철도-


    파이퍼(Franciszek Piper, 1941~. 폴란드 역사학자)에 따르면 아우슈비츠로 잡혀온 1백9만5천 명 가운데 약 20만5천 명이 수용소 수감자 명단에 등록되어 일련번호가 먹여졌으며, 이 가운데 2만5천 명은 다른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86만5천 명은 도착 즉시 살해되었다. 이밖에도 90만 명에 달하는 비유대인들이 명단에 등록되지도 않은 채 살해되었다고 했다. 도착 즉시 검사를 통해 노동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수감자는 등록되어 수용소에 입감되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가스실로 갈 때까지 남아 기다렸다. 이들은 대부분의 아동들, 유아를 데리고 있는 여인들, 노인, 외견상 노동 능력이 없다고 SS의사가 판단한 사람들이었다. 실제로는 몸에 결정적인 상처가 있거나 붕대를 감았거나, 부스럼이 있거나 몸이 쇠약해 보여도 부적격자로 판단했다. 어린이들은 일정한 높이에 걸어 놓은 막대기 밑을 지나게 하여, 그 밑을 통과하면 가스실로 보냈다. 걸을 수 없거나 밤에 도착한 수감자들도, 가스실로 갔다. 압수된 그들의 소지품은, 카나다 창고(Kanada: 아우슈비츠 화물 창고)에서 수감자들이 분류하였다. 카나다라는 말은, 30개의 막사가 있는 B구역의 창고가 많은 약탈물로 가득하였기 때문에, 풍요의 땅 캐나다를 빗대어 수감자들이 붙인 이름이었다.

    화장장은 탈의실, 가스실, 화구로 이루어졌다. 제1화장장과 제2화장장의 탈의실과 가스실은 지하에 있었고, 제4 및 제5 화장장의 경우는 지상에 있었다. 탈의실 벽에는 번호를 먹인 옷걸이 용 갈고리가 있었다. 제2화장장에는 해부실이 있었다. SS장교가 샤워를 하고 이를 잡아야 한다고 하면, 수감자들은 옷을 벗고 가스실로 들어갔다. 들어가면 “목욕”또는 “소독”이라는 표시가 나타났다. 경험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 표시는 살해 대상자에 따라 달랐다고 한다. 비누와 수건을 받은 수감자도 있었다. 기만이었을 것이다. 한 방에 보통 2천 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약 3천 명으로 증언한 사람도 있다.

    독극물 치클론 B는 SS가 보낸 시안화 화합물이다. 문이 닫히면 SS요원이 천정에 난 구멍을 통해 이 가스 발생 독극물을 투입했다. 희생자들은 보통 10분 이내에 사망을 하였다. 회스는 20분이 소요되었다고 증언했다. 돌격대 요원 랑푸스(Leib Langfus: 돌격대원으로 강제 노역을 한 유대교 랍비)가 이때의 경험을 기록한 일기장이 1952년, 아우슈비츠 II의 제3화장장 터에서 발견되었다.

    그 좁은 공간에 그 많은 사람들이 들어섰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힘든 일이었다. 가스가 아니더라도 질식으로 죽었을 것이다. 들어가기를 거부한 사람은 곧 총살되거나, 맹견이 물어 죽게 하였다. 모든 문들은 빈틈없이 밀폐되었고, 가스는 천정의 작은 구멍을 통해 투입되었다. 가스실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고통 속에 오직 슬픈 비명만을 질렀다. 절망 속에 외치는 사람, 발작적으로 흐느끼는 사람, 가슴이 찢어질 듯 비통한 울음만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음으로, 죽어 넘어지면서 시신들이 여러 겹으로 포개져 그 높이가 1미터에 이르렀다. 아이들을 꼭 껴안은 채 앉은 자세로 죽은 어머니들, 꼭 껴안고 죽은 부부 시체들이 있었다. 뒤엉켜 죽은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가스로 인해 피부가 푸르게 변한 시신도 있었고, 잠자는 듯한 모습도 있었다.

시체 이용

    돌격대원들은 가스 마스크를 착용하고, 가스실로부터 시체를 꺼냈다. 시체로부터 안경이나 의족을 수거하고, 여자 시체로부터는 머리털을 잘랐다. 벨제츠,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경우 여자 수감자들은 가스실로 들어가기 전 머리털이 잘렸지만, 아우슈비츠의 경우는 죽은 후에 잘렸다. 1943년 2월 6일 독일 경제성은,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네크 수용소가 보낸 3톤에 달하는 여자 머리털을 받았다. 이 같은 머리털은 먼저 염화 암모니아수로 깨끗이 처리한 다음, 화장장 벽돌 바닥에서 건조 시켰다. 그런 다음 빗질을 하여 종이 상자로 포장하였다. 이 머리털은 여러 회사들로도 보내졌는데, 그 중 브레멘 불루멘탈(Bremen-Bluementhal: 독일 북부 브레멘 시 북쪽 외곽, 베저 강변 도시) 소재 한 회사 근로자들이, 머리털 더미에서 그리스 글자가 새겨진 조그만 동전들을 발견하였다. 이로 미루어 1943년, 5만 명에 달하는 유대계 그리스인들이 아우슈비츠로 왔을 가능성이 있다. 1945년 1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 소련 적군은 선적을 기다리고 있던 7톤가량의 인간 머리털을 발견하였다.

-희생자들 안경-

화장 직전 시신들로부터 귀금속을 찾아내고 틀니, 금이빨을 빼내었다.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1940년 9월 23일부터 시체의 금니를 수거하였다. 이 일은 돌격대 치과의사들이 수행하였다. 이 작업을 목격한 사람은 비밀을 누설할 우려가 있었음으로,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질 수도 있었다. 이렇게 수집된 금은 SS 보건소로 보내져, SS대원이나 그 가족들 치료에 사용되었다. 1942년 10월 8일 현재 이렇게 모아진 금은 50킬로그램에 달했다. 1944년 초에는 시체로부터 뽑아낸 금이빨이 매월 10에서 12킬로그램에 달했다. 화장을 한 재는 비스툴라 강(Vistula: 폴란드 내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유럽에서 아홉 번째로 긴 강)에 뿌리거나 비료로 사용하였다. 타지 않고 남은 뼈 조각은 절구에 빻아 가루로 만들었다.

사망자 수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은 적게 잡아도 1백3십만 명에 달한다. 수용소에 등록된 수감자는 총 40만207명으로 남자 26만657명, 여자가 13만560명이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열차 시간표와 유대인 추방 기록에 토대한 파이퍼의 연구에 따르면, 1백3십만 명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고, 그 중 적어도 1백8만2천명 이 그곳에서 죽었다. 이 숫자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치는 얼마나 살해했는지를 감추려고 하였다. 1942년 7월 수용소 소장 회스는 히물러로부터, 모든 무덤을 개봉하여 그 시체들을 불에 태울 것과, 태운 시체의 수를 가까운 장래에 알 수 없도록 그 재를 잘 처리하라는 명령을 SS대장 블로벨(Paul Blobel, 1894~1951)을 통하여 받았다.

    사망자 숫자 추정치는 파이퍼의 숫자를 상회하였다. 수용소가 해방된 후인 1945년 5월 8일 소련 정부는, 아우슈비츠에서 4백만 명이 살해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화장장의 화장 능력에 토대한 숫자였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회스는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사람이 얼마냐 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최저 2백5십만 명이 가스로, 50만 명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었다고 했다. 그는 이 숫자가 아이히만으로부터의 보고에 토대한 것이라고 했다. 회스는 감옥에서 쓴 회고록에, 아이히만이 회스의 상관인 리챠드 글뤼크에게 보고한 2백5십만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회고록 기초 자료인 아이히만 보고서는 망실되어 없다.

레지스탕스, 해방

    연합군은 폴란드 육군 대위 필레츠키(Witold Pilecki, 1901~1948)의 보고서를 통해 아우슈비츠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였다. 필레츠키는 바르사뱌에서 나치에 자수,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1940년 9월 22일 “세라핀스키”라는 이름으로 투옥된 그는 1943년 4월 27일, 그곳을 탈출하였다. 그는 잡혀 있는 동안 수백 명의 수감자들을 포섭하여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였고, 나치에 의한 수용소 대규모 학살에 관한 정보를 비밀리에 폴란드 군에 알렸다.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그는, 1944년 8월부터 10월까지 있었던 바르샤바 반나치 봉기에서 싸웠고, 봉기가 진압 당하면서 나치 전쟁포로 수용소에 다시 감금되었다. 소련군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석방된 그는 영국 폴란드 망명정부로 가 일을 하였다.

    1940년 7월 6일 폴란드인 제화공 비요프스키(Tadeusz Wiejowski, ?~1941)가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후, 뒤이어 적어도 802명(남 757, 여 45)이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 가운데 144명이 탈출에 성공하였고 327명은 체포되었으며, 그밖의 사람들 운명은 알져지지 않고 있다. 1942년 6월 20일, 피에초프스키(Kazimierz Piechowski, 1919~2017. 폴란드 엔지니어)는 동료 두 명과 함께 창고로 몰래 들어가 SS 장교복, 소총, 승용차를 훔쳤다. 그들 중 한명의 손을 묶어 수감자로 가장 한 후, 수용소를 벗어났다. 그들은 나중에 수용소장 회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동차 훔친 일을 사과했다. 1944년 7월 21일 폴란드인 수감자 비엘레츠키(Jerzy Bielecki, 1921~2011. 폴란드 가톨릭 사회봉사자)는 SS장교 복장을 입고 가짜 통행증으로 유대인 여자 친구 치불스카(Cyla Cybulska)와 함께 정문을 통과하였다. 그녀를 심문하기 위해 데려가는 것으로 가장했다. 전후 그는 유대인을 구한 공로로, 이스라엘 야드 바쉠(Yad Vashem: 홀로코스트 희생자 기념재단)으로부터 영예의 “올바른 이방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 노아의 율법에 따라 사는 비유대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비요프스키-

    1943년 11월 19일 타베아우(Jezy Tabeau, 1918~2002. 폴란드 의학도)는 동료와 함께 탈출, 폴란드 지하 레지스탕스를 접촉하여 수용소 상황을 알렸다. 1944년 4월 27일 브르바(Rudolf Vrba, 1924~2006. 슬로바키아계 유대인. 후일 생화학자)와 베츨러(Alfred Wezler, 1918~1988. 작가)가 슬로바키아로 탈출, 슬로바키아 유대인 위원회에 수용소 가스실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6월에 이 정보를 토대로 작성된 보고서가 발표되면서 아우슈비츠로의 헝가리 유대인 운송이 중단되었다. 1944년 5월 27일 폴란드 유대인 로신(Arnost Rosin)과 모르도비츠(Czesław Mordowicz, 1919~2001)가 슬로바키아로 탈출하였다. 이들이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작성된 로신-모르도비츠 보고서, 브르바-베츨러 보고서, 타베아우 보고서를 종합하여 아우슈비츠 보고서(Auschwitz Protocols)가 작성되었다. 1944년 11월 “미국 아우슈비츠 수용소 전쟁난민 이사회” 이 모든 보고서들을 발간하였다.

수용소 폭격

    1941년 1월 망명 중인 폴란드군 사령관 겸 수상인 시코르스키(Wladyslaw Sikorski, 1881~1943)에게, 영국 공군 폭격대 사령부 사령관 피어스(Richard Pierse, 1892~1970)에게 보낼 보고서가 있었다. 1940년 12월 무렵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이 작성한 이 보고서는, 처절한 수용소 상황과 폴란드 망명정부에게 그곳을 폭격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은 폴란드 정부가 수용소를 폭격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폭격으로 전기 철조망이 파괴되면 혼란과 어두움이 따를 것이고, 이는 탈출에 최적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현지 주민들은 탈주자들을 숨겨주고, 그곳을 벗어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수감자들은 영국으로부터 폴란드 비행기가 와 자신들이 탈출할 수 있는 날을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런던의 폴란드 정부에 바라는 모든 수감자들의 요청입니다.”

    이에 대해 피어스는, 수감자들에게 해가 없는 수용소 폭격은 기술적으로 어렵다고 했다. 1944년 5월 바이스만들(Michael D. Weissmandl, 1903~1957. 슬로바키아 유대교 랍비)은 연합군 공군에게 수용소에 이르는 철도 폭격을 요청했으나 폭격은 시행되지 않았다. 와이만(David Wyman, 1929~2018. 마사추세츠 암허스트 대학 교수. 역사학)은 1978년 발표한 논문 “아우슈비츠가 폭격을 당하지 않은 이유”에서, 미국 공군은 폭격을 할 수도 있었고 마땅히 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44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태리 주둔 미공군제15전투비행단이 아우슈비츠 III의 IG-파르벤 사를 세 번에 걸쳐 폭격을 하였음으로, 따라서 다른 수용소나 철도를 파괴할 수도 있었다고 했다. 영국도 폭격에 나서지 않았던 점을 지적한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와이만이 주장한 폭격을 수행할 만큼 연합군 공중 폭격 능력이 정밀하지 않았다고 했다.

돌격대 반란

    화장장에서 일한 유대인 수감자들로 구성된 돌격대(Sonderkommando)는 바로 대량 학살의 목격자들이었다. 따라서 증인을 남기면 안 된다는 이유로, 그들도 정기적으로 학살을 당하였다. 1944년 10월 7일, 3백 명의 돌격대원들은 명령에 따라 인근 마을로 가 돌무더기를 치울 예정이었다. 대원들은 대부분 그리스나 헝가리로부터 온 유대인들이었다. 작업을 위해 이런 식으로 돌격대 대원을 이동 시키는 건, 그들을 학살하기 위한 상투적인 수법이었다.

-돌격대원-

대원들은 돌과 망치로 SS대원을 공격하여 그들 가운데 3명을 살해한 다음, 감춰두었던 기름 묻은 걸레조각으로 4번 화장장에 불을 질렀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은 제2화장장 돌격대원들은 봉기가 시작되었음을 알고, 작업반장(Oberkapo)을 화구 속으로 처박았다. 절단기로 철조망을 절단한 후 탈출한 그들은, 라이스코(Rajsko: 폴란드 남부 오스비엥침 소재 마을)에 도착, 그곳 아우슈비츠 곡물 창고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그들을 추적한 SS가 그 창고에 불을 질러, 모두 살해했다. 제4화장장에서 발생한 봉기가 진압된 후 아직 살아남아 있던 212명의 돌격대원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그들 가운데 그라도프스키(Zalmen Gradowski, 1910~1944)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일지를 제3화장장 근처에 묻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돌격대원이 그곳을 알아내어, 그 일지를 찾아냈다. 2017년 그 일지는 여러 형태로 발간되었고, 그 중 하나가 “지옥의 가운데로부터(From the Heart of Hell)"이다.

죽음의 행진

    아우슈비츠로의 마지막 유대인 수송은 1944년 10월 30일 폴란드 로츠(Lodz)게토로부터 6~7만 명, 테레지엔슈타트 게토로부터 2천 명, 슬로바키아로부터 8천 명이었다. 1944년 11월 1일, 히믈러는 SS에게 대규모 가스 처형 중지를, 11월 25일에는 가스실과 화장장 파괴를 명령하였다. 돌격대와 함께 살아남은 수감자들이 수용소 건물을 해체하고, 현장을 깨끗이 정리하였다. 1945년 1월 18일 마우타우젠으로부터 압송된 독일인 범죄자 마르켓슈(Engelbert Marketsch)가 아우슈비츠 마지막 수감자였다. 1945년 1월, 히믈러는 아우슈비츠 모든 수용소 철폐를 명령하면서, 잘 못될 경우 총통(히틀러)이 그 책임을 각자에게 물을 것이라고 했다. 단 한명의 죄수라도 살아남아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카나다 막사에 보관하였던 약탈물과 기타 보급품들은 독일로 빼돌렸다. 1944년 12월부터 1945년 1월15일까지 아우슈비츠로부터 1백만 벌의 옷을 빼내어 배에 실었고, 기타 9만5천 개의 짐이 독일 내 수용소로 보내졌다.

    1월17일부터 아우슈비츠 I, II로부터 2만 명, 산하 수용소로부터 3만 명 등 총 5만8천 명의 수감자들이 도보로 출발, 도중에 지붕도 없는 화물 열차에 실려 다하우, 프로센부르크, 그로스 로젠, 마우타우젠, 도라-미텔바우, 라벤스브루크, 작센하우젠 등 독일 및 오스트리아의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수용소에 남은 9천 명 남짓의 수감자들은 움직일 수 없는 환자들이었다. 행군 도중 걸을 수 없거나 뒤처지는 사람은 총살에 처했다. 행군 도중 이렇게 죽은 사람들이 거의 1/4에 달했다. 1944년 12월 약 1만5천 명의 유대인 수감자들이 아우슈비츠로부터 베르겐-벨젠(Bergen-Belsen: 현 독일 북부 색스니 주 소재)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가, 1945년 4월15일 영국군에 의해 구조되었다. 1월20일 제1, 제2화장장을 폭파했고, 23일에는 카나다 보급 창고에 불을 질렀다. 5일 동안이나 탔다. 돌격대 반란 때 파괴되고 남아 있던 제4화장장의 일부도 완전 파괴했다. 소련 적군이 진입하기 하루 전인 1월26일, 제5화장장은 완전 폭파되어 사라졌다.

    아우슈비츠 III과 모노비츠의 IG-파르벤 수용소 수감자들이 처음으로 해방을 맞은 사람들이었다. 1945년 1월 27일 토요일 오전 9시, 소련 적군 제100보병사단 소속 병사가 아우슈비츠 III으로 진입하였다. 이어 오후 3시에는 아우슈비츠 I, II를 접수하였다. 3개 수용소에 7천 명, 산하 수용소들에는 5백 명의 수감자들이 살아 있었고 6백구의 시체도 있었다. 83만7천벌의 여자 옷과 3만7천 벌의 남자 옷, 4만4천 켤레의 구두도 발견되었다. 7톤가량의 머리털도 있었는데 소련 전쟁범죄 조사단은 이를 대략 14만 명분으로 보았다. 머리털을 검사한 결과, 치클론B 성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의 생존자 레비(Primo Levi, 1919~1987)에 따르면, 말을 타고 아우슈비츠로 다가온 네 명의 소련군 병사가 무너진 헛간에서 시체가 기어가는 듯한 모습을 보고 놀라더라고 했다. 아직 몇 명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인사도 없고 웃지도 않았다고 했다. 억압당하고 시달린 듯 멍한 눈초리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듯 보였다고 했다. 인간이라면 부끄러워해야 할, 독일인만 모르는 부끄러운 장면으로, 그러한 범죄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고 했다. 당시 수용소 막사로 진입했던 소련군 대령 엘리사베츠키(Georgii Elisavetskii)는 1980년,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했다. 막사로 들어선 그와 병사들은 수감자들을 향해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독일어, 우크라이나어로 다시 외쳤다. 이디시어를 섞어 다시 외쳤다고 했다. 수감자들은 괴롭히러 온 줄 안 듯 몸을 숨기려고 했다. 엘리사베츠키는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신은 소련 육군 대령이며 유대인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마침내 장벽이 무너지듯, 그들이 앞으로 다가와 소리를 지르며 무릎을 꿇고는 병사들 외투자락에 입을 맞추며, 그들의 다리를 끌어안았다고 했다.

    소련군 의무대와 폴란드 적십자가 야전 병원을 설치, 기아 상태의 수감자 4천5백 명을 돌보았다. 대부분이 이질과 폐결핵 환자들이었다. 자원 봉사자들도 참여하여 구조를 도왔다. 아우슈비츠 II에 겹겹이 쌓인 인분을 삽으로 제거했다. 눈을 녹인 물과 소방용 우물을 사용하였다. 추가 지원대가 도착할 때까지 2천2백 명의 환자를 몇 명 안 되는 의사와 12명의 폴란드 적십자 소속 간호사들이 돌보았다. 곧 모든 환자들은 병원으로 바뀐 아우슈비츠 I 건물로 옮겨졌다. 의료 요원들은 18시간 교대로 일을 하였다.

    당시 아우슈비츠 수감자 구조는 언론에 보도되지가 않았다. 적군은 독일을 향하여 진격에 몰두하고 있었고, 따라서 수용소 수감자 구조는 그들의 주 목표가 아니었다. 1945년 2월 2일 프라우다지 기자 폴레보이(Boris Polevoi, 1908~1981)가 수감자 석방을 보도했으나, 유대인들에 대한 언급은 없이 다만 “파시즘의 희생자들인 수감자들”이라고만 썼다. 아우슈비츠 해방에 관한 전면적인 보도는, 1945년 4월 연합군이 부헨발트, 베르겐-벨젠, 다하우로 진격하고 나서부터였다.

전후 전범 재판

    아우슈비츠 요원들 가운데 15%에 불과한 789명만이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대부분 폴란드와 독일에서 행해진 범죄였다. 라식(Aleksander Lasik, 1953~ .폴란드 역사학자)에 따르면, SS 여성 장교들은 남자들보다 더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유죄판결을 받은 17명 가운데 4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나머지는 남자들보다 더 긴 장기복역 형을 받았다. 이는 여성 대원들이 2백 명에 불과하여, 수감자들 눈에 더 잘 띄었고 따라서 그들의 죄상을 기억하기 쉬워서였을 것이다.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는 1946년 3월 11일 독일 북부 프렌스브르크(Flensburg)에서 영국군에게 체포되었다. 프란츠 랑이라는 가명의 농부로 위장하고 있었다. 그는 하이데(Heide: 독일 최북단 슐레비크 홀슈타인 주 소재 마을)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심문을 위해 영국군 점령지인 민덴(Minden: 독일 웨스트팔리아 주 소재 면소재지)으로 압송되었다. 그후 그는 오스트리아 SS 대장 칼텐브루너(Ernst Kaltenbrunner, 1903~1946)에 대한 재판에서 증인으로 뉘른베르크 법정에 섰다. 회스는 대량학살에서 자신이 행한 역할에 대해 솔직하게 진술하고, 자신은 히믈러의 명령에 따랐다고 했다. 1946년 5월25일 폴란드로 이송된 그는 수감 생활 중 회고록을 썼다. 이 회고록은 “아우슈비츠 소장”이라는 책이름으로 1951년 폴란드어로, 1958년 독일어로 출판되었다. 1947년 3월 11일 그는 바르샤바 최고 재판정에 섰고, 4월2일 사형선고를 받은 후 4월16일 아우슈비츠 화장장 근처 교수대에서 처형되었다.

-권력자 회스 교수대-

    1947년 11월25일 크라쿠프(Krakow: 폴란드 고도시들 가운데 두 번째로 큰 도시)에서 아우슈비츠 전범 재판이 열렸다. 이날 여자수용소 장교 마리아 만델(Maria Mandel, 1912~1948)과 바이바라 수용소(Vaivara: 에스토니아 소재 강제 수용소)소장 아우메이어(Hans Aumeier, 1906~1948)를 포함한 40명의 아우슈비츠 요원들이 폴란드 최고 법정에 섰다. 1947년 12월 22일, 그들 가운데 23명이 사형선고를, 7명이 종신형을, 아홉 명은 3년에서 15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뮌히(Hans Münch, 1911~2001. 수용소 의사)는 무죄판결을 받은 유일한 수용소 요원이었다. 살아남은 수감자들이 그를 위해 유리한 증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다하우(Dachau)와 벨센(Belsen)전범 재판에서는 크라머(Josef Kramer, 1906~1945. 아우슈비츠-비르켄나우 수용소장), 회쓸러(Franz Hössler, 1906~1945. 아우슈비츠-비르켄나우 SS대장), 슈외틀(Vinzenz Schöttl, 1905~1946. 모노비츠 강제 수용소장), 엔트레스( Friedrich Entress, 1914~1947. 수용소 의사), 그리고 SS 여자대원 그레세(Irma Grese, 1923~1945)와 폴켄라트(Elisabeth Volkenrath, 1919~1945)등이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치클론 B의 공급 회사인 슈타베노프(Tesch & Stabenow)사 소유주인 바인바허(Karl Weinbacher, 1898~1946)도 전후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63년 12월20일부터 1965년 8월20일까지 180일 동안 서독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아우슈비츠 전범재판에서는 한 명의 의사, 두 명의 치과의사, 수용소 부소장 두 명, 수용소 약제사 등 총 22명이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19명의 피고인 가운데 6명이 종신형을 받았고, 기타 3년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254명의 증언을 수록한 7백 페이지의 기소장에는, 브로스차트(Martin Broszat, 1926~1989), 크라우스니크(Helmut Krausnick, 1905~1990)등 독일 현대사 연구소(Institut für Zeitgeschichte) 역사가들이 작성한 3백 페이지에 달하는, 나치강제 수용소에 관한 보고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를 토대로, 1968년 SS와 강제수용소에 관한 최초의 종합 연구서인 “SS국가 해부(Anatomy of SS State)”가 발간되었다.

    동독 역시 전직 아우슈비츠 수용소 간부들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들 가운데 히셔(Horst Hischer, 1912~1966)는 수용소 SS 고위급 의사로, 적어도 7만5천 명에 달하는 남녀를 비롯하여, 아이들을 가스실로 보낸 자였다. 그는 1965년 체포되어, 1966년 반인도적 범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히셔는 독일 법정이 처벌한 아우슈비츠 소속 SS 최고위 의사였다.

7.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독일 정치가로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의 독재자였다. 그는 나치당의 지도자로서 권좌에 올랐고, 1933년 총통이 되었다. 그는 1939년 9월1일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전쟁 중 그는 군사 작전에 깊이 간여하였고, 6백만에 이르는 유대인과 그밖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인 대학살(Holocaust)의 주범이었다.

히틀러의 가계

    아돌프 히틀러의 부친 알로이스 히틀러(Alois Hitler, 1837~1903)는 사생아로, 알로이스의 모친은 안나 쉬클그루버(Maria Anna Schicklgruber, 1795~1847)였다. 따라서 알로이스의 성은 어머니의 성을 따라 “쉬클그루버(Schicklgruber)"였다. 서기 1842년 안나는 게오르그 히들러(Johann Georg Hiedler, 1792~1857)와 결혼하였다. 이에 따라 알로이스는 히들러의 형제인 요한 네포무크(Johann Nepomuk Hiedler, 1807~1888)의 집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서기 1876년 알로이스는 세례를 받아 사생아 신분을 벗어났는데, 생부를 알 수 없었음으로 세례명부에는 계부 게오르그 히들러를 부친으로 등록하여, 합법적 신분을 획득하였다.

-알로이스 히틀러-

    프랑크(Hans Michael Frank, 1900~1946. 독일 정치인. 나치 점령기 폴란드 정부 수반)는, 알로이스의 모친이 그라츠(Graz: 오스트리아 Styria 주 주도)의 유대인 가정에서 하녀로 일한 적이 있고, 그 가정의 아들인 열아홉 살 프랑켄베르거(Leopold Frankenberger)가 바로 알로이스의 아버지라고 했다. 그러나 그 시절 그라츠에 프랑켄베르거가 살았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고, 스티리아의 유대인 거주는 그때까지 거의 4백 년 동안 불법이었기 때문에, 알로이스가 태어난 후 몇 십 년 만에 합법적 신분이 되었을 리가 없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알로이스의 부친이 유대인이었다는 주장을 부정한다.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 당시 알로이스가 살고 있던 브라나우 암 인(Branau am Inn)에는 Hiedler, Hetler, Hüttler, Hütler, Hitler 등의 성이 있었는데 모두 ”소지주小地主“를 뜻하는 말로, 서로 바꾸어 쓸 수도 있었다. 알로이스는 자신의 성 ”쉬클그루버“가 발음이 거칠고 촌스러워 ”히틀러“로 바꾸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20일, 독일과의 접경 지역인 오스트리아의 브라나우 암 인에서 태어났다. 그는 알로이스 히틀러(Alois Hitler, 1837~1903)와 클라라 푈츨(Klara Pölzl Hitler, 1860~1907)의 여섯 자녀 가운데 넷째였다. 아돌프가 태어날 당시 부친 알로이스는 52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세관원이었고, 어머니 클라라는 29세였다. 클라라는 농부의 딸이었다.

-클라라 히틀러-

    히틀러의 형제들인 구스타프, 이다, 오토는 아기 때 죽었다. 집에는 알로이스가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알로이스 주니어(Alois Jr. 1882~ ?)와 안젤라(1883~1949)도 함께 살았다. 히틀러가 세 살 때, 독일 파소(Passau: 하 바바리아주 도시)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히틀러는 하 바바리아(Lower Bavaria) 사투리를 배우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가 일생 동안 사용한 독일어가 특징을 띄게 되었다. 서기 1894년 그의 가족은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레온딩(Leonding: 상 오스트리아 수도 Linz 시 남서쪽 소재)에 정착하였다. 서기 1895년 은퇴 후 알로이스는 람바하(Lambach: 오스트리아 Wels-Land 소재) 인근 하펠트(Hafeld)로 이사를 하여, 양봉에 투신하였다. 히틀러는 휘쉴함(Fischlham: Wels-Land 소재 자치 시) 인근 국립 초등학교(Volksschule)에 입학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다. 히틀러는 엄격한 학교 교칙에 적응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펠트로의 이사는 부자간 심각한 갈등의 출발점이 되었다. 알로이스는 그에게 매질을 했고, 어머니는 아들을 보호하려고 애를 썼다. 알로이스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알로이스는 전형적인 중간 관리급 공무원 출신으로 엄격한데다 유식한 체, 잘난 체하는 사람이었다. 가족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고 시간이 나면 바로 가, 술이나 마시고 담배를 피던가 아니면 벌꿀 기르는 게 전부였다. 동정심도 없어 히틀러에게 가한 체벌은, 어린 그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히틀러의 지배 욕구, 순종적인 여인에 대한 경멸감, 대인관계에서의 무능력, 엄청난 증오심등은 부친으로부터 당한 학대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의지가 강했던 히틀러는 아버지와의 충돌을 불렀고, 이 충돌은 어린 히틀러로 하여금 언제나 고통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히틀러의 여동생 파울라는 후일 “아돌프는 아버지에게 거칠게 대들었고, 매일 매 맞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아돌프를 감싸고 위로했다”고 회고했다.

    하펠트에서 알로이스는 양봉 사업에 실패, 1897년 가족과 함께 람바하로 돌아갔다. 여덟 살이 된 히틀러는 노래 교습을 받고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때 그는 성직자가 될 꿈을 꾸기도 했다. 서기 1898년, 그의 가족은 레온딩(Leonding: 오스트리아 Linz 시 남서쪽 소재 도시)에 영구 정착했다. 1900년 동생 에드문트가 홍역으로 죽자, 히틀러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만만하고 사교적이며 성실한 학생이 아닌, 까다롭고 침울한 소년이 되어 아버지 그리고 선생님들과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켰다. 공무원으로 성공했던 알로이스는 아들도 자신의 길을 따라주길 바랐다. 후일 히틀러는 아버지가 자신을 세관 사무소로 데리고 갔던 일을 극본으로 쓰기도 했는데,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들, 모두 고집이 센 부자간 적대감을 그린 이야기였다. 히틀러는 인문학교(Classical school)에 진학하여 예술가가 되고 싶어 했지만, 알로이스는 이를 무시하고 1900년 9월 린츠 소재 레알슐레(Realschule: 전문 직업학교)에 입학시켰다. 히틀러는 이 결정에 저항하였다. 후일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의도적으로 성적을 나쁘게 받았고, 기술학교 성적이 나쁘다는 걸 부친이 알면, 나로 하여금 나의 꿈을 쫓아가도록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일부러 성적을 나쁘게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태생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그렇듯, 히틀러는 어린 시절부터 독일 민족주의 사상을 배웠다. 그는 오직 독일에만 충성심을 표했고, 기울어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 윤리적으로 얼룩졌던 그 통치를 경멸했다. 그는 친구들과 만날 때 인사말로 “하일(Heil: 만세, 또는 안녕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지만 현재는 금기어)”을 썼고, 오스트리아 애국가 대신 독일 애국가(Deutschlandlied: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독일 애국가)를 불렀다.

    1903년 1월 알로이스가 사망을 하자, 히틀러의 어머니는 학교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그에게 학교를 그만두도록 했다. 1904년 9월 히틀러는 슈테이르(Steyr: 상 오스트리아 소재 도시)소재 “레알슐레(Realschule)"에 입학을 했고, 그의 품행은 좋아지기 시작했다. 1905년 졸업 시험 재시험을 통과하여 학교를 떠났는데, 장래에 대한 계획이나 공부를 더하겠다는 욕심도 없었다.

    1907년 히틀러는 린츠를 떠나, 고아 지원 기금과 어머니의 도움으로 비엔나 소재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그는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Wien)에 두 번에 걸쳐 입학 원서를 냈지만, 모두 불합격했다. 그는 건축학교 입학을 권고 받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하지 않아 건축학 공부를 위한 필요한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히틀러의 모친은 47세의 나이에 유방암으로 사망하였다. 1908년 빈털터리가 된 히틀러는 어쩔 수 없이 무숙자 보호소에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막노동을 하거나 비엔나 풍경을 담은 그림을 그려 팔아 돈을 마련했다. 비엔나 시절 그는 건축과 음악에 대한 열정이 불붙어,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을 열 번이나 보았다. 비엔나 시절 그는, 처음으로 인종적인 발언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루에거(Karl Lueger, 1844~1910. 오스트리아 정치인. 1897~1910 비엔나 시장 역임)같은 포퓰리스트들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적의에 찬, 반유대주의나 독일 민족주의를 이용하였다.

    특히 히틀러가 살고 있던 마리아힐프(Mariahilf: 비엔나 제6구)지역에서는 유별나게 독일 민족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쇠네러(Georg von Schönerer, 1842~1921.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 정치인)가 시장이 되자, 히틀러는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쇠네러는 범게르만주의 옹호자로서 또한 맹렬한 반유대주의자로서, 젊은 히틀러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히틀러는 동유럽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두려움과 선입견을 부채질하는 신문들을 비롯하여, 체임벌린(Houston S. Chamberlain, 1855~1927. 영국계 독일 철학자), 챨스 다윈, 니체(Friedrich Nietzsche), 봉(Gustave Le Bon, 1841~1931. 프랑스 작가. 군중 심리를 다룬 저서 “군중: 대중 심리 연구”의 저자), 쇼펜아우어 같은 철학자나 신학자들의 사상을 담은 신문이나 팸플릿을 읽었다. 히틀러의 친구 쿠비체크(August Kubizek, 1888~1956. 음악가.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따르면, 히틀러는 린츠를 떠나기 전 이미 확고한 반유대주의자가 되어 있었다고 했다.

-쇠네러-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비엔나 시절에 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고 한 반면, 그가 그림을 팔도록 도와준 하니슈(Reinhold Hanisch, 1884~1937)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비엔나 시절 히틀러는 유대인들과 교제를 했다는 것이다. 에반스(Richard J. Evans, 1947~. 영국 역사학자)는 히틀러의 살인적인 반유대 감정은, 독일의 1차 대전 패전으로 인한 재난이 유대인들의 “등에 칼 박기”때문이라는 과대망상에 기인하는 것으로 역사가들을 보고 있다고 했다. 1913년 히틀러는 부친의 남은 재산을 물려받아, 뮌헨으로 이사하였다. 군 입대 영장을 받고 신체검사를 위해 1914년 2월5일 잘츠브르크로 갔다. 징병검사 불합격 판정을 받은 그는 뮌헨으로 다시 돌아갔다. 히틀러는 후일 회고하기를, 인종들이 뒤섞인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 군대에 복무하고 싶지 않았고, 빨리 제국이 망하기를 바랐다고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복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 8월 현재 히틀러의 나이는 25세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시민권이 있었으므로 바바리아 군대(Bavarian Army: 멸망한 신성로마제국을 물려받은 바바리아 왕국<1806~1919>군대. 1919년 독일군에 통합됨)에 입대를 해야 했고, 입대는 허락되었다. 1924년 작성된 바바리아 당국 문서에 따르면, 과거 신체검사 불합격 경력이 있는 그의 입대는 순전히 당국의 과오 때문이라고 했다. 군에 입대해서도 히틀러는 변함없는 독일 민족주의자 관념을 계속 유지하였다.

    전쟁 중 히틀러는 바바리아 예비군 보병 제16연대 소속으로, 프랑스와 벨지움에서 복무했다. 그는 제1중대 소속 보병으로, 이프레 전투(Ypres: 1914년 10월19일~11월 22일까지 벨지움 서부 전선 플랑드르 이프레에서 있었던 전투)에 처음 참가했다. 이 전투에 참가한 9개 보병사단은 전투 개시 후 20일 만에, 신병으로 채워진 전체 병력의 반에 해당하는 약 4만 명의 병사들(대부분이 대학생)을 잃어, 독일인들은 이 전투를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이프레 대학살(Kindermord bei Ypern)”이라고 했다. 히틀러가 소속한 연대는 3천6백 명의 병력으로 전투에 참가했으나, 전투 후 생존자는 611명에 불과했다. 12월에 들어 히틀러가 소속한 중대 250명 병력은 42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 때의 경험으로 히틀러는 남은 전쟁 기간 동안 전쟁에 냉담해졌다. 전투가 끝난 후 히틀러는 일병에서 상병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연대 연락병으로 임명되었다. 연대본부는 전선으로부터 수 킬로 후방에 있었기 때문에, 연락병은 비교적 안전한 보직이었다. 그러나 베버(Thomas Weber, 1974~. 독일 역사학자)는, 전투 당시에는 전선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던 연대 연락병과, 포연 속에서 참호를 오고가야했던 대대 또는 중대 연락병과의 차이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히틀러가 특혜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히틀러(아래 맨왼쪽)-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방어태세에 들어갔음으로, 연락병의 임무도 바뀌었다. 도보나 자전거 연락은 줄어들고, 무전 연락이 증가하였다. 히틀러의 동료들은 연대 사령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들은 배급 받은 잼을, 담배를 피우지 않는 히틀러의 담배와 바꾸기도 했다. 1915년 초, 상병 히틀러는 길 잃은 개를 손에 넣어, "꼬마 여우"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여러 가지 재주를 가르쳐 동반자로 삼았다. 서커스에 알맞은 개라고 했다. 1917년 그의 연대는 전투가 없는 알사스(Alsace)전선으로 이동했다. 행군 도중 히틀러는 자신이 그린 그림들과 애견을 잃었다. 상심한 그는 18일간의 첫 휴가를 얻어, 베를린의 동료 집에서 냈다.

    그가 속한 리스트 연대(List Regiment)는 이프레 전투(First Battle of Ypres ,1914)를 비롯하여 솜므 전투(Battle of the Somme, 1916. 프랑스 북부 Picardy 소재 솜므 강 전투), 아라스 전투(Battle of Arras, 1917. 프랑스 최북부 Pas-de-Calais), 빠샹댈르 전투(Battle of Passchendaele, 1917. 서프랑드르의 벨지움 시골 마을)를 포함, 여러 전투를 치렀다. 1916년 7월 19일부터 이틀 간 치룬 프롬멜(Fromelles: 프랑스 최북단 마을)전투는 프랑스에 상륙한 호주 군대가 치룬 첫 전투로, 바바리아군 진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바바리아군은 호주 군을 격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호주군은 약 7천 명의 병력을 잃음으로써, 서부전선에서 두 번째로 많은 병력 손실을 입었다. 리스트 연대의 연대사는, 이 방어전의 눈부신 승리를 더 이상 불가능한 “서부전선 독일군 최고의 승리”로 기록하였다.

-프롬멜 전투(호주군)-

     60명의 전사자와 211명의 부상자를 낸 전투가 끝난 후 히틀러에게 제2급철십자 훈장(1914)과 제1급철십자 훈장(1918) 등, 두 개의 훈장이 수여되었다. 육군 상병에게 드문 일이었다. 전투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통신병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데 대한 상이었다. 병사에게는 희귀한 철십자 훈장은 보통 전투병보다는 히틀러처럼 사령부에 근무하며, 장교들과 친분이 있는 병사들에게 주어졌다고 했다. 이 상은 연대 부관 구트만(Hugo Gutmann, 1880~1962) 소위가 추천한 것이었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1938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1940년 미국으로 이민을 하였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정에서, 과거 히틀러의 상관이었던 두 사람은, 이때 히틀러는 승진을 거부하였다고 증언했다.

    1916년 10월 솜므 전투에서 히틀러는, 폭탄 파편으로 왼쪽 넓적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는 브란덴브르크 주 벨리츠(Beelitz)시 적십자 병원으로 후송되어 거의 두 달 동안 입원하였다. 퇴원 후 뮌헨의 보충부대 전보 발령을 받았다. 그는 상관인 비더만(Hauptmann F. Wiedemann, 1891~1970)에게 편지를 보내, 동료들이 전선에 있는 상황에서 뮌헨의 보충대는 참을 수 없으니 본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1917년 5월, 비더만은 그가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솜므 전투-

    1918년 10월15일, 영국군의 겨자 가스 공격으로 히틀러와 그의 동료들은 잠시 눈이 멀었다. 바그너(Friedelind Wagner, 1918~1991. 음악가 리챠드 바그너 손녀 딸)에 따르면, 히틀러는 목소리도 잃었다고 했다. 초등 치료를 받은 후 히틀러는 포메라니아(Pomerania: 발틱 해 남부 폴란드와 독일의 분할 지역)소재 파세발크(Pasewalk)육군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 곳에 머물던 11월 10일, 어느 목사로부터 독일의 패전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그 충격으로 눈이 다시 먼 듯했다고 했다. 이어 들려온 베르사이유 조약(1919)체결은 독일 제국의 전쟁 책임, 무장해제, 여러 지역의 독일 영토 박탈, 라인란트(Rhineland: 라인 강을 따라 있는 서부 독일 지역)의 비군사화, 독일에 대한 경제적 제재 등 히틀러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히틀러는 “침대에 꼼작 못하고 누워 있는 동안 나는 독일을 해방 시켜야겠다는, 독일을 위대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시 실행을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11월 19일 히틀러는 파세발크에서 퇴원을 하여 뮌헨으로 돌아갔다. 11월 21일 그곳에 도착한 그는, 제2보병연대 제1보충대 제7중대에 배속되었다. 12월에 그는 다시 트라운슈타인(Tarunstein: 바바리아 남동부 소재 마을)전쟁 포로수용소 경비병으로 재배속되어, 이듬해 1월 수용소가 해체될 때까지 복무하였다.

    그는 뮌헨으로 돌아가 재배속을 기다리며 몇 달을 보냈다. 당시 뮌헨은 바바리아 인민국가(People's State of Bavaria: 1년간 단명의 사회주의 국가)의 일부로서, 아이스너(Kurt Eisner, 1867~1919. 독일 정치인, 언론인)의 암살을 비롯하여 수많은 테러로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1919년 2월 21일, 아이스너는 뮌헨에서 독일 민족주의자 총에 맞아 죽었던 것이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아우어(Erhard Auer, 1874~1945. 바바리아 정치가)도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뮌헨 시장 야라이스(Paul R. von Jahreiß, 1878~1919)도 오셀(Heinrich Osel, 1863~1919. 바바리아 정치인)도 모두 총에 맞아 죽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베를린 정부는 “자본주의 백색 수비대”를 뮌헨에 파견하였다. 1919년 4월 3일 히틀러는, 자신이 배속된 대대의 연락관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부대에게 어느 편에도 서지 말라고 조언했다. 1919년 5월 6일 뮌헨 바바리아 소비에트 공화국은 공식적으로 붕괴되었고, 백색 수비대 파견군 사령관 오벤 중장(Burghard von Oven, 1861~1935)은 뮌헨이 평화를 되찾았음을 선언하였다. 이어 관련자들에 대한 체포와 처형이 있은 후 히틀러는, 동료 연락관 두프터(Georg Dufter)를 “급진 소비에트 선동가”라며 꾸짖었다. 히틀러는 혁명 열정에 감염된 군 내부 인사들을 군조사위원회에 알려, 모조리 뿌리 뽑도록 했다. 이 같은 그의 반공산주의 시각 덕택으로 1919년 그의 부대가 해체되었을 때, 히틀러는 퇴출을 면할 수 있었다.

정치 입문

    전쟁이 끝나자 히틀러는 뮌헨으로 원대 복귀했다. 정규 교육도 빈약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했던 그는, 군대에 그대로 있었다. 1919년 7월 그는 독일육군 정보부대 정보요원으로 발탁되어, 사병들과 함께 독일 노동자당(DAP: Deutsche Arbeiterpartei)에 침투하는 임무를 받았다. 1919년 9월12일 독일 노동자당 회의가 개최되었고, 당 대표 드렉슬러(Anton Drexler, 1884~1942. 극우 정치 선동가)는 히틀러의 연설 재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반유대, 독일 민족주의자, 반자본가, 반맑스주의 내용을 담은 “나의 정치적 각성”이라는 자신의 문집 한 권을 히틀러에게 주었다. 상부의 명령에 따라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 신청을 했고, 신청 후 일주일도 안 되어 당원 번호 555번을 받았다. 당원 번호는 500번부터 시작을 했는데, 당원 수가 많은 큰 정당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속임수였다. 유대인에 관한 히틀러 최초의 글은, 1919년 9월16일 그가 동료 병사 아돌프 겜리히에게 보낸 편지이다(Gemlich 편지로 알려져 있음). 이 편지에서 히틀러는, “정부의 목적은, 흔들림 없이 유대인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했다.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 창립자의 한 사람이며 툴레 회(Thule-Gesellschaft: 1차 대전후 뮌헨에 설립된 독일 신비주의 게르만 족 단체) 회원인 에카르트(Dietrich Eckart, 1868~1923. 독일 민중시인)를 만났다. 그후 에카르트는 히틀러의 멘토가 되어 생각을 같이 했고, 뮌헨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대중에게 호소력을 높이기 위해 당명을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NSDAP)으로 개명하였다. 이 당이 바로 구어口語로 “나치”로 불리는 당(Nazi Party)이다. 히틀러는, 붉은 색 배경의 백색 원 안에 만卍자(Swastika)가 있는 당 기旗를 디자인하였다.

    1920년 3월 31일 히틀러는 제대를 한 후, 당의 일에 몰두하였다. 당시 반정부 독일 민족주의자들 본거지였던 뮌헨에 본부를 둔 나치당은, 맑시즘을 분쇄하고 바이마르 공화정을 무너뜨리기로 결정했다. 1921년 2월 이미 대중 조작에 일가견을 갖춘 히틀러는, 6천 명의 대중 앞에서 연설을 했다. 이를 알리기 위해 두 대의 트럭에 분승한 당 지지자들이 당 깃발을 흔들며 뮌헨 시내를 돌면서, 전단을 나누어주었다. 베르사이유 조약과 정적, 특히 맑스주의자들과 유대인에 반대하는 맹렬한 연설로 히틀러는 곧 유명인사가 되었다.

-32세의 히틀러-

    1921년 6월 히틀러와 에카르트가 기금 모금 차 베를린에 머무를 때, 뮌헨 나치당 본부에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 집행위 간부들이 뉘른베르크에 근거를 둔 독일 사회주의당(Deutschsozialistische Partei, DSP)과 합당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히틀러는 7월 11일 뮌헨으로 돌아가 사표를 제출했다. 집행위 위원들은 당의 지도자이며 대변인인 히틀러의 사퇴는, 당의 종말을 뜻하는 것임을 알았다. 히틀러는 당 의장 드렉슬러를 교체한다면 다시 합류하겠다고 했다. 집행위원회가 이를 받아들여 7월 26일 히틀러는 당원 번호 3680번으로 다시 복귀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나치당 내부로부터의 지속적인 저항에 직면했다. 지도층 내 히틀러의 적대자들은 에쎄르(Hermann Esser, 1900~1981. 나치 언론인)를 당으로부터 추방하고, 히틀러는 당의 반역자라는 내용의 전단지 3천매를 만들어 배포했다. 이에 히틀러는 자신과 에쎄르를 변호하는 대규모 군중 연설로 반격을 가해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 같은 그의 전술은 성공적이어서, 7월 29일 찬성 533표 반대 1표로 드렉슬러를 대신하여 당의장이라는 절대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뮌헨의 어느 맥주홀에서 행한 신랄한 연설로, 히틀러는 대중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청중의 경제적 어려움이라던가, 대중적인 주제를 이용한 선동선전에 그는 익숙해 있었다. 대중 연설을 할 때 히틀러는, 군중심리와 청중의 자신에 대한 기대감을 최대로 이용하였다. 역사가들은 대규모 군중 앞 미사여구와 소규모 군중 앞에서 그의 시선으로 인한 최면효과를 지적한 적이 있다. 이때의 경험을 헤크(Alfonso Heck, 1928~2005, 나치 치하 히틀러 청소년 단원)는 “사람들은 신경발작에 가까운 민족주의적 광기에 빠져들었다. 연설이 끝나면 한동안 가슴이 터질 듯 함성을 지르고, 만세를 외치며 얼굴에는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부터 나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몸과 마음을 빼앗겼다.“라고 했다.

    루돌프 헤스(Rudolf W. Hess, 1894~1987. 1933년 나치 부총통 취임. 종신형을 받고 복역 중 자살), 헤르만 괴링(Hermann W. Göring, 1893~1946. 나치 정치, 군사 지도자. 자살), 에른스트 룀(Ernst Julius G. Röhm, 1887~1934. 초기 나치 군사 지도자)은 히틀러 등장 초기부터 그를 추종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룀의 “돌격대(Sturmabteilung: SA)”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나치 군중대회 경비를 담당하고, 정적을 공격하는 준군사 조직이었다. 이 시기 히틀러의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재건 조직(Aufbau Vereinigung)” 이었다. 뮌헨을 거점으로 했던 이 단체는, 1918년 독일의 우크라이나 점령과 1919년 라트비아 문제에 독일이 개입하면서, 러시아 백인 망명객들과 초기 나치가 협력하여 만든 조직이었다. 이 단체의 목표는 독일 정부와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를 전복한 후 권위주의적 극우 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부유한 산업자본가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은 이 단체는, 볼쉐비즘과 국제 금융을 연결시키고, 이에는 유대인의 음모가 있다는 식으로 히틀러에게 보고하였다.

    1920년 2월24일, 나치당은 나치 국가 수립을 위한 “25개 핵심 계획(25-point Program)”을 성안하였다. 이 계획은 어떤 이데올로기를 일관되게 정리한 것이 아닌, 반베르사이유 협정,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적인 관념에 대한 불신 등, 범게르만 민족 운동에 흐르는 이데올로기를 종합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히틀러에게 있어 가장 중요했던 점은, 이 계획이 담고 있는 강력한 반유대인 입장이었다. 그는 이 계획이 선전선동 자료로서, 대중을 나치당으로 끌어 들일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1923년 히틀러는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1차 대전 참전 장군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1865~1937)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치당은 정책과 겉모습에서 이태리 파시즘을 모델로 하였다. 히틀러는 무쏘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의 1922년 “로마 진군”을 흉내 내어 1923년 11월 8일, 뮌헨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히틀러와 루덴도르프는, 바바리아주(뮌헨은 바바리아 주 주도임)최고 책임자이며 사실상의 주지사인 카르(Gustav R. von Kahr, 1862~1934)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카르는 주 경찰국장인 세이써(Hans R. von Seisser, 1874~1973), 독일 육군 장군 로쏘프(Otto von Lossow, 1868~1938)와 함께 히틀러를 제외한, 민족주의적 독재 정부를 원하였다. 히틀러와 돌격대(SA)는 뮌헨 소재 맥주홀 “뷔르겐브로이켈러”에서, 카르가 동원한 3천 명의 대중 앞에 섰다. 카르의 말을 가로챈 히틀러는 국민 혁명이 시작되었으며, 루덴도르프와 함께 신정부를 수립하겠다고 선언했다. 연설을 끝내고 휴게실로 돌아온 히틀러는 권총을 든 채 카르와 세이써, 로쏘프에게 접근, 지지를 요구하였고, 이렇게 해서 결국 그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히틀러의 군대는 뮌헨 주둔 독일 군과 경찰서들을 성공적으로 제압하였으나, 카르와 그의 동조자들은 곧 지지를 철회했다. 독일군도 경찰도 히틀러에게 합류하지 않았다. 다음날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은 바바리아 정부 전복을 위해 맥주홀을 출발, 바바리아 국방성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경찰의 저지에 막혀, 대열이 흩어졌다. 이 과정에서 16명의 나치당원과 경찰 4명이 죽고, 히틀러의 쿠데타는 실패하였다.

-뮌헨 쿠데타-

히틀러는 친구 한프슈탱글(Ernst Hanfstaengl, 1887~1975. 독일계 미국인 사업가)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히틀러가 자살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1923년 11월 11일, 히틀러는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그는 기가 꺾였지만 침착했다. 1924년 2월 뮌헨 특별 재판정에서 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나치당 대표는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1893~1946. 나치 이론가)가 임시로 맡았다. 4월 1일 히틀러는 5년 징역형을 선고 받아, 란츠베르크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교도관들로부터 우호적인 대접을 받은 그는 지지자들의 편지도 받을 수 있었고, 나치당 당원들과 정기적인 면회도 할 수 있었다. 담당 검사의 의견과는 달리 바바리아 대법원의 판결로 용서를 받은 그는, 1924년 12월 24일 가석방되었다. 미결 기간까지 포함해 1년 정도 감옥 생활을 한 것이다.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히틀러는 “나의 투쟁(Mein Kampf)"제1권 대부분의 내용을 운전기사 모리스(Emil Maurice, 1897~1972)에게, 그 다음 부관 루돌프 헤스에게 구술하였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거짓과 우둔, 비겁함을 상대로 한 4년 반 동안의 투쟁”이었다. 이 책은 툴레회 회원인 에카르트(Dietrich Eckart, 1868~19232. 독일 민중 시인)에게 헌정한 것으로, 히틀러의 자전적 내용과 사상, 독일을 인종에 토대한 하나의 통합된 국가로 바꾸려는 계획을 담고 있다. 책 전반에 걸쳐 유대인을 “병균”과 동등하게 보고, 국제적으로 독을 퍼뜨리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유일한 해결책은 유대인 멸종이었다. 1925년과 1926년, 두 권으로 된 “나의 투쟁”이 발간되었고, 1925년부터 1932년까지 모두 22만8천 권이 팔렸다. 히틀러가 총통이 된 첫해였던 1933년에는 백만 권이 팔렸다.

    가석방 직전 바바리아 정부는, 히틀러를 오스트리아로 추방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바리아 주재 오스트리아 총영사는, 그의 독일군 복무로 인해 오스트리아 시민권이 상실되었다는 그럴 듯한 이유로, 바바리아 정부 요구를 거절했다. 1925년 4월 7일 히틀러는 이 소식을 듣고,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나치당 재건

    히틀러가 석방되었을 때 독일의 정치적 혼란은 어느 정도 가라앉아 경제가 개선됨으로써, 히틀러가 정치 선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적이었다. 쿠데타에 실패한 나치당과 그 관련 단체들은 바바리아에서 고립된 상태에 있었다. 1925년 1월 4일, 바바리아 수상 헬트(Heinrich Held, 1868~1938)와 만난 자리에서 히틀러는,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겠으며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만 정치적 권력을 추구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에 따라 2월 16일, 나치당 추방을 취소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2월 27일 바바리아 당국은 히틀러의 대중 연설을 금지시켰고, 나치당 추방 안은 1927년까지 변경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추방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야심에 따라 슈트라세(Gregor Strasser, 1892~1934. 초기 나치당 요인), 오토 슈트라세(Otto Strasser, 1897~1974. 초기 나치당 요인), 괴벨스(Joseph Goebbels, 1897~1945)에게 독일 북부의 나치당 확대 개편을 지시했다. 그러나 그레고르 슈트라세는 당의 강령에 사회주의적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히틀러를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 노선을 택했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권시장이 붕괴되었다. 독일이 받은 충격은 비참했다. 수백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주요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하였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이 비상사태를 대중의 지지를 얻는 기회로 이용하기로 했다. 그들은 베르사이유 조약을 파기하고, 경제를 부흥시켜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약속을 했다. 히틀러에게 대공황은 하나의 정치적 기회였다. 의회주의적 공화정에 대해 독일인들은 극좌, 극우로 갈리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중도적인 정당들은 이 같은 흐름을 저지할 수가 없었고, 1929년에 있었던 국민투표는 나치 이데올로기를 고양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30년 9월 선거 결과, 대연정이 깨어지면서 소수 내각으로 바뀌었다. 독일 중도당(Deutsche Zentrumspartei)의 브뤼닝(Heinrich Brüning, 1885~1970, 1930~1932. 바이마르 공화정 수상) 수상은 대통령 힌덴브르크(Paul von Hindenburg, 1847~1934)의 비상조치령에 따라 통치하였고, 이로 인해 정부는 권위주의적으로 흐르게 되었다. 1930년 총선에서 나치당은 득표율 18.3%로 총 107석을 얻어, 군소정당에서 벗어나 일약 의회 내 제2정당이 되었다.

-힌덴브르크-

    1930년 말, 쉐링거(Richard Scheringer, ?)와 루딘(Hanns Ludin, 1905~1947)등 두 명의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 장교에 관한 재판에 히틀러가 출두했다. 두 장교는 나치당 가입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당시 공무원의 정당 가입은 불법이었다. 검사는 나치당이 극단적인 정당임을 주장하며, 변호사에게 히틀러를 증인으로 부르라고 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나치당은 오직 민주적 선거를 통해서만 정치적 권력을 추구하고 있으며, 군으로부터도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증언했다.

    브뤼닝의 긴축정책은 경제 개선에 별 도움이 안 되었고, 인기도 없었다. 이 기회를 이용한 히틀러는, 특히 1920년대의 인플레이션과 대공황의 영향을 받은 농부, 제대군인, 중간층 대중들에게 정치적 메시지를 보냈다. 히틀러는 1925년에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포기한 후 7년이 지났지만, 아직 독일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국적이 없었음을 뜻한 것으로, 따라서 합법적으로 공적인 일을 할 수가 없었고 추방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1932년 2월 25일, 나치 당원이었던 브룬스비크 주(Brunswick: 바이마르 공화정 시대 자유 주)내무상 클라게스(Dietrich Klagges, 1891~1971. 1933~1945까지 브룬스비크 수상 역임)는 히틀러를 베를린 주재 브룬스비크 대표단 행정관으로 임명하여, 브룬스비크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히틀러의 독일 시민권도 함께 해결되었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는 힌덴부르크와 겨뤘다. 1932년 1월 27일 뒤셀도르프 기업가 클럽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히틀러는 독일의 강력한 산업자본가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어냈다. 힌덴부르크는 민족주의자, 가톨릭, 군주주의자, 공화주의자 그리고 일부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히틀러의 선거 구호는 “독일 위에 히틀러”로, 이는 그의 정치적 야심을 뜻한 것이며 비행기를 이용한 선거전 구호이기도 했다. 그는 선거를 위해 비행기를 이용한 최초의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35%를 얻어 2등에 그쳤다. 비록 힌덴브르크에 패했지만, 이 선거를 계기로 히틀러는 독일 정치계에 강력한 인물로 등장하였다.

    효과적인 정부의 결핍은, 정치계에 영향력 있는 두 정치인 파펜(Franz von Papen, 1879~1969. 독일 보수계 정치인)과 후겐베르크(Alfred Hugenberg, 1865~1951. 사업가. 독일국민당 대표)와 더불어 산업자본가들과 기업가들의 개입을 불렀다.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힌덴브루크 대통령에게 수백만의 국민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을 수행하고, 의회로부터 자유로운 정부를 위해 그 수반으로 히틀러를 임명할 것을 촉구하였다.

    힌덴부르크는 1932년 7월과 11월에 있었던 두 번의 선거에서 다수당 정부 구성에 실패한 후, 마지못해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히틀러는 후겐베르크의 독일 국민당( Deutschnationale Volkspartei: DNVP)과 연정을 시도하였다. 1933년 1월 30일, 힌덴브르크 사무실에서 간단한 의식을 거친 후, 새 내각이 발표되었다. 새 내각에 나치당은 세 자리를 차지하였다. 히틀러는 수상, 프리크(Wilhelm Frick, 1877~1946)는 내무상, 괴링(Hermann Göring)은 프러시아(Prussia: 발틱해 연안의 독일 주) 내무상이 되었다. 히틀러는 독일 전역의 경찰 장악을 위해 각료 수준의 자리를 요구했고, 괴링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히틀러는 다수당 정부를 세우려는 적대자들의 시도를 분쇄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치적으로 교착상태에 빠지자 히틀러는 다시 힌덴부르크로 하여금 의회를 해산케 하였다. 의회가 해산되면 3월초 선거를 치룰 계획이었다. 1933년 2월 27일, 의회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괴링은 네델란드 공산주의자 루베(Marinus van der Lubbe, 1909~1934)를 방화범으로 지목하였다. 불이 붙는 순간, 그가 그 건물 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베는 나치에 의해 처형되었다. 1960년대까지 솨이어(William L. Shirer, 1904~1993. 미국 언론인)나 불록(Alan Bullock, 1914~2004. 영국 역사학자)같은 역사가들은 그 화재를 나치의 소행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재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루베의 단독 범행으로 보고 있다. 히틀러의 요구에 따라 힌덴브르크는 2월 28일 나치가 입안하여 제시한, 재판 없이 기본권을 제한하고 체포할 수 있는 “의사당 화재법(Reichstag Fire Decree)”에 서명했다. 그 법은 공공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긴급조치를 취할 수 있는 대통령의 권한을 정한,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제48조에 따른 것이었다. 2008년, 루베의 범죄는 함스(Monika Harms, 1946~. 독일 변호사)에 의해 번복되었다. 1998년에 제정된 법에 의거, 루베는 무죄라는 베를린 어느 변호사의 주장에 따른 조치였다. “1998년 법”은, 나치의 법률이 “정의의 기본적 개념”을 해쳤다는 취지에서, 나치 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사면하는 법이었다.

