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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베니스의 상인 for More Readings:    www.beethovennote.com ~~~~~~~~~~~~~     최근 금융자본의 횡포에 대한 미국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급기야는 반 월가 시위라는 집단행동을 불러왔고, 이러한 시위가 전 세계적으로 번져나가고 있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세계 금융 산업은 유대 자본이 그 중심에 있으며, 세계 정치 및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같은 거대 산업이 유대인들에게 돌아갈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갔던 바빌론의 유수( 기원전 586년) 이후 시작된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하기까지 거의 2천5백년의 세월이 흐른다. 이 기간 동안 거의 대부분을 남의 땅에서 보낸 것이다. 1862년, 시온주의자인 “모세 헤스(Moses Hess, 1812 – 1875)가 처음으로, 고토로 돌아가자는 시온주의 운동에 불을 지핀다. 그리고 이 운동은 “드레퓌스 사건”으로 본격화 된다.      1894년에 있었던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정부가, 유대계 프랑스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에게 독일 간첩이라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조작된 증거에 따라 그를 반역죄로 기소한 사건이다. 그는 무혐으로 석방될 때까지 불령 가이아나에서 5년을 복역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온주의자들은 더욱,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만 유랑지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학대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당시 프랑스의 자연주의 작가 “에밀 졸라”(1840- 1902)는 그의 소설 “나는 고발한다”에서 이 사건을 고발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유대인인 드레퓌스가 감히 프랑스의 육군대위가 될 수가 있었던가?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은 프랑스 국민을 절...

프랑스 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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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ench Revolution(1789)   for More Readings:   www.beethovennote.com ~~~~~~~~~~~~   1. 프랑스 대혁명(개요)      프랑스 대혁명은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결합한 결과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 )은, 루이15세와 루이16세의 구체제( Ancien régime )  개혁 시도가 오히려 혁명을 초래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루이14세, 루이15세 또는 루이16세, 아니면 이 세 사람 모두 혁명 발발의 책임자라고 말한다. 루이14세 (1643~1715)에 의해 약화되긴 했지만, 귀족들은 아직도 왕권에 도전할만한 강력한 세력이었고, 루이15세(1715~74)와 루이16세(1774~92)는, 그 누구도 강력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귀족들은 특권하에 군대나 정부의 고위직을 독점했고, 캐톨릭 승려는 병원, 학교, 고아원의 운영자들이었다. 출생, 사망, 결혼에 따른 신고는 교회 소관이었고, 출생신고를 하지 않거나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은 사생아로 취급되어 법적인 권리가 없었다. 이 같은 교회와 귀족세력의 발호는 사회적 긴장을 불러왔고 또 왕으로 하여금 개혁을 어렵게 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더구나 루이14세가 양위를 할 당시 프랑스는 7년전쟁, 스페인왕위 계승전쟁 등 일련의 전쟁으로 인한 전비 때문에 빚더미에 허덕이고 있었다.      또 루이15세나 16세의 치세 중, 프랑스는 수많은 군사적 외교적 패배를 했고, 이로 인해 왕권의 버팀목인 군대의 충성심과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치세 초기 루이15세는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치세 말에는 뽕빠두르 (Madame de Pompadour), 뒤 배리(Madame du Barry)등 귀부인들이 개인적인 취미를 위해 정사에 관여...

왕조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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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More Readings:  www.beethovennote.com ~~~~~~~~~~~           프랑스 대혁명(1789), 러시아 혁명(1917), 태평천국의 난(1850~64), 동학 혁명(1894)은 모두 왕조의 멸망을 가져온 사건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 사건들의 핵심은 개혁이었으며, 이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 혁명의 당사자로 처형된 루이16세는 개혁을 원했지만, 특권적인 교회와 귀족들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그는 결국 단두대로 목이 잘렸다. 러시아 알렉산더III세와 니콜라스II세는, 알렉산더II세의 개혁을 되돌려 놓은 반개혁 황제들이었다. 자신을 학대한 부친을 죽인 혼외정사의 아들 스메르자코프 카라마조프를 통해, 혼외자식 학대하듯 백성을 학대하는 황제는, 언젠가 백성들의 손에 죽을 것임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암시하지만, 황제는 알아듣지 못한다. 니콜라스II세는 러시아 혁명의 결과, 1918년 가족과 함께 총살된다. 청조는 한족에 대한 차별과 서구 열강의 침탈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아편전쟁(1839~42)에서 영국에 대한 굴욕적인 패배와 피폐한 백성들의 삶은 결국 홍수전의 반란(1850~64)을 불러온다. 수많은 민란을 간과했던 청조는 뒤늦게 개혁(양무운동)에 손을 댔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그나마 보수 세력의 끊임없는 비판과 견제를 받았다. 양무운동(1861~1894)은 또 백성을 위한 당장의 시급한 개혁이 아닌, 초점을 벗어난 장기 부국강병 개혁이었다. 홍수전의 난으로 국력이 약화된 청조는 결국 막을 내린다.           동학 혁명(1894)은 갑오경장이라는 개혁을 가져왔지만, 이 역시 때가 늦어 미구에 왕조가 멸망하는 것이다. 시기를 잃은 개혁은 오히려 위기를 부른다는 토크빌의 (Alexis de Tocqueville, 1805~59, 프랑스 역사학자)말이...