-루베-

    정치적 투쟁이외에도 나치당은 선거를 앞두고 군사 작전에 버금할 폭력과 더불어 반공산주의 선전선동에 전력을 다했다. 선거일인 1933년 3월 6일의 선거에서 나치당은 43.9%를 득표, 의회 제1당이 되었지만 절대 다수당이 되지 않아, 독일국민당과 다시 한 번 연정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1933년 3월 21일, 포츠담 소재 개리슨(Garrison) 교회에서 새로 구성된 의회는 “포츠담의 날” 기념행사를 가졌다. 나치와 구프러시아 엘리트 및 군부와의 통합을 과시하기 위한 행사였다. 히틀러는 모닝코트를 입고 나타나, 힌덴부르크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의회 내 절대 다수당은 아니었음에도 정치적으로 완벽한 장악을 위해 히틀러는 “권능부여 법(Ermächtigungsgesetz)”을 발의하여 새 의회 의결에 붙였다. 이 법의 공식 명칭은 “국가와 국민의 고통구제법”으로, 의회의 승인 없이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권한을 히틀러 내각에 부여하는 법이었다. 이 법은 헌법을 회피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을 두었다. 이는 헌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의회를 통과하려면 2/3이상 찬성이 있어야 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음으로 나치는 “의사당 화재법”을 원용하여, 81명의 공산당 의원(나치는 그들에게 적대적이었지만 총선에의 참가는 허락했었다)전원을 체포하고, 사회민주당 의원들의 회의 참여를 금지했다. 1933년 3월23일,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베를린 소재 "크롤(Kroll) 오페라 하우스“에서 의회가 개최되었다. 건물 내 경비는 돌격대(SA)가 맡았고, 건물 밖에서는 입법부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도착하는 의원들을 향해 구호를 외치며 위협적인 행동을 했다. 히틀러가 ”권능 부여법“은 힌덴부르크에 의해 거부될 것이라고 하자, 이 말을 들은 카아스(Ludwig Kaas, 1881~1952. 독일 중도당 지도자. 가톨릭 성직자)는 통과를 지지하겠다고 했다. 이 법은 찬성 444표 반대 94표로 통과되었는데, 사회 민주당을 제외하고 모두 찬성이었다. “의사당화재법”과 함께 이 법은 히틀러 정부를 “사실상의 합법 독재” 바꾸어 놓은 법이었다.

-SA-

    1934년 베를린 주재 영국 언론 특파원과 대화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하는 말이 농담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독일민족 사회주의 운동은 향후 1천 년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15년 전만하더라도 자신이 독일을 지배할 것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비웃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했다. 입법부와 행정부를 완전히 장악한 히틀러와 그의 일파는, 야당 탄압을 시작했다. 사회민주당은 의회로부터 추방되고, 그 자산은 몰수되었다. 메이데이 행사를 위해 전국의 노동조합 대표들이 베를린에 모여 있는 동안, SA는 그들의 사무실을 급습하여 수색했다. 1933년 5월 2일, 전국의 노동조합은 강제로 해산되고 그 지도자들도 체포되었다. 그들 가운데 강제노동 수용소로 끌려간 사람들도 있었다. 전국의 노동자, 관리자, 회사 소유주를 대표하는 “독일 노동 전선(Deutsche Arbeitsfront)”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히틀러의 민중공동체(Volksgemeinschaft)라는 정신 속에, 나치즘이 무엇인지 그 개념이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6월말이 되어 여러 정당들이 해체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나치의 명목상 파트너인 "독일 국민당(DNVP)“도 마찬가지였다. 히틀러는 SA의 도움을 받아, 국민당 대표 후겐베르크에게 6월 29일까지 사퇴할 것을 요구했다. 1933년 7월 14일, 독일의 유일한 합법 정당은 나치당임을 선언했다. SA가 더 많은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요구함에 따라 군부, 산업계, 정치계 지도자들의 우려가 더욱 커졌다. 이에 대해 히틀러는 “긴 칼의 밤(Nacht der langen Messe: 1934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있었던 SA에 대한 히틀러의 숙청 행위)”을 통해, SA 지도자들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히틀러는 룀(Ernst Röhm, 1887~1934. SA 대장)을 비롯하여 관련 장교들은 물론, 정적인 슈트라세(Gregor Strasser, 1892~1934)와 슐라이허(Kurt von Schleicher, 1882~1934. 바이마르 공화정 마지막 수상이었던)를 체포, 총살에 처했다. 이 같은 히틀러의 행위에 대해 국제사회와 많은 독일인들이 충격을 받았지만, 또한 많은 독일인들이 그가 질서를 회복하고 있다고 믿었다.

    1934년 8월2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하기 전 날, 내각은 “국가 최고위직 관련 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률은 힌덴부르크 사망 시 대통령직은 폐지되고, 대통령의 권력은 수상에게 인계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히틀러는 정부의 수장은 물론 국가수반이 되어, 공식적으로 지도자 겸 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수상(Reichskanzler) 호칭은 곧 폐지되고 지도자(Führer: 한국어로 총통)호칭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져야하는 모든 법적 제약을 없앴다. 국가수반으로서 히틀러는 군 총사령관도 되었다.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군인의 충성 맹세는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온 국가나 군 최고 사령관에 대해서가 아닌, 히틀러 개인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 8월19일 국민투표를 거쳐 88%의 찬성으로, 대통령직과 총통직을 통합하였다.

    1938년 초 히틀러는, 군부 장악을 확실히 하기 위해 블롬베르크- 프릿슈(Blomberg– Fritsch) 사건을 일으켰다. 히틀러는 경찰 사건 기록을 통해, 야전군 사령관 블롬베르크(Werner von Blomberg, 1878~1946)의 아내가 매춘을 한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그를 강제 퇴역시켰다. 프릿슈(Werner von Fritsch, 1880~1939) 대장은 동성연애를 했다는 SS의 조사 보고에 따라 숙청했다. 사실 그들은 1938년 초 예정되었던 전쟁 준비를 하라는 히틀러의 요구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그의 불만을 샀던 것이다. 히틀러는 블롬베르크의 사령관직을 자신이 차지하였다. 히틀러는 국방성을 독일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rmacht: OKW)로 개편하고 카이텔(Wilhelm Keitel, 1882~1946. 독일군 원수)이 지휘토록 하였다. 아울러 열여섯 명의 장군 옷을 벗기고, 44명을 전보 조치했다. 모두 친나치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1938년 2월초까지 12명의 장군이 추가로 제거되었다.

-카이텔-

    히틀러는 자신의 독재가 합법성을 갖춘 것으로 보이도록 했다. 그의 모든 법령은 “의사당 화재법”과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에 따른 것이었다. 의회는 4년마다 두 번에 걸쳐 “권능부여법”을 개정하였다. 국회의원 선거가 아직도 기능을 하고 있던 1933년, 1936년 그리고 1938년 선거에서는, 90%를 넘는 득표를 한 나치 및 친나치 후보 명단만 유권자에게 보여 주었다. 이러한 선거는 지극히 비밀스럽게 치러졌고, 투표를 포기하거나 반대투표를 한 사람에게는 가혹한 보복을 하였다.

나치 독일

    1934년 8월 히틀러는 중앙은행 총재 샤하트(Hjalmar Schacht, 1877~1970)를 경제상에 임명한 후, 이듬해 전시 경제 준비를 위한 전권을 위임하였다. 재건축과 재무장을 위한 재정 조달을 위해 샤하트는 약속어음과 화폐의 발행, 유대인을 포함하여 국사범으로 체포된 사람들의 재산 압류가 가능토록 했다. 실업자 수는 1932년 6백만에서 1936년 1백만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 역사상 가장 거대한 사회간접자본 개선사업인 댐, 고속도로, 철도건설 등 공공사업을 추진했다. 1930년대 중반서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의 임금은 바이마르 공화국 때보다는 비교적 낮았고, 물가는 25%가 더 올라 있었다. 전쟁 경제로 이행하는 동안 근로 시간은 늘어나, 1939년에는 주 50시간이었다. 독일 고전 문화에 대한 히틀러의 재해석을 수행할 사람으로 슈페르(Albert Speer, 1905~1981. 독일 건축가. 나치 전쟁물자 및 무기생산성 장관)가 베를린의 건축물 개조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여러 나라들로부터 보이코트를 당했지만, 독일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히틀러는 개회식을 주도하였고, 베를린의 여름 경기와 파르텐키르헨(Garmisch-Partenkirchen: 바바리아 소재 알파인 스키 타운)에서 개최된 동계경기 개회식에도 참가하였다.

-베를린 올림픽-

    1933년 2월 3일 군지휘관들과 만난 자리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궁극적 외교정책인 “레벤스라움(Lebensraum: 중부 및 동부 유럽으로의 독일 식민지 개척 정책)을 위한 정복과 그곳의 가차 없는 독일 화”를 언급하였다. 그해 3월 외무장관 베른하르트(Bernhard Wilhelm von Bülow, 1849~1929)가 발표한 주요 외교 정책 목표는 오스트리아 합병, 1914년 현재 독일 국경 복원,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른 군사적 제재 거부, 과거 아프리카 독일 식민지와 독일 영향 하에 있는 동유럽의 일부 지역 회복 등이었다. 히틀러는 베른하르트의 목표가 너무 미온적임을 알았다. 그즈음 행한 연설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목표가 평화적임을 강조하고, 기꺼이 국제 협정의 틀 안에서 이행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1933년 첫 각료회의에서 히틀러는 실업 구제보다는, 군비를 위한 재정지출을 우선했다.

    1933년 10월 독일은, 국제연맹과 세계 비무장회의(World Disarmament Conference)로부터 탈퇴하였다. 1935년 1월에는, 사아르란트(Saarland: 국제연맹의 신탁통치령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 통치했던 프랑스 접경 지역의 작은 주)주민의 90%이상이 독일과의 통합을 지지했다. 그 해 3월 히틀러는 60만 명의 병력 증강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는 베르사이유 체제가 허한 병력의 6배에 해당하는 규모로, 공군과 해군 증강도 포함하고 있었다. 영국, 프랑스, 이태리는 물론 국제연맹도 독일의 조약 위반을 비난하였으나, 이를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1935년 6월 18일, 영국-독일 해군간 체결된 협정(Anglo-German Naval Agreement: AGNA)에 따라, 독일 군함 톤수를 영국 군함 톤수의 35%까지 늘릴 수 있게 되었다. 히틀러는 이 성과를 “나의 투쟁”에서 예언한 대로, 영국과의 동맹이 시작된 것으로 생각하여, 자기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고 했다. 국제연맹과 베르사이유 조약을 무력화 시킨 이 협정은,  프랑스나 이태리와 아무런 사전 협의가 없었다.

    1936년 3월 독일은 라인란트의 비무장 지역을 재점령함으로써, 베르사이유 조약을 위반하였다. 1936년 7월 히틀러는, 내전 중인 스페인의 프랑코(Francis Franco, 1892~1975)장군으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은 후, 그를 돕기 위해 스페인에 독일군을 파견하였다. 그와 동시에 영-독 동맹군 창설을 위해서 계속 노력했다. 1936년 8월 재무장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가 나타나자 히틀러는 괴링에게, 향후 4년 이내에 있을 전쟁에 대비할 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했다. 그 계획은 유대-볼세비즘과 독일 나치즘과의 전면적인 대결을 전제한 것으로 이를 위한 재무장은, 그 비용이야 어떠하던 히틀러로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프랑코-

    1936년 10월 치아노(Galeazzo Ciano, 1903~1944. 이태리 무솔리니 정부의 외무장관)가 독일을 방문, “9개조 의정서(Nine-Point Protocol: 독-이 친선 협정)”에 서명하였다. 11월 1일 무솔리니는, 독일과 이태리는 “추축(Axis)”관계임을 선언하였다. 11월 25일 독일은 일본과 반코민테른 조약(Anti-Comintern Pact)에 서명하였다. 영국, 중국, 이태리, 폴란드도 권유를 받았으나, 1937년 이태리만이 이 조약에 서명하였다. 히틀러는 영국과 동맹을 맺으려 했던 계획을 포기하면서, 영국지도자들을 비난했다. 1937년 11월 5일 총통 관저에서 외무상과 군부지도자들을 만난 히틀러는, 독일 국민을 위한 "레벤스라움“ 의지를 재천명했다. 그는 1938년 초나 늦어도 1943년 이전에 동유럽에서 있을 전쟁 준비를 명령하였다. 자신이 죽을 경우에 대처할 세세한 내용도 기록(Hossbach Memorandum: 1937년 11월 5일 회의록)에 남겼는데, 이는 그의 “정치적 유언장”이 될 터였다. 경제적 위기로 인한 독일 국민 생활 수준의 급격한 저하는, 오직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함으로써 막을 수 있다고 히틀러는 생각했다. 그는 군비경쟁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영원한 선두를 차지하기 전에, 서둘러 행동의 취해야 한다고 했다. 1938년 초, 블롬베르크-프릿슈 사건 와중에서 히틀러는 군사-외교 기구를 통제하겠다며 외무상 노이라트(Konstantin von Neurath, 1873~1956)를 해임하고, 스스로 전쟁을 목적으로 한 외교정책을 폈다.

    1938년 2월 히틀러는, 자신이 임명한 친일본적인 외무상 리베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 1893~1946)의 조언을 받아, 중국과의 동맹관계를 파기하고 보다 현대적이고 강력한 일본제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히틀러는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인정하고, 일본이 점령한 태평양 상 독일 식민지들도 포기하였다. 히틀러는 대중국 무기 선적 중단을 명령하고, 중국 군대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독일 장교들을 모두 소환하였다. 이 같은 조치에 분노한 장개석은, 중국-독일 경제 협정을 파기하고 독일인 소유 중국산 원자재를 모두 몰수하였다.

    1938년 3월 12일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합병을 선언하였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Sudetenland: 체코슬로바키아 북, 남, 서부 지역)지역의 게르만족으로 관심을 돌렸다. 1938년 3월 28~29양일 간에 걸쳐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주데텐란트 지도자인 헨라인(Konrad Henlein, 1898~1945. 주데텐란트의 독일 정치가)과 일련의 비밀 회담을 가졌다. 헨라인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게 주데텐 독일인 공동체의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기로 하고, 이를 구실로 체코에 대해 군사행동을 취하기로 히틀러와 합의했다. 1938년 4월 헨라인은 헝가리 외상에게, 체코 정부가 무엇을 제안하던 자신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겠다고 했다. 어느 경우든 체코 정부의 요구를 거절할 것이며, 이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붕괴시킬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주데텐란트는 히틀러에게 별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 그의 진정한 의도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복이었다. 히틀러는 독일군최고사령부에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계획을 수립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9월5일,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외교적 압력을 받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베네스(Edvard Benes, 1884~1948)는 제4차 계획(Fouth Plan: 헌법 개정을 통한 체코슬로바키아 재건 계획)을 공개했다. 이 계획은 대부분, 주데텐란트 자치를 위한 헨라인의 요구사항을 담고 있었다.

-베네스 -

    독일은 석유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체코를 둘러싼 영국과의 대결은 독일의 석유 공급 능력을 약화 시킬 수도 있었다. 이로 인해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1938년 9월29일 히틀러, 영국 수상 체임벌린, 무솔리니, 프랑스 수상 달라디에르(Édouard Daladier, 1884~1970)가 참가한 뮌헨회의에서,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는 협정(Munich Agreement)이 체결되었다. 체임벌린은 협정 체결에 만족하여 “우리시대의 평화가 찾아 왔다”라고 한 반면, 히틀러는 1938년에 전쟁을 일으킬 기회를 잃게 되어 분노했다. 그는 10월 9일 자르브뤼켄(Saarbrücken: 독일 자르란트 주 주도)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와 관련한 실망을 토로했다. 히틀러가 볼 때, 영국 개입으로 인한 평화는 외관상 독일 요구에 영국이 따른 듯 했지만, 이는 사실 자신의 외교적 패배를 뜻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히틀러는 독일의 동방 영토 확장정책의 앞길을 가로 막는 영국을 억제하려는 의지가 더욱 강해졌다. 이 정상회담의 결과 히틀러는 타임지가 선정한 1938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1938년 말부터 1939년 초까지 계속된 경제 위기는 재무장에 기인한 것으로, 히틀러는 국방예산을 감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39년 1월 30일 행한 “수출 아니면 죽음”이라는 연설에서 히틀러는, 철강과 같은 무기 생산에 필요한 고품질의 원자재 수입을 위하여, 외환 보유고를 늘릴 것을 역설하였다. 1939년 3월 14일, 헝가리로부터 압력을 받은 슬로바키아(Slovak Republic: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합병 포기 후 1939.3.14~1945.4.4간 존재 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 나치 가신 국가)는 독립을 선언하고, 독일의 보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다음날 히틀러는 독일 국군에게 체코 변경 지역 침공을 명령하고, 그 지역을 독일의 보호령으로 선언하였다. 완전한 뮌헨 협정 위반이었다. 이 같은 히틀러의 행위는 아마 경제적 위기의 심화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제2차세계차대전

    1939년 히틀러는 사적인 자리에서, 영국을 격파 대상 적국으로 선언하고 이를 위한 전단계로 폴란드를 없애버릴 필요성을 역설했다. 폴란드를 손에 넣는다는 말은, 독일 동쪽의 안전 확보와 영토 확장을 뜻했다. 1939년 3월 31일 영국이 폴란드 독립을 보장한다는 발표에 분노한 히틀러는, “그들을 술로 만들어 악마가 마시도록 하겠다”라고 했다. 영국의 폴란드 독립 보장을 독일 포위 정책으로 본 히틀러는, 1939년 4월1일 전함 티르피츠(Tirpitz)호 진수식이 있었던 빌헤름스하(Wilhelmshaven: 니더작센주 항구 도시) 연설에서, 영-독 해군협정을 파기하겠다고 위협했다.

    폴란드가 독일 위성국이 되거나 중립화가 이루어지면, 독일 동부 안전이 확보되어 영국 봉쇄를 막을 수가 있었다. 히틀러는 당초 폴란드를 위성 국가로 생각했지만, 폴란드 정부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자, 1939년 그의 주 외교정책은 폴란드 침공이었다. 4월 3일 히틀러는 군부에게, 8월 25일자 폴란드 침공 계획(Fall Weiss)을 수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4월 28일 의회 연설에서는, 영-독 해군협력 협정과 독일-폴란드 불가침 협정 등 두 협정 파기를 선언했다. 히틀러가 이처럼 전쟁을 서두른 이유는 자신이 조만간 죽을 것이라는 공포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히틀러는 언제나 버릇처럼 자신이 독일을 지휘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이미 너무 늙고, 후계자들은 자기만한 의지력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히틀러는 폴란드 공격이 영국과의 전쟁을 당길 것임을 우려를 했다. 그러나 런던 주재 독일 대사를 역임했던 나치 정부 외무상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 1893~1946. 나치 정부 하 독일 외무상)는 히틀러에게, 영국이나 프랑스가 폴란드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말 안심시켰다. 이에 따라 1939년 8월 22일 히틀러는, 대폴란드 군사 기동훈련 명령을 내렸다.

-리벤트로프-

   독일이 스탈린과 체결한 불가침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은 폴란드 분할이라는 비밀 협정을 포함하고 있었음으로, 이 기동훈련은 소련의 승인이 필요했다. 영국이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리벤트로프의 예상과는 달리, 1939년 8월 25일 영국-폴란드 동맹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와 함께 무솔리니가 강철조약(Pact of Steel: 독일-이태리 동맹 조약)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이태리로부터 들려오자, 히틀러는 8월25일자 폴란드 침공 계획을 9월 1일로 연기하였다. 8월 25일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하지 않겠다는 말로 영국의 중립을 유도했으나 실패하자, 리벤트로프에게 마지막 계획을 수립,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시간 부족으로 계획 재수립은 불가능했다. 

    1939년 9월1일, 독일은 단치히 자유시(Free City of Danzig: 1920년부터 국제연맹 보호령이었던 발틱 연안의 항구 도시. 현 폴란드 Gdansk 시)에 대한 권리와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라 독일이 할양하였던 폴란드 회랑(Polish Corridor: Danzig 회랑이라고도 함. 독일과 동프러시아를 갈라놓는 폴란드 내 발틱해 접근로)에 대한 권리가 침해되었다는 구실로,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였고, 이에 놀란 히틀러는 화를 내며 리벤트로프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선전포고를 하였음에도 즉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9월 17일 소련군은 폴란드 동부로 진군하였다. 당시의 언론들은 폴란드 함락을 “엉터리 전쟁(Sitzkrieg: 전쟁 초기 8개월 동안 독일 자르에서 치룬 프랑스군 유일의 서부전선 전투를 빗댄 말. 즉, 선전포고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영국이 뒷짐 지고 있었음을 빗댄 말)”의 결과로 불렀다. 히틀러는 폴란드 북서부를 소규모 행정 단위로 개편하여, 단치히-서프러시아 행정구에는 포르스터(Albert Forster, 1902~1952. 나치 정치인. SS대원)를, 바르터란트(Warterland: 네델란드 서북부 지역)에는 그라이서(Arthur Greiser, 1897~1946. 나치 정치인. SS대원)를 책임자로 임명하면서, 그들의 뜻에 따라 독일화를 추진하도록 지시했다. 포르스터 관할 지역의 폴란드인들은, 자신들에게 게르만 피가 흐른다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을 해야 했다. 이와는 달리 그라이서 지역은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인종 청소를 단행했다. 그라이서는 포르스터가 수천 명의 폴란드인들을 게르만족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게르만의 혈통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비난했다. 이 문제에 히틀러는 개입을 삼갔다. 이는 모호한 지시를 내린 후, 부하들이 어떤 정책으로 실천하는지 히틀러가 지켜보는 “총통을 위한 과업”이론의 실증 예가 되었다.

-단치히 자유시-

    폴란드 인종 청소에 앞장섰던 히믈러와 그라이서의 주장과는 달리, 폴란드를 독일 곡창지대로 만들자는 괴링과 프랑크(Hans Frank, 1900~1946. 정치인, 변호사)의 주장도 있었다. 1940년 2월 12일 이 주장은 “괴링-프랑크 주장”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경제적 붕괴를 초래한 대규모 유대인 추방이 종식될 것임을 뜻했다. 그러나 1940년 5월 15일, 히믈러는 “동부의 이방인 처리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이라는 제목의 메모를 발표하였다. 이 메모는 유럽 유대인들을 아프리카로 추방할 것과 폴란드 국민을 “지도자 없는 노동자 계급”으로 저하 시키고자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히틀러는 히믈러의 이 주장을 “훌륭하며 옳다”고 하면서, 더 이상의 유대인 추방 종식을 주장하는 괴링과 프랑크를 무시하였다. 히틀러는 히믈러-그라이서 주장을 대폴란드 정책에 적용하였다.

    1940년 4월 9일, 독일군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였다. 같은 날 히틀러는 “위대한 게르만 제국” 탄생을 선언하였다. 이 연설은 독일이 이끄는 순수 인종 정치적 단일체에 네델란드, 플란다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합류한 “유럽 게르만족 통일제국”이라는 히틀러의 꿈을 담은 선언이었다. 1940년 5월, 독일은 프랑스에 이어 룩셈부르크, 네델란드, 벨지움을 점령하였다. 독일의 이 승리는, 무솔리니로 하여금 6월 10일 나치 군대에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6월 22일 프랑스와 독일은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파리 방문 후 7월 6일 베를린으로 돌아온 히틀러의 인기와, 전쟁에 대한 독일 국민의 지지는 최고조에 달했다. 예상치 못한 승리의 결과 히틀러는, 1940년 야전군 원수기념일에 12명의 장군을 원수로 승진시켰다.

    던커크(Dunkirk: 프랑스 북부 항구)로부터 프랑스를 철수해야 했던 영국은, 대서양 상 영국 자치령 전역에서 전투를 계속하였다. 히틀러는 영국 신임 수상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에게 평화를 제안했으나 거부당하자, 영국 남동부에 위치한 영국 공군 기지와 레이더 기지에 대한 공습 명령을 내렸다. 9월 7일 런던에 대한 독일의 야간 공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을 격파하지 못했다. 9월 말에 이르러, 히틀러는 영국 침공(Operation Sea Lion: 바다사자 작전)에 필요한 독일 공군의 우위가 확보되지 않았음을 알고는, 침공 계획을 연기했다. 그러나 런던을 비롯한 플리머스, 코벤트리에 대한 야간 공습을 강화하여, 폭격을 계속했다.

-던커크 철수-

    1940년 9월 27일 히틀러, 사부로 쿠루수(Saburo Kurusu, 1886~1954. 주 독일 일본 대사), 치아노(Gian Galeazzo Ciano, 1903~1944. 이태리 외무상)등 3인은 공동 방위 조약인 베를린 조약(Berlin Pact: Tripartite Pact라고도 함)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는 항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도 가입을 하여, 추축국(Axis powers)을 형성하였다. 히틀러는 반영국 대열에 소련도 가담 시키려 노력하였으나, 11월 베를린에서 몰로토프(Molotov, 1890~1986. 2차대전 당시 소련 외무상)와 회담이 결론 없이 끝나면서 실패하였다. 이에 따라 히틀러는 소련 침공준비 명령을 내렸다. 1941년 초 독일군은 북아프리카, 발칸반도, 중동 지역에도 진주하였다. 같은 해 2월, 독일군은 리비아에 도착하여 이태리군을 지원했다.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 침공 (1941.4.6)후 곧 그리스로 쳐들어갔다. 1941년 5월 독일군은 영국군과 싸우는 이락군대에 지원군을 파견하였고, 지중해 상의 크레테 섬도 침공(1941.5.20)하였다.

패망으로 가는 길

    1941년 6월 22일 3백만이 넘는 추축국 군대가 1939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독-소 상호불가침조약)을 정면으로 위반, 소련을 침공하였다. 이 공격(암호명 Barbarossa 작전)의 목적은 소련을 붕괴 시켜, 그 자원을 서유럽 공격에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공격은 성공적이어서 추축국 측은 발틱 국가들을 비롯하여 백러시아, 서우크라이나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8월 초까지 추축국 군대는 5백 킬로미터를 진격하여, 스몰렌스키(Smolenski: 모스크바 남서남쪽 360킬로 지점의 드니에프르 강변 도시) 전투에서 승리를 하였다. 히틀러는 모스크바 진격을 멈추고,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레닌그라드와 키에프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히틀러의 모스크바 공격 실패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독일군 진격이 잠시 멈춘 틈을 타, 소련군은 부대를 재정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41년 10월 모스크바 공격이 재개되었고, 12월 독일군은 파멸적인 결말로 끝이 났다. 이 같은 위기에 처한 히틀러는, 스스로 나치 독일 육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바바로사 작전-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 미해군 기지를 공격하였고 그로부터 4일 후 히틀러는 대미 선전포고를 하였다. 1941년 12월 18일, 히믈러는 히틀러에게 “러시아 유대인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히틀러는 “빨지산”으로 취급하여 모두 죽이라고 했다. 1942년 말, 독일군대는 제2차 엘 알라메인(El Alamein: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서쪽 106킬로 지점의 지중해 해변 도)전투에서 패배를 함으로써, 히틀러의 수에즈 운하 및 중동 점령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1940년 서부전선에서의 승리로 히틀러는 이에 공이 큰 군사전문가들을 신뢰한 반면, 야전지휘관들을 믿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작전을 직접 지휘하였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1942년 12월과 이듬해 1월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로부터 후퇴를 해야 했으나 이를 거부하였고 그 결과 독일 제6군단은 거의 전멸하였다. 20만 명 이상의 추축국 군인이 죽었고, 23만5천 명이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쿠르스크 전투(Battle of Kursk: 러시아 쿠르스크에서 있었던 대규모 탱크 전)에서 결정적인 전략 실패가 있었다. 히틀러의 군사적 과오가 잦아지면서, 독일군과 독일경제도 그의 건강처럼 점점 악화되어 갔다.

-쿠르스크 전투-

    1943년 연합군의 시실리 침공이 있은 후, 이태리 국왕 엠마누엘 III세(Victor Emmanuel III, 1869~1947)는 파시스트위원회(Gran Consiglio del Fascismo)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통해, 무솔리니를 권좌에서 제거하였다. 바도글리오(Pietro Badoglio, 1871~1956. 이태리 장군. 이태리 동아프리카 초대 총독)원수가 정부 수반이 되어, 곧 연합군에게 항복하였다. 1943~1944년 기간에 동부전선 전역에서 소련은 히틀러 군을 격파하였고,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이 있었다. 이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수륙양용 작전이었다. 많은 독일군 장교들은 패전이 불가피하고, 히틀러 지휘 하의 전쟁은 독일의 완전한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암살 시도는 1944년 7월 20일 발생한 발키리 작전(Operation Valkyrie)으로, 라스텐부르크(Rastenburg: 폴란드 동북부 마을) 소재 나치군 사령부 총통 벙커에 폭탄을 설치한 사건이다. 발키리 작전은 원래 연합군의 공습으로 시민 질서가 붕괴될 경우, 독일 예비군이 수행할 비상 작전계획이었다. 그러나 독일 육군의 올브리히트(Friedrich Olbricht, 1888~1944. 독일군 육군 중장), 트레스코(Henning von Tresckow, 1901~1944. 육군 준장), 스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 1907~1944. 육군 대령) 등은 이 작전 계획을 독일 각 도시 장악, SS해체, 요인 체포가 가능토록 수정했다. 히틀러로부터 나치 군대를 해방시키려면, 그를 죽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오랜 준비 끝에 벙커 안 히틀러의 육중한 테이블 밑에 시한폭탄이 담겨진 가방을 숨겼다. 브란트(Heinz Brandt, 1907~1944. 독일군 육군 중령)가 이를 발견, 제거하려던 순간 폭발, 그는 물론 히틀러도 부상을 입었다. 브란트 덕으로 가까스로 살아난 히틀러는 무자비한 보복을 명령하였고, 그 결과 올브리히트 중장을 포함한 4천9백 명 이상이 죽음을당하였다.

-발키리 폭파 현장-

히틀러의 죽음

    1944년 말 소련 적군과 연합군은 독일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적군의 화력과 결의를 잘 알고 있던 히틀러는 아직 남아 있는 기동 예비군을, 소련군보다 약체라고 생각한 미군과 영국군과의 전투에 투입하기로 했다. 12월 16일 히틀러는 미, 영국군을 상대로 아르데네스 공격(Ardennes Offensive: 벨지움과 룩셈브르크 접경 아르데네스 숲에서 있었던 전투. 일명 Bulge 전투)을 개시했다. 이 싸움에서 히틀러는 잠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결국은 패배하였다.

-Bulge 전투-

    1945년 1월 현재, 독일 전 지역은 대부분 파괴된 상태였다. 히틀러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 순간 위기가 아무리 심각할지라도, 불변의 우리 의지가 승리할 것이라고 했다. 독일의 군사적 실패는 생존권이 박탈당하는 것과 같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히틀러는, 연합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독일의 모든 산업시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슈페르(Albert Speer, 1905~1981. 독일 건축가. 전쟁 기간 중 나치 전쟁물자 및 무기 생산성 장관)가 이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1945년 4월 12일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미국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미국과 영국이 분열하여 평화 협상을 제안해 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루즈벨트의 죽음은 연합군에게 아무런 분열의 원인이 되지 않았다.

    히틀러의 56회 생일인 1945년 4월 20일, 그는 총통 벙커에서 나와 마지막 여행을 하였다. 파괴된 총통 궁(Reich Chancellery: 총통 근무 건물) 정원에서 그는, 베르린 교외 전투에서 소련군과 싸우는 히틀러 소년단(Hitlerjugend) 소년 병사들에게 철십자 훈장을 수여하였다. 4월 21일 젤뢰베(Seelöwe: 베를린 동쪽 70킬로 지점의 마을) 고지 전투에서 하인리치(Gotthard Heinrici, 1886~1971)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를 격파한 주코푸(Georgy Zhukov, 1896~1974) 지휘 하의 소련군 제1백러시아 전투부대는, 베를린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히틀러는, 슈타이너(Felix Steiner, 1896~1966. SS대장)가 지휘하는 인력부족, 장비 부실의 별동대(Armeeabteilung)에 희망을 걸었다. 히틀러는 슈타이너에게, 독일군 제9사단과 함께 주코프 부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 소년단-

    4월 22일에 있었던 회의에서 히틀러는, 슈타이너의 공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물었다. 아직 작전을 개시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함께 소련군이 베를린에 입성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히틀러는 카이텔(Wilhelm Keitel, 1882~1946. 독일군 최고사령관), 요들(Alfred Jodl, 1890~1946. 독일군최고사령부 작전참모장), 크레프스(Hans Krebs, 1898~1945. 나치 육군최고사령관), 브르크도르프(Wilhelm Burgdorf, 1895~1945. 독일군 인사국장 및 히틀러 부관)를 제외한 모두에게 회의장 밖으로 나가라고 한 다음, 군지휘관들의 무능과 반역적 행태를 비난하는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는 말을 했다. 그는 최후까지 베를린에 머무를 것이며, 권총 자살을 하겠다고 했다.

    4월 23일 소련군이 베를린을 포위하였고, 괴벨스는 시민들에게 방어전에 나서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같은 날 괴링은 베르히테스가덴(Berchtesgaden: 바바리아 소재 마을. 히틀러, 괴링, 괴벨스 등의 별장 소재지)으로부터 한통의 전보를 보내왔다. 히틀러가 베를린에 고립되어 있으며, 자신이 독일 지휘책임을 맡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정한 시간 이후 부터 히틀러의 지휘 능력이 어떠한지 보겠다고 했다. 이에 히틀러는 괴링을 체포하라는 명령으로 응수했다. 4월 28일 히틀러는, 히믈러가 연합군과 항복 협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히믈러 체포 명령을 내리고, 히믈러의 부하인 총통 부관단 소속 SS대장 페겔라인(Hermann Fegelein, 1906~1945. 에바 브라운의 제부)을 총살에 처했다. 

-베르히테스가덴-

4월 28일 자정이 지나 히틀러는 총통 벙커에서 에바 브라운(Eva Braun, 1912~1945)과 간략한 결혼식을 올렸다. 29일 오후 히틀러는, 무솔리니가 하루 전 레지스탕스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에 히틀러는, 체포를 당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4월29일 히틀러는 괴링을 모든 직으로부터 해임한 후, 마지막으로 유언장을 남겼다.

-에바 브라운-

    1945년 4월 30일, 소련군이 총독 관저로 접근하자 히틀러는 스스로 머리에 총을 쏘았고 에바 브라운은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었다. 1929년 17세의 소녀 에바 브라운은, 히틀러를 연인으로 만나 이렇게 생이 끝난 것이다. 히틀러가 이미 명령한 바에 따라 그들의 시체는 후원으로 끌어내어진 후 폭탄 구덩이에 던져져 석유가 뿌려졌다. 소련군의 포탄이 계속 터지는 가운데 그들의 시신에 불이 붙었다.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되니츠 제독(Karl Dönitz, 1891~1980)과 요셉 괴벨스가 각각 국가수반과 수상으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수상으로서 단 하루를 보낸 괴벨스는, 그 다음날 여섯 자녀에게 청산가리를 먹인 후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요셉 괴벨스-

5월 2일, 베를린이 항복하였다. 히틀러와 브라운의 시신을 옮겼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이는 소련군의 정보 왜곡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련군은 의치 이외에 히틀러나 에바 브라운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그들의 유해를 찾아낸 적이 없다. 히틀러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지만, 42명의 증인으로부터 증언을 청취하고 오랜 조사가 이루어진 1956년까지 히틀러 사망 확인서는 발급되지 않았다. 히틀러의 사망은 이 증언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추정한 것이다.

히틀러 리더십

    히틀러는 “지도자 원칙(Führerprinzip)”을 내세워 나치당을 지배하였다. 이 원칙은 상관에 대한 절대복종에 토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정부 구성은 피라밋 형태를 취하여 최상부에 무오류의 지도자인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의 서열은 선거가 아닌 상급자의 임명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상급자는 피임명자에게 지도자의 의지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히틀러의 리더십은 부하들에게 모순된 명령을 내려, 부하들 간 의무와 책임이 중복되게 하여, 강한 자가 임무를 수행토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히틀러는 불신과 경쟁을 키우고 부하들 사이에 내분을 일으킴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 극대화하였던 것이다. 1938년 이후 그의 내각은 회의가 열린 적이 없었고, 각료들도 그가 참가하지 않는 한 회의를 열지 못하도록 하였다. 히틀러의 명령은 서류를 통한 적이 없고, 말 또는 보르만(Marin Mormann, 1900~1945. 히틀러 개인 비서)을 통하여 전달되었다. 히틀러는 서류작성, 타인과의 약속, 재정 업무에 관해 보르만을 신뢰하였고 보르만은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였다.

    2차 대전 중 히틀러는 다른 어느 나라 지도자들보다 더한 엄청난 전쟁 노력을 기울였다. 1938년 군대에 대한 자신의 통제를 강화했고, 군사 전략에 관한 모든 중요한 사항을 직접 결정했다. 1940년 군대의 권고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결정으로 단행한 노르웨이, 프랑스, 베네룩스 3국에 대한 공격은, 비록 영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자신의 외교적, 군사적 전략은 실패를 하였지만, 성공적임이 증명되었다. 1941년 히틀러는 스스로 육군총사령관이 되어 전쟁에 깊이 관여하였고, 이후 대소련 전쟁을 직접 지휘하였다. 반면 그의 수하 군사령관들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은, 의사 결정이 늦고 수행할 수 없는 빈번한 명령으로 방어 전략이 교란되었고, 전황이 독일에 불리하게 전개됨에 따라, 점차 현실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념에 찬 그는, 오직 자신의 리더십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도 히틀러는 평화협정을 거부하고, 항복은 바로 독일의 파멸로 보았다. 군부는 히틀러에게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고, 그의 결정을 지지하고 실천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에게 히틀러의 이미지는, 나라와 정치적 임무에만 헌신하며 가정생활이 없는 독신주의자로 비쳤다. 1931년 9월, 히틀러의 이복 조카인 라우발(Geli Raubal, 1908~1931. 히틀러의 이복 누나 안젤라 라우발의 장녀)이, 그녀의 뮌헨 아파트에서 히틀러의 권총으로 자살을 하였다. 당시 그녀는 히틀러와 연애 중에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녀의 죽음은 히틀러에게 심각하고, 계속되는 고통의 원천이었다. 히틀러 여동생 파울라(Paula Hitler, 1896~1960)는 히틀러 가계의 마지막 인물로, 1960년 6월에 사망하였다.

-파울라 히틀러-

    히틀러의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고 부친 알로이스는 반교권주의자(anticlerical)였다. 집을 떠난 후 히틀러는 가톨릭 미사나 성사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슈페르에 따르면 히틀러는 정치적 동료들에게 교회 욕을 했고, 공식적으로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지만 예배에 참가해본 적도 없었다. 슈페르는 기독교보다는 일본인의 신앙이나 이슬람이, 그 “온유함과 부드러움”으로 인해 독일인에게 더 알맞다는 게 히틀러의 믿음이었다고 했다. 콘웨이(John S. Conway, 1929~2017. 컬럼비아 대 석좌교수. 역사학)에 따르면 히틀러는 근본적으로 반기독교 교회 주의자라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자신에게 알맞은 몇 가지 개신교 교리를 좋아했고, 가톨릭교회의 위계적인 조직과 전례, 어법 가운데 받아들인 것도 있었다. 1932년 행한 연설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가 아닌 독일 기독교 신자라고 하였다. 슈페르와의 대화에서는 자신을 통해, 독일 복음주의 교회가 자리를 잡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교회가 사회에 대해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아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 교회와는 전략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는 유대인과 싸우는 “아리안 예수”를 믿는다며, 공식 석상에서 기독교 유산과 독일 기독교 문화를 예찬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2차 대전 시 미국 정보국)가 작성한 보고서 “나치 마스터 플랜”에 따르면, 히틀러의 궁극적 목적은 기독교의 완전한 제거였다. 히틀러의 초기 정책에서 이를 알 수가 있는데, 그러나 그 같은 극단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나타내는 건 적절치 못하다는 걸 그는 알았다. 히틀러는 이 계획 실천을 전쟁이 끝난 후로 미루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건강

    히틀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가 과민성대장증후군, 피부병, 부정맥, 동맥경화, 파킨슨병, 매독, 동맥염, 이명, 단일고환증 등의 질병으로 고통 받았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1943년 OSS의 보고서에서 랑거(Walter C. Langer, 1899~1981. 하버드대 교수. 정신분석학)는, 히틀러를 “신경성 정신병자”로 기술하였다. 웨이트(Robert G. L. Waite, 1919~1999. 캐나다 역사학자. Williams 대 교수)는, 1977년 발간한 그의 저서 “정신병의 신 아돌프 히틀러”에서, 히틀러가 “경계성 인격 장애”로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에벌르(Henrik Eberle, 1970~. 독일 역사학자)는 히틀러가 파킨슨병을 비롯하여 여러 질병으로 시달리는 동안에도 어떤 정신적 장애 없이, 언제나 자신의 결정과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했다.

    1930년대 언젠가 히틀러는 식이요법으로 채식을 한 적이 있었고, 1942년 이후로는 생선이나 육류를 일체 입에 대지 않았다. 사교 석상에서도, 사람들에게 육식을 피하라며 동물 도살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했다. 보르만(Martin Bormann, 1900~1945. 나치당 본부 책임자. 히틀러 개인 비서)은 베르크호프(Berghof: 바바리아 알프스 오베르잘츠베르크 소재 히틀러 별장)인근에 온실을 두고,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생산하여 히틀러가 먹도록 했다. 채식주의자가 된 이후 히틀러는 술을 끊었고, 사교 모임의 경우에만 맥주나 포도주를 조금 마셨다. 그는 어린 시절 담배를 많이 피웠으나(하루 25내지 40개피 권련) 성인이 된 이후에는 금연을 했다. “돈 낭비”라며 단호히 끊은 것이다. 그는 측근들에게 금연을 하면 금시계를 주겠다는 말로 독려하기도 했다. 1937년 이후 히틀러는 가끔 앰피타민(각성제)를 복용했는데, 1942년 후반부터는 이 약에 중독이 되었다. 슈페르는 히틀러의 점진적 이상 행동과 고집불통이나 다름없는 의사결정(예컨대 군대의 후퇴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은 것)을, 이 약 복용 때문으로 보았다. 전쟁 중 히틀러는 주치의인 모렐(Theodor Morell, 1886~1948)로부터 90회 이상의 약 처방을 받았다. 그는 만성적인 위장장애와 여러 가지 질병으로 하루에도 많은 약을 복용했다. 앰피타민 이외에도 수면제, 진정제, 코카인, 항경련제, 위장약 등을 복용하였다. 그는 발키리 암살 음모에서 터진 폭탄으로 고막이 파열되어 고통을 겪었고, 다리에 박힌 200개의 나무 파편 제거 수술을 받아야 했다. 뉴스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왼손 떨림과 질질 끄는 듯한 걸음걸이는 전쟁 전에 시작하였으나, 생애가 끝날 무렵에는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히틀러 사망 직전에 그를 만난 쉥크(Ernst-Günther Schenck, 1904~1998. 의사. SS대원)는, 그를 파킨슨씨병 환자로 진단했다.

-베르크호프 별장-

    히틀러의 자살로 당시의 인류는 “마법”에서 풀려난 것과 같았다. 그의 죽음으로 그에 대한 모든 지지가 붕괴되었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다. 시민들은 나라의 붕괴에 직면하여 너무나 바빴고, 군인들은 싸움터를 벗어나 도주했다. 톨랜드(John W. Toland, 1912~2004. 미국 작가, 역사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지도자를 잃은 나치즘은 바람 빠진 풍선”이었다. 커쇼(Sir Ian Kershaw, 1943~. 영국 역사학자)는 히틀러를 “현대의 정치적 사악함이 구체화된 인물”로 보았다. 인류 역사상 그처럼 물질적, 도덕적으로 완벽한 파괴가 단 한 사람의 이름과 연결된 예가 없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정치적 야심이 세계 대전을 불렀고, 전 유럽에 궁핍과 파괴를 남긴 것이다.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났지만(Stunde Null: 1945. 5월 8일 자정), 독일은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히틀러의 정치는 사람들에게 전례가 없는 고통을 가져다 준 것이다. 루멜(Rudolph J. Rummel, 1932~2014. 미국 정치학자. 예일대 교수)은, 1천9백3십만 명에 달하는 비무장 민간인과 전쟁 포로의 학살(Democidal: 정부의 명령이나 포그롬 등 정부 기관에 의한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학살. 루멜이 만든 용어임)은, 전적으로 나치의 책임이라고 했다. 그밖에도 2천8백7십만 명에 달하는 군인과 시민들이 군사 작전으로 죽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사망한 민간인 수는, 전쟁사에 전례가 없다. 역사가들이나 철학자들, 정치가들은 흔히 나치 체제를 “악마”로 표현한다. 이와 관련 많은 유럽 국가들(유럽 16개국, 캐나다, 이스라엘)은 나치즘을 조장하고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행위(Holocaust denial: 유대인 대학살이 과장되고 조작되었다는 주장)를 처벌하는 법을 가지고 있다.

     마이네크(Friedrich Meinecke, 1862~1954. 베를린 대 교수. 역사학)는 히틀러를 “역사상 괴이하고 믿기 힘든 품성을 갖춘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고 했다. 로퍼(Hugh Trevor-Roper, 1914~2003. 옥스퍼드대 교수. 역사학)는 히틀러를 무서울 정도로 역사를 단순화한 자로, 철저히 조직적이고 대단히 역사적이며 철학적이나, 인류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지극히 거칠고 잔인하며 도량이 없는 정복자라고 했다. 로버츠(John M. Roberts, 1928~2003. 옥스퍼드 대 교수. 역사학)는 히틀러의 패배로, 독일 지배 유럽 역사가 종언을 고하고, 그 대신 미국과 나토 주도의 서방 블록과 소련 지배의 동구권이 대결하는 냉전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했다. 하프너(Sebastian Haffner, 1907~1999. 독일 언론인, 역사학자)는, 만일 히틀러와 유대인 학살이 없었다면 현대 이스라엘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유럽 식민지들의 탈식민지화는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라고 했다. 또 알렉산더 대왕을 제외하면 히틀러는 역사상 다른 어느 인물보다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세계를 바꾸게 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라고 했다. 물론 부정적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IX. 유대인의 교육

    어린 나이에 교육의 시작은 유대 문화에서 오래된 관행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마땅히 따를 길을 어려서 가르쳐라(잠언 22:6)” 라는 솔로몬 왕의 이 말은, 유대 교육의 핵심이다. 사람은 어렸을 때 부친의 슬하에서 가르침을 듣고 계명에 따라 행실을 배워, 성인이 되어도 어려서 배운 행실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유대인 교육은 자손이나 제자에게 “이러이러한 일을 하라” 라고 가르치는 것인 동시에, 선행善行을 습관화 하도록 가르친다. 교육은 유대인 일상 생활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하루에 두 번 드리는 셰마(Shema) 기도문에는 어린이 교육에 관한 토라의 구절이 들어 있다(신명기 6: 6~9). 이렇게 해서 유대인은 12살이 되면 계명을 지킬 책임을 진다. 그러나 탈무드에 따르면 열두 살 이전에 어떤 율법을 교육 받았다면, 열두 살 이전에도 책임을 진다.

1. 유대인 교육

    유대인은 교육을 신성시한다. 유대인 교육은 유대교 탄생과 더불어 중시되어 왔으며 교육 받은 시민을,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으로 생각한다. 랍비 시대부터 교육은 아름다운 삶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보았다. “종교의 사람들”로 알려진 유대인들은, 이처럼 교육을 중시한다. 유대교는 타나크 공부를 시작하는 어린 시절부터 토라 공부를 중시한다. 유대교 성서에는, 아브라함이 후손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것을 가르치는 내용이 있다. 유대인 부모의 자손에 대한 기본적 의무 가운데 하나는, 셰마 이스라엘(Shema Yisrael: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유대 기도문)의 말씀대로, 자녀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밖에도 유대 어린이들은 부모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교육을 받는다(신명기 32:7). 잠언에도 교육에 관한 많은 말씀이 있다(잠언 3:1~2).

    기원전 75년 셰타(Simeon ben Shetah, 140~60 BCE. 바리새인 학자)는 초등 교육을 의무화하였다. 서기 64년 감라(Joshua ben Gamla: 대제사장)는 최초의 공식적인 유대인 교육기관을 세웠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의무 교육기관이었다. 이 교육 기관이 설립되기 이전에는 부모들이 자손을 가르쳤다. 감라는 마을마다 학교를 세우고, 여섯 살이나 일곱 살부터 의무 교육을 실시하였다. 탈무드는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를 유대인의 학습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위해서라며, 랍비의 집에서 공부하는 어린이들에게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이 같은 전통에 따라 유대인들은 학교를 세우고, 자녀들을 위한 가정교사를 채용하면서 18세기말까지 이르렀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대 소년들은 시나고그의 “방”에서 교사의 지도 아래 토라를 공부하였다. 최초의 유대인 주간 학교(Day School)는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과거에는 직업을 얻기 위한 도제로서 충분하였으나, 이제 대학 입학을 위해 수 년 동안에 걸친 고등학교 공부가 필요했던 것이다. 유대인 주간 학교 개척자 히르슈(Shimson R.Hirsch, 1808~1888. 독일의 유대 랍비)는 프랑크푸르트에 고등학교를 세웠고, 이후 이 학교는 수많은 학교의 모델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또 지나치다할 정도로 교육용 건물을 많이 지었고, 전문직으로서 교직을 높여 세우기도 했다. 미국 교사협회 회장을 지낸 생커(Albert Shanker, 1928~1997)를 비롯하여 펠드만(Sandra Feldman, 1939~2005)과 현 회장 와인가알텐(Randi Weingarten, 1957~)등은 모두 유대인들이다.

    정통 유대교 또는 하레디 유대교(Haredi Judaism: 율법과 전통을 고집하는 유대교) 공동체가 아니면 오늘날 유대인 학교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상 성 구별은 하나의 전통적인 규범이었다. 역사적으로 소년들은 예쉬바(Yeshiva: 랍비 문헌 연구에 중점을 둔 유대교 교육기관)에서 주로 토라나 탈무드를 공부했다. 반면 소녀들은 유대 교육과 폭넓은 세속 교육을 함께 받았다.

예쉬바

    미쉬나 시대(10~220 CE)나 탈무드 시대(70~640 CE) 소년들은 유대교 율법정(Beth Din: 랍비의 법정)에 세 줄로 앉아 공부를 했다. 랍비의 율법정이 폐지되면서 예쉬바(Yeshiva: 전통 유대교 학교. 랍비 문헌, 탈무드, 할라카, 토라, 유대 철학을 가르침)가 토라의 주된 공부 장소가 되었다. 탈무드 자체가 주로 바빌로니아 수라(Sura: 유프라테스강 동쪽 소재 고대 성읍)나 품베디타(Pumbedita: 현 이락 팔루자 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시대 지도적인 현자들이 그곳에서 탈무드를 가르쳤다.

    현재 미국과 이스라엘, 특히 정통 유대교 공동체에는 많은 예쉬바가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헤스더(Hesder: 탈무드 공부와 이스라엘 국군 시온주의와의 결합 프로그램)와 현대 정통 예쉬바가 창립되어, 예쉬바에서의 공부가 일상화되었다. 젊은 남자들은 고교 졸업 후 예쉬바에서(여성들은 미드라샤<Midrasha>에서) 토라를 공부하면서, 수년을 보내는 것이다. 하레디 공동체에서는 이 공부를 위해 수십 년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물론 비정통 유대교 예쉬바도 있다. 이러한 예쉬바는 랍비가 되기 위한 준비 학교이긴 하나, 그 교과목은 정통 예쉬바와는 다르다.

    21세기인 현재 미국이나 이스라엘에서는, 정통 하레디 예쉬바가 수학이나 과학 등 세속 학문을 제외한 종교 과목만을 가르친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미국 하레디 예쉬바는 세속 과목을 가르친다. 예를 들어 뉴욕 소재 보다스(Yeshiva Torah Vodaas) 고등학교는 미국 고등학교 과정(Common Core Standards)에 따라 가르친다. 그러나 미국 하시디 예쉬바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세속학문 전과목을 기피하고, 기초적인 과목만 가르쳐 온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유대인 여성 교육

    유대 여성 교육은 20세기 들어와서야 시작되었다. 이전의 유대 여성들은 부모나 친척으로부터 유대교 기초 개념이나 할라카에 관하여 배웠다. 여성들을 좌절 시키는 이 같은 교육 차별은 탈무드도 언급하고 있다. 우르카누스( Eliezer ben Hurcanus, 1세기 무렵 랍비)는, 부친이 딸을 가르치는 것은 우둔함(우둔한 자)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전통적인 종교적 관점으로는 여성의 지적 수준은 남자와는 달라, 토라나 탈무드의 복잡 미묘한 뜻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같은 시각을 바꾸어 놓은 인물은 슈니러(Sara Schenirer, 1883~1935. 교사)였다. 그녀는 폴란드 크라쿠프(Krakow: 폴란드 제2도시)에 최초의 여학교(Bais Yaakov school)를 설립, 야곱 운동(Beth Jacob Movement: 1917년에 시작된 유대 소녀들을 위한 학교와 유대 젊은이들의 연대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야곱 운동의 결과, 유대 여성들은 탈무드를 제외한 토라와 할라카를 배웠다. 이는 그녀들이 토라와 가사 일을 배웠다는 걸 뜻했다. 현재 미국 유대 소녀들은 남녀공학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일이 많아, 유대 학교의 여성 교육 역할은 줄어들고 있다. 그녀들은 시나고그나 일요학교에서 유대 교육을 받는다. 2차 대전 이후 유대 여인들은 연구직이나 교사직으로 많은 진출하고 있다.

유대인 조기 교육

    부모란 처음부터 자녀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 마련이다. 임신 중에도 최고 수준의 소아과 의사, 출산을 위한 최고의 병원을 찾는다. 이처럼 부모가 되어 가는 과정에서 유대인 부모는 출산과 양육을 위해 무엇이 최고인지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왜 유대교는 영아 때부터 아기의 삶에 개입하는가? 왜 좀 더 자라, 아이들과 대화가 가능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가? 출생부터 다섯 살까지 유아기 경험은, 아기의 장래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연구가 있다. 이 시기 어린이 뇌는, 미래의 능력과 관심사를 일생 동안 좌우할 신경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아기 때 외국어 환경에 노출된 어린이는, 그 후 그러한 환경에서 벗어나도 그 언어에 친화적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유아기 시절 유대교 경험은, 당연히 성장 후에도 유대교에 대한 자세와 관심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브랜다이스 대학(Brandeis University: 보스톤 소재) “현대 유대 연구소” 소장 로젠(Mark I. Rosen) 박사는, 가정이나 탁아소의 유대교 환경은 아이들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성장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대인 유아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먼저 유대공동체에는 태아 교육이나 출산을 위한 프로그램, 신생아 용품이나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신생아 선물 프로그램, 탁아소 프로그램, 육아 관련 모자 프로그램, 부모의 자질과 성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유대교 지식을 가르치는 부모 교실 같은 프로그램이 있다.

    신생아에 대한 선물로는 유대교를 주제로 한 컵(Kiddush cup: 안식일 전야 제례용 포도주 잔), 메주자(Mezuzah: 토라의 구절을 적은 양피지)를 담은 조그만 상자 또는 아동용 그림책이나 음악을 선물한다. 매월 단위로 5세 이하의 어린이에게 책이나 음악을 보내주는 도서관 프로그램(PJ Library program: 마사추세츠 그린스펀 재단 프로그램)도 있다. 아동들의 취침 시간, 안전, 기도문(Shema)등 아동들의 일상생활에 관한 안내도서 프로그램도 있다. 개혁 유대교는 아동과 함께 부모가 사용할 수 있는 아침, 저녁 전례에 관한 훌륭한 책자를 제공하고 있다. 전통 유대 음식을 만들어 냄새를 맡고 맛을 보게 하여, 감각을 통하여 어린 자녀들이 뜻 깊은 유대 문화를 기억 속에 남기도록 한다. 안식일이나 하누카(Hanukkah: 2세기 마카비 반란 초 예루살렘 탈환과 제2성전 재봉헌 기념일)의 촛불을 보게 하고, 쇼파르(Shofar) 연주나 유대 음악을 듣도록 한다.

-키두쉬 컵-


    두 살이 되면 유치원에 입학함으로써, 정식 유대인 교육이 시작된다. 유치원 입학으로 일생 동안 받을 유대 교육의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안식일 축제, 기도시간, 유대 휴일 준수, 성경 이야기, 음악, 음식 등 유대교가 어린이들에게 제공하는 완벽한 수준의 교육 환경을 제공 받는 것이다. 이제 어린이는 자신의 능력과 필요에 알맞게 설계된 환경 속에서, 자신의 모든 감각과 지각으로 유대교를 경험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유대인 공동체는 이러한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시나고그 또한 같다. 아이의 탄생은 부모의 인생을 바꾸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다. 자녀 양육은 보람 있고 때로는 벅차고 도전적이며, 결코 지루하지 않은 삶의 여정인 것이다.

족장의 윤리

    족장의 윤리(Pirkei Avot)는 윤리적, 도덕적 원칙에 관한 랍비들의 금언집이다. 족장의 윤리가 윤리적 원칙을 “기본 원칙”으로 하는 것은 토라에 그러한 준칙이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힐렐(Hillel, ?~ c. 10 CE. 탈무드 현자)은 이교도로부터 토라 전체에 대한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대답하기를 “네가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토라 전부이며, 나머지는 배워 알 수 있느니라” 라고 대답하였다. 족장의 윤리가 가르치는 율법은 그 주제가 다양하다.

    먼저 타인에게 친절하라고 가르친다. 이 세상은 셋의 토대 위에 서 있으니, 그 셋은 바로 토라, 아보다(Avodah: 아보다는 히브리어로 일, 하느님께 봉사, 기도, 희생물 등을 뜻함), 그리고 타인에 대한 친절이라고 했다(아보트 1:2). 집 대문을 열고, 가난한 사람을 가족처럼 대할 것이며(아보트 1:5), 사람을 대할 때는 인자한 마음으로 대하라고 했다. 랍비 요하난(Yohanan ben Zakkai, 1세기경 현자)이 제자들에게, 무엇으로 자신을 위해 옳은 길을 찾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제자들은 “좋은 시야”, “좋은 친구”, “좋은 이웃”으로 대답하였고, 엘레아자르는 “따듯한 마음”이라고 했다. 요하난은 제자 엘레아자르의 대답을 택하였고, 그 이유는 그의 대답이 다른 모든 제자들의 대답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아보트 2:13).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라. 나에게 귀중한 것은 타인에게도 귀중한 것이며(아보트 2:1), 친구의 명예를 내 명예인 듯 소중히 해야 할 것이다(아보트 2:15). 악한 눈, 악한 기질, 하느님의 피조물에 대하여 증오를 하는 사람은,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을 당할 것이다(아보트 2:16). 친구의 돈을 내 돈 같이 중히 여기라(아보트 2:17).

    위대함을 위해 노력하라.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줄 것인가? 나를 위한 존재, 나란 무엇인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인가?(아보트 1:14). 힐렐의 이 말은, 그 간결한 표현으로 유명하다. 사람이 선택해야 할 올바른 길은 무엇인가? 합당한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아보트 2:5). 좋은 이름을 얻은 사람은, 참으로 좋은 자신을 얻은 것이다(아보트 2:8). 자신을 비하하지 말라(2:18).

    하느님을 공경하라. 하느님의 뜻을 나의 뜻 같이 행하라. 그리하면 하느님이 나의 뜻을 자신 뜻 같이 행하실 것이다(아보트 2:4).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구하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토라로 인도하라(아보트 1:12). 자선을 많이 할수록, 보다 많은 평화가 있을 것이다(아보트 2:8).

    일을 사랑하고 관직을 탐하지 말 것이며, 권력과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아보트 1:10). 자기 이름을 창대케 하려는 자는, 그 이름을 망하게 할 것이며(아보트 1:13), 공동체를 위하여 하는 일은 하늘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하느님의 커다란 보상이 따를 것이다(아보트 2:2). 통치자의 권력을 조심할 것이니, 그들은 오직 그들의 목적을 위해 친구가 되어 줄 뿐이다. 그들은 그들이 필요할 때 친구로 나타나지만,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옆에 없다(아보트 2:3).

    먹을 고기가 많아질수록 벌레도 많아지는 법, 재산이 많을수록 걱정도 많아진다. 하녀가 많을수록 내 잔소리가 많아지고, 하인이 많을수록 도둑이 많아진다(아보트 2:8).

    토라 공부를 많이 한다고 자랑 말 것이니, 토라는 나를 지으시기 위해 있기 때문이다(아보트 2:8). 내 모든 행동은 하늘을 위한 것이 되도록 하라(아보트 2:12).

    셰마(Shema)를 낭송할 때와 기도를 드릴 때 주의하라. 암기하듯이 기도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 앞에 긍휼과 은혜를 구하라(아보트 2:18).

    토라 공부는 직업과 결합하여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을 하지 않고 토라 공부만 하는 것은 소용이 없고, 오히려 죄로 이어질 것이다(아보트 2:2). 사업 활동을 줄여 토라에 몰두하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아보트 4:10). 토라 공부가 없다면 세상일에 관여할 일도 없고, 세상일이 없으면 토라 공부도 없다(아보트 3:21).

    면류관(학문)을 악용하는 자에게는 죽음이 따를 것이다(아보트 1:13).

    현자들 사이에서 자란 나는 침묵보다 더 나은 것을 찾지 못했다. 지나치게 많은 말은 죄의 원인이 된다(아보트 1:17). 말은 적게 하되, 일은 많이 하라(아보트 1:15). (상대방이)이해할 수 없는 말은 삼가되, 이해할 수 있도록 생각하여 다시 말하라(아보트 2:5).

    사소한 계명이라도 큰 계명 준수하듯 하라. 계명마다 내려지는 보상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아보트 2:1).

    모든 사람을 좋게 평하라(아보트 1:6). 그의 처지를 모르고, 네 동료를 판단하지 말라(아보트 2:4).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 변호인처럼 행동하지 말라. 소송 당사자가 당신 앞에 설 때 (둘 다) 유죄로 간주하라. 그들이 당신의 판단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의 공으로 돌려야 한다. 증인을 심문하고 말을 삼가, 그들이 당신으로부터 거짓말하는 것을 배우지 않게 하라(아보트 1:9). 이 세상이 존재하는 세 가지 토대는 정의, 진실, 평화임을 잊지 말라(아보트 1:18).

    행동할 때를 놓치지 말라. 시간이 있을 때 하겠다, 라는 말을 하지 말라. 그 시간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무지한 사람은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천박한 사람은 경건해질 수 없다. 소심한 사람은 배울 수 없고, 참을성 없는 사람은 가르칠 수 없다(아보트 2:6). 성급하게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아보트 2:15).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 물 위에 뜬 해골을 본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가 남을 죽였으니, 남이 그대를 죽인 것이다. 그대를 죽인 그들도, 결국은 남이 그들을 죽일 것이다(아보트 2:7).

2. 영재 교육

  이스라엘은 재능 있는 인재 발굴,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학교 안팎에 있다. 재능 있는 학생들을 위한 기숙학교, 재능은 있으나 불리한 환경에 처해 있는 인재 발굴, 공동체로부터의 전문가 및 물질적 자원 동원, 공동체 존립을 위한 전략으로서 재능 있는 아동을 위한 프로그램, 재능 있는 러시아 이민자를 위한 학교, 컴퓨터 프로그래밍 학교 등이 있다.

IASA 프로그램

    이스라엘 예술 과학 아카데미(IASA)는 예술, 과학, 수학에 재능 있는 학생(10~12학년)들을 위한 3년제 기숙학교이다. 이스라엘 전국으로부터 재능 있는 학생들을 선발하여,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한다. 이스라엘이 생존하려면 재능 있는 청소년들이 그 능력을 계발, 발휘하여 이스라엘 사회에 봉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 이 학교 설립 동기이다.

    이스라엘은 5년간의 계획 끝에 1990년 IASA를 개교하였다. 이미 영재 교육 프로그램이 있었음으로 영재를 발굴, 양성함에 있어 기숙학교가 달성할 수 있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마음속에 두고 시작하였다. 1994년 6월 이 학교는 이스라엘 학생 70명, 러시아 이민자 28명, 아랍-이스라엘계 학생 14명, 기타 키부츠(Kibbutz)와 모샤브(Moshav: 키부츠와 유사한 농업 공동체)에서 선발된 학생 등 총 182명의 재학생이 있었다. 이처럼 문화적 배경이 다른 학생들이 수학, 예술, 과학에서 서로 어울려 24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건,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배움의 기회라고 할 수 있다. IASA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가. 분야별 일류 교육. 학생들로 하여금 아이디어를 내고, 탁월한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지도.

나. 과학도와 예술학도 간 교류를 통한 문화적 시야 확대.

다. 공동체 봉사를 통한 책임감 양성과 이에 대한 공동체의 학교 지원.

라. 가치관 함양. 이스라엘과 유대 민족에 대한 헌신 강조.

    교사진으로는 전임 교사, 시간제 교사, 생활지도 교사가 있다. 전임 교사는 필수 과목을 지도하며, 시간제 교사는 각 분야 전문가들인 대학교수, 박사 과정의 학생, 관련 기업인, 그 분야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숙사는 학생들이 학문적, 창조적, 정서적, 사회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의 분위기로 짜여 그 속에서 새로운 자유, 새로운 제약, 새로운 질서와 사회관계를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토요일 밤이면 학급별, 학생회별 활동이 있고 음악회나 발표회도 한다. 외부 강사도 초빙한다. 예루살렘의 풍요로운 문화생활 즉 연극, 음악회, 영화, 전시회, 강연회 등을 즐기도록 학생들을 독려한다. 학생들은 서로 존경하고, 학교 재산을 아끼고 학교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행동 준칙도 있다. 영리하고 재능 있는 학생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일 수 있으며, 치열한 경쟁심으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는 생활지도 교사가 담당, 지도한다.

     “이스라엘 알기” 프로그램을 통해 성서적 또는 고고학적 유적지, 자연보호 구역,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한 역사 유적지, 예루살렘 소재 정부기관이나 그 주변 관심 지역을 방문한다. 과학도와 예술학도간 교차 교육을 통해 상호간 이해를 높이고, 시야를 넓히도록 한다. 예술 학도에게 주입식 과학 교육이 아니며, 과학 학도에게 저수준 예술 감상 교육이 아님은 물론이다. 과학과 예술 간 기본적이고 총체적인 관계를 경험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기회인 것이다.

디스커버리 프로그램

    재능도 있고 지도자로서 잠재력이 있으나 이를 개발할 수 있는 문화적, 교육적 기회가 없는 열악한 공동체로부터 아동들을 발굴, 양성하는 프로그램이다. 경제적으로 불리한 가정의 평균 이상의 재능 있는 아동(7학년부터 9학년까지)이 그 대상이다.

    1988년 IASA에 의해 3년제 기숙학교로 출발하였다. 처음 9개 공동체에서 시작하여 1993~1994년 기간에 유대인, 아랍-기독교도, 드루즈와 베두인 등 모두 26개 공동체로 확대 실시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타고난 재능이 있으나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과 시설을 결하고 있는 공동체에서, 그러한 아동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에 토대하고 있다. 이처럼 계발되지 못하고 있는 재능이라는 문제에 대한 답으로 이 프로그램이 시작된 것이다. 대상 학생은 시험, 학교 성적, 기타 정해진 기준에 따라 교사가 7학년 학생에서 선발한다. 공동체도 물론 교사나 외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그러한 학생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선발된 학생은 9학년까지 다니면서, IASA 입학을 위해 다른 학생과 경쟁을 해야 한다. 방과 후에는 12~16명으로 그룹을 지어 토론이나 연구실에서 조사, 실험을 한다. 학생들은 다음 세 가지 형태의 활동에 참가한다.

가. 수학적 사고력 배양과 물리, 화학, 생물, 기술 분야에 관한 주 2회에 걸친 학습.

나. 전 학년 동안 5~7회에 걸친 예술, 음악 특별 활동.

다. 박물관, 미술 전시회, 음악회 등 참가. 이러한 활동에는 다른 공동체 학생들을 참여시켜, 연대감을 넓힌다.

    이러한 활동은 불우한 환경의 어린이들에겐, 그들의 가정이나 공동체가 제공 불가능한 기회이다. 예술가나 작가, 음악가, 발명가 워크샵, 연극, 영화, 이스라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동체 간 모임 등 활동도 있다. 이러한 활동들의 근저에는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닌, 대상에 대한 접근과 사고 능력의 배양이라는 전략이 깔려 있다. 모든 활동은 참가자들에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을 배우도록 가르치고 있다. 정보 교환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창조적이고 남이 생각지 못하는 능력 배양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학생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노력을 다해 지식을 늘리고,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수업을 지도하는 교사는 전문가들로부터 계속 지시와 감독을 받는다.

어린이 창조성 증진 프로그램

    정규 학교 수업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으로, 어린이가 지식에 눈을 뜨고 즐기게끔 하는 프로그램이다. 매학기 약 2천6백 명의 어린이들이 방과 후에 180개 반으로 편성되어 과학,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분야 학습에 참여한다. 유대인 공동체나 아랍인 공동체의 5~15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대상 학생은 교사나 부모가 추천한다.

    오전에는 같은 또래, 오후에는 같은 관심사를 가진 동료들과 함께 지낸다. 각자 재능에 따른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이 잠재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다. 어린이들의 사고력, 창조력을 자극하고, 습득한 지식을 응용케 함으로써 사회 문제에 참여 시키면, 결국 그들은 자신의 가치체계를 형성하게 된다고 본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매년 35~59명 내외의 뛰어난 재능을 가진 어린이들을 발굴한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없다면 그들의 잠재 능력은 나타날 수 없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  “어린이들이 건설적인 가치를 향한 격려나 지도를 받지 못한다면, 그 재능은 파괴적이나 범죄적인 목적을 향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신념이다. 교사들은 텔아비브 대학 또는 예술 아카데미 전임 강사이거나 부교수들이다. 자문 위원회가 정한 원칙을 따르며 교수법에 관한 정기적인 토론회를 가진다. 학생들의 생활에 심리학자가 간여, 지도한다.

    여름 방학은 “창조 활동 기간”으로, 학생들은 학교 지원을 받아 예술이나 과학 분야에서 특별 활동을 한다. 연구소나 과학자들을 만나 그들의 활동을 알아본다. 이스라엘-아랍 관계, 환경오염 등 이스라엘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관한 토론회를 갖기도 한다. 방학 동안 교사들은 영재성과 창의성의 본질, 교실에서 이러한 특성을 식별하고 육성하는 방법에 관한 교육을 받는다.

    매년 6회 정도 부모를 위한 연수회를 열어, 재능 있는 자녀를 어떻게 이해하고 도울 것인가에 관하여 부모들에게 도움을 준다. 또한 교육 심리학자와 카운슬러들은 창조성과 천재성에 관한 강의와 세미나도 개최한다. 영재 아동과 그 부모, 교사들을 위한 카운슬링도 준비되어 있다.

예루살렘 특수학교(AMUTA)

    이스라엘로 돌아온 영재 아동(구소련 등으로부터의 이민자 아동)들을 이스라엘 교육 환경에 적응토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구소련으로부터 온 이민자로서 수학과 과학에 뛰어난 고등학생이 주 대상이나, 4살부터 18살까지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교과목은 구체적인 지식과 기술 습득보다는 “창조력 배양”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에 토대하여 짜여져 있다. 교육 방법은 비고츠스키(Lev Semyonovich Vygotsky, 1896~1934. 아동 심리학자), 포이엘슈타인(Reuven Feuerstein, 1921~2014. 이스라엘 인지 심리학자) 같은 학자들의 현대적인 사상에 토대하고 있다. 수학, 물리학 및 생물학 공부를 위한 특별한 수업이 마련되어 있다. 학생들에게는 복잡한 과제를 주어, 혼자의 힘으로 해결토록 한다. 어린 학생들은 실험에 가까운 활동을, 보다 나이가 든 학생에게는 대학 연구자들과 함께 실제 연구에 참여토록 한다. 학생은 각자 의무적인 숙제 이외에도 학기마다 100~150개의 과제를 해결해야 하고, 3~5번에 걸친 시험을 치러야 한다. 이 학교 수학, 물리학, 기술 과정은 이스라엘 학교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러시아로부터 온 아동들이 이스라엘 사회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러시아어를 이스라엘 학교생활에 결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존감과 자기 확신을 가지게 하고, 동기 부여를 하는데 이 프로그램의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은 언어 문제 극복과 이스라엘 사회에 적응을 위한 고등학교의 통상적인 “러시아 반”과는 다르다. 이 과정을 거친 러시아 출신 영재 아동들은 이스라엘 태생의 영재(Sabrim)들과 함께 공동 학습, 연구실 활동, 특수 프로젝트 등에 참여한다. 이렇게 하여 새로 온 이민자 아동들이 이스라엘 사회에 적응하고, 향후 이방인으로서의 위험을 감소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구소련에서 수학, 자연과학, 기술 분야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학교에서 교사로서 일을 할 수가 있다. 예루살렘 특수학교(Jerusalem School for Physics and Mathematics)는 이들의 경험에 토대하여 된 설립된 학교이다. 이스라엘 역사는 히브리어 교사가, 기술 및 자연 과학은 러시아어 교사가 가르친다. 이렇게 해서 히브리어에 익숙하지 못한 학생들이 기술을 이해토록 한다.

수학 영재 프로그램

    수학에 뛰어난 지방 또는 개발 지역 고교생을 선발하여, 대학에서 과학이나 수학 공부를 하도록 유도하는 프로그램(A Fostering Program of “Doctoral Students for Math)이다. 7학년 말 수학적 사고력 및 기본 실력 테스트를 거쳐,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을 선발한다. 선발된 학생은 8학년부터 10학년까지 바르 일란 대학(Bar-Ilan University: 이스라엘 제2 연구 대학)이 주도하는 수업을 받는다.

    커리큘럼은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대비한 수학 능력 제고에 초점을 두고 있다. 수업 프로그램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 10학년 말 입학시험을 거쳐 바르 일란 대학에서 계속 공부.

나. 바르 일란 대학의 선형 대수와 무한소 수학(Infinitismal Arithmetic) 과정을 거쳐 획득한     성적으로 바르 일란 대학에 입학, 수학 공부 계속.

다. 11학년 또는 12학년에 시험을 거쳐 바르 일란 대학에 입학, 수학 공부 계속

라. 11학년에 본교로 돌아가 수학 입학시험을 치른 후, 바르 일란 대학에서 12학년 수업.

    “무한소 수학”은 1년 과정으로, 매주 4시간 강의에 2시간 실습을 한다. 11학년과 12학년 학생은 “집단 이론 및 분석 입문”에 관한 1년 과정의 집중적인 수업에 매일 4시간씩, 주 5일간 참가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적어도 2년이 소요되는 요건을 충족하면, 1년 만에 수학 학사 학위를 이수하는 것이다.


X. 유대 지성

    1901년 제1회 노벨상 이후 2022년까지 9백 명 가까운 수상자 가운데 유대인 수상자는 약 20%에 이른다. 수상자를 전혀 내지 못하고 있는 나라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분야별로 보면 문학상 15명, 화학상 35명, 의학상 60명, 평화상 9명, 물리학상 47명, 경제학상 34명 등 노벨상 6개 전 부문에 걸쳐 있다. 노벨상은 유대인에게 편중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스라엘 공과대학(Technion: Israel Institute of Technology)은 세계8위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학교로, 하버드나 영국의 어느 대학보다도 우위에 있다.

    최초의 유대인 수상자는 1905년 화학상을 받은 바에예르(Adolf von Baeyer, 1835~1917)이다. 비젤(Elie Wiesel, 1928~2016. 1986 노벨 평화상 수상)과 케르테스(Imre Kertész, 1929~2016. 2002 노벨 문학상 수상)는 홀로코스트 기간 중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때 잉글러트(François Englert, 1932~. 2013 노벨 물리학상 수상)는 고아원에 숨어 살아남았다. 콘(Walter Kohn, 1923~2016. 1998 노벨 화학상 수상), 슈테른(Otto Stern, 1888~1969. 1943 노벨 물리학상 수상),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크레브스(Hans Krebs, 1900~1981. 1953 노벨 의학상 수상), 카르프루스(Martin Karplus, 1930~. 2013 노벨 화학상 수상)같은 사람들은 나치의 학대를 피해 독일을 탈출한 이들이다. 그밖에도 몬탈치니(Rita Levi-Montalcini, 1909~2012. 1986 노벨 의학상 수상), 하옵트만(Herbert Hauptman, 1917~2011. 1985 노벨 화학상 수상), 푸르치고트(Robert Furchgott, 1916~2009. 1998 노벨 의학상 수상), 코른베르크(Arthur Kornberg, 1918~2007. 1959 노벨 의학상 수상), 카를(Jerome Karle, 1918~2013. 1985 노벨 화학상 수상)등은 가혹한 반유대주의를 경험한 학자들이었다. 아슈킨(Arthur Ashkin, 1922~2020. 2018 노벨 물리학상 수상)은 수상 당시 96세로, 최고령 노벨상 수상자이다. 노벨상 이외에도 수학과 컴퓨터 과학 분야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는 튜링(Turing: 1947년 창립된 국제 컴퓨터 학회가 수여하는 상)상 수상자 약 20%, 필드 상(Fields Medal: 국제 수학회가 40세 이하의 수학자에게 수여하는 상)수상자 27 %가 유대인이다. 이 같은 유대인의 천재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유대인의 유대교에 대한 학문적 열정은 세속 학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유대인들은 고등 교육을 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경우가 많았고, 허락된 경우에도 그 수에 제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유대인 천재가 많았던 이유는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 문화는 지식 추구와 남다른 탁월함을 장려하고, 지적 성취를 강조한다. 이는 유대인의 오랜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들이 직면했던 박해에 대한 대응의 결과이기도 하다. 또한 지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에서, 다양한 학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1천만 이상의 디아스포라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1. 기술과 과학

    유대인의 초기 과학 활동은 물질세계에 관해 기술하고 있는 히브리 성서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성경상 우주에 관한 여러 언급을 종합해보면, 물리적인 우주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있다. 창세기의 천지 창조를 고전 천문학에 비교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경에는 또 위생에 관한 준칙도 있다. 예를 들면 문둥병 환자의 청결에 관한 준칙(레위기 14:1~32)이다. 치료 후 완치된 문둥병 환자의 청결에 관해 "살아 있는 정한 새 두 마리와 송백나무 진홍 털실과 우슬초 한 포기를 가져오도록 한다(레위기 14:3)" 라는 상세한 관리 방법도 있다.

    토라는 종류가 다른 동물끼리의 교미를 금지하고 있다(레위기 19:19). 또 포도원에 다른 씨 파종도 금지하고 있는데(신명기 22:9), 이는 오늘날 유기 농법과 관련을 맺고 있다. 모세의 율법에는 나무(신명기 20:19~20)나 조류(신명기 22:6~7)같은 천연 자원의 보존과 관련한 율법도 있다.

    중세기 유대인 학자들의 일차적인 학문은 천문학이었다. 저명한 유대인 천문학자 싸쿠토(Abraham Zacuto, 1452~1515)는 1478년 발간한 책(Ha-hibbur ha-gadol)에서 태양, 달, 5개의 혹성의 위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와 포르투갈 항해왕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1524)가 항해에 참고한 책이다. 달 분화구 싸구트(Zagut)는 싸쿠토의 이름을 따라 명명한 것이다.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인 히야(Abraham bar Hiyya, 1070~1136)는 2차방정식(x2 – ax + b = 0)을 수록한 유럽 최초의 책을 지었고, 이 책은 피보나치(Leonardo Fibonacci, 1170~1250. 이태리 수학자)의 연구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히야는 또 표면적 S, 둘레 L, 반지름 R인 원의 방정식(S=SxR/2)을 증명하기도 했다.

    르레상스 시기 포르투갈 유대인 의사였던 오르타(Garcia de Orta, 1501~1568)는 열대병 의약품 선구자였다. 그는 1563년 발간한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많은 물질들을 다루었다. 그는 아시아 열대 질병 특히 콜레라를 다룬 최초의 유럽인으로, 콜레라 사망자 해부라는 인도 최초의 검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라테스(Bonet de Lattes, 1450~1514. 유대인 의사 겸 점성가)는 천구의天球儀를 발명, 태양과 별의 위치, 밤과 낮의 길이를 정확히 측정하였다. 그밖에도 아브라함(Abraham ibn Ezra, 1089~1164), 다비드(David Gans, 1541~1613), 유다(Judah ibn Verga, 15세기 스페인 세비야 출신의 수학자겸 천문학자), 마샬라(Mashallah ibn Athari, 740~815)같은 유대인 천문학자들이 있었다. 특히 달 분화구 아베네즈라(Abenezra)와 메살라(Messala)는 각각 아브라함과 마샬라의 이름으로 명명한 것이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1921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은 독일 태생의 유대인 물리학자이다. 그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혁명적인 상대성 이론은 2백년 이상의 역사를 갖는 뉴톤 역학을 대신하여, 20세기 이론 물리학과 천문학을 바꾸어 놓기도 했다. 상대성이론으로 핵시대의 문이 열렸고 중성자 별, 블랙홀, 중력파 같은 천문학적 현상을 예언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는 질량-에너지 등가 방정식 E=mc2를 세웠고, 광전자 효과를 설명하였으며 빅뱅 이론을 비롯하여 양자 역학, 핵에너지 등 물리학 여러 분야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3세의 아인슈타인-

    제2차 세계 대전 중 최초의 원자탄을 개발, 생산한 맨하탄 프로젝트에는 많은 유대인 과학자들이 참여하였다. 원자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론물리학자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 1904~1967. 버클리 대 물리학 교수)는 1942년 로스 알라모스 국립 연구소(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 맨하탄 프로젝트를 위해 설립, UC계열 대학이 운영한 비밀 연구소)책임자였다. 핵연쇄반응을 생각해낸 스질라드(Leo Szilard, 1898~1964), 수소폭탄의 아버지 텔러(Edward Teller, 1908~2003), 수소폭탄을 디자인한 울람(Stanislaw Ulam, 1909~1984), 원자핵과 기본 입자 이론 확립에 공헌을 한 위그너(Eugnen Wigner, 1902~1995. 196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로스 알라모스 핵이론국 책임자였던 핵융합 이론가 베테(Hans Bethe, 1906~2005. 1967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론물리학자 페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 1965 노벨 물리학상 수상), 원자 구조를 밝힌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 1922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이론물리학자 바이스코프(Victor Weisskopf, 1908~2002)와 로트블랏(Joseph Rotblat, 1908~2005. 1995 노벨 평화상 수상)등도 모두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가한 유대 과학자들이다.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프리드만(Alexander Friedmann, 1888~1925)은, 그가 수립한 프리드만 방정식에 따라 우주가 팽창한다고 주장한 과학자이다. 유대계 물리학자 겸 천문학자인 펜지아스(Arno A. Penzias, 1933~. 1978 노벨 물리학상 수상)는 윌슨(Robert W. Wilson, 1936~. 1978 노벨 물리학상 수상)과 함께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복사를 발견하여, 빅뱅 이론 확립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양자 역학에서도 유대 과학자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닐스 보어는 전술한 대로 원자 구조를 밝혔고, 슈뢰딩어 방정식의 확률분포함수에 관한 표준해석을 정립한 보른(Max Born, 1882~1970. 1954 노벨 물리학상 수상), 양자역학의 선구자 파울리(Wolfgang Pauli, 1900~1958. 1945 노벨 물리학상 수상), 양자색역학의 페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 원자와 분자 간의 힘에 관한 론돈 분산력 이론을 확립한 론돈(Fritz London, 1900~1954), 양자전기역학의 하이틀러(Walter Heitler, 1904~1981)와 슈빙거(Julian Schwinger, 1918~1994. 1965 노벨 물리학상 수상), 양자정보과학의 개척자 페레스(Ahser Peres, 1934~2005), 양자 장이론의 봄(David Bonm, 1917~1992)등은 양자 역학 이론의 개척자들이거나 그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유대 과학자들이다.

    정신분석학의 아버지로 우리에게 알려진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환자와 의사의 대화를 통해 정신 병리를 다루는 정신분석을 창안하였고, 그 속에서 자유연상을 이용한 치료법을 개발하였으며, 정신 분석 과정의 중심 역할을 하는 감정 전이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는 꿈의 분석을 통해 육체적, 심리적 질병의 진행 과정과 억압 메카니즘에 관한 임상적 해석은 물론, 무의식에 관한 정교한 이론 수립에 필요한 여러 가지 모델을 알아내었다. 또한 유아기 성과 관련한 외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을 정립하였다.

-프로이트-

    노이만(John von Neumann, 1903~1957)은 수학, 기능 분석, 에르고딕 이론(Ergodic theory: 결정론적 역학 시스템의 통계적 특성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 기하학, 위상 수학, 수치해석학, 양자 역학, 유체역학, 게임이론 등 여러 분야에 공헌한 수학자겸 물리학자이다. 컴퓨터 개발과정에서 그는 폰 노이만이라는 이름의 컴퓨터 얼개를 소개한 바 있고, 선형 프로그램, 자기 복제 기계(주어진 환경에서 발견되는 원료를 사용하여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일종의 자율 로봇), 확률 계산(Stochastic computing: 임의의 비트 흐름으로 연속적인 값을 나타내는 기술의 총칭), 통계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폰 노이만-

    노에더(Emmy Noether, 1882~1935)는 이론물리학과 추상대수학(Abstract algebra)분야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수학자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그녀를 수학사에 가장 중요한 유대 여성 학자로 본다. 그녀는 환環이론, 장場이론, 대수학 이론에 혁명적인 기여를 하였다. 물리학에서도 대칭과 보존율 간의 근본적인 관계에 관한 그녀의 이론이 있다.

    이들 이외에도 과학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유대 과학자들과 발명가들이 있다. 헤르츠(Heinrich R. Hertz, 1857~894)는 맥스웰의 전자기 방정식이 예언한 전자기파의 존재를 처음으로 증명한 유대계 독일 물리학자이다. 초당 주파수 단위 헤르츠는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와인버그(Steven Weinberg, 1933~2021)는 약력과 원자 입자간 전자기적 상호 작용을 통합한 이론으로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유대계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이다.

    세이건(Carl E. Sagan, 1934~1996)은 외계 생명체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미국의 천문학자이다. 그는 방사선을 이용하여, 기초화학 물질로부터 아미노산 생성이 가능함을 실험을 통하여 증명하였다. 그는 또 1977년 발사된 보이저 우주선에 실린, 외계 지적 생명체에게 보낸 황금 레코드판의 메시지를 설계하기도 했다. 그는 금성표면의 높은 온도가 온실효과 때문이라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우스도르프(Felix Hausdorff, 1868~1942)는 유대계 독일 수학자로 현대 위상수학(Topology)의 토대를 놓은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또 집합론, 함수 해석론, 기술적 집합론, 측도이론(Measure Theory: 집합의 크기를 측정하기 위한 이론)에도 크게 기여를 하였다.

    위튼(Edward Witten, 1951~)은 수학자겸 이론 물리학자로 프린스턴대 석좌교수이다. 그는 끈 이론(String Theory), 양자 중력, 초대칭 양자장이론 분야의 학자이다. 그의 연구는 순수 수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1990년 국제 수학협회로부터 필드 상을 수상한 최초의 물리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M이론(M-theory: 모든 초끈 이론을 통합한 물리학 이론)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긴즈부르그(Vitaly Lazarevich Ginzburg, 1916~2009)는 초전도체와 초유체超流體에 관한 이론으로 20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유대계 러시아 물리학자이다. 그는 구소련 핵무기 프로그램을 이끈 과학자이다.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이론 물리학 책임자이기도 했다. 생애 말년에 무신론자가 되어, 러시아 사회에 끼친 사제들의 영향력을 비판하였다.

    란다우(Lev D. Landau, 1908~1968)는 구소련 유대계 물리학자로 이론 물리학 분야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는 노이만(John von Neumann, 1903~1957)과 함께 양자역학의 밀도 행렬(Density Matrix: 특정 물리 시스템의 양자 상태를 알리는 행렬)을 발견하였고, 그밖에도 반자성反磁性 양자역학 이론, 초유체 이론, 긴즈부르그-란다우 초전도체 이론, 페르미 액체(Fermi liquids)이론 등 물리학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절대온도(−270.98 °C)이하에서 액체 헬리움 II의 특성에 관한 연구로, 196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아하로노프(Yakir Aharonov, 1932~)는 이스라엘 양자 물리학 학자이다. 2008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 채프만 대학 이론 물리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저명한 과학자로,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 석좌 교수이며 이스라엘 선진기술 연구소(IYAR) 소장이기도 하다.

    포돌스키(Boris Y. Podolsky, 1896~1966)는 EPR 역설(EPR paradox: 양자 역학이 설명하는 물질세계는 불완전하다는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의 주장)과 교란 파동 함수에 관하여 아인슈타인, 로젠(Nathan Rosen, 1909~1995) 등과 함께 연구한 것으로 유명한 학자이다. 나단 로젠은 수소폭탄을 연구한 유대계 미국 물리학자로 아인슈타인, 포돌스키와 함께 일한 학자이다. 후일 웜 홀(wormhole)로 명명된 아인슈타인-로젠 브릿지 (Einstein–Rosen bridge: 시공간 상 독립적인 지점을 연결하는 가상의 구조물)이론은, 로젠의 이론이기도 하다.

    카르멜리(Moshe Carmeli, 1933~2007)는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이론 물리학을 가르쳤다. 그는 우주론, 천체물리학, 일반 및 특수 상대성 이론, 게이지 이론(Gauge Theory: 스칼라, 벡터로 표현되는 장場이론의 하나), 수리물리학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그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우주론적으로 확대 발전 시켜, 4차원의 시공간으로부터 5차원의 공간-속도 모형으로 확장 시켰다.

    립슈이츠(Rudolf Lipschitz, 1832~1903)는 유대계 독일 수학자로 해석학, 미분 기하학, 대합대수, 고전 역학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코헨(Paul J. Cohen, 1934~2007)은 유대계 미국 수학자로 연속체 가설(Continuum hypothesis: 실수 집합의 모든 부분 집합은 가산 집합이거나 아니면 실수 집합과 크기가 같다는 가설)을 증명하였다. 그는 또 선택 공리(Axiom of choice: 공집합이 아닌 집합에서 한 원소를 고를 수 있으며, 이를 무한번 반복할 수 있다는 공리)는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Zermelo-Fraenkel set theory)과는 독립적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는 필드 상을 수상하였다.

    슈바르츠(Laurent M. Schwartz, 1915~2002)는 유대계 프랑스 수학자로, 함수해석학 분포 이론(Theory of distributions)의 개척자이다. 이 이론으로 디랙 델타 함수가 무엇인지 그 정의가 명확해지기도 했다. 디랙 델타 함수는 물리학자 폴 디랙(Paul A. Dirac, 1902~1984. 영국 이론 물리학자)이 양자역학에서 자주 사용하여 유명해진 개념이다. 이 공로로 슈바르츠는 1950년 필드 상을 수상하였다.

    마르굴리스(Grigory A. Margulis, 1946~)는 유리수로 실수의 근사 값을, 에르고딕 이론으로부터 구하는 방법을 고안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또 리 그릅(Lie groups)속 격자 작업으로도 유명하다. 리 그릅은 노르웨이 수학자 리(Marius Sophus Lie, 1842~1899)가 고안한, 미분 기하학 및 위상수학 등에서 국소적으로 유클리드 공간을 닮은 공간을 말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그릅은 공집합과 한 집합의 두 원소를 결합하여 제3의 원소를 생산하는 연산을 말하며, 격자는 숫자로 거리를 측정할 수 없는 기하학적 공간과 유사하나, 별도의 공간을 말한다. 이러한 공로로 마르굴리스는 1978년 필드상, 2005년 울프 수학상(Wolf Prize: 이스라엘 울프 재단 상), 2020년 아벨상(Abel Prize: 노르웨이 국왕 상)을 수상함에 따라 이 세 개의 상을 석권한 다섯 번째 인물이 되었다. 1991년 그는 예일 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카아프(Richard M. Karp, 1935~)는 버클리대 컴퓨터 과학자이다. 그는 알고리즘 연구로 저명한 인물로, 1985년 컴퓨터 산업계의 노벨상인 튜링상(Turing Award: 국제 컴퓨터 학회 상)을, 2004년 벤자민 프랭클린상(컴퓨터 및 인지과학상)을, 2008년 교토상(Kyoto Prize: 기술과 과학 분야의 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효율적인 조합 알고리즘 구축, 컴퓨터 과학에 확률적 방법의 응용, NP-완전성(NP-completeness)이론과 그 응용에 대한 공헌으로 1992년 미국 국립 엔지니어링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샤미르(Adi Shamir, 1952~)는 이스라엘 암호 학자이다. 그는 리베스트(Ron Rivest, 1947~. MIT교수), 아들만(Len Adleman, 1945~. USC 교수)과 함께 RSA 알고리즘을, 페이지(Uriel Feige, 이스라엘 와이즈만 과학 대학 교수), 피아트(Amos Fiat, 1956~. 텔아비브 대 교수)와는 식별 체계(Identification Scheme: 메타 데이터에서 집합의 고유한 레코드를 식별하기 위한 분류체계)를 발명한 학자이다. 그는 암호학과 컴퓨터 과학 발전에 수많은 공헌을 하였다.

    펄(Judea Pearl, 1936~. UCLA 대 교수)은 인공지능에 확률적 접근으로 베이지안 네트워크(Bayesian Networks: 복잡한 모델을 쉽게 표현하기 위해 조건부 확률을 사용, 그래프로 표현하는 방식)를 개발하여 유명해진 인물이다. 2011년 인공지능 연구에 공헌한 공로로 튜링상을 수상하였다.

    노이만(Max Newman, 1897~1984)은 유대계 영국의 수학자로 암호 해독가이다. 2차 대전 중 그는 세계 최초로, 프로그램이 가능한 전자 컴퓨터인 “콜로서스” 개발을 이끌었다. 그는 맨체스터 대학 컴퓨터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1948년 세계 최초의 프로그램 저장 컴퓨터를 개발하였다.

    야코비(Carl J. Jacobi, 1804~1851)는 유대계 독일 수학자로 타원 함수, 역학, 미분 방정식, 행렬식 등 수학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앨트만(Sidney Altman, 1939~2022. 예일 대 교수. 분자생물학)은 1989년 RNA의 촉매적 특성에 관한 연구로 체크(Thomas R. Cech, 1947~. 콜로라도 대 교수)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캘빈(Melvin E. Calvin 1911~1997. 버클리 대 교수. 생화학)은 캘빈 사이클(Calvin cycle: 광합성 중 이산화탄소와 수소화합물을 글루코스로 변화시키는 일련의 화학 반응)을 발견한 공로로, 벤슨(Andrew Benson, 1917~2015.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대 교수), 배스햄(James Bassham, 1922~2012. 버클리 대 교수)과 함께 196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생애 중 거의 50년을 버클리 캠퍼스에서 보냈다.

    발라하(Otto Wallach, 1847~1931)는 유대계 독일의 화학자로, 1910년 지방족 화합물에 관한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버그(Paul Berg, 1926~2023. 스탠포드 대 교수. 생화학)는 핵산과 재조합 DNA에 관한 연구로 길버트(Walter Gilbert, 1932~. 하버드 대 교수), 생어(Frederick Sanger, 1918~2013. 영국 캠브리지 대 교수)와 함께 1980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요나트(Ada E. Yonath, 1939~ 샌프란시스코 Weizmann 연구소 연구원)는 리보좀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연구로 라마크리슈난(V. Ramakrishnan, 1952~. 캠브리지 대학 의학 연구소. 생화학), 슈타이츠(Thomas A. Steitz, 1940-2018. 예일 대 교수. 생화학)와 함께 2009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그녀는 이스라엘은 물론 중동 최초의 과학 분야 여성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아다 요나트-

    세트만(Dan Shechtman, 1941~. 아이오와 주립 대 교수. 재료공학)은 준주기적 결정을 발견한 공로로 201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액셀로드(Julius Axelrod, 1912~2004. 뉴욕 건강 정신 위생국 직원. 생화학자)는 인간의 뇌 속 카테콜아민 신경전달물질의 방출과 재흡수에 관한 연구로 버나드 카츠(Bernard Katz, 1911~2003. 영국 의사. 신경 생리학), 오일러(Ulf von Euler, 1905~1983. 스웨덴 생리학자)와 함께 1970년 노벨 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메크니코프(Ilya I. Mechnikov, 1845~1916. 유대계 러시아 동물학자)는 면역 관련 연구로 1908년 노벨 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왁스만(Selman A. Waksman, 1888~1973. 미국 Rutgers 대 교수. 미생물학)은 토양 미생물에 관한 창조적이고 조직적인 연구 결과, 스트렙토마이신 발견에 공헌하여 1952년 노벨 의학상을 수상하였다. 후일 왁스만의 제자 샤츠(Albert Schatz, 1920~2005. 미국 미생물학자. 스트렙토마이신 발견자)는 스트렙토마이신 발견에 자신의 공적이 무시되었다는 이유로, 왁스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로자린드 프랭클린(Rosalind E. Franklin, 1920~1958. 영국 킹스 칼리지 교수. 결정학)은 DNA, RNA, 바이러스 그리고 석탄의 분자 구조 이해에 중심적 역할을 한 여인이다. 그녀는 런던 킹스 칼리지 재직 시절 제자 레이몬드 가슬링이 촬영한 사진(Photo 51)의 X선 회절 영상에 관한 연구로 잘 알려진 학자이다. 이 연구를 토대로 크릭(Francis Crick, 1916~2004. 영국 분자생물학자), 왓슨(James Watson, 1928~. 미국 분자생물학자), 윌킨스(Maurice Wilkins, 1916~2004. 영국 생물물리학자)는 DNA의 나선 구조를 밝힘으로써, 1962년 노벨 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왓슨은 프랭클린이 수상을 했더라면 했으나, 노벨상은 사후 수상 제도가 없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라시(Carl Djerassi, 1923~2015. 스탠포드 대 교수. 약학)는 “알약의 아버지”라는 별칭의 인물로, 임신중절 알약의 개발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불룸버그(Baruch S. Blumberg, 1925~2011. 펜실바니아 대 교수. 유전학)는 B형 간염바이러스 발견과 그 백신 개발 공로로, 1976년 가주세크(Daniel C. Gajdusek, 1923~2008)와 함께 노벨 의학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솔크(Jonas E. Salk, 1914~1995. 피츠버그 의과 대학 교수)는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바이러스 학자이다. 그는 1948년부터 피츠버그 대학에서 소아마비 바이러스 연구에 착수, 그 후 7년 동안 백신 개발에 몰두하였다.

    사빈(Albert B. Sabin, 1906~1993. 이스라엘 와이즈만 과학원 원장)은 소아마비 백신 알약을 개발, 그 병을 퇴치하는데 주요 역할을 한 인물이다.

    에를리히(Paul Ehrlich, 1854~1915)은 유대계 독일 의학자로 혈액학, 면역학, 화학치료요법 분야의 공로로 1908년 노벨의학상을 수상하였다. 1909년 매독 치료법과 그람 염색 박테리아 추적을 위한 전구체 기술 발명은, 그의 최대 업적 중 하나이다. 이 기술로 인해, 여러 가지 혈액 세포 분별을 통한 혈액 질병 진단이 가능하게 되었다.

    랑크(Otto Rank, 1884~1939.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20년 이상을 함께 하면서 정신 분석에 관한 많은 저서를 썼다. 1926년 비엔나를 떠나 파리에 정착한 그는 저술가로, 정신 치료의사로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며 성공적인 삶을 보냈다.

    프랑클(Viktor E. Frankl, 1905~1997. 심리학자)은 로고테라피(Logotherapy)의 창립자이다. 로고테라피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알프레드 아들러의 개인심리학과 더불어 세 번째 심리 치료 방법으로, 과거가 아닌 새로운 삶의 의미를 환자와 함께 모색하는 심리치료 방법이다.

    촘스키(Avram Noam Chomsky, 1928~. 아리조나 대 및 MIT 석좌 교수)는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지성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그는 분석철학의 주요 인물로, 인지과학의 토대를 세운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언어학, 전쟁, 정치학 관련 150권 이상의 책을 저술하였다. 이념적으로 그는 아나코 신디칼리즘(Anarcho-syndicalism: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노동자들의 경제 통제와 사회적 영향력의 확대를 주장하는 아나키즘)과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편에 서있다.

    보아스(Franz U. Boas, 1858~1942)는 현대 인류학의 개척자로 “미국 인류학의 아버지”이다. 그의 업적은 역사적 특수주의(Historical particularism: 미국 최초의 인류학 학파)와 문화적 상대주의 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다.

    마르쿠스(Siegfried S. Marcus, 1831~1898)는 1864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가솔린 동력으로 가는 차를 처음으로 제작한 발명가이다.

    베르린너(Emile Berliner, 1851~1929)는 축음기판을 발명한 발명가이다. 서기 1894년 미국에 이어 영국의 런던, 캐나다 몬트리얼, 독일 베를린 등에 "그래모폰"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는 또 항공기용 성형星型엔진(Radial engine), 헬리콥터의 발명자로도 알려져 있다.

-Radial engine-

    구레비치(Mikhail I. Gurevich, 1893~1976)은 구소련 항공기 디자이너로 미코얀(Artem Mikoyan)과 함께 MIG 항공국 공동 설립자이다. 냉전 기간 중 미그 항공국은 총 4만5천대의 미그전투기를 생산, 그 가운데 1만1천대를 수출하였다. MIG-25는 구레비치가 은퇴 전 마지막으로 디자인한 전투기이다.

    마이만(Theodore H. Maiman, 1927~2007.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 교수)은 레이저를 발명한 미국의 물리학자이다. 1960년 5월 16일 최초의 레이저 광선 발사 성공 후, 7월 7일 세상에 발표하였다. 최근 레이저 발명자를 호칭하는 “레이저 오디시(Laser Odyssey)”는 그를 추모하는 명칭이다.

    랜드(Edwin H. Land, 1909~1991)은 폴라로이드 회사 공동 설립자이다. 그는 값싼 편광 필름을 발명, 즉석 사진이 가능한 카메라를 발명하였다. 1948년 말부터 판매를 개시한 이 카메라는, 1분 이내에 사진 현상을 가능케 했다.

    칸(Robert E. Kahn, 1938~)은 세르프(Vint Cerf, 1943~. 미국 인터넷 엔지니어)와 함께 인터넷 핵심인 전송제어 프로토콜(TCP)과 인터넷 프로토콜(IP)을 처음으로 개발한 미국 엔지니어이다. 이 공로로 칸은 2004년 투링상을 수상하였다.

    코헨(Bram Cohen, 1975~)은 2001년 최초의 공유프로그램 파일인 P2P(BitTorrent)프로토콜을 개발하였다. 그는 코드콘(CodeCon: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연례 모임)의 공동 주관자이기도 하고, 암호화폐 "Chia" 개발자이기도 하다.

    브린(Sergey M. Brin, 1973~)은 페이지와 함께 구글 공동 창립자이다. 2023년 2월 현재 890억 달라의 재산으로, 세계 제9위 부자이다. 페이지(Lawrence E. Page, 1973~)는 브린과 함께 구글 공동 창업자이다.

-세르게이 브린-

    비로(Laszlo J. Brio, 1899~1985)는 처음으로 볼펜의 상업화 생산에 성공한 유대계 아르헨티나인이다. 그에 앞서 라우드(Joh J. Loud, 1844~1916. 미국 발명가)가 볼펜을 디자인 하였으나, 상업화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블라스(Simcha Blass, 1897~1982. 폴란드 엔지니어)는 아들 예샤야후와 함께 최초로 현대식 물방울 관개 시스템을 개발한 발명가이다.

    펠젠슈타인(Lee Felsenstein, 1945~)은 미국인 컴퓨터 엔지니어로, 퍼스널 컴퓨터 개발에 중심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최초로 대규모 생산을 했던 휴대용 컴퓨터 오스본(Osborne 1)의 설계자이다.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신탁통치 지역에 정착한 이유는 이데올로기를 위해, 그리고 박해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였다. 고토로의 귀환은 바로 토지에로의 귀환이었다. 곧 시온주의 이데올로기 핵심인 농촌 건설과 자급자족적인 농민을 위한 과업이 수행되었다.

    서기 1870년, 범이스라엘 동맹이 설립한 최초의 농업학교인 미크베(Mikveh Yisrael School: 텔아비브 소재 기숙학교)의 교사와 졸업생들이 이스라엘 농업 분야 연구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06년 아론손(Aaron Aaronsohn, 1876~1919. 식물학자)은 헤르몬 산에 이르는 노상에서 “모든 밀의 어머니”로 생각되는 밀의 종(Triticum dicoccoides)을 발견하였다. 이어 1909년 그는 아트리트(Atlit: 하이파 남쪽의 해안 마을)에 농업 연구소를 세운 후 지리학적, 식물학적 표본 채집에 나섰고, 1921년 레호보트(Rehovot: 텔아비브 남쪽 20킬로 지점 도시)에 설립한 농업 연구소에서는 토양과 팔레스타인의 기후 조건에 알맞은 농업 특성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이 연구소가 현재 이스라엘 농업연구기구(ARO)이다.

    1912년, 당시 오토만 제국 치하에 있던 하이파(Haifa)에서 이스라엘 최초의 기술 연구소인 테크니온(Technion: 현 이스라엘 공과대학)이 축복 속에 첫 출발을 하였다. 테크니온은 국가가 수립되기 전에 세워진 대학으로서는, 세계 유일의 국립대학이다. 당시 유럽의 차별로 인해 유대인은 기술 교육을 받기 힘들었음으로 유학생을 보내는 대신, 테크니온은 현대 국가 수립에 필요한 기술을 도입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슈트라우스(Nathan Straus, 1848~1931. 미국인 사업가, 박애주의자)가 세운 예루살렘의 히브리 건강연구소(Hebrew Health Station)는 의학과 공중 보건에 관한 연구를 시작으로 공중위생, 안과 질환, 세균학 관련 부서를 운영하여 발진티푸스, 콜레라 백신 그리고 들쥐를 포함한 유해 동물 제거 방법을 개발하였다.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는 히브리 건강연구소와 제휴하여 광견병 백신을 개발하기도 했다.

    1925년에는 스코푸스(Scopus: 예루살렘 북동쪽 소재)산 언덕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을 세우고 미생물학, 생화학, 세균학, 위생학부를 개설하였다. 1936년에는 후일 베일린손(Beilinson) 병원으로 개명한 “유대아 샤론 병원”을 건설하였고, 이때 유대 노동자들은 2일간의 무료 근로를 제공하기도 했다. 1938년 베일린손 병원은 이스라엘 최초의 혈액 은행을 세웠다. 1939년 문을 연 스코푸스 산 언덕 로스차일드-하다사 대학(Rothschild-Hadassah University) 병원은, 이스라엘 최초의 의학 관련 교육기관이었다. 하다사 메디칼 센터로 이름을 바꾼 이 병원은 바로 이스라엘 의학 연구의 선구자이다. 테크니온과 더불어 1934년 레호보트에 설립한 다니엘 시에프(Daniel Sieff: 후일 와이즈만 과학원)연구 센터도 산업 기술 연구소이다. 이밖에도 1930년대에, 많은 사해 연구소들이 설립되었다.

    “WEIZAC”은, 노이만(John von Neumann)이 개발한 IAS(Institute for Advanced Study: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 소재 연구기관)설계에 토대하여 와이즈만 과학원(Weizmann Institute of Science: 이스라엘 국립 연구 대학)이 1954년에 개발에 착수, 1955년 완성한 대용량 저장 프로그램을 갖춘 세계 최초의 컴퓨터 중 하나이다. IEEE(뉴욕 전기, 전자 공학 전문가 협회)는, WEIZAC를 전기공학과 컴퓨터 공학 역사상 기념비적인 이정표로 인정하고 있다.

    1950년 8월 6일 IBM은 이스라엘에 사업 등록을 하면서, 이스라엘 최초의 하이테크 회사가 되었다. 텔아비브 알렌비 거리에 자리를 잡은 IBM은 펀치 카드(Punch card: 컴퓨터 정보 입력을 위한 비트를 구멍을 뚫어 표시한 종이 카드)기계의 조립과 수리, 기계와 자판의 분류 등의 업무를 하였다. 1956년에는 펀치 카드 생산을 위한 공장을 세웠고, 1957년에는 컴퓨터 데이터 처리를 위한 최초의 서비스 센터를 개설하였다.

    에프라임 카트지르(Ephraim Katzir, 1916~2009)대통령 산업통상 장관에 과학자를 임명함으로써 이스라엘 과학 기술 연구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주식 공유, 경영 참여 등 아무런 조건이 없이 신규 창업비용의 50~80%를 지원하였다. 1980년대 초 엘론 전자 회사(Elron Electronic Industries: 이스라엘 하이테크 기술 회사 설립 지원 회사)는 파트너인 CDC(Control Data Corporation: 미국 컴퓨터 회사)와 함께 이스라엘 최초의 벤처 캐피탈 회사를 설립하였다.

    현재의 고도 기술 시대를 연 미국의 실리콘 밸리나 마사추세츠 128번 도로(Massachusetts Route: 1960년대부터 1980년까지 이 도로를 따라 하이테크 산업 단지가 있었음)처럼, 이스라엘 하이테크 산업도 1980년대 컴퓨터 과학 기술의 급속한 발전의 산물이었다. 그때까지 이스라엘 경제는 농업, 광업, 다이아몬든 가공, 섬유업, 비료, 플라스틱 제조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정보 통신 기술에 토대한 하이테크 산업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핵심적인 요인은, 국방과 항공 산업에 대한 투자였다. 이 투자로 인해 새로운 기술과 노하우가 싹이 튼 것이다. 1988년 이스라엘은 국방 예산으로 GDP의 17.1%을 지출하였다. 2016년에는 5.8%로 하락하였지만, 이스라엘 군비 지출은 세계적으로도 상위에 속한다. 국방과 항공 산업에 대한 집중 투자는 이스라엘 의료기기, 전자제품, 통신,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분야에서 하이테크 산업을 가능케 한 토대였다.

    1990년대 러시아로부터 대규모 이민 유입으로, 하루아침에 이스라엘 엔지니어와 과학자 수가 배증되었다. 1989년부터 2006년까지 약 1백만 명의 러시아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왔다. 1998년 미라빌리스(Mirabilis: 음성과 메시지 즉시 전달 프로그램 ICQ 개발 회사) 매입은 이스라엘 하이테크 최초의 산물로, 이스라엘 회사들로 하여금 닷콤 버블 열기에 휩싸이게 하였다.

    현재 이스라엘은 세계 제일의 연구 집중 비즈니스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2018년 GDP의 4.95%를 연구, 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기술 부문은 이스라엘 경제에 핵심적 역할을 하여 2021년 총생산의 12%, 총 고용의 10%를 점유하였다. 연구개발을 위한 정책 도구로는 보조금과 세제 혜택이 있다. 정부의 지원과 고도로 훈련된 기술 인력 덕택으로 다국적 기업들에게 이스라엘은 연구 센터로서 대단히 매력적인 곳이다. 이스라엘의 기술 혁신은 신생 기업은 물론, 다국적 기업과 대기업의 연구 개발 투자에 의존하고 있다. 2019년 현재 530개의 외국 연구소가 이스라엘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대규모 다국적 회사 소유로 이스라엘 회사나 기술, 노하우를 매입하여 만든 연구소들이다. 인텔이나 모토롤라, IBM처럼 30년 이상 연구 활동을 한 연구소들도 있다.

2. 유대 문학

    유대인들이 다수 모여 살았던 곳에서 유대 세속 문학이 발생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20세기 전반기 미국 로스 엔젤레스, 20세기 중반 뉴욕에서는 유대인들의 활발한 문학, 예술 활동이 있었다. 이 활동의 주역들은 유대교도들이 아니었다.

    유대 세속 문화는 히브리어, 이디쉬어, 라디노 등 유대어 또는 영어나 독일어로 표현되었다. 이디쉬어로 쓴 세속 문학과 연극은 주로 19세기에 출현하였다가 20세기 중엽에 사라졌다. 전례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히브리어가 다시 등장한 것은 주로 20세기 초에 나타난 현상으로, 시오니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떤 유대인 공동체가 유대어를 사용하느냐의 여부는, 그 공동체가 얼마나 고립 또는 동화되어 있느냐에 좌우되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폴란드의 고립된 유대마을(Shtetls)이나 뉴욕 이스트 사이드의 유대인들은 이디쉬어를 사용했으나, 독일에 동화된 유대인들은 독일어를, 미국에 동화된 유대인들은 영어를 썼다.

    유대인 작가들은 유대 문학은 물론,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문학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전적으로 세속 문학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디쉬어로 쓴 알레이켐(Sholem Aleichem, 1859~1916. 유대계 러시아 작가. 총 28권의 저서가 있음), 싱거(Isaac B. Singer, 1903~1991. 유대계 미국 소설가. 1978 노벨 문학상 수상)같은 작가들의 작품은, 미국과 동유럽 유대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로, 모두 그들 자신의 자전적 소설들이다. 로스(Philip Roth, 1933~2018)나 벨로우(Saul Bellow, 1915~2005. 1976 노벨 문학상 수상)를 비롯하여 많은 유대 작가들을 위대한 미국작가들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유대인의 시각으로 작품을 썼다. 긴스버그(Allen Ginsberg, 1926~1997. 유대계 미국 시인)는 그의 자전적 작품 “하울과 카디쉬(Howl and Kaddish)”에서처럼, 유대적인 주제를 다루었다. 세계 문학에 공헌한 유대 작가들로는 독일의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 캐나다의 리칠러(Mordecai Richler, 1931~2001), 구소련의 바벨(Isaac Babel, 1894~1940), 체코슬로바키아의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네델란드의 물리슈(Harry Mulisch, 1927~2010)가 있다. 물리슈의 작품 “천국의 발견”은, 2007년까지 최고의 네델란드 책으로 선정된 바 있다. 말킨(Yaakov Malkin, 1926-2019. 텔아비브 대학 미학 교수)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유대 세속 문화는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함께한 미적 즐거움이나 관념의 원천으로서, 오랜 세월 시련을 거친 문학 작품들은 물론 작품의 탄생과 무관한 사회, 문화적인 내용을 다루는 작품들도 모두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쓴 유대 작가들로는 알레이헴(Sholem Aleichem, 1859~1916. 러시아 희곡작가), 망게르(Itzik Manger, 1901~1969. 오스트리아 시인, 희곡작가), 싱거(Isaac B. Singer), 로스(Philip Roth, 1933~2018. 미국 소설가), 벨로우(Saul Bellow, 1915~2005. 미국 소설가. 1976 노벨 문학상 수상), 아그논(S.Y. Agnon, 1888~1970. 이스라엘 소설가), 바벨(Isaac Babel, 1894~1940. 러시아 언론인, 작가), 부베르(Martin Buber, 1878~1965. 오스트리아 철학자 ), 베를린(Isaiah Berlin, 1909~1997. 러시아 출신 영국 철학자), 비알리크(Haim N. Bialik, 1873~1934. 오스트리아 시인), 아미카이(Yehuda Amichai, 1924~2000. 이스라엘 시인, 작가), 오즈(Amos Oz, 1939~2018. 이스라엘 작가, 언론인), 여호슈아(A.B. Yehoshua, 1936~2022. 이스라엘 작가), 그로스만(David Grossman, 1954~. 이스라엘 작가)등이 있다.”

    유대 세속 문화에는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 독일 시인),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오스트리아 낭만주의 음악가), 번슈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 교향악단 지휘자. 피아니스트), 샤갈(Marc Chagall, 1887~1985. 화가), 에프슈타인(Jacob Epstein, 1880~1959. 미국인 조각가), 샨(Ben Shahn, 1898~1969. 미국인 화가),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 이태리 화가, 조각가),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보헤미아 소설가),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1873~1943. 오스트리아 영화감독), 루비츄(Ernst Lubitsch, 1892~1947. 미국 영화감독), 알렌(Woody Allen, 1935~. 미국 배우, 영화감독) 등 서구 문화에 깊은 영향을 준 인물들의 자랑스러운 걸작품들이 있다. 

    이들 이외에도 아시모프(Isaac Asimov, 1920~1992. 보스톤 대 교수. 작가 겸 생화학자), 헬러(Joseph Heller, 1923~1999. 미국 작가), 스타인(R.L. Stine, 1943~. 미국 작가), 샐린저(J. D. Salinger, 1919~2010. 미국 작가), 챠본(Michael Chabon, 1963~. 미국 작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 프랑스 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 1915~2005. 미국 극작가), 아이스너(Will Eisner, 1917~2005. 미국 만화가), 실버슈타인(Silverstein, 1930~1999. 미국 작가, 시인), 쾨스틀러(Arthur Koestler, 1905~1983. 영국 작가, 언론인), 벨로우(Saul Bellow, 1915~2005. 미국 작가), 두루온(Maurice Druon, 1918~2009. 프랑스 작가)등이 서구 문화에 영향을 준 유대 작가들이다.  

    유대 역사상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시인들이 히브리어로 시를 써왔다. 성경의 시는 성서 시대의 시이다. 중세 시대 유대인의 시로는 전례시(Piyyutim)가 있고, 할레비(Yehuda Halevi, 1075~1141. 스페인 시인), 나그릴라(Samuel ibn Naghrillah, 993~1056. 스페인 탈무드 학자), 가비롤(Solomon ibn Gabirol, 11세기. 스페인 안달루시아 시인), 에즈라(Moses ibn Ezra, 1092~1164. 스페인 철학자, 시인), 아브라함 에즈라(Abraham ibn Ezra. 1092~1167. 스페인 철학자, 시인), 라브라트(Dunash ben Labrat, 920~985 CE. 스페인 철학자, 시인)같은 시인들이 지은 시가 있다.

    그러나 현대 히브리어 시는 하스칼라 시대(Haskalah: 1770~1881년 유럽 및 무슬림 지역 유대인 계몽주의 시대) 루자토(Moshe C. Luzzatto, 1707~1746. 랍비, 철학자)가 이끈 히브리어 재생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의 뒤를 이어 비알리크(Hayim N. Bialik, 1873~1934. 유대계 러시아 시인), 알터만(Nathan Alterman, 1910~1970. 이스라엘 극작가, 시인), 체르니코프스키(Shaul Tchernichovsky, 1875~1943. 유대계 러시아 시인)같은 시인들이 히브리어로 시를 썼다. 유대 문학의 또 다른 특징으로 무사르 문학(Musar: 선악을 구별하여 가르칠 것을 강조하는 문학)이 있다. 종교적인 작가들과 세속의 작가들이 모두 무사르 문학을 썼다. 한편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약 13%가 유대인이다. 

    글뤼크(Louise Elisabeth Glück, 1943~ 유대계 미국의 시인, 수필가)는 202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노벨 위원회는 그녀를, 엄격한 미美로 개인의 존재를 일반화한,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분명한 시적 목소리를 낸 시인으로 극찬하였다. 노벨상 이외에도 그녀는 풀리처상, 미국 인문학상, 전미국 도서상, 전미국 도서비평가협회상, 볼링겐 상(Bollingen Prize: 격년으로 미국 시인에게 수여되는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03년 그녀는 미국 계관시인이 되기도 했다.

-글뤼크-

    봅 딜런(Bob Dylan, 1941~. 미국 가수, 작사 작곡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사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60년 이상 대중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196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한 그는 민권과 반전 운동의 성가가 되다시피 한 “바람 속에 펄럭이는(Blowin' in the Wind, 1963), ”사람들이 변하는 시대(The Times They Are a-Changin, 1964)“ 등을 작사하였다. 그 시대 그의 시는 정치, 사회, 철학, 문학 등 광범한 영역에 걸쳐 영향을 미쳤고 전통적인 팝 문화에 도전, 반문화의 싹을 트게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핀터(Harold Pinter, 1930~2008. 영국 극작가, 영화감독, 배우)는 50년 이상 극작가로서 활동을 한 가장 영향력 있는 극작가로, 200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생일 파티(1957)”, “배신(1978)”, “심판(1993)” 등 많은 영화 대본을 썼다. 그밖에도 무대, 라디오, 티브이, 영화 등에서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많은 역할을 하였다.

    예리네크(Elfriede Jelinek, 1946~. 오스트리아 극작가, 소설가)는 독일어로 쓴 빛나는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200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소설 속 음악처럼 흐르는 목소리와 놀랄만한 언어적 열정으로, 사회의 모순을 고발한 작가라는 수상 평을 받았다.

    케르테스(Imre Kertész, 1929~2016)는 200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유대계 헝가리 작가이다. 그는 역사의 야만적인 전횡에 맞서 싸운, 개인의 연약한 경험을 승화시킨 작가라는 수상 평을 받았다. 그는 헝가리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그의 작품들 주제는 주로 홀로코스트이다. 그 자신이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고디머(Nadine Gordimer, 1923~2014)는 유대계 남아프리카 공화국 작가로 199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장엄하고 서사적인 문체로 인류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는 수상 평을 받았다. 그녀는 특히 남아공의 인종차별 문제를 다루었다. “버거의 딸(Burger's Daughter)”, “7월의 사람들(July's People)”같은 그녀의 작품들은 남아공 정부로부터 추방을 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반인종차별 활동으로 아프리카 민족 의회에 참여하였고, 저 유명한 1964년 넬슨 만델라 재판정에서 그를 위한 변론을 하기도 했다.

-고디머-

    브로드스키(Iosif A. Brodsky, 1940~1996)는 구소련 태생으로 소련 당국과 충돌, 오든(Wystan H. Auden, 1907-1973. 영국계 미국 시인)의 도움으로 소련을 떠나 1972년 미국에 정착하였다. 미국에 정착한 그는 예일, 컬럼비아, 케임브리지 대학 등에서 가르쳤고, 198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사유의 명확성과 시적 강렬함이 배인, 모든 것을 감싼 작가라는 수상 평을 받았다. 그는 1991년 미국 계관시인이 되기도 했다.

    카네티(Elias Canetti, 1905~1994)는 불가리아 태생 세파르디 유대인으로 독일어 작가이다. 그는 영국으로 이주하였으나 1912년 부친이 사망하자, 그의 모친은 세 아들을 데리고 다시 비엔나로 돌아갔다. 1938년 카네티는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이주하여, 1952년 영국 시민이 되었다. 그는 모더니스트 소설가, 극작가, 회고록 집필가, 넌 픽션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8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넌 픽션 “대중과 권력(Crowds and Power)"은 그의 이름을 빛낸 작품이다. 

    싱거(Isaac B. Singer, 1903~1991. 미국. 소설가. 회고록 집필가)는 처음 이디시어로 쓴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197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이디시 문학 활동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회고록인 어린이 문학 “즐거웠던 어느 하루(A Day of Pleasure)와 픽션 글 모음집인 ”날개들의 왕관 외(A Crown of Feathers and Other Stories)" 로, 두 번에 걸쳐 전미국도서상을 수상하였다.

    벨로우(Saul Bellow, 1915~2005)는 197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유대계 미국 작가이다. 그는 노벨상 이외에도 퓰리처상, 미국예술훈장을 받았다. 그는 전미국도서상을 세 번이나 받은 유일한 작가이다. 1990년 그는 미국문학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국립도서재단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자크스(Nelly Sachs, 1891~1970)는 유대계 스웨덴 시인이며 극작가이다. 2차 대전 중 그녀는 나치를 경험했고, 동료 유대인들의 슬픔과 소망을 대변하는 가슴 아픈 대변인이기도 했다.

    아그논(Shmuel Y. Agnon, 1888~1970)은 현대 히브리 문학의 중심인 이스라엘 작가이다.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의 폴랜드 갈리시아에서 태어난 그는, 팔레스타인 신탁통치령으로 이주한 후 예루살렘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주로 전통적인 유대인의 생활과 현대 세계 간의 갈등을 다루었다. 그렇게 하여 유대 정착촌의 사라져가는 유대 전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현대 히브리어와 랍비 히브리어를 섞은 독특한 언어 스타일로 작품을 썼다. 196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파스테르나크(Boris L. Pasternak, 1890~1960. 구소련 시인, 작가)는 1922년 최초의 시집 “나의 누이, 삶(My Sister, Life)"을 베를린에서 발표하였고, 이 시집은 곧 러시아어 중요 문학작품이 되었다. 그는 괴테, 쉴러,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공연함으로써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는 1905년 러시아 혁명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를 그린 “의사 지바고”로 195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이 소설은 당초 소련 당국에 의해 출판이 금지되었으나, 그 원고가 이태리로 유출되어 1957년 출판되었다. 이는 소련 공산당을 분노케 하여, 그에게 수상을 거부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따라서 그는 상을 받지 못하고, 1989년 그의 아들 예프게니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수상하였다. 이 소설은 2003년부터 교과 과목으로 채택되어, 러시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파스테르나크-

    베르그송(Henri L. Bergson, 1859~1941. 프랑스 철학자)은 20세기 전반 분석철학과 유럽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친 철학자이다. 그는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이성이나 과학보다는, 경험과 직관이 더 중요함을 주장하였다. 그는 192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풍부하고 생동력 있는 관념과 이를 표현하는 눈부신 기교“가 그에게 내린 수상 평이었다.

    하이제(Paul von Heyse, 1830~1914. 유대계 독일 작가, 번역가)는 시, 소설, 177편의 단편, 60여 편의 드라마를 쓴 독일 문학계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191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인, 극작가, 소설가, 단편 작가로서 이상주의가 스며든 예술을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공”이 그에게 내린 수상 평이었다. 그는 고령의 나이로 노벨상을 수상한 다섯 번째 인물이기도 하다.

3. 유대 음악

    유대 종교 음악은 시나고그나 성전의 찬송가로부터 진화된 것으로, 그 역사는 성서 시대(창세기가 기록된 기원전 1450년 무렵)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시나고그 음악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불렀던 찬송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쉬나에 따르면, 성전의 성가대는 열두 개의 악기와 열두 명의 남성 가수들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악기들로는 키노르(리라), 네벨(하프), 토푸(탬버린), 쇼파르, 그리고 챠릴, 알라모스, 우가브 등 여러 종류의 관악기가 있었다. 성전에서는 구리로 만든 일종의 심발도 사용했다. 탈무드는 성전 성가대가 일종의 파이프 오르간을 사용했으나, 물을 이용한 이 오르간은 너무나 소란스러워 사용하지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초기 예루살렘 성전 음악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콜 니드레이(Kol Nidrei: 욤 키프루 전야 시나고그에서 부른 노래) 멜로디는 구전되어 막스 브루흐(Max Bruch, 1838~1920.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에 의해 첼로 곡으로 편곡되기도 했다. 

    서기 70년 성전이 파괴되면서 유대인들이 흩어지자, 그후 성전 음악은 시나고그에 보존되어 지켜져 왔다. 학자들이 밝힌 그 시대 음악은 가수와 회중 간 주고받는 형식 즉, 가수가 부르면 회중은 후렴을, 또는 가수가 부르면 회중이 받아 부르는, 또는 가수와 회중이 서로 다른 노래를 번갈아 부르는 3가지 형식이었다. 이러한 형식은 오늘날에도 시나고그 예배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유대 예배 음악의 특징은 음계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음계는 기도문에 따라 또는 기도자에 따라 달랐다. 음계는 아하바 라바(Ahavah Rabbah), 마게인 아보트(Magein Avot), 아도나이 말라크(Adonai Malach) 세 종류가 있었고 이 음계들을 결합하거나 중복하여, 많은 음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가수는 정해진 음계 내에서 기도문을 즉흥적으로 불렀다. 표준적인 음표는 없었음으로, 음계와 멜로디는 후계자들에게 직접 구전으로 전수되었다. 18세기 후반, 이러한 예배 음악은 표준화되어 기록되기 시작했으나, 즉흥 연주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같은 전례를 따라 시나고그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순전히 성악이었다. 멜로디는 가수가 부르는 대로였다. 회중도 단성單聲(Monophonic)으로 응답했다.

    유대교 전례에서 사용한 성가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피이유트(Piyyut)는 서기 70년 성전이 파괴된 이후 1천년 동안 부른 노래로, 명확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시나고그 음악의 한 갈래였다. 가수는 스스로 만들거나 아니면 전해지는 멜로디에 따라 피이유트를 불렀다. 피이유트 가사는 미쉬나 시대부터 쓰였음으로 대부분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되어 있다. 대부분 히브리어 운율에 따른 시적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 세상의 주인(Adon Olam)"은 대표적인 피이유트 성가이다.

    피즈몬(Pizmon)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전통적인 유대 노래이다. 이 노래는 중동 지역 세파르디 유대인의 노래로, 아쉬케나지 성가 제미로트(Zemirot)와도 관련을 맺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이 노래는 알레포(Aleppo: 시리아 북부 도시) 유대인 후손의 노래라고도 한다. 아주 오래된 멜로디도 있고, 가사로 보아 중동 대중음악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제미로트는 성가이며,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부르나, 이디시어나 라디노 말로 부르기도 한다. 가사는 중세 랍비나 현자들이 쓴 시이다. 제미로트에는 작곡자 미상인 민요들도 있다.

    바카쇼트(Baqashot)는 알레포 유대인 공동체가 오랜 세월 부른 노래 모음집이다. 안식일 자정부터 새벽까지 부른 이 노래는 스페인에서 유대인이 추방당할 무렵 생겨났으나, 16세기 사페드(Safed: 이스라엘 북부 마을)의 카발라(Kabbalah: 유대 신비주의 학파)운동을 계기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이 노래는 한 때 지중해 전역은 물론, 런던이나 암스텔담 같은 서유럽 세파르디 공동체의 하나의 관습이 되어 부를 정도였다.

    끝으로 니군(Nigun)은 개인이나 단체가 부른 종교 음악으로 하시디 운동(Hassidic movement: 18세기 현재의 우크라이나에서 있었던 정신 개조 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다. 니군은 가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냥 빔..빔..빔..또는 라이..라이..또는 야이..야이...아이...아이를 반복하여 부른다. 이 같은 성가들은 물론 작곡자가 있었겠지만, 하느님 위주의 고대 및 중세 사회에서의 우주 만물은 하느님의 피조물로, 노래 역시 하느님의 작품으로 인식되어 감히 인간의 이름으로 그 작곡자를 말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 작곡자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한 기독교 공인을 계기로, 유대 예배 음악이 발전한다. 서양 음악의 뿌리인 그레고리 성가는 바로 이 유대 예배 음악을 그레고리 I세(Gregory I, 540~604)와 그레고리 II세(Gregory II, 669~731 CE)가 수집, 라틴어로 재편찬한 노래로 현재 약 3천여 곡이 전해지고 있다. 가톨릭 성당에서 고음의 성가대원이 반주 없이, 박자 없이 목소리를 길게 뽑아 부르는 독창곡이 바로 그레고리 성가이다. 화음이 없는 멜로디 위주의 단성 음악(Monophony)인 그레고리 성가는 로마네스크(800~1150), 고딕(1150~1450), 르네상스 시대(1450~1600)를 거치면서 화음을 곁들인 다성 음악(Polyphony)으로 발전한다. 물론 이 시기에는 악기의 미발달로 화음 역시 목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다성多聲이란 바로 여러 목소리를 반영한 이름이다. 유대 예배 음악인 이 그레고리성가야 말로, 바로 서양음악의 모태인 것이다.

4. 언어와 글자

    이스라엘 왕국 글자는 기원전 10세기 무렵 페니키아 문자로부터 비롯되었다이 시기 히브리어는 페니키아어 및 아람어와 관련된 북서 셈어 계통의 언어였다. 고대 비문에서 볼 수 있듯이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 간에는 사투리가 있었다. 구약은 주로 유다 사투리어로 쓰였다. 오늘 날 이 글자 체계는 구히브리어 알파벳으로 불린다. 그 특성상 자음 성격인 아브자드(Abjad: 자음만 있고 모음은 읽는 사람의 추론에 의존하는 글자 시스템) 체계로, 22개의 자음으로 되어있다. 모음은 영어와 비슷하지만 자음과 연계가 없으면 음가가 없다.

 

XI. 금융과 언론

    1. 유대 금융

    바빌론의 유수가 있기 전 이스라엘 땅(Erez Israel)에 금융 거래가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때는 농업 사회로 돈이 필요한 형제나 이웃에게 돈을 빌리거나, 꾸어주는 정도였다(신명기 23:21). 그후 최초의 유대 디아스포라인 바빌로니아 유대 공동체 유대인들은, 그곳 돈 많은 사람들의 경제 양식을 처음으로 경험하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유대인들에게 한단계 높은 바빌로니아 대금업에 참여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아직 농업 경제가 주도적이었고, 고리대금업자나 도박꾼들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미쉬나 산헤드린 3:3). 이 같은 환경은 원시적인 유대 금융업이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던 무대였다. 

    바빌론의 유수가 끝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대금업을 시작하였다. 농업이 주도적인 사회였지만, 예루살렘에는 세리稅吏나 지주 등 많은 부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소득으로 투기를 하거나 성전에 맡기기도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성전은, 국민 은행 역할을 한 것이다. 체계를 갖춘 은행의 발생은 십일조(tithes) 특히 특정 농산물의 1/10을 성전에 봉헌하고, 순례자들의 환전 필요성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은행 용어에 그리스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은행 성립에 헬레니즘의 영향이 있었음을 뜻한다.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에서도 국제 무역뿐만 아니라 대금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로마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3천 달란트의 돈으로 이자 놀이한 유대인 조세 징수관이 있었다. 그는 아그리파 왕(Agrippa, 11 BC~44 CE. 유대아 왕)에게 돈을 빌려준 리시마쿠스(Alexander Lysimachus)로, 클라우디우스(Tiberius Claudius Germanicus, 10 BC~54 CE. 로마 황제)의 어머니 안토니아의 집사였다.

칼리프 제국

    8세기 후반에 이르러 칼리프 왕국의 수도 바그다드의 상업이 급속히 발전함에 따라 대부분의 유대인들도 농업을 벗어나면서, 금융은 상류 유대인 계층의 사업이 되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이집트 파티마 왕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하바디야(Jahbadhiyya)는 일종의 은행으로, 부자들의 저축과 유대 상인 계층을 기반으로 했다. 이 은행업자들은 예금자들이 저축한 돈이나 자신의 돈을 국가와 관리들에게 빌려 주면서, 정부의 몰수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엄청난 규모의 자금을 관리할 수 있었다.

    파티마 왕국의 칼리프 무스탄시르(al-Mustanṣir, 1029~1094) 치세하 유대인 투스타리(Sahl al-Tustari, ?~1048) 형제는, 당시 이집트 재정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파티마 왕국을 멸하고 살라딘(Saladin, 1137~1193)의 아이유브 왕조가 등장하면서 이집트 유대인들의 입지는 악화되었으나, 환전 영업은 계속할 수가 있었다. 이집트에서 맘루크 왕조(Mamluk Sultanate)가 끝날 무렵(1517), 카이로의 유대인 환전상 사무엘은 상당한 재산을 손에 넣었는데, 그로부터 술탄은 50만 디나르를 몰수하였다. 무슬림 통치 기간 중인 11~12세기 이베리아 반도 꼬르도바의 유대인들은 금융업에 적극적이었다. 이 시기 레스폰사(Responsa: 율법학자들의 문답집)를 보면, 십자군 이전 이베리아 반도에는 화폐 경제가 고도로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초기 유럽

    서기 414년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추방을 당한 유대인들, 그리고 동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압제를 받았던 유대인들은 그리스인이나 시리아인들을 따라 골(Gaul: 현재의 프랑스)로 갔는데, 이는 단순히 보석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빌려주기 위해서였다. 서기 481년 메로빙거 왕조(Merovingian dynasty)가 들어서자 유대인들은, 왕가의 위임을 받아 징세관이 될 수 있었다. 그레고리(Gregory of Tours, 538~594. 뚜르 백작)에 따르면, 그와 그의 교구목사(Vicar)는 유대인에게 빚을 졌다고 했다. 이는 대금업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메로빙거에 이어 카로링거 왕조(Carolinger dynasty, 750~887 CE)가 들어서자 유대인들은 다시 라인란트로 돌아가, 로마 제국 시대에 했던 것처럼 상인들에게 동업 형식 또는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 주었다.

유럽 대금업

    제1차 십자군(1096)이후 서부 및 중부 유럽, 특히 스페인에서는 가톨릭의 팽창으로 유대인은 상업이나 수공업을 할 수 없었다. 영국,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보헤미아, 모라비아, 이태리 등지의 유대인들은 생계를 위해 크건 작건 대금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황청은 기독교도의 이자 취득을 금하고, 이후 종교회의(특히 1215 제4차 라테란 종교회의)에서 이를 재차 강조하였다.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 서부 유럽의 부유한 기독교도들이 국제 무역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였고, 이에 따라 유대인들은 그들을 대상으로 독점적인 대금업貸金業을 할 수 있었다. 이자를 금지한 성경 말씀(출애굽 22:25, 레위기 25:36)으로, 기독교도들은 대금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환전과 화폐 주조는 대금업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유대인들이 독점하는 일이 흔했다. 12세기 전반기부터 환전업은 특별한 은행 업무로,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 두 명에서 열 명까지 동업 형태를 취하였다. 12세기 라인란트의 바카라크(Bacharach: 마인츠 빙겐 소재 성읍)와 뮌첸베르크(Münzenberg: 독일 헤센 주 소재 성읍)에서는 금융업이 유대인 공동체의 주업이 되다시피 했다. 13세기 들어 이곳에서는 고리대금업 즉 유대인이라는 통념이 있었고, “유대인화(judaizare)”라는 단어는 “이자를 취한다”와 동의어가 되기도 했다. 12세기 프랑스에서 대금업은 유대인의 주요 업종이었으나, 13세기에 들어 한 수 위의 경쟁자들인 롬바르드(Lombards: 이태리 북부의 게르만 족)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과는 네델란드에서 더욱 치열한 경쟁을 하였다. 영국에는 링컨(Aaron of Lincoln, 1125~1186)과 요크(Aaron of York, 1190~1253)등 두 강력한 유대 은행가들이 있었고, 특히 유대 금융 재원으로 유대 자금(Exchequer of the Jews)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영국 왕실은 더 많은 자금을 보유한 프랑스나 이태리 금융업자들에게 의존하면서, 1290년에는 유대 금융업자들을 추방하기까지 이르렀다. 이태리에서는 그리스도교 측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유대 금융인들은 교황의 보호 아래 사업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13세기 후반에는 이태리 중부까지 세력을 확장한 후, 북부지역까지 뻗어나갔다. 처음에는 작은 마을로, 이어 큰 마을로 영업을 확대해나갔다.

-뮌첸베르크-

    대출금에 대한 담보는 처음 “갚겠다는 맹세”를 시작으로, 13세기 중반부터는 신용장(서약서)을 사용했지만 또한 보석을 선호했다. 서부 독일에서는 부동산 담보를 선호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가옥, 포도원, 농장, 마을, 성채, 심지어는 영주의 봉토까지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이자율은 36%를 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납부가 지연될 경우는 100%를 넘기도 했다. 

    자연경제에서 화폐경제로의 이전과 토지 소유권의 안정화에 따라 유대 금융업은 새로운 가능성을 맞게 되었다. 특히 라인란트와 신성로마제국의 지크부르크, 트리에르, 마인츠, 슈페이에르, 슈트라스부르크, 바젤, 울름, 뉘른베르크에서는 유대인들이 자금 공급자로 등장하였다. 14세기 상반기 무렵 유대인 비벨린(Vivelin of Strasbourg, ?~1347)은 영국 왕 에드워드 III세가 대프랑스 동맹의 대가로, 동맹자 볼드윈(Baldwin of Luxembourg, 1285~1354. 트리에르 대주교)에게 지불하는 금화 6만1천 플로린(florin)을 송금 중개한 중요한 은행업자였다. 같은 시기 트리에르(Trier) 대주교의 재무 담당자는 유대인 다니엘스(Jacob Daniels)이었다. 다니엘스는 아마 라인란트에서 가장 실력 있는 유대인 은행가였을 것이다. 대주교의 사위인 미카엘은 다니엘스의 뒤를 이어 재무를 담당하였다. 다니엘스와 마찬가지로, 당시 빙겐(Bingen am Rhein)에서는 유대인 크로이츠나하(Abraham von Kreuznach)가 마인츠 대주교의 재정 업무를 맡고 있었다. 레클링하우젠(Gottschalk von Recklinghausen)과 그의 회사는 라인 라인란트의 또 다른 유대 은행이었다. 중앙 유럽에서 실레지아(Silesia: 폴란드, 독일, 체코와 접한 지역)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이 행한 은행 업무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서기 1366년 이태리 북부 도시 베니스에서는 게르만계 유대인들이 대금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던 또 다른 유대 대금업자들과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밀라노나 제노아 같은 도시들은 게르만계 대금업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사와 플로렌스에서는 다 피사(PISA, DA)가문이 중요한 대금업자였다. 서기 1437년 메디치(Cosimo di Giovanni de' Medici, 1389~1464. 메디치 가문 창시자)는 플로렌스에 4개의 유대인 은행을 설립하도록 허락하였다. 15세기 중엽에 프란시스코 승려들이 반유대인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자선 단체 성격의 전당포(Monti di Pietà)가 여러 곳에 설치됨에 따라 유대인의 대금업은 심각한 시련을 맞았다.

    14세기 말, 보헤미아 왕 벤체스라우스(Wenceslaus IV, 1361~1419)에 의한 유대인 채권무효화 조치는, 왕가의 탐욕과 전횡의 예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상황과 맞물려,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 보헤미아 유대 대금업자의 기능은 왕족에게로 넘어가, 유대인들은 대금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살던 곳을 떠나 시골 또는 동유럽으로 가, 경제가 뒤떨어진 그곳에서 생계를 꾸려갈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동유럽의 헝가리, 폴란드, 리투아니아 왕족이나 귀족들은 그들의 재정적 능력을 활용할 수가 있었다. 동유럽 왕국들의 삼림 개발에 따라 유대인들은, 토지 등 고정 자산의 임대사업(Arenda)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대금업을 한 유대인들도 있었다.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이 무슬림으로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되찾은 후, 유대인들의 대규모 금융 활동과 징세 청부업(Tax farming: 왕이나 귀족에게 돈을 빌려 주고, 세금을 걷어 빌려준 돈을 회수할 있도록 한 징세권 위임제도)이 왕성하게 되었다. 유대인 대금업자들은 무어족과의 싸움에 필요한 무기 구입 자금도 빌려주었다. 엘 시드(El Cid, 1043~1099. 중세 스페인 장군)는 발렌시아(Valencia: 지중해 연변 도시) 원정 자금을 부르고스(Burgos: 스페인 중부 도시) 유대인들로부터 빌렸다. 알폰소 VI세(Alfonso VI, 1072~1109. 까스띠야 왕국 왕) 역시 군사 원정자금을 유대인 금융업자로부터 빌렸다. 그의 후임 왕들은 유대인을 궁정 재무담당 특히 조세 징수관으로 임명하였고, 아울러 대금업을 하도록 허락하였다. 이렇게 해서 에즈라(Judah Ibn Ezra)는 까스띠야의 알폰소 VII세(Alfonso VII, 1105~1157), 쇼샨(Joseph Ibn Shoshan)은 알폰소 VIII세(Alfonso VIII, 1155~1214), 자독(Solomon Ibn Zadok)과 그의 아들 말레아(Çag de la Maleha)는 알폰소 X세(Alfonso X, 1221~1284)의 조세 징수관으로 일을 하였다. 산초 IV세(1258~1295)가 즉위하자 바르칠론(Abraham el-Barchilon)이 궁정 징세관이 되어, 징세 청부업을 감독하였다.

    일반적으로 까스띠야 왕국 유대인들은 징세 청부업에 소극적이었는데, 결국 꼬르떼스(지금의 의회 해당)의 반대로 1288년부터 이 제도가 폐지되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궁정 징세관을 선호하게 되었다. 아라곤 왕국 궁정도 까스띠야 왕국처럼 유대인 징세관에게 의존하였다. 아라곤 왕국 하이메 I세(Jaime I, 1208~1276)는 유대인 뽀르따(Benveniste de Porta, ?~1268)를 징세관으로 임명하는데, 아마 그에게 바르셀로나와 헤로나(Gerona)의 수령직을 보장하였을 것이다. 까발레리아(Judah de la Cavalleria)는 아라곤 왕실에서 가장 강력한 유대인으로, 왕국의 모든 지방 수령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뻬드로 III세(Pedro III, 1239~1285) 치세하 라바야(Ravaya)는 아라곤 왕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 가문의 징세관이었다. 꼬르떼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까스띠야 왕국의 유대인들은 징세 청부업을 계속하였는데, 세비야의 아브라바넬(Isac Abrabanel,1437~1508) 가문이 대표적인 예였다. 아브라함(Abraham Seneor, 1412~1493)은 이사벨라 여왕의 조세 징수관이었고, 아브라바넬은 여왕의 대그라나다 전쟁 자금을 빌려주기도 했다. 산탄헬(Luis de Santangel, ?~1498)은 왕가의 회계 담당자로서, 여왕의 콜럼버스 신대륙 원정 지원자금을 마련해주었다. 

    멘데스(Diogo Mendes, 1998~?)는 포르투갈 왕과 영국의 헨리 VIII세에게 융자를 해준, 네델란드(당시 스페인 식민지) 앤트워프의 가장 중요한 상업은행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가족은 터키로 이민을 하여, 정부의 지원하에 상업과 금융을 결합한 사업을 하였다. 오토만 제국에서도 많은 유대인 환전상과 징세 청부업자들이 있었다. 서기 158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동맹을 맺은 후(Iberian Union),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프랑드르와 동인도 주둔 군대 비용, 아프리카 개척 사업 등 왕가의 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하였다. 서기 1626년 스페인 경제 위기가 있은 후, 1640년 포루트갈의 반란(포르투갈의 대 스페인 독립전쟁)이 있을 때까지 유대인들의 금융 활동은 더욱 활발했고 규모도 확대되었다. 이 새로운 가톨릭 유대인들의 마지막 금융투자 대상은, 식민지 개척을 위하여 1649년 설립된 금융회사 브라질 컴퍼니(Brazil Company)였다.

    그러나 유대인의 진정한 금융업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종교재판을 피해 앤트워프, 함부르크, 암스텔담으로 도피한 유대인들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곳에서 겉으로만 가톨릭으로 지낸 사람들도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유대교로 되돌아간 사람들도 있었다. 앤트워프의 히메네스(Ximenes)가문과 데보라(Rodrigues d'Evora)가문은 브라질과 동인도까지 사업 관계를 넓혔던 저명한 유대 상업 은행가들이었다. 그들은 가톨릭으로 남아 있었지만 함부르크나 암스텔담으로 간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세파르디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서기 1619년 함부르크 유대인 공동체는, 30명이 주주가 되어 상업은행을 설립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덴마크나 홀슈타인(Schleswig-Holstein)왕실의 재정 조달을 위한 왕가 대리인들도 있었다. 앤트워프에서 가장 유명했던 유대인 금융가 삼파요(Diego Teixeira de Sampayo, 1581~1666)는 스페인의 총영사 겸 재무관이었고, 그의 아들 마누엘은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의 재정 담당관이었다. 마누엘은 서유럽의 대신성로마제국 및 스칸디나비아 왕실 지원금 송금 업무를 한, 함부르크의 저명한 환전상이기도 했다.

    서기 1602년 3월 20일 암스텔담에서 소수의 유대인들이 모여, 동인도회사(the United East India Company)를 설립하였다. 서기 1620년에는 160명의 포루투갈 사람들이 이 회사에 투자를 하였다. 네델란드의 대외무역 특히 브라질과 서인도제도와의 무역이 증가함에 따라, 암스텔담 자본시장은 성장을 거듭하였다. 암스텔담을 통한 식민지 주둔 병력 운영 자금과 각종의 보조금 송금도 활발하였다. 이에 따라 외환 시장에서 유대인 금융가들의 위상이 높아졌고, 특히 그들은 무역회사 지분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그 가운데 핀토 가문(Isaac de Pinto)과 그라스 가문(Baron d'Avernas le Gras)등 두 가문이 유명하였다. 그렇지만 암스텔담 세파르디 유대인들의 재산은, 가톨릭교도들에 비하면 훨씬 낮았다. 18세기 후반 새로운 세파르디 금융가 메스끼따(David Bueno de Mesquita)가 등장하였다. 영국왕 챨스 II세(Charles II, 1630~1685)와 포르투갈 공주 캐더린(Catherine of Braganza, 1638~1705)의 결혼으로 런던 역시 세파르디 금융 중심지가 되어, 꼬스따(Moses da Costa, ?~1747), 메디나(Solomon de Medina, 1650~1730), 뻬레이라(Isaac Pereira, 1806~1880), 기디언(Samson Gideon, 1699~1762), 살바도르(Joseph Salvador, 1716~1786), 골드스미드(Aaron Goldsmid, ?~1782)같은 유대 은행가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신성로마제국

    16세기 신성로마제국(독일) 금융은 프랑크푸르트의 슈반(Joseph ben David Schwan, ?~1572)이나 미첼 쥬드(Michel Jud, ?~ 1549)같은 유대인들이 이끌었다. 17세기에 들어 합스부르크 왕가는 바쎄비(Jacob Batsheba Bassevi), 핀체를레(Joseph Pincherle), 마르부거(Jacob Marburger)같은 유대 금융가들의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였다. 절대 왕정이 등장하면서 많은 유대인들 특히 아쉬케나지들이 왕궁에 고용되어 필요한 예산을 조달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이로써 “유대인의 어전”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하노버의 베렌트(Leffmann Behrends, 1630~1714), 함부르크의 골트슈미트(Bendix Goldschmidt, ?~1721), 푸랑크푸르트의 베에르(Aron Beer, ?~1740), 비엔나의 베르트하이머(Samson Wertheimer, 1658~1724)와 오펜하이머(Samuel Oppenheimer, 1630~1703)등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 가장 유명했던 유대 금융인들이었다. 쥐쓰 오펜하이머(Joseph Süß Oppenheimer, ? ~1738)는 18세기 초 신성로마제국 남부에서 유명했던 유대 금융인으로, 1738년 몰락하여 처형을 당할 때까지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8세기말 신성로마제국의 주요 유대 금융인으로서는 브룬스비크의 야콥슨(Israel Jacobson, 1768~1828), 베를린의 블레이히뢰더(Bleichröder)가문, 본의 바루흐(Simon Baruch) 가문과 오펜하이머(Solomon Oppenheimer, 1772~1828), 프랑크푸르트 로스챠일드(Rothschilds)가문, 칼스루헤의 하버(Haber)가문, 슈트트가르트의 카울라(Kaulla)가문, 뮌헨의 셀리그만(Aron Elias Seligmann, 1747~1824)등이 있었다.

이태리

    16세기 초 이태리에는 이미 피사(Da Pisa), 볼테라(Volterra), 노르사(Norsa), 델방코(Del Banco), 리에티(Rieti), 트리볼리(Trivoli)같은 유명한 유대 금융가문이 있었다. 서기 1619년 델방코 가문이 베니스 은행(Venetian Banco Giro: 1806년 베니스 왕국 몰락과 함께 문을 닫음)을 설립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재산과 생활양식은 르네상스식 그대로, 예술가들과 문학가들에게 둘러싸여 살았다. 그러나 몬테 피에타(Monte di Pieta: 자선을 위한 전당포)제도의 확산과 종교 개혁으로 인한 교황의 압제로 유대 금융인들의 영향력은 줄어들어, 1570년 프로렌스에서는 피사 가문이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16세기말 로마에는 아직도 60~70명의 유대 대금업자들이 남아 있었고, 1세기가 지난 17세기 말에도 20여명이 남아 있었다. 16세기 초, 이태리 전역에 5백여 곳의 대금 업소가 있었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었다.

유대 여성 금융인들

    유대 결혼 및 재산법은 결혼 지참금, 유산 또는 케투바(Ketubbah: 결혼 계약서)에 따른 이혼, 남편의 사망 등으로 받은 재산을 여성이 관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혼녀나 과부는 부동산이나 (담보로 잡은) 저당물도 물려받을 수가 있었고, 채권은 특히 좋은 재산이었다. 여성의 대금업 점유율은 매우 높아 13~14세기 북프랑스와 영국에서는 50%를, 신성로마제국의 경우는 14세기 중엽부터 15세기 말까지 30%에 달했다. 이 같은 점유율은 독신 여성(보통 과부)또는 그녀들과의 동업 형태로 이루어진 것으로, 남편이나 친척과의 동업을 포함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대부분 귀족이나 왕실을 대상으로 높은 수준의 대금업을 하였다. 조세 수입에 기여한 공로로 스티리아(Styria) 징세관의 자리에 오른 여성(Selda von Radkersburg)도 있었고,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바이에른 주 도시)유대 공동체의 수장이 된 여성 대금업자도 있었다. 부유한 유대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 대금업자들도 납치를 당하여 몸값을 주고 풀려나거나, 강도나 살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세파르디 유대 공동체와는 달리 아쉬케나지 공동체에서는, 여성의 활동이 제한을 받지 않았다. 여성은 겸양지덕을 갖추어야 한다는 할라카의 가르침과는 달리, 사업을 위하여 가톨릭교도와도 접촉할 수 있었다. 사업상 여행을 해야 할 경우는, 남자 또는 수녀로 위장을 하였다. 근대 초 유럽 유대 여성 사업가 비중은 중세 때만큼 높지가 않았다. 이 시기 저명한 유대 여성 금융가로는 하멜른(Hameln: 독일 니더작센 주 도시)의 그뤼켈(Glückel, 1646~1724), 프랑크푸르트의 브렌델레(Brendele, ?~1560), 베를린의 리프만(Esther Liebmann, 1649~1714)등이 있었다.

19세기와 20세기

    19세기 유대 금융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로스챠일드(Rothschild) 가문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결과 유럽 금융의 새로운 중심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로스챠일드 가문의 시조 메이어 로스챠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 1744~1812)는 희귀 동전 수집가로 시작하여, 신성로마제국의 가신국家臣國 헤쎈 카셀(Hessen-Kassel)의 빌헬름(Wilhelm, 1787~1867)왕자 후원으로, 1769년 귀족이나 왕족을 대상으로 금융업을 할 수 있는 궁정 유대인(Court Jew)의 자격을 획득하였다. 빌헬름 왕자는 메이어 부친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로스챠일드의 아들들은 프랑크푸르트의 암쉘(Amschel Mayer, 1744~1812), 비엔나의 솔로몬(Solomon Mayer, 1774~ 1855), 나폴리의 카알(Carl Mayer, 1788~1855), 파리의 제임스(James Mayer, 1792~1868), 런던의 네이선(Nathan Mayer, 1777~1836)등 유럽 주요 은행가들로 성장하였다.

    서기 1810년 아브라함 골드스미드(Abraham Goldsmid, 1756~1810. 런던 유대 은행가)와 배링(Francis Baring, 1740~1810. 독일계 영국 은행가)이 사망하자, 네이션 로스챠일드가 런던 금융시장의 주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영국의 대유럽 금융거래는 그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서기 1815년 비엔나 회의(Congress of Vienna: 나폴레옹 몰락 후 유럽 질서 재편을 위한 회의)이후 로스챠일드 가문은 유럽 전역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특히 (나폴레옹 전쟁으로)가치가 하락한 지폐를 통한 사업을 포기하고, 정부가 필요한 단기 자금 조성에 진력하였다. 서기 1818년 로스챠일드는 프러시아를 시작으로 영국, 오스트리아, 나폴리, 러시아에 대한 자금을 공급하였다. 서기 1815년 3백3십만 프랑이었던 로스챠일드의 자본금은, 1828년 1억1천8백4십만 프랑으로 성장하여 있었다.

기타 상업 은행

    로스챠일드 이외 독일 유대인 은행가들로서는 멘덴스존(Joseph Mendelssohn, 1770~1848))과 블라이히뢰더(Samuel Bleichröder, 1779~1855)가 있었다. 멘델스존은 1795년 베를린에 은행을 설립, 외국 기업 특히 러시아 기업들에 산업자금을 빌려 주었다. 로스챠일드 베를린 직원이었던 블레이히뢰더는 1803년, 자신의 은행을 설립했다. 그의 아들 게르손 블라이히뢰더(Gerson von Bleichröder, 1822~1893)는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 프러시아 정치가)의 막역한 친구로, 1866년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전쟁 당시 프러시아 전쟁 자금을 조달하였고, 1871년에는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으로 인한 프랑스 전쟁 배상금 송금 업무를 처리하였다. 블라이히뢰더 은행 역시 외국 기업에 융자를 하였다. 서기 1893년 그가 죽자 그의 동업자 슈바바하(Paul von Schwabach, 1867~1938)가 이어 받아 사업을 계속하였다.

    바르부르크(Moses Marcus Warburg, 1763~1830)가문은 1798년 함부르크에 은행을 설립하였다. 영업은 주로 함부르크의 대외 무역, 특히 미국과 영국과의 무역을 지원하였다. 바르부르크 가문의 폴(Paul M. Warburg, 1868~1932)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이전 함부르크 은행장으로, 뉴욕에 지사를 설립한 인물이다.

    이삭 슈파이어(Michael Isaac Speyer, 1644~1692)를 시조로 하는 슈파이어 가문은, 18세기말 프랑크푸르트에서 로스챠일드 가문보다 더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문이었다. 서기 1838년, 슈파이어 (Lazard Speyer-Elissen) 은행의 미국 지점(Philipp Speyer and Co)은 남북 전쟁 당시 북부군에 금융지원을 하였고, 전후 철도 건설에도 참여하였다. 또 도이체 은행(Deutsche Bank)과 협업으로, 쿠바와 멕시코에서도 금융 사업을 하였다.

    서기 1789년 오펜하이머가 본(Bonn)에 은행을 설립하였다. 19세기 초 오펜하이머는 쾰른(Köln)으로 이주, 그의 아들 아브라함이 라인란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은행가가 되어 보험, 철도 건설, 산업 투자 관련 금융 사업을 하였다. 밤베르거(Ludwig Bamberger, 1823~1899)와 마르쿠제(Hermann Markuse)는 1870년 도이체 은행(Deutsche Bank)을 설립, 독일의 대외 무역에 적극적인 금융 지원을 하였다. 서기 1851년 한제만(David Hansemann, 1790~1864)이 설립하여 1929년 도이체 은행과 합병한 디스카운트(Disconto-Gesellschaft)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참여하였다. 구트만(Eugen Gutmann, 1840~1925)은 드레스너 은행(Dresdner Bank) 창립자였고, 솔로몬 오펜하이머의 장남 아브라함(Abraham Oppenheimer, 1804~1878)은 1853년 다름슈태터 은행(Darmstädter Bank für Handel und Industrie)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푸에르슈텐베르크(Carl Fuerstenberg, 1850~1933)는, 1856년 베를린 무역회사(Berliner Handelsgesellschaft) 창립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1932년 독일의 가장 중요한 두 은행 도이체 은행과 다름슈테트 은행은 각각 유대 금융가 바쎄르만(Oskar Wassermann, 1869~1934)과 구트만(Herbert Gutman)이 운영하였다.

    영국은 1832년 샐로몬스(David Salomons, 1797~1873)가, 1833년에는 스턴(Stern)형제가, 1835년에 몬타구(Samuel Montagu, 1832~1911), 1859년에는 엘랑거(Emile Erlanger, 1832~1911), 슈파이어 가문, 셀리그만(Seligman)형제 등이 은행을 개설하였다. 그들은 모두 프랑크푸르트 출신 유대인들이었다. 슈파이어 은행은 그리스, 불가리아, 헝가리,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을 위한 금융을 다루었다. 바그다드의 유대인 새순(David Sassoon, 1792~1864)이 1832년 인도 봄베이에 설립한 새순 회사(David Sassoon & Co)는 인도의 면화와 아편을 중국에 팔았고, 일본을 비롯하여 동방 여러 곳에 지사를 설치하여 귀금속, 비단, 고무, 향료, 모직, 밀 등 엄청난 교역을 하였다. 카쎌(Ernest J. Cassel, 1852~1921. 영국 유대 은행가)은 메이어(Carl F. Meyer, 1851~1922. 영국 유대 은행가)와 함께 이집트와 터키에 은행을 설립하였다. 몬테피오르(Moses Montefiore, 1784~1885)는 산업은행을 설립하였고, 오펜하이머(Ernest Oppenheimer, 1880~1957)가 설립한 앵글로-아메리칸(Anglo-American Corp)은, 임로드(Gustav Imroth, 1862~1946. 유대인 금광 주)의 남아프리카 다이아몬드 회사와 사업관계를 맺었다. 에를리히(Hamilton Ehrlich)는 남아프리카 광업 및 금융회사를 설립하였고, 바나토(Barney Barnato, 1851~1897)가 세운 남아프리카 금융회사(South African financing Co)는, 남아 연방의 가장 중요한 기업들 가운데 하나였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로스챠일드의 경쟁자인 푸울드(Achille Fould, 1800~1867)가 나폴레옹 III세를 지원하여, 후일 재무상이 되었다. 그는 부친이 설립한 금융 회사(Fould, Oppenheimer et Cie)를 형제와 함께 상속 받았다. 서기 1852년 마르세이유로부터 파리로 이주한 페레이르(Émile Pereire, 1800~1875)형제는 프랑스와 스페인 철도 건설에 금융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많은 사업에 자금을 공급하였으나, 이로 인해 1867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밖에 중요한 유대 은행으로는 1872년에 설립된 파리 은행(Banque de Paris et des Pays-Bas)이 있었다. 1889~1901년 기간 대 러시아 금융 제공은 로스챠일드 은행을 통해서였다. 이태리 상업은행(Banca Commerciale Italiana)과 이태리 신용 은행(Credito Italiano) 설립, 그리고 포르투갈, 스페인에 대한 투자도 프랑스 로스챠일드, 스턴, 골드 스미드 은행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러시아와 동유럽

    19세기 비엔나에서는 많은 유대 은행들이 설립되었다. 그 중 에스켈레스 은행(Eskeles & Arnstein: 1859년 파산)이 가장 영향력이 있었다. 서기 1821년에는 로스챠일드 은행이, 오스트리아 할인은행(Eskomptgessellschaft)은 1853년, 1855년에는 오스트리아 신용은행(Kreditanstalt)이 개설되어 비엔나 주식 시장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1867년 헝가리 신용은행(Ungarische Allgemeine Kreditbank), 1841년 헝가리 상업은행, 1869년 헝가리 담보 신용은행(Ungarische Hypotheken-bank)등도 모두 유대인들이 세운 은행이었다. 독일계 유대인 페트체크(Otto Petschek, 1882~1934)는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은행을 설립하였다.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러시아에서도 유대인 은행들이 등장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독일에서 이민한 슈티글리츠(Ludwig von Stieglitz, 1779~1843)는 1803년 성 피터스버그에 은행을 설립하여, 러시아 금융계의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남부, 특히 많은 유대 주민들이 있었던 베르디체프(Berdichev: 현 우크라이나 지토미르 주 마을)와 오데사(Odessa: 우크라이나 남부 흑해 연안 도시)에서는 유대인의 금융 활동에 많은 제한이 있었다. 서기 1860년 징세 청부업자 귄츠부르크(Joseph von Günzburg, 1812~1878)는 성 피터스버그에 은행을 세웠고, 그의 아들은 키에프와 오데사에 은행을 설립했다. 서기 1872년 폴리야코프(Lazar Poliakoff, 1843~1913)는 모스크바에 은행(L. S. Polyakov Bank)을 설립하였다. 그와 그의 두 형제는 러시아 남부에도 은행을 설립하였다.

    18세기가 끝나갈 무렵 쾨니크스베르크(Königsberg), 레비(Levy), 시모니(Simon Simoni)같은 많은 유대 금융인들이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폴란드로 이민을 하였다. 그 가운데 에프슈타인(Jacob Epstein)은 폴란드 국왕(Stanisław II August, 1732~1798)궁정 납품업자로서, 금융왕국을 세운 인물이다. 서기 1863년에는 폴란드 봉기(대러시아 항쟁)가 발생하면서, 많은 유대 은행들이 파산하였다. 이 때 파산한 란다우어(Wilhelm Landauer)는 몇 년 후 돌아와, 1913년 금융회사를 다시 설립하였다. 서기 1871년에는 에프슈타인(Mieczyslaw Epstein, 1833~1914)이 바르샤바 할인 은행(Warsaw Discount Bank)을, 크로넨베르크(Leopold Kronenberg, 1812~1878)는 1869년 바르샤바 크레딧 은행과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의 은행(Bank Handlowy)을 설립하였다.

스칸디나비아와 네델란드

    마그네스(L.E. Magnes), 야곱슨(Morris Jacobsson, 1800~1870), 마구누스(Edward Magnus)등 유대금융인들은 1848년 스웨덴에 괴테보르크스(Göteborgs Privat Bank)은행을 설립하였다. 덴마크 금융인 함브로(Joseph Hambro, 1780~1848)와 그의 아들은, 1832년 런던에 정착하여 은행(Hambro's Bank)을 개설하였다. 덴마크 금융계 지도자 그뤼크슈타트(Isaac Glückstadt, 1839~1910)는 1872년부터 1910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은행(Landsmans-Bank)을 경영하였고, 사후 그의 아들이 이어 받았다. 서기 1870년 덴마크 재무상에 올랐던 레비 마르틴(Levy Martin)은, 1873년부터 1897년까지 한델스 은행(Copenhagen Handelsbank) 총재를 역임하였다. 

    서기 1859년에는 룩셈부르크 국제 은행 자회사인 리프만 로젠탈(Lippman, Rosenthal & Co)이 설립되어, 네델란드 정부공채 인수업무를 하였다. 서기 1871년 브럿쎌 출신의 에르레라(Jacques Errera), 오펜하임(Joseph Oppenheim), 스턴(Isaac Stern)과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술츠바하(Sulzbach)형제 등 유대 금융인들은 브럿쎌 은행(Banque de Bruxelles)을 설립하였다. 서기 1812년 알사스로부터 스위스로 이주한 드레퓌스(Isaac Dreyfus, 1786~1845)는 바젤에 은행을 세웠다. 이 은행이 바로 후일 드레퓌스 은행(Dreyfus Söhne & Cie, Banquiers)이다. 이 은행은 후일 바젤 상업 은행(Basler Handelsbank) 설립을 주도하였다. 

    히틀러는 유럽 점령 지역의 유대인 금융기관을 모두 폐쇄하고, 독일내 유대 금융기관은 비유대인에게 넘기거나 아니면 청산 절차를 거쳐 폐쇄하였다.

미국

    식민지 아메리카 대륙의 유대인들은 이미 대금업자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17세기 후반 뉴욕에서 활동한 레비(Asser Levy, ?~ c. 1680)가 그 예의 인물이다. 그들은 해외 친척이나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활동하였다. 프랭크(David Franks, 1740~1793)가 그 예로, 그는 프랑스-인디언 전쟁(오하이오 강 주변의 인디언 영토를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 간의 전쟁)시, 런던 대금업자인 형제 모세의 도움을 받아 영국군에게 군자금을 빌려주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유대인 대금업자는 폴란드로부터 온 살로몬(Haym Salomon, 1740~1785)으로, 극심한 상황 속에서도 미국 독립 전쟁에 필요한 대규모 자금을, 프랑스와 네델란드로부터 어음을 발행하여 유치하였다.

    모세(Isaac Moses, 1742~1818)도 독립전쟁 자금을 동원한 인물로, 후일 뉴욕 은행(Bank of New York) 설립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미국에 유럽형 유대인 은행이 출현한 것은, 19세기 중엽 독일계 유대인들의 대규모 이민이 도착하면서부터이다. 슈파이어 가문의 필립 슈파이어(Philipp Speyer, 1815~1876)와 구스타브 슈파이어(Gustav Speyer, 1825~1883)라던가, 오거스트 벨몬트(August Belmont, 1813~1890), 에마누엘 레만(Emanuel Lehman, 1827~1907)과 메이어 레만(Mayer Lehman, 1830~1897)형제 등이 바로 미국 금융 제도의 토대를 세운 인물들이다. 이밖에도 1840~1880기간 독일계 유대 금융기관인 쿤(Kuhn, Loeb Co), 라자드(Lazard Frères, J.W. Seligman Co), 골드만 삭스(Goldman, Sachs & Co), 라덴버그(Ladenburg, Thalman & Co)등이 미국 금융계 권력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투자은행으로서, 독일계 유대인 이민자들에게는 별 기회가 없었던, 보다 안정적인 상업은행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이들의 금융 지원을 받아 성장한 미국의 기업들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더 많은, 끝을 모르는 자본을 요구하였다. 그러한 자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유대 금융기관들은 유럽 특히 프랑스, 영국, 독일 금융계와의 관계를 적극 활용하였고, 그들과 협업을 통한 대규모 자금 조성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비유대인과의 경쟁에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유대 금융인들은 결혼을 통하여 동맹을 맺기도 했다. 뢰브(Solomon Loeb, 1828~1903)가문, 쿤(Abraham Kuhn, 1819~1892), 쉬프(Jacob Henry Schiff, 1847~1920)가문, 워버그(Moritz Warburg, 1871~1937)가문이 그 예이다. 금융이외 독일계 거대 유대인 회사들은 유대 은행가와 자녀 결혼을 통해, 혈연관계를 통한 자금 조달을 하는 경우도 흔했다. 이러한 혈연과 사업 관계로 인해 뉴욕에는 독일계 유대인 금융 및 기업 귀족 계층이 등장하게 었고, 그 결과 그들의 후손들이 1세기 이상 미국 유대인 공동체의 금융, 문화, 정치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유대 금융기관들은 미국의 자본 형성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한 금융기관으로는 남북 전쟁 이후 연방정부를 위한 자금 마련에 중요한 역할을 한 슈파이어(Speyer & Co), 벨몬트(August Belmont & Co), 셀리그만(J. & W. Seligman)등이 있고, 특히 쿤과 뢰브는 서부 철도 건설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세기 말 셀리그만은 1천만 달러의 자본금을 조성하였고,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뢰브는 일본을 위해 2억 달러 상당의 단기 채권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 전체 금융기관이 보유한 자본에 비하면 유대 금융기관의 자본은 아직 소규모였지만, 그들의 배타적인 협업과 단결은 1890년 반유대를 부른 원인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국제 유대 금융의 상위에 있는 소수의 무자비한 유대인들이 무슨 음모(International Jewish Conspiracy)를 꾸미고 있다는 풍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일계 유대인 금융회사들의 금융 정책은 대단히 보수적이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사회적, 금융적 책임하에 운영되었다. 라자드나 쿤, 뢰브 같은 19세기 유대 금융 가문이 아직도 살아 있지만, 그러나 미국의 금융시장이 거대한 성장을 이루었고 비인격화됨에 따라 그 어느 가문도 과거의 주도적인 위상을 잃지 않은 가문이 없다. 주식 등 유가증권 거래, 투자 분석, 기업 관리에 유대인이 깊이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상업은행의 일반적인 업무 분야에 유대인의 참여는 상대적으로 폐쇄적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현재까지, 금융 산업은 거대화 되어 구식 유대 금융기관은 다른 은행에 합병 또는 매각되어 사라진 곳도 많다. 유대인들은 또 미국 생활에 동화되면서 인종이 아닌 성공을 따라 움직였다. 미국 금융계에는 펠릭스 로하틴(Felix Rohatyn, 1928~2019), 바서슈타인(Bruce Jay Wasserstein, 1947~2009), 시티뱅크의 바일(Sanford Weil, 1933~)등 많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은 종교나 인종적 배경이 아니라, 개인의 통찰력과 능력 때문임은 물론이다.

    헝가리계 유대인 소로스(George Soros, 1930~)는 가장 성공적인 투자자의 한 사람으로 비영리기관에 많은 기부를 하였다. 슈타인하르트(Michael Steinhardt, 1940~)는 헤지 펀드와 벤처 투자를 통해 거대한 부를 형성하였고, 역시 자선 기관에 많은 돈을 기부하였다. 아이칸(Carl Icahn, 1936~)과 제이콥(Irwin L. Jacob, 1941~2019)은 사업가로 명성을 떨친 유대인들이었고, 코헨(Joseph Cohen, 1941~2019)은 골드만 삭스의 투자를 이끈 전략가였다. 카오프만(Henry Kaufman, 1927~)은 저명한 경제학자로서 주식 시장에 대한 자문으로 명성을 떨쳤고, 많은 제자를 두고 있다. 슈와브(Charles Robert Schwab, 1937~)가 이끄는 월스트리트의 슈와브사(Schwab & Co)는 저가 주식 시장으로, 크게 성공을 한 회사이다.

    내부자 거래로 악명을 날린 보에스키(Ivan Boesky, 1937~)나 증권법 위반 범죄를 저지른 밀켄(Michael Milken, 1946~), 이란과의 석유 불법 거래를 하여 처벌 받은 리히(Marc Rich, 1934~2013)등은 악명으로 이름을 날린 금융인들이었지만, 유대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유대인들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부패한 금융인들이었지, 부패한 유대 금융인들이 아니었다.

    20세기 마지막 시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미국 정치, 경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펀(Alan Greenspan, 1926~ )은 20년 이상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 연방준비은행)를 이끈, 워싱턴의 강력한 인물이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유대인 경제학자 루빈(Rober Rubin, 1938~)은 재무 장관이었고 그의 후임자 소머스(Lawrence Sommers, 1954~)는 하버드 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월펜손(James D. Wolfensohn, 1933~2020)은 1995부터 2005까지 10년 간 세계은행 총재였고, 그의 후임자 월포위츠(Paul D. Wolfowitz, 1943~)는 부시(George W. Bush) 행정부에서 노련한 외교 및 국방 정책 보좌관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유대 금융인들은 과거 여러 세기에 걸쳐 여러 나라들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대단히 중요하고 건설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업은 그렇게 수지가 맞는 사업은 아니었다. 부유한 유대인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특히 부유한 귀족이나 기독교도 상인들과 비교하면 더욱 그러했다. 유대 은행가들이 부유해진 것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결과 똘레도(Toledo) 종교회의(586 CE) 이래 1200년 간 법적, 제도적으로 속박 당했던 유대인들이 완전한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획득하고 난 후였다. 그때까지 유대인 개인의 금융 사업은 한계가 있었다. 유대인들의 금융 영향력이 최고에 이른 때는 20세기 초였고, 그 후 그 영향력은 가속도적으로 약화되어 왔다.

2. 주식시장

    유대인 은행가들은 주식시장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유대인들은 대금업과 은행업이라는 과정을 거쳐 주식시장에 참여하였다. 서기 1536년 앤트워프에 처음으로 주식시장이 열리자 아누짐(Anusim: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 당한 유대교도)들이 대거 몰려와 중개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 챨스 V세(Charles V, 1500~1558.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의해 추방을 당하여, 당시 유럽의 경제 중심지였던 암스텔담으로 갔다. 서기 1647년 현재 주식 총 거래의 13%가 포르투갈계 유대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개인별 투자 금액은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다. 서기 1688년, 베가(José de la Vega, 1650~1692. 세파르디 다이아몬드 상인)는 암스텔담 주식 거래에 관한 책을 처음으로 발간하였다. 이때 신성로마제국의 유대인들은 대부분의 상품 거래를 할 수 없도록 금지를 당하고 있었다. 18세기 말 런던 주식 시장은 골드스미드(Abraham Goldsmid, 1756~1810. 유대 은행가)형제가 주도를 하다, 나폴레옹 전쟁 후 로스챠일드의 손으로 넘어갔다.

    미국의 경우는 1792년 뉴욕 주식거래 중개인 위원회 창립 당시 하아트(Ephraim Hart, 1747~1825. 유대계 독일 상인)는 22명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다. 19세기 중엽부터 이 위원회에는 요셉 셀리그만, 쿤, 뢰브, 오토 칸, 쉬프 등 많은 유대계 독일 은행가, 기업가들이 가입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물론 영국 주식 시장에서 유대인의 점유율은 높지 않았고, 20세기 중엽에는 수도 줄고 점유율도 줄었다. 반면 유럽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프랑스 리용과 파리 주식 시장은 18세기초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나폴레옹 전쟁 후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주도권을 잡았다. 철도 관련 주식을 처음으로 상장한 인물은 로스차일드였다. 모빌리에르(Credit Mobilier)는 페레이르(Émile Pereire, 1800~1875) 형제가 설립한 프랑스 최초의 증권회사였다. 서기 1892년 레이나하 백작(Jacob Adolphe Reinach, 1840~1892, 독일계 유대인 은행가)이 일으킨 파나마 운하 건설회사 사건으로-재정 능력이 없는 이 회사를 프랑스 정부가 뇌물을 받고 묵인한 사건-5억 프랑의 투자자 손실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주식 시장에서 반유대 운동이 일어났다.

    서기 1811년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 증권 시장에는 유대인 참여가 금지되었었으나 그후 나치가 등장할 때까지 로스차일드 가문과 몇몇 부유한 유대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이끌었다. 베를린 주식시장은 1739년 2월 처음 거래가 있었고, 이때 부유한 유대인들의 참여가 있었다. 1805년 증권 거래소 관련법이 제정되었고, 1807년 현재 174개 회원사 가운데 159개 사가 유대인 회사였다. 그러나 이 같은 압도적 위치는 얼마 가지 않았다. 공립 은행 설립이 급증하면서 주식 시장에서의 유대인 역할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서기 1882년 총 2천9백 명의 유대인이 주식 시장에 참여하여 점유율 22%를 기록하였고, 1925년에는 총 5천6백20명이 참여하였으나 점유율은 3.84%에 불과했다. 서기 1873~76년 경제위기가 유대인들이 가담한 주식 투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슈퇴커(Adolf Stoecker, 1835~1909. 루터란 목사)의 반유대 운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비엔나 주식 시장 역시 부유한 유대 금융인들이 그 토대를 놓았고, 곧 로스차일드 가문이 이어 받았다. 투자가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다. 19~20세기초 부다페스트, 프라하, 부카레스트 주식 시장도 유대인들이 주도했으나, 그후 반유대주의와 민족주의 등장에 따라 유대인의 역할은 줄어들었다. 주식시장은 유대 자본가들의 정신적 소산물로, 유대인이 지배하고 있다는 좀바르트(Werner Sombart, 1863~1941. 독일 경제학자) 같은 모략가들의 반유대 선전선동이 있었다.

3. 유대 언론

     미국 언론계에서 유대인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 있다. 지난 1세기 동안 전해져온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 자랑스러울 수도 있지만 또한 반유대 선동선전이기도 하다. 시온 원로 의정서(제VIII장 반유대주의 참조)는, 유대인들이 세계 지배의 수단으로써 언론을 장악하려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유대인의 언론 지배”라는 선동선전은 반유대 모략임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언론계에 종사하는 유대인들은 권력자인 동시에 약자로, 이 같은 모순은 미국 유대인 정체성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미국 언론 문화는 유대적일 수도 아니면 반유대적일 수도 있다.

    유대인들이 뉴욕 타임즈를 비롯하여 많은 신문들을 소유하자 유대인의 영향력에 관한 우려가 일었다. 워너 브러더스, 파라마운트, NBC, CBS 등 많은 영화사와 방송국들이 유대 이민자들의 소유가 되었다. 뉴스는 물론 오락 분야도 많은 부분이 이거(Robert Iger, ~1951. 디즈니 회장), 주커(Jeff Zucker, 1965~. CNN, NBC 회장), 에프론(Nora Ephron, 1941~2012. 영화감독 겸 각본 작가),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1946~. 영화 감독) 등 유대인 예술가나 기업가들에게 넘어갔다. 타임지나 워싱턴 포스트 같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기관도 유대 언론인들이 이끌어 왔다. 현재 많은 유대인들이 미국 언론계나 예술계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같은 유대 언론 권력은 자랑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백인들과의 관계가 있는 분야에서는 근심걱정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면에 숨어 있는 유대 권력이 겉으로 드러나면, 미국 주류 사회의 반유대 감정이 노출되었던 것이다. 1947년, 전후 열린 청문회에서 미국 하원 비미국활동 대책 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파시스트, 공산주의자 연계 반정부 활동 조사 위원회. 1938년 수립)는 10명의 작가들을 공산주의 혐의자로 고발을 하였는데, 이 가운데 6명이 헐리우드 유대 작가들이었다. 이때 유대 언론은 숨을 죽이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감춘 적이 있었다. 유대 언론 기관이 여론을 조작한다는 허위 보도는 보수 세력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 보수는 유대 언론과 대중 문화가 진보 정치를 주도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시각으로 보고 있다. 1980년대 초 미국 영화배우 협회 회장이었던 아스너(Edward Asner, 1929~2021. 영화 배우. 아쉬케나지)는, 미국 지원을 받은 엘살바도르 군부에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모금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CBS는 그를 유대인과 좌익 간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공산주의자 돼지라고 비난하고, 그의 출연을 중지시켰다. 

    정치인들이 유대 언론을 희생양으로 삼은 일은 흔했다. 1996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도울(Robert Dole, 1923~2021)은, 랩 음악과 액션 영화가 지나치게 폭력적이라고 주장했다. 바로 유대인 레빈(Gerald Levin, 1939~)이 경영자로 있던 타임 워너(Time Warner)를 지목한 말이었다. 사실 폭력적인 작품은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 1931~. 호주계 미국인)의 뉴스 콥(News Corp: 영화 및 언론 릅)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헐리우드에서 발생하는 과오의 이면에는 언제나 “유대인” 책임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 언론이나 예술은 유대 특성을 나타낸 적이 없다. 유대인의 문화적 정체성이 아닌 미국적인 판타지를 창조해온 것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나 “루돌프 사슴 코”에서 버얼린(Irving Berlin, 1888~1989. 유대계 미국 작곡가)이 그러했듯이, 유대 예술가들은 연예산업을 통해 미국 기독교 문화의 보편화에 책임을 져왔다. 반유대 모략에도 불구하고 인종적, 종교적으로 소수인 유대인들이 이처럼 미국 문화 발전에 공헌할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의 정체성이 아닌 미국적인 가치와의 조화, 그들이 처한 특이성(즉, 생존)에 대한 유대 민족의 도전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XII. 유대인 부의 비밀

    부유함과 부자를 경멸하고, 가난을 바람직한 덕목으로 본 기독교와는 달리 유대인들은 가난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히브리 성서나 탈무드는 부를 매우 긍정적으로 본다. 타인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이들에게 은총을 내리신다(신명기 15:10, 이사야 1:17~19, 잠언 19:17). 하느님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부유함과 평화로 보상을 하신다(레위기 26:3~13, 신명기 11:13~15).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부를 누리는 사람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다. 탈무드는 허락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예루살렘 탈무드, 키두쉰 4: 12).

    탈무드는 정직한 근로가 존엄하다는 걸 강조한다. 제1세대 아모라임(Amoraim: 구전 토라를 가르친 유대 학자)이었던 아리카(Abba Arikha, 175~247 CE)가 제자 카하나(Rav Kahana: 제2세대 아모라임)에게 이르기를 “거리에서 짐승 가죽을 벗기고 그 대가를 받을 것이니, 나는 잘난 사람이라 이 일은 나의 격에 맞지 않아, 라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바빌로니아 탈무드. 바바 바트라 110a).

    탈무드의 현자들은 다양한 직업에 종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공리공론이 아닌, 생계를 위한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한 평범한 사람들로, 그들의 말이 탈무드를 이루어낸 것이다. 예를 들어 힐렐(Hillel, ?~10 CE. 탈무드 현자)은 나시(Nasi: 23~71명의 유대 원로들로 구성된 회의 의장)가 되기 전 나무꾼이었고, 샤마이(Shammai the Elder, 50 BCE~30 CE. 미쉬나 현자)는 목수였다. 칠키야(Abba Chilkiyah: 제2성전 기간 중 탈무드 현자)는 일일 노동자였고, 랍비 사카이(Yochanan b. Zakkai: 1세기 유대 랍비 현자)는 40년 동안 장사를 했으며 샤울(Abba Shaul: 랍비 현인)은 무덤 파는 노동자였다. 랍비 요세프(Chiya b. Yosef)는 소금 장수였다. 랍비 아바(Abba Bar Abba: 2세기 말 경 탈무드 현자)는 비단 장수였고, 그의 아들 사무엘(Mar Samuel)은 의사였다. 이들 모두 탈무드 현자들이었다.

    탈무드 현자들은 백성들이 양심적으로 일하도록 격려하였다. 그들은 네 가지 일 즉 토라 공부, 선행, 기도 그리고 직업에 충실할 것을 가르쳤다(바빌로니아 탈무드, 베라코트 32b). 랍비 하나시(Yehudah HaNasi, 135~217 CE)는 아카데미아에 갈 때마다 물통을 지고 갔는데, “일은 일하는 사람을 영예롭게 함으로 위대하다”라는 말을 했다(바비로니아 탈무드, 네다림 49b). 시편(128:2)에는 “네 손으로 일하여 그것을 먹으니, 그것이 네 복이며 너의 행복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본 장에서는 부자의 길로 가는 탈무드의 가르침을 소개코자 한다. 인용한 탈무드는 아딘 슈타인살츠 본(Adin Steinsaltz, 1937~2020. 랍비. 철학자. 번역가), 아트스크롤 본(ArtScroll: 미국 뉴저지 Mesorah 출판사 본), 손치노 본(Soncino: 영국 출판사)을 사용하였다. 이름의 “b"는 히브리 이름일 때는 ”ben"을, 아람어 이름일 경우는 ”bar"를 나타낸다. 예컨대 “Eliezer b. Shimon”는 시몬의 아들 엘리에제르, “Simon bar Kokhba"는 코크바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이다. 탈무드에서는 일반적으로 하느님을 ”거룩하신 하느님(HaKadosh Baruch Hu)“으로 부른다.

자선

    탈무드는 부를 거룩하신 하느님이 주신 보상(바빌로니아 탈무드, 타아니스 9a)으로 설명한다. 신명기(14:22)의 "너희는 해마다 씨를 뿌려 밭에서 거둔 소출 가운데 그 십분의 일을 떼어두었다가"라는 말씀에 따라, 탈무드는 부자가 되기 위해 10분의 1을 떼어두라고 권고한다. “십분의 일(tithe: 십일조 또는 조금이라는 뜻)”이라는 어휘는 히브리어로 “부자가 되다”라는 말과 유사하다. “인심이 후하면 더욱 부자가 되지만 인색하게 굴면 오히려 궁해진다(잠언 11:24)”는 말씀은, 가난한 사람에게 자신의 돈을 주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부는 의인에게도 아름답고 세상에도 아름다운 것이다(바빌로니아 탈무드, 아보스 6:8). 남을 돕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사용한 부자는 탈무드 현자들의 존경을 받았다(바빌로니아 탈무드, 에루빈 86a). 자선이 부자가 되는 길이라는 말은 다른 문헌에서도 발견된다(바빌로니아 탈무드, 샤보스 119a). 랍비 요시(Yishmael ben Yosi. 3세기 초 랍비)가 랍비 예후다 하나시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거둔 십일조를 타인에게 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은 재물과 함께 상급을 주신다”고 하였다. 탈무드 현자들은,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그들에게 십일조 주는 일을 게을리 하면, 벌을 받아 가난해진다고 하였다(바빌로니아 탈무드, 테무라 16a). 레위기(26장)와 신명기(28:15~29)에도 이 율법을 어긴 죄에 대한 처벌로 한발, 역병, 기근, 농작물 손실 등 무시무시한 처벌의 말씀이 있다.

    구약 룻기(2:2~9)는, 부유한 지주 보아즈가 수확 후 남은 이삭에 관한 율법을 지킨 이야기이다. 이삭줍기는 유대교 성서(타나크)가 허락한, 가난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권한 중 하나이다. 레위기(19:9)에도 “거두고 남은 이삭을 줍지 말라”는 계명이 있다. 만일 수확 후 들에 남은 이삭이 있다면, 그 땅의 소유주는 그것을 거두어들일 수 없다는 말이다. 가난한 사람 즉 떠돌이나 고아, 과부들을 위해 남겨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신명기 24:19). 가난한 룻은, 보아즈의 들에서 수확 후 남은 이삭을 거둔 여인이었다. 룻기는 부유한 지주 엘리멜렉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엘리멜렉은 기근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해질 것을 알고 고향 예루살렘을 떠나 모압으로 갔다. 그는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을 긍휼이 여기지 않았고 돕고 싶지도 않았음으로, 고향을 버리고 떠났던 것이다. 이에 대한 벌로 그는 건강은 물론 생명까지 잃었다. 반면 그의 혈족 보아즈는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 번영을 이루었다.

    구리온(Nakdimon ben Guryon)은 1세기 경, 제2성전이 파괴되기 전 예루살렘에서 가장 부유했던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바빌로니아 탈무드, 기틴 56a). 어느 날 랍비 요하난(Yochanan b. Zakkai. 1세기 무렵 현자)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의 제자들이 뒤를 따라 걸었다. 길을 가던 도중 그는 아랍인 소유 소들이 배출한 똥에서 보리 낟알을 줍는 어느 젊은 여인을 보았다. 그를 보자 여인은 머리칼로 얼굴을 가린 채 그의 앞을 가로막고 말하기를 “어른이시어, 제게 먹을 것을 좀 주십시오” 그가 묻기를,

“당신은 누구시오?” 그녀가 대답하였다.

“저는 구리온의 딸입니다” 그가 놀라 말하기를,

“저런! 당신 부친 재산은 어떻게 된 일이오?” 그녀가 대답하였다.

“재산을 지키는 일은, 그 재산을 (자선을 하여)줄이는 것이다”라는 속담이, 또는 '재산을 지키는 방법은 자비심이다'라는 말이 예루살렘에 있지요." 요하난이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 시아버지 재산은 어찌 된 일이오?” 그녀가 대답하였다.

“돈 때문에 돈을 잃었지요. 랍비여, 어르신께서는 저의 결혼 계약서에 서명을 하신 일을 기억하시나요?” 요하난이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그녀의 결혼 계약서에 서명한 일이 기억난다. 그 문서에는 그녀의 부친이 주는 황금 일백만 량의 결혼 지참금 이외에 그녀 시아버지가 약속한 재산도 있었다.” 요하난은 울음을 터뜨리며 “오, 이스라엘이어 행복할지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한 어느 나라나 민족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나, 그렇지 않을 경우 야만족 나라 아니 야만족 나라가 기르는 짐승의 손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외쳤다. 구리온이 자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건 사실일까? 요하난이 계속하여 말하였다.

“바라이타(Baraitha: 구전 토라에 있는 전승)는 가르치기를, 구리온이 공부를 하기위해 집을 떠날 때 그가 가는 길에는 좋은 품질의 모직을 깔았는데, 그의 뒤를 따라가며 가난한 사람들이 그 모직을 거두어 들여 사용하였다. 내말인 즉슨, 그는 자신의 영예를 위하여 길에 모직을 깔았을 뿐, 자선을 행한 것은 아니다. 낙타에는 그 힘에 따라 짐을 싣는다(부자일수록 책임이 크다는 말).”

    이 이야기의 교훈은 명백하다. 부유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도울 의무가 있다는 가르침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지 않으면, 그 징벌은 가난이다. 자선은 무명으로 하는 것이 이상적이며, (자선가의)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자선을 뜻하는 히브리어 체다카(Tzedaka)는, 옳음과 정의로움을 뜻한다. 자선은 의무이며, 남다른 관대함으로 보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할 때, 당연히 도와야 한다. 만일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 야훼께서 지으셨음으로, 따라서 야훼께서는 이 부자를 가난하게, 이 가난한 사람을 부자로 만드실 것이다(바빌로니아 탈무드, 테무라 16a). 랍비 여호수아(Yehoshua ben Levi. 3세기 탈무드 현자)는, 누구든 자선에 익숙한 사람은 지혜와 부를 갖추고 아가다(Aggada: 탈무드와 미드라쉬에 있는 비율법적 해설서)에 통달한 자손을 얻어,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바빌로니아 탈무드, 바바 바트라 9b).

사업에서의 정직성

    알렉산드리아 현자들이 랍비 여호수아에게, 부자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무슨 일이든 정직하게 즉, 부자가 되려면 하는 일에 정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그의 대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랍비 여호수아에게, 재산을 모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상품에 많은 시간을 투입하고(연구하고), 성실을 다하여 일해야 한다고 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현자들이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였으나 부자가 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음으로, 차라리 모든 재산의 주인인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겠다고 했다(하까이서 2:8). 결국 탈무드는 두 가지 즉, 사업에서의 정직성과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등 두 가지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탈무드는 “네 동료의 돈을 네 돈처럼 귀히 여기라(바빌로니아 탈무드, 아보스 2:12)”는 말로 가르치고 있다. 이는 사업에서 정직성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사업을 정직하게 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토라를 준수하는 사람이다(출애굽 15:26).

    경건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타인에 끼치는 손해와 불법 행위를 다루는 율법을 흔들림 없이 준수하여야 한다(바빌로니아 탈무드, 바바 카마 30a). “네가 한 일에서 정직하였느냐?”는 사후 최후의 심판에서 처음 받는 질문이다(바빌로니아 탈무드, 샤보스 31a). 사업이 나쁠 때는, 속임수를 생각하기 쉽다. 이 때 메주조트(Mezuzot: 신명기 6:4~9 구절을 적은 조그만 두루마리)를 챙겨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다.

    랍비 후나(Huna, 3세기 바빌로니아 탈무드 현자)는, 가지고 있던 포도주 4백 통이 모두 식초로 변한 일이 있었다. 랍비 여호수아를 비롯하여 많은 현인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들이 물었다(그 손실의 원인을 알기 위해). 후나가 뒤로 물러서며 “내가 잘 못한 것으로 의심하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이유 없이 사람을 처벌하십니까?” 라고 현인들이 반문했다. 랍비 후나는, 고쳐야할 잘 못된 일을 자신이 저지른 사실을 누군가 알고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현인들은 “우리가 선생님에 대하여 들은 바는, 소작인의 당연한 권리임에도 그에게 포도나무를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후나가 말하기를, “그가 나에게 맡겨 놓은 포도나무라도 있는가? 그는 나로부터 모든 포도나무를 훔쳐갔노라(즉, 소작인이 정당한 몫 이상의 포도나무를 가져갔다는 말).” 현자들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말하기를 “이는 사람들이 말하는, 도둑으로부터의 도둑질도 도둑질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다시 말해 후나는 부정직한 소작인에 대한 자신의 합법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자기 것으로 해석하여 도둑질을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 이에 후나는 소작인 몫의 포도넝쿨을 돌려주기로 하였다. 그러자 식초가 다시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다른 이야기로는 식초 가격이 올라 포도주 가격으로 팔 수 있었다고 한다(바빌로니아 탈무드, 베라코스 5b. 아트스크롤 본).

    이 이야기는 윤리적으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성공을 하며, 정당하지 못한 사람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벌을 받는다는 말을 하고 있다. 만일 누구든 불행한 일이 발생하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탈무드는 가르치고 있다. 앞에서 말한 포도주 4백통은 하나의 상징일 수도 있다. 토라에는 아브라함이 히타이트 사람 에브론(Ephron)으로부터 족장의 동굴(Machpelah: 예루살렘 남쪽 30킬로 지점 소재 동굴. 유대교 및 이슬람 성지)을 사기 위해 4백 세겔을 지불한 이야기가 있다(창세기 23:16). 탈무드는 죽은 아내 사라의 묘지 터가 필요했던 아브라함을 속인 에브론을 나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늘 날 지나친 의약품 값을 받는 수많은 제약회사들이 바로 에브론의 흔적이다.

    부자가 재산을 보존하고 싶다면 일꾼들에게 제때에 임금을 지불해야 하고, 오만한 자세로 임금을 지불하지 말라고 하였다. 임금 지불 지연(레위기 19:13), 임금 떼어먹기, 공적 책임의 전가, 재산이 있다고 오만하면 재산을 잃게 되며, 겸손한 사람은 땅을 차지하고 평화를 누릴 것이다(바빌로니아 탈무드, 수카 29b).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면 재산 상 파멸이라는 징벌이 따를 것이다. 랍비 카마(Chanina bar Chama. 제1대 아모라임)는 돈을 빌려 주었다. 이자는 하루에 빌려준 돈의 1/8을 받기로 하였다. 그는 돈이 아닌 물건을 빌려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그는 모든 돈을 잃었다. 랍비들은 이자를 금지한 하느님의 뜻을 어긴 징벌이라고 했다. 게마라는 그가 돈을 빌려주는 일과 삽을 빌려주는 일을 같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돈을 물건으로 보고, 이자를 그 돈의 사용료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삽의 경우에는 감가상각이 된 채 빌려간 삽 그대로 돌려주지만, 돈은 감가상각이 되는 것도 아니고, 빌려간 돈 그 자체를 돌려주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카마의 행위는 분명 이자를 목적으로한 대금이라고 했다.

    랍비 엘레아자르(Shimon ben Eleazar. 타나임 현자)는 “돈놀이하지 않으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 사람, 이렇게 사는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이 있다고 하였다(시편 15:5). 이는 또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면, 그의 재산이 붕괴될 것임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자를 받지 않고 돈을 빌려주어도, 망하는 사람이 있다. 이에 대해 랍비 엘레아자르가 말하기를, 이자를 받지 않고 망한 사람은 다시 일어서게 되나, 이자를 받은 사람은 다시는 재기할 수 없다고 하였다(바빌로니아 탈무드, 바바 메치아 70a).

    율법 준수로만 충분하지 않다. 탈무드에 따르면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유는, 율법 충실히 따랐으나 그 이상의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바빌로니아 탈무드, 바바 메치아 30b). 탈무드는 율법 준수 이외에 최고의 윤리적 행위인 “경건의 길”을 말하고 있다. 경건한 자세로 사업을 하는 사람은, 비록 돈이 된다 할지라도 타인의 어려움을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경건한 사람은 타인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남에게 코웃음을 치면, 가난과 질병으로 징벌을 받는다. 랍비 케티나(Ketina. 바빌로니아 유수 시절 현자)는, 백성을 업신여기고(조롱하고) 신하와 함께 흥청거리는 왕(호세아 7:5)에 대해 말하기를 “하느님께서 조롱하는 자로부터 손을 거두시었다”라고 했다(바빌로니아 탈무드, 아보다 자라 18b).

안식일을 영광스럽게

    부자가 되는 열쇠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탈무드에 따르면, 안식일을 영광되게 보내면 큰 재물로 보상을 받는다고 했다(바빌로니아 탈무드, 샤보스 118b, 119a). 이는 1주 내내 일을 삼가라는 뜻이다. 안식일에는 특별한 음식을 먹고 맛있는 포도주를 마시며 즐겁게 보내야 한다. 마늘과 사탕무로 요리한 커다란 생선 음식을 권하기도 한다(바빌로니아 탈무드, 샤보스 118b). 안식일을 즐겁게 보내는 사람은 야곱의 유산으로 먹고 살 수 있다고 했다(바빌로니아 탈무드, 샤보스 118b). 안식일에 정성을 다하여 키두쉬(Kiddush: 축성祝聖)를 올리면, 주전자에 포도주가 가득할 것이다(부자가 될 것이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샤보스 23b).

    랍비 유다 하나시가 랍비 할라프타(Jose ben Halafta. 2세기경 제4대 타나임)의 아들 랍비 이스마엘(Yishmael)에게, 이스라엘 땅이 왜 부유한지를 물었다. 이스마엘이 대답하기를, 그 백성들이 십일조를 떼어 놓기 때문이라고 했다(신명기 14:22). 십일조를 떼지 않는 바빌로니아는 왜 부유한지 물었다. 그들은 토라를 준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나라들이 부유함은 왜 그러한가 또 물었고, 안식일을 지키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랍비 아바(Chiya bar Abba, 3세기말 제3대 아모라임 현인)는 라오디케아(Laodicea: 터키 고대 도시)를 방문했을 때 어느 부자로부터 초대 받은 적이 있었다. 부자가 그의 앞에 황금 식탁을 가져왔다. 열여섯 사람이 들어야 할 정도로 무거운 탁자였다. 그 탁자에는 열여섯 개의 은으로 된 끈이 매어 있었고, 식탁 위 그릇에는 갖가지 음식이 담겨 있었는데 모두 맛이 있고, 향기로웠다. 그 음식을 차리면서 부자가 하는 말이,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야훼의 것,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야훼의 것(시편 24:1)”이라고 했다. 그리고 식탁을 치우면서 “하늘은 야훼의 하늘이요, 땅은 사람들에게 주셨다(시편 115:16)”라고 했다. 그가 주인에게 무슨 일을 하기에 이처럼 큰 상을 차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 주인이 대답하기를 자신은 도살업자로, 동물을 죽여 좋은 고기를 보면 안식일에 쓰겠다는 다짐을 한다고 하였다. 랍비 아바가 주인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바빌로니아 탈무드, 샤보스 119a).

토라 준수

    바빌로니아가 십일조를 떼지 않아도 부유한 이유는 토라를 지키기 때문임을 전술한 바 있다. 토라의 계명을 지키면 또한 부의 보상이 따른다. 랍비 요나손(Yonason Sacks. 뉴욕 예쉬바대 총장)은,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토라를 준수하면 결국 부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부자이기 때문에 토라 준수를 게을리하면, 결국 가난해진다고 하였다(유대인 윤리 모음 족장의 윤리 4:11).

관리의 정직

    탈무드는 공동체 지도자가 되어 정직하게 일을 하여 백성들의 신뢰를 얻으면, 하느님의 보상으로 부자가 된다고 하였다. 랍비 이디(Nehilai bar Idi)는 사울의 예를 들어, “먼저 사울이 베젝에서 그들을 점호해 보니 이스라엘 사람이 삼십만, 유다 사람이 삼만이었다(사무엘상 11:8).” “그래서 사울이 총동원령을 내리고 델라임에서 점호해 보니 보병이 이십만이었고 유다측에서도 일만이 가담했다(사무엘상 15:4).” 사울은 이를 양의 숫자로 계산하였다(바빌로니아 탈무드, 유마 22b). 이는 정직하고 믿음성 있게 일을 한 사무엘에게 하느님이 보상을 하신 것이다. 사무엘은 부자가 되고 수많은 양떼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지혜 습득

    지혜가 있으면 또한 부유해질 수 있다(바빌로니아 탈무드, 바바 바트라 25b). 랍비 엘레아자르는 “지식을 갖춘 사람은 결국 부유하게 될 것이며(잠언 24: 4), 지식을 가져야 모든 귀함과 기쁨으로 방을 채울 것이다(바빌로니아 탈무드, 산헤드린 92a)”라고 하였다.

    이 말은 “그(토라) 오른손에서 장수長壽를 받고 그 왼손에서 부귀영화를 받는다” 는 잠언(3:16)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토라의 오른 손에는 장수만 있고, 부와 명예는 없다는 말일까? 물론 아니다. 토라의 오른손은 생애도 길고, 부와 명예도 따른다는 말이다. 반면 토라의 왼손은 부와 명예를 뜻하나 생애는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토라의 오른손은 토라를 깊이 공부하고 그 가르침을 터득하는 것이고, 왼손은 토라를 피상적으로 공부하고, 건성건성 이해하는 것이다.

올바른 직업 선택 

    랍비 메이르(Meir. 제4대 타나임)는 자기 아들에게 “깨끗하고 쉬운” 직업을 갖도록 가르치고, 가난과 부유함이 함께하는 직업이란 없음으로, 부자가 되도록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했다. 가난이나 부유함이 어떤 특정 직업에서 오는 것이 아닌, 개인의 뛰어난 소질과 미덕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했다(바빌로니아 탈무드, 키두쉬 82a). “깨끗하고 쉬운”게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치가 않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아이델(Shmuel Eidels, 1555~1631. 랍비, 탈무드 학자)은 “정직하고 위험이 적은” 직업을 뜻한다고 하였다.

    프리드만 보고서(Friedman: 탈무드에 관한 2001년 학술 보고서)는 탈무드의 관점에서 이상적인 직업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정신적인 추구가 가능할 것.

. 부정직 또는 성적 타락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

. 사람과 사회에 도움이 될 것.

. 이익이 있어 부자가 될 수 있어야 할 것.

. 일이 깨끗하고 즐거워야 할 것.

. 지나치게 격렬한 일이 아니어야 할 것.

    탈무드는 또한 오만하고 부정직하며 성적으로 부도덕하고, 끊임없이 고군분투해야 하는 직업을 피할 것을 말하고 있다. 기업은 이러한 일을 피해야 하며 사람과 사회에 도움이 되고, 이윤을 남기며, 근로자가 청결하고 상쾌한 가운데 품위 있게 일을 할 수 있는 사업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아마 “최고의 의사들은 지옥으로 갈 운명이다”라는 탈무드의 언급(바빌로니아 탈무드, 키두쉰 82a) 때문일 것이다. 탈무드 현자들은 의사라는 직업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이익에만 치우쳐 가난한 사람을 외면할 경우 저지를 수 있는 해악을 의사들에게 경고한 것이다.

    토사포트(Tosafot: 중세 탈무드 해설서)에 따르면, 율법학자들이 글을 팔아 부자가 되면 일을 하지 않아 토라나 테필린, 메주조트 같은 문헌들이 부족할 것임으로, 예루살렘 시나고그(Synod: 제2성전 시기 120명의 율법학자, 선지자등으로 구성된 최고회의)는 율법가들을 스물네 번 굶겼다. 글을 써도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바빌로니아 탈무드, 페사킴 50b). 즉, 부자가 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함은 물론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축복의 말

    랍비 후나(Huna, 212~297)은 가난하여, 안식일 제례에 쓸 포도주를 사기 위해 매고 있던 가죽 허리띠를 담보로 하여 돈을 빌렸다. 그 대신 풀로 만든 허리띠를 찼다. 그 모습을 본 그의 스승이 그가 한 일을 알고는 “하느님께서 너의 전신에 비단옷을 입히실 것이다” 라고 했다. 이 축복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져, 후나는 부자가 되었다. 키가 작았던 그가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찾아온 딸과 며느리가 보니, 말 그대로 그는 전신이 비단에 싸여 있었다(바빌로니아 탈무드, 메길라 27b). 그가 받은 은총에 놀란 어느 랍비가 물었다. 후나가 대답하기를 “당신에게도 역시 같은 축복이 내리시기를. 축복의 말을 받은 후, 그 말을 한 이에게 ‘당신에게도’라고 말하는 것은 예의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내 존중

    아내를 존중하면 부자가 된다고 탈무드는 가르치고 있다. 현자들은 가정이 평화로우면(Sholom bayis) 은총이 내린다고 하였다. 남편은 언제나 아내를 존중해야 하는 바, 가정에 내리는 은총은 오직 아내의 덕이기 때문이다(창세기 12:15~16). 아내를 공경하면 부자가 될 것이다(바빌로니아 탈무드, 바바 메치아 59b).

    사람이 가난해지는 세 가지가 있다. 옷을 벗은 채 침대 앞에서 소변을 보는 일(게으르다는 말), 손을 닦지 않고 전례를 드리는 일(식사 전 손을 닦지 않는 다는 말), 면전에서 아내로부터 꾸지람을 듣는 일이다(아내에게 충분한 장신구를 마련해 주지 않았다는 말. 바빌로니아 탈무드, 샤보스 62b). 불쾌하고 불결하며 구역질나는 행동은 가난과 관련이 있다. 랍비 히스다(Hisda, ?~320. 탈무드 학자)는 “손에 물을 가득히 하여 닦은 바, 하늘이 내게 손 가득히 복을 주셨다.” 라고 했다(바빌로니아 탈무드, 샤보스 62b). 식사 전 충분한 물로 손을 깨끗이 닦는 일은 복을 가져온다(위생에 철저하여야 한다는 말). 가난해지는 세 번째 원인은, 지나치게 아내에게 인색하기 때문이다.

    잠언(31:10~31)에는 귀한 여인(Eishes Chayil)에 대한 찬가의 말씀이 있다. 히브리어로 하일(Chayil)은 경건, 올곧음, 가치, 부, 성공 등을 뜻한다. 여기서 말한 여인이란 근면성실하고 생산적이며 정직하고, 가난한 사람에 친절하고 가족과 하느님께 헌신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여인은 가정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하여 번영 시킨다.

    현자의 가르침은, 아내가 버는 돈을 취하려고 하는 자는 결코 축복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아내가 번다는 말은 팔기 위해 물레를 돌려 실을 짜, 그 무게로 돈을 번다는 말과 같다. 그 돈은 몇 푼 되지 않고, 팔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어찌됐던, 여인이 노동의 생산물을 파는 일은 칭찬 받을 일이라고 하였다(잠언 31: 24~25).

검소한 생활

    탈무드는 재산 자랑을 경계한다. 지나친 재산 과시는 오만을 부른다고 하였다. 성경에도 부유함에 따르는 위험에 관한 말씀이 있다(신명기 8:11~18). 성공한 사람은 “내힘, 내 능력으로 이 모든 부를 이루었노라”라고 생각하기 쉽다. 성경은 이 세상의 쾌락에 지나치게 빠져든 유대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신명기 32:15). 재산은 하느님이 주신 것임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프리드만 보고서(2002)는, 부의 과시는 유대 율법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재산 자랑을 하면 자신을 들어내어 유대인의 적들을 비롯하여 타인의 질투심을 부르고, 돈이 없어 사치한 생활을 못하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며, 오만을 부른다고 했다. 하느님이 재산을 주신 뜻은 타인과 나누기를 위해서이며, 한 사람의 자기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왕에게조차도 지나친 은과 금이 허락되지 아니하며(신명기 17: 17), 이는 마음이 부풀어 올라 제 동족을 얕잡아보는 일도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신명기 17:20).

    탈무드는 “부유함은 절약”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바빌로니아 탈무드, 메나코스 86a). 이 말은 덜 익은 올리브 열매로 기름을 짜 버리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랍비 아바(Ḥiyya bar Abba. 제3대 아모라임)는 이 기름을 버렸을 것이나, 랍비 시몬(랍비 유다 하나시의 아들)은 이 기름을 가져다가 음식에 섞어 먹었을 것이다. 랍비 시몬은 부자였다.


XIII. 그들이 만들어 온 이야기

선사 시대

    현재의 이스라엘 영토에 살았던 최초 인간에 관한 가장 오래된 증거는 갈릴리해 인근 우베이디야(Ubeidiya)에서 발견된 돌도끼로, 1백5십만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론(Yiron: 이스라엘 북부 요르단 접경 지역 소재 키부츠)에서 발견된 부싯돌은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밖에도 선사 시대의 유적으로 1백4십만 년 전의 아슐리안 석기(Acheulean: 직립 원인과 하이델베르크 원인이 사용한 구석기), 루하마 유물(Bizat Ruhama: 북 네게브 루하마 키부츠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과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을 건네 준 야곱의 딸 다리(Gesher Bnot Yaakov: Korazim 고원과 요르단의 여울목을 연결하는 다리)가 있다.

    카르멜 산(Mt. Carmel: 이스라엘 북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있는 산)의 엘 타분(el-Tabun)동굴과 에스 스쿨(Es Skhul) 동굴에서는 네안데르탈인과 현대 인류의 초기 유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지역의 지층은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략 1백만 년 이상에 걸친 인간 진화의 역사를 담고 있다.

-에스 스쿨-

또 다른 구석기 유적으로는 케셈(Qesem cave: 이스라엘 Kafr Qasem 시 인근의 전기 구석기 유적지)과 마놋 동굴(Manot cave: 갈리리 호수 서쪽 호모 사피엔스의 두개골이 발견된 곳)이 있다. 아프리카 밖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현대 인류의 화석으로는 스크훌 동굴(Skhul cave: Carmel 산 소재)과 카프제 동굴(Qafzeh cave: 하 갈릴리 Nazareth 인근 소재)에서 발견된 호모 사피엔스 두개골이 있다. 이들은 12만 년 전, 이스라엘 북부에서 살았던 현대 인류의 조상이다. 대략 기원전 1만 년 무렵, 이곳에는 나투피안 문화(Natufian culture: 기원전 1만5천년부터 1만1천5백년까지 Levant 지역에 존재 했던 후기 구석기 문화)가 있었다.

    기원전 4천5백 년경, 가술 문화(Ghassulian Culture: 동석기 중, 후기에 레반트 남부에 있었던 문화)라고 불린 최초의 문화가 가나안으로 유입되면서, 가나안 동석기銅石문화(Chalcolithic, 4500~3500 BCE)가 시작되었다. 가술인들은 원래 코카서스와 자그로스 산맥(Zagros: 현재의 이란과 이락 북쪽, 터키 남동쪽을 잇는 긴 산맥) 북서쪽이 만나는 지역으로부터 온 사람들로, 철을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 왔다. 구리 세공에서도 전문가들이었고, 고대세계에서 앞선 금속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세공품은 후기 메이콥(Maycop, 대략 3700~3000 BCE. 코카서스 서부에 존재했던 고대 청동기 문화) 문화와 유사하여, 그들이야말로 금속 가공의 원조일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의 구리광산은 와디 페이난(Wadi Feynan: 요르단 남부 소재)에 있었다. 구리는 공작석(孔雀石)의 형태를 띤 백운암白雲(Dolomite)으로부터 채광되었다.

-자그로스 산맥-

광석을 녹여 구리를 뽑아낸 지역은 베르셰바 문화권(Beersheba: 대략 4200~4000 BCE 기간 네게브 북쪽 베르셰바 분지에 있었던 문화)에서였다. 그들은 바이올린 형태의 인형을 만들었는데, 이는 키클라드 문화(에게해 Cyclades 군도)나 메소포타미아 북부 바크(Bark)문화와 유사한 공예품들이었다. 동석기 시대가 끝날 무렵 남지중해 해변 샤론 평야에, 엔 에수르(En Esur) 성읍이 출현하였다. 기원전 3천년 무렵 초기청동기 시대 이 성읍은 인구 5~6천명으로 요새화된, 당시로서는 전형적 형태의 도시였다.

-가술 인형-

    청동기 시대 초기(3500~2000 BC)에 이르기까지 에블라(Ebla: 시리아 땅에서 일어난 여러 고대 왕국들 중 하나)를 비롯하여 많은 지역들이 발전하였다. 에블라는 기원전 2300년경, 메소포타미에서 일어난 사르곤 대왕(Sargon the Great, c. 2334~2279 BCE 재위. 수메르를 정복하고 아카디아 제국을 창건한 인물)에게 복속되었다가, 그후 나람 신(Naram-Sin, 2254~2218 BC. 사르곤의 손자)의 아카디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수메르인들이 “천막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부른 “마르투(Martu)” 족은, 후일 아모리인(Amorite)들의 선조였다. 마르투는 유프라테스 강 서쪽에 있던 왕국으로 사르곤 시대보다 앞선, 적어도 수메르(Sumer: 기원전 6~5천 년 동석기石器시대와 초기 동기시대 메소포타미아 남부 문명)의 우룩(Uruk: 수메르의 고대 도시. 후일의 바빌로니아)왕 엔샤쿠샤냐(Enshakushanna: 대략 기원전 3천대 중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나라였다. 수메르 왕 문두(Lugal-Anne-Mundu: 대략 기원전 2천4백 년)가 마르투를 지배하였다는 점토판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점토판은 그 시대부터 수세기가 지나 만들어진 것으로, 신뢰성을 결여하고 있다.

-Ebla 유적-

    하조르(Hazor: 갈릴리 호수 북쪽 상갈릴리 소재 고대 유적)와 카데쉬(Kadesh: 레반트의 고대 성읍), 그리고 아무루(Amurru: 기원전 2000년경 아모리 족이 세운 현재의 시리아 북서쪽에 있었던 고대 왕국)는 북서쪽으로 가나안 사람들과 접하고 있었다. 기원전 2154년 아카디아 왕국이 멸망하면서 그 땅으로, 티그리스 강 동쪽 자그로스 산맥으로부터 크히르벳 케락크(Khirbet Kerak: 갈릴리 호수 남쪽) 도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도착하였다. 이 밖에도 DNA 분석 결과, 기원전 2500년부터 기원전 1000년까지 자그로스 산맥과 코카서스로부터 남쪽 레반트로 인류 이동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 시기 레반트에서는 엔 에수르(En Esur)나 메기도(Meggido)같은 주요 성읍들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초기 가나안 사람들은 남쪽의 이집트나 북쪽의 후리안(Hurrians: 아나톨리아, 시리아, 북메소포타미아인), 하티안(Hattians: 중부 아나톨리아인), 히타이트인(Hittites: 북, 중부 아나톨리아인), 루위안(Luwians: 남부 아나톨리아인) 등 소아시아인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아카드, 아시리아와 정기적인 접촉을 하였다. 이러한 접촉은 철기 시대 내내 이루어졌다. 철기 시대를 거치면서 성읍들을 떠나 목축업과 농업에 토대한 농촌 생활로 되돌아갔으나, 금속 공예와 교역을 위한 무역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후기 청동기 시대의 우가리트(Ugarit: 북부 시리아의 고대 항구 도시) 언어는 가나안어가 아니었지만, 고고학적 증거로 보아 그곳은 가나안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으로 생각되고 있다.

    에블라 점토판(Ebla Tablets: 1천8백 개의 점토판과 4천7백 개의 파편으로 이루어진 점토판)의 “가나나의 주님(Lord of ga-na-na)”이라는 셈어 기록(2350 BCE)은, 마크디크(Mardikh: 현 시리아 Idlib주의 한 마을) 유적에서 발견된 것으로 “가나안의 주님(Lord of Canaan)”인 다곤(Dagon: 고대 시리아에서 숭배했던 신)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한 학자들도 있다.  만일 이 해석이 사실이라면, 기원전 2500년 에블라인들을 가나안 사람들로 보아도 될 것이다. 터브(Jonathan Tubb: 영국 고고학자)에 따르면, “ga-na-na”라는 말은 기원전 3천 년 무렵의 가나안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했다.

    중기 청동기 시대(2000~1550 BCE)로 접어들면서 도시 생활이 부활되고, 가나안 지역은 여러 도시국가들로 나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시국가는 하조르(Hazor)였다. 메소포타미아 영향을 받은 가나안은 국제통상 지역으로, 여러 곳으로부터 물질문화가 흘러들어 왔다.

-Hazor 유적지-

    아카드 제국의 나람신 왕(Naram-Sin, 2254~2218 BCE) 치세 초기, 아무루 왕국은 수바르투(Subartu/Assyria: 상메소포타미아에 있었던 고대국가), 수메르, 엘람(Elam: 현재의 이란 남서쪽에 있었던 고대 국가)등과 함께 아카드 제국(Akkad Empire: 고대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제국)을 포위한 네 나라 중 하나였다. 아무르 왕국은 라르사(Larsa: 고대 수메르의 도시 국가), 이신(Isin: 현재의 이락 알 카디시야에 있던 고대국가)을 포함하여 메소포타미아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후일 “아무루”라는 말은 아시리아/아카드 말로 가나안 북부와 남부 내륙을 가리켰다. 그즈음 가나안 지역은 예즈렐 분지(Jezreel Valley: 이스라엘 북부 소재)의 메기도와 보다 북쪽의 오론테스 강(Orontes River: 레바논에서 발원하여 서아시아를 흐르는 강) 유역의 카데쉬 등 두 지역으로 나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모리족 지도자 수무아붐(Sumu-abum, 1792~1750 BCE)이 독립 도시국가 바빌로니아를 창건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하무라비(Hammurabi, 1792~1750 BCE)가 바빌로니아 제I제국을 창건하였다. 하무라비가 죽은 후 아모리 족은 아시리아로부터 쫓겨났으나, 남아 있던 귀족들은 후일 히타이트에 의해 죽음을 당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세누스레트 I세(Senusret I: 고대 이집트 12왕조의 제2대 파라오)때 이집트 장교였던 시누헤는 상레트예누(Upper Retjenu: 고대 가나안과 시리아 사람들이 이집트를 지칭한 말)와 페네쿠(Fenekuh: 페니키아)에서 복무했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세누스레트 III세(Senusret III, 1878~1839 BCE)의 세베쿠 전승 기념비(Sebek-khu Stele)는 멘투(Mentu: 고대 이집트 전쟁의 신)전투, 레트예누, 셰겜(Shechem: 아무르 점토판에 있는 가나안 도시를 일컫는 말)전투 등에 관한 가장 오래되고 믿을 수 있는 전쟁 보고서이다.

-세베쿠 전승 기념비- 

무트 비시르(Mut-bisir: 고대 아무루 왕국 군대의 장교)가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샴쉬 I세(Shamshi-Adad I, 1809~1776 BCE)에게 올린 편지에는 “라히숨(Rahisum: ?)에 산적들과 ‘가나안’이 자리잡고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편지 유물은 고대 아시리아의 최전방이었던 시리아 소재 마리(Mari: 현재의 시리아에 있었던 고대 셈어족 도시 국가)의 유적에서 1973년 발견되었다.

-Mari 유적- 

이 편지에서 말하는 “가나안”이 특정 지역인지 또는 특정 지역의 사람들을 뜻하는지, 아니면 외국인을 뜻하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와 관련 드류스(Robert Drews, 1936~. 미국 밴더빌트 대 교수. 역사학)는, 알라라크(Alalakh: 터키 Hatay주 소재 고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무키쉬 왕국(Kingdom of Mukish: 터키 남부 시리아 접경지대에 있었던 고대 왕국)의 시조 이드리미(King Idrimi, 1490~1465 BCE) 조각상의 쐐기문자 명문銘文을 가나안에 대한 최초의 확실한 기록으로 보았다. 그 명문에는 “가나안 땅의 아미야(Ammiya: 가나안에 있던 성읍)”라는 기록이 있다. 자신에 대한 백성들의 반란이 있은 후 이드리미 왕은 가나안 땅으로 망명, 그곳에서 잃어버린 고토를 찾기 위한 준비를 했다는 기록이다.

-이드리미 상-

    기원전 1650년 경, 가나안 사람들은 힉소스(Hyksos)로 알려진 나일 강 동쪽 삼각주 지역으로 침입하여 그곳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이집트 명문에 있는 아모르인 지역은 오론테스 강까지 이르는, 페니키아 동쪽의 북부 산악 지대를 말한다. 그곳에서 이루어진 많은 고고학적 발굴로 그 지역은 가나안 땅으로 판명되었고, 중기 청동기시대 대부분의 기간 명목상으로는 이집트의 속국이었으나, 하조르(Hazor)의 영향을 받아 최고의 번영을 이루고 있었다. 북쪽의 얌하드(Yamhad: 시리아 알레포에 소재했던 고대 도시)와 카트나(Qatna: 시리아 Homs 주에 소재했던 고대 도시) 두 성읍은 도시 동맹의 패권자들이었고, 성경에 기록된 하조르(Hazor)는 가나안 남쪽에서 또 다른 동맹을 이끈 주요 도시였다.

    이집트제국과 히타이트제국에 완전히 합병되기 전인 후기 청동기 시대(1550~1200 BCE) 초 메기도와 카데쉬는 가나안의 중심 성읍들이었고, 그 후 신아시리아제국은 가나안 지역을 흡수, 동화시켰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가나안으로 온 고대 셈어족들에는 바빌로니아를 지배했던 아모리 족도 있었다. 창세기(14:7), 여호수아(10:5), 신명기(1:19, 27,44)를 통해 가나안 남부 산간 지대에 아모리 족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민수기(21:13)와 여호수아(9:10, 24:8~12)는 요르단 동쪽 헤쉬본(Heshbon: 요르단 강 동쪽에 있던 고대 도시)과 아쉬테로드(Ashteroth: 철기시대 트란스요르단 최북단에 있던 고대 도시)에 본거지를 두었던 아모리 족의 두 대왕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가나안 역사 초기, 아모리 족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히브리인들이 출현하기 수세기 전 가나안과 시리아 남서부는 이집트의 속지였다. 이집트인들이 드문드문 살기는 했지만, 이집트는 속지의 반란이나 성읍들 간 싸움을 진압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이 시기 가나안 북부와 시리아 북부는 아시리아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집트 투투모세  III세(Thutmose III, 1479~1426 BCE. 이집트 제18왕조 제6대 파라오)와 아멘호테프 II세(Amenhotep II, 1427~1400 BCE. 이집트 제18왕조 제7대 파라오)는 강력한 권력과 군대의 힘으로, 아모리인들과 가나안사람들로부터 충성을 받아낼 수가 있었다. 투투모세 III세 때 하비루(Habiru: 이집트어로 Apiru. 성서의 Hebrew)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는데, 히브리인을 뜻하는 이 말은 용병, 도적, 범죄자를 뜻하는 말로, 한 때는 정착민이었으나 어떤 불행 또는 환경의 변화로 떠돌이가 되어 왕이나 왕자, 성읍의 장에게 돈을 받고 일을 해준 사람들이었다.

   수메르 쐐기문자 사가즈(SA-GAZ)는 하비루를 뜻하지만, 아카디아어로는 “도적”을 뜻한다. 슐기 왕(Shulgi, c.2030~1982 BCE. 수메르 우르 제3왕조 제2대 왕)치세 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하비루에 관한 보고가 있었다. 가나안에 하비루가 나타난 원인은 아시리아 북쪽 소아시아에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새로운 국가는 마리야누(Maryannu: 말이 끄는 전차로 무장한 청동기 시대 중동의 무사 계급) 귀족들이, 미타니(Mitanni,1550~1260 BCE)로 알려진 아리안계 후리안(Hurrians: 청동기 시대 아나톨리아, 시리아, 북메소포타미아에 살았던 종족)과 연합하여 세운 나라였다.

                                                                       -수메르 쐐기문자-

    하비루는 인종 그룹이었다기보다는 하나의 사회 계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비루에는 셈어족, 카시트족(Kassite: 바빌로니아를 지배했던 고대 중근동 민족), 루위안족(Luwian: 아나톨리아 중부에 살았던 아나톨리아인)도 있었지만, 대부분 후리안 종족이었다. 따라서 아멘호테프 III세(Amenhotep III, 1388~1351 BCE 치세. 이집트 제18왕조 제9대 파라오) 때 하비루는, 이집트의 커다란 정치적 불안정의 원인이기도 했다. 이웃 왕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는 했으나, 반란을 꿈꾼 하비루들이 기회를 노리기도 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용맹스러웠던 가나안 사람 아지루(Aziru: 기원전 14세기 Amurru의 통치자)는 다마스커스 평야까지 세력을 넓히려고 했다. 하마스(Hamath: 시리아 오론테스강 유역의 고대도시)인근 카트나(Qatna) 총독 아키지(Akizzi)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아멘호테프 III세는, 이 반란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멘호테프 III세 때, 히타이트가 시리아로 진입하여 아모리인들을 추방하고 그 대신 셈어족을 받아들이면서, 가나안의 이집트 세력은 쇠퇴를 하게 되었다. 아브디 아쉬르타(Abdi-Ashirta: Gubla<현재의 레바논 Byblos 시>의 리브 하다와 싸운 Amurru의 왕)와 그의 아들 아지루는 처음 히타이트를 두려워하였으나 곧 그들과 조약을 맺은 후 이집트의 속령을 공격, 정복하였다. 리브 하다는 파라오에게 도움을 호소하였으나, 머나먼 곳의 파라오는 종교개혁에 몰두하고 있어 그를 도울 수가 없었다.

    아멘호테프 III세를 이은 아멘호테프 IV세(Amenhotep IV, 1352~1335 BCE. 이집트 18왕조의 제10대 파라오)는 부왕과 더불어 히타이트 제국의 수필루리우마 I세(Suppiluliuma I, 1344~1322 BCE)에게 충성을 바침으로서, 리브 하다(Rib-Hadda: 기원전 14세기 중엽 이집트 구블라 총독) 같은 충신들에게 끊임없는 갈등을 안겨 주었다. 아멘호테프 IV세는 이집트의 전통 신앙인 다신교를 버리고 아텐 신(Aten: 이집트 18왕조가 20년 간 숭배한 태양신)을 숭배하기도 했다.

-아멘호테프 III-

    아마르나 점토판(Amarna letters: 기원전 14세기까지 사용되었던 쐐기문자로 기록된 수백 개의 점토판으로, 아멘호테프 IV세 때의 이집트 수도 Amarna터에서 발굴)에는 시리아 북부의 하비루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가운데 에타카마(Etakkama, 1350~1335 BCE. 카데쉬 수장)가 파라오에게 올린 점토판 편지는, 비르야와자(Biryawaza: 기원전 14세기 중엽 이집트가 지배했던 시리아 지역 소 군주)가 파라오의 성읍들을 카데쉬와 우비(Ubi: 기원전 14세기 다마스커스 주변 지역)의 하비루에게 바쳤으니, 그들로부터 그 땅을 되찾아 파라오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 전쟁터로 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폐하가 신에게 주신 모든 성읍들이 하비루의 수중에 떨어졌다”고 한 시돈(Sidon: 현재의 레바논 시돈 시에 있었던 고대 도시)의 성주 지므리다(Zimrida)가 남긴 기록도 있다. 아브디 헤바(Abdi-Heba: 기원전 14세기 중엽 예루살렘 성주)는 하비루와 결탁하여 반역을 일으킨 라바야(Labaya: 기원전 14세기 가나안 남부 산간 지방의 통치자)의 아들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었다. 아브디 헤바는 파라오에게 “만일 올해 안에 폐하의 군대가 와 지키지 않는다면, 폐하는 이 땅과 왕자들을 잃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올렸다. 라바야가 기나(Gina: 고대 가나안의 한 성읍) 공성전에서 전사하자, 그의 아들들은 파라오에게 편지를 보내 서로를 헐뜯고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였다. 에타카마로부터 파라오에게 불충스럽다는 말을 들고 불안을 느낀 비르야와자는 파라오에게 편지를 보내, 명령이 있으면 자신의 군대와 형제들 그리고 사가즈(하비루)와 함께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다. 이처럼 하비루에 관한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아마르나 점토판-

    신왕조(기원전 16~12세기 고대 이집트 제18, 19, 20왕조) 초기 이집트는, 레반트 통치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제18왕조 통치는 매우 강력했으나 19, 20왕조에 이르러서는 불안정했다. 기원전 1275년, 람세스 II세(Ramses II, 1303~1213 BCE)는 히타이트와의 카데쉬 전투에서 교착상태에 빠지자, 이때 히타이트는 방향을 바꾸어 레반트 북부(시리아와 아무루)를 점령하였다. 도시와 사원, 기념물 건설 등 자신의 건설 계획 때문에 심리적 압박을 받은 람세스 II세는 히타이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망해가는 레반트 지역을 그대로 방치했다. 그의 후임자 메르네프타(Merneptah, 1213~1203 BCE. 제19왕조의 제4대 파라오. 람세스 II세의 아들)는 승전기념비를 세웠는데, 이 기념비에는 “이스라엘(Israel)”로 알려진 사람들을 포함, 레반트 남부 여러 성읍들을 멸하였다는 명문이 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고고학적 발견이 없어, 선동선전을 위한 기념비였을 수도 있다. 전투가 있었더라도 레반트 남부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람세스 III세(1186~1155 BCE) 치세가 끝날 무렵, 레반트 남부에 대한 이집트의 통치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바다 사람들(청동기 말 전후 동지중해에서 이집트를 공격한 해상 동맹)”이 침입, 이스라엘 남서부 해안 평야지대에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청동기 말과 전기 철기시대 예루살렘은, 요새도 갖추지 못한 작은 마을에 불과했으나, 철기시대(720~586 BCE)에는 성벽도 갖춘 제법 큰 성읍이었다. 아마르나 시대가 끝난 후 가나안 남부 지역은, 이집트 지배하에 들어갔다. 가나안 북부 지역은 이미 아시리아의 지배하에 있었다. 호렘헤브(Horemheb, 1319~1292 BCE. 고대 이집트 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는 요르단 강을 건너 갈릴리를 거쳐 예즈렐(Jezreel)에 이르는 길고 긴 이집트 교역로를 위협하는 목축 유랑족인 샤수(Shasu: 청동기 말부터 철기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레반트 남부에 있었던 종족)를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이어 세티 I세(Seti I, 1290~1279 BCE. 이집트 제19왕조 제2대 파라오)도, 타루(Taru)의 숲 지대로부터 가나안에 이르는 사해 동남쪽을 차지하고 있던 셈어 유랑족인 이 샤수 무리를 퇴치하였다.

-샤수 포로를 매질하는 이집트인-

    샤수와 싸운 카데쉬 전투(Battle of Kadesh: 기원전 1274년 오론테스 강변의 카데쉬 성읍에서 있었던 람세스 II세와 히타이트 무와탈리 II세와의 전투)에서 거의 전멸을 당할 뻔했던 람세스 II세(Ramesses II, c. 1303~1213 BCE. 제19왕조 제3대 파라오)는 가나안 전투에서 모압(Moab: 오늘날 요르단에 있었던 고대 가나안인들의 왕국)과 암몬(Ammon: 요르단 강 동안에 있었던 셈어 계통의 고대 왕국)을 점령, 그곳에 영구적인 수비대 보루(람세스 보루)를 세웠다. 그러나 이집트군이 가나안 전투에서 정벌한 샤수는 하비루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비루라는 말이 샤수를 뜻하는 말로 사용된 적이 없고, 하비루가 고대 셈어를 말했던 모압족이나 암몬족, 에돔족과 관련되어 있는지 여부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전기 철기시대(1150~950 BCE)

    기원전 1208년 무렵에 세운 이집트 메르네프타 승전 기념비에는 “이스라엘은 일소되었고, 이제 그 후손은 없다” 라는 명문이 있다. 이는 "이스라엘" 이라는 말이 등장한 최초의 고고학적 증거이다. 기원전 1000년 무렵 예루살렘 북쪽 사마리아에, 수백 곳의 작은 마을들이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각 마을 주민 수는 4백 명까지 이르러 자급이 가능했고 목축, 농작물, 포도와 올리브 경작을 비롯하여 물물교환도 있었다. 도기류는 평범하고 소박하였다. 글쓰기를 알아 기록도 하였다. 데버(William G. Dever: 아리조나 대 교수. 구약학)는 이를 조직화된 국가라기보다는 소규모의 문화적, 정치적 집단으로 본다.

-메르네프타 기념비-

    오늘날 학자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야훼 중심의 유일신 문화로부터 이스라엘 사람과 이스라엘 문화가 비롯되었을 것으로 본다. 전기 철기시대 이교도와의 결혼 금지, 가족사와 혈통의 중요성, 종교의 중요성 등을 강조한 어느 집단이 자신들을 가나안 사람들과 차별을 통해, 이스라엘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시작했을 것이다. 유일하고 전지전능한 신을 믿는 유일신 사상은 오늘날 유대교로 불리는 종교가 형성될 때까지, 수세기에 걸쳐 서서히 진화되었다.

    최초의 문자소文字素(grapheme)에 토대한 문자 기록은, 아마도 이집트에 거주 경험이 있던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글자는 페니키아 문자로 진화되어, 이로부터 모든 현대의 알파벳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다. 페니키아 문자로부터 비롯된 초기 문자 팔레오 히브리어(Paleo- Hebrew 또는 Old Hebrew: 가나안 비문에서 발견된 글자)는 기원전 약 1천 년부터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구약을 기록한 문자는 히브리 구어口語이다.

-페니키아 알파벳-

    가나안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많이 먹었으며 스스로 만든 미케네식 도기를 사용하였다. 후일 이 그릇은 원형을 잃음이 없이 2가지 색깔의 필리스틴(Philistine: 블레셋) 도기로 진화되어 갔다. 도시들은 크고 세련되었으며 발견된 유물들로 보아 복잡하고, 계층화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블레셋 도기-


  청동기 후기 예루살렘 북부 고원지대에 있던 촌락은 25곳을 넘지 않았으나, 전기 철기시대 말에는 3백 곳 이상을 넘었다. 인구도 2만에서 4만으로 두 배 증가하였다. 북부 지역의 마을들은 수에서 뿐만 아니라 규모도 컸다. 고고학자들은 이 마을들을 이스라엘인 거주지로 특정하려고 했으나, 테두리가 늘어진 도기라던가 4개의 방이 달린 집터는 고원지대 밖에서도 발견되어, 이스라엘인들만의 유물이나 유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발굴되지 않은 성서(The Bible Unearthed: 고대 이스라엘과 성서의 기원에 관한 고고학 서적)”의 공동 저자 핑켈슈타인(Israel Finkelstein, 1949 ~. 텔아비브 대 교수. 고고학)과 실버만(Neil Asher Silberman, 1950~ 미국인 고고학자)은 유다(Judah: 야곱과 레아 사이의 넷째 아들), 벤야민(Benjamin: 야곱과 라헬 사이의 막내아들), 에브라임(Ephraim: 야곱의 손자), 므나세(Manasseh: 야곱의 손자) 족의 영토에 대한 조사를 한 바 있다. 1967년 남쪽 유대아 산간 지방으로부터 북쪽 사마리아에 이르는 고원 지대의 발굴을 통하여 그들은, 기원전 1200년 무렵 필리스틴이나 가나안과는 다른 문화가 출현하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어떤 명확한 인종 그룹의 침략이나 진입이 없이, 약 250개에 달하는 마을 공동체가 돌연히 등장한 것이다. 이 새로운 문화의 특징으로는, 돼지고기 흔적이 없고(돼지고기는 당시 그곳 필리스틴 식품의 20%을 차지했다), 필리스틴이나 가나안의 고급스러운 도기를 사용한 흔적도 없으며, 할례를 했다는 점이다. 다름 아닌 최초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현대의 학자들은, 가나안 고원지대 이미 존재했던 사람들로부터 평화 속에서 이스라엘이 등장한 것으로 본다. 즉, 이스라엘 종족의 정체성은 출애굽 이후 있었던 정복을 통해서가 아닌, 가나안-필리스틴 문화의 변형으로 본다. 고고학적 증거로 보아, 마을에 모여 사는 사회였으나 자원과 인구가 부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마을 규모도 작았고, 마을 인구도 최대 3~4백 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은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가옥들이 빙 둘러싼 가운데에는, 공동의 광장이 있었다. 돌로 세운 초석 위에 진흙으로 지은 집에는 3~4개의 방이 있었고, 목재로 지은 2층집도 있었다. 주민들의 생업은 농업과 목축이었다. 산기슭 계단식 농토에는 여러 가지 작물과 과일을 심었다. 자급자족 경제로 물물교환이 일반적이었다. 성경에 따르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나타나기 이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판관들(Biblical Judges: 군사 지도자)이 이끌었다. 이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 이견이 있으나 어쨌든 지역 우두머리나 정치조직이 안전을 책임졌을 것이다. 작은 마을들은 성벽이 없어, 그 지역 큰 마을에 복속되었을 것이다. 글을 쓸 줄 알아, 작은 마을에서도 글로 기록을 했다.

후기 철기 시대(950~587 BCE)

    1. 통일 이스라엘 왕국

    후기 철기시대 기베온 기베아(Gibeon-Gibeah: 가나안과 벤야민, 유다, 에브라임 지파 지역) 고원에 출현했던 거대한 정치 집단은, 기원전 10세기 상반기 쇼솅크 I세(Shoshenq I, 943~922 BCE. 고대 이집트 제22왕조 파라오)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 후 기원전 950~900년 즈음 북부 고원지대 티르자(Tirzah: 셰겜 북동쪽 사마리아 고원지대 마을)에 수도를 둔 또 하나의 거대한 정치 집단이 등장하였는데, 이를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전임으로 볼 수 있다.

    통일 이스라엘 왕국(United Kingdom of Israel)은 히브리 성서 신명기에 기록된 정치 집단이다. 블레셋(필리스틴)과 주변 종족으로부터 점증하는 위협에 직면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무엘에 의해 사울이 왕이 되면서 하나의 국가로 뭉치게 되었다. 그들은 왕의 자리를, 하느님을 위해 준비된 권력과 존경의 자리에 인간을 앉히는 것으로 보았다. 사울이 즉위하기 전 실로(Shiloh: 사마리아에 있던 고대 성읍 겸 지성소)는 적어도 종교적 의미로는 수도와 다름없었다. 고고학적 증거로 보아도 그렇다. 사울 왕조 전 기간에 걸쳐, 수도는 기베아(Gibeah: 벤야민지파, 유다지파, 에브라임 지파가 있었던 곳)였다. 사울이 죽은 후 왕위를 이어받은 에슈발(Eshbaal, 1010~1008 BCE)은 마하나임(Mahanaim)에서 통치를 하였고, 제3대 다윗왕은 헤브론을 수도로 삼았다. 사울과의 내전을 치룬 후 다윗은 강력한 통일 왕국을 창건하였다.

                                  

                                                    -통일 이스라엘 왕국-

    성경 기록에 따르면, 다윗왕은 블레셋을 포함 적대 세력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여 국경의 안전을 공고히 했다. 이스라엘은 왕국에서 제국으로 발전을 하였고 그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은 필리스티아(블레셋 땅), 모압, 에돔, 암몬 왕국들까지 이르렀다. 아람 조바(Aram Zobah: 이스라엘 왕국 북쪽에 있던 셈어족 왕국)나 아람 다마스커스(Aram Damascus: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전 732년까지 레반트 남부에 존재했던 왕국)같은 나라들은 통일 왕국의 가신家臣이 되기도 했다. 통일 왕국 국경은 지중해로부터 아라비아 사막까지, 남북으로는 홍해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렀다.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이는 경쟁자인 형 아도니야(Adonijah: 다윗과 하기스 사이의 넷째 아들)로부터 빼앗은 다소 불미스러운 일이었다. 솔로몬의 치세 기간(961~922 BCE)은 전례 없는 평화, 번영, 문화 발전이 시기였다. 그는 공공 건물 건설에 박차를 가했고, 부친이 공고한 동맹을 맺은 티레(Tyre)왕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였다. 다윗의 궁전과 마찬가지로 솔로몬 왕궁은 티레의 건축가들, 장인들, 숙련 노동자들, 돈, 보석, 삼나무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물자로 지었다. 이에 대한 대가는 토지로 갚았다. 솔로몬 왕은 메기도, 하조르, 게제르(Gezer: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사이에 있던 고대 도시) 등을 포함, 여러 도시들을 재건하였다. 여섯 개의 왕궁 문짝과 각석角石등을 비롯한 고고학적 증거들로, 그 시대 건물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솔로몬 왕이 사망(926 BCE)을 하자, 북쪽 10종족을 지배했던 통일 왕국과 예루살렘이 지배했던 남쪽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기원전 930년 무렵, 왕위 계승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Rehoboam, c. 972~c. 913 BCE) 때,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북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에 따라 셰겜(Shechem: 현 웨스트 뱅크 텔 발라타 인근 지역)과 사마리아(Samaria: 현 팔레스타인 중부 지역)는 북이스라엘 왕국에, 예루살렘은 남쪽 유다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두 왕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지역은 독립 주(Province)가 되었다. 기원전 722(또는 721 BCE)년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두 왕국은 불편한 관계 속에 공존하였다.


-사마리아-

    압살롬 반란

    압살롬(Absalom)은 다윗 왕의 셋째 아들이다. 구약 사무엘하는 그를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사무엘하 14:25)”로 묘사하고 있다. 압살롬은 부친에게 반란을 일으켜, 결국은 에브라임 숲 전투(Battle of Ephraim's Wood)에서 죽었다.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수도 이전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 대부분의 생애를 그곳에서 보냈다. 그는 부친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태도가 올바르고 잘 생긴데다 충성심이 깊어 보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화려한 전차(Chariot)를 몰며 행차할 때는 50명의 남자들을 앞서게 했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데, 성경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아들 셋, 딸 하나를 슬하에 두었다. 딸 타마르는 아름다웠다. 그는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었다는 말을 했다(사무엘하 18:18). 이로 미루어 그의 아들들은 모두 일찍 죽었거나 아니면 이 말을 한 후 태어났을 수도 있다. 그에게는 딸 타마르 이외에 또 다른 딸 마카(Maacah)도 있었다. 마카는 후일 르호보암(Rehoboam: 이스라엘 왕국의 마지막 왕)의 아내가 되었다. 마카는 아비야(Abijah: 다윗 왕가의 제4대왕 겸 유다왕국의 제2대왕)의 어머니였고, 아사(Asa of Juda: 다윗 왕가의 제5대왕 겸 유다 왕국의 제3대 왕)의 조모였다. 그녀는 우상 숭배라는 이유로 르호보암이 내칠 때까지 모후로서 아사를 위하여 봉사하였다.

    압살롬에게는 딸의 이름과 같은 타마르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의 이복형제이며 다윗의 장남인 암논이 그녀를 강간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2년이 지나 압살롬은 복수에 나서, 다윗왕의 모든 자손들을 연회에 초청한 다음 하인을 시켜 술이 취한 암논을 살해하였다. 압살롬은 곧 게슈르(Geshur: 오늘날의 골란 고원)의 왕이며 외할아버지인 탈마이(Talmai)에게로 도피를 했다. 그후 3년이 지나 압살롬은 다윗왕의 사면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사무엘하 14:23).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압살롬은, 다윗 왕의 궁정으로 재판을 받으러 온 사람들을 모아 지지 세력을 확보하였다. 그들에게 그는 “당신들의 주장은 옳으나, 당신들 말에 귀 기우릴 사람은 궁정에 아무도 없다” 라고 했다. 이 말은 아마도 통일 이스라엘 왕국 재판 제도의 결점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 “이 땅의 판관이 나라면, 모든 송사가 내게로 올 것이며, 나는 올바른 판단을 할 것이다”라는 말도 했다. 그는 탄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절을 하는 사람에게 입을 맞추며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을 훔친 것이다.

    그로부터 4년 후, 그는 스스로 왕임을 선언한 후 과거의 수도였던 헤브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부왕의 후궁들과 성관계도 가졌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모두 그의 편에 섰고, 다윗에게는 그렛인(Cherethites: 레반트에 있었던 종족)과 블렛인(Pelethites), 그리고 가스(Gath: 철기 시대 블레셋 5개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로부터 따라온 호위병들뿐이었다. 그들의 시중을 받아 다윗은 피난길에 나서야 했다. 선지자 사독(Zadok: 아론의 아들 엘레아사르의 후손)과 아비아타르(Abiathar), 그리고 그들의 아들 요나단과 아히마스는 예루살렘에 남아 다윗을 위해 첩자 노릇을 했다. 예루살렘에 이른 압살롬은, 다윗왕의 고문인 아히도벨(Ahithophel: 다윗왕의 고문)을 만나 의논을 하였다. 압살롬이 여동생의 복수를 하였다고 하나, 그렇다면 그도 암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암논이 이복 여동생 타마르를 강간하기 위해 요나답(Yonadab: 암논의 사촌. 다윗왕의 형 시메아의 아들)의 의견을 물은 거와 같이 압살롬도 아버지의 처첩들과 근친상간을 위해 아히토벨의 의견을 물은 것이다. 아히도벨은 학문도 높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따라서 다윗왕은 죽을 무렵에도, 나이 30도 안 된 그의 말을 따랐다. 다만 그는 충성심이 부족하여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편에 섰다. 이렇게 하여 장차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잃었던 것이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아히도벨은 점성술을 믿어, 그 나타난 조짐들을 자신이 왕이 될 예언으로 생각했으나 사실은 자신의 손녀 딸 밧셰바(Bath-sheba: 아히도벨의 아들인 엘리암의 딸로 다윗왕의 부인)의 운명을 가리키는 징조였다. 잘못된 믿음에 사로잡힌 그는 압살롬을 부추겨 전례에 없는 죄를 저지르게 하였다. 압살롬은 부왕에 대한 반란으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오히려 부친을 거역하고 가족의 순결을 해친 죄로 죽음을 당하고, 왕관은 틀림없이 아히도벨의 것이 될 터였다.

    다윗왕은 압살롬의 군대를 피해 요르단강을 건너 피신하였다. 다윗왕은 하인 후새(Husai)에게 압살롬을 치라고 했다(사무엘하 15:34). 압살롬의 진영에 도착한 후새는 압살롬에게, 아히도벨의 말을 따를 것이 아니라 다만 주요 전투를 위해 군사만 준비하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다윗왕은 전투 준비를 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압살롬이 후새의 말을 따르고 자신의 조언을 따르지 않자 아히도벨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에브라임 숲(요르단 강 서쪽 지역)전투에서 압살롬의 군대는 완전히 궤멸되었다. 노새를 타고 도주하던 압살롬은 참나무 아래를 지나가다 그 나무 가지에 머리카락이 걸렸다. 그 광경을 본 다윗의 병사가 지휘관 요압(Joab)에게 보고를 하였다. 요압은 압살롬에게 원한이 있었던 사람으로, 이 기회에 원수를 갚기로 했다. 언젠가 압살롬이 그의 보리밭을 태우고, 그가 아닌 아마사(Amasa: 다윗왕의 여동생 Abigail의 아들)를 군 지휘관으로 삼은 적이 있었다(사무엘하 17:25).

-압살롬-

    압살롬을 죽이는 일은 "누구도 내 아들 압살롬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다윗 왕의 명령에 대한 거역이었다. 그러나 요압은 압살롬의 가슴을 세 번 찔렀고, 이어 그의 병사들 열 명이 달려들어 죽였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왕은 그가 어떻게 죽은지도 모른 채 매우 슬퍼했다. "...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사무엘하 18:33)." 다윗왕은 슬픔 속에 마하나임(Mahanaim: 요단강 하류로 추정되나 정확한 지점 불명)으로 돌아갔다. 슬픔에 잠긴 그를 요압이 부축하여 일으켜 세운 다음, 백성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였음을 보고하였다. 압살롬은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으니, 그 비문에 관한 성경 기록은 다음과 같다.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사무엘하 18:18).”

    고대 예루살렘 인근 키드론(Kidron)계곡에 있었던 압살롬의 무덤 또는 압살롬의 기념비로 알려진 오래된 비석은, 성경에 기록된 그 비석으로 알려져 왔으나 현대 고고학은 그 비석의 연대를 기원후 1세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유대백과사전(Jewish Encyclopedia)은 “높이 20피트, 넓이 24평방피트의 크기의 한 무덤이 있으니 전승에 따르면 압살롬의 안식처라고 한다. 이 무덤은 예루살렘 동쪽 키드론 계곡에 있다. 오랜 세월 그 무덤을 지나는 유대인, 기독교도, 무슬림들은 그 비석에 돌을 던지는 게 관행이었다. 예루살렘 시민들은 자식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 말 안 듣는 자손이 어떻게 되는지를 가르쳤다.

    헛된 야망, 부질없는 영광, 부모에 대한 불효 등 압살롬의 삶과 죽음은 랍비들이 다룬 좋은 주제였다. 그가 허영심으로 휘날린 금발은 바로 그를 옭아맨 올가미였다. 그는 사악한 전술로 부친과 형제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훔쳤고 이로 인해 가슴이 창으로 세 번 찔려 그 반역적인 삶이 끝났던 것이다. 여기서 “참나무도 심장이 있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창에 찔리기 전 압살롬의 머리카락이 참나무 가지에 걸린 것은, 부친을 배반할 정도의 무자비한 사람은 자연도 심장이 있어 그 행위를 징벌한다는 금언이다.

    2. 북이스라엘 왕국

    북이스라엘 왕국(930~ c.720 BCE)은 철기시대 가나안 북부에 있었던 왕국이었다. 그 영토는 사마리아, 갈릴리, 트랜스요르단에 걸쳐 있었고 수도는 사마리아였다. 남쪽에는 유다 왕국이 있었다.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왕국이 분열되어 생긴 두 왕국이다. 기원전 10세기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은 이미 성읍들이 들어섰고, 기원전 9세기 이 성읍들은 모두 옴리(Omri, 884~873 재위. 북이스라엘 왕국 제6대 왕)의 치세하에 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이 시기 사마리아는 정치의 중심지로 화려한 왕궁도 있었다.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

     기원전 732년 이스라엘 왕국의 페카(Pekah: 제18대 왕)와 아람 왕국의 레진 왕 동맹군이 유다 왕국의 예루살렘을 위협하자, 여호아하즈 II세(Jehoahaz II: 유다 왕국 제12대 왕)는 아시리아 필레세르 III세(Tiglath-Pileser III, 745~727 BCE)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여호아하즈가 공물을 바치자 필레세르는 다마스커스와 이스라엘 왕국을 공격, 약탈하고 트랜스요르단 북부 산간 지역의 르벤, 가드, 므나세 종족을 비롯하여 사막 거주지대인 예투르(Jetur), 나피쉬(Naphish), 노답(Nodab)을 복속 시켰다. 포로로 잡힌 이들 종족 가운데는 르벤족 지도자도 있었다. 필레세르는 이 포로들을 카부르 강(Khabur River: 유프라테스 강 지류) 유역의 할라(Halah), 하보르(Habor), 하라(Hara), 고잔(Gozan) 등지로 끌고 갔다(역대기상 5:26). 필레세르는 또한 납달리 땅과 에브라임의 야노아(Janoah: ?)성읍을 점령한 후, 납달리 지역에는 아시리아인 총독을 임명했다. 이때 아람 백성과 많은 수의 이스라엘 왕국 백성들이 아시리아로 잡혀갔다(아시리아 유수. 열왕기하 15:29, 16:9).

    기원전 720년, 잡혀가지 않고 남아 있던 백성들은 다시 침입한 아시리아인들에게 잡혀갔다. 3년에 걸쳐 아시리아가 사마리아를 공격하던 중, 아시리아 왕 샬마네세르 V세가 사망하였고 사르곤 II세(Sargon II, 722~705 BCE)가 그 뒤를 이었다. 사르곤은 사마리아를 점령한 후 “짐의 치세 첫해에 사마리아 백성 2만7천2백90명을 포로로 잡아왔노라. 짐의 장비 운송을 위해 50대의 병거를 준비했으며, 이전보다 더 좋게 그 도시를 재건하였노라. 짐이 정복한 땅의 백성들을 그곳에 살게 했으며, 짐의 신하를 그곳 총독으로 임명하였노라”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해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된 후 2세기가 지난 기원전 720년, 북이스라엘 왕국은 멸망하였다.

    포로들 가운데 일부는 카부르(Khabur: 시리아 유프라테스 강 지류) 유역과 메디아(Media: 현재의 이란 서북쪽에 있던 고대 왕국)에 흩어져 살게 하였다. 이에 따라 에크바타나(Ecbatana: 메디아의 수도)와 라제스(Rages: 현재의 이란 Tehran 주 Ray 군 소재 시)에 유대인 공동체가 서게 되었다. 성경 토비트서는, 사르곤이 북이스라엘 왕국, 특히 납달리의 티스베(Thisbe: 성경은 고대 Gilead의 한 지역을 말하고 있으나 이에는 이설이 있음)로부터 또 다른 포로들을 수도 니네베(Nineveh)로 잡아갔음을 기록하고 있다.

-니네베 마쉬키 문 유적-

아시리아 제국으로 잡혀간 북이스라엘 왕국의 야곱 10개지파 종족((야곱의 12지파 가운데 르벤, 시므온, 단, 납달리, 갓, 아쉐르, 이사카르, 스불룬, 므나세, 에프라임 지파)들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수 세기가 지난 후 유다 왕국의 랍비들은 아직도 그 사라진 10개 종족들의 귀향을 이야기하며 기다렸다. 성경에 따르면 아시리아에 잡혀 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들은 소수의 백성들과 사제들, 레위인, 성전 막일꾼들이었다(역대기상 9:3). 사마리아 전승에 따르면 “아시리아 유수” 이후에도 북이스라엘왕국의 백성들 가운데 납달리족, 므나세족, 벤야민족, 레위족은 그대로 남아 사마리아인의 조상이 되었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많은 백성들이 남쪽 유다왕국의 예루살렘으로 피난, 이에 따라 예루살렘 인구가 5배나 증가하였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성벽을 새로 쌓고, 물 수요 증가로 인해 히스기야 왕(Hezekiah, 715~687 BCE. 유다 왕국의 제13대 왕)은 실로암(Siloam) 못을 새로 만들었다(이사야 22:9).

    이스라엘 왕국의 종교는, 유대교 성경(열왕기하 16:31~32)과 우가리트(Ugarit: 시리아 북부 고대 항구)에서 발굴된 바알 동그라미(Baal cycle: 폭풍의 신 바알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그라미)로 보아, 야훼 숭배와 바알 숭배라는 두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 종교를 야훼 숭배(Yahwism)로 본다.

-바알신 상-

    열왕기하(12:29)에 따르면 여로보암(Jeroboam, ?~c. 910 BCE. 북이스라엘 왕국 초대 왕)은 베델(Bethel)과 단(Dan: 이스라엘 왕국 북쪽에 있던 고대 성읍. 12지파의 하나인 단 족의 도시) 두 곳에,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할 수 있는 제단을 세웠다. 종교적으로 백성들이 남쪽 예루살렘에 속박되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제단 앞에 민족 신을 대표한다며 금송아지를 세웠다. 성경은 이를 여로보암의 큰 과오로 본다(열왕기상 12:26~29). 아합은 왕국의 종교로 받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바알 숭배를 허락하였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의 아내 지저벨(Jezebel)은 페니키아 공주로, 바알 신을 숭배한 여인이었다(열왕기상 16:31).

     고고학적 증거로 보면 북이스라엘 왕국은 도시의 발달 등, 상당히 번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 정착지는 규모가 작고 요새화가 되지 않았었으나 북이스라엘 왕국이 등장하면서 성읍들도 규모가 커지고, 대규모 왕궁과 담과 문을 갖춘 요새도 건설하였다. 북이스라엘 왕국은 처음 아람족의 공격에 시달렸기 때문에 방어를 위해 많은 투자를 하였으나, 아시리아의 아람족 정벌로 여력이 생기면서 인프라 건설에 집중하였다. 많은 망루와 성벽을 갖춘 기념비적인 성벽을 포함하여 단, 메기도(Megido: 청동기 시대 가나안 도시 국가. 철기시대 이스라엘 왕국의 왕도), 하조르(Hazor: 갈릴리 해 북쪽 요새)같은 성읍들 주변에 군사 요새를 건설하였다. 북이스라엘 왕국 경제는 올리브 기름, 포도주 생산 등 다양한 산업에 토대하였다.

    3. 유다 왕국

    유다 왕국은 철기 시대 레반트(Levant)남부에 있었던 왕국이다. 수도 예루살렘은 유대아(Judea) 땅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유대인이란 어휘(Jews)는 유다(Judah)에서 비롯된 말로, 유대인이란 바로 유다의 후손을 뜻한다.

    유다 왕국은 이스라엘 왕국보다 좀 늦은 기원전 9세기 후반에 잘 준비된 나라로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상당한 논쟁이 있다. 기원전 10세기부터 9세기까지 남부 고원 지대는 많은 세력들이 있었고, 그 누구도 분명한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후 히즈기야(Hezekiah, c. 739/41~687 BCE. 유다 왕국의 제13대 왕) 치세하 유다 왕국은 강한 나라가 되었다. 이는 방어 성벽(Broad Wall: 예루살렘 구시가지 유대인 구역의 고대 방어 성벽)이나 실로암(Siloam)터널 같은 고고학적 증거로 알 수가 있다. 실로암 터널은 신아시리아제국 왕 세나헤립(Sennacherib, c. 745~681 BCE)의 군대가 포위하였을 때, 예루살렘 실로암 못에 물을 대기 위한 수로였다.

    왕의 옥새(LMLK seals)는 히즈기야 왕(기원전 700년 경) 때 처음 사용을 시작하였다. 그 도장들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커다란 항아리 손잡이에 찍힌 왕의 옥새는 세나헤립이 파괴한 폐허에서 발굴되었는데, 히즈기야 통치 29년 동안 불라(Bulla: 진흙이나 쇠로 만든 구형의 도장)와 함께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세나헤립이 파괴한 라기스(Lachish: 고대 가나안 성읍) 터에서 완벽한 형태의 주전자도 발굴되었다. 도장 원형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서로 다른 형태의 21개 도장으로 찍은, 약 2천개의 각인이 발견되었다. LMLK는 히브리어로 “lamedh mem lamedh kaph(발음은 라멜레크)”의 머리 글자인데, 페니키아어로는 “[유다의]왕에게 속하며”, “왕에게 속하며”, [유다의]정부에 속하며“, “왕에게 [올리는]” 등을 뜻한다.

-Bulla-

    기원전 7세기 유다 왕국의 인구가 증가했고, 히즈기야 왕이 신아시리아 세나헤립에게 저항을 한 적이 있지만, 신아시리아의 가신국가로서 번영을 하였다. 기원전 605년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신아시리아 제국이 붕괴하면서, 레반트를 둘러싸고 이집트와 신바빌로니아 제국 간에 패권 경쟁이 일어나 그 결과 유다 왕국은 급속히 기울었다. 기원전 6세기 초, 이집트의 지원을 받은 유다 백성들이 바빌로니아에 저항하는 항쟁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기원전 587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네브카드네자르 II세(Nebuchadnezzar II, 605~562 BCE)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여 멸망 시켰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포로가 되어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으로 끌려가고(바빌론 유수), 유다왕국은 바빌로니아의 속주가 되었다.

    그후 바빌로니아는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에 의해 멸망하였다. 유다 땅을 점령한 아케네메스의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600~530 BCE. 아케메네스 제국 시조)은, 바빌론에 잡혀 있는 유대인들을 석방하였다. 그후 4백년이 지나 마카비 반란(Maccabean Revolt, 167~160 BC. 유대인 무사들에 의한 대 페르시아 셀류싯 제국에 대한 저항)이 있은 다음, 유대인들은 다시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였다.

    유다 왕국의 실존 여부는 학자들 간, 주요 논쟁 대상이다.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 기원전 8세기 말까지 행정의 중심지로 등장한 바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고고학적 증거로 보아 기원전 8세기 이전에는 인구가 너무 적어, 왕국을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텔 단 석판(Tel Dan Stele)에는 기원전 9세기 다윗 왕가가 사마리아 땅 남쪽 왕국을 통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기원전 8세기부터 유다의 왕들에 관한 증거도 있다. 다만 이 시기 왕국이 어떻게 발전하여 갔는지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기원전 733년까지 거슬러 오르는 님루드 점토판(Nimrud Tablet K.3751: 현재의 이락 북부 Mosul 시 남쪽에 소재 했던 고대 아시리아 도시 님루드 터에서 발견된 점토판)에는, 아시리아 쐐기 문자로 “유다”를 일컫는 ”Ya'uda“ 또는 ”KUR.ia-u-da-a-a“ 라는 기록이 있다.

 -님루드 명문-

    기원전 10세기 예루살렘은 어떠한 도시였을까? 핑켈슈타인은 그 시기 정착민 활동과 관련한 명백한 증거가 없음으로 당시 예루살렘은 수도가 아닌 유대아 땅의 조그만 시골 마을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예루살렘 인근의 다윗 시(City of David)는 예루살렘의 고대 유적지로, 또한 예루살렘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기원전 9세기까지 이곳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활동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돌계단(Stepped Stone Structure: 18미터 높이의 돌계단)과 거대 돌 구조물(Large Stone Structure: 다윗 시 소재 유적)은 원래 하나의 행정 기관이었던 공공 구조물의 일부로, 전기 철기시대에 물질문화가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드버(William G. Dever, 1933~. 아리조나 대 교수. 고고학)도 당시의 예루살렘은 요새화된 작은 성읍으로 아마 판관이나 선지자, 율법가들만 살았을 것이라고 했다. 만일 철기시대 전, 후기에 다윗 시에 행정기관이 있었다면, 예루살렘은 강력한 군사 보루를 갖춘 소규모 정치적 중심지였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네게브 사막 옛 군사요새 터에서 발견된 군사 명령서는 유다 왕국 시대의 것으로, 그 시대 지휘관들은 초급 장교에 이르기 까지 널리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수 엘리트 계층만이 아닌 유다 왕국의 군사, 행정, 사제 등 여러 계층이 쓰고 읽을 줄 알았다. 이는 당시 유다 왕국에 교육을 위한 시설이 있었음을 뜻한다.

일상생활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포도주 용기의 바닐라 향 흔적으로 미루어, 기원전 7세기 예루살렘 엘리트 계층은 포도주에 바닐라 향을 섞어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세계에서 바닐라 향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려졌다. 바닐라 향은 당시 아시리아와 이집트 지배하에서, 네게브 사막을 횡단하는 국제 무역로와 관련되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성읍과 요새

    텔 베르 셰바(Tel Be'er Sheva: 이스라엘 남부 소재 유적)는 성경이 말하는 베르셰바(Beersheba)로 믿어지는 곳으로, 기원전 9세기부터 8세기까지 네게브 사막의 유대인 중심지였다. 유대아 산맥과 셰펠라(Shephelah: 유대아 산맥과 지중해 해변 사이의 낮은 구릉 지대)에서는 여러 요새 터와 감시탑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포대가 설치된 여러 겹의 벽으로 둘러싸인 이 요새들은 그 중앙에 광장이 있었고, 외벽에는 밖을 향해 활을 쏠 수 있는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의 구멍이 있었다. 오늘 날의 배트 아인(Bat Ayin: 웨스트 뱅크의 이스라엘 정착촌)과 야바(Jab'a: 웨스트 뱅크의 팔레스타인 촌)사이 유대아 산맥에 자리에 있었던 트웨인(Khirbet Abu et-Twein)은, 유다 왕국 당시 가장 유명했던 군사 요새였다. 이 요새에서 내려다보면, 셰펠라를 비롯하여 아제카(Azekah), 소코(Socho), 고데드(Goded), 라기스(Lachish), 마레샤(Maresha)등 고대 유대 마을 터를 내려다 볼 수가 있다.

-텔 베르 셰바-

    네게브(Negev) 사막 북쪽 텔 아라드(Tel Arad)는 행정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새였다. 이 요새는 유대아 산맥으로부터 아라바(Arabah: 사해 남쪽 지역), 모압, 에돔에 이르는 길을 방어했다. 이 요새는 여러 번에 걸친 개축과 확장이 이루어졌다. 그밖에도 네게브에는 우자(Hurvat Uza), 텔 이라(Tel Ira), 아로에르(Aroer), 텔마소스(Tel Masos), 텔(Tel Malhata)같은 요새들이 있었다. 유대아 사막의 베레드 예리호(Vered Yeriho: 현 요르단 계곡 예리고 인근의 이스라엘 정착촌)요새는, 예리고(Jericho)에서 사해에 이르는 지역을 방어한 주요 요새였다. 예루살렘 인근에도 그 시대 감시탑 터들이 몇 곳 남아 있다. 프렌치 힐(French Hill: 예루살렘 북동쪽 이스라엘 정착촌)과 길로(Gilo: 성경 상 Beit Jala을 가리키는 고대 유다 성읍)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탑들이 발견되었다. 이 탑들은 그 위치로 보아, 왕국 전역의 통신을 쉽게 하기 위한 봉수대였음이 분명하고, 이는 예레미아서나 라기스 서간문(Lachish letters: 질그릇 파편에 고대 히브리어로 쓴 가나안 명문)에도 잘 기록되어 있다.

-예리고-

북이스라엘 왕국과의 관계

    처음 60년 동안 유다의 왕들은, 이스라엘 왕국을 지배하려 했고 따라서 두 왕국 간 전쟁이 끊임없었다. 르호보암 통치 17년 동안 유다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은 계속 전쟁 상태에 있었다. 르호보암은 성읍들을 요새화하고 성채를 세우는 등 정교한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르호보암 5년, 파라오 쇼솅크(Shoshenq I, 943~922 BCE. 고대 이집트 제22왕조 시조)는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유다를 공격, 많은 성읍들을 굴복 시키고 예루살렘을 약탈하였다. 르호보암은 성전의 보물들을 그에게 뇌물로 바치고, 유다왕국은 이집트 가신家臣국가가 되고 말았다. 르호보암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아비야(Abijah of Judah: 유다 왕국의 제2대 왕. 다윗 왕가의 제4대 왕)는 부왕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왕국을 치세하에 두려고 노력했다. 그는 세마라임(Mt. Zemaraim: 고대 벤야민 땅의 한 성읍)전투에서 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을 격파하여, 많은 인명 손실을 내게 하였다. 성경 역대기에 따르면, 이때 이스라엘 왕국은 50만 명이 살육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제 여로보암은 더 이상 유다 왕국의 위협이 되지 못하였고, 벤야민 지파와 이스라엘 왕국간 경계선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비야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아사(Asa of Judah: 유다왕국의 제3대 왕)는 처음 35년 동안 이스라엘 왕국과 평화를 유지하며, 부왕이 세웠던 요새들을 재정비 강화하였다. 역대기하 기록에 따르면, 마레샤(Maresha: 이스라엘 셰펠라에 소재했던 고대 에돔 성읍)인근 세파스 분지(Zephath valley)전투에서 아사군 50만 명은, 이집트의 지원을 받은 이디오피아인 스라(Zerah)의 1백만 대군과 300대의 병거를 물리쳤다. 스라가 파라오였는지 아니면 장군이었는지 성경에는 언급이 없다. 이디오피아 군은 기진맥진한 채 해안 평야지대인 게라르(Gerar: 오늘날 이스라엘 남쪽 중앙부에 있던 고대 블레셋 성읍)까지 쫓겨 갔다. 그후 유다왕국은 이집트의 침략으로부터 해방이 되어, 수세기가 지난 요시아 왕(Josiah)때까지 평화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재위 36년째가 되던 해 아사는 이스라엘 왕국의 바아샤(Baasha: 이스라엘 왕국의 제3대 왕)와 대결하게 되었다. 바아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머지않은 유다 왕국과의 경계선에 요새 라마(Ramah)를 세웠다. 이로 인해 양국 간 군사 충돌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아사는 아람 다마스커스(Aram Damascus,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전 732년까지 존재했던 레반트 남쪽 고대 다마스커스 왕국)왕 벤 하다드 I세(Ben Hadad I, 885~865 BCE)에게 성전의 금과 은을 뇌물로 준 후, 바아샤와의 맹약을 파기해달라고 했다. 이에 하다드는 이스라엘 왕국의 주요 성읍인 이욘(Ijon), 단(Dan)을 비롯하여 많은 성읍들을 공격하였고, 따라서 바아샤는 라마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사는 아직 미완성인 라마를 공격, 그곳에서 노획한 물자들을 벤야민 지파와 경계선을 맞대고 있는 게바(Geba: 타나크에 등장하는 고대 성읍)와 미즈파(Mizpha: 벤야민 지파의 고대 성읍)의 요새를 강화하는데 썼다.

    아사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여호사밧(Jehoshaphat, 905~c. 849 BCE. 유다 왕국의 제4대 왕)은 정책을 바꾸어,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왕(Ahab, ?~ 852 BCE. 이스라엘 왕국 제7대 왕)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이 동맹은 라모스 길르앗(Ramoth-Gilead: 요르단 강 건너 레위 지파의 성읍. 신명기 4:43)에서 있었던 아합과 시리아 간의 전투로, 이 전투에 참가한 여호사밧에게 커다란 손해를 가져왔다. 여호사밧은 오피르(Ophir: 현재의 사우디 아라비아 알 마디나 주에 있던 고대 금광 지역)와의 무역을 위해 아하지아(Ahaziah: c. 852~c. 849 BCE 재위. 이스라엘 왕국의 제8대 왕)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무역에 필요했던 함선이 침몰하여, 오피르와의 교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여호사밧은 여호람(Jehoram of Israel, c. 905~849 BCE. 이스라엘 왕국의 제9대 왕)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에 공물을 바치던 모압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성공적이어서 모압인들은 항복을 하였으나, 모압 왕 메샤(Mesha)가 자신의 아들을 산채로 키르 하레세스(Kir-Haresheth: 오늘날 요르단의 알 카라크 시에 있었던 고대 성읍) 성벽에 희생물로 바치는 모습을 본 여호사밧은, 공포에 질려 그대로 회군하였다.

   여호사밧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여호람(Jehoram of Judah, c.850~c.840 BCE 재위. 유다 왕국의 제5대 왕)은 아합의 딸 아달리아(Athalia)와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 왕국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이 같은 동맹관계에도 불구하고, 여호람의 유다 통치는 안정적이지 못했다. 곧 에돔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여호람은 그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블레셋이 침략하자 아랍족, 이디오피아인들이 여호람의 왕궁을 약탈하고, 그의 막내아들 아하지아(Ahaziah, 863~841 BCE. 유다 왕국 제6대 왕)를 제외한 왕의 가족들을 모두 붙잡아 갔다.

    기원전 715년 유다 왕 히즈기야는 아쉬켈론(Ashkelon: 이스라엘 남부 지중해 해변의 고대 항구) 및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신아시리아 왕 세나헤립(Sennacherib, c.745~681 BCE)에게 공물 바치길 거부하고 저항하였다. 그 결과 세나헤립은 유다의 성읍들을 공격하였다. 세나헤립이 솔로몬 성전을 비울 것과 그곳 보물들을 바치라고 하자, 히즈기야는 3백 달란트의 은과 3십 달란트의 금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710년 세나헤립은 예루살렘을 재차 공격하였다. 그러나 함락 시키지는 못하였다.

-아쉬켈론-

    므나세(Manasseh, c. 687~642 BCE. 유다 왕국 제14대 왕)치세 기간 유다 왕국은 세나헤립과 그의 후계자 에사르하돈(Esarhaddon, 713~669 BCE), 그리고 기원전 669년 이후에는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669~631 BCE. 신아시리아 마지막 왕)의 가신국가가 되었다. 므나세는 에사르하돈의 건축 사업을 돕고, 그를 따라 이집트 공략에 함께 나섰다.

     요시아(Josiah, 648~609 BCE)가 유다왕국의 제16대 왕위에 오른 기원전 641년 무렵, 국제 정세가 요동을 쳐 신아시리아 제국이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의 바빌로니아 제국은 아직 신아시리아를 대체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고, 서쪽의 이집트는 신아시리아 통치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이 같은 권력 공백기에 유다 왕국은 외세의 간섭 없이 잠시 독립을 누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609년, 이집트의 네코(Necho, 610~595 BCE. 이집트 제26왕조 파라오)가 신아시리아를 돕기 위해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유프라테스강까지 진군하였다. 해변을 따라 군사를 이끌고 시리아까지 진군코자했던 네코는, 필리스티아(Philistia: Ashdod, Ashkelon, Ekron, Gath, Gaza 등의 성읍을 포괄하는 레반트 남서부 도시동맹 지역)와 샤론(Sharon: 지중해와 접한 평야지대)을 쉽게 통과하였다. 그러나 구릉지대를 지나 예즈렐 분지(Jezreel Valley: 메기도 분지. 이스라엘 북부 비옥한 평야 지대)의 남쪽에 이르렀을 때, 요시아가 지휘하는 유대 군대의 저지를 받았다. 요시아는 이집트 프삼틱 I세(Psamtik I, 664~610 BC. 이집트 제26왕조 초대 파라오)가 이미 1년 전 사망하였음으로, 이집트-아시리아 동맹군이 약화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마 바빌로니아를 도우려는 생각에서 요시아는, 메기도에서 그들의 진군을 막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메기도 전투에서 요시아는 전사하였다. 네코는 아시리아의 아슈르 II세(Ashur-uballit II, 612~609 BCE. 아시리아 제국 마지막 왕)와 연합,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하란(Harran: 터어키 동남부 시리아 접경지대의 고대 성읍. 아브라함의 출신지)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하란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네코는 시리아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이 사건은 아시리아 제국이 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원전 608년 이집트로 돌아가던 중 네코는, 여호아하즈(Jehoahaz: 유다 왕국의 제17대 왕)가 요시아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음을 알았다. 네코가 여호아하즈를 왕위에서 끌어 내리고, 그의 아우 여호야김(Jehoiakim, 609~598 BCE. 유다왕국의 마지막에서 두 번 째 왕)을 왕위에 앉히니, 여호아하즈의 왕위는 3개월에 불과했다. 네코는 유다에 1백 달란트의 은(대략 3.4톤)과 1달란트의 금(대략 34킬로그램)을 세금으로 부과했다. 그리고 여호아하즈를 포로로 하여 이집트로 압송하였으니, 그는 예루살렘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유다 왕국은 이집트의 속국이 되어, 여호야김은 많은 공물을 바치면서 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쉬 전투에서 이집트가 바빌로니아에 패하자 여호야김은 마음을 바꾸어, 이집트가 아닌 바빌로니아의 네브카드네자르 II세(Nebuchadnezzar II, 605~562 BCE)에게 공물을 바쳤다. 이 전투에서 이집트 동맹군에 승리를 거둔 사령관 네브카드네자르는, 승리 후 곧 바빌로니아 왕에 올랐다.

바빌론 유수

    기원전 601년 그의 치세 4년에 네브카드네자르는 이집트를 공격하였으나, 커다란 손실을 입고 후퇴하였다. 그러자 지금까지 충성을 바쳤던 레반트 여러 지역이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여호야김은 네브카드네자르에게 바쳤던 공물을 취소하고 다시 이집트 편으로 돌아섰다. 그후 네브카드네자르는 모든 반란을 진압하였다. 바빌로니아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99년 네브카드네자르는 하티(Hatti: 시리아, 팔레스타인 땅)를 공략한 후,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이 전투에서 여호야김이 전사하자(598 BCE), 그의 아들 여고니아(Jeconiah, 605~562 BCE. 유다 왕국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왕)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의 즉위 3개월 후인 기원전 597년 3월 16일, 네브카드네자르는 예루살렘을 공격, 성전을 약탈하여 그 보물들을 바빌론으로 가져갔다. 이때 여고니아와 그의 신하들, 저명인사들, 숙련된 기술자들이 1만여 명의 백성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다. 그들 가운데 선지자 에제키엘(Ezekiel)도 있었다. 네브카드네자르는 여호야김의 동생인 시드기야(Zedekiah, c. 618~586 BCE. 유다왕국의 제20대 마지막 왕)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고, 이로써 유다 왕국은 바빌로니아의 속국이 되었다.

    예레미아(Jeremiah)를 비롯하여 친바빌로니아 세력들이 반대하였으나, 시드기야는 네브카드네자르에게 반기를 들어 공물 납부를 거부하고, 이집트 호프라(Hophra, 589~570 BCE. 이집트 제26왕조 제4대 파라오)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589년 네브카드네자르 II세는 예루살렘을 재차 공격하였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이 모압이나 암몬, 에돔 등 이웃 나라로 도피를 하였다. 18개월(30개월이라는 설도 있음)의 공격 끝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네브카드네자르는 또 다시 성전을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성벽은 물론 성전과 함께 중요 인물들의 가옥도 파괴하였다. 시드기야와 그의 아들들이 포로가 되었고, 시드기야 면전에서 그의 아들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눈알이 뽑힌 시드기야는 장님이 되어 많은 사람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갔다(예레미아 52:10~11). 유다 왕국은 바빌로니아의 속주가 되어, 그 이름도 예후드 메디나타(Yehud Medinata)로 바뀌었고, 독립국가로서의 왕국도 끝이 났다.

    그 결과 기원전 6세기 대부분 예루살렘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고, 반면 비교적 안전했던 북쪽 벤야민이 번성하였다. 그곳 미즈파(Mizpah: 벤야민 지파의 성읍)가 이제 바빌로니아의 속주가 된 예후드 메디나타의 수도가 되었다. 이 같은 수도 이전은 당시 바빌로니아의 보편적인 정책이었다. 바빌로니아는 아쉬켈론(Ashkelon)의 정치, 종교, 경제 지도자들을 포로로 하고, 행정 중심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 네브카드네자르 II세는 게달리아(Gedaliah: 선지자 예레미아의 목숨을 구한 아히캄의 아들)를 예후드 메디나타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유대인 게달리아는 인근 모압이나 암몬, 에돔 등지로 도망을 갔던 유다인들이 돌아오도록 애를 썼고, 망한 나라가 다시 번영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정책을 폈다. 그러나 곧 유다 왕국 충신 느다니아(Ishmael ben Nethaniah)가 게달리아를 비롯하여 칼데아(Chaldea: 메소포타미아 남부 습지대에 살았던 셈어족)족 예루살렘 바빌론 수비대 병사들도 모조리 참살하였다(예레미아 41: 2~3). 유다 땅에 남아 있던 백성들과 고향으로 돌아왔던 유대인들은, 예레미아의 반대(예레미아 42:2, 43:2~3)에도 불구하고, 바빌로니아의 복수를 피해 카레아(Yohanan ben Kareah: 바빌로니아 예루살렘 총독)의 지휘 아래, 모두 이집트로 도피하였다. 이는 유다 땅 밖, 또 다른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미즈파 유적-
    

    이집트로 간 유대인들은 미그들(Migdol), 타파네(Tahpanhes), 놉(Noph)그리고 파드로스(Pathros) 등지에 흩어져 살았다. 예레미아도 함께 가(예레미아 43:6) 그들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거나 이집트로 갔다. 예레미아서는 바빌로니아로 잡혀간 유대인 수를 4천6백 명으로, 열왕기에서는 8천에서 1만 명 정도로 보고 있다. 

    기원전 539년 오피스 전투(Battle of Opis: 신바빌로니아와 아케메네스 제국 간 마지막 전투)에서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멸한 페르시아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c. 600~530 BCE. 아케메네스 제국 시조)은 바빌론 유수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허락으로 왕자 제루바벨(Zerubbabel: 여고니아의 손자)과 선지자 에스라는 유다 백성들을 이끌고 유다 땅으로 돌아가(538 BCE), 기원전 586년 네브카드네자르가 불태워 버린 솔로몬 성전을 재건하였다. 느헤미아(Nehemiah: 페르시아의 유대아 총독)는 성벽 재건축을 지휘하였다. 성전 재건은 매우 어려웠다. 그 일은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했으나 고향으로 돌아온 백성이 적어, 노동력이 부족했다. 성전 재건과 함께 유대아는 신앙의 나라가 되었다. 이 성전은 바로 야훼에게 바친, 이 새로운 나라의 눈부신 상징물이었다. 바빌론 유수나 성전 재건 등 일련의 사건은 유대 문화와 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대교 성서 말씀의 주요 주제는 바로 이스라엘의 왕 야훼에 대한 유대인의 충성이다. 따라서 성서적 관점에서 보면, 유일신을 섬기지 않은 이스라엘 왕국이나 유다 왕국의 왕들은 모두 “사악”하다. 다만 선한 왕들 가운데 히스기야(Hezekiah, 727~698 BCE)는 우상 숭배를 금지한 왕이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므나세(698~642 BCE)나 암몬 (642~640 BCE)은 우상 숭배를 부활시켜, 야훼의 노여움을 샀다. 예를 들어, 텔 아라드(Tel Aad: 사해 서쪽이 있는 고고학적 유적지)에서 발굴된 마리화나(Cannabis) 흔적은 신앙에 반하는 것으로 유다 왕국에서 제례를 드릴 때, 정신적인 자극을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요시아(640~609 BCE)는 다시 야훼 숭배로 돌아갔지만, 이미 때가 늦어 신바빌로니아에게 왕국이 멸망당하는 야훼의 징벌을 받은 것이다. 이처럼 유대교에서 바빌론 유수는 야훼에게 불복종하고 우상을 숭배한 죄에 대한 벌을 뜻한다. 바빌론 유수는 유대교는 물론, 유대 문화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 기간에, 과거의 문자를 현재의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바꾼 것이 그 예이다.

    예루살렘은 완전 파괴되었지만,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유다 땅의 일부에는 바빌론 유수 기간에도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바빌론에서 석방된 포로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서쪽이나 북쪽으로 갔다. 그들 대부분이 오늘날의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에 정착을 하였다. 이들 대부분이 현 이락 유대인, 페르시아 유대인, 조지아 유대인, 부카라 유대인(Bukharan Jewish: 유대어-페르시아어 사투리를 사용한 중앙아시아 유대인) 공동체의 조상이다.

    고고학적 발굴과 조사를 통해 바빌론 유수가 있기 전 유다 왕국 인구는 약 7만5천 명 정도로 본다. 포로의 숫자를 최고 2만 명 정도로 보는 성경 기록도 있는데, 그렇다면 대략 25%정도의 인구가 포로로 잡혀 가고, 75%는 유다 땅에 그대로 있었다는 말과 같다. 유대 땅 여러 곳에 사람들이 계속 살았고, 그곳들에 파괴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인구도 줄어, 그 후 150년 동안 폐허 상태였다.

페르시아 시대

    예레미아서(39~43장)는 바빌론 유수 기간을 상실의 시대로 보고 있다. 열왕기하(17~18장)에서는 역사가 잠시 중단된 시기로, 연대기에서는 유대아 땅의 안식기로 본다. 에스라서 첫머리에서는 유다 왕국의 종말로 본다. 다니엘서(1~6장)의 수잔나, 벨, 드래곤 이야기, 외경 에스드라서(3:1, 5:6), 토빗, 유딧기에서도 바빌론 유수가 등장한다. 애가哀歌는 바빌론 유수로부터 비롯된 이야기이다. 모세 5경(Pentateuch) 마지막 편집 본은, 바빌론 유수 이후 페르시아 치세 기간에 이루어졌고, 그 주요 전거典據의 하나인 선지자 전거(Priestly source)는 주로 유다 왕국이 페르시아 속주가 된 때의 산물이다. 이처럼 바빌론 유수는 히브리 성경의 풍부한 주제이기도 하다.

    바빌론 포로 기간 중 선지자 에제키엘(Ezekiel)은 유대인 최고의 지도자였고, 토라가 문서화 되어 유대인 일상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유대인들은 또 성전이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민족 종교 집단으로 바뀌기도 했다. 카오프만(Y. Kaufmann, 1889~1963. 이스라엘 성서학자)은 바빌론 유수를 분기점으로, 이스라엘 종교가 막을 내리고 유대교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율법가나 현자들이 유대인의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바빌론의 유수가 있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 구성은 종족 중심이었지만, 유수 이후에는 가족이 중심이 되었고, 에레츠 이스라엘(Eretz Israel: 가나안 땅)에는 언제나 많은 수의 유대인이 살게 되었다.

네부카드네자르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 II, 605~562 BCE)는 부왕(Nabopolassar, 626~605 BCE. 신바빌로니아 제국 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역사 상 그는 가장 위대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수도 바빌론 건설 계획을 수립했고, 유대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43년 동안 재위, 칼데아 왕조(Chaldean dynasty: 나보폴라싸르 왕가)에서 가장 오랜 세월 치세를 한 왕이기도 하다. 무인이었던 그는, 부왕 치세하에서도 이미 군대를 지휘하여 아시리아와의 전투(Medo-Babylonian war: 나보폴라싸르의 권력 장악 계기가 된 아시리아 내전)를 치루기도 했다. 기원전 605년 네부카드네자르는 네코(Necho II, 610~595 BC. 이집트 제26왕조 파라오)가 지휘하는 이집트 군대를 카르케미쉬 전투에서 격파(예레미아 46:2~10)하였다. 이렇게 해서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아시리아제국을 압도하고 강력한 국가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르케미쉬(Carchemish: 유프라테스 강 상류 고대 성읍) 전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Nineveh)가 메데스, 스키타이, 바빌로니아 동맹군에게 점령을 당하자 아시리아는 하란(Harran: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천도하였다. 기원전 609년 하란이 바빌로니아 동맹군에게 점령당함으로써 아시리아 제국은 멸망을 했고, 아시리아군의 패잔병들이 이집트 통치하에 있던 유프라테스 강변의 카르케미쉬에 집결하였다. 기원전 609년, 아시리아의 과거 가신 국가였던 이집트는, 아시리아 왕 아슈르 우발리트 II세(Ashur-uballit II, 재위 612~609 BCE)와 동맹을 맺고 바빌로니아에 반기를 들었다.

-카르케미쉬 전투-

    이집트 파라오 니코 II세가 지휘한 이집트군은, 유다 왕 요시아(Josiah, 640~609 BCE)군대의 저지로 인해 전쟁터인 메기도(Megiddo)도착이 늦었다. 이 전투에서 요시아는 패배를 하여 전사하였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이집트-아시리아 동맹군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하란으로 진격하였으나, 점령에는 실패하여 아시리아(현재의 시리아) 북서부로 퇴각하였다.

    카르케미쉬 전투에서 이집트-아시리아 동맹군은 네부카드네자르 II세가 지휘하는 바빌로니아-메디아 동맹군을 맞아 전투를 치렀으나, 패전하였다. 그 결과 아시리아는 멸망하였고, 이집트는 고대 근동 세계에서 중요한 세력으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이 전투 후 바빌로니아는 경제적 번영기를 맞았다. 이 전투 이후 부친이 죽자 네부카드네자르는 왕위에 올랐다. 부왕의 치세 하에서 그는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나, 정작 자신이 왕이 되고난 후에는 군사적으로 이렇다 할 실적이 없었고, 더구나 이집트 공략에서는 재난이라할 만큼 커다란 실패를 하였다. 이 시기 바빌로니아의 가신 국가들, 특히 레반트 지역의 가신 국가들은 바빌로니아를 신아시리아 제국에 훨씬 못 미치는 “종이 호랑이”로 보아, 그 군사력에 의심을 품었다. 사태는 심각하여 바빌로니아 백성들조차 왕명을 따르지 않고, 반역 행위를 하는 자들도 있었다.

    등극 초기 이처럼 불운한 시기를 겪은 네부카드네자르에게 행운이 찾아왔으니 바로 이집트 사주를 받은 레반트 지역 가신 국가들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일이다. 기원전 587년 네브카드네자르는 유다왕국을 멸하고 그 수도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그 결과 예루살렘과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 바빌로니아로 잡아 간 사건이 바로 “바빌로니아 유수”이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네부카드네자르를 “유대 민족의 파괴자”로서, 그때까지 그들이 겪었던 그 누구보다도 최대의 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성경 예레미아서는 네부카드네자르를, 잔인한 적이지만 또한 하느님이 지명하신 이 세상의 지도자로, 하느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를 징벌하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 언급하고 있다. 예루살렘 정벌 이후 레반트 지역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그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고대 중근동에서 가장 강력한 신흥 국가로 바꾸어 놓기도 했다.

    군사적 업적 이외에도 그는, 위대한 건축가로 이름을 남겼다. 여러 전쟁에서 승리를 함으로써 그는 바빌로니아를 비롯하여 메소포타미아에 거대한 건축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의 치세 하에, 에사길라(Esagila: 바빌론 수호신인 Marduk 신전)와 에테메난키(Etemenanki: 마둑신에게 헌정된 지구라트)를 비롯하여 수많은 종교 관련 건축물이 새로이 건설되었다. 왕궁의 수리와 신축을 비롯하여, 중앙로의 단장과 바빌론 시내로 들어가는 여덟 번째 문인 이쉬타르(Ishtar Gate)를 건설하였다. 네부카드네자르 II세에 관해서는 군사적 업적 보다 건축에 관한 기록이 많아, 역사가들은 그를 무사보다는 건축가로 보기도 한다. 현대인이 보는 바빌론의 모습은 대부분 그가 설계한 모습이다.

-이쉬타르문(베르린 박물관)-

키루스 대왕

    키루스 대왕으로 불리는 키루스 II세(Cyrus II, c. 600~530 BCE)는, 최초의 페르시아 제국인 아케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을 창업한 인물이다. 그의 치세하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는 서쪽으로 헬레스폰트(Hellespont: 현재의 터키 Gallipoli 반도)에서 동쪽의 인더스 강에 이르는, 전례가 없던 거대 제국이었다. 그의 후임 왕들은 서쪽으로 발칸 반도, 동쪽으로는 인더스 분지까지 영토를 넓혔다.

    키루스는 30년을 통치했으며, 메디아 제국(Median Empire: 고대 이란 Medes 족의 제국)을 멸한 후 리디아 제국(Lydian Empire: 오늘날 터키 서부에 있었던 고대 제국)에 이어 마침내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멸망 시켰다. 그는 중앙아시아로 원정을 하여 “예외 없이 모든 나라들을 복속” 시켰다. 그러나 이집트 정복에는 나서지를 않았는데, 이는 기원전 530년 마사게타(Massageta: 고대 동부 이란 유목족)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크세노폰(Xenophon, 430~355 BC. 그리스 역사가)에 따르면, 그 전투 후 키루스는 수도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의 왕위는 아들 캄비세스 II(Cambyses II, 550~530 BCE)에게 계승되었다. 캄비세스 II세는 짧은 재위 기간 중 이집트, 누비아(Nubia: 나일 강 유역), 레나이카(Cyrenaica: 현재의 리비아 동부 지역)를 정복하였다.

    키루스 대왕의 정복전쟁은 종교적 목적에 크게 무게를 두었다. 과거의 정복은 주로 전략적 이유 즉, 잠재적인 적을 없애 국토의 안전을 도모코자 한 것이었다. 그의 시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페르시아인은,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전전하던 초라한 종족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그리스어나 독일어, 영어와 같은 인도-유럽어 계통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에게 그들은 동물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고, 따라서 매우 무시를 당했다. 그러나 기원전 7세기, 선지자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 그리스어로 Zoroaster)가 나타나 새로운 종교(Zoroastrianism: 배화교)를 설파하였다. 그에 따르면 우주는 서로 대립되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 하나는 선과 빛(Ahura Mazda)이요 또 다른 하나는 악과 암흑(Angra Mainy)이라고 했다. 우주의 역사란 이 두 신 사이의 길고 긴 투쟁에 불과한 것으로, 결국에는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우주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이 싸움에 참가하는 것이며, 모든 신들과 종교는 거의 영원한 이 싸움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키루스 대왕-

    조로아스터교(배화교)에는 선과 악 두 신이 있고, 모든 다른 신들은 이들 중 어느 한 편에 있다. 키루스는 야훼가 선한 신들 가운데 한 신이라고 믿었고, 따라서 야훼가 자신에게 예루살렘에서 야훼 숭배를 회복하고, 성전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야훼의 명령에 따라 그는 성전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예배를 드릴 사람들이 없는 성전은 무용지물일 터였다. 따라서 그는 바빌론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실제로 키루스는 정복지의 많은 종족들을 그들의 땅으로 돌려보내 그들의 신을 경배토록 하였음으로, 유대인을 되돌려 보낸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바빌론의 유대인들 중 많은 수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바빌로니아 종교로 개종하였다.

    그리스인들에게 “존경 받는 어른 키루스”로 알려진 키루스 대왕은, 정복한 땅의 관습과 종교를 존중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귀환 칙령(Edict of Restoration)은, 그가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정복한 후 그곳에 포로가 되어 있던 유대인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려 보내라는 명령으로, 이 사실은 키루스 원통(Cyrus Cylinder: 아카디아 쐐기문자로 쓴 키루스 대왕의 명령문이 담긴 점토판)으로도 증명된다. 이 통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과 포로가 된 백성들 석방에 관한 키루스의 칙령이 기록되어 있다. 이 칙령은 성경에도 언급되어 있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빌로니아로부터 시온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 유대인의 종교에 영원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키루스 원통-

    키루스 대왕은 또한 인권, 정치, 군사 전략에서의 업적뿐만 아니라 동, 서양 문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고대 세계의 아케메네스 제국 영향력은 멀리 아테네까지 미쳐, 아테네의 귀족들은 아케메네스 귀족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문화로 바꾸기도 했다. 키루스는 오늘날 이란의 페르시스(Persis)주 출신으로, 현대 이란인의 정체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현대 이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 그의 무덤 역시 존경을 받는 장소이다. 1970년대 이란의 팔라비 왕(Mohammad Reza Pahlavi, 1919~1980)은 “키루스 원통(Cyrus Cylinder)"을 인권에 관한 인류의 가장 오랜 선언문으로 정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종교에도 페르시아적인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자신들의 종교를 정화하려는 노력과 함께 이루어졌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대부분 신앙과 관련이 없는 대중적인 것들로, 교육 받은 성직자 계층이 아닌 대중 속에서 일어난, 기독교에서만 지속 가능 것들이었다. 그 예로는 이중 구조의 우주와 사후 신앙을 들 수 있다.

    먼저 이중 구조의 우주(Dualistic Universe)이다. 초기 히브리인들은 야훼만이 우주를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모든 역사는 두 힘 즉, 야훼와 인간의 의지라는 두 힘이 가져온 결과물이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바빌론 유수를 합리화하려다 보니, 우주가 선과 악이라는 두 대립적인 힘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페르시아 사상을 받아들인 게 아니었을까 한다. 따라서 바빌로니아 유수 이후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종교 속에, 야훼에 대립적인 악마를 언급했을 것이고, 기독교에서는 이 말이 “사탄”이 된 것이다.

    다음은 사후 신앙관이다. 바빌론의 유수 이전 히브리인들의 사후 신앙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그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 잠시 머무는, 올(Sheol)이라는 먼지로 이루어진 집으로 간다고 믿었다. 이 믿음은 모든 셈어족들의 사후관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은 착한 사람의 영혼은 영원한 축복 속에 선한 신과 다시 만나고, 악한 사람은 악한 신이 마지막 패배할 때까지 그 신과 함께 한다고 믿었다. 히브리인들은 이와 같은 페르시아 사후관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같은 사후관은 바빌론 유수와 같은, 이 세상 삶의 고통을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없었고, 우주의 정의란 이 세상에서 삶이 아닌 오직 사후에만 있다고 믿은 것이다. 기독교도와 에세네(Essenes: 사해 북쪽에서 비롯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유대 신비주의 종교)파는 이 교리를 정통으로 받아들였다.

제2성전 기간(6세기 BCE~3세기 CE)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의 시조인 키루스 대왕 때 유대아 땅은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페르시아 지배 시대가 열린 것이다. 왕위를 물려받은 캄비세스 왕(Cambyses II, 550~ 530 BCE)의 이집트 병합으로, 유대아와 필리스타인 평야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변방이 되었다. 기원전 522년 캄비세스가 죽자 정치적 혼란 끝에, 기원전 521년 다리우스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다리우스 대왕(Darius the Great, 550~486 BCE)은 행정조직을 개편하고, 제반 법률을 개정하였다. 토라의 편집 이면에는 이러한 정책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404년, 페르시아는 이집트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면서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적대자가 되었다. 따라서 페르시아는 유대아와 레반트에 대한 행정 통제를 강화하였다. 결국 페르시아는 이집트를 재정복하였지만, 페르시아도 곧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 BCE)의 수중에 떨어짐으로써, 레반트는 헬레니즘 시대를 마지하게 되었다.

    페르시아 지배 시대 유대아 인구는 전 기간을 통하여 3만 명을 넘지 못했을 것이고 예루살렘 인구는 대략 1천5백 명으로, 그들 대부분은 성전과 관련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키루스 대왕은 첫 조치로, 바빌론에 포로가 되어 있는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토록 하였다. 그들이 돌아가 곧 성전을 재건하였다고 하나, 성전 재건은 빨랐어야 다음 세기 중엽, 예루살렘이 다시 유다의 수도가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처음 페르시아는 유대아를, 여호야긴(Jehoiachin: 유다왕국의 19대왕으로 끝에서 두 번째 왕)의 후손들이 다스리는 다윗 왕가의 가신국가로 보고 통치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중엽의 유대아는 세습 사제들이 지배하는 신정神政 체제로, 페르시아가 임명한 총독은 질서유지와 조세 업무만을 담당하였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 중엽 에즈라(Ezra, 480~440 BCE. 유대 율법학자 겸 사제)와 느헤미아(Nehemiah, 465~424 BCE)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에즈라는 토라를 실천토록, 느헤미아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토록 각각 페르시아 왕의 명령을 받고 온 사람들이었다.

    성경은 바빌로니아로부터 돌아온 귀환자들과 유대아에 남아있던 잔류자들 간의 긴장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귀환자들은 성전 재건에 잔류자들의 참가를 거부했고, 이는 부분적으로 귀환자들이 바빌로니아 시절 겪은 고립주의와, 또 부분적으로는 재산권에 대한 분쟁 때문이었다. 에제키엘(Ezekiel: 사제.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한 예언자)과 그의 제자들의 예언에 영감을 받은 에즈라와 느헤미아는, 이처럼 분열된 민족을 순결한 전례사회로 다시 통합하려고 했다.

    페르시아 지배 시대, 특히 기원전 538~400년 즈음에는 유대교와 성서 정전正典 기록을 위한 기반이 마련된 시대였다. 또 유대아의 일상 언어가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로 바뀐 시대이기도 했다(종교나 문헌에는 히브리어가 계속 사용되었다). 다리우스 대왕의 관료제도 개혁으로, 토라의 광범한 개정과 재정비가 있었을 것이다. 페르시아 지배 시기 이스라엘에는 옛 유다 왕국 백성의 후손들, 바빌로니아로부터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 사마리아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또는 그들보다 먼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가 되돌아온 메소포타미아 사람들, 그밖에도 여러 종족이 뒤섞여 살았다.

헬레니즘 시대(333~64 BCE)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356~323 BCE. 고대 그리스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의 정복으로, 유대아에는 헬레니즘 시대가 열린다. 기원전 323년 후계자 없이 알렉산더가 죽자 그의 수하 장군들이 그의 제국을 분할, 지배하였다. 기원전 322년 프톨레미 I세(Ptolemy I, 367~283 BC. 프톨레미 왕조의 시조)는 자신을 이집트의 왕으로 선언을 하고, 기원전 320년에는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의 속주였던 예후드 메디나타(Yehud Medinata: 유대아 땅)를 점령하였다. 유대인과 셀류싯 제국(Seleudcid Empire, 312~3 BCE. 마케도니아 제국 분할 후 마케도니아 장군 Seleucus I세가 세운 나라) 과는 처음 관계가 좋았으나, 에피파네스 왕(Antiochus IV Epiphanes, 174~163 BCE. 셀류싯 왕)이 유대아에 헬레니즘 문화를 이식하려고 하자, 유대인 무사 마카비들에 의한 반란(Maccabean Revolt, 167~160 BCE)이 일어났다. 반란의 결과 유대아로부터 셀류싯 사람들이 쫓겨나고, 하스모니아 왕조(Hasmonian dynasty, 140~37 BCE. 유대아를 통치한 왕조)가 통치하는 독립 유대 왕국이 수립되었다. 이 시기에는 또한 정통 유대인과 헬레니즘화된 유대인 사이에 내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스모니아 왕들은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이 통치했던 모든 영토를 포함하여, 예루살렘의 유대 군주가 통치하는 왕국을 재건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모압인, 에돔인, 암몬인들을 유대교로 강제 개종을 시키기도 하였다. 이때 하스모니아 왕조가 유대교 정전을 정식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프톨레미 지배

    전술한 바와 같이 기원전 322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프톨레미 I세는 알렉산더 제국의 일부였던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기원전 320년 그는 유대아도 수중에 넣었는데, 그곳이 이집트 공격과 방어를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 눈독을 들인 세력이 있었다. 기원전 317년 마케도니아 장군 안티고누스(Antigonus Monophthalmus, 382~301 BCE)는 바빌로니아의 속주 메디아(Media: 현재의 이란 북부에 있던 고대 왕조) 총독 셀레우쿠스(Seleucus, 358~281 BCE. 후일 셀류싯 제국을 창업한 Seleucus I Nicator세)를 몰아내고, 레반트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프톨레미 편에 선 셀레우쿠스는, 안티고누스의 아들 데메트리우스(Demetrius I, 337~283 BCE. 마케도니아의 왕)와 싸울 군대를 모집하였다. 기원전 312년, 프톨레미는 가자(Gaza)전투에서 데메트리우스를 격파한 후, 예후드 메디나타를 다시 수중에 넣었다. 전투는 계속되어 기원전 301년 이프수수(Ipsus: 고대 아나톨리아 중부 마을)전투에서 셀레우쿠스 군대 역시 안티고누스를 격파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프톨레미도 역시 그 지역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한때 동맹관계였던 두 사람 사이에 대를 이어, 백년에 걸친 여섯 차례의 시리아 전쟁이 일어났다(Syrian wars, 274~168 BCE).

    프톨레미 왕정 초기 유대인들은 그 통치에 만족해하였다. 평화롭고 경제도 안정적이었다. 세금을 내고 반역을 하지 않는 한 종교의 자유도 허락되었다. 프톨레미 I세를 이어 프톨레미 II세(Ptolemy II Philadelphus, 309~246 BC)치세하에서 예후드 메디나타의 국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프톨레미 II세는 셀레우쿠스와의 제1차 및 제2차 시리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프톨레미 II세는, 셀류싯 제국(Seleucid Empire, 312~63 BC. 셀레우쿠스가 창업한 제국)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자신의 딸 베레니체와 셀류싯 왕 안티오쿠스 II세와의 결혼을 성사 시켰다. 정략적이었던 그 결혼은 성공적이지 않아, 베레니체와 안티오쿠스 II세 그리고 그 자손들은 안티오쿠스 II세의 전처에게 모두 살해를 당하였다. 이는 제3차 시리아 전쟁의 원인이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이 있기 전 프톨레미 II세는 나바테아(Nabataeans: 아라비아 사막 북부 레반트 인근의 고대 아랍인)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적 있었다.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 프톨레미 II세는 팔레스타인의 성읍들을 튼튼히 하고 새로운 성읍들을 건설했다. 그 결과 많은 그리스인들과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이 새로운 성읍들로 옮겨왔고, 그들을 따라 새로운 관습과 문화 즉 헬레니즘이 전해지기도 했다. 프톨레미 시대 “징세 농부”라는 새로운 제도가 확립되었다. 소농으로부터 높은 세금을 징수하는 대농大農 제도였다. 이 대농들은 많은 돈을 벌었으나, 또한 이 제도로 인해 귀족들과는 물론 백성들과도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제3차 시리아 전쟁 중, 예루살렘 최고위 사제인 오니아스(Onias II)는 프톨레미 III세(Ptolemy III Euergetes, 246~222 BCE)에게 조세 납부를 거부하였다. 이 사건으로 프톨레미 왕조에 대한 유대인의 지지가 철회되자, 제4차 및 제5차 시리아 전쟁이 일어났다. 그 결과 프톨레미 왕조의 팔레스타인 통치는 종말을 맞았다. 제4차 및 제5차 전쟁은 앞선 세 차례 전쟁보다 더 많은 상처를 팔레스타인에 안겨 주었다. 이 상처와 함께 프톨레미 IV세(Ptolemy IV Philopater, 244~204 BCE), 프톨레미 V세(Ptolemy V, 210~180 BCE)의 무기력한 통치는 막강한 셀류싯 군사력를 맞아, 1세기에 걸친 프톨레미 왕조의 팔레스타인 지배가 끝이 났다.

마카비 반란

    셀류싯의 예루살렘 지배는 안티오쿠스 III세(Antiochus III, 241~187 BCE. 그리스 왕 겸 셀류싯 제국의 제6대왕) 때인 기원전 198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예루살렘 백성들이 자신을 따듯하게 영접해준 대가로 프톨레미 왕들처럼 유대인의 종교와 관습을 허락하고 성전의 재건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그는 로마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어느 사원을 약탈하기로 했다. 이를 알아챈 엘람(Elam: 현 이란 서남부 오지에 있던 고대 문명)소재 벨(Bel) 사원은 사람을 보내, 안티오쿠스 III세와 그의 협조자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기원전 187년의 일이었다. 안티오쿠스 III세의 아들 안티오쿠스 IV세 (Antiochus IV Epiphanes, 215~164 BCE)가 부친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안티오쿠스 IV세의 신하 헬리오도루스는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보물을 훔치려고 했으나, 고위 사제 오니아스(Onias III)에게 탄로가 났다. 오니아스는 헬리오도루스의 성전 출입을 금지하고, 그 이유를 안티오쿠스 IV세에게 설명했다. 안티오쿠스 IV세는 오히려 오니아스를 교체하고, 오니아스의 아우 야손(마카베오하 2:19)을 대신 자리에 앉혔다. 야손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한 일이었다. 야손과 안티오쿠스 IV세,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은 헬레니즘 관습을 따랐다. 마카베오상에 기록되어 있듯, 이러한 헬레니즘 관습은 하느님과의 계약과 함께 할 수 없었다. 헬레니즘 영향으로 많은 유대인들은 불행을 느꼈다. 마타디아스(Mattathias, 166~165 BCE. 마카비 반란을 촉발 시킨 유대교 고위 성직자)와 그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바로 마카비 반란의 원인이었다.


-유대인 배교자를 죽이는 마타디아스-

     희생물을 바치라는 왕의 요구를 거절한 마타디아스는, 이 때문에 아들들과 함께 도주를 해야 했다. 바로 마카비 반란(Maccabean Revolt, 167~160 BCE)의 시작이었다.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us, ?~160 BCE. 유대교 고위 사제. 마타디아스의 아들)가 반란의 지도자였다. 안티오쿠스 IV세의 반란 진압 명령에 따라 리시아스(Lysias, ?~162 BCE. 셀류싯 시리아 총독)는 장군들을 보내었으나, 모두 반란군들에게 패하였다. 리시아스 자신도 출전을 하였으나 역시 패하고 말았다. 그후 안티오쿠스 IV세는 죽었는데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가 나나야(Nanaya: 메소포타미아 사랑의 신)신전을 공격, 파괴한 후 곧 병사했다는 이야기다.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의 아들 안티오쿠스 V세(Antiochus V Eupator, c. 172~161 BCE)가 9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리시아스가 그의 섭정이 되었다.

    아크라(Acra: 그리스가 예루살렘에 세웠던 요새) 공방전 시, 유다의 동생 엘레아자르(Eleazar Maccabeus)가 전사하였다. 마카비 군사는 예루살렘으로 후퇴하였으나, 그곳에서도 참패하였다. 그후 데메트리우스가 리시아스와 4촌 동생 안티오쿠스 V세를 죽인 후, 셀류싯 새 왕(Demetrius I Sorter, 162~150 BCE 재위)이 되었다. 마카비 봉기를 반대한 알키무스(Alcimus)는 헬레니즘화된 고위 사제로, 바키데스(Bacchids: 유프라테스 서쪽 지방 셀류싯 총독)의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하시드(Hasideans: 마카비 반란 기간에 있었던 종교 그릅) 율법학자들이 알키무스에게 누구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다 마카비는 로마와 협력 조약을 체결, 지원을 기다리고 있던 중 바키데스 군대와의 예루살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아우 요나단(Jonathan Apphus)이 뒤를 이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기원전 153년 셀류싯 제국이 내정 문제에 직면하자, 그 기회를 이용한 요나단은 데메트리우스 I세에게 군사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셀류싯 왕 발라스(Alexander I Balas, 150~145 BCE)는 그를 최고위 사제로 임명하였다. 그후 이집트와 셀류싯 간 분쟁이 발생하자 요나단은 군대를 지휘하여 이집트 군을 격파하고, 아크라 요새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42년, 셀류싯 왕 트리폰(Diodotus Tryphon, ?~138 BCE)은 요나단을 살해하였다. 요나단의 동생 시몬(Simon Thassi, ?~135 BCE)이 뒤를 이었다. 기원전 141년 시몬은 하스모니아 왕조(Hasmonean Dynasty, 140~37 BCE)를 창업하였다. 그의 형제 유다 마카비가 반란을 일으킨 후 26년이 지나서였다.

하스모니아 왕조

    기원전 140년부터 116년까지 하스모니아 왕조(Hasmonean Dynasty, 140~37 BCE)는, 셀류싯 제국의 유대아 자치정부로 유대아를 통치하였다. 자치라지만 완벽한 자치가 아니었다. 기원전 110년 무렵 셀류싯 제국이 내분으로 분열하면서, 유대아는 보다 자유롭게 되었다. 그 결과 인근 페레아(Perea: 요르단 강 동쪽 분지), 사마리아(Samaria: 남으로는 유대아, 북으로는 갈릴리 호수와 접하는 팔레스타인 중앙부), 이두메아(Idumea: 또는 Edom. 트란스요르단에 위치했던 고대 왕국), 갈릴리(Galilee), 이투레아(Iturea: 갈릴리 북쪽 레반트 지역)까지 통치할 수 있었다.

    성경 마카베오상, 하 그리고 요세푸스의 “유대 전기(the Jewish War)”에 따르면, 셀류싯 황제 안티오쿠스 IV세(175~164 BCE)는 프톨레미 이집트를 점령한 후(168 BCE), 실리 시리아(Coele Syria: 레바논 산맥과 안티 레바논 산맥 사이 베카 분지)와 페니키아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였으나, 로마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그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약탈하고, 유대와 사마리아 관습을 억제하였으며 헬레니즘 관습을 강제하였다. 그후 강력한 로마 공화정과 파르티아 제국(Parthian Empire, 247 BCE~224 CE. 고대 이란에 존재했던 왕국)이 등장하면서, 그 덕택으로 하스모니아는 자치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63년 로마의 침공으로, 결국 하스모니아는 로마의 가신이 되었다.

    시몬의 손자인 히르카누스 II세(Hyrcanjs II, 67~66 BCE 재위)와 아리스토불루스 II세(Aristobulus II, 66~63 BCE 재위)는 줄리어스 시저(Gaius Julius Caesar, 100~44 BCE)와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106~48 BCE)간 권력 투쟁의 볼모가 되었다. 그러나 시저와 폼페이우스가 모두 죽자 하스모니아 왕가는 파르티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잠시 자치권을 회복하였다.

헤롯 왕조

    로마의 유대아 최초 개입은 기원전 63년에 있었다. 이 해에 로마 황제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106~48 BCE)는 제3차 미드리다티스 전쟁(Mithridatic War)에서 폰투스 왕국(Kingdom of Pontus: 281~63 BCE 카파도키아에 있었던 고대 왕국)의 미드리다테스 VI세를 격파한 후 이어서 예루살렘을 점령, 약탈하였다. 이때 하스모니아 왕조 알렉산드라(Salome Alexandra, 141~67 BCE) 여왕은 이미 사망한 후였고, 그녀의 두 아들 히르카누스 II세(John Hyrcanus II, 67~66 BCE 재위)와 아리스토불루스 II세(Aristobulus II, 66~63 BCE 재위)는 서로 반목하고 있었다. 기원전 63년, 아리스토불루스 II세는 예루살렘에서 히르카누스 군대에게 포위를 당하고 있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파견관 스카우루스(Marcus Aemilius Scaurus, 92-52 BCE. 로마 정치인)에게 사자를 보내어 도움을 요청했다. 그 대가로 그는 엄청난 뇌물을 제공했고, 폼페이우스는 즉시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후 아리스토불루스 II세는 스카우루스를 금품 강요죄로 고발했다. 스카우루스는 폼페이우스의 매제 겸 부하였음으로,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누스에게 왕과 대제사장의 자격을 부여하고 유다왕국을 떠맡겨, 아리스토불루스에게 앙갚음을 했다. 그후 폼페이우스가 줄리어스 시저에게 패하자, 시저의 신하인 에돔 사람 안티파테르(Antipater I, 113~43 BCE. 헤롯 대왕의 아버지. 헤롯 왕조의 시조)가 히르카누스의 뒤를 이어, 유다 총독이 되었다.

    기원전 44년 줄리어스 시저가 살해된 후 라비에누스(Quintus Labienus, ? ~39 BCE. 로마 장군)는 “해방자들 내전(Liberators' civil war: 시저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제2차 삼두정치 당사자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가 일으킨 내전)”에 참전하였다. 내전에서 패한 라비에누스는, 파르티아(Parthian Empire, 247 BCE~224 CE. 현재의 이란에 소재했던 고대 왕국)의 군대와 함께 로마를 침략하였다(40 BCE). 파르티아가 로마 군대를 격파하자 파코루스(Pacorus I, ?~38 BCE. 파르티아 왕 Orodes II세의 아들)는 페니키아 해안으로부터 이스라엘 내륙에 이르는 레반트 전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불루스 II세의 아들 안티고누스(Antigonus)는 파르티아를 부추겨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도록 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마카비를 열렬히 지지하였고, 따라서 로마와 유대인 간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안티고누스는 파르티아 힘으로 왕위에 올라, 백성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백성들은 독립의 신시대가 오리라 생각했다. 히르카누스 II세와 파사엘(Phasael: 헤롯의 형)은 예방차 안티고누스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안티고누스는 환영 대신, 히르카누스의 귀를 잘랐다. 신체적 불구로 대제사장이 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파사엘도 곧 사형에 처해졌다.

    안티고누스는 대제사장 겸 왕이 되었으나, 그 기간은 고작 3년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도망친 에돔인 헤롯은 로마의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83~30 BCE. 원로원 집정관)에게 도움을 요청, 기원전 40년 로마 원로원은 그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그가 바로 헤롯 대왕(Herod I the Great, 72~c. 4 BCE)이다. 그가 왕이 되는 것이 파르티아와의 싸움에서 유리할 것이라는 안토니우스의 말에 따라 원로원은 헤롯을 임명했던 것이다. 하스모니아 왕가는 103년 동안 존속하다가 이렇게 망하였다. 그날 원로원은 신들에게 희생제를 올리고, 쥬피터 신전에 맹세하였다. 헤롯 취임 첫날 안토니우스는 그를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

    그후 헤롯과 파르티아와의 싸움은 몇 년 더 계속되었고, 싸움에 바빴던 로마는 병력 부족으로 헤롯을 도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원전 37년 파르티아가 패망하면서, 헤롯은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헤롯의 적인 안티고누스는 로마의 안토니우스에게 인계되어 곧 처형되었다. 하스모니아 왕조가 종말을 고한 것이다. 헤롯 왕은 “건설자 헤롯”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치세 기간 중 유대아는 전례 없는 건설 붐이 일었다. 그때 세워진 건축물은 지금도 남아, 그 지역 경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계획에 따라, 마사다 요새(Masada fortress: 이스라엘 남부 탁자 형 고대 보루), 헤로디움(Herodium: 헤롯왕의 이름을 딴 궁정 형 요새), 케사리아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 지중해 연안 샤론 평야의 고대 항구 도시)가 건설되었다.

-헤롯 성전 모형-

    그러나 안티고누스는 하스모니아 왕가의 마지막 남자가 아니었다. 아리스토불루스 III세(53~36 BCE)는 아리스토불루스 II세의 장남 알렉산더의 아들로서, 하스모니아 공주 마리암네(Mariamne I, ?~29 BCE. 헤롯의 둘째 부인)의 오빠이기도 했다. 대제사장을 잠깐 지냈던 알렉산더는 기원전 36년 처형되었다. 이는 헤롯의 첫 부인 도리스(Doris)의 질투 때문이었다. 헤롯은 마리암네와 결혼을 위해 도리스를 쫓아내, 이때 도리스는 헤롯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안티파테르 II세와 함께 쫓겨났다. 그 후 헤롯은 경쟁자인 하스모니아 왕가로부터의 암살 공포에 시달려, 마리암네를 포함 하스모니아 가문의 자손들을 모조리 살해하였다. 마리암네와 헤롯 사이에서 태어난 아리스토불루스 IV세와 알렉산더도 성인이 되자 모두 아버지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아리스토불루스 IV세가 딸 헤로디아스(Herodias, 5 BCE~39 CE)를 낳은 후의 일이었다.

-헤롯의 재판정을 떠나는 마리암네-


    히르카누스 II세는 기원전 40년부터 귀가 잘린 채 파르티아에 붙잡혀 있었다. 기원전 36년까지 4년 동안 그는 파르티아의 수도 바빌로니아에서 자신을 존경하는 유대인들과 함께 살았다. 헤롯은 그가 파르티아를 사주하여, 자신의 왕위를 찬탈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바빌로니아 유대인들은 그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헤롯은 최대의 경의를 표하여 그를 영접했고, 조정의 상석에 앉혀 원로회의 의장을 맡게 했다. 제거를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스모니아 왕가의 마지막 남은 자손인 히르카누스 II세는 헤롯에게 너무나 두려운 경쟁자였다. 기원전 30년 히르카누스 II세는, 나바테아 왕국(Nabatean Kingdom: 고대 아랍 왕국)왕과 결탁한 국가 전복 음모 혐의로 사형 언도를 받고 처형되었다.

    헤롯 치세하, 하스모니아 왕가의 남자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헬로디아스만이 딸 살로메와 살아남아 있었다. 헤로디아스는 하스모니아 공주 마리암네의 손녀딸로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하스모니아 상속녀였다. 마리암네의 죽음은 의문 투성이었다. 궁정 불화와 권력 쟁탈전 속에서 죽은 것이다. 그녀는 기원전 29년에 처형되었는데, 그녀의 손녀딸 헤로디아스와 증손녀 살로메로 인해 그 이름이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헤로디아스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두 번째 남편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20 BC~39 CE)와 갈리아로 도피를 하였다. 헤롯 안티파스는 그의 조카 아그리파 I세(Herod Agrippa, 11~44 CE. 헤롯 대왕의 손자)에 의해 로마 황제 칼리굴라(Caligula, 12~41 CE)에 대한 반역 혐의로 고발을 당하여, 헤로디아스와 함께 도피를 했던 것이다. 헤롯 왕가의 아그리파 I세와 그의 아들 아그리파 II세는 모두 하스모니아 피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아그리파 I세의 부친 아리스토불루스 IV세는, 헤롯 대왕과 하스모니아의 딸 마리암네 사이의 아들이다. 그러나 왕위는 모계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들을 합법적인 통치자로 여기지를 않았다.

-사도 요한의 머리를 헤롯에게 바치는 살로메-


초기 로마 시대(64 BCE~2세기 CE)

    기원전 64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106~48 BCE)는 시리아를 정복한 후, 예루살렘의 하스모니아 내전(Hasmonean Civil War: 하스모니아 왕권을 둘러싼 분쟁. 로마의 개입으로 종결됨)에 간섭하여, 하스모니아 가문의 히르카누스 II세(Hyrcanus II, ?~30 BCE)를 최고위 성직자에 앉혔다. 기원전 47년 히르카누스 II세는 안티파테르(Antipater)를 대장으로 3천명의 유대인 병사를 보내어, 알렉산드리아 공방전에서 위기에 처한 줄리어스 시저와 그의 조력자인 클레오파트라의 생명을 구하게 하였다. 이 일로 줄리어스 시저는 안티파테르의 후손들을 유대아의 왕으로 봉하였던 것이다. 기원전 37년부터 기원후 4년까지 헤롯 대왕은 에돔(유다의 남동부 지역)인으로서 그리고 로마의 유대인 가신으로서, 유대아를 통치하였다. 헤롯 대왕은 성전(제2성전)을 크게 지어, 이 성전은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 건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때 유대인 인구는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약 10%를 점하였다.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에도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성전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힐렐(Hillel, 10 BCE~10 CE. 힐렐 학파의 시조)이 이끄는 랍비 유대교는, 성전의 성직자들보다 훨씬 더 백성들의 인기를 끌었다. 로마는 예루살렘의 유대 성전에 황제의 상(像)을 전시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로마 제국 내 유대 시민이 성전에 세금을 납부한 경우에는 특별 전시를 허락하였다.

-힐렐-

    성경에 따르면, 예수(Jesus)는 헤롯 대왕 치세 말기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사렛 출신의 개혁자로, 서기 25년에서 32년 사이에 로마 총독 빌라도(Pontius Pilate)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의 제자인 12사도는 바울(Paul, 5~67 CE)을 비롯하여 모두 유대인이었고, 바울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정의를 내려, 새로운 종교의 탄생을 향한 거보를 내디뎠다. 서기 50년, 예루살렘 종교회의는 유대교의 할례와 토라에의 속박을 거부하고, 비유대인에게도 가능하며 보다 보편적인 신의 개념을 가진 새로운 유대 종교(기독교)를 창안하였다. 예수의 또 다른 제자 베드로(Saint Peter)는 초대 교황이 된 인물이다.

    서기 64년 성전의 고위 성직자 감라(Joshua ben Gamla)는 처음으로, 유대 소년들에게 여섯 살에 읽기 공부를 해야 한다는 종교적 의무를 부과하였다. 그 후 수백 년이 지나면서 이 의무는, 유대 관습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제1차 유대-로마전쟁

    유대아와 로마 간에는 세 차례의 전쟁이 있었다. 제1차 유대-로마전쟁(66~73 CE)은 “유대인 대반란” 또는 “유대인 전쟁” 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전쟁은 로마 지배하 유대아(Judea: 로마 속주 유대아, 사마리아, 에돔)가 로마에 저항한 세 차례 전쟁 가운데 첫 번째로서, 도시들이 파괴되고 백성들의 이산과 토지가 몰수를 당했고, 성전의 파괴를 가져왔다. 이 대반란은 로마-유대인 간 종교적 갈등이 원인으로, 네로황제 치세 12년인 서기 66년에 시작되었다.

    예루살렘 통치자 헤롯 대왕은, 로마 원로원이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한 로마제국의 가신 왕이었다. 그는 기원전 37년부터 33년 간 예루살렘을 통치한 왕으로, 왕권에 도전한 사람은 누구든 죽이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폭군이었다. 헤롯은 과거 하스모니아 왕조의 모든 사람들을 죽였다. 하스모니아 왕가의 공주였던 자신의 아내를 포함하여 모든 처족들을 죽인 무자비한 왕이었다. 그는 또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헤롯의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귀족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사제는 과거 왕조와 무관한 사람으로만 임명했다.

    기원전 4년 그가 죽은 후, 그의 혈족들이 영토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이에 따라 왕국은 4개로 분열(Herodian Tetrarchy)되어 그의 누이와 세 아들들에게 상속되었다. 그 누구도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장남 아르켈라우스(Herod Archelaus, 23 BCE~c.18 CE)는 사마리아, 유대아, 에돔을, 차남 안티파스(Herod Antipas, 20 BCE~39 CE.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보내어 죽인 왕. 루가 복음 23:11)는 갈릴리와 페레아(Perea: 요르단 강 동안)를, 헤롯 대왕의 누이 살로메(Salome I, 65 BCE~10 CE)는 람니아(Iamnia: 현 이스라엘 Yevne 시), 아조투스(Azotus: 현 이스라엘 Ashdod 시), 파사엘리스(Phasaelis: 현 웨스트 뱅크 북동쪽 Fasayil 마을)의 여왕이 되었다. 서기 6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 63 BCE~14 CE)는 악정 책임을 물어 아르켈라우스를 해임하고, 직접 통치를 위해 키리니우스(Publius S. Quirinius, 51 BCE~21 CE)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아르켈라우스 치세하 백성들의 탄원을 받아들인 후 단행한 조치로, 그 결과 유대아 땅은 로마의 “유대아 속주”가 되었다. 그밖의 헤롯 왕가 영토는 계속 헤롯 사람들 소유였다. 아르켈라우스의 이복형제인 헤롯 필립(Philip, c. 26 BCE~34 CE)은 이두레아(Iturea: 갈릴리 북쪽 레반테 지역), 트라코니티스(Trachonitis: 시리아 남부 화산암 지역), 바타네아(Batanea: 요르단 강 북동 지역), 가울라니티스(Gaulanitis: 골란 고원), 아우라니티스(Auranitis: 시리아 남쪽 요르단 북쪽 지역), 파네아스(Paneas: 골란 고원 일부 지역)를 차지하였다(누가복음 3:1).

    헤롯 대왕이 남긴 또 다른 유산은 경제적 궁핍이었다. 헤롯의 대규모 건설 현장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가난을 면치 못하였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가난한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왕궁은 이를 진압할만한 지도력이 없었다. 헤롯의 지도력 결핍으로 모든 지역이 폭동에 취약했고, 이는 대폭동을 예고하는 전조였다. 지중해 동부 지역에 대한 로마의 지배가 확대되면서, 반은 로마에 종속되어 있던 헤롯 왕국은 서기 6년, 결국 로마 제국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었다. 로마 속주로서의 가신국가 시기를 거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고, 갈릴리 유다(Judas of Galilee)가 이끈 유대인 봉기는, 총독 키리니우스가 실시한 인구조사(유대아 속주 증세를 목적으로 한 인구 조사)에 대한 저항이었다.

    헤롯 대왕이 죽고 그의 아들 헤롯 아르켈라우스가 왕위에서 쫓겨난 후, 로마 제국은 유대아를 다스리기 위해 태수(서기 4년 이전의 지방 수령인 지사에 해당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처음 로마인 태수들은 유대법과 유대인 관습을 존중하고, 안식일에도 쉬게 하였으며 로마 신의 제례에 참여도 면제해주었다. 동전에 상像을 넣어 주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 유대법과 관습을 무시하는 태수와 갈등이 있을 경우 유대인들은, 유대아를 관할하는 로마 시리아 총독에게 그의 면직을 탄원할 수도 있었다.

    서기 7년부터 26년까지는 비교적 평온한 시기였으나, 37년 이후 칼리굴라(Caligula, 12~41 CE)황제 시기 유대아는 다시 소요가 일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긴장은, 그리스 문화의 유입에 따른 갈등, 로마법과 유대인 권리의 충돌 등 그 원인이 복잡하였다. 칼리쿨라는 로마 이집트 총독 플라쿠스(Aulus Avilius Flaccus, 33~38 CE)를 신뢰하지 않았다. 플라쿠스는 티베리우스(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 42 BC~37 CE. 로마제국 제2대 황제)에게 충성을 하고 칼리굴라 모친을 해치는 음모에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 분리주의자들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서기 38년 칼리굴라는 플라쿠스의 비행을 조사하기 위해, 헤롯 아그리파(Herod Agrippa: 헤롯 대왕의 손자)를 알렉산드리아로 밀파했다. 필로(Philo Judaeus, 20 BC~50 CE. 로마 속주 이집트의 그리스계 유대인 철학자)에 따르면, 아그리파를 유대인의 왕으로 잘못 안 알렉산드리아 그리스인들은 그에게 야유를 보내며 맞이하였다고 한다. 플라쿠스는 유대 시나고그에 황제의 흉상을 안치함으로써, 황제는 물론 그리스인들의 분노를 달랬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였다. 칼리굴라는 플라쿠스를 해임한 후 처형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서기 39년, 아그리파는 갈릴리 왕 헤롯 안티파스를, 파르티아와 공모하여 로마제국에 반역할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고발을 했다. 칼리굴라는 안티파스를 추방하고 그의 영지를 아그리파에게 상으로 주었다.

    서기 40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들 사이에 또다시 충돌이 발생하였다. 유대인들은 황제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얌니아(Jamnia: 상 갈릴리 소재 고대 성읍)에서도 유대인 반란이 발생하였다. 주민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던 그곳에서 함께 섞여 살던 이방인들이 유대 율법을 무시하고, 로마군의 유대인에 대한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더구나 로마인들은 유대교 제단을 더러운 진흙으로 더럽혀 유대인들을 분노케 했다. 이처럼 유대교를 모독하면서도 칼리굴라는 예루살렘 성전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같은 칼리쿨라의 명령을 따른다면 내전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 한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Publius Petronius)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거의 1년을 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칼리굴라에게 명령을 거둘 것을 건의했다. 서기 46년, 유대아 속주에서 야곱(Jacob)과 시몬(Simon) 형제가 이끈 “야곱과 시몬의 봉기”가 발생하여 48년까지 계속되었다. 갈릴리에 집중된 이 반란은 산발적인 것으로, 두 형제는 로마 당국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다.

    그후 비교적 온건했던 로마의 대유대아 정책은 유대아 로마 총독 플로루스(Gessius Florus, 64~66 CE 재임)의 부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는 성전 보물을 훔치고, 신성 모독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죽임으로써 반란에 불을 질렀다. 그에 맞선 유대인들은 로마 시리아 총독 갈루스(Gaius Cestius Gallus, ?~67 AD)로부터 지지를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노력은 실패에 그쳤고, 처음 소규모 저항으로 시작된 이 반란은 혁명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폭동을 진압코자 했던 플로루스는 오히려 유대인들의 혁명 열정을 자극하여, 반란은 점점 더 확대되어 갔다.

    서기 66년 케사리아 마리티마에서 발생한 폭동은, 그곳 시나고그에 새鳥를 희생 제물로 바친 어느 그리스 상인의 그릇된 행위로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성전 책임자 엘레아자르(Eleazar ben Hanania)는, 로마 황제를 위해 바치고 있던 기도와 희생제를 중단시켰다. 곧 세금에 불만을 품었던 사람들이 가세하여, 로마인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총독 플로루스는 로마군에게 성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황제의 것이라고 하며, 17달란트 상당의 성전 보물을 훔치기도 했다. 예루살렘은 혼란에 빠지고, 유대인들은 플로루스를 거지로 취급하여 동냥 그릇을 돌려가며 공개적으로 그를 조롱했다. 플로루스는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보내어 많은 유대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들 대부분이 로마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형이나 십자가에 매달리는 처벌을 받았다. 곧 분노한 유대 민족주의자 단체들이 무기를 들고, 예루살렘 로마군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사태의 악화를 두려워한 친로마 헤롯 아그리파 II세(Herod Agrippa II, c. 27~c. 100 CE. 헤롯 왕조 마지막 왕)는 누이 베레니케(Julia Berenice)와 함께 예루살렘을 탈출, 갈릴리로 도주하였다. 유대인들은 유대아로부터 로마 시민들과 친로마 관리들을 추방하고, 로마 상징물들을 모두 파괴하였다. 무엇보다 시카리(Sicarii: 로마제국의 유대아 점령에 저항한 열성당원)는 마사다(Masada)로마 수비대를 공격, 점령하였다.

  폭동은 유대인 공동체 내 찬성과 반대라는 갈등을 불렀다. 폭동 과정에서 전임 대제사장 아나니아스(Ananias)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다. 예루살렘 로마군 수비대는 포위를 당하여, 반란 반대 측을 도울 수가 없었다. 마침내 수비대 사령관 메틸리우스(Publius Metilius Secundus: 하드리아누스 치세 시기 로마 원로원 집정관)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안전한 철수를 허락 받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그러나 반란군 지도자 엘리에자르(Eliezar)는 항복한 수비대 병사들을 모두 살해하였고, 다만 유대교를 받아들인 사령관 메틸리우스만은 살려 주었다. 당시 예루살렘의 기독교도들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 이미 펠라(Pella: 요단강 건너 데카폴리스)로 피신한 상태였다.

-펠라 유적-

    유대아의 소요에 직면한 로마 시리아 총독 갈루스는, 시리아 주둔 로마 군단(XII Fulminata)을 재편성 후 갈리시아 군단(III Gallica)과 스키타이 군단(IV Scythica), 페르라타 군단(VI Ferrata)으로 보강하였다. 여기에다 동맹군, 비전투요원을 합쳐 로마 군단 총 병력은 3만에서 3만6천 명에 달했다. 예루살렘 및 인근 속주의 질서 회복을 위한 재편 조치였다. 재편된 로마 군단은 나르바타(Narbata: 케사리아의 동쪽 아루봇. 열왕기상 4:10)와 세포리스(Sepphoris: 갈릴리 소재 고대 성읍)로 진격, 무혈점령하였다.

    유대 반군은 세포리스로부터 퇴각하여 아츠몬(Atzmon: 갈릴리 소재) 고지로 도피하였으나 곧 포위를 당하였다. 갈루스는 갈릴리 서쪽 아크레(Acre)를 지나 케사리아와 야파(Jaffa: 현재의 텔아비브 남쪽 지역)로 진격하여, 그곳 유대인 반군 8천4백 명을 학살하였다. 그는 계속 전투를 치러, 리다(현재 이스라엘 Lod 시)와 아페크(Afek: 예루살렘과 아스칼론 사이의 고대 군사 요새)를 취하고, 게바(Geva: 예즈렐 계곡 소재)의 반군 토벌 작전에 나섰다. 이 전투에서 갈루스는, 아디아베네(Adiabene: 메소포타미아 북부 소재 고대 왕국)의 동맹군이 합류한 지오라(Simon bar Giora, ?~71 CE. 농민 반군 지도자)의 반군에게 5백 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잃었다.

    시리아 로마 군단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여 성과를 거두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해안가로 후퇴하던 중, 벳 호론(Beth Horon: 현재의 기브온-아이얄론 국도 상에 소재했던 고대 성읍)전투에서, 반군의 매복에 걸려 참패하였다. 이 패전은 로마제국 역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제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전투에서 6천 명에 달하는 로마 병사가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는 그 이상이었다. 풀미나타 군단(Legio XII Fulminata)은 군단 마크(Aquila: 독수리 상)도 잃고, 갈루스의 군대는 대오를 잃고 시리아로 후퇴하였다. 승리한 유다 반군은 사두개파(Sadducee: 제2성전 기간 중 유대아의 사회, 종교적 유대인 분파)와 바리새파(Pharisee: 제2성전 기간 중 그 신앙이 랍비 유대교의 토대가 된 유대인 분파)의 지지를 받았고, 지오라가 지휘하는 농민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엘레아자르(Eleazar ben Simon, ?~70 CE)가 지휘한 열성당(Zealot: 1세기 대로마 항쟁을 이끈 유대인 정치 운동)도 시카리에 가담하였다.

    주도권을 잡은 유대군은 아쉬켈론(Ashkelon: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 성읍) 장악을 목표로 진격하였다. 페레아 사람 니제르(Niger), 바빌로니아인 실라(Shila), 이세(Issea)사람 요하난의 군대가 합세한 유대군은 아쉬켈론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쉬켈론의 주변 장악에는 성공하였지만 공격전에서 실패, 로마 수비대와의 전투에서 유대군은 8천 명의 병력을 잃었다. 아울러 아쉬켈론 거주 유대인들도 이웃 그리스-시리아, 로마인들에게 학살을 당하였다. 이 패전은 유대군으로 하여금 개활지 전투가 아닌, 진지전으로 전술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벳 호론 전투에서 갈루스가 패한 후, 감리엘(Simeon ben Gamliel, 10 BCE~70 CE. 유대 지도자. 랍비)의 지도하에 백성들이 참가한 회의가 개최되어, 예루살렘에 유대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전임 대제사장 하난(Hanan ben Hanan, ?~68 CE)은 정부 수반이 되었고, 구리온(Joseph ben Gurion, ?~68 CE.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지도자), 감라(Joshua ben Gamla, ?~70 CE. 대제사장)등도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마티아스(Joephus Mattias, 37~c. 100 CE. 역사가 겸 군사 지도자)는 갈릴리와 골란 고원 담당 총사령관이 되었고, 시몬(Josephus Simon, c. 37~100 CE. 군사 지도자)은 예리고(Jericho)총 사령관을 맡았다. 야파, 리다, 니코폴리스(Ammeus-Nicopolis: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사이에 있었던 고대 성읍), 탐라(Tamra: Acre 동쪽 20킬로 지점)전 지역은 요하난(Yohanan Issean)이 맡았다. 하나니아(Eliezar ben Hananiya)는 자피아(Joshua ben Zafia)와 함께 에돔을 맡았다. 그들을 도와 갈루스와의 전투에서 영웅적인 활동을 한 니제르는, 부사령관이 되었다. 므나세(Menasseh)는 페레아 사령관으로, 하나니야(Yohanan ben Hananiya, ?~131 CE. 랍비)는 고프나(Gophna: 예루살렘 북쪽 23킬로미터 지점에 소재했던 고대 성읍)와 아크라베타(Acrabetta: ?)를 맡았다.

    시카리 지도자 예후다(Menahem ben Yehuda)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으나 실패,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살아남은 시카리 무리들은 과거 로마군 수비대로부터 시카리가 빼앗은 마사다(Masada) 요새로 가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그 결과 인근 엔게디(Ein Gedi: 사해 서쪽 마사다와 쿰란 동굴 인근 오아시스)같은 유대 마을들을 두렵게 했다. 카리스마적인 농민 반군 지도자 지오라(Simon bar Giora, ?~71 CE) 역시 임시 정부에 의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추방을 당하여, 무리와 함께 마사다로 피신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갈릴리 전투

    네로황제(Nero Augustus Germanicus, 37~68 CE)는 유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장군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9~79 CE. 후일 로마 황제)를 파견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프레텐시스 10군단(X Fretensis: 기원전 40년 옥타비아누스-후일 로마 황제-가 창군한 부대)과 마케도니아 5군단(V Macedonica: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가 창군한 부대)등 2개 군단을 지휘하여, 서기 67년 4월 프톨레마이스(Ptolemais: 이스라엘 북부 해안 지역)에 상륙하였다. 그곳에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부터 레지오 15군단(XV Legio)을 이끌고 온 아들 티투스(Titus Caesar Vespasianus, 39~81 CE. 후일 로마 황제)와 합류하였다. 아그리파 II세를 포함한 현지 동맹군들도 합류하였다. 6만 명이 넘는 병력으로 베스파시아누스는 갈릴리 공격에 나섰다. 갈릴리 유대아 반군은, 부자와 제사장을 대표하는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100 CE)군과 시리아로부터 온 피난민, 가난한 농부, 어부들이 주력인 열성당원(Zealots)등 두 부대로 나누어 전투에 임했다. 세포리스(Sephoris: 갈릴리 중부 소재했던 고대 성읍)나 티베리아스(Tiberias: 갈릴리 서안에 소재했던 고대 성읍) 등 유대 엘리트 계층과 관련이 있는 많은 성읍들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을 했던 반면, 많은 성읍들은 치열한 전투 끝에 점령을 당하였다. 타리카에아(Tarichaea: 갈릴리 해안가 마을), 요다파타(Jotapata: 하갈릴리 소재 성읍), 감라(Gamla: 골란 고원의 고대 성읍)성읍들도 무릎을 꿀었다. 지스칼라(Gischala: 상갈릴리 소재 오늘날의 Jish)는 열성당원의 요새로 역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점령을 당하자, 그 지도자들은 포위망을 뚫고 예루살렘으로 도주를 하였다. 서기 68년, 북부 지역 반란이 진압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케사리아에 사령부를 두고, 예루살렘 반군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면서 해안가 진압작전을 계속하였다. 이처럼 갈릴리 소탕 작전을 통해 로마군은 1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 노예로 팔았다.

    서기 68년 봄,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아와 사마리아 고원지대 전투에 나섰다. 갈릴리로부터 쫓겨난 유대인들은 일찍이 갈루스가 점령, 파괴한 요파(Joppa: 고대 항구. 오늘날의 Jaffa)를 재건, 그곳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로마군에 포위를 당한 그들은 성벽을 재건하고, 소함대를 이용하여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오는 로마군의 군량미 반입을 막았다. 유대인들은 또 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 해안가에서 해적이 되어, 많은 선박을 동원 그 해역의 로마군 항해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북부에서 실패한 열성당원들은 “지스칼라의 요한” 지휘하에 갈릴리를 탈출, 가까스로 예루살렘으로 도피할 수가 있었다. 유대아 임시 정부에 충성하는 유대 여러 지파 민병대와, 시몬이 이끄는 열성당원으로 가득 찬 예루살렘은, 로마군의 포위로 인해 무정부 상태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열성당원들이 예루살렘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그 결과 열성당원과 항복을 반대하는 시카리 간에 내전이 발생하였다.

    유대아 임시정부(서기 66년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반군이 세운 임시 정부)가 로마군과 종전협정을 맺을 것이라는 소식을 열성당으로부터 들은 에돔은, 2만 명의 병사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하였다. 열성당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에 입성한 에돔군은, 임시정부와 전투(Zealot Temple Siege: 예루살렘 성전 포위전)를 벌여, 그 수반 하난과 장군 구리온을 죽였다. 아울러 많은 백성들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의 사망자는 1만2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마사다에서 이 소식을 들은 지오라는 군대를 이끌고 그곳을 떠나, 나안(Naan: 현재의 이스라엘 르호보트 시 인근 나안 키부츠)에 진을 친 후 에돔군을 공격,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굴복 시켰다.

    유대아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로마에서는 큰 사건이 발생하고 있었다. 서기 68년 중엽, 네로 황제는 실정으로 인해 지지 세력을 잃고 있었다. 원로원은 물론 황제 근위부대와 군사령관들이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원로원이 네로를 백성의 적으로 선언하자 그는 로마를 탈출,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로마 스페인 총독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 24 BCE~69 CE)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으나, 그도 몇 달 후 경쟁자 오토(Marcus Salvius Otho. 32~69 CE. 제7대 로마 황제)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로 인해 소위 “네 황제(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의 해(Year of Four Emperors)"로 불린 로마제국 제1차 내전이 발생하였다. 서기 6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휘하 장군들의 추대로 황제의 물망에 오르고 있었다. 그는 아들 티투스를 유대아 전쟁터에 남겨 놓은 채 로마로 돌아가, 이미 오토를 내쫓고 황제가 된 비텔리우스(Aulus Vitellius, 15~69 CE. 제8대 로마 황제)에게 황제의 자리를 포기할 것을 강요했다. 

    많은 병력 손실을 우려하여 예루살렘 공격을 반대한 부친이 떠나자, 티투스는 군대를 몰아 반란군이 점령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티투스 군대가 유대아 산간 지방을 지나면서 저지른 무자비한 살육행위로, 많은 피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다. 유대 반군은 로마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였다. 로마군을 무찌르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열성당은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로마군의 예루살렘 공격을 막아낼 만큼 상당수의 병력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 때 열성당 지도자 요한은 속임수를 써 엘레아자르를 죽이고, 예루살렘을 무자비하게 다스리고 있었다. 요한의 이러한 압제에 대항하기 위해, 살아남은 유대아 임시 정부는 마사다의 지오라에게 도움을 구하였고, 이에 지오라는 1만5천 명의 병사를 지휘하여 예루살렘으로 왔다. 요한과 지오라는, 그해 내내 서로 싸웠었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유다-로마 공방전은 곧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방어선을 뚫지 못한 로마군은 시 외곽에 영구 진지를 구축한 다음, 성벽 밑으로 굴을 파고 동시에 성벽 높이만큼의 벽을 쌓아 올렸다. 예루살렘을 탈출하려다 붙잡힌 포로는, 예루살렘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벽 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였다. 하루에 5백 명을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로마군이 공격용 성루를 쌓기 시작하자 요한과 지오라는 내분을 중단하고, 함께 방어에 나섰다. 그들은 로마군과 평화협상 대신, 결사 항전을 위해 쌓아놓은 식량에 불을 질렀다. 그 결과 많은 시민들과 병사들이 굶주림으로 고통을 겪었다. 당시 예루살렘에 포위된 유대인들은 60만 명 이상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의 추방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여, 남녀노소 모두 무기를 들고 결사적으로 싸웠다. 당시 예루살렘에 포위된 인구는 약 1백만 명으로 본다. 전쟁을 모르고 과월절 기간 중 성전 방문을 위해 예루살렘에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모두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서기 70년 여름, 7개월에 걸친 공방전 끝에 티투스는 성벽을 허물고 들어가 예루살렘 전역에 약탈과 방화를 하였다. 공격은 가장 취약한 지점인 제3성벽부터 시작되었다. 이 성벽은 포위를 당하기 직전에 완공되어, 공격을 이겨내기에 충분치가 않았다. 5월말 로마군은 승전을 향해 가고 있었고, 곧이어 보다 중요한 제2성벽도 무너뜨렸다. 로마군이 마지막 공격을 하고 있는 동안 요한이 지휘하는 열성당원들은 아직 제2성전을 지키고 있었다. 반면 지오라가 지휘하는 시카리는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었다. 반란군의 마지막 요새인 성전은 티샤 바브(Tisha B'Av: 그레고리력으로 서기 70년 7월 29일 또는 30일)에 파괴되었다.

-티투스의 예루살렘 점령-

    예루살렘 세 성벽은 성전과 함께 모두 파괴되었다. 성은 모두 불에 탔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다. 당시 무너져 내린 돌들과 그 자취를 현장에서 아직도 알아볼 수가 있다. 지스칼라의 요한은 아그리파 II세의 군영에서, 지오라는 한 때 성전이 서 있던 곳에서 항복했다. 대제사장만이 볼 수 있었던 메노라(Menorah: 일곱 황금 촛대)와 진설병陣設餠(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올리기 위한 제단 등 성전의 보물들은, 쇠사슬에 묶인 7백 명의 유대인 포로들과 함께, 티투스의 승전 기념 분열식에 동원되어, 로마 시민들의 구경꺼리가 되었다. 포로들 가운데는 요한과 지오라도 있었다. 요한은 무기징역, 지오라는 사형에 처해졌다. 티투스는 개선문을 세워 이 승리를 기념했고, 이 개선문에는 그날의 분열식에 성전의 보물들이 로마 시민들에게 소개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로마를 방문하는 이들은 현장에서 이 개선문(Arch of Titus)을 볼 수 있다. 예루살렘 항복에도 불구하고 유대아 오지의 반란은 끝나지 않아, 서기 73년까지 계속되었다.

-티투스 개선문(로마)-

마지막 요새 마사다

    서기 71년 봄 티투스는 로마 행 배를 탔다. 새로운 총독 바수수(Sextus Lucilius Bassus)가 부임하여 왔다. 그의 임무는 유대아 "폭도“들 소탕이었다. 그는 제10군단(X Fretensis)을 동원, 저항을 계속하는 반군 잔당들을 공격, 분쇄하였다. 그는 헤로디움(Herodium: 웨스트 뱅크에 자리한 고대 요새)을 점령한 후 요르단을 거쳐 사해 인근의 마카에루스(Machaerus: 하스모니아 왕가의 요새)를 점령하였다. 그는 계속 진군하여 사해 북쪽 야르두스 숲까지 진격, 그곳에서 만난 아리(Judah ben Ari, ?)가 지휘하는 3천 명의 반군을 격퇴하였다.

    바수수가 병이 들어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실바(Lucius Flavius Silva, c.43~? 로마 유대아 속주 총독)가 그를 대신하였다. 서기 72년 가을, 실바는 유대 반군의 마지막 요새였던 마사다(Masada)로 진격했다. 그의 군대는 레지오 10군단(X Legio)과 병참부대, 그리고 수천 명의 유대인 노예들로 구성된, 총 1만 명에 달하는 대부대였다. 마사다를 포위한 후 수차례 항복을 권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실바는 여러 곳에 군막을 세워 포위망을 형성했다. 서기 73년, 마사다 성벽을 깨고 진입한 로마군은, 반란군 967명 가운데 이미 자살한 960명의 시신을 목격했다.

-마사다-

    로마의 반란 진압은 유대아 인구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완전히 파괴가 된 예루살렘은 물론 그 언저리에 사람이 사는 것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대부분이 이산가족이 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예루살렘 전투에서 1백십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고, 9만7천 명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었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지중해 연변으로 도피를 하였다. 죽은 사람들 대부분이 질병과 식량부족 때문이었다. 대규모 인명 피해와 성전이 파괴되었지만, 유대아의 유대인 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로마 통치에 대한 불만은 결국 바르 코크바 반란(Bar Kokhba revolt: 132~136 CE)을 불러와, 유대아 멸망을 초래하였다.

    코크바 반란은 유대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환경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성전의 파괴로 1세기 예루살렘 부의 원천이었던 로마와 파르티아로부터의 부富와 순례자들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할라카(Halakhah: 구전 토라에서 비롯된 유대교 율법집), 미드라쉬(Midrash: 유대교 외경), 바룩 시리아 계시록(Syriac Apocalypse of Baruch: 제2성전 파괴 후 쓴 작자 미상의 문헌)은 성전 파괴로 인한 고통을 담고 있다. 그밖에도 로마는 반란에 참가한 유대인들의 모든 토지를 몰수하였다. 서기 70년 제2성전의 파괴는, 유대교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성전이 사라지자 유대교도들은 더욱 헌신적으로 토라 계명을 지켰고, 시나고그를 생활의 중심지로 삼았다. 반란 직전에 등장한 시나고그는 성전 대신 유대인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고, 랍비들은 시나고그의 지도자로서 대제사장의 책임을 맡았다. 반란 후 공백이 된 유대 지도자의 자리를 랍비들이 메꾼 것이다. 그들은 글과 교육을 통해 성전이 사라진 시대, 유대교가 자리를 잡도록 애를 쓴 사람들이었다.

    서기 70년 이후 랍비가 주도적이었던 시대를 “랍비의 시대”라고 한다. 랍비 문헌에 따르면, 바리새인 랍비 요하난(Yohanan ben Zakkai: 제2성전 기간 중 현자)의 제자들이 그를 관 속에 뉘어, 몰래 예루살렘을 빠져 나와 베스파시아누스를 만났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요하난은 베스파시아누스로부터 야브네(Yavne: 현 이스라엘 중부 도시)에 유대교 회당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는 유대인 생활을 재정립할 수 있는 규칙을 제정, 성전이 파괴된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야브네는 탈무드 공부의 본부가 되었다. 지금은 무시되지만, 야브네에서 유대교 정전이 완성되었다는 말도 있었다. 이 같은 일련의 일들은, 랍비 유대교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토라 연구의 중요성과 시나고그에서의 예배를 강조함으로써, 유대인들로 하여금 성전이 없는 유랑 생활 속에서도, 문화와 종교를 유지 시킬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로마 플라비아누스 왕조(69~96 CE)는 이 승리를 유대아 통치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로 이용하였다. 예루살렘 함락을 경축하고, 사크라(Via Sacra: 고대 로마 거리)와 막시무스 경기장(Circus Maximus: 전차 경기장)에 티투스 개선문(Arch of Titus)을 세우기도 했다. 유대아 점령을 기념하는 동전을 만들어, 승리를 경축했다. 필로스트라투스(Lucius Flavius Philostratus, c. 170~250 CE. 그리스 철학자)에 따르면, 티투스는 꽃다발 받기를 거부하였는데, 다만 자신은 신이 노하여 사용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동지중해를 격변시켜 놓은 이 유대인 대반란은, 일련의 유대-로마 전쟁의 시작으로 로마제국의 앞날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유대아 지역의 긴장은 계속되었다. 동쪽 파르티아의 대로마 위협과 함께 동지중해 전역에서 또 다른 유대인 반란이 발생했다.

키토스 전쟁

    제2차 유대-로마 전쟁인 키토스 전쟁(Kitos War, 115~117 CE)은,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다. 서기 115년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Caesar Nerva Traianus,  53~117 CE 재위)는 제국의 동부 국경 지대에서 파르티아와의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트라야누스의 출정은 파르티아의 침략을 받은 아르메니아 왕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아르메니아에 대한 침공은, 그곳에 미치는 로마의 영향력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파르티아의 도전은 이미 50년 전 네로황제 때부터 있었다.

    메소포타미아를 가로질러 행군하는 로마 군단의 후미를, 유대 반군들이 공격하였다. 반란은 먼 이집트, 키프러스까지 번졌고, 유대아에도 반란 기미가 있었다. 리다(Lydda: 현 텔아비브 인근 Lod 시)까지 번진 봉기로, 이집트에서 오는 로마군 군량미 공급이 위협을 받았다. 반란은 지방까지 신속히 번졌다. 유대인 거주 지역인 니스비스(Nisibis: 현재의 터키 Mardin주 Nusaybin시), 에데사(Edessa: 상 메소포타미아에 소재했던 고대 도시), 셀류시아(Seleucia: 티그리스강 유역에 있던 셀류싯 제국의 도시), 아르벨라(Arbela: 오늘날 이락 Erbil)도 반란에 가담을 하여, 그곳 주둔 로마 수비대를 공격, 병사들을 살해하였다.

    키레나이카(Cyrenaica: 리비아 동부 지역)의 반란 지도자 루쿠아스(Lukuas: 그리스 이름 Andreas)는 왕을 자칭했다. 그의 무리는 헤카테(Hecate: 부와 은총의 여신. 그리스 신화), 쥬피터, 아폴로, 아르테미스, 이시스 신전 등 많은 신전을 포함하여 카에사레움(Caesareum: 로마황제 기념관), 바실리카, 공공 목욕탕 등 로마의 상징인 많은 건물들을 파괴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키레나이카 인구가 줄어,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그곳에 주민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다. 카시우스(Dio Sassius, 155~c. 235 CE. 로마 역사가)는 키토스 전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루쿠아스가 지휘하는 키레나이카 유대인들은 로마인, 그리스인들을 살해하였다. 그들의 살점을 굽고, 그 내장으로 혁대를 만들었다. 그들의 피를 바르고, 그 가죽으로 의복을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을 머리로부터 톱질을 하여 두 조각을 냈다. 사자들과 싸우게 하거나 먹이로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2십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집트와 키프러스에서도 이러한 짓을 저질러 2십4만 명이 죽었다.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그곳 땅에 발도 들여놓지 못할 것이나, 바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이 온다고 하여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유대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트라야누스 황제가 보낸 루시우스(Lusius)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키레나이카 출신 시네시우스(Synesius, 373~c. 414. 고대 리비아 프톨레마이스의 그리스 주교)도 그의 군주론(Do Regno: 아르카디우스 황제에게 한 강의 집)에서 유대인이 저지른 파괴를 언급하고 있다. 키레나이카 파괴는 심각하여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즉위하자마자 재건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 키레나이카로부터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졌다. 키레나이카의 인구 감소는 심각하여, 폐허를 면할 수가 없었다. 그 추방된 유대인들은 시르테(Sirte: 현재의 리비아 Syrte 시)로 가, 그곳 베르베르족과 함께 살았다.

    루쿠아스는 유대 반란군을 이끌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그곳에 입성한 유대군은, 곳곳에 불을 질렀다. 로마 이집트 총독 루푸스(Marcus Rutilius Lupus)는 이미 도주한 후였다. 반란군은 이집트 신전과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106~48 BC)의 무덤을 파헤쳤다. 유대 반군은 헤로모폴리스(Hermopolis: 고대 이집트 도시)전투에서 로마군에 대승을 하였고, 이 사실은 파피루스에도 기록되어 있다. 트라야누스는 근위대장 투르보(Marcius Turbo) 지휘하의 새로운 군대를 보냈으나, 키레나이카의 평화는 117년에 들어서야 가능했다.

    서기 117년 아르테미온(Artemion)이 이끄는 키프러스 유대 반군은, 2십4만 명에 달하는 그리스인 주민들을 살해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Caesar Nerva Traianus, 53~c. 117 CE)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파견되어 곧 키프러스를 장악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후, 유대인의 키프러스 섬 거주를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키프러스 해안에 상륙하는 유대인 난파자에게도 적용되었다. 트라야누스가 페르시아 만灣으로 원정을 하고 있을 때, 메소포타미아에서 또 다른 유대인 반란이 발생하였다. 트라야누스는 진압에 나서,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셀류시아, 에데싸, 니시비스(Nisibis: 현 터키 마르딘 주 Nesbin 시)를 재정복하였다.

    파르티아 왕 오스로에스 I세(Osroes I, 109~129 CE 재위)의 아들 파르다마스파타스(Parthamaspatas)는 친로마 인물로서, 트라야누스 황제를 따라 원정 길에 올랐다.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반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에게 왕을 세워주고자 했다. 따라서 크테시폰(Ctesiphon: 티그리스 강 동안의 고대 도시)에 도착하자 모든 로마인과 파르티아인들을 불러 모은 다음, 높은 단상에 올라 일장 연설로 자신의 업적을 설명한 후, 파르다마스파테스에게 왕관을 씌워주었다. 그런 다음 하트라(Hatra: 상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북쪽을 향해 떠났다. 서기 117년 여름 내내, 트라야누스는 하트라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동방의 더위 속에서 수년간 계속된 전쟁은 트라야누스에게 많은 희생을 가져왔고, 그도 역시 일사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는 병에서 회복하기 위해 로마로의 멀고 먼 회군을 결정했다. 셀류시아에서 배를 탄 그는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실리시아(Cilicia: 아나톨리아 남부 지중해 연변)의 셀리누스(Selinus) 항구에 상륙한 그는 곧 사망하였다. 5현제賢帝 중의 한 사람인 그도 그렇게 죽은 것이다. 하드리아누스(Caesar Traianus Hadrianus, 76~138 CE)가 그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가 되었다.

    유대 반란 지도자 루쿠아스는 유대아로 도주를 하였으나, 투르보(Quintus Marcius Turbo: 황제의 군사 고문. 수비 대장)가 곧 그를 추적,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이때 그의 두 형제 율리안과 파푸스도 함께 처형되었다. 그들도 반란의 주요 지도자였다. 메소포타미아 유대인 반란을 진압한 루시우스 키에투스(Lusius Quietus)는 이제 유대아 주둔 로마군 사령관이 되어, 율리안과 파푸스가 지휘하였던 반란군 집결지 리다(Lydda: 오늘날의 이스라엘 Lod 시)를 포위, 공격하였다. 그곳 유대 족장 라말리엘(Rabban Ramaliel II, c. 80~118 CE. 랍비)은, 하누카 축제일에도 금식을 요구하는 등 성문을 굳게 잠그고 저항하였으나 곧 죽음을 당하였다. 그가 죽은 후 리다 시는 곧 함락이 되어, 많은 유대인들이 희생되었다. “리다의 학살”로 불리는 이 사건은 탈무드에서(그 희생에 대한) 칭송의 말로 언급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은 키에투스는 로마군에 충성을 다하였으나, 황제는 권력이 안정되자 그의 사령관 직을 박탈하였다. 서기 118년 여름, 키에투스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황제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전쟁을 끝내는 결정을 내리자, 트라야누스의 동방 정복이 무위로 돌아갔다. 비록 하드리아누스가 메소포타미아를 포기하였지만, 크테시폰에서 추방을 당하였던 파르다마스파테스를 오스로에스(Osroes: 파르티아 서쪽 지역)로 돌려보내, 왕으로 봉한 성과가 있었다. 그후 1세기 동안 오스로에스는 독립을 잃었지만, 그 지역을 둘러싼 제국들 간 완충국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유대아는 로마인들에게 계속 긴장의 지역이었다. 하드리아누스 치세하 로마 군대는 케사사리아 마리티마로 이동, 영구 주둔하였다. 서기 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지중해 동해안 방문으로, 유대아 속주에 중요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황제가 파괴된 예루살렘을, 자신의 이름에서 비롯된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는 이름의 로마 식민 도시로 재건키로 한 것이다. 이 같은 결정은 유대인 처벌에 관한 황제의 결정과 함께, 서기 132년에 발생한 바르 코크바 반란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바르 코크바 반란

    바르 코크바 반란 또는 유대인 전쟁(Expeditio Judaica)은, 시몬 바르 코크바(Simon bar Kokhbah)가 이끈 로마 속주 유대아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저항하여 일으킨 반란이다. 이 전쟁(132~136 CE)은 유대-로마 간 세 번의 전쟁 가운데 마지막 전쟁으로, 제3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키토스 전쟁을 제외하고 이 전쟁을 제2차 전쟁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66~77 CE)이 끝난 후, 로마는 유대아 속주에 대 심각한 종교적 탄압을 가하였다. 총독의 격도 낮추어 집정관이 아닌 태수로 격하하였다. 유대아에는 프레텐시스 제10군단(X Frentesis)이 주둔했다. 키토스 전쟁을 거치면서, 긴장이 계속 고조되어 마침내 전쟁이 또 발생한 것이다. 2세기 초 유대아 속주에 대한 관리 부실도 반란의 주요 원인이었다. 부임해 오는 총독마다 노골적인 반유대 감정으로 통치를 하였다. 교회의 아버지(기독교 교리를 세운 초기 신학자)들과 랍비들이 남긴 문헌에는, 루푸스(Quintus Tineius Rufus: 로마 유대아 총독)가 반란 발생의 주요 원인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코크바 반란은 여려 요인들이 얽혀 발생한 것으로 역사가들은 본다. 행정 관련 법규 변경, 유대아에서의 로마인들 거주 확대, 소작농 제도로의 전환, 경제 침체, 유대 민족주의 등장 등이 반란 발생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키토스 반란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성전의 언덕에 쥬피터 신전을 세우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신도시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 로마 퇴역 군인을 위한 식민 도시) 건설도 반란을 부추긴 주요 요인이었을 것이다. 2014년 예루살렘에서 발굴된 프렌테시스 군단 관련 유물에는 서기 130년 폐허가 된 성전을 방문한 하드리아누스 황제 관련 내용도 있다. 처음 그는 유대인에 대해 동정적이었음으로 성전의 재건을 약속하였으나, 그가 성전 터에 쥬피터 신전을 세우려는 의도를 알고 유대인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이에 관해서는 그가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으나, 악의적인 사마리아인들이 못하게 방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 같은 험담은 드문 이야기가 아니다.

    질서 유지를 위해 6군단(VI Ferrata)이 유대아 속주에 추가로 배치되었다. 예루살렘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이름을 바꾸면서 그에 필요한 작업이 개시되었다. 유대아 총독 루푸스는 예루살렘시 경계선을 바꾸는 의식을 치렀다. 이는 “성전을 갈아엎는” 것을 뜻했다.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도발이었고, 따라서 유대인들은 로마 당국에 적의를 품고 등을 돌렸다. 하드리아누스가 할례를 금지한 후 긴장이 고조되었다는 아우구스타 역사서(Historia Augusta: 서기 117년부터 284년까지의 로마 황제, 황제 후계자, 황위 찬탈자 목록 집)의 주장이 있으나, 이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도 하드리아누스는 그리스 문화 애호가로서(지식인이었다는 뜻) 할례를 바람직스럽지 않은 생식기 절단으로 보아 그리했을 것이고, 유대 문화에 대한 경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반란 지도자들은 60년 전의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서기 132년, 시몬 코크바(Simon bar Kokhba, ?~135 CE)와 엘라사르(Elasar: 유대 현자)가 이끄는 반란은 순식간에 모딘(Modi'in: 현재의 이스라엘 모딘 시)으로부터 유대아 전역으로 번졌고, 로마 수비대의 예루살렘 진입을 저지했다. 반란 초기 루푸스(Rufus)가 진압책임을 맡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132년 이후의 기록에서 그의 이름은 보이질 않는다. 반란 직후 코크바 반란군은 아엘리아 카피톨리나에 주둔 중인 로마군 제10군단(Legio X Fretensis)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때 예즈렐 분지(Yezreel Valley: 이스라엘 북부 내륙 평야지대)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 제6군단(Legio VI Ferrata)은 2만 명의 증원 군을 보냈지만,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있던 반란군 진압에 실패하였다.

    반군과의 전투에서 제10군단과 6군단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인근 속주로부터 로마 군이 증파되었다. 시리아 총독 마르셀루스(Gaius Poblicius Marcellus)가 지휘하는 갈리시아 3군단(Legio III Gallica)과, 속주 아라비아 페트라에아(Arabia Petraea: 요르단의 나바테아 왕국, 레반트 남부, 시나이 반도, 아라비아반도 북서 지역을 포괄하는 지여) 로마 총독 네포스(Titus Haterius Nepos)의 키레나이카 제3군단(Legio III Cyrenaica)도 도착을 하였다. 곧이어 아라비아 페트라에아로부터 제22군단(Legio XXII Deiotariana)이 증파되어 카피톨리나로 오던 중, 반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하였다. 그 결과 이 군단은 해체되었다. 이집트 주둔 포르티스 제2군단(Legio II Traiana Fortis)도 유대아에 투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유대아 주둔 로마군은 거의 8만 명에 이르렀으나, 반란군 수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반란군은 지형에 밝고, 강력한 요새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반란 초기부터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 돌아와, 코크바군에 가담하였다. 지원병은 엄격한 검사를 거쳐 선발되었다고 탈무드는 기록하고 있다. 코크바군의 많은 병사들이 그리스어만을 알았다는 기록도 있어, 그들이 유대인이었는지 여부가 확실치 않다. 랍비 문헌에 따르면, 코크바군은 최대 40만 명에 이른 적도 있었다. 반란 초기 코크바 반란군은 로마인들을 급습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반란군은 여러 가지 전술을 썼다. 게릴라전을 벌려 로마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진지를 점령한 후에는, 수적 우세로 육박전을 벌리기도 했다. 야전 전투에서 몇 차례 패전을 겪은 로마군은 야전에서의 전투를 피해, 성을 공격하는 공성전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시몬 코크바는 그때까지 2백5십년 간 의문의 여지없이 독립적이었던 유대아 공동체를 “나시 이스라엘(Nasi Israel: 이스라엘 왕)”이라는 이름으로 통치하였다. 반란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랍비 아키바(Rabbi Akiva, 50~135 CE)는 코시바(Simon Bar Kosiba)를 유대인의 메시아로 추앙하고, 그에게 코시바 대신 ”코크바(Kokhbah)“라는 성을 붙여 주었다. 그래서 코크바로 불린 것이다. 코크바는 ”별의 아들“을 뜻하는 아람어로 ”야곱에게서 한 별이 솟는구나. 이스라엘에게서 한 왕권이 일어나는구나(민수기 24:17)“ 라는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이 부활되어, 새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선포하였다. 동전도 다량 발행되어 외국돈을 압도하였다. 

    보급품 공급 곤란에 직면한 로마군의 진격이 늦어지자, 코크바군은 장기 방어전으로 들어갔다. 성읍이나 마을 방어전은 주로 유대아 전역에 산재한 은신처인 동굴을 거점으로 하였다. 가옥마다 토굴을 파, 그 속에 매복하여 좁은 통로를 따라 오는 우세한 세력의 로마군을 격퇴하였다. 토굴은 서로 연결이 되어 매복 장소로서 뿐만 아니라, 식량 저장소, 그 가정의 피신처로 사용되었다. 이 같은 토굴 작전은 유대아 고지대, 유대아 사막, 네게브 사막, 갈릴리, 사마리아, 요르단 계곡 등에서 행하여졌다. 2015년 7월 15일 현재 140개 마을의 350곳에 이르는 토굴 은신처가 확인되었다.

    몇 차례 패배를 거듭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장군 세베루스(Sextus Julius Severus. 133~c.135 기간 유대아 주둔군 사령과)를 브리타니아로부터, 그리고 멀리 다뉴브 주둔군도 불러들였다. 서기 133년 세베루스는 대군을 이끌고 유대아에 도착하였다. 제미나 제10군단(X Gemina: 기원전 53년 주리어스 시저가 갈리아 침공 시 지휘했던 군단), 히스파나 제9군단(IX Hispana: 브리타니아 주둔 부대)그리고 1개 보병 군단과 예비 부대로 구성된 대규모 병력이었다. 그는 유대아 총독의 이름으로, 반군 진압을 위한 대규모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의 부대 도착으로 로마군 병력은 거의 두 배로 증가하였다.

    이제 코크바 반란군과 맞선 로마군은, 60년 전 티투스가 지휘했던 로마군을 훨씬 넘는 규모였다. 전 로마군의 약 1/3이 반란군과 싸우고 있었다. 세베루스의 유대아 전투에 참가한 로마군은 프렌테시스 제10군단, 페르라타 제6군단, 갈리아 제3군단, 키레나이카 제3군단, 트라이아나 포르티스 제2군단, 제미나 제10군단, 마케도니아 제5 보병군단, 클라우디아 제11보병 군단, 풀미나타 제12보병군단, 플라비아 펠릭스 보병 제6군단 등 10개 군단과 50여개에 이르는 지원부대로, 총 병력 수는 6만에서 12만에 이르는 대병력이었다. 세베루스가 직접 지휘하여 데리고 온 히스파나 제9군단은, 2세기에 들어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전투 중 전멸한 것으로 본다.

    페르라타 제6군단 주둔지로 판명된 베이트 셰안(Beit She'an: 현재의 이스라엘 북부 베이트 셰안 마을)분지의 텔 샬렘(Tel Shalem)에서 있었던 전투를 결정적 전투 가운데 하나로 보는 학자도 있다. 에크(Werner Eck, 1939~. 독일 Cologne 대 역사학 교수)가 그러한 시각으로, 1999년 그는 바르 코크바 반란을 로마 제국 역사상 특별한 사건으로 언급하였다. 텔 샬렘 인근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친 개선문 잔해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반란군을 격파한 기념물이었을 수도 있다. 텔 샬렘에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흉상을 비롯하여 그 시대 그곳과 관련된 몇 가지 유물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텔 샬렘 전투는 반란 지역의 확대를 뜻하는 것으로, 에크의 이론대로 전쟁이 갈릴리를 비롯하여 북부 산악지대까지 확대되었음을 뜻한다.

    코크바는 헤로디움(Herodium: 예루살렘 남쪽 12km 지점의 고대 마을)을 제2사령부로 정하였다. 사령관은 갈굴라(Yeshua ben Galgula)로, 아마 코크바의 제2 또는 제3의 휘하 부대였을 것이다. 물 공급을 위한 수로와 동굴도 발견되었다. 동굴 안에서 발견된 타다 남은 목재는, 반란 시대의 것임으로 증명되었다. 헤로디움은 서기 134년에 로마군에게 포위되어, 그해 말 무렵 점령당하였다.

-헤로디움-

반란 마지막 단계에 들어 시몬 코크바는 점령지를 거의 모두 잃고 있었다. 많은 요새를 잃은 후 그와 그의 남은 군대는 베타르 요새(Betar: 유대아 산맥 속 고대 유대 마을)로 철수하였다. 서기 135년 그곳도 로마군의 포위망에 들어갔다. 이 작전에 마케도니아 제5군단과 클라우디아 제11군단이 참가하였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베타르 요새는 티샤 바브(Tisha B'av: Av월 9일. 그레고리력으로 7월 또는 8월에 속하는 날로, 제1성전과 제2성전 파괴를 슬퍼하는 유대력에서 가장 슬픈 날) 금식의 날에 성벽이 깨어지면서 점령을 당하였다고 한다. 랍비 문헌에 따르면 패전의 원인은, 시몬의 외삼촌인 랍비 하무다이(Elazar Hamudaʻi)를 적과 내통한 것으로 의심을 하여 살해함으로써, 하느님의 보호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점령당한 후 벌어진 끔직한 광경은, 학살이란 한 마디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 탈무드에 따르면 베타르는 시산혈해를 이루었고, 로마 군대는 “흐르는 피가 고여 그들이 타고 있는 말의 코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죽였다.”

-베타르 요새-

반란 실패

    미드라쉬(Rabbinic Midrash: 유대교 타나크 외경)에 따르면 로마는 아키바(Akiva), 테라디온(Hanania ben Teradion), 산헤드린 대변인 후스피드(Huspith), 샤무아(Eliezer ben Shamua), 하키나이(Hanina ben Hakinai), 율법학자 예쉬밥(Jeshbab), 다마(Yehuda ben Dama), 바바(Yehuda ben Baba)등 8명의 산헤드린 랍비들을 처형하였다. 아키바의 처형 날짜에 관해서는 이론이 있으나 미드라쉬 기록에 따라 반란 초기로 본다. 그외 다른 랍비들은 전쟁 마지막 단계에서 처형되었다. 랍비 문헌은 고통스런 고문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아키바는 쇠빗으로 전신의 가죽이 벗겨졌고, 테라디온은 기둥에 묶여 불에 태워 죽였다. 죽는 시간을 연장하기 위해 그의 전신을 토라 두루말이(가죽으로 된)로 휘감은 다음, 젖은 옷을 입혔다. 시몬 바르 코크바의 운명에 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전승에 따르면 두 가지 가능성 즉, 뱀이 물게 하여 죽였거나 아니면 거짓 메시아라는 이유로 산헤드린 명령에 따라 살해 되었을 수도 있다. 에이카 라바(Eichah Rabbah: 성경 애가의 랍비 해석서)에 따르면, 코크바의 잘린 머리는 베타르가 함락된 직후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쳐졌다.

-바르 코크바-

    베타르 점령 후 로마군은 남아 있는 성읍들과 유대 피난민들을 찾아내어 조직적인 파괴와 살해를 계속하였다. 키레나이카 제3군단이 그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역사가들은 베타르 함락 후 전투가 계속되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저항이 또 있었지만 곧 진압되었다는 말도 있고, 135년 겨울부터 136년 봄까지 반란군 잔당이 가족들과 함께 남아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반란은 완전 실패로 끝났음이 명백하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바르 코크바 반란을 결정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본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과는 달리, 이 전쟁은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이고 노예로 팔아, 유대아(팔레스타인)의 유대민족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하였던 것이다. 유대인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한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 디오(Lucius Cassius Dio, 155 ~c. 235. 로마 역사가)의 “로마사”는, “50군데의 유대군 진지와 985곳의 유대인 마을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5십8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고 기근과 질병, 화재로 죽은 사람들은 여기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이렇게 해서 유대아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아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마을들은 모두 이 반란 중 파괴된 곳들이다. 유대아의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이 같은 파괴를 “종족 근절"행위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포로가 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 전역으로 노예가 되어 팔려나갔다. 7세기에 기록한 연대기에 따르면 “유대인 노예 한 명 값은, 말 한 마리가 한 끼 먹는 사료 값과 같았다.” 이 기록은 노예 시장에 공급되는 노예 수가 넘쳐났음을 뜻한다. 팔리지 않은 노예들은 가자, 이집트 등으로 쫓겨나 유대인 유랑자 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때 랍비 유대교 역시 시나고그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바르 코크바 반란이 실패한 후 유대아의 유대인 인구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소수의 유대인들이 살아남아, 갈릴리는 유대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살아남은 유대인들 가운데 갈릴리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었고, 랍비 가족들은 세포리스(Sepphoris: 갈릴리 중부, 나사렛 인근)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2세기부터 4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티베리아스(Tiberias: 갈릴리 해 서안)와 예루살렘에서 유대교 경전인 미쉬나(Mishnah)와 탈무드(Talmud)가 편제되었다.

    유대아 변경 즉 엘류데로폴리스(Eleutheropolis: 헤브론 북서쪽 21킬로 소재 마을), 에인 게디(Ein Gedi: 사해 서쪽 소재 오아시스) 그리고 헤브론 산간 지대의 유대아 공동체는 전쟁에 휩쓸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해안 지대인 케사리아와 베이트 셰안(Beit She'an: 이스라엘 북부 해수면보다 120미터 낮은 베이트 셰안 분지 소재) 그리고 골란 고원의 유대인 공동체도 마찬가지였다. 패전 후 유대인의 지속적인 유대아 정착 문제는 랍비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랍비들은 유대인 이산을 막으려고 애를 썼고, 심지어는 유대아 경계를 벗어나 사는 사람들을 우상숭배자로 낙인을 찍기도 했다. 디오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전쟁으로 많은 로마인들도 죽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원로원에 보내는 편지 서두에 늘 쓰는 “가내 건강하신지요. 나와 나의 군대도 건강합니다” 라는 인사말을 쓰지 않았다. 서기 150~160년까지 발급한 로마 제대군인 증명서가 많은 것을 보면, 코크바 반란 기간 중 로마 군단과 지원부대 인명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133년부터 135년까지 전례 없이 많은 징병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데이오타리아나 제22군단(XXII Deiotariana)은 심각한 병력 손실로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제9군단도 카파도키아(Cappadocia: 아나톨리아 소재 로마 속주)나 다뉴브 전투에서 반란군에게 패한 결과, 해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제10군단 역시 반란군으로부터 심각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기타 인명손실

    바리새 지파가 이끈 반란군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유대아 반란군에게 병사를 보낸 갈릴리 유대인 공동체는 박해와 대규모 처형을 당했지만, 완전한 파멸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마리아는 반란을 적극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많은 사마리아 젊은이들이 코크바 반군에 합류하였다. 사마리아는 로마의 무자비한 보복을 받았지만, 많은 성읍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편 코크바 반란에 참여를 거부한 기독교 유대인들은, 반군들에게 살해를 당하고 온갖 박해를 받았다. 유대아 거주 그리스인과 로마인들 역시 반란 초기 코크바 반군으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았다.

    반란을 진압한 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인 민족주의를 뿌리 뽑기 위해 일련의 칙령을 반포하였다. 토라 율법과 히브리 달력 사용을 금지 시켰고, 유대교 학자들을 처형하였다. 성전의 언덕 위 자신이 세운 쥬피터 신전 앞 광장에서, 유대교 성서를 불에 태우는 행사도 했다. 예루살렘 성전 앞에는 쥬피터와 자신의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그의 칙령은 그가 사망한 서기 138년까지 시행되었다. 그가 죽자 유대 공동체는 크게 안도했다.

    유대인 처벌은 보다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유대아 또는 옛 이스라엘을 기억할만한 모든 것을 지우는 과정에서, 유대아 속주(Provincia Iudaea)라는 명칭도 시리아 팔레스티나(Syria Palestina)로 바뀌었다. 이 같은 명칭 변경이 여러 곳에서 발생했지만, 그러나 유대 민족 이름이 사라진 적은 없었다. 로마의 새식민지 아엘리아 카피톨리나(예루살렘)에 유대인 출입이 금지되었고, 다만 티샤 바브의 날에만 허락되었다. 유대아와 유대인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유대교 관습을 금지시킴으로써,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제국에 재난을 입힌 한 나라를 뿌리채 뽑아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코크바 반란은 유대교와 현대 시오니즘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먼저 랍비 유대교에 미친 영향이다. 파멸적으로 끝난 반란은, 유대교 사상에도 큰 변화를 주다. 메시아 사상(Messianism)은 추상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변하였고, 랍비들의 정치사상도 지극히 보수적이고 소극적으로 변하였다. 예를 들어 탈무드는 바르 코크바를 무시하여, 그를 거짓 메시아로 지칭하는 경멸의 말인 “벤 쿠쉬바”로 기록하고 있다. 메시아 사상에 대한 랍비들의 이 같은 이중적인 태도는 마이모니데스(Moses ben Maimonides, 1138~1204. 세파르디 유대인 철학자)의 “예멘에 보내는 편지”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메시아의 뜻에 따라 일으킨 봉기가 실패함으로써 초래된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예멘에 보내는 편지”란, 12세기 예멘에서 메시아를 자칭한 사람으로 인해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있었고, 이에 관해 의견을 물은 예멘 유대 지도자에게 보낸 마이모니데스의 답장이다. 그 다음 시온니즘과 현대 이스라엘에 미친 영향이다. 랍비 시대가 지난 후 코크바 반란은 민족주의적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청년 시온주의 운동인 “베타르(Betar 또는 Beitar)”는, 코크바 반란의 최후 요새 이름을 딴 것이다. 이스라엘 초대 수상 벤 구리온은, 코크바 반란을 이끈 지도자의 성을 딴 것이다. 이스라엘 유치원 아동들에게 인기 있는 동요 가운데 “바르 코크바는 영웅, 그는 자유를 위해 싸웠다”라는 후렴이 있는 노래가 있다. 그 가사는 바르 코크바가 체포되어 사자 굴에 던져졌으나, 사자의 등을 타고 도망을 쳤다는 내용이다.

후기 로마 시대(136~390 CE)

    바르 코크바 반란이 초래한 파멸적인 결과로 인해, 유대아의 유대인은 그 수가 현저히 감소하였다. 이후 수세기에 걸쳐 많은 유대인들이 유랑지(Diaspora)로, 특히 급속히 성장하고 있던 바빌로니아 유대 공동체로 갔다. 유대아 땅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사람이 없는 유대아를 떠나 갈릴리로 가, 그곳을 정신적 중심지로 삼았다. 해안 평야지대와 헤브론 산(Mount Hebron)남쪽에는 그들의 공동체가 명맥을 유지하며 남아 있었다. 기독교로 개종하는 유대인들도 있었다.

    로마는 나시(Nasi: 왕자라는 뜻)라고 불린 세습 랍비 족장(갈리리의 Hillel 파 출신)들로 하여금 유대인을 대표토록 했다. 나시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하나시(Judah haNasi, 135~217 CE)는 미쉬나 최종 본을 편제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문맹의 유대인은 버림 받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많은 문맹의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셰파람(Sheraram: 이스라엘 북부 아랍 도시)이나 벳 셰아림(Bet Shearim)같은 유대교 신학교들은 계속해서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이들 가운데 최우수 학자들은 세포리아스(Sepphoris)나 티베리아스 산헤드린의 재판관이 되었다. 바르 코크바 반란이 있기 전 갈릴리 인구의 2/3, 해안가 주민의 1/3이 유대인이었다. 현재 갈릴리에 있는 많은 시나고그들의 역사는 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후기 로마 시대 팔레스티나 아카데미와 바빌로니아 아카데미는 경쟁관계에 있었다. 팔레스티나 아카데미는, 평화 시대에 고향 땅을 떠난다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바빌로니아로부터 온 학생들에게는 성직을 주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바빌로니아 학자들은 팔레스타인 랍비들을, “바빌론 유수”이후 돌아온 “열등 가계”의 후손들로 보았다. 3세기 로마제국은 경제적 위기와 게르만족과의 싸움에 필요한 전비 마련을 위한 지나친 조세 부과로, 많은 유대인들이 시리아-팔레스티나를 떠나, 보다 관대한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Persian Sassanid Empire)으로 갔다. 그곳 바빌론 유대 공동체에는 수많은 신학교가 있었다.

기독교 공인

    4세기 초 로마 황제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us the Great, 272~337 CE)는 콘스탄티노플을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정하고, 기독교를 공인하였다(313 CE. 밀라노 칙령). 그의 모친 헬레나(Saint Helena)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하고, 예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에 예수 강탄降誕교회,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聖墓敎會 등 지금까지 남아 있는 주요 교회들 건축을 인도하였다. 또 예루살렘 중심부의 로마인 거주지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부르게 하였다. 이 같은 일련의 조치로 예루살렘은 기독교 도시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예루살렘에서 살지를 못하고 떠돌았으나, 파괴된 성전 터에서 예배는 가능했다. 다음 세기로 넘어갈 무렵 기독교는 이교도들을 추방했고, 이로 인해 고대 로마 전통이 사라지고, 그 사원들이 파괴되었다. 4세기 말에는 기독교이외의 이교도 신을 숭배하면 처벌을 받았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서기 351부터 352년까지 부패한 로마 총독에 반기를 든 또 다른 반란이 갈릴리에서 발생했다. 서기 362년 율리아누스 황제(Flavius Claudius Julianus, 331~363. 반기독교 헬레니즘 주의자)가 예루살렘에 제3의 성전 건축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서기 362년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그가 전사하여, 그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후 서기 380년, 데오도시우스 I세(Theodosius I, 347~395 CE)가 반포한 데살로니카 칙령(Edict of Thessalonica)으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비잔틴 시대(390~634 CE)

    서기 390년 로마제국은 동, 서 두 제국으로 분열되면서, 동로마제국은 비잔틴 제국으로 불리었다. 비잔틴 제국은 동방정교(그리스)의 주 무대였고, 동방정교의 거대한 토지 소유권은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5세기에 서로마제국이 멸망(476 CE)하면서 많은 수의 기독교도들이 로마령 팔레스티나 프리마(Palaestina Prima: 팔레스타인 및 인근지역)로 이주를 하여, 기독교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이때 팔레스티나 프리마 유대인은 총 인구의 10~15%였고, 주로 갈릴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비기독교로서 유대교는 유일하게 허용되는 종교였지만 새로운 예배 장소 건축 금지, 공공건물 점유 금지, 기독교도 노예 소유 금지 등 유대인에 대한 억압은 서서히 강화되어 갔다. 서기 425년 마지막 나시 감리엘(Gamliel VI)이 죽자, 산헤드린도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나시라는 칭호도 폐지되었다. 이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일으킨 몇 차례의 반란이 있었고, 이로 인해 사마리아 공동체는 약 1백만에 달했던 인구가, 거의 사라질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 시기 팔레스틴어로 쓴 유대교 성서로는 게마라(Gemara, 400 CE), 예루살렘 탈무드(500 CE), 과월절 아가다(Passover Haggadah) 등이 있다. 서기 495년 수트라(Mar-Zutra II: 2세기경부터 11세기 초까지 존재했던 바빌로니아 유대공동체의 세습 지도자)는 사산조 페르시아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 지금의 이락에 독립 유대 국가를 세웠다. 이 나라는 7년을 지탱하다가 망한 후, 마르 수트라 III세(마르 수트라 II세 아들)는 티베리아스(Tiberias: 갈릴리 서쪽 해안가)로 이주를 하여, 서기 520년 그곳 유대교 아카데미아 수장이 되었다.

    성전 촛대(Menorah: 가지가 7개 달린 촛대)는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로마 사람들이 가져간 후,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약탈할 때, 그들에 의해 다시 카르타고로 옮겨졌다고 한다. 프로코피우스(Procopius, 500~c.565 CE. 비잔틴 역사가)는, 533년 비잔틴 군대가 그것을 다시 찾아내어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왔다고 했다.

    서기 611년, 사산조 페르시아의 코스로우 II세(Khosrow II, 590~628 CE.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는 비잔틴 제국을 침략하였다. 서기 614년 그는, 티베리아스의 부자 벤야민이 모집한 유대 전사들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을 함락하였다. 그때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True Cross)가 페르시아인들의 손에 들어갔다. 이 싸움에서는 예멘의 히미야르 왕국(Himyar Kingdom)도 코스로우 II세를 도왔을 것이다. 페르시아는 허쉬엘(Nehemiah ben Hushiel)를 예루살렘 총독으로 봉하였다. 그는 비잔틴-사산조 페르시아 전쟁(602~608 CE) 시, 비잔틴 황제 헤라클리우스(Heraclius, 575~641 CE)에 저항하여 발생한 유대인 반란 지도자였다. 그는 팔레스티나에서 유대 자치권 획득을 위해 노력한 마지막 유대인이었다. 그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기독교도들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역사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에는 고고학적 증거가 없어, 현대의 역사가들은 의문을 품는다. 서기 628년 코스로우의 아들인 카바드 II(Kavad II, c.590~628)세는 팔레스타인과 성 십자가(True Cross)를 돌려주기 위해, 비잔틴 제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을 돌려받은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갈릴리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하고, 유대인의 예루살렘 출입을 금지하였다.

무슬림 시대 초기(634~1099)

    서기 635년 카타브(Omar ibn al-Khattab, 582~644 CE. 예언자 무함마드의 장인)가 지휘하는 이슬람 군대가 레반트를 점령함으로써, 레반트는 라시둔 칼리프 왕국(Rashidun Caliphate, 632~661. 무함마드 사후 제1대 칼리프 왕국)의 샴 속주(Bilad al-Sham: 시리아)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에는 필라스틴(Jund Filastin: 사마리아, 셰겜, 예리고, 예루살렘, 헤브론 )과 우르둔(al-Urdunn: 레바논 산 남부, 갈릴리, 골란고원, 요르단 분지)등 두 곳을 군사 구역으로 정하였다. 티베리아스는 우르둔의 수도로 하였다. 팔레스타인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서서히 무슬림의 지배 속으로 들어갔다.

    서기 661년 무아위야 I세(Muawiyah I, c. 597~680. 시리아 우마이야 왕조의 시조)가 예루살렘의 칼리프가 되면서, 다마스커스 우마이야 왕조의 초대 왕이 되었다. 서기 691년 우마이야 왕조(Umayyad Caliphate, 661~750 CE)의 칼리프 알 말리크(Abd al-Malik, 685~705 CE)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 성전의 언덕(Temple Mount)에 이슬람 사원(Dome of the Rock: 바위의 돔)을 건설했다. 서기 705년, 그가 세운 두 번째 건물 키블리 모스크(Qibli: Al-Aqsa Mosque)가 같은 장소에 건설되었다. 이 두 건물은 여러 번의 지진을 겪은 후, 10세기에 재건축되었다. 이 성전의 언덕에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신성한 주춧돌(Kodesh HaKodashim)이 있다. 이 바위는 성물 중의 성물로, 그곳에 난 구멍을 통해 “영혼의 우물”로 알려진 그 바위 밑 동굴로 들어 갈 수가 있다. 유대인들은 이곳을,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희생물로 바친 곳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과는 달리, 무슬림들은 메카를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을 희생물로 바치려 했던 곳으로 본다.

-신성한 주춧돌-

    신 도시 람라(Ramlah: 이스라엘 중부 소재 도시)가 필라스틴(Jund Filastin: 레반트의 우마이야 및 압바스 왕조의 군사 지역)의 무슬림 수도로서 건설되었다. 서기 750년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차별로 인해 압바스 혁명(Abbasid Revolution)이 발생하여, 우마이야 왕조는 압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 750~1517 CE)로 대체되었다. 쫓겨난 우마이야 왕조는 스페인으로 가, 꼬르도바에 도읍하였다. 압바스 왕조는 새로운 도시 바그다드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다.

    8세기 전반기에 칼리프 오마르 II세(Omar II, 680~720 CE. 우마이야 왕조 제8대 칼리프)는 새로운 법을 제정하여,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에게 그 신분을 알 수 있는 옷을 착용케 했다. 유대인에게는 목이나 모자에 노란색 별 목걸이를 걸도록 하고, 기독교도들은 푸른 옷을 입도록 했다. 이 법은 언제나 시행된 것은 아니었지만 억압의 시기에는, 비무슬림에 대한 조롱과 학대의 수단이었다. 무슬림이 아닌 자에게는 인두세가 부과되었고, 이를 납부하지 않을 경우 투옥이 되거나 그 이상의 심한 처벌을 받았다. 인두세 납부 영수증이 없으면 여행도 불가능했다. 이러한 차별은 팔레스타인으로부터의 인구 탈출을 초래했고, 1백만에 달했던 인구는 수세기가 지나면서, 15세기 오토만 제국 초기에는 30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

    서기 982년 카이로의 파티마 칼리프 왕국(Fatimid Caliphate: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카이로에 있었던 무슬림 왕국)의 칼리프 만수르 니자르(Abu al-Mansur Nizar, 955~996 CE)는, 동으로는 홍해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이르는 광대한 지중해 연안을 지배하였다. 파티마 칼리프들은 이스말리즘(Isma'ilism: 시아파의 분파로, 이스마일의 동생 알 카딤을 진정한 Imam으로 숭배)추종자들로서, 자신들을 무하마드의 딸 파티마(Fatima)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 서기 1010년 무렵, 파티마 칼리프인 알 하킴(al-Hakim, 985~1021 CE)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알려진 성묘교회聖墓敎會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10년 후 그는 잘못을 인정하고, 교회의 재건을 위한 건축비를 지원했다. 서기 1020년 알 하킴은 스스로 신임을 선언하고, 새로 생긴 드루즈(Druze: 이슬라미즘에서 뻗어 나온 시아파 분파)는 그를 메시아로 불렀다. 7세기부터 11세기까지 갈릴리, 예루살렘, 바빌로니아 등지의 유대 율법학자(Mesoretes)들은 율법서(Masoretic Text: 총 24권의 히브리어와 아람어 본인 타나크)를 편제하였고, 그 결과 이 책들은 히브리 성서의 정통본이 되었다.

십자군과 몽고(1099~1291)

    서기 1099년 제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기독교 왕국인 예루살렘 왕국을 수립하였다. 이 기간 중 무슬림과 유대인들은 무차별 학살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나갔다. 십자군이 유럽을 지나면서 유대인을 만나면, 기독교로 개종이냐 아니면 죽음이냐 선택을 강요했다. 이 선택 앞에서 유대인들은 대부분 순교를 택하였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도 살육은 계속되었다.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들의 죽음과 십자군의 행위를 기억하며, 기도를 드린다. 십자군에 관해서는 본서 제II장에서 상술한 바 있다.

    서기 1244년에는 타타르(Khwarezmian Tatar: 페르시아 계 터키 맘루크 수니파 무슬림과 몽고 계열의 타타르 족)가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기독교도들을 몰살하고 유대인들을 추방하였다. 서기 1247년, 타타르는 아이유브(Ayyubid dynasty, 1171~1260. 쿠르드족이 이집트에 세운 수니파 이슬람 술탄 왕조)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다. 서기 1258년 몽고족은 바그다드를 점령, 파괴하고 수십만 명을 학살하였다.

맘루크 시대(1291~1517)

    서기 1258년부터 1291년까지 예루살렘은 몽고 침입자들(때때로 십자군과 동맹한)과 이집트 맘루크(Mamluks)의 대결장이었다. 맘루크는 13세기 중엽부터 16세기 초까지 아랍이나 오토만 제국에 복무했던 터키인, 코카서스인, 동남부 유럽인 노예나 해방 노예 출신으로, 용병 부대 병사 신분에서 기사 계급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이 같은 대결로, 예루살렘은 가난과 심각한 인구 감소를 겪었다. 맘루크는 어릴 때부터 군사 훈련을 받은,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무사들이었다. 제7차 십자군이 실패한 직후, 맘루크는 이집트 왕국을 손에 넣었다. 초대 맘루크 술탄 쿠투즈(Qutuz, ?~1260)는 얄룻 전투(Battle of Ain Jalut: 1260년 9월 3일, 헤롯의 샘 인근 예즈렐 분지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몽고군을 격파하여, 몽고군의 더 이상 진출을 막았다. 그러나 그는 수하 장군 바이바르(Baibars, 1223~1277)에 의해 암살을 당하였다. 바이바르는 거의 모든 십자군 진지들을 파괴하여 없애버렸다. 맘루크는 1516년까지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면서, 헤브론 소재 족장들의 동굴(유대교 제2성소)에서 유대인의 예배를 금지하였다. 이 금지는 1967년 6일 전쟁에 승리한 이스라엘이 웨스트 뱅크를 점령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서기 1291년, 맘루크 술탄 칼릴(Al-Ashraf Khalil, 1260~1293)은 마지막 남은 십자군 진지를 점령하였다. 맘루크는 아이유브와 마찬가지로 해안 지역을 파괴하고, 북쪽 티레로부터 남쪽 가자(Gaza)에 이르기까지 모든 도시들을 파괴하였다. 바다로부터의 십자군 반격을 예방하기 위해 항구들도 파괴하였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모두 내륙으로 옮겨 감으로써, 수세기 동안 이 지역들은 인구가 적었다.

    서기 1492년 1월 스페인에서는 마지막 무슬림 국가가 막을 내렸고, 6개월 후 유대인들은 스페인(세계에서 가장 큰 유대인 공동체)을 떠나거나 아니면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요받았다. 이에 따라 1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개종을 하였지만, 개종 후에도 비밀리에 유대교 전례를 계속 지켰다. 발각을 당하면 또르께마다(Torquemada, 1420~1498. 도미니크 수도승으로 제1회 종교재판 심문관)가 주도한 가톨릭교회의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그때 많은 유대인들이 스페인을 떠났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제 VIII장 참조). 그들은 대부분 북아프리카, 유럽, 오토만 제국의 데살로니카(Thessalonica: 현재는 그리스 제2도시)로 이주하였고 이로 인해 데살로니카는 세계 최대의 유대인 공동체가 생겨나게 되었다. 오토만 제국의 영토인 중동, 팔레스타인으로 간 사람들도 있었다. 오토만 제국의 영토인 중동, 팔레스타인으로 간 사람들도 있었다.

-데살로니카-

    서기 1523년, 류베니(David Reubeni, 1490~1541. 유대 정치 운동가)는 유대아 땅을 정벌 후, 그곳에 유대왕국을 세우려고 했다. 그는 그 계획에 참여토록 신성로마제국 챨스 V세를 설득하였다. 그는 많은 왕족들을 접촉, 이 계획을 실현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실패,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었다.

오토만 제국 시대(1516~1917)

    맘루크 치세하 유대아는 샴(Bilad a-Sham: 시리아)의 속주가 되었다. 서기 1516년 오토만 터키 술탄 셀림 I세(Selim I, 1470~1520)가 이 지역을 정벌, 오토만 시리아(Ottoman Syria)의 속주로 편입하였다. 이후 4세기에 걸친 시리아 속주에서, 1864년 오토만 터키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오토만 제국 술탄 술레이만(Suleiman, 1520~1566 재위)은, 종교 재판을 피해 유럽을 탈출한 유대인들이 오토만 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주치의 모세 하몬(Moses Hamon, 1490~1554)은 스페인의 종교재판에서 살아남은 사람으로, 술탄에게 많은 조언을 했다. 서기 1535년부터 1538년까지 술레이만은, 현재 우리가 보는 예루살렘 성벽을 건설하였다. 13세기 이후 그가 건설할 때까지 예루살렘은 성벽이 없었다. 성벽의 건설은 예루살렘의 역사적인 모습을 따르긴 했지만, 다윗시의 주요부분(청동기와 철기 시대 예루살렘의 거주지로 생각되는 현재의 Siloam 지역)과 시온 언덕 지역은 복구에서 제외되었다.

    술레이만의 후계자 셀림 II세(Selim II, 1566~1574)의 왕비 누르바누(Nurbanu Sultan)는 유대인이었다. 셀림 II세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으나 종교재판을 피해 포르투갈을 탈출한 멘데스 나시(Doña Gracia Mendes Nasi, 1510 ~1569) 부인에게 티베리아스의 통치를 맡겼다. 그녀는 티베리아스의 유대인 피난민들을 돕고, 히브리어 신문을 발간하였다. 이때 사페드(Safed: 이스라엘 북부 도시)는 카발라(Kabbalah: 영원불변의 신과 유한한 우주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비교秘敎)의 중심지가 되었다. 멘데스 부인의 조카 요셉 나시(Joseph Nasi)는 티베리아스 총독이 되어, 종교재판을 피해 이태리로부터 온 유대인들의 정착을 도왔다. 유대인들은 4대 성지인 예루살렘, 헤브론, 사페드, 티베리아스로 모여들었다. 수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우크라이나 크멜리츠키 반란(Khmelnytsky Uprising, 1648~1657 기간, 우크라이나군 사령관 크멜리츠키가 주도한 대폴란드 연방 정부에 대한 반란) 이후에는 더 많은 유대인들이 유대아로 이민을 왔다.

-티베리아스-


    서기 1660년 드루즈(Druze) 반란으로 사페드와 티베리아스는 완전히 파괴가 되기도 했다. 서기 1663년, 사바타이 제비(Sabbatai Zevi, 1626~1676. 세파르디 유대인으로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한 인물)가 예루살렘으로 오자, 가자의 신학자인 나탄(Nathan, 1643~1680)은 그를 유대인의 구세주라고 하였다. 서기 1666년, 사바타이 제비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이스탄불로 왔고, 술레이만 II세는 그에게 이슬람으로의 개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그의 많은 제자들이 개종을 하여, 그 일파가 돈메(Donmeh: 겉으로는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으나 실제로는 유대교를 믿는 사바타이 교도)라는 이름으로, 현재 그 후손들이 튀르키에에 남아있다.

    서기 1799년 나폴레옹이 잠시 유대아를 점령한 후, 유대인을 불러들여 새 나라 창건을 위한 포고령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가 아크레(Acre: 오토만 제국의 도시. 현 이스라엘 Akko 시)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포고령 반포 계획은 무산되었다. 오토만 통치자인 파샤(Muhammad Ali Pasha, 1769~1849)는 오토만 시리아(Ottoman Syria)를 정복한 후, 그 지역을 재정비하려고 했다. 그러나 1834년 그의 징병제도는 농민 반란을 불러, 이때 많은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이 폭도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 반란이 있은 후 파샤는 1만여 명에 달하는 현지 농부들을 이집트로 추방하고, 그 대신 이집트 농부들을 불러들였다.

    서기 1838년, 또 다른 드루즈 반란이 있었다. 서기 1839년 모세 몬테피오르(Moses Montefiore: 영국인 은행가, 인도주의자)는 이집트에서 파샤를 만나, 다마스커스에 100내지 200곳의 유대인 정착지 건설을 위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파샤 측의 협정 위반으로 협정은 이행되지 않았다. 서기 1896년 현재 예루살렘에는 유대인이 절대 다수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88%가 무슬림이었고, 기독교도는 9%에 불과했다.

제1차세계대전

    제1차 세계 대전 중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적이라고 생각한 러시아와 싸우는 독일을 지지하였다. 영국 정부는, 유럽 최대의 유대인 공동체인 데살로니카(전체 인구 16만 중 40%가 유대인)에서 있었던 오토만 제국의 정치개혁 운동(Young Turks movement: 오토만 절대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고자 한 20세기 초 정치개혁 운동)이 외치는 “유대인의 힘”이라는 어귀를 반유대 운동으로 인식, 유대인들이 위기의식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영국은 유대인들이 참전하여 자신들을 도와주기를 바랐다. 영국은 또한 미국 유대인 공동체가 미국의 참전을 설득해 주기를 고대했다. 영국 내각에는 수상 로이드 조지를 비롯하여 이미 시온주의에 대한 동정론이 일고 있었다. 오토만 터키군 사령관은 야파의 유대인들을 러시아의 첩자거나 적으로, 또는 팔레스타인을 오토만 제국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시온주의자들로 보고, 1914년부터 1년에 걸쳐 1만4천 명의 유대인을 야파로부터 추방하였다. 1917년에는 추방령에 따라 야파와 텔 아비브로부터 무슬림을 비롯하여 전 주민이 추방되었다. 그때 쫓겨난 유대인들은, 1918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후에야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1917년, 영국 외무상 발포어(Arthur Balfour)는 보수당 지도자이며, 영국 내 유대인 지도자인 로스차일드에게 “발포어 선언”으로 알려진 한 통의 서신을 보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민족국가 수립에 호의를 가지고 본다” 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 선언은 팔레스타인을 영국이 지배하겠다는 숨은 뜻이 있었다.

    자보틴스키(Vladimir Jabotinsky, 1880~1940. 러시아 유대인. 개혁주의적 시온주의자)와 트룸펠도르(Joseph Trumpeldor, 1880~1920)가 조직한 시온주의자들로 구성된 유대인 부대는, 영국 편에서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 부대는 갈리폴리 전투(Gallipoli Campaign: 1915년 2월부터 1916년 1월까지 터키 갈리폴리 반도에서 있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 연합군과 오토만 제국간의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닐리 시온주의자 스파이 조직(Nili Zionist: 영국군을 위한 스파이 조직)은, 오토만 군대의 전투 계획과 부대의 배치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영국군에 제공하였다.

영국의 신탁통치(1920~1948)

    1919년 체결된 베르사이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에 따라, 영국의 팔레스타인 신탁통치가 1923년 발효되었다. 발포어 선언에서 제외되었던 트랜스요르단 역시 신탁 통치령이 되었다. 미국도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영국의 팔레스타인 신탁통치를 승인하였다.

    발포어 선언은 1917년 11월 2일에 발표되었고, 그로부터 1주일 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였다. 혁명은 러시아 내전을 불렀다. 1918년부터 1921년까지 러시아 전역,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수많은 포그롬이 발생하여 적어도 10만 명 가까운 유대인이 희생되었고, 60만 이상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이 같은 폭력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코자하는 시온주의자들을 더욱 자극하였다.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약 4만 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였다(제3차 알리야). 그리스-터키 전쟁(1919~1922)역시 데살로니카의 그리스계 유대인들로 하여금 피난처로 팔레스타인을 찾게 하였다.

    이 시대 많은 유대 이민자들은 사회주의적 시온주의자들이였다. 따라서 그들은 유대인들의 동등한 법적 권리를 주장하고, 많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배출한 볼세비키 (Bolshevik: 레닌이 세운 극좌 혁명 맑스주의 정당)를 지지하였다. 개척자(halutzim)로 알려진 사회주의 이민자들은 농업에 경험이 많고 훈련이 되어 있어, 키부츠(kibbutz)라고 불린 자급자족 농업 공동체를 세웠다. 그들은 말라리아의 발생지인 예즈렐(Jezreel)계곡과 헤페르(Hefer)평야의 물을 빼 농토로 바꾸었고 시온주의 자선 단체가 해외로부터 모금한 돈으로 토지를 사들였다. 또한 유대정착지 방어를 위해, 주로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유대 민병대도 비밀리에 조직했다.

    프랑스-시리아 전쟁(1920)과 발포어 선언이 있은 후, 1920년 4월 예루살렘 구시가지에서 아랍인들과 유대인 충돌(Nebi Musa riots)이 있었다. 1921년 야파에서도 같은 충돌이 있었다. 세계유대인기구(WZO) 팔레스타인 대표부는 평화 정착을 위하여 영국의 개입을 찬성하고, 해외로부터 모금한 돈으로 평화 정착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했다. 1924년부터 1929년까지 8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도착했다(제4차 알리야). 폴란드와 헝가리의 반유대주의와 지나친 세금을 피해 온 그들은 이민을 엄격히 규제한 미국 이민법 때문에 미국을 포기하고,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든 것이다. 이 새로운 도착자들은 대부분 중산층으로서, 여러 곳으로 퍼져 소규모 사업을 하거나 점포를 열었다. 그러나 여의치 않은 경제적 상황은, 1년도 못되어 대부분 문을 닫게 했다. 1923년 텔아비브에 처음으로 전기 발전기를 설치했는데, 이는 러시아 케렌스키 정부(Kerensky: 니콜라스 II세 퇴위 직전의 임시 정부) 하의 성 피터스버그 인민 위원(Commissar)이었던 루텐베르크(Pinhas Rutenberg, 1879~1942)가 지휘한 사업이었다. 1925년 예루살렘에 히브리 대학, 하이파에 테크니온 대학(공과 대학)이 설립되었다. 1927년에는 이집트 파운드가 아닌 팔레스타인 파운드를 본위 화폐로 채택하였다.

    1928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유대민족위원회(Va'ad Leumi)는 팔레스타인 내 유대 공동체(Yshuv)의 주요 집행기관이었다. 위원에는 비시온주의자도 있었다. 유대 공동체의 성장에 따라 유대민족위원회는 정부 형태를 갖추어 교육, 건강, 안전 같은 문제들을 다루었다. 영국의 승인 하에 위원회는 조세제도를 확립, 유대인을 위한 독립적인 업무를 수행하였다. 1929년부터는 이 위원회 위원장은, 26개 지역 유대인들의 투표로 선출되었다.

    1929년, 유대교의 가장 성스러운 곳인 “통곡의 벽”을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었다. 영국 당국은 그곳에 이르는 좁은 골목길에서 의자나 커튼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많은 참배자들이 노인이거나 의자가 필요한 사람들이었고 또 남. 여 구별을 위한 칸막이가 필요했음을 무시한 조치였다. 무프티(Mufti, 1897~1974. 팔레스타인 아랍 무슬림 지도자)는, 무슬림 재산인 그 골목길을 통해 가축을 몰려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성전의 언덕(Temple Mount)을 장악하려 한다고 했다. 이 같은 그의 적대적인 발언으로 1929년 8월, 팔레스타인에서는 봉기가 일어났다. 이 봉기로 헤블론의 유대 공동체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이 봉기를 기회로 우익 시온주의자들은, 1931년 자체 민병대(Etzel)를 조직하였다.

    범시온주의자(General Zionists), 미즈라히(Mizrahi)당, 사회주의 시온주의자(Socailist Zionist)같은 시온주의 정치 집단들은, 교육과 보건 정책을 내세우고 세금, 기부금, 입장료 등으로 스포츠를 진흥시키며 경쟁하였다. 반면 영국 식민당국은 공공사업에 투자를 하지 않았다. 1차 대전부터 2차 대전에 이르는 기간에는, 팔레스타인에 자결권을 가진 유대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이념과 신탁통치라는 현실 사이에 화해하기 힘든 긴장이 자라고 있었다. 영국은 다수를 차지하는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정책을 폈다.

    1933년 나치는 하바라 협정(Ha'avara Agreement: 나치와 시온주의자 독일 유대인 간 협정)을 통해 5만 명의 독일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보낼 것에 합의 하였다. 나치는 해당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했고, 그 대신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정착지에 도착, 1천4백만 파운드의 독일 상품을 수입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독일을 떠나기를 원했지만, 나치는 그들이 현금을 소지하지 못하도록 했고 오직 옷가방 두 개만을 허락하였다. 따라서 경유지 영국으로의 입국세도 내지 못할 상황이라, 감히 떠날 엄두를 못 내었다. 따라서 하바라 협정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었고, 협상에 참가했던 시온주의 노동지도자 아를로소로프(Haim Arlosoroff)가 1933년 텔아비브에서 살해되었다. 영국은 그의 암살을 이용, 좌익 시온주의와 우익 시온주의 간 갈등을 만들어 냈다. 아를로소로프는 마그다 리쉘(Magda Ritschel, 1901~1945)의 남자 친구였는데, 후일 그녀는 나치 선전 상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1945)의 아내가 되었다. 그가 살해당한 것은 나치와의 연관성 때문에 나치가 살해하지 않았을까 의심이 가는 점도 있지만, 그러나 증거가 없다.

    1929년부터 1938년까지 25만 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였다(제5차 알리야). 이들은 주로 독일에서 왔고 의사, 변호사, 대학교수 등 전문직들이 많았다. 그 결과 바우하우스(Staatliches Bauhaus: 독일 예술학교)출신의 건축가들이 텔아비브를 세계 유일의 친바우하우스 도시로 만들었고, 팔레스타인은 1인당 의사 수가 세계 최고였다.

    유럽에서는 파시스트가 등장하여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깊어지고 있었다. 많은 유럽 국가들에서(1935년 뉘른베르크 법에 따라 특히 독일에서) 유대인은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경제권을 박탈당하고, 일방적인 학대를 받았다. 폴란드(유대인에 대한 거부가 점점 심해지다가, 1937년 유대인의 권리를 전면 금지하였다), 헝가리, 루마니아, 나치 독일의 괴뢰 국가인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등에서는 반유대주의가 현저한 정부들이 들어섰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합병하였다.

    유대인의 유입 증가와 나치의 선전선동에 따라 팔레스타인에서는 대규모 아랍 민중봉기(1936~1939)가 있었는데, 이는 대체로 영국의 식민 통치를 끝내기 위한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반란이었다. 세계 시온주의 기구(WZO) 팔레스타인 대표부(Jewish Agency for Israel) 국장 벤 구리온(David Ben Gurion, 1886~1973.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초대 수상)은 이 반란에 직면하여, 유대인-아랍인이라는 양극단을 피해 인내 정책(Havlagah)으로 대응, 아랍인에 대한 공격을 거부하였다. 이 같은 그의 정책에 반대한 시온주의자 민병대(Etzel)는, 하가나(Haganah: 시온주의자 준군사 조직)로부터 탈퇴하였다. 이 반란에 직면한 영국은, 22만5천 명의 아랍인 이주를 조건으로, 갈릴리와 서부 해안지역을 유대인을 위한 배타적 지역으로 결정하였다. 이는 필 위원회(Peel Commission: 영국 상원 윌리엄 필이 이끈 팔레스타인 신탁통치령의 불안 원인을 조사한 위원회)의 권고에 따른 조치였다. 따라서 그 이외의 지역은 아랍인들의 배타적인 지역이 될 예정이었다. 유대 측 지도자인 와이즈만(Chaim Weizmann, 1874~1952. 후일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과 벤 구리온은 시온주의자 입법기관(Zionist Congress)에게 향후 협상을 위해, 필 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측은 이를 반대하였고,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뜻을 수용함으로써 이 계획은 폐기되었다. 필 위원회 청문회에서 와이즈만은, “유럽에는 6백만 명의 유대인이 있으나, 그들에게 세계는 여러 곳으로 나뉘어, 그들이 들어갈 살 수도 들어갈 수도 있는 곳이 없다.” 라는 발언을 했다. 

    1938년 개최된 국제회의(Evian Conference)에서, 유럽을 탈출하려는 수많은 유대인 문제가 검토되었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상정조차 되지 않았으나 영국은 개의치 않았고, 유대측은 이 회의에 초대 받지 조차 못하였다. 나치는 유대인을 인도양의 마다가스카르로 보내자는 제안(Madagascar Plan)을 했다. 회의 결과 아무런 합의가 없어, 유럽 유대인들에게도 상황이 바뀌지 않았다.

    유럽을 떠나려는 수백만의 유대인들에게 세계 여러 나라들은 문을 닫았고, 영국도 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갔다. 1939년 백서(The White Paper: 1936~1939 팔레스타인의 아랍 폭동에 관한 영국 정부 보고서)는, 10년 이내에 아랍-유대 공동의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라는 권고를 했다. 백서는 또한 1940부터 1944년까지 팔레스타인에 7만5천 명의 유대인을 정착 시키려는 계획은, 아랍 측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아랍, 유대 양측 모두 이 백서의 권고를 거부했다. 1940년 3월 영국의 팔레스타인 고등판무관은,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유대인을 추방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이제 유대인들은 모사드 알리아 벳(Mossad Le'aliyah Bet: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민병 조직)이나 이르군(Irgun: 시온주의자 민병대)이 행한 불법 이민(Aliyah Bet)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외부로부터 아무런 도움이 없이, 소수의 유대인들이 가까스로 유럽을 탈출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그들 대부분을 체포, 모리셔스 감옥으로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2차 세계 대전 중 세계 시온주의 기구(WZO)는, 영국군과 함께 싸울 유대 군대를 창설하려고 했다. 처칠이 그 일을 도왔으나, 영국 정부와 군부는 반대를 했다. 영국은 유대인 병사 모병 수는 아랍인 모병 수와 같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영국을 위해 싸울 아랍인은 없었고, 팔레스타인 지도자 무프티(Grand Mufti of Jerusalem: 수니파 무슬림 지도자)는 나치 독일 편에 선 상황이었다. 1940년 이태리는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나치 편에 섰다. 곧이어 텔아비브와 하이파에 대한 이태리 공군의 폭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41년 5월 북아프리카를 통한 추축국의 공격으로부터 이슈부(Yishuv Ha-Ivri: 이스라엘 독립 전 이스라엘 땅에 살던 유대 주민)를 보호하기 위하여 하가나(Hagana: 시온주의자 준군사 조직)는 팔마흐(Palmach: 이슈부 군대 정예 전투 부대)를 창설하였다. 1942년 6월 팔레스타인을 점령코자 롬멜의 군대가 이집트를 통과했을 때도 영국은 유대인들에 대한 무기 공급을 거절하였다. 그 결과 영국과의 전투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 시온주의자 지도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WZO는 팔레스타인 유대 청년들에게 영국 군대를 도우라고 했다. 전쟁 기간 중 3만 명의 팔레스타인 유대인과 1만2천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영국군에 징집되었다. 1944년 6월 영국은 이태리 전선에서 싸울 유대인 전투 부대를 창설키로 결정했다. 전쟁 기간 전 세계로부터 약 1백5십만에 이르는 유대인들이 연합군 측, 특히 소련과 미국 군대에서 복무하였다. 그리고 소련 군대에서만 20만 명의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전쟁에 참전했던 수많은 제대 군인들이, 후일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거나 지원활동을 하였다. 약 2백 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유대인 단체가 영국의 팔레스타인 신탁통치 정부에 저항하였다. 전쟁 중 이들은 영국을 위하여 싸웠으나 이제 스턴(Avraham Stern, 1907~1942. Irgun의 지도자)이 이끄는 레히(Lehi: 일명 Stern Gang. 아브라함 스턴이 조직한 시온주의자 민병대 및 테러 조직)의 조직원이 되어 영국과 싸운 것이다. 1943년 소련 강제수용소로부터 석방된 수정시온주의자 베긴(Menachem Begin, 1913~1992. 후일 이스라엘 제6대 수상)은 팔레스타인으로 와, 민병대(Etzel)의 지휘자가 되어 영국과 싸웠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샤미르(Uitzhak Shamir, 1915~2012. 후일 이스라엘 제7대 수상)는, 영국이 재판 없이 레히 활동가들을 가두고 있는 에리트리아 소재 강제 수용소를 탈출하여, 레히의 지휘관이 되었다.

-아브라함 스턴-

    중동 지역의 유대인들 또한 전쟁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나치는 북아프리카 지역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었고, 그 지역의 많은 유대인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1941년 이락에서는 친추축국 쿠데타가 발생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하였다. WZO 대표부는 팔레스타인으로 공격해오는 롬멜(Johannes E. Rommel, 1891~1944. 독일 육군 원수)을 최후까지 저지하기 위한 종합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나치의 계획은 팔레스타인 유대인을 뿌리 뽑고자 한 것이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는 점령지 정부의 도움을 받아, 유럽 유대인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살해코자 조직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6백만에 달하는 유대인이 죽었다. 그 가운데 1/4이 어린이었다. 그 결과 폴란드와 독일 유대인 공동체가 사라져 존재하지 않게 되었었다. 유럽으로부터 미국과 팔레스타인으로 온 유대인들은, 아무런 연고도 뿌리도 없었다. 홀로코스트가 주로 아쉬케나지, 세파르디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수인 미즈라이는 유대 세계에서 과거보다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었다.

    유럽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살 곳을 잃은 사람들 즉 피난민들이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설립된 미.영 공동조사 위원회(Anglo-American Committee of Inquiry: 1946년 1월 미국 워싱턴 DC)는 그들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물었고, 95%가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원하였다.

    시온주의 운동 과정에서 맨체스터 대학의 유대인 생화학 교수 와이즈만(Chaim Weizmann, 1874~1952. 후일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은 영국 시민권이 있고 온건한 친영국 유대인으로 영국 공군에서 아들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그를 요주의 인물로 보았다. 시온주의 운동은 WZO로 넘어가, 벤 구리온이 이끈 반영국 사회주의 시온당(Mapai Party)이 주도를 하게 되었다. 현재 디아스포라 시온주의 운동 주체는 미국의 유대인들이다.

-와이즈만-

종전

    전쟁의 결과, 영국은 심각한 약체가 되었다. 중동에서의 전투를 통해 영국은 중동 석유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따라서 영국의 회사들이 이락, 쿠웨이트, 바레인, 아랍에미레이트의 석유를 통제했다. 1945년 5월8일 승전 기념일 행사를 치룬 후 총선에서 영국 노동당이 승리하였다. 노동당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창건을 말했지만, 실제로는 1939년 백서(10년 이내 팔레스타인에 유대 독립 국가 수립을 요구한 백서)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팔레스타인으로의 입국은 불법이주(Aliyah Bet)가 주를 이루었다. 과거 빨지산과 게토 전사들 기구였던 브리카(Across Europe Bricha)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동유럽으로부터 지중해 항구로 데리고 온 후, 영국의 봉쇄망을 뚫기 위해 소형 선박에 태워 팔레스타인으로 데려 왔다. 한편 아랍 세계로부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를 억제하려는 영국의 노력이 있었지만, 14년간 11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왔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팔레스타인 총 인구의 33%가 유대인이었다.

    독립을 위해 시온주의자들은 대영국 게릴라전을 수행하였다. 유대 지하 민병대인 하가나(Haganah)는 영국과 싸우기 위해 에첼(Etzel), 스턴 갱(Stern Gang) 같은 민병대들과 연합, 영국과 싸웠다. 1946년 6월4일 폴란드에서 대규모 포그롬이 발발하여,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유럽을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노도처럼 몰려들었다. 포그롬 한 달 후인 7월 22일, 시온주의자 민병대 이르군(Irgun)은 영국군 사령부가 들어 있던 예루살렘 소재 킹 다윗 호텔에 포격을 가하여, 91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 포격이 있은 후 텔아비브는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영국은 아가타 작전(Operation Agatha)을 펴, 2천7백 명의 유대인을 체포 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WZO지도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재판 없이 구금되었다.

-다윗 호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10만에서 12만 명의 유대인이 폴란드를 떠났다. 이는 지하 조직인 베리하(Beriha: 홀로코스트 생존 유럽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피난시킨 조직)의 도움을 받아, 폴란드 시온주의 활동가들이 한 일이었다. 베리하는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로비아로부터 총 25만에 달하는 홀로코스트 생존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오도록 도왔다.

    영국은 아트리트(Atlit: 하이파 남쪽 20킬로 지점 해안가) 수용소나 키프러스 섬 임시 캠프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오려는 유대인들을 적발, 투옥했다. 체포된 유대인들은 대부분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었고, 수많은 어린이들과 고아들도 있었다. 나라도 여권도 없는 유대인들이 결코 떠날 수 없으리라는 키프러스 사람들의 걱정도 해결해야 했고, 1939년 백서가 정한 7만5천명의 팔레스타인 이민 쿼타도 채워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으로 영국은 매월 750명의 유대인 피난민의 팔레스타인 입국을 허락하였다. 1947년이 되어서야 영국 노동당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새로 탄생한 유엔에 넘길 준비를 했다.

유엔의 분할 계획

    1947년 4월2일,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넘겼다. 이에 따라 유엔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SCOP)를 설치했다. 1947년 7월 UNSCO는 팔레스타인을 방문, 유대 시온주의 활동가들을 만났다. 그러나 영국의 아랍 고등 판무관은 그 만남을 인정하지 않았다. 유엔 활동에 대한 영국의 노골적인 방해였다. 이어 영국 외무상 베빈(Ernest Bevin, 1881~1951)은, 귀환자들을 실은 선박(SS Exodus 1947)에게 유럽으로 돌아가라는 회항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그 배에 탔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독일 함부르크 항에서 영국군에 의해 강제 하선을 당했다.

    아구다트 이스라엘(Agudat Israel: 비시온주의 정통 유대교 하레디당)은 향후의 유대 국가 수립에 관하여 벤 구리온과 종교적 현상 유지 협정(종교 문제에 관한 기존의 공동체 합의를 바꾸지 않는다는 종교적 정당과 비종교적 정당 간 합의)을 체결한 다음, 유대 국가를 수립할 것을 UNSCOP에게 권고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일정 수의 예시바(Yeshiva: 전통 유대교 학교)학생과 정통 유대인 여성들에 대한 병역 면제, 안식일(Sabbasth), 정부 기관에서의 코세르 음식(Kosher: 유대 율법에 따라 조리하고 먹는 음식)사용, 정통 유대인을 위한 별도의 교육 시스템 등에 관한 정책이 채택되었다.

    UNSCOP가 작성한 보고서는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리하고 특히 예루살렘을 국제신탁통치하에 두자고 하였다. 1947년 11월29일 유엔 총회는 UNSCOP 보고서를 조금 고친 수정안을 채택하였다. 이 수정안은 신탁통치 종료와 함께 팔레스타인에 “독립 아랍국가”와 “독립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고, “예루살렘”을 국제 통제하에 두겠다는 계획안이었다(Resolution 181: 팔레스타인 분리 결의안). 이를 위해서도 1948년 2월1일까지, “실질적인” 유대인의 입국을 허락할 것을 영국에 촉구했다. 그러나 영국은 물론 유엔안전보장이사회도 이 결의안의 권고를 이행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 영국은 계속해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입국을 막았다. 오히려 유대-아랍 분리가 영국-아랍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주리라는 우려를 한 영국은 신탁통치가 끝날 때까지, 유엔 대표단의 팔레스타인 입국을 막았다. 그리고 1948년 5월 마침내 영국은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철수하였다. 그러나 1949년 3월까지 영국은 키프러스 거주 유대인 가족과 “징집 대상 연령”의 유대인을 계속 잡아두고 있었다.

내전

    유엔 총회 결의 181호는 유대 공동체에게는 기쁨을, 아랍 공동체에게는 불만을 안겼다. 이에 따라 양측 간에 폭동이 발생했고, 이 폭동은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1948년 1월부터는 아랍해방군(Arab Liberation Army: 아랍 국가들로부터 지원병으로 구성된)이 개입하면서 양측의 군사 충돌이 증가하였다. 해안을 따라 여러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 모두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집착하였다. 후세이니(Abd al-Qader al-Husseini, 1907~1948. 팔레스타인 아랍민족주의자)가 이끄는 수백 명의 성전 군(Army of the Holy War: 팔레스타인 아랍 비정규군)이 이집트로부터 왔다. 도착 후 수천 명의 지원병을 모집하여 무력을 강화한 그는, 1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이슈브(Yishuv)는 100대의 장갑차를 이용 예루살렘에 보급품을 공급하려고 했으나, 이 작전은 대부분 실패하였다. 1948년 3월 그 장갑차들은 모두 파괴되었고, 후세이니의 예루살렘 봉쇄는 완벽하였다. 예루살렘에 보급품을 공급하려던 수백 명의 하가나(Haganah: Yishuv 민병대) 병사들도 모두 전사하였다.

    내전으로 인하여 하이파, 야파, 예루살렘, 기타 유대인 거주 지역의 중, 상류 아랍인들은 모두 해외로 또는 인근 아랍 국가들로 피난을 하였다. 이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미국은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리안 지지를 철회하였다. 이에 따라 아랍 연맹(Arab League)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유엔의 분리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다. 한편 1948년 2월7일 영국은, 팔레스타인 아랍 지역을 트란스요르단(Yordan)에 복속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요르단군은 영국군이 지휘하고 있었다.

    벤 구리온은, 하가나를 재편성하고 징병제도를 제도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거주 유대인은 남녀를 불문하고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다. 골다 메이어(Golda Meir, 1898~1978. 후일 제4대 이스라엘 수상)는 미국 내 유대인들로부터 모금한 자금과 시온주의자들을 도운 스탈린 덕택으로, 동유럽으로부터 주요 무기를 도입할 수 있었다. 벤 구리온은 야딘(Yigael Yadin, 1917~1984. 이스라엘 고고학자, 정치인)에게 아랍 국가들의 개입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하가나 민병대가 작성한 달레트 계획(Plan Dalet: 팔레스타인 신탁통치령에 대한 통제 지침)은, 수세가 아닌 공세로 전환할 것과 영토 확보를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유대군은 곧 티베리아스, 하이파, 사페드, 베이산, 야파, 아크레를 함락하였고, 그 결과 2십5만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아랍 난민이 발생하였다. 이는 인근 아랍 국가들의 개입을 부르는 원인이 되었다.

-벤 구리온(오른쪽)-

    

   1948년 5월14일 영국군이 마지막으로 하이파를 떠났고, 바로 그날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개최된 유대 국민 위원회(Jewish People's Council: 팔레스타인 유대 공동체를 대표하는 집행기관)는 이스라엘 땅(Eretz Israel)에, 이스라엘 국가(the State of Israel)라는 이름의 유대 국가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처럼 험난하고 길고 긴 역사의 길을 걸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State of Israel)가 탄생, 현재 그곳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지금까지 예루살렘, 그곳으로부터 비롯된 긴 이야기를 읽었고 그곳에 얽힌 분란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고 있다. (C)

저자: 박흥서. 전 코트라 이스라엘 과장.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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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The Bible Unearthed by Israel Finkelstein

0 Biblical Peoples and Ethnicity by Ann E. Killebrew

0 Biblical Archaeology by Eric H. Cline

0 The Deportations of the Israelites by Younger, K. Lawson

0 Encyclopedia Britannica

0 The Forgotten Kingdom by Israel Finkelstein

0 History of Jews by Paul Johnson

0 A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by Abraham Malamat(1976)

0 Historia de Espania by Informacion y Revistas S.A

0 Hitler's Germany by Mattew Huges & Chris Mann

0 Jewishvirtuallibrary

0 Jewishencyclopedia

0 Jerusalem Besieged by Eric H. Cline

0 Jewish People by Reimond P. Scheindlin

0 The Origin of Judaism by Yonatan Adler

0 The Oxford illustrated history of the Holy Land

0 A Short History of Judaism by Jacob Neusner

0 Wikipedia

0 공동번역성서

0 성채의 나라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